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 - |
일본의 노부호 사토 다이조는 현역에서 은퇴한 세기의 명탐정들 - 미국의 엘러리 퀸, 영국의 에르퀼 푸아로, 프랑스의 매그레 경감, 그리고 일본의 아케치 고고로 - 에게 황당무계한 제안을 했다. 그것은 바로 2년 전, 현금수송차 탈취로 3억 엔을 강탈한 뒤 미궁에 빠져버린 이른바 '3억 엔 사건'의 범인상과 유사한 인물에게 자신의 3억엔을 훔치게 하고, 그 모방범의 행동을 추적하여 진짜 3억 엔 사건의 실태를 추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네 명의 명탐정은 사토 다이조의 제안을 승낙했다.
사토의 부하 간자키 고로는 3억 엔 사건의 범인상에 부합하는 무라코시 가쓰히코라는 젊은이를 찾아냈고, 무라코시는 사토가 계획한 대로 사토가 준비해둔 3억 엔을 강탈했다. 이후로 네 명의 명탐정들은 차례차례 무라코시의 이후 행동을 추리했고, 무라코시는 마치 명탐정들이 조종하기라도 한 것처럼 추리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여정 (트래블) 미스터리'의 대가로 알려진 니시무라 교타로의 장편 소설.
1970년대를 무대로 세계의 명탐정을 모아 추리쇼를 벌인다는 설정은 팬픽 느낌입니다. 그래도 추리계에서 꽤 이름을 날린 거장의 작품이니만큼, 단순한 패러디 팬픽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꽤 흥미로운 범죄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탈세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동기는 지금 시점에서도 무릎을 칠만한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당연히 팬픽스러운 요소도 가득합니다. 고전 명탐정의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제법 많아요. 등장하는 탐정들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잡혀 있고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아케치 고고로는 별다른 특색없는 조용한 노인이지만, 엘러리 퀸의 촐랑대고 경박스러운 명랑함, 푸아로의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감, 은근하면서도 묵직한 메그레는 제가 생각한 그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나이를 먹은 뒤 정말로 살아 있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한 묘사도 좋고요. 엘러리 퀸이 하드보일드를 평가하며 육체보다는 머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게 좋은 예입니다. 사건이 벌어진 뒤 현장에서 엘러리가 하는 "모자는 어디로 갔을까요?"라는 대사, 위치가 바뀐 의자에 집중하는 식의 고전적인 추리 방식도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그러나 한편의 추리 소설로 완성도를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워요. 아무리 늙었어도 세계 굴지의 명탐정을 한명도 아니고 네명이나 불러놓고, 그들을 모두 속이려 한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원래 계획대로라면(단지 돈 3억엔을 잃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함) 거금을 들여 명탐정을 부를 이유도 없고요. 그냥 미시마 앞에서 3억엔 사건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계획을 실행해도 충분했습니다. 경찰을 부른 뒤, 돈이 불탔다는 것만 공식적으로 알게 만들면 되니까요. 아니면 명탐정들의 결론이야 똑같으니 네명이나 한명이나 그게 그건데 그냥 일본의 아케치만 불러도 충분했고요.
이러한 설정은 팬픽 기획을 위한 의도였다고 칠 수는 있지만(어차피 이런 소설이 현실적일 수는 없으니), 범행도 곳곳에 헛점 투성이입니다. 우선 간자키가 다이조의 계획대로 1인 2역으로 움직였으리라는 보장부터가 전혀 없습니다. 1인 2역이 다이조의 지시라고 하더라도, 더스트 슈트를 통해 지폐를 불태운 행동은 설명되지 않고요. 무라코시 - 간자키가 더스트 슈트가 소각장으로 이어지는걸 몰랐던건 순전한 우연, 착각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지폐를 불태운 것도 다이조의 지시였다고 한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간자키가 자신이 무라코시가 아님을 증명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게다기 마지막 추리쇼에서 시기 적절하게 간자키가 혼자서 알약을 꺼내어 먹은 뒤 죽어버린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이 정도로 적절하게 죽어준다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거의 최면술의 영역이 아닐까 싶네요.
덧붙여, 지폐의 "덩어리"가 남아서 감식이 가능했더라면 그 지폐가 폐기대상인지 아닌지 정도도 확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팬픽 측면의 가치와 예쁜 디자인 덕에 별점을 약간 더합니다만, 전반적으로 평균 이하의 작품입니다.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딱히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덧 : 아케치 코고로가 아니라 고고로로 번역된 이유가 따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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