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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6

안개의 깃발 (霧の旗) (2010)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나기다 키리코는 채권자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오빠를 구하기 위해 고향 출신의 유명 변호사 오오츠카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오츠카는 변호 의뢰를 냉혹하게 거절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키리코의 오빠는 항소 도중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모든걸 잃은 키리코는 도쿄로 올라와 호스테스로 일하던 중, 우연찮게 스기우라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 그곳은 오오츠카 변호사와 불륜 관계였던 미치코의 아파트였다. 미치코는 원래 스기우라와 사귀고 있었지만 오오츠카 변호사와의 관계로 스기우라와 헤어지려고 했었고, 그 탓에 큰 다툼이 있어 왔다. 미치코는 자신의 결백을 키리코가 증언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키리코는 오오츠카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키리코에게 유리한 증언, 그리고 진범을 나타내는 증거를 인멸했다는걸 숨기는데...

제가 읽어보지 못했던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수차례 영상화되었는데, 제가 본 건 2010년 버젼이에요. "미스테리아 36호"에 수록되어 있던, 국내에서 영상화된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에 대한 소개를 읽다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유튜브에 누군가 불법이겠지만, 자막까지 붙여서 올려놓은 버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키리코 오빠가 뒤집어 쓴 범죄, 그리고 스기우라 살인 사건 모두 범인이 너무 명확해서 추리물로 보기는 너무나도 허술한 탓입니다. 특히 스기우라 살인 사건은, 미치코가 현장을 발견한 뒤 그냥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범인 야마가미 체포에는 아무 문제 없었을 거에요. 라이터라는 증거가 있었으니까요. 물론 마침 근처에 있던 키리코를 불러 도움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미치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건 분명했으니까요. 그러나 키리코가 현장에 있던 야마가미의 라이터를 몰래 빼돌리는걸 대충 넘긴건 여러모로 문제입니다.

또 키리코가 오오츠카 변호사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동기 역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진범, 아니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경찰이나 검찰에게 원한을 품었다면 모를까, 사건 수임 자체를 거철했던 변호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앙심을 품는단 말입니까? 원래 고향에서 친하게 지냈었다던가 하는 인연도 없는데 말이지요. 오오츠카 변호사 역시 키리코가 앙심을 품었다는걸 증명했더라면 향후 미치코 변호에 유리하게 써 먹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건 이해하기 힘들고요. 키리코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 미치코 변호를 위해 하는게 아무 것도 없어서 유능한 변호사라는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오오츠카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끝에 겨우 성공했다는 성장과정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부분이었고요. 고작 몇 분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최악이었으며, 오오츠카 변호사가 어쨌건 풀려나는데 성공한걸로 보이는 미치코와 행복하게(?) 살아갈걸 암시하는 장면은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그래도 키리코의 '복수극' 한정으로는 나름 괜찮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오츠카 변호사를 파멸시키기 위한 키리코의 집념이 정말 눈부시거든요. 특히 은근슬쩍 술을 먹여 육체관계를 맺은 뒤 고소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게 맞기는 맞나 봅니다. 두 배우의 연기도 괜찮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치카와 에비조가 냉혹한 변호사 역할에는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를 버리고 미치코에 올인하는 과정의 빌드업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건 배우보다는 각본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워낙 커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거라던가, 이거 등 그동안 보아왔던 TV용 마쓰모토 세이초 영상물들 모두가 기대 이하였는데, 역시나 별다르지 않는 수준이었어요. 앞으로는 구태여 찾아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2022/11/13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기타쿠니 고지 / 문승준 : 별점 2점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4점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변호사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도시타는 가난한 동네 변호사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의뢰 해결이 주 업무라 법정 다툼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정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보다는 일본 추리 소설 시장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소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일상계 추리 단편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문가 - 서점 점원헌책방 주인, 요리사, 화과자 장인, 시계 수리 전문가, 사진가, 바리스타라쿠고가복화술사, 호텔리어, 심지어 스님까지 - 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자의 직종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그냥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설정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법률 전문가스러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도시타는 화자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일 뿐, 탐정 역할은 도시타의 동생 리쓰가 담당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리쓰 캐릭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일단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시타' 에 관련된 말을 하는 루틴이 있고, 현재 상황과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떠오르게 만드네요. 결은 좀 달리하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설정마저도 똑같고요. 그러나 우영우만큼 호감가게 묘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문가 일상계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에 목숨을 건 나머지 이상한 만화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또 추리한 결과를 형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는데, 여기에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에 더해져 굉장히 비호감이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글래머 소꼽친구 간호사 사키, 여자를 밝히는 스님 마루메, 전 야쿠자 출신이자 현 카페 주인인 이모부 등 비현실적이거나,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괜찮았다면 나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록된 네 편의 단편들 모두 그렇게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이야기 전개가 리쓰 캐릭터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았던 탓입니다. 입 안에 넣은 치과 치료용 충전물이 라디오처럼 동작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따뜻한 인간 드라마 중심의 전형적인 일상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가 일상계로 보기에는 전문성, 일상성 모두 떨어지며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꼽자면 일본에서도 변호사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도?
딱히 영상화 되었다는 소식도 없고, 후속권도 출간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금새 절판된걸로 보면 다른 분들의 평가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고양이'는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므로 집사분들께서는 낚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1화 <<못된 며느리와 낙서 소동>>
고토에 아줌마는 도시타에게 며느리 험담 끝에 며느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토에 아줌마가 돌아간 후, 리쓰는 그녀의 섬망성 기억 상실을 눈치챘다. 형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며느리 에가와 씨를 만나러 갔다가 ,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던 낙서 소동에 휘말리는데...

진상은 알고보니 고토에 할머니의 병을 낫기 위해 며느리 에가와가 마당에 자생하는 디기탈리스 잎을 떼어 말린 뒤 몰래 먹였다는 겁니다. 고토에 할머니는 디기탈리스 잎의 부작용으로 치매와 비슷한 용태를 보인거지요.
그런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디기탈리스가 심장병에 효과가 있지만 독성 또한 강하다는건 정보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 완성으로 '디기탈리스 중독'이 함께 뜰 정도로요. 이걸 약재로만 알고 먹였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자기 험담만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살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이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마무리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도시타가 제대로 된 변호사였다면 며느리를 경찰에 신고하는게 맞았어요.
추리를 하기 위한 정보 제공도 빈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차라리 낙서 소동 쪽이 추리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다른 낙서들과는 그림이 달랐고, 키가 작은 사람이 그렸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하지만 진상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생이 새가 부딛힐까봐 '버드 스트라이크'를 리카 씨네 가게 쇼윈도에 그렸다는게 전혀 와 닿지 않았거든요. 쇼윈도가 그 가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1층 건물 쇼윈도에 새가 날다가 부딛힐일이 그렇게 많을리 없으잖아요. 애초에 범인 신지의 집 창문에 새가 부딛혀 죽은 것부터가 작위적이지요. 이를 리쓰가 맨션의 깨진 창문만 보고 바로 알아챘다는 추리도 비현실적이고요.

아울러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화 <<협상 상대는 요통으로 고생하는 전과자>>
도시타 형제는 연립 재건축을 앞두고, 퇴거를 거부하는 임차인을 설득하는 의뢰를 받았다. 리쓰는 찾아간 임차인 아라키 데쓰조의 집 안에서 '사취'가 나는걸 느꼈고, 여러가지 주변 정보들을 조합하여 그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길고양이를 돌본다는걸 훔쳐온 쓰레기 봉투 속 내용물을 통해 추리하는 과정, 그리고 사취는 길고양이가 물어온 쥐의 시체였다는 진상까지의 전개와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퇴거를 불응했던 이유가 유치원에 드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작위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고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일상 드라마 느낌을 가득 전해주는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3화 <<만화가 지망생과 사라진 유언장>>
도시타는 이모네 카페 단골인 만화가 지망생 레논 씨의 사건 을 수임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형이 레논 씨가 유언장을 숨겼다고 주장해서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논 씨는 도시타에게도 유언장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형이 어머니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을 녹음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수록작 중 유일하게 변호사가 활약할만했던 이야기. 핵심은 '유언장은 어디에 숨겼나?' 라서 변호사가 나설만한 부분은 없지만, 레논 씨가 왜 유언장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레논 씨가 어머니 장례식 초야 직후, 카페를 방문한 뒤 책꽂이 위에 있는 책을 떨어 트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카페의 만화책 중 한 권 안에 유언장을 숨겼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에 대해 사소해보였던 레논 씨의 질문이 중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유산을 형이 아니라 레논 씨에게 전부 남긴다는 거라서 유언장을 숨기고 형과 유산을 반으로 나누려 했다는 동기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바보같아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동기였다면 유언장을 숨기는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식으로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유언장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전개를 보면 더더욱요. 이는 유언장이 없을 경우 법률적으로 레논 씨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4화 <<한심한 피고인과 소음 트러블>>
도시타는 마약용 주사기를 수백개 구입하려다 경찰에게 상처를 입힌 에비스 씨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으려고 도시타는 노력했지만, 에비스 씨는 거부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리쓰가 급작스럽게 증인 요청을 하여 판결은 연기되었다.
그 사이 도시타는 소꼽친구 사키의 소개로 이웃이 내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도모코 씨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도시타 형제는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도시타가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법정에서 날선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왜 에비스 씨가 징역형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추리해낸 뒤, 진상을 파악하여 그의 갱생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도모코 씨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소음 공해는 단순한 소재였고, 도모코 씨 남편이 정리 해고를 앞두고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근무하는 상황의 극복이 핵심이거든요.

