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읽어버린 세계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읽어버린 세계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05/03/13

드래곤과 조지 - 고든 R 딕슨 / 강수백 : 별점 3.5점

드래곤과 조지 - 8점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시공사

대학강사 짐 액커드는 박봉에 시달리지만 사랑하는 약혼자 앤지가 있어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는 가난한 청년, 그러나 어느날 앤지가 조수로 일하던 연구실에서 앤지가 애스트랄 투시 기계의 오작동으로 다른 세계로 전송되는 사건을 목격하고 장치를 이용하여 그녀 뒤를 쫓게 된다.

그러나 짐이 도착한 곳은 중세시대의 영국과도 같은 세계고 짐 자신은 드래곤의 육체에 전송되어 버린 것이었다! 앤지의 행방을 쫓던 드래곤 짐은 그녀가 "암흑의 권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마법사 캐롤리너스에서 듣고 그녀를 구해내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동반자"들을 모아 암흑의 권세를 쓰러트리는 모험에 착수한다.

용맹한 기사 브라이언과 원래 드래곤이었을때부터의 친구인 말하는 늑대 아아라, 그리고 활의 명수 다휘드, 황야의 무법자 가일즈와 그녀의 딸 다니엘,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 드래곤인 스므르골과 호수 드래곤 세코등과 힘을 합쳐 짐은 암흑의 권세에 도전하게 되는데....

아주 어렸을적에 TV에서 "용이여 불을 뿜어라!"라는 인상적인 영국풍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물리학을 가르치는 주인공이 보드게임같은 게임을 하다가 환타지 세계로 정신만 이동하여 용의 몸에 들어가 그 세계의 악과 싸운다라는 설정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악의 두목 앞에서 현대 물리학 이론을 열거하며 환타지 세계를 붕괴시키는 마지막 결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죠.

이 작품은 이 애니메이션과 기본적인 설정이 동일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환타지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충분해요. 용과 기사, 아름다운 레이디 등 이런 류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들에서 시작해서 중세사 전문가인 작가의 지식이 디테일하게 살아있는 궁수들에 대한 묘사나 말하는 늑대같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결합되어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짐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온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이 세계에 남기로 결심한 결말부는 애니메이션과는 반대더군요.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여주인공인 공주가 주인공의 세계로 온다는 결말이었는데 말이죠. 허나 소설도 워낙 매력적인 동반자들과 함께 했기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결말이에요.

하지만 상당히 기발하고 유머스럽게 풀어나갔던 전반부에 비해 암흑의 권세와의 실제 한판 승부는 생각보다 시시한 편이라 약간 불만스럽긴 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아이디어가 도입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데, 결국 순수하게 힘대 힘의 승부를 보여주기 때문에 좀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도 조금 있고요. 물론 드래곤 대 드래곤, 오우거 대 드래곤 등 화려한 등장인물의 리얼한 전투 묘사를 즐기는 즐거움은 컸지만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전통적인 영국 환타지의 줄기를 어느정도 충실히 따르면서도 유머와 독특함이 잘 살아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재미 역시 빠지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SF중심의 그리폰북스에 이 작품이 왜 포함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는 뒷부분 해설도 볼거리였습니다. "반지의 제왕"같은 거대 장편에 압도되신 분들이라면 기분 전환을 위해 가볍게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다시한번 "용이여 불을 뿜어라!"를 보고 싶어 지는군요. 어디 구할데 없나....

2010/08/27

사가판 조류도감 / 어류도감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4점 / 3점

사가판 조류도감 - 8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글 그림, 김동욱 옮김/세미콜론
사가판 어류도감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글 그림, 김동욱 옮김/세미콜론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은 "재괴지이",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 "서유요원전" 정도만 읽어보았습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은 완독한 셈이지만 대표작이라는 "암흑신화" 등을 읽지 못했으니 팬이라고 하기도 쑥스럽고, 작가에 대해 잘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작가만의 '흉내낼 수 없는 기이함' 이 워낙에 매력적이라 국내 출간된 작품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번에 출간된 두 편의 단편집을 같은 이글루스 블로거이신 '벨제뷔트'님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고난 소감부터 이야기하자면 그야말로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를 만끽하기에 충분한 작품집이라는 것입니다. "조류도감"에는 6편의 작품이, "어류도감"에는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판타지와 SF는 물론 환상동화, 개그, 일상계 호러와 서스펜스에다가 전기-기담물까지 작가가 손댄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어 내용도 풍성할 뿐 아니라 특유의 기이함이 전편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두 권 모두 다 작가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구태여 구분하자면 "어류도감"쪽은 '기이함'보다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편한 구성의 작품이 많고, "조류도감"은 조금 더 매니아적이고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류도감"이 더 마음에 들었고요. 작가의 진정한 매력은 '호러' 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제 생각을 만족시키는 작품이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조류도감"은 4점, "어류도감"은 3점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좋아하신다면 적극 추천할 수 밖에 없는 작품집입니다. 팬이시라면 '닥바구'(닥치고 바로 구입!) 해야 되는 책이랄까요. 좋은 기회를 주신 벨제뷔트님에게 다시금 감사드립니다(몰랐는데 학교 동문이시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학교 근처에서 만나 뵙고 싶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이야기 두 편만 소개해 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탑을 나는 새"

판타지 장르물입니다.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진 세계, 탑의 층마다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외부의 탑들도 각각 또다른 세계고요.

외부를 멀리하며 탑의 바닥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나선계단으로 이동한다는 세계관도 독특하지만("계단을 오르는 남자"와 조금 유사하기도 하네요), 외부 세계를 동경하던 주인공이 '천사'일 수도 있는 새 소녀와 사랑에 빠져 인간 세계를 버린 뒤 새들의 현실을 알게 되는 충격적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서늘한 맛이 정말 일품이었어요.

"새를 보았다"

두 소년은 거대한 새를 우연찮게 목격한 뒤, 새를 관찰하기 위해 찾아간 건물 옥상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다른 소년과 친구가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새의 정체를 나중에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상계 심리 서스펜스 호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공포는 없지만 새의 정체를 둘러싼 긴장감이 좋고, 마지막의 진상도 괜찮았어요. 일상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심리 서스펜스가 무엇인지를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 외의 작품들 중에서는 전기-기담물인 "호무치와케"와 "어류도감"의 "교인", 심리드라마 "물고기 꿈을 꾸는 남자"를 베스트로 꼽습니다.

덧 : 리뷰를 읽으신 트위터 지인께서 진짜 도감인줄 아셨다고 하시네요. 생각해보니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안의 온갖 상상의 동물들을 실제 도감형식으로 꾸며놓아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런 도감이 실제로 나온다면 그 역시 '닥바구!'

2020/11/1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로버트 바 외 / 이정아 : 별점 2.5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6점
로버트 바 외 지음, 이정아 옮김, 박광규/코너스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두 번째 권입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의 초기인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발표되었던 단편들이 수록된 앤솔러지입니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과 마찬가지로 정가 할인되었기에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셜록 홈즈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탐정들 등장이 많은게 이채롭습니다. 유명한 외젠 발몽, 마틴 휴잇을 비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당대 탐정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사나이, 자연인 명탐정 노벰버 조와 초창기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는 독특해서 인상적이더군요. 플랙스먼 로우는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수록작들 수준이 모두 높지는 않습니다. 셜록 홈즈의 영향을 짙게 받은, 모방작이 많은 탓입니다. 시대와 유행에 충실했지만, 뛰어넘지는 못한 셈이지요. "두 개의 양념병"이라는 걸작이 수록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수준 이하 작품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가 인하된 가격이 워낙 저렴하기에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거브 탐정, 일생 일대의 사건"

파일로 거브는 마대 자루에 꿰메어진 채 익사한 헨리 스미츠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다. 그의 활약을 모든 리버뱅크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끊어진 전구를 쥐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하는데...

도배 및 인테리어 사업을 하면서, 통신 교육으로 탐정이 된 파일로 거브가 활약(이라고 쓰고 좌충우돌이라고 읽는)하는 시리즈 단편입니다.

통신 교육을 받은 탐정은 "탐정 피트 모란"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피트 모란은 겉에 드러난 것들만 1차원적으로 해석하는 단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민따위는 하지도 않지요. 당연히 추리보다는 코미디가 핵심인 이야기 들이었고요. 이 작품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탐정에 대한 희화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요. 마을 주민 모두가 변장이라는 걸 알아채는 변장을 한 뒤 탐문 수사에 나선다던가, 파일로 거브가 펼치는 수사를 마을 주민 모두가 지켜본다는 등의 묘사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피트 모란" 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웃음거리를 제외하면, 나름대로는 추리물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 기묘하게 죽었던 헨리 스미츠 사건의 결정적 단서는 피해자가 쥐고 있던 전구였으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어디서 전구를 갈았는지?"를 파악한 뒤 피해자의 작업실로 올라가 전구를 가는 동작을 따라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거든요.
피해자는 자신이 만든 '양고기 자동화 포장 기계'로 넘어져 마대 자루로 포장된 뒤 강물로 던져졌던 겁니다. 단서를 찾고, 추리한 뒤 추리를 검증한다는 순서만큼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셈이에요. 추리라기 보다는 겉에 드러난 단서를 '추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넓은 범주의 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단한 추리는 아니며, 흡사 "월레스 앤 그로밋"을 연상케 하는 황당무계한, 일종의 다고베르트 머신같은 기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도 언급되긴 했는데, 단지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만 점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당연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 

로드 던세이니가 1934년에 발표했던 작품으로 장르 문학을 사랑하시는 모든 애호가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 고전 걸작 단편입니다. 마지막의 의외성이 돋보이는, 이른바 '기묘한 맛' 장르의 대표작이지요.

이전에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정통 추리물 성격이 강할 뿐더러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충실해서 놀랐습니다. 이는 마지막 반전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상세한 묘사를 통해 반전을 탐정역인 린리 씨가 룸 메이트인 스메더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스메더스는 살인 용의자 스티거가 구입했다는 양념 '넘누모'를 파는 행상인이라서 린리씨는 샐러드에 뿌려먹게 넘누모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메더스는 거절합니다. "고기와 짭짤한 음식에만 뿌려 먹는 겁니다"며, 잘 모르고 채소에 뿌려 먹더라도 "두 번은 안 하죠"라고요. 이 말로 진상이 드러납니다!

2주일 동안 고기를 어떻게 보존했을지, 뼈와 정말 먹을 수 없는 내장 같은 부산물은 어떻게 처리했을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는 합니다. 그래도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고전 걸작임에는 분명해요.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린리 씨와 스메더스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더 많이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백작의 사라진 재산" 

외젠 발몽 시리즈 단편으로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에도 수록되었던 작품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트릭이 황당해서, 이전만큼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주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래시계" 

버트럼 이스트퍼드는 골동품상에서 오래된 모래 시계를 구입했다. 시계는 30분 정도 지나면 시간이 멈추는 문제가 있었다. 그날 밤, 모래 시계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던 (?) 버트럼 앞에 옛날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 모래 시계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190여년 전 자신이 참전했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시계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는데...

표제작으로 저자는 '외젠 발몽' 시리즈 작가인 로버트 바인데, 작품은 외젠 발몽 시리즈와는 관계없는 역사 판타지입니다.

일단, 모래 시계 소유권을 주장하던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해 준 전쟁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중위는 장군으로부터 기습 공격 작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걸 몰라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작전 실패 후 체포되었습니다. 장군은 '모래 시계 모래가 다 떨어지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리를 떠나고요.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 탓에 총살을 집행할 수 없었고, 장군도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총살 지시를 철회한다는 내용입니다. 긴박하면서도 왠지 모를 유머, 여유가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어떻게 버트럼 앞에 나타났는지부터 이유 불명이니까요. 왜 모래 시계가 파괴되고 중위는 사라졌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버트럼 이스트퍼드가 꾼 꿈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그래서 점수는 2.5점입니다. 여러모로 마무리가 아깝습니다.

"일곱 명의 벌목꾼" 

노벰버 조를 벌목꾼 막사 책임자 클로즈 씨가 찾았다. 작년에 나타났던, 벌목꾼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는 검은 가면이 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클로즈 씨로부터 범인 체포를 부탁받은 조는 파트너 쿼리치와 함께 막사로 향했다. 다음날, 강도를 막기 위해 여섯 명이 뭉쳐 떠났던 인부들이 강도를 당했다며 돌아 오는데...

탐정 노벰버 조 시리즈 단편입니다. 노벰버 조는 깊은 산 속에서 일하는 벌목꾼이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이지요.

전개 방식은 셜록 홈즈와 동일합니다. 주어진 단서를 통해 귀납적 추리를 펼쳐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여섯 명 벌목꾼이 차를 마셨던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행동 등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사소한 일이 단서가 된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마신 차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주전자를 씻었던 겁니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단서가 범인을 드러내는건 아닙니다. 범인을 드러내는건 돈을 숨겨 놓았을 막사를 해체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덕분이거든요. 이에 놀란 범인을 현장에서 잡는게 전부입니다. 차에 수면제가 들어있던건 분명해서, 그걸 씻으나 안 씻으나 별 차이가 없었고, 범인이 특정 시간에 개울가에서 무슨 짓을 했건 별로 중요한 단서가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완성도는 그닥이었습니다. 셜록 홈즈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한참 미치지 못해요. 벌목꾼이라는 직업이 유용하게 사용돼지도 못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부여한 가치도 역사적 중요성과 초판본 희귀성 뿐입니다. 엘러리 퀸도 '오지 탐정' 이라는 개념 도입만 높이 평가한 셈입니다.

"유령 저택의 비밀" 

잘 생각해보게.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말이지. 또한 거기에 덧붙여 이 단 하나의 발자국까지 잘 생각해보게 뭔가 번쩍하고 해답 같은 게 떠오르지 않나?" 

