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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

류 - 히가시야마 아키라 / 민경욱 : 별점 3점

- 6점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해피북스투유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와 의형제가 되었는지 묻자, 마 할아버지는 만두를 입에 넣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알았고, 뭐, 네 할아버지와 있으면 굶지는 않았으니까.”
리 할아버지와 구오 할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먹는 것과 목숨을 거는 일은 같은 거라는 사실을 이때 새삼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함께 먹는 것, 제대로 먹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었다.

예치우성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했다. 단순 강도 사건은 아니고 국공내전 때 많은 공산당원을 살해해서 원한을 샀기 때문으로 보였다. 예치우성은 대리 시험을 보다가 퇴학당해서 3류 고등학교로 전학가고, 거기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대학을 떨어지고, 소꼽친구인 두살 연상 마오마오와 사랑에 빠지지만 어릴 때 부터의 친구 사오잔과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군대에 갔다가 마오마오와 헤어지는 등 질풍노도와 같은 청춘을 보내며, 할아버지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버블 일본에 농산물 등을 수출하는 회사에 일하면서, 중국에 있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마 할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범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범인은 삼촌 위우원으로,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살해했던 왕커창 일가의 유일했던 생존자 아들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슈알후의 아들인 척 하여 할아버의 양자가 되었었다.....


대만계 일본 작가의 작품.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집어들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인공 예치우성의 고등학교에서 군 생활까지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춘 소설이자 예치우성의 성장기더라고요.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답게, 묘사는 출중합니다. 70년대 대만을 이렇게까지 실감나게 그린 작품은 정말이지 처음 보네요. 숨막히는 더위로 대표되는 이국적인 풍광이 가득하지만 70~80년대를 거쳤던 한국인 독자에게 친숙한 광경들이 많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가학적이고 거친 학교 생활, 무식한 군대 생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레코드 가게에서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준다는 등 당시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많이 느껴진 덕분입니다. 특히 전쟁으로 본토에서 쫓겨난 외성인들과 본성인들의 갈등 상황은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요. 의형제, 의리를 강조하는건 확실히 중국스러웠습니다만.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모두 강렬하며, 이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치우성의 그야말로 폭풍같은 청춘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파괴적이기도 하면서,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황이 펼쳐져서 눈을 떼기 힘들정도였어요. 살짝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치우성이 제대한 뒤인 80년대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세컨드 러브>> 등이 언급되는데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도 익히 잘 아는 시대니까요. 그런데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진 뒤 '두 번째 사랑'을 만났다는걸 의미하기 위해 이 곡을 일부러 등장시켰을텐데 이렇게 노골적인 제목보다는 은근하게 <<슬로 모션을 다시 한번>>처럼 접근하는게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추리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도 없어요. 작품 내에서 할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이 중요하게 언급되며, 치우성도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펼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단서도 없고, 치우성의 수사도 근거없는 헛된 노력에 그칩니다. '분신사바'가 중요한 단서인 것처럼 등장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범인이 삼촌 위우원이었다는건 나름대로 반전이지만,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친구 마 할아버지가 보낸 사진으로 드러나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이전에 쌓아 올렸던 단서들, 예를 들어 위우원이 했던 거짓말 등이 있기는 하지만 피상적이며, 단서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추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위우원이 십 수년이 지난 뒤에야 예준린을 살해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예준린을 살해했을 때 치우성을 포함한 다른 예씨 일가를 모두 살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예준린이 위우원이 슈알후가 아니라 왕커창의 아들이라는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걸 위우원이 깨닫는건, 예준린을 살해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 동안 복수를 멈추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점들을 본다면 이 사건은 추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위우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아들처럼 대했다는 묘한 상황을 통해 중국과 대만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는 소재로 쓰였을 뿐입니다. 치우성의 질풍노도와 같은 정춘은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대만으로 향하는 성장통인 셈이고요.

후기를 보니 작가는 캐릭터가 마음대로 날뛰도록 작품을 쓴다던데, 그 말대로 전체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쓰지 않은 티도 물씬 납니다. 치우성이 어리석게 사오잔과 어울리며 비슷한 사고를 치고다니는 전개도 그렇지만,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둘이 이복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급작스러운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황당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더군요. 치우성이 중국으로 위우원 삼촌을 찾아가 담판을 짓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었고요. 사랑하는 연인도 새로 생기고, 안정된 직장도 있는데 지금와서 왜? 라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를 무대로 각색할 수 있어 보이네요. 한국 전쟁 때 북한의 부역자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던 가족의 생존자 아이가 흥남 철수 때 남한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학살을 주도했던 국군 집안에 어찌어찌 양자로 들어갔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양부와 기묘한 애정을 쌓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복수를 위해 양부를 살해하지만 양부가 자기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허무함을 느낀다, 그리고 뿌리를 찾기 위해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향한다 정도로요. 
이렇게 정리하니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전쟁의 아픔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닌 탓이겠죠. <<최후의 증인>>이 전쟁으로 인한 양쪽 세력의 악행과 비극을 더 잘 그려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증인>>이나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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