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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빵의 지구사 - 6점
윌리엄 루벨 지음, 이인선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얼마 전 "향신료의 지구사"를 읽고 탄력받아 한권 더 집어든 '지구사'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여덟 번째 리뷰군요. 시리즈 완독까지는 두 권 남았네요.

그 동안 읽었던 '지구사'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커리의 지구사" 였습니다. '커리'가 무엇인지에서 시작해서, 커리의 역사와 세계화된 과정, 대표적인 커리 요리까지 화려한 도판과 함께 짤막하면서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리즈 다른 책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특히 이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마음에 듭니다. 어떤 빵을 어떻게 만들었을지에 대해 관련 사료를 통해 잘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농경 생활을 택한 뒤 빵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수렵과 채집 생활에 비해 부정적이었다는 시각이 독특했습니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농경 도입으로 노예 제도가 생겨났다고 주장했고, 창세기를 다룬 구약 성경과 유대 신화에서도 농업은 부정적이었다고 하네요. 최초의 농부였던 카인은 가장 처음 살인을 저지르고, 하느님에게 거짓말을 하며, 비자발적 노역으로 도시를 세운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랍니다. 유대 신화에서는 불신의 상징인 저울과 자를 끌어들였고요. 그럴듯하죠? 

하지만 농경 생활은 필연적이었고, 결국 이 덕분에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를 '빵'과 연결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우르크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한 설명입니다. 기원전 3200년경,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농경지에 효과적으로 물을 대는 중앙관개농법이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쌓이게 되었고, 그 덕분에 전 인구가 농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분업과 전문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3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진화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고대 빵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서술에도 불구하고,밀의 종류, 배합, 이스트의 종류 등을 모두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어서 현재 어떤 빵인지 재현하는건 어렵다고 하는 주장도 신기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로마 시대 등 빵에 대해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시대 모두 마찬가지라고 하니까요.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재현이 가능한 빵은 근세시대 (1500년 이후)에 처음 등장한다는군요.

이러한 빵의 탄생 이후는 부자와 빈자가 빵으로도 구분되는 시기에 대한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버스 마컴의 "영국 주부" (1615) 속 하류층 농장 노동자를 위한 갈색 빵 레시피가 아주 충격적이기 때문이에요. 특징은 완두콩 가루를 섞은 것인데, 놀랍게도 저자 마컴이 경주마에게 먹이는 빵보다도 못한 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 재료, 맛 모두가 별로였던 하위 계층의 빵은 당연히 상위 계층은 거부해 왔는데. 이 현상이 빵의 역사를 이끌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은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16세기 ~ 18세기 흰 빵은 부의 상징이며 갈색 빵은 가난의 상징으로, 이런 상징은 저도 당시를 다룬 소설 등에서 많이 접해보았었습니다. "하이디"에서도 '하얀 롤빵'이 선망의 대상이었죠?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호밀빵을 멀리하는건 현대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이건 모든 식품, 사치품, 기호품에 해당되는 내용이 아닌가 싶어요. 구태여 '빵'에 한정지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맛있는 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도 별로에요. 밀가루의 종류, 발효 방법, 설탕을 넣는지 소금을 넣는지 등 다양한 빵 제조법을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설명은 깔끔하지만 기대했던 지구사적인 설명은 아니었거든요. 좀 더 빵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어지는 세계의 빵 소개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그냥 국가별 빵 몇 가지가 등장할 뿐이며, 미래의 빵도 자가 제조 기계가 발전하고 공장제 빵도 진화할거라는 일반적인 이야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제 특성상 유럽 중심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약점이에요.

다행히 부록처럼 수록된 주영하의 한국 빵 역사가 실망을 조금은 만회해 줍니다.조선 시대 이기지가 청나라 연행길에 먹었던 카스테라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일제 시대 널리 퍼졌던 빵 문화가 해방과 6.25 후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제과제빵의 거목인 삼립 식품과 크라운 제과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주 나쁘지는 않고, 얻을게 없지도 않지만 제목처럼 빵의 범지구적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2018/11/30

위스키의 지구사 - 케빈 R. 코사르 (주영하) / 조은경 : 별점 2.5점

위스키의 지구사 - 6점
케빈 R. 코사르 지음, 조은경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눈에 띌 때마다 한 권씩 사 모으고 있는,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출간된 "~ 지구사"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이번에는 제목 그대로 위스키의 역사를 다루는데, 위스키란 곡물을 발효시킨 후 증류하여 만든 술이라는 정의에서 시작하여 기본적인 제조 방법의 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스키의 기원이 무엇이며 "위스키"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등 실제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위스키'가 '우스키', 즉 '생명의 물'을 뜻으로 '오스케바'라고 발음되는 게일어를 영어화한 것이라는데 재미있네요. 어원부터가 '생명의 물' 이라니!

다음은 맨 처음 위스키를 만들었다는 스코틀랜드, 경쟁자였던 아일랜드, 신대륙 미국에서의 국가별 위스키 역사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 위스키는 저도 무척이나 좋아하는터라 소개가 반가왔습니다. 그다지 잘 알려져있지 않은 아일랜드 위스키의 역사도 흥미로왔고요. 아이리시 위스키는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데 로크스 (locke's)라는 싱글 몰트 위스키는 구할 수 있다면 한 번 구해보고 싶네요. 미국 위스키의 역사는 정착민이 처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등 전반적으로 새로운 내용은 많지 않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이 위스키 애호가라는 등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괜찮았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 전쟁 당시 군대에 항상 충분한 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무척 놀랐네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걸까요? 이후 알 카포네 등으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금주법 시대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고요. 그리고 "21" 이라는 제목으로 현재의 위스키 시장과 상황을 설명하며 내용은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지구사' 뒤에 한국의 음식 문화 전문가 주영하 씨의 한국 위스키의 역사가 특집으로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본편보다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처음에 위스키를 발음대로 '유사길' 이라는 한자로 표시했다는 내용부터 대한 제국 시절의 유통 과정, 일본 강점기 시기 위스키 시장의 확대와 위스키 원액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유사 위스키'의 등장, 그리고 해방 후 상황으로 이어지는 내용 모두 말이죠. 아무래도 우리 역사에 관련된 내용이라서 그랬던 것 같네요.

이렇게 대충이나마 통사적인 접근도 가능하고, '지구사'라는 말에 걸맞게 각 국가별 현황에 대해서 다루어 주기 때문에 위스키에 대해 대충이나마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역사만 서술된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지만 주영하 씨의 글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기도 하고요. 위스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으시다면 읽어보실 필요가 없겠지만, 이쪽 분야를 좋아하시거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2/14

커리의 지구사 - 콜린 테일러 센 / 강경이 (주영하) : 별점 4점

커리의 지구사 - 8점
콜린 테일러 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지구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있는 식문화 역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이 전에 시리즈 중 세 권을 읽고 리뷰를 남겼었죠(위스키, 치즈, 피자). 그런데 예쁘게 잘 만들어져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시리즈는 구입했지만 그동안 손대지 않고 있던 차에, 얼마전 읽었던 "카레라이스의 모험"을 읽고 급작스럽게 땡겨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습니다. 커리에 대한 역사는 물론, 세계화된 과정과 세계속 커리 요리들, 그리고 커리의 현재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동안 항상 궁금했었던, '커리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채소와 고기를 기름에 볶은 매콤한 카릴 혹은 카리라는 남부 인도 요리가 영어로 '커리'로 변형되고, 이 말이 일반적인 인도 요리를 가르키는 말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고요. 중국 요리를 서양에서 '찹 수이'라고 퉁쳐 말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인 셈이죠.
그리고 원래 인도 아대륙에는 강황, 생강, 카마린드, 인도산 후추라는 자생 향신료가 있었는데, 인도 상인들이 다양한 국가와 교역을 하면서 온갖 외국 요리들이 인도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뒤 포르투칼과 영국 등의 침략, 식민지 운영을 통해 서양 요리가 인도 요리, 재료와 결합되며 18세기 말에는 영국인들에게 '커리'라는 말과 요리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커리의 오랜 세월을 거친 발전 과정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인도 뿐 아니라 인도인들이나 다른 교역을 통해 커리가 전파된 이웃 국가들의 커리 요리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습니다. 영국은 물론,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식민지 운영 국가는 물론 카리브 해, 모리셔스, 스리랑카, 피지 및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커리가 어떻게 전파되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가지 요리들의 명칭과 상세한 소개는 물론, 유명 요리의 경우 간략한 레시피까지 수록되어 이해를 도와주는데 미국 남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커리 중 하나라는 영국식 인도 음식 컨트리 캡틴 치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록된 '리델 박사의 컨티리 캡틴 치킨' 레시피는 1849년 출간된 서적에서 인용된 것인데 현대 커리 레시피와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양파를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될 때 까지 볶다가 잘게 썬 닭고기와 소금, 커리 가루를 뿌리고 볶은 후 수프를 부어 끓이면 됩니다.

상세한 설명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아요. '탄두리 치킨'이 파키스탄 난민 쿤단 랄 구즈랄에 의해 만들어진지 고작 7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레시피라는 것입니다! 버터 치킨 역시 쿤단 랄 구즈랄이 만들었다니 그리 오래 된 요리가 아닌건 마찬가지고요. 탄두리 화덕의 역사와 함께 하는 오래된 레시피라 생각했는데 의외였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주영하 님이 쓴 한국 커리의 역사도 자료적 가치가 무척 높습니다. 일본인들에 의해 20세기 초반 전파된 후, 1930년대 이후는 일반화되었고 해방 이후 1960~70년대에는 이미 직장인들의 주된 점심 메뉴로 자리잡았으며, 같은 시기에 인스턴트 카레가 발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과정이 도판과 함께 충실히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지구사" 시리즈다운 판형과 디자인도 마음에 들며, 풀 컬러로 수록된 도판과 각종 자료도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과연, 카레왕이 추천할 만 합니다. 카레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카레라이스의 모험 - 모리에다 다카시 / 박성민 : 별점 3점

2020/04/24

초콜릿의 지구사 - 사라 모스, 알렉산더 바데녹 / 강수정 : 별점 2.5점

초콜릿의 지구사 - 6점
사라 모스.알렉산더 바데녹 지음, 강수정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의 출판사에서 '식탁 위의 글로벌 히스토리'라는 주제로 간행하고 있는 'oo의 지구사' 시리즈 중 한 권. 모두 열 권의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습니다. 저도 소장용으로 모으고 있지요. 리뷰를 올리는 건 이 책으로 여섯 권 째네요.