심령학에 정통한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가 등장하는 단편. 심령 현상도 과학과 추리로 풀어낸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나병에 걸렸다는걸 추리해 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고요.

그러나 진짜 유령이 나온거라는 결말 만큼은 영 별로네요. 이 정도까지 추리로 풀어내었다면, 사람이 꾸민거라는 진상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는 좋고, 추리도 볼만하지만 앞서 설명드렸듯 진상, 결말 때문에 감점합니다.

"레이커 실종 사건"

은행에서 수금을 담당하던 사원 레이커가 실종되었다. 그는 1만 5천 파운드를 지닌 채였다. 경찰은 그가 돈을 가지고 도주한걸로 판단했지만, 마틴 휴잇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

사립탐정 마틴 휴잇 (휴이트) 시리즈 단편입니다. 마틴 휴잇은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연재된 스트랜드 매거진 출신 탐정으로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이지요. 그래서인지, 작품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사건이 벌어지고, 탐정이 사건을 조사하여 추리 한 뒤, 경찰과 다른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이니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리한 결과가 의외라는 전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도 셜록 홈즈의 라이벌답게 추리적으로는 꽤 괜찮습니다. 수금할 때 레이커를 제대로 바라본 은행 직원은 거의 없었다, 은행 중 한 곳은 입구가 수리 중이었다는 수금 당시 정황, 그리고 레이커가 파리행 표를 살 때 본명을 댔고 독특한 우산만 채링크로스 역에 남겨졌다는 도주 정황을 통해 마틴 휴잇은 수금을 한 레이커는 변장한 가짜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합리적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의외성있는 반전이었을 테고요.

하지만 마틴 휴잇이 진범을 알아내는건 작위적입니다. 레이커 이름이 적힌 우산 속 광고지가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요. 광고지만 없었더라도, 이 범행은 완전 범죄가 되었을거에요. 광고 내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들에게 진범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광고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지요. 최소한 암호 정도는 써 줬어야 합니다. 이럴 거라면 마틴 휴잇이 구태여 발품을 팔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신문 광고란 속 수상한 광고만 보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마틴 휴잇 캐릭터도 문제에요. 유명세에 비하면 별다른 매력은 없기 때문이에요. 이름만 바꾸면 셜록 홈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형적이더라고요. 후대에 그나마 이름을 남긴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은 다들 차별화된 특징들이 있었지요. 도둑인 뤼뺑을 비롯해서 장님인 맥스 캐러도스,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안락의자 탐정 구석의 노인, 멋드러진 별명만큼은 길이 남은 밴 듀슨 (반 두젠), 법의학 탐정의 시조인 손다이크 박사처럼요. 물론 독특하다고 해서 역사에 길이 남는건 아닙니다. 아마추어 괴도 탐정 래플스처럼 지금은 잊혀진 존재도 허다하지요. 그러나 이는 작품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마틴 휴잇 시리즈는 추리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만큼, 마틴 휴잇만의 개성과 매력을 더하지 못한게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셜록 홈즈 스타일을 잘 따르고 있는,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이야기지만 단점이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바다 건너온 살인자"

로프터스 디컨 씨가 자택의 하치만 성상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현장은 거의 밀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고인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헨리 콜슨 씨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둘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헨리 콜슨 씨는 고인이 애지중지했던 '마사무네 검'이 사라졌다는걸 알아챘다. 그 검은 일본인 게이고 가나마로가 되찾기 위해 부탁과 협박을 반복했던 과거가 있었다. 가나마로는 원래 검의 소유주 아들로, 아버지 영전에 검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헨리 콜슨 씨는 게이고 가나마로가 일본으로 돌아갈 표를 예약했다는걸 알아내는데...

아서 모리슨이 쓴 단편인데 의외로 마틴 휴잇 시리즈가 아니네요. 내용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로, 마틴 휴잇이 등장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겁니다. 등장하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이 마틴 휴잇, 셜록 홈즈와 구분되는 특별한 매력이나 특기,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 했습니다. 추리가 진행되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거든요. 약간의 범인 심리 분석도 눈길을 끄는 요소였고요. 디컨 씨는 외출했다가 급한 용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집 안에 있었던 누군가가 범인이었을테고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왔을까요? 경찰은 침실 창문을 주목했지만, 도링턴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침실 창문으로 들어왔다면, 디컨 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침실로 향했을테고, 그곳에서 범행이 일어났을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요. 그리고 도링턴은 하치만 성상이 집에 들어온 날 범행이 일어났고, 성상이 원래 있던 상점에서 물건이 없어지고 부서진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하치만 성상 안에 누군가 숨어서 잠입했다'고 추리하지요. 물건 안에 범인이 숨는 이야기는 많을테지만, 이 정도면 꽤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되네요. 범인 카스트로를 특정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했습니다.

게이고 가나마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시킨 전개도 좋습니다. 앞서 피해자가 집착했다는 마사무네 검과 보라빛 옻칠 세공품 소개를 통해 가나마로가 한 말 - 큰 돈을 들여서 겨우 검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의미 - 의 뜻이 드러나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일본 물품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 했습니다.

물론 하치만 성상 무게에 대해 좀 대충 넘어가고 있기는 합니다. 사람 한 명 무게가 추가되었다면 이상함을 느끼는게 당연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범행을 저지른 카스트로가 다시 성상에 숨은 뒤 몰래 빠져나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한 몫 잡아서 도주 자금을 마련하는게 상식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단점은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빼어난 점이 분명 있고요. 탐정이 조금만 더 매력적이었다면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날 밤의 도둑"

프로비던트 은행 지점장 아일랜드가 텅빈 금고를 보고 혼절했다. 그런데 경비원 제임스 페어베언은 전날 밤, 지점장 아내인 아일랜드 부인이 지점장실을 향해 남편을 부르는걸 목격했었다. 아일랜드 부인은 그 사실을 부정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지점장이 지점장실 문을 통해 금고로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건강을 회복한 뒤, 범행 시간에 있었던 완벽한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그리고 그의 재산 상태는 완벽해서 금고 돈을 훔칠 필요가 없다는게 드러나는데...

'구석의 노인' 단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좋아해서 여러 편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낯서네요. 이전 다른 단편집 수록작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다른 단편집에서 빠진게 이해가 되더군요. 단순하고 뻔한 탓에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지점장은 범인이 아니다', '지점장 아내는 거짓말을 해가며 누군가를 감싸주려 한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결론은 쉽게 추리할 수 있어요. 범인은 바로 아일랜드 지점장의 아들이었던 거지요. 아들이 사건 발생 후 은행을 바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이 추리를 뒷받침하고요. 이 정도 사건을 구석의 노인에게 의지하는 버튼 양은 너무 무능력한게 아닌가 싶네요. 경찰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좋아하는 시리즈의 미번역 초역을 읽어보았다는 의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대리 살인" 

작가는 M.M 보드킨입니다. 작가는 영국에서 판사까지 역임했던 법조인이었다네요. 그래서인지, 클라이막스는 법정 공방이더군요. 정식 법정은 아니고, 검시이긴 합니다만 배심원이 배석하고,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하는 등 정식 법정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법정 미스터리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밀실에서 구식 전장총이 발사된 장치 트릭입니다. 물병을 돋보기처럼 쓴 게 진상이고요.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으로 익숙한 트릭이지요. 엉클 애브너는 1918년 발표되었으니 이 작품이 원조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작가 보드킨과 탐정 폴 벡이 포스트와 명탐정 엉클 애브너만큼 알려지지 못했다는 겁니다. 원조로서의 영광은 커녕, 잊혀져 버린거지요.

읽어보니 잊혀진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설 완성도가 별로인 탓입니다. 우선 쓸데없는 묘사가 많고 장황합니다. 에릭 네빌이 정원으로 나가 복숭아를 먹는 묘사가 2페이지에 걸쳐 설명될 이유는 없어요. 그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 트릭은 대충 넘어가는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에릭 네빌이 압박에 못 이겨 자백하고 쓰러진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어요. 트릭이 간파되었다 하더라도, 실수인지 살의가 있었는지 증명하는건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에릭 네빌이 정말로 목이 말라서 물병을 그곳에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엉클 에브너 시리즈가 훨씬 좋은 작품입니다.

2013/09/09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아놀드 베넷 외 : 별점 1.5점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4점 아놀드 베넷 외 지음,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도서출판 한스미디어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추리소설 앤솔러지. 유명 고전 작가들의 단편은 물론이고 초창기 추리 이론까지 풍성하게 실려있습니다.
1, 2권으로 출간되었는데 1권은 읽은 작품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고전 취향이라 2권부터 구입하게 되었네요. 2권 역시 다른 책에서 읽어본 작품이 제법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워낙에 목차가 괜찮고 또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 황금기 작품들을 주력으로 하고 있기에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입니다. 일본어 중역 느낌이 물씬 날 뿐더러 그 자체가 별로 매끄럽지 않아 읽기 힘들었어요. 악명 높은 동서 추리문고 최악의 번역도 이거보다는 좋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고전 황금기 걸작이 아닌 몇몇 현대 일본작가 작품이 섞여 있는 것도 기획 의도가 모호해 보여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기획의도만으로 3점은 충분하지만 번역은 용서가 안되네요. 좋은 기획의도가 번역 때문에 다 망가진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한스미디어의 다른 작품들은 괜찮았었던 것 같은데 대관절 영문을 모르겠군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지만 대부분 다른 책에서 훨씬 좋은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라진 기억" | 배리 퍼론

극작가 애닉스터가 완벽한 밀실살인 트릭을 생각했는데, 교통사고로 트릭을 잊어버린 탓에 술집에서 트릭을 알려주었던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

교통사고로 딱 필요한 기억만 상실한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전개, 그리고 마지막에 애닉스터가 상황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애닉스터만이 유일한 위험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서늘한 반전류의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

"살인!" | 이넉 아놀드 베넷

명백한 살인사건인데, 경찰이 수사 결과 몇몇 남겨진 단서를 통해 자살로 결론 내린다는 내용의 소품. 솔직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리 묘사에 대한 번역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피트 모란, 다이아몬드 헌터" | 퍼시벌 와일드

"탐정 피트 모란"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그때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별로인 탓에 작품마저도 후지게 느껴지는 기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께서는 "탐정 피트 모란"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 때문에 별점을 주기조차 어렵네요.

"골초는 빨리 죽는다" | 이자와 모토히코

"역설의 일본사" 말고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상을 많이 수상했던 유명 작가의 단편.

두 명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형식과 담배로 촉발된 살의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결말이 너무 심하게 별로였습니다.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어이없는 결말이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먹이" | 토마스 테셔

이형 생물체가 등장하는 크리쳐 호러물. 스티븐 킹의 비슷했던 작품(한 소년의 아버지가 점액질 괴물이 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애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극적 결말이라는게 차이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평하기는 어렵지만 공포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결말에서 반전이 돋보이는 것도 아닌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콜 Y의 비극" | 노리즈키 린타로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했던 작품이죠. 읽어보니 원작을 "직역"한 번역으로 읽기가 어렵더군요.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3점인 좋은 작품인데 안타깝네요. 솔직히 제 번역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들의 쇼핑" | 쓰쓰이 야스타카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해본 적 있는 이색작.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부들이 강도단을 조직한다는 내용입니다. 작품 자체의 수준은 그냥저냥이지만, 작가 특유의 섬뜩한 풍자 하나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가 백미!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살의" | 다카기 아키미쓰

역시나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굉장한 걸작입니다. 이른바 "일사부재리" 원칙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마지막 반전까지 빼어난 단편의 모범 답안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살의"라는 말이 들어간 작품들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은 하나같이 괜찮네요.

"아버지" | 토마스 H. 쿡

토마스 H. 쿡의 장편은 몇 권 읽어보았지만 단편은 처음입니다.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장편 못지않은 묵직함이 잘 전해지는 묘사가 아주 좋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무대 뒤의 살인" | 에드워드 D. 호크

총 3편의 초단편 Short-Short로 이루어진 작품.

예전에 읽었던 "4페이지 미스터리"와 유사하나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3편의 이야기 모두 논리정연하면서도 예상을 뒤집는 정통 추리물이거든요.

첫번째 작품은 사진 필름 원판을 가지고 협박하는 협박자가 살해된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저런 논리 퍼즐에서 많이 보았던, 다섯 번째 남자마다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는 이집트 전시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작품은 에스터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돋보였어요. 특히나 1만 2500달러라는 애매한 비용과 30분이라는 시간 공백을 설명하는 게 제법이었거든요.
마지막 작품은 살인사건은 전혀 상관없는 동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반전이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명성에 걸맞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오번 가문의 비극" | 매슈 핍스 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단편 미스터리 시리즈인 "프린스 자레스키" 시리즈!

그러나 별로 건질 게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프린스 자레스키 설정은 너무나 만화 같았고 사건도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아버지가 광인이 된 것을 왜 숨겨야 하는지도 불분명하고 사건 현장 윗층에서 과학교실을 열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을 하는 것도 와닿지 않았어요. 그냥 본인이 자살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수준 이하의 작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번역까지 별로라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불도그 앤드류" | 아서 체니 트레인

터니게이트 - 애플보이 사이의 영토 분쟁에서 불도그 앤드류가 지나가던 터니게이트를 문 뒤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는 법정극.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좀 무리지만 유머스러운 일상계 법정극으로는 충분히 읽을 만 했습니다. 재판장의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약간의 반전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번역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마크 트웨인이 연상되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내의 외출" | 자크 푸트렐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이 책에 수록된 제목은 "녹색눈의 괴물"이죠). 당대 보기 드문 일상계로 가치 높은 수작입니다.

