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비채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비채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5/05/31

옥토버리스트 - 제프리 디버 / 최필원 : 별점 2점

옥토버리스트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라는 딸 세라를 유괴당했다. 유괴범 조셉은 가브리엘라의 사장인 찰스 프레스콧이 가지고 있던 '옥토버리스트'와 돈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가브리엘라는 우연히 만나 친해진 펀드회사 대표 대니얼의 도움으로 리스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조셉과 협상에 나서는데...

제프리 디버는 링컨 라임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이 작품은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닙니다. 어딘가의 리스트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했던 기억이 나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무슨 리스트인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36장에서 시작해 1장으로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처음 접했던 방식인데, 소설로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이 역순 전개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구조적 장치로 작용하며, 덕분에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씩 깨지는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실제로는 게임 속 상황이었고, 교회 집사라 선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던 노란 셔츠의 딕슨이 사실은 킬러였으며, 엘레나가 차에 치인 줄 알았던 장면도 알고 보니 연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일종의 반전 요소들은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가 더욱 커져 긴장감을 높입니다. 대니얼이 킬러였다는 첫 번째 반전을 시작으로, 가브리엘라는 대니얼을 잡기 위해 함정 수사를 벌이던 형사였다는 두 번째 반전, 그리고 가브리엘라 역시 다른 조직과 연계된 킬러로 애초에 대니얼 일당을 제거하는게 본래 목적이었다는 마지막 반전으로 이어지거든요.

결말에서는 대니얼 일당은 가브리엘라의 계획대로 조셉에게 살해당하고, 경찰이 가브리엘라의 행방을 놓쳤던건 그녀가 소지품을 쓰레기차에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등 모든 떡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에는 '옥토버리스트'는 대니얼을 유인하기 위해 대충 만들어낸 맥거핀으로 명칭조차 "옥토버 페스트"에서 따왔다던가, 대니얼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했던 ‘프리스턴 솔루션’은 알고 보니 요트 커버 색깔에 불과했다는 등도 있고요.
책 맨 마지막에 수록된 목차의 진짜 제목들이 이런 정리를 도와주는데, 예를 들어 챕터 35의 제목은 ‘대니얼의 무덤’입니다. 대니얼은 이 챕터에서 죽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역순 전개가 반전을 위한 장치로만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설득력을 희생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와 수나리 형사는 이미 가브리엘라가 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작품 중반까지 이에 대한 단서나 암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 돌이켜보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요 반전들이 충분한 복선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가브리엘라가 형사이자 킬러였다는 설정, 대니얼의 정체 등이 대표적인데요. 모두 과거 사건이나 대화 장면을 갑자기 삽입해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반전은 많지만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라가 킬러였다는 반전은 반드시 필요했는지 의문이에요.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져 버린 셈입니다.

또한 프랭크처럼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큰 역할 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보이기는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형식과 실험 정신은 분명히 흥미롭지만, 반전 위주의 전개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전체적인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굳이 찾아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3/29

산마처럼 비웃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5점

산마처럼 비웃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고키 가문의 넷째 노부요시는 미뤄두었던 성인식을 위해 고향 구마도로 귀향했다. 그러나 노부요시는 산속 사당을 순례하던 중 길을 잃고 흉산 부름산에 들어서고 말았다. 노부요시는 부름산의 유일한 민가인 가스미 가문의 다쓰이치 일가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다쓰이치 가족은 노부요시만 남긴 채 밀실인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나선 노부요시는 과거 광부와 사기꾼들이 살해되었다는 금광터 여섯 무덤굴에서 망자의 비명을 듣고 도망치다가 정체불명의 사악한 존재까지 목격한 뒤,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도조 겐야는 노부요시의 병든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마도로 향했다. 지역 유지인 리키하라와 부름산에 오른 겐야는 다쓰이치의 집에서 얼굴이 불타고, 구전 동요의 지장 형태를 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다쓰지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쓰지 아들 고지의 시신이 흑색지장 사당에서 역시 동요에 나오는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후 리키하라도 실종되었고, 겐야는 다니후지 형사와 함께 여섯 무덤굴에서 토막난 리키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쓰지의 장례가 열리던 날, 가설 극장에 불이 나 경찰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 가스미가에 남은 다쓰지의 아버지 단고로, 아내 시마코, 첩 슌기쿠도 동요 속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하는데....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찾아 읽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네 번째 출간작으로, 반 년 전에 읽었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바로 전작입니다. 2008년 일본 현지 출간 당시에 각종 랭킹 상위권을 휩쓸었었지요.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만큼 대담한 추리와 충격적인 진상이 돋보입니다.

진상은 다쓰이치 씨 가족과 다쓰지 씨 가족이 실은 동일 인물들이었다는 겁니다. 다쓰이치의 딸 유리는 소년 다쓰하루가 변장한 것이었고요. 이들은 마을에 들어온 유랑극단 ‘태평극단’으로 모습을 바꾸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부요시가 유리에게서 느낀 섬뜩함은, 결국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위장한 데서 비롯된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단발머리는 연극 "거미줄 활시위"에 등장하는 단발머리 시동의 가발로, 그것 자체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요. 고지와 히라히토가 닮은 이유 또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다쓰지의 얼굴을 훼손한 이유 역시 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얼굴이 온전하게 발견되면, 다쓰이치와 다쓰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쓰지 일가가 변장을 택한 동기도 납득할 만합니다. 작년 백중 무렵, 다쓰하루가 부름산에서 금이 섞인 암석을 발견했고, 이를 다쓰지 혹은 고지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가즈토리 가문 소유였고, 가즈토리 리키하라의 사위 마사오는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금을 빼앗기고 채광 기회도 잃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쓰지 일가는 다쓰이치 가족으로 변장하여 몰래 금을 캐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쓰이치 가족이 사라진 밀실 트릭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 유리가 혼자 남아, 두 문의 안쪽에 직접 빗장을 걸고 노부요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목욕통을 가리는 칸막이 뒤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겼고, 노부요시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는 사이 2층으로 올라가 노부요시가 자던 방에 다시 숨은 것이지요.

이외에도 노부요시가 성인식 도중 겪었던 괴이 현상들에 대해, 겐야의 추리로 합리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야생 여우나 염주 비둘기의 울음이었고, 소름끼치는 절규는 발정기의 야생 여우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다른 짐승들과 대치하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산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파였으며, 나병에 걸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게라의 길’이라는 외길을 이용해 이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무 위의 시뻘건 불덩이는 날다람쥐였고, ‘어어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형들이 노부요시를 찾으러 산에 들어왔을 때 외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작품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서를 흘려두고, 이를 추리를 통해 조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정통 본격 추리물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다쓰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시신 훼손에 사용한 '두꺼비 기름'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점은 추리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다쓰지, 고지, 시마코, 슌기쿠, 다쓰하루, 노부요시 단 여섯 명뿐입니다. 이 중 다쓰지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아이 다쓰하루가 범인일 수는 없기에 남는 사람은 노부요시뿐입니다. 

다쓰이치 가족의 정체를 밝혀내는 단서로, 소노코의 혼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활용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노부요시가 소지한 물건 중 상대가 알지 못했던 건 혼례 시간 변경을 알리는 편지뿐이었고, 그걸 읽고 이들이 갑작스레 자리를 떠났다는 걸 통해 정체를 유추해낸 것입니다. 이유는 '태평극단'이 혼례 축하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구전 동요를 따라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인데,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공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 동요가 ‘금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어서, 사건의 핵심 동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은 전개가 조금 처지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진상인 ‘다쓰지 일가의 변장’ 설정의 설득력 부족입니다. 아무리 가즈토리 가문과 가스미 가문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해도, 어릴 적 친구였던 리키하라가 다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무리입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요. 가족 모두가 변장을 했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금광을 몰래 캐기로 했다면 다쓰지와 고지만 변장했어도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다쓰지만 변장해서 머무르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불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조 겐야는 처음에는 마사오를, 그 다음에는 수행자 단부로 변장한 다쓰이치, 다쓰지의 동생 다쓰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마사오는 금광을 캐는걸 주장해 왔었기에 이를 반대했던 장인과 몰래 금광을 캐던 다쓰지 일가를 없앨 수 있었고(딸 유리의 실종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고요), 다쓰조는 이미 금광 때문에 여섯 명이나 살해했었으니까요.

반면, 진범인 노부요시의 동기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인식을 실패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며, 다쓰이치 일가가 장난을 쳤다고는 해도, 이로 인해 여섯 명이나 살해한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입니다. 그럴 거였다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혔던 형들을 먼저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또한 금맥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묘사하다가, 결국 사냥용 총에 사금을 넣어 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금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런 사기를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소하지만 다쓰이치 가족이 나타난건 작년 백중 무렵, 태평극단이 나타난건 작년 여름께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건 국내 독자에게는 이해가 힘든 부분이라 아쉬웠고요. 이런건 번역할 때 통일시켜 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시리즈 특유의, 일본 촌락에 전승되는 괴담이 실제 사건과 얽히며 전개되는 플롯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단점이 커서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입니다.

2025/01/24

가을비 이야기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1.5점

가을비 이야기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비채

'현대 호러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 작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이 커서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인간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공포를 극대화한 기담집이다.
호러에 미스터리 기법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 이후 일본 호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일인자 자리에 오른 기시 유스케가,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가지 공포담은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읽는 이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서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는 책 소갯글을 보고 집어든 작품.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소갯글에서는 공포, 호러 소설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나 의외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작가 명성만 놓고 보면 "엠브리오 기담" 정도의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의 소재, 내용들도 "백조의 노래" 외에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완성도도 그닥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단편들 - "도깨비불의 집", "미스터리 클락" - 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도 역시나군요. 앞으로 기시 유스케 단편은 읽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귀의 논"

아오타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는 못하는 아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미하루는 그 말을 들은 뒤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미하루와 아오타가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미하루가 고백을 끝낸 아오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무섭지도 않고 의외의 반전도 없는 짤막한 소품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가"

작가 아오야마는 자다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이동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병원 의사는 마쓰나가에게 '푸가(해리성 전주)'라는 말을 꺼냈다. 자살 명소 수해로 이동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오야마는 영능력자에게 부탁해 침실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그러나 결계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는 침실에서 대량의 물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집자 마쓰나미는 얼마 후, 아오야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안으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떠오르는 작품. 에메의 작품에서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약의 부작용으로 벽에 갇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면서 순간 이동을 하던 주인공이 결계 탓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로 이동을 못해서 중간에 갇힌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짧았던 에메의 작품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아오야마 시점의 순간 이동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너무 길거든요. 읽다보면 비슷한 내용이라 지루해집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거미를 테마로 한 결계 등의 이야기도 지나치게 장황하며, 거미 꿈은 정말이지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반면 순간 이동에 대한 설명은 제목의 '푸가' 뿐인데 극히 부족하고요. 분량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반전 소재로 사용된 물침대는 너무 생뚱맞았어요. 물침대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침구는 아니니까요. 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억지 발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다는 함께 자던 동거인 아키 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게 더 호러블하지 않았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백조의 노래"

인기없는 소설가 오니시 레이분은 대부호 사가로부터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는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창법으로 부른 레코드를 남겼다.

