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의(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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