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살인사건 - 고가 사부로 지음, 박현석 옮김/현인 |
일본 추리소설계의 3대 거성 중 한명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타이틀의 작가가 쓴 단편집.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름 추리소설은 읽을만큼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일본 추리소설 3대 거성 중 두명을 들어본 기억조차 없다니 많이 반성해야 겠어요. 어쨌거나 초기 형태의 일본 추리 단편물을 접할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이기에 관심이 가던 책이었습니다. 국내에는 란포 이외에는 고사카이 후보쿠의 <연애곡선> 정도만 소개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읽어본 결과는 실망이 더 컸습니다.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최소한의 소설적인 완성도가 부족한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특기가 과학이었기에 과학을 응용한 트릭을 만드는 데에는 제법 많이 공을 들였지만 그 외의 부분은 너무 대충 넘어간 느낌이에요. 한마디로 수수께끼에는 적합하나 소설로는 부적합한 그런 작가였달까요.... 감히 일본 추리소설계의 3대 거성 중 한명이 맞는지 의심까지 갖게 만들 정도로요. 그 외에 지나치게 직역스러운 번역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별점은 2점. 자료적으로는 가치가 있고 쉽게 접하기 힘든 당대 작품이기는 하나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구태여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생각됩니다.
<혈액형 살인사건>
게누마 박사의 죽음과 가사가미 박사 부부의 자살 뒤 1년 후, "나" 우자와가 사건에 대해 공개하는 형태로 쓰여진 중단편 작품.
혈액형이 중요한 동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게누마 박사의 기묘한 죽음에 대한 트릭 (밀실에서 1시간 30분 정도의 가스 흡입으로 사람이 사망할 수 있도록 한 장치가 무엇인지?)이 엄청나게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독특함을 풍기는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과학 추리 소설이랄까요?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면 초월적인 작품라 생각될 정도에요. 일산화탄소를 액화한다는 발상은 지금 읽어도 신선한, 좋은 트릭이라 생각되고요.
그러나 트릭에 비하면 작품 자체는 평균 이하입니다. 우왕좌왕하는 전개에다가 범인이 너무 뻔하게 드러나버리는 등 읽는 재미를 줘야 하는 소설적 완성도가 심하게 별로에요. 혈액형이라는 동기도 시대를 감안하면 특이하나 지금 읽기에는 낡아빠졌을 뿐이죠. 작가가 너무 과학적인 설정과 트릭에만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순수한 선의에서 아기를 집에 데리고 오게 된 주인공과 그의 아내, 아기 어머니를 찾아달라고 의뢰받은 사립탐정, 그리고 다시 아내와 주인공의 수기로 이어지는 작품.
아기가 왜 주인공과 닮았는지, 아기 어머니가 왜 아기를 열심히 찾지 않았는지 등 소소한 수수께끼가 잘 배치된 작품으로 괜찮은 일상계 소품이라 생각됩니다. 각각 1인칭 수기로 이어지는 전개도 낡은 방식이기는 하나 작품과는 잘 어울렸어요.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
<푸른 옷의 사내>
자택에서 협심증으로 숨진채 발견된 오바마(!) 신조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이야기.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어요. 오바마 신조가 죽었다면 가장 득을 보는 것은 상속자 다쿠이치일테고, 그가 오바마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는 설정까지 있으니 이야기가 길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요.
다쿠이치가 상속세 때문에 시체를 방조했다는 진상 하나만큼은 조금 독특하나 그 외에는 별로 건질게 없는 평범 이하의 작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덫에 걸린 사람>
빚때문에 발버둥치는 도모키 - 노부코 부부가 각각 고리대금업자 다마시마를 죽일 결의를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무려 500엔이라는 거금을 갑자기 입수하게 된다던가, 지나가던 다케야마가 500엔을 분실한 뒤 우발적으로 다마시마를 죽이게 된다던가 하는 식의 우연치고도 너무 지독한 우연이 연달아 벌어지기 때문에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김화백 작품을 보는 기분마저 들 정도에요. 막나가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되잖아요?
죄책감을 묘사하는 부분이라던가 마지막의 "운명이라는 녀석은 항상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운명이다" 라는 도모키의 대사는 멋지지만 그냥 그 뿐이었습니다. 별점 1점 이상은 주기 어려운 몹쓸 작품이에요.