전반적인 시리즈의 컨셉은 비슷합니다. 일단 해당되는 주제의 음식, 또는 재료를 어떻게 먹기 시작하였고, 그 뒤에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통사적으로 훝어봅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나 재료가 우리 식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미칠 것인지를 고찰하며 마무리 됩니다. 그 뒤에는 주영하가 저술한 해당 음식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서술한 부록, 해당 음식과 재료로 만드는 요리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고요. 음식, 재료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할애하여 초콜릿의 재료인 카카오를 언제부터 어떻게 먹기 시작하였는지를 마야와 아즈텍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정복 이후 유럽으로 전파되어 세계화 되는 과정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거든요. 마야, 아즈텍 유물이라던가, 각종 문헌과 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한 도판과 함께 설명해주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고요. 이를 통해 처음에는 의학적 효과와 최음제 등의 용도로 쓰이다가,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게 된 이후 18세기 초에는 이미 현대의 핫 초콜릿과 비슷한 레시피가 등장하였으며, 18세기부터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아침 식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으며 온갖 레시피가 쏟아져 나오는 등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만 한 건 사드 후작과 초콜릿의 관계였습니다. 사드 후작이 감옥에서 초콜릿을 원한건 이게 계급을 상징하는 일종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논리이지요.

이후 19세기 들어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으로 비로서 초콜릿이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때 즈음부터는 과거의 사치품이 아니라 영양가 높고 저렴한 간식이자 음식이 된 거죠. 따뜻한 가정의 이미지와 일체화 되어서요.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온갖 세계의 초콜릿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공정 무역, 서아프리카의 아동 노동과 강제 노동을 통한 카카오 산업의 어두운 부분과 같은 문제와 함께 여성성과 남성성, 쾌락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는 초콜릿의 상징성, 그 이미지에 대한 고찰을 끝으로 글은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다른 'OO의 지구사'와는 좀 다르게 각 시대별로 초콜릿이 무엇을 상징했는지?라는 '이미지'에 집중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먹거리라기 보다는 기호품에 가깝기에 이렇게 접근했을텐데,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패션이나 시계, 쥬얼리나 와인과 유사한데, 초콜릿과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하거든요. 시계도 쿼츠라는 기술이 탄생한 뒤, 일반화되었지만, 고급 명품 초콜릿 '그랑 크뤼' 처럼 기계식 시계 카테고리가 아직 건재한 것과 같은 이치지요. 다양한 마케팅으로 구축된 '이미지'가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통사적인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너무 이미지 측면에 집착한 탓입니다. 그리고 제 컨디션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잘 읽히지 않더라고요. 찬찬히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또 언제나 본 편 이상의 기쁨을 안겨다주었던 주영하의 부록도 이번에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초콜릿 도입과 발전 및 '발렌타인 데이' 등 초콜릿으로 탄생한 문화 현상을 함께 다루기에는 1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깊이있는 접근이 아쉽네요. 레시피도 이번에는 눈여겨 볼 만한게 없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초콜릿이라는 음식, 재료보다는 그 상징성과 이미지에 대한 고찰이라는 측면은 좋았지만 재미와 다른 부분의 가치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17/03/30

피자의 지구사 - 캐럴 헬스토스키 / 김지선 : 별점 2.5점

피자의 지구사 - 6점
캐럴 헬스토스키 지음, 김지선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의 '~의 지구사' 시리즈 중 한권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치즈의 지구사"는 많이 실망스러웠었기에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이 책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피자라는 음식의 발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발전하여 세계화가 되었는지를 통사적으로, 시대순으로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거든요. 각 시대별 대표 피자와 주요 변곡점도 확실하게 체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요. 제목 그대로 이 책 한권만 읽어도 피자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충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책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피자의 시작과 초기 발전 과정을 다룹니다. 당연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요. 최초의 피자는 단순한 음식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재료를 얹어 구워서 만드는 납작한 빵은 신석기 시대에서도 둥그런 반죽을 구워 먹었다고 할만큼 흔했으니까요. 그러나 누가 먼저 둥글납작한 빵을 그릇으로 만들고 그 위에 소스를 얹거나, 다른 음식을 담는다는 발상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나마 비슷한게 고대 그리스의 빵 '플라쿤토스'입니다. 토핑을 바로 빵 위에 올려 굽는 것이지요. 빵을 접시나 그릇으로 사용하여 요리를 담아낸다는 기본 개념은 피자와 같습니다.
이후 이탈리아에 토마토가 재배되고, 18세기에 드디어 피자에 토마토가 쓰이기 시작합니다! 나폴리에서 19세기에 빈민들을 위한 음식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요. 마침내는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의 아내 마르게리타 여왕이 나폴리에 방문해 '마르게리타' 피자를 대접받은 후 본격적으로 성장해서, 2차대전 후 인구 이동과 함께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나가게 됩니다.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보잘것 없는 음식이었지만 이민과 관광이 붐을 이루며 널리 전파된 것이죠.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토핑으로 변주가 일어나자 피자의 기원을 자처한 나폴리의 전통 피자 요리사들이 정통 나폴리 피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통나폴리피자협회 (VPM)를 결성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VPN이 인정하는 정통 나폴리 피자는 마르게리타, 마리나라, 마르게리타 엑스트라 피자 뿐이라는데 엄격한 지침을 따라서 만들어야 한다니 꼭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2장은 미국으로 이주한 나폴리 이민자들을 통해 피자가 미국에 뿌리내리며 대중화되는 과정 - 2차대전 이후 군인, 이민자들에 이해 미국에서 피자 소비가 대중화되고, 피자헛과 같은 피자 체인점과 냉동 피자가 속속 등장하면서 거대 산업을 이루게 되는 - 을 담고 있습니다. 이민자 요리들을 자체적으로 재조형하여 미국 음식을 만들어 낸 방식이 피자에도 제대로 발휘되어 더 이상 이탈리아 전통 에스닉 푸드가 아니라 미국이 사랑하는 음식이 된 것이지요. 산업화되며 대량생산, 규격화, 지속성이라는 3대 원칙을 포함해서요.
하지만 1장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고 피자헛, 도미노 등 체인점과 냉동 피자 산업 등 산업화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소개됩니다. 그래도 '시카고 피자'의 유래는 기억에 남네요. 텍사스 출신 아이크 슈얼이 오픈한 레스토랑 '우노'에서 선보인 딥디시 피자가 최초라고 하는데, 예전 삼성동 KOEX 우노에서 먹어본 적이 있기 때문으로 덕분에 아주 오래전 옛 추억이 잠시 떠올랐답니다.

3장은 피자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피자헛의 세계 진출, 각 지역별 특별식, 엔터테이먼트 ("닌자 거북이"와 같은)와 결합하여 피자 자체가 유행이 되는 과정 등이 소개되며, 마지막 4장은 피자의 미래라는 제목인데 별 내용은 없습니다. '토핑 재료에 제한이 없는 한 피자는 영원할 것이다, 그 독특한 특성과 함께'가 전부니까요. 페이지도 10페이지가 안 될 만큼 짤막합니다. 딱히 언급해드릴게 없네요.

그리고 주영하씨의 "피자, 한국 정복의 역사"가 부록처럼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처럼 한국에 피자가 진출한 과정을 통사적으로 상세하게 소개한 글입니다. 책 성격에도 부합할 뿐더러 내용도 충실하여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형적인 주영하씨 음식관련 미시사 글이었어요. 뒤에 실린 진짜 부록인 다양한 피자 레시피도 집에서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읽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내용이었고요.

이렇듯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있으면서도 식욕까지 불러일으키는 좋은 책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3장, 4장 내용이 좀 부실해서 감점하지만 피자를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읽고나서 가장 안타까운건 우리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피자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산업화한 미국식 피자라는 것입니다. 저렴하고 빠른, 패스트푸드 측면에서 피자 체인점의 역할은 분명 있겠지만 나폴리 사람들이 사랑한, 여왕에게 마친 마르게리타 피자만큼은 쉽게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한식 요리점에서 퓨전 한식만 팔고 정작 김치는 내어놓지 않는 것과 다를게 없잖아요?

