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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09

옥수수밭의 아이들 - 스티븐 킹 : 별점 2.5점

옥수수밭의 아이들 - 6점 스티븐 킹 지음/영웅

스티븐 킹은 작품성은 그닥 인정하지 않지만 재미랄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다 여기는 작가입니다. 다른 책도 몇 권 구입했었는데 이번에 전집이 새로 출판되었더군요. 하지만 집에 이런 저런 스티븐 킹 단편집이 3권이나 있어서 이번에 새로 나온 정식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 역시 번역 출판된 책이 아닌 예전에 해적 출판했던 스티븐 킹 단편집입니다. 그래도 정식 번역본의 목차를 조사해 보니 제가 가지고 있는 단편집 3권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들어 있어서 별로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헌책방 만세!

여튼, 간만에 꺼내 읽은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작가 서문 : 광기와 공포에 관하여"
  • "그들은 때때로 다시 돌아온다"
  • "부기맨"
  • "악의 다리미"
  • "가짜봄"
  • "예루살렘의 땅"
  • "벼랑 끝에 선 사나이"
  • "옥수수밭의 아이들"

정식 번역본이 아닌 티를 내듯이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것이 조금 거슬리며, 특히 인명이나 지명이 일어 중역의 티를 팍팍 내 주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뭐 새책 산것은 아니니 불평은 여기까지!)

전체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전형적인 룰을 따르기보다는 드라마에 신경쓴 단편들이 실려 있습니다. 스티븐 킹 특유의 잔인한 묘사가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점 역시 그러한 점을 뒷받침하고요. 덕분에 호러 소설 초심자가 읽기에 적당한 수준의 작품들입니다. "금연 주식회사" 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요.
개인적인 베스트는 "악의 다리미"와 "벼랑끝에 선 사나이" 입니다. "악의 다리미"는 설정과 스티븐 킹의 전형을 잘 따르고 있는 점에서, "벼랑끝에 선 사나이"는 드라마에 굉장히 포커스를 맞춘 심리 단편이라는 점에서 추천할만 합니다.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결국 등장해서 빼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그야말로 무난한 단편집입니다. 공포가 조금 약한 편이긴 한데 개인적으로 읽을만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무난한 만큼 호러, 장르소설 입문자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품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돌아온다>
영화화된 작품이 30여편에 이르는 헐리우드가 사랑하는 작가 답게 90년대 초 영화로 만들어졌던 단편. 어린시절 형을 살해했던 건달들이 20여년이 지나서 자신이 부임한 고등학교에 한명씩 전학와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내용인데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평이한 편입니다. 마지막에 "주술"을 써서 그 건달들을 퇴치하는 결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고요. 그래도 스티븐 킹 입문으로 적당한 수준의 공포와 재미는 전해 줍니다.

<부기맨>
정신과 의사를 찾아온 한 남자의 독백으로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약간은 특이한 작품. 집 벽장에 숨어있다가 아이들을 전부 죽인 "부기맨"이라는 악령에 대한 공포를 토로하다가 마지막에 그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TV시리즈 "환상특급" 류의 반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악의 다리미>
악마가 깃들게 된 세탁기계에 대한 내용인데 특이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기계에 악마가 깃들게 된다는 상상력도 대단하지만 그 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결국 다리미 기계가 정말 괴물이 된다는 마지막 결론이 약간 어처구니 없긴 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스티븐 킹의 능력이 정말이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죠.

<가짜봄>
"딸기봄 (스트로베리 스프링)"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스트로베리 스프링"이라는 지방 특유의 날씨와 맞물리며 주인공에게 대학 학창 시절 벌어졌던 연쇄살인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야기로 줄거리는 주로 회상 장면을 토대로 진행되는데 "괴물"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스티븐 킹 작품 치고는 조금 특이했지만 마지막의 반전은 좀 약했습니다. 그냥저냥한 평작이에요.

<예루살렘의 땅>
악마주의 광신자들 교주의 피를 물려받은 가문의 후계자가 광신자들이 거주하던 잊혀진 도시 근처 저택에 살게되며 가문의 과거를 탐색해 간다는 내용. 악마와 광기를 다루는 묘사라던가 조용하게 보여주는 공포가 인상적입니다. 내용의 대부분이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 형태로 되어있는 것도 재미있고 간단한 암호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단, 대표작으로 알려져있지만 그 정도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벼랑 끝에 선 사나이">
공포보다는 심리묘사에 주력한 독특한 작품. 재벌의 아내와 불륜 관계에 빠진 주인공이 재벌의 덫에 걸려 무모한 내기를 하게되는 이야기인데 짧은 시간동안에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과 심리묘사를 효과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습니다. 스티븐 킹 소설치고는 이례적이지만 "금연 주식회사"같은 시니컬한 맛이 있어서 마음에 들더군요. (물론 "금연 주식회사"같은 멋진 반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옥수수밭의 아이들>
표제작이죠. 꽤 괜찮은 단편입니다. 제가 싫어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여러 설정이 상당히 공포를 잘 이끌어내는 편이거든요. 특히 "옥수수밭"이라는 존재를 공포의 토대로 묘사한다던가 아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라는 설정 등이 좋습니다. 마지막에 초자연적인 "옥수수밭 신"이 등장하지 않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말을 이끌어내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뭐 작가 취향이니까요. 영화화도 되었는데 조사해봤더니 원작 소설의 "설정"만 빌려온 전혀 다른 스토리의 작품이더군요.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경찰은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겁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지요.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흡입력의 비결이고요.

  •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와 같이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 관련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에 얽힌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이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입니다.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에요.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이거든요.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의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는 대사가 와 닿을 정도로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2/07/24

네 명의 의인 - 에드거 월리스 / 전행선 : 별점 2.5점

네 명의 의인 - 6점
에드거 월리스 지음, 전행선 옮김/양파(도서출판)

아래 리뷰에는 내용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악한 자들을 처단하는 자경단 네 명의 의인이 이번에는 영국 외무부 장관 필립 레이먼 경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가 추진 중인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면, 부패한 정부를 쓰러트릴 영웅 가르시아가 죽게 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네 명의 의인은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보내며 압박하지만, 레이먼 경은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사건 총 책임자 팰머스 형사는 레이먼 경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경은 결국 네 명의 의인이 경고한 시간에 자택 밀실 안에서 살해되고 마는데....

사회 정의를 위해 힘쓰는 4인조가 영국 총리를 암살한다는 내용의 모험물이자 범죄 추리물입니다. "킹콩"의 원작자로 당대의 유명한 스토리텔러였던 에드거 윌리스의 작품이지요.

20세기 극초반인 1905년 발표된 작품인데 상당히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았고, 지금 시점에서 읽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라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 악을 처단한다는 '자경단' 설정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재력과 변장 기술로 대표되는 특수 능력이 돋보이는 덕분이에요. 멤버 중 한 명인 테리가 조직의 기밀을 누설하려 하자 신문사로 복면을 하고 직접 찾아가 빼내온다던가, 팰머스 형사로 변장하여 총리에게 직접 협박장을 전달하는 등의 대범함에 더해 빼어난 추리력까지 갖춘 모습은 후대, 아니 현재의 DC나 마블 히어로들과 비교해도 딱히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 악당이지만 경찰과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며 매너까지 갖춘 안티 히어로적인 모습도 독특함을 더해주고요.'괴도 신사'의 영국 버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무엇보다도 레이먼 경이 수많은 경찰로 둘러쌓여 있는 밀실 안에서 살해된 트릭은 대단합니다. 레이먼 경이 자주 누르던 부저에 전기가 통하게 하여 감전시켜 죽였다는 건데, 지금 보면 왜 경찰이 진작에 알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만,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꽤나 그럴싸하면서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손에 있는 얼룩 흔적라던가, 머나먼 이국 독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네 명의 의인이 도둑맞은 수첩 속에 표기되었던 지명이 전기가 통하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는 등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이고요. 

