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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0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권영주 : 별점 2점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한 지방 촌도시에 있는 바 에이프릴에 토요일 밤마다 다양한 사람들 - 비디오 가게 주인과 사진관 주인 부부, 신사복점 아들, 돌팔이 치과의사 - 이 모인다. 모이는 이유는 토요일 밤, 바를 찾는 슈겐도의 행각승 지장 스님에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일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단편집입니다. 학생 아리스와 작가 아리스 이외의 시리즈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범죄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추리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흑거미 클럽"이겠지요. 에도가와 란포 단편에도 이러한 모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 몇 개 있고요. 스님 탐정이라는 점에서는 "A 사이즈 살인사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전적인 설정을 도입한 작품답게,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모두 고전적이면서도 전형적인 퍼즐 미스터리이자 수수께끼 풀이입니다. "문제"편과 "해답"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성도 고전적이고요.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런 고전적인 단편들을 좋아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첫 번째 문제는 설정입니다. "흑거미 클럽"은 클럽 회원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구석의 노인"같은 이야기 전달자와 탐정 등장 구조에서 한 단계 진보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화자와 탐정을 모두 행각승 지장 스님이 맡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간단한 의견을 약간 전달할 뿐, 하는게 거의 없어요. 때문에 지장 스님이 등장하는 3인칭 추리 단편으로 만드는 게 나았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슈겐도의 행각승이라는 주인공이자 탐정 지장 스님입니다. 강인한 체력에 무술도 어느 정도 갖추고, 술이나 고기도 사양하지 않는 - 좋아하는 칵테일이 "보헤미안 드림"(조사해봤는데 존재하지 않는 칵테일 같네요)일 정도로 - 만화같은 설정도 별로지만, 주인공이 스님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탓입니다. 앞서 언급한 "A 사이즈 살인사건"에서는 그나마 "선문답"이라는 형식을 통해 추리를 피력하는 등 스님 설정의 당위성을 가져가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떠돌이"라는 설정 이외에는 행각승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전체적인 분위기 모두가 소설이 아닌 TV 단막극에 더 어울리는 내용들이었고, 트릭들도 영상화되는 것이 더 깔끔하게 설명될 수 있을것 같아서 TV 시리즈를 소설로 만든게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미스터리 매니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고전 스타일 구현을 위한 무리한 욕심은 가상합니다만, 썩 잘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이 작가는 소설가보다는 "원작가"로 활동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수록작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개인적 베스트로는 "독 만찬회"를 꼽습니다.

"지방 철도와 신데렐라" 

고전적인 구성과 더불어 독자에게 주는 정보도 공정한 정통 퍼즐 미스터리입니다. 상-하행선이 번갈아 운행하는 시골 기차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트릭이 등장하고요. 아이돌과 매니저가 등장하는 설정은 뻔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택의 가장파티" 

벼락부자 졸부의 가장 파티장에서 배트맨 분장을 한 사람이 피해자를 찾아간 뒤, 다스베이더가 피해자와 배트맨의 시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입니다.

영상화되는 것이 더욱 어울릴법한 트릭으로 그다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범인이 곧바로 밝혀졌으리라 생각도 들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절벽의 교주" 

사이비 종교 단체의 절벽 아래 수행장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이야기입니다. 

공들여 만든 자연적인 밀실을 무대로 한 밀실 살인물인데 설정부터가 억지스러워요. 트릭도 너무 만화같고요. 범행이 작품에서처럼 한 번에 성공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독 만찬회" 

가족 만찬회장에서 벌어진 독살 사건이라는 고전적 설정도 좋지만, 트릭이 굉장히 깔끔하고 기발해서 마음에 듭니다. 동기도 합당하고요. 우연에 의한 일종의 사고라는 문제가 있긴 한데 수수께끼 풀이로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생각되네요. 뭐 이런게 더 현실적이기도 하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을 때는 혼자" 

전직 야쿠자가 총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의 도주로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는 내용으로, 뭔가 거창한 밀실 트릭이 쓰였을 것 같은데 실상 알맹이는 별 게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범인이 중요한 단서를 간과했기 때문에 사건이 복잡해진 것 뿐이거든요. 좀 흔한 내용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깨진 유리창" 

일종의 순간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피해자가 사망할 때가 아니라, 범인이 도주하고 나서 사망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유리창을 깼다는 것이지요. 어디서 많이 본 듯 싶어요. 

그러나 트릭이 정말로 조잡하고 유치한 수준입니다... 수사를 통해 곧바로 드러날 장치 트릭이라는 문제도 크지만, 안에서 깬 유리와 밖에서 깬 유리의 형태가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기본조차 망각하고 있는 탓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덴마 박사의 승천" 

우연히 만난 발명가의 괴상한 죽음의 진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자살 같지만, 현장까지 술에 취한 듯한 엉망진창의 피해자 신발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는건데, 수준을 떠나서 솔직히 반칙이었다 생각됩니다. 작위적이면서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차라리 바 손님들의 아이디어가 진상보다 더 나았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9/09/01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2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겐 가문의 현 당주인 할머니 야요이가 손녀 유카리가 실종된 사건을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맡겼다. 마침 호겐 가문의 본가가 있던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 에서 기묘한 결혼 사진을 찍은 혼죠 사진관의 나오키치도 결혼한 부부의 조사를 요청했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두 사건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조사 결과 유카리를 유괴했던건 결혼한 신랑 야마우치 도시오였다. 놀라운건 그가 여동생이라고 데리고 다니다가 결혼한 고유키가 유카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몇일 뒤, 야마우치 도시오의 목이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에 매달린채 발견되는데...

꺄! 완전 취향 저격의 독서였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극하는 고전적인 설정, 전개와 묘사가 아주 감탄스러운 수준이거든요. 각 챕터마다 곁들여진 짤막한 부제같은 단문도 옛스럽지만 참극! 공포! 저주! 악연! 증오와 원한의 불꽃! 배우는 모두 모였다! 같은 진부한 묘사도 눈길을 사로잡아요. 전화기조차 격렬하게 울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비련의 여주인공이 가혹한 운명 때문에 결국 총탄에 맞아 죽고, 그녀의 입으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까지 정말로 완벽합니다!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

그야말로 요코미조 세이시다운 설정과 묘사들도 애호가의 팬심을 자극합니다. 전형적인 "대부호 콩가루 집안의 복잡한 가정사가 낳은 비극" 이라는 동기부터요.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낡아빠지긴 했지만 이런게 바로 요코미조 작품의 매력이지요.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될 때 까지 1권 분량의 2/3를 사용할 정도로 진행이 느린 것도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이를 원숙한 솜씨로 등장인물과 기묘한 사건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 힘듭니다. 과연, 짬밥(?)은 날로 먹은게 아닌 셈이에요! 물론 호겐 가문과 이가사리 가문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4대째를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첫 단락은 과하긴 했습니다만...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전해주는 묘사도 고전적이기는 한데, 작가 인생의 말년에 발표했던 쇼와 시대의 작품이라 그런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묘사들이 눈에 뜨인다게 특이했습니다. 피해자인 야마우치 도시오가 재즈 악단 '앵그리 파이러츠'의 리더였다는 등 재즈 콤보 멤버가 사건의 주요 인물이라는 점부터 그러합니다. 또 앵그리 파이러츠의 멤버 중 한 명인 사가와 데쓰야는 애꾸눈인데 그의 안대는 시크하며, 그가 붉은 원색 코트를 입고 지휘를 하면 여자들이 모두 사로잡혔다는 묘사는 처절함마저 느껴질 정도에요. 재즈와 텔레비젼,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젊은 세대를 의식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젊은 세대의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보이기는 하네요.
 당대 풍광을 잘 느끼게 해 주는 묘사도 좋습니다. 전후 막 복구가 시작되던 분위기가 잘 느껴지거든요. 도쿄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부흥하는 부분의 설명이 특히 볼 만 합니다.

현실성 여부를 떠나 팬으로 즐길 거리도 많아요. 몇 년, 아니 몇 십년이 지났지만 더벅머리에 머리를 긁적이고, 볼품없는 하카마에 낡은 회색 외투와 삿갓 모양 모자를 쓴 긴다이치의 행색이 대표적입니다. 비올 때 쓰는 박쥐 우산마저도 친숙합니다. 도도로키 경부나 와 같은 친숙한 등장인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고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지라 일종의 후일담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도도로키 경부는 은퇴 후 잘 나가는 탐정 사무소 소장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경부보로 경찰에서 일하고 있으며, 거리의 양아치였던 다몬 슈는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요.
여기서 도도로키 경부가 생각 이상의 낭만파 꼰대라는 묘사도 재미있었어요. 지금 하는 불륜 조사같은 일 보다 긴다이치가 가져온 가슴이 뛰는 모험은 흥미로와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건방진 의뢰인과 예전에는 잔챙이 범죄자였던 다몬 슈와 함께 하는건 싫어하는데 이거야말로 꼰대죠. 전형적인 '왕년에 내가' 류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이런 완전 고전적인 즐거움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건 단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추리적으로는 완전 꽝이에요. 모두 3건의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양적으로는 풍성한데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한, 모든 사건의 발단인 첫 번째의 야마구치 도시오 살인 사건부터가 엽기적인 사건 현장의 묘사 외에는 억지스럽고 엉망입니다. 우선 후더닛 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야마구치 도시오의 부인 고유키가 실종되었으니까요. 나중에 고유키가 아니라 혼죠 가문의 딸 유카리가 실종되었다는게 밝혀지지만 이 역시 사건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이미 둘이 닮았다는걸 앞 부분에서부터 자세히 밝히고 있어서 수수께끼도 뭐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동기와 같은 와이더닛 측면으로는 괜찮은가? 역시나 별 볼일 없어요. 야마구치 도시오에게 농락당하고 분노한 유카리가 반대로 그를 농락하려다 둘 다 죽게 되었다게 진상이거든요. 트릭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들의 문란한 행각으로 벌어진 사고일 뿐입니다.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목을 풍경처럼 매달은 이유'가 정말 야마구치 도시오의 유언 때문이었다는 이유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 외의 괜히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들은 거슬리기만 합니다. 고유키가 야요이를 설득해 시체를 없앤게 대표적입니다. 그 집은 폐가에 가까와서 사건이 바로 발각될 이유는 없었던 만큼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둘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처럼 위장하고 시간을 번 뒤 집을 아예 재건축 하는 형태로 갔어도 무방했을거에요. 야요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요. 여러모로 사건을 억지로 만들기 위한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세 번째, 요시자와 살인 사건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적으로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범인의 분노로 인한 무차별 살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두 번째 사건만 후더닛, 와이더닛 측면으로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파티 참석자들 모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졌는데 이는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범행이 일종의 착각으로 벌어졌다는 의외성도 좋았고요.
문제는 사용한 트릭이 저자의 이전 작품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에 등장했었던 트릭이라는건데, 범인이 추리 소설을 통해 트릭을 익혀서 사용했다는 식으로 트릭의 자가 복제를 설득력있게 넘어가는 솜씨는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날로 먹은 듯 하지만 이 역시 거장의 재치겠지...요. 와이더닛 측면으로도 협박자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등장 인물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 범위 밖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범인 시게루부터 보자면, 아들 데쓰야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분노한다는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살인까지 저지를만한 인물이라는 묘사가 그 전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너무 갑작스러워요. 분노의 대상에 아내가 포함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요.
데쓰야가 도시오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후 방황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에요. 어머니가 유카리, 아니 고유키라도 그가 호겐 이가라시 가문의 후손이라는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유카리는 엄연히 야요이의 손녀이고, 고유키는 데쓰야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방황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혼조 도쿠베에가 과거 유카리의 사체를 숨긴 뒤 이를 통해 호겐 가문을 협박해 왔다던가, 이를 효도 후사타로가 눈치채고 협박을 이어간다는 설정도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무려 백만엔이나 되는 선금과 함께 사건을 의뢰받은 주제에 의뢰인이 죽도록 방관한 긴다이치의 무능함이고요.