드라마 모두 좋은 이야기에요.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에비스 씨 시간의 경우, 오래전 이혼한 아내가 키우던 아들이 칼에 찔린 뒤, 부모는 수혈이 안 되는 탓에 행인들로부터 피를 뽑으려고 주사기를 구입했다는 동기부터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딱히 추리를 할 부분도 없고요.
도모코 씨가 치과 진료를 받은 이후, 이빨에 채운 충전물이 우연히 방송을 수신하게 되어, 일종의 광석 라디오처럼 동작했다는 진상도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겁니다. 설령 실제 일어나더라도 입 안에서 소리가 나는걸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아쉬움이나 여운을 남기기는 커녕 더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만 굳게 만들어 주네요.

2014/08/11

사망 추정 시각 - 사쿠 다쓰키 / 이수미 : 별점 3점

사망 추정 시각 - 6점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소담출판사

지역 유지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 미카가 유괴당한 뒤, 1억원의 몸값을 요구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치밀한 범인의 계획 때문에 몸값을 잃을까 우려하여 몸값 전달을 포기했다.
그러나 곧바로 미카의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은 수사상의 문제가 없었는지에 대한 비난 위기에 직면했고, 특히 현경의 모리타 본부장은 쓰네조로부터 검은 돈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욱 심한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경찰은 사망 추정 시각에 대한 검시 조서를 조작했다. 동네 건달 쇼지를 범인으로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잘 몰랐던 작가의 신선한 법정물. 작품은 크게 세 부분 - 미카 사건의 상세한 수사과정이 펼쳐지는 초반부, 시체 근처의 지갑에서 돈을 훔친 뒤 시체를 발견하고 도망간 동네건달 고바야시 쇼지를 범인으로 날조하는 과정이 그려지는 중반부, 가와이 도모아키 변호사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쇼지의 국선 변호인으로 임명된 뒤 조사해본 기록들을 통해 쇼지가 진범이 아님을 확신하고 항소심에 임하는 후반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법조인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다운 디테일이 제일 큰 장점입니다. 이는 작품을 읽는 내내 강하게 독자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특히 쇼지에게 누명을 씌우는 수사기관의 조작 과정은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본부장 이하 모든 담당자가 어떻게든 쇼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날조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인데, 이후 가와이 변호사가 그 헛점을 여러개 눈치챌 정도로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 이 정도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면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천라지망이랄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검찰, 경찰때문에 실형을 선고받은 뒤 무죄가 된 실제 사례가 몇 건 있었기에 남의 일 같지 않기도 했고요. 바로 얼마 전에도 "친딸 살해 누명을 20년만에 벗어났다"는 뉴스가 떴었지요.

이외에도 유괴범이 몸값을 받아내려는 작전도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고, 이후 가와이 변호사가 항소를 준비하고 법정에서 승부를 벌이는 후반부는 법정물의 모범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긴박감이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첫번째는 촌동네이고 동네 건달을 상대로 했다 하더라도, 조작 수사 과정은 지나쳤습니다. 인권을 무시한 강요된 수사로 미란다 원칙에 대한 설명도 없고, 변호사도 없는 상태에서 밤을 세워가면서 폭력으로 진술을 얻어낸다는건 작품의 무대인 2001년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잖아요? 이게 20세기 초중반, 아니 한 80년대만 되도 그러려니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초반부터 와타나베 쓰네조는 범인을 이미 짐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의 이름을 초반에 대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딸은 금지옥엽처럼 귀하게 키웠을 뿐더러 자신의 적은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냉혈한으로 묘사되니까요. 딸이 죽은 다음에 모든 활력을 잃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복수는 했을 것 같은 인물이라 이상했어요. 범인이 유카를 죽인 이유도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고요.

마지막으로 가와이 변호사의 노력은 항소재판은 속심이 아니라 사후심이라는 것, 즉 1심 판결이 타당하다는 재판장의 논리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데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수사의 왜곡이야 본부장이 검은 돈을 받은 것이 원인이라는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법부가, 그것도 현장과 떨어진 도쿄에서의 재판이 이렇게까지 대충 이루어진다는게 말이 될까요?

무엇보다도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쇼지의 누명 역시 벗겨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작품이 약간 모호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이기도 한 부분인데, 제게는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범인도 멀쩡히 있고, 쇼지는 누명을 쓴 채 무기징역인데 가와이 변호사 혼자 사법제도의 모순을 깨닫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끝맺으니 맥이 빠질 수 밖에요. 뭐 논픽션, 르포르타쥬 수준의 사회 고발성 강한 작품으로 본다면 큰 단점은 아니긴 합니다. 현실적이기도 할테고요. 그러나 하나의 완성된 소설로 보기에는 미완성인 결말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신사회파라는 홍보문구에는 걸맞게 이 사회의(특히 사법제도) 모순, 부조리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 또한 별로 빠지지 않는 만큼 법정물에 관심있으신 분들께 추천 드립니다.

2022/08/14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마이클 코넬리 / 조영학 : 별점 2점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물 변호사 미키 할러는 운 좋게 거물 부동산 업자 루이스가 한 여성을 잔인하게 폭행했다는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미키 할러는 루이스가 무죄라는걸 확신하여 변호에 임했지만, 어느 순간 루이스가 유죄일 뿐 아니라 과거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루이스에 의해 조사원 라울이 살해당했고 유력한 증거마저 빼앗겼을 뿐 아니라, 라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루이스는 이런 미키 할러를 협박하여 자신의 변호에 힘을 쏟게 만드는데....


마이클 코넬리의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엄청난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입니다. 매튜 매커너히 주연의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었고요. 작가가 생각했던 멋진 트릭과 설정을 아낌없이 쏟아붓기 때문에 시리즈의 경우는 첫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경우가 많기도 하고, 이전에 읽었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 대한 기억도 좋아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완독했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일단 미키 할러 캐릭터부터가 별로에요. 정의로운 변호사와 악덕 변호사 사이의 애매한 무언가로 그려져 있거든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미키 할러는 의뢰인들이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만드는데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는걸로 묘사됩니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고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으로, 나 역시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지 않는다" 면서요. 이 과정에서 "돈이 없으면 죄를 짓지 말라"며 엄청난 돈 욕심도 부립니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의뢰를 받아들일 때 그가 무죄임을 확신하고 변론에 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던대로 법의 헛점을 찾아내어 의뢰인을 빼내면 그만이지요.
같은 이유로 루이스가 연쇄 살인범이고, 미키 할러가 과거 사법 거래를 유도해 징역을 선고받게 만든 지저스 사건의 진범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저스는 돈이 없었고, 루이스는 돈이 많으니까요. 피고만 풀려나게 해 주고 돈만 벌면 되지요.
게다가 앞서 여러 명의 마약 사범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하는데에는 일말의 주저도,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으면서 루이스에 대해서만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도 앞 뒤가 맞지 않았어요. 이를 미키의 부친 말을 인용하면서 '무고한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식으로 포장하고는 있는데 이 정도로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물론 루이스가 라울을 살해했기 때문에 복수심을 갖는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는 미키 할러가 불필요한 정의감을 불태워 루이스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즉, 주객이 전도된 상황인 것이지요.
그 외 다른 캐릭터들도 별로인건 마찬가지입니다. 변태 연쇄 살인마 루이스에 대한 설정이라던가 미키 할러와 전처이자 검사 매기와의 관계 등도 진부했습니다. 특히나 루이스의 경우는, 다른 작품들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왔던 두뇌파 연쇄 살인마들과 흡사했을 뿐더러, 다소 뜬금없이 살인마라는게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설득력있게 그려냈어야 했습니다.

