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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9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10) 술병 속에 숨긴 비밀

추리 소설에서 술병은 꽤 익숙한 소품입니다. 이전에 와인병이 흉기로 사용된 작품을 소개해드리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술병은 무언가를 숨기는 역할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술병은 작은 물건을 감추기에 제법 괜찮습니다. 위스키나 코냑처럼 짙은 색 유리를 사용하는 병은 더욱 좋지요.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기 어려우니까요. 술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면 더 알아채기 쉽지 않을 테고요. 무엇보다 술병은 술을 담아두는 물건이라는 선입견이 강한 탓에, 책상이나 선반에 놓여 있어도 누군가 굳이 안을 확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인 "잃어버린 얼굴"에서는 이 점을 아주 잘 써먹습니다. 이야기 초반, 한 여성이 다세대주택 외부 계단 아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됩니다. 그녀의 곁에는 깨진 산토리 올드, 둥글고 짤막한 검은 병 때문에 '다루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위스키 병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병에서는 여성의 지문뿐 아니라 이미 살해된 남성 야기 다쓰오의 지문까지 검출됩니다. 

여성은 야기에게 선물하려고 가져간 위스키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지문이 새로 가져온 병에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그녀는 과거 야기에게 가져다준 술병을 그의 집에서 다시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연스럽게 수사에서는 왜 굳이 사건 현장에서 위스키 병을 가져가려 했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야기가 술병을 단순히 술을 담는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데이터를 작은 저장장치에 담아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그것을 위스키 병목 안쪽에 숨겨두곤 했습니다. 짙은 검은색 병이라 밖에서는 안쪽을 살펴보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했던 겁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형사 히노가 이 사실을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히노는 야기의 단골 바에서 기네스를 마시다가, 잔 속에 노른자를 넣은 ‘옐로 선셋’이라는 칵테일을 받습니다. 이렇게 검은 맥주 때문에 잔 안의 노른자가 잘 보이지 않았던 점에 착안하여, 검은 위스키 병 속에도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추리로 이어지거든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바텐더의 재치와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산토리 올드는 일본 위스키의 역사에서도 꽤 유명한 술입니다. 1940년에 처음 완성됐지만 전쟁으로 출시가 미뤄졌다가 1950년에 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둥글고 검은 병 모양 때문에 '다루마'나 '다누키'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1950~60년대에는 성공한 뒤 마시는 고급 위스키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과 함께 대중화되어 1970년대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요. 현재의 산토리 올드는 야마자키의 스패니시 오크통 원액을 키 몰트로 사용하는 블렌디드 위스키로, 강렬하고 거친 맛보다는 달콤한 향과 부드럽고 둥근 맛이 특징입니다. 지금도 특유의 둥근 검은 병을 유지한 채 판매되고 있는데, 실제 병을 보면 왜 작가가 무언가를 숨기는 장소로 이 술을 선택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병의 특징을 활용한 작품도 있지만, '술병'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작품도 있습니다. 엘러리 퀸의 "킹은 죽었다"입니다. 작품의 무대는 억만장자 킹 벤디고와 그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입니다. 킹에게 살인 예고가 전달되고, 예고된 시각이 되자 동생 유다는 자신의 방에서 권총을 발사합니다. 하지만 유다가 쏜 총에는 실탄이 들어 있지 않았고,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던 킹은 다른 방에서 실제 총탄을 맞습니다. 문제는 킹이 총을 맞은 방에서는 총도, 탄피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소품이 유다가 저택 곳곳에 숨겨둔 세공자크 V.S.O.P 코냑입니다. 피아노 현 위에서 여섯 병이 발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체육관, 수영장, 당구장 등 어디에서나 짙은 녹색 술병이 튀어나옵니다. 유다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라서, 술이 필요할 때마다 그게 어디든 자신만 알고 있는 장소에서 병을 찾아냅니다.

처음에는 괴짜 부호의 기이한 습관처럼 보이는 이 술병들은 사실 사건의 트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작품을 읽을 재미를 크게 해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만, 범행 직후 유다가 술을 찾는 장면과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과정에서 술병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V.S.O.P는 ‘Very Superior Old Pale’의 약자로, 코냑의 숙성 등급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 규정에서는 블렌딩에 사용된 가장 어린 원액이 최소 4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오래 숙성된 코냑을 뜻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20년이나 30년 이상 숙성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코냑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생산하는 브랜디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만듭니다. V.S.O.P급 코냑은 일반적으로 어린 코냑의 거친 느낌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과일 향에 바닐라와 견과류, 향신료, 오크 같은 숙성향이 더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브랜드와 숙성 기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스트레이트로 천천히 향과 맛을 즐기기에도 좋은 등급입니다.

"잃어버린 얼굴"과 "킹은 죽었다"는 시대도, 분위기도 상당히 다른 작품입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술병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누구나 술병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 자체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지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눈앞에 계속 보였는데도 의심하지 않았던 물건이 사건의 중요한 열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마술의 '미스디렉션' 같은 트릭을 활용하여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다음에 바의 선반에서 오래된 위스키 병을 보게 된다면, 라벨보다 먼저 병 안쪽이 궁금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다루마, 즉 산토리 올드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으니, 바에서 실제 병을 본다면 한 잔 주문하고 찬찬히 병 안쪽을 살펴볼까 합니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5/01

잃어버린 얼굴 - 사쿠라다 도모야 / 최고은 : 별점 3.5점

얼굴이 훼손되고 손목마저 절단된 상태의 신원 불명 사체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피해자의 정체는 전직 탐정이었던 야기 다쓰오라는게 곧바로 드러났다. 고마네에서 벌어진 다른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수사에 나선 수사계장 히노 유키히코는 이 사건이 10년 전 실종된 오누마 겐, 그리고 지역 신문에 실린 경찰의 부실 대응을 고발하는 투서와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아냈고 탁월한 추리력을 발휘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매미 돌아오다"로 좋은 인상을 심어준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 추리 수사물입니다. 

굉장히 정통적인 경찰 수사 추리물인데, 복선 회수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앞부분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보였던 지역 신문 투고, 부부 싸움 끝에 벌어진 살인 사건, 표백제를 구입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 같은 요소들이 나중에는 모두 본 사건과 직접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정말 하나도 허투루 사용된 설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이런 복선들과 이어지는 추리, 진상의 몇 가지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경찰의 부실 수사에 대한 투서 + 수상한 남자가 다이야라는 소년에게 접근했던 사건 + 투서 전 지방지에 실렸던 하야토의 시 + 다이야는 하야토의 친구였다 + 그날, 다이야는 하야토의 집에서 놀다가 나왔다 → 수상한 사람은 하야토의 존재를 시를 통해 알았고, 다이야를 하야토로 착각했다.
  • 시라카와 현장을 발견한 고다 미쓰코가 들고있던 다루마 위스키 병 + 죽은 야기가 구속 전 단골 바 바텐더에게 술을 보관해달라고 부탁 + 야기가 협박에 사용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 야기는 USB를 다루마 병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 오누마 겐이 횡령을 저질렀다 + 오누마 겐은 사채도 쓰고 있었다 + 야기에게 불륜 조사를 의뢰한 사람 중 하나가 쓰지였다 + 쓰지의 아내 가나는 오누마 겐의 직장 동료였다 → 오누마 겐은 가나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야기에게 협박당했고, 쓰지를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사소해 보이는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진상으로 정리되는 과정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수사계장 히노가 펼치는 추리의 짜임새도 좋습니다. 사소한 지점에서 이상함을 포착한 뒤, 그걸 기발한 방향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인데 신선하고 재미있어요. 대표적인게 시라카와가 살해되었을 당시 문고리가 걸려 있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는 추리입니다. 살인까지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허술했을 리 없으니 이는 임시 상황이었고 누군가 곧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추리를 전개하는데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는 앞서 나온, 수상한 여자가 표백제를 구입했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범인이 '부부' 였다는걸 드러내게 되지요.
그 외에도 고다 미쓰코가 빼돌리려고 했던 USB가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추리 등 히노의 명추리는 볼만한게 많습니다. 

오누마가 10년 전 쓰지를 살해한 뒤 그의 신분으로 바꿔치기해서 살아왔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오누마로 의심되지만 혈액형이 달랐던 신원불명의 사체 등 관련된 정보도 충실히 제공됩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장치보다는 탐문과 방문 조사,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증언을 통해 진상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묘사도 꼼꼼하여 수사물로서의 재미도 잘 살아 있고요.

다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운과 우연이 과하게 작용하는 편입니다. 사건의 발단부터가 그러합니다. 오누마를 야기가 '우연히' 발견하고 뒤를 쫓았던게 시작이었으니까요. 오누마가 '아들일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의 시를 지방지에서 읽은 것, 우에무라 교코가 오누마의 접근에 대해 투서를 보낸 것, 시라카와가 걸쇠가 걸리지 않은 야기의 집에 들어가 살해당한 것도 모두 우연입니다. 이런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요.

그리고 경찰도 예전 사진을 통해서는 바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야기가 십여 년 전에 조사했던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뭐 이건 전직 탐정의 실력이라고 쳐도, 오누마가 쓰지를 살해한 뒤에도 사건 현장 근처에서 계속 살았다는건 정말이지 말도 안됩니다. 작품 안에서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솔직히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무리한 설정이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주인공 히노의 성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누마 구미에 대한 취조 과정 등에서 엿보이는데 너무 인간적인 탓입니다. 오지랖도 너무 넓어요. 쓰레기를 쌓아두는 폭력적인 사타케의 부친 이야기는 본 줄거리와 큰 관련이 없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인간미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하드보일드스러운 사건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별로였어요. 차라리 좀 더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형사 쪽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잘 짜여진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10/13

COCKTAILS WITH PHILIP MARLOWE, SAM SPADE, AND BOGART

예전에 제가 썼던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이라는 에세이에서 추리 소설 속 칵테일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셜록 홈즈가 연재된 잡지로 영원히 기억할 "The Strand Magazine"에서 비슷하게 하드보일드 탐정들과 칵테일에 대한 칼럼이 있길래 번역해보았습니다. 수준은 엉망이고 의역도 많으니 내용 참고 정도로만 보아 주세요.
"I like liquor and women and chess and a few other things."- 필립 말로우 <<기나긴 이별>>

누아르 속 탐정의 이미지는 샘 스페이드 역의 보가트, 하루 일당을 받고 갱스터와 팜므파탈과 싸우는 하드보일드 탐정 필립 말로우 역의 로버트 미첨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영화와 배우들을 통해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가상의 탐정들 캐릭터는 그들이 선택한 술에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고요. 분홍색 빨대와 함께 제공되는 프로즌 다이키리는 없습니다.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진하면서 요란하지 않은 클래식 음료를 마셨지요. 지저분하고 어두운 술집이나 구식 호텔 바, 스테이크 하우스 옆 칵테일 라운지, 현지 펍에서요.
"어둡고 연기가 자욱한 바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음모를 꾸미고, 비밀을 밝히고, 속삭이는 고백에는 낭만적인 느와르가 있습니다."라고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 리사 웅거(Lisa Unger)는 말합니다.
레이몬드 챈들러의 탐정 필립 말로우는 열렬한 애주가였습니다. 그는 항상 사무실에 올드 포레스터 버번 한 병을 보관했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올드 포레스터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병은 3분의 1 정도 차 있었다."라고 소설 <<리틀 시스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 토비 위디컴이 쓴 <<레이몬드 챈들러를 위한 독자 가이드>>에는 챈들러 작품 속 등장 음료에 대한 목록이 실려 있습니다. <<핑거맨>>에는 바카디가, <<빅 시티 클루스>>에는 바카디와 그레나딘이 등장합니다. <<더 하이 윈도우>>에는 포 로즈 위스키가 등장하고요. <<라온트 피전>>에는 더블 깁슨이 있습니다. 이 목록에는 올드 그랜드대드 위스키와 브루클린 스카치도 포함됩니다.
칵테일 문화에 대해 말로는 영구히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김릿에 대해서였습니다. 소설 <<기나긴 이별>>에서 영국 출신이자 열렬한 애주가인 테리 레녹스는 필립 말로우에게 "진짜 김렛은 진 반, 로즈 사(社)의 라임 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는 거죠. 마티니는 비교도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뒤 말로우가 혼자 바에 갔을 때, "바텐더가 내 앞에 음료를 갖다 놓았다. 라임 주스 때문에 엷은 녹색 기미가 있는 신비한 노란 빛깔이었다. 입을 대 보니 부드러운 단맛과 날카롭게 혀를 찌르는 강한 자극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자기 잔을 들어 내 앞에 올려 보였다. 우리는 함께 마셨다. 그제서야 그녀의 음료도 똑같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라고 했지요.