이렇게 추리적으로는 너무 별 볼일 없기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설정도 기대 이하인 등 - 예를 들어 사가와 데쓰야는 최초 야마구치 도시오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될 정도로 격한 분노를 품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뮤지션으로 설명되는 식으로 - 솔직히 더 낮은 점수를 주어도 무방하긴 한데, 고전 애호가들은 여러모로 즐길 거리가 많기는 합니다. 최소한 저는 깔깔거리며 즐겁게 읽었답니다. 저 같은 고전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이 작품을 즐길 정도의 고전 애호가가 얼마나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2014/12/09

파리인간 - 한스 올라브 랄룸 / 손화수 : 별점 2.5점

파리인간 - 6점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책에이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저항하는 군인으로 활약했고, 전후 고위 관직도 역임했던 하랄 올레센이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수사 총 책임자로 임명된건 콜비외른 크리스티안센 경감이었다. 경감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랑나르 보르크만 교수는 경감에게 자신의 딸 파트리시아로부터 조언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녀의 뛰어난 추리력을 알아챈 크리스티안센은 그녀와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노르웨이 작가의 추리소설. 원래 북유럽 쪽 추리소설은 취향이 아닌데 평이 굉장히 좋았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정통 본격물 느낌이라는게 의외였습니다. 북유럽 추리소설이라서 "웃는 경관"이나 발란더 시리즈와 같은 묵직한 수사물이 아니면 요 네스뵈로 대표되는 스릴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첫 사건인 하랄 올레센 살인사건에 사용된 밀실 트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현대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시대 배경이 1968년이라 비교적 고전적인 추리가 사건 수사에 동원될 여지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범인이 가짜 범인을 조작하는 과정이 등장한 점도 고전 정통 본격물 스타일이라 할 수 있으며, 여러 증언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진상까지 끌고 가는 전개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고전적 추리 스타일에 더하여 전쟁영웅인 줄로만 알았던 하랄 올레센의 과거가 아파트 거주민들을 통해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진진합니다. 2차대전 중 국경지대 안내인이 자기 방어를 위해 두 명의 유대인 부부를 사살한 후 무죄 판결을 받았던 펠드만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데, 역사학자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발휘된 셈입니다. 안데르손에게 듣는 하랄과 디어풋의 목숨을 건 탈출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치는 등 디테일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탐정역의 천재 소녀 파트리시아도 특이했습니다. 발로 뛰는 형사와 장애가 있어 칩거하는 천재 조합은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설정이면서 링컨 라임 시리즈와 똑같아서 아주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리 소설을 백여 권 읽은 추리 소설 매니아라는 설정만큼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추리 소설 애호가라서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네요. 처음 만났을 때 책상에 놓인 책 중 한 권은 스텐리 엘린의 작품이라는 디테일도 돋보였습니다(1968년은 "발렌타인의 유산"이 발표된 해이기도 하죠). 그냥 설정으로 끝내는게 아니라 매니아답게 여러 가지 추리 소설을 응용하며 대화를 펼치는 점도 좋았어요. 아이 울음소리를 불평한 주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며 셜록 홈즈를 흉내 내는 식으로요. 중반부에 공소시효가 끝난 뒤 벌어진 동일한 범죄를 다룬 조르주 심농의 작품을 언급한 것도 기억에 남는데, 무슨 작품일까 궁금해집니다. 물론 추리소설 백여 권 읽은 걸로는 매니아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작가의 데뷔작이기 때문일까요? 아쉬운 부분도 많이 보입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정통 추리물의 스타일을 따르고는 있지만 실제 추리적으로는 그렇게 잘 짜여져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하랄과 엮여 있다는 인간 관계는 작위적이며, 주요 인물들의 증언이 거의 모두 거짓이기 때문에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도 못합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밀실 트릭도 반 다인의 작품 등에서 이미 선보였던 고전적인 트릭에 지나지 않아 참신함이 부족해요. 레코드판이 아니라 테이프를 사용하는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수준도 유치하고요. 마지막에 모든 주요 인물들 앞에서 펼치는 추리쇼라는 작위적 설정까지 고전적 스타일을 답습했어야 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또 비록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사진까지 있는데 디어풋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다는건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범인이 원래 계획대로 자살을 위장한 완전범죄를 벌이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총도 새로 구해왔으니 모든 준비가 끝난 것 아닌가요?

그 외에도, 사라의 미모와 크리스티안과의 불륜은 지나치게 과하게 묘사된 듯 싶었어요. 할리퀸 로맨스 성인버전을 읽는 기분이었으니 말 다했죠. 휠체어에 앉아있던 장애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 역시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출연했던 수작 스릴러 "서스피션" 등 여러 작품에서 숱하게 등장했던 것이라 진부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데뷔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인 완성도가 미흡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히는 재미만큼은 충분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2/06/09

너무 친한 친구들 - 넬레 노이하우스 / 김진아 : 별점 1.5점

너무 친한 친구들 - 4점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북로드

환경운동가로 지방도로 건설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던 고교 교사 파울리가 살해당했다. 보덴슈타인 반장의 지시로 수사를 진행하던 피아 형사는 유력한 용의자인 동물원장 산더와 미청년 루카스의 구애를 받게 되는데...

하아... 그간 격조했습니다. 거의 1주 만이네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블로그가 방치 상태가 되어 갑니다... 주말이라도 부지런히 글을 올려야겠습니다. 

블로깅 목적으로 이번에 읽은 책은 요새 대세라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형이 구입했길래 별 고민 없이 덩달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독일 가정주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읽어보니 여러모로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더군요.

첫 번째로는 최근의 인기작임에도 고전적인 정통 추리 수사물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피해자에 대한 설정입니다. 환경운동가로 활동해서 생겨난 적 뿐만 아니라, 전처와는 재산 문제로 싸우고, 옛 친구의 숨기고 싶은 과거도 알고 있고, 가르치던 학생과 졸업 문제로 격하게 싸우는 등 가는 곳마다 적을 만든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5만 유로라는 거액의 현금 소지까지 밝혀지고, 알고 보니 의외의 자산가이며 여러 보험도 얽혀 있는 등 여태까지 살아 있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근 추리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그야말로 모범적인 피해자입니다.
일본 고전 추리소설에서 봄직한 콩가루 집안에 대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집 나간 아들들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거의 모든 커플이 불륜을 저지르며, 심지어 자기 아들의 여자친구와 놀아나는 아버지까지 등장하는 등 일본 소설을 능가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용의가 짙은 인물을 순차적으로 등장시키고, 부수적인 사건이 벌어짐에 따라 용의자가 계속 이동하는 등의 수사 과정도 역시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전적이기만 했더라면 이만큼의 인기는 얻을 수 없었겠죠? 형이 "추리를 가장한 로맨스소설이다"라는 평을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다른 장르 문학 작품과 비교하면 로맨스 소설 느낌을 많이 전해 줍니다. 등장인물도 미남미녀가 많고(잘생긴 정육점 주인이라든가...), 주인공인 피아 형사를 향해 구애하는 인물도 중후한 중년과 잘생긴 애송이라는 조합으로 두 명이나 등장하는 등 여성 독자를 끌어들일 만한 요소가 많아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진범의 정체와 결말에 큰 문제가 있더군요. 너무 뜬금없기도 하거니와, 정교함이나 치밀함과는 담을 쌓은 범죄로 단지 운이 좋았던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트릭 같은 요소는 전무합니다.

그렇다고 수사 과정이 치밀하냐 하면 그것도 영 아닙니다. 첫 범행 때에는 목격자도 있고, 두 번째 범행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를 남겼음에도 범인이 용의선상에조차 오르지 않는건 솔직히 경찰의 무능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거든요. 용의자들 혈액 검사만 했어도 충분했을 것을...
또 최초 파울리 살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반더베르크를 살해하려 한 동기는 도저히 알 수도 없었고, 독자의 혼돈을 노리고 뿌린 떡밥(예를 들어 파울리의 전처와 현 여자친구의 수상쩍은 밀회라든가)도 제대로 회수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는 등 완성도 면에서는 현격한 결격사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산더와 루카스를 색안경 끼고 보는 보덴슈타인의 심리 묘사는 대놓고 노리고 쓴 티가 물씬 나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독자에게 "얘하고 얘가 수상해!"라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공정성이라는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요소를 무시해버린 것이니 도저히 좋게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맨스 소설 느낌을 넘어서 시시콜콜한 심리 묘사가 너무 많은 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주인공이 잘생긴 미중년 동물원 원장에게 끌리는 감정을 주체 못하는 피아 형사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보덴슈타인 반장의 캐릭터도 일과 가정 모두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등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앞서 말한 독특함과 그에 따른 장점, 즉 고전 느낌의 로맨스 분위기, 확실한 여성스러운 묘사는 분명히 괜찮았습니다. 각 요소들은 전통적이나, 그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괜찮은 시도이긴 하죠. 헐리우드 스릴러화되는 최근 유럽 장르소설과의 차별화 포인트도 확실하고요.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읽어야 할지 심히 고민됩니다...

2014/06/10

CMB 박물관 사건목록 2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24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 박물관 사건목록 2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24권 리뷰입니다. 최신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25권이 나와있네요.

여튼, 24권에는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잔잔한 일상계 없이 네편 모두 사람이 죽는 등 심각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점은 동시기 발표된 "Q.E.D 45"와 같군요. 작업 당시 작가에게 뭔가 안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수록작 2편의 "Q.E.D", 3~4편의 "C.M.B"로 목차도 굳어져가는 느낌이네요.

전체 별점은 반올림해서 2.5점. 두편은 괜찮고 두편은 평범했습니다.

상세한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니쇼테이"

"니쇼테이"라는 실존했던 기묘한 건축물을 재현하는 괴짜에 대한 이야기. 진상은 과거 있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였는지를 밝히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쇼테이를 재건하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아서 본 줄거리와 그렇게 잘 연결된다고 볼 수 없고 내용도 작위적인 부분이 한가득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니쇼테이 재건은 단지 "돈을 물쓰듯 쓰는" 행동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라도 상관없는 것이니 별 관계도 없고, 진범이라는 이모부부가 구태여 그 건축물안에서 여보란듯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당쵀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니쇼테이라는 건축물에 대해 접한 작가가 기묘한 부분이 좋아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지 못한 느낌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이상의 독특한 시를 주제로 추리소설을 써야지!"라는 생각까지는 좋았으나 그 결과물은 실제 시와는 유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희대의 졸작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아예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니쇼테이는 지금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영화 세트"로 허가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해내어 곁가지 진상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 하나만큼은 괜찮았고 특유의 박물학적 지식의 전달 측면에서도 니쇼테이라는 건축물을 알게 해 주었다는 점은 좋았으니까요. 관심이 생겨서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는데 확실히 신기하긴 하군요.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여튼, 별점은 2점입니다.

"다이아몬드 도둑"

미술관에서 사라진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찾는 이야기. 도둑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전개도 깔끔하고 진상도 그럴듯합니다. 마지막에 진범이 새롭게 드러나는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신라가 진범을 깨닫게 되는 사소한 범인의 실수가 저는 그렇게 와닿지는 않더군요. 자포자기를 했을 수도 있고 다른 경로로 명확하게 진품이 아니라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일 수도 있는데 너무 지레짐작이 심했던 것 같거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확실히 깔끔해서 이번 권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꼽을 만한 에피소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레이스"

아버지와 삼촌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만 놓고보면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딱히 재미가 없어요. 막장드라마의 제국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정도야 뭐 장난 수준이니까요. 총을 쏘았던 경비원의 증언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너무나도 쉬운 전개라는 것도 불만이고요, 반전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평균 이하의 졸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옷장 속의 유령"

C.M.B가 아닌 M.A.U로 제목이 달려있는, '암시장의 마녀' 마우가 주인공인 사건목록 번외편입니다. 마우가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강령회 도중 쇠사슬로 묶인 옷장 안에서 영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지요. 

