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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2

바람의 화원 1/2 - 이정명 : 별점 3점

바람의 화원 1 - 6점
이정명 지음/밀리언하우스

정조 즉위 당시, 도화서에 두명의 천재가 있었으니 한명은 단원 김홍도였고 다른 한명은 혜원 신윤복이었다. 단원 김홍도는 신윤복의 스승으로 제자의 천재성에 경탄을 금치 못하나 신윤복은 고리타분한 도화서 양식을 거부한 이단아적인 존재. 두명의 천재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갖가지 어명을 받든 뒤, 어진화사의 지위에까지 오르나 결국 과감한 사실적 그림으로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내쳐지게 된다. 그러나 정조는 두명에게 진정한 어명, 즉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어진을 찾으라는 밀지를 내리고 신윤복은 내노라하는 세도가 김조년에게 몸을 의탁한 뒤 어진을 찾기위한 기나긴 여정에 들어간다...

이정명씨는 요새 잘나가는 한국 작가로 알고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책은 회사 동료가 추천해서 읽게 되었네요. 솔직히 한국의 이른바 "팩션" 쟝르는 그동안 읽어본 작품들도 실망만 안겨준 것이 많아서 별로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이 책은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제법 괜찮은, 길이가 제법 되는데 한번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을 안겨 주는 맛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팩션"이라는 쟝르명에 걸맞게 크게 2가지의 수수께끼, 즉 사라진 사도세자 어진, 그리고 어진과 관련되어 살해된 두명의 화원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와 신윤복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두가지의 수수께끼가 두 화원이 그린 당대의 걸작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작가의 세심한 자료조사와 노력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별 관련없어 보이는 유명한 작품들이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펼쳐지는 것은 정말이지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미대 출신이긴 하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갔던 작품들에 대한 과감한 해석이 정말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미스테리라는 쟝르만 놓고 본다면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사도세자 어진에 관련된 수수께끼는 결국 김홍도의 잠깐(?)의 조사를 통해 밝혀질 뿐더러 범인을 지칭하는 암호문은 억지 그 자체였거든요. 종이를 이용한 트릭이나 그림을 글씨로 읽는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그다지 효과적으로 쓰인 것 같지도 않았고요. 더군다나 또다른 수수께끼인 신윤복의 정체라는 것은 그것이 밝혀지는 것이 이른바 "감식안" 이라는 설정인지라 설득력이 너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신윤복의 정체가 이야기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약점이라 생각되네요. 특히 이 부분은 출판사의 미친 마케팅 덕에 수수께끼고 나발이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근영 주연 드라마로 SBS 방영 예정!" 이라고 홍보를 해 버리니 나원참 이거 장난도 아니고...

아울러 이야기도 좀 중구난방으로 튀고 결말도 약간 어이가 없긴 합니다. 진범에 대한 단죄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으며 결국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라는 식의 엔딩이라 약간 허무했거든요. 여운을 남기는 맛은 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치밀한 자료조사와 다양한 그림에 대한 재해석 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조 시대 도화서 이야기는 요새 자주보는 "이산"으로 친숙하기도 해서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어쨌건 "한국형 팩션"이라고 불리우는 쟝르가 만약 있다면 그 중에서 최고작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공들여 쓰여진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팩션"이라고 불리우기에는 약간 부족해 보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진심으로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출판사의 미친 마케팅은 불만이지만, 문근영 주연의 드라마도 꼭 보긴 봐야겠네요. 문근영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2009/04/08

A 장조의 살인 - 몰리 토고브 / 이순영 : 별점 2점

A장조의 살인 - 4점
몰리 토고브 지음, 이순영 옮김/살림

어느 날 뒤셀도르프 경찰청의 헤르만 프라이스 경위에게 위대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이 'A음이 계속 들려 견딜 수 없다'며 사건을 의뢰한다. 프라이스 경위의 고독한 수사의 와중에 슈만의 귀중한 악보가 도난당하며, 범인으로 의심되던 슈만의 일대기를 쓰던 음악평론가 게오르크 아델만이 살해된채 발견되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위대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팩션입니다. 슈만의 일생에서의 역사속 사실인 1854년 2월 라인강 투신 사건과 그 후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실존하는 일화를 토대로 왜 위대한 작곡가 슈만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만 했는가? 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단 읽는 재미는 쏠쏠했습니다. 자세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디테일한 묘사는 팩션이라는 쟝르명에 충분히 값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 유명 음악인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고요. 또한 나름의 복잡한 과거사와 자신만의 철학을 지닌 음악 애호가 탐정인 주인공 프라이스 경위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교하자면 "애덤 댈그리쉬" 경부 같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더군요. 예술적인 감수성이나 젠틀맨적인 이미지, 그리고 공직자로서의 자세 같은 부분에서 유사함을 느꼈습니다. 독신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프라이스 경위는 여자친구? 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추리적으로 크게 특기할 부분은 없습니다. 책의 홍보도 "미스터리 팩션"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만큼 추리적인 부분은 많이많이 부족하거든요. 이 작품속에서 트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슈만에게만 들리는 A음" 밖에는 없는데 그나마도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릭대로라면 당대 유명 음악인들이 거쳐가던 슈만의 집에서 과연 그러한 장치적 트릭을 남모르게 지속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거든요. 게다가 현실적으로 이 트릭을 "지속가능한"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부족했고요. 작가는 이 트릭을 슈만의 "절대음감" 에 딱 맞는 트릭이라고 주장하고는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음악평론가 아델만 살인사건의 경우는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단서와 정보의 제공이 공정하지 않기에 더더욱 실망스러웠고요. 동기와 수법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 편이지만 그 외에는 트릭도, 단서도 없습니다... 공연히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만 있을 뿐이죠. 덕분에 우리의 프라이스 경위만 좌충우돌 고생하고 애꿎은 독자만 지루하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듭니다.

게다가 결말도 사실 썩 개운치 않은 편입니다. 진범이 누구인가? 에 대한 모호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정한 악당은 그대로 남겨진채 결국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결말이 참으로! 정말로! 시시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예정대로 슈만은 정신병원으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제 갈길을 가는 것으로 끝나버리니 이거 참... 어차피 애시당초 이야기의 소재 자체가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역사속 인물들에 대한 가공의 결말을 만들 수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끝낼 것이었다면 역사를 소설로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역사속 인물들은 들러리로 등장하는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던가, 아니면 보다 대담한 결말 - 프라이스 경위와 클라라 슈만의 작당으로 병원으로 끌려간 슈만은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조율사라던가,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라던가 뭐 그런 식으로요) 라는 전개 - 로 마무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결론내리자면, 제목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 작품 초-중반의 분위기 덕분에 정통 팩션으로서의 기대를 한껏 갖게 만들지만 결국 제가 기대했던대로의 작품이 아니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별점은 2점으로, 천재 음악가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즐기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선택이겠지만 저같은 추리 애호가에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하우미스터리와 도서출판 살림의 공동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된 책이라 좀 죄송스럽긴 한데 뭐 리뷰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독서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하우미스터리와 도서출판 살림 관계자 여러분께는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2/10/03

토로스 & 토르소 - 크레이그 맥도널드 / 황규영 : 별점 2.5점

토로스 & 토르소 - 6점
크레이그 맥도널드 지음, 황규영 옮김/북폴리오

실제 인간을 토르소(torso, 목과 팔이 없는 조각 작품)처럼 만드는 엽기적인 살인극이 1935년부터 1961년까지 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펼쳐진다. 이 살인극에는 인기 범죄소설 작가 헥터 라시터가 깊숙히 개입해 있는데...

국내 최대의 추리 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의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된 작품입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 드립니다.

범죄 소설가 헥터 라시터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스릴러입니다. 크게 1935년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1937년의 스페인, 1947년의 헐리우드, 1959년의 쿠바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락별로 아직까지 육상에서의 중심기압 기록을 가지고 있는 1935년의 태풍 상륙, 1937년의 스페인에서의 프랑코에 대항한 내전, 1947년의 "블랙 달리아" 사건이라는 큰 실제 사건들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초현실주의 토르소 연쇄살인사건과 엮여서 진행됩니다.
굵직한 실제 사건들이 배경인데다가 헤밍웨이와 오손 웰즈, 리타 헤이워드 등 당대 실존인물들이 등장해서 한몫 단단히 하기 때문에 팩션 느낌도 강하게 전해줍니다. 이를 엄청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로 그려내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미술사적인 시점에서의 그림 묘사들도 디자인 전공자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그러나 팩션적인 재미 외의 범죄 소설로의 재미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블랙 달리아" 사건에서 작가가 상상한, 이른바 "초현실주의 연쇄 살인사건"의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는 탓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초반의 살인사건은 범인이 현장까지 엄청난 무게의 기계장치들을 옮기고, 나머지 잔해들을 처리하기 위해 굉장한 체력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거라고 말하는데, 정작 방법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부실하죠.
게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은 팩션치고는 각색이 너무 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쇼트가 배우를 꿈꾸는 화가 아르바이트였다니, 좀 지나쳤어요. 레이첼 - 알바의 1인 2역 트릭도 뻔해서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초현대미술 작품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도판이 거의 없는 책의 구성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헥터 라시터의 활약도 문제입니다. 권총에 수류탄까지 휘두르는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터프가이 작가라니, 이 자체가 초현실주의가 아닐까요? 또한 현대미술 작가들을 진보주의자에서 최소한 좌파(빨갱이?), 변태에 연쇄살인마 집단으로 묘사한 점과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헥터 라시터가 FBI의 끄나풀 역할도 하면서 이런 집단을 응징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마초이즘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시려고 협잡질도 마다하지 않는 헥터의 모습은 후반부 현대미술가들의 난교 파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과 부합하지 않아서 어색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귀경길에 한시간이나 비행기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재미는 넘치지만 크라임 미스터리, 범죄소설로는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터프가이 모험극 느낌도 강했고요. 그래도 읽는 재미 만큼은 확실한 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합니다.