모험과 범죄를 잘 결합한 전개도 좋았습니다. 좀도둑 빌리 마크스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빌리에게 호주머니를 털려 '4명의 의인'이라는게 드러난 네 명의 의인 중 한 명인 포이카르트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빌리를 찾아낸 뒤, 그가 자기들의 정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처단하는 부분이지요. 포이카르트는 대놓고 빌리에게 얼굴을 드러내어 그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가 보상금 때문에 일부러 경찰에 신고를 미루고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 뒤 다른 의인 맨프래드가 경찰을 사칭하여 빌리를 살해하게 되고요. 이 일련의 과정은 모두 합리적일 뿐더러, 추리는 물론 여러가지 디테일일들이 곁들여져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물론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부분, 작위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네 명의 의인의 활약 대부분은 변장 중심이며, 운에 많이 의지하고 있어서 딱히 스릴을 느끼기 힘들고 꽉 짜여진 정교한 이야기라고 하기는 무리인 탓입니다. 마지막에 테리가 왜 죽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리고 네 명의 의인 캐릭터가 약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한 명은 화학 전문가라는 설정 정도에 그치는데, 리더이자 돈줄, 브레인, 행동대장과 같은 식으로 각각의 캐릭터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A 특공대"처럼요. 트릭도 앞서 괜찮았다고 말씀드렸지만, 레이먼 경이 범행 예고 시각에 부저를 누른다는건 장담할 수 없었던 등 몇가지 디테일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100년이 넘은 고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재미를 가져다주는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당대의 인기가 이해가 되는 수준이었어요. 설정은 정 반대지만, 비슷한 시기의 대흥행작이었던 "팡토마스"와 비교해보자면, "팡토마스"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2020/03/21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5점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년전 헤어졌던 옛 연인 사야카가 그녀의 아버지 유품 속 약도와 열쇠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자고 부탁해왔다. 사야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이 집에서는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야카에게 자해의 흔적까지 봤기에 더더욱. 

그녀와 함께 출발하여 찾아낸 약도 위치의 기묘한 건물은 아버지의 열쇠로 지하실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은 '미쿠리아 유스케'라는 소년이 가족과 함께 살다가, 23년 전의 2월 11일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사야카는 왜 초등학생 이전의 기억을 잃었는지? 23년 전,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일이 사야카가 기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 집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는 사야카와 함께 집 안에서 찾아낸 유스케의 일기장 등을 단서로 이 의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4년 발표 장편으로, 존재를 몰랐던 작품인데 몰입감이 대단합니다. 초등학생 이전의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야카,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수수께끼의 열쇠와 약도, 그 곳에 위치한 기묘한 집, 지하실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집은 모든게 이십여년 전 어느 날의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였다는 등 도입부부터 아주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집 안의 시계가 모두, 심지어 서랍 속에 숨어있던 회중시계조차 11시 10분이라는 시간에 멈춰있는게 드러나는 묘사는 오싹할 정도였어요.
이어서 둘의 조사를 통해 발견한 집의 거주자였던 유스케의 일기, 미쿠리야 씨의 편지 등 여러가지 단서가 수집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게 만약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회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을거에요. 덕분에 한 번도 쉬지않고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추리물로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굉장히 공정합니다. 이 집과 미쿠리야가(家), 그리고 사야카의 과거에 대한 단서는 주인공과 사야카의 조사를 통해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스케의 일기와 아버지 미쿠리야의 편지 등은 주인공들이 입수하여 접하는 시점부터가 독자들과 똑같아요. 주인공들만 더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습니다. 사야카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고, 둘 모두 이 집에 처음 온 셈이니까요.
 트릭도 괜찮습니다. 일기와 편지를 통해 구성된 일종의 서술 트릭인데 깔끔하며, 설득력도 높거든요. 진상은 유스케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미쿠리야 씨는 알고보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조부모가 손자를 거두어 키우면서, 손자로부터 아버지처럼 여겨졌다는건 아주 드문일도 아니지요. 사야카의 정체가 유스케의 동생 히사미였다는 극적인 반전 역시 이 진상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일기 속에서 히사미를 '차미'라는 애칭으로 부를 때, 이를 주인공들이 고양이로 착각했다는 전개도 자연스러웠고요.

거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집 한채와 남녀 주인공 2명만이 등장하는데, 이 만큼의 몰입감을 전해주는 전개도 대단합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무대 장치가 간단하고 등장 인물이 적더라도 장면 장면의 임팩트가 있는 작품이라 연극에는 별로 적합하지는 않아 보였고, 저예산 영상물로 찍으면 아주 좋겠더군요. 왜 아직 영상물이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판권을 사서 조금 각색해도 괜찮을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나 책 뒤 해설에서 '어정쩡하다'고 하는 - 2012년 독자 일만명이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인기 랭킹에서 36위를 차지하는 등 - 이유도 대충은 이해가 됩니다. 서술 트릭 전성기에 야심차게 도전한 결과물로 보이는데, 억지가 지나친 탓입니다. 집의 정체가 가장 억지입니다. 크노소스 궁전과 같은, 죽은 당시를 재현해 놓은 일종의 무덤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현실적이지 않지요. 크노소스 시대도 아니고, 현대 시점에서 구현하기에는 지나친 낭비니까요. 별로 큰 돈은 들지 않았다고 설명은 되지만, 지하실에다가 방 여러 개를 갖춘 단독 건물을 세우고, 그 안의 인테리어도 모두 갖춘다고 하면 억 단위의 돈은 들었을겁니다. 만든 뒤의 관리 문제도 크고요. 또 이야기를 살펴보면, 할머니는 이 비극적인 범죄를 비밀로 하고 싶어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비싸고 거창한 무덤을 만든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야카의 기억 상실과 자녀 학대가 과거의 끔찍한 성추행과 오빠의 죽음으로 빚어졌다는 진상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물론 유스케가 밤에 우연히 들었다는 그 '소리'가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맞고, 굉장히 충격적인 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 - 성추행, 그리고 오빠의 죽음 - 이 기억 상실을 불러왔다는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야카의 자녀 학대를 이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써 먹은 건 큰 잘못이에요. 어찌되었건 자녀 학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성추행과 자녀 학대 설정은 빼고 "몽환화"처럼 풋풋한 두 남녀의 모험물로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사야카의 아버지가 비록 할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한 들,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그 집 아들이 일으킨 사고로 죽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 딸 대신 원수의 집 딸을 대신 딸처럼 키웠다? 제대로 키울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친 딸이 죽어서 제대로 슬퍼하거나 공양조차 하지 못한다는걸 받아들인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할머니까지 죽었다면 모를까, 엄연히 육친이 살아있잖아요. 비밀을 지키고 싶었다면 조손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새롭게 삶을 이어가도 되고요.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좋은 작품인건 분명하지만, 대체로 억지스럽다는 서술 트릭물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읽어 볼 만은 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외출이 어려운 요즈음, 집에서 가볍게 읽어보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길이도 적당한 편이니까요.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4/05/23

앤더슨의 테이프 - 로렌스 샌더스 : 별점 2.5점

앤더슨의 테이프 - 6점 로렌스 샌더스 지음/고려원(고려원미디어)

존 "듀크" 앤더슨은 우연찮게 만나게 된 유부녀 "애그니스 애벌리" 덕에 방문하게 된 호화 아파트 한 동을 통째로 털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어둠의 세계 속 여러 동료들의 힘을 빌어 듀크는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지만, 모든 범행은 각종 사법기관 및 관계 당국의 도청 장치들에 의해 모니터되는 중이었다. 그래도 계획은 성공했으나 의외의 결말을 맞게 되는데...

