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4/03/19

열세 번째 배심원 - 아시베 다쿠 / 김수현 : 별점 2점

열세 번째 배심원 - 4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다카미 료이치는, 책이 팔리지 않아 궁지에 몰린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그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의 범인으로 일부러 체포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집필해 출간한다는 이른바 “누명 계획”. 다카미는 이 계획에 따라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꾸고, 의도대로 경찰에 체포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체포 직후 상황은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자신이 연루된 사건이 단순한 위장된 범죄가 아닌, 실제 강간 살해사건이며, 결정적인 증거는 그와 피해자의 DNA가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였다.

다카미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모리에 슌사쿠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과 조작된 증거의 진실을 파헤치며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홍루몽 살인사건"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아시베 다쿠의 장편소설로,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두 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전업작가를 꿈꾸지만 실패한 다카미 료이치가 '누명 계획'이라는 이름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꾼 뒤, 가짜 살인사건을 연출해 경찰에 체포되기까지의 과정. 두 번째는 그렇게 체포된 다카미가 뜻밖에도 실제 강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며,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의 법정 투쟁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한번에 읽히는 흡입력이 있어 독자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은 법정물 특유의 긴장감을 잘 살리고 있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설정 역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충분히 이슈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아주 미세한 단서를 활용한 마지막 반전도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을 깨지는 않으며, 무엇보다 DNA 감정이라는 과학적 수사기법의 맹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추리극이나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작가가 스스로 밝힌 대로 “역본격 추리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설득력도, 완성도도 부족해 보입니다. 진상 자체는 그럴듯한 편이지만, 근간이 되는 설정이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도입되지 않은 배심원 제도가 전제된 가상의 세계관이 이 이야기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가공의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SF적 상상력에 기대는 방식으로, 마치 밀실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의 범인이 초능력자였다는 식의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접근으로는 현실 속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완성도 높은 법정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배심원 제도에 대해서 다룬 작품이라면 QED 27권의 "입증책임" 에피소드나 헨리 데커의 "복수법정" 쪽이 훨씬 더 나아요.

또한 이야기의 핵심 장치인 “누명 계획”—조혈간세포를 이식해 DNA를 바꿔치기하는 설정—은 실제 골수이식 사례에서도 확인된 적 있는 방식이라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전제하고 있는 경찰 수사의 허술함이 문제입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듯 혈액이 아닌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다른 유전자 샘플로 검사를 했더라면 바로 들통날 일이기 때문이죠. 물론 작품 속에서는 정치적 개입으로 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변호인 측에서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 사안이기에 서사의 긴장감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결말 역시 지나치게 급하게 흘러가는 해피엔딩입니다. 다카미를 다시 유죄로 만들려는 시도가 왜 실행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미요시 기요히코가 센노 마치코 살인범으로 체포된다는 전개는 작위성의 극치입니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체포가 이루어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고, 미요시 역시 혈액만 바뀌었을 뿐이라면 모발 샘플을 통해 얼마든지 DNA 감정이 가능했을 텐데, 이런 간단한 접근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단순한 해피엔딩보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활용한 보다 치밀한 반전이 있었더라면 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겁니다.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 캐릭터 자체도 아쉽습니다. 의뢰인의 결백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너무나 착한,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인물로 그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나 개성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리즈를 이끌어갈 중심 인물로서의 흡인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근미래 SF 판타지처럼 끌고 갈 요량이었다면 다른 복잡한 설명도 대충 요약하고 길이만이라도 줄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분량은 450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누명 계획"의 핵심 트릭인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한 DNA 바꿔치기라던가 "배심원 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니까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작가가 영향받은 유사 작품들을 소개하는데, 소개된 작품들이 훨씬 재미있어 보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