2025/01/10

메이지 단두대(明治斷頭台) - 야마다 후타로 : 별점 3점

明治斷頭台 山田風太郞ベストコレクション (角川文庫) (文庫) - 6점
山田 風太郞/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단두대"는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집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합니다.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되었기에 계속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원서를 ChatGPT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걸맞는 장점들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장점은 실존 인물과 메이지 시대 풍광을 활용한 팩션적 재미입니다. 츠키지 호텔관, 에이타이바시 다리, 코덴마초 감옥 등 메이지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사건 속 배경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변화와 증기선같은 기술 발전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역 중 한 명으로 근대 경찰의 아버지 카와지 토시요시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던가 '마지막 사무라이' 키리노 토시아키, 일본 육군 창설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현실감과 역사적 몰입감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가공의 이야기와 결합해 당시 시대적 풍광을 생생히 재현하며, 작품의 팩션적 매력을 극대화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추리적 재미와 정교한 트릭의 사용입니다. "괴담 츠키지 호텔관"에서는 일본도 양 끝에 게다를 고정시키고, 게다 굽을 나선형 계단 난간에 걸쳐 위에서 미끄러트린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나카사카 큐우치는 이를 이용해 자신은 옥상 전망대에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피해자를 공격해 살해했지요.
"미국에서 보내는 사랑"에서 범인은 인력거를 혼자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진상은 인력거 두 대를 묶어서 일종의 4륜 차량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를 언덕 위에서 밀어서 굴러내려가게 한건데, 굉장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만 라소츠(나졸)들의 위증(?)과 마지막 현장에서 인력거가 묶여 있지 않았던 점(얇은 끈으로 묶여 풀렸다?) 등이 애매했던 점인데, 이는 라소츠들이 진범의 도우미였다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잘 설명되고요.
"에이타이바시의 교수형"에서는 밧줄과 배의 움직임을 이용해 자살로 위장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범인 테라니시 진주로는 피해자를 강 위 증기선으로 유괴한 뒤, 미리 에이타이바시에 설치해 두었던 밧줄 고리에 목을 밀어넣고, 반대쪽 끝을 자신이 잡아당겨 자살처럼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증기선을 타고 있어서 당시 상식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었고요. 앞서 설명드렸던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전이 사용된 멋진 트릭입니다.
"자신의 목을 안고 있는 시체"에서는 범인이 아리사카 이헤이를 살해한 뒤, 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몸과 처형된 죄수의 목을 붙여 위장한 사건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죄수의 목을 빼돌렸는지?'인데, 이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라소츠의 속임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앞서 모든 작품에서 라소츠가 한 몫했다는 걸 결정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점은 충격적인 결말입니다. 마지막 단편 "정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악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라소츠들의 협력을 얻었던 겁니다. 사실 사건 대부분에서 라소츠들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바탕이 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무사였던 라소츠들은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의 이상에 공감하며 범죄에 협력했고, 케이시로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어갔던 것이었지요. 모든 걸 밝힌 케이시로가 스스로 단두대를 사용해 자살하는 장면도 충격적이며, 정의와 권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전해줍니다. 이후 체포하는 척했던 라소츠들이 에스메랄다를 탈옥시키며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괜찮은 결말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작품의 배경인 일본 메이지 시대는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츠마와 조슈번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주요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추리 소설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트릭이 활용된 본격 추리 단편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 "탄정대 대순찰"은 케이시로와 라소츠들, 탄정대와 단두대의 배경 설명에 치중되어 있고, 이어지는 "무녀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거든요. 마지막 "정당한 정부는 가능한가"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는 자백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추리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고요. 따라서 본격적인 추리 요소는 부족한 편입니다.

케이시로가 정의를 추구하며 폭주하는 이유, 라소츠들이 케이시로에게 충성을 바치며 목숨까지 거는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균 이하 범죄자들인 라소츠들의 심경 변화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했어요.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문의 후예로, 일본에서는 '무녀'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너무 과했고요. 만화적이라서 영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팩션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바실리스크"같은 닌자 액션물(?) 원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16/08/05

제라르 준장의 회상 - 아서 코난 도일 / 김상훈 : 별점 3.5점

제라르 준장의 회상 - 6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웠던 제라르 준장의 소싯적 모험담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아버지 코난 도일 경의 작품으로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마이클 더다가 극찬했던 탓에 관심을 갖던 작품인데, 얼마 전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되어서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극찬받을 만하더군요!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정말 발군이었던 덕분입니다. 준장의 생명을 건 모험들의 긴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손에 땀을 쥐고 읽었습니다.
여섯 명의 펜싱 사범과 결투를 벌였다는 식의 허세 끼 있으면서도,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여성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매너를 보여주는 제라르 준장도 아주 매력적이고요. 시기적으로 본다면 얼마 전 읽은 "내 방 여행하는 법"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떠오르는데, 허세는 동급이더라도 유머 감각은 월등합니다. 그래서 모험담도 전반적으로 유쾌해요. 잘난 척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쾌한 친구인 셈이지요.

아울러 역사 모험물답게 나폴레옹, 네 원수, 탈레랑, 워털루 장군, 뮈라 원수 등 다양한 실존 인물들과 실제 전쟁이 벌어졌던 곳들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좋습니다. 군복을 비롯한 여러 세세한 디테일들과 전투 장면의 묘사 역시 큰 볼거리에요.

결론적으로 추천작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약간 시대는 다르지만 "스카라무슈"나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교할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잃어버린 세계"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도일 경은 추리물뿐 아니라 모험물에도 확실히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프랑스 군인의 이야기를 영국 작가가 이렇게나 실감나게 쓴 것도 정말이지 놀라와요. 영국 군인을 지나치게 영웅시하지 않은 것도 신기했습니다.

각 단편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라르 준장, 음울한 성으로 가다"

1807년 2월, 제라르 중위는 연대 본부에 출두하던 중 우연히 경기병 연대 순찰대를 만났다. 순찰대의 지휘관 뒤로크 소위는 아버지의 원수 슈트라우벤탈 남작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둘은 남작의 계략으로 성에 갇혀버리는데...

제라르 준장의 회고에서 시작되는 모험담의 첫 이야기입니다. 나이 지긋한 인물의 1인칭 방백에서, 본 이야기는 3인칭의 소설로 전환되는 구조인데 예전 "샘 호손의 사건부"와 같은 방식입니다. 이야기의 현실성을 높이는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네요.

시리즈의 시작으로 나무랄 데 없습니다. 지하에 갇힌 후 탈출하는 과정, 그 와중에 남작을 중오하는 의붓딸의 도움, 그리고 남작과의 최후의 결투와 완벽한 해피엔딩 등 모험물로서의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라르 준장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각인될 뿐 아니라, 사악한 남작의 캐릭터도 잘 살아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아작시오의 자객들을 처단하다"

1807년, 제라르 중위는 퐁텐블로 궁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밀명을 받았다. 밤 10시에 황제와 함께 어떤 사내들을 상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에서 '아작시오 형제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했었는데, 그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팩션적 요소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황제가 암살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핵심인데, 이미 결과(암살 실패)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재미를 주기 어려운 탓입니다. 검술로는 상대도 안 되는 두 명의 자객과 대결하는게 모험의 전부이기도 하고요.

물론 나폴레옹을 위장한 일종의 가게무샤가 대신 죽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제라르가 궁을 나갈 때 처음 들어올 때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즉 모든 걸 잊고  나가겠다고 하자 나폴레옹이 한 답변 — "그럴 수는 없을걸, 그때 자넨 중위였으니까 말이야. 이제 가서 푹 쉬게, 제라르 대위" — 등 재치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더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을 잡다"

1810년, 부상으로 후방에 머무르던 제라르 대령은 연대 복귀를 위해 산을 넘다가 게릴라들에게 사로잡혔다. 잔혹한 게릴라 엘 쿠치요에게 사지가 찢길 뻔했던 제라르를 구해준 건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영국군 용기병대였다.
용기병대의 지휘관 바트와 친해진 제라르는 그와 카드 게임 '에카르테'를 벌여 당당하게 탈출할걸 계획하는데...

산적에게 습격받았다가 영국군에 사로잡히고, 마지막에는 웰링턴 장군까지 나오는 드라마틱한 구성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제라르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스페인 산적들의 묘사도 생동감 넘치며, 프랑스인이 영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 카드 게임의 박진감 등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요. 에카르테를 프랑스 전체를 뒤져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될까라는 식의 귀여운 허세도 여전합니다.

