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자의 후예 해방자 딜비쉬는 서방과의 전쟁에서 포타로이를 해방시킨 전쟁 영웅으로 어느날 어둠의 의식을 거행하던 마법사 젤레락을 방해한 뒤 젤레락의 저주를 받아 200년을 지옥의 나락으로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파괴의 주문과 친구 블랙을 얻어 현세로 돌아온 딜비쉬는 젤레락을 찾기위한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
형이 사둔지는 꽤 되었지만 그닥 손이 가지 않다가 얼마전 읽게된 책입니다. 일단 손이 가지 않은 이유는 형의 혹평도 많이 작용했기에 아무리 젤라즈니 선생의 책이지만 그동안은 좀 멀리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읽고 나니 생각보다는 재미있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딜비쉬와 그 친구인 블랙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인공 딜비쉬는 이 바닥에서는 좀 뻔한 설정의 재반복이긴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귀한 자의 후예로 용병 생활을 통해 해방자로 거듭나는 사연이나 타고난 강함, 냉정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 모두 이런 영웅담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된 이야기이긴 하죠. 그러나 저주받아 떨어졌던 지옥에서 익힌 주문과 보이지 않는 검과 엘프의 선물이라는 녹색장화 (발자국이 남지 않고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할 때 발부터 떨어지게 됨) 라는 아이템 등 디테일이 특이하고 젤라즈니 선생 특유의 묘사가 좋아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인상적인 캐릭터로 창조된 것 같습니다.
또한 강철로 된 말같은 형상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 블랙의 설정은 그야말로 왔다!입니다. 판타지의 기본이 되는 아이템인 "말" 그 자체를 주인공의 하나로 만드는 발상이 기발하기도 하지만 이 말이 강철로 된 몸을 지녀 거의 무적에 가깝고 마법까지 쓸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말(言)도 하는데 이 블랙이 지껄이는 대사가 시니컬하면서도 꽤나 유머스러운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여자가 길을 지나는 딜비쉬를 붙잡고 애인을 구해달라고 통사정 할 때 하는 말입니다. "이건 고전적이다 못해 해묵은 수법 아니오. 저 여자 뒤를 따라가면 매복하고 있던 무장한 사내 두어명이 당신을 덮칠거요. 그자들을 처치하면 여자는 뒤에서 당신 등을 찌를 거고. 이런 것을 소재로 한 발라드까지 나와 있지 않소"
하지만 이러한 멋진 설정도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죠? 이 책에는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딜비쉬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셀린데의 노래"를 제외한다면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셈이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스케일이 큰 전쟁 이야기 보다는 적은 규모의 무대와 인물들을 바탕으로 색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메라이사의 기사" 와 "악마와 무희",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저주받은 자 딜비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건 순전히 제 개인 취향이니 다른 분들은 다른 편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취향이든 아니든 대부분 본격적인 영웅담을 한번 써 보고 싶어서 손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쭉쭉 읽는 재미 하나는 확실합니다.
뭐 젤라즈니 선생 수준에 걸맞지 않는 단순하고 뻔한, 그냥 무협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맹이가 없긴 하지만 젤라즈니 선생도 심심풀이로 쓰고 싶은 책도 있을 테니까요. 작품의 수준을 논하지 않고 젤라즈니의 작품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수준으로 보면 적당할 것 같네요. 작가 이름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라 생각합니다.
저주받은 자, 딜비쉬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너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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