이야기도 작위적인 전개가 많아서 잘 짜여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차리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옛 의뢰인 지저스 사건의 피해자 마사 렌테리아와 루이스 사건의 피해자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는걸 알아채고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확신합니다. 허나 두 피해자가 그렇게 닮았다는 것 부터가 비상식적이고 작위적이에요. 루이스가 미키 할러의 총을 훔쳐 라울을 살해할 때 사용했다는건 작위적인 설정의 끝판왕 격입니다. 총은 루이스가 미키를 옭아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만약 미키 할러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루이스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미키 할러를 협박할 생각이었을까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치밀하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법정에서 밀고자의 입을 빌어 루이스가 과거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정도인데, 그 밀고자의 증언이 허술하다는건 이미 법정에서 미키 할러 자신이 증명해 버립니다. 경찰이 이 증언으로 보강 수사를 벌일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유력한 용의자였던 지저스가 사법 거래를 통해 이미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걸 자백해버렸는데, 경찰이 다시 수사에 나설만큼 한가할리도 없고, 심지어 담당 형사는 미키 할러를 미워하기까지 하는데 왜 다시 수사를 벌일까요?
루이스의 범죄 행각도 왜 진작에 체포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대충이었습니다. 루이스는 CCTV에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히 피해자를 찾아가거든요.

그나마 전자 발찌로 모든 행적이 추적당하는 루이스가 어떻게 라울을 살해했는지? 에 대한 트릭은 하나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루이스의 어머니가 대신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지요. 상당히 설득력이 높을 뿐더러, 라울이 죽기 전 손가락으로 남긴 다이잉 메시지 - W, 즉 여자가 범인이다! 라는 것 - 와 연결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들이 더 많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영상화가 되었으니, 소설보다는 영상화된 버젼을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2004/04/17

장화신은 고양이 - 에드 멕베인 : 별점 1점

별볼일 없는 형사 변호사 메슈 호프는 칼튼 버너비 메컴의 변호를 맡는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혼자 편집실에서 일하던 아내 플루던스 메컴의 살인 용의로 체포된 인물로 마당에 파 묻은 피 묻은 옷과 흉기라는 결정적 증거와 함께 이웃 사람의 증언 때문에 궁지에 몰린 상태.
호프는 플루던스의 직장과 원한 관계를 조사하며 플루던스가 죽기 직전까지 편집하고 있었던 필름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고 그 필름의 정체와 소재 파악에 집중한다. 
결국 플루던스가 제작한 영화는 “장화신은 고양이”라는 포르노 영화로 이 영화에 관련된 또 다른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내는데….

87분서 시리즈로 유명한 에드 멕베인의 “호프 변호사 (Matthew Hope)” 시리즈. 시리즈의 일곱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원제는 아마도 .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도 다 번역 출간 된 듯 한데 평소 구하지 못하다가 우연찮게 이 작품만 구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싸구려 펄프픽션"! 이었습니다. 엽기적이고 잔인한 살인 사건의 묘사나 “포르노 필름”이라는 선정적인 동기,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매춘부들 등 범죄물에서 흥행이 됨직한 소재만 모아다가 만든 이야기에요. 그나마도 무언가 괜찮은 플롯, 트릭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소재만 모아 놓았을 뿐이라 한번 읽고 끝날 수준의 싸구려 잡문에 불과합니다. 말초적인 부분을 자극하는 몇몇 묘사들은 잠깐 잠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만 단지 그뿐인이고요.. 포르노 영화가 수백만달러의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은 제껴두더라도 제목이 “장화신은 고양이”라니 이것 참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네요.
게다가 "호프 변호사" 시리즈지만 실제로 탐정 역할을 하는 것은 포르노 영화 스탭으로 “보물단지”가 될 지 모르는 필름을 찾는 티크와 모즈라는 떨거지입니다. 아 제작자라는 헨리라는 놈도 있구나. 여튼 포르노 필름을 찾는다는 곁가지 이야기가 오히려 추리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묘사되며, 호프 변호사는 주인공에 걸맞는 활약을 커녕 이혼한 아내와 딸과 관련된 가정사에 고민하는 모습만 주로 보여주는데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아울러 호프 변호사의 사생활을 이용하여 시리즈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큰 이야기로 포장하는 방식은 "87분서"와 유사하지만 노골적으로 시리즈 물임을 선전하는 것 같아서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87분서도 두 작품밖에 읽어 보지 못했지만 나름 추리와 하드보일드 요소가 잘 조화된 작품들이었는데 이 작품은 흥행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많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에게 미국 쪽 하드보일드 계보는 안 맞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4/03/19

열세 번째 배심원 - 아시베 다쿠 / 김수현 : 별점 2점

열세 번째 배심원 - 4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다카미 료이치는, 책이 팔리지 않아 궁지에 몰린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그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의 범인으로 일부러 체포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집필해 출간한다는 이른바 “누명 계획”. 다카미는 이 계획에 따라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꾸고, 의도대로 경찰에 체포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체포 직후 상황은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자신이 연루된 사건이 단순한 위장된 범죄가 아닌, 실제 강간 살해사건이며, 결정적인 증거는 그와 피해자의 DNA가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였다.

다카미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모리에 슌사쿠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과 조작된 증거의 진실을 파헤치며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홍루몽 살인사건"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아시베 다쿠의 장편소설로,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두 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전업작가를 꿈꾸지만 실패한 다카미 료이치가 '누명 계획'이라는 이름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꾼 뒤, 가짜 살인사건을 연출해 경찰에 체포되기까지의 과정. 두 번째는 그렇게 체포된 다카미가 뜻밖에도 실제 강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며,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의 법정 투쟁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한번에 읽히는 흡입력이 있어 독자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은 법정물 특유의 긴장감을 잘 살리고 있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설정 역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충분히 이슈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아주 미세한 단서를 활용한 마지막 반전도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을 깨지는 않으며, 무엇보다 DNA 감정이라는 과학적 수사기법의 맹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추리극이나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작가가 스스로 밝힌 대로 “역본격 추리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설득력도, 완성도도 부족해 보입니다. 진상 자체는 그럴듯한 편이지만, 근간이 되는 설정이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도입되지 않은 배심원 제도가 전제된 가상의 세계관이 이 이야기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가공의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SF적 상상력에 기대는 방식으로, 마치 밀실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의 범인이 초능력자였다는 식의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접근으로는 현실 속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완성도 높은 법정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배심원 제도에 대해서 다룬 작품이라면 QED 27권의 "입증책임" 에피소드나 헨리 데커의 "복수법정" 쪽이 훨씬 더 나아요.

또한 이야기의 핵심 장치인 “누명 계획”—조혈간세포를 이식해 DNA를 바꿔치기하는 설정—은 실제 골수이식 사례에서도 확인된 적 있는 방식이라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전제하고 있는 경찰 수사의 허술함이 문제입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듯 혈액이 아닌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다른 유전자 샘플로 검사를 했더라면 바로 들통날 일이기 때문이죠. 물론 작품 속에서는 정치적 개입으로 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변호인 측에서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 사안이기에 서사의 긴장감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결말 역시 지나치게 급하게 흘러가는 해피엔딩입니다. 다카미를 다시 유죄로 만들려는 시도가 왜 실행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미요시 기요히코가 센노 마치코 살인범으로 체포된다는 전개는 작위성의 극치입니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체포가 이루어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고, 미요시 역시 혈액만 바뀌었을 뿐이라면 모발 샘플을 통해 얼마든지 DNA 감정이 가능했을 텐데, 이런 간단한 접근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단순한 해피엔딩보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활용한 보다 치밀한 반전이 있었더라면 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겁니다.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 캐릭터 자체도 아쉽습니다. 의뢰인의 결백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너무나 착한,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인물로 그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나 개성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리즈를 이끌어갈 중심 인물로서의 흡인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근미래 SF 판타지처럼 끌고 갈 요량이었다면 다른 복잡한 설명도 대충 요약하고 길이만이라도 줄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분량은 450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누명 계획"의 핵심 트릭인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한 DNA 바꿔치기라던가 "배심원 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니까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작가가 영향받은 유사 작품들을 소개하는데, 소개된 작품들이 훨씬 재미있어 보입니다.