마지막 웰링턴의 한마디도 인상적입니다. 급작스럽게 나타난 웰링턴에게 제라르가 하는 말 — "내가 카드 게임에서 이겼다, 약속대로 자유를 달라, 자신은 킹을 잡고 있다" — 에 대한 답변으로 웰링턴이 "자넨 우리 킹에게 잡혔거든" 이라고 하는 장면은 영국적이면서도 재치 있더라고요.

모험물로도 재미있고, 팩션으로도 괜찮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왕, 제라르 준장을 잡다"

1810년, 다트무어 감옥에 수감된 제라르는 탈출을 감행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치밀한 탈출 — 창의 철봉을 뽑고, 벽돌을 빼낸 후 이중 벽을 철봉에 침대보로 만든 밧줄을 묶어 넘음 — 도 재미있지만, 탈출 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우선 찰스 메러디스의 마차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외투를 훔칩니다. 그러나 그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형무소 근처에 오고 말지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말한 방향과 반대로 향했지만, 영국 복싱 챔피언 브리스톨 버슬러를 만나 격투를 벌인 끝에 사로잡힌다는 좌충우돌 행각이 정말 흥미진진한 덕분이에요.
메레디스의 편지로 풀려난다는 반전도 아주 기막히며, 이 와중에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는 기사도 정신도 반짝반짝 빛납니다. 메레디스 부인과 나누는 농짓거리도 인상적이었고요.

한마디로 탈출기로서도, 모험담으로서도 빼어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밀플뢰르 원수와 맞서다"

1810년, 마세나 원수는 제라르 대령에게 탈주병 출신으로 엄청난 세력의 산적 집단을 만든 밀플뢰르 원수 타도 및 그가 사로잡은 부유한 백작 부인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과 산적의 근거지로 향하던 제라르는 도중에 영국군을 만났다. 다행히 지휘관이 친분이 있던 바트이며, 그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산적의 근거지인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마침 그 수도원에서 쫓겨났다는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패잔병을 가장하여 잠입할 것을 모의하는데...

일단 바트의 재등장은 반가웠고 수도원장의 정체가 밀플뢰르 원수였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원수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허나 중간에 제라르의 목숨을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등 전개 면에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영국군을 사로잡은 방법과 똑같이 아침에 제라르를 유인하여 프랑스 군도 일망타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방심을 노렸다 치더라도 밀플뢰르 원수가 직접 나설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또 반가운 캐릭터였던 바트가 전사한다는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제라르보다는 밀플뢰르가 더욱 주인공에 가까운 일종의 안티 히어로물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네요. 결국 밀플뢰르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그러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국을 걸고 도박을 하다"

1812년,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후 괴멸적 상황에 빠졌다. 때문에 제라르 대령은 프랑스로 복귀하여 부대를 재건할 것을 명받았다.

독일을 가로질러 귀국하는 와중에 제라르는 항상 프랑스와 친밀했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고, 협력자를 통해 곳곳에 표시된 기묘한 "T"자 마크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프로이센 상류층의 비밀 결사 투겐트분트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제라르는 죽어가는 군위대 장교 아르노 후작을 만나 황제의 밀서를 건네받았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호프성의 작스-펠슈타인 대공에게 밀서를 전해 독일이 황제에게 거역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그리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게 거역하는 상황의 한가운데 놓인 제라르의 모험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팩션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실상 모험이랄 것은 대단치 않습니다. 대공을 찾아가 이야기하는 게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제라르가 팔로타 백작부인을 자칭한 대공비에게 서류를 뺏기는 과정, 궁지에 몰려도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역사를 거스르지 못하는 제라르의 실패만큼은 인상적이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훈장을 타다"

준장이 된 제라르는 전우 샤르팡티에 소령과 함께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았다. 황제는 당면한 작전 내용과 밀서를 스페인 국왕인 자기 형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후, 친히 경로까지 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 경로는 프로이센 군 등에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제라르는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여 명령을 완수하는데...

태사자가 홀로 북해성 밖의 원군을 청하는 것과 같은,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을 가로지른다는 화끈한 모험이 펼쳐집니다. 태사자처럼 제라르의 기지도 돋보입니다. 시장 저택에서 벌어지는 프랑스군 - 프로이센군 전투, 그리고 이후 프로이센 군에게 다시 점령된 상황에서 코사크 장교 부트킨 백작을 속여 탈출하는 과정은 정말 기가 막히거든요.

게다가 황제의 의도는 그들이 사로잡히게 만들어 거짓 정보를 적에게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 그래서 황제는 사로잡힌 샤르팡티에게 레지옹도뇌르를 수여하고 제라르에게는 특별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는 결말까지도 완벽합니다. "저 친구는 우리 군에서 최악의 돌대가리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용감한 군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말이야."라는 말과 함께요. 그 말 정말이지 정확합니다! 아무래도 제라르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머리는 타고났지만 좀 더 큰 그림은 볼 줄 모르는 인물인 것 같아요.

여튼 별점은 4점. 모험도 화끈하고 결말까지 완벽하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제라르 준장, 악마의 유혹을 받다"

나폴레옹 군대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라르 준장은 프랑스 군 내에서 최고의 용사로 알려진 다른 전우 2명과 함께 베르티에 원수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나폴레옹을 적군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3명 모두 분노와 함께 제안을 거절했지만, 직후 황제가 나타나 그들을 시험했다며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그의 후계자를 증명하는 서류와 4천만 프랑에 해당하는 증권을 숨겨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레랑의 지시를 받은 악당들에게 서류를 빼앗겼고,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추격과 격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단편집의 아쉽지만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마지막답게 황제 나폴레옹의 최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단 한통의 편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도입부로부터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밝히는 전개는 괜찮습니다. 허나 무려 전우 2명이 죽었음에도 대단한 모험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 임무를 성공하더라도 나폴레옹에게 내일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좀 맥이 빠고요. 나폴레옹 2세는 결국 한 게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이 서류들이 그의 존재를 어떻게 한 건 아니니까요.

결론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0/07/16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3점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이 작품은 경찰 관계자 3명 - 아일랜드인 존 캐러더스 형사 / 잉글랜드인 부국장 허버트 암스트롱 경 / 스코틀랜드인 데이비드 해들리 총경 - 각자가 한꼭지씩 맡아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형식부터 시작해서 그동안의 존 딕슨 카 작품과는 성격이 아주 다른, 굉장히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유로는 첫번째로 코믹하고 왁자지껄한 블랙코미디 군상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한 것을 꼽고 싶습니다. 설정부터가 황당하고 코믹하죠. 가짜 수염을 단 인물이 나타나 경관을 습격하고, 가짜 수염을 단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고, 흉기인 단검이 놓여있던 장식장 안에 가짜 수염이 놓여있고... 이렇듯 <멋지다 마사루> 수염부 일동이 일생 일대의 걸작으로 지목할만큼 많은 수염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주요 관계인들의 행색과 행동 하나하나도 실소를 자아내죠. 예를 들자면 사건이 벌어진 박물관 경비원이 나무상자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던가, 주요 관계인 한명이 경찰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두번째로는 다른 딕슨 카 작품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고딕 호러 스타일의 괴기성도 찾아보기 어렵고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이 얽히는 팩션 느낌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죠. 기드온 펠 (기디온 펠) 박사나 헨리 메리벨 (헨리 메리베일) 경 시리즈는 방코랑 시리즈나 딕슨 카의 다른 팩션 작품들 보다야 고딕 호러 느낌이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처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동방의 물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는 사건 현장 때문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약간 가져다 붙이는 정도에서 끝나니까요. 그나마도 박물관의 구조 이외에 사건에 필요한 요소는 전무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점은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오히려 이 작품의 문제는 전개 과정에 있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3인의 화자에 의해 전개되는 방식은 어차피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특함 이외에는 혼란만 가져다 줄 뿐, 1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진행하는 방식에 비해 나은 점을 찾기 어렵거든요. 솔직히 중간부분에서는 지루해서 깜빡 졸기까지 했습니다. 사건도 동기는 확실하지만 너무나 많은 우연이 겹쳐져서 일어난 것이라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고요. (여러가지로 이유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사족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아울러 증거도, 증인도 없다는 결말도 좀 허무했습니다.
때문에 작품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편이지만 딕슨 카라는 작가와 기드온 펠 박사라는 명탐정이 등장하는 작품 치고는 너무 평범한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래도 거장답게 별다른 트릭없이 수수께끼같은 사건을 펼쳐나가는 이야기솜씨는 일품이며 합리적인 추리에 따른 반전까지 갖춘 완성도 높은 추리소설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딕슨 카의 고딕 호러 스타일은 아무래도 좀 취향을 탈만한 내용이기도 하니 즐겁고 신나는 이러한 작품으로 딕슨 카라는 작가를 알게 되는 것도 괜찮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존 딕슨 카 작품 완독에 도전하기 위해 읽은 작품으로 다 읽고나서 완독이라고 좋아했더니 신작 <초록캡슐의 수수께끼>가 또 출간되었네요. 이 작품도 빨리 읽어야 겠습니다.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2021/10/09

늑대의 왕 -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 송섬별 : 별점 2.5점

늑대의 왕 - 6점
니클라스 나트 오크 다그 지음, 송섬별 옮김/세종(세종서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79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방범관 카르델은 호수에서 시체 하나를 건져내었다. 시체는 살아있을 때 몇 개월에 걸쳐 혀, 이빨, 눈, 귀 및 사지가 하나씩 훼손된 후, 치료되었다는게 밝혀졌다. 인데베토우 치안본부 소속의 세실 빙에는 치안총감 놀린의 부탁으로 사건을 맡고, 카르델과 힘을 합쳐 수사에 착수했다. 놀린은 세력가 레우테르홀름의 간섭으로 치안총감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고, 빙에도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중이라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카르델의 탐문 수사, 그리고 빙에가 시체를 감쌌던 천을 추적해서 둘은 시고위층 비밀 조직 에우메니데스가 소유한 고급 창관이 시체를 버렸다는걸 알아냈는데....