<위조지폐 사건>
중학생 화자인 "나"와 동급생 모리 하루오가 친구 도비야마의 고향에 방문해서 그 마을에서 벌어진 위조지폐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내용으로 셜록 홈즈 느낌이 가득 나는,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지만 탐정역의 모리 하루오가 강아지 발바닥의 잉크를 단서로 하여 절에 방문한 뒤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 진상을 알아낸다는 과정 자체는 셜록 홈즈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설득력이 넘쳤습니다. 만약 시리즈가 있다면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었어요.
그러나 아동용으로 창작된 듯 한 조금 저렴한 문체와 묘사, 그리고 탐정역인 모리 하루오의 인간적 매력이나 개성이 전혀 표현되지 않는 점 등이 점수를 깎아먹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진주탑의 비밀>
경찰과 협력하여 일하는 하시모토 빈이 깜쪽같이 가차로 바꿔치기 당한 진주탑의 행방을 밝혀낸다는 작품으로 역시나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의뢰인의 의뢰와 주요 단서를 놓고 벌이는 탐문 수사,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인물을 모두 모아놓고 벌이는 깜짝 추리쇼까지 완벽하게 고전적인 작품이에요.
허나 사세의 간단한 공작으로 이루어지는 트릭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좀 아쉽네요. 어차피 전문가들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다면 사세 입장에서 진주탑을 만들 때 몇몇 진주만 바꿔치기 했다면 훨씬 용이하게 돈을 손에 넣었을텐데 이런 공작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것도 무려 7만엔이나 되는 거금을 쓴다는 점에서 더욱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스타일은 잘 따라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생각되네요.
<거미>
쓰지카와 박사와 시오미 박사라는 두 박사간의 알력다툼과 그로 인해 비롯된 살의에 대한 이야기로 동기는 <혈액형 살인사건>과 좀 비슷하고 트릭은 <웃지 않는 수학자>와 동일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웃지 않는 수학자>에서는 나름 폐쇄공간에다가 특정 시기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제한조건이 있기는 하나 이 작품에서의 연구실 회전은 상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정말로 트릭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는 합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인 거미에 대한 광기 묘사도 뭔가 2% 부족할 뿐더러 좀 뻔했고요. 그냥저냥한 당대 분위기스러운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꾀꼬리의 탄식>
명문 화족 후타가와 가의 후계자 시케유키의 죽음, 그리고 상속자 시케타케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써내려간 중단편. 제법 긴 분량인데 시케유키가 사망할 때 까지의 전반부, 노무라의 아버지와 시케유키가 남긴 문서로 이루어진 중반부, 시케타케의 정체와 시케유키 죽음에 얽힌 트릭을 파헤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케유키가 일본 알프스를 파헤치는 작업을 하는 이유가 서서히 밝혀지는 과정까지의 긴장감이 꽤 그럴듯하고 시케유키를 독살한 트릭도 괜찮은 편이나 진상이 정말로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지 않고 유력 용의자를 급작스럽게 단죄하며 끝내버리는 마지막 결말때문에 작품을 망쳐버렸어요. 어차피 증거도 없고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겠지만 이렇게 끝내는건 너무 안이한 처사였다 생각됩니다. 최소한 진상은 밝혀 줬어야죠.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호박 파이프>
한 집에서 피살된 일가족, 남겨진 방화의 흔적,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백주강도 사건의 관계자 이와미가 얽혀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본격 추리물. 간단한 암호 트릭과 더불어 방화에 이용된 염산가리와 설탕의 혼합물에 유산을 떨어트리는 장치 등 복잡한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전개도 흥미로운 편입니다. 이와미라는 평범한 회사원이 범죄에 어떻게 관계되었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완성도는 그닥 높아 보이지는 않네요. 백주강도가 탐정역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설득력이 전무할 뿐 아니라 트릭의 과학적 설명은 합당하나 범인이 그렇게까지 정교한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거든요. 그야말로 트릭을 위한 트릭일 뿐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니켈 문진>
묵직한 니켈 문진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된 시미즈 박사의 사인을 둘러싸고 그의 서생인 시모무라와 우치노가 두뇌싸움을 펼쳐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녀인 야에코를 화자로 하여 전개하는 구조는 독특하긴 하나 이야기 전체의 설득력이 낮아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왜 시미즈 박사가 독가스를 연구했는지, 또 왜 독일어로 그 연구를 기록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 비밀을 훔치려는 사람들의 공작이 너무나 허술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에요.
순수한 니켈이 자석에 반응한다는 과학 상식을 알게된 것 이외에는 건질 부분이 전무한, 그야말로 너무한 수준의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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