조작된 랩소리라던가 강령회에서 들려왔던 유령의 목소리, 어떻게 밀실과 같은 옷장 문을 열었는지 등 트릭만큼은 풍성합니다. 대저택, 강령회, 밀실 등의 고전적인 설정과도 잘 맞물려 있어서 고전 본격물을 즐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추리적으로는 괜찮았어요. 구태여 이런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는 설정상의 헛점과 랩소리, 빗을 이용한 유령 목소리 등이 실제 가능했을지와 같은 장치 트릭의 문제점까지도 고전적이라 저는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마우를 주인공으로 또 스핀오프를 벌려놓느냐는 겁니다. 솔직히 마우라는 캐릭터는 너무 만화적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타츠키를 더욱 잘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이래서야 진히로인은 마우라고 해도 할말 없겠어요.
게다가 이 작품에서 마우의 활약은 나쁘지는 않지만 "고전적"이라는 설정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기에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토마가 주인공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6/08/19

저주받은 자, 딜비쉬 (Dilvish, The Damned) - 로저 젤라즈니 / 김상훈 : 별점 2.5점

저주받은 자, 딜비쉬 - 6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너머

고귀한 자의 후예 해방자 딜비쉬는 서방과의 전쟁에서 포타로이를 해방시킨 전쟁 영웅으로, 어느날 어둠의 의식을 거행하던 마법사 젤레락을 방해한 뒤 젤레락의 저주를 받아 200년을 지옥의 나락으로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파괴의 주문과 친구 블랙을 얻어 현세로 돌아온 딜비쉬는 젤레락을 찾기위한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

형이 사둔지는 꽤 되었지만 그닥 손이 가지 않다가 얼마전 읽게된 책입니다. 일단 손이 가지 않은 이유는 형의 혹평도 많이 작용했기에 아무리 젤라즈니 선생의 책이지만 그동안은 좀 멀리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읽고 나니 생각보다는 재미있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딜비쉬와 그 친구인 블랙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딜비쉬는 이 바닥에서는 좀 뻔한 설정의 재반복이긴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귀한 자의 후예로 용병 생활을 통해 해방자로 거듭나는 사연이나 타고난 강함, 냉정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 모두 이런 영웅담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된 이야기이긴 하죠. 그러나 저주받아 떨어졌던 지옥에서 익힌 주문과 보이지 않는 검과 엘프의 선물이라는 녹색장화 (발자국이 남지 않고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할 때 발부터 떨어지게 됨) 라는 아이템 등 디테일이 특이하고 젤라즈니 선생 특유의 묘사가 좋아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인상적인 캐릭터로 창조된 것 같습니다.
또한 강철로 된 말같은 형상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 블랙의 설정은 그야말로 왔다!입니다. 판타지의 기본이 되는 아이템인 "말" 그 자체를 주인공의 하나로 만드는 발상이 기발하기도 하지만 이 말이 강철로 된 몸을 지녀 거의 무적에 가깝고 마법까지 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말(言)도 하는데 이 블랙이 지껄이는 대사가 시니컬하면서도 꽤나 유머스러운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여자가 길을 지나는 딜비쉬를 붙잡고 애인을 구해달라고 통사정 할 때 하는 말입니다. "이건 고전적이다 못해 해묵은 수법 아니오. 저 여자 뒤를 따라가면 매복하고 있던 무장한 사내 두어명이 당신을 덮칠거요. 그자들을 처치하면 여자는 뒤에서 당신 등을 찌를 거고. 이런 것을 소재로 한 발라드까지 나와 있지 않소"

하지만 이러한 멋진 설정도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죠? 이 책에는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딜비쉬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셀린데의 노래"를 제외한다면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셈이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스케일이 큰 전쟁 이야기 보다는 적은 규모의 무대와 인물들을 바탕으로 색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메라이사의 기사" 와 "악마와 무희",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저주받은 자 딜비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건 순전히 제 개인 취향이니 다른 분들은 다른 편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취향이든 아니든 대부분 본격적인 영웅담을 한번 써 보고 싶어서 손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쭉쭉 읽는 재미 하나는 확실합니다.

뭐 젤라즈니 선생 수준에 걸맞지 않는 단순하고 뻔한, 그냥 무협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맹이가 없긴 하지만 젤라즈니 선생도 심심풀이로 쓰고 싶은 책도 있을 테니까요. 작품의 수준을 논하지 않고 젤라즈니의 작품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수준으로 보면 적당할 것 같네요. 작가 이름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4/07/02

사무라이 (Samourais / Samurai, 2002) - 지오다노 제데를리니


만삭의 몸으로 기모노를 입은 채 대나무 숲을 헤치고 도망가는 한 여인. 그리고 뒤를 쫓는 일본의 정통 사무라이. 그가 산통을 느끼고 쓰러진 여인을 냉정하게 죽이려는 순간 그녀의 호위병들이 나타나 대결을 펼친다. 여인을 죽이지 못한 사무라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죽어가고, 그 순간 여인의 몸에서는 고치에 휩싸인듯한 아이가 태어난다. 태어나자 마자 순식간에 눈앞에서 건장한 남자로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그로부터 500년 후. 21세기 일본에서는 폭력적인 게임을 팔아 자금을 만드는 범죄 집단의 살인이 이어지고, 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죽음을 통해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된다. 수사를 맡은 형사 모리 후지와라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악마일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고 심문과정에서 느낌이 맞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쇠약해진 육신을 버리고 새 몸으로 다시 부활하겠다는 의문의 말을 남긴 채 악마는 죽어가고. 모리 앞에는 후지와라 가문의 선조가 나타나 5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일본 사무라이 시대 후지와라 가문의 쇼군이었던 모리의 선조는 적을 막기 위해 전쟁의 악마를 불러오지만 다시 지옥으로 보내는데 실패하게 된다. 악마가 육신을 얻기 위해 딸의 몸에 잉태된 것을 안 쇼군은 그녀를 죽이려 하지만, 그녀의 호위병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 그리고 몇 백 년이 지난 현재, 쇠약해진 몸을 버리고 새 육신이 필요한 악마는 후지와라의 후손 모리의 딸을 두 번째 숙주로 삼고자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를 죽이지 않고서는 악마의 부활을 막을 길이 없음을 알게된 모리는 그 길로 유학중인 딸 아케미(마이 안 르)를 직접 죽이기 위해 프랑스로 출발한다.


한편 프랑스에 유학중인 매력적인 여성 어느 날 밤 악마에게 강간 당하는 끔찍한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빠와 악마가 동시에 찾아오고 있음을 모르는 아케미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시달리기 시작하는데...


절친한 친구 모군의 도움으로 공짜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보게 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은 한마디로 “쓰레기!!!” 입니다.

시작부터 왠지 어색한 전국시대 코스프레 분위기의 화면으로 심상치 않더니 영화가 갈수록 정말 가관이더군요. 나름대로 아주 약간의 복선 (살해당한 천재 프로그래머 켄지 X가 개발한 네트워크 장치와 PS2 게임인 “라스트 부시도”)을 깔아가며 뭔가 있어보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영화에서 건질만한 요소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려는 악마와 이를 저지하려는 사람들의 싸움은 예전 만만치 않게 후졌던 아놀드의 “엔드 오브 데이즈”와 판박이 설정이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액션과 어설픈 특수효과들은 참으로 한심합니다. 캐릭터 역시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에 찐따 친구라는 고전적 설정에서 한뼘도 더 나아간 부분이 없습니다. 여기에 수백년 살아온 악마라는 놈이 고작 팬티만 입고 주먹질만 한다는 가증스러운 싼티까지 가세합니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쓰레기입니다. 이 후진 영화가 무려 3개국 합작이라니..... 즉각 경계경보를 발령하며, 목격시 즉각 폐기 처분하시기를 권고합니다.

2012/01/08

UN-GO : 별점 2점

정말 오랜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끝까지 감상했습니다. 추리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생겨 보게 되었습니다.

사카구치 안고의 오래된 단편집을 원작으로, 배경을 근미래로 각색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총 11화 완결입니다. 단편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점차 세계관과 주인공들의 관계 및 정체를 밝혀가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됩니다.

근미래가 무대이긴 하지만, 원작이 워낙 오래된 작품이어서인지 사건 수사는 탐정들의 추리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공권력과 거대 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잘 각색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거대 자본이 인터넷 기업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터넷 기업의 수장이자 자본과 공권력을 모두 상징하는 인물인 카이쇼 린로쿠의 사상을 비교적 디테일하게 보여준 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분위기가 잘 묻어났습니다. 다만 원작을 읽어보지 못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네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에피소드의 길이가 고작 20여 분밖에 되지 않아 정교한 추리 구조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들이 추리물이라기에는 다소 얄팍한 편이었습니다. 20여 분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단편 에피소드 형태로 진행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긴 호흡의 구조로 바뀝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그려갔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길었던 마지막 3편의 에피소드가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탐정 신쥬로의 파트너 인과의 능력이 '그가 물어본 질문에 인간은 반드시 답을 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이런 능력이 있다면 용의자들에게 "너가 범인이냐?"라고 묻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요? 그나마도 초반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이야기 전개에 크게 필요 없는 판타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이 설정을 제외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RAI 카자모리 정도의 조력자였다면 훨씬 설득력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고 홍보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던져놓은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않고 끝맺었다는 점, 그리고 연출과 작화에서도 다소 저렴한 느낌이 들었던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세간에는 백전백패의 '패전 탐정'으로 알려진 주인공 신쥬로의 추리가 사실은 옳고, 명탐정으로 알려진 IT 거물이자 공권력의 흑막인 카이쇼 린로쿠의 추리가 틀린 것이라는 설정은 정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권력 집단의 조작으로 인해 카이쇼의 추리가 매번 옳은 것으로 발표된다는 설정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주요 반전 요소로 써먹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설정이었는데, 1화에서 너무 쉽게 소비해버린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 설정 하나 덕분에 감점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추리물로서는 기대 이하였던 만큼, 혹시 다음 시즌이 제작된다면 보다 추리 요소에 진지하게 접근해 주었으면 합니다.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화

"당신에게 있어 남편은 뭐야?"

파티장에서 살해당한 부도덕한 기업회장 사건.

캐릭터 소개와 세계관 등을 설명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카이쇼 리에 - 카이쇼 린로쿠 - 유우키 신쥬로라는 주요 탐정역들의 추리를 연달아 보여주며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탓에 추리가 그냥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구조인 탓에 추리적인 내용은 그닥이었습니다. 트릭도 고전적이라 신선함이 떨어졌고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본 설정 소개 이외의 가치는 별반 없는 에피소드였습니다.

2화

"정말 네번째 요나가히메는 누구야?"

아이돌 요나가히메의 프로듀서 살해사건을 다룬 에피소드. 요나가히메의 죽었다는 네번째 멤버에 얽힌 동기는 그럴싸했는데 범인이 딱히 변장까지 해 가면서 다른 멤버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은 것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래도 작품 설정과 이야기가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평작 수준은 되는 듯 싶네요.

3화

"사사 카자모리는 누구?"

사사가문의 당주 카자모리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나 7년 전 폭사한 전당주 사사 코마모리가 인공지능의 권위자였다는 것에서 카자모리의 정체가 쉽게 예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동기가 부실하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부유하지만 기괴한 콩가루 집안이라는 일본 본격물의 전통적 설정을 근미래 배경에 걸맞게 각색하고 나름의 트릭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좋았는데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어서 아쉽네요.