18세기 후반 스웨덴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무식과 야만, 과학이 공존하던 비슷한 시기 유럽을 무대로 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와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구스타프 3세가 일으켰던 대 러시아 전쟁, 그 중에서도 스벤스크순드 해전이 꽤 비중있게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도 사건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등, 역사적인 배경을 더 짙게 깔고 전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팩션' 인 셈이지요.

이런 역사적인 부분의 디테일은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 문화와 시대상, 생활상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예를 들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유로 독한 아라비카 커피를 자주 마신다는 세실 빙에의 묘사처럼요. 전형적인 지知-용勇 컴비 - 허약한 두뇌파 탐정 세실 빙에와 엄청난 완력과 터프함을 자랑하는 카르델 - 설정도 이 작품에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웁살라 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빙에, 왼 팔을 대 러시아 전쟁 중에 잃었던 역전의 용사 카르텔은 그들에 대한 설명과 그들 각자의 회상 만으로도 작품의 역사적인 배경과 디테일을 보다 강화시켜 줍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빙에와 카르델이 수사를 통해 창관까지 찾아가기는 하지만, 피해자와 범인이 드러나게 되는건 피해자 다니엘 데발을 그 꼴로 만든 집행자 크리스토페르 블릭스가 남긴 편지가 빙에에게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범인인 발크가 크리스토페르를 자유롭게 풀어준 이상, 체포되는건 시간 문제이기도 했고요. 크리스토페르가 죄책감에 밍기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사건은 더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그나마 컴비가 창관으로 찾아가기까지의 수사를 그린 1부, 크리스토페르가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2부는 수사와 범죄 과정이 상세히 등장하기라도 하는데, 안나 스티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그린 3부는 존재 자체가 불필요했습니다. 재미도 있고, 당시 스웨덴이 얼마나 무식한 국가였는지, 노역장이 얼마나 생지옥이었는지, 방범관들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등의 시대상을 드러내는데에는 효과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3부를 읽지 않아도, 그리고 안나 스티나는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최악의 방범관이자 새디스트인 페테르손이 카르델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는 에필로그라도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었고요. 또 안나 스티나는 마지막에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한들 그냥 봐 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아울러 요한네스 발크가 이런 무서운 범행을 저지른 동기가 '프랑스에서처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건 팩션이라는 측면에서는 잘 어울렸으나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데발을 사랑했지만, 데발이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먹으려고 했던,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끄나풀이었기 때문이라는걸 알게 되어 살의를 품었다는 발크의 동기는 누가 보아도 명백합니다. 때문에 그가 재판정에 서 봤자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는 부족했을 겁니다. 사랑했던 연인의 배신으로 살인을 저지른 귀족의 후예 때문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4부에서 피해자 뱃 속에서 발견한 반지의 문장을 통해 피해자 신원,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를 더듬어가는 부분만큼은 좋았어요. 반지의 문장은 전 치안총감 릴옌스파레의 문장을 흉내낸 것이었고, 이를 통해 반지 주인이 릴옌스파레가 풀어놓은 정보원이었다는게 밝혀지는 과정이 앞서의 복선 등으로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가 자기 배설물을 먹었던 것도 리스토페르가 사지를 잘라내는 시술을 피해자에게 가하던 중에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먹여서 나중에 부검을 통해 그의 신원이 드러나게끔 조치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되며, 피해자가 처한 끔찍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져 극적인 효과를 더해줍니다. 빙에가 "사실 다니엘 데발은 발크를 배신한게 아니라 그를 사랑했다"고 데발의 편지를 위조해서 발크를 속인 끝에 그가 순순히 죽음을 맞게 만든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듯 하다가, 사실은 빙에의 조작이었다는게 드러난건 확실히 새로왔어요. 세실 빙에와 그의 아내에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과 맞물려 여운을 남기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역사물로의 재미는 확실하고,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혹한 범죄, 범죄 만큼이나 끔찍한 당시 스웨덴 상황 등은 부담스러워서 감점합니다. 해피 엔딩에 악당들은 확실히 응징하는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가 훨씬 더 제 취향이었습니다.

2010/12/27

Hansang의 2010 올해의 추리소설 Best 3

2010 올해의 추리소설 이벤트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팬덤의 하나인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입니다. 2009년 12월 ~ 2010년에 간행된 책들이 대상인데 확인해보니 이 중에서 읽은 책은 30여 권밖에 안되네요. 너무 적게 읽었나? 어쨌건 제 블로그 정리 차원에서라도 저도 한번 선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은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책을 더 읽기는 힘들 것 같거든요.

그럼 먼저 선정에 앞서 간단하게 2010년 추리소설계를 들여다 보도록 하죠.

2010년 국내 추리소설계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쏠림 현상이 심했고" "뜻깊은 발굴도 있었으며" "국산 추리소설이 모처럼 활기를 띤" 한 해였다고 말이죠.

"쏠림 현상"은 230여 권의 작품 중 100권 정도를 일본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일본 추리소설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 그리고 100권 정도의 일본 작품도 히가시노 게이고, 우타노 쇼고, 미야베 미유키 등 특정 유명 작가에게 많이 치우쳐져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일본 작품 이외의 작품 역시 기존 유명 작가의 시리즈 작품들과 국내에서 인기가 많은 팩션 장르물이 대부분이라는 것에 기인합니다. 출판사도 책이 팔려야 먹고 사는 경제조직이니 인기 작가 작품이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고 덕분에 출간된 반가운 작품들도 많았지만 일부 작가는 작품의 수준보다는 순전히 작가의 네임벨류로 선정되어 출간되는 것 같아 조금 아쉽더군요.

"뜻깊은 발굴"은 첫 번째 쏠림 현상의 와중에도 추리 애호가로서 기다려 왔던 반가운 작품들이 속속 번역된 한 해이기도 해서 꼽아보았습니다. 일본 추리소설 중에서는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라든가 "리라장 사건"이, 영-미권에서는 "7퍼센트 용액"과 "붉은 오른손",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과 딕슨 카의 고전들이 출간되었으니까요. 앞으로는 일본과 영-미권에 치우치지 않은, 예를 들면 중국이나 대만 등 제 3 세계권의 추리 소설도 발간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모르죠. "장미의 이름"처럼 대박이 날 수도 있잖아요?

"국산 추리소설의 활기"는 목록에서 보기 드문 한국 추리 소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인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어요. 장르도 훨씬 다양해져서 꾸준히 출간되어왔던 단편집뿐만 아니라 정통 장편 추리물에서부터 팩션, 하드보일드, 그리고 김내성의 과거 고전이 재발간되는 등 질과 양 모두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아주 기쁩니다. 한국 추리 소설도 더욱 성장한 한 해라 생각되며, 부끄럽게도 제대로 읽어본 작품이 아직 없는데 꼭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그나저나 여기 "경성탐정록" 2권이 포함되어 있었어야 하는데... 눈에서 땀이나네... ㅠ.ㅠ

그럼 간단한 분석을 마치고, 제 개인적인 "2010 올해의 추리 소설" 순위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둥~

Hansang의 2010 올해의 추리소설 Best 3

* 2009년 12월 ~ 2010년 출간된 추리소설만 해당됨

"7퍼센트 용액" - 니콜러스 메이어 : 별점 4점 - 셜록키언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작품. 일본 원판으로 구입은 해 놓았지만 10페이지 정도 읽고 손 놓고 있던 차에 국내에 출간되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작품도 역시나 만족스러웠고요.

"얼굴에 흩날리는 비" - 기리노 나쓰오 : 별점 4점 - 과거 구판본으로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정식 완역본으로 작품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제 생각에는 여성 작가의 하드보일드란 이런 것이다! 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작품 같아요. 첫 맛부터 진하고 독한 위스키라기보다는 부드럽지만 슬프면서도 날카롭고 쓴 뒷맛을 감추고 있는 사케 같은 작품이랄까요?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 별점 4점 - 고전 걸작. 더 말이 필요 없죠. 제가 읽은 딕슨 카 전 작품 중에서도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아차상>

"마크스의 산 1.2" - 다카무라 가오루 : 별점 4점 - 2010년 재판본이 아닌 예전 고려원 판본 별점입니다. 새 판본을 읽지 못했기에 선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작품이죠.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4점 - 별점 4점이기는 한데 개인적인 팬심이 포함되어 있어서 순위에서는 뺍니다.