2014/04/21

파계 재판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파계 재판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신극배우였던 무라타는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남편을 살해한 내연녀 야스코를 위해 시체 유기를 도왔다는 혐의는 인정했지만,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검사는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했으나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으로 서서히 흐름이 바뀌고, 결국 무라타의 비밀까지 밝혀지는데...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인 무라타 가즈히코의 결백을 밝히고 진범을 밝혀내는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의 활약이 그려지는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추리작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이지요.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기로는, 이전 가미즈 교스케 단편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도서출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두 번째로 출간되었는데,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에 이어 국내 정식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네요.

장점이라면,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순간에 드러나는 진범과 그 진상이 매우 인상적인 덕분입니다. 작가가 사법고시 준비 수준으로 조사했다는 법정 묘사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고요. 증인이 한 명씩 등장해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도 매우 긴박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서는 사회파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부락민 출신이라 평생 차별에 시달렸다는 설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인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차별을 그린 동명 작품에서 따왔으며,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입니다. 검사가 제시하는 무라타의 과거 범죄들이 실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극단에서의 횡령은 출신을 이용한 협박 때문이었고, 동거녀와의 결별 역시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식으거든요. 특히 그 동거녀가 법정에서 결혼하겠다고 증언하는 장면과, 무라타가 이를 일축하며 "내 돈 때문이지!"라고 외치는 순간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합니다. 전부 법정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화자인 요네다가 법정출입기자로서 재판 과정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별도 취재나 외부 조사가 동반되는데,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엽기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서 보이던 과장된 묘사 없이 매우 절제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추리적인 요소의 한계입니다. 요네다의 시점만으로 모든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탓이에요. 법정 미스터리 특성상 상대가 어떤 증언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이는 이야기 구조를 제한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정보의 일부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대한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증인이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사건이 더 애매해졌을거에요. 또한 사라진 천만 엔의 행방에 대해 검사나 경찰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이며, 자금의 출처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진범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쓰가와 히로모토와 야스코의 관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쓰가와가 야스코의 시신을 어떻게 유기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유기에는 무라타의 자가용이 개입되었기에 개연성이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작품은 무라타의 재판에서만 끝을 맺습니다. 화자인 요네다를 내세운 만큼 쓰가와 재판 결과까지 다루는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배우 이토 교지나 여배우 호시 아키코 같은 인물들도 단순한 미스디렉션으로 사용하기엔 등장 비중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요. 무라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비까지 들여 조사에 나선 햐쿠타니 변호사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상황상 무라타가 범인처럼 보이니까요. 이후 시리즈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카기 아키미쓰의 법정 미스터리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극적 긴장감과 사회파적 메시지를 고루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사법고시 수준의 공부를 했다는 열정이 느껴졌고,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책의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책 하단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보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띠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런 디테일은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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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1/05/29

다섯 번째 증인 - 마이클 코넬리 / 한정아 : 별점 2.5점

다섯 번째 증인 - 6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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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할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담보대출 관련 민사소송 변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뢰인 중 한 명이었던 리사 트레멀이 자신의 집을 압류하려 한 은행가 미첼 본듀란트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자, 다시 형사 소송 변호에 뛰어드는데...

해리 보슈를 창조했던 마이클 코널리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큰 인기를 끌어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매튜 매커너히 주연 영화로 발표되기까지 했었지만, 마이클 코널리의 전작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동안은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엄청난 두께도 큰 진입 장벽이었고요.

하지만 읽어보니, 그동안 진작 읽지 않은게 후회될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재미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법정물로 완벽한 재미를 선사한다는 점입니다. 리사 트레멀 재판에서 변호사 미키 할러가 승리하기 위해 프리먼 검사와 벌이는 치열한 법정 공방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에요. 또 미키 할러는 재판 과정에 철저한 작전을 세워서 변칙적이고, 어떻게 보면 불법에 가깝거나 비열해 보이는 짓까지 서슴없이 동원합니다. 단순히 증거 몇 개로 난타전을 벌이는 수준이 아니고요. 그래서 더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미키 할러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피고인이 정말 무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든요. 돈을 받은 이상, 의뢰인 승리 - 여기서는 무죄 판결 - 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렇게 기브 앤 테이크에 충실한 모습, 그러면서도 변호, 그 중에서도 형사 사건 변호라는 직업적 전문 분야에서의 출중한 능력은 '페리 메이슨'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함께 일하는 수족과 같은 동료들과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은 성격, 엄청난 말주변까지 더해져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페리 메이슨의 적자인 셈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현실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 미첼 본듀란트는 키가 180cm가 넘어서, 키가 160cm밖에 안되는 의뢰인 리사가 망치로 정수리를 가격해서 살해하는건 어려웠다는 증언이 리사의 무죄 평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리사는 풍선을 이용해서 본듀란트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게 만든 뒤, 뒤에서 망치로 가격했던 겁니다.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미키 할러가 복수하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리사가 전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은닉했다는걸 폭로하고, 본인은 더 이상 변호사를 하지 않고 검사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보여줄 것 같아 두근두근해지더라고요.

그러나 리사가 진범이라는 반전과 트릭은 좋았지만,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동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리사가 본듀란트를 급작스럽게 죽인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거든요. 작 중 미키 할러의 변론을 통해서도 설명되지만, 미키 할러에 의해 리사의 집 압류는 늦춰질 예정이었지요. 작장을 잃은건 한참 전이니 그 때문에 갑작스럽게 살의가 폭발했을리도 없고요. 우발적인 범행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풍선을 이용해서 사건 현장을 꾸민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미키 할러의 재판 전략도 복잡하지만, 실상 들춰보면 그렇게 알맹이가 많지는 않아요. 검찰에서 내민 증거는 많다지만, 실제로 리사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리사가 쓰던 정원용 장화에 피해자 피가 아주 미량 묻어있던게 거의 유일한 증거지요. 흉기인 망치는 리사 집에 있었던 것이라는게 증명되지 못했고, 오히려 장화와 망치가 놓여있던 차고가 잠겨 있지 않았다는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탓에 직접 증거로 보기는 애매해 졌으니까요. 그러니 장화에 묻은 피 정도로 리사를 살인범으로 단정 짓는다는건 무리로 보였습니다. 제가 배심원이었다면,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했을거에요.

그리고 앞서 설명드렸던 결정적 트릭, 즉 키가 큰 피해자 정수리를 때리기 위해 풍선을 이용했다는 트릭도 조금만 생각해봐도 억지스럽습니다. 검시 결과, 피해자 무릎이 깨져 있는걸로 드러나고 이로써 고개를 뒤로 젖힌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부각됩니다. 그러나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정수리를 가격당한다면, 당연히 뒤로 넘어가서 뒷통수가 깨질 겁니다. 무릎을 다칠 이유는 없어요.

위탁 추심업체 ALOFT의 수장 오파리지오가 본듀란트로부터 협박을 받아 그를 죽였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본듀란트의 협박(?)성 편지는 딱히 큰 위협이 되지 않는걸로 보였고, 실제로 오파리지오가 회사를 매각하는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오파리지오가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증언을 끌어낸 뒤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장면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리사가 사건 현장을 잘 빠져나가고, 대부분의 증거를 인멸하는데 성공했다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던건 마찬가지에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니,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겠지만요.

그 외 전개에서 불필요한 부분도 많습니다. 미키 할러의 전처 등 사건 외적언 이야기라던가 미키 할러를 깡패들을 시켜 폭행하는 이야기, 잔챙이 3류 영화 제작자 허브 달의 존재, 신참 변호사 애런슨의 정의에 대한 고민 등은 이야기를 길게 늘일 뿐, 딱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킬링 타임 펄프 픽션으로는 적당했습니다. 제 2의 페리 메이슨 자리를 차지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러나 책 보다는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영화로 보는게(나온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2012/02/26

어둠의 변호사 - 도진기 : 별점 2.5점

어둠의 변호사 - 6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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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변호사라 불리는 고진은 남광자라는 여인에게서 오빠의 유산 상속과 관련된 의뢰를 받았다. 유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남씨 집안과 같은 저택 1층에 거주하는 서씨 집안 사이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참극, 그리고 2년 전 살인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흥미가 생긴 고진은 남씨 집안의 무남독녀 남진희를 만난 뒤, 시각장애가 있는 그녀를 돕기 위해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남진희가 살해당하는데...