탐정 로스의 보고를 통해, 미쓰코 존스의 창법은 사막에서 노래하다가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라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병이 성대를 찢어 얇게 만들고, 분할 진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환상이 깨진 사가에게 로스는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했고, 레이분은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콘덴서 스피커는 놀라운 기술이지만 저음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거나, 스테레오 녹음은 3D 영화 같아서 진기함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가지 내용은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소개된 노래들 - 메리 캠프가 무른 마농 레스코의 '홀로 외로이 버려져', 미쓰코 존스가 부른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고요. (아래와 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창법의 비결이 불치의 풍토병이라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의 비법이 제어할 수 없는 손가락 떨림이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궁극의 비법을 손에 넣었지만, 짧은 영광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앞서의 오디오, 음악에 대한 상세 설명에 비하면, 풍토병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반전을 위한 억지 설정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쿠리 상"

2003년 11월 28일, 대형 사고를 쳐서 자살을 결심한 열두 살 다쿠야에게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루토가 함께 죽자며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주술은 소원을 빈 네 명 중 세 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했다. 다쿠야와 하루토는 친구 가에데와 신이치를 끌어들여 고쿠리상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고, 숨을 거둔 하루토 외 세 명은 고쿠리상의 조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2일, 성공한 변호사가 된 다쿠야 앞에 주간지 기자 노구치가 나타나 18년 전 하루토의 돌연사, 가에데의 집 전소와 가족의 죽음 및 다쿠야가 저질렀던 사건을 언급하고 돈을 요구했다. 충동적으로 노구치를 살해하고 다급해진 다쿠야는 다시 한 번 고쿠리상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가에데와 신이치 등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쓰타나나누마로 가라는 답을 받은 다쿠야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주술이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쿠야는 쓰타나나누마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은 명확한 주술의 조건과 이를 불러낸 존재에 의한 저주와 공포가 필수입니다. 고전 걸작인 스즈키 코지의 "링"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은 조건, 목적은 물론 주술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설명과 주술 결과 모두 애매하게 묘사되어 혼란스럽고,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안락사를 선사하는 주술이었다면, 18년 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걸까요? 

마지막 순간에 이미 사망한 하루토와의 대화도 무슨 맥락으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쓰타나나누마의 경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도 뭐지 싶어요. 아오모리 현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2024/10/06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3점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는 대학교 선배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로부터 하미 지역의 특별한 제의와 기묘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미에는 네 개의 마을에 각각 신사가 있고, 홍수나 가뭄 때마다 신사마다 돌아가며 지역 농사의 젖줄인 미쓰 천의 원류 진신 호에서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를 행해왔는데, 13년 전 제의에서 사요촌 미즈시 신사 신관 류지의 큰아들 류이치가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터무니없이 무서운 어떤 것을 본듯한 형상이었다. 그 뒤 제의에서도 신관들은 기묘한걸 목격했다고 했다. 
이 소재를 탐방하기 위해 도조 겐야는 편집자 소후에와 함께 가뭄 탓에 행해지는 하미의 기우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제의 중 신남 역할을 맡은 류지의 둘째 아들 류조가 가슴에 미즈치 님의 신기 중 하나인 뿔에 찔려 죽은걸 목격했다. 그러나 현장인 집배는 완전한 밀실이었다. 겐야는 현장을 확인한 뒤, 자살이라고 추리했고 류지가 동의하여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미즈시 신사 외눈 광에 제물로 류지의 의붓손녀 사요코가 감금돠었다는걸 다른 신관들과 관계자들이 알게 되었다. 사요코를 풀어달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류지는 주술을 푸는데 시간이 걸린다며, 다음 날 풀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날 밤부터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미즈치 신사의 다쓰키치로, 미쿠마리 신사의 다쓰조 신관이 차례로 살해당했고, 스이바 신사 류코 신관은 중상을 입었다. 류지는 소후에를 감금한 뒤 겐야를 협박하여 범인을 밝혀낼 것을 종용했고, 겐야는 관계자들 앞에서 범인은 류지의 의붓 손자 쇼이치라고 추리했다. 겐야가 내 놓은 범인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건 쇼이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리쇼 직후 류지마저 총격으로 살해당했고, 도조 겐야는 소후에를 구해내 스이바 신사 후계자 류마와 함께 마을 밖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류마에게 진짜 진범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때 네 개의 마을은 폭우로 범람한 미쓰 천에 모두 휩쓸리고 말았고, 도조 겐야는 경찰에 살해된 사람들과 범인들 모두 실종된 것으로 신고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자신감 있는 오만한 명탐정보다 도조 겐야 쪽이 마음에 드는 걸. 연쇄살인이 발생해 몇 명 죽고 난 다음에 겨우 사건을 해결해 놓고 실은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고 지껄이는 명탐정보다,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댁이 훨씬 더 믿음이 가." - 류마.

도조 겐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제 10회 일본 본격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인데, 굉장히 흡입력있고 재미있는 내용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와 사건, 트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게 아주 돋보였습니다. 제의는 공물을 담은 큰 통을 호수에 빠트리면서 진행되는데, 이 통 안에 '산제물'인 사람을 넣어 두었던게 밀실 트릭의 진상입니다. 13년 전 제의에서 처음 산제물을 바쳤는데, 이 때 통에 갇혔던 산제물 이치로가 물 속에서 튀어나와서 류이치는 깜짝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켰던겁니다. 이치로는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고요.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는 산제물은 사요코였는데, 그녀 역시 통을 호수에 빠트릴 때 빠져나와 류조를 찔러 죽였습니다. 통 안에 공기가 남아있어서 관계자들이 현장을 보고 떠날 때 까지 숨어있을 수 있었고요. 이 과정에서 집배가 한 번 더 흔들린 이유 - 떠오른 통에 부딪혀서 - 까지 설명되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겐야가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도 볼 만 합니다. 우선 겐야는 범인에게 해당되는 일곱 개의 조건을 꺼내어 놓습니다.
  1. 미즈치님 제의에 산재물이 부활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2. 쓰루코 대신 사요코가 제물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3. 산재물이 통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4. 사요코가 제물로 바쳐졌음을 알고 범행을 결심한 인물
  5. 류마의 잠수 장비가 어느 광 어느 궤짝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인물
  6. 잠수 장비를 착용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인물
  7. 호수에 드나드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인물.
이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추려낸 후, 하나씩 소거해가는 과정이 아주 그럴듯했어요. 이를 통해 범인이 쇼이치라는걸 드러내는 추리도 합리적이고요. 물론 이는 나중에 아닌걸로 밝혀지지만요.
미즈시 신사가 '산제물'을 바쳤다는걸 밝혀내는 추리도 돋보입니다. 신에게 바치는 '신찬'은 누가 보아도 산제물인 여성을 형상화한 것인데, 류지가 이를 대충 고르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등의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알려줍니다. 여러모로 '본격추리대상'을 탈만큼 추리적으로는 풍성합니다.
다만 도조 겐야의 추리는 일본어를 이용한게 많아서 한국 독자는 풀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산제물'을 추리해내는 추리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이런걸 원어로 보고 이해하며 추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일본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눈에 뜨였습니다. 류마가 해군 자살 특공대 후쿠류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류마의 입을 빌어 전쟁 당시 자살 특공대에 대해 개죽음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라던가, 자식이 죽어도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낙후된 촌락의 사고방식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사고방식과 빗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아버지나 자식이 죽어도, 형이나 동생이 목숨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기뻐했던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지요.
쇼이치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지지 않은 후일담은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 자매가 행복을 찾았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 사요코가 산제물로 통 안에 갖혔을 때 미즈치의 뿔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처럼요. '불안함을 느껴 호신의 의미로 가지고 있었다'는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데,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닙니다. 그렇게 아무나 가져갈 수 있게 두었다는 것부터가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그것도 제의 전에 말이지요. 또 호수에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는데, 사요코가 범행을 저지른 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물론 공기가 들어있는 통을 사용했다는 트릭이 활용되기는 했는데, 과연 얼마나 숨을 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뒤 사건에 대해 증언하지 않고, 숨어서 신관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삼으려고 했다는게 신관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라고 믿었다 한 들, 최우선 복수의 대상은 류지여야 합니다. 다른 신사의 신관들이 아니라요. 그리고 복수심에 불탔다 한들 신관들을 미즈치 님의 신기로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상식적이었다면 자신들의 편일 세이지, 류마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마을 밖 경찰서에 신고했어야 했어요.
류지가 산제물을 바치기로 결심한 뒤에도 외눈광을 유지한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의 때마다 산제물을 바친다면, 필요 없는 곳입니다. 미즈치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쉽게 허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쳐도 첫 산제물을 바친게 13년 전이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이미 13년 전에 통 뚜껑을 잘 닫지 않아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통 뚜껑이 열렸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점이고요.