이상으로 2010 올해의 추리소설 관련 글을 마치며, 내년에는 별점 5점짜리 작품을 선정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09/03/18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 제임스 굿윈 / 한은경 : 별점 3점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6점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비채

술탄 마흐무트 2세 치하의 19세기 중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광이 서서히 저물던 시기의 이스탄불에서 제국의 근대적 군대 신위병 장교 4명이 실종되었다. 군대 총사령관 세라스케르는 환관 야심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야심은 이외에도 궁정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수사도 맡는 등, 쉴틈없는 나날을 보냈다. 
신위병 장교 4명은 한명씩 살해된채 발견되었고, 수사를 진행하던 야심은 이 사건의 배후에 10년전 신위병이 끝장낸 구제국의 유물이었던 전투기계집단 "예니체리"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서서히 사건의 흑막, 본질에 접근하는데....

'19세기 초-중반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무대로 환관 탐정이 활약하는 팩션'이라는 책 소개를 믿고 구입한 책입니다. 제가 추리 소설은 물론 역사물도 좋아하기도 하고, 역사 추리물은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이 책의 장점으로는, 제일 먼저 19세기 초-중반의 이스탄불의 세밀한 묘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 한권만 읽어도 당시 이스탄불 거리의 정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당시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정치적 상황같은 국제 정세, 술탄과 귀족들, 거리나 지명과 같은 단순한 정보 이외에도 요리나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지는 등 그 깊이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 모든건 작가가 원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 연구를 계속해 온 학자출신인 덕분입니다.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서 느껴질만큼 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추리 소설 역사에 없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환관탐정" 야심의 캐릭터 역시 독특한 맛이 넘칩니다. 성실하고 똑똑하며 요리 역시 뛰어나지만, 환관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는 환관탐정... 멋지지 않나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의 화끈한 친구인 망한 나라 폴란드의 전권대사 팔레브스키 역시 멋졌습니다. 이 친구가 주인공인 스핀오프격 외전이 나와도 재미있겠더라고요.

마지막으로는,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잘 몰랐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황제의 모후 발리데 술탄이라는 인물 같은 경우겠지요. 프랑스 출신의 미녀로 노예시장을 거쳐 술탄을 낳아, 결국 황태후의 자리에 이르르게 된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이라니.. 이 여자 이야기만으로도 소설이 한권이겠어요! 
번역도 깔끔한 편이라 쉽게 쉽게 읽을 수 있고, 책 뒤의 "예니체리" 부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등 책 만듬새도 좋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소설이라는 측면 이외의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술탄의 근대적 개혁 칙령 발표 직전에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중심으로 술탄의 모후인 발리데의 보석 도난 사건, 그리고 하렘에서 일어난 궁녀 교살 사건이라는 사건이 계속 벌어져서 사건 자체는 풍성하지만, 이 모든 사건이 연관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야심의 추리에 의해 해결되는 것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야심은 충실한 수사관이긴 하지만 그가 수집하여 독자와 공유하는 정보는 대부분 쓰잘데 없는 것들이고, 중요한 정보들은 너무나 작위적인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흑막인 마지막 반전 부분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범인이자 흑막은 사건 자체를 일으키면 안되는 상황이거든요. 은밀하고 조용하게 거사를 진행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어처구니 사건을 벌인다니.... 설득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요. 그리고 거사가 실패하는 결말 역시 별로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흑막자체가 너무나 어설펐다!" 라고나 할까요.... 
아울러 당대 오스만투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실제 역사와 실제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세계의 판타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약점입니다.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픽션인 "팩션"으로 읽히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에 읽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음모" 과 유사합니다. 역사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역사물, 아니 "역사 모험물"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요. 야심부터가 이 작품에서 3번이나 죽을 뻔하고, 스스로도 격투로 사람을 잡고, 죽이고,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등 많은 모험이 담겨 있는데, 이럴 거라면 차라리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저 자신도 추리적인 부분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도 지루한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많은 모험과 더불어 나름 추리적 요소가 담겨있는건 사실입니다. 당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매력을 아주아주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점도 분명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저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국적인 매력에 푹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추리 매니아로서는 실망한 점이 분명 있기 때문에 시리즈 작품이 더 있더라도 계속 읽어볼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내용 및 트릭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2/21

천재탐정 미타라이: 살인사건의 진실 (2016) - 이즈미 세이지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지 편집자인 오가와가 미타라이를 찾아와 미해결 수수께끼 사건 해결을 요청했다. 미타라이는 고고섬에 변사체가 연달아 떠내려온 사건에 흥미를 갖고, 조사와 추리로 사체는 후쿠야마에서 해류를 타고 내려왔다는걸 알아냈다.
후쿠야마로 향한 미타라이는 다른 외국인 변사체와 함께,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된 사건과 마주쳤다. 그리고 사건에는 후쿠야마 굴지의 기업인 사이쿄 화학 공업과, 과거 '세이로'라고 불리우던 전국시대 병기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작가가 허락하지 않아서 영상화가 늦어졌다는,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시리즈 첫 번째 영화. 티빙에서 감상했습니다. 지난 연초에 감상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여러 사건이 등장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하다는게 장점입니다. 아래 순서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1. 고고 섬으로 6구의 변사체가 떠내려온다. 한편 후쿠야마 바다에서는 '수룡'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2.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이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되었다.
  3. 후쿠야마에서 외국인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사체를 옮기려던 외국인 무리를 검거했다.
  4. 역사 연구가 타키자와가 전국시대 병기 '세이로'의 존재를 알아냈다.
  5. 타키자와가 수상한 외국인과 부딪혔는데, 그는 이상한 알약을 떨어트렸다. 그 뒤 타키자와를 외국인 무리가 습격하려다 그녀의 저항으로 되려 추락사했다.
여기서 '외국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고고 섬 변사체, 후쿠야마 여성 변사체, 타키자와 습격 사건은 한 묶음입니다. 위험 약물을 제조 판매하던 외국인 무리가 관련자들 사체를 바다에 버렸고, 타키자와가 비밀을 눈치챘다 여기고 죽이려 했던 겁니다. 

이 사건들을 빼면 핵심 사건은 이비 부부 사건과 수룡의 정체, 두 가지로 중반 이후에는 두 사건, 그 중에서도 정통 추리물이라 할 수 있는 이비 부부 사건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 사건은 아기 보모 타츠미가 실수로 아이가 추락사한걸 감추려고 유괴극을 꾸몄으며, 복수를 위해 이비 씨 가족을 감시하던 마키타 사장이 이를 눈치채고 부부마저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게 진상인데 여러가지 단서, 복선을 나름 공정하게 보여주면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마키타 사장이 협박 편지를 남긴게 아니라서, 이비 씨에게 편지 내용을 읽어보라고 시켰고(내용 파악을 위해), 몸값 약속 시간도 선뜻 바꾸어 주었다는 등의 추리도 합리적이었어요.
'세이로'가 수룡이며, 이는 알고보니 잠수함이었다는건 역사 추리물 형태인데, 역사 속 기록과 연결하여 팩션처럼 전개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전국시대 병기가 흑선에 대항할 비밀무기로 기능한다는건 말도 안되지만, 잠수해서 흑선의 '외륜'만 노린다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설득력도 있었고요.

영화 만듦새도 좋습니다. 특히 촬영이 아주 인상적이에요. 요새 영화에서 보는 선명한 조명이 아니라, 자연광을 쓴 듯 자연스럽고 다소 낮은 채도의 약간 오래 전 영화같은 화면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작위적일 수 밖에 없는 추리물이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화면이 그래도 생생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촬영 덕분에 후쿠야마, 세토 내해 일대를 배경으로 삼는, 일종의 '여정 미스터리'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주연 타마키 코지의 미타라이 연기는 본격물 탐정으로서의 모습에 충실해서 나쁘지 않았어요. 전형적이지만 이런 작품 속 탐정들이 뭐 대부분 그러하니까요. 만약 미타라이가 실제로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는 이미지는 잘 전해줍니다.
하지만 추리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비 부부 사건은 마키타 사정의 동기, 그리고 경찰 수사 부분에서 아쉽거든요. 단순 복수로 이런 엽기적인 범행을 벌인다? 설득력이 낮습니다. 아기가 이미 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앙값음이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외국인 수하들을 시켜 진작에 복수할 수도 있었는데 이런 기묘한 범행을 구태여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못합니다. 이비 씨 가족을 꾸준히 감시해왔다는 설정, 성공한 사업자가 자기 공장에서 불법 의약품을 제조한 이유도 작품 내에서 조금 설명해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경찰은 이비 씨가 과거 과격한 환경 단체 시위를 했고, 그 시위 탓에 사이쿄 화학공업 관계자가 자살했다는걸 알아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거에요. 영화에서처럼 '하나 뿐인 아들의 행방은 지금 알 수 없다'며 대충 흘려보낸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잠수함 세이로를 마키타 사장이 타고 도주하던 화물선에 충돌시켜 멈추는 장면은 뭔가 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당황스럽기만 했거든요. 이렇게까지 해서 화물선을 멈춰야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미타라이 시리즈 팬이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동안 저는 충분히 즐거웠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02/18

7퍼센트 용액 - 니콜라스 메이어 / 정태원 : 내게는 별점 4점!

