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서커스 -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
사전 취재겸 대단한 목적없이 네팔에 도착한 <<월간 심층>>의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는 우연히 네팔 왕실 가족 피살 사건을 알게되어 취재를 시작한다.그녀는 숙소 도쿄 로지의 여주인 차메리를 통해 왕궁 경비대 소속인 라제스와르 준위를 만나 인터뷰를 시도하나 준위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부한다.
다음날 다치아라이는 '밀고자'라는 단어가 몸에 새겨진 살해된 준위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를 기사의 핵심으로 쓰려 하나 이후 여러가지 단서들을 모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데...
어쩌다보니 국내 출간작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고 있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장편. <<안녕 요정>>의 등장인물이었던 다치아라이 마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작품 소개를 보니 이런저런 상도 많이 수상했더군요.
읽으면서 일종의 '사회파' 추리물이라는 점에 놀랐습니다. 네팔을 무대로 보도라는 행위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묻고 있는데, 작가의 전작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2001년 네팔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왕실 가족 살해 사건을 주제로 보도, 기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의미의 작품을 써 내려갔다는 점에서 그 노력과 열정에는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리고 사회파라고는 하지만 추리적으로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부분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라제스와르 준위의 시체 등에 새겨진 'INFORMER'라는 단어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자주 쓰지 않는 말이라는 것과 네팔의 문자가 아닌 영문자로 새겼다는 점에 주목하여 글자의 내용보다 글자를 새긴 이유, 행위에 집중하여 결과를 이끌어내는 부분입니다. 옷을 벗긴 이유를 숨기기 위해서라는 진상도 나쁘지 않았어요. 밝혀진 진상, 즉 범인과 시체를 옮긴 사람든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 역시 꽤 기발했고요.
그 외에도 숙소 도쿄 로지와 다르마길, 인드라 초크, 타멜 지구 등 카트만두의 여러 거리들, 셀 로티와 달디단 치야와 모모, 하루에 두번 식사를 하는 네팔 사람들의 식습관 등 디테일한 풍광 묘사 역시 괜찮았습니다. 여정 미스터리의 느낌을 전해줄 정도였어요.
허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그다지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추리보다 사회파적인 부분에 중심축이 놓여져 있는 탓이 큽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무언가 물음을 던지기 위한 내용이 너무 길고 장황하거든요. 다치아라이가 네팔에 관광 관련 기사를 쓸까 하고 도착한 시점에서 왕실 가족이 살해당하고, 다치아라이가 비공개 인터뷰한 라제스와르 준위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 과정까지가 무려 300여페이지에 달할 정도입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런저런 소개할 것들이나 세세한 설정이 많긴 하지만 좀 지나치죠.
300여페이지에 달한 서두에서 정작 추리에 필요한 복선은 이웃방 미국 젊은이 롭의 말버릇이었던 '치프가 있다', 그리고 야쓰다에 대한 몇몇 세세한 설정들 뿐이라는 것도 지루함을 더합니다. 정작 롭의 말버릇과 총이 연결되는 과정은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일 뿐이며, 야쓰다와 대마초 밀매를 연결시키는 과정도 마찬가지라 이렇게 길게 풀어낼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에요. 마찬가지로 총이 없어졌을 때의 도쿄 로지내 사람들 위치도 표로 만들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 쓴 것에 불과합니다.
또 핵심 사건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전혀 다른 동기, 전혀 다른 관계자가 우연히 한 장소에서 조우하여 각기 다른 의도를 펼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인데 설득력이 낮아요. 자세히 설명해 드리자면, 앞서 이야기한 다치아라이의 추리, 즉 '글자를 새긴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라제스와르 준위 살인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준위가 살해당한 이유는 야쓰다와 대마초 밀매 관련 트러블이 벌어진 탓이며, 이를 위해서는 문구가 새겨지거나 시체가 이동될 필요가 없습니다. 준위의 시체를 옮겨 글자를 새기고 위장한 것은 다치아라이가 오보를 낼 것을 의도한 사가르의 부수적인 행동이고요. 이러한 일이 연쇄적으로 딱 맞게 일어날 확률은 기적에 가깝죠.
차라리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라도 공감이 갔더라면 그나마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기레기' 라고 불리우는 기자의 행태들, 제대로 된 취재도 없이 자신의 기사가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할지 생각도 하지않고 기사를 뿌려버리는 막장 행태는 저도 심하게 불만입니다. 하지만 다치아라이가 '라제스와르 준위는 기자와의 인터뷰 후 '밀고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라는 사실을 시체 사진과 함께 기사화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까지는 사실이라 문제될게 전혀 없습니다. 독자들이 추측으로 '아마 왕실 내부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한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생각하든 말든 그건 그 이후의 일이에요. 그리고 기사 발표 후 후속 기사를 준비하다가 사가르가 사실은 자기가 꾸민 짓이었다고 폭로한다? 솔직히 일본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다치아라이 역시 '사건은 미궁에 빠졌으며, 한 소년이 자작극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정도로 마무리하고 네팔을 뜨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사가르의 말대로 기자들이 멍청한 쓰레기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다치아라이가 기사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작중에서 설명됩니다. 사실 먹고살기를 제외하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내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밝혀내고 싶어.'라는 말. 많은 사람들이 같은 내용을 취재하고 보도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위한 무언가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다라는 말은 전부 이상일 뿐이에요.
이런 면에서 차라리 라제스와르 준위의 생각이 더 새겨들을만 합니다. 사람들이 기자를 믿을 하등의 이유는 없으며, 또한 진실만큼 왜곡되는 것도 없다는 것인데 100% 동의합니다. 어차피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다치아라이가 자신의 일에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도둑에게는 도둑의 신념이, 사기꾼에게는 사기꾼의 신념이 있다. 신념을 갖는 것과 그것이 옳고 그름은 별개야." 라는 답에 할 말을 잃고 마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맞는 말이니까요. 신념 운운하기 전에 먹고 실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의 독자들에게는 네팔 왕궁 사건 기사는 서커스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보다 솔직한 태도였을 것입니다. '앎'을 위해서, 무언가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위해서라는 말은 솔직히 얼토당토않죠.
제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이가 든 탓도 크기야 하겠지만 이상과 현실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이런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다면 국내의 현실을 반영하여 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네팔을 무대로 구태여 쓸 필요는 없어보였어요. 작가 스스로 네팔 왕실 사건을 일본 독자들에게 호기심거리고 던져 서커스화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네요. 기자는 안되고 작가는 써도 되는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작가의 전작에 비하면 추리와 재미면에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딱히 추천드리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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