아울러,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작품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쇼이치 시점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지루했습니다. 쇼이치를 통해 하미 지방에 미즈치 신 외에도 기묘한 어떤 것 - '팽것', 귀녀 등 - 이 있다는 설정을 장황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이형 존재에 대한 서술은 다른 미쓰다 신조 작품과 거의 똑같았던 탓입니다. 추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거의 없고요. 그나마 진신 호에서 미쓰 천으로 이어지는 지하 수로는 여러 통로로 접근할 수 있다 정도만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이 역시 류마가 조성한 무덤 - 이치로의 시체가 떠내려 온 - 과 이치로의 사체가 발견된 곳 등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게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쇼이치 부분을 빼고 도조 겐야 부분만 추려서 읽어도 충분히 말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쇼이치 가족의 어머니가 '가가구시촌의 사기리'였다는건 시리즈 제 1작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과 연결되는데, 이 역시 천편일률적인 묘사로만 이어질 뿐 특별한 소재로 사용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있는건 분명하니까요. 도조 겐야 시리즈, 혹은 호러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4/05/03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점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 4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기소설가 도조 겐야가 괴담 수집 취재를 위해 향한 가가구시촌은 신사를 맡은 '백'의 '가미구시가', 뱀 신을 모시는 '흑'의 '가가치가'라는 두 가문 세력으로 나뉘어진 곳이었다. 도조 겐야가 도착한 직후, 가가치가 무신당에서 수행승 젠토쿠 도사가 교살당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가가치가 어른들이 잇달하 살해당했다. 사체는 모두 허수아비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건들이 일종의 밀실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탓에 수사는 미궁에 빠졌지만, 도조 겐야는 추리쇼를 펄쳐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데....


"처음부터 생각해 보지 않고 괴이를 받아들이는 건 인간으로서 한심한 일이야. 그렇다고 인지를 뛰어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건 인간으로서 오만한 거고. 세상의 모든 일은 흑백을 명확히 가릴 수 있는게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안 돼."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 제 1작. 시리즈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읽고나서 14년만에 읽게 되네요. 
550페이지를 넘기는 대장편으로 일본의 괴담을 섬찟하게 그리면서, 괴담과 관련된 괴사건이 일어나지만 이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추리해서 해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잘 살린 작품이지요.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전개와 설정 모두 나무랄데 없습니다. 후속권이 계속 이어지는 인기 시리즈가 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일단 미쓰다 신조 작품답게 괴기 현상에 대한 묘사가 좋습니다. 어린 시절 렌자부로와 함께 모험을 떠났던 렌타로가 사라졌던 사건이 특히 굉장했어요. 귀기어린 구구산의 분위기, 기묘한 계단을 통해 이어지는 당집과 지하실, 뒷 계단을 통해 나왔을 때 뒤를 쫓아온 괴이 등이 렌자부로의 시점으로 설명되는데, 한 편의 괴담으로도 완벽한 수준이었습니다.

오래전 벌어졌던. '신령 납치'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시즈에 실종 사건은 '시즈에가 스스로 몸을 숨겼던게 아니었을까?'라는 추리에서 시작해서, 마을을 덮친 괴이한 연쇄 살인 사건까지 추리해 내는 도조 겐야의 추리도 볼거리입니다. 등장하는 괴담, 괴이 현상에 가까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수께끼 중 주요한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지요가 지장갈림길에서 목격했던 사기리 생령의 정체는?
  • 누가 숨어있기 힘들었던 나루터에서 가쓰토라를 어떻게 살해했는지?
  • 구니하루 찻잔에 독을 넣고, 잠깐 사이에 피해자를 허수아비처럼 꾸민 방법은?
  • 기누코를 살해하고 오솔길에서 사기리, 렌자부로, 도조 겐야 눈을 피해 달아난 방법은?
이에 대해서 도조 겐야는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추리를 내 놓고, 실패를 반복하는데 왠지 모르게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 놓는 추리들도 아예 말이 안되지 않고요. 예를 들어 맨 처음 '범인은 사기리 할머니의 시종인 구로코다!'라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구로코는 젠토쿠 도사 범행 당시 무신당 안에 있었고, 구니하루 범행 때에도 현장에 있었으며 맨 처음 장소를 이탈했기에 옆 방에 숨어들 수 있었고, 기누코 사건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터부시하는 허수아비님 속에 숨어 렌자부로의 눈을 피했으며, 이는 구로코가 마을 사람이 아니어서 가능했다는 등의 내 놓는 근거 역시 꽤 탄탄한 편입니다. 이는 구로코의 정체는 렌자부로의 형 렌지로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이 역시 나름대로 근거를 잘 제시해줍니다.
구구의례라는 의식을 행하며 할머니가 조제했던 약을 먹은 사기리가 좌반신에 마비가 남고 잘 걷지 못하게 된걸 보고, 그녀가 뇌경색에 의한 시야협착 증세를 가지고 있어서 왼쪽을 돌아볼 때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추리, 그리고 범인이 사기리의 쌍둥이 언니 사기리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처음부터 사기리는 2명이 아닐까라는 단서를 계속 던져주고 있기도 하고요. 애초에 도조 겐야의 취재 노트, 렌자부로의 수기와 함께 작품을 전개하는 축인 '사기리의 일기'가 주인공인 동생 사기리가 아니라 언니 사기리의 일기였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모든게 허수아비 속에 숨어 있었던 사기리 시점이었던 거지요.
아울러 언니 사기리가 모든 범행을 허수아비 속에 숨어서 행할 수 있었던건, 그녀가 구구의례 뒤 허수아비님과 같은 산신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핵심 트릭이야말로 괴담과 추리가 잘 결합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외에도 젠토쿠 도사를 살해한 범행은 이모 사기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서 특별한 수수께끼가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다른 범인이 있었다는게 드러나며 이 사건에서의 목격 증언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잘 짜여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작답게 부족한 부분도 느껴집니다. 일단 첫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상당히 지루합니다. 가미카쿠시 촌을 양분하고 있는 흑, 백 세력의 필두 가가치가, 가미구시가 양 가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족 관계를 엄청나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탓입니다. 문제는 이 설정은 미쓰다 신조 작품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신선하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우선 '뱀 신'을 모시면서 떠받드는 가가치가의 묘사는 "백사당", "사관장", "흉가" 등 다른 작품 속 가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가치가 무신당에서 행해지는 의식 역시도 비슷하고요. 
물론 이건 이 작품이 작가의 초기작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다소 부당한 비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불필요한 내용이 과하다는건 분명합니다. 마을 이름의 유래 등을 통한 마을 마귀 신앙 설명처럼요. 사건과 별로 관계가 없는 부분을 모두 쳐 내었더라면, 200페이지는 충분히 줄일 수 있었을겁니다. 

도조 겐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외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시골 마을을 찾아온 긴다이치 코스케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화적으로 독특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이렇게 무색무취한 것도 문제네요. 게다가 괴담을 무척 좋아한다는 설정은 관련된 설명이 늘어지게 만들 뿐이라 오히려 감점 요소였다 생각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사건은 풍성하고, '누가 죽였는지?'를 밝히는 후더닛 측면으로는 볼만하나 본격 추리물에서 가장 중요한 트릭면에서는 아쉽습니다. 범인이 빠져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던 허수아비 속에 숨는 트릭인데, 이는 이미 도조 겐야로부터 그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렌자부로 등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인해서 흐지부지 넘어가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극단적 상황에서 심리적 거부감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던것 아니었을까요? 렌자부로와 마을 사람들 의견으로 불가능하다고 쉽게 단정지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설령 도죠 겐야는 그랬다쳐도, 경찰이 이를 쉽게 납득하고 넘어간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사기리가 떠내려보낸 주물을 쌍둥이 언니가 몰래 다시 어깨에 얹은 이유라던가, 기타 등장하는 괴이와 괴담 모두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단점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렌타로 실종 사건입니다. 할아버지가 찾으러 갔을 때 사당이 사라진 이유에 대한 도조 겐야의 추리는 그럴싸 했지만, 누가 왜 렌타로를 납치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으니까요. 이도저도 아니게, 어정쩡하게 정리된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아이디어는 돋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어차피 같은 설정이라면 "백사장", "사관장"같은 후기작을 읽는게 더 낫습니다. 외딴 지역에 전승되는 전설, 저주와 엮인 사건에 대한 추리 소설이라면 "흑사의 섬"도 나쁘지 않고요.

2023/08/05

하얀 마물의 탑 - 미쓰다 신조 / 민경욱 : 별점 2.5점

하얀 마물의 탑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모토로이 하야타는 2차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던 탓에 등대지기가 되었다. 해군 시절 등대의 중요함을 느꼈던 탓이었다. 양성학교를 거쳐 첫 부임한 곳은 간토의 다이코자키 등대였다. 그곳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는 등의 경험을 겪고 2년 후, 도호쿠 지방에 있는 고가사키 등대로 전근이 결정되었다.
어선으로 고가사키 등대에 접근하던 하야타는 등대에서 이상한 햐얀 형체를 목격했고, 이 때문에 어부가 직접 상륙을 거부해서 등대 아래 아지키 마을에서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하야타는 이동을 위해 안내인 모스케를 고용했지만, 모스케가 사라져버려서 홀로 출발했다. 그리고 하야타는 숲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쫓는걸 알아채고 서두르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해까지 진 상태에서 발견한 민가는 기묘하게 생겼고 무척 낡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집은 마을 사람들이 '하얀집'이라고 부르며 피해가라고 했던, 시라가미를 모시는 무녀의 집이었다. 가면을 쓴 무녀와 손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야타는 친절한 손녀 하쿠호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그녀에게서 받은 부적 덕분에 무사히 등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등대에는 아무도 없었고, 밤이 되어서야 등대장 이사카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야타를 찾으러 숲에 갔다왔다고 한 이사카는 하야타가 겪었던 일을 듣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다. 다이코자키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었었고, 고가사키 상륙 전에 하얀 형체를 목격했었고, 숲 길로 이동하다가 무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는 등 하야타와 거의 똑같은 이야기였다.
등대장의 회고는 마을 신주의 딸 미치코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하듯 홋카이도로 전근을 갔는데, 딸은 신주가 부리는 시라몬코에게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하야타는 자신의 경험담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뒤, 이사카의 아내 미치코는 마을 신사 신주의 딸이 아니라 하얀집의 딸 시라쓰유였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불가해한 일을 겪을 때는 합리적인 해석이 중요하다."

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신간 코너에 있길래 시리즈인줄 모르고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읽다보니 시리즈더라고요. 다행히 첫 번째 작품은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사관장>>과 비교적 흡사합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무속 신앙과 그들이 부리는 신(?)에 관련된 기묘한 능력, 그것에 얽히게 된 민간인이라는 핵심 소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이 무녀와 연을 맺는 전개와 사람들이 겪는 기현성이 '하얀색'이라는 것도 유사하고요.
하지만 주인공 모토로이 하야타의 존재가 결정적 차이를 만듭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온갖 기현상에 대한 나름의 추리를 펼칩니다. 이게 꽤 그럴싸해서 재미있었어요.
 
