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존 -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
장려회 프로 장기기사 출신 쓰카다 히로시는 어느 날 어두컴컴한 폐허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곳은 "다크 존"이라는 공간이었다. 쓰카다는 다크존의 "홍왕"이 되어 17명의 병사를 이끌고 "청왕"과 7전 4선승제의 기묘한 시합을 벌이게 되는데...
다양한 장르물에서 필력을 과시해 왔던 기시 유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장르를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지 망설여지지만, "판타지 호러 게임 스릴러"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작자가 창조한 호러블한 게임이 벌어지는 내용이니까요.
일본 장기를 바탕으로 한 게임이 작품의 핵심 요소로,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설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 각 말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잡으면 내가 불러내어 사용할 수 있다.
- 시간, 적을 죽인 포인트가 모이면 승격이 가능하다.
이러한 룰과 말들의 특징을 잘 활용한 7전 4선승제의 게임 묘사만큼은 발군으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화려하게 펼쳐져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임 외의 부분은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 쓰카다에게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전개 탓이 큽니다. 동거하던 이구치를 임신시킨 것, 함께 방문한 군함도에서 그녀를 내버려 둬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하게 만든 것, 장려회에 남아있을 수 있는 기회를 건 마지막 승부에서 오쿠모토에게 진 것 모두 본인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이구치 죽음의 책임을 물어 오쿠모토를 죽인건 순전히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습니다.
그 외에 여러가지 행동들도 — 유원지에서 커플에게 시비를 건다던가, 대학 강의실에서 여교수에게 지적을 받고 쫓겨난다던가 — 쓰카다의 잘못이 없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민폐 캐릭터에요. 이 놈만 없었어도 이구치와 오쿠모토는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겁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극단적인 경쟁사회에서 누구나 무너질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글쎄요... 극단적인 경쟁사회에서 실패한다고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건 아니죠.
또 지나치게 게임 위주라는 것도 불만입니다. 작가의 또 다른 클로즈드 서클 호러 액션 스릴러 "크림슨의 미궁"은 상황에 대한 설명이 나름대로 등장하지만, 이 작품은 순수하게 쓰카다의 마음속, 죄책감과 죄악감이 불러온 연옥이라는 설정이거든요. 이럴 거면 그냥 게임에 대해서만 쓰는게 나았습니다. 불필요한 쓰카다 이야기는 왜 나왔나 싶네요. 초반부에 게임 디자이너 메카로 겐고를 비중 있게 등장시켜 뭔가 합리적인 설명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단순한 떡밥일 뿐이라는 것도 불만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더 이야기하자면, 연인 이구치가 다크 존의 모태인 "군함도"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설정이라던가 쓰카다의 과거 회상 모두 역시나 별거 없는 떡밥이라 실망스러웠어요.
또 홍왕 쓰카다는 물론, 독자에게 게임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정교한 맛이 떨어집니다. 게임을 하면서 그 내용을 하나씩 알아가는 식인데, 게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룰에 대해 명확히 숙지부터 하는 게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스타크래프트" 전성기 시절 임요환 선수의 플레이가 놀라움을 자아냈던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닛의 창의적인 활용 때문입니다. 그러한 맛은 부족해요. 이러한 점에서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깊이 고민하고 쓴 작품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작가 스스로 창조한 기묘한 게임으로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개한 솜씨는 분명 놀라운 재능이고 본받을 만한 점이지만, 게임 외의 다른 요소는 건질 게 거의 없는 작품입니다. 여태 읽은 작가 장편 중 최악인데 차라리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계를 소설로 옮기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나저나 찾아보니 출간된 지 2년도 안 되었는데 이미 절판되었더군요. 딱히 어렵게 구해볼 책은 아니지만 의외이기는 합니다. 그렇게 인기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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