2020/04/12

밀크의 지구사 - 해나 벨튼 / 강경이 : 별점 2.5점

밀크의 지구사 - 6점
해나 벨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oo의 지구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책이 워낙 예뻐서 눈에 뜨이는 대로 한 권씩 구입해 두기는 했는데, 처음에 읽었던 몇 권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 카레왕추천으로 읽은 "커리의 지구사"가 아주 좋아서, 나머지도 계속 읽어볼까 하여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처럼 밀크, 즉 우유가 우리 식문화에 자리잡은 역사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일 첫 단락은 왜 인류가 동물의 젖을 먹어야 했으며, 언제부터 젖을 먹기 시작했는지입니다. 동물의 젖을 먹게 된 이유는, 가축을 키우면 그 젖을 식량으로 쓰는건 타당한 이치라고 설명됩니다. 쥐와 고양이, 돼지 젖을 먹지 않은 이유는 먹을 만큼 젖을 짜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고요.
이후 알려주는건 인류가 언제부터, 어디서 우유를 먹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최근 연구결과로는 기원전 7,000년 또는 그 이전에 현재의 터키 지역 쪽에서 먹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 이후 각종 문명, 문화권에서 젖을 어떻게 짜서 먹었는지 등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각 문화권에 있었던 독특한 레시피, 유제품에 대해서도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우유를 끓여먹으면 소화하기가 훨씬 숴워져서 고대 인도에서는 뭉근하게 끓인 뒤 강황가루나 후춧가루, 계피 조각, 생강 가루를 넣어서 먹었다는군요. 몽골의 말젖 발효주 아이락 만드는 법, 베두인의 낙타젖은 물과 1대 3의 비율로 희석하면 맛이 좋다는 대 플리니우스의 레시피 등도 수록되어 있고요.
참고로 동물의 젖을 요리의 재료로 쓴 역사도 당연히 오래 되었습니다. 기원전 1750년 경 바빌로니아 설형 문자 기록에 따르면 밀크나 신 밀크를 새끼 염소 스튜 등에 사용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고기와 밀크를 함께 먹지 않았습니다.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는 이유라는데, 나름 타당하네요. 이러한 고대 문명에서의 우유 먹는 방법에 대한 설명은 고대 로마까지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서두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뒤에서부터는 근대 이후부터의 시기가 핵심으로 다루어집니다. 우유 수요가 증가하여 현대적인 우유 산업이 생성된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기 위함이지요. 우선 17세기 이후부터 시골 동네에서 우유를 꾸준히 먹고, 도시에서도 우유 수요가 증가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이는 인구 증가와 시장 활성화 덕분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우유 시장이 커진 19세기의 우유는 위험한 식품이었다고 하네요. 지저분한 낙농장에서 비위생적인 운송 과정을 거쳐 냉장도 하지 않은 채 저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유의 양을 늘리고 색깔, 맛, 향을 위해 온갖 첨가물을 넣어 더욱 위험했어요. 이후 19세기 후반 저온 살균법이 보균되면서 겨우 현대적인 우유 보급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우유 시장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줄어듭니다. 탄산음료 시장이 성장했고, 우유가 사실은 해롭다는 이야기도 계속 확산된 탓이지요. 우유의 유해성에 대한 담론은 우유가 여러가지 처리 과정을 거치기에 불거진 이야기로, 처리 전의 생유를 마시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긴 하나 당장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는군요. 여기서 "은수저"에서 하치겐이 생유를 먹고 맛있음에 전율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우유 수요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야쿠르트, 밀크티 등 각종 음료 시장도 성장하고 있지만 낙농업은 환경에 문제를 일으키므로 우유 소비를 줄이는 방법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흔하게 먹는 우유 한 잔에 얼마나 오래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고민이 담겨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네요. 앞으로의 고민까지 말이죠.

뒤에는 언제나처럼 부록으로 주영하가 쓴 한국에서의 우유 문화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놀랐던 점은, 한국 우유 산업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11년에 이미 생산과 판매 모두 법령으로 확립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본 열도의 우유업이 한반도에 그대로 투입되었기 때문이죠. 일본에 우유 산업이 발전한건 일찌기 산업화된 유럽과 미국의 우유 기술을 도입하여 홋카이도 개척 당시 낙농 사업을 펼쳤으며, 19세기 후반에 서구화를 위한 서구 추종 분위기에 육식과 함께 편승한 탓이었고요.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 젖소를 직접 도입할 정도로 우유 공급을 권장했다고 합니다. 조선 국민들을 전쟁에 써먹기 위한 육체 개조 목적이었지요. 하여튼 이렇게 근대적인 우유 산업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확립되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우유협동조합부터가 1937년 경성우유동업조합으로 시작했다고 하니까요. 우유에 대한 식문화 만큼은 다른 서방 선진국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우유 소비량은 1997년 이후 더 이상 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이유와 마찬가지겠죠. 젊은 층 인구 감소를 보면, 앞으로는 더 줄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애초에 근대화, 서구화를 위해 도입되었다는 목적을 돌이켜 보면, 이미 서구 문화권과 다름없는 현재 시점에서 우유 소비량이 더 증가한다는건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 뒤 마지막은 우유에 대한 몇 가지 레시피가 실려있는데 수 페이지에 불과하고, 내용도 별다를건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우유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단한 깊이는 없지만, 가볍게 읽기도 좋았고요. 충실한 도판과 함께 해당 음식의 역사에 대해 한 번 훝어준다는 이 시리즈 컨셉에 충실하거든요.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1/01/17

향신료의 지구사 - 프레드 차라, 강경이 : 별점 2.5점

향신료의 지구사 - 6점
프레드 차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기대가 컸던 "스파이스"에 큰 실망을 한 뒤 집어들게 된, 향신료를 주제로 한 식문화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스파이스" 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주요 향신료 5개 - 시나몬cinnamon(석란육계), 클로브clove(정향), 블랙페퍼 blackpepper(흑후추), 넛메그 nutmeg(육두구), 칠리페퍼chilli pepper(고추)- 에 대한 상세한 설명부터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마음에 듭니다. 어떤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는게 먼저인게 당연하니까요.
또 큰 세계사 흐름과의 연결도 잘 정리되어 있는 편입니다. 동서간의 만남, 신대륙의 발견에는 향신료가 주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라는걸 잘 알 수 있었거든요. 이러한 노력에 의해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로 진행되는 과정과 향신료 교역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요.

뒤이어 고대와 로마, 중세, 대항해시대, 산업혁명기, 현재에 걸쳐 각 시대별로 향신료가 어떤 향신료가 어떤 경로로, 무엇을 위해 누구에 의해서 유통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핵심만 잘 짚고 있어서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특히 "스파이스"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단순한 '선물' 정도만 전해주고 페퍼를 싣고 올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다 가마 일행부터가 캘리컷 힌두 지배자 사마린에게 보잘것없는 선물을 바쳤다고 하니까요. 선물이 통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난 뒤, 대포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요. 덕분에 포르투갈은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소비되는 페퍼 대부분의 공급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의 이슬람 항구를 함락할 수는 없어서, 주도권을 결국 네덜란드에게 내어 주고 맙니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홍해 길목의 항구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을테니, 엄청나게 먼 항로를 거쳐 와야 하는 포르투갈 함대가 공략해서 정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겁니다. 아울러 이 책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성공은 아시아 세력이 해상 무역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하고요. 당연히 홍해를 거친 육로를 통한 향신료 거래가 유통의 중심이었고, 포르투갈이 차지한건 전체 향신료 거래의 약 5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네요.

포르투갈 이후 네덜란드가 포르투칼의 동방 교역로를 차지할 수 있었던건 향신료 거래 시 현지 세력과 은화로 거래했기 때문이라는건 새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물론 네덜란드도 동인도 제도의 세 가지 주요 향신료는 반다 제도는 정복 후 노예화 과정을 통해 장악했지만요. 2006년 세계적인 사학자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가 유럽인의 열대지방 진출에 대해 요약한 말 그대로, “그들은 포옹으로 시작해서 학대로 태도를 바꾸더니 유혈 사태로 마무리했다." 인 셈이지요.
또 포르투갈처럼 네덜란드도 향신료 교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이 해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향신료 생산지역의 내륙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 세력이 공백 상태에 있었던 덕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중국인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이지만 설명되어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유럽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몇 세기 전부터 중국인은 향신료 교역망에 뛰어들어 페퍼, 클로브, 넛메그, 시나몬을 구해갔고, 아시아 내 교역은 서로간에 쉽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로 이루어져서 중국인은 원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페퍼는 베트남,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었으니 중국은 굉장히 가까왔고, 시나몬과 넛메그는 중국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중국이 항로를 장악할 생각이었다면, 유럽과의 동서 대전이 훨씬 이른 시기에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어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사뭇 궁금합니다.

이후 향신료가 쇠퇴하는 과정은 "스파이스" 설명과 거의 같지만, 훨씬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향신료 산업의 현재도 알려주면서 마침표를 찍는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도판도 최고 수준인 등 책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번역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고, 주요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시대 향신료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문헌 번역 인용에 그칠 뿐이라 조금 아쉽습니다만, 이 정도면 기본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지구사' 시리즈는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아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7/03/12

치즈의 지구사 - 앤드류 댈비 / 강경이 : 별점 2점

치즈의 지구사 - 4점 앤드류 댈비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에서 간행한 음식들에 대한 미시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디자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 몇권 구입한지는 좀 되었지만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세계의 유명 치즈를 모아 놓은 치즈 보드를 가지고 각 치즈별 유래, 역사를 설명해 주는 챕터부터 시작됩니다. 12개의 치즈가 올라가 있는 치즈 보드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리와 모짜렐라라던가 고르곤졸라, 파르미자노 레자노, 체더 등 친숙한 치즈들이 많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간혹 사먹는 브리가 중세 말 유럽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치즈 중 하나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심지어 프랑스 사람들의 과장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영국 저자들도 인정했다니, 앞으로 더 열심히 먹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치즈'에 대해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000년 경 중앙 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낙농업으로 전환이 일어나고 젖 짜기가 이루어진 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젖을 안정적이며 고정적인 식량원인 치즈로 만드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는 치즈의 시작, 그리고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치즈 역사가 소개됩니다.
기원전 3000년 이집트 지역 유물에서 발굴된 유기물 흔적이 치즈였다는 등 사료가 바탕이 된 상세한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당대 치즈 요리 레시피가 소개되는 것도 볼거리에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포싯 - 가루치즈를 와인에 섞어 만든 것 - 이 대표적입니다. "오디세이아"에서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을 환영하며 대접하는, 치즈와 보리죽, 노란 꿀을 프람니아 와인에 섞은 포싯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하게 만든 음식이라 더 기억에 남는데, 레시피만 보면 약간 치즈 수프 비슷할 것 같네요.