우선 '세기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유명한 아일린모어섬 등대 사건부터 자신만의 해석을 내 놓습니다. 등대장인 마셜이 미쳤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폭풍우가 오지 않았지만 일지에 폭풍우가 덮쳤다고 적혀있던건 마셜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부하 중 듀커가 '화를 냈다'는건 마셜이 미쳤기 때문에, 그리고 듀커가 '여전히 조용했고' 맥아더가 '기도했다'는건 마셜이 듀커를 죽여서 맥아더가 기도했다고요. 실종의 진상은 마셜이 비옷과 장화를 신고 듀커의 시체를 버렸는데, 그걸 안 맥아더가 비옷과 장화를 신고 뛰어나와 말리다가 둘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 추리합니다.
홀로 숲 길을 해메던 하야타를 추격했던 하얀 괴물체에 대한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길 안내를 부탁했던 모스케였다는 겁니다. 슬쩍 수풀 사이로 본 거대한 하얀 형체는 모스케가 짐을 나르며 짐 위에 덮어놓았던 흰 천이고요. 하야타가 마을 여관의 딸 기리에와 사이가 좋은걸 봤기 때문에, 질투심으로 저지른 일종의 장난(?)이라는 동기까지도 잘 설명해줍니다. 밤에 돌을 던지고, 다음날 등대로 향할 때 숲 속에서 하야타를 포위했던건 원숭이들이었을거라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자료 조사도 충실해서 등대의 역사 등 온갖 정보들도 가득한데, 그 중에서도 오사카 케이키치 등대 소설을 읽는 묘사는 반가왔습니다. <<등대귀신>>은 <<등대귀>>라는 제목으로 읽었었던 적이 있지요. 다른 작품들도 언급되는데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전개는 다소 지루한 편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가 고가사키 등대로 향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게 거의 1/3 지점일 정도거든요. 하야타의 과거라던가, 신념에 대한 묘사, 그리고 등대의 역사 등 관련 자료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 말이지요.
또 합리적으로 모든걸 설명하려고 했으면 그렇게 모든걸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습니다. 이사카 부부는 유령(?)이었다는 결말은 어처구니를 상실케하며, 이사카 부부와 다른 등대지기 하마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애초에 이사카가 고가사키로의 전근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은 아예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 외에도, 하얀 집과 마을과의 관계처럼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한 때는 그 집에서 출산을 했다고 하는데, 불길하게 여기는 집에서 왜 출산은 했을까요? 출산을 앞 둔 임산부가 가기에는 너무 험한 산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좋은 일은 마을 신사에, 나쁜 일은 하얀집에 기원한다는 설정도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 자체가 애매하잖아요. 예를 들어,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시라몬코를 이용하면 안되는 걸까요?
등대에서 보이던 하얀 형체가 하얀 집의 딸 하쿠호 (이전에는 시라쓰유)의 하야타 (이전에는 이사카)를 향한 연심이라는 해석도 별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맞다면 하얀 형체는 이사카와 하야타에게만 보였어야 했습니다. 시라쓰유, 하쿠호의 연심은 그들이 자살하려 할 때 구해주었던 젊은 등대지기에게 향해 있었으니까요. 즉, 마을 어선 선장이 '하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들, 그걸 목격했다고 등대 상륙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얀 사람'이 귀신을 볼 수 있는 모두에게 보인다면, 그걸 '연심'이라고 하기도 힘들테고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구체화된다는 해석이었다면 말은 되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경험에 진절머리가 난 하야타가 등대지기를 그만둔다는 결말도 영 아니었어요. 물론 하야타가 하쿠호의 사랑을 받아줄 리는 없지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이 유령이 되어버린 이사카 부부를 봤으니까요. 하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하얀 집의 무녀는 시라몬코를 부려 일본 각지를 조사하고, 심지어 아이를 납치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등대지기를 그만 둔 걸로 하쿠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쿠호에게 누군가 다른 남자가 희생양이 되기 전에는 말이지요. 하쿠호에게 희생양으로 모스케라도 던져주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이렇게 설명이 부족하고 결말이 대충이라는 점에서는 완성된 소설보다는 괴담에 가까왔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1편인 <<검은 얼굴의 여우>>는 추리물이라고 하는데, 1편이나 읽어봐야겠습니다.

2023/06/25

658, 우연히 - 존 버든 / 이진 : 별점 2.5점

658, 우연히 - 6점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한 전설적인 뉴욕 경찰 거니에게 대학동창 멜러리가 찾아왔다. 멜러리는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 무작위로 자신이 떠올린 숫자를 알아맞춘 누군가가 자기를 협박하고 있다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거니의 지시를 사업 - 조금 수상쩍은 일종의 종교단체 - 핑계를 대며 회피하던 멜러리는 결국 살해당했다. 사건 현장도 기묘한 점 - 허공으로 사라진 듯한 발자국, 총을 쏜 뒤 깨진 병으로 목을 찌른 점 등 - 투성이었다.
거니는 지방검사 클라인의 요청으로 수사본부에 자문역으로 참여했고, 브롱크스와 소더턴에서 잇달아 일어난 살인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걸 알아냈다. 알고보니 범인은 경찰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에 꽤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작품. 소개가 멋드러지고 재미있어 보여서 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1에서 1000까지의 수 중 피해자가 아무렇게나 떠올린 숫자를 어떻게 맞출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도입부는 기대에 부응합니다. 아주 흥미로왔거든요. 살인이 벌어진 뒤, 현장의 범인 발자국을 따라가보니 허공으로 떠오른 듯 갑자기 사라졌다는 엽기적인 현장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요. 범인이 살인 현장에 이전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대한 단서를 남기며 - 작약 (피어니), 넙치 (플라운더) -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전개도 재미있었습니다.
기상천외한 트릭, 불가능 범죄에 연쇄 살인극, 거기에 범인과의 두뇌싸움까지 결합되어 있으니 본격물로의 판은 제대로 깔린 셈입니다. 이런 작품을 21세기에 볼 수 있다는게 놀랍네요.

특히 도입부를 장식했던 '숫자 맞추기' 트릭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원리는 유명한 '주식 투자 사기'와 같아요. 여러명에게 '숫자를 생각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 뒤 '너가 생각한건 이 숫자야'라는 편지에 모두 똑같은 숫자를 써서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숫자를 생각했던 사람은 깜짝 놀라며 범인에게 조종되고 마는 것이고요. 범인이 편지를 보낼 대상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런 사람은 늘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주식이 오르냐, 내리냐와 같은 단순한 이지선다가 아니라 1부터 1000까지의 광범위한 숫자라는게 핵심인데, 챗 GPT에게 물어보니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10000명이 각자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1000의 10000승으로 같은 숫자를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약 1/1000이 됩니다. 즉, 10000명이 각자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약 10명 정도가 같은 숫자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하네요. 범인처럼 약 수만명에 이르는 광범위한 DB를 확보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인거지요. 누구나 알고 있음직한 아이디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는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가 않습니다.
트릭과 결합된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범인은 당첨된 - 숫자를 맞춘 -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 (200여 달러)을 수표로 보내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이 이런 숫자를 알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너의 비밀도 알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뭔가 비밀이 있는 사람들은 수표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범인은 아는게 하나도 없지만 이렇게 받은 수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게 됩니다.
형사답지않고 프로파일러에 가까운 거니 형사의 활약도 독특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왜 그랬는지?를 생각하고 추리한다던가, 범인의 심리를 예상해서 위기를 타개하는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과장이 심한 측면은 있지만 나름 볼 만 했어요. 아내와의 대화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묘사도 기존 컨텐츠들의 거친 상남자 뉴욕 형사들과는 달랐고요.

그러나 도입부의 숫자 트릭 외의 추리적 요소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화로 생각한 숫자를 말하게 한 뒤, 우편함의 편지를 보라고 했던 두 번째의 숫자 맞추는 트릭이 대표적입니다. 숫자를 듣고 편지를 우편함에 넣은게 당연하지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신발 밑창을 거꾸로 붙인 장화를 신고 범행을 저질러서 허공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트릭은 유치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트릭은 피해자를 골라내고,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분명합니다만, 뒤이은 트릭들은 이렇게 범행을 저지를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숫자 맞추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멜러리를 죽였을테고, 이미 죽였다면 현장을 기묘하게 위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덧붙인 경찰과 게임을 하기 위해서? 라는 설정은 억지스러웠고요.
주정뱅이 경찰이었던 아버지 탓에 어머니가 장애를 얻어서 복수를 시작했다는 범인의 동기도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그렇다면 범행 대상도 주정뱅이 경찰이었어야 했는데, 금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범인의 총구 앞에 놓인 나르도 반장을 구하기 위해 거니가 범인을 도발하면서 시간을 끌고, 이 틈에 나르도 반장이 술병을 던져 범인을 죽인다는 결말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좋다는 첫 번째 트릭도 후보자가 많아지면 들통날 우려가 많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SNS 등 소통 수단이 많은 지금보다는 인터넷 등이 덜 발달한 시대에 적절했을 트릭이에요.

경찰의 수사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인이 수표를 보내도록 유도한 사서함 주인 더모트를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은게 대표적입니다. 범인이 그 사서함에 접근해서, 수표를 빼돌려 주소를 알아낸건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수표를 보는게 쉬웠을 더모트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범인이 어떻게 범행 현장에서 개인 흔적을 철저히 지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도시에서 무려 3건이나 범행을 저질렀는데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운다? 현대의 과학 수사를 일반 범죄자가 벗어나기는 거의 무리가 아닐까 싶네요. 이런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 있는데, 설득력을 갖추려면 보다 상세한 디테일이 필요했습니다.

너무 길다는 문제도 큽니다.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로 분량이 늘어났다면야 괜찮았겠지만, 거니 형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작업들과 여러가지 생각, 꿈, 아들과의 인연과 사건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건 지루함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부인과의 긴장감 느껴지는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집에서 쉬면서 편하게 사건 이야기를 하다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면 안되나요? 프렌치 경감처럼요. 현대물이라고 다 이혼남에 가정 내 위기를 겪는건 아닌데 말이지요. 필요한 설명보다 쓸데없는 부분의 디테일만 넘치는 셈입니다.

그래도 숫자 맞추기 트릭에 대한 발상만큼은 좋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분량을 줄이고 범행 과정의 설득력을 보강했더라면 아주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겁니다. 그래도 본격적인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덧 : 유리탑의 살인에서는 이 작품의 '658'이 추리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자리 숫자라는 식으로 언급하는데, 추리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숫자는 '813'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명도, 발표년도, 누적 판매량 모두 이 책을 압도할테니까요.