4화

"그 시체는 누구?"

3화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사사 카자모리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시체는 그럼 누구였는지를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인과의 질문이 효과가 없고 신쥬로의 추리에 의해 사건이 밝혀지는 비중이 높아집니다.

그래도 추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 없고(경찰 공조수사였다면 단박에 결판났겠죠), 인간의 욕망에 더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세계관과 믹스하여 보여주는 부분은 지나친 훈계조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이 에피소드부터 뭔가 미묘하게 변해서 그닥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5화

"어젯밤 너는 여기에 돌아왔었지. 거기서 뭘 봤지?"

'일륜의회'라는 우익단체(로 보이는) 리더 시마다 하쿠로우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시마다 하쿠로우의 아들 시마다 지로가 배우라는 것은 뭔가 고이즈미를 연상케도 하지만 내용은 풍자와는 별 관계는 일종의 보물찾기 이야기였습니다.

신쥬로의 최초 추리가 실패하고 인과와 신쥬로의 인연이 살짝 드러나며 인과의 다른 능력 (파워)이 드러나는 등 설정면에서 특이한 부분이 많이 보여지는 에피소드이긴 하나 추리적으로는 정말로 심각할 정도로 별 내용이 없더군요... 외려 카이쇼의 추리가 더 그럴듯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정의 이외에는 건질게 없었던 수준 이하의 에피소드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여전히 별로였고요.

6화

카이쇼의 옛친구 야지마가 신쥬로에게 카니쇼의 장서 중 한권인 책 속에서 발견된 암호에 대해 의뢰하는 내용으로 야지마가 아내의 잠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같은 일상계적인 요소가 괜찮았던 소품입니다. 야지마의 아내와 카이쇼간의 불륜을 암시하는 전개에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좋았고요. 마지막 카이쇼의 "진실은... 언제나 하나인 걸까" 라는 모 유명작품 명대사를 비트는 센스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인과의 기묘한 능력을 통한 활약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설득력 측면에서 점수를 줘야하는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이렇게 판타지스러운 설정 없이도 잘 만들 수 있었는데 대관절 왜 인과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7화

신쥬로가 6화 사건의 흑막인 야지마의 동료 죄수인 소설가를 면회하던 중 그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이야기를 듣고나서 전쟁 전 영화 촬영현장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이야기. 전쟁에 대한 나름의 시각은 있으나 여러 수수께끼같은 설정을 가지고 장난친 느낌만 드는 알 수 없는 에피소드였어요. 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르겠고 사건도, 추리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어요. 물론 다음 에피소드와 이어지기에 이 에피소드만 놓고 평가하기는 좀 무리이긴 합니다.

8화

전편 마지막에 벌어진 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감독 살인사건과 주요 용의자로 몰린 신쥬로가 추리를 통해 진범을 밝혀내는 이야기.

교도소라는 무대에서 모니터 가능한 수감자 번호를 이용하여 만든 트릭은 작품에 꽤 잘 어울렸고 마지막 추리쇼에서 결정적 단서로 내민 상자에 가린 범인에 대한 피해자의 대사도 제법 디테일이 살아있는 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전편에서 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설정들의 떡밥이 해결되지 못하고 범죄 자체가 우발적이기에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설가와 별천왕 (벳텐오우)의 관계라는 핵심 요소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요.

9화

카이쇼 린로쿠가 적들을 모아놓은 TV토론회에 참석했다가 폭발사고에 휘말리고 그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전편에 등장한 별천왕의 최면술을 주요 트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기억 디테일이 어긋나는 사소한 장치는 돋보이지만 완결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서 에피소드만의 평가는 어렵습니다.

10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데 숨겨야만 하는 것은?"

9화의 사건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카이쇼가 TV 청문회로 결백을 증명하려하나 인과에 의해 심복인 코야마 검사가 카이쇼의 비밀인 정보조작을 고백하여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후 자동차 폭발사고로 사망하게 된다는 이야기.

추리는 신쥬로가 별천왕의 존재를 알고 카이쇼의 죽음을 의심하는 것이 전부지만 간만에 등장한 인과의 활약(?)과 함께 주요 인물들의 극적인 행동 등에서 서스펜스가 제법 느껴지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의 진실에 만족하는 것은 거기서 사고를 멈추는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카이쇼 린로쿠가 대중이 쉽사리 빠지게 되는 음모론에 대해 설명하며 내뱉는 대사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친구 "하나의 진실" 이라는 말을 꽤 좋아하는 듯 싶군요.

11화

"너의 바람은 뭐지?"

9, 10화에서부터 이어져 카이쇼 린로쿠 죽음과 별천왕 존재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에피소드로 대망의 최종회입니다. 3화에 걸친 장편 에피소드답게 복선도 확실하고 단서도 풍부할 뿐 아니라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확실히 장편답게 디테일했어요. 무엇보다도 별천왕 능력에 대한 설명을 보여줘서 일종의 두뇌게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나 하야미가 별천왕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후루써클이라는 조직과 함께 어떻게 인과까지 조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등 시청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설득력도 함께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정통 추리물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부분을 좀 더 신경썼어야 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몇몇 설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요사이 유행인 듯 한데 별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혹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같지는 않네요.

2014/12/19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Guardians of the Galaxy (2014) - 제임스 건 : 별점 4점

1988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슬픔에 가득 차 병원에서 뛰쳐나간 피터는 우주선에 납치당했다. 그리고 26년 후, 라바저로 성장한 피터 퀼은 정체불명의 고가 오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오브를 팔기 위해 향한 잔다르에서 오브를 노리는 로난의 양딸 가모라, 피터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린 로켓과 그루트 컴비와 격투를 벌였고, 한꺼번에 체포된 그들은 우주 감옥으로 보내졌다.
감옥에서 만난 드랙스와 의기투합한 4인은 탈옥 후 오브를 고가에 팔기위해 구매자가 있는 노웨어(Knowhere)로 향했고, 콜렉터로부터 오브의 정체를 들었다. 오브는 생명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무기였다. 마침 로난이 노웨어로 쳐들어왔고, 결국 오브를 빼앗긴 일행은 라바저의 보스 욘두를 설득하여 오브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가는데...

드디어 봤습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히어로 시리즈 최신작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옛날 말로 "우주 활극"이라고 해도 어울릴 고전적이면서도 B급의 향취 가득한 작품인 덕분에 아주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우주해적 코브라"를 영화로 만들면 딱 이런 분위기일 것 같은데, 정말 저 같은 사람에게는 취향 직격하는 영화였어요.

장점이라면 우선, 2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전개가 좋습니다. "퍼스트 어벤져"처럼 "어벤져스"를 위한 떡밥으로 사용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러닝타임을 소비한 덕분입니다.

캐릭터들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캐릭터들을 매력적으로 살리고 있어요. 초인은 아니지만 몇몇 특수 장비와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스타로드 피터 퀼은 "육화의 용사"의 아들렛 등과 비슷하지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 덕분에 차별화되며, 입이 거친 터프가이 콤플렉스 덩어리 로켓 라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최강자 그루트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최고의 캐릭터들이었습니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보아왔던 츤데레 여전사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인 가모라와, 비중만큼의 강함과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드랙스는 조금 아쉽지만 나름대로 액션과 개그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요.

이들의 활약에 더불어 감독의 재능이 엿보이는 감각적인 연출, 곳곳에 숨어있는 잔혹하지만 웃기는 장면들과 깨알같은 명대사들도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특히 잔혹해 보이는 유머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필요도 없는 의족을 탈출에 쓸 거니 가져오라고 하는 식으로요. 이런 건 오롯이 감독의 능력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다른 마블 영화와는 다르게 대놓고 "만화입니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화면 효과와 아트워크를 선보이는데, 이 역시 완전히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굉장히 과하고 쨍해서 리얼리티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외려 영화와는 분위기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가 80년대 키드이기에 "Awesome Mix"를 온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영화에서 기억에 남을 정도로 언급된 케빈 베이컨의 "Footloose"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의외이긴 합니다. 어른의 사정이 있던 걸까요?

물론 좀 막나가는 영화답게 전개에 허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콜렉터의 시녀가 자살을 시도하지만 않았어도 콜렉터가 오브를 정상적으로 소유하게 되었을 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죠. 드랙스가 로난을 불렀어도 이미 피터 일행은 떠난 뒤였을 테고, 피터 퀼 일행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 외 가모라의 급작스러운 배신이나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욘두의 행동거지 등 전개에 급작스러운 것들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 즐겁고 화끈하다는 영화 본연의 가치에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즐거운 영화로, 모든 분들께 추천하기에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한데 저는 대호(大好)!였습니다. 저와 같은 취향, B급 정서 가득하신 분들께는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로난 앞에서 스타로드가 댄스 배틀을 벌이는 장면은 "Breathless"의 마지막 장면, 리차드 기어의 노래와 춤을 그대로 사용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확인 한 번 해 보시길.

2020/07/12

붉은 눈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붉은 눈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여덟 편의 단편과 작가가 수집한 네 편의 짤막한 실제 괴담이 수록된 공포 단편집입니다. 즐겨찾는 블로거이신 각시수련님이 올리신 미쓰다 신조 관련 글을 읽고 구해 읽었습니다. 여름에는 역시 공포 소설이지요.

미쓰다 신조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가 읽었던 작품들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모두 집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무섭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이어, 이런 집에 대한 사는게 정상적인 무언가일리가 없다는 식으로 긴장감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다른 장편과의 차이점이라면, 수록작들 대부분인 작가이자 편집자인 미쓰다 신조가 직접 수집했거나 경험했던 '괴담'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현실감이 더해져 무섭고 오싹하기는 한데,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소설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괴담으로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본연의 목적에는 충실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눈"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동급생이었던 마도 다카리가 사람에게 찾아와 죽음을 선사하는 붉은 눈을 지닌 무언가였다는 이야기.

마도 다카리가 이상하다는 묘사에서 시작하며, '나'와 함께 마도 다카리의 집을 찾아갔던 요네쿠라가 병으로 죽어버리고, '나'를 무당이었던 할머니가 지켜주었다는 결말까지 전개는 일직선입니다. 사악한 뭔가에 씌워져, 친구는 죽고 나는 할머니 덕분에 겨우 살아남는다가 이야기의 전부니까요. 마도 다카리의 정체라던가 퇴치 방법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반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읽기 쉽고, 전개도 깔끔하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더군요. 

고전적인 설정과 내용인 탓도 큽니다. 무언가에 씌워지면 죽는다는 설정부터 고전적이잖아요? 꿈을 통해 마도 다카리가 근처에 있다는걸 느끼게 되면, 그 사실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알리라는 결말은 "링"과 흡사하고요. 마도 다카리가 이상한 아이라는게 초반부터 드러나서 별다른 의외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 성격에는 충실하나 그렇게 무섭지 않고 새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경험했던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괴담 사진 작가" 

월간지 부편집장인 '나'는 특집 기사 때문에 사이언 마스든이라는 괴기 사진 작가 사진집을 출간한 출판사 트레빌을 찾았다. 그리고 업무 후 귀가 중에 트레빌에서 일하는 미즈키 요리코라는 여성을 만나 모쿠노 요시미라는 사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을 찾는데, 그 곳은 화마가 휩쓸고 간 흉가였다....

괴기 사진 작가가 온갖 괴기스러운 사진을 찍고 현상하다가, 그 현장에 있던 '무언가'를 집으로 데려온 꼴이 되어 결국 본인은 죽고, 여동생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광인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래전, 사진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기피했었습니다. 사진이 영혼을 빼 내어 간다는 소문때문에요. 간단한 조작으로 사람을 그대로 종이로 옮겨버리니 그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만약 이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피사체의 영혼과 사진이 찍히는 장소에 있는 '무언가'도 빼 내어 갈 수 있다는 뜻도 될 테고요. 이런 발상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설정도 신선했고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 비서를 자칭하는 여동생, 자택 가득한 모쿠노 요시미의 사진들 모두 괴기스러운 묘사로 가득차 있어서 흥미진진합니다. 모쿠노 요시미와 그 여동생의 정체가 드러나는 클라이막스까지의 전개도 깔끔해요. 