오래전 남씨, 서씨 가문에서 벌어진 이분희 살인사건, 2년 전의 박은순 살인사건, 남진희 살인사건, 마지막의 서형일 살인사건까지 총 4건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며, 의외의 진상과 함께 다양한 트릭이 사용된 한국 본격 추리물입니다.

복잡하고 치밀한 인간관계, 과거에서 이어진 비극, 악마적인 핏줄에 의한 범죄 등 여러 비현실적인 설정 -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르네요 -을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 녹여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가문이 얽히게 된 이유인, 전 남편이 도망간 뒤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한 이분희와의 관계라든가, 서형일을 입양시킨 이유 등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이거든요. 주요 등장인물의 설정, 주택 명의, 집을 나간 아버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설명 등도 상세하게 덧붙여 설득력이 높습니다.

트릭도 뛰어납니다. 이분희 사건의 진상도 놀랍고, 서형일 사건의 다잉 메시지도 설득력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박은순 사건과 남진희 사건 두 건에서 사용된 여러 트릭은 풍성하면서도 추리 애호가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박은순 사건에서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위조 여권 전문가’라는 특이한 전문가가 필요했다는 점, 그리고 현지에서 벌인 돼지피 사건은 경찰에 검거될 위험성이 컸다는 점(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위조 여권 등이 밝혀지며 모든 것이 끝장날 상황)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또한, 남진희 사건의 경우 별장의 설계 자체와 함께 수원 톨게이트에서의 소동 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러나 이는 극의 흐름을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개의 문제가 더 컸는데, 탐정 역할을 맡은 고진을 비롯해 용의자로 등장하는 서씨 가문의 형제들의 캐릭터가 천편일률적이었고,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가 지나치게 알리바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현대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지루해집니다.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를 독자들이 끝까지 가져가도록(특히 서두리) 구성한 것 같지만,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어요. 차라리 서씨 가문의 형제들을 동시에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소거법 형태로 진행했더라면 더 흥미로웠을 겁니다.

단서 제공 방식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유언장의 첫 번째 버전이나, 서형일의 배낭여행 당시 친구의 행적 등 당연히 조사되었어야 할 단서들이 뒤늦게 등장하는데, 현대 경찰 수사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개에 우연이 많이 개입된 것도 본격 추리물로서는 감점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더부살이하는 노인의 정체와, 그로 인해 밝혀지는 저주받은 핏줄의 정체가 우연히 밝혀지는 과정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외에, 판사 출신 작가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법률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는데, 단점은 아니지만 전문 분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점을 많이 언급했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소설일 뿐만 아니라, 완성도와 트릭 면에서도 한국 추리소설 장르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첫 장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놀랄 만한 수준이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와 시리즈였습니다. 시리즈 후속작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2024/11/30

최후의 증인 - 유즈키 유코 / 한성례 : 별점 2.5점

최후의 증인 - 6점
유즈키 유코 지음, 한성례 옮김/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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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 변호사 사가타 사다토는 요네사키 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재판에서 검사 마오와 대결을 벌였다. 마오는 피고가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를 살해했다는걸 공판 과정 내내 여러 증인과 증거를 통해 착실히 밝혀나갔지만 사가타는 공판 마지막 날, 전직 형사 마루아먀를 증인으로 불러 놀라운 진상을 밝혔다. 피해자 미쓰코는 8년 전, 피고 시마즈의 음주 신호 위반 사고로 외동아들 스구루를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사건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최후의 증인”은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유즈키 유코의 법정 스릴러이자 복수극입니다. 제7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으로 변호사(검사) 사가타 사다토 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하네요.  “고독한 늑대의 피”는 하드보일드였는데 이런 작품도 잘 쓰는군요.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사고에서 시작해 복수, 법정 공방, 그리고 8년 전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까지 세 개의 큰 흐름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순서대로 설명드리자면, 타카세 코지와 미쓰코 부부의 외동아들 스구루는 신호를 위반한 음주운전자 시마즈의 차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시마즈는 자신의 부와 '공안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사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지요. 그리고 8년 후, 미쓰코의 시한부 판정을 계기로 부부는 교묘한 복수를 계획합니다. 이후 시마즈는 미쓰코의 의도된 유혹에 빠져들었다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고 맙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받은 사가타와 마오가 법정에서 대결을 펼치고요.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는 깔끔하고, 인물 묘사도 돋보입니다. 특히 주요 악역 시마즈는 독자들이 분노를 느낄 만큼 적절히 그려졌습니다. 그의 특권과 오만함, 그리고 본의는 아닌 사악함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캐릭터로, 독자들이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쓰코의 복수극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시마즈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이 수단이 마지막 순간까지 감춰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종의 서술 트릭적인 재미를 제공합니다. 공판 3일째에 피고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까지는, 피고인이 미쓰코라고 생각하도록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전개 상 감추기 쉽지 않은 부분인데, 고민을 참 많이했구나 싶었어요.

법정물로도 볼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변호사 사가타가 검사 마오의 논리를 하나씩 무너뜨리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예컨대, 시마즈가 사건 직후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도망친 행위는 오히려 범죄와 무관하다는 논리로 반박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불륜 상대로부터 공격받은 뒤 도주하는 상황이라면 사람 많은 호텔 로비를 지나 택시를 탄게 당연하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럴리 없다는 논리인데 그럴싸합니다.
시마즈가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으나, 결국 8년 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처벌받게 된다는 점도 통쾌함을 안겨주고요.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미쓰코의 복수 계획은 서술 트릭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치밀하지 못합니다. 특히 시마즈가 미쓰코의 단순한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했어요.
또 마지막 공판에서 등장하는 마루야마 형사의 증언도 지나치게 극적이고 억지스럽습니다. 그의 증언이 없더라도 8년 전 사건이 복수극의 동기였다는건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가타와 마오 검사에게 부여된 설정도 다소 진부하고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사가타가 검사직을 떠나게 된 계기, 마오 검사의 아버지가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희생당했다는 서사는 작품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뿐이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사가타가 '어떤 식으로든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지만, 지은 죄는 반드시 죗값을 치루게 만드는' 변호사라는 설정을 끌고가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깔끔한 전개와 강렬한 악역 묘사, 그리고 법정 스릴러의 묘미를 잘 살렸지만 추리적으로 다소 아쉬우며, 작위적이고 진부한 부분도 많아 감점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7/04

Q.E.D Iff 증명종료 30 - 카토 모토히로

"Q.E.D."의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의 마지막 권입니다. 

이전 권에서 토마가 가나에게 고백하길래 이번 권을 마지막으로 시리즈가 끝날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Q.E.D. UNIV"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최근의 폼은 작가의 최전성기가 지났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것은 반갑네요.

이번 권에도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비교적 가벼운 입시 부정 사건이고, 한 편은 살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스티지"

하버드에 합격한 가나는 브라이언 교수와 학장으로부터 입시 부정 관련 사건 조사를 의뢰받았다. 자동차 부품 회사 사장 넬리 게레로가 기부 입학을 위해 천만 달러 수표를 보냈는데, 아들 야엘이 불합격하고 자살했다며 학교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수표를 받지 못했다.

넬리가 마약 카르텔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자, 입시 컨설턴트 시퍼가 천만 달러 수표를 학교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챙기려고 했던 것이 수표 분실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녀는 야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학교에 수표를 돌려주었지만 들통나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나 진짜 진상은 넬리가 야엘을 마약 카르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시켰던 것입니다.

진상은 나쁘지 않지만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야엘의 위장 자살과 시퍼가 학교에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수표를 반납한 일은 경찰과 학교 측 조사가 미흡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습격한 마약 카르텔을 가나가 공격해서 물리친다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정보 제공도 기부 입학에 대해 약간 알려주고 끝날 뿐입니다. 제목의 "프레스티지"도 명예와 환상을 의미하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문이 닫힐 때"

암호화폐 투자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간호사 허버트는 투자 회사 사장 체스터 피멜 살해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체스터의 혈액만 낭자할 뿐, 시신은 없었다. 시신 없는 상태로 기소된 허버트의 재판이 시작되는데...