김릿
진 2온스 
로즈 라임 주스 ¾온스 
얼음과 함께 쉐이커에 넣은 뒤 30초간 세게 흔든다. 칵테일 잔에 따른다.

대쉴 해밋의 사립 탐정 샘 스페이드는 위스키를 즐겨 마셨고, 해밋의 코믹한 부부 범죄 해결사 닉과 노라 찰스는 칵테일 잔을 손에 들고 있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닉 찰스가 1934년 소설 <<씬 맨>>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들은 완벽한 칵테일을 만드는 전문가였습니다. 닉은 "중요한 것은 리듬입니다. 항상 쉐이킹에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맨해튼에서는 폭스트롯 음악에 맞춰, 브롱크스에서는 투스텝 음악에 맞춰 흔들지만 드라이 마티니는 항상 왈츠 음악에 맞춰 흔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작가 제임스 크럼리의 미스터리 소설은 술집과 맥주, 초라한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잘못된 사건>>에서 사립 탐정 밀로 드라고비치는 음주에 대해 긴 독백을 합니다. "아들아,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독선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니 절대 믿지 마라. 그는 항상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들 중 일부는 선한 사람이지만 선의 이름으로 세상의 대부분의 고통을 야기한다. 그들은 심판자이자 간섭자야. 그리고 아들아,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남자는 절대 믿지 마라. 그들은 보통 겁쟁이나 바보, 그렇지 않으면 비열하고 폭력적인 무언가를 내면 깊숙이 두려워하고 있는 놈이기 때문이야. 자신을 두려워하는 남자는 믿을 수 없단다. 하지만 가끔 변기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는 믿을 수 있다. 그는 겸손과 인간 본연의 어리석음,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야. 남자가 더러운 변기에 내장을 내밀 때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

사람들이 미스터리를 쓰는 한, 술을 좋아하는 탐정은 계속 존재할겁니다. 사립 탐정은 힘든 직업입니까요. 긴 근무 시간과 낮은 급여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은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가끔은 미키 스필레인의 소설 속 주인공 마이크 해머처럼 술집에 가서 주문을 해 봅시다. "더블 버번 한 잔, 병은 놔두게."

2023/10/08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점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마술사면서 사기, 거짓말, 위조도 서슴치 않는 안티 히어로 '블랙 쇼맨' 다케시 삼촌이 활약하는 단편집. 전작은 묵직한 장편 추리물이었던 반면, 이번 작품들은 가벼운 단편 범죄 드라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웠습니다. 핵심 매력 포인트였던 다케시의 안티 히어로적인 속성이 거의 사라진 탓이 큽니다. 손님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하는, '정의의 바텐더'로 캐릭터가 변해 버렸더라고요. 사건들도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결말도 거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칵테일이 주요 소재로 쓰이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만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속작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기대는 되지 않는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맨션의 여자>>
마요는 손님 우에마쓰 가즈미와의 미팅 장소로 다케시 삼촌의 바 '트랩핸드'를 이용하게 되었다. 다케시는 거짓말과 사기로 가즈미 남편의 지인인 척 했다.
어느정도 마요, 다케시와 친해진 가즈미는 다케시의 바에서 오래전 연이 끊긴 오빠 유사쿠와 만나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흔쾌히 허락한 다케시와 마요는 도청장치로 유사쿠가 가즈미가 가짜라고 협박하는걸 들었다. 다케시는 간단한 조사와 추리로 가즈미는 가짜가 맞지만 진짜와 협력했을거라 생각하고, DNA 검사를 요구하는 유사쿠를 가짜 사진으로 물리친 뒤 가즈미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나에는 가즈미의 부탁으로 역할을 수행했고, 그 이유는 췌장암으로 곧 죽게 되는데 유산이 자기에게 끔찍한 짓을 한 오빠에게 상속되는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케시가 사기꾼으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가짜 가즈미의 정체를 꿰뚫고, 조작한 사진으로 유사쿠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보이는 전반부, 그리고 나나에의 입을 통해 가짜 가즈미가 된 이유가 설명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탐정(?)의 활약과 범인(?)의 고백이 1, 2부 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셜록 홈즈와 같은 고전 추리물을 연상케합니다. 

다케시의 DNA 검사 요구를 퇴치하기 위해, 유사쿠는 아빠의 블륜으로, 가즈미는 엄마의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조작한건 기발했는데, 그 외에는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이 없습니다. 나나에와 가즈미가 꼭 닮았다는 우연에 모든게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이런 우연보다는 가즈미의 재산을 이용하여 나나에에게 성형 수술을 시켜주고, 회복 기간 동안 바꿔치기를 위한 학습을 했다고 풀어가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추리, 범죄물이라기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는 점도 아쉽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위기의 여자>>
나미는 만남 어플로 만난 기요카와로부터 그가 가지고 있다는 하와이 별장 이야기를 듣고, 함께 트랩핸드에 방문해서 칵테일 '블루 하와이'를 마셨다. 연이어 자기 재산을 자랑하던 기요카와는 다케시의 칵테일 한 잔을 더 마신 뒤 미친듯이 졸려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알고보니 기요카와는 어플로 만난 여자에게 재신이 많다는 거짓말로 환심을 산 뒤, 수면제를 먹인 뒤 몹쓸 짓을 하는 악당이었습니다. 이를 꿰뚫어 본 다케시가 술잔을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이 과정에서 칵테일 '블루 하와이'가 트릭의 주요 소재로 사용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면 유도제가 범죄에 악용되는걸 막기 위해 물에 녹으면 파랗게 변하게 만들었는데 (일본 이야기겠지요?), 그걸 숨기기 위해 원래 색이 파란 블루 하와이를 선택했다는 아이디어가 괜찮았거든요. 바텐더 다케시에게도 어울리는 소재였고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후속작이 나온다면 추가되어도 좋을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다케시가 기요카와의 수작을 눈치채고 경고를 하기 위해 '비트윈더시트'를 대접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재료만 듣고 칵테일 이름을 떠올리고, 이게 '경고'라고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까요. 또 같은 재료라도 비율에 따라 여러 결과물이 나오는게 칵테일이라서, 경고의 의미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뭐, 이 모든게 다케시 삼촌의 억지라면 할 말이 없지만요.

그래도 나름 트릭도 사용되었고, 다케시의 활약도 빛나며 기승전결도 깔끔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환상의 여자>>
유즈키는 치과의사이자 재즈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도모야와 불륜 관계였다. 그러나 도모야갸 교통사고로 죽은 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는 절친 야요이와 함께 트랩핸드를 찾은 유즈키는 도모야가 과거 요코스카에서 연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모야의 과거를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코스카에서 도모야가 '딸'이라는 여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걸 알아내는데....

표제작. 도모야가 딸과 함께 보냈던 과거는 모두 조작으로, 유즈키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려는 친구 야요이의 계획이었다는 내용.

불륜녀인 친구를 위해 본처를 설득하기까지 한 친구 야요이의 엄청난 노력은 절절이 전해집니다만, 이런 계획이 유즈키의 새로운 시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차라리 요코스카에서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조작해서 정나미가 확 떨어지게 했더라면 모를까요. 불륜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소재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도 없고 알멩이도 없는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와 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022/04/17

죽음의 한가운데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1.5점

 

죽음의 한가운데 - 4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튜 스커더는 경찰 제리 브로드필드의 의뢰로 창녀 포샤 카가 왜 그를 고소했는지 조사에 나섰다. 그녀는 제리가 매주 100달러를 내 놓으라며 협박했다고 주장했지만, 제리는 자기가 경찰 내 부패 사건에 대해 특별 검사와 협조하고 있는 탓에 함정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튜가 포샤를 만난 다음날, 제리는 포샤 살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은신처에서 포샤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는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리는 필사적으로 매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매튜는 특유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수사를 맡는데...

얼마전 읽었던 "아버지들의 죄"에 이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본인 스스로 누구보다 부패한 경찰이면서 제발로 특별 검사를 찾아가 경찰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알린 뻔뻔한 허영덩어리 제리 브로드필드 캐릭터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악당인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니컬하게 품위와 스타일을 추구하는게 나름 재치가 넘쳐서 감탄했어요. 구치소에 수감될 때 빼앗길게 뻔한 넥타이를 일부러 매고 갔던 것 처럼요. 그는 풀려날걸 확신하며 그걸 매고 갔던 겁니다. 그리고 나올 때 넥타이를 돌려주면,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넥타이를 매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이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건질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를 들어 포샤가 처음에 전화를 건게 하디스티였다고 추리했던건 그냥 떠본 것에 불과합니다. 이걸로 사건이 급진전되는데, 이를 "그냥 한번 떠본 거군요" 로 퉁치고 넘어가는건 반칙입니다. 매튜 스커더가 알고 있는, 동성애자들이 찾는 술집 신시아를 제리 브로드필드가 자주 찾았다는 것도 우연에 불과했고요. 바텐더 케니로부터 포사 카가 죽기 직전,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증언을 한 것도 추리와는 무관한, 운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브로드필드의 이상 행동 - 제 발로 검사를 찾아가 경찰이 부패했다는걸 알린 - 과 포샤 카가 살해당한 핵심 동기인 '책'에 대해서 너무 늦게 언급되는 것도 공정해 보이지 않습니다. 더글러스는 브로드필드의 증언을 바탕으로 '책'을 쓸 예정이었고,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포샤가 먼저 제안했었다는건 굉장히 중요한 증언인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더글러스의 행동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명확한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범인이 누군지 안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육감 덕분이다 어쩌구 하는건 작품을 추리 소설로 보기 힘들게 만듭니다.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첫 번째 범행이 제리 브로드필드에게 누명을 씌우려던게 아니라, 애당초 포샤 카가 진짜 목적이었다는 반전은 그럴싸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특별검사 프레자니언의 부하 클로드가 진범이었다는건 뜬금없습니다. 매튜가 클로드가 범인이라며 댄 근거는 그가 제리로부터 포샤 카가 고객 명단을 검사에게 넘기고 있었다는걸 들었다는 것, 그리고 클로드도 포샤 카의 고객이었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모두 마지막 추리쇼 이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또 이 논리라면 포샤 카의 고객은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 클로드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해요. 

작가 더글러스 퍼맨을 살해한 두 번째 범행은 더 기가 찹니다. 퍼맨이 포샤로부터 클로드의 이름을 입수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즉, 이 범행은 작중에서 동기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퍼맨이 위험을 어떻게 알고 매튜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했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게다가 제리가 수감된 상태에서 퍼맨을 살해하는건 정말 머저리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아울러 매튜 스커더가 쓰레기로 등장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리의 부패와 문란함을 지적하지만 그 역시 제리의 아내와 곧바로 바람을 피웠으니 누가 누구를 탓한단 말입니까? "오늘은 지금까지 그의 의자에 앉아서 그의 위스키를 마시고, 그의 돈을 받고, 그의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다."라니,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그가 관계를 맺는 창녀 일레인은 그가 경찰이었을 때 경찰이었기 때문에 관계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하고요. 이런 개막장 행태는 살인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정의관, 그리고 보수를 받으면 십일조를 내는 정도로는 합리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돕고 사는 그런 세태를 그리고자 했던게 목적일 수는 있겠지만, 영 볼품은 나지 않더군요.

그나마 브로드필드가 특별 검사 프레자니언 전에 연방검사 하디스티를 찾아갔었다는 말을 통해, 경찰 부패는 특별 검사의 일인데 연방 검사를 찾아간건 이상하다고 추리해내는건 괜찮았습니다. 미국 경찰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머나먼 한국의 일반 추리 독자가 보기에는 꽤 괜찮은 착안점이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장점은 극히 일부였을 뿐으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후 시리즈가 계속될 수 있었던게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었는데, 다음 작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건지 조금 궁금해지기는 하네요. 문제는 더 읽어볼 의욕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지만요.

2022/04/02

아버지들의 죄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점

아버지들의 죄 - 4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일 해니포드는 매튜 스커더에게 딸 웬디가 살해당한 사건 조사를 의뢰했다. 3년 전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두절된 딸이 왜 죽음을 맞았는지를 알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매튜는 웬디와 웬디의 룸메이트였으며, 현장 근처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했던 리처드의 과거를 파헤치는데....

1976년에 발표되었었던,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제 1작입니다. 대표작 "800만가지 죽는 방법"보다 무려 10년 전 이야기지요. 