셜록 홈즈의 7퍼센트 용액 - 8점
니콜라스 메이어 지음, 정태원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코카인(이른바 7퍼센트 용액) 중독에 빠진 홈즈는 악의 원흉으로 지목한 모리어티 교수를 응징하기 위해 집착했다. 홈즈의 중독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왓슨은 치료를 위해 유명 의사 프로이드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왓슨의 머리로는 홈즈에게 들키지 않고 그를 프로이드와 만나게 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왓슨은 홈즈의 형 마이크로포드와 상의하여 홈즈를 프로이드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게 할 계획을 짜냈다....

출간 전 부터 셜록 홈즈 팬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입니다. 셜록키언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는 파스티슈 작품인 덕분입니다. 홈즈 완역본은 물론, 다른 파스티슈물들까지 출간되고 있는(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 베이커가의 살인 등등등) 최근 몇년 사이의 홈즈 붐에 비하면 출간이 오히려 뒤늦은 감이 듭니다. 그래도 출간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반갑습니다. 일본어 문고판으로 구입해 놓긴 했는데 잠깐 보니 문장이 너무 답답해서 독서를 미루던 차였기에, 국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고나니 과연 유명할만 하더군요. 저같은 홈즈 매니아들이 푹 빠질 수밖에 없는 디테일한 설정과 다양한 잔재미들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본적인 이야기 설정부터 셜록 홈즈 첫번째 시즌의 마지막 이야기였던 모리어티 교수와의 사투, 그리고 이른바 "라이헨바흐의 비극" 에 관련된 놀라운 진상을 전해줍니다. 런던 범죄계의 나폴레옹인 모리어티 교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더불어 이 사건 자체가 왓슨이 날조한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와 또 다른 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 내용이거든요. 아울러 현대 정신의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관련되어 있는건, 셜록 홈즈를 가공의 인물에서 현실로 끌어내 줍니다. 이러한 현실 세계와의 크로스오버는 다른 셜록 홈즈 파스티슈 작품에서도 많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둘의 만남이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셜록 홈즈의 추리 방식과 유사하다는걸 이야기에 잘 녹여내고 있어서 작위적이지 않고 설득력있습니다. 팩션같은 느낌도 좋았고요.

그 외에 셜록 홈즈가 처음 만난 프로이드에 대해 추리하는 장면, 후반부 주요 사건인 바론 부인 낸시 슬레이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등 명탐정 홈즈스러운 추리법도 원전에 충실해서 추리적인 가치도 높습니다. 여러 고정 캐릭터들 - 모리어티를 비롯하여 마이크로포드 홈즈, 허드슨 부인, 위긴스, 토비 등등등 - 의 등장 및 충격적인 홈즈의 과거사가 밝혀지는 과정도 팬으로서 무척이나 반가웠고요. 다양한 당대 문물이 뒤섞이지만 난잡하지 않고 외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가끔 하는 묘사도 수준급입니다. 기타 여러가지 사항들을 자세하게 주석으로 설명하는 친절함도 책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셜록 홈즈와 당대에 대한 디테일을 차치하더라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재미가 뒷받침 되는 것 역시 명성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셜록 홈즈에게 닥친 위기를 왓슨이 친구로써 고민하고 그것을 극복하게 도와주는 전반부도 재미있지만, 작게는 한 미국여인을 도와주고 크게는 유럽에 임박한 전쟁을 막아낼 목적으로 활약하는 홈즈가 그려지는 후반부는 그야말로 모험 소설로 손색없는, 활극적인 재미마저 선사해주고 있기에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저같은 홈즈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작품입니다. 후반부 활극이 좀 홈즈스럽지 않았던 점, 그리고 전쟁 위기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 모리어티 교수에 대해 이후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 점 등 약간의 감점 요소가 있지만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셜록 홈즈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국내 추리문학계를 위해 헌신하신 정태원 선생님의 번역과 후기도 놓치지 마세요.. 

아울러, 이 책을 읽고 경성판 셜록 홈즈 파스티슈라 할 수 있는 "경성탐정록"도 읽어 주시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2008/07/01

위고 카브레 1,2 - 브라이언 셀즈닉 / 이은정 : 별점 3점

위고 카브레 2 - 6점
브라이언 셀즈닉 글.그림, 이은정 옮김/꿈소담이

고아 위고 카브레는 번잡한 파리의 기차역에 살고 있다. 위고의 고단한 삶의 목적은 사고로 죽은 아버지가 남긴 자동 인형 수리를 마치는 것. 그래서 위고는 행방불명된 삼촌의 시계지기 일을 대행하고 때때로 도둑질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와중에 책을 좋아하는 소녀 이사벨과 기차역에서 장남감 가게를 하는 괴팍한 할아버지와 복잡하게 얽히게 된 위고는 이사벨의 도움으로 마침내 자동인형을 복구하는데 성공한다. 자동인형을 동작시키자 인형은 곧바로 수수께끼와 같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일종의 그림책입니다. 2008년도 칼데콧 상을 수상한 작품이네요. 조금 조사해 봤더니 칼데콧 상은 가장 뛰어난 그림책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주는 상이라고 하는군요. 제가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쟝르에 혹해있기도 하고 작품의 소개글이 너무 근사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구입해 읽어본 책입니다. 책 내용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브라이언 셀즈닉의 디테일한 연필화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그런데 읽고난 감상은 뭐랄까.. 좀 속은 느낌입니다. 1권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는데 2권에서 너무 쉽게쉽게, 엄청난 해피엔딩으로 풀어버리는 바람에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고 너무 뻔해지거든요. 동화에서 너무 큰 걸 기대한 제가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1권은 정말 굉장히 좋았기에 2권의 결말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더군요. 게다가 별 내용도 없는데 하드커버 양장본 1,2권으로 나온 형태는 용서가 안됩니다. 원서는 한권이던데 말이죠. 국내 종이질이 더 후진가?

어쨌건 저에게는 내용보다는 그림 쪽이 훨~씬 가치가 많은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돈이 아깝기도 하네요. 그래도 조르주 멜리에스라는 실제 영화계의 선구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팩션적 요소와 더불어 꿈(?)과 희망(?)을 전해주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화로서 부족함은 없습니다. 애니메이션같은 연출을 보여주는 그림도 굉장히 좋고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보기에는 많이 유치했기에 마케팅을 좀 잘못한거 같긴 한데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라면 충분히 즐길거리가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그래서 무난하게 3점 줍니다. 제가 나이가 들은게 잘못이지 책 자체는 괜찮았으니까요.
 
아울러 영화화가 계획되어 있다고 책 띠지에서 광고는 하고 있는데 최근 어떻게 구현될지 좀 궁금해지는군요. 영화로 만들기에는 스케일이 많이 딸려보이거든요. 뭐 대단한 액션이나 효과가 있는 것두 아니고.... 차라리 브라이언 셀즈닉의 일러스트를 그대로 살린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 좋겠습니다.

2004/10/23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사나이 - 켄 폴레트 : 별점 2.5점

1914년, 영국 귀족원 의원 월든 백작에게 윈스턴 처칠이 갑자기 찾아왔다. 처칠은 군비를 확충 중인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 러시아와의 동맹을 수립해야 한다는 밀명을 내렸고, 이에 백작은 처조카이자 러시아 짜르의 조카이자 해군 제독인 알렉스와의 회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회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펠릭스는 알렉스를 암살하기 위해 영국으로 출발했다. 무고한 러시아 민중의 전쟁 참여를 막기 위함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첩보물 "바늘구멍"의 원작자 켄 폴레트의 역사 첩보 스릴러입니다. 1차대전 직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여 무정부주의자의 암살 계획을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답게 바늘구멍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적대국의 스파이이자 악당인 주인공이 주변 여성(?)의 도움으로 수차례의 도주 끝에 임무에 성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못한다는 - 바늘구멍은 최후의 순간에 실패하고 죽어버리긴 했지만 - 설정이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무방하거든요. 

그래도 실존인물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는 전개(특히나 처칠의 악역스러운 묘사!)로 팩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이는 영국 귀족에 대한 상세한 세부 묘사(파티나 체면을 위한 여러 의식 등)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암살, 모험물로도 빼어납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 직접 제작하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암살 계획 및 발각된 펠릭스의 수차례에 걸친 탈주극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무엇보다도 타락하고 아무 생각 없는, 자신밖에 모르는 영국과 러시아 귀족들보다는 무정부주의자의 편을 들고 싶어지는 전개가 인상적이에요. 펠릭스는 악역처럼 묘사되고는 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일종의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니까요. 때문에 집념의 암살 계획은 성공하지만 아무 소득없이 끝나버린다는 결말은 굉장히 슬펐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에 집착한 듯한 불필요한 성적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월든 백작의 딸 샬롯의 지나친 정치 참여 의식도 전혀 설득력이 느껴지지 못했고요. 마지막으로 펠릭스와 리디아, 그리고 샬롯과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극적 장치이긴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비슷한 소재였던 쥘 베르느의 "황제의 밀사" 쪽이 저는 훨씬 마음에 드네요. "황제의 밀사"나 다시 구해서 읽어 봐야 겠습니다.

