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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3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는 참을 수 없다! 법정 추리 소설의 고전 걸작들.

* 이전 소개드렸던 honto의 북트리 서비스에서 추천하는 법정 추리 소설들


법정 추리 소설의 고전 걸작들을 소개해드립니다. 1950~60년대 작품들이지만, 검찰측과 변호측이 증인을 서로 심문하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피고인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다투는 긴박감, 관계자들을 둘러 싼 복잡한 인간관계 등 작품의 핵심 매력들은 시대가 지났어도 전혀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읽을 가치가 충분한 명작들이니, 한 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사건>> 오오카 쇼헤이 (국내 미출간)
19세 소년이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법정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일본의 재판 제도와 절차가 상세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치밀한 르포르타쥬로 보이기도 하는, 읽을만한 법정 추리 소설.

<<파계 재판>> 다카기 아키미쓰
일본 법정 추리 소설의 원점이라고 불리우는 걸작. 전편에 걸쳐 법정 장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피고의 무죄를 믿는 변호사와 검사가 엮어내는 진검승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금씩 수수께끼가 밝혀지면서, 여러 복선이 회수되어 클라이막스로 이르는 과정은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외국 추리 소설 번역가로서 활약했던 저자의 데뷔작. 애거서 크리스티의 <<검찰측 증인>>을 의식하여 쓰여졌으며, 다카기 아키미쓰도 절찬했다는 법정 추리 소설. 과연 변호인 측 증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50년 전에 쓰여졌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복선과 트릭은 지금 읽어도 선명하게 그 가치를 내뿜는다.

<<검찰측 증인>> 애거서 크리스티
남편이 살인 혐의로 재판받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된 아내. 그 곳에서 아내는 뜻밖의 증언을 하기 시작한다.
원래 희곡으로 쓰여진 작품답게 전편이 대화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으로 마치 연극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도 전해준다. 숨쉴틈없이 휘몰아치며 결말로 향하는 진행으로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걸작.

<<유다의 창>> 카터 딕슨
'밀실의 거장'으로 유명하지만 법정 추리 소설도 집필하고 있었던 저자가 밀실물과 법정 추리 소설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피고의 무죄 판결을 위해 헨리 메리베일 경이 파헤치는 진실은 무엇인지? 재판을 통해 상세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가설을 내놓고, 이를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 훌륭하게 묘사된 본격물.

2022/11/13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기타쿠니 고지 / 문승준 : 별점 2점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4점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변호사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도시타는 가난한 동네 변호사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의뢰 해결이 주 업무라 법정 다툼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정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보다는 일본 추리 소설 시장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소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일상계 추리 단편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문가 - 서점 점원헌책방 주인, 요리사, 화과자 장인, 시계 수리 전문가, 사진가, 바리스타라쿠고가복화술사, 호텔리어, 심지어 스님까지 - 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자의 직종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그냥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설정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법률 전문가스러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도시타는 화자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일 뿐, 탐정 역할은 도시타의 동생 리쓰가 담당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리쓰 캐릭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일단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시타' 에 관련된 말을 하는 루틴이 있고, 현재 상황과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떠오르게 만드네요. 결은 좀 달리하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설정마저도 똑같고요. 그러나 우영우만큼 호감가게 묘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문가 일상계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에 목숨을 건 나머지 이상한 만화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또 추리한 결과를 형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는데, 여기에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에 더해져 굉장히 비호감이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글래머 소꼽친구 간호사 사키, 여자를 밝히는 스님 마루메, 전 야쿠자 출신이자 현 카페 주인인 이모부 등 비현실적이거나,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괜찮았다면 나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록된 네 편의 단편들 모두 그렇게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이야기 전개가 리쓰 캐릭터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았던 탓입니다. 입 안에 넣은 치과 치료용 충전물이 라디오처럼 동작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따뜻한 인간 드라마 중심의 전형적인 일상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가 일상계로 보기에는 전문성, 일상성 모두 떨어지며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꼽자면 일본에서도 변호사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도?
딱히 영상화 되었다는 소식도 없고, 후속권도 출간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금새 절판된걸로 보면 다른 분들의 평가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고양이'는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므로 집사분들께서는 낚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1화 <<못된 며느리와 낙서 소동>>
고토에 아줌마는 도시타에게 며느리 험담 끝에 며느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토에 아줌마가 돌아간 후, 리쓰는 그녀의 섬망성 기억 상실을 눈치챘다. 형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며느리 에가와 씨를 만나러 갔다가 ,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던 낙서 소동에 휘말리는데...

진상은 알고보니 고토에 할머니의 병을 낫기 위해 며느리 에가와가 마당에 자생하는 디기탈리스 잎을 떼어 말린 뒤 몰래 먹였다는 겁니다. 고토에 할머니는 디기탈리스 잎의 부작용으로 치매와 비슷한 용태를 보인거지요.
그런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디기탈리스가 심장병에 효과가 있지만 독성 또한 강하다는건 정보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 완성으로 '디기탈리스 중독'이 함께 뜰 정도로요. 이걸 약재로만 알고 먹였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자기 험담만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살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이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마무리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도시타가 제대로 된 변호사였다면 며느리를 경찰에 신고하는게 맞았어요.
추리를 하기 위한 정보 제공도 빈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차라리 낙서 소동 쪽이 추리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다른 낙서들과는 그림이 달랐고, 키가 작은 사람이 그렸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하지만 진상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생이 새가 부딛힐까봐 '버드 스트라이크'를 리카 씨네 가게 쇼윈도에 그렸다는게 전혀 와 닿지 않았거든요. 쇼윈도가 그 가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1층 건물 쇼윈도에 새가 날다가 부딛힐일이 그렇게 많을리 없으잖아요. 애초에 범인 신지의 집 창문에 새가 부딛혀 죽은 것부터가 작위적이지요. 이를 리쓰가 맨션의 깨진 창문만 보고 바로 알아챘다는 추리도 비현실적이고요.

아울러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화 <<협상 상대는 요통으로 고생하는 전과자>>
도시타 형제는 연립 재건축을 앞두고, 퇴거를 거부하는 임차인을 설득하는 의뢰를 받았다. 리쓰는 찾아간 임차인 아라키 데쓰조의 집 안에서 '사취'가 나는걸 느꼈고, 여러가지 주변 정보들을 조합하여 그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길고양이를 돌본다는걸 훔쳐온 쓰레기 봉투 속 내용물을 통해 추리하는 과정, 그리고 사취는 길고양이가 물어온 쥐의 시체였다는 진상까지의 전개와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퇴거를 불응했던 이유가 유치원에 드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작위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고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일상 드라마 느낌을 가득 전해주는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3화 <<만화가 지망생과 사라진 유언장>>
도시타는 이모네 카페 단골인 만화가 지망생 레논 씨의 사건 을 수임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형이 레논 씨가 유언장을 숨겼다고 주장해서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논 씨는 도시타에게도 유언장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형이 어머니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을 녹음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수록작 중 유일하게 변호사가 활약할만했던 이야기. 핵심은 '유언장은 어디에 숨겼나?' 라서 변호사가 나설만한 부분은 없지만, 레논 씨가 왜 유언장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레논 씨가 어머니 장례식 초야 직후, 카페를 방문한 뒤 책꽂이 위에 있는 책을 떨어 트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카페의 만화책 중 한 권 안에 유언장을 숨겼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에 대해 사소해보였던 레논 씨의 질문이 중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유산을 형이 아니라 레논 씨에게 전부 남긴다는 거라서 유언장을 숨기고 형과 유산을 반으로 나누려 했다는 동기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바보같아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동기였다면 유언장을 숨기는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식으로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유언장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전개를 보면 더더욱요. 이는 유언장이 없을 경우 법률적으로 레논 씨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4화 <<한심한 피고인과 소음 트러블>>
도시타는 마약용 주사기를 수백개 구입하려다 경찰에게 상처를 입힌 에비스 씨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으려고 도시타는 노력했지만, 에비스 씨는 거부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리쓰가 급작스럽게 증인 요청을 하여 판결은 연기되었다.
그 사이 도시타는 소꼽친구 사키의 소개로 이웃이 내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도모코 씨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도시타 형제는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도시타가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법정에서 날선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왜 에비스 씨가 징역형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추리해낸 뒤, 진상을 파악하여 그의 갱생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도모코 씨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소음 공해는 단순한 소재였고, 도모코 씨 남편이 정리 해고를 앞두고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근무하는 상황의 극복이 핵심이거든요.

드라마 모두 좋은 이야기에요.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에비스 씨 시간의 경우, 오래전 이혼한 아내가 키우던 아들이 칼에 찔린 뒤, 부모는 수혈이 안 되는 탓에 행인들로부터 피를 뽑으려고 주사기를 구입했다는 동기부터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딱히 추리를 할 부분도 없고요.
도모코 씨가 치과 진료를 받은 이후, 이빨에 채운 충전물이 우연히 방송을 수신하게 되어, 일종의 광석 라디오처럼 동작했다는 진상도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겁니다. 설령 실제 일어나더라도 입 안에서 소리가 나는걸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아쉬움이나 여운을 남기기는 커녕 더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만 굳게 만들어 주네요.

2009/08/24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 윌리엄 윌키 콜린스 외 / 한동훈 : 별점 1.5점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 4점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한동훈 옮김/하늘연못
하아.... 오랫만에 추리소설 포스팅입니다. 최근 바쁘기도 하고 여유가 없어도 통 책 읽을 시간이 없었네요. 이 책도 읽는데 1주일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럼 리뷰를 시작할께요.

일단 이 책을 소개하기 전에 "골든에이지" 가 과연 어떤 시기인지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는 단편 중심의 추리소설의 시대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여명기를 지나 1913년 벤틀리가 "트렌트 마지막 사건" 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둔 이후 이든 필포츠의"빨간머리 레드메인즈". 메이슨의 "독화살의 집", 버클리의 "독초콜릿 사건" 등 장편 추리소설 명작들이 속속 발표되고 곧바로 크리스티, 반다인, 엘러리 퀸, 딕슨 카, 크로포츠 등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들이 데뷰를 하기 시작한 시기, 즉 1차대전 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거장들의 데뷰가 이어지고 본격 추리소설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황금시대 (골든에이지)"라고 하는 것이죠.