허버트가 체스터의 혈액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풀어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안티에이징 클리닉에서 허버트와 체스터가 만났다는 것이 단서가 되거든요. 젊은 시절에 채혈했던 피를 주입하는 요법을 위해 확보했다는 것인데, 실제 미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꽤 높습니다. 체스터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체스터의 작전이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교살한 체스터의 사체를 숨긴 방법도 앞서 나온 복선과 이어집니다.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키트에 대한 복선으로, 체스터의 사체를 마약 중독 사망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개에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체스터의 변호사가 노력해서 허버트를 재판정에 세웠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허버트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체스터의 부재로 인한 암호화폐 폭락이 멈추지도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길거리 마약 중독자의 시신이라도, 살해당한 시신을 마약 키트로만 검사하여 매장한다는 것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최소한 근처에 유명 투자자의 시신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근처 시신들은 철저하게 조사하는게 당연합니다.

허버트가 변호사를 살해하려 한 척 해서 체스터 사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아요. 두 사건은 관계가 없으니까요. 변호사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해서, 체스터를 죽이지 않았다는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는 발상은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멍이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키스 씬은 마음에 듭니다. 무려 80권의 연재 끝에 결국 성사된 데다가, 토마가 얼마나 괜찮은 녀석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덕분입니다.

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14/12/18

잭 리처 (2012) - 크리스터퍼 맥쿼리 : 별점 2점

도심 한복판에서 의문의 저격으로 5명의 무고한 시민이 살해당했다. 전직 군인 '제임스 바'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지만, 그는 자백을 거부한 채 ‘잭 리처를 데려오라’는 메모를 남겼다. 제임스 바는 호송 중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 빠졌고, 뒤이어 전직 군 수사관 출신이지만 실제 정체를 아는 이는 누구도 없는 의문의 남자 ‘잭 리처’가 나타났다. 리처는 제임스 바의 변호사 ‘헬렌’과 함께 사건 수사에 나서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영화만 찾아보게 되는군요. 이번에 본 영화는 개봉한 지 조금 된 영화 "잭 리처"입니다. 원작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명성이 자자한 슈퍼 베스트셀러이기에 관심이 가던 차에 영화부터 감상하게 되었네요.

이 영화는 여러모로 어제 리뷰했던 "툼스톤"과 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스릴러 장르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라는 점, 헐리우드 빅스타가 주연이라는 점, 주인공은 과거 전문가로 실력 있는 수사관이지만 현재는 명확한 직업이 없는 인물이라는 점 등이 거의 똑같거든요. 차이점이라면 이 작품이 "툼스톤"에 비해 더 헐리우드 액션 영화의 문법에 충실하다는 점이고요. 잭 리처도 정의감 넘치는 쿨가이라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 주인공의 전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리썰 웨폰"의 마틴 릭스 느낌이에요.

그러나 단순히 뻔한 헐리우드 양산형 액션 스릴러는 아닙니다. 베스트셀러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돋보이는 점도 있는데, 특히 주인공 잭 리처가 인상적이에요. 최고 실력의 군인이자 헌병 수사관 출신의 떠돌이라는 설정이 아주 괜찮았거든요. 운전면허와 자동차도 없이 버스로 떠돌아다니며 옷도 필요할 때마다 한 벌씩 사서 입고 버리는 식으로 진정한 무소유가 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사실상 잃을 게 없기에 당연히 겁날 것도 없다는건 확실히 와 닿았고요. 당연히 엘리트 군인으로서의 사격, 격투 실력과 수사관 출신다운 추리력도 괜찮았습니다. 이야기도 이러한 잭 리처의 캐릭터에 많은 부분 기대어 전개됩니다.

허나 잭 리처를 뺀다면 작품 자체는 기대 이하입니다. 전개가 즉흥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든 탓입니다. 중반부까지 중요한 실마리로 보였던 양아치들의 습격은 실제로는 잭 리처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 쓰였을 뿐, 정작 사건 해결은 멍청한 미행자들이 대놓고 회사 차로 미행하는 실수 때문에 드러나는 식이거든요. 어차피 이 시점에서 잭 리처는 범행 동기를 눈치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장치이기도 했고요. 이외에도 동네 깡패들의 습격,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자동차 추격씬 등 불필요한 장치, 요소는 넘쳐납니다. 
불필요했어도 잘 찍었더라면 눈요기라도 되었을 텐데 액션씬 모두가 최근 트렌드에 어울리지 않게 단조로워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클라이맥스에서 악당이 동원한 부하가 10명도 안 되는 스케일, 라이벌 격인 악당이 그다지 강하지 못한 상성 관계도 실망스러웠어요. 제작비가 6천만 불이나 된다는데 제작비를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네요. 톰 크루즈 출연료로 다 나갔나?

아울러 캐릭터도 낭비가 심합니다. 히로인인 변호사 헬렌이 대표적입니다. 헬렌은 잉여 캐릭터에 불과하거든요. 아버지와의 갈등 말고는 작중에서 하는 게 없습니다. 피해자들을 조사해보라는 잭 리처의 지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모든 힌트가 드러난 다음에야 배후를 파악할 정도로 실력도 없고요. 이 작품에서 그녀의 유일한 비중은 큰 가슴밖에는 없습니다. 차라리 중간에 죽어버리는 샌디가 매력이나 작중 비중이 더 높아 보이니 말 다했죠.

정리하자면 영화의 핵심은 1. 잭 리처가 변호사에게 사격장 조사를 요청 → 2. 사격장으로 찾아가 CCTV 및 증언 확보 → 3. FBI에 관련 증거 전달로 끝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재미는 없었겠죠. 그래서 필요했을 드라마틱한 전개와 액션은 크게 튀지 않게, 설득력 있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악당들이 잭 리처를 엮어 넣기 위해 샌디를 살해하고, 잭 리처가 샌디의 죽음에 분개한다는 과정과 변호사를 납치한 뒤 이어지는 공사장에서의 클라이맥스 액션 같은 식으로요. 앞서 이야기했던 불필요한 장면을 조금 덜어내고 핵심 내용과 이러한 영화적 전개를 잘 결합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지금의 결과물은 스릴러적인 요소와 액션이라는 요소 두 개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흥미로운 추리가 가미된 액션 스릴러물로는 괜찮을 수 있지만, 전개가 지루하고 최근 트렌드에 맞지 않는 단조로운 액션 장면 때문에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툼스톤" 쪽을 권해드립니다.

덧 1 : 중후한 노인으로 등장하는 로버트 듀발과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 보스 역의 베르너 헤어조크와 같은 왕년에 한가락한 인물들의 모습은 반가웠습니다.

덧 2 : 월드와이드 흥행 수익은 2억 불을 넘은 나름 성공작으로 후속작이 기획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톰 크루즈가 캐릭터를 잘 살린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작에서는 거구의 덩치여서 캐스팅 당시부터 말이 많았나 보네요. 개인적으로는 비주얼적으로도 더 압도적인, 안티 히어로에 어울리는 배우가 연기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후속작에서는 WWE 출신 스티브 오스틴을 추천해봅니다.

2017/04/14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도진기 : 별점 2.5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6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는 미모의 중년 여인 김명진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명진은 20년 전 죽은 남편 신창순, 그리고 남궁현, 임의재, 한연우 네 명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나, 장난스러운 내기 끝에 신창순과 결혼했었다. 과거의 남자 세 명과 김명진의 동생 김해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움에 나섰다...

현직 판사이자 소설가로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 해도 무방할 도진기의 장편으로 시리즈 캐릭터인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합니다. 

제가 읽었던 이전의 '어둠의 변호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법정에 선 고진'의 활약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법정 미스터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속에서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재판을 통해 피고인을 유죄로 만드는데 정평이 난 실력자 조현철 검사와 불꽃튀는 대결을 벌이거든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서로 배심원을 설득하고, 재판을 유리하게 이끄는 배틀이 아주 볼 만 합니다. 조현철 검사가 은근슬쩍 끼워넣었던 거짓말 탐지기 조사 결과를 뒤집는 변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말싸움도 현란하기 그지 없고요. 작가가 현직 판사이기에 쓸 수 있었던 묘사들,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재판 속행과 보석 신청 등 모든 상세한 설정들이 그러합니다. 이 정도면 해외 유수의 법정 미스터리물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만 하지 않나 싶을 정도에요.