'로렌스 샌더스'는 상당히 유명한 작가이지만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계명" 시리즈나 "대죄" 시리즈 등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읽어본 것은 "피터 S의 유혹"이라는 남창 지골로물 뿐이었는데, 그 작품이 아주 시시껄렁했고 작풍이 '시드니 셀던'스러워서 그동안 별 관심은 없었더랬죠.
그러던 중 이 책이 마침 poirot님의 블로그에서 소개된 것을 보고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하던 차, 자주 가던 헌책방에 떡하니 놓여 있길래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문고본 헌책이라 굉장히 저렴하기도 했고, 작가의 데뷔작이니만큼 매너리즘에 빠진 펄프 픽션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습니다.

읽어보니 한 번에 읽게 되는 흡입력이나 구성력은 "로렌스 샌더스"라는 작가의 명성이 허언이 아니구나 싶더군요. "앤더슨"이라는 캐릭터나 그가 계획을 진행해 나가는 단계까지는 정말로 흥미진진해요.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은 확실하달까요?

또한, 소설의 전개를 전부 "도청 테이프"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이어나간다는 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뒷부분의 작품 해설에서는 마이클 클라이튼의 "안드로메다 스트레인"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소설적인 장치나 트릭 면에서는 "안드로메다 스트레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용이 뻔하고 결말 역시 예상대로라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모처럼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에요. 무엇보다도 실제 범행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인해 한순간에 계획이 틀어진다는 마지막 부분이 가장 실망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제가 싫어하는 불필요한 성적인 묘사가 난무해서 작품 전체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이런 묘사는 '시드니 셀던' 류의 펄프 픽션과 별다를 게 없네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펄프 픽션과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괜찮은 범죄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그런 작품이에요. 그냥저냥 무난한 데뷔작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확실히 괜찮았어요. "대죄"나 "계명" 시리즈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계획의 가장 큰 교훈이라면... "피해자를 절대 봐주지 마라!"

2005/02/16

밀랍 인형 (Wax Work) - 피터 러브시 : 별점 4점

밀랍인형 - 8점
피터 러브제이 지음/뉴라이프스타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립 식물원이 있는 고급 주택가 큐 스트리트의 고급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진사 하워드 클로우머의 조수 퍼시벌이 독살당했다. 경찰은 그가 사진사의 아내 미리엄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미리엄을 기소했다. 그녀는 피해자가 즐겨 마시던 와인 디캔터에 사진관에서 쓰던 청산가리를 넣어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술서를 제출했고,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며칠 안 남은 어느날, 형사부장 크리브에게 이 사건에 대한 엄중 조사 명령이 하달되었다. 사실은 독약을 꺼낼 수 있는 금고의 열쇠는 피해자 퍼시벌과 남편 하워드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리엄은 열쇠를 손댈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건 수사에 나선 크리브는 미리엄 주변에 비슷한 형태의 자살-독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워드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하워드가 종적을 감춘 탓에, 크리브는 법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는 사형수 미리엄과의 면회를 통해 진상을 밝힐것을 결심하는데....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로 접했던 영국작가 피터 러브시의 작품. 작가에 대해 호감도 있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여러분들의 호평을 인터넷 상에서 익히 접해왔기에 헌책방에서 눈에 띄었을때 주저없이 구입하였습니다.

고전 황금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영국이 무대입니다. 손에 잡힐 듯한 시대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작가의 시대 묘사는 특출합니다. 3편의 장편 모두 다른 시대가 배경인데도 말이지요. 현대가 무대인 "마지막 형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 초엽의 "가짜경감 듀"나 이 작품 모두 창문 밖 거리를 보고 쓴 듯한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권이거든요. 특히나 이 19세기 후반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적당히 수사와 재판 등의 조직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한 듯한" 고전 추리소설적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인데 작품과도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작품 속 탐정역의 크리브 형사 부장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데, 상사에게 치여살며 만년 형사부장에 머물러 있는 궁상맞은 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자존심도 있고 행동력, 추리력이 탁월한 능력있는 탐정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홈즈를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당시 경찰에도 레스트레이드같은 무능한 인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설정은(출세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뭐 레스트레이드도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능력있는 인물이겠지만요.

하지만 이 크리브 형사 부장보다 이 작품을 빛내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리엄이라는 영국 스타일 "팜므파탈"입니다. 주로 "몸"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은 미국식 팜므파탈에 비교해서 상류계급의 귀부인이라는 사고방식, 엄숙하고도 단정하면서도 곧은 행동거지로 무장하고 약점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독사같은 면모를 갖춘 독특한 악녀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냅니다.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 역시 갖추고 있고요.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은 굳은 마음과 치밀함도 큰 무기입니다.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하며 무너지긴 했지만,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였습니다. 이야기도 스토리텔러로서의 피터 러브시의 진가를 잘 보여줍니다. 크리브 형사부장이 서서히 사건을 파헤치며 드러나는 과거의 또 다른 자살 사건, 그리고 과거 사건과의 이해할 수 없는 연관성에서 비롯된 추리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승부! 결국 마지막에 "일사부재리 원칙"이라는 결정적 법 조항으로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반전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를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드러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다왔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인과 타소 밀랍 인형관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다 긴장감을 자아내면서도,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는 연출 역시 발군이고요.

하지만 작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인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승부에서 크리브 형사부장이 이끌어내는 부분은 약간 치밀함이 부족했고(물론 이 사건에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전제조건이 있어서 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해답이 급작스럽게 돌출된다는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트릭으로 지적 흥분과 재미를 가져다 준다는건 분명합니다. 중편 정도의 부담없는 분량도 매력적이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만한 매력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PS : 그나저나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는 물론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좀 길었다고 느껴졌었는데 이 책은 깔끔하네요. 아무래도 이 정도 길이가 저한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2003/05/16

시간의 침묵 - 제임스 패터슨 : 별점 1점

시간의 침묵 - 2점
제임스 패터슨/우리시대사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패터슨의 '알렉스 크로스'형사 시리즈 1작. 