세 번째 챕터에서는 '지속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온갖 다양한 치즈 제조법을 소개해 줍니다. 지역과 시대별, 재료별(양젖, 소젖, 염소젖 및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구분되는 레닛 등) 로 구분된 다양한 치즈들이 소개되는데 이 역시 아주 상세합니다. 좋은 치즈의 여섯 가지 특징 등 읽을거리도 많고요.

마지막 챕터에서는 세계가 치즈를 소비하는 방법이 다루어지는데, 당연하겠지만 주로 다양한 음식들과 레시피 소개가 중심입니다. 시칠리아의 미식가 시안 아르케스트라토스의 레시피, 소크라테스의 채식 식단 등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레시피가 가득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약처럼 먹었다는 일화나 치즈가 언어별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전체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지는 않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200여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읽기 힘들고 이해도 어려울 정도였어요. 이유는 통사적인 내용보다는 각각의 치즈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통사적으로 접근한 챕터도 고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의 초창기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고요. 이래서야 "~의 지구사"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치즈에 대해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연대순으로 주요 변곡점마다 존재했던 치즈를 보다 상세하게 알려주는게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네요.

2020/12/29

2020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열 일곱번 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블로그 나이가 성인이 될 날도 얼마 안 남았네요.

올해 특징이라면, 독서가 취미이신 모든 분들이라면 마찬가지겠지만 독서량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겁니다. 이 결산을 시작하고 책을 가장 많이 읽있네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숫자로 정리해보면, 2020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77 (48)권, 기타 장르문학 4 (1)권, 역사서 9 (15)권, 디자인 or 스터디 4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25 (11)권, 기타 도서 14 (18)권으로 모두 133 (97)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보다 30% 정도 늘었군요. 분야로 따지면 추리 / 호러 등 장르 문학과 Food 및 구루메 관련 책을 많이 읽은게 눈에 띄고요. 방콕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좀 자극적이고 재미있거나, 주요 관심사를 찾아 읽기 마련이니 당연합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20년 베스트 추리소설 : "흉가" 

올해 읽은 작품 중 별점 3점 이상 작품은 21편입니다. 꽤 수확이 많았던 한해였어요. 읽은 작품 중 1/3 가까이가 수작 이상인 셈이니까요. 이중 올해의 베스트는 "흉가"입니다. 무섭고 재미난 이야기 전개도 훌륭하지만 복잡한 설정, 복선 회수, 결말까지 완벽했습니다. 욕설, 육두문자 없이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끌고간다는 점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코로나로 외출도 못하는 더운 여름 휴가철에 탐독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아울러 올해 읽은 단편집 중에서 최고의 단편도 뽑아 보겠습니다. 별점 4점 짜리 작품으로는 아카가와 지로 "유령 열차" 수록작인 "비 옷을 입은 시체", 곤도 후미에의 "타르트 타탱의 꿈" 수록작인 "텅빈 카슐레", 스티븐 킹의 "악몽과 몽상 1" 수록작인 "돌런의 캐딜락", 마쓰모토 세이초의 "현란한 유리" 수록작인 "비와 2층",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 수록작인 "빈 집을 지키던 밤", 이사카 고타로의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수록작인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수록작인 "탐정 스페이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수록작인 "푸른 히아신스 향기", "뇌물과 부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별점 4.5점짜리 작품이 무려 2편이나 있어서 4점 정도로는 후보가 될 수 없었어요. 별점 4.5점을 받은 작품은 미야베 미유키의 "희망장" 수록작인 "희망장"과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수록작인 "두 개의 양념병"입니다.
이 중 베스트로는 "희망장"을 선정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도 걸작이지만, 발표된지도 오래되었고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니 양보해도 될 것 같네요.

2020년 워스트 추리소설 : "너무 예쁜 소녀" 

많이 읽은 만큼 실망스러웠던 작품도 많았습니다. 75권 중 별점 2점 이하 작품이 28편이었거든요. 그래도 평균 이하 작품이 2/3를 넘었던 작년보다는 1/3에 불과하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졸작 오브 더 졸작, 정말로 종이가 아깝고 나무에게 미안한 별점 1점의 작품도 세 편이나 됩니다. "너무 예쁜 소녀", "콜드게임", "루팡의 딸"이 그 주인공이지요. 이 중 워스트로는 "너무 예쁜 소녀"를 선정합니다. "콜드게임"은 잔혹한 왕따 가해자를 편드는 듯한 설정이 문제였을 뿐 재미면에서는 나름 합격점을 줄 만 했고, "루팡의 딸"은 최소한 짧기라도 하니까요. "너무 예쁜 소녀"는 추리도 없고 스릴도 없는데 길기까지한 완벽한 시간 낭비였습니다. 끝까지 참고 읽은 저에게 상을 주고 싶습니다.

2020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4권만 읽었는데 모두 고만고만했습니다. 별도의 베스트, 워스트는 없습니다.

2020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올해는 아홉 권밖에 읽지 않았는데 일곱 권이 별점 3점 이상이었습니다. 별점 4점짜리 책도 "펜슬 퍼펙트",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의 세 권이나 되고요. 

이 중 베스트로는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을 꼽겠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기 위한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재미도 있고 가격까지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올해 역사 도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가장 나쁜 별점이 2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에는 너무 가혹하기에, 올해는 별도로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사 도서는 대체로 선방한 한해였어요.

2020년 베스트 디자인 or Study : "명작순례" 

이쪽 분야 책들은 도판만 괜찮아도 평균 이상은 해 줍니다. 그래서 실패가 별로 없는 분야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올해 유일의 별점 5점을 받은 책이에요.요. 수록된 글들도 좋고, 도판까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을 사지 않으면 무슨 책을 사겠습니까.

2020년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올해 이 분야는 네 권 밖에는 읽지 않았는데 가장 나쁜 별점이 2.5점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워스트 도서가 없습니다.

2020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커리의 지구사" 

'지구사' 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식문화 역사 시리즈 중 한 권.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작입니다. 커리에 대한 역사는 물론, 세계화된 과정과 세계속 커리 요리들, 그리고 커리의 현재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커리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중세 유럽의 레시피" 

제목에서 기대했던 중세 유럽 요리에 대한 깊이있는 정보는 커녕, 최소한의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기대하기 어려운 별점 1점짜리 망작입니다. 담고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요. 저처럼 낚이는 분이 없으면 좋겠네요.

2020년 베스트 기타 도서 : "탱크의 탄생" 

올해 읽은 기타 도서는 특출나게 빼어난 책은 없었지만, 평균 이상 재미를 전해주는 괜찮은 책들이 제법 많았었습니다. "심리 조작의 비밀", "탱크의 탄생", "망령의 기억", "깃털 도둑"이 별점 3점을 받은, 그런 책들이었지요.

다 좋은 책이지만 이 중 베스트로는 "탱크의 탄생"을 꼽겠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라하는 '도감' 분야의 책으로 도판, 일러스트가 완벽하게 제 취향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책의 가장 단점은 제법 비싼 가격일 뿐이에요. 무기 도감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2020년 워스트 기타 도서 : "편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인데 장르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라서 기타 도서로 분류하였습니다. 작위적이고 뻔한 전개도 감점 요소이지만 무엇보다도 핵심 주제 - 범죄자 가족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 에 대해 주인공의 심정을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어요.

2020년 베스트 Movie : "포드 V 페라리" 

많은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코로나 사태 직전 영화관에서 감상한 이 영화입니다. 남자 가슴을 뛰게 만드는 웅장한 화면과 음향 효과가 발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베스트 영화는 다른 작품이 되었을거에요.

그나저나, 언제쯤 극장에서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2020년 워스트 Movie : "머더 미스터리" 

'정통 미스터리'라고 소개된 글에 낚였네요. 일견 전형적인 미스터리물로 보이지만, 실제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으로 건질건 전무해요. 게다가 별로 웃기지도 않고요. 왜 애덤 샌들러를 요새 보기 힘든지 새삼 느끼게 해 준 망작이었습니다.

2020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올 한 해는 "시마 코사쿠의 사건부"를 제외하고는 추리 or 호러 만화는 전통의 시리즈인 Q.E.D와 C.M.B의 후속권을 읽었을 뿐입니다. 이 중 최고는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 목록 36" 이었습니다. 수록작 중 "산의 의사"와 "카스미장 사건"이 아주 좋았기 때문입니다.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에피소드별로 살펴보자면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5" 수록작인 "도토리와 솔방울",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수록작 "상상 속 살인", "Q.E.D iff 12" 수록작 "재생의 시간"도 별점 3.5점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2020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책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이 가장 낮은데,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는 좀 가혹하지요. 그래서 에피소드로 워스트를 꼽아 봅니다.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7" 수록작인 "크로스로드"와 "종려나무 동전"이 별점 1점입니다. 동기, 트릭, 진상 모두 작위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졸작이었어요.

2020년 베스트 Comic - 기타 :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2020년 만화들은 별점 3점짜리가 무려 14편이라서 많아서 한 편을 꼽기 어렵네요. 그래도 이 중에서 딱 한 편!을 꼽으라면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입니다. 다른 단편집에서 이미 접했었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된 탓에 감점했을 뿐, 모로호시 다이지로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단편집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만 읽는다면, 별점 4점도 거뜬했을거에요.