편집자 미쓰다 신조 시점의 경험담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엄청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 덕분이죠. 그 중에서도 '나'가 발견한 모쿠노 요시미는 등신대 사진을 잘라놓은 종이 인형에 불과했고, 여동생이 '나'를 이 곳으로 끌어들인 미즈키 요리코였다는게 드러나는 클라이막스 묘사는 백미입니다.
또 이 클라이막스 반전을 위해 앞 부분에 뿌려놓은 복선, 단서도 적절하고 공정합니다. 번역자가 공들여 이 단서를 설명하기 위해 이름 부분만 공들여 한자를 병기하여 표기한 탓에 이게 뭔가 의미가 있다는 티가 물씬 났던건 문제였지만요. 어차피 한국 독자가 해석하기는 무리였고요.

그런데 미즈키 요리코가 '나'를 이 집으로 끌어들여 뭘 어떻게 하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미즈키 요리코는 그 저택에서 어떻게 되는건지, '나'가 저택에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도 마찬가지고요. 속 시원하게 밝혀진게 전무한 탓에 완성된 이야기로는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공포만큼은 확실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영상화에 적합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미쓰다 신조 시점의 현재와, 괴기 심령 사진을 찍다가 데려온 무언가가 여동생에게 씌워져 파멸하는 모쿠노 요시미 시점을 오가며 모쿠노 요시미에게 씌워진 무언가가 현재, 과거에서 동시에 '개화'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로 만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내려다 보는 집"

어린 시절, 교차로 벼랑 위쪽에 지어져 '나'를 내려다 보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던 집이 있었다. 흉가는 아니었지만, 지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아무도 사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집 때문에 기묘한 느낌을 받던 나와 친구 K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조사해 볼 계획을 세운다. 마침 함께 있었던 K의 어린 동생과 함께 4~5명의 아이들은 집 수색에 나서는데...

작가 미쓰다 신조로 보이는 '나'의 어린 시절 있었던 추억 괴담으로 "괴담 사진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가 본인이 경험했었던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식의 묘사가 탁월하며,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내려다 보는 집'에서 K의 동생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만나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리 구슬을 받고 놀았다는 상황도 상당히 공포스럽고요.

그러나 '공포'를 전해줄만한 실체는 친구 K의 동생의 이상한 행동과 증언 뿐이며, '내려다 보는 집'에 대해서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빍혀지는게 없는 결말은 많이 답답합니다. 이야기의 현실감을 유지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기묘한 이웃집을 무단 침입한 아이들 이야기 정도니까요. 덕분에 현실감넘친다는 장점도 있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한밤중의 전화"

공포 소설가인 '나'에게 새벽 2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 시절 친구가 5년전 취한 채로 찾아갔던 심령 스폿에 방문해 있다는 전화였다...

친구인줄 알고 긴 통화를 이어가는데, 알고보니 친구가 아니고 이형의 존재였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건 고전 괴담 '너는 내가 아직 니 엄마로 보이니?'와 다를게 없지요.

하지만 심령 스폿인 묘지에 있는 괴상한 집에 대한 묘사 - 코 앞에 늪이 있는, 연한 빨간색에 집 안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온갖 불쾌한 쓰레기가 가득한, 창무하나 없으며 대문의 위치도 기묘한, 기분 나쁜 그림이 붙어있고 안 쪽에서 회반죽이 칠해져 입구가 봉해진 - 는 아주 빼어납니다. 전작들인 "화가", "기관"는 물론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모두 마찬가지인데, 미쓰다 신조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불현듯, 미쓰다 신조가 개포동 은마 아파트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자체가 바로 괴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단지 무서운 공간 묘사에 그치지 않고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니까.' "다 왔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섬찟합니다. 뻔하지만 이야기로서도 잘 완결되기는 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

'나', 즉 미쓰다 신조는 S 지방의 어느 온천 마을에 머무르던 중, 온천 여관 뒷 쪽에 있는 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산책을 나섰다. 그 길의 끝에서 이런저런 정체 불명의 폐가와 폐허를 목격하고 돌아온 뒤, 자정이 넘은 시간 노천탕을 찾았다가 낯선 남자를 만났다. 그는 여관 선선대 부인의 오빠라면서, 미쓰다 신조에게 과거 '재나방 남자'라는 살인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재나방 남자 사건은 가즈오라는 소년이 기묘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낯선 남자는 당시 용의자로 몰렸지만 곧바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곤도 순경의 증언 덕분에요. 그는 가즈오와 헤어진 5분 뒤, 곤도 순경과 스쳐 지나갔는데 곤도 순경은 시체가 발견된 연못 옆에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연못을 지나 반대쪽 길로 향하던 순경은 두부 장수 오누키와 마주쳤고, 바로 뒤 오누키가 시체를 발견했고요. 그래서 낯선 남자는 범인이 될 수 없다는게 증명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게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관 뒤 오솔길에서 발견한 폐허와 박쥐 남자, 재나방 남자라는 기묘한 살인귀 이야기가 덧씌우져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인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대담하며 그럴듯합니다. 범인은 곤도 순경이거나, 낯선 남자일 것이라는 추리인데, 낯선 남자가 범인일 경우 가즈오의 시체를 감춘 트릭을 파헤치는게 특히 인상적이에요. 낯선 남자는 사건 당시가 절분이라 가지고 있던 콩을 곤도 순경이 나타나기 직전 순간적으로 시체 위에 뿌린겁니다. 비둘기를 불러모아 시체를 숨기 위해서라는데, 주어진 정보 제공도 공정한 편이며, 실현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현실감있게 잘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담으로서의 역할도 그리 빠지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낯선 남자는 살인귀 재나방 남자로 오래전 죽었으며, 지금도 가끔 노천탕에 출몰한다는 마무리는 뻔하지만 확실해서 이야기 완성도 측면으로는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공포와 추리 양쪽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뒷골목의 상가"

미쓰다 신조는 E씨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백사당" 안에 녹여내려다가, 무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오싹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는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쓰다 신조는 원고 속 E씨 체험담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뒤 취재원이었단 야카게 씨가 E씨가 죽었다며, 괴담에 대한 섬뜩한 원고를 보내오는데...

도입부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E씨 시점의, E씨가 겪었다는 괴담입니다. E씨가 어린 시절 야반도주하여 숨어 살게 된 교토 '뒷골목' 집에서 공포스러운 존재와 마주한다는 내용이죠.

어떤 거리, 공간이 특정 시간이나 특정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어 그 곳의 이형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에서도 보아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는지, 이형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형이 노리는게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공포스러운 존재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공포의 핵심도 E씨가 '지이이이이잇.....' 소리를 내는 소름끼치는 여자에게 쫓기는 과정이고요.

하지만 이 여자가 E씨의 뒤를 쫓고, 집 안으로 숨어들어오는 과정의 묘사는 가히 일품이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 드나들 틈새를 지나 뒤로 나타나서 뒷쪽 창틀을 움켜쥐는 장면 묘사는 특히 압권이었습니다.
E씨는 아직 그 곳에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E씨 원고의 결말은 E씨가 그 곳에서 이사를 갔다는 모순 가득한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할 바에야, 모든 걸 이렇게 모호하게 풀어내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네요.
괴담으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맞거울의 지옥"

미쓰다 신조가 젊은 시절 교토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때, 도쿄 출장 중 캡슐 호텔 화장실에서 맞거울을 보며 에도가와 란포의 "거울 지옥"을 떠올리다가 다른 손님을 만났다. 그도 괴담을 좋아해서 의기투합한 미쓰다 신조는 함께 호텔 로비에서 캔 맥주를 나누며 괴담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그 남자의 동생과 맞거울에 얽힌 괴담을 듣게 되는데...

거울과 거울 사이, 맞거울의 무한 공간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작품. 작품은 그다지 의외성이 없지만 겹쳐진 거울 속 어딘가에 있는 귀신이 거울을 건너뛰면서 나이를 먹고, 결국 나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나타난다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근사합니다. 소설로도 멋지지만 영상화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클라이막스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 

사람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상, 즉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사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죽음 그 자체로 보였기에 슌이치로는 쫓아내지 않았다. 이누마는 자기처럼 괴담을 좋아하는 친구 가이즈카, 요코가와, 이와세와 함께 한 밤중에 인터넷 상에 유명한 오드아이 소녀가 얽힌 괴담이 있는 폐가를 찾았다가, 친구들이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 단편집 표제작이자 첫 번째 작품인 "붉은 눈"의 마도 다카리와 그녀의 집이 또 다시 등장하는 작품. 그리고 친구들과 무모한 심령 스폿 탐험을 나선다는 설정은 "한밤중의 전화"와 같습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사상학 탐정 슌이치로이고, 마도 다카리가 거주하는 흉가에 대한 오싹한 묘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가히 미쓰다 신조 월드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집대성 작품답게 오싹한 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무너져가는 집을 탐험하는 과정부터 오싹해요. 불당 안의 불상 눈이 파내어져 있었다는 묘사가 특히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도 차로 돌아가던 4명에게 닥친 공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폐가 방문을 거절하고 차 안에 남아있던 이와세가 "그 여자애가 왔다. 계속 차에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들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지요.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친구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는 직후 묘사도 오싹합니다. 대체 무엇을 본 걸까요?

본인 경험 괴담이 아니라 소설적인 구성을 갖추어서 그런지 기승전결 구조도 좋습니다. 슌이치로를 찾아온 이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결말이 특히 좋아요. 이누마에게 사상이 보이지 않은 이유, 슌이치로의 고양이 보쿠가 이누마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니까요.

중반부의 오싹한 장소를 뒤지는 전개는 담력 시험 수준이라 특별한건 없고, 마도 다카리의 정체와 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죽게 만드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건 여전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8/08/04

공정드래곤즈 1~3 - 쿠와바라 타쿠 : 별점 2점

[고화질] 공정 드래곤즈 03 - 4점
쿠와바라 타쿠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입니다. 백종원 씨를 비롯, 여러 셰프들이 스타덤에 오른지 오래이며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는 온갖 예능들도 넘쳐나고 있고, 무엇보다도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 스타가 된 사람들마저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만화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요리 만화는 등장한지 오래되긴 했습니다. 빵이나 카레, 중화요리, 초밥, 도시락, 와인, 술 등 요리사가 주인공이며 특정 요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만화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주로 주인공의 직업과 소재가 특이한 배틀물 - 고전 "맛의 달인"의 '완벽과 최고'의 대결처럼 - 에 머무른 작품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여러가지 다양한 장르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식과 요리를 소소한 일상, 인간 드라마와 결합시키거나, 평범한 음식을 실존하는 평범한 식당에서 평범하게 먹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전개하는 '음식을 소재로 한 소소한 일상계'입니다. 앞서는 "심야 식당", 그리고 뒤에는 "고독한 미식가"가 대표적인 예이며, 이외에도 영상화 된 작품만 해도 "하나 씨의 간단 요리", "와카코와 술",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 "음식의 군사" 등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인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두 번째로 현재 음식 만화에서 작지만 확실한 인기를 몰고 온 분야는, 판타지 세계관과 음식 소재를 결합한 '이세계 미식물'입니다. 쿠이 료코가 "던전 밥" 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장르는 "던전밥"처럼 이세계의 몬스터를 재료로 친숙한 음식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이세계 주점 노부" 등 처럼 현대(그 중에서도 일본) 요리를 그러한 음식을 잘 모르는 이세계 주민에게 소개한다던가, 아예 현대 일본인이 이세계로 이동하여 자신의 요리 실력으로 현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맛없는 밥 엘프와 유목생활", "이세계에서 카페를 개점했습니다" 등으로 아이디어가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대 요리사가 전국시대로 타임 슬립한다는 "노부나가의 셰프" 와 같은 이야기도 유사 장르로 포함시킬 수 있을테고요.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 만화는 이러한 '이세계 미식물' 장르에 속한 작품입니다. 그 중에서도 원조 "던전 밥" 의 특징을 많이 따릅니다. 용을 사냥하는 용 사냥꾼들이 용을 재료로 이런저런 친숙한 음식들을 만든다는 점에서요. 이세계 전문직 종사자의 평범한 식단을 테마로 했다는 점에서는 '일상계 음식 만화'의 한 범주로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아류작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포룡선 퀸자자호를 타고 용을 사냥하는 사람들과 사냥 과정에 대한 디테일 - 용이라고 불리우긴 하지만 크툴루 신화 속 크리쳐가 연상되는 "용", 고전적인 비행선인데 용을 잡기 위한 다양한 장비(작살총, 봄랜스, 창과 이런저런 와이어, 후크들, 오토자이로)를 갖춘 퀸자자호, 포룡 과정에서 하늘에 떠 있는 퀸자자호 내부에서의 식사와 빨래와 같은 생활 묘사 등등등 - 이 펜터치 중심의 고전적이면서도 빼어난 작화로 그려져 있어서 큰 재미를 선사해 주는 덕분입니다.