법정에서의 대결이 중심이라서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수많은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딱 한 가지 등장하는 트릭의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신창순 살해에 사용된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체가 발견된 이유와 범인 임의재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역업자라는걸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하우더닛" 물로서의 진가도 발휘됩니다. 결국 유럽에 있는 사람만 가능한 트릭이기에 범인이 임의재다!는 건데 꽤 설득력 있었어요.

지고지순한 일종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6명의 청춘들이 처음 만난게 격동의 1990년대라 더 와 닿았고요. 저 역시 1990년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지요. 이 사랑의 중심에 놓여있는, 작가의 이상형을 투영해 놓은 듯한 김명진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팜므파탈과 정 반대인, 순진무구한 천사같은 캐릭터를 잘 그려 놓았거든요. 작중 한연우의 표현을 빌자면, 오디오 기기에 취미를 갖는 사람들에게 마크 레빈슨 같은 존재랄까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작위적 장치들이 많이 거슬립니다. 너무 '소설'을 의식한 티가 물씬 났어요. 신창순이 아내를 학대하던 인간 쓰레기였다는 중요 정보를 나중에 밝히는게 대표적입니다. 살인의 가장 큰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변론을 맡은 변호사에게 그러한 정보를 숨긴건 말도 안돼지요. 임의재가 차용증을 가지고 김명진을 겁박하는 장면 역시 나중에 고진과 이우현의 인기척을 느끼고 쇼를 했다고 밝혀지지만 억지스러웠고요. 독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 묘사였습니다. 그 외 많은 부분에서 작가가 한연우를 범인이라고 유도하는 것도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트릭도 순간 이동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디테일은 그닥입니다. 1주일에 걸친 운송기간 동안 사후 경직으로 뻣뻣해진 시체를 어떻게 무마했을지가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상당한 재산가로 묘사되는 임의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현지 조사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강도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언급되는데, 누군가를 고용하는게 훨씬 쉽고 간편했을겁니다. 중국인들이 당한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처리되었을 확률도 높고요.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기가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20년이 흘렀습니다. 과거가 다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백야행" 시대에나 먹혔음직한, 자신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여자를 위한 순애보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에요. 그나마 "백야행"은 현재진행형이기나 했지, 20년 후에도 그렇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달리기 시합에 이어서 김명진이 술을 먹은 후 강제로 관계를 가진 탓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는 설정도 영 와닿지 않더군요. 1990년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덧붙이자면 심장 판막증이 있는 임의재가 장거리에 도전할 만큼 김명진을 사랑했다는 것도 작위적이라 별로였어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랑했다면 중간에 포기하면 안되는거잖아요? 차라리 뛰다가 쓰러져 기절이라도 하던가..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대 착오적인 순애보는 거슬리며, 작위적인 요소가 많아 감점하지만 미녀와 청춘,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고 법정 미스터리물로는 평균 이상은 되는 작품입니다.
블라디보스톡과 한국을 오가는 스케일도 크고 법정물로는 충분히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미녀의 존재도 확실하니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네요.

2021/05/14

더블, 더블 - 엘러리 퀸 / 이제중 : 별점 2점

더블, 더블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에게 신문기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라이츠빌에서 일어났던 루크 매캐비의 죽음, 루크의 유산 4백만 달러가 주치의 세바스티안 도드에게 상속된 것, 유산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하트 방적 공장 사장 존 스펜서 하트가 자신이 유용한 루크의 돈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4월 7일에는 마을에서 구걸을 했던 술꾼 톰 앤더슨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담긴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엘러리 퀸에게 톰 앤더슨의 딸 리마가 찾아와 아버지는 죽었을 거라며 사건 해결을 의뢰했고, 엘러리 퀸은 리마와 함께 십여년 만에 다시 라이츠빌로 향하는데...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수작들이 많이 모여있는 '라이츠빌 시리즈'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이었던 국명 시리즈에 반해, 라이츠빌 시리즈는 범죄 드라마 성격이 강하다는게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기존 라이츠빌 시리즈와는 조금 다릅니다.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범죄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도둑, 의사, 변호사가 차례로 죽는다'는 마더 구스 동요 중 한 편의 내용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확실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라이츠빌 시리즈에요. 이야기 자체는 전혀 본격물처럼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로 여겨진 탓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도 않는 탓입니다. 경찰이 방관하는 동안, 탐정인 엘러리 퀸 역시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던가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답게 인간 관계와 동기에 집중합니다.

덕분에 왜 동요가 사건과 연결되는지? 왜 범인이 엘러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한, 와이더닛물로는 꽤 흥미로운 편입니다. 특히 동요와 사건과 연결되는 이유가 참신했어요. 범인 케네스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유언장 쓰기를 미루던 도드 의사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순순히 유언장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두 건의 사망 사고의 피해자 직업에서 착안하여 톰 앤더슨을 죽이고, 니콜 자카르도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한 뒤 이 모든게 마더구스 동요 법칙에 따른 죽음으로 다음 차례가 도드 의사인걸 명심하게 만든 것이지요.
도드 의사가 오래 앓아온 신경증 탓에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게 전개와 묘사에서 계속 드러나서 설득력도 넘칩니다. 우발적인 죽음이 목표한 살인의 연결고리로 이용된다는 트릭은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작품에서의 동기만큼은 신선하면서 설득력 높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허나 후더닛물로는 좋은 작품은 못됩니다. 범인은 케네스 아니면 리마일게 너무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리마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바깥 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을 수는 있습니다. 속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죽일 동기는 없습니다. 때문에 범인은 케네스인 거지요. 도드 박사의 유산 4백만 달러는 동기로 차고 넘치잖아요. 세 번째 사건인 니콜 자카르 사살 사건은 어쨌건 케네스가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고요. 

물론 도드 박사의 유언장이 공개된 뒤, 거의 모든 유산은 종합 병원에 기부되기 때문에 케네스의 동기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도드 박사 뒤에 살해된 변호사 홀더필드, 양복장이 월더 형제 사건에서는 동기가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도드 박사 살해까지는 케네스가, 그 뒤 범행은 리마가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도드 박사가 죽은 뒤 결혼했으니 뭔가 동기를 공유했을거라고 본 것이지요. 사실 뒷 부분은 여러모로 리마인게 더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동요 순서대로 '대장'이 마지막에 죽는다면, 이는 앞서 엘러리가 리마에게 말했듯 엘러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말은 결국 케네스가 진범이라서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케네스의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엘러리가 꾸민 리마 체포 쇼를 보고 자백했다는 결말도 좋은 후더닛 본격물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요.

국명 시리즈로 대표되는 엘러리 퀸 본격물처럼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도 큽니다. 동요와 사건을 무리하게 엮은 탓입니다. 동요 순서대로 변호사와 장사꾼 (양복장이)가 죽는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드 박사가 유언장을 두 번 남겼다는 것도 우연이고, 이를 진작에 데이비드 월도가 밝히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변호사 비서 플로스가 때마침 라이츠빌을 떠났다는 것도 동요에 끼워 맟추기 위한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비서 플로스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게 그나마 말이 되었을 겁니다. 

엘러리 퀸에게 케네스가 편지를 보냈다는 설정은 억지의 정점입니다. 엘러리 퀸의 입으로 도드 박사에게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서라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케네스는 그냥 신문에 투고만 했어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범이 탐정을 불러서 피해자가 죽는걸 예언하게 만들다니, 억지도 정도껏 해야죠.