2020년 워스트 Comic - 기타 : "지구빙해사기" 

대가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이 불명예스러운 올해의 워스트네요. 당대를 풍미했던 오토모 가즈히로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 설정, 작화와 분위기를 적당히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 혼종이나 결과물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산평 : 

이글루스 블로그 운영도 17년 째인데, 올 한해가 가장 변화도 많고 드라마틱했습니다. 다른 해에 비해 유별나게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요. 그러나 코로나라는 예상치못한 질병 탓이라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네요.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셨고, 지금도 계속 힘든 분들이 계실 터라 가슴도 무척 아프고요. 모쪼록 코로나 사태가 빨리 진정되어, 기쁜 마음으로 블로그 운영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여러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일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게 분명합니다. 사랑합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입니다. 이번 권에는 네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겁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2/12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별점 2.5점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6점
이미지프레임 편집부 엮음/길찾기

기동전사 건담의 시작을 알린 1년 전쟁을 실재 있었다고 가정하고 진지하게 접근한 책입니다. 전사라면 전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2차 창작물인 셈입니다. 예전에도 살짝 관심은 있었는데, "섬광의 하사웨이"를 보고 내친김에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미 절판 상태라 상, 하권 중 상권만 구할 수 있었기에, 상권만 읽어보고 리뷰를 남깁니다.

특징이라면 1년 전쟁에 관련된 설정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쟁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세한 전투 관련 분석이 돋보입니다. 전쟁 발발 정의 지구권과 콜로니 배치에서 시작되어, 전투의 추이라는 제목으로 일주일 전쟁, 루움 전투, 공국군 지구 침공 작전, 오데사 작전 설명으로 이어지는 첫 챕터부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연방군과 지온군 함대 구성 및 이동 방향, 전투의 향방 등을 여러 전쟁사 책들과 비슷한 도판들을 이용하여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전투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콜로니와 미노프스키 물리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같은 기본 설정에 대한 상세 설명은 물론 지온 공국 성립의 역사, 전쟁 시작 후 오데사 작전 까지의 이야기 및 모빌 슈츠와 각종 병기들, 지구 연방군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MS는 물론이고 전함과 육전용 장비들, 항공기 소개도 충실하고요. 이 중에서는 아울러 스페이스노이드의 주장, 지온 공국이 전쟁에 돌입하기까지의 공국과 연방군 정세 등 1년 전쟁 당시의 사회 환경과 이데올로기, 정세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예컨데 2차 대전을 다룬 책이라고 친다면, 독일이 히틀러 집권 후 재무장을 하여 폴란드를 침공하고, 결국 프랑스까지 점령하는 과정을 지휘관들과 주요 전선에서 펼쳐진 작전들, 그리고 주요 전술과 주력 병기와 함께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나치즘과 히틀러의 집권 과정, 영국과 프랑스 등 주변 주요 강대국의 정세를 이벤트별로 원인과 결과를 잘 알 수 있게 설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잘 알려진 설정이 대부분이라 새로운건 별로 없습니다. 이 책 출간 이후, 1년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디 오리진"이 출간된 탓도 컸고요. 그래도 진지한 역사서처럼 쓰여진 결과물을 보니 색다른 느낌도 들고,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어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 발표되었던 기획임을 짐작케하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대표적인게 디오라마로 이루어진 화보였습니다. 디오라마 자체가 나쁜건 아니지만 촬영과 편집 모두 책의 컨셉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거든요. 밀리터리 풍의 화보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고요. 이왕 이렇게 책을 만들 거였다면, 장난감같은 프라모델 사진이 아니라 더 진짜같은 사진과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책의 내용도 오래전 발표된 책 답게 이른바 '정사'에 포함된 내용만 담겨 있어서 MS IGLOO라던가, The Origin같이 후대 추가된 설정과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불만스럽습니다. 그 탓에 볼륨도 가격에 비하면 영 시원치 않은 편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도판과 편집만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재간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아틀라스 전차, 항공전사와 "2차대전 독일의 비밀무기"를 합치는 식으로요. 지금의 결과물은 재미는 있지만 딱히 하 권을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2020/01/23

카레라이스의 모험 - 모리에다 다카시 / 박성민 : 별점 3점

카레라이스의 모험 - 6점
모리에다 다카시 지음, 박성민 옮김/눌와

카레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저자가 카레의 정체를 탐구하고, 뒤이어 일본식 카레와 카레라이스의 형성 과정에 대해 고찰한 음식사, 문화사, 미시사 사적입니다.

읽으면서 "맛의 달인" 24권의 '카레 승부' 편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카레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인도까지 가서 카레가 무엇인지를 조사하고, 영국으로 찾아가 카레 가루의 원형을 찾는다는 이야기 전개 구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뒤 일본 카레의 형성 과정을 깊숙히 파고든다는 점은 차이점이지만 스리랑카는 카레에 몰디브 피쉬라는 가다랑어 종류 건어물을 사용한다, 카레의 맛이 부족하면 한방약을 털어서 섞어 먹으면 좋다는 등 "맛의 달인"에도 등장했던 이야기가 뒤에도 계속 등장합니다. "맛의 달인" 24권이 출간된건 1990년이며, 이 책이 언제 출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카레 서적을 발표하며 '카레왕' 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저자이니, 이 책에 등장했던 전개와 이야기들이 원조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당연히 책이기 때문에 "맛의 달인" 보다 카레에 대한 정보 제공은 훨씬 자세하며 정보의 폭도 넓고 깊습니다. 여러가지 아이디어들도 돋보이고요. 일본에서 시판되는 카레를 조리해서 인도인에게 먹여본다는 도입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실제로 인도인들도 꽤 맛있어 했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인도의 여러 향신료를 조합하여 만든 요리를 '카레'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맛의 달인"에 이미 나왔던 내용이지만, '카레'의 어원은 타밀어에서 무언가 끼얹어 먹는 소스를 의미하는 '카리'에서 왔거나, 힌디어로 향이 강하고 맛있는걸 뜻하는 '터카리'라는 말에서 왔거나, 아니면 옛 인도 북부의 요리 이름인 카디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재미있었습니다. '캥거루' 어원에 대한 전설처럼, 영국 지배 시기에 영국 관리가 인도인들에게 먹는 요리를 물어보았는데 그들이 맛있다고 한 '쿠리'라는 말에서 유래했던 설은 거짓말이라는 디테일까지 완벽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한 시기의 이야기라면 18세기 이후 이야기인데, 커리가 처음 영어 문헌에 등장한건 1598년이기 때문이라네요.
그 외에도 인도인들도 카레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던가 - 등장하는 요리사인 쟈인 씨는 국물이 있는 요리라고 하지만 마살라, 즉 향신료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요리는 모두 카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 매운 맛의 기본은 특별한 향신료가 아니라 고추와 후추가 중심이며 인도에서 카레를 만들 때 양파를 카라멜라이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등 새롭게 알게 된 정보가 가득합니다.

이러한 카레의 정체에 대한 탐구 뒤 펼쳐지는 일본식 카레의 형성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문화권에 완전히 이질적인 요리가 도입되어 국민 요리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제대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맛의 달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우선 소개되는건 일본 카레의 기원입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카레 조리법인 "서양요리지남" 속 카레는 개구리! 카레였으며, 야채로 파를 사용했다는군요. 이 책이 나온 19세기 후반에는 일본식 카레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양파, 감자, 당근이 생소한 채소였기 때문입니다. 1879년 간행된 "서양과채조리법" 속 파는 “오니언”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고, 다른 책에는 “아니언”이라는 표기도 있었으며 “뿌리를 식용으로 하며, 겉의 껍질을 벗기고 잘 씻는다”라고 주석이 달린걸 보면 파 역시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던 재료가 아니었을테고요. 이러한 개구리 카레 스타일의 카레 요리법이 1900년대 초반까지 퍼지게 되는데, 지금과 다른 점은 카레 가루를 넣은 소스로 고기를 익힌 요리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인도식과는 다르게 카레 가루를 쓰고, 밀가루로 걸쭉하게 만들었다는게 특징이지요.
지금과 유사한 카레 요리법인 걸쭉한 카레 루에 고기와 함께 양파, 감자, 당근을 함께 넣어 볶고 끓여 만드는 방식은 다이쇼 시대 이후 확립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이러한 레시피로 카레를 조리하여 배식한게 결정적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러한 조리법의 역사와 함께 저자는 카레가 일본의 국민 요리가 된 이유를 추적합니다. 우선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시스템을 받아들여 국가를 개조하던 와중에 육식이 유행하게 됩니다. 대표 요리인 규나베가 널리 퍼진 뒤, 카레가 일본인에게 서양 요리의 입문격 요리로 알려지고요. 이유는 이미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고, 고기도 규나베처럼 작게 썰어 넣어 부담스럽지 않았던 덕분입니다.
그 뒤 '1. 레스토랑, 식당 등의 메뉴에 등장한다. -> 2. 잡지, 서적(현재라면 TV)과 같은 미디어에서 요리법 또는 '요즘 이런 요리가 유행'이라는 말 등이 소개된다. -> 3. 일반 가정의 식탁에도 등장하게 된다.' 라는 외부 요리 수용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도입 초기의 소스형에서 스튜형으로 조리법도 바뀌고요. 소스형 카레는 주재료가 고기지만, 가정 요리로는 요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도록 고기는 적게, 그리고 밥에 국물을 끼얹어 먹는 식의 음식으로 발상을 전환한게 그 이유입니다.
그 결과가 본래의 서양 요리와는 다른 일본풍의 양식 '카레라이스'인 것입니다. 그 뒤, 일본 카레 가루 제조와 카레 루의 판매, 인스턴트화 등을 거친게 현재의 일본 국민 요리 카레라이스입니다.

이렇게 일본 카레라이스에 대해서만 연구한 결과물이라는건 아쉽지만, 카레가 아니라 그 어떤 요리라도 다른 문화권에 흡수될 때에는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책의 장정과 디자인,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카레왕께서 추천한 참고 도서인 "카레의 지구사"도 빨리 읽어봐야겠군요.