그러나 별점을 주기 민망할 정도로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서 도저히 읽을 맛이 나지 않네요.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로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A 분장실의 수수께끼" | 자크 푸트렐

역시나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것과 같은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 여배우의 증발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장치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선보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핵심이 "최면술"이라는 게 문젭니다. 당시 최면술이 마법처럼 받아들여진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물로 생각되는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번역 역시 수준 이하였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윔지 경 단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검은별"과 동일한 스타일의 모험극.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오필리어 살해" | 오구리 무시타로

"흑사관 살인사건"의 오구리 무시타로가 쓴, 범죄학자이자 탐정 노리미즈 린타로가 등장하는 단편. 셰익스피어 스타일 연극 무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무대 장치를 이용한 기계장치 트릭에 더해 심리적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 등장하죠.

현실적이지 못한 트릭,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학적인 전개와 묘사, 거기에 동기까지 애매하여 전체적인 완성도가 낮습니다. 정통추리물로 보기도 어려웠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졌어" | 크레이그 라이스

"스위트홈 살인사건"의 크레이그 라이스가 쓴 단편. 주인공인 술꾼 찌질이 변호사 말론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네요.

의뢰인인 사형수 폴 파머 자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폴 파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끊어지지 않았어"를 단서로 마지막에 추리쇼까지 펼쳐 보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추리물입니다.

정통파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반부 딕슨 의사와의 대화로 병원에서 탈옥한 죄수가 있다는 단서를 전해주는 등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았고요.

메들레인 스타가 그냥 폴 파머와 결혼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텐데 성공 확률이 낮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옥의 티이긴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2/11/13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 니시자와 야스히코 / 김은모 : 별점 2점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인 소년 마모루 미키가미는 어느 순간 부모님과 떨어져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기숙학교에 재학하게 되었다. 그곳에 머무는 학생들은 그 외에 스텔라와 중립, 시인, 여왕님, 신하 (마모루가 붙인 별명)의 모두 6명이었다. 어느날 '교장 선생님'이 새로운 학생의 입학을 알리자 마모루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마모루는 '시인'에게 이유를 물었고, '시인'은 신입생이 오면 학교에 살고있는 무엇인가가 깨어나며, 과거 마모루가 전학왔을 때도 그랬다는 말을 해 주었다. 몇일 뒤, 신입생 루 베넷을 처음 만났을 때, 마모루를 포함한 학생들 모두는 세계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루 베넷은 입학한 첫날 사라져 버렸고, 그를 찾기 위해 '교장 선생님'과 '사감'이 학교를 비운 사이, 신하, 시인 등 다른 학생들과 선생들이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일곱 번 죽은 남자"와 '탓쿠 & 타카치' 시리즈로 유명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예전에 소개해드렸던 "헌책방 스탭의 추천"에서 반전이 놀라운 작품으로 소개되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숙학교에 모인 소년, 소녀들'이라는 주제는 일본 만화에서는 많이 보아왔는데, 이 상황에 대해 학생들이 하나씩 펼쳐놓는 추리가 초반부의 볼거리입니다. 맨 처음에 '중립'은 그들을 특수한 비밀 탐정으로 만들려는 목적이라고 추리합니다. '여왕님'은 그들이 전생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특별한 아이들이라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고 추리하고요. 다른 기억을 떠올릴 때는 현재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에 오기 전 기억이 없다는게 이유였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학교는 가상 현실 속 세계라는 '시인'의 추리였습니다. 기억 상실은 물론 '뒤틀림' 까지 설명가능했던 덕분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앨리스 살인게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 즉 케네스 더피도 가공의 인물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진상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반전도 놀랍습니다. 사실 학생들은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던 겁니다! 그들 모두 치매 탓에 12살 이후의 기억을 잃고, 12살에 갇혀 있던 상태였어요. 이는 '교장 선생님' 시워드 박사의 연구를 위해서였는데, 이 연구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수가 같은 착각을 하면, 그 착각이 객관적 사실로 변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인들이 10~12살 아이들이라고 착각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데 상당히 그럴싸했어요. 노인 모두가 자기들이 아이들이라고 믿고 생활하게 되었지만, 잘 모르는 신입생이 나타나면 노인을 억지로 어린 아이로 착각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뒤틀림'이 일어났다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고요. 역자의 말대로 "벛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가 떠오르기도 하만, 주인공들도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변주도 아주 좋네요.

반전까지 이르는 과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싫어하는 코튼 부인의 저염 건강식 요리, 게이트 볼 정도 밖에 없는 야외 활동, 열 살에서 열두 살 먹은 아이들치고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고방식과 말투가 어른스럽고 실제 그 또래들보다 지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 엄청나게 다양하고 방대한 단서를 통해 반전에 대한 단서를 사전에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단서들은 온갖 세세한 데에 이르고 있어서 공정함 측면에서는 최고 점수를 줄만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인 마모루가 영어를 금방 습득했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작 중에서는 '머리가 좋다' 고 설명되지만, 사실은 12살 이후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익혔기 때문입니다. '전화 부스' 방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최첨단 전자 장치들과 사건이 일어난 뒤 아이들이 '전화 부스'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를 걸 수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60년 뒤 제품들이라 최첨단으로 보였을 뿐이며, 전화도 미래의 물건이니 걸기 힘들었던게 당연하지요.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전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잠시 머물렸던 중계점이 있었다는 공통의 기억과 신문과 잡지는 물론 텔레비젼도 없는 시설, 사감 파킨스 씨 이름과 그가 내는 추리 퀴즈에 항상 등장하는 치매 노인 등 단서들은 그 외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 많은 단서들 중 가장 결정적인건 이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데니스 루드로가 '이 세계, 건물과 사람 모두 거짓이며 우리는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고 한 말일 테고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스텔라라는건 다소 뜬금없었지만, 학교 세계에 푹 빠져 소녀로 있고 싶었던 스텔라가 판타지를 깨트리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동기만큼은 중반에 소개되는 마모루의 종교관 - '자신의 판타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부정하고 말살하려 한다. 자신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이 피를 흘려도 태연하다.' - 으로 거의 돌직구처럼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야말로 전개 과정에서 독자와 정정당당히 승부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데니스가 사라진 상황에 대한 시인의 추리 등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듭니다. 곳곳에 헛점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학교는 가상 현실이라는 '시인'의 추리처럼요.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최신의 첨단 기술로 60년 전 과거에 사로잡혀서 최신 폰으로는 전화도 걸지 못하는 노인의 추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역자는 '등장인물들도 속고 있으므로, 이 작품은 서술 트릭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반쯤은 의도적인 설정 오류 때문에 서술 트릭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반전을 숨기기 위한 색다른 추리를 위해 집어넣은 장치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런 설정 오류는 가상 현실 외에도 텔레비젼과 비디오 테이프, 비디오 게임 등에 대한 설명 등 곳곳에서 눈에 뜨입니다. 오래전 TV, 자동차를 구하기 위해 고생했다는데 정작 이런 미래 기술(?)은 거리낌없이 도입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죠.

그래도 이 정도 오류는 반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을텐데, 살인 사건은 도무지 용납이 안됩니다. '신하' 살인 사건부터 보자면, 수업 도중에 스텔라가 급작스럽게 저지른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동안 스텔라의 판타지에 잘 맞춰주던 '신하'가 왜 갑자기 살해당할 정도로 스텔라 심기를 거슬렸을까요? 게다가 이 자리에는 '시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즉, '시인'은 범인이 스텔라라는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스텔라와 함께 있으라는 마모루의 말을 선선히 들었을리 없습니다. 당연히 마모루와 함께 있으려 했겠지요. 케네스 (신하) 만의 사정이 있었을거라는 '사감'의 말로 퉁치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코튼 부인 살해도 억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치매 노인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 앞에서 욕설을 퍼붓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돼요. 전개를 보면 '학교'에서 일어났던 기존 사건들은 모두 '사감'이 숨기고 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코튼 부인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려다가 충돌을 일으켜 총에 맞아 죽을 이유는 없어요. '신하'는 사고사로 착각했다쳐도, '시인'은 엄연히 칼에 찔려 죽었으니 당연히 경찰에 신고했었어야 합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사감'과 코튼 부인이 한패였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무합니다. 오히려 '교장 선생님'마저도 '사감'이 살인 사건을 은폐한걸 몰랐다고 묘사될 정도지요. 경찰이 나타나면 곧바로 진상이 드러날테니,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또 스텔라가 판타지를 지키기 위해서 뭔가 거슬렸던 신하를 죽이고, 범행을 목격한 시인을 죽인건 그렇다쳐도 그 뒤의 범행은 아예 설명이 불가합니다. 여왕님과 마모루를 설득해서 교장 선생님과 사감만 조용히 기다렸으면 만사 해결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자동차로 이동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던 여왕님 살해야 그렇다쳐도, 중립을 실해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적인 반전과 반전을 위한 빌드업은 대단했지만, 살인 사건 쪽으로는 영 별로였고요 감점합니다. 작가의 장점 - 아이디어 - 과 단점 - 무리수 - 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015/01/05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1.5점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 - 4점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노부호 사토 다이조는 현역에서 은퇴한 세기의 명탐정들 - 미국의 엘러리 퀸, 영국의 에르퀼 푸아로, 프랑스의 매그레 경감, 그리고 일본의 아케치 고고로 - 에게 황당무계한 제안을 했다. 그것은 바로 2년 전, 현금수송차 탈취로 3억 엔을 강탈한 뒤 미궁에 빠져버린 이른바 '3억 엔 사건'의 범인상과 유사한 인물에게 자신의 3억엔을 훔치게 하고, 그 모방범의 행동을 추적하여 진짜 3억 엔 사건의 실태를 추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네 명의 명탐정은 사토 다이조의 제안을 승낙했다.
사토의 부하 간자키 고로는 3억 엔 사건의 범인상에 부합하는 무라코시 가쓰히코라는 젊은이를 찾아냈고, 무라코시는 사토가 계획한 대로 사토가 준비해둔 3억 엔을 강탈했다. 이후로 네 명의 명탐정들은 차례차례 무라코시의 이후 행동을 추리했고, 무라코시는 마치 명탐정들이 조종하기라도 한 것처럼 추리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여정 (트래블) 미스터리'의 대가로 알려진 니시무라 교타로의 장편 소설.

1970년대를 무대로 세계의 명탐정을 모아 추리쇼를 벌인다는 설정은 팬픽 느낌입니다. 그래도 추리계에서 꽤 이름을 날린 거장의 작품이니만큼, 단순한 패러디 팬픽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꽤 흥미로운 범죄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탈세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동기는 지금 시점에서도 무릎을 칠만한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당연히 팬픽스러운 요소도 가득합니다. 고전 명탐정의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제법 많아요. 등장하는 탐정들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잡혀 있고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아케치 고고로는 별다른 특색없는 조용한 노인이지만, 엘러리 퀸의 촐랑대고 경박스러운 명랑함, 푸아로의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감, 은근하면서도 묵직한 메그레는 제가 생각한 그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나이를 먹은 뒤 정말로 살아 있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한 묘사도 좋고요. 엘러리 퀸이 하드보일드를 평가하며 육체보다는 머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게 좋은 예입니다. 사건이 벌어진 뒤 현장에서 엘러리가 하는 "모자는 어디로 갔을까요?"라는 대사, 위치가 바뀐 의자에 집중하는 식의 고전적인 추리 방식도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그러나 한편의 추리 소설로 완성도를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워요. 아무리 늙었어도 세계 굴지의 명탐정을 한명도 아니고 네명이나 불러놓고, 그들을 모두 속이려 한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원래 계획대로라면(단지 돈 3억엔을 잃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함) 거금을 들여 명탐정을 부를 이유도 없고요. 그냥 미시마 앞에서 3억엔 사건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계획을 실행해도 충분했습니다. 경찰을 부른 뒤, 돈이 불탔다는 것만 공식적으로 알게 만들면 되니까요. 아니면 명탐정들의 결론이야 똑같으니 네명이나 한명이나 그게 그건데 그냥 일본의 아케치만 불러도 충분했고요.

이러한 설정은 팬픽 기획을 위한 의도였다고 칠 수는 있지만(어차피 이런 소설이 현실적일 수는 없으니), 범행도 곳곳에 헛점 투성이입니다. 우선 간자키가 다이조의 계획대로 1인 2역으로 움직였으리라는 보장부터가 전혀 없습니다. 1인 2역이 다이조의 지시라고 하더라도, 더스트 슈트를 통해 지폐를 불태운 행동은 설명되지 않고요. 무라코시 - 간자키가 더스트 슈트가 소각장으로 이어지는걸 몰랐던건 순전한 우연, 착각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지폐를 불태운 것도 다이조의 지시였다고 한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간자키가 자신이 무라코시가 아님을 증명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게다기 마지막 추리쇼에서 시기 적절하게 간자키가 혼자서 알약을 꺼내어 먹은 뒤 죽어버린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이 정도로 적절하게 죽어준다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거의 최면술의 영역이 아닐까 싶네요.
덧붙여, 지폐의 "덩어리"가 남아서 감식이 가능했더라면 그 지폐가 폐기대상인지 아닌지 정도도 확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팬픽 측면의 가치와 예쁜 디자인 덕에 별점을 약간 더합니다만, 전반적으로 평균 이하의 작품입니다.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딱히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덧 : 아케치 코고로가 아니라 고고로로 번역된 이유가 따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2008/08/29

Eye_26세, 나는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 요시무라 켄지 / 송수영 : 별점 1.5점

Eye _26세, 나는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 4점
요시무라 켄지 지음, 송수영 옮김/넥서스BOOKS

30분만에 읽어버린 사진+여행기로 26살의 젊은 일본청년 켄지가 1년동안 세계를 여행하면서 담은 사진과 단상을 담은 책입니다.

사진이 굉장히 미려한 것도, 단상과 같은 글도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책 자체는 깔끔하고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선진국이 아닌 오지에 가까운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에 담았다는 것과 여행기가 아닌 스케치에 가까운 책이라는 것도 타 여행기와 차별화되는 점이고요.