2022/04/22

숲 - 할런 코벤 / 최필원 : 별점 2.5점

- 6점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폴 코플랜드는 얼마전 살해된 채 발견된 마놀로 산티아고가 20년 전, 캠프장 살인 사건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진 길 페레즈라는걸 알게 되었다. 당시 피해자 중 마고 그린과 더그 빌링엄의 시체는 발견되었었지만, 길 페레즈와 폴의 여동생 카밀 코플랜드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폴은 20년 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동생 카밀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사에 나서는데....

할런 코벤 작품은 처음 읽어봅니다. 전미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는 하지만, 제가 현대물보다는 고전 취향인 탓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격리 중 읽을 거리를 찾다가 드디어 읽어보았습니다.

이야기는 폴이 주도하는, 젊은 대학생 젠레트와 마란츠가 스트리퍼 샤미키를 강간한 사건 재판과 20년 전 있었던 숲에서의 여름 캠프 참가자 살해 사건이 겹쳐져 진행됩니다. 가해자 젠레트의 아버지가 사건을 무마하려고, 협박할 거리를 찾아서 폴의 과거를 뒤지기 위해 풀어놓은 탐정에게 길 페레즈가 접촉해서 정보를 전해준게 20년 전 사건의 재조사로 연결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드러내가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면서, 결국 이 모든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전개는 과연 베스트셀러 작가답더군요. 

20년 전 사건에 얽혀있는 주요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폴의 여동생 카밀이 살아있는지?
  2. 어떻게 폴이 루시와 밀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그 날 웨인 스튜벤스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3. 왜 폴의 아버지는 카밀을 찾기 위해 2년간 숲을 뒤지다가 포기했는지?
  4. 왜 폴의 어머니는 폴을 남겨 두고 홀로 집을 나갔는지?
  5. 페레즈 가족이 카밀이 살아있다고 했는데,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
  6. 길 페레즈의 부모는 왜 마놀로 산티아고가 자기 아들이라는걸 계속 숨기는지?
  7. 마놀로 산티아고는 누가 살해했는지?
이 수수께끼들은 폴의 수사와 일련의 증언들로 하나씩 풀리는데, 우선 카밀은 살아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카밀은 아니지요. 그리고 검시를 통해 유골은 출산했던 여성이고, 40~50대의 나이로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이 조건에 부합되는건 폴의 어머니고요. 즉, 폴의 아버지는 떠나려는 어머니를 죽여 매장한 뒤, 숲을 수색하는걸 포기했던 겁니다. 길 페레즈의 부모가 아들이 마놀로 산티아고라는 가명으로 살아왔다는걸 알면서도 부정했던건, 과거 캠프장 사건의 유족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이고요.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진상이 모두 이치에 맞고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거기에 더해 젠레트와 마란츠 강간 사건에서 변호사 플레어와 대결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과정은 한 편의 좋은 법정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젠레트와 마란츠가 '짐과 칼' 이라는 기묘한 가명을 댄 이유를 클럽하우스에서 빌렸던 DVD 목록을 뒤져서 찾아내고, 그 DVD를 법정에서 상영하는 장면은 아주 멋졌어요. 단순히 20년 전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한 동기로 사용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말이지요. 

카밀이 돌아오고, 젠레트와 마란츠 사건은 젠레트 아버지의 힘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20년 전 사건 당일 루시가 폴을 유혹했던 건 의도되었던 일이었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주인공 폴이 이런 류(법조인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의 스테레오 타입이라는건 다소 아쉬웠고, 몇몇 부분에서 눈에 뜨이는 헛점도 있습니다. 우선 마놀로 산티아고를 루시의 아버지이자 당시 캠프장 주인이었던 아이라가 살해했다는건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라가 나이를 많이 먹고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살해했다는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뒤이은 아이라가 폴을 살해하려는 과정은 더 억지스러웠고요. 

루시에게 젠레트의 아버지가 고용한 탐정사가 20년 전 사건에 대한 편지를 보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폴의 치부라고 생각했으면 공론화해서 폴을 검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게 맞습니다. 왜 아무 관계도 없는 루시에게 편지를 보낼까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동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길 페레즈의 부모가 마놀로 산티아고가 아들이 아님을 주장하는건, DNA 조사 앞에서는 무력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DNA 샘플을 얻는건 어렵지 않았을텐데 왜 조사를 하지 않는지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요. 심지어 폴은 검사인데 말이지요. 

폴의 작은 아버지같은 존재인 소시가 카밀이 살아있음을 폴에게 끝까지 숨긴 이유도 불분명해요. 길 페레즈의 부모는 살아있지만, 폴의 부모는 모두 죽은 마당에 보상금을 받았던 죄를 물을 수도 없잖아요. 폴의 아버지가 죽은 순간, 진실을 이야기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지나치게 곁가지 이야기가 많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폴의 아내가 일찍 죽고, 폴은 아내의 이름으로 처제 가족과 신탁 기금을 운용하지만 이를 처제 남편이 횡령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폴의 아버지는 KGB 출신이었고 자신의 장인, 장모를 고발해서 아내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는건 어머니 살해의 동기로 써먹기는해서 좀 낫긴 하지만 과하게 거창했던 느낌이고요. 등장하는 여성들이 거의 대부분 엄청난 미녀라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구태여 이런 설정들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흥행할만한 요소는 충분히 갖춘 범죄 스릴러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8/27

영매탐정 조즈카 - 아이자와 사코 / 김수지 : 별점 2.5점

영매탐정 조즈카 - 6점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20회 본격미스터리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등 온갖 상을 휩쓸고, 자주 가던 추리 소설 커뮤니티에도 극찬하는 분들이 많으시길래 구입해서 읽어본 작품입니다. 아래의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화. 우는 여자 살인" 

추리소설가 고게쓰는 대학 후배 구라모치 유이카의 부탁으로 영매 조즈카 히스이를 찾았다. 우는 여자에 관련된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조즈카는 조사를 위해 고게쓰와 함께 유이카의 자택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유이카의 집을 찾은 둘은,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조스카는 유이카의 혼을 자신에게 빙의시켜, 경찰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2화. 수경장 살인"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추리소설가 구로고시 아쓰시의 별장 '수경장'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되었다. 수경장에서 발생하는 심령현상의 조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비큐 파티가 있던 날 밤, 구로고시 아쓰시는 살해되었다. 조즈카는 범인이 벳쇼라는걸 영능력으로 알아냈지만, 경찰은 구로고시와 불륜 관계였던 신타니를 체포하고 말았다. 고게쓰는 유일한 단서였던 조즈카가 꾼 꿈을 토대로 범인이 벳쇼라는걸 경찰이 믿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3화.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

고게쓰의 팬이라는 여고생 후지미 나쓰키가 자기 학교 여학생들이 살해된 사건 조사를 부탁했다.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경찰의 도움을 얻어 사건 현장 및 학교를 방문해서 조사에 나섰다. 조즈카의 영시를 통해 범인이 여자 아이라는걸 알게 된 고게쓰는, 프로파일링을 지어내서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지미 나쓰키까지 살해되고 마는데....

"최종화. VS엘리미네이터"

그런데 구성이 독특합니다. 1~3화는 각각 완성된 단편들인데, 네번째인 "최종화. VS엘리미네이터"를 통해 앞서 3개의 이야기를 뒤집는 반전과 앞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추리적인 장치들이 정리되고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장점이라면,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할 만 하더군요. 

우선 조즈카가 영능력으로 얻은 정보를 통해 진범을 알아내고, 트릭을 밝혀내는 1~3화에서의 고게쓰의 추리와 활약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수경장 살인"에서 조즈카의 꿈을 캐비닛 거울과 연결시켰던 추리,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에서 나쓰키가 살해되었을 때 범인이 카메라에서 필름을 가져갔고, 렌즈캡을 떨어트렸던걸 단서로 하스미 아야코는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추리 등은 설득력이 높거든요. 

그러나 이 정도였다면 흔해빠진, 그냥저냥한 추리물 수준에 그쳤을거에요. 조즈카가 던져주는 단서가 워낙 명확해서 고게쓰가 대단한 명탐정일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4화 덕분에 이 작품이 한 단계 수준을 뛰어넘는 완벽한 본격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4화에서 조즈카는 영매가 아니라, 천재 탐정으로 사건 현장을 쓱 보고 추리했던 걸, 영능력인양 고게쓰에게 단서를 던져주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앞서 세 건의 사건에서 그녀가 어떻게 모든걸 추리해 내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데, 이 추리들이 정말 대박입니다. 합리적이며 설득력 있는건 물론, 모두 독자에게도 주어졌던 공정한 단서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왠만한 고전 걸작 본격물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추리적 쾌감을 선사해주는 덕분입니다. 여고생 교살 사건에서 핵심 단서로 쓰였던 스카프 고리와 같은 디테일을 조즈카의 대사로 스쳐지나가듯 드러냈던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즈카가 추리력을 선 보일 때 셜록 홈즈라던가, 일상계의 정의 같은 지식을 피로하는 것도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부분이고요.

하지만 걸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다지 새로운 느낌이 없는 탓입니다. 1~3화 까지의 설정인, 영매가 영능력으로 탐정과 컴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는 쎄고 쎘으니까요. 귀신이 알려준 단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건 이미 만화 "카코와 가짜 탐정"에서 써먹었었지요. 고전 "싸이코메틀러 에지"라던가, 미쓰다 신조의 "사상학 탐정" 도 비슷한 류일테고요.

4화의 반전과 본격물로의 전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능력자로 알려진 순진한 미녀가 알고보니 추리력이 뛰어난 닳고 닳은 아가씨였다는건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과 똑같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하기 어려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천사에서, 마지막에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는 고게쓰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웃는, 닳고 닳은 건방진 아가씨로 변모한다는 조즈카 캐릭터도 오다기리 쿄코 판박이고요. 

지나친 과장과 억지도 불만스럽습니다. 캐릭터부터 만화같아요.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영능력(?)과 추리력을 갖춘 절세의 미소녀 조즈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그녀가 영능력(?)을 발휘할 때의 과장된 연기, 고게쓰와의 알콩달콩한 로맨스 묘사는 읽으면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였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영 부족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요. 