시기가 이른 탓인지 낯선 설정이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인건 매튜 스커더가 술을 엄청나게 마신다는 점입니다. 술 때문에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들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서 자책하는 느낌은 없어요. 제 3자 입장에서 건조하고 냉정하게, 흡사 의뢰받은 사건을 다룰 때 처럼 본인 사건도 다루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방관자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창녀 일레인이 아니라 바텐더 트리나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모습도 새로왔고요.

그런데 내용은 무려 19편의 후속 시리즈가 이어진 작품답지 않습니다. 별로 건질게 없거든요. 일종의 스포일러인 제목부터가 문제입니다. 작 중에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모두 세 명 - 웬디의 의붓아버지 케일 해니포드와 이름도 모르는 웬디의 친아버지, 그리고 리처드의 아버지 마틴 밴터폴 목사 - 입니다. 이 중 웬디의 친아버지는 6.25 전쟁에서 죽었는데, 유부남이었던 주제에 웬디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도망갔던 쓰레기지요. 그 탓에 웬디는 아빠뻘 유부남에게 끌리는 비정상적인 성적 기호를 갖게 되었고, 결국 중년 남자들과 관계한 뒤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딸을 창녀로 만든 죄를 지은 셈입니다. 마틴 밴터폴 목사는 한술 더 뜹니다. 본인 스스로 웬디와 관계를 맺은 뒤 이를 자책하다가 그녀를 죽이고, 본인 아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죽게 만든 두말할 것 없는 죄인이니까요.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할 친아버지들이 딸, 아들을 파멸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건, 베트남 전쟁의 패전과 오일 쇼크를 불러와 국민들을 고통받게 만들었던 미국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를 상징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나마 착한 사람이 웬디의 의붓아빠 케일 해니포드였다는게 조금 의외였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의붓아빠의 성폭행이 벌어지는게 다반사였는데 말이지요. 케일 해니포드는 다소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절대 선을 넘지 않았고, 오히려 웬디가 왜 죽었는지 알기 위한 조사를 의뢰하여 죄인을 처벌하게 만드는, '죄를 묻는 아버지' 쪽이라는게 새로왔습니다. 이 역시 시대상으로 보자면,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기 시작한 당시 분위기와 겹쳐지는 느낌이에요.

제목처럼 이야기도 간단명료해서 모든건 쉽고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이 역시 먹고 살기 힘들었던 당시, 머리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읽을거리로 소구되기 위해서라 짐작되네요. 매튜 스커더의 수사 과정도 아주 단순해요. 수사라 해 봤자 관계자를 만나 증언을 얻는게 전부이며, 이 모든 과정은 일반인 이상, 경찰 이하라는 매튜 스커더 수준에 딱 맞는 정도라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플하게 끌고나간 탓일까요? 등장 인물 중 범인역을 수행할 인물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틴 벤터폴 목사가 범인이라는 결말은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그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 그리고 그가 웬디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걸 추리해낼 만한 증거가 전무했던 탓입니다. 단지 목사가 봄에 웬디를 만났었다, 웬디를 사악한 마녀로 칭하며 섹스를 무기로 삼는걸 경계했다, 재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는게 전부인데, 이를 통해 봄에 웬디의 유혹에 넘어간 뒤, 관계를 지속하다가 죽였다고 추리하는건 비약이 심해도 너무 심했습니다. 살인을 결심한 이유, 동기도 설명이 부족했고요. 

또 매튜 스커더가 강제로 목사가 자살하게 만든다는 결말은 전혀 그답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매튜 스커더 본인도 죄많은 존재입니다. 그가 누군가를 심판한다는건 상상하기 힘듭니다. 진실을 밝히고 사람들이 평가하도록 만들면 모를까요. 대체 누가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단 말입니까? 매튜 스커더에게는 어설픈 자경단 역할보다는 냉정한 관찰자가 더 어울립니다. "더티 해리"가 아니라요. 당시 사회 분위기가 악에 대한 무조건적인 심판을 바랬다 하더라도, 아무리 봐도 무리수였습니다.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폐기되어 버린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매튜 스커더에 협박에 못이겨 목사가 자살을 택한 것도 확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매튜의 중상에 무너져버린 꼴인데,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 아들이 살고 있는 방에 아버지 흔적이 남는건 당연하니까요.

그나마 중간에 잠깐 등장하는 매튜 스커더의 일종의 메소드 추리법(?) 정도만 인상적입니다. 그는 웬디와 리처드가 함께 살던 방에 잠입해서, 그들처럼 직접 체험해보고 느껴본 뒤 -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 방 저 방에 다니면서 의자에 앉았다가 벽에 기대기도 하면서, 그곳에 살았던 두 사람의 본질과 접해 보려고 애를 썼다." - 그들 관계에 대해 고민하다가 웬디와 리처드가 섹스가 아닌, 사랑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완벽한 커플이었다는걸 알아내거든요. 돈도 없고, 대단한 과학 수사 도구도 방법도 없는 매튜 스커더에게 정말 딱 맞는 추리법이었어요. 후속작에서 이를 잘 계승했더라면 추리 소설사에 한 획을 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어지지 못한게 조금 아쉽네요. 또 이런 수사 과정을 통해 리처드가 진범이 아니라는게 자연스럽게, 합리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좋았습니다. 리처드는 동성애자인데다가, 웬디와 서로 사랑하고 있었고 동거하고 있었으니 구태여 죽여가면서 섹스를 강제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나기도 했고요. 시리즈의 팬으로 매튜 스커더의 시작을 알고 싶으신 분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1/11/28

서술트릭의 모든 것 - 니타도리 케이 / 김은모 : 별점 1.5점

서술트릭의 모든 것 - 4점
니타도리 케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서점의 명탐정"의 작가 니타도리 케이의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간단하게 "서술트릭 단편집"이네요.

처음에는 서술트릭을 쓴 작품들을 모아놓고, 트릭들을 분석해 놓은 책일거라 생각했는데 단편집이라서 의외였습니다. 서술트릭은 작가가 독자를 속이는게 핵심인데,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모두 서술트릭물이다! 라고 서두에서 알려주는 것도 독특했고요. 한 마디로 "속일테니 맞춰봐라!"라는 마술사의 마술 공연같은 발상이었달까요? 독특하면서도 신선했고, 그 패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품들 수준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서술 트릭을 사용하려고 무리수를 둔 작품들이 많은 탓도 크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만화적이고 과장된 탐정 캐릭터 벳시의 존재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뻥 뚫어주는 신" 

주식회사 세븐티즈의 2층 화장실 변기가 막혀 물이 넘쳤었는데, 업자를 부르기 전에 뚫렸고 바닥도 깨끗하게 청소된 채 발견되었다. 누가 몰래 이런 기특한 짓을 하였을까? 궁금해하던 직원들에게, 지나가던 프리랜서 기자 벳시가 난입해 사건을 해결한다.

한 명을 제외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70세가 넘은 노인들이라는게 서술트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내용에서 설득력이 거의 전무한 탓입니다. 막힌 변기를 뚫고 바닥 청소를 하는걸 몰래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것도 1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2층 화장실 창문으로 몰래 기어 올라가면서까지 말이죠. 때문에 이런 무리한 활약은 노인인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리였고, 그래서 유일한 여고생인 아르바이트 우미짱이 범인이었다! 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어요. 서술 트릭은 중요하게 사용되지도 못한 셈이지요. 화장실 매니아 벳시는 억지를 넘어선, 만화같은 존재라 더 와닿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등을 맞댄 연인" 

호리키 히카루는 히라마쓰 시오리가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을 본 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오리도 히카루의 다정한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똑같은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명 다 서로에게 다가갈 기회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와중에, 시오리가 속해 있던 사진부에서, 암실 사진 확대기 필터가 0호로 바꿔치기된 사건이 일어났다. 유력한 용의자는 사진부 부장의 연인으로 부장과 싸운 뒤, 부장에게 복수심을 품었을 마쓰모토였다. 그러나 그녀는 범행 시각에 사진부와는 반대쪽에 있는 도서관 앞에서 호리키 히카루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호리키 히카루와 히라마쓰 시오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각자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를 시점을 바꿔가며 전개하는 청춘 연애물에서 급작스럽게 일상계 추리물로 전환되는 작품입니다. 

청춘 연애물로는 좋습니다. 두 청춘의 감정이 풋풋하면서도 귀엽게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트릭도 깔끔합니다. 서술 트릭의 핵심은, 호리키 히카루가 마쓰모토라고 생각했단건, 사실은 히라마쓰 시오리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쓰모토의 알리바이는 없어지고, 그녀가 범인이라는게 밝혀지게 되지요. 호리키 히카루가 시오리를 마쓰모토로 오해하게 된 계기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서술 트릭을 위한 억지도 눈에 뜨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벳시'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인물을 끼워넣은게 문제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상계 추리물에 갑자기 만화 주인공이 등장한 느낌이거든요.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묘사와 행동은 유치할 정도였습니다. 벳시를 등장시켜 전체을 연작 단편 시리즈로 묶으려는 어리석은 노력을 하느니, 차라리 독립된 단편 작품으로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을 잘못 알았다는건 바로 드러났을테 어차피 탐정이 필요하지도 않으니까요. 오해의 원인은 호리키 히카루의 여동생 소라나가 등장해서 설명해주면 되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서술트릭이 사용된 완벽한 청춘 연애 일상계 추리물이 될 수 있었는데, 벳시의 존재가 오점을 남겨 아쉽습니다.

"갇힌 세 사람과 두 사람"

강도단의 일원 아담, 해밀턴, 윌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세 명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샘슨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장에 있던 일본인 두 명은 꽁꽁 묶어 놓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서술 트릭은 강도단이 묶어 놓은 일본인 2명이 벳시와 조수 우미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둘은 강도단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왔던 거지요. 처음부터 미국을 무대로, 미국인 강도단이 나와서 뭔가 싶더라고요. 너무 비현실적이었으니까요. 진상도 역시나였고요. 왜 일본을 무대로, 일본인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었을지 의문입니다. 독자를 속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속일 수도 있다는걸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을까요?

서술트릭을 사용한 단편이라는 목적에는 충실했고, 강도단이 서로를 범인이라고 단정지으며 죽이는 과정의 추리는 제법 볼만했지만 작위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별 생각없이 산 책의 결말"

벳시가 바텐더로 일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잡담을 나누다가, 최근에 읽었던 책 속 트릭을 풀어내는 퀴즈를 내었다. 형사 사에지마 시리즈로, 산에서 낚시를 하던 네기시 기요시가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나'와 벳시의 잡담 이후, 곧바로 '형사 사에지마 시리즈' 이야기가 이어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나 착하고 성실했던 네기시 기요시가 살해당했던 이유는, 단골 스낵바에서 다른 단골 아라이에게 억지로 술을 권해서 먹였기 때문입니다. 아라이는 술만 먹으면 사람이 변해 폭력적이 되는 탓에, 오래 금주를 해 왔지만 네기시의 권유로 실패하고 말았던 거지요. 아라이의 음주 폭력으로 가족은 지옥같은 상황에 처했고, 그래서 둘째 아들 데쓰야가 복수를 하게 된 겁니다. 사용된 서술 트릭은 시점을 착각하게 만든 것이고요. 소설은 오래 전, 80년대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서술 트릭은 사에지마 사건의 트릭을 풀어내는 것과는 무관했다는 겁니다. 데쓰야의 알리바이 - 범행 시각에 친구 누마타가 전화를 받았다 - 는 그 시간에 집 근처에서 있었던 선거 연설 방송을 다른 동네에서 미리 녹음해 두고, 친구에게 전화할 때 그 녹음을 틀었다는 간단한 조작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휴대용 플레이어만 있다면 어느 시대에나 가능했을 이야기입니다.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는 묘사로 1985년 단기간에 생산되었던 NTT의 숄더백 핸드폰 '숄더폰'을 썼다고 추리하는건 완전 억지스러웠어요.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도 녹음했다가 틀면 되잖아요? 사에지마 소설 속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 작품이 80년대 작품이라는걸 밝히는건 재미있었지만, 서술 트릭을 사용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작품의 시점이 다를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또 벳시 씨는 책이 오래 전 발표되었을 수도 있다는걸, 그동안 있었던 동네 서점 이벤트로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공정함도 부족한 편이고요.