그러나 켄지보다 10살 많은 36살인 제가 읽기에는 너무 "어린" 책이었습니다. 꼭 방학숙제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젊은이의 찰나의 충동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놓고 볼 때는 자위행위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켄지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겠죠. 물론 자위행위 보다는 훨씬 많은 돈이 들기는 했겠지만요.

책은 이쁘긴 하지만 별반 알맹이도 없고 생각할 거리도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10/11

슈퍼맨 : 레드 선 - 마크 밀러 외 / 최원서 : 별점 2점

슈퍼맨 : 레드 선 - 4점
마크 밀러 외 지음, 최원서 옮김/시공사(만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슈퍼맨은 공화국 동지들을 위해 스탈린의 뒤를 이어 위대한 지도자가 된 후, 뛰어난 능력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오직 슈퍼맨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는 렉스 루터가 버티고 있는 미국을 빼고. 그러나 슈퍼맨의 독재와 인류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배트맨 등 반대 세력이 등장했고, 결국 슈퍼맨은 렉스 루터에게 패배하고 세계의 패권을 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걸작이라고 소문난 작품. 이번 추석 연휴 때 우연찮게 읽어보았습니다. 
소련의 영웅이 된 슈퍼맨 뿐 아니라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게 스탈린의 서자이자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였던 표토르였다던가, 그린 랜턴 할 조단을 공산주의와 싸우는 미국 해병대원으로 각색하는 식으로 여러 DC 히어로들의 신화를 비틀어 이야기에 적절히 녹여낸건 볼 만 했습니다. 단순히 설정 변경 놀이보다는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였어요. 슈퍼맨이 다른 지구에서 와서 태양광 - 레드 선- 을 받으면 힘이 약해진다는 반전도 괜찮았고요. 붉은 군대, 즉 소련의 리더의 정체성과도 잘 엮이는 멋진 설정이었습니다. 후술할 어이없는 결말보다는 이 설정을 더 잘 살리는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게 좋았을겁니다.

그러나 전개는 평이해서 특별히 재미를 느낄 부분은 별로 없었습니다. 배트맨과 원더우먼은 비중에 비하면 하는게 너무 없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슈퍼맨이 아래와 같은 렉스 루터의 편지 하나에 큰 죄의식을 느끼며 무너져버린 뒤 렉스 루터가 이를 40년 전부터 계획했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했어요. 슈퍼맨이 세계를 지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렉스 루터 따위가 걸림돌이 될 까닭도 없고요.
번역도 이상할 정도로 읽기 힘들었는데, 번역 결과물이 원전을 충실히 반영한 것인지도 살짝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6/29

복면 작가는 두 사람 있다 (覆面作家は二人いる) - 기타무라 카오루 : 별점 2점

"하늘을 나는 말" 등 만담가 '엔시 씨와 나'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일상계 추리물의 창시자 기타무라 가오루(카오루)의 또다른 시리즈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필명이 복면 작가인 이중인격 아가씨 니이즈마 치아키와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 컴비가 여러가지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지요. 국내에는 아직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았는데, 작가의 팬인 탓에 원서를 번역해서 읽어보았습니다.

특징이라면 기타무라 카오루 작품답지 않은 가볍고 만화적인 설정입니다. 엄청난 가문의 영애로 미모와 추리력, 거기에 집 밖을 나서면 성격이 야성적으로 변하는 이중 인격 탐정 니이즈마 치아키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설정은 아주 많이 별로였습니다. 다른건 다 그렇다쳐도,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성격이 변한다는건 납득하기 힘드네요. 설득력도 없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며, 작품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니까요. 그냥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귀한 집 아가씨라는 설정의 안락의자 탐정물로 만드는게 훨씬 더 나았을 겁니다.
추리적으로도 평범합니다. 사소한 정보와 단서에서 진상을 끌어내는 전개 솜씨는 여전하나, 동기면에서 설득력을 가져가고 있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국내에 정식 소개되더라도 시리즈를 더 찾아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미노 미즈호의 만화가 조금 유명한 듯 한데(제 기억에 해적판으로 오래전에 소개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만화로 소개되는게 더 나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트릭, 진상 및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면작가의 크리스마스

잡지 '추리세계'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는 신인 작가 ‘니이즈마 치아키’를 만나러 갔다. 치아키는 엄청난 집의 아가씨로 귀족적인 외모에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문을 나서는 순간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해버리는 특징이 있었다.
그 무렵, 근처 여고 기숙사에서 한 여학생이 살해당한다. 단서는 딱 하나, 피해자가 선물받았지만 사라져버린 ‘토끼 오르골’이었다. 치아키는 오르골 포장이 뜯어져 있었는지에 주목한 뒤, 범인을 밝혀낸다.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 쌍둥이 형이자 경찰인 오카베 유스케, 그리고 복면작가 치아키 등 주요 등장인물과 치아키의 기묘한 특징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어요. 료스케와 치아키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어떤 여성이 가지고 있던 검은 트렁크 안에서 채찍이 나온 이유에 대한 추리는 좋은 일상계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기숙사 살인 사건에서는 핵심 단서인 '오르골의 포장이 뜯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자 째 사라진 이유는?'를 통한 치아키의 추리 결과 - '포장된 선물이 방 안에 흩어져 있었다면, 산타클로스가 범인이라는걸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 -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이 여고 기숙사는 산타가 돌아다니며 선물을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고, 산타가 범행을 저지를 때 선물이 흩어져 그걸 주워 담다가 피해자의 개인적인 선물까지 가져갔다는 것이지요. 사소한 단서에서 진상을 끌어내는 과정은 설득력 높고, 모든 정보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소개되어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범행 동기가 너무 사소했다는 문제는 있지만 일종의 사고같은 밤행이기도 하니, 이 정도면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잠자는 복면작가

오카베 료스케는 치아키에게 원고료를 주기 위해 수족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고 말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인근에서 유괴당한 아이 수사를 하고 있던 오카베의 쌍동이 형 유스케가 있었고, 서로의 오해가 겹쳐 치아키가 범인으로 의심받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이후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치아키는 유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낸다.

초반, 치아키가 잠복 중이던 유스케를 료스케로 착각하고 '돈 내놔'라고 이야기해서 유괴범으로 오인된다는 전개는 제법 웃겼습니다. 치아키는 원고료를 달라는 말이었는데, 유스케는 몸값으로 오해했던 거지요.
유괴범이 유괴당한 유우코의 언니였다는 진상, 그리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로 생긴 의붓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는 동기도 괜찮았어요. 이에 대한 정보 제공도 충실하고요. 

하지만 유괴 당일 언니가 쿠키를 따로 가져갔다는 등의 정보는 너무 과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쉽게 드러나 버렸어요. '불에 태워버린다' 등의 이상한 협박과 특수 효과(?)를 이용한 불타는 소리같은 정보는 아예 쓸데가 없었고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장난이라지만, 유괴라는 중대한 범죄를 가볍게 마무리하는 결말은 영 별로였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면 작가는 두 명 있다

료스케의 선배 사콘의 언니가 일하는 가게에서 연쇄 CD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유스케는 치아키가 집 밖에 나오면 성격이 변하는게 아니라, 자기들처럼 쌍둥이 두 명일 거라고 추리했다. CD 도난 사건과 치아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료스케는 치아키를 데리고 사콘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치아키가 사실은 두 명이 아닐까?'라는 추리는 료스케가 치아키와 함께 집 밖으로 나오면서 손쉽게 드러납니다. 수수께끼라고 할 수도 없어요. CD를 훔친 방법은 범인들이 사전에 걸리지 않는 '동선 확인'을 했다는게 진상이라서 영 실망스러웠고요. 이를 위해 스티커만 몰래 빼돌렸다는 등의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딱히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1/30

고쿠 1~6 - 테라사와 부이치 : 별점 2점

[고화질세트] 고쿠 (총6권/완결) - 4점
테라사와 부이치 지음/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걸작 "우주해적 코브라"로 스페이스 판타지의 신기원을 연 작가 테라사와 부이치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1987년에는 비교적 먼 미래로 느껴졌을, 2014년을 무대로 한 근미래 SF 액션 스릴러로, 우리나라에는 e-book으로만 소개되었습니다. 설 연휴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경찰 출신의 사립탐정 후린지 고쿠입니다. 맨 몸에 쟈켓을 입고 목에 넥타이를 메는 다소 충격적인 패션 센스를 가진 남자지요.

고쿠는 첫 번째 사건에서 악당의 최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왼쪽 눈을 찔러 실명하는데, 누군가 그 왼쪽 눈에 소형 컴퓨터 단말기가 장착된 '의안'을 설치해 줍니다. 그 의안은 전 세계의 모든 컴퓨터는 물론, 인공위성까지도 연결하여 제어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요. 고쿠는 이른바 '신의 눈'이라고도 하는 이 의안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누군가가 전해 준 또다른 장비 여의봉(?)을 무기로 악당들과 싸워나갑니다.

여러 면에서 작가의 출세작 "코브라"가 떠오릅니다. 미인들의 부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기본 전개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로 엄청난 마초인데다가 시니컬하면서도 독특한 유머 넘치는 대사를 내뱉는 고쿠 캐릭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갖추고 있는 피지컬만으로도 세계관 최강자인데다가, 강력한 무기 '싸이코 건' 까지 소유한 코브라와는 다르게 고쿠는 비교적 평범한 인간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도 전능하다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은 왼쪽 눈의 의안 덕분에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의안으로 왠만한 적들은 쉽게 무력하게 만드니까요.

그래도 단순한 자가복제 아류작은 아닙니다. '신의 눈'이라는 아이디어 덕이 큽니다. 모든 단말에 접속하여 조작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최소한 1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것입니다. 인공 위성으로부터 현재의 GPS, 카 네비게이션과 동일한 정보를 전달받아 이를 추격에 활용하는 장면 등은 미래를 보고 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공 위성과 각종 단말을 조작하여, 악당 하크류 겐지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영상을 건물 전광판으로 표시하는 장면은 능력의 특징을 제대로 선보여준 명장면이었고요.

정보를 장악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탐정'이 주인공인 이야기에도 잘 어울렸어요. Private Eye가 Midnight Eye를 갖게 되니, 금상첨화인 셈이지요.

탐정물답게 놀라운 진상과 반전을 갖춘 이야기들도 꽤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류는 의붓 아버지에 의해 사이보그로 개조되어 몸에 강력한 보호막을 두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중화제를 투약하지 않으면 미치광이 살인마로 돌변하기 때문에, 여동생 요시코는 고쿠에게 류를 죽여달라고 의뢰했고요. 그런데 알고보니 류는 의붓아버지 젠조의 복제인간으로 창조된지 고작 30일에 불과했던 생명체였습니다. 젠조는 자기 몸에 보호막을 설치하기 위해 류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수정체를 만든 건 여동생인줄 알았던 요시코였고요. "차이나타운"이 떠오르는, 하드보일드스러운 막장 관계를 인공수정, 급속 성장, 기억 이식 등 미래 기술에 녹여낸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슈퍼 스타 시노즈카 레이라가 자기 노래를 표절했다며 죽이려고 하는 지하 록의 여왕 야마가미 리사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놀라운 진상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4권(일본 기준)으로 끝나버린 이유도 분명합니다. 뒷 부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암흑의 선녀" 편에서 귀신 '천동녀'의 정체는 쿠키 일족의 정신을 넣은 인공두뇌로 구현된, 일종 에너지 덩어리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주해적 코브라"의 사라만다 설정과 똑같죠. 다카르 랠리에 참여한 오토바이 레이서 보니의 문신 속에 마이크로 필름의 정보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우주해적 코브라"와 유사했고요. 유령 유전자 실험에 자원하여 스스로 생명체의 모든 진화를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카산드라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실험 덕분에 생물 진화의 최종 단계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건 바로 악마였다는건 재미있는 발상입니다만 이는 "코브라"에서 화성의 최종 병기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악마가 고작 금괴를 노린다던가, 그 최후가 녹아버린 뜨거운 금을 뒤집어 쓰는 것에 불과했다는 등 세부적인 이야기 완성도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요. 

후반부 에피소드들에서는 '신의 눈'의 능력도 잘 선보이지도 못합니다. 모든 장치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기본 설정만 답습할 뿐입니다. 이런 능력을 활용하여 악당에게 자신의 경고를 날린다던가, 공장에서 자기만을 위한 특별한 무기를 만든다던가 하는 초반부 에피소드들같은 새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걸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악당들과 육탄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도 별로였고요. 

또 한국어판 e-book은 에피소드별 제목이 제대로 부여되어 있지 않은 등 편집이 그닥이며, 마지막 권에 '지금 밝혀지는 고쿠의 비밀'이라는 저자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고 소개되는데 정작 수록되어 있지 않은 등 문제가 많아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던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유튜브를 뒤지면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교적 수작인 초반부 에피소드를 영상화한 만큼 애니메이션만 찾아서 보시는게 낫습니다.

2011/11/27

계간 미스터리 2011.가을 - 청어람M&B 편집부 엮음 : 별점 3점

계간 미스터리 2011.가을 - 6점
청어람M&B 편집부 엮음/청어람M&B

국내 최고의 추리소설 커뮤니티 "하우미"에서 진행한 이벤트로 당첨된 도서입니다. 먼저 이벤트를 주최한 황금펜클럽 편집부와 하우미 담당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드립니다.