그런데 1권은 용 사냥꾼이 용을 사냥하고 그 부산물을 조리해 먹는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2, 3 권부터는 세계관이 긴 호흡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나가더군요. 단편으로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2권은 용의 거래로 먹고 사는 마을 '퀀 시'에 기항한 퀸자자호가 마을에서 깨어나 폭주하는 용을 사냥하는 이야기에 승무원 지로의 짤막한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지며, 3권은 사냥 중 지상으로 떨어진 타키타가 지상의 사냥꾼에게 구조된 후, 자신을 따르게 된 새끼 용을 무리에게 돌려보내 준다는, 한 권에 한 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구성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화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세계 미식물' 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일상계 이세계 사냥 판타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야기도 딱히 새롭거나 재미있지도 못합니다. 전형적인 설정의 전형적인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용잡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어우러지는 2권은 조금 낫지만, 3권은 전형적인 나우시카류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고기에 푹 빠진 미카는 "던전밥"의 라이오스와 유사한 등, 퀸 자자호의 승무원들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뻔한 캐릭터라는 점이 더해져 식상해도 너무나 식상할 따름입니다.
용 고기가 무슨 색깔이며 구울 때는 어떻고, 날로 먹으면 어떤지 등 기본적인 특성조차 소개되지 않고 이런저런 요리를 선보인다던가, 뒤로 가면 갈 수록 특별한 요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전개를 보면 판타지 구루메 만화를 그려달라는 편집부의 요구를 따르는 척 하면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그려나가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뭐 이런 류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많을테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권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읽기는 했는데, 다음 권을 읽게 될 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러고보면 저와 같은 이세계 미식물 팬을 위해서 지브리에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를 활용하여 비슷한 컨텐츠를 내 놓으면 좋을 것 같네요. 나우시카 세계관에서 오무를 가지고 만드는 요리 등이 등장하면 참 재미있지 않을까요? 서둘러라 지브리!

2012/06/13

변호 측 증인 - 고이즈미 기미코 / 권영주 : 별점 3점

변호 측 증인 - 6점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검은숲

고아에 스트립댄서 출신인 나미코는 재벌가의 방탕한 외아들 야시마 스기히코와 결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의 시아버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한 남편 스기히코에게 아내 나미코는 사건의 진상을 깨우쳤다고 공언한 뒤, 옛 동료가 소개한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이 작품이 데뷰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잠깐 조사해봤더니 첫 남편이 "이쿠시마 지로"였다는 것, 만취하여 사고사로 죽었다는 것 등 작가의 일대기도 흥미롭더군요.

250여페이지라는 짤막한 길이도 적당하고 읽는 맛도 잘 살아있는 소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고전적"인 스타일이라는 점입니다. 1960년대에 발표된 작품인데 스타일은 그보다 더 이전의, 고전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괴퍅한 노인의 죽음과 난봉꾼 아들의 환영받지 못한 결혼의 조합이라는 설정부터가 고전 본격물스럽지요. 수많은 작품에서 익히 보아왔던 설정이기도 하고요. 거기에 더해 감옥 안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은 "처형 6일전"이나 "환상의 여인"이 떠오르며, 나미코의 시점과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한 전개는 코넬 울리치의 향기가 짙게 느껴집니다.
묘사도 그러합니다. 벽난로, 바 스툴, 프랑스식 창문, 테라스옆 골담초 덤불... 묘사 만으로도 영국 시골 마을 별장이 떠오를 정도거든요.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꾸면 고전 황금기 시대 작품이라고 해도 속아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고전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전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 아니라 주인공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반전을 그린, 서술 트릭의 원조격 작품이라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반드시 속는다!"라는 말 하나만큼은 적절하다 생각될만큼 트릭의 완성도도 높은 편이에요.

그러나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둘러싼 수많은 절찬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쓰여진 시대를 감안한다면' 걸작이라는 평가인 듯 싶고, 저 역시 이 평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현재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반전만 해도 뭔가 한방 모아서 터트리기는 하는데, 폭발력이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충격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심심하고, 기대했던 법정 장면에서의 드라마가 약한 탓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완성도는 높지만 지금 읽기에는 딱히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도 아닌데다가, 작중 변호사의 입을 통해 밝혀지듯 경찰의 부실한 수사도 사건을 키우는데 한몫 했다는 점에서 딱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래도 후대에 평가받을 만한 점은 분명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꼭 시대를 초월할 필요는 없죠. 그 나름대로 즐길거리만 있으면 되니까요. 책도 이쁘게 잘 나온 편이라 마음에 드네요. 추리소설 입문자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06/01/14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아리스가와 아리스 : 별점 2점

ロシア紅茶の謎 (講談社文庫) (文庫)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講談社

범죄 심리학 조교수이자, 실제 사건에서의 활약으로 "임상 범죄 학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천재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 시리즈 단편집. 아리스가와 아리스(저자)의 첫번째 단편집이기도 합니다. 그의 "국명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책에는 전부 6개의 단편과 작가 해설 등이 담겨있습니다.
일본 여행 가서 구입한 책으로 장편이 아니라 단편집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번역 한번 해 볼까 하고 삽질하느라 걸린 시간도 있어서 이래저래 거진 한달이 걸렸네요.... 2006년 들어서는 처음으로 완독한 책인 것 같습니다. (만화책은 수도없이 읽었지만서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하였습니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본격 작가라서 굉장히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이유는 작품 대부분이 "트릭을 위한" 이야기들이라 트릭에 매몰된 듯한 느낌인 탓입니다. 트릭도 만들기 쉬운 암호 미스테리가 많아서 별로였고요. 표제작이며 작가 스스로 마음에 든다는, 이른바 국명 시리즈인 "러시아 홍차의 비밀"이 제일 어처구니 없고 수준이하였다는 점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또한 탐정역의 히무라 히데오의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단편이라는 특성상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겠지만, 잘난척 하는 천재라는 고전적 스테레오 타입 그대로의 인물이라 새로운 면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신본격답게 문제-해결이 명확하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은 좋았습니다. 용의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단서에 대한 범위를 좁혀줌으로써 이해를 돕는 추리만화 타입의 전개도 쉽게 읽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그냥저냥한 평작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 자체는 제법 괜찮은게 있고, 뛰어난 작품도 분명있기는 합니다. 위에 말한 단점은 장편을 보면 많이 상쇄될 것도 같고요. 다음번에는 장편에 한번 도전해 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한 3개월은 걸리겠지만....

개인적인 베스트는 "동물원의 암호"와 "팔각형의 함정" 입니다.

작품별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동물원의 암호 :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육사. 그는 죽기 직전 암호로 된 쪽지를 남긴다. 그 암호는 퍼즐광이었던 피해자가 공들여 만든 것으로 암호를 해독하면 범인을 알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주인공 컴비는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해독에 도전하는데...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자체가 무척 괜찮습니다. 기발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그런 암호거든요. 일본 거주자가 아니면 풀기 힘들다는 약점은 있지만 말이죠. 내용 전개도 명쾌하고 논리적이라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 중 하나였습니다.

2. 지붕 밑의 산보자 :
하숙집 주인이 살해되는데 경찰 조사로 발견한 그의 일기에서 그가 하숙집 지붕을 밤에 돌아다니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는 사실과 하숙인들 중 인근 연쇄 강간마로 짐작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런데 하숙인들을 암호화된 이니셜로 표기하고 있어서 정체를 모르는 상태. 연쇄 강간마이자 하숙집 주인 살인 사건의 범인인 그 하숙인을 찾기 위해 두 컴비가 나선다.
역시 암호 트릭입니다. 이 작품은 암호 자체는 무척 간단한 편이라 정교한 맛은 좀 없더군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의 동명 단편을 응용한 센스와 마지막의 살짝 등장하는 반전은 무척 좋았다 생각됩니다.

3. 붉은 도처 (稻妻) :
한 여인이 투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무라 히데오의 제자인 학생이 목격자로 나서 그 여자가 방에서 밀려 떨어졌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여자의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
밀실 트릭물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정교함은 떨어지는 편이고 작품에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너무 적어서 이상할 정도였어요.

4, 룬의 가르침 :
외국인 기자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요청받아 찾아간 히무라 히데오. 그는 피해자가 손에 쥐고 죽은 "룬 문자판" 4개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주력한다.
이 책의 단편들 중에서 전개가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 히데오의 방에 놀러간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책상위에 놓여진 룬 문자판을 보게 되자 히무라 히데오가 그것에 관련된 사건을 들려주는 셜록 홈즈물 스타일의 전개로 이루어지거든요. 트릭은 역시나 일본 독자들만이 풀 수 있는 암호인데 평이하기도 하지만 좀 억지성이 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룬 문자"라는 요소가 왜 들어갔나 싶게 쌩뚱맞아서 의아했는데 책 뒤의 작가 후기를 보니 "고대문자"에 관련된 트릭 추리물을 써 달라는 의뢰의 결과물이더군요. 뭐 그냥저냥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5.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인기 작사가 독살 살인 사건에 참여한 컴비. 아무도 그의 찻잔에 독을 주입할 기회가 없었던 상황에서 사건의 해결에 도전한다.
표제작이자 국명 시리즈라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트릭도 억지에다가 범인이 왜 그런 트릭을 썼는지에 대한 타당성 자체가 불분명 합니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상황" 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제일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는데.... 본격물의 정도를 벗어나 너무 트릭에만 집착한 씁쓸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6. 팔각형의 함정 :
아리스가와 아리스 원안의 추리극을 상연하는 연극 예행 연습에 초대된 두 컴비는 실제로 살인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게 실제로 있군요! 만화에서만 보던 "추리극" 공연과 관객이 함께 하는 범인 맞추기 이벤트라는 연극을 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작가)가 실제로 원안을 제공했던 연극 각본의 소설화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도 본격물에 걸맞는 깔끔하고 완벽한 구성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트릭도 아주 약간을 제외한다면 수긍할 만 했고 범인이 왜 그렇게 트릭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합당하며 범인을 알게 되는 단서 역시 이치에 맞거든요. 일종의 문제편 격인 서술 뒤에 "독자에게의 도전장" 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으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아요.