그냥 사에지마 시리즈 단독으로만 보아도, 녹음기 트릭이 잘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트릭이 없었어도 범인 체포는 어렵지 않았을 거에요. 매주 일요일 네기시를 감시했던 데쓰야의 행동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면 바로 체포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아라이 가족에 대해 수사하고, 아라이 이사무의 주폭 행위를 추리해 내는 등의 디테일은 괜찮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많이 사용된 편이지만, 핵심 서술 트릭은 무의미했고, 이야기의 설득력도 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빈궁장의 괴사건" 

너무나도 저렴한 방세 덕분에 외국인 유학생과 고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유명장'은 흡사 교도소나 폐가같은 상태로 '유령장' 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어느날, 세입자 중 한 명인 중국인 리의 귀중한 '하이셴'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사건 발생 시간에 있었던 유령장 세입자가 분명했다. 일본인 유아사, 세네갈인 응가보, 태국인 마시, 한국인 최선배였다...

태국인이 두 명이었다는게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시 오카를 닮은 라챠시챠나논미챠시브와실라, 잘생기고 양복을 입는 '챵' 라챠시챠논이챠시브와실라 두명이었던 거지요. 챵은 왼손잡이인데, 범인은 오른손잡이라는게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둘이 '마시 오카' 한 명으로 오인된 탓에 그가 범인이 아닌 것 처럼 착각하게 만든 겁니다. 하지만 실제 소설 속 사람들에게는 명백히 두 명이라서, 이 서술 트릭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긴 태국인 이름의 글자 한 자를 바꿔쳐서 독자를 속이려고 했던건 너무 조잡해 보였어요.

마시 오카가 벽 시계 위에 가짜 시계를 붙여서 응가보가 시간을 착각하게 만든 장치 트릭이 더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장치 트릭은 나쁘지 않고, 나름 설득력은 있었던 만큼, 억지로 서술 트릭을 넣으려고 몸부림 치는 것 보다는, 이 장치 트릭 중심으로 풀어나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벳시의 등장도 유치하고 만화적이었던건 마찬가지라, 당연히 빼는게 더 나았을 테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서술트릭 연작을 만들기 위해 잃은게 더 많았던 작품입니다. '하이셴'이 결국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등 유쾌한 분위기만큼은 나쁘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아쉽네요.

"일본을 짊어진 고케시 인형" 

벳시 탐정 사무소에 정계 여당의 거물 다와라다 고사부로가 찾아왔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걸고, 일본 내 유명 동상에 장난을 치는 걸로 유명해진 헤드헌터를 붙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벳시는 헤드헌터의 다음 목표물이 미야기현 센다이에 있는 세계 최대 고케시 오타네 짱이라는걸 알아냈고, 우미와 함께 현장으로 향해 잠복했다. 그러나 잠복에도 불구하고 오타네 짱도 헤드헌터의 장난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단편집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수록작 중 최악이었어요. 헤드헌터의 장난은 정부에 비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정치단체 모션을 몰락시키기 위한 음모 - 모션의 리더가 연설하는 장소에서 헤드헌터가 장난을 친 뒤, 모션의 리더가 헤드헌터라고 음해할 목적 - 였다는 발상부터가 유치했고, 등장하는 벳시 씨가 전부 5명이었다는 서술 트릭도 한 번 속여보겠다!는 의도가 지나쳤어요.

뭐 이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코케스 오타네 짱 얼굴에 낙서를 한 핵심 트릭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벳시 씨 5명이 잽싸게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서, 도장을 찍듯 낙서를 완성했다는건데 할 말을 잃게 만드네요. 이게 가능할거라고, 그것도 짧은 시간에 가능할거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습니다. 3명 정도였다면 모르겠지만요. 오타네 짱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타네 짱으로 향하는 입구에만 카메라를 설치한 비상식적인 행동도 나중에나 트릭 때문이었다고 설명되지, 실제 잠복할 때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이전 이야기에 등장했던 벳시 씨는 모두 다른 사람이었고, 등장했던 우미 짱도 이전 이야기에 전부 등장했다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도, 작품 내용이나 추리하고는 무관했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이라,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 후기" 

간단한 소설과 함께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설은 딱히 언급할 수준이 아니었고, 앞서의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에 모든 작품을 풀기 위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며 공개하는데,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빈궁장의 괴사건"에서 등장인물 이름을 메모해보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열쇠는 없더군요. 앞서 말씀드렸듯 이름을 가지고 장난친 조잡한 트릭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2020/08/01

현란한 유리 (絢爛たる流離) - 마쓰모토 세이초 / 이규원 : 별점 2점

현란한 유리 - 4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의 소유자들이 온갖 범죄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마쓰모토 세이초의 연작 소설입니다. 1963년에 연재된 작품을 모아서 출간했다니 비교적 초기작이지요. 그래서인지 대담한 시도와 아이디어들이 눈에 띕니다. '연작'이라는 구성과 12편 중 8편의 작품이 두 편 씩 이어지는 구조라는 점, '트릭'이 괜찮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시대별로 상세한 배경 설정과 묘사도 돋보였습니다. 고물이 돈이 되는 상황에서 불량품 철사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티켓" 에서는 시대 상황이 범죄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작가의 조선 주둔군 시절을 바탕으로 한 "백제의 풀"과 "도망"은 경험없이는 쓸 수 없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고요.

그러나 이야기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아쉽습니다. 구태여 연작으로 엮을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들도 많았기에, 12편의 이야기 수를 좀 더 줄이고, 다이아몬드 반지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더 좋있을 겁니다.

단편들 전체를 평균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과 비교하면 많이 처집니다. 이 보다는 저도 몇 편 소개해드렸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려 12편이나 되니 리뷰도 큰일이네요. 읽다 지치실듯.

"토속 인형" 

기타큐슈의 광산 재벌인 야쓰오 광업의 데릴사위 다다오와 딸 다에코 부부는 별거 상태로 지내다가, 불황으로 야쓰오 광업이 무너진 뒤 다다오는 취미인 토속 인형 수집품과 함께 도쿄의 다에코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에코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이 많이 님아 있었던 덕분에 화려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에코가 취미로 배우는 '노' 관련된 사범들이 집에 드나들면서 다에코와 어울리는걸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던 다다오가 병으로 사망한 얼마 뒤, 다에코는 살인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다다오 유골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지만, 다행히 변호사 기타야마의 활약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쇼와 초기 기타 큐슈 광산 재벌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지만, 정말 남의 눈과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듯한 완벽한 3인칭 묘사로 진행되는 부부의 관계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변호인의 변론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토속 인형 수집품에 독살스러울 정도로 도드라지는 빨간색 인형들이 있었는데 이 빨간색은 비소가 함유되어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인형 수집품을 다다오와 함께 화장해서 비소가 검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과학 수사로는 비소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다오의 유해인지, 인형 때문인지)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겠지만, 1930년에는 불가능했을테니 무죄 판결을 받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부부였는데, 금융적인 부분도 다에코가 전권을 쥐고 있고 다다오의 죽음으로 별로 얻어서 다에코가 살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를 법정에서 밝혀 무죄 판결을 끌어내기 때문에 괜찮은 법정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다다오 살해가 급작스럽게, 뜬금없이 일어난다는 점, 특별한 살해 동기가 없다는건 분명한 약점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살의를 품고 비소를 먹였는데, 그 이유가 불분명하니 답답하더군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인의 쓰즈미" 

1편에서 활약한 기타야마 변호사가 다에코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다에코의 노 사범 중 한명인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였다. 그는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흉기인 비수에 강습용 쓰즈미의 끈이 감겨 있었기 때문에 범인으로 몰렸다...

비수가 여자 힘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꽂혀 있었고, 다에코는 흰 기모노를 입고 있었지만 혈흔이 전혀 묻어있지 않아서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결국 다에코가 범인이었다는게 밝혀진다는 이야기지요.

트릭은 간단합니다. 빨래용 대나무 장대 끝에 비수를 묶은 뒤 먼 곳에서 찌른거에요. 지렛대 효과로 더욱 강한 힘이 가해져 깊숙이 찔렀고, 먼 거리라서 흰 기모노에 피가 튀지 않았지요. 트릭의 밑밥을 깔기 위해 다에코가 몇일 전부터 이웃집에 '노' 강습을 권하러 갔다던가, 그날따라 계절과는 맞지 않는 흰 기모노를 입었다던가 하는 사전 준비도 설득력있게 묘사되며,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간단한 조작 - 단도에 쓰즈미 끈을 감아 둔 - 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범행이 작품에서처럼 성공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뼈 등이 있어서 한 방에 가슴을 찌르는건 먼 곳에서는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또 다에코가 범행을 자백한다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버려진 빨래용 대나무 장대에 경찰이 주목한 정도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살해 동기, 즉 남편을 살해한건 다에코가 맞으며 기타야마는 이를 가지고 다에코를 협박했기에 살해했다는 동기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다에코가 다시 처벌 받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사부재리에 대해서는 기타야마가 다에코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동기 없이도 가까운 남자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다에코라는 악녀의 최후를 그렸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추리적으로나 내용면으로나 특별히 건질건 없습니다.

"백제의 풀"

일제 강점기 막판, 전라북도 금읍에서 일하던 일본인 이하라는 아내를 두고 군에 소집되었다. 부대는 집과 가까왔지만 이등병 신분으로 외출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부대의 고급 참모 야나기하라 소좌가 자신의 사택에 하숙한다는걸 알고 난 뒤, 이하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 날, 모악산 기슭 금산사 경내에서 야나기하라 고급참모가 단도같은 흉기로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조선이 무대라서 반가왔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조선 주둔군 소속 일본군인들이며, 살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백제 고찰 금산사거든요. 죽은 야나기하라가 오른손으로 풀 한 줌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도 "백제의 풀"이지요. 전쟁 말기 조선 정읍이라는 지방에 대한 여러가지 상세한 묘사도 돋보였는데 작가가 전쟁 말기, 조선 정읍에서 주둔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티가 물씬 납니다. 내지보다 조선이 안전하다, 미국도 조선은 독립시켜 장차 우방으로 확보해 두고 싶을테니 폭격하지 않을거라는 이하라의 식견이라던가, 불령선인이 범인일 수 있다는 등 디테일들도 좋았고요.

추리적으로도 군인으로 위장한다면 만사형통이었을거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위한 간단한 변장 트릭과 이 트릭이 결국 단서가 된다는 전개 모두 괜찮았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야나기하라 소좌는 사건 당일 누군가 다른 군인과 함께 걸어서 어딘가(금산사) 로 이동하는게 목격되었습니다. 그래서 범인은 정체 불명의 군인이라 여겨졌고요. 그러나 유이치와 친분이 있던 보급 담당자 다카스기의 추리는 달랐습니다. 유이치가 새 군복을 부탁해서 몰래 새 군복 한 벌을 주었지만, 유이치가 새 군복을 결국 입지 않았던걸 단서였어요. 유이치는 새 군복을 어디에 썼을까? 정답은 유이치는 새 군복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몰래 부대를 나가, 군복을 입고 군인으로 위장한 아내와 밀회를 즐겼는데, 그만 야나기하라에게 발각되어 버린거죠. 그래서 아내가 이를 가지고 협박하던 야나기하라를 살해했다는 겁니다. 이 추리가 정답이었는지, 결국 유이치는 사지 오키나와로 전속되어 버린다는게 이야기의 결말이고요. 이 범행을 알아챈 윗 선의 누군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하라 부인이 군인으로 변장해서 금산사까지 이동해 밀회를 즐길 이유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집 근처 어딘가, 혹은 부대 근처 어딘가에서 밀회를 하는게 당연한 발상 아닐까요? 이하라의 장인은 결혼 선물로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줄 정도의 재력이 있는 인물인데, 이 정도 인물의 후광으로도 근처에 있는 아내를 보러가는게 과연 불가능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밀회를 알아낸 뒤, 야나기하라 역시 부인을 절로 꾀어내어 즐기려다가 살해당했을거라는 추리도 이상합니다. 야나기하라는 이하라 부인 집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구태여 밤에 외출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엇보다도 전시에 그나마 편한 조선에 있으면서 아내와 밀회를 즐기려고 몰래 부대를 빠져나간 병사는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 

전라북도 금읍에 위치한 남조선 연안 방비 사단에 새로 부임한 시노하라 겐사쿠 경리 대위는 사택 부인들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고고학 전공자라서 휴일에 금산사 경내를 산책하던 중, 사택 부인 중 한 명인 히사코를 만나 일종의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금산사를 더 자주 찾다가 하숙집 주인인 야마다 기사장, 금읍 최고의 부자 일본인인 속물 오이시 등만 차례로 만난 뒤, 이들이 왜 절에 왔는지 의문을 품게 되는데...