심리학 학위를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도 근사한 흑인경찰 알렉스와 영화배우의 딸을 유괴하고 몸값을 가로챈 천재 유괴범과의 한판 승부를 그리고 있는데, 소설보다는 전형적인 한편의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흑인이라는 것을 빼면 주인공 알렉스 크로스 형사는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캐릭터와 똑같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정신이상범죄자 역시 영화에서 친숙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없이 쉽게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흥행요소들을 차용했지만 작가가 그다지 뛰어난 스토리텔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범인은 억지스럽고 평면적이라 진부하기 짝이없고, 꽤 공들인듯한 극적 반전도 너무 터무니 없는 탓입니다. 도저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추리소설로는 많이 부족한, 싸구려 펄프 픽션 형사물입니다. 영화로 만들면 더 효과적일것 같기는 하고, 그래서인지 영화화가 되긴 했는데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된건지 이해하기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딱 한가지, 알렉스 크로스 형사가 책에서는 건장한 중년 흑인으로 나름대로 섹시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영화에서는 모건 프리먼이 주연이라서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를 어떻게 표현했을지가 약간 궁금하긴 합니다. 덴젤 워싱턴이 적역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어차피 안볼거지만...

2007/03/28

기묘한 신부 - E.S 가드너 / 장백일 : 별점 2점

기묘한 신부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변호사 페리 메이슨에게 한 여성이 찾아와 자신의 친구의 이야기라며 실종된 남자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페리 메이슨은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녀를 설득하여 진실을 털어놓게 유도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고 사무실을 떠나고, 그녀가 이미 선금을 지급한 것을 알게 된 페리 메이슨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사건에 대해 대략 파악하게 되나 그녀의 전 남편 그레고리가 피살된 후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는데...


페리 메이슨 시리즈. 리뷰는 "관리인의 고양이"와 "말더듬이 주교" 이후 세번째네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러모로 다른 작품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다른걸 다 떠나서 "실제로 의뢰인이 사건을 저질렀다" 라는 황당한 진상 탓이 크죠. 때문에 페리 메이슨이 법정에서 사건을 뒤집는 결정적 장면도 "꼼수" 일 뿐이며 그 속에 담긴 진상을 파악해서 역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실망스러웠어요. 진상 역시 희박한 근거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 추리적으로 보기에 상당한 무리가 있었으며, 그녀가 범행을 저질렀고, 그것은 정당방위였다라는 당연한 이론을 도입하지 못하는 과정의 설득력도 빈약했고 말이죠.

또한 굉장히 간단할 수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결혼"이라는 설정을 도입해서 불필요하게 질질 끈 티가 나는 것도 별로였습니다. 별거 없는 사건인데 왜 이리 등장인물은 많은지... 게다가 등장하는 대부호와 그 아들 캐릭터는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라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꼭 무슨 붕어빵 기계에서 찍어놓은거 같은 전형적인 미국식 대부호 캐릭터더라고요.

물론 흥행 대마왕이자 탁월한 스토리텔러인 가드너의 작품답게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이런저런 재미만 놓고 본다면 꽤 괜찮은 편이긴 하거든요. 또 제가 읽은 페리 메이슨 시리즈 중에서는 법정씬이 제일 길고 유쾌하며 활약도 엄청나서 페리 메이슨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후대 미국의 대중 소설에 큰 영향을 준 듯한 요소가 많이 보여서 나름 흥미로우며 재미만 놓고 본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나 앞서 말했듯 추리적으로 헛점이 많아서 잘 된 추리소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중소설"과 "추리소설"의 줄타기를 잘 실천한 작품이긴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0/02/11

교통경찰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 이선희 : 별점 2.5점

교통경찰의 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바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연작단편집. 총 6편의 단편이 "교통사고"라는 일관된 주제로 실려있습니다.

먼저 단점부터 이야기하죠. 일단 이야기의 얼개가 대부분 허술했습니다. 사건에 우연이 많이 작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교통사고라는 주제에 있어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너무 직접적으로 강하게 드러내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초기작이기 때문이겠죠?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먼저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은 "천사의 귀"와 "버리지 마세요"를 들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편 "천사의 귀"는 장님소녀가 특이한 재능을 이용하여 교통사고의 진짜 가해자를 밝힌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 이야기되듯 신호등 표시 시간이 변경되었는데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으며 이러한 소녀의 노력과 관계없이 너무나 우연한 제 3자의 비디오 촬영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는 것에서 정교한 느낌을 받기 어려웠어요.
다섯번째 단편 "버리지 마세요" 역시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이죠. 나름 치밀한 살인극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이 살인극이 도로에 버린 캔 깡통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결국 우연이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결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피해자인 카메라맨이 범인의 범행을 눈치채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아예 다르게 풀어버리고 결말은 우연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라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살인극 자체는 괜찮았던 만큼 아쉬움이 크네요.

그리고 설득력 부족은 "분리대"와 "불법주차"라는 단편에서 크게 느껴졌습니다. 두 작품모두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두드러지나 동기와 결말에 있어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예컨데 두번째 단편 "분리대"는 독자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아줌마 캐릭터 덕에 무단횡단에 대한 사회고발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에는 성공하고는 있지만, 결말이 개운치 못합니다. 경찰의 약간의 조사만으로도 복수를 위한 자해라는건 쉽게 밝혀질테니까요.
네번째 단편 "불법주차"는 불법주차 차량으로 제시간에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은 아이의 복수라는 이야기로 역시나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확실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이라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네비게이션이 부정확한 길을 알려줘서 그것때문에 손해본 사람이 복수한다" 라는 이야기와 다를것도 없잖아요. 뭐 나름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단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장점도 명확하죠. 위에 예를 든 단편들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대단하니까요. 또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에 값하는 추리적인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 말이죠.
특히 세번째 단편 "위험한 초보운전"같은 경우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이 치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려 이 단편은 동기부분에서 다른 단편들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사건의 결말까지 범인이 의도한대로 정확하게 흘러가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단편 "거울 속에서"는 우발적 사고를 토대로 한 공정한 추리 수사물로 우연과 작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정통 수사물이라 할 수 있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었고 결말이 미적지근하다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의 등장이라던가 전체적으로 감도는 따뜻한 느낌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도 잘 살아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을 매기자면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장단점이 명확한 만큼 2.5점 주겠습니다. 초기작인것을 감안한다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봐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충분히 보여주니까요.

2004/12/15

대열차 강도 - 마이클 크라이튼 : 별점 3.5점

대열차 강도 - 8점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명지사

대열차강도

상류 계급의 신사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피어스의 정체는 사실은 범죄자이다. 그는 신사 생활의 친구인 은행 지배인 헨리 파울러를 통해 얻은 정보 등을 종합하여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 영국 군인들의 봉급으로 지불되는 금괴 1만 4천 파운드를 훔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 기관지가 좋지 않은, 하지만 뛰어난 열쇠 위조공인 에이거를 끌어들이며 금고의 열쇠 4개중 2개의 복제를 위해 "스네이크스맨" 클린 윌리를 탈옥시켜 합류시킨다. 
충직하며 잔인한 마부 바로우와 피어스의 정부이자 미인이며 뛰어난 배우인 여인 미리엄 등으로 이루어진 일당은 열쇠를 모두 복제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지만, 다른 도난 사건으로 열차의 경비가 강화되게 되자 피어스는 스스로 위험을 짊어지고 모든 난관을 뚫고 계획을 성공시킨다. 하지만 윌리의 배신으로 결국 검거되게 되는데....