일개 추리 소설가가 경찰과 협력한다는 편의적인 설정이야 본격물이니 그렇다고 쳐도, 현장을 쓱 보고 진상을 모두 추리해냈다는 것도 과장이 지나칩니다. 말로 설명하는데 50분이나 걸리는 추리를 단 몇 초만에 끝냈다는게 말이 될까요? 이 정도면 영능력보다 더한 초능력이지요. 

추리도 설명은 그럴싸하지만, 결론에 단서를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2화입니다. 구로고시의 신작이 정확하게 몇 권 배달되었는지, 구로고시가 여분의 책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구로고시 서재에 책을 따로 둘 곳이 없었다는 걸 잠깐의 관찰 후 추리하여 단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이럴 바에야 그냥 뛰어난 영능력자라는게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겁니다. 

그 외에, 고게쓰가 여대생 연쇄 살인마 쓰루오카 후미키였다는 것과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이후를 그린 에필로그도 뻔하고, 억지스러운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여대생들을 칼로 찌르며 '아프지 않았지?'라고 물어보던 이유가 과거 누나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애초에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고게쓰에게 납치된 조즈카가 탈출하는 과정도 작위적이고요.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저에게는 일본 서브 컬쳐 특유의 과장된 묘사, 어디서 많이 보았던 뻔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들로 가득차 있다는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던 작품입니다. "사쿠라코 씨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처럼요.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은, 잘 짜여진 본격물이기는 하나, 제게는 소문만큼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화에 가깝게, 가볍게 쓰여진 작품이 먹히는걸 보면, 확실히 시대가 변하긴 변한 듯 합니다..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해졌다. 며칠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했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렸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서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까운 편입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 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결정적 단서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럽습니다.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탓입니다.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20/03/21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5점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년전 헤어졌던 옛 연인 사야카가 그녀의 아버지 유품 속 약도와 열쇠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자고 부탁해왔다. 사야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이 집에서는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야카에게 자해의 흔적까지 봤기에 더더욱. 

그녀와 함께 출발하여 찾아낸 약도 위치의 기묘한 건물은 아버지의 열쇠로 지하실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은 '미쿠리아 유스케'라는 소년이 가족과 함께 살다가, 23년 전의 2월 11일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사야카는 왜 초등학생 이전의 기억을 잃었는지? 23년 전,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일이 사야카가 기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 집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는 사야카와 함께 집 안에서 찾아낸 유스케의 일기장 등을 단서로 이 의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4년 발표 장편으로, 존재를 몰랐던 작품인데 몰입감이 대단합니다. 초등학생 이전의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야카,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수수께끼의 열쇠와 약도, 그 곳에 위치한 기묘한 집, 지하실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집은 모든게 이십여년 전 어느 날의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였다는 등 도입부부터 아주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집 안의 시계가 모두, 심지어 서랍 속에 숨어있던 회중시계조차 11시 10분이라는 시간에 멈춰있는게 드러나는 묘사는 오싹할 정도였어요.
이어서 둘의 조사를 통해 발견한 집의 거주자였던 유스케의 일기, 미쿠리야 씨의 편지 등 여러가지 단서가 수집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게 만약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회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을거에요. 덕분에 한 번도 쉬지않고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추리물로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굉장히 공정합니다. 이 집과 미쿠리야가(家), 그리고 사야카의 과거에 대한 단서는 주인공과 사야카의 조사를 통해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스케의 일기와 아버지 미쿠리야의 편지 등은 주인공들이 입수하여 접하는 시점부터가 독자들과 똑같아요. 주인공들만 더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습니다. 사야카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고, 둘 모두 이 집에 처음 온 셈이니까요.
 트릭도 괜찮습니다. 일기와 편지를 통해 구성된 일종의 서술 트릭인데 깔끔하며, 설득력도 높거든요. 진상은 유스케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미쿠리야 씨는 알고보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조부모가 손자를 거두어 키우면서, 손자로부터 아버지처럼 여겨졌다는건 아주 드문일도 아니지요. 사야카의 정체가 유스케의 동생 히사미였다는 극적인 반전 역시 이 진상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일기 속에서 히사미를 '차미'라는 애칭으로 부를 때, 이를 주인공들이 고양이로 착각했다는 전개도 자연스러웠고요.

거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집 한채와 남녀 주인공 2명만이 등장하는데, 이 만큼의 몰입감을 전해주는 전개도 대단합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무대 장치가 간단하고 등장 인물이 적더라도 장면 장면의 임팩트가 있는 작품이라 연극에는 별로 적합하지는 않아 보였고, 저예산 영상물로 찍으면 아주 좋겠더군요. 왜 아직 영상물이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판권을 사서 조금 각색해도 괜찮을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나 책 뒤 해설에서 '어정쩡하다'고 하는 - 2012년 독자 일만명이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인기 랭킹에서 36위를 차지하는 등 - 이유도 대충은 이해가 됩니다. 서술 트릭 전성기에 야심차게 도전한 결과물로 보이는데, 억지가 지나친 탓입니다. 집의 정체가 가장 억지입니다. 크노소스 궁전과 같은, 죽은 당시를 재현해 놓은 일종의 무덤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현실적이지 않지요. 크노소스 시대도 아니고, 현대 시점에서 구현하기에는 지나친 낭비니까요. 별로 큰 돈은 들지 않았다고 설명은 되지만, 지하실에다가 방 여러 개를 갖춘 단독 건물을 세우고, 그 안의 인테리어도 모두 갖춘다고 하면 억 단위의 돈은 들었을겁니다. 만든 뒤의 관리 문제도 크고요. 또 이야기를 살펴보면, 할머니는 이 비극적인 범죄를 비밀로 하고 싶어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비싸고 거창한 무덤을 만든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야카의 기억 상실과 자녀 학대가 과거의 끔찍한 성추행과 오빠의 죽음으로 빚어졌다는 진상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물론 유스케가 밤에 우연히 들었다는 그 '소리'가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맞고, 굉장히 충격적인 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 - 성추행, 그리고 오빠의 죽음 - 이 기억 상실을 불러왔다는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야카의 자녀 학대를 이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써 먹은 건 큰 잘못이에요. 어찌되었건 자녀 학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성추행과 자녀 학대 설정은 빼고 "몽환화"처럼 풋풋한 두 남녀의 모험물로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사야카의 아버지가 비록 할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한 들,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그 집 아들이 일으킨 사고로 죽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 딸 대신 원수의 집 딸을 대신 딸처럼 키웠다? 제대로 키울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친 딸이 죽어서 제대로 슬퍼하거나 공양조차 하지 못한다는걸 받아들인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할머니까지 죽었다면 모를까, 엄연히 육친이 살아있잖아요. 비밀을 지키고 싶었다면 조손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새롭게 삶을 이어가도 되고요.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좋은 작품인건 분명하지만, 대체로 억지스럽다는 서술 트릭물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읽어 볼 만은 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외출이 어려운 요즈음, 집에서 가볍게 읽어보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길이도 적당한 편이니까요.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7/02/25

천계살의 - 나카마치 신 / 현정수 : 별점 2.5점

천계살의 - 6점
나카마치 신 지음, 현정수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물간 추리소설가 야규 데루히코는 "추리세계"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 담당 편집자 하나즈미 아스코에게 새로운 기획을 말했다. 그가 내 놓은 것은 추리소설의 '문제편'이었다. 야규는 자신과 다른 해결편을 탤런트 겸 소설가 오노미치 유키코가 썼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남긴 뒤 온천으로 해결편을 쓰기 위해 떠났지만 그곳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아스코는 야규가 쓴 "호수에 죽은 자들의 노래가.."가 실제로 후쿠시마에서 벌어졌던 여성 살인사건을 그대로 쓴 것임을 알아냈고, 피해자 가미나가리 아사에의 남편 라이조, 아사에의 먼 친척으로 라이조와 아사에 공장에서 비서 겸 사무원으로 일하는 가타기리 요코, 공장장 우라니시 사부로 등을 차례로 만나며 사건 진상에 서서히 접근해 가는데...

"모방살의"에 이은 살의 시리즈 제 2작입니다. "모방살의"는 유명세와 기대에 비하면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본격물 팬으로서는 만족한 부분도 있었기에 이 작품도 읽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발표했던 단편을 80년대에 가필, 수정하여 장편으로 만든 방식은 "모방살의"와 동일합니다. 그래서인지 설정과 전개가 모두 옛스럽습니다. 젊은 여성 편집자가 혼자 온천 여관, 호텔, 레스토랑 등을 탐문하여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은 마츠모토 세이초"푸른 묘점"이 바로 떠오를 정도였어요.

핵심 트릭으로 일종의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그 트릭의 수준이 높다는 점도 모방살의와 같습니다. 야규가 아스코에게 준 소설을 활용한 트릭으로, 독자가 알고 있는 '문제편'이 전부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아스코의 수사 활동, 그리고 오노미치 유키코가 자살하는 장면까지가 진짜 문제편이라는 트릭입니다. 현실과 소설이 어우러진 구조인데, 지금 읽으면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피에르 르메트르의 "능숙한 솜씨"도 동일한 트릭이 사용되었었지요. 하지만 발표연도를 감안한다면 시대를 앞서간 트릭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400자 원고지 58매를 읽고 검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던가, 복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던가 하는 식으로 이 부분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단서와 복선이 살짝 등장하는 것도 본격물스러워서 좋았고요. 야규가 서점주인 이리우치지마 유키토모에게 건넨 1만엔도 복사비로는 너무 과하지요.

그 외에 배치된 소소한 트릭들의 수준도 높습니다. 라이조에게 배달된 현금이 든 편지와 방화 사건을 속달을 보통 우편으로 속이기 위함이며, 이를 현금이 1,000엔 짜리와 5,000엔 짜리가 섞여 있다는 것으로 추리해 내는게 대표적입니다. 무게를 조정하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뒷받침된 좋은 트릭이었어요.
여관에 투숙한 손님이 초밥을 손으로 집어 먹는 것으로 그녀가 아사에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는걸 드러내는 전개도 마찬가지이며, 이 여성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도 그럴듯합니다. 드러나는 증거들로 가타기리 요코에서 오노미치 유키코로 혐의가 이동하는 과정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제 3의 인물이었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고요.