전편에 이어지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최후를 그린 작품입니다. 수수께끼는 야마다 기사장과 오이시가 왜 금산사를 찾는지? 인데, 이는 추리가 아닌 시노하라 대위의 미행을 통해 드러납니다. 야마다 기사장은 절에 초단파 수신기를 숨겨두고 몰래 전황을 들어왔던 겁니다. 기사장은 일본이 망하면 조선인이 봉기할테니 빼돌린 금을 가지고 바로 달아날 생각이었거든요. 오이시 역시 같은 목적이었고요.

여기까지는 꽤 흥미롭지만, 진상이 밝혀지는건 미행에 따른 결과라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이후 전개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합니다. 착하고 순진해보였던 역사학도 출신 군인 시노하라 대위가 일본 패망을 알고 군비를 빼돌리고 오이시와 야마다를 꼬드겨 일본으로 탈출하다가 둘 다 살해한다는 막장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이하라 부인마저 살해하고 반지를 빼앗는다는 암시마저 등장하니 말 다했지요.

일장기에 색을 칠해 태극기를 만들고 봉기한다는 등 당시 조선에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디테일은 여전히 놀라운 수준이고, 일본인들이 자기 하나 살자고 조강지처까지 버리면서 발악하다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어요. 허나 앞서 설명드렸듯이 추리적으로나 전개 면으로나 그다지 점수를 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와 2층" 

전쟁 때 군대에서 운전사로 일하던 하타노는 물자를 빼돌린 뒤 전후 암시장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잡았다. 레이코와 바람이 난 하타노는 아내 아키에와 이혼하고 싶어지지만 위자료가 아까와 죽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타노가 아키에를 살해하는데 사용된 기상천외한 트릭이 눈길을 끕니다. 아키에에게 큰 장화를 뒤집어 씌운 뒤, 곧바로 외출하면서 아랫층 관리인에게 부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니 윗층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피해자는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장화를 벗으려 발버둥 쳤지만, 관리인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올라가지 않았고요. 이후 아키에는 질식해서 죽음에 이르지만 이 때까지는 살아있었으니 범인 하타노의 알리바이도 완벽하게 성립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시한장치 트릭인거지요. 

트릭도 트릭이지만 흉기인 고무 장화는 하타노가 취급하는 물자로 현장에 널려있었다는 점, 또 시체를 발견한 뒤 곧바로 장화를 벗기고 자신이 신어서 증거를 인멸한 마지막 행동이야말로 진짜 탁월한 아이디어였습니다. 하타노가 1년 뒤 암시장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는 허무함도 전후 일본의 상황과 잘 어울렸고요.

범인 하타노가 대단한 완력을 지녔다는 등의 디테일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건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석양에 물든 성" 

스미코는 아버지의 지인인, 국회의원이었다는 아와시마에게 속아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에게 시집간다. 행복했던 나날은 잠깐 뿐, 남편의 광증을 알게 된 스미코는 이혼한 뒤 본가로 돌아온다. 그런데 뻔뻔한 아와시마는 되려 그녀를 농락하고, 살의를 품은 스미코는 아와시마를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한다.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 후계자라는 뻔한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 존재는 사건과는 무관하다는게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솔직히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그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부분도 없어요. 스미코가 아와시마에게 농락당한다는 전개도 지금 보면 영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스미코가 러브 호텔에 투숙한 아와시마에게 수면제를 탄 맥주를 먹이고, 욕실에서 익사시킨다는 범행의 설득력은 높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결국 사고사로 처리될 뿐 범행은 드러나지도 않고, 추리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신세 망친 처녀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인데 전형적이고 뻔해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전등" 

아버지의 골동상에서 일하던 스미코에게 혼담이 들어오지만 계속 거절하던 어느 날, 그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혼담을 가져오던 가나이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추파를 던지던 무라타였다. 둘 중 누가 범인인가?

전편의 주인공 스미코가 이번에는 피해자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스미코가 살해된 시간과 그녀의 방에 침입한 수법 등 범행 관련 정보를 초반부에 상세히 알러줍니다. 이 과정에서 '왜 범인은 살해 후 도주하면서 전등을 켜 놓았는지?'라는 수수께끼도 드러나고요. 전등만 꺼 놓았다면 시체가 보다 늦게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수수께끼가 앞서의 범행 시간, 범행 방법과 조합되어 뭔가 대단한 트릭이 나오겠구나! 싶은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런데 진상은 생뚱맞습니다. 불을 끄지 않은 이유는 범인이 도주할 때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을 무서워한 범인이 경황없이 도주했기 때문이라는 건데, 앞서의 복선이나 단서를 통해 밝혀지는게 아니거든요. 이를 경찰이 밝혀낸건 가나이가 연행된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난 덕분입니다. 운과 우연이 조합된 결과인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착상은 재미났지만, 정교함이 아쉽습니다.

"티켓"

고물상 다이치는 골동상의 첩 스가를 통해 철공소의 폐품 철사를 얻어 팔게 된다. 철사의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폐품 철사를 풀어서 파는데 큰 인건비가 들게 되어 고민 끝에, 고물업자 사카이의 요청 - 철사 푸는 기계를 만들테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 - 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가까지 끌어들여 큰 돈을 투자한 기계는 실패했고, 스가의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다이치는 사카이와 함께 스가를 살해하고 그녀가 가진 돈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는데...

다이치와 사카이가 스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범행 현장까지 끌고가 죽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범인의 완벽한 계획을 파헤치는 수사가 이어서 펼쳐지지는 않고, 사카이가 다이치까지 죽이려다가 자신이 죽고만다는 다소 허무한 결말이라서 도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추리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워요. 사카이가 다이치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왕 한 명을 죽였다면, 한 명 더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이려면 인적없던 스가 살해 현장에서 바로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스가가 가지고 있던 돈을 반으로 나누지 않아도 되니까요. 멀고 먼 시골 촌구석인 현장에서 기껏 도망쳐 나온 뒤, 시체에 유력한 증거인 '기차표'를 남겨두었다는 말로 다시 다이치를 현장으로 보낼 이유는 없어요.

전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돈에 매달리는 인간 군상에 대한 디테일은 좋습니다.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 범행이 일어나기까지의 긴장감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범행 동기가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필"

쓰치다 사부로의 집에 하숙하는 양공주 나쓰코는 대필을 업으로 하는 도쿠라와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빅터라는 중사의 '키푸' (병사 한 명에게만 전속된 아가씨)였는데, 종종 빅터에게 폭행을 당해 멍이 들고 화상을 입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쓰코는 도쿠라와 밀회를 위해 준비했던 집에서 죽었다. 사인은 질식사였는데, 그녀의 몸 어디에도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가스 중독이나 약물에 의한 죽음도 아니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범인이 나쓰코를 어떻게 살해했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인 본격물입니다. 허나 후더닛물은 아니에요. 범인은 도쿠라일 가능성이 가장 높거든요. 가장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뿐더러, 유력한 용의자는 빅터와 도쿠라밖에 없는데 빅터는 나쓰코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범행 방법만 알아내면 되는, 구태여 표현하자면 하우더닛물인 셈이지요.

등장하는 흉기는 전기입니다. 변압기를 연결하여 가정용 100볼드를 승압하여 감전사 시킨 것으로, 도쿠라는 간다에 있는 전기 학교를 졸업했다는 부연 설명도 있고, 나쓰코 시체에 땀을 많이 흘렸다는 단서도 제공하는 등 나름 공정한 정보 제공에도 신경 쓴 티가 납니다.

그러나 전기 감전사의 경우 몸에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도쿠라가 나쓰코 화상 자리에 전선을 가져다 대었다 한들 그 흔적이 완벽하게 감추어졌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요. 또 앞서 말했듯 유력한 용의자는 도쿠라밖에 없기에, 경찰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다면 범행 방법은 몰라도 범인을 밝혀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고요. 무엇보다도 도쿠라의 동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양공주와 관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이 떠오르네요.

"안전율"

도아 철강 회장 가구 류헤이에게 좌익 학생운동 단체인 총학련 재정부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흥미를 느낀 가구는 후쿠시마 준이치와 만나 그들의 사상을 들은 뒤, 2만엔을 기부했다. 그 뒤, 가구는 자신과 내연 관계에 있는 스탠드바 '코스타리카'의 마담 사호코가 바텐더 기미지마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학련 시위를 이용해 기미지마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적군파로 대표되는 60년대 급부상했던 좌익 학생 운동이 등장하는게 이채로왔던 작품. 사회적 이슈를 고발하는 작품을 써 왔던 사회파 작가답습니다. 좌익 운동의 지도부는 대학생 애송이들이지만 당시 사회 지배층들이 상당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묘사도 신기했고요. 또 프락치를 멤버들이 구분하여 린치하기 위해 특별한 표식을 한다는 설정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좌익 운동은 그냥 신기한 소재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를 범행에 사용할 의도였다면 목적, 방법이 명확했어야 하는데 , 단지 등 뒤에 마크를 하는 정도로는 많이 부족해요. 기미지마가 연적이라 할 수 있는 가구의 초대로 선뜻 학생 운동 현장에 나타났다는 내용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시위가 격해지기 전에 귀가해 버렸을 수도 있는 등 헛점도 많습니다. 차라리 마크는 경찰을 속이기 위함이며, 가구 회장이 직접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의 전개가 나았을거에요. 여러모로 너무 대충 넘긴 느낌입니다. 이 한 편만으로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네요.

아울러 "시마 과장"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일본 고위 인사가 내연의 처가 있는게 별로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문제가 되었더라도, 회장이 직접 살인에 나선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림자"

전 편에서 기미지마가 좌익 학생 운동 단체에게 살해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호코가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 이야기입니다. 전 편이 완성된 작품이 아닌 느낌이 든 건 당연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기미지마 살해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니까요. 사호코 마담이 기미지마를 바에서 찔러 죽인 것이라고요. 그 뒤 그녀는 가구를 위해서 죄를 지었기에 그를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랑 이야기죠? 그런데 와 닿지 않기는 전편과 마찬가지입니다. 전 편은 이야기의 구멍이 많은게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범행 방식이 문제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용해 유리를 잘라 흉기로 사용했다는게 특히 억지스러워요. 바에 흉기가 한두개가 아닐텐데 왜 흉기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범행을 저질렀을까요? 그것도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잘라가면서까지? 그냥 유리를 깨도 뾰족한 조각은 쉽게 얻을수 있었을텐데? 게다가 마지막에 다이아몬드에 난 상처가 큰 증거인 것 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걸로 유리를 잘랐다는건 증명하기도 불가능하고요.

경찰 수사망에 반지가 걸리는 것도 우연에 불과한 등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소멸" 

N시 호텔 공사 현장에서 일하게 된 17세 소년 지로는 휴일에 우연히 별장촌 주민 도요코를 만났다. 그녀는 지로가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걸 알고 여러가지 선의를 베풀었고, 지로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도요코는 결혼하여 별장촌을 떠난다고 지로에게 말했고, 지로는 도요코의 약혼자를 살해한 뒤 약혼 반지를 빼앗지만 이후 주박처럼 반지에 얽메이는데....

계급간 격차로 인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살의를 불러온다는 통속적인 내용의 작품. 그래도 밑바닥 노동자와 부잣집 딸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계급 격차를 빼면 '질투심'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도요코가 경찰에게 지로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별장에 초대해서 식사까지 대접해서 별장 고용인들도 아는 사실인데 왜 함구시켰을까요? 그녀 역시 나름대로 지로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걸까요? 하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전무합니다. 

게다가 마무리는 최악입니다. 지로가 증거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두려움 때문에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낮지만, 급작스럽게 반지를 공사현장 철근에 용접한 뒤 철근이 떨어져 이상한 흔적이 들통난다는 결말은 우연치고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심지어 공사장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떨어진 철근 자재에 맞아서 중상을 입고, 그래서 경찰이 함께 현장을 조사하던 중 철근에 백금이 달라붙은걸 알게 된다? 이 정도면 지로가 반지를 낀 채로 사건 담당 형사 앞에 떨어진다 수준의 우연일 겁니다.

고도 성장이 시작되는 상황에서의 빈부 격차, 사회 문제를 통속적이고 다룬 진부한 이야기로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반지를 이야기에 억지로 엮다가 마지막에 없애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07/26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시가 아키라 / 김성미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6점
시가 아키라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미타는 택시 안에 스마트폰을 두고 내렸는데, 그것을 주운 남자가 폰 속 도미타의 여자친구 아사미에게 반하고 말았다. 남자는 전문 해커이자 연쇄 살인범으로,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아사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한 편, 인적이 뜸한 야산에서 신원 불명의 여성 변사체가 잇달아 발견되어 경찰은 수사에 나서는데...