2022/07/01

삼개주막 기담회 - 오윤희 : 별점 2점

삼개주막 기담회 - 4점
오윤희 지음/고즈넉이엔티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포나루에 있는 , 과부 주모가 세 아이와 함께 운영하는 삼개주막을 찾은 손님들이 하는 기담 내지 괴담을 엮은 단편집입니다.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한국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게 눈길을 끕니다. 묘사도 마음에 들고요. 특히 여러 한국 요리 묘사가 좋습니다. 실제로 주막에서 먹었음직한 요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숙소와 주막을 겸하는 객주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마음에 들고요. "열녀" 속 등장인물인 허씨 가문의 아이 율이가 후일 장사의 귀재인 허생전의 허생이 되었다던가, 주막집 장남 선노미가 연암 박지원의 기담회의 이야기 꿈이 된다는 등 실제 역사와 고전을 버무리는 팩션 스타일 전개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괴담치고는 섬찟함이 부족하다는건 문제입니다. 단순한 치정극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던가, 인간이 더 무섭다는 식으로 공포를 자극하는 이야기는 전무합니다. "열녀"에서 허씨 가문 도련님이 본 건 그네를 타는 미모의 아낙이 아니라 목을 맨 형수 정씨의 사체가 흔들리는 모습의 환영이었다는 정도만 눈여겨 볼 만한데, 이는 오노 후유미의 "귀담백경" 속 "마음에 들다"와 똑같은 설정이라서 "귀담백경"을 읽은 저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미 아는 내용에서 무서움을 느낄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네를 타는 아낙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다"보다 오히려 못하기도 하고요.

이야기들도 앞서 설명드린 몇몇 요소를 제외하고는 딱히 한국적인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특별히 시대 배경을 따른다기보다는 일본 괴담물에서 보았음직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배경으로, 특정 가게를 찾은 손님으로부터 듣는 괴담물이라는 설정부터가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의, 그 중에서도 '미시마야' 시리즈와 너무 비슷하지요. 선노미가 괴담을 그림으로 그린다던가, 기담을 이야기하는 이야기꾼 역할을 맡게된다는 것도 미시마야 시리즈와 유사하고요. 이야기를 도맡아 '듣는' 역할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는걸로 역할만 반대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설정도 공양을 겸해 그림을 그리는 미시마야보다는 빈약해 보였고요. 

또 첩의 저주로 자기가 사산했다고 생각한 정실 부인이 첩과 첩의 아이를 죽였는데, 그 이후 정실 부인이 낳은 딸이 첩의 환생이었다는 "첩의 환생",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우연히 찾은 폐가가 알고보니 과거 보러가던 원래 친아버지인줄 알았던 양부의 모함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던 친부 집이었다는 "과거 보러 가는 길", 유괴된 아이가 '고독'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이다가 죽은 뒤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온다는 "유괴된 아이"는 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입니다. 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이계록" 등의 중국 괴담이 바로 떠올랐어요. 

수록작 중 독한 시어머니가 남편을 잃은 며느리를 살해한 뒤, 자살한 것으로 꾸며 '열녀' 칭호를 받으려 했다는 "열녀"정도만 조선을 무대로 했다는 인상을 주지만, 앞서 말했듯 그네를 타는 여인의 환각 등 다른 일본 괴담물에서 이미 접했던 설정이 등장해서 그리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꼬인 가족 관계를 남발하는 전개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보러 가는 길"의 선비 세진의 아버지가 알고보니 친아버지가 아니라 원수였다던가, "열녀"의 정씨 남편은 전처의 아들이라 시어머니가 도련님을 더 챙겼다던가, "옹기장의 꿈" 속 옹기장이 박씨의 아들 희동이는 알고보니 옹기장이의 친동생같은 제자 덕배의 씨였다던가, 심지어 주막집 맏아들 선노미까지 도망친 노비의 아이였다는 식인데, 너무 지나치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의 아류작으로만 보입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로 했다면 더 한국적인 소재가 등장했어야 했습니다. 별로 무섭지도 않아서, 딱히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저도 다음 권은 읽어볼 생각이 별로 들지 않네요.

2008/06/10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 - 데이비드 리스 / 서현정 : 별점 3점

암스테르담의 커피 상인 - 6점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대교북스캔(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

암스테르담의 상인 미후엘 리엔조는 한번의 파산으로 동생 다니엘에게 얹혀 사는 신세지만, 전부터 알고 지냈던 네덜란드 여인 게이트라위드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커피 거래를 조작하자는 제안으로, 리엔조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구상하여 3000길더나 되는 돈을 투자 받았다. 하지만 이전의 악연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암스테르담 유대인 조직 마아마드의 실력자 파리도의 견제 등으로 서서히 게이트라위드의 배후세력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었고,. 결국 최후의 거래를 통해 파리도와 단판 승부를 벌일 결심을 굳힌 미후엘은 금기시 되어 있는 마지막 작전을 펼치는데...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들의 주인공인 유다의 사자 벤자민 위버가 등장하는 추리물인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위버의 조부뻘인 미후엘 리엔조가 등장하는, 추리적 요소는 별로 없는 역사 기업 소설입니다.
추리적 요소라면 커피를 대상으로 한 작전세력(?)의 진정한 흑막이 누군이냐에 대한 것인데, 작중에서 계속적으로 음모의 주체로 등장하는 미후엘의 라이벌 파리도가 결과적으로는 흑막이었고, 회고록 형태로 삽입된 고리대금업자 알페론다의 기록을 통해 배후의 암투가 상세히 드러나는 탓에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또 마지막 선물시장에서의 바람 장사 작전은 너무 쉽게 이루어져서 맥이 빠집니다. 과정은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잘 표현되어 있어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에 시시하고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아심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여 국면을 전환시키는 약간의 반전은 있지만, 사기와도 같은 책략이라 엄청난 음모, 그리고 두뇌싸움의 결말 치고는 뒷맛이 씁쓸할 뿐입니다.

그러나 아주아주 재미있어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래에 대한 불꽃 튀는 두뇌 게임과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 복잡한 음모가 아주 잘 묘사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당시 암스테르담과 유대인 사회에 대한 치밀한 고증 및 묘사는 역시나 최고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워낙 재미 측면에서 뛰어나기에 역사관련 팩션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한줄로 감상을 평하자면 "유대인하고는 절대로 거래하지 마라."

2012/08/23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상)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상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하)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먼저 읽었던 하권에 이은 상권.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4호 부검실
검은 정장의 악마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잭 해밀턴의 죽음
죽음의 방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그다지 무섭지 않으며 강한 심리 묘사가 중심이라는 특징은 하권과 동일합니다. 그래도 교훈적인 주제는 하권만큼 많지는 않더군요. 조금 더 재미에 치중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 개인적인 베스트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제 4호 부검실>
의식이 있지만 몸 전체가 마비된 주인공이 부검실에서 부검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을 깨닫는다는 스릴러. 그에게 닥칠 부검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에 대한 긴장감이 부검실 의사들의 유머러스한 대화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블랙코미디같은 느낌도 큽니다. 결말이 예상대로이긴 하나 코미디로 보면 괜찮은 듯. 별점은 2.5점입니다.

<검은 정장의 악마>
한 노인이 20세기 초엽, 자신이 아홉살 때 만났던 악마에 대해 털어놓는다는 내용. 너새니얼 호손의 <영 굿맨 브라운>에 대한 개인적 헌사이며 킹 본인은 별볼일 없는 결과물로 생각했지만 반응도 좋았고 상도 탔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킹 의견에 동의합니다. 별볼일 없었어요. 호손 시대에 쓰여진듯한 오래된 감수성이 확실히 느껴지기도 했을 뿐더러 별로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게다가 전개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악마가 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제대로 추격하지 않은 이유도 명쾌하지 못한 등 떡밥만 가득할 뿐이라서 말이죠. 중후반부 악마와의 추격전 하나만큼은 긴장감이 넘치지지만 단점이 워낙 명확하기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한 세일즈맨이 자살을 하려다 평생 모은 화장실 낙서에 대한 노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한다는 드라마. 탁월한 심리묘사에 화장실 낙서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잘 어우른 걸작 소품. 길이도 적당할 뿐더러 삽입된 낙서들이 참 적절하더군요. 그리고 열린 결말이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잭 해밀턴의 죽음>
딜린저 갱단의 일원이었던 잭 해밀턴의 죽음을 딜린저의 오른팔 호머 반미터가 회고하는 안티 히어로 물이자 신화이자 팩션. 실제로 있었음직한 생생함이 압도적입니다. 딜린저에 대해 모르면 즐기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창작 동기가 킹이 호머 반미터가 파리에 올가미를 던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단지 그 정도의 소스로 이렇게나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내다니, 역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하나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싶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죽음의 방>
남미 한 국가 고문실에 잡혀온 미국기자 플레쳐의 탈출을 그린 모험물.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인, 서스펜스 하나만큼은 최고로 치고 싶은 작품입니다. 금연한 사람에게 담배를 피고 싶게끔 만드는 효과도 있는데 흡연 장려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은 그닥이나 흥미진진한 것은 확실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다크 타워> 시리즈의 번외편 단편이라고 합니다. 원전을 읽지 않아 세계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은 <북두의 권> + <트라이건> 정도 되려나요? 이 작품집에서 가장 긴, 중편에 가까운 길이를 자랑합니다.
일단 수녀들의 정체, 녹색 괴물들과 끔찍한 벌레들이 등장하는 등 호러 판타지로서의 묘사와 설정은 좋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된 히어로와 그를 돕는 비련의 히로인 그리고 둘에게 닥친 비극적 결말이라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조금도 더 나아간 것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이래서야 인어공주의 다크버젼일 뿐이죠. 물거품이 아니라 벌레가 되었을 뿐.
때문에 제게는 알맹이가 별로 없는 흔해빠진 호러 판타지였을 뿐입니다. 젤라즈니가 왜 대단한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사람을 자살로 유도하는 초능력을 가진 딩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에 고용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자신이 살인에 이용되었음을 깨닫고 탈출을 결심한다는 이야기.
설정도 흥미진진하고 이야기도 재미있기는 한데 영화로 따지면 기본 설정과 주인공 소개 후 막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할 때 끝나는 느낌이에요. 기-승 까지만 있다는 느낌? 그래서 완성도는 높이 쳐주기 어렵네요. 뒷부분을 따로 본다면 모를까.
덧붙이자면 작가 스스로 밝힌, 창작 동기인 잔돈을 버리는 청년에 대한 설명도 그닥 잘 되어 있지 않더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3/01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2024) - 나가오카 치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괴도 키드가 히지카타 토시조에 썼다는 일본도를 훔치려 했다. 이 칼들을 모으면, 오노에 재벌 선대가 남긴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핫토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키드는 칼을 훔쳐갔지만, 암호를 풀 수 없어서 코난 일행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 오노에 가문 변호사가 살해되었고, 경찰은 모리 탐정, 핫토리와 함께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보물 찾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보물을 노리는 무기 상인 카도쿠라가 오노에 선대로부터 칼을 맡았던 전직 사범 후쿠시로를 납치했고, 괴도 키드를 쫓던 나카모리 경부도 카도쿠라에게 저격받아 중상을 입고 마는데...