마이클 클라이튼의 초기작으로 실제 영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고 합니다.
흡사 영국 신사의 전형으로 보이는 주인공 에드워드 피어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필리어스 포그가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의 치밀한 계획, 그리고 발생하는 여러 난관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뚫고 나가는 담대함은 클라이튼의 흡입력 있는 구성으로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에요.

재미에 더해 빅토리아 왕조 시절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압권입니다. 철도 전성시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및 당대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에 대한 묘사, 부르조아 계급 및 하층 계급에 대한 설명, 거기에 여러 세부적이고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식까지 자연스럽게 집어넣고 있으며 (ex : 매독에 걸리면 숫처녀와 사랑을 하면 낫는다는 당시의 사고방식 등) 당시 크리미아 전쟁 및 인도 세포이 여단의 반란 같은 당대 대 사건들도 적절히 인용하고 있습니다. 당대에 쓰여진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에요. 이러한 묘사와 해설 덕분에 지적 만족감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고요.

하지만 거의 후반부까지 이르는 피어스 일당의 치밀한 계획 및 그 성공에 비해 체포 자체는 "제보"에 의한 것이 약간 시시했으며 검거 후 변호 활동이나 탈옥을 위한 노력은 별로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쉬웠습니다. 주인공 피어스의 재치와 위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거든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주인공이 승리하는 구도로 그려지는 결말은 만족스럽습니다. 유사한 구성으로 주인공의 범죄 계획에서 실행에 옮기는 단계까지를 숨가쁘게 그린 "앤더슨의 테이프"는 주인공이 결국 실패한다는 결말이 개인적으로 석연치 않았고 뭔가 아쉬웠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당이긴 하지만 집요한 노력의 성과 덕분에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은 나름의 해피엔딩이라 생각되네요. 피어스는 이 계획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탁월한 스토리텔러로서의 마이클 크라이튼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SF쪽으로 많이 치우치고 있지만 범죄 스릴러에도 탁월한 만큼 앞으로는 이쪽 분야의 걸작도 계속 써 주었으면 합니다.

2007/11/20

마신유희 - 시마다 소지 / 김소영 : 별점 2.5점

마신유희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김소영 옮김/두드림

스웨덴에서 뇌과학 연구를 진행하던 미타라이 기요시는 "기억의 화가"로 유명한 로드니 라힘과 만난다. 로드니는 기억 속 마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는데 그 그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티모시" 라는 마을과 똑같다는 것이 밝혀져 유명해진 인물.
그 뒤 이 마을 "티모시"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괴물의 울음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참극. 다섯 명의 희생자들은 잡아 뜯기고 찢기어 죽임을 당하고 마침 마을을 방문한 미타라이가 경찰 수사에 뛰어들어 엽기적 사건 현장 뒤에 숨겨진 진상을 하나씩 밝혀나가기 시작하는데...


나에게 주는 선물 2탄은 간만의 본격 추리 소설 "마신 유희" 였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워낙에 재미있게 읽었기에 미타라이 시리즈가 새로 출간된다는 것에 많은 기대를 했었던터라 관심에 비한다면 외려 너무 늦게 읽은 것 같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물과 그의 수기를 바탕으로 구약 성서와 연관시켜 전개되는 소설의 전개는 굉장히 흡입력 있고 재미 하나는 최고 수준이지만 추리적인 부분에서는 살짝쿵 아쉬움이 남았거든요.
트릭이 너무 작위적이라는 것이 제일 큰 감점 요인입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의 "아조트"와 같은 설득력이 많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트릭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범인도 초인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건 현실성이 많이 떨어졌고 (심지어는 작품 안에서 "철인 3종 경기" 운운하며 범인의 체력을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범인이 범행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 준비한 각종 장치들 역시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탓입니다. 아울러 여러가지 불가능한 상황 -괴물의 울음소리나 사람을 찢어(?)버리는 괴력 등-에 대한 단서의 제공도 공정해 보이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종의 서술 트릭이 등장하는데 범인을 특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이라는 칭호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마지막의 범인을 밝혀내는 깜짝쇼 역시 너무 패턴 그대로라 진부했어요. "이 안에 범인이 있다" 수준이었거든요. 그 외에도 점성술사였던 미타라이가 어느새 천재 교수로 돌변한 것에 대한 의아함과 어색함도 있었고요.

그래도 장점을 꼽아보자면 범인의 동기는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유산"이라는 동기는 좀 진부하지만 실제로 가장 많은 사건의 동기이기도 하고 그만큼 현실적이기도 하니까요. 또 앞서 말했듯 재미 하나만큼은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천재적인 정신병자(?)의 과거와 그가 작성한 구약 성서에 바탕을 둔 수기, 그리고 그 수기와 맞물려 일어나는 초인적인 범죄라는 이야기는 읽는내내 두근두근거릴 정도로 흡입력 강한 재미를 선사해 주거든요. 일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네스호를 배경으로 한 영국의 시골마을에 대한 묘사 역시 뛰어나서 재미를 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깜짝쇼에서 숨겨진 진짜 마을의 정체와 사건, 수기에 얽힌 진상이 밝혀지는 반전만큼은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불만스러운 점도 많았지만 작가의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묘사와 기본 설정, 그리고 그것을 끌어나가는 힘 하나는 역시나! 싶더군요. 비록 추리적으로 아쉬움은 있지만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2016/07/25

몽환화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몽환화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키야마 리노는 올림픽 대표로까지 손꼽혔던 수영 선수였지만, 심리적 이유로 수영을 그만두었다. 그 뒤 리노는 사촌 나오토의 자살 후 가까워진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의 꽃 사진들을 블로그로 만드는걸 돕게 되었다. 그러나 아키야마 슈지가 살해당했고, 경찰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리노, 리노를 우연히 알게 되어 돕기 시작한 가모 소타, 개인적 인연으로 아키야마 슈지에게 보은을 하려는 경찰 하야세, 소타의 형으로 수면 밑에서 은밀하게 수사를 진행하는 요스케 등 여러 명이 사건 해결에 나섰고, 결국 그들은 사건에 정체불명의 '노란색 나팔꽃'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스탠드 얼론 작품입니다. 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언급되기에 2010년대 이후 발표된 근작이라 생각했는데, 책 뒤 해설을 보니 10여 년 전부터 연재해왔던 작품을 수정·가필해 단행본으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장점부터 말씀드리자면, 재미있고 속도감이 넘친다는 점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도입부로 시작해 여러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흥미를 자아냅니다. 결국 하나로 모여 깔끔히 끝나는 마무리도 좋고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주인공 커플이 몇 안 되는 단서를 가지고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모험에 약간의 추리가 더해진, "부부 탐정" 스타일의 작품인 탓에 온전한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 와중에 등장하는 추리 역시 작가의 명성에 걸맞습니다. 현장에 남겨진 단서 — 젖은 방석, 페트병 차가 담긴 찻잔 — 을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하야세 경부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왜 시원한 페트병 차를 마시는데 유리컵이 아니라 찻잔을 사용했을까? 찬장에 근사한 유리컵이 있었는데?’라는 극히 사소한 의문에서 시작되는 추리가 아주 설득력 있습니다. 아들 유타와의 인연으로 오갔던 연하장의 내용이 주요 단서가 되었다는 건 다소 작위적이지만,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고요.(무언가의 성취를 기원해 차를 끊는다는 것이 일본에서 일반적인 문화인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또 아키야마 슈지가 개화시킨 노란 나팔꽃이 살인의 동기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예상과 다른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보통 이런 설정이라면 거액의 돈이나 비밀 조직이 얽혀 있기 마련인데, 손주의 친구에게 살해당했다는 평범한 결말인데 오히려 신선했던 덕분입니다.