제15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최종 수상작입니다. 최근 상당히 화제가 된 듯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과 SNS는 누구나 쓰는 반면, 해킹에 취약점이 많아서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은 많습니다. 휴대폰 위치 추적을 활용한 작품이 개중 많은 편이고요. 해킹에 촛점을 맞춘다면 찬호께이의 "망내인"이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내인"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살인이라는 실제 범죄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때문에 대단한 해킹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현실적입니다. 특히 살인 직전까지 페이스 북 등을 잘 활용하여 피해자를 옭아매는 과정은 설득력이 높아요. 비슷하게 페이스 북을 주로 활용했던 "리얼 라이즈"는 영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었는데 말이지요. 아마 이런 부분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수상하게 된 요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우선 범인은 습득한 도미타의 핸드폰의 비번을 풉니다. 도미타의 생일이 비밀번호였지요. 그런데 이를 알아낸 방식이 기발합니다. 마침 전화를 걸어 온 애인의 이름이 화면에 표시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의 페이스북 가입자를 조사한 뒤 바탕 화면 사진과 일치하는 가입자를 찾아냅니다. 이를 통해 도미타의 페이스북 계정을 알아내어 생일을 확인했던 겁니다.
다음으로는 도미타의 핸드폰에 해킹 프로그램을 심어 놓은 후 폰을 돌려줍니다. 페이스 북을 통해 알아낸 정보로 도미타, 아사미와 관련된 가짜 페이스북 친구들을 다수 만들어 연결하고요.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아사미에 관련된 정보를 하나둘씩 입수하면서 도미타 폰에 고의로 랜섬웨어 감염을 일으킨 뒤, 친구 소개를 가장하여 보안 전문가로 직접 나타나 도미타와 아사미의 신임을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사미에게도 개인 정보 유출과 해킹 등의 사건을 일으키고 해결해 준 뒤, 틈을 타 납치하는데 성공합니다.
페이스 북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건 약점이며, 도미타의 직장 동료로 가장한 고야나기의 질척거림 등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그럴싸한 현실 속 해킹 수법이라 생각됩니다. 도미타 핸드폰 속 사진의 GPS 정보를 분석하여 아사미의 집이 어디 근처인지를 알아낸다던가 하는 디테일들도 괜찮았으니까요.

여기에 더해 범인이 이미 살해하여 유기한 피해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게 만드는 상황도 아주 인상적이에요. 피해자들의 스마트폰만 살려 놓은 뒤 가끔 문자 메시지 연락을 하는 정도인데 이게 아주 잘 먹히거든요. 가족, 친지와 멀어지고 모든 걸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는 현대 사회이기에 가능했던 속임수이지만, 실제로 아주 그럴듯해 보여서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아사미를 납치하여 살해하려는 실제 범행 쪽 이야기는 아쉽게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우선 아사미에게 누드 사진을 보내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보안 전문가 우라노로 가장하여 신뢰를 쌓았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범죄면 경찰에 바로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 다케이와의 불륜을 암시하는 사진을 페이스북을 해킹하여 게시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케이의 행동을 컨트롤하는건 불가능한데 다케이가 경찰에 신고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 범행을 통해 다케이를 아사미로부터 떼어 놓는다고 해도 범인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요.
이보다는 작품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리얼 라이즈" 수준 정도의 페이스 북 조작이 더 현실적입니다. 조작한 나의 정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퍼트려 내 개인의 평판을 망가트리는 정도요. 평판을 망치는 것 외에 페이스 북을 통해 상황을 제어하거나 조작하는건 아무래도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납치는 방심한채 술을 마시는 아사미를 만나 그녀의 술에 약을 타는 고전적인 방식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럴 생각이었다면 도미타, 다케이를 떼어버리고 차분히 보안 전문가 우라노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든 뒤 당당히 집에서 납치하는게 정답이었어요. 이미 연쇄 살인 및 사체 유기가 발각되어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범행을 서두를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텐더가 분명 아사미와 함께 나가는 범인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사미를 납치한 뒤 그녀가 Siri로 도미타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된다는 결말이 가장 문제입니다. 해킹 전문가인 범인이 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어요. 폰이 아이폰이라는걸 명확히 알았는데도 이 기능을 간과한건 납득하기 어려우니까요. 전화를 받은 도미타가 이전 해킹 덕분에 아사미 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해킹과 폰 위치 추적은 별 상관이 없잖아요? 백신을 설치했다면 모를까.

그리고 데뷰작이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적인 완성도도 부족합니다. 캐릭터 설정부터 견고하지 못해요. 도미타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는 거의 전편에 걸쳐 아사미에게 의지하는 무능력한 찐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사미를 구해주고 그녀의 과거마저 모두 이해한다는 대인배로 급작스럽게 거듭납니다. 반면 왠지 모르게 계속 좋은 사람, 훈남으로만 묘사되는 다케이는 반대로 단 몇 줄의 묘사를 통해 불륜을 즐기는 인간 쓰레기로 돌변하여 리타이어해 버리고 말고요.
여기에 더해 아사미가 과거 AV 배우 야마모토 미나요였다는 설정은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와 별 상관도 없을 뿐 아니라 아사미로 가장한 미나요가 아사미의 대학 시절 잠깐의 연애 상대였던 다케이와 다시 만나는 행동은 비현실적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화를 불러올 이유는 없잖아요? 이 과정에서 그녀가 진짜 아사미인 것처럼 심리묘사를 해 가며 독자를 속일 이유 역시 없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톡톡 튀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닥 기대에 값하지는 않았습니다. 해킹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망내인"을 읽는게 훨씬 낫습니다.

2019/01/06

돌이킬 수 없는 약속 - 야쿠마루 가쿠 / 김성미 : 별점 2점

돌이킬 수 없는 약속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능한 바텐더 무카이는 원래 얼굴의 큰 반점 탓에 사람들이 기피하여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며 먹고 살다가 야쿠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범죄자였다. 다행히 도주 중에 만났던, 딸이 잔혹하게 살해된 노부코로부터 거액을 받고 15년 전 호적을 구입해서 재탄생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노부코 딸의 복수를 약속했었는데, 노부코의 딸을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두 명의 범죄자가 풀려났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의 가족들에게도 위해를 가한다는 협박이 이어지는데...

란포상 수상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2015년 작품입니다. 무려 15년 전 했던, 지키고 싶지 않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 딜레마가 흥미롭습니다. 평범한 바텐더가 누명을 쓴 후 도주를 하면서 범인이 누군지 더듬어 가는 과정도 박진감있게 묘사되어 있고요.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범인들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옛 동창을 가장해서 편지를 보냈다는 아이디어도 좋았어요.

그러나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주인공 무카이와 범인, 그리고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가도쿠라와 이이지마의 관계입니다. 책 소개에서 "한 번 죄를 저지른 사람은 새 삶을 꿈꿀 수 없는 것일까?" 운운하는데 소갯글부터 오류투성이에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빚을 졌기 때문이고, 그것도 생명을 빚졌다면 생명을 걸고 갚아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한 여인이 죽기 전 전재산을 주면서까지 부탁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무카이의 태도는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평온한 삶을 놓치기 싫어하는 소시민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건 나름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죽을 뻔한 사람을 구해주고 새 삶을 살게 해 주었다면 은혜갚을 생각을 해야죠. 노부코의 딸을 잔혹하게 능욕하고 살해한 가도쿠라와 이이지마는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원한 해결 사무소" 급의 화끈한 복수가 이어져도 시원치 않을 판에 청부업자가 양심 운운하며 도망칠 생각이나 하는 판이니 이게 대체 뭔가 싶네요. 

반대로 범인 오치아이가 무카이의 딸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복수의 대상이 영 잘못됐잖아요? 가도쿠라와 이이지마가 출소하지 않더라도 복수를 하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텐데 15년이나 기다린 이유도 잘 모르겠고, 무카이의 모든 걸 빼앗으려 했다면 지금의 방법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했을테니까요. 예를 들어 남편의 정체를 알고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무카이의 아내를 꼬셔서 결혼하는 식으로요. 지금의 설정은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전개도 여러모로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개미지옥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무카이의 심리묘사는 괜찮지만 가도쿠라 살인사건 이후부터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이이지마가 서둘러 도주하는 바람에 신발을 버려두고 가는데 신발 안에 GPS가 들어 있었다던가, 도주하다가 정말로 우연히 옛 피해자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여 피해자의 아들 이름이 고헤이라는걸 알게 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오치아이의 복수극임이 밝혀진 후 이어지는 급전개는 정말이지 가관입니다. 연인의 자살이 무카이 탓이라고 믿는 오치아이에게 그녀는 사실 친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는 진상을 털어놓고, 이를 고헤이가 짠하고 나타나서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은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고작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소모했나 싶어 화가 날 정도입니다.

또 범행 기도 당시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칼에 지문이 묻어있다면 당연히 바 내부 인물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를 대충 넘긴 것도 문제입니다. 이 부분과 오치아이가 초반에 만난지 15주년을 기념하는 건배를 제의한 날이 실제로는 다른 날이었다는 등의 단서를 연결하면 충분히 범인을 짐작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하긴 이 정도로 단서를 줘 봤자 오치아이가 15년을 기다린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서 알아채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또 무카이가 다카토 후미야라는걸 아는건 노부코가 외에는 호적을 구해 준 마카베 밖에는 없다는건 분명 합리적 추론인데, 마카베가 이 정보를 십 수년 뒤 복수극에 써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히 노부코가 나갔던 피해자 모임에서 관련된 연결고리가 생겼다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최소한 고헤이에 대해 우연하게 알아채는 것 보다는 이 쪽이 설득력이 높아요. 여러모로 소득없고 전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마카베 추적은 분량 늘이기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만큼은 괜찮지만 여러모로 문제가 더 크기에 감점합니다. 가벼운 킬링타임용 읽을거리 이상의 책은 아닙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8/08/24

밤의 파수꾼 - 켄 브루언 / 최필원 : 별점 2.5점

밤의 파수꾼 - 6점
켄 브루언 지음, 최필원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일랜드 경찰 '가르다' 출신으로, 해고 후 사립 탐정이 된 잭 테일러에게 이혼녀 애니가 딸 앤 헨더슨 자살 사건의 진상 조사를 의뢰했다. 경찰로 보이는 덩치들로부터 린치를 당해 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잭은 정보원 캐시로부터 앤이 아르바이트했던 가게 사장 플랜터가 수상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애니와 깊은 관계를 맺은 후, 친구 서튼과 함께 가게를 관리하는 경비회사 운영자 포드를 찾아가는데...

아이리쉬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거장이라는 켄 브루언의 대표작입니다. 많은 작품이 영상화되었으니 상당히 잘 팔리는 작가인 듯 합니다. 이전에 '타탄 느와르의 제왕' 이라는 이언 랜킨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있는데, 아일랜드 출신의 아이리쉬 누아르 거장이라니 둘이 만나면 좋은 승부가 되겠네요.

솔직히 아무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페이지가 쭉쭉 넘어가는 맛이 상당해서 놀랐습니다. 이야기는 별 게 없지만 폐인에 가까운 주인공 잭 테일러의 일상을 쫓는 전개가 재미있으며, 특히 길어야 10 페이지 정도인 짧은 단락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아주 탁월한 덕분입니다. 짤막한 일상을 연이어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일생과 심리를 들여다보게끔 만드는 묘사가 정말 절묘해요. 짧은 호흡, 토막글에 친숙한 현대인에게 적합한 작법인데 이런 방법으로 긴 장편을 써 낸 솜씨에는 정말이지 박수를 보냅니다. 