때문에 1차대전 이전의 소설만 담고있는 이 책의 "골든에이지"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책 소갯글을 보면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기를 연 대표작가 다섯 작가의 소설을 담은 책" 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소갯글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개척기에 활동한..." 이라고 설명되는 것이 더욱 적당한, "개척기 (여명기) 미스터리 중편선" 이 더 합당한 표현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못된 제목이라면 과장광고를 넘어서서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제대로 목차나 내용을 살펴보지 않은 제가 죽일 놈이지만요.

그래서인지 사실 책 내용은 기대와는 많이 달라서 실망이 컸습니다. 이 "골든에이지"라는 시기에 나온 작품들을 제가 워낙 좋아라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흥미진진한 본격추리물을 기대했는데 이 책에 실린 중편들은 실제 추리물로 보기에는 힘든, 추리물 성향을 띈 드라마들로 단지 오래되었다라는 가치 밖에는 없는 탓입니다. 더군다나 5편의 작품들 중 한작품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 을 다룬 것이 아닌 일종의 "창작극"이나 "자작극" 이라서 그런지 더더욱 몰입하기도 어렵고 지루했습니다. 이럴바에야 셜록 홈즈의 라이벌이나 번역해 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아노 탐정 중단편이 하나 실려있긴 하지만 많이 부족해요. 작품도 별로였고요.

물론 역사적인 의미는 크고 책 자체의 번역이나 장정, 디자인도 훌륭한 편이라 과장된 제목으로 현혹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물론 그랬더라면 절대 구입하지 않았겠지만요. 별점은 1.5점입니다(솔직히 1점 주려다 책 자체의 가치를 생각해서 참습니다.).

3층 살인사건 / 프랭크 보스퍼 

런던 블룸즈베리의 한 하숙집을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목 그대로 하숙집 3층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하숙집을 무대로 하여 몇몇 인물들만 등장하여 주로 대화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인 작품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작가가 배우 출신인 탓이 크겠죠.

그러나... 제목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과는 달리 추리소설로 보기는 애매했습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확립되지도 않았고 특히나 퍼즐 미스터리는 등장하지도 않았던 때에 쓰여진 작품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추리물로 정의하기는 확실히 무리였어요. 가장 중요한 목격자의 증언이 범인의 변장을 통해 유도된 것이라던가 하는 간단한 트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유치한 수준의 트릭이며, 경찰의 수사 역시 너무 대충이고 전개도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등 범죄와 관련된 부분에서의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더군다나 극중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추리소설이나 장르문학에 대한 홀대(?)가 묻어나는 것 역시 조금은 불쾌한 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추리소설 초창기의 추리물의 성격을 띈 소설이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네요. 영국 하숙집과 거주민들의 생생한 묘사, 블랙코미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 재기발랄하면서도 요란한 대사들은 재미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뻔하기도 하고요.

애시당초 이 작품 하나밖에 작품이 없는 작가를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기를 연 대표작가" 라고 선전하는 출판사 행태가 더욱 문제겠죠.

데드 얼라이브 / 윌리엄 윌키 콜린스 

영국인 변호사가 미국의 외딴 농장에 휴양차 체류하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으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하네요. 피해자가 사실은 살아있었다... 라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법정 장면에서의 증거를 둘러싼 공방과 감형을 위한 거래로 거짓된 자백이 속출하는 등 드라마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시나 추리물은 아닙니다. 사건이 결국 범인(?)의 자백으로 해결된다던가 - 아니 애시당초 사건 자체가 없었지만 - 주요 증인을 찾아 나서는 것도 신문 광고를 통한 제보에 의지한다던가 등으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라는 발상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초창기 법정 드라마 정도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역사적 가치 이외의 재미를 찾아보기도 힘들고요.

안개속에서 /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 

초면인 사람들도 친구가 되는 영국의 한 클럽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용인데, 등장인물들의 "증언 (목격담 / 경험담)" 으로 사건이 이어지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미국인이 간밤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자 그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러시아 공주를 자칭하는 여자도둑과의 인연을 다른 회원이 이야기하고, 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귀족의 변호사가 살인사건의 다른 진상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식으로 증언과 증언이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거든요.

결국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사건에 관심을 보인 클럽회원 준남작이 하원에서의 연설을 하지 못하도록 한 작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르는 약간의 반전이 밝혀지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앞선 두 작품에 비하면 확실히 추리라는 과정이 묘사된, 때문에 그나마 "추리 소설" 로는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두 번째 다이아몬드 사건 이야기는 내용에 별반 필요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추리의 과정은 있지만 결국 경찰 수사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지는 뻔한 추리라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쓰여진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 박하게 굴 필요는 없겠죠?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입니다. 그런데 엘러리 퀸의 ‘가장 중요한 추리소설 125편’에 선정된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무슨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이유를 통 모르겠네요. 그만큼 가치있는 작품은 아닌듯 싶은데...

버클 핸드백 /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 

"나선계단의 비밀"로 유명한 서스펜스 소설의 대모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의 작품입니다. 시리즈 캐릭터이기도 한 간호사 "힐더 애덤스" 시리즈의 한편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된 시리즈 같네요. 작가의 간호사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듯한 디테일한 묘사와 별명에 걸맞는 서스펜스, 스릴의 묘사가 일품인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이 넘치면서도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고 결말도 합당해서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너무 급작스럽게 사건이 해결되는 점, 주요 등장인물의 고백(?)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 하죠. 무엇보다도 소설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이 좋았으니까 말이죠. 이 책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세미라미스 호텔 사건 / 알프레드 에드워드 우들리 메이슨

"독화살의 집"에 등장했던 명탐정 아노 탐정의 중단편입니다. 상당히 좋아하는 캐릭터라 기대가 큰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 별로네요. 본격물스러운 맛이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의 핵심인 여주인공이 우연히 본 범인의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심리적인 부분에 기대고 있어서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심리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아노 탐정의 캐릭터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등 실망스러운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초반부 마약을 발견하는 과정과 추리가 여러 단계로 발전하는 부분, 그리고 범인의 이상한(?) 행동과 장물을 숨겨놓는 곳에 대한 아이디어 정도는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다른 중단편들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구태여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20/11/1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로버트 바 외 / 이정아 : 별점 2.5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6점
로버트 바 외 지음, 이정아 옮김, 박광규/코너스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두 번째 권입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의 초기인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발표되었던 단편들이 수록된 앤솔러지입니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과 마찬가지로 정가 할인되었기에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셜록 홈즈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탐정들 등장이 많은게 이채롭습니다. 유명한 외젠 발몽, 마틴 휴잇을 비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당대 탐정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사나이, 자연인 명탐정 노벰버 조와 초창기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는 독특해서 인상적이더군요. 플랙스먼 로우는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수록작들 수준이 모두 높지는 않습니다. 셜록 홈즈의 영향을 짙게 받은, 모방작이 많은 탓입니다. 시대와 유행에 충실했지만, 뛰어넘지는 못한 셈이지요. "두 개의 양념병"이라는 걸작이 수록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수준 이하 작품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가 인하된 가격이 워낙 저렴하기에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거브 탐정, 일생 일대의 사건"

파일로 거브는 마대 자루에 꿰메어진 채 익사한 헨리 스미츠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다. 그의 활약을 모든 리버뱅크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끊어진 전구를 쥐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하는데...

도배 및 인테리어 사업을 하면서, 통신 교육으로 탐정이 된 파일로 거브가 활약(이라고 쓰고 좌충우돌이라고 읽는)하는 시리즈 단편입니다.

통신 교육을 받은 탐정은 "탐정 피트 모란"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피트 모란은 겉에 드러난 것들만 1차원적으로 해석하는 단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민따위는 하지도 않지요. 당연히 추리보다는 코미디가 핵심인 이야기 들이었고요. 이 작품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탐정에 대한 희화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요. 마을 주민 모두가 변장이라는 걸 알아채는 변장을 한 뒤 탐문 수사에 나선다던가, 파일로 거브가 펼치는 수사를 마을 주민 모두가 지켜본다는 등의 묘사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피트 모란" 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웃음거리를 제외하면, 나름대로는 추리물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 기묘하게 죽었던 헨리 스미츠 사건의 결정적 단서는 피해자가 쥐고 있던 전구였으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어디서 전구를 갈았는지?"를 파악한 뒤 피해자의 작업실로 올라가 전구를 가는 동작을 따라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거든요.
피해자는 자신이 만든 '양고기 자동화 포장 기계'로 넘어져 마대 자루로 포장된 뒤 강물로 던져졌던 겁니다. 단서를 찾고, 추리한 뒤 추리를 검증한다는 순서만큼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셈이에요. 추리라기 보다는 겉에 드러난 단서를 '추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넓은 범주의 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단한 추리는 아니며, 흡사 "월레스 앤 그로밋"을 연상케 하는 황당무계한, 일종의 다고베르트 머신같은 기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도 언급되긴 했는데, 단지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만 점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당연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 

로드 던세이니가 1934년에 발표했던 작품으로 장르 문학을 사랑하시는 모든 애호가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 고전 걸작 단편입니다. 마지막의 의외성이 돋보이는, 이른바 '기묘한 맛' 장르의 대표작이지요.

이전에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정통 추리물 성격이 강할 뿐더러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충실해서 놀랐습니다. 이는 마지막 반전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상세한 묘사를 통해 반전을 탐정역인 린리 씨가 룸 메이트인 스메더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스메더스는 살인 용의자 스티거가 구입했다는 양념 '넘누모'를 파는 행상인이라서 린리씨는 샐러드에 뿌려먹게 넘누모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메더스는 거절합니다. "고기와 짭짤한 음식에만 뿌려 먹는 겁니다"며, 잘 모르고 채소에 뿌려 먹더라도 "두 번은 안 하죠"라고요. 이 말로 진상이 드러납니다!