"흑철의 어영"에 이은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의 27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의 유명 관광지 하코다테를 배경으로 전설적인 보물과 연쇄 사건이 얽힌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한 암호가 등장하는데, 전통 일본도의 구조와 히지카타 토시조가 남긴 시집, 하코다테의 오릉곽 등 실존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몰입감을 높이며, 사라진 성릉도 대신에 히지카타 토시조가 칼싸움 중 남겼다는 자국의 본을 떠서 코등이를 만드는 이야기는 팩션같은 재미도 줍니다. 덕분에 2차 대전 당시 숨겨진 무기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도 그럴듯하게 포장됩니다.

주 무대인 오릉곽은 물론, 여러 하코다테의 실제 명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코다테 뿐 아니라 모미지가 좌충우돌하면서 다른 홋카이도의 명소를 보여주기까지 하고요. 덕분에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여정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엔딩에서는 실제 사진이 보여지는데, 꼭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판 코난 특유의 비현실적인 액션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케이블카 선로를 따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리거나, 비행기 날개 위에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건 고속 열차가 탈선하거나,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고 침몰하는 것에 비교하면 소소한 편이지요. 실제 명소들이 무대인 덕분이기도 할 텐데,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성이 유지된다면 좋겠습니다.

시리즈 팬으로는 핫토리 헤이지가 핵심 멤버로 활약한다는게 좋았습니다. 제 최애 캐릭터 중 한 명이거든요. 핫토리가 카즈하에게 고백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모미지의 훼방으로 고백에 실패하는 장면 등은 충분히 즐길만 했고요. 신이치와 괴도 키드가 닮은 이유(알고보니 사촌간!)가 밝혀지는 쿠키 영상도 호불호가 갈린다는데,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괴도 키드 세계관과 엮을 필요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요.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너무 허술합니다. 초반에는 칼을 훔치려는 키드와 핫토리, 코난과의 대결이 펼쳐지고, 그 뒤에는 보물을 찾으려는 암호 해독이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만 중심으로 전개해도 차고 넘쳤을 텐데, 경찰이 개입하게 하기 위해 변호사 살인 사건을 삽입한건 무리수였습니다. 애초에 범인이 저지를 이유가 없었던 사건이기도 했고요. 키드 역시 칼을 훔치려다가 돌려준 이후에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어서, 계속 등장하는건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동기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전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했던 무기라 하더라도, 21세기에 경제적 가치를 가질리 없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고, 악당들이 경찰에게 총질을 하고 일본 대도시에서 폭탄 테러를 하면서까지 이를 찾아다니는 전개는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다른 이야기도 이 때문에 여러모로 이상하고요. 차라리 금괴가 보물이라는 설정을 밀어붙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암호 풀이의 과정은 좋지만,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마지막 장면은 많이 허술했습니다. 트릭은 성릉도의 코등이(?)의 모양이 오릉곽과 동일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먼저 기구를 띄운 뒤 칼을 바라보면서 오릉곽과 코등이의 형태가 일치하는 고도를 찾아냅니다. 기구 고도에 위치하는 장소는 하코다테 산 밖에 없으니, 하코다테 산의 이 고도 위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건데, 실존하는 장소에 기반한 트릭이라는건 장점이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구를 띄우는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면 고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칼을 세우는 위치에 따라서도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크고요. 기구에서 산을 가리키는 정확한 방향을 모르면, 이 역시 오차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야 '하코다테 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라는 말과 별다를게 없어서,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암호를 풀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평작은 된다 싶네요.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2012/01/23

이니그마 - 로버트 해리스 / 조영학 : 별점 2.5점

이니그마 - 6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톰 제리코는 선배 앨런 튜링의 소개로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 부서에 배치된 후, 독일군 기기 중 가장 어려운, 4중 회전자를 채택한 이니그마 "샤크"를 해독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건강을 해친 톰은 요양을 떠났지만, 고작 3주 후 샤크의 체계가 바뀌어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와 동시에 옛 연인 클레어의 행방을 뒤쫓다가, 그녀의 방에서 훔쳐낸 암호문을 발견하는데...

역시나 물만두님의 리뷰집을 읽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된 작품입니다. "그들의 조국"으로 데뷔한 로버트 해리스의 두 번째 작품으로, 45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첫 작품은 가상 역사물이었지만,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 블레츨리 파크를 무대로 한 팩션입니다.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와는 달리 디테일이 확실해서 좋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니그마와 블레츨리 파크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는데, 소설은 이니그마에 대한 고증과 암호를 풀어내는 과정이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거든요. 암호 해독에 관심이 있다면 자료 삼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해 줍니다. 실제 이니그마 해독 과정이 중심이라 독자가 암호 해독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성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또한,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 축인 '이니그마 해독'과 '클레어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 중에서 클레어 실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균형 있게 전개하는 것도 좋았어요. 거대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단서를 알아내야 하고, 그 단서가 되는 것이 수송 선단을 발견한 U보트의 통신 암호라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그로 인한 서스펜스 (명확한 시간 제한이 생기므로)를 영화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박진감 있게 서술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가 너무 길고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톰 제리코의 불안한 심리 묘사와 옛 연인 클레어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클레어에 대한 비중이 커진 탓에, 진짜 여주인공인 헤스터의 존재가 묻혀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제리코가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와 함께 클레어의 실종에 얽힌 진상과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는 전개는, 영화에서 초반에 간결하게 처리한 것처럼 소설에서도 요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밀도 있는 상세한 묘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부분은 장황한데 반해,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너무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이 있어 강약 조절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확실하게 정리하며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마치 연재 종료를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만화의 엔딩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한, 폴란드인 푸코프스키가 가족을 위해 카틴 숲 학살 관련 암호문을 몰래 해독하려 했다는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애초에 암호문 내용이 카틴 숲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스파이로서 해당 메시지를 중개했다고 설명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품 내에서 해당 암호문은 해독조차 시도되지 않았다고 묘사되며, 가장 뛰어난 암호 해독 전문가인 제리코조차도 해독이 기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어려운 암호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사실 위그램이 심어놓은 블레츨리 파크 감시용 스파이였다는 설정은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나름 반전 요소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꼭 필요하지는 않으며 퍼그에게 의도를 가지고 암호를 전해주었다는 점도 현실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애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퍼그의 배후를 찾기 위한 작전이었다면, 주객이 전도된 셈입니다. 이 암호 때문에 퍼그가 독일 쪽에 붙으려 한 것이라면, 차라리 단순한 미행이나 감시를 붙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U보트를 뒤쫓는 암호 해독 요원들의 시간 제한이 있는 작전과, 또 다른 음모가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서스펜스와 재미는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알리스테어 맥클린 스타일 (짧고 임팩트 있게)로 쓰였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 둘을 비교한다면 영화 쪽이 더 낫습니다. 일반 독자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해독 장면보다는, 클레어의 실종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거든요. 결말 또한 영화 쪽이 깔끔하고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 시종일관 을씨년스럽고 어두운 분위기의 원작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톰 제리코가 마지막 퍼그와의 추격전 이후 요양할 때 읽었다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목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13인의 만찬", "명탐정 파커 파인",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목사관 살인사건" 등, 작중 주인공이 읽는 책들이 제 취향과도 묘하게 어울려서 더욱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