에토로후 발 긴급전 -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시작 |
진주만 공습 직전 미국인 스파이가 관련된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비밀 작전을 그린 첩보 모험 소설입니다. 무려 500페이지를 꽉 채운 대장편이기도 하죠. 이런저런 작품으로 알려진 사사키 조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길이에 비하면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수상경력이 무색할 정도로요.
일단 이렇게 길 이유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사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주요 내용하고는 별 관계가 없어서 지루합니다. 해설에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학대받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어쩌구 하면서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어차피 남의 나라에 스파이 활동하러 들어오는 일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일인데 왜 그런 것들을 합리화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악도 모호하고 센치한 정서만 난무하는 등, 첩보 모험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할 뿐입니다.
또 준비 과정과 잠입 과정의 디테일에 비하면, 반대로 에토로후 섬에서의 첩보 활동은 설명이 많이 부족합니다.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섬을 봉쇄한 해군이 유일한 발전기가 있는 공장을 내버려둔다? 당연히 말이 안 되죠. 상식적으로라도 해군 부대가 일부라도 상륙해서 마을과 주요 고지를 점령한 뒤, 감시 및 경계 근무를 벌였어야 했습니다. 물론 섬 최고의 미녀가 정체도 모르는 스파이한테 반해서 이것저것 도와준다는 묘사에 비하면 이 정도 몰상식은 양반이긴 하지만요. 그 외에도 작전 자체의 긴장감이 부족하고, 첩보를 입수한 미국 쪽에서의 움직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점 등 첩보 소설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뒷 부분 해설에서도 언급하듯이 켄 폴레트의 "바늘구멍"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적성국의 스파이가 외딴 섬에 스파이로 잠입하고, 섬에 살던 여자가 그 스파이에게 홀딱 빠진다는 설정은 판박이지요. 하필이면 비슷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비슷하냐... 단지 "바늘구멍"의 스파이와 여자는 국가에 충실한 애국자였고, 이 작품에서의 스파이와 여자는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라는 차이만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전 "바늘구멍" 쪽이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유명세만큼 읽는 재미는 있긴 합니다. 에토로후 섬에 대한 세밀한 묘사 등 방대한 자료조사가 뒷받침된 내용, 그리고 일본인의 전쟁 범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좋았어요. 건질 게 아예 없지는 않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키-센조 이야기, 케니 사이토의 스페인 내전과 미국에서의 범죄활동 묘사, 슬렌슨 신부의 난징에서의 체험 묘사 등은 모두 잘라내고 케니 사이토의 첩보활동을 중심으로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추적활동을 보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게 여러모로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