소타와 리노의 성장기적 서사도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리노의 심리적 약점 극복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소타가 원자력 전공자로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빚도 유산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재미와 흥미에 비해 진상이 다소 시시합니다. 제목 그대로 ‘몽환화’라 불리는 나팔꽃 씨앗에 환각 효과가 있어 에도 막부메이지 시대에 걸쳐 통제되었지만, 마취제로 활용했다는 가공의 역사 설정까지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범인이 단지 우연히 얻은 씨앗의 환각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 번식 의뢰를 한 마사야라는 점은 김이 빠집니다. 역사적 스케일의 설정은 결국 곁가지일 뿐이니까요.

현대 파트에서도 가모와 이바 가문이 대를 이어 비밀리에 나팔꽃을 쫓는다는 설정, 소타가 나팔꽃 사건 피해자의 후손이며 첫사랑이 그와 얽힌 이바 가의 딸이라는 설정은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이 정도면 ‘핫토리 가문이 아직 닌자 일을 한다’는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작품 속 수수께끼 대부분이 이 두 가문의 비밀스러운 행각 때문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요스케가 소타에게 진상을 숨긴 이유, 이바 다카미가 구도를 추적하며 가명을 쓴 이유, 다카미가 소타를 만나고 도망치듯 떠난 이유, 요스케가 리노에게 정체를 숨긴 이유, 하야세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 모든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요.
또한 뭔가 거대한 비밀에 휘말린 듯 보였던 리노와 소타 커플은 불필요한 ‘헛수고’를 했다는 뜻이기도 해서 허무합니다. 슈지 살인사건의 범인은 하야세가 밝혀냈고, 노란 나팔꽃의 진상은 요스케와 다카미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스터리를 만든 건 리노가 초반에 하야세 경부를 믿지 못한 탓인데, 그것조차 설득력 있지는 않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가모 소타보다는 경찰 하야세가 더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하지만 단점도 뚜렷하여 감점합니다. 그래도 작가의 팬이라면 읽어볼 만 합니다.

2020/02/28

백은의 잭 - 히가시노 게이고 / 한성례 : 별점 2.5점

백은의 잭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게쓰 고원 스키장의 스키 시즌이 막 시작한 즈음, 익명의 메일이 도착했다. 스키장에 폭탄을 묻어두었다는 협박 메일이었다. 관리 책임자 쿠라타의 의견과는 다르게, 경영진은 돈을 주고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협박범과의 거래를 위해 쿠라타는 스키장 패트롤 요원 네즈, 후지사키, 키리바야시의 도움을 얻는걸 허락받고, 3천만엔의 몸값을 건네 주었다. 그러나 몸값을 건네준 뒤에도 범인들의 협박은 계속되는데...

얼마전에 골프를 소재로 한 추리 소설을 읽었었죠. 이번에는 스키장을 무대로 스키어와 스노보더가 활약하는 작품입니다. 이른바 '설산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지요. 

우선, 히가시노 게이고의 스노보드, 스키장 사랑은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노보드에 빠진 경위를 설명하는 에세이를 전에 읽었었는데, 확실히 푹 빠졌구나 싶더라고요. 스키장과 스노보드, 스키 등 동계 스포츠에 대한 묘사가 아주 빼어나거든요.

그러나 단지 취미 생활을 소재로 한 소일거리 작품은 아닙니다. 범죄물로도 아주 괜찮아요. 스키장을 협박하는 범인들의 계획부터 그럴싸하니까요. 경영자 입장에서는 협박받은걸 경찰에 신고하여 영업을 그만두는게 더 큰 손실인건 당연하겠죠.
하지만 이건 그냥 양념에 불과합니다. 뒤에서 밝혀지는, 폭탄을 실제로 묻은건 현재 경영진이라는 진상은 더욱 놀랍습니다. 이유도 굉장히 설득력이 높아요. 스키장 매각을 용이하게 하려고 인기없는 호쿠게쓰 구역을 눈사태를 일으켜 없애버리려는 속셈이었던 겁니다. 일본의 법에 따르면, 스키장을 폐쇄하게 되면 그 지역의 자연을 원상태로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그 돈을 투자하느니 아예 날려버리는게 낫기 때문입니다.
이는 범인들에게도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범인 중 한 명인 마스부치 히데나리는 인기없는 코스가 엮여 있는 마을 촌장 마스부치의 아들이거든요. 그는 스키장에 매수된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난 뒤, 계획을 저지하려고 스키장 협박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범인들이 여러 차례 돈을 요구하며 협박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돈을 손에 넣을 때 마다 스키장 슬로프 일부만 안전하다고 정보를 흘리면서, 국제 스키대회인 크로스 대회를 호쿠게쓰 구역에서 개최하게끔 유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호쿠게쓰 구역만 일단 안전한게 밝혀지면, 스키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리라 생각한거에요. 

그리고 세 번째 협박이 스키장 경영진의 역습이었다는 아이디어도 기발합니다. 협박을 자작한 뒤 폭탄을 터트리고, 범인들이 협박에 실패하여 벌인 짓이라고 할 속셈이었다는데 이 역시 충분히 말이 되니까요. 여러모로 버블 이후 스키장의 어려움, 그리고 일본의 법을 잘 활용한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이러한 범인, 스키장이 얽히고 섥혀 서로가 목적을 위해 암투를 벌이는 복잡한 이야기를 경찰에게만은 절대로 알리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은밀히 네즈에게 범인을 쫓아보라고 말하는 경영진의 석연치않은 행동이라던가, 일부러 네즈가 추격전을 벌일 수 있도록 유도한 세 번째 협박장 등을 통해 잘 드러내는 전개도 빼어납니다. 범인들이 스노보드의 명인들이라서 슬로프에 놓인 돈을 쉽게 회수할 수 있었다는 것도 결말과 잘 연결되고요. 안전보다는 돈을 더 생각하는 스키장 경영진, 이에 반대하는 관리 책임자 쿠라타와 용기있는 패트롤 대원 네즈와 후지사키 캐릭터도 단순하지만 이해하기 쉬워 좋았습니다. 쿠라타와 후지사키의 로맨스, 말괄량이 스노보더 치아키의 발랄함과 활약도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호쿠게쓰 구역에서 일어난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이리에 부자가 폭발에 의한 눈사태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는 마지막 결말 부분은 억지스럽습니다. 이리에 타쓰키의 경우, 전날 그 장소에서 극심한 공포를 느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다시 그 곳에 가고싶다고 이야기한다? 이건 말도 안되죠. 설령 아버지에 끌려 갔다치더라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패트롤의 도움을 받는게 당연하고요.
게다가 신게쓰 고원 스키장을 매입하려는 세이운코사의 회장 부부가 이들 부자와 정말로 우연히 엮여 함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칩니다. 히요시 씨가 죽다가 살아난 뒤, 그 코스에 더 애착을 느낀다는건 억지 전개와 결말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작위적인 부분을 들어내고, 경영진의 음모와 이를 눈치챈 협박범 정도의 구도로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꼭 필요했다면 우연은 범인들이 이리에 부인을 사망케 한 사고를 일으킨 스노보더였다는 정도로 끝내는게 좋았을거에요.