"계간 미스터리"는 국내 유일의 추리문학 전문 잡지이며 제목 그대로 계간지인데, 이번 호 특집은 김내성 선생님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들과 선생님의 미발표 논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시, 김내성"이라는 제목의 자료입니다. 이 자료 하나만으로도 이번 "계간 미스터리"에 대한 만족도는 아주 높았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단편들과 연재작이 실려 있습니다. 간단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일석간 - 김내성

거금 2천 원의 분실 사건에 얽힌 유쾌한 연애물. "연문기담"과 유사한 일상계 로맨틱 코미디 추리물입니다. 단서가 너무 명확하고 우연이 많이 개입된다는 점은 조금 아쉽지만, 범인(?)의 행동에 대한 이유와 동기가 확실해서 깔끔하다는 장점도 돋보입니다. 변격물로 유명한 김내성의 새로운 면을 느낄 수 있었던 수작입니다. 귀여운 악녀 이미지의 미망인 전혜봉 여사 캐릭터도 인상적이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킬힐 (Kill Heel) - 정석화

시체와 함께 발견된 여인과 그녀를 취조하는 형사, 두 명의 대화와 심리 묘사로만 전개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설정은 평범하나 사소해 보이는 단서를 통해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위적인 알리바이 트릭, 경찰 수사로 비교적 손쉽게 드러난 범인들의 관계, 반전이기는 하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아버린 진짜 동기 등 자잘한 부분에서 정교함이 약간 아쉬웠어요. 특히 진짜 동기가 밝혀진 뒤가 그러합니다. "디아볼릭" 등 수십 년 된 작품과 유사했기 때문이죠. 또, 오타가 굉장히 많은데 거슬리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우리 동네 살인마 - 정명섭

동네에서 벌어진 한 일가족의 집단 음독 사건을 수사하는 청년 백수의 모험담.

추리소설가를 꿈꾸는 추리 애호가이자 청년 백수인 탐정 캐릭터와 더불어 시종일관 유쾌한 전개가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국내에도 이런 작품이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어요. 개인적인 이번 "계간 미스터리"의 베스트 단편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딱 한 가지,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게 단점인데, 작품 길이를 늘리더라도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게 좋았을 것 같네요.

막다른 골목 - 김이제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 있다... 라는 설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작품.

문제는 설정은 그럴듯한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겠죠. 한국적 이차원 판타지랄까요? 나름 의미를 부여하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장르문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네요. 재미도 그닥이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The Whisper of Blood - 미지의 속삭임 (2부)

1부를 읽지 않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세계 지능체와 엮여 고생길에 접어드는 주인공을 그린 SF입니다.

독특한 이세계 지능체 캐릭터는 괜찮았는데, 세계관이 이런 류 작품치고는 많이 뻔한 편이었어요. "기생수"를 비롯한 근미래 SF에서는 많이 보아온 설정이었거든요.

그러나 아직 완결된 것도 아니고 일부만 읽었기에 속단하기는 이를 것 같습니다. 별점은 완독할 때까지 유보합니다.

위험한 호기심 - 홍성호

펜션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고, 형사 준영은 펜션에서 사라진 충전기에 주목하는데...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당선작입니다. 전개와 결말이 이치에 맞고,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리를 거쳐 수사해 나가는 과정이 괜찮은 범죄-수사 스릴러물로, 첫 작품이라는 것이 놀랍네요.

하지만 아쉬웠던 점도 있습니다. 일단 지나친 성적 묘사가 거슬렸어요. 뭐, 사건이 성적인 관계에 기반한 만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 외에도 의도하지 않은 알리바이의 작위성 등 우연이 많다는 점, 주인공 형사 캐릭터가 그야말로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데뷔작이기도 하고, 아이디어와 전개는 좋았던 만큼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정태원 추모글

한국 추리문단에 큰 공헌을 하신 고 정태원 선생님에 대한 추모글입니다. 소개된 선생님의 저작만 해도 정말 엄청나서 다시금 고개가 숙여집니다. 평이나 별점을 남길 글은 아니죠.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경의 부고 기사에서부터 시작되는 충격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피터 웜지 경 시리즈 단편인데 "검은별"과 너무나 판박이였습니다. 설정부터 전개가 똑같아요.

덕분에 추리물이 아니라 모험물로 보일 뿐더러, 추리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아동 취향의 수준 낮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작가의 명성과 시리즈의 후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작품으로, 차라리 "검은별"을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그 외 노원 선생님의 장편 연재작은 연재물이라 이번 권만 읽어서는 이해가 힘들어서 뭐라 평가하기 어렵네요. 스케일이 큰 작품인데 디테일이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추후 단행본이 나오면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별점은 그때까지 유보합니다.

이러한 단편들을 포함한 총 별점은 3점입니다. 국내 유일의 추리문학 전문지답게 미발표 외국 단편이 한두 편 정도 더 소개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긴 하나, 앞부분 김내성 선생님의 다양한 글들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기에 큰 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한국 추리문학을 사랑하시는 몇 안 되는 모든 분께 추천드립니다.

2021/03/06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제임스 노우드 프랫 / 문기영 : 별점 3점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6점
제임스 노우드 프랫 지음, 문기영 옮김/글항아리

서양의 많은 애호가에게 바이블처럼 읽힌다는 차에 대한 전문서이자 문화사 서적입니다.

1부에서는 차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차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역사, 그리고 홍차 인기가 주춤했던 뒤 다시 인기를 끌게 된 현재 시점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하여 알려줍니다. 특징이라면 '기원' 부터 상세하게 통사적으로 서술해서 알려준다는 점이고요. 특히 미국인 저자에게는 불리했을 중국차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다는 데에서 공부의 깊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신농 황제가 차에 관심을 보였고, 기원전 1066년 윈난 성에서 생산된 차가 황제에게 공물로 바쳐졌다는 등 중국 고대사에서 시작하여 당나라 육우의 "다경"이후 송나라 채양의 "다록", 명나라에서 이전과 다른 녹차 가공법이 등장했다는 역사 소개가 상세하며, 심지어 "고문진보" 속 차에 대한 명시 '칠완다가'까지 번역하여 소개할 정도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차 전래가 불교 전파와 관련이 있다는 여러가지 설들과 그에 대한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첫번째 설은 승려 감로가 1세기 경 인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차를 들여왔다는 설로, 그가 심었다는 전설의 차나무 일곱 그루는 아직도 쓰촨성 멍딘 산에 남아 있다네요. 두번째 설은 달마 선사 눈꺼풀에서 차나무가 자라났다는 설인데, 달마 선사가 인도 출신이니 이 역시 차나무 인도 기원설을 의미하지요. 야생 차나무의 고향은 윈난성과, 인간이 차나무를 처음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쓰촨 성 모두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 불교에서 명상과 술을 대신하기 위한 이유로 차를 이용했고, 그래서 승려들이 차나무 재배와 차 가공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꽤나 타당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당나라에서 육우 선사가 "다경"을 쓴 배경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테고요. 

'차 茶'라는 문자가 등장한 시기와 그 발음 및 일본 다도 문화의 역사, 그리고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센노 리큐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주로 오카쿠라 가쿠조의 "차에 관한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은데, 놀랍게도 국내에 e-book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네요. 이 책에 일본이 가루차를 거품내는 송나라 방식을 쓰는건, 자기들이 몽골 침략을 물리쳐서 차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거라는 해석이 나오는 모양인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센노 리큐 이후 센차 방식을 발전시킨 바이사오에 대한 설명도 빼 놓지 않고 있고요.

다음은 중국차가 유럽에 전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1610년 네덜란드가 최초로 차를 들여오면서 유럽에서 차가 확산되게 됩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이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역 단절로 프랑스는 차 공급이 끊어졌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커피 수입이 단절된게 국가적 선호가 갈리게 된 이유라고 하네요. 그리고 영국에서 찰스 2세와 왕비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차 유행과 이 때문에 벌어진 영국 동인도 회사, 존 컴퍼니와 중국 무역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원래 중국차를 성공적으로 수입해서 유럽에 유통시킨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는데, 네덜란드는 중국 차의 미래를 과소평가해서 인도네시아 자와섬을 통한 중계 무역만 하다가 수요 폭증 때 중국과 직거래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보스턴 티 파티,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동인도 회사의 추악한 행위들과 아편 전쟁, 영국이 패권을 쥔 뒤 민싱 레인에서의 차 거래와 차 운반선들이 레이스를 펼치던 영광의 시대, 인도 아삼 지방에서의 차 재배 성공, 토머스 립턴과 실론 티의 성공 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기존 제국주의 사고방식과 다른 전통들이 모두 파괴된 뒤 그 자리를 값싼 '티백'이 차지하였고, 회사마다 가격 경쟁이 시작되어 고급 차들이 모두 시장에서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요. 다행히 지금 고급 차 시장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언급하며 차 역사 설명은 마무리됩니다. 그 외에는 차와 관련된 여러 유명인들, 그리고 '본차이나'로 대표되는 다기 제조에 대한 역사 등을 함께 소개해주고 있는데, 모두 재미있었어요.

반면 2부의 나라별 주요 차 소개는 특별히 와 닿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고, 인터넷 등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희제가 '벽라춘'이라고 이름붙인 차 이름의 유래는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저자 개인적인 견해는 괜찮았지만요. 그 밖에는 프랑스가 1825년 베트남에 최초의 차나무를 심었다고 자랑하지만, 옛날부터 차나무는 베트남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차는 이미 1,000년 전 부터 인도차이나 문화 일부였다며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정도만이 눈에 뜨였습니다. 프랑스가 뭘 새롭게 한 건 없고, 오히려 창피해 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로, 비교적 공정한 견해라 할 수 있겠죠. 

그래도 2부 마지막에 실린 블렌딩과 차 브랜드 설명은 그런대로 유용했습니다 . 브랜드별 대표 차 명칭, 어떻게 블렌드되어 있고 어떤 맛인지를 대략적이나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 그레이의 기원과 레시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3부는 50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분량인데다가 차를 어떻게 마시는게 좋은지 차 마시는 방법이 전부입니다.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도판이 없다면 최소한 유튜브 동영상 링크라도 포함해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부와 3부는 그닥이었지만, 1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차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최소한 1부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

2006/09/13

깨진 콜라병에 깃든 기업의 철학 : 별점 3점

깨진 콜라병에 깃든 기업의 철학
닉 어스본, 그렉 셔원 외 지음, 이종운 옮김/키위소프트

"세계의 프로 비즈니스 리더들이 탐독한 성공하는 비즈니스, 실패하는 비즈니스" 라는 거창한 카피를 달고 있는 책입니다.

제목의 의미는 코카콜라는 깨진 병들 사이에서도 코카콜라 병은 알아 볼 수 있도록 디자인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병 디자인(요새는 바뀌었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옛날 콜라병)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하고는 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콜라병 디자인 비하인드 스토리는 디자이너가 자기 여자친구의 몸을 보고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콜라 한병에 담긴 양이 한잔 분량이 안되는 디자인이라 채택되었다는 이야기였거든요.

뭐 하여간, 책은 제목과는 다르게 옛날 마케팅보다는 IT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각 장마다 짤막한 칼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이 하나같이 재미있고 볼만하더군요. 특히나 닷컴업계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많은 투자를 받았지만 결국은 실패해버린 거대 사이트, 반대로 몇명이 모여 작게 시작했지만 결국 성공한 사이트 등의 사례를 통한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관련된 CRM이나 웹 컨텐츠에 관한 글들도 좋았고요. 하지만 어렵지 않고 굉장히 유머러스한 스타일로 글이 쓰여져서 제 취향에 더 맞은것 같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쉽고, 재미있게, 짤막하게 접근해야만 한다는 저자들의 사상이 잘 녹아들어간 책이랄까요?

워낙 짤막한 글들이 모여 있어 목차 소개는 어렵지만 제가 재미나게 읽은 글들은 "야후가 잘못한게 도대체 뭘까?" "멍청한 소비자? 아니 멍청한 사이트!", "어느 위대했던 콘텐츠 회사의 죽음", "모비 딕과 온라인 글쓰기" 등입니다. 물론 다른 글들도 다 유용하고 재미있습니다!

책이 쓰여진 시점이 좀 지났는지 지금 읽기에 조금 낡은 내용도 없잖아 있지만 짤막하면서도 사례 중심의 웹 비즈니스 비법(?)서라 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꼭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정도 읽어볼만한 좋은 칼럼이 많아서 추천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러나.. 책값 만원은 굉장히 비싸게 느껴지는군요...

2010/04/06

저스티스 JUSTICE 1~3 - 짐 크루거 / 알렉스 로스 / 더그 브레이스웨이트 : 별점 3점

저스티스 JUSTICE 1권~3권 (묶음) - 6점
짐 크루거 지음, 알렉스 로스 채색, 더그 브레이스웨이트 데생, 정지욱 옮김/시공사

DC코믹스의 저스티스 리그를 바탕으로 한 슈퍼히어로 코믹스. 기본 설정이 상당히 기발합니다. 악당들, 즉 슈퍼 빌런들이 힘을 모아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오히려 이들의 이상향에는 기존 슈퍼 히어로들이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또한 내용면에서 의외로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가 있어서 반갑기도 했는데 예를 들자면 "그린 랜턴"을 죽이지 않고 머나먼 우주로 보내버린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을 들 수 있겠죠.