2주일 동안 고기를 어떻게 보존했을지, 뼈와 정말 먹을 수 없는 내장 같은 부산물은 어떻게 처리했을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는 합니다. 그래도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고전 걸작임에는 분명해요.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린리 씨와 스메더스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더 많이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백작의 사라진 재산" 

외젠 발몽 시리즈 단편으로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에도 수록되었던 작품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트릭이 황당해서, 이전만큼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주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래시계" 

버트럼 이스트퍼드는 골동품상에서 오래된 모래 시계를 구입했다. 시계는 30분 정도 지나면 시간이 멈추는 문제가 있었다. 그날 밤, 모래 시계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던 (?) 버트럼 앞에 옛날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 모래 시계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190여년 전 자신이 참전했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시계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는데...

표제작으로 저자는 '외젠 발몽' 시리즈 작가인 로버트 바인데, 작품은 외젠 발몽 시리즈와는 관계없는 역사 판타지입니다.

일단, 모래 시계 소유권을 주장하던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해 준 전쟁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중위는 장군으로부터 기습 공격 작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걸 몰라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작전 실패 후 체포되었습니다. 장군은 '모래 시계 모래가 다 떨어지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리를 떠나고요.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 탓에 총살을 집행할 수 없었고, 장군도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총살 지시를 철회한다는 내용입니다. 긴박하면서도 왠지 모를 유머, 여유가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어떻게 버트럼 앞에 나타났는지부터 이유 불명이니까요. 왜 모래 시계가 파괴되고 중위는 사라졌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버트럼 이스트퍼드가 꾼 꿈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그래서 점수는 2.5점입니다. 여러모로 마무리가 아깝습니다.

"일곱 명의 벌목꾼" 

노벰버 조를 벌목꾼 막사 책임자 클로즈 씨가 찾았다. 작년에 나타났던, 벌목꾼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는 검은 가면이 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클로즈 씨로부터 범인 체포를 부탁받은 조는 파트너 쿼리치와 함께 막사로 향했다. 다음날, 강도를 막기 위해 여섯 명이 뭉쳐 떠났던 인부들이 강도를 당했다며 돌아 오는데...

탐정 노벰버 조 시리즈 단편입니다. 노벰버 조는 깊은 산 속에서 일하는 벌목꾼이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이지요.

전개 방식은 셜록 홈즈와 동일합니다. 주어진 단서를 통해 귀납적 추리를 펼쳐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여섯 명 벌목꾼이 차를 마셨던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행동 등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사소한 일이 단서가 된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마신 차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주전자를 씻었던 겁니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단서가 범인을 드러내는건 아닙니다. 범인을 드러내는건 돈을 숨겨 놓았을 막사를 해체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덕분이거든요. 이에 놀란 범인을 현장에서 잡는게 전부입니다. 차에 수면제가 들어있던건 분명해서, 그걸 씻으나 안 씻으나 별 차이가 없었고, 범인이 특정 시간에 개울가에서 무슨 짓을 했건 별로 중요한 단서가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완성도는 그닥이었습니다. 셜록 홈즈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한참 미치지 못해요. 벌목꾼이라는 직업이 유용하게 사용돼지도 못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부여한 가치도 역사적 중요성과 초판본 희귀성 뿐입니다. 엘러리 퀸도 '오지 탐정' 이라는 개념 도입만 높이 평가한 셈입니다.

"유령 저택의 비밀" 

잘 생각해보게.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말이지. 또한 거기에 덧붙여 이 단 하나의 발자국까지 잘 생각해보게 뭔가 번쩍하고 해답 같은 게 떠오르지 않나?" 

심령학에 정통한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가 등장하는 단편. 심령 현상도 과학과 추리로 풀어낸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나병에 걸렸다는걸 추리해 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고요.

그러나 진짜 유령이 나온거라는 결말 만큼은 영 별로네요. 이 정도까지 추리로 풀어내었다면, 사람이 꾸민거라는 진상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는 좋고, 추리도 볼만하지만 앞서 설명드렸듯 진상, 결말 때문에 감점합니다.

"레이커 실종 사건"

은행에서 수금을 담당하던 사원 레이커가 실종되었다. 그는 1만 5천 파운드를 지닌 채였다. 경찰은 그가 돈을 가지고 도주한걸로 판단했지만, 마틴 휴잇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

사립탐정 마틴 휴잇 (휴이트) 시리즈 단편입니다. 마틴 휴잇은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연재된 스트랜드 매거진 출신 탐정으로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이지요. 그래서인지, 작품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사건이 벌어지고, 탐정이 사건을 조사하여 추리 한 뒤, 경찰과 다른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이니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리한 결과가 의외라는 전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도 셜록 홈즈의 라이벌답게 추리적으로는 꽤 괜찮습니다. 수금할 때 레이커를 제대로 바라본 은행 직원은 거의 없었다, 은행 중 한 곳은 입구가 수리 중이었다는 수금 당시 정황, 그리고 레이커가 파리행 표를 살 때 본명을 댔고 독특한 우산만 채링크로스 역에 남겨졌다는 도주 정황을 통해 마틴 휴잇은 수금을 한 레이커는 변장한 가짜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합리적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의외성있는 반전이었을 테고요.

하지만 마틴 휴잇이 진범을 알아내는건 작위적입니다. 레이커 이름이 적힌 우산 속 광고지가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요. 광고지만 없었더라도, 이 범행은 완전 범죄가 되었을거에요. 광고 내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들에게 진범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광고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지요. 최소한 암호 정도는 써 줬어야 합니다. 이럴 거라면 마틴 휴잇이 구태여 발품을 팔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신문 광고란 속 수상한 광고만 보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마틴 휴잇 캐릭터도 문제에요. 유명세에 비하면 별다른 매력은 없기 때문이에요. 이름만 바꾸면 셜록 홈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형적이더라고요. 후대에 그나마 이름을 남긴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은 다들 차별화된 특징들이 있었지요. 도둑인 뤼뺑을 비롯해서 장님인 맥스 캐러도스,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안락의자 탐정 구석의 노인, 멋드러진 별명만큼은 길이 남은 밴 듀슨 (반 두젠), 법의학 탐정의 시조인 손다이크 박사처럼요. 물론 독특하다고 해서 역사에 길이 남는건 아닙니다. 아마추어 괴도 탐정 래플스처럼 지금은 잊혀진 존재도 허다하지요. 그러나 이는 작품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마틴 휴잇 시리즈는 추리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만큼, 마틴 휴잇만의 개성과 매력을 더하지 못한게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셜록 홈즈 스타일을 잘 따르고 있는,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이야기지만 단점이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바다 건너온 살인자"

로프터스 디컨 씨가 자택의 하치만 성상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현장은 거의 밀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고인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헨리 콜슨 씨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둘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헨리 콜슨 씨는 고인이 애지중지했던 '마사무네 검'이 사라졌다는걸 알아챘다. 그 검은 일본인 게이고 가나마로가 되찾기 위해 부탁과 협박을 반복했던 과거가 있었다. 가나마로는 원래 검의 소유주 아들로, 아버지 영전에 검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헨리 콜슨 씨는 게이고 가나마로가 일본으로 돌아갈 표를 예약했다는걸 알아내는데...

아서 모리슨이 쓴 단편인데 의외로 마틴 휴잇 시리즈가 아니네요. 내용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로, 마틴 휴잇이 등장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겁니다. 등장하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이 마틴 휴잇, 셜록 홈즈와 구분되는 특별한 매력이나 특기,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 했습니다. 추리가 진행되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거든요. 약간의 범인 심리 분석도 눈길을 끄는 요소였고요. 디컨 씨는 외출했다가 급한 용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집 안에 있었던 누군가가 범인이었을테고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왔을까요? 경찰은 침실 창문을 주목했지만, 도링턴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침실 창문으로 들어왔다면, 디컨 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침실로 향했을테고, 그곳에서 범행이 일어났을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요. 그리고 도링턴은 하치만 성상이 집에 들어온 날 범행이 일어났고, 성상이 원래 있던 상점에서 물건이 없어지고 부서진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하치만 성상 안에 누군가 숨어서 잠입했다'고 추리하지요. 물건 안에 범인이 숨는 이야기는 많을테지만, 이 정도면 꽤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되네요. 범인 카스트로를 특정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했습니다.

게이고 가나마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시킨 전개도 좋습니다. 앞서 피해자가 집착했다는 마사무네 검과 보라빛 옻칠 세공품 소개를 통해 가나마로가 한 말 - 큰 돈을 들여서 겨우 검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의미 - 의 뜻이 드러나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일본 물품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 했습니다.

물론 하치만 성상 무게에 대해 좀 대충 넘어가고 있기는 합니다. 사람 한 명 무게가 추가되었다면 이상함을 느끼는게 당연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범행을 저지른 카스트로가 다시 성상에 숨은 뒤 몰래 빠져나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한 몫 잡아서 도주 자금을 마련하는게 상식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단점은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빼어난 점이 분명 있고요. 탐정이 조금만 더 매력적이었다면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날 밤의 도둑"

프로비던트 은행 지점장 아일랜드가 텅빈 금고를 보고 혼절했다. 그런데 경비원 제임스 페어베언은 전날 밤, 지점장 아내인 아일랜드 부인이 지점장실을 향해 남편을 부르는걸 목격했었다. 아일랜드 부인은 그 사실을 부정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지점장이 지점장실 문을 통해 금고로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건강을 회복한 뒤, 범행 시간에 있었던 완벽한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그리고 그의 재산 상태는 완벽해서 금고 돈을 훔칠 필요가 없다는게 드러나는데...