2010/11/17

심야 플러스 원 - 개빈 라이얼 / 최운권 : 별점 3점

심야 플러스 원 - 6점
개빈 라이얼 지음, 최운권 옮김/해문출판사

2차 대전 당시 '칸톤'이라는 암호명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도와 활약했었던 영국인 루이스 케인은 옛 동료였던 변호사 멜랑의 의뢰를 받았다. 대부호 마간하르트를 리히텐슈타인까지 호송해 달라는 의뢰였다. 그러나 보디가드로 고용된 케인과 유럽 No.3의 총잡이 하베이, 마간하르트와 그의 비서 재먼이 떠나는 여정은 단순한 호송이 아니었다. 곧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킬러들이 등장하고 경찰의 추적도 시작되는데...

개빈 라이얼의 1급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입니다. '호송' 이라는 특이한 주제도 좋지만,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주인공이자 호송의 중심 인물 루이스 케인이 과거 레지스탕스 때의 다양한 경험과 인맥을 살려 난관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정말로 생생한 덕분입니다. 알콜 중독과 싸우는 총잡이 하베이의 캐릭터 역시 묵직한 매력을 전해주고요.
또한 자신의 머리와 몸에 의지하여 상대방 킬러들과 두뇌 싸움을 벌이며 위기를 벗어나가는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도 대단합니다. 고전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이라서 고전 명작의 향취가 물씬 납니다.

험난한 호송 과정의 묘사 뿐인 단순한 모험 서스펜스 스릴러에 머물지 않는다는 장점도 큽니다. 리히텐슈타인으로 향하는 마간하르트의 '목적'과 그에 따르는 반전이 여러 개의 복선을 통하여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정교함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손에 땀을 쥐면서 읽었습니다.
그 외의 묘사들, 특히 프랑스에서 리히텐슈타인까지 유럽 대륙을 관통하는 여정의 디테일 역시 재미를 더해 주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범인의 계획이 허술하다는 약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무려 1천만파운드라는 돈이 걸려있는데(1파운드 = 2,000원으로 계산하면 무려 2백억원!), 마간하르트를 죽이기 위해 벌이는 작전이 너무 쪼잔하고 스케일이 작기 때문입니다. 호송의 중간 과정에서 케인 일행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준 것도 의문이고요. 마지막으로, 마간하르트가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범인의 계획은 실패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합법적으로 주주 모임을 연기할 수 있었을테니) 운에 기댄 측면이 많다는건 분명 단점이겠지요.

하지만 고전적이고 묵직한 스릴러의 참맛을 잘 전해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11/01

고행의 순례자 - 엘리스 피터스 / 김훈 : 별점 2점

고행의 순례자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북하우스

성 위니프레드의 유골을 시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겨온 지 4년이 지난 1141년 5월, 유골 이장을 기념하는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순례자들이 수도원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 거대한 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맨발로 여행하는 청년 시어렌과 동행인 매튜는 캐드펠 수사의 주의를 끌었다. 한편 왕후와 왕의 권력 투쟁 와중에 한 젊은 기사가 살해당한 사건 소식이 들려왔고, 기사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왕후의 사절이 수도원에 방문했다. 

드디어 축제의 날, 다리가 불구였던 소년 룬의 다리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며 혼란스럽던 와중에, 시어렌과 매튜가 수도원을 떠나며 이윽고 그들의 여정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데....

캐드펠 시리즈 10번째 작품. 제가 역사물도 좋아하고 추리 소설도 좋아해서 역사 추리물은 발간되면 보통 사서 보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명성에 비하면 그닥 추리물로서의 재미는 없어서 그간 제대로 구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리뷰를 올렸던 "수도사의 두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던 중 헌책방 순례하다가 싼 맛에 구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추리적으로 너무 별로네요. 원래 정통 추리물 성격이 옅은 시리즈이기는 하지만 제가 본 시리즈 중에서도 이 작품은 가장 추리물 같지 않았습니다. 고행에 대한 비밀과 수도원의 순례자를 윈체스터의 살인사건과 연결짓는 전개는 괜찮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의 비중에 비해 "추리"로서의 비중은 굉장히 작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시어렌의 고행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이 단순히 "엿들은"것에 의한 증언으로 밝혀지는 장면은 더더욱 이 작품을 추리물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시리즈 내내 반복되어 왔던 캐릭터들을 재탕한 듯 모든 인물들이 굉장히 평면적이고 단순합니다. 역사적인 부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지루했고요. 영국에서야 굉장히 잘 알려진 사건일 수 있겠지만 영국 역사에 별 관심없는 대한민국의 일개 독자인 저는 전혀 모르는 사건이니 당연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전체적으로 캐드펠 시리즈 중에서도 후반부에 속하는 작품인데. 뒤로 갈수록 추리적인 성격이 약해지는 것 같네요. 매력적인 캐릭터임에는 분명해서 보다 고전적이면서도 지적인 추리를 선보일 수도 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2010/06/29

예지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억관 : 별점 3점

예지몽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재인

"용의자 X의 헌신", "탐정 갈릴레오"의 물리학자 갈릴레오 유가와 - 형사 구사나기 컴비가 활약하는 단편집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일반적인 본격 추리물에 가까운 정통파 작품이었죠. 그러나 단편집인 "탐정 갈릴레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괴현상"을 이야기의 핵심 소재로 등장시켜 그 수수께끼를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에피소드가 중심인, 그러니까 괴현상에 이어지는 과학적인 해설이 핵심인 작품집이라 본격 추리적인 맛은 좀 덜했습니다. 과학적 해설도 일상적인 것이 아닌 너무 전문적인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잘 와 닿지도 않았고요.

이 책은 단편집이라 그런지 "탐정 갈릴레오"의 성격에 좀 더 가깝긴 합니다. 그러나 전편의 단점을 확실히 보완했더군요. 과학적인 설명이 지나치지 않고 상식선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특별히 심오한 이론이나 소재가 등장하지 않아 내용이 현실적이었거든요. 괴현상도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상황들로 채워져 있고요. 또한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말랑말랑한 연애감정 묘사가 전무하다는 것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전편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작품마다 편차가 조금 있기는 한데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영을 보다>를 꼽고 싶네요. 별점은 평균 2.7점인데 반올림하여 3점입니다.

꿈에서 본 소녀
괴기현상 : 일종의 예언
사건 : 모리사카 레이미라는 이름에 얽매여 17년동안 그 이름의 소녀와 결혼할 것을 믿고 살던 청년 사카기가 실존하는 모리사카 레이미라는 여고생 집에 침입하려던 사건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을 믿던 청년에 대한 이야기로 유가와의 물리학적 지식은 사건해결과는 무관한 작품입니다. 좀 아쉬운 것이 "모라시카 레이미"라는 이름이 굉장히 드문 이름이라는 배경 설명이 보강되었어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안다고 해도 그 이름이 흔하다면 트릭이고 뭐고 필요없는 거니까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전제조건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면 사카기가 그녀에 대한 꿈을 어떻게 꿀 수 있었는지에 대한 추리는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어서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단서의 제공도 공정한 편이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영을 보다
괴기현상 : 유체이탈
사건 : 기요미라는 호스테스가 살해되던 순간에 다른 곳에 나타난 "영"으로 나타난 사건

역시나 물리학은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영이라는 존재를 현실의 살인사건으로 끌어와 해결하는 유가와의 추리가 아주 일품인 작품입니다. 특히나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실패한 트릭"이 꼬여서 빚어낸 상황이라는 것이었어요. 그 외의 CD플레이어의 잡음과 같은 사소한 단서를 취합하는 능력 역시 고전적이라 좋았습니다. 그야말로 고전 황금기 시절의 단편의 맛이 느껴질 정도로 마음에 쏙 들더군요. 별점은 4점입니다.

떠드는 영혼
괴기현상 : 폴터가이스트 현상
사건 : 실종자를 찾기 위해 용의자의 집에 침입한 구사나기가 폴터가이스트 현상과 맞부닥치게 된다.

사건이 너무 간단해서 추리의 여지가 없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에 대한 진상규명이 더욱 볼거리였어야 하는데 과학적이기는 하나 재미는 없는 편이었어요. 공진현상이 그렇게 대단하게 일어난다는 것도 크게 와 닿지 않았고 말이죠. 또한 상식적이라면 시체를 파묻은 뒤 괴현상이 일어난 것을 알았을테고, 이 괴현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시체를 다른 곳에 버리고 원상복구 시키지 않았을까요?
이 단편집의 워스트 단편으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단 이야기 앞부분에서 시체를 숨겨야 한다는 유카와의 의견은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니 갱들이 희생자들 다리에 콘크리트 신발을 신겨 물속에 버리는 것이겠죠.

그녀의 알리바이
괴기현상 : 도깨비불
사건 : 빚에 쪼들리던 영세공장 사장이 교살된 사체로 발견됨

이 작품은 TV 드라마 "갈릴레오"에서 이미 봤던 작품이더군요. 주요 트릭과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도구를 지나칠 정도로 사용하며 결국 공범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러나 드라마 버젼과 결말이 다르다는 점이 특이했어요. 드라마쪽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각색되어 있는데, 힌트를 드리자면 현실에서는 해피엔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지몽
괴기현상 : 예지몽
사건 : 한 여성의 자살이 목격되는데 그녀의 죽음 이틀전 똑같은 꿈을 꿨다는 소녀가 등장한다!

예지몽이 예지몽이 아닌 현실이었을 것이다는 가정하에 입각하여 추리가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제 트릭이 전문가만 알 수 있는 특정 소재를 이용한 복잡한 장치트릭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전기장치 등에 대한 설명도 너무 대충 넘어가고 있고요. 때문에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입니다.

하지만 워낙에 상황이 재미있고 독특할 뿐 아니라 마지막의 예지몽 소녀 도모카의 다른 예지몽이라는 서늘한 결말은 인상적이었기에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2009/05/02

처형 6일전 - 조너슨 라티머 / 문영호 : 별점 3점

처형 6일전 - 6점
조너슨 라티머 지음, 문영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로버트 웨스틀랜드는 이웃 사형수의 자살소동을 보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친 뒤, 자신의 돈을 이용하여 단 일주일 남은 사형 집행때까지 진범을 잡고자 한다. 유일한 단서는 그의 무죄를 증언해 줄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편지 뿐이었다. 웨스틀랜드는 유능한 변호사 핑클슈타인, 사립탐정 윌리엄 크레인과 그의 조수 윌리엄즈를 고용한 뒤, 자신의 지인과 친구들을 총 동원하여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하는데 남은 시간은 단 6일!

조너선 (조나단?) 라티머의 대표작이자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명편으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멋진 고전입니다. 어렸을 때 아동판으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이번에 알라딘에서 동서 추리문고 할인 행사를 하길래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새 야구만 보는 것 같아서 연휴도 되고 했기에 맘잡고 한번에 읽고 포스팅합니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위의 줄거리처럼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많이 연상케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두 작품을 착각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환상의 여인"은 정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단 한명의 목격자를 찾기 위한 고난의 과정을 강렬한 서스펜스와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서스펜스보다는 하드보일드적인 탐정의 수사과정과 주인공이 뒤집어 쓴 누명을 파헤치는 추리 부분이 더 돋보이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에 가깝다는 명확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맹점을 찌르는 밀실 트릭, 그리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나무랄데 없는 수준이며, 진범을 밝히는 과정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 중요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는 등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거리가 충분합니다. 트릭이나 구성이 지금 읽으면 굉장히 쉬운 발상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도록 구성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반전과 진범의 정체도 납득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타당한 결말이라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중반 이후부터 서스펜스가 확 죽긴 합니다. 추리물로 돌변하면서 주인공이 탐정 윌리엄 크레인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리묘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거든요.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체적인 균형 면에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뭔가 더 끄집어낼게 있어 보였던 옆방 사형수들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것도 좀 애매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윌리엄 크레인이라는 캐릭터가 작중에서 하드보일드 탐정다운 간지도 없고 일체의 호감도 느껴지지 않아 몰입하기 어려운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하드보일드 치고는 두뇌가 결합된 행동파 탐정이라는 독특한 면은 있지만 지나치게 본능 - 술과 여자 - 에 탐닉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성실해 보였거든요. 이런 친구한테 목숨을 내 맡긴 웨스틀랜드가 불쌍해질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고전적 하드보일드 스릴러물이면서도 "정통 추리"의 요소를 잘 도입한 이색적인 작품이라 지금 읽어도 그 매력이 충분한 고전명작이라 생각합니다. 걸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추리와 하드보일드 모두를 좋아하신다면 추천할만한 작품으로 제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웨스틀랜드는 살아나긴 했어도 잃은게 너무 많아 보이네요...