무엇보다도 알렉스 로스의 그림이 정말 명불허전이라 감탄사를 자아냅니다. 실사를 보는 듯한 치밀하고 완벽한 뎃셍과 컬러링으로 뻔한 슈퍼히어로 만화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지로 승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만화면 만화지 '그래픽 노블'이라고 꼭 홍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작품은 그야말로 컷 하나하나가 모두 아트!라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나서 '그래픽 노블'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어떻게 보면 이케가미 료이치 스타일, 즉 그림이 너무 좋아서 만화로서의 가치와 재미가 떨어져 보이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평가가 욕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그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외에도 그린 애로우나 아톰 같은 비인기 히어로들 등 거의 모든 JLA 세계관의 히어로들이 잠깐씩이나마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제가 기존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슈퍼 빌런들 - 브레이니악, 고릴라 그라드, 가이간타, 블랙만타, 치타 등등등 - 이 등장하기에 풍성한 느낌을 전해주어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초기의 재미난 설정에 비해 지나치게 뻔한 전개, 슈퍼 빌런들이 선한 의도를 가진 것은 당연히 아니기에 음모를 꾸미다가 결국 슈퍼 히어로들에게 계획이 뽀록나서 한판 승부끝에 패배한다는 결말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림 하나만으로도 모든게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내용이야 어쨌건 그림만으로 흐뭇하니, 알렉스 로스의 다음 작품도 빨리 구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2014/01/20

몰타의 매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4점

몰타의 매 - 8점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샘 스페이드의 탐정 사무소로 원덜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서스비라는 남자와 도주했기 때문에, 서스비를 찾아내 여동생을 되찾고 싶다는 의뢰였다. 동료 탐정인 아처가 의뢰를 맡고 서스비를 미행하지만, 밤사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더군다나 그가 미행하던 서스비까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상황. 경찰은 용의자로 스페이드를 지목하고, 그는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책소개에서 인용)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전 하드보일드 추리 장편. 1930년 발표되어, 하드보일드의 전형을 구축한 작품입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지니고 있는 명성이 쉽게 이해가 될 정도에요.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시대를 앞서간 주인공 샘 스페이드입니다. 마초이자 상남자에다가 나쁜 남자이기까지 하거든요. 파트너의 아내를 유혹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쿨함이라고는 전혀없는 돈귀신으로 도움을 얻으려고 찾아온 여자에게서도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500달러를 악착같이 받아냅니다. 거기에 더해 총으로 위협하는 악당들도 맨손으로 제압하는 완력, 경찰에게도 굴하지 않고 농담과 비야냥으로 받아치는 반골정신도 겸한, 그야말로 안티 히어로의 표본같은 인물이에요. 샘 스페이드를 설명하는 묘사도 탁월합니다. 얼굴에 여러개의 V가 표시된다는 첫 등장 시의 묘사부터 독자를 사로잡지요.
등장 이후 단 한번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팜므파탈 오쇼네시 역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악녀로, 스페이드와 함께 완벽한 컴비플레이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유물인 "몰타의 매"을 소재로 녹여낸 참신함, 그리고 "몰타의 매"를 찾는 보물찾기라는 내용은 이후의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보기 드물었기에 오히려 돋보입니다. 몰타의 매의 유래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나름 그럴듯 하기도 했고요.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 같이 명대사가 난무하는, 그런 문학적 향취는 별로 없지만 깔끔하고 간결한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이야기 중간에 스페이드가 이야기한 일화 - 한 사내가 우연히 죽을뻔한 뒤 아예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종적을 감춘다 - 는 뭔가 울림을 전해주기까지 합니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만한 내공은 확실히 느껴졌어요. 

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추리물이 별다른 트릭이 없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이고 뭐고 정말 전혀 없는 탓입니다. 유일한 수수께끼는 서스비가 매 조각상을 어디에 감추었는지? 뿐인데, 이건 오쇼네시의 뒤를 쫓는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고 설명되기 때문에 스페이드가 활약할 여지가 없어요. 실제로 거트먼과 카이로는 스페이드의 도움 없이 매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지요. 

전개도 속도감있고 빨라 독자를 몰입시키지만, 세세한 부분에서의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카이로가 스페이드를 찾아온 이유, 거트먼이 스페이드를 고용하려는 이유 등 스페이드가 사건에 엮이는 과정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쇼네시가 스페이드를 고용했더라도, 생판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느니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그녀를 미행만 해도 충분했을테니까요. 하긴 오쇼네시가 서스비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스페이드를 끌어들인것 부터 설득력이 없으니... 아처를 쏴버린 것처럼 그녀 스스로 서스비를 쏴버리는게 제일 깔끔했을텐데 왜 이렇게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어차피 경찰도 그녀의 존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서스비가 과거 도박조직에 연루된 원한으로 살해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는데 말이죠.
마지막에 스페이드가 경찰에 오쇼네시를 넘기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스페이드가 그녀를 넘기지 않으면 바로 체포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희생양은 거트먼 일당으로 충분했을것 같은데, 한명 죽이나 두명 죽이나....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추천작. 단점은 조금 있으나 사소할 뿐 이 바닥의 영원한 고전, 원전으로서의 가치와 재미를 유지하고 있는 보기드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못하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 1 : 오쇼네시에게 교수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전기의자를 쓰지 않았었나요? 이 당시 하드보일드에서 흔히 이야기되는건 "싱싱 (형무소)"과 "전기의자" 인데 이 작품은 예외적이라 의아했습니다.

덧 2 : 샘 스페이드의 파트너가 마일스 "아처"라는 것이 좀 특이했습니다. 하드보일드 3대 탐정 중 한명인 "루 아처"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묘한 인연인데 로스 맥도널드가 루 아처 창작 시 이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좀 궁금하네요.

2023/05/13

신의 기록 - 에드워드 돌닉 / 이재황 : 별점 4.5점

신의 기록 - 10점
에드워드 돌닉 지음, 이재황 옮김/책과함께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 과정을 시작부터 완결까지 꼼꼼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미시사, 인문학 서적.
시작이 된 나폴레옹 프랑스 원정대의 로제타석 발굴에서 시작하여, 샹폴리옹이 해독을 성공하고, 샹폴리옹 해독이 옳았다는게 검증된 카노포스석 발굴로 마무리되는데 핵심은 이집트 성체자 해독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제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자세합니다.
우선, 성체자 해독이 어려웠던 이유는 사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자가 어떤걸 나타내는지를 알려면 사례가 많아야 했거든요. 하지만 로제타석 조차도 성체자 부분은 깨져버린 탓에 14줄만 남아있어서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처음에 학자들은 두 번째 부분인 속체자에 주목했습니다. 속체자는 그림문자인 성체자에 비하면 비교적 정상적인 문자로 보였고, 정상적인 문자는 일반적으로 자모 기반이라서 속체자의 자모를 알아내려고 했거든요. 로제타석의 그리스어 부분에서 자주 반복되었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속체자 부분에서 찾아내어 이 둘의 문자열을 짝짓고, 그래서 자모를 알아내려고 했던 시도가 초반에 이루어졌었지요. 이는 비교적 - 반쯤은 우연으로 -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이 탓에 속체자는 자모로 이루어져 있다는 오류가 강화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속체자는 성체자를 바탕으로 간략히 써서 빨리 쓸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간체자여기에, 결국 이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뒤 영국의 토머스 영, 프랑스의 샹폴리옹이라는 두 천재가 등장합니다. 먼저 나선건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던 토머스 영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학자들처럼 속체자와 그리스어를 비교 분석하여 패턴을 찾아내려 했죠. 이는 앞서 말했듯 실패가 예정된 방법이었습니다. 실패 후 영은 '중국어'를 통해 해독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바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중국어 - 한자 - 의 외래어 발음법에서 착안한 방법이었지요. 한자는 모든 단어를 가지고 있지만, 외국어를 발음하려면 그 발음에 맞는 문자를 붙여서 써야 합니다. 뜻과 상관없이요. 불란서, 이태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은 로제타석의 비이집트계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 를 어떻게 성체자로 적었는지 찾아내면, 최소한 그걸 읽는 방법은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타원체 - 카르투슈 - 가 둘러싸고 있는 성체자를 주목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고, 음독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을 것이라 여겼거든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카르투슈 안 성체자만 소리와 상응한다고 생각했고, 그 외의 성체자는 부호에 뭔가 의미가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입니다. 마야 문자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처럼요. 그 때도 마야 문자는 그림으로 관념을 나타내는 부호라는 주장이 널리 퍼졌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문자 체계였다는게 드러났지요.

영의 발견은 샹폴리옹이 이어받아서, 그는 여러 카르투슈 속 이름을 해독했고, 로제타석 성체자 숫자도 헤아려 봅니다. 그 결과 일반적인 개념대로 성체자 하나하나가 한 단어나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너무 적다는걸 알아냅니다. 그리고 역시 중국 한자식 발상으로, 평범한 이집트 단어에도 성체자를 소리 문자로 사용했다고 생각하지요.
아부심벨 신전에서 베껴낸 비문을 받은 샹폴리옹은 파라오 '람세스', '토트메스'의 이름을 해독했고, 여기서 '콥트어' 전문가라는 능력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파라오들 이름이 '탄생'을 뜻하는 콥트어 단어 '미세'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달았거든요! "라가 탄생시킨 아들', "토트가 탄생시킨 아들"이라는 뜻으로요! 그래서 카르투슈 밖 성체자에서 이렇게 '탄생'을 의미하는 성체자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게 그리스어 부분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찾아보았니다. 그 결과 '탄생일' 이라는 단어를 알아내죠. 성체자가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게 아니라 자모를 가진 문자라는게 드러난겁니다. 이게 샹폴리옹이 그 유명한, 형에게 "내가 해냈어!"를 외치고 기절했다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읽는 방법을 알아낸 샹폴리옹은 콥트어 규칙을 적용해서 성체자 분석을 진행합니다. 성체자에 가장 많은 물결무늬는 콥트어에 가장 많이 나오는 "N"이라고 판단했지요. 


콥트어에서 N은 of의 의미였습니다. P는 정관사 the로 사용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해독으로 p 발음은 무슨 그림인지 알아냈고요. 이를 통해 TheXXXXXofXXXXXX 같은 문장을 끌어낸 뒤, 단어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진전은 '결정자'의 발견이었습니다. 단어 끝에 붙어있어서, 없어도 되는 글자로 보였던 글자였는데 알고보니 명확하게 단어임을 알려주는 부호였던 겁니다. '고양이'라는 글자 뒤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놓는 식으로요. 결정자는 단어 뒤에 붙기 때문에, 해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래가 성체자 '고양이'인데, 정말 고양이 그림이 붙어있네요.


또 샹폴리옹은 그리기 어려운 단어를 같은 발음인 그리기 쉬운 단어로 바꾸어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어요. 이집트어에서 '아들'과 발음이 같은 것은 '오리'였습는데, 이 역시 콥트어에서도 두 단어 모두 '사'라는 같은 발음이었던 것에서 떠올린 것이지요. '독수리'도 '어머니'와 발음이 같았고요.
참고로, 이렇게 동음이의어가 쓰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건 오래된 사실이라네요.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원래 기독교 성경에서는 선악과가 어떤 종류의 과일인지 특정하지 않았는데,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성경을 만들면서 라틴어 단어 말룸 (malum)이 '사과'와 '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데 착안해 집어넣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성체자의 비밀을 푼 샹폴리옹이 이집트를 방문하여,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여왕 - 핫셉수트 -'에 대한 글을 읽어내는 것으로 성체자 해독에 대한 글은 완료됩니다.

정리하기도 힘들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지만,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관련된 자료도 굉장히 상세합니다. 도판은 물론, 여러 등장인물들의 일대기 소개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영국의 부자 윌리엄 뱅크스의 일대기가 대표적입니다. 직접 이집트로부터 오벨리스크를 운반해 자기 저택에 세울 정도로 부자였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라는 카르투슈가 발견되어서 성체자 해독에 기여했지요. 동성애자로 밝혀져 몰락하고 말았다고 하고요.
관련된 역사 소개도 빠지지 않습니다. 시작이 된 나폴레옹 프랑스 원정대의 로제타석 발굴이 대표적입니다. 발굴 뿐 아니라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의 시작과 끝을 모두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집트 역사 서술도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집트가 그렇게 대단한 고대 문명 국가가 아니었다는 서술은 흥미롭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기술을 바탕으로 건설된 문화로이며, 근본은 인간의 육체적 노력에 두고 있었다고요. 의학은 초보 수준이었고, 과학적 법칙이라는 관념이 없었으며 세계는 주술과 마법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쓰기의 탄생에 대한 언급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글쓰기는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동굴 벽화는 2만년 전의 것인데, 가장 이른 문자도 5천년 밖에 되지 않았지요. 저자는 도시가 발달되어 교역이 복잡해 진 탓에 기록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글쓰기의 초기 단계로 밝혀진게 이라크 고대도시에서 기원전 8000년 ~ 3500년 무렵 사용되었던 점토덩이들이었으며, 이를 통해 점토 덩어리가 점토에 누른 자국, 점토에 그린 그림, 점토판 위에 쓴 부호로 추상성이 증가하며 결국 쓰기로 이어지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됩니다.
라파누이섬에서만 발견되었던 '롱고롱고' 문자, 선형문자 B의 해독, 마야 문자 등 다른 문자들 소개도 빠지지 않고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카르투슈 안의 파라오 이름을 읽어내는 과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뒤 단어 분석은 좀 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그러했어요. The, Of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들어오는 단어를 채워 넣기 위한 자료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로제타석의 성체자는 몇 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요. 성체자로 로제타석의 그리스어 부분 단어가 무엇인지 다 알아낸다 한 들, 어휘로 따지면 턱업이 부족했을겁니다. 이를 전체 성체자로 어떻게 확대해 나갔을까요?
또 콥트어 전문가였기 때문에 그리기 어려운 단어를 쉬운 단어로 교체했다는걸 알아냈다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교체한건지, 원래 그 의미로 썼는지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서 알려줬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그동안 궁금했었던 이집트 상형문자 - 성체자 - 의 비밀에 대해 어느정도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입문용 서적과는 수준 자체가 다르네요. 다소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집트 문자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셨던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그나저나, 상형문자가 한자와 비슷한 원리였다면, 동양인 학자가 분석에 나섰다면 어땠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네요.