이를 빛내주는 글솜씨도 일품입니다. 그야말로 아일랜드 느낌이 왠지 모르게 묻어난달까요? 척박하면서도 거칠고, 즉흥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그런 분위기가 문장 하나하나에서 드러납니다. 알콜 중독자 잭 테일러의 일상을 구성하는 술들과 그의 취미인 독서, 영화 감상, 음악에 대한 디테일도 아주 탁월해서 재미를 더해주고요.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누아르나 느아르, 범죄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이야기에 알맹이가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점입니다. 기묘한 자살 사건에 대해 20살도 안된 정보원 캐시가 배후를 쉽게 알아내고, 잭이 찾아가자마자 바로 범인이 자백하고, 결국 사건의 진상은 잭을 폭행한 전직 경찰 출신 경비원의 자백으로 밝혀지는 식이거든요.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이 너무나 허술합니다. 세 명의 소녀를 포함해서 범인들 두 명, 사건 때문에 얽힌 다른 두 명 등 모두 7명이나 죽어나간 대형 사건이고 주요 참고인이자 유력 용의자인 거물 플랜터가 실종되었는데 경찰이 딱히 하는게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잭의 단골 술집 그로건스의 바텐더 숀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아무런 수사 없이 뜬금없는 증언에 의해 범인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앤은 자살한게 맞다는 증언이 뭔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이에요.
이렇게 범죄에 대한 묘사도 부족하고, 추리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 전무한데 이 작품을 하드보일드 느와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캐릭터도 그닥입니다. 잭 테일러의 알콜 중독 묘사는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알콜 중독 탐정들과 비교해서 딱히 특별한 건 없습니다. 오히려 차이점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멋을 부린 느낌만 듭니다. 문학 소년으로 시를 좋아했다는 식의 설정은 잭의 알콜 중독과 폭력성과 대비되어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기는 하지만, 솔직히 불필요했어요. 설득력도 없고요. 금주를 결심했다가 무너진 후 애니와 헤어지고, 런던으로 향할 것을 결심하는 과정도 진부했습니다. "싱 스트리트"도 아니고, 50 가까운 중년 남자가 왠 런던?

아울러 앞서 말씀드렸던 토막글이 이어지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구성은 흥미롭지만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지나가다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로 경마에서 대박이 터진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지요. 이 대박으로 잭이 런던으로 떠날 결심을 하면서 사건을 대단원에 이르게 만드는 작위적인 연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앤에게서 받은 돈으로 런던을 갔어도 충분했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기 편한, 적절한 재미에 더한 구성과 전개는 일품이지만 추리적인 성격이 강하지 않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영상화 된 버젼은 한 번 보고 싶군요.

2017/03/04

한잔의 맛 - 김양수 : 별점 2점

한잔의 맛 - 4점
김양수 지음/예담

피키캐스트 연재 당시 가끔 찾아보았던 웹툰인데 단행본으로 나왔기에 구입해 보았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인 '나'가 인터뷰를 계기로 친해진 바텐더, 그리고 또 다른 손님들과 나누는 술과 잔잔한 일상이 어우러진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내용으로 분위기는 "바텐더"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바텐더" 쪽 이야기가 더 깊이 있습니다. 에피소드 한편 한편이 더 길며, 오랜 시간 연재하며 캐릭터 설명에도 많은 분량을 할애한 덕이죠.
하지만 일상툰 "생활의 참견"에서 유감없이 선보였던 작가 특유의 개그 감각으로 떨어지는 깊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 특히나 바텐더가 준비한 칵테일에 대해 "시원하게 창공을 가르는 오이 비행기같다고나 할까!", "(죠니워커) 블랙이 돼지갈비라면 더블 블랙은 숯불 바베큐 같은 느낌?"처럼 내뱉는 한마디가 키 포인트입니다. 마스터의 표정도 볼거리고요.

술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싱글 몰트는 잠시 두었다 마시면 좋다, 진토닉에 오이를 넣어서 마시는 '헨드릭스 큐컴버'(헨드릭스 진이라는 진을 사용해야 하는 진토닉의 일종) 소개, 그리고 '하이볼' 같이 다른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술과 칵테일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싱글 몰트를 블렌디드보다 좋아하는데, '라가볼린 16년'은 한번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격도 10만원 중반대면 적당한 듯?

그러나 딱 한 가지, 중간에 등장하는 마스터의 과거를 다룬 에피소드는 아쉽습니다. 촉망받는 바텐더였지만 바텐더 대회에서 키우던 햄스터 출산 때문에 도전에 실패한 후 세계를 방황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개그가 장황하게 펼쳐지는데 별로 웃기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어요. 등장하는 라이벌 역시 어처구니 없는 것은 마찬가지고요. 작가가 개그 작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 같은데, 작품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개그 작가로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일부 심각한 에피소드를 빼고 보다 즐거운 이야기로 전개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몇몇 에피소드는 코미디 임에도 최루성 드라마를 삽입하여 눈물을 강요하는 한국 코미디 영화의 병폐가 느껴져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으로 읽기 편하고 그런대로 재미도 있지만 말씀드린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가격도 분량에 비하면 비싼 편입니다.

2017/02/10

바텐더 - 윌리엄 래시너 / 김연우 : 별점 2.5점

바텐더 - 6점
윌리엄 래시너 지음, 김연우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떠돌이 바텐더 저스틴 앞에 정체불명의 노인 버디 그래클이 나타났다. 버디는 수 년 전 저스틴 어머니 살인 사건의 범인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자신이 청부를 받아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가 의뢰했는지 알고 싶으면 1만불을 달라고 요구하는데....

바텐더가 오래전 살인 사건 진상을 찾아나선다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예전 어딘가에서 책 소갯글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이지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 소개가 상당히 흥미로왔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몰아쳐서 하룻만에 읽어버릴 정도로요. 이야기의 도입부부터 인상적입니다. 어머니의 살인범이 아버지라는걸 고발했던 기억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벗어났는데,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타나 사실은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밝힌다!는 이야기를 짧은 도입부 안에서 긴장감 넘치게, 완벽하게 서술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정말로 어머니를 죽인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도저히 다음 장을 안 읽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 읽었던 작품들 중 가장 괜찮았던 도입부였다 생각되네요. 

사건을 개인적으로 파고드는 바텐더 저스틴 나름의 수사 활동도 그럴싸합니다. 과거 로스쿨 출신이라는 배경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우직한 인터뷰, 탐문 중심의 조사만 벌이는게 무척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조사를 시작한 후 의미있는 단서를 손에 쥐게 되는 것도 이모와 형과의 인터뷰부터 였다는 점 역시 설득력 높은 전개였고요.

또 이 작품만의 특징인데, 제목에 걸맞게 칵테일 활용이 아주 탁월해서 눈길을 끕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단락의 소제목을 칵테일과 다양한 술, 음료수 이름으로 구성한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마구잡이로 붙인 것이 아니라 단락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내용에도 술이 적절하게 인용됩니다. 알콜 중독자 버디(던)을 낚기 위해 조니 워커 블루 라벨로 유혹한다던가, 아버지의 옛 불륜 상대 애니를 찾아간 저스틴이 그녀의 냉장고 속 다이어트 진저에일, 썩어가는 딸기, 말라 비틀어진 라임, 싸구려 보드카로 스트로베리 뮬을 만들어 준다는 식으로요. 해고된 저스틴이 친구 코디에게 총을 구입해달라며 최고급 데킬라 테존 아녜호를 주는 장면도 빼 놓을 수 없겠군요.
제가 칵테일, 술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라 더 즐길거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여튼 이러한 요소들은 던이 코디에게 보험 사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복선 등에서 활용되는 디테일과 함께 작품의 짜임새를 높여줍니다.

그러나 추리, 범죄 소설로 볼 때 너무 별 볼일 없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첫 번째로, 아버지의 작전은 너무 별볼일 없습니다. 플린이 증언 철회를 하기 위해 그냥 두어도 되는데 왜 죽였을까요? 그를 죽이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비밀이 있는 진범이 있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게 과연 합리적인 시나리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단순 사고로 처리될 위험도 있고, 결국 사람을 더 죽여야 하는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하니까요. 이보다는 플린 증언 철회를 통한 재심을 일단 시도해보는게 더 낫지요. 

또 아내의 불륜과 그에 따른 범행 조작 역시 증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재닛 모스가 몇년이 지난 후 죄책감으로 자살했다? 죽일만큼 미워한 여자가 죽었으면 두다리 쭉 뻗고 자면 잤지 자살했을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랬더라도 살인을 청부했다는 증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었을테고요. 한마디로, 유죄 판결을 뒤엎을만한 증거는 전무합니다.

두 번째로, 버디 그래클(던)의 모든 행동이 말이 안됩니다. 제이크를 찾아와 자신이 범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도입부부터요. 왜 데릭이라는 유능한 하수인을 두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이 1만불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까요? 푼돈 벌이라도 하려는 의도였다고 칩시다. 그래도 저스틴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던이 협박, 회유 중에 데릭을 이용하여 제이크를 위협하는 것도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저스틴이 사건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굳히고 더 열심히 조사에 나서게 만드는 결과만 초래했으니까요. 성과는 없고 뭘 기대했는지도 알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럴 바에야 데릭을 시켜 빈집을 터는게 훨씬 나았을테지요. 그나마 여기까지야 괜찮다쳐도, 던이 최후의 순간에 애니의 집에 침입해서 칼부림을 한건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역시나 없지만, 끔찍할 정도로 작위적인 탓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집에 살인범이 침입하지만 백마탄 왕자가 구해준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의 반복에 불과해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되는 죽은 어머니의 장신구들도 도대체 어디서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사건이 현재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중요한 증거품인데 이게 어디서 났을까요?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 좋은 작품이기는 힘들겠지요.

저스틴 캐릭터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냉소적인 성격과 입담은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술이나 다른 자극적인 것 모두 입에 대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명상과 요가로 자신을 다스리는 구도자적인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장황합니다. 사실 작품과 별 상관도 없는 설정인데, 그냥 너무 멋을 부린 느낌이에요. 구도자처럼 사는데 불구하고 여자는 왜 이렇게 밝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요. 그냥 아픈 과거가 있는 바텐더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요? "바텐더"의 사사쿠라 류 처럼 손님의 심리와 느낌을 잘 파악하는, 한마디로 '눈치'가 빠르다는 바텐더의 특기를 잘 살려 사건 수사와 연결했더라면 훨씬 더 제목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었을텐데, 책 속 묘사로는 바텐더의 기술과는 무관한 저스틴의 수도승같은 생활이 더 중요하게 묘사되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던과 다른 청부업자들의 힘 센 도구 역할을 하는 데릭은 도무지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아요. 너무 눈에 띌 뿐더러 범행도 지나치게 많이 저지르는데 그냥 공기와 같은 인물이라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건에서 손쉽게 빠져나가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인물을 이야기에 개입시키는 것보다는, 던과 데릭을 합쳐 실제로 몸을 써서 사람을 죽이는 보다 사악한 악당을 그려내는게 대결 구도에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지만 여러모로, 특히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한데, 개인적으로는 눈치빠른 바텐더와 미녀 단골 손님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이야기가 더 좋지않았을까 싶네요. "구석의 노인"의 변주처럼요.

2016/08/22

일러스트 칵테일북 - 오 스툴 / 황소영 : 별점 3점

일러스트 칵테일북 - 6점 오 스툴 지음, 황소영 옮김, 엘리자베스 그레이버 그림/봄엔

제목에 혹해서 충동구매한 책입니다. 저자는 실제 바를 운영했던 술 전문 칼럼리스트로, 58종의 칵테일에 대해 유래 및 간략한 관련 에피소드, 레시피를 일러스트와 함께 전해 줍니다. 7편의 짤막한 칼럼도 함께 수록되어 있고요.

160페이지 정도 분량에 페이지 디자인도 일러스트가 많이 좌우하고 있어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아닙니다. 짧지만 그만큼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책의 독자를 '홈 바텐더'와 '아마추어'에게 맞추고 있어서 레시피, 도구 등에 대해 쏠쏠한 정보가 많은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집에 바 용품을 구입할 때 어떤 것을 구입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칼럼이 대표적입니다. 웨딩 파티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방법도 마찬가지에요. 버번 & 사과 주스, 데킬라 & 사과 주스 등 정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조합으로 만드는 칵테일을 소개해 주거든요. 그 외의 레시피들 모두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팁을 제공합니다. 참고로 저자가 추천하는 칵테일은 '네그로니'입니다. 맛있고 간단하기 때문으로 진, 스위트 베르무스, 캄파리를 동량으로 섞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네요.

이러한 정보와 레시피 외에도 애주가들, 그리고 만화 "바텐더"를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이라면 흥미로울 만한 이야기도 제법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제가 좋아하는 '김렛'이 사람 이름이었다거나, 제임스 본드의 유명한 마티니 주문 방법은 엉터리였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카지노 로열"에서야 비로소 '베스퍼'라는 진짜 칵테일이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빌 맥코이라는 주류 밀매업자가 금주 시대에 진품만을 취급하여 좋은 평판을 쌓은 뒤 '리얼 맥코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리얼 맥코이"라는 20년도 더 된 킴 베이싱어 주연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는 정말이지 처음 알았네요.