그러나 트릭을 제외한 부분의 완성도가 낮다는 점 역시 전작과 동일합니다. 아니, 솔직히 설득력면에서는 전작보다 못합니다. 특히 전개가 엉망이에요. 우선 아스코가 곧이곧대로 오노미치 유키코에게 해결편을 의뢰한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써서 활자화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 이유를 대고 기획을 중지하면 그만이니까요. 사건을 키울 필요는 전혀 없어요. 설령 해결편을 의뢰했더라도 야규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이후에는 그냥 손을 놓아버리는게 맞습니다. 야규의 문제편만 보면 드러난 범인이 명확하고, 야규는 죽었고, 만사형통이잖아요. 어떤 멍청한 범인이 자신이 저지른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단 말입니까? 서점 주인 이리우치지마가 가진 복사본이 남아있지만, 이게 증거가 안된다는 것은 이미 아스코와 이리우치지마 사이의 대화를 통해 증명되니 무의미합니다.

아사에를 죽인 이후 여관에 투숙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사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녀를 가장하여 투숙한 사람이 범인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이 정체가 탄로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작 중 등장하는, 우편을 이용한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은 가타기리 요코와 우라니시 사부로가 벌인 사전 공작으로 아스코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덕분에 가타기리 요코, 오노미치 유키코가 누명(?)을 쓰게 되는 전개는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 의도한 상황은 아닙니다. 사건 직후 손이 떨려서 운전을 할 수 없어서 쉴 수 밖에 없었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차에서 쉬면 되니까요. 

이외에도 우연이 개입된 전개가 너무 많습니다. 유키코와 아사에가 만나게 된 해피닝, 아스코가 유키코의 퇴원을 도와주던 아사에의 차에 함께 탄 것, 알리바이 공작을 위해 여관에 투숙한 아스코를 가타기리 요코가 찾아온 것 등...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울러 사건이 복잡해진 것에 경찰의 무능함이 한 몫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피해자 아사에가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대고 병원에 찾아왔는데 경찰이 동승자를 파악하지 못했다? 일개 추리 소설가와 잡지 편집자가 추적하여 진상을 밝혀낼 수 있는 수준의 수사조차 경찰이 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눈여겨볼만한 트릭과 아이디어는 있지만 단점도 적지 않습니다. 본격물 애호가라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16/07/25

몽환화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몽환화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키야마 리노는 올림픽 대표로까지 손꼽혔던 수영 선수였지만, 심리적 이유로 수영을 그만두었다. 그 뒤 리노는 사촌 나오토의 자살 후 가까워진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의 꽃 사진들을 블로그로 만드는걸 돕게 되었다. 그러나 아키야마 슈지가 살해당했고, 경찰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리노, 리노를 우연히 알게 되어 돕기 시작한 가모 소타, 개인적 인연으로 아키야마 슈지에게 보은을 하려는 경찰 하야세, 소타의 형으로 수면 밑에서 은밀하게 수사를 진행하는 요스케 등 여러 명이 사건 해결에 나섰고, 결국 그들은 사건에 정체불명의 '노란색 나팔꽃'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스탠드 얼론 작품입니다. 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언급되기에 2010년대 이후 발표된 근작이라 생각했는데, 책 뒤 해설을 보니 10여 년 전부터 연재해왔던 작품을 수정·가필해 단행본으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장점부터 말씀드리자면, 재미있고 속도감이 넘친다는 점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도입부로 시작해 여러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흥미를 자아냅니다. 결국 하나로 모여 깔끔히 끝나는 마무리도 좋고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주인공 커플이 몇 안 되는 단서를 가지고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모험에 약간의 추리가 더해진, "부부 탐정" 스타일의 작품인 탓에 온전한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 와중에 등장하는 추리 역시 작가의 명성에 걸맞습니다. 현장에 남겨진 단서 — 젖은 방석, 페트병 차가 담긴 찻잔 — 을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하야세 경부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왜 시원한 페트병 차를 마시는데 유리컵이 아니라 찻잔을 사용했을까? 찬장에 근사한 유리컵이 있었는데?’라는 극히 사소한 의문에서 시작되는 추리가 아주 설득력 있습니다. 아들 유타와의 인연으로 오갔던 연하장의 내용이 주요 단서가 되었다는 건 다소 작위적이지만,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고요.(무언가의 성취를 기원해 차를 끊는다는 것이 일본에서 일반적인 문화인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또 아키야마 슈지가 개화시킨 노란 나팔꽃이 살인의 동기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예상과 다른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보통 이런 설정이라면 거액의 돈이나 비밀 조직이 얽혀 있기 마련인데, 손주의 친구에게 살해당했다는 평범한 결말인데 오히려 신선했던 덕분입니다.

소타와 리노의 성장기적 서사도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리노의 심리적 약점 극복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소타가 원자력 전공자로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빚도 유산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재미와 흥미에 비해 진상이 다소 시시합니다. 제목 그대로 ‘몽환화’라 불리는 나팔꽃 씨앗에 환각 효과가 있어 에도 막부메이지 시대에 걸쳐 통제되었지만, 마취제로 활용했다는 가공의 역사 설정까지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범인이 단지 우연히 얻은 씨앗의 환각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 번식 의뢰를 한 마사야라는 점은 김이 빠집니다. 역사적 스케일의 설정은 결국 곁가지일 뿐이니까요.

현대 파트에서도 가모와 이바 가문이 대를 이어 비밀리에 나팔꽃을 쫓는다는 설정, 소타가 나팔꽃 사건 피해자의 후손이며 첫사랑이 그와 얽힌 이바 가의 딸이라는 설정은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이 정도면 ‘핫토리 가문이 아직 닌자 일을 한다’는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작품 속 수수께끼 대부분이 이 두 가문의 비밀스러운 행각 때문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요스케가 소타에게 진상을 숨긴 이유, 이바 다카미가 구도를 추적하며 가명을 쓴 이유, 다카미가 소타를 만나고 도망치듯 떠난 이유, 요스케가 리노에게 정체를 숨긴 이유, 하야세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 모든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요.
또한 뭔가 거대한 비밀에 휘말린 듯 보였던 리노와 소타 커플은 불필요한 ‘헛수고’를 했다는 뜻이기도 해서 허무합니다. 슈지 살인사건의 범인은 하야세가 밝혀냈고, 노란 나팔꽃의 진상은 요스케와 다카미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스터리를 만든 건 리노가 초반에 하야세 경부를 믿지 못한 탓인데, 그것조차 설득력 있지는 않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가모 소타보다는 경찰 하야세가 더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하지만 단점도 뚜렷하여 감점합니다. 그래도 작가의 팬이라면 읽어볼 만 합니다.

2016/01/12

모방살의 - 나카마치 신 / 최고은 : 별점 2.5점

모방살의 - 6점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월 7일 7시, 추리작가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를 음독하고 사망했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었으나, 사카이의 약혼자 나카다 아키코와 친구 쓰쿠미 신스케는 의문을 품고 각자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나가는데.....

이런저런 추리 커뮤니티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은 평을 받아서 관심 가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추리적인 요소, 특히 트릭은 상당히 빼어나더군요. 추리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기에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요.

추리소설가 사카이의 자살을 사카이의 약혼자 아키코와 친구이자 동료인 신스케가 각자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전개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두 명의 시점을 오가는 교차 전개를 지닌 작품은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 트릭을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두 시점이 서로 다르다는 서술 트릭이지요.
핵심 트릭 중 하나인 '두 명이 알고 있는 사카이는 다른 사람이다!'는 중반 정도에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기는 합니다. 나카다 아키코의 약혼자 사카이는 출판사에서 정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깔끔한 원고를 쓰는 사람인데 신스케의 친구 사카이의 원고는 지저분하다는 설명이 가장 큰 단서였어요. 트릭을 알고 나니 그 외의 몇 가지 자잘한 단서들도 눈에 뜨이더군요. 아키코가 약혼자 사카이의 신인상 수상을 몰랐다던가... (다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는 단점은 아니에요. 외려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합니다. 또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첫 발표는 1970년대) 상당히 앞서나간, 놀라운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저도 다른 서술 트릭물을 많이 접해보았으니 눈치챘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무척 놀랐을 것 같네요.

게다가 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는 점도 대단합니다. 즉 두 사건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다는 다른 서술 트릭도 등장하며, 곁가지로 사용된 트릭들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의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트릭,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열차와 충돌한 트럭에 쓰여진 회사 이름("오코노기" / "고시바")를 활용한 트릭 등이 그러합니다. 물론 이건 트릭이다! 라는게 노골적이라서 약간은 추리 퀴즈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수준도 높고 작품과 잘 연결되어 재미있게 묘사됩니다.
서술 트릭과 함께 이러한 트릭들이 연이어 펼쳐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지네요. 이렇게까지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투입한 역작은 최근에 본 적이 없으니까요.

범행에 관련된 동기도 비교적 설득력이 높아서 와이더닛 물로도 괜찮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 뇌성마비 아이와 관련된 유괴, 거액의 현금이라는 동기와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의 유명 작가 표절에 얽힌 동기 모두 그럴듯했어요. 특히나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거장 세가와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사카이의 작품에 얽힌 진상 - 사실 세가와가 1년 전에 죽은 사카이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었고, 이 노트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입수한 1년 후의 사카이가 표절한 것이라는 표절의 윤회 - 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첫 번째 사건을 "모방"한 이유도 비교적 타당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냐고 하면 선뜻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이름이 같은 다른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 (청산가리 음독)으로 자살한다는 것부터 트릭을 위해 사건을 만든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물론 이런 작위적이라는 굴레는 본격물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고, 트릭이 빼어나서 단점이라고만 하기 어렵습니다만, 소설로서의 완성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키코와 신스케가 각자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들, 즉 도가노 리쓰코(아키코)와 야나기사와 구니오(신스케)를 대면하자마자 즉흥적으로 범인임을 확신하고 공격하는 등 이야기의 밀도와 설득력이 낮기 때문입니다. 택시에서 몇 마디 들은 것을 가지고 처음 만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몬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또 비교적 공들인 트릭인 사진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했음에도 첫 번째 사카이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던가, 마찬가지로 알리바이를 공작한 편집장 야나기사와 구니오가 실제로 범인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허탈했고요.