2019/11/29

회색 인간 - 김동식 : 별점 2점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꾸준히 업로드한 글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과거 하이텔 시기에나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의 재림이네요. 올린 글의 분량만 따지만 거의 "태백산맥"에 육박한다니 그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이텔 시기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등과는 명확히 다른 점은, 굉장히 짧은 꽁트, 아니 쇼트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무려 스물 네 편이나 수록된 단편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기묘한 설정, 그리고 그 기묘한 설정 때문에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탐욕이 생겨나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는 결말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기묘한 설정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지만, 그냥 기묘하다는 상황에만 매몰되어버린 이야기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건물이 급작스럽게 식인 괴물로 변하여 밖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식인 빌딩", 인간이 녹았다가 다시 돌아오면 완벽한 컨디션이 된다는 기적의 물 정화수가 대유행한다는 "흐르는 물이 되어"가 대표적이에요.
또 기묘한 설정에 기댈 뿐,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반전도 뻔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우팅"에서 인류 모두가 인조인간이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차라리 연구소 경비병들만 진짜 인간이었다는 반전이라도 넣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나마 조금 신선한 반전들도 대체로 기존 상식이나 그때까지의 현실을 반대로 뒤집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식상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에서 나이를 먹지 않게 만드는 영원의 구가 사실은 저주였다던가,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무적의 재생력을 안겨다주는 선물로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피노키오의 꿈"에서 피노키오의 소원이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건강한 소나무가 되는 것이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반전이라도 있는 이야기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특별한 반전 없이 인간미, 감동 쪽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 이야기들은 더 엉망이에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땅을 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먹을게 부족해서 문화는 사치였지만, 어느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화가 생겨난다는 결말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인간도 아니라는 주제인데, 솔직히 억지스럽죠. 이런 상황이라면 집단이 생기고, 자체적인 법률이 생기는게 타당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이 그냥 살기 힘든 상황만 길게 묘사되는 것도 지루하고요.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간미는 "도박묵시록 카이지 외전 반장의 일일 외출록" 에서 훨씬 더 재미있게 잘 그려졌다 생각됩니다.
손가락 여섯개인 신인류를 낳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계획이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밝혀진 후, 손가락 여섯개인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생각이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꿈같은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 없고요. 괴물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접했었던 설정도 많습니다. 어설픈 풍자, 별 것 아닌 내용을 길게 늘려쓴 이야기도 눈에 거슬렸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답게 반짝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이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노인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자 노인이 자신이 부자라면서 통조림을 5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 신에게 소원을 빌 당사자로 선택되는 개인에게 닥치는 집단 광기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신의 소원", 노인을 가상 세계에 모신다는 발상이 그럴싸 했던 "디지털 고려장" 등이 그러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의 전개가 뻔하고 결말의 반전이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거나 아예 없다는 단점은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

다행히 설정도 좋고, 전개도 괜찮으며 결말과 반전도 완성도 높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재활용" 입니다. 돈만을 위해 살아온 두석구가 딸이 교통사고로 죽자, 13일 내 시체 세 구를 섞어 넣으면 한 명이 부활한다는 주술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생존은 랜덤이라 딸이 살아나지 못하자 두석구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13일 동안 이 주술을 계속 시도하고요.
그런데 영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영혼들은 두석구의 딸 부터 영혼을 찢어발긴다는 마지막 반전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두석구는 딸이 살아날 때 까지 주술을 시도할테니 영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딸부터 처치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이를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마지막 대사도 좋았고요.
쇼트쇼트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합니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도 평균 이상입니다. 정대리가 가진 보물인 쇠구슬은 손을 대면 비가 오게 만듭니다. 김대리는 이를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을 대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흐려지기만 할 뿐이고요. 그런데 아기가 손을 대자 지진이 발생하여 결국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원리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날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지요. 기묘한 설정도 좋지만 제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모녀, 한 사내와 협곡에 갇힌 김남우가 극심한 굶주림 끝에 식량으로 희생될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협곡에서의 식인"도 기묘한 맛 측면에서는 꽤 괜찮습니다. 김남우의 편인줄 알았던 사내가 놀랍게도 급작스럽게 김남우를 살해하는데, 알고보니 그들 4명은 모두 가족이었던 반전 덕분입니다. 김남우가 가족을 경계하고 오히려 위협할까 두려워 남인척 김남우 편에 섰다가 배신을 했던 거지요. 살아난 가족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는다는 마지막 한 방도 묵직하고요.
아쉬운건 에이즈가 지금은 그렇게 위험한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좀 더 '천벌'에 가까운 병에 걸리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살인단백질 이야기"에 나왔던 프리온을 활용한 병이 어땠을까 싶네요. 식인으로 전염되고, 치사율 100%이니까요.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도 반전이 좋습니다. 사이비 종교 교주 두석구가 지옥에서 악마들의 부탁으로 죄인들에게 환생을 약속하는 환생교를 만들어 포교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 통제를 잘 하려는 악마들의 계획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나 1년 뒤, 절대자가 강림하여 두석구를 찢어 발기고 죄인들의 희망을 끝냅니다. 죄인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었다가 큰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말인데 아주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하여튼, 전체 평균해서 별점을 주자면 2점입니다. 모든 수록작 중 세네 편 정도가 중간 수준, 세 편 정도가 중간 이상, 한 편이 수작이고 나머지가 모두 기대 이하이니 이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반 타작도 하지 못한 셈이니 전반적으로 좋은 단편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 창작하여 발표한 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등단도 한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음에는 보다 완성도있게 다듬어 발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2014/01/14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 모리 아키마로 / 이기웅 : 별점 2점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 4점
모리 아키마로 지음, 이기웅 옮김/포레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건 미적 추리이고, 그에 따라 나타난 진상이 미적이지 않으면 내 관심은 그 시점에서 소멸될 거야."

'미학'이 주요 테마인 일상계 추리 연작 단편집. 제1회 애거서 크리스티 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네요. 전혀 몰랐던 작품인데, 국내 최고의 추리애호가 사이트인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 중인 "2013년 올해의 추리소설" 이벤트에서 몇몇 분들이 언급하였길래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미학 전공자인 탐정이 등장하여 "미학 강의"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를 다른 무언가와 절묘하게 겹쳐서 진행하는 작품은 일상계 연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미학"이라는 소재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단지 독특한 수준에 그치지지도 않습니다. 미학 이론을 일상계 추리물 속에 결합하여 잘 녹여내고 있거든요. 화자인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에드거 앨런 포라는 설정이라서 포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미학적 분석과 이론이 등장하는데, 실제 사건이 이러한 이론들과 엮여 나가는 과정이 제법 괜찮습니다. 실제 통하는 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검정고양이의 미학 이론과 논리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그럴싸하고요. 덕분에 미학 이론에 대한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히 전해 줍니다.

아울러 특이한 탐정, 천재 탐정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만 "미학"을 전문으로 하는 교수 탐정 역시 이 작품이 처음이었어요. 미학 전공이라는 점 외의 탐정에 대한 설정과 묘사는 천재 학자이자 잘난 척 덩어리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시니컬한 대사로 똘똘 뭉쳐 있는 점에서는 임상 범죄 학자 히무라 히데오나 갈릴레오 유가와가 바로 연상되는 탓에 그렇게 차별화되지는 않지만요. 오히려 설정과 묘사보다는 "검정고양이"라는 별명 외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화자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게 더 특이했습니다. 추후 서술트릭에 써먹으려는 의도였을까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첫 두 편 이외의 나머지 네 편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 전개나 모두 미흡하여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미학 이론과 추리가 제대로 조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후의 시리즈가 기대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독특한 설정을 지속적으로 끌어나가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평균해서 2점입니다. 앞의 두 편은 미학 이론과 추리의 결합이 잘 이루어진 좋은 작품들로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하지만, 뒤의 네 편이 점수를 모두 깎아먹었습니다. 그래도 앞의 두 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독특한 일상계 추리물을 찾으신다면 정답일 수도 있으니까요. e-book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만큼은 각 단편별로 별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록작 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달과 나의 거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나"가 어머니의 정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이한 지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내용입니다. 

"다케토리 이야기"의 원제는 "다케토리옹 이야기" 였는데, 달과 인간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제목이 바뀌었다던가, 나폴레옹 3세가 고용한 오스만 남작이 파리에 가스등을 전면으로 도입하며 '예술의 학살자'임을 자처한 이유는 달을 대체하여 달의 주민을 파리에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던가하는 등의 눈이 휭휭 돌아갈 정도로 현학적인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거의 강의에 가깝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미학 강의가 무척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지도의 수수께끼도 대단한건 아니지만 지도에 관계된 두 학자의 전공분야가 앞서 자세하게 설명한 이론과 딱 들어맞고, 진상 역시도 합리적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암호로서의 가치가 없는 기이한 지도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징표가 된다는건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짜임새와 완성도는 좋았고 무엇보다도 미학이론과 일상계 추리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새로운 시리즈의 도입부로는 차고 넘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벽과 모방"

3년전 "나"와 검은고양이가 처음 만나게 되었던 세미나 팀에서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장소는 팀원 중 한명인 세키마타의 가루이자와 별장이었다. 그러나 세키마타는 팀원들이 방문한 날 기이한 행동을 보인 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세키마타의 자살 원인을 분석하는 추리와 작품을 관통하는 바그너와 니체의 "벽" 이론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이지만 서양에서는 말하는 벽은 공포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 기본 개념의 붕괴- 는 것, "검은 고양이"에서의 벽을 해석하는 이론, "모방"과 "카피"의 차이 - 모방은 정신과 행위에 관한 개념이지만 카피는 완성된 결과만을 지향하는 것 - 를 설명해 주면서 이 개념이 이 사건에 깊게 얽혀있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등 현학적인 이론 소개는 아주 좋았습니다.

다만 세키마타의 모방 행위는 비정상적이라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미학과 추리를 절묘하게 엮어나간 전개는 기존에 알고있던 추리 소설의 상식을 깨는, 멋진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강의가 지나치게 장황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쉬우며 적절한 길이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물의 레토릭"

연인이 동반자살로 의심되는데 여자가 사용한 향수의 향기가 이후에도 떠돈다는 괴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의 작품. 

그런데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와 사건을 엮는건 무리수였습니다. 물 - 여성의 시체라는 모티브 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학강의와 일상계 추리를 엮는다는 설정에 지나치게 얽매인 느낌입니다. 사건도 오해와 잘못된 증언이 결합된 것일 뿐이라서 사건으로 보기도 어렵고요. 우연과 작위에 의한 전개가 많다는 것도 감점요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숨기면 꽃"

검은 고양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여류학자 이구스가 실종되어 그녀의 행방을 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도둑맞은 편지"와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를 주로 강의하는데, 내용에 비하면 너무 거창하네요. 알맹이는 별거 없는데 포장만 요란한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었달까요. 진상도 딱히 설득력이 없어서 전혀 와닿지 않았고요. 머리를 깎았다고 해서 딸을 못 알아볼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눈이 안 좋다고 해도 저같으면 목소리로 알아볼 수 있을거라 자신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두개골 속에서"

5년전 혜성처럼 데뷰했으나 데뷰작 이후 사라져 버린 천재시인 시조 도미아키의 데뷰 5주년 기념 파티에서 그의 신작이 낭독되었다. 그 후 시조와 동일인물이라고 의심받던 영화감독 에즈미가 자살하는데...

"황금충"에서 리그랜드와 황금충이 서로에게 침입했다고 설명하는 미학 강의만큼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이야기들과 같습니다. 이 미학 강의가 시조 도미아키와 에즈미 감독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억지스럽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사디즘 - 마조히즘의 관계처럼 에즈미는 관능 속에서 생을 긍정하는 반면, 시조는 그로테스크한 모티브 속에서 유머러스하게 죽음을 긍정한다는 정 반대의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부연 설명만으로도 이야기 전개는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검은 고양이의 누나 레이카가 제대로 설명만 해 주면 애시당초 사건이 될 수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설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보다는 미학강의가 더 좋아서 완벽하게 주객전도된 느낌입니다.

"달과 왕"

한 노교수의 죽음, 그리고 그와 젊은 여류학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단편.

포의 "까마귀"가 그리스 음악적인 시라는 것, 여기서 까마귀의 "Nevermore"는 악기를 의미할 수 있다는 등의 현란한 미학 강의만큼은 여전히 볼거리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그리스 연극 "쫓는 왕"과 작중 사건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전개도 꽤 괜찮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전혀 건질게 없습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바로 앞의 사람이 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골전도"를 응용한 발성법이라는 설정은 불필요한 사족이었습니다. 어치피 말도 안되는 내용에, 선하나 더 긋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끼면 신호등이 푸른달로 보인다는 마지막 이야기도 지나치게 만화적이라 별로였어요.

그래도 직전의 막장 작품들보다는 낫네요. 내용면에서 설득력도 있고, 결말 부분에서 나와 검정고양이 관계의 진전을 암시하는 달달한 전개도 선보인 덕분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5/22

밤과 낮 사이 1 - 마이클 코넬리 외 / 이지연 : 별점 2.5점

밤과 낮 사이 1 - 6점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자음과모음(이룸)

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단편 컬렉션이라는 책입니다. 장르 문학 단편을 좋아하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볼륨은 풍성합니다. 무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열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 추리물, 범죄물, 스릴러, 액션물에 섬찟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묘한 맛' 계열 등 수록 장르도 다양한 덕분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 마이클 코넬리와 같은 유명 작가들 작품이 수록된 것도 반가웠고요.

하지만 워낙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별 편차가 큽니다. 첫 수록작인 "그들 욕망의 도구"처럼 좋은 작품도 있지만, 뻔한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다던가, 심리 묘사에 치중할 뿐,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등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앤솔러지인데 선정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하여 출간한 것일까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대략 2.5점입니다. 1권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볼륨을 자랑하는 2권도 있는데, 읽어볼지 말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욕망의 도구" 

'나'는 죽기 전, 짐 오빠를 만나 그가 로니 언니를 이용했던 70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1931년, 아버지 가출 후 어려워진 가족을 위해 짐 오빠가 로니 언니에게 몸을 팔게 했었던 사건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몸을 팔았던건 로니 언니가 아니라 짐 오빠 자신이었다는 충격적 반전까지 완벽했던 단편입니다. 탁월환 회상과 심리 묘사는 독자를 반전으로 이끄는 선입견을 잘 쌓아 올려주고요. 