2020/02/22

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 에도가와 란포 / 박현석 : 별점 2.5점

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 6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박현석 옮김/현인

일본의 추리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전설적인 에세이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오래 전 부터 존재를 알고 있던 책이기도 하고, 저 역시도 추리 소설(요리 중심이지만)에 관련된 에세이를 출간한 경험이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 읽었습니다.

책은 1956년에 출간되었으며, 주로 1950년대 "환영성" 등 이런저런 잡지들에 기고했던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구성입니다. 1953년, 에도가와 란포가 영미 탐정소설에서 예전부터 사용되던 트릭을 800여개 수집하여 쓴 "유형별 트릭 집성"이라는 글이 유래이며, 이 글로부터 여러가지 에세이들이 파생되어 이런저런 잡지들에 수록되었다고 하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서 ―이 책의 탄생과정
1. 기발한 착상
2. 뜻밖의 범인
3. 흉기로써의 얼음
4. 특이한 흉기
5. 밀실 트릭
6. 은닉 방법에 관한 트릭
7. 프로버빌리티의 범죄
8. 얼굴 없는 시체
9. 변신 소망
10. 이상한 범죄동기
11. 탐정소설에 나타난 범죄심리
12. 암호기법의 종류
13. 마술과 탐정소설
14. 메이지의 지문 소설
15. 원시 법의학서와 탐정소설
16. 스릴에 대해서

각 주제별로, 에도가와 란포가 직접 이런저런 소설의 예를 충실히 들어가며 설명해 줍니다. 책의 특성 상 당연히 핵심 트릭이 까발려지고요. 노리즈키 린타로"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기생충같은 책인거지요.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은 읽기 힘든, 오래전 잊혀진 작품들이거나 우리가 접하기 힘든 일본 고전들, 아니면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 많다는 것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자신의 작품 이야기도 많이 소개된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면죄부를 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또 미스터리 가이드에서처럼 어떤 작품에서 어떤 트릭이 쓰였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좀 두루뭉실, 애매하게 소개하고 있거든요. 뭐 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리고 거장이 쓴 책 답게, 단순히 트릭을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분석을 통해 깊이있는 식견을 보이는 글도 많아요. 마지막 16장인 "스릴에 대해서"가 좋은 예입니다. 스릴의 종류를 상세히 분류하여 이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내용인데, 실로 이치에 맞고 설명도 적합하여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예로 드는 것도 아주 좋았고요.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글들도 제법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처음 발표된 시점에서 60여년 이상 지난 탓이 가장 큽니다. 대표적인 예는 "이상한 범죄 동기"에서 결코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었던 "대통령의 미스터리"를 길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일본에는 거의 읽어본 사람이 없는 책이라 특별히 소개했던 모양인데, 지금 상황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암호 기법의 종류"도 마찬가지로, 지금 읽기에는 다른 비슷한 책에 비하면 내용이 굉장히 부실한 편이에요. 메이지 시대 지문을 증거로 삼는 소설이 처음 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만 소개하는 "메이지의 지문 소설"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였고요.

아울러 하나의 트릭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서술 트릭이 빠져 있는 등, 현대적인 작품 속 최신 트릭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었더라도, 출판사나 후대의 작가가 증보판을 출간하는 선택지는 없었을까요? 제가 가끔 읽는 'oo의 지구사' 시리즈에 주영하 씨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수록한 글처럼, 다른 작가가 부록 형식으로 뒤에 최신 트렌드를 덧붙이는건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책의 완성도, 모양새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고 도판도 부실합니다. 또 책 속에서 소개된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는지 여부, 그리고 출간되었다면 무슨 제목으로, 어디에서 출간되었는지를 따로 소개해 주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했어요. 어차피 추리 소설의 애호가들만 구입할 이런 류의 책에서는 필수적인 정보인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름의 가치는 분명하나 여러모로 지금 읽기에는 낡은 결과물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부족하고요. 추리 소설의 대단한 애호가가 아니라면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즐길 거리가 제법 되는 만큼,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되었건, 누군가가 21세기에 걸맞게 내용을 수정하고 덧붙여 개정증보판 형식으로 재출간해 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2008/07/12

왓치맨 - 알란 무어 / 정지욱 : 별점 4점

왓치맨 Watchmen 2 - 8점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악당들과 싸우던 슈퍼 히어로들은 킨 법령에 의해 거의 대부분은 은퇴 수순을 밟는다. 그러던 어느 날 "코미디언"이란 히어로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예전 동료의 한명은 "로어샤크"는 예전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히어로들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간파하게 된다. 조사의 와중에 "로어샤크"는 경찰에 체포되나 그를 도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나이트 아울"은 그를 탈옥시키고 결국 모든 사건과 음모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데...

휴고상을 수상하는 등 너무나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걸작이라는 평이 자자했던 왓치맨이 드디어 국내 정발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단의 평 처럼 대단한 예술성을 느꼈다고 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재미있더군요. 단순한 권선징악적 이야기가 아닌 복잡한 음모가 이면에 펼쳐지며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슈퍼 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 슈퍼 히어로물을 잘 아는 성인을 위한 만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의 지구 평화를 지키기위한 명목하에 벌어진 거대한 음모에 대한 히어로들의 암묵적인 동의, 그에 반발하는 로어샤크의 제거라는 극단적인 결말은 무척 인상적이었고요. 절대 선이 존재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적인 SF, 그리고 다른 차원의 지구와 세기말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겠지만 친숙한 슈퍼 히어로물에 이러한 세계관을 도입한 아이디어는 높이 사 줘야죠.

아울러 추리 애호가로서는 "추리적" 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왔습니다. 히어로 연쇄 살인사건이라 할 수 있는 중심 사건과 그것을 조사해 나가는 로어샤크의 모습은 하드보일드 물을 연상케 했거든요. 수사 과정 자체는 별거 없는 탐문수사에 그치지만 거대한 음모와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고 나름 하드보일드 전통에 충실하다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래픽 노블"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정도로 미국 만화 특유의 선을 살리면서도 정교하게 그려지며 화려한 채색이 덧붙여진 데이브 깁슨의 그림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세부적인 디테일 하나를 놓치지 않는 치밀함 역시 빛을 발하고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작품에 대한 방대한 정보와 해석이 넘쳐나는데 그러한 세부 정보가 없이 처음 접하더라도 작품의 수준은 평범 이상을 보여주는 뭔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종합해 보았을 때 별 4개는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번에 영화화되어 개봉할 예정이라는데 스토리를 영화 하나로 압축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긴 하지만 무척 기대됩니다.

2017/11/05

화석의 기억 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2.5점 (국내 미출간)

도쿄에 사는 미나기 류이치는 어린 시절 살던 시골 마을(정확하게는 '붉은 숲'이라는)에서 "누시"라는 큰 곰(?)에 의해 어머니 후유코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본 TV 뉴스를 통해 누시가 다시 나타났다는걸 짐작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교제하던 유키에와의 성관계 동영상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협박하여 300만엔이라는 자금을 마련하여 시골 마을로 향한 류이치는 대학 조교 혼조 테츠야를 만났다. 그는 백악기(7,000만년전) 지층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 화석을 발굴하고 있었다.
이후 이 '오파츠'가 교수에 의해 부정당한 테츠야는 홀로 조사를 떠나는데....

국내에는 "nervous breakdown" , 그리고 "초공속 가루비온"의 캐릭터 디자이너로만 알려진 타가미 요시히사의 1980년대 작품입니다. 정확하게는 1985~87년까지 연재되었는데, 대표작이라고 하는 "카루이자와 신드롬" 연재 종료 직후(1982~85) 시기이니 작가 인생 최전성기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대표작 "grey"와도 년도가 겹치네요. 굉장히 진지한 SF물이면서도 크리쳐 물이기도 하고, 미스터리 스릴러물 성격도 포함된 복잡한 장르물입니다.

위의 줄거리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오파츠가 등장하는 부분까지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누시가 무엇인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도 7,000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화석 정체는 특히나 궁금증을 자아내니까요. "별의 계승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고요.

뒤이어 모든 것은 타임머신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전개와 여기서 불거지는 '타임 패러독스'도 볼만합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뭔지도 모르면서 찾아 헤메는, 그리고 타임 머신으로 밝혀지는 "용고"의 정체는 원래 지구에서의 생존이 어려워져 만들어낸 외계로의 도망 우주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엔진 (용고)의 폭주로 시공을 뛰어넘어 1987년 붉은 숲에 떨어졌고, 이 "용고"가 계속 시공간을 뒤튼 탓에 7,000만년전과 연결되어 있게 된 겁니다. 누시는 7,000만년 전 숲에 살던 공룡이었고, 7,000만년전 지층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화석은 마찬가지 이유로 과거로 점프한 현대 인류의 것인거지요.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타임 패러독스는 도라에몽에서도 익히 보아 온 것입니다. 작 중에서도 용고는 노비타의 책상 서랍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진지한 SF 스토리에 약간의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덕에 꽤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용고"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단서가 오래전 한 할머니가 남긴 일기라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시가 12간지의 움직임을 보이는, 일종의 시계 같은 장소에 나타나며 이를 통해 한 가운데임을 추리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결말이 완성도를 떨어트립니다. 류이치가 깨닫는 것, '조금씩의 차이가 결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려내기에는 너무 서둘러 마무리된 탓입니다. 관련자들을 타임 머신이 부른 이유 - 동일한 역사 반복을 위해 - 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고요. 설득력을 갖추려면 또다시 시공을 점프한 후, 류이치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현 시점(1987년)에 "용고"가 없는 평안한 인생을 손에 넣는다는 결말 정도는 보여줬어야 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현세의 기차에서 내리는 류이치가 어머니 후유코와 포옹하는 것이었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 스톤 오션의 결말이나 영화 "프리퀀시"의 클라이막스처럼 말이죠. 뭐 그만큼의 설득력은 조금이나마 쌓아 올렸어야 하겠지만... 여튼 지금의 결말은 역사가 단순 반복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작가 의도가 제대로 반영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흥미로운 본편 전개에 비하면, 곁들여지는 사이드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누시의 정체가 공룡이라는 것도 너무 빨리 밝혀져서 몰입을 저해하고, 누시보다 주인공들 혈족에 전해지는 "용고"를 찾아내려는 음모 이야기는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인 기업, 친족 간의 파벌 싸움이 이야기에 잘 녹아나지도 않았고 말이죠.
아울러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나 별로에요. 여중생 섹스 파트너와의 성관계 비디오를 그 아버지에게 팔아 넘겨 자금을 마련하는 쓰레기인데다가, 어머니인 후유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 등장 인물들과 정사를 갖는 등 전반적으로 쿨함을 강조하기에는 도가 지나칠 뿐더러 너무 자극적으로 접근하려 한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꽤나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지루한 전개에 더해 작가 특유의 허무한 결말이 더해진 결과물입니다. 본 편 이야기에 집중하여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가져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2026/06/06