덧붙이자면, 솔직히 별점은 3점 이상을 줄 수 있는 작품인데 번역이 너무 별로라서 도저히 3점이상은 못 주겠습니다.... 동서 추리문고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한데 몰입해서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어요. 대사의 구분도 이상해서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한 장황한 묘사를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직역으로 표현하는 등 읽다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였거든요. 예를 들자면 '해걸음은 점점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환등기 앞에서 누군가가 모슬린을 두 겹 네 겹을 차곡차곡 접어서 포개 놓아가는 듯 했다' 라는 문장을 들 수 있겠네요. 뒷부분이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불필요한 묘사이기도 하고요. 그냥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도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이런 문장이 전편에 난무합니다...

2007/01/13

핑거스미스 (Finger Smith) - 세라 워터스 / 최용준 : 별점 2점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장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입스씨와 석스비 부인에 의해 양육된 사영수의 딸 수전 트린더는 입스씨와 친분이 있는 건달 "젠틀먼" 리버스의 계획, 즉 부유하지만 삼촌에게 얽매여 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를 꼬셔 결혼한 뒤 유산을 가로챈다는 계획에 협조하기 위해 모드라는 처녀의 하녀로 임시 고용되어 "브라이어"라는 저택으로 향한다.
음란서생 삼촌에게 기계처럼 양육되며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모드와 친분을 쌓으며 연민의 정을 키워나가던 수전은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까지 들 정도로 깊이 빠지지만 3천파운드라는 거금 때문에 모드와 결혼한 뒤 그녀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는 리버스의 계획에 협력하여 그녀가 리버스와 결혼하는 것을 돕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레즈비언 소설"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2005년판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의 해외판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추리계에서 유명한 작품이죠.

읽고나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정말로 두꺼운 책이라는 것. 즉 대 장편이라는 것이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판형은 작지만 페이지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거든요. 이렇게 긴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과 브라이어, 정신병원 등의 배경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옷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묘사한 것에 더하여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엄청나게 장황한 탓이 큽니다. 여성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심리묘사가 책의 반을 차지한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더군요. 디테일이 지나쳐서 나오는 인물들이 다 미친것 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뭐 실제로 미친 애들도 있고.
읽기가 쉽지는 않은 분량이라 3개로 나누어진 - 수전 트리더, 즉 수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지는 1부, 그리고 모드의 시점으로 쓰여지는 2부, 다시 수의 1인칭으로 돌아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3부 - 이야기를 각각 3권의 책으로 분책하여 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무겁고 길기에 들고 다니면서 읽은 제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네요.

그러나 길이에 비한다면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재미는 물론이고 빅토리아 시대의 하층 계급들과 음란서생(?)등 성적인 요소를 등장시키면서도 싸구려스럽지 않고 나름의 품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시기에 대해 방대한 묘사를 통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칠 정도로 추리물의 궤도에서는 꽤 많이 빗나가 있다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물론 뻔한 사기극으로 전개되다가 충격적으로 터지는 1부 마지막의 반전은 정말 효과적이었고, 2부에서 밝혀지는 1부와의 연관성도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해요. 그러나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핑거포스트와는 달리 별다른 단서도, 복선도 없고 "고백"에 의존하는 전개이기 때문이며 진상 그 자체도 그리 복잡하거나 뒤틀린 구조는 아니었거든요. 또한 진상 자체가 워낙 고전적 설정이기에 1부 이후에는 크게 충격적이지도 않았고요.
그나마 1부와 2부는 나름 추리물의 구조를 지니지만 3부는 소설의 마무리를 위해서만 존재하기에 전혀 추리물스럽지 않습니다. 아울러 나름 해피엔딩을 좋아하긴 하나 이 작품의 대단원은 별로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꽤 재미있고 가치도 있지만 제 취향은 절대 아닌 작품이었어요. 레즈비언 코드는 제껴놓더라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름의 가치는 충분하나 자료 조사 목적이 아니라면 두번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토대로 제작했다는 TV 시리즈는 꽤 관심이 가는군요. 영상으로라면 무척 화려하리라 생각됩니다. 

2017/08/27

무뢰한의 죽음 - M.C. 비턴 / 전행선 : 별점 2점

무뢰한의 죽음 - 4점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실라가 약혼자인 극작가 헨리 위더링을 로흐두로 데려와 약혼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초대 손님 중 피터 바틀릿 대위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던 유명한 사교계의 무뢰한이었다. 약혼 파티에서도 여지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아침 총에 맞아 죽은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사고사로 생각되었지만, 해미시 순경이 몇 가지 단서로 살해되었다는걸 밝혀낸 뒤 동기가 명확한 파티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은행가 프레디 포브스그랜트가 체포된 다음 날, 프레디의 아내 비라마저도 독살당했고 사건은 결국 미궁에 빠지는데...

M.C. 비턴의 해미시 순경 시리즈 2작입니다. 1작이 마음에 들었기에 곧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시리즈답게 전작에서 이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은건 즐겁습니다. 특히 해미시 순경 설정이 더 풍성해 졌어요. 사냥은 그를 미워하는 할버턴스마이스 대령까지 인정할 정도로의 전문가이며, 달리기, 사격, 낚시, 심지어 체스 대회까지 나가면 우승하는 다양한 능력에다가 전작에서도 등장했던, 미스 마플스러운 "시골 마을 인간 관계를 사건에 대입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해 명료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통한 심리 분석, 게다가 '속기'까지 가능한 슈퍼맨으로 묘사되거든요. "홍반장"의 추리 소설 버젼이라고해도 무방합니다. 다른 전작에서 이어지는 캐릭터들도 반갑습니다. 이름만 등장했던(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밀렵꾼 앵거스 맥그리거가 직접 등장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고루하면서 부패하고, 그리고 난잡한 부르조아들에 대한 고전적인 묘사도 여전합니다. 작가가 부르조아에 대한 묘사를 너무나 하고 싶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질만큼 애정도 묻어나고요. 부르조아인 '무뢰한' 바틀렛이 알고보니 나름 능력자이며, 그를 죽인 평민 헨리 위더링은 '속물'에 불과했다는 진상만 보아도 작가가 부르조아들을 동경하고 있다는게 뻔히 보입니다.

단, 이러한 점들이 장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전작에서 이어지는 인물 중 블레어 경감은 전형적인 악덕 경찰 상사라서 너무 뻔합니다. 분명 전작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 마음을 터 놓았다 싶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블레어가 성공을 독차지하는 결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고전스러운 묘사도 정도가 지나칩니다. 특히 밀땅 중에도 스스로의 주제를 파악하고 프리실라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해미시의 행동, 부모님이 좋아하는 약혼자가 있지만 해미시를 향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프리실라 두 명 모두 현대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답답합니다. 한국 근대를 연상케 하는, "장남"의 가족 부양 의무가 중요하다고 소개되는 등의 기본 설정부터가 고전적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전작에서의 현대적인 캐릭터들의 모습이 약해진 듯 하여 아쉽네요.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죄다 별로인 추리적인 부분에 비하면 사소합니다. 물론 범인의 의외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동기만큼은 괜찮습니다. 범인이 정말로 뜬금없기는 해도 동기만큼은 파티에서 비롯되었으며,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동기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거든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도 전작보다는 나아진 점이고요.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추리의 과정은 엉망입니다. 우선, 보다 공정한 전개를 위해서 파티에서 푸루니(푸루넬러)의 말로 헨리의 히트작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바틀릿 대위가 알았다는 부분은 좀 더 보강했어야 합니다. '파티 후반부에 바틀렛이 푸루니를 유혹하여 끌고간 후, 연극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는, 뒷 부분에 프리실라와 푸루니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덧붙였더라면 아주 좋았을거에요. 아니면 최소한 해미시가 "공작 부인의 연인"을 관람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정도로라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대령의 과거 사생활을 이전에 여러 채널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스캔들 중 하나가 연극의 핵심 내용이더라는 정도로요. 

해미시 스스로 이 사건의 범인은 익숙한 사냥꾼일 것이다, 이유는 총알을 바꿔넣을 정도로 충분한 여분의 탄환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라고 추리했던걸 스스로 뒤엎는 결말도 아쉽습니다. 독자의 헛다리를 유도해 놓고 그냥 발을 빼버린 셈이니까요. 별다른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울러 비라를 살해한 범행의 동기, 방식과 과정 모두 운과 우연에 의지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동기부터 이야기하면, 바틀렛이 함께 밤을 보낸 3명의 여성 중 비라에게만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행 도구인 쥐약도 우연히 입수했으며, 비라가 단 것에 사족을 못 쓴다는 약간의 복선 정도로는 그녀가 독이 든 케이크를 먹어치운다는걸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저녁을 못 먹는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는 정도의 묘사는 필요했어요.
여튼, 이 시리즈는 두 편 밖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살인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 단점 모두 전작과 비슷합니다. 추리적으로 조금만 괜찮았어도 계속 읽어볼텐데 애매하네요. 다음 권을 읽어봐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2016/03/19

실종 일기 2 - 아즈마 히데오 / 오주원 : 별점 3점

실종 일기 2 - 6점
아즈마 히데오 지음, 오주원 옮김/세미콜론

만화가 아즈마 히데오가 극도의 알코올 중독에 빠진 탓에 아내와 자식들에 의해 1998년 12월 26일, 모 병원 정신과에 입원한 뒤 1기, 2기, 3기로 구분된 약 3개월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기는 거의 독방 생활이기에,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2기부터 퇴원까지의 약 2개월간입니다. 당연히 병원 생활과 알코올 중독 치료 프로그램이 상세하게 묘사되는데, 전작 "실종일기"처럼 개그로 표현해 주는게 재미가 상당합니다. 여러 번의 자살 시도, 음주, 금단 증상과 후유증은 작가 본인에게 매우 힘든 경험이었을 텐데도 말이지요.

여름날 술을 마시고 토하고,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다 또 토하고, 추워서 나왔다가 또 토했다는 알코올 중독 후유증 경험담은 저 역시 겪었던 지독한 숙취와 크게 다르지 않아 와 닿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고요.

또한 매튜 스커더가 떠오르는 금주회 모임 에피소드도 재미있으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병동 동료들 역시 개성이 뚜렷해 세세한 볼거리가 많습니다.

화풍도 독특합니다. 컷마다 배경을 꼼꼼히 넣고, 스크린톤을 거의 쓰지 않은 채 선으로만 승부하는 방식은 데즈카, 이시노모리 선생 스타일로 오래 전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단지 옛날 스타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뒷부분 도리 미키와의 대담에서 언급된 것처럼 단순화된 선으로 다양한 인물을 구분하는 캐릭터 조형 능력은 발군이며, "가장 귀여운 여자아이를 그리는 만화가"라는 칭호에 걸맞은 면모도 엿보입니다. 확실히 저에게는 이런 고전풍 그림체가 취향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빵빵 터지는 이야기는 아니고 화풍도 고전적이라 호불호가 뚜렷할텐데, 저에겐 완전 취향이었습니다. 반대로 취향이 아니라면 여러모로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