아빠 실종에 관련된 설정은 지금 읽기에는 뻔하고, 짐 오빠의 고백 후 결말까지가 조금 늘어지는 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단편의 맛을 잘 살린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밤과 낮 사이" 

표제작. 주인공이 겨우 열기구에 매달려 있고, 두 명이 열기구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첫 장면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열기구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결국 열기구 속 아이를 잃게 된 아버지이자 살인 강도인 브래들리가 주인공에게 복수심을 품고 습격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탈옥해서 주인공을 습격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 작위적이라는건 단접입니다. “전적이 있는 은행 강도로 풀려난 지 고작 이삼 일 만에 기구를 탈취해서 도와주려던 착한 이웃을 죽게 만든 놈인데, 그래 그놈을 튀게 놔뒀다고요?”라는 주인공 말 처럼 쉽게 이루어진 브래들리의 탈옥, 브래들리가 탈옥 후 주인공 집을 바로 찾아와 주인공을 납치한 것, 마지막 죽기 일보 직전에 사라진 열기구를 발견하는 것 등 모두가 말이지요. 주인공이 브래들리가 3만달러라는 돈을 숨겨놓았을 코인 락커 열쇠를 강탈한 뒤 죽게 만든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주인공의 뉴요커 스타일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이라면, 주인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게 나았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인공이 3만 달러를 거의 손에 넣었지만, 로키 산맥 끝자락까지 몰고 왔던 머스탱이 고장나서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쇼트쇼트스러운 결말로 마무리하던가요.

그래도 도입부만큼은 역대급이며 스릴과 서스펜스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환상특급"같은 TV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책 제본가의 도제" 

베네치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미국인 졸리 매독스는 부유한 괴짜 노인 샌본과 친해진다. 그는 졸리와 여자 친구 루치아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데....

굉장히 뻔했던 작품입니다. 제목과 책 제본에 대한 장인 정신 가득한 묘사, 희귀 서적 수집가와 책 제본가가 루치아의 피부 문신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에서 결말이 쉽게 예상된 탓입니다. 마지막에 졸리가 받은 선물이 인피로 제본된 책이라는것 역시도 뻔했고요. 

샌본과 제본가 주치니가 인피 제본 책을 졸리에게 선물할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졸리가 책 제본에 매력을 느껴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할 거라는걸 알려줄만한 단서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편의적인 전개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다른 재미도 느끼기 힘들어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차라리 졸리는 사실상 이용가치가 없고 루치아의 인피만 중요한 상황인 것 처럼 끌고 가서 결국 졸리가 체포되도록 만드는 결말이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졸리의 여자친구 사체 (머리?)를 여행가방에 몰래 넣어 두는 식으로요.

"스킨헤드 센트럴" 

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뒤 시골 마을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스킨헤드 머리를 한 데일에게 집안 일을 시킨 뒤, 짐 아내의 패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일의 동생 제이슨이 패물을 돌려주는데...

가정 폭력에 따른 범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야기가 명쾌하지 못해요. 동생 제이슨을 폭행한건 형 데일인지? 그렇다면 형 데일을 폭행해서 사과하게 만든건 그 아버지인지? 짐 부부 집에 데일이 불을 지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또 형제의 아버지가 폭력 성향을 간직한채 10여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데일이 저지른 범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데일은 절도를 저질렀고, 이는 맞아도 싼 짓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아이를 매질했다고 짐이 이야기하는건, 그 아버지 말대로 오지랖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에 집에 불을 지른 데일을 육군 훈련소에 보내는 결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당연히 경찰을 불렀어야 했습니다. 방화는 굉장한 중범죄니까요. 이미 성인이 된 데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비교적 길게 설명되는 짐 부부 아들이 죽은 비참한 사고도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데일 가족 이야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데일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이 역시 오지랖이죠.

좀 있어보이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지만, 알맹이는 그닥인 모래성같은 이야기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 

늙은 노파가 온갖 사람들에게 심술궂은 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다는 설정은 고전 영국 추리 소설에 등장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속에서 이런 편지는 은근한 협박이나 스캔들 폭로였던 반면, 이 작품 속 생크스 여사의 편지는 훨씬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이 은근한 심리 서스펜스라면, 이 작품은 현대물답게 스플래터 하드고어물인 셈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 상황 묘사와 엮어서, 독자에게 이 노파는 죽어도 싸다는걸 확실히 알려주거든요.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교사 시절 학생의 게이 성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었어요. 진작에 살해당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에 생크스 여사가 살해되지만, 동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아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끔찍한 범행'과 '처단' 자체의 자극적 쾌감에 비해 이야기가 평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란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첫 남편" 

잘 나가던 변호사 리오나드가 아내의 첫 남편 사진을 발견한 뒤, 자격지심과 질투로 오해를 만들고, 결국 첫 남편 야드만을 죽인다는 범죄극입니다. 비교적 분량이 긴데, 리오나드가 붕괴해가는 심리 묘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긴 만큼 디테일한 묘사는 좋지만, 전개는 평이합니다. 리오나드가 야드만을 죽인다는 결말은 뻔했고요. 아내 발레리도 죽였을 거라는 암시가 살짝 등장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야드만을 죽인 뒤, 그의 렌트카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차안에 있던 야드만의 애견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거나 범행이 드러난다는 결말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도 개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차량이 있었다는 작위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길이만큼 좋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운이 좋아" 

텔레파시 능력자 수키 스택하우스와 마녀 아멜리아 브로드웨이에게 보험 사업을 하는 그레그가 사건을 의뢰했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서류철을 뒤졌는데,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는 의뢰였다.

텔레파시 능력자, 마녀, 뱀파이어, 마술사 등이 나오는 판타지 범죄물로 그레그의 경쟁 업자 중 한명이 그레그의 비정상적인 행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수키 스택하우스가 더듬어 밝혀내는 과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동으로 뒤섞인 상황에 대한 정리도 깔끔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며, 판타지적인 설정과 능력들을 조사 과정과 이야기에 잘 써먹고 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화스러운 설정만큼이나 만화스러운 전개는 아쉽습니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게 많아요. 그레그가 주변 행운을 빨아들여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거야말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충분한 설정인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버지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단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벌어졌던, 더운 날씨에 차 안에 방치되어 사망한 아이 사건이 그려집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게 진상인데, 아내와 남편을 분리시킨 뒤 심문하여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 묘사가 빼어납니다. 아내가 먼저 자백했다며 자백을 유도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이고요. 또 그냥 심증이 아니라 '이미 그만 둔 보모를 재 고용하는 광고를 내지 않은 점' 에 착안하여, 어차피 아이가 죽을걸 예상했다는 추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부모 시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의 동기가 치열하게 드러나지 않는 탓에, 드라마의 깊이가 부족했어요. 전개와 결말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경찰 수사물로는 기본은 하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저명한 해리 보슈 시리즈다웠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개 산책 시키기" 

토론토에 사는 부유한 미시 로라 프랜시스는 개 산책 중에 단역 배우 레이를 만난 뒤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레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남편 로이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정부에게 남편 살인 청부를 맡기지만, 남편이 선수쳐서 정부는 죽고, 선수친 남편도 정부가 의뢰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왔던 -헨리 슬레셔였던가요? - 뻔하디 뻔한 내용이라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로라와 레이가 벌이는 질퍽한 정사 장면 묘사는 그나마의 수준을 더 낮고 저렴하게 보이게 만들고요. 이럴 바에야 뻔해서 짝퉁스러운 반전을 끼워넣지 말고, 포르노에 가까운 싸구려 펄프 픽션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볼 만한 부분이 있었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모자족인" 

부유한 의료기기 사업가 제더버그 마틴이 살해당했다. 스무살이나 어린 젊은 아내 나네트는 정체불명의 거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언니의 전 남자 친구인 카일 헤이에스 형사 밑에서 일하게 된 감식관 테스 캐시디가 주인공인 작품. 

단서, 증거, 동기 모두 애매하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입니다. 테스 캐시디가 몇 가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 귀납법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두가지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불을 두려워했으며, 친아들이 반대하는데도 나네트가 화장을 고집한 이유가 첫 번째, 흉기인 도끼에 찍힌 커다란 엄지손가락 지문이 두 번째입니다. 테스는 도끼에 찍힌 엄지손가락 지문은 고인의 엄지발가락 지문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 것으로 추리합니다.

이 엄지발가락 지문에 대한 추리를 우연히 테스가 알게 된 '모자족인' - 아이가 바뀌는걸 방지하기 위해 엄마의 손가락 지문과 어린아이의 엄지발가락 지문을 찍는것 - 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법의학으로 발가락과 손가락 구분이 불가능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구분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동기가 있는건 나네트와 아들 스티븐 뿐이니 어떤 식으로든 범행은 드러났을테고요. 이런 점에서 현대물보다는 근대물에 더 적합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아울러 테스와 상관과의 관계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뱁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뒷골목 싸구려 범죄극. 주인공이 스트리퍼 뱁스와 함께 마약 전달책을 찾아가 마약을 강탈해오는게 전부입니다.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특기할 만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주인공이 때때로 '십자가'를 본다던가, 대학교를 나왔다던가 하는 기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잠" 

묘지 관리인 그레이브 디거는 과거 마크 틴들이라는 과거 용병이었다. 실수로 포로가 되었었지만, 상관 월터 잭슨의 희생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지에 월터의 시신이 매장되게 되는데, 얼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시신을 모욕하자 그는 용병 마크 틴들로 돌아간다....

그레이브 디거가 용병으로 돌아온다는, 영화로 따지면 캐릭터 탄생을 알리는 도입부 격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각성은 조각내버렸다는 한 마디로 끝이고요. "존 윅"에 빗대어 보면, 자동차와 개의 복수는 하지도 않고, 다시 킬러로 각성해서 집에 쳐들어온 마피아 조직원을 죽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즐거운 응원단" 

고등학교 응원단에 미모의 호랑이 코치가 부임했다. 그녀는 단원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는데, 단원 중 3명은 그녀가 스터드 하사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했다. 코치는 그녀들을 꼬드겨 친해지지만, 3명 중 한 명인 베스의 도발로 결국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치가 불륜을 저지른 뒤 아이들을 입막음 시키려고 억지로 친한척을 한건 알겠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인 베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그녀를 견제한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코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륜남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다? 한국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남 스터드의 친구 프라인이 베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말도 뭔가 싶어요. 죽인 것도 아니고, 설령 이 자리에서는 죽였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게 뻔하잖아요? 볼짱 다 본 막장 인생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되지 않고 답없는 전개와 결말을 그려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로" 

3인조 은행 강도인 잭 일당은 서부 텍사스 일대를 떠돌다가, 교차로에 있는 작고 낡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더브와 로이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둘은 충동적으로 가게 주인인 노부부를 살해한다. 둘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목 잭의 분노가 두려워, 잭에게도 총격을 가하는데....

서부 텍사스의 황량한 묘사, 그리고 작은 가게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묘사가 볼 만했던 범죄 액션극. 가게를 찾은 꼬마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잭이 기사회생하고, 꼬마가 잭의 새로운 동료가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주어진 암시와 내용을 보면 잭은 악마이고, 나이가 들어 쓸모없어진 인간 부하들을 때때로 교체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액션 장면만으로도 별점 2점은 충분합니다.

"악마의 땅" 

소몰이꾼 출신으로 서던퍼시픽 철도탐정으로 일했지만 해고당한 형제는, 핑커튼 탐정사 취직을 위해 바바리 해안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형은 사람을 관찰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셜록 홈즈같은 취미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 메그가 둘에게 수상쩍은 일자리를 제안했다. 구스타프는 동생에게 일행인걸 들키지 말자고 말했고, 찾아간 술집에서 갑작스럽게 구스타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에 대해 기묘한 독촉을 하는 편지에서 시작해서, 편지를 쓴 사람이 형 구스타프와 겪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작품.

사람이 술집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본격물로 셜록 홈즈만큼 똑똑하다는 구스타프 형이 아니라, 힘쓰는 쪽인 동생이 추리를 하는 탐정과 이야기를 하는 화자 역할인 왓슨, 그리고 액션 담당인 브라운 신부의 동료 프랑보우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경구를 떠올리며 추리하는 과정은 홈즈 팬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술집에서 급작스럽게 피아노를 친 이유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이며, 좌, 우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위나 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추리하는 식입니다. 결국 동생은 바닥에 문이 있다는걸 알아내고 형을 구해내게 되지요. 

또 소몰이꾼 1인칭 시점의 말투로 전개하는 묘사, 특히나 중간중간 삽입된 소몰이꾼 감성 유머가 아주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근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 무식한 막노동꾼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탐정 피트 모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닥의 문은 셜록 홈즈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메그의 술집에서 벌어진 다툼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감점 요소이지만, 장점이 명확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구스타프 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킴 노박 효과" 

제목은 주인공이 벌이는 사기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애착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돈을 울궈내는 사기지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 역할에서 따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

주인공의 킴 노박 효과 사기 생각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정조역전세계처럼 나이든 과부들에게 킴 노박 효과를 일으키며 돈을 빼 먹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이게 바로 남녀평등이겠죠. 질퍽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된 범죄와 심리 묘사도 볼거리였습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교님'에게 사로잡힌 주인공이 빠져나온 뒤, 남창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은 설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완벽한 범죄자였던 주인공을 몰락시키려면,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쉽게 약점을 잡혀버려서 인생이 막장에 몰려 버린다면, 앞서 대단해 보였던 사기와 범죄 행각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 작품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버리고 마니까요.

주인공과 성형외과 의사, 킴 노박 효과를 일으켰던 배우, 피해자 등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괜히 복잡하게 보일 뿐, 이야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킴 노박 효과도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랑했던 애인이나 전처, 혹은 영화배우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게 과연 사기일까요? '그 사람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건 당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거짓말로 돈을 울궈내는건 사기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추억에 대한 댓가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들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은 단편에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훨씬 길고 정교한 작품으로 만들었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