'구석의 노인' 단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좋아해서 여러 편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낯서네요. 이전 다른 단편집 수록작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다른 단편집에서 빠진게 이해가 되더군요. 단순하고 뻔한 탓에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지점장은 범인이 아니다', '지점장 아내는 거짓말을 해가며 누군가를 감싸주려 한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결론은 쉽게 추리할 수 있어요. 범인은 바로 아일랜드 지점장의 아들이었던 거지요. 아들이 사건 발생 후 은행을 바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이 추리를 뒷받침하고요. 이 정도 사건을 구석의 노인에게 의지하는 버튼 양은 너무 무능력한게 아닌가 싶네요. 경찰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좋아하는 시리즈의 미번역 초역을 읽어보았다는 의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대리 살인" 

작가는 M.M 보드킨입니다. 작가는 영국에서 판사까지 역임했던 법조인이었다네요. 그래서인지, 클라이막스는 법정 공방이더군요. 정식 법정은 아니고, 검시이긴 합니다만 배심원이 배석하고,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하는 등 정식 법정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법정 미스터리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밀실에서 구식 전장총이 발사된 장치 트릭입니다. 물병을 돋보기처럼 쓴 게 진상이고요.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으로 익숙한 트릭이지요. 엉클 애브너는 1918년 발표되었으니 이 작품이 원조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작가 보드킨과 탐정 폴 벡이 포스트와 명탐정 엉클 애브너만큼 알려지지 못했다는 겁니다. 원조로서의 영광은 커녕, 잊혀져 버린거지요.

읽어보니 잊혀진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설 완성도가 별로인 탓입니다. 우선 쓸데없는 묘사가 많고 장황합니다. 에릭 네빌이 정원으로 나가 복숭아를 먹는 묘사가 2페이지에 걸쳐 설명될 이유는 없어요. 그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 트릭은 대충 넘어가는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에릭 네빌이 압박에 못 이겨 자백하고 쓰러진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어요. 트릭이 간파되었다 하더라도, 실수인지 살의가 있었는지 증명하는건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에릭 네빌이 정말로 목이 말라서 물병을 그곳에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엉클 에브너 시리즈가 훨씬 좋은 작품입니다.

2020/03/07

법정의 마녀 - 다카기 아키미쓰 / 박춘상 : 별점 1.5점

법정의 마녀 - 4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박춘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에게 한 실업가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며, 자신이 죽은 후의 처리를 의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심하던 대로 살해당했고, 범인으로는 세 번째 부인인 아야코가 지목되었다.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를 독살했다고 자백한 아야코의 변호를 위해 법정에 선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사건의 행방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다카기 아키미쓰의 장편 법정 추리물입니다. "파계재판"의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로. 재판을 통해 유력한 용의자의 혐의를 벗기는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을 그리고 있지요.

다카기 아키미쓰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 포함 국내 출간된 전작을 읽었을 정도로요. 당연히 절판된 작품 포함으로, 절판작 입수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오래전 절판된 작품들에 비하면 새로 출간된 작품들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별로입니다. 이유는 추리적으로 너무나 엉망인 탓입니다. 고전 본격물의 대명사같은 작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에요. 특히 진범이 드러나는 과정은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작위적일 뿐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거든요. 아야코의 자백 조서를 조작했다는 증거인 지장의 하얀 흔적은 그 전까지는 독자에게 전혀 제공되지 못한 정보이며, 이와시게 형사가 가와세 스미에와 밀회를 즐겼으며, 진범인 스미에를 돕기 위해 조서를 조작했다는 사실 역시도 법정에서의 깜짝쇼로 밝혀지기 이전에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일주일동안 사립탐정을 써서 이와시게를 조사한 결과라는데, 독자에게 그 전까지는 일언반구도 없어요. 그 전에 스미에와 이와시게가 통화하는 등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수상함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죠.
추리적으로 이렇게 엉망인 탓에, 법정에서의 한 판 승부도 부각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변론에서 햐쿠타니가 몰래 수집했던 깜짝 증거와 증인을 들이미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앞 부분의 재판 과정은 아야코의 혐의를 짙게 만드는 정도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지, 햐쿠타니의 변론에 도움을 주지는 별로 도움을 주지도 않고요.

또 이야기 전개도 억지스러워요. 초반에 가와세가 왜 햐쿠타니에게 찾아와서, 자기가 살해당할 것 같다며 죽은 뒤 후일을 부탁하는 설정부터가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기분이 이상하다, 불길하다는 정도로 변호사에게 이런 고백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이런 고백을 털어놓은 직후 죽는다면 크리스티의 단편인 "그린쇼의 아방궁"에서처럼, 의뢰인이 진짜 가와세였는지부터 의심해야 할 겁니다.
아울러 진범 스미에가 가족 외 다른 손님들까지 방문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복수가 목적이고, 딱히 새어머니 아야코에게 불만이 없다면 사건이 은폐될 수 있도록 몰래 범행을 저지르는게 나았을테니까요. 실제로 범행 직후 아야코와 장남 고이치는 주치의 모리나가 박사를 설득해서 자연사로 위장하려고 했었죠. 햐쿠타니가 없었다면 성공했을테고요.

등장인물들도 별로입니다. 이는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가와세 가문의 묘사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집안 식구들이 비정상은 아닙니다. 장남인 고이치는 어엿한 직장인으로 비교적 상식인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다른 가족들도 겉으로는 꽤 괜찮은 모습들을 연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런 점에서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그려낸 모든 가족들이 이상하고 심지어 광인인 콩가루 집안 설정보다는 조금은 나은 편입니다. 그러나 가장인 가와세의 비정상적인 성욕은 요코미조 세이시 못지 않습니다.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의붓딸을 강제로 범했다는 사건 동기는 그 정도가 지나치죠. 결과적으로는 요코미조 세이시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는 셈이에요.
제목인 '법정의 마녀' 가와세 아야코에 대한 묘사는 한 술 더 뜹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웃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는' 모습 때문에 마녀라고 생각하는 여인이죠. 그러나 햐쿠타니에 의해 그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탓에 항상 웃는다는 사실을 밝혀지고, 작품은 그녀가 마녀가 아니라 무고한 성녀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종교적인 이유로 웃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이러한 급작스러운 캐릭터 변화는 이야기에 도움을 주지도 않아요. 그녀가 범인이 아니면 결국 가와세 가족 중 한 명이 범인일 뿐인데 후보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가 급작스럽게 스미에를 진범으로 내세우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건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던 탓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책의 완성도 면에서는 항상 높은 점수를 주어 왔던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인데 이 부분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법정의 마녀'를 곧이곧대로 그린 일러스트부터 형편없어요. 공들여 그리기는 했지만 작품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차라리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서처럼 등장하는 주요 소품을 정밀묘사한 일러스트를 수록해주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 읽기라는 목적이 없었더라면 1점을 주었을 졸작입니다. 비교적 고전이지만 나름 현대적인 설정과 전개를 갖추어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 역시도 요코미조 세이시 등이 지배하던 당대 분위기와 아주 분리된 작품을 쓰지는 못했다는걸 확인한 정도만이 수확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도 이 작품만큼은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2004/09/09

시행착오 - 앤소니 버클리 콕스 : 별점 4점

시행착오 - 6점 앤소니 버클리 콕스 지음, 황종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런던 리뷰"지에 정기적인 평론을 기고하는 평론가 토드헌터씨는 동맥류로 시한부인생 판정을 받았다. 그는 남은 시간을 가장 값지게 사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사회에 해가 되는, 하지만 처벌 받지 않는 존재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대중 작가 팔로웨이를 유혹하여 가정과 가계를 파탄낸 요부 진 노우드를 표적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경찰은 팔로웨이의 사위 빈센트 파머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여 사형선고를 내렸고, 토드헌터 씨는 그의 무죄와 자신의 유죄를 밝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고발하여 재판정에 서게 되는데...

세계 3대 도서 추리소설 중 하나인 "살의"의 작가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작품입니다. "살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온 탓에 주변 분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도서 추리처럼 범인역의 토드헌터씨를 미리 밝혀 놓고 있지만 일반적인 상식과는 반대로 범인이 스스로의 범행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면서도 유머스럽게 그리고 있습니다.

좋았던 점은 스스로의 범행을 증명하기 위해 단서들을 나열하고 복선들을 잘 짜깁기 하는 등의 추리적인 요소와 법정에서의 치열한 공방같은 법정 스릴러의 요소가 잘 갖추어진 점, 내용상 탐정역의 비중이 작을 수 밖에는 없지만 중요한 조력자인 범죄 연구가 치터윅씨라던가 법정 장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왕실 변호사 어니스트 프리티보이(!) 경 같은 캐릭터가 잘 살아 있고 각각의 영역 (추리-법정 스릴러)을 확실히 구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사소해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나 단서를 짜맞추고 앞부분의 불필요해 보였던 여러 묘사들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부분들이 많다는 점과 마지막의 반전이 아주 괜찮다는 점입니다.
반전은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하나 저의 생각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으며, 그 모든 내용이 앞에 등장한 단서와 복선에 기한다는 정통 추리적인 요소를 잘 따르고 있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다만 목차에서 각 단락마다 제1부 - 악한 소설풍 (피카레스크) / 제2부 - 신파연극풍 (트랜스폰타인) / 제3부 - 미스터리소설풍 (디텍티브) / 제4부 - 신문소설풍 (저널리스틱) / 제5부 - 괴기소설풍 (고딕) 이라는 재미있는 부제로 구분하여 놓았지만 번역의 미스인지 각 부제별 소설의 느낌은 별로 살아 있지 않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원본은 느낌이 다를까요?
그리고 "시한부인생"이라는 토드헌터씨의 나름대로의 긴장감있는 핸디캡이 거의 노출되지 않고 하나의 설정으로만 쓰인 점은 좀 유감입니다. 유머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는 있겠지만 덕분에 최후의 순간까지도 토드헌터씨의 병과 죽음이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그래도 법정물과 추리물의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독특한 유머가 잘 살아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상당한 분량에다가 등장인물의 수도 많은 편이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충분해요. 때문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만으로 평가하기는 이르겠지만 상당히 즐길만한 작품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드는데 대표작이라는 "살의"도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6/03/11

마루타마치 르부아 - 마도이 반 / 김예진 : 별점 2점

마루타마치 르부아 - 4점 마도이 반 지음, 김예진 옮김, 쿠마오리 준 그림/파우스트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서에서 저명한 의사 가문 시로사키가의 손자 론고는 3년 전, 자택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여인 루주와 의도치 않게 시간을 보낸 뒤 그녀에게 푹 빠졌다. 그러나 론고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그녀는 사라졌고, 할아버지 지온의 심장 페이스메이커가 정지하여 사망했다.