뭐 그래도 시원한 범죄 오락 소설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몰입해서 읽게 만드니까요. 스토리텔러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잘 발휘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기 작가의 괜찮은 오락 소설이니 영상화된건 당연한데, 조사해보니 TV 스페셜 드라마로 2014년에 방영되었더군요. 그런데 쿠라타 역은 와타나베 켄, 후지사키 리오 역은 히로스에 료코, 네즈 역은 오카다 마사키라는 나름 화려한 캐스팅에 놀랐습니다. 캐스팅 때문인지 네즈보다 쿠라타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 보이네요. 뭐 이런 각색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설산에서의 박력있는 활강은 전혀 그려내지 못한 듯 싶어 제대로 볼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2021/02/06

숙명 - 히가시노 게이고 / 권남희 : 별점 2점

숙명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역 최고 회사인 UR 전산 대표였던 우류 나오아키가 병사한 뒤, 회사 사장이 된 스가이 마사히코가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흉기는 우류 나오아키가 생전에 수집했던 무기 중 하나인 독이 든 석궁이었기 때문에, 범인은 우류 가문 관계자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사건 수사를 맡은 형사 중 한명인 와쿠이 유사쿠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우류 가문이 숨기고 있던 비밀에 대한 수사에 집중한다. 어린 시절, 우류 가문 아들 우류 아키히코와 엮였던 여러가지 인연과 추억 때문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0년에 발표한 비교적 초기 장편입니다.

UR 전산 사장 스가이 마사키요 살인 사건은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흉기를 통해 범인은 우류 가 근처에 있는 사람들로 특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기만 알아내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지요. 당연히 이야기도 '왜 살인 사건을 저질렀는지' 에 대한 탐구가 핵심이고요.

탐구 결과, 스가이가 우류 나오아키가 사망한 뒤 그의 유품 중에서 강탈한 '전뇌' 어쩌구가 써 있었다는 오래된 파일, 스가이가 뇌 의학 전문가에게 접촉했다는 증언, 관계자인 우에하라 박사와 우류 아키히코 모두 뇌의학자이며 오래전 죽은 사나에의 지능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 중요 단서들이 모두 초반에 드러납니다. 독자는 이를 통해 과거 사나에에게 불법으로 뇌에 관련된 실험이 자행되었고 비밀 파일은 그 실험을 다룬 것이며, 스가이는 이 실험을 묻어두려는 관계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뻔한 소재인 탓입니다.

하지만 그냥 뻔하지만은 않습니다. 형사 와쿠라 유사쿠의 수사로 30여년에 걸친 장대한 비밀이 한꺼풀 씩 드러나는 전개가 굉장히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직후 우에하라 마사나리는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됩니다.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하여 사람의 감정 조작이 가능하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연구 성과 발표는 묻혀버렸지만, 대기업 우류공업 대표이사 우류 가즈아키가 우에하라 박사를 지원하며 연구가 은밀하게 재개됩니다. 그들은 7명의 남녀 피실험자를 모아 '전뇌식 심동 조작 방법' 이라고 이름붙인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뇌수술을 받고 실험 중이던 피실험자들 중 4명은 탈주하고, 남은 3명은 원상 복구 수술을 받은 뒤 2명은 죽어버립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여성 사나에도 심각할 정도로 지능이 퇴화해 버리고요. 이런 비참한 결과를 본 우류 가즈아키와 우에하라 박사는 연구를 영원히 묻어 버리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여기에 더해 의외성 있는 설정과 전개가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백미는 우류 아키히코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단서가 작품 곳곳에 드러나지만, 진범은 우류 나오아키의 충신 중 유일하게 회사에 남았던 마쓰무라 겐조 상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억지스럽과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문제는 큽니다. 어린 시절부터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와쿠라 유사쿠와 우류 아키히코가 사실은 사나에가 낳은 쌍둥이 형제였다는건 눈에 거슬릴 정도였어요. 우류 아키히코야 그렇다쳐도, 와쿠라 유사쿠까지 사나에 아들이라고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나에가 쌍둥이를 낳았다면, 우류가문에서 두 명 다 입양하는게 맞지, 한 명만 전혀 관계없는 다른 곳에 입양보낸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또 이란성 쌍둥이라면 아무리 외모가 다르더라도 성격이나 취향은 닮은 점이 많았을텐데, 마지막에 비밀이 드러난 뒤에서야 이를 언급하는건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7인의 실험체 중 한명이었던 에지마 소스케의 딸 미사코와 유사쿠가 고등학생 때 교제했다가 헤어진 뒤, 미사코가 우류 아키히코와 결혼했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왜 아키히코가 미사코와 결혼했는지도 설명이 부족했고요. 형제라서 이성에 대한 취향도 비슷했다는 것일까요?

그 외에도 우류 아키히코의 배다른 동생들인 히로마사와 소노코가 의기 투합해서 스가이를 죽이려고 한게, 마침 살인 사건이 저지른 딱 그 날 그 시간이라던가, 우류 아키히코가 석궁 화살촉을 수리했던 순간접착제를 떨어트린걸 마침 아내 미사코가 발견한다던가 하는 등 우연이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작품이 그만큼 정교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래서야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추리적인 부분도 별로에요.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과 석궁을 현장에 가져다 둔 사람이 다르다는 트릭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투서를 보내서 경찰에게 이 트릭이 간파된 뒤에는, 사건은 해결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자 중에서 오전 시간에 석궁을 가져다 놓을 수 있던건 가사 도우미 스미에 씨 밖에 없었으니까요. 지나가던 여중생들 증언이 아니었더라도, 마쓰무라 겐조의 운명은 정해진거나 다름이 없었던거지요. 석궁 화살깃 수리와 같은 디테일은 솔직히 불필요한 사족으로 느껴졌고요. 

유사쿠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던 사나에 죽음에 대한 진상도 어색했습니다. 실험 재개를 노렸던 스가이 가문이 납치하려 할 때 병실에서 떨어져 죽었다는데, 누가봐도 분명한 살인 사건을 경찰이 이렇게 쉽게 덮는게 가능했을까요? 가능했다 치더라도, 유사쿠의 아버지가 사나에가 유사쿠 모친이라는걸 알았다는게 사건을 덮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저라면 아이 어머니 복수를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섰을거 같은데 말이죠. 최소한 사건을 덮었다면, 죽을 때 유사쿠에게 남긴 비밀 수사 노트에 그 진상은 써 놓았을 겁니다.

우류 가문이 지켜왔던 비밀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있지만 석연치는 않습니다. 우류 가즈아키와 우에하라 박사부터가 좀 웃겨요. 연구를 묻어버리기로 했다면 파일도 바로 없애버렸어야죠. 왜 화근을 남겼는지 모르겠어요.

스토리텔러로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솜씨가 잘 드러나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이 너무 많아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오래전 숨겨왔던 가문의 비밀이 도화선이 된 사건이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건 오다 경부보이고, 주인공 유사쿠는 순전히 과거의 비밀에 집중한다는 구조 등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몽환화"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밝은 미래를 향해 젊고 열정적인 커플이 발을 내딛는다는 "몽환화"하고는 반대로, 이 작품의 유사쿠는 숙적이자 형제인 아키히코에게 완패하고 쓸쓸히 물러선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시대가 느껴지네요. 버블이 막 끝날 1990년의 일본과, 아베노믹스로 막 부활하기 시작한 2013년 일본의 시대상이 그렇게 달랐으리라 짐작됩니다.