리스타트 (Boss Level) (2021) - 조 캐너한 : 별점 2점

전직 특수부대원 로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죽은 뒤 다시 같은 날 아침으로 돌아오는 현상에 직면했다. 전처 젬마가 개발한 장치 때문이라는걸 알아낸 로이는, 젬마를 상관 벤터로부터 구하고 루프와 지구 파멸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하루가 반복된다는 루프물 영화는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소스 코드"를 보았었지요. 

뻔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만의 큰 특징은 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끊임없는 액션의 무대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비슷하지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을 무대로 복선과 음모는 거의 없이 시종일관 액션으로만 밀어붙인다는게 차이점이에요. 맨손 격투와 총격전은 물론이고, 맨몸 스턴트, 자동차 추격, 검술 액션까지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액션은 다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이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들과 악당들을 해치우기 위해 죽어가면서 공략법을 익히고 결국 그들을 극복해 나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선보이는 프랭크 그릴로의 외모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촬영도 화끈하며 적절한 유머와 합도 좋고요.

일종의 게임같은 '공략' 세계관은 전체 전개에서도 일관되게 선보입니다. 루프가 계속되면 세계가 붕괴하기 때문에, 로이는 살아남거나 악당들을 없애는 대신 잠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들과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로요. 그런데 로이는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전처 젬마가 그날 아침까지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로이는 다시 하루를 공략하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적들을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젬마를 최대한 빠르게 구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거든요. 이렇게 단계별로 공략이 진행되며 단서와 조건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원제 "Boss Level"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습니다.

또 아예 복선과 음모가 없지도 않습니다. 로이가 암살자들에게 쉽게 추격당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날 치위생사를 만났는데, 그때 치료받은 이빨에 추적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대단히 놀라운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액션 중심 영화에서 제법 흥미로운 요소로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는 좀 부족합니다. 우선 앞서 액션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는데, 암살자들 개개인과의 대결이 대부분이라서 규모가 많이 작습니다. 루프물답게 반복되는 장면도 많고요. 

또 중반부에서 아들 조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영화 전체가 쉴 새 없이 액션을 몰아치다가 갑자기 멈추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 선택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달리던 액션 영화로서의 기세를 잡아먹는건 사실이에요.

배우들의 활용도 아쉽습니다. 프랭크 그릴로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이름값에 비해 크게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멜 깁슨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별다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년의 대배우가 이렇게 몰락했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만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신선함보다는 액션의 물량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킬링타임용 루프물입니다. 저는 운동할 때 감상했는데 적당했어요.