루주와의 약속으로 사실을 함구한 탓에 할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벌받은 론고는 3년 후, 가문의 지시를 거부하고 의대에 진학하여 명문가의 사설 법정인 "쌍룡회"에 피고인 "어속"으로 호출되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론고를 위해 저명한 용사인 타츠키 가문의 황룡사 야마토와 대결할 청룡사로 선택된 것은 교토대생 미카가 미츠루와 조수 타츠야였다. 그리고 이윽고 벌어진 쌍룡회에서 3년 전 사건의 진실과 루주의 정체가 차례로 밝혀지는데...

마도이 반의 데뷔작으로 추리 애호가들의 커뮤니티인 하우미에서의 반응이 좋아 구입하였습니다. 사실 구입한 건 꽤 오래전인데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작품의 핵심은 '론고는 무죄이며 진범은 루주라는 정체불명의 여자다'라는걸 밝혀내는 과정입니다. 이게 "쌍룡회"라는 일종의 법정에서 검사인 황룡사와 변호사인 청룡사의 논리 배틀을 통해 진행된다는게 특징이고요. 이러한 전개는 법정물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압도적으로 불리한 론고와 청룡사 측이 처음 생각했던 작전 — 재판관의 손녀인 카나리가 루주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흘려 주도권을 잡으려는 — 이나, 청룡사와 황룡사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공격과 그 와중에 놀라운 진상이 연이어 드러나는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추리 애호가분들이 입을 모아 칭찬할 만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쌍룡회"부터가 만화적인 설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교토의 오래된 명문가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귀족들의 여흥이라는 쌍룡회와 젊은 미남미녀들로 구성된 등장인물들은 "오란고교 호스트부" 와 다를게 없으니까요. 하는 행동들도 비슷하고요. 법정에서 암검살이니 낙화 되돌리기니 하는 필살기를 펼쳐 보이는 묘사와 과장된 연출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코미디가 아니라 완전히 진지한 법정물이라는 겁니다. 

물론 작품이 라이트 노벨이니 그냥 만화와 다를게 없다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쌍룡회가 억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진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3년 전 벌어진 사건의 범인으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용의자가 "사실은 그때 다른 여자랑 같이 있었는데 그녀가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며, 그녀가 있었다는 증거로 선물받았다는 키스 마크가 찍힌 손수건을 조작해 들이민다는 것부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제가 검사, 즉 황룡사라면 다른 건 둘째치고라도 그 손수건이 그때 받은 것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겁니다. 쌍룡회가 어느 순간부터 '루주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런데 그녀의 정체는 OO다'는 식으로 흘러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첫 번째 증거로 내민 찻잔은 검사인 황룡사가 바꿔치기를 하는 등 정상적인 법정으로 보기 불가능한, 비합법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와 설정이 난무한다는 점도 감점 요인입니다. 논하는 사건 자체가 피고의 증언에만 기반하는데다가, 변호사와 검사는 서로 사기만 치는걸 좋은 법정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커피가 홍차로 바뀐 것으로 루주의 정체를 밝히는건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결정적 증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피고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어요. 찻잔을 바꿔치기한 것으로 도청 사실을 눈치채는 장면 역시 그럴듯해 보이지만, 똑같은 디자인과 색깔의 찻잔을 준비했다는건 억지입니다. 찻잔의 모양이 목소리로 전달될 수는 없으니까요.

마지막에 놀라운 사실이 속속 밝혀지는 부분도 과했습니다. 루주의 정체야 그렇다 쳐도, 미츠루는 여자였고 야마토는 나데시코였다는 서술 트릭은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논리 배틀의 탈을 쓰고 있지만 불합리한 요소와 억지가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와 닿지 않는 만화적인 설정과 읽기 힘들게 만드는 장황한 대화 역시 감점 요인입니다. 후속작이 있나 본데 도저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조금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4/03/23

중간의 집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중간의 집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러리의 지인인 변호사 빌의 매제 조가 살해당했다. 현장을 찾은 엘러리는 피해자가 뉴욕 상류층 사람인 조지프 켄트 김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볼은 조 윌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빌의 여동생 루시와 결혼했고, 본래 신분으로는 돈많은 과부 제시카 보든과 결혼했던 중혼자였다.
현장에서 조 윌슨의 아내 루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수집되었고, 김볼로 가입했던 1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수취인이 얼마전 루시로 변경된걸 근거로 경찰은 루시를 체포했다. 빌은 동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분투했지만 루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엘러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볼의 의붓딸 안드레아의 결정적 증언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여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검은숲의 엘러리 퀸 전집 중 한 권. "도중의 집"이라는 제목의 자유추리문고 버젼도 이미 읽었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러리 퀸 1기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와 3기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 2기 시기를 연 작품이라고 하는데, "스웨덴 성냥 미스터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았을 거라는 언급이 작중에 등장할 정도로 '국명 시리즈'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후더닛'에 충실한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이며, '독자에의 도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명 시리즈'보다는 드라마의 변화 폭이 넓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반부는 아예 법정물로 간주해도 될 정도니까요. 법정물로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범인의 다분히 고의적이고 어설픈 행동들을 열거하며, 이는 루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는 빌의 마지막 변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범인이 충분한 휘발유가 있었는데도 구태여 주유소를 방문해 베일을 쓴 얼굴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등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역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변론을 펼칩니다. '범죄자들은 아둔하며, 뛰어난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은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럴듯했습니다.
거의 빌이 이길 뻔 했지만 흉기에 루시의 지문이 묻어 있있다는 증거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는 결말도 현실적이었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핀치의 만년필에 독특한 초록색 잉크가 들어있었다는 것, 범인이 립스틱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여 코르크를 태워 필기구로 쓴 것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의 도전' 단계 전까지 독자들에게 정말로 공정하게 제공된다는건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통해
  1. 범인은 남자다.
  2. 범인은 흡연자고, 아마도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3. 범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낼 내용이 새겨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다.
  4. 범인은 김볼과 루시에게 적대적인 동기가 있다.
  5. 범인은 필기구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소유한 필기구를 사용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어 사용하기를 꺼렸다.
  6. 범인은 아마도 김볼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7. 범인은 앤드레아에게는 우호적이다.
  8. 범인은 오른손잡이다.
  9. 범인은 김볼이 보험 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리를 끌어내고, 관계자들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런 후더닛 추리 외에도 '중간의 집'으로 명명된 집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만으로 그 용도를 꿰뚫어 보는 추리도 볼만한 등, 확실히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점은 많았어요.

그러나 완성도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던, 앞서 안드레아가 목격했던 성냥부터가 그러합니다. 이를 토해 엘러리 퀸은 범인은 담배를 피운게 분명한데, 재와 꽁초와 같은 흔적이 없으니 파이프를 피웠다고 추리하지요. 하지만 애초에 엘러리 퀸 스스로가 범인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파이프로 흡연이 가능했다는걸 초반에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냥 모두가 코르크를 태우는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억지이자 반칙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의 아내 루시가 빌에게 선물하려고 산 문구 세트 칼을 만졌다는 완전한 우연이 재판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 것, 핀치의 간단한 변장이 주유소 사장이 루시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전개 면에서는 수수께끼가 모두 엔드레아의 위증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점이 큽니다. 앤드레아가 중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했던걸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 거에요. 앤드레아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었고요.
엘러리 퀸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은 여전히 짜증스러웠으며, 빌이 엔드레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무고한 동생이 20년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덕 중혼자의 의붓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설명도 대체로 부족합니다. 빌이 처음에 '중간의 집'에서 발견했던 앤드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겼던 이유는?(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 김볼이 빌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마음먹은날 앤드레아까지 중간의 집에 부른 이유는? 대체 핀치는 그 날 그 시간에 김볼이 중간의 집에 혼자 있을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명 시리즈'보다는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냥저냥합니다.

2014/04/21

파계 재판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파계 재판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신극배우였던 무라타는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남편을 살해한 내연녀 야스코를 위해 시체 유기를 도왔다는 혐의는 인정했지만,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검사는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했으나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으로 서서히 흐름이 바뀌고, 결국 무라타의 비밀까지 밝혀지는데...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인 무라타 가즈히코의 결백을 밝히고 진범을 밝혀내는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의 활약이 그려지는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추리작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이지요.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기로는, 이전 가미즈 교스케 단편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도서출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두 번째로 출간되었는데,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에 이어 국내 정식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네요.