작가 스스로도 정말 여러 번 고쳐서 발표한 작품이라는데, 고쳐 쓴 작품이 이 정도라면 역량 부족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괜한 욕심에 여러 가지 트릭을 넣어 이야기를 키우지 말고, 차라리 서술 트릭에 1년간의 시차를 이용한 표절의 윤회 중심으로 보다 짧게 썼더라면 완성도는 높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사카이 유괴 사건과 그로 인한 자살, 슌스케의 사카이는 표절의 진상 폭로를 걱정한 나카이에게 살해당한다 정도면 아주 깔끔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트릭들이 결합된 좋은 추리물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캐릭터와 묘사 역시 트릭에 비하면 좋다고 하기 어렵기에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5/12/02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김홍민 : 별점 2.5점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4점
김홍민 지음/어크로스

필명인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출판사 북스피어 사장 김홍민 씨가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한 글과 본인 블로그에 올린 글을 모아 출간한 책입니다. 

저는 마포 김사장 뉴스레터는 물론, 블로그도 RSS로 구독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때문에 그간의 재기발랄한 글들을 책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아주 기뻤습니다. 다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약적인 예산 하에서 지혜를 짜내 자신이 출간한 책을 홍보하려는 노력과 제목이기도 한 그의 철학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가 더해진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1부가 그러한 이야기 중심인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와 손톱"의 봉인 페이지에 대한 이야기
  2. 뒷날개를 활용한 등장인물 소개 (이건 정말 필요한 책에는 아주 최고일 듯 싶어요)
  3. 과학 소설 전문 출판사 '불새' 관련 기가 막히는 이야기: 공무원이었던 어느 남자가 로버트 하인라인의 "은하를 넘어서"를 읽고 출판사를 차린 뒤 과학소설을 내놓는다. 일곱 권의 책을 내고 문을 닫는다. 많은 이의 성원으로 재고를 처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불새 대표가 뭘 했느냐. 이런 빌어먹을, 다시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부분만큼은 원 글의 감동을 살리고자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또 작가, 출판인을 꿈꾸고 있는지라 여러모로 참고가 되는, 실전에 기반한 에피소드들인 2장의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다짜고짜 투고는 옳지 않다(출판사 절차를 따를 것), 공모전에 대한 팁 — 장면 전환에 전화를 이용하지 말라, 진부한 비유는 피하라, 평범한 보통 명사는 제목에 쓰지 말라, 불필요한 묘사로 시작하지 마라, 뻔한 기관 국정원 등을 주요 소재로 삼지 마라, 영화처럼 서술하지 마라(주인공의 시선과 행동만을 쫓아 전개했을 때의 문제), 짧은 장을 반복해서 만들지 마라 등 -,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왜 4의 배수인지와 판권 페이지 관련 이야기 등은 재미도 있고 유익했으니까요.

허나 몇 가지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긴 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에도물" 출간 논란이 대표적이죠. 일단, 북스피어가 키워놓은 시장을 날로 먹으려고 한 비채는 엄연히 상도의를 어긴 것이며, 도덕적인 면에서 비난받아야 함은 마땅하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선인세는 엄연히 작가에게 돌아가는 돈입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경쟁으로 내 작품값, 내 몸값이 올라가고, 출판사에서 그만큼 많이 팔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건 지극히 타당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에요. 즉, 좋은 작품을 썼고, 그것이 좋은 가격을 인정받고, 높은 판매를 보장받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선인세 경쟁으로 한국 출판사가 글로벌 호구가 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마포 김사장 말대로 적정 금액이 암묵적으로 있다면 그건 담합이죠. 왜 유통사가 콘텐츠 창작자의 창작물 가격을 마음대로 정한답니까? 선인세가 높아서 독자가 피해를 본다는 게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멀쩡한 책의 분책이나 동일 판형, 페이지 단행본 대비 가격 상승, 사재기를 통한 판매 부수 조작 등) 유통사들 간의 분쟁일 뿐, 독자와 작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뒤가 켕기는 건 출판사지 독자가 아니에요.
통일된 디자인과 판형으로 시리즈를 모으지 못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도 "아이스" 한 권만 피니스 아프리카에 말고 검은숲에서 출간되었고, 가가 형사 시리즈"신참자"만 출판사가 다른 등 이 바닥에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라 문제도 아닙니다. "경성 탐정록"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1, 2부 판형부터가 다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필요한가?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는데? 라는 생각을 드러낸 것도 섭섭했습니다. 한국 작가의 추리소설은 투자 대비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라면 최소한의 애정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꾸준히 각종 공모전을 개최하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와 너무 비교되는 마인드에요. 이래서야 그냥 장사꾼이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품만 영원히 팔 건가요?

이렇듯 마음에 안 들거나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앞부분, 1, 2부의 이야기는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인, 그리고 출판사를 지지하는 팬층이 두텁다는 것은 알겠고, 그렇게 두터운 팬층을 만든 마포 김사장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북스피어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비록 이전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기는 했지만(거절의 이유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경성 탐정록" 장편을 여기서 내 주면 참 좋겠다 싶긴 하네요. 마포 김사장의 재기발랄한 마케팅이라면 뭔가 될지도?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2015/11/05

더 스크랩 -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 별점 2.5점

더 스크랩 - 6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비채

무라카미 하루키가 외국 잡지에서 읽은 인상적인 기사를 자신의 감상과 함께 소개하는 짤막한 칼럼 모음집입니다.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가,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쓰면 끝이지요.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라고 머릿말에 작가 스스로 밝힐 만큼 거저먹는 기획물입니다. 기획부터가 풍요의 80년대다와요.

그래도 글 자체는 꽤나 재미있습니다. 특유의 고즈넉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여전히 독자에게 푸근함과 편안함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단 몇 줄, 심지어는 딱 한 줄이라도 본인의 감상을 적는 것에서 촌철살인의 묘미가 살아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80년대를 추억하고 자극할 만한 내용들이 제법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제가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 키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재미있어 보이는 물건 광고까지 소개해주고 있으니까요.
물론 저의 기억 속 80년대는 본 조비, 안전지대가 동급이었던, 그리고 "오렌지로드"가 현역이었던 80년대 후반에 가깝지만 "록키 3", "쿠조", "소피의 선택", "크리스틴" 같은 영화들이라든가 카렌 카펜터와 말론 브란도, 마리웰 헤밍웨이, 레지 잭슨, 빌 머레이, 휴이 루이스,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같은 유명인들, 스타워즈의 츄바카와 스크래블 게임과 같은 당대의 아이콘 등 제 기억에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들은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뒤에 실려 있는 도쿄 디즈니랜드가 오픈했을 때 방문했던 탐방기나 올림픽과 전혀 상관없는 올림픽 일기는 완전 부록, 사족 느낌이기는 하나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돈 주고 구입해서 읽기에는 아깝지만 잡지에서 한 꼭지 읽기에는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재미있는 글 모음집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콘셉트에 제대로 부합하는 글들이랄까요? 쉽게, 짤막하게 읽을 수 있는 글들로 저와 같이 80년대를 추억하실 수 있는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15/10/28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 권영주 : 별점 2점

애프터 다크 - 4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한밤중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아사이 마리는 밤샘 밴드 연습을 준비하는 다카하시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과거 언니 에리와 더블 데이트할 때 만났던 인물인데, 그를 통해 마리는 전 프로레슬러 가오루가 매니저로 있는 러브 호텔의 중국인 매춘부 폭행 사건을 도와주게 되었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것은 프로그래머 시라카와로 그는 근처 사무실에서 새벽 근무 중이었다. 한편, 아사이 마리의 언니 아사이 에리는 2개월 동안 끝없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2004년작. 장편이라고는 하는데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만 놓고 보면 중편이라고 해야겠지요. 길이도 적당하지만 읽기 편해서 집어들고 한번에 읽을 수 있었네요. 빼어난 세부 디테일 묘사와 청춘들의 잘 알 수 없는 고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묘사라는 장점도 여전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실험적인 묘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일종의 방백처럼 독자가 바라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설명하는 아시이 에리의 침실과 TV에 대한 묘사가 그러해요.

그러나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미사여구로 치장하여 보기에는 풍성하지만, 결국 정리되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에리의 잠은 깰 것인지, 마리와 다카하시가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을 배경으로 눈 속에서 데아트를 할 것인지, 시라카와는 중국인 조직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등 뭐 하나 설명되는게 없어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정도면 열린 결말도 뭐도 아니고 작가의 직무 유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책 소갯글을 보면 어둠의 감촉, 고독의 질감을 담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만큼 이미지 묘사에 주력했을 뿐입니다. 이야기만 놓고보면 성공적인 결과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거면 마리와 다카하시의 청소년 이상 성인 미만 청춘의 하룻밤 만남 이야기를 깔끔하게 그리는 것이 훨씬 쉽고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가 스스로도 한밤중 패밀리 레스토랑에 혼자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거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구상했다는 말 그대로 말이죠. 섹스 없는, 그냥 이야기만 있지만 묘하게 감정을 사로잡는 그런 이야기로요.
특히나 "상실의 시대"(저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세대라...)에서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공중전화로 전화하는 마지막 묘사 스타일로 마지막 둘의 이별을 그렸으면 정말 좋았을 거에요. 과연 마리는 맛있는 계란말이를 먹으러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설레면서도 두근거리는 여운을 남기는 식으로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분위기 묘사는 최고지만 독자에게는 아주 불친절한 작품이었다 생각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전방위적인 호평이 쏟아진 작품이라고는 하는데, 저는 이해하기 쉽고 보다 친절한 작품이 좋습니다.

덧 1 : 도서출판 비채의 추리소설 레이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로 출간되었는데, 이게 추리소설이라는 의미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데, 제 분류로는 "기타"입니다.

덧 2 : 매 장면마다 배경 음악이 소개되는 것이 특이한데, 잊기 전에 적어봅니다.

11:56 데니스

퍼시 페이스 고 어웨이 리틀걸

다카하시가 등장하여 파이브 스폿 애프터 다크 허밍

버트 배커랙 에이프릴 풀

12:25 데니스

마틴 데니 악단 모어

01:18. 작은 바

벤 웹스터 마이 아이디얼

듀크 엘링턴 소피스티케이티드 레이디

01:56 스카이락

펫 숍 보이스 젤러시

홀 앤 오츠 아이 캔트 고 포 댓

02:43 시라카와의 사무실

이보 포고렐리치 영국 모음곡

03:58 시라카와의 사무실

브라이언 아사와가 부르는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칸타타

집으로 가던 중 들른 세븐일레븐에서는 서던 올 스타스 신곡

04:52 연습실

소니 롤린스 소니문 포 투 (다카하시 밴드 연주)

05:10 세븐일레븐

스가 시카오 폭탄 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