2022/10/15

이별의 수법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5점

이별의 수법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근무하던 탐정사무소가 폐업한 탓에 빈둥거리다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하무라 아키라. 위험한 구석이라곤 없는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녀의 불행은 멈추지 않는다. 뇌진탕과 갈비뼈 골절, 폐 손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말기 암으로 입원해 있던 왕년의 스타 배우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된다. 얄궂게도 그녀는 하무라 아키라에게 20년 전 가출한 자신의 딸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하무라는 실종 직후 딸의 행방을 좇았던 탐정을 찾아가지만, 그 탐정 또한 20년 전에 실종되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의뢰인의 6촌 조카는 교살당했으며, 의뢰인의 집에서 일했던 두 명의 가정부의 행방마저 묘연하다. 왕년의 배우를 둘러싼,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잦은 살인과 실종 사건들. 20년 전 실종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들 사이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탐정은 왜 사라졌을까? 하무라 아키라는 20년이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오래된 비밀과 마주한다. (출판사 제공 소개)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장편. '살인곰 서점' 시리즈가 국내에 출간된지는 꽤 되었는데, 이 작품이 살인곰 서점 시리즈 중에서는 첫 작품입니다. 해설을 읽어보니 시리즈 연착륙을 노리고 단편집부터 발간했던게 이유였다는데, 독자로서는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 처사입니다.

작품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답게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별 것 아닌 의뢰로 보였는데, 조사가 진행되면서 의외의 사건으로 발전해 나가며 그 와중에 거친 (?) 액션이 폭발한다는 이야기거든요. 일반인들, 그리고 평범한 일상속 이야기가 많았던 다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와는 다르게 정통, 본토 (?) 하드보일드 냄새를 물씬 풍긴다는 점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과거 유명 여배우이자 유력 정치인의 접대부 (?)였던 의뢰인, 의뢰 대상인 실종된 여배우의 딸은 유력 정치인의 손녀 + 강간 피해자 + 연쇄 살인범, 딸이 저지른 연쇄 살인의 끝은 어머니 살해라는 내용이니까요. 스케일은 본토 못지 않아요. 제목부터가 <<기나긴 이별>>스러웠는데, 알맹이도 만만치 않았던거지요.

다행히 이런 스케일 크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잘 그려내고는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와 그녀가 조사하는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잘 묘사된 덕입니다. 전개도 매끄러우며 하무라 아키라의 조사 과정도 아주 현실적이에요. 경찰이 아닌 일반인 탐정이 가능했을 조사의 최고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남다른 하무라의 눈썰미와 추리력은 여전하고, 사소한 단서들로 진상이 드러나는 구조도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 외에 함께 진행되는 사건들의 완성도도 높아요. 후부키가 하무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계기가 되었던, 백골 발견 사건처럼요. 살아있는 줄 알았던 아내 에이코가 알고 보니 변장한 남편이었고 백골이 에이코였다는 트릭인데 꽤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탐정 이와고 사건의 진상도 설득력 높아서 마음에 들었고요. 장편 속에서 지나가는 사건으로 등장하는게 아니라 하나의 단편으로도 충분했을, 완성도 높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하무라 아키라 2기 살인곰 서점 시리즈의 막을 여는 작품답게 백곰 탐정사 설립 유래도 등장하고,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 등 팬으로 즐길거리도 많아서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2016년 발표 당시 이런저런 리스트에서 베스트 10 안에 포함된건 - 주간문춘 베스트 미스터리 10위, 고노미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6위 등 - 당연하다 생각되네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전개 중간중간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눈에 걸리는 탓입니다. 우선 후부키가 하무라에게 딸 시오리를 찾아달라고 의뢰한 것 부터가 억지입니다. 과거 시오리가 사라졌던건 후부키가 시오리의 살인 행각을 알고난 뒤 시오리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후부키는 시오리가 죽었고, 충직한 비서 야마모토가 사체를 처리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녀 주변에 시오리를 닮은 누군가 (알고보니 진짜였지만)가 출몰했기 때문에 그 진상을 알기 위해 사건을 의뢰했다는데, 이건 말도 안됩니다. 20년 전에 시오리를 처리했다는 충직한 비서 야마모토는 건재했으니까요. 그냥 야마모토에게 연락해서 진상을 알아보면 될 일이었어요!
야마모토가 시오리와 관계를 가진 탓에 미안해서 연락을 못 받았다는 묘사가 있지만, 그랬다면 의뢰는 비서를 찾아달라는걸로 족합니다. 시오리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면, 탐정의 조사를 통해 과거의 연쇄 살인이 드러날지도 모르잖아요. 20년 전 처럼 시오리 친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실제로 하무라는 시오리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그녀가 사라진 이유 등 모든 진상을 알아내는데 성공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억지스러운 의뢰였습니다.

시오리의 연쇄 살인도 하무라의 조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급작스러울 뿐더러 비현실적인 사건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이건 시오리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그녀의 캐릭터가 제대로 구성되지 못한 탓입니다. 고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했었다는 과거 언급이 전부인데, 이 아픈 기억이 연쇄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전혀 설명되지 않고, 범행에 대한 묘사도 전무하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야마모토의 여동생 유코는 그녀가 시오리를 도발했다는 말이라도 나오는데, 가정부와 이모 할머니는 대체 왜 죽인건지도 모르겠어요.
후부키가 시오리의 최종 목표였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그럴거라면 과거에 가정부와 이모 할머니를 살해했을 때 같이 죽이려 했어야지요. 또 시오리가 입원 중이었던 병원을 몰래 빠져나온지도 3주 정도 지났다고 설명되는데, 왜 주위만 맴돌고 진작에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까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뚱뚱한 시오리가 후부키를 덥치고, 그걸 막는 하무라와의 사투는 지나칠정도로 전형적이면서 크리쳐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웠고요.
매니저 야마모토의 복수 - 성폭행을 저질러 시오리를 연쇄 살인마로 만든 안자이에 대한 - 도 뜬금없었고, 20년 전 1990년대에 이렇게 많은 죽음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단순 실종이나 자연사로 위장한 이모 할머니 사건이야 그렇다쳐도 명확한 살인 사건이었던 하나 사건, 유코 사건은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을텐데 그 경과는 대충 넘어갑니다.

또 곁가지 사건 중 친구인 줄 알았던 악녀 마미가 얽힌 사건은 비중은 제일 큰 반면 내용은 별게 없어서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이벤트를 가장한 불법 카지노 운영 방식에 대한 추리는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순진한 사기 피해자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하무라를 속여넘긴 프로 범죄자이자 일종의 생활밀착형 사이코패스 마미 묘사만큼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에 계속 등장하는 민폐 캐릭터의 확장형이기도 한데, 이후 시리즈가 생활밀착형으로 방향을 전환하게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재미만큼은 분명합니다. 단점을 잔뜩 언급하기는 했지만 읽는 동안에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나쁜 토끼>>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에서 생활밀착형 하드보일드인 살인곰 서점 시리즈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작가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