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에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괴사건들을 모아서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역사와 추리를 모두 좋아하는 저로서는 흥미가 안갈래야 안갈 수 없는 책이었는데 마침 형이 구입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쌩유!)
책은 크게 2개의 주제로 나뉘어 구성되고 있는데 첫번째가 "1부 - 근대 조선을 뒤흔든 미스터리 살인사건"이고 두번째가 "2부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스캔들"입니다. 두가지 주제 모두 흥미롭고 제목만 보아도 읽고 싶어 지지만 역시 저같은 미스터리 팬에게는 첫번째 주제가 더 와 닿더군요.
1부에는 총 4개의 사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인 "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은 대낮 경성거리에서 발견된 아이 머리를 둘러싼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이고 두번째 사건"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은 안동에서 피살되어 발견된 일본인 순사 가와카미와 용의자로 붙잡힌 조선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세번째 사건은 "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으로 부산의 조선인 하녀 마리아가 주인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을 다루고 있고 네번째 사건은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으로 지금도 유명한 사교집단 백백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단순히 흥미거리위주로 수록된 사건들이라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역학관계를 논할만한 주제가 많아 의미 있는 선정이었다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의 용의자인 조선 청년들의 억울함과 "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다카하시 부인에 대한 수사와 처우, 처벌이 너무나 달라서 한번쯤 비교해 보며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거든요. 특히 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이끌어낸 순사 살해사건의 경우는 그 수사의 방법이 너무 원시적이고 황당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쩐지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기도 해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용의자 동생의 증언인 "형이 목을 졸라 죽이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봤지만 그 다음은 졸려서 잤기때문에 모른다"라는 증언은 폭소 그 자체였습니다. 조선 남아들은 형이 살인해도 졸리면 잔다는 이야긴지 원...
또한"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은 "문둥이가 아기 간을 먹으면 낫는다"라는 토속적인 주술적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역시 인상적이었고 법의학자로 경성제대 교수까지 등장하는 등 당시 수사 방식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자료적 가치도 상당합니다. 사건의 엽기성과 내용에서 최근 유명한 "프랑스 영아 유기 사건"을 떠올리게도 하더군요. (이 주술적 믿음을 소재로 퇴마록의 이우혁씨가 쓴 괜찮은 단편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1부의 마지막 사건인 백백교 사건은 다른 매체에서 많이 접해서 크게 새롭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역사적" 측면에서 선정한 것이겠죠? 이만한 대형 사건은 정말 드물테니 말이죠. 뭐 뻔한 내용이지만 그런대로 도판과 자세한 재판과정의 수록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2부는 "스캔들"이라는 주제를 다룬 만큼 내용적으로나 사건 측면으로나 1부에 비하면 아무래도 임팩트가 떨어지긴 하지만 역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전부 6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인 "중앙보육학교 박희도 교장의 여제자 정조유린 사건"은 3.1 운동때 민족대표 중 한명이었던 교육자 박희도의 여제자 성추행(?)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번째인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는 순종의 장인으로 매국노였던 윤택영 후작의 어마어마한 빚과 그 최후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고요. 세번째 "이인용 남작 집안 부부싸움"은 역시나 매국노였던 이인용 남작 부부의 재산을 둘러싼 의미없는, 허무한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도피행각"으로 조선 제일의 테너로 불렸다는 음악가 안기영 교수가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이야기, 다섯번째는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 사건"으로 당시 국내 제일의 신여성이었던 박인덕의 이혼에 관련된 이야기, 마지막 여섯번째는"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로 최영숙이라는 스웨덴 유학생의 비참한 최후를 서술한 내용입니다.
제가 제일 흥미롭게 읽은 것은 매국노들 대부분이 가산을 탕진하여 외려 총독부에 구걸(?)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두편의 이야기인 "채무왕 윤택영 후작" 이야기와 "이인용 남작 부부싸움" 이야기였습니다. 친일파들이 다 떵떵거리면서 한자리 차지하고 살아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부분 당대에 가산을 탕진했다는 통쾌한(!) 이야기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들끼리 싸우는 이야기도 신났고요. 특히 저자의 덧붙인 코멘트, 요사이 매국노들의 후손이 땅 반환 소송을 한다는데 과연 그들에게 남은 재산이 있었는지 부터 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가장 와 닿았습니다.
그 외의 남녀간의 문제를 다룬 이야기는 요사이 연예면에 나올만한 소재의 이야기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져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여성과 전형적 조선 남자와의 결혼이 "돈"에서 비롯되었다는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은 읽다보니 요사이 모 아나운서 결혼 이야기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마지막 이야기인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는 당시 조선에서의 여자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으로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지금 수준으로 보아도 5개국어에 능통한 수재 여성이 국내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콩나물 장사나 하다가 혼혈아를 낙태한 것 때문에 외려 탕녀 취급이나 받다니....저자가 하인스워드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과 같이 지금도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네요.
기획만으로도 무척 특이한 역사-인문 서적이지만 읽는 재미도 충분히 전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현재 30대 중반의 나이로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는 저자의 글 답게 고루한 역사관을 논하는 것이 아닌, 요사이의 시사적인 문제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새롭고 신선하면서도 재미난 내용이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거든요. 저 스스로도 반성하고 한번 생각해 볼만한 주제도 많았고요.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아울러 구상중인 일제 강점기 배경의 추리 소설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기쁨 두배였습니다.
단 가격이 12,000원이라는 것은 확실히 문제네요. 책의 내용은 재미있고 가치도 있지만 사진도 거의 없고 그다지 많은 분량의 이야기도 아닌데 솔직히 너무 비쌉니다! 한 8000원 정도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날 까지 팍팍 밀어줄만 한 책인데 가격이 좀 많이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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