아울러 엘리자베스 그레이버의 일러스트도 뛰어난 수준으로, 제목에 혹하기는 했지만 후회가 없을 정도로 멋진 그림들입니다. 이 정도면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분량에 비하면 과하다 싶은 가격, 그리고 제본이 유선(?) 제본으로 되어 있어서 쉽게 펼쳐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살림 지식 총서'나 '시공 디스커버리 문고' 스타일로 제본하고 보다 저렴하게 출간하는게 나았을 거에요 일러스트 칵테일북 -  오 스툴 지음, 황소영 옮김, 엘리자베스 그레이버 그림/봄엔

제목에 혹해서 충동구매한 책입니다. 저자는 실제 바를 운영했던 술 전문 칼럼리스트로, 58종의 칵테일에 대해 유래 및 간략한 관련 에피소드, 레시피를 일러스트와 함께 전해 줍니다. 7편의 짤막한 칼럼도 함께 수록되어 있고요.

160페이지 정도 분량에 페이지 디자인도 일러스트가 많이 좌우하고 있어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아닙니다. 짧지만 그만큼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책의 독자를 '홈 바텐더'와 '아마추어'에게 맞추고 있어서 레시피, 도구 등에 대해 쏠쏠한 정보가 많은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집에 바 용품을 구입할 때 어떤 것을 구입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칼럼이 대표적입니다. 웨딩 파티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방법도 마찬가지에요. 버번 & 사과 주스, 데킬라 & 사과 주스 등 정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조합으로 만드는 칵테일을 소개해 주거든요. 그 외의 레시피들 모두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팁을 제공합니다. 참고로 저자가 추천하는 칵테일은 '네그로니'입니다. 맛있고 간단하기 때문으로 진, 스위트 베르무스, 캄파리를 동량으로 섞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네요.

이러한 정보와 레시피 외에도 애주가들, 그리고 만화 "바텐더"를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이라면 흥미로울 만한 이야기도 제법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제가 좋아하는 '김렛'이 사람 이름이었다거나, 제임스 본드의 유명한 마티니 주문 방법은 엉터리였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카지노 로열"에서야 비로소 '베스퍼'라는 진짜 칵테일이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빌 맥코이라는 주류 밀매업자가 금주 시대에 진품만을 취급하여 좋은 평판을 쌓은 뒤 '리얼 맥코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리얼 맥코이"라는 20년도 더 된 킴 베이싱어 주연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는 정말이지 처음 알았네요.

아울러 엘리자베스 그레이버의 일러스트도 뛰어난 수준으로, 제목에 혹하기는 했지만 후회가 없을 정도로 멋진 그림들입니다. 이 정도면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분량에 비하면 과하다 싶은 가격, 그리고 제본이 유선(?) 제본으로 되어 있어서 쉽게 펼쳐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살림 지식 총서'나 '시공 디스커버리 문고' 스타일로 제본하고 보다 저렴하게 출간하는게 나았을 거에요. 비슷한 스타일의 시리즈로 묶어서 말이죠.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기에 만족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구입해서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리기는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애주가이자 독서가인 친구에게 선물하기 좋은 그런 책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에 실린 대로 대충대충 제 맘대로의 '진 토닉'이나 한 잔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2014/08/25

바텐더 1~21 - 조 아라키, 나가토모 겐지 : 별점 2.5점

바텐더 Bartender 21 - 6점
조 아라키 지음, 나가토모 겐지 그림/학산문화사(만화)

"바텐더" - 조 아라키 원작 / 나가토모 켄지 그림

몰랐었는데 이 만화도 완결되었군요. 주말에 몰아서 완독하였습니다.

작품은 크게 주인공 "신의 글라스" 류가 여러 바를 떠돌아다니며 용병생활을 하는 전반부, 호텔 카디널의 바 이덴홀에서 근무하는 중반부, 그리고 독립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 바를 찾은 손님들과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펼쳐지는 전개이죠.

요리만화 스타일의 배틀이 펼쳐지는 에피소드는 거의 없고, 바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최고의 한 잔을 대접한다는 치유물 계열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주인공이 천재라는 점만 빼면 "심야식당"과 비슷한 분위기지요. 이러한 이야기 특성상 주인공 사사쿠라 류보다는 손님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인게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가와가미 쿄코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연히 바를 찾은 첫사랑에게 고백을 결심하지만 그가 약혼자와 함께 나타나자 "라스트 키스"라는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에피소드(내내, 내내,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또 그녀가 어머니를 급작스럽게 잃은 뒤 바텐더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핑크 리본"이라는 칵테일을 만드는 에피소드가 좋았어요.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작품의 히로인은 미와가 아니라 쿄코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명언이 등장하는 것도 명언 덕후로서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아쉽게도 쿠루시마 타이조가 죽은 뒤 류가 독립하게 되기까지를 그리는 후반부는 재미가 떨어집니다.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치유물 분위기가 희석되고, 류의 제자인 와쿠이 츠바사의 성장기와 독립 준비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배틀이 중심이 되는 탓입니다. 차라리 쿠루시마 미와와의 관계를 좀 더 진전시키거나, 아니면 ‘미스터 퍼펙트’와의 최종 결전과 같은 빅 이벤트로 마무리했더라면 임팩트는 더 있었을 텐데 이도저도 아니라 좀 아쉬웠어요.

그래도 새로 오픈한 이덴홀을 중심으로 이전처럼 끌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절히 마무리한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재미고 뭐고 다 없어진 채 좀비처럼 연명하는 일부 만화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ㄴ비다. 후반부 이야기는 맥이 좀 빠지지만, 전체적으로 잔잔하면서도 푸근한, 그러면서도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싶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4/06/16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3 - 게임관 살인사건 : 별점 1점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3 - 4점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유원지에 놀러간 김전일과 미유키는 일행과 떨어져 지나가던 버스를 잡아탔다. 그러나 버스는 통째로 납치당했고, 승객들은 기이한 생존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이상하게 만화만 읽게 되네요. 여러모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튼 간만에 읽은 김전일 시리즈입니다. 발표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제 기준으로는 가장 최신작이죠.

특징이라면 특정한 일련의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펼치는 일종의 '게임'을 다루는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를 김전일 시리즈에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한창 유행했던 장르로 "큐브",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살해하는 운명카드", "다크 존" 등 관련 콘텐츠도 엄청나게 많은데, 김전일 시리즈답게 게임보다는 추리물적인 접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실패였습니다. 범인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는 탓입니다. 마지막 증언에서 버스가 어두워 일행을 못 찾았다는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일행인 딸이나 바텐더가 버스를 한 번도 훑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될까요? 승객이 열 명도 안 되는데!

또 게임을 벌이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한 동기인 100억의 유산도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거액이기는 하지만 외딴 곳에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춰 놓고 살인 게임쇼를 벌일 정도의 재력과 노력이라면 딸에게 전해주기에 충분했을텐데, 뭐 하러 사람까지 죽이는지 모르겠거든요. 이보다는 사람을 고용해서 그냥 한 명씩 교통사고 같은 걸로 죽이는 게 훨씬 쉽고 싸게 먹혔을 겁니다.

그리고 게임을 벌이는 이유가 밝혀지다 보니, 내용도 어처구니 없어져 버립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 중 2명을 원하는 순서로 살해하기 위해서라면,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게임쇼를 벌이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요새같이 검시가 발달한 상황에서 목격자 증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바텐더와 딸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여한 피해자들의 관계만 조사해도 동기가 손쉽게 들통날테니까요. 아니,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무기 마담 주변 인물의 조사만으로도 드러날 동기였기에 애초부터 게임쇼 자체가 불필요했던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게임'이 재미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첫 번째만 게임이고, 두 번째의 고리 풀기, 세 번째의 컵라면과 마지막의 에티켓은 게임이라 부를 수도 없으니까요. 또 에티켓에서의 와인 라벨은 와인에 취미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정보인데 너무 1차원적으로 접근한 듯 합니다. 첫 번째를 제외한 모든 게임에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요.

물론 아주 건질 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과 잘 결합된 첫 번째의 네 자리 숫자 맞추기 게임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두 번째 컵라면 이야기에서 컵라면 밑바닥에 열쇠가 없는 상황을 추리에 접목시킨 것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첫 번째 게임의 경우 재미있는 추리일 뿐 '증명할 수 없다'는 큰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 장점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는 기대 이하였고, 추리적으로도 별로이며 마지막 결말까지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억지스러워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군요. 별점은 1점입니다.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의 재미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김전일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시켜준 망작입니다. 돈 주고 사지 않은 게 다행일 뿐입니다.

2013/06/07

BAR 레몬하트 1 - 후루야 미쓰토시 : 별점 1.5점

BAR 레몬하트 1 - 4점
후루야 미쓰토시 지음, 에이케이 편집부 옮김/에이케이(AK)

인터넷 상에서의 유명세가 상당해서 읽고 싶었던 작품입니다.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술에 대해 박식한 바텐더가 운영하는, 어떠한 술도 마실 수 있는 환상의 Bar "레몬하트"를 무대로 손님들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내용으로, "바텐더"와 "심야식당"을 적절히 섞어놓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술"에 대한 정보 전달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때문에 드라마가 굉장히 약하고, 이야기들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 술들에 대해 알려주는 웹사이트를 하나하나 링크해서 보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점은 "에키벤"과 유사하기는 합니다. "에키벤"도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상 내용은 철도와 도시락 소개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에키벤"은 디테일한 그림이 덧붙여져서 소장 가치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이 작품은 작화마저도 허술해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술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모를까,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다음 권을 더 읽어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13/05/17

손 안의 작은 새 - 가노 도모코 / 권영주 : 별점 2점

손 안의 작은 새 - 6점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노블마인

"앨리스 시리즈"와 "유리기린"으로 접했던 일본의 일상계 추리작가 가노 도모코의 최신작. 평범한 회사원 게이스케와 사에의 알콩달콩한 연애담과 함께, 그들 주변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졌던 소소한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전형적인 일상계입니다. 전에 읽었던 "유리기린"처럼 심각한 설정 없이 진짜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작품이 전개되는 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편집인데 각 단편들이 명확하게 종결되는 구조가 아니라는게 특이합니다.. 모두 다음 작품과 연결되는 연작식 구성을 취하고 있거든요. 1인칭 시점이 두 명의 주인공을 오가는 점도 특이했고요.

그러나 좋은 추리물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작위적이고 설득력 없는 동기가 난무해서  완성도가 영 별로인 탓입니다. 가장 첫 단편인 "손 안의 작은 새"에서 요코가 자신의 그림이 서서히 망가지도록 금기시된 유화 조합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부터가 그러합니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지 말던가, 아니면 명확하게 나이프로 그림을 찢어버리던가... "자전거 도둑" 역시 마찬가지죠. 대부호의 손자가 자전거 백미러를 훔친다? 그거 돈 주고 사려면 얼마나 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에서 화분의 위치와 빌딩의 반사를 이용하여 원래 찾아갔던 집을 숨긴다는 트릭 역시 잠깐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실제로 가능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결혼반지를 가장하기 위해 150만 엔이나 되는 반지를 훔친다는 "에그 스탠드" 역시 어이가 없었습니다. 살짝 속이려고 감수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요.

물론 아주 건질 게 없지는 않습니다. 초반부에서 '호무라 사에'라는 이름을 추리해내는 과정, 사에를 기다리던 게이스케가 자신의 우산을 바꿔치기해 간 여고생에 대해 추리하는 부분은 괜찮았어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비상한 추리력을 가진 게이스케라는 캐릭터 묘사도 호감이 가고요.

하지만 단점이 더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순정만화 스타일의 일상계로 추리소설을 처음 접하는 여성분들에게 적합해 보입니다. 완전 본격물 애호가에게는 추천드리기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작중의 중요 장소인 바 "에그 스탠드"에서 주문하는 칵테일들만큼은 인상적입니다. 한번쯤 맛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벚꽃 가득한 가게 분위기로 인헤 사에가 주문하는 "체리 블로섬", 게이스케의 "모스크뮬", 수수께끼의 친근한 노신사가 선물한 샴페인 + 신선한 오렌지 주스 조합의 "미모사", 마지막 이야기에서 사에와 다투고 혼자 방문한 게이스케가 추운 밤에 시키는 에그노그, 에그노그에 쓴 노른자를 뺀 흰자로 바텐더 이즈미가 만드는 "밀리언달러"(오리지널 레시피라며 진 베이스에 흰자를 1/3만 넣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