장점이라면,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순간에 드러나는 진범과 그 진상이 매우 인상적인 덕분입니다. 작가가 사법고시 준비 수준으로 조사했다는 법정 묘사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고요. 증인이 한 명씩 등장해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도 매우 긴박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서는 사회파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부락민 출신이라 평생 차별에 시달렸다는 설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인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차별을 그린 동명 작품에서 따왔으며,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입니다. 검사가 제시하는 무라타의 과거 범죄들이 실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극단에서의 횡령은 출신을 이용한 협박 때문이었고, 동거녀와의 결별 역시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식으거든요. 특히 그 동거녀가 법정에서 결혼하겠다고 증언하는 장면과, 무라타가 이를 일축하며 "내 돈 때문이지!"라고 외치는 순간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합니다. 전부 법정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화자인 요네다가 법정출입기자로서 재판 과정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별도 취재나 외부 조사가 동반되는데,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엽기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서 보이던 과장된 묘사 없이 매우 절제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추리적인 요소의 한계입니다. 요네다의 시점만으로 모든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탓이에요. 법정 미스터리 특성상 상대가 어떤 증언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이는 이야기 구조를 제한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정보의 일부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대한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증인이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사건이 더 애매해졌을거에요. 또한 사라진 천만 엔의 행방에 대해 검사나 경찰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이며, 자금의 출처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진범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쓰가와 히로모토와 야스코의 관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쓰가와가 야스코의 시신을 어떻게 유기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유기에는 무라타의 자가용이 개입되었기에 개연성이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작품은 무라타의 재판에서만 끝을 맺습니다. 화자인 요네다를 내세운 만큼 쓰가와 재판 결과까지 다루는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배우 이토 교지나 여배우 호시 아키코 같은 인물들도 단순한 미스디렉션으로 사용하기엔 등장 비중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요. 무라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비까지 들여 조사에 나선 햐쿠타니 변호사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상황상 무라타가 범인처럼 보이니까요. 이후 시리즈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카기 아키미쓰의 법정 미스터리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극적 긴장감과 사회파적 메시지를 고루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사법고시 수준의 공부를 했다는 열정이 느껴졌고,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책의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책 하단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보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띠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런 디테일은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10/03/05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4점

유다의 창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부유한 청년 제임스 앤스웰은 예비 장인 에이버리 흄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흄이 권한 술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정신이 든 그의 앞에 화살에 찔린 시체가 된 에이버리 흄이 놓여 있었고, 방은 방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진 완벽한 밀실 상태였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그를 구하기 위해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를 맡아 법정에서의 사투가 시작되는데...

드디어 나왔다! 오랜 시간 기다린 존 딕슨 카의 대표작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네요. 소식을 듣자마자 구입했습니다. 작품도 하루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그야말로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멋진 작품이었고요.

일단 밀실 트릭의 대가다운 솜씨가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두터운 문에 빗장이 질러지고 창문마저도 빗장쳐진, 틈 하나 없는 완벽한 밀실(검찰측 말대로 "봉인된 방"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죠)에서의 살인이라는 설정도 흥미롭고, 트릭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남을 명트릭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여러가지 단서들도 굉장히 합리적이고요.

또 의외로 법정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게 대박입니다. 사건이 재판 과정을 통해서 증인들의 증언과 단서로 재구성되어 전개됨에 따라, 고전 추리물의 최대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완벽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독자가 머리속으로, 또는 손으로 그려야 하는 사건 시간표 같은 것도 전부 표로 제공해 주니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겠지요. 아울러 작가의 시리즈 탐정 캐릭터이기도 한 헨리 메리베일경의 왕실 고문 변호사로서의 활약을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이 영미권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동기가 취약하다는 것, 그리고 헨리 메리베일경이 극중에서 언급하듯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뻔하다"는건 고전 본격 추리물로는 확실한 약점입니다. 헨리 경이 독자가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다는 설정도 약간 아쉬웠고요.
그래도 전개과정에서 나름 합리성을 보장하고 있기에 크게 흠 잡기는 어렵습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고전 황금기 시대 본격 추리물 및 법정 미스터리 걸작입니다. 동서 추리문고 스타일의 낡은 일어 중역본이 아닌 깔끔한 번역으로 소개된 것도 반갑고요. 추리 애호가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제가 읽은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및 개인적인 순위를 예전 "세개의 관" 리뷰에 언급했는데 업데이트해 봅니다. 확인해 보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하나만 아직 안 읽었는데, 일단 읽은 것 까지만 정리할께요.^^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 순서는 무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 연속 살인사건 / 모자 수집광 사건 / 해골성 / 벨벳의 악마 / 화형법정 / 흑사장 살인사건 / 세개의 관 / 구부러진 경첩 / 감미로운 초대 (밤에 걷다) /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이 중 딱 세 작품만 꼽으라면 저의 영원한 베스트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정통 추리와 고딕 호러의 완벽한 결합체인 "해골성", 그리고 바로 이 작품인 "유다의 창" 을 꼽겠습니다.

2007/01/07

말더듬이 주교 - E.S 가드너 / 정계춘 (자유추리문고 17) : 별점 1.5점

말더듬이 주교 - 4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 사무실로 멜로리 주교가 찾아와 더듬는 말투로 한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변호를 의뢰하며 억만장자 렌월드 C 블래운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상세한 내용은 추후 관련인물들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전한 후 사라진다. 페리 메이슨은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를 통해 주교에 대한 모든 정보와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나 곧바로 주교가 폭행당한 뒤 사라지고 주교에게 고용되었던 간호사 아가씨마저 종적을 감춘다.
페리 메이슨은 주교가 말한 과실치사 사건의 당사자이자 블래운리 가문에서 내쳐진 며느리인 줄리아 블래너와의 만남을 가진뒤 정확한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게 되나 곧바로 렌월드 C 블래운리가 살해당하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줄리아 블래너가 체포되고 페리 메이슨은 증거를 얻기 위한 활동 덕에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미국 추리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쪽이야 걸작도 많고 이래저래 접한 작품이 많지만 그외의 작품들은 뭔가 흥행을 굉장히 의식한 듯한, 시드니 셀던 류의 작품이 너무 많다고 여겨졌거든요. 때문에 진정한 흥행 대마왕인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 선뜻 손이 가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자유추리문고 구입에 포함되어 있어 모처럼 주말에 진득하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동서문화사 판이지만 뭐 어차피 같은 작품이니까...)

"관리인의 고양이"라는 작품을 포스팅 하는 등 이전에도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몇편 읽어보았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조금 다른 분위기였어요. 정통 추리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외려 하드보일드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페리 메이슨과 하드보일드는 잘 어울릴 듯한 소재는 아니지만 이 작품은 페리 메이슨이 혼자 쳐들어가서 악당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나 악당과의 담판 등 세세한 분위기 및 범행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뚜렷하게 하드보일드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전개 역시도 여러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사건의 본질을 추적해 나간다는 하드보일드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더라고요.
그래서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밖에 없어요. 무엇보다도 사건은 단 한건의 살인 사건만 벌어질 뿐이며 그 동기가 너무 뚜렷하고 악당 캐릭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져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물론 어차피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서 사실 기대하는 것은 정통파적인 요소보다는 법정쇼겠죠.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정쇼" 대신 일종의 속임수로 범인의 자백을 이끌어 내는 결말이기에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법정쇼는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의 해결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자리였기에 긴장감이 떨어지거든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증언과 증거 수집,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법정쇼라는 최대의 매력이 없는 앙꼬없는 찐빵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탐정 폴 드레이크라는 고정 캐릭터 3인의 협력 관계 등 시리즈의 팬이라면 즐길 만한 요소가 많고 위에서 이야기한 하드보일드적인 부분때문에 색다른 느낌도 전해주며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최대 장점인 "쭉쭉 읽히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단지 추리소설로만 놓고 본다면 높은 수준의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도 좀 애매한 편이고요. 제목에서 유래되는 주교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초반부가 외려 저는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런데, "주교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통설이 구미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쓰이는 말인가보죠? 제목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작품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쓰이고 있어서 궁금해지긴 하네요.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3/09/09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아놀드 베넷 외 : 별점 1.5점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 4점 아놀드 베넷 외 지음,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도서출판 한스미디어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추리소설 앤솔러지. 유명 고전 작가들의 단편은 물론이고 초창기 추리 이론까지 풍성하게 실려있습니다.
1, 2권으로 출간되었는데 1권은 읽은 작품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고전 취향이라 2권부터 구입하게 되었네요. 2권 역시 다른 책에서 읽어본 작품이 제법 많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워낙에 목차가 괜찮고 또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 황금기 작품들을 주력으로 하고 있기에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입니다. 일본어 중역 느낌이 물씬 날 뿐더러 그 자체가 별로 매끄럽지 않아 읽기 힘들었어요. 악명 높은 동서 추리문고 최악의 번역도 이거보다는 좋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고전 황금기 걸작이 아닌 몇몇 현대 일본작가 작품이 섞여 있는 것도 기획 의도가 모호해 보여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기획의도만으로 3점은 충분하지만 번역은 용서가 안되네요. 좋은 기획의도가 번역 때문에 다 망가진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한스미디어의 다른 작품들은 괜찮았었던 것 같은데 대관절 영문을 모르겠군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지만 대부분 다른 책에서 훨씬 좋은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라진 기억" | 배리 퍼론

극작가 애닉스터가 완벽한 밀실살인 트릭을 생각했는데, 교통사고로 트릭을 잊어버린 탓에 술집에서 트릭을 알려주었던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

교통사고로 딱 필요한 기억만 상실한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꽤 그럴듯한 전개, 그리고 마지막에 애닉스터가 상황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애닉스터만이 유일한 위험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서늘한 반전류의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

"살인!" | 이넉 아놀드 베넷

명백한 살인사건인데, 경찰이 수사 결과 몇몇 남겨진 단서를 통해 자살로 결론 내린다는 내용의 소품. 솔직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리 묘사에 대한 번역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피트 모란, 다이아몬드 헌터" | 퍼시벌 와일드

"탐정 피트 모란"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그때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별로인 탓에 작품마저도 후지게 느껴지는 기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실망하신 분들께서는 "탐정 피트 모란"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 때문에 별점을 주기조차 어렵네요.

"골초는 빨리 죽는다" | 이자와 모토히코

"역설의 일본사" 말고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상을 많이 수상했던 유명 작가의 단편.

두 명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형식과 담배로 촉발된 살의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결말이 너무 심하게 별로였습니다.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어이없는 결말이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먹이" | 토마스 테셔

이형 생물체가 등장하는 크리쳐 호러물. 스티븐 킹의 비슷했던 작품(한 소년의 아버지가 점액질 괴물이 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애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극적 결말이라는게 차이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평하기는 어렵지만 공포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결말에서 반전이 돋보이는 것도 아닌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콜 Y의 비극" | 노리즈키 린타로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했던 작품이죠. 읽어보니 원작을 "직역"한 번역으로 읽기가 어렵더군요.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3점인 좋은 작품인데 안타깝네요. 솔직히 제 번역과도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녀들의 쇼핑" | 쓰쓰이 야스타카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해본 적 있는 이색작.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부들이 강도단을 조직한다는 내용입니다. 작품 자체의 수준은 그냥저냥이지만, 작가 특유의 섬뜩한 풍자 하나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대사가 백미! 순수하게 작품만 놓고 평가하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살의" | 다카기 아키미쓰

역시나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굉장한 걸작입니다. 이른바 "일사부재리" 원칙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데, 마지막 반전까지 빼어난 단편의 모범 답안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살의"라는 말이 들어간 작품들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 "이런거"라던가....)은 하나같이 괜찮네요.