캐릭터들도 현실적이지 않은, 만화같은 캐릭터들 뿐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산 속 움막에 살던 청순한 소녀 리마가 대표적입니다. 도드 의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증 증상을 보인다는건 사건 동기 설명을 위해 필요했던 묘사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점치기를 시도한다는 설정 등 다른 캐릭터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엘러리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던 리마가 케네스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라이츠빌 시리즈라면 아예 리마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게 맞았을테고, 이왕 등장한거라면 팬들에게는 리마가 엘러리와 연결되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나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예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의 장점보다는 기존 엘러리 퀸 시리즈의 단점이 더 불거진 망작입니다. 역시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22/04/29

Q.E.D Iff 증명종료 1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17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도 오랫만이네요. 이번에는 나름대로(?) 강력 사건 한 편과 일상계(?) 한 편이 수록되어 있는 전통의 구성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포플러 장의 살인 게임" 

포플러 장에 토마와 가나를 포함해서, 댄서와 마술사, 용병 등 다채로운 직업의 사람 열 명이 모였다. 48시간 안에 저택에서 일어날 무언가에 대해 풀어내는 게임 참가 때문이었다. 상품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푸른 나비 브로치였다. 게임을 하는 동안 포플러 장은 봉쇄되며, 참가자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참가자 중 코가모와 하토야가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살해당한 방은 밀실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있었다.

포플러 장은 유명 게임에서 반사회조직을 찾아내기 위해 회사가 만든 영역이었고, 푸른 나비 브로치는 게임에 사용되는 아이템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그럴듯하게 그려낸 전개와 묘사, 그리고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기묘한 직업이 가장 큰 단서가 된다는 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밀실 트릭도 게임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고요. 피해자 두 명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인 뒤, 창을 잠그고 자살했던 겁니다. 그 캐릭터는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는 설정이고요.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병 간호를 핑계로 불참했던 저녁 식사 때 게임 참가자들이 했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걸 단서로 토마는 주시마츠가 여러 캐릭터를 이용한다는걸 알아냈거든요.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캐릭터를 사용했다는 아이디어도 좋아요. 주시마츠는 다른 두 캐릭터를 이용하며 밀실 살인을 저지르고, 아이템이 담긴 가방을 훔쳤습니다. 그래서 세 명이 동시에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건은 형사임을 자처했던 카리카네가 이 사실을 알아낸 뒤, 주시마츠를 협박해서 실제 주소를 알아냈다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카리카네 역시 가방이 범행 동기라는걸 알고 있었던 등 범인밖에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진상이 너무 극단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애초에 게임 회사는 계정 주인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으니, 이런 복잡한 게임을 따로 벌이지 않아도 수상한 사람의 조사를 경찰에 의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약하고요. 

게임도 어디까지 자유도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평범한 게임이라면 직업별로 스킬이 있는게 당연하니, 밀실 트릭이 의미가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추리물로 기능하려면, 보다 정교한 설정이 필요했습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 개를 만든 것이었다!도 아이디어도 새롭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 노트"에서도 두 쌍동이가 아니라 세 쌍동이었다!는 트릭이 등장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을 녹여낸 시도는 좋았지만, 설득력을 갖추는 데에는 실패했고 추리적으로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서 감점합니다.

"트롤리 딜레마" 

토마와 가나가 휴식을 즐기던 바닷가 야키소바집 아르바이드생 이시카리 아유가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편모 가정 자녀로 아버지 쿠치무츠 고로 씨는 부자였지만 1년 전 캐나다에서 타고있던 선박 좌초 사고 이후 실종되었으며, 양육비 지원도 끊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토마는 고로 씨가 특별실종선고를 받게 되면, 사망한 것과 같이 처리되니 유산 분할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쿠치무츠 집안에서는 아유가 쿠치무츠 씨의 딸이 아니라며 유산 분할 및 DNA 제공도 거부했다. 심지어 쿠치무츠 가문에서 머리카락을 봉납해 왔었던 신사에 누군가 침입하여 쿠치무츠씨의 머리카락을 불에 태워버리고 마는데....

이전에 등장했던 변호사 키리시마 치도리가 재등장합니다.

제목의 트롤리 딜레마는 한 선로는 1명이, 다른 선로에는 5명이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선로로 폭주하는 기차를 유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런 저런 딜레마, 특히 사람 생명의 경중을 다루는 상황에서 많이 언급되는 문제이지요. 그러나 작 중에서 이 문제는 수 페이지를 할애해가며 설명하는 것 치고는, 내용과는 별 상관은 없습니다. 쿠치무츠 가문 4명의 자식과 아유 한 명의 대결 구도가 아닌 탓입니다. 아유에게 돈을 준다고 다른 4명의 자식들이 다 망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야기도 별로입니다. 쿠치무츠씨가 살아있었고, 화상 통화로 변호사와 가족이 참석한 회의에 화상 통화로 참여하여 장남에게 아유가 자기 딸이라며, 뒷 일을 부탁하는 걸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쿠치무츠씨는 이미 죽었으며, 유산 상속 분쟁은 모두 쇼였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화상 통화를 조작해서 살아있던 것 처럼 꾸몄던 겁니다. 암으로 죽음을 예상하여 꾸준히 자식들에게 재산을 증여해왔는데, 죽은 시점이 너무 이르면 이미 증여한 재산에도 상속세가 부과되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듯하죠? 

허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이런 조작극을 가족들과 변호사만 있는 장소에서 벌이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가족들이 쿠치무츠 씨가 살아있다고 우겨도 믿어줄리가 만무하니까요. 그리고 이 화상 통화 조작극을 위해 유산 분쟁에 대해 쇼를 벌인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이럴거면 그냥 변호사들과 가족들이 함께하는 자리만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한마디로 설득력없는 이야기를 위해 이런저런 설정을 가져다붙이기는 했지만, 그리 성공적인 결과물은 아니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12/04/23

정신자살 - 도진기 : 별점 1.5점

정신자살 - 4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길영인은 아내 한다미의 가출 이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인터넷에서 '정신자살연구소'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정신을 파괴하여 자살 없는 인생을 살게 해 준다는 연구소 소장 이탁오 박사의 말에 혹한 길영인은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시술비를 지불하고 정신자살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시술 이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에 더욱 집착하며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작품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건너뛰게 되었네요. 전에 읽은 "어둠의 변호사"가 요코미조 세이시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먼저 좋았던 부분부터 이야기해보죠.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둠의 변호사"와 비교할 때 소설적인 완성도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편인 덕분이겠죠? 문체나 전개가 모두 세련되어졌습니다. 길영인이 "정신자살"이라는 독특한 말에 이끌려 이탁오 박사의 연구소에 찾아가는 과정과 정신자살 시술 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를 파헤치며 진상을 더듬어 가는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전작과 달리 고진과 이유현 형사 콤비의 캐릭터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진의 가벼운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채로웠고요.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인 트릭도(중반까지는) 괜찮은 편입니다. 4년 전 이탁오 박사가 저지른 첫 사건인 박재성 - 우호선 사건에서의 트릭은 장편에서 캐릭터 소개에 사용되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후 신재인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트릭도 복선이 잘 설계되어 있으며, 신재인 집에서의 소실 트릭도 괜찮았어요.

또 전작에서의 아쉬웠던 점 - 판사가 쓴 작품이지만 실제 법률을 이용한 부분이 별로 없다 - 를 초반 염상우의 친족상도례 작전에서 잘 써먹습니다. 때문에 여기까지는 별점 3점, 아니 4점 가까이 줄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나... 마지막 진상과 반전이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일단 다중인격이라는 길영인 사건의 진상은 현실적이지 않고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요. 1인칭 시점에서의 수기와 전개를 통해 서술 트릭 같은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한데, 뜬금없이 밝혀지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나마 두 가지 - 1년 전 프리버드의 전화와 펜션 사건에서의 길영인 전화 - 단서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리 띄엄띄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한초록이 끝까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뭐 다중인격 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다음, 펜션에서의 살인 사건에서의 과일을 이용한 트릭은 어떨까요? 그림 몇 장 본다고 과일을 가지고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럴 능력이 있다면 수박을 깎아서 사람 모양을 만들거나, 아니면 화장실 휴지를 적셔서 종이찰흙을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인간거미 합체 장면은 정말이지 나오지 않는 것만 못했습니다. 작품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설픈 에도가와 란포 흉내 내기에 불과했으니까요. 게다가 그 이유가 체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극치. 다시 병원으로 보내 둘을 나눠 놓으면 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탁오 박사도 불법 시술로 구속되었을 테고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덧붙이자면, 이탁오 박사 캐릭터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작품에 현실감을 심는 데는 오히려 장애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초, 중반부의 전개는 좋았고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도 있으며, 세 번째 장편다운 완성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특히 마지막 장면 두 페이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추리소설의 현재이자 미래를 나타내는 작품이고 시리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일본 추리소설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