"아버지" | 토마스 H. 쿡

토마스 H. 쿡의 장편은 몇 권 읽어보았지만 단편은 처음입니다.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장편 못지않은 묵직함이 잘 전해지는 묘사가 아주 좋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무대 뒤의 살인" | 에드워드 D. 호크

총 3편의 초단편 Short-Short로 이루어진 작품.

예전에 읽었던 "4페이지 미스터리"와 유사하나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3편의 이야기 모두 논리정연하면서도 예상을 뒤집는 정통 추리물이거든요.

첫번째 작품은 사진 필름 원판을 가지고 협박하는 협박자가 살해된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저런 논리 퍼즐에서 많이 보았던, 다섯 번째 남자마다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는 이집트 전시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작품은 에스터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돋보였어요. 특히나 1만 2500달러라는 애매한 비용과 30분이라는 시간 공백을 설명하는 게 제법이었거든요.
마지막 작품은 살인사건은 전혀 상관없는 동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반전이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명성에 걸맞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오번 가문의 비극" | 매슈 핍스 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단편 미스터리 시리즈인 "프린스 자레스키" 시리즈!

그러나 별로 건질 게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프린스 자레스키 설정은 너무나 만화 같았고 사건도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거든요. 아버지가 광인이 된 것을 왜 숨겨야 하는지도 불분명하고 사건 현장 윗층에서 과학교실을 열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을 하는 것도 와닿지 않았어요. 그냥 본인이 자살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이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수준 이하의 작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번역까지 별로라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불도그 앤드류" | 아서 체니 트레인

터니게이트 - 애플보이 사이의 영토 분쟁에서 불도그 앤드류가 지나가던 터니게이트를 문 뒤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는 법정극.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좀 무리지만 유머스러운 일상계 법정극으로는 충분히 읽을 만 했습니다. 재판장의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약간의 반전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번역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마크 트웨인이 연상되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내의 외출" | 자크 푸트렐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이 책에 수록된 제목은 "녹색눈의 괴물"이죠). 당대 보기 드문 일상계로 가치 높은 수작입니다.

그러나 별점을 주기 민망할 정도로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서 도저히 읽을 맛이 나지 않네요.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로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A 분장실의 수수께끼" | 자크 푸트렐

역시나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에 수록된 것과 같은 사고기계 시리즈 단편. 여배우의 증발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장치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선보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핵심이 "최면술"이라는 게 문젭니다. 당시 최면술이 마법처럼 받아들여진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물로 생각되는데 지금 읽기에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번역 역시 수준 이하였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윔지 경 단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검은별"과 동일한 스타일의 모험극.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오필리어 살해" | 오구리 무시타로

"흑사관 살인사건"의 오구리 무시타로가 쓴, 범죄학자이자 탐정 노리미즈 린타로가 등장하는 단편. 셰익스피어 스타일 연극 무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무대 장치를 이용한 기계장치 트릭에 더해 심리적 착각을 이용한 트릭이 등장하죠.

현실적이지 못한 트릭,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학적인 전개와 묘사, 거기에 동기까지 애매하여 전체적인 완성도가 낮습니다. 정통추리물로 보기도 어려웠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졌어" | 크레이그 라이스

"스위트홈 살인사건"의 크레이그 라이스가 쓴 단편. 주인공인 술꾼 찌질이 변호사 말론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네요.

의뢰인인 사형수 폴 파머 자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폴 파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끊어지지 않았어"를 단서로 마지막에 추리쇼까지 펼쳐 보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추리물입니다.

정통파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반부 딕슨 의사와의 대화로 병원에서 탈옥한 죄수가 있다는 단서를 전해주는 등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았고요.

메들레인 스타가 그냥 폴 파머와 결혼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텐데 성공 확률이 낮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옥의 티이긴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4/09/15

백화점의 교수형 집행인 오사카 케이키치 7가지 미스터리 - 오사카 케이키치 / 곽은숙 : 별점 2.5점

백화점의 교수형 집행인 - 오사카 케이키치 7가지 미스터리 - 6점
<오사카 케이키치> 저, <곽은숙> 역/그래출판

"감방"에서 이 작가의 "세 광인"이 마음에 들었다고 리뷰를 올렸었죠.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보았는데, e-book으로 출간되어 있더군요. 퍼블릭 도메인 작품인 덕분이겠지요? 가격도 2,000원으로 착해서 주저 없이 구입했습니다.

참고로 "감방"에서는 오오사카 케이키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오사카 케이키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찾아보니 "오오사카" 쪽이 맞는 번역이네요. 그런데 위키를 보니 작가의 인생도 정말 드라마같습니다. 태평양전쟁에 징집되어 출정 전 은사인 고가 사부로에게 장편소설 원고를 맡겼는데, 오오사카는 루손 섬에서 병사했고 고가 사부로 역시 급사해 버린 탓에 원고가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하여튼, 이 책은 제목 그대로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일상계 소품 한 편을 제외하고는 고전 황금기 스타일의 정통 본격물들입니다. 

수록작 전체의 별점 평균을 낸다면 2.5점 정도인데, 별점 3.5점 이상의 작품이 두 편이나 있으며 고전 황금기 스타일을 충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독서였습니다. 이런 작품이 전전(1945년 이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탄탄한 기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고요. 고전 황금기 본격물 애호가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런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보다 많이 소개되길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 리뷰에서는 항상 그렇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꼭두각시 재판"

20여 년 동안 법정 정리로 일해온 화자가 겪었던, 무려 세 건의 재판에서 핵심 증인으로 활약한 요정 여주인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법정물로 볼 수 있는데 요정 여주인이 사건 피해자나 용의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면서도 유·무죄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만드는 증언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력 넘치게 그리고 있습니다. 복선 및 단서 제공 역시 적절했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도박을 그린 작품은 본 적이 없는데 너무 가볍게 소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아이디어가 돋보였어요.

조금 낡은 구성과 언젠가는 꼬리가 밟힐게 분명했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야말로 숨어있는 보물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향수 신사"

여고생 구루미가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신사가 은행강도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을 알고 벌이는 작지만 용감한 행동을 그린 작품.

거의 대부분이 구루미의 심리 묘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1. 여행 중 앞좌석에 앉은 신사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2. 손가락이 하나 없다는 큰 특징을 알게 된 후 왜 그 사실을 숨길까?를 궁금해한다.
3.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은행강도 사건의 용의자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

라는 순서로 전개됩니다.

여고생이다 보니 딱히 용감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된 사촌에게 줄 결혼 선물을 이용하여 명확한 증거를 남긴다는 재치가 돋보이네요. 딱히 대단한 트릭이나 추리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귀여운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백화점의 교수형 집행인"

탐정역으로 아오야마 교스케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표제작.

노구치라는 백화점 점원이 교살된 채 추락사한 사건을 가지고 사체의 상태와 범행 현장에서 아래의 단서들

1. 범인은 힘이 셀 것이다.
2. 범행은 옥상에서 일어났다.
3. 흉기는 길고 거친 표면을 가진, 밧줄과 같은 것이다.
4. 동기가 없다.

을 끌어내어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주어진 증거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고전 황금기 시대 본격물 스타일에 충실한 작품이죠. 나름 과학적인 트릭이 사용된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트릭이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애드벌룬 안에 목걸이를 숨길 당위성도 좀 부족하고요. 이렇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자유로웠다면 범인이 통제 가능한 다른 수를 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땅에다 파묻던가... 여튼 이래서야 트릭을 떠올리고 억지로 작품을 끼워 맞춘 결과물로 보일 뿐입니다.

전개에 있어서도 피해자 노구치가 목걸이를 훔치지 않았으리라 주장한 귀금속 코너 주임의 증언은 너무 심각한 오류를 독자에게 불러일으키기에 공정해 보이지 않았고요. 아울러 번역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피해자의 사체에서 끌어낸 정보로 추리가 시작되는데 어려운 법의학 용어가 많이 등장할 뿐더러 주요 단서가 되는 특징도 지나치게 직역이라 이해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조사해보니 작가의 데뷔작이던데, 뭔가 보여주고 싶은 의욕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장례식 기관차"

운행 중 유별나게 역살(사람을 치는 것) 사고가 많은 기관차가 어느 날부터 매주 돼지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키는 이유는?

사고가 많은 기관차라는 독특한 소재와 기발한 동기가 결합된 본격물. 돼지 역살 사고가 결국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는 전개까지도 어떻게 보면 고전적인 작품이죠.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추리, 진상 모두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단점이 조금 거슬렸습니다. 예를 들어 복잡한 도구를 이용하여 돼지를 선로에 잡아놓는 범인의 행동에서 범인이 이 도구를 판매한다는 추리를 끌어낸다든가, 범인의 동기가 역살 사고 때 "화환을 사러 오는" 오사센 기관사를 자주 보기 위해서라는 것 등입니다. 첫 번째 추리는 당연히 말도 안 되죠. 누구나 상상 가능한 쉬운 방법이 있는데 손에 넣기 쉽다고 구태여 복잡한 방법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두 번째의 동기도 범인이 스스로 움직여 자살이 가능했다면, 그게 불가능했더라도 아버지가 업고서라도 근처로 나가보는 식으로 오사센의 얼굴을 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테고요.

형식과 전개는 마음에 들지만 이러한 비약 때문에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위키피디아에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해가 잘 되지는 않습니다...

"꽃다발 속의 벌레"

역시나 전형적인 고전 황금기 스타일 본격물. 한 재산가가 절벽에서 추락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홈즈 스타일의 탐정역인 오츠키 변호사의 활약이 볼거리인데 현장의 발자국을 조사하여 "범인은 여성"이라고 추리하고, 떨어져 있던 사과껍질은 범행 당시 떨어진 것이며 방향이 왼쪽이라 왼손잡이가 깎은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며, 경찰이 놓친 얇은 조각이라는 주요 증거를 발견하는 식입니다.

또 진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는, 체구도 작은 연약한 여성이 어떻게 격투 끝에 피해자를 절벽 밑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 있었는가?라는 것에 대한 해답이 위의 단서들로 밝혀지는 결말도 아주 좋았습니다. 깎는 위치에 따른 사과껍질의 방향성 같은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아쉬운 점이라면 농부라는 목격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인데 농부의 규칙적인 생활에 대한 언급 정도를 해 주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아울러 동기 역시도 썩 와닿지는 않았어요. 이래서야 범인이 너무 명백하니까요. 사실 경찰이 원고 조각을 회수한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지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앞선 두 편의 본격물보다는 훨씬 정교하고 합리적인, 추리의 과정과 트릭만큼은 수준 이상의 본격물로 고전 황금기 걸작과 겨룰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칸칸충 살인사건"

아오야마 교스케가 재등장하는 단편.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의 비중이 낮은 단순한 살인극이지만 피해자 키사부로의 시체 상태로 범행 장소는 물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리해내는 교스케의 모습은 명탐정이라 불러도 손색없어 보입니다. 조선소의 구조를 실제 추리에 응용한 디테일도 나쁘지 않았고요.

허나 내용이 워낙 단순해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별로 없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리고 G.Y라는 이니셜이 어떻게 "야마다 히로노스케"의 이니셜이죠? 번역 오류인가... 여튼 세세한 부분이 좀 아쉽네요.

"등대귀"

시오마키 등대의 불이 갑자기 꺼지고 당직인 도모다 간수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 성인 두 명이 들어도 움직이기 어려운 큰 바위를 등대 꼭대기로 옮긴 계획의 진상은?

임해시험소의 아즈마야 소장이 탐정역으로 등장하여 등대의 기계장치를 이용한 트릭을 밝혀내는데, 등대라는 장소의 특수성에 복잡한 장치 트릭이 더해진 것이라서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등대의 구조를 독자가 머릿속에 그리면서 추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탓입니다. 동기도 정신병적인 것이라 너무 쉽게 간 느낌이고요.

완고한 옛날 사무라이 같은 카자마 간수의 거짓말을 잡아내는 소소한 활약은 좋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4/14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도진기 : 별점 2.5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6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는 미모의 중년 여인 김명진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명진은 20년 전 죽은 남편 신창순, 그리고 남궁현, 임의재, 한연우 네 명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나, 장난스러운 내기 끝에 신창순과 결혼했었다. 과거의 남자 세 명과 김명진의 동생 김해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움에 나섰다...

현직 판사이자 소설가로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 해도 무방할 도진기의 장편으로 시리즈 캐릭터인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합니다. 

제가 읽었던 이전의 '어둠의 변호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법정에 선 고진'의 활약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법정 미스터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속에서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재판을 통해 피고인을 유죄로 만드는데 정평이 난 실력자 조현철 검사와 불꽃튀는 대결을 벌이거든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서로 배심원을 설득하고, 재판을 유리하게 이끄는 배틀이 아주 볼 만 합니다. 조현철 검사가 은근슬쩍 끼워넣었던 거짓말 탐지기 조사 결과를 뒤집는 변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말싸움도 현란하기 그지 없고요. 작가가 현직 판사이기에 쓸 수 있었던 묘사들,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재판 속행과 보석 신청 등 모든 상세한 설정들이 그러합니다. 이 정도면 해외 유수의 법정 미스터리물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만 하지 않나 싶을 정도에요.

법정에서의 대결이 중심이라서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수많은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딱 한 가지 등장하는 트릭의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신창순 살해에 사용된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체가 발견된 이유와 범인 임의재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역업자라는걸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하우더닛" 물로서의 진가도 발휘됩니다. 결국 유럽에 있는 사람만 가능한 트릭이기에 범인이 임의재다!는 건데 꽤 설득력 있었어요.

지고지순한 일종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6명의 청춘들이 처음 만난게 격동의 1990년대라 더 와 닿았고요. 저 역시 1990년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지요. 이 사랑의 중심에 놓여있는, 작가의 이상형을 투영해 놓은 듯한 김명진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팜므파탈과 정 반대인, 순진무구한 천사같은 캐릭터를 잘 그려 놓았거든요. 작중 한연우의 표현을 빌자면, 오디오 기기에 취미를 갖는 사람들에게 마크 레빈슨 같은 존재랄까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작위적 장치들이 많이 거슬립니다. 너무 '소설'을 의식한 티가 물씬 났어요. 신창순이 아내를 학대하던 인간 쓰레기였다는 중요 정보를 나중에 밝히는게 대표적입니다. 살인의 가장 큰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변론을 맡은 변호사에게 그러한 정보를 숨긴건 말도 안돼지요. 임의재가 차용증을 가지고 김명진을 겁박하는 장면 역시 나중에 고진과 이우현의 인기척을 느끼고 쇼를 했다고 밝혀지지만 억지스러웠고요. 독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 묘사였습니다. 그 외 많은 부분에서 작가가 한연우를 범인이라고 유도하는 것도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트릭도 순간 이동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디테일은 그닥입니다. 1주일에 걸친 운송기간 동안 사후 경직으로 뻣뻣해진 시체를 어떻게 무마했을지가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상당한 재산가로 묘사되는 임의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현지 조사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강도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언급되는데, 누군가를 고용하는게 훨씬 쉽고 간편했을겁니다. 중국인들이 당한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처리되었을 확률도 높고요.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기가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20년이 흘렀습니다. 과거가 다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백야행" 시대에나 먹혔음직한, 자신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여자를 위한 순애보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에요. 그나마 "백야행"은 현재진행형이기나 했지, 20년 후에도 그렇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달리기 시합에 이어서 김명진이 술을 먹은 후 강제로 관계를 가진 탓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는 설정도 영 와닿지 않더군요. 1990년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덧붙이자면 심장 판막증이 있는 임의재가 장거리에 도전할 만큼 김명진을 사랑했다는 것도 작위적이라 별로였어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랑했다면 중간에 포기하면 안되는거잖아요? 차라리 뛰다가 쓰러져 기절이라도 하던가..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대 착오적인 순애보는 거슬리며, 작위적인 요소가 많아 감점하지만 미녀와 청춘,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고 법정 미스터리물로는 평균 이상은 되는 작품입니다.
블라디보스톡과 한국을 오가는 스케일도 크고 법정물로는 충분히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미녀의 존재도 확실하니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네요.

2011/03/06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 원은주 : 별점 3.5점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 8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지음, 원은주 옮김/시공사

귀금속 거래업자인 존 혼비는 자신이 금고에 넣어둔 다이아몬드 원석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증거는 금고 바닥 메모지에 선명한 피 묻은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수사 결과, 그 지문의 임자가 혼비 씨의 조카 루벤의 것으로 밝혀져 그는 곧바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손다이크 박사는 사건 의뢰를 받은 뒤 루벤의 무죄를 확신하고 친구 저비스, 충직한 하인이자 기술자 풀턴과 함께 독자적인 과학 수사 기법을 활용하여 그를 돕는데...

1907년에 출간된 법의학의 선구자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 첫 작품. 국내에는 동서에서 중단편집 "노래하는 백골"이 출간되어 있고, 국일미디어의 "암호 미스터리 걸작선"에 단편 한 편이 수록되어 있는 정도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캐릭터인데 이렇게 소개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지문'에 대해 깊게 탐구하고 있으며, 범인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단지 루벤 혼비의 누명을 벗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즉, '트릭' 자체에만 깊이 파고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인 오스틴 프리먼의 지론이 "독자는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수사 과정에 더 흥미를 느낀다"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려 100년도 전에 나온 작품이니 만큼 대단한 추리가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핵심 트릭 자체가 많이 낡은 발상이니까요. 또, 낡은 방식의 뻔한 전개 덕분에 독자는 범인이 누군지 쉽게 짐작하게 된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아울러 화자인 저비스 박사의 애정 행각이 작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도 전통적인 추리 애호가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무척 재미있었지만요..)

하지만 범인이 쉽게 드러나고 트릭이 별 볼 일 없다고 해서 이 작품이 추리 소설적인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인들도 잘 모르는 '지문'에 대한 속성을 이미 이 시기에 작품으로 쓸 만큼 (그것도 재미있게!) 깊게 파고들었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만하거든요. 특히 법의학과 과학수사에 기초하여 트릭을 파헤친 손다이크 박사가 마지막에 벌이는 법정에서의 반전쇼는 여타의 법정 추리물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했습니다.

게다가 중간에 벌어지는 손다이크 박사 암살 음모에 대한 디테일 역시 대단합니다. 기묘한 총알에 대한 설명, 불시에 날아온 소포의 포장만 보고도 범죄를 예감하는 추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펼쳐지는데, 그 아이디어가 100년 전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반에 잠깐 등장하는 역장에 대한 추리 역시 당대 셜록 홈즈의 라이벌다운 풍모가 느껴졌고요.

앞서 말한 일부 단점들, 지금 읽기에는 낡은 전개는 감점 요소지만 그래도 이 작품의 장점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며 출간 자체만으로도 기쁜 일이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고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절대 놓치지 마시길.

덧붙여 아주 예쁜 디자인과 판형이라는 점과 함께 충실한 번역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동서판은 특유의 일본어 중역 덕분인지 손다이크 박사의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는데, 이 작품에서는 과묵하지만 냉철한 지적인 미남자(!) (여기서 제일 놀랐습니다. 왜인지 할아버지 이미지였거든요)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니까요. 과거 불만이었던 "노래하는 백골"도 제대로 된 완역본으로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