2023/04/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6. 비스크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6. 비스크 인형
어두운 마을에서 마와리 가의 한 귀퉁이만 희미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에 세워진 몇 개의 화환이 희미한 흰 그림자처럼 보였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몇 대의 차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일행이 역으로 향하는 길로 사라졌다. 토시오는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손에는 마사오의 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양쪽에 하얀 연등이 노란 빛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정면에 흰 나무 제단이 놓여 있고, 검은색 액자 속에는 토모히로의 얼굴이 있었다. 어제 마이코가 보여줬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웃지 않는 토모히로는 흑백이라서 그런지 훨씬 더 우울해 보였다.
흰 천이 걸린 관 앞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은 야위었지만, 목소리는 힘찼다.
"안녕하세요, 또 뵙게 되었군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마이코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옅은 색의 안경을 쓴 소우지였다. 마이코는 깜짝 놀란 듯이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당신, 누구죠?"
마이코는 생각하는 척했다.
"싫은데요. 벌써 잊어버리셨나요. 어제 만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요."
소우지는 마이코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보세요, 샹보르관 앞에서 나를 지나쳤잖아요."
마이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살짝 쳐다보았다,
"당신은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한 번 본다면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과 꼬 닮았으니까."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
어제 마이코를 본 소우지가 같은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실례지만, 당신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인형과 꼭 닮았어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나요?"
"아니요, 하지만 주모우라는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인형이라고 하니까 기억이 났어요. 프랑스의 인형 제조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거 참 반갑네요. 내가 만난 여성 중 주모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비스크 인형이 뭐지요?"
"19세기에는 고급 패션 인형이 활발하게 만들어졌어요. 비스크 인형은 주모우 사가 1840년대에 개발한 인형이에요. 인형의 목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만들어졌지요. 라틴어로 비스는 두 번이라는 뜻이고, 큐이는 구운다는 뜻입니다. 즉, 두 번 구웠다는 뜻이죠. 고온으로 구운 초벌구이 목에 색을 입히고 다시 저온으로 구우면 지금까지 없던 아름다운 피부색이 만들어져요. 피에르 주모우의 인형은 모두 당신과 같은 매력적인 얼굴로 만들어졌어요."
"고마워요. 비스크 인형이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피에르의 아들인 에밀 주모우는 인형의 기능적인 면에서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용수철 장치로 인형이 움직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마술을 부리기도 하죠. 오르골이 달린 것도 있고, 소리 내어 말하는 인형도 만들어졌어요. 저도 몇 점 가지고 있는데,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군요."
"꼭 보고 싶네요."
"당시는 고체, 슈미트, 스테넬 등 인형 제작자들의 군웅할거 시대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왜인지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에 가장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자의 마음도 빼앗으려는 거겠지요."
소우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토모히로와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마이코는 토시오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저거 마사오 씨의 가방 아닌가요?"
"네, 어제 마사오 씨를 차에 태워 드렸어요. 그 때 가방을 잊어버리셔서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당신들이 마사오 씨의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토모히로는 안타깝만, 마사오 씨가 경미한 부상으로 끝난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독경도 끝났을 테니 나중에 옆방으로 오세요."
"하지만 마사오 씨와는 어제 만났을 뿐입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방금 전에 회사 사람들이 방문했던 탓에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라, 마사오 씨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소우지는 토시오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 두 사람을 초대했다.
국화 생화 한 가운데에 마사오가 앉아 있었다. 원래의 하얀 얼굴은 상복의 검은색에 싸여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가느다란 어깨는 그대로 슬픔의 선이었다.
마사오 옆에 작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마사오의 어머니로 생각되었다. 눈빛이 마사오를 닮았다. 어제 대문 앞에 서서 마사오와 토모히로를 배웅하던 노파였다. 작은 무릎 위에는 낯익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도망치려 하는 아이를 노파는 계속 달래고 있었다.
마사오 앞에는 대머리 노인이 앉아 있었다. 토모히로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었다. 토시오는 마와리 데츠바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독수리 같은 눈빛과 한 줄로 굳게 다문 입이 굳은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데츠바는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다. 뚱뚱한 몸을 구겨 앉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데츠바 옆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토시오는 이 여성의 존재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마이코의 입에서 단 한 번도 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는 스물다섯, 여섯 살, 빨간 머리, 입술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밝은 느낌의 미인이지만 검은색 옷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토시오의 귀에 닿기도 전에 경을 읽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마이코는 두 손을 모아 염주를 쥐고 있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옆에서 바라보며 향에 불을 붙였다.
소우지가 나와서 두 사람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해바라기 공예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두 사람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잠시 후 경을 읽는 소리가 끊겼다. 스님이 다른 방으로 간 것 같았다.
"잠깐만요, 마사오 씨"
소우지가 불렀다. 마사오가 방으로 들어오자 소우지는 가방을 내밀었다.
"이분들이 전해주셨어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지."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가방을 쳐다보았다.
"없어진 줄로만 알았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토시오는 마사오의 눈빛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팔에서 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제가 떼어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마사오는 가방을 소중히 받았다.
"내용물을 확인해보는게 좋겠어."
소우지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런 무례한 짓을..."
마사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토시오는 무거운 공기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다.
"상처는? 아프지 않습니까?"
마사오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 뺨을 바라보았다. 뺨에는 검붉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토시오는 상처의 흔적보다 구부러진 하얀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리는?"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걱정 끼쳐 드렸네요."
데츠바가 와서 앉자 소우지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데츠바는 말없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주모우.......실례지만,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요."
마이코는 명함을 꺼냈다. 소우지는 마이코의 명함을 보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었다.
데츠바 옆에 앉아있던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은 소우지의 여동생이었다. 소지는 마사오를 구해줬을 때의 토시오의 행동을 보고 온 듯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오리(香尾里)였다.
"카오리, 너도 그렇게 영웅에게 구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쥰키치가 알게 된다면 화내지 않을까?"
소우지가 말했다.
"오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카오리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카오리는 쥰키치와 내년에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시마키 쥰키치 군은 해바라기 공예의 유능한 개발부원이랍니다."
카오리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카오리의 손을 뿌리치고 테이블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토우이치군, 엄마한테 혼날 거야. 또 이빨이 상할지도 몰라."
카오리가 말했다.
"정말 단 것을 좋아한다니까."
마사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소우지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말했다,
"아빠가 너무 엄격했던 것 같아. 본인이 단 것을 싫어했으니까. 아이는 금지하면 더 많이 먹고 싶어하는 법인데 말이지."
소우지의 비판적인 말투에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빠는 토우이치를 정말 귀여워 해 주었어요. 치과에 데리고 간 적도 있었죠."
마사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니 양손 사이에는 하얀 손수건이 비벼져 있었다. 토우이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머니의 슬픔을 감지한 듯 마사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봉제 곰 인형을 들고 왔다.
"자, 토우짱, 이제 자러 가자. 곰 인형을 들고 ......"
"엄마, 부탁해요"
마사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토우이치를 맡기려 했다. 토우이치는 봉제 곰 인형을 내던졌다.
"오, 오랜만인데."
소우지는 곰을 집어 들었다.
"토우이치는 곰 인형을 가지고 자나요?"
"그게 없으면 잠을 잘 못 자요."
마사오가 말했다.
소우지가 계속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상하네. 안 움직여."
곰의 목에 달린 스위치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마사오가 들여다보았다.
"마사오 씨는 장난감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배터리가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배터리가 있다면 제대로 걸을 수 있을 텐데........"
소우지는 곰 인형의 등을 열어 보았다.
"야, 배터리가 없구나. 다음에 건전지를 사서 아저씨가 움직여 주도록 하지. 이 장난감은 누가 사 준거죠?"
"토모히로요."
소우지는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토우이치는 소우지의 손에서 곰 인형을 빼앗았다. 마사오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토우이치를 안고 방을 나갔다.
"항상 혼자 자요?" 
소우지가 물었다.
"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사오는 토우이치의 흐트러진 옷깃을 고쳐주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좋은 습관이네."
"토모히로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소우지는 입을 다물었다. 마사오는 일부러 계속 토모히로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같았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스님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남색 도포 차림의 스님은 바쁜 정치인 느낌으로, 말도 많았다. 어느새 자신이 젊은 시절 유학했던 유럽의 풍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형이 일찍 죽어서 가업을 잇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서양미술로 가문을 일으켰을 텐데 말이죠."
그는 물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마사오가 부드럽게 토시오와 마이코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모히로가 부탁한 것이 있었군요."
마이코 일행이 토모히로의 차를 뒤쫓고 있는 것을 택시 기사가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래,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마이코도 주변을 피하듯 말했다.
"비밀이었나요?"
"글쎄요......"
"저는 토모히로의 아내입니다. 그 조사 내용을 알려주시겠어요?"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 거래할 회사의 신용조사였어요. 해바라기 공예에는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으로요."
"새로운 거래 ....... 그 조사는 끝났나요?"
"이제 보고서 작성만 남았어요."
"그 보고서를 저한테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에게? 읽고 어떻게 하실 건가요?"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남편이 당신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요?"
"어제 러더퍼드 데이비스 씨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토모히로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격렬한 명령을 떠올렸다. 토모히로가 왜 있지도 않은 약속을 위해 마사오를 이용하려 했던 것일까?
"나는 최근 들어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토모히로의…."
마사오는 말끝을 흐렸다. 스님이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소우지가 부탁한 택시가 아직 오지 않았다. 소우지는 택시 회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코는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소우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녀에게 호송을 받다니, 고마운 일이군."
스님이 말했다.
"그 대신에, 승차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던게 당신들이었나요?"
마이코와 스님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절이 있는 곳은 데츠바의 집과 같은 오노와였다. 토시오는 처음 가는 오노와라는 곳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맞습니다.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게 설마 운석일 줄은 몰랐네요."
"구약성경에 있잖아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돌을 내려 원수를 죽였다는 말이요. 이 큰 돌이라는 것은 운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운석비였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운석비? 비처럼 운석이 떨어지는 게 있나요?"
"거대하고 부서지기 쉬운 성질의 운석은 지구 대기에 뛰어들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운석비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아니, 얼마 전에도 보도된 적이 있었어요. 1976년 중국 동북부 길림성 지역에 떨어진 운석비는 그 범위가 무려 오백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수집된 운석은 백 개 이상, 최대 1,770Km의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는 직경 2m의 분화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도시에라도 떨어지면 대재앙을 피할 수 없었겠군요"
"떨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죠. 하여튼, 토모히로 씨도 불운한 일을 당했어요."
"데츠바 씨도 낙담했을 것 같네요."
"글쎄요, 고집센 녀석답게 별로 티는 내지 않더군요. 물론 마음속으로는 그렇지야 않았겠지만….."
"그렇게 고집많은 분으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당신은 처음 봤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데츠바를 압니다. 꽤나 대단한 녀석이에요. 첫째, 그 나이가 되어도 의사에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건강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그럴리가, 나야 건강하지만 데츠바는 얼마 전에 가벼운 뇌출혈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런데도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고요?"
"아니, 그때는 갔죠.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이번에는 혈압이 너무 내려가서 2주일 동안 머리가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온 의사를 돌려보내고 말았죠. 그런데 데츠바의 의사 혐오증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에요. 그의 아내가 죽은 이유가 의사의 오진 때문이었거든요. 장폐색을 잘못 진단했었지요. 데츠바의 동생 류키치, 그는 토모히로의 아버지인데, 류키치의 죽음도 의사 탓으로 믿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사오 씨에게 혈압을 재도록 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가?"
“그녀는 원래 큰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어요. 혈압 강하제도 마사오 씨가 구해 온 것만 마십니다. 매일 아침 한 알씩, 캡슐에 든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에요. 그 고집스러움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데츠바의 아버지는 어른스러운 분이셨지만…..."
"데츠바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해바라기 공예를 만들었던 호도라는 분인가요?"
"맞아요. 호도씨는 내가 어렸을 때 두세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데츠바를 꼭 닮았어요. 다만 스케일은 더 컸지요. 메이지의 낭만도 가지고 있었고요. 어쨌든 저 이상한 나사 저택을 지은 사람이었으니까."
"나사 저택... 이름만 들어봤어요."
"마침 절로 가는 길에 나사 저택 앞을 지날 거예요. 한밤중의 나사 저택은 또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죠."
"오싹한 건물인가요?"
"지금은 낡아서 그래요. 새 건물이었을 때는 묘하게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데츠바 씨는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네, 아들 소우지, 딸 카오리와 함께요. 살기 불편할 것 같지만, 소우지는 일종의 호사가고, 카오리는 화가 지망생이니 그 집에 잘 어울립니다."
"언제쯤 지었습니까?"
"다이쇼 초기, 아직 서양 건축이 드물었던 시대. 정석적인 건축법에 맞지 않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슈발의 궁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슈발의 궁전?"
"프랑스 남부 드롬주 오트리브 마을에 세상에 보기 드문 건축물이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 프랑스에 갔을 때 관람료를 내고 구경해 본 적이 있지요. 돌과 시멘트로 마구잡이로 만든 궁전입니다. 궁전이라고는 해도 인도 사원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옆은 페르시아풍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벽면에는 여기저기 기괴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요. 마치 아이가 종이 한 장에 생각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자재로 성을 그려나간 것처럼 슈바르의 궁전에도 온갖 상상력이 쏟아 부어졌습니다. 단 한 사람의 손길 하나로요."
"단 한 사람의?"
"네, 우편배달부 페르디난트 슈발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돌을 주워와서 짓기 시작했고, 완성될 때까지 무려 34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조개껍데기를 주워다가 집을 지은 사람, 빈 병으로 건축을 한 사람 등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가하면 이상한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동물입니다. 돈이 없어도 그러한데, 돈과 권력이 있으면 오죽하겠습니까. 엄청난 건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다이묘들은 더욱더 큰 성을 짓고 싶어했지만, 절반은 도락이라고 할까, 취미라고 할까, 장난 같은 부분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천수각과 같은 아름다움은 만들 수 없죠"
"아름다움 못지않게 기묘한 동물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장난감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신전이나 궁전에는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크로커다로폴리스의 미궁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고대 이집트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궁인데 열두 개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천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해요. 그 기술과 규모는 피라미드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로였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궁전 안에는 여러 가지 큰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문을 열면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강렬한 빛이 쏟아져 눈부시게 빛나는 방. 바닥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방……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 미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미궁에는 왕과 신성한 악어가 조용히 묻혀 있었습니다. 미궁이라고 하면 테세우스가 잠입했다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미궁도 유명하죠. 테세우스는 아름다운 아리아드네가 준 비단실을 풀면서 미궁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하지요. 아무래도, 미녀가 등장하니까요. 미녀는 어디에 곁들여도 좋지요"
"그건 그렇겠죠."
마이코는 여유롭게 웃었다.
"로마 시대에는 시빌의 신전이 유명한데요. 이 신전에 있는 제단에 불을 붙이면 저절로 안쪽의 성소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 속임수는 잘 먹혔던 모양이에요. 후대에 이르러서는 여기저기서 같은 장치를 갖춘 신전이 만들어졌다니까요. 속임수를 모르는 신도들은 상당히 놀라고 두려워했다죠. 옛날에는 신기한 작용을 하는 사술이 곧 종교와 연결되곤 했습니다. 사실 이 장치는 이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에 달궈진 공기의 팽창하는 힘이 신전 문에 전달되는 것 뿐이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데 자동문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라도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님이 장난을 치면 속아넘어가 버릴 겁니다."
"스님도 그런 수법을 사용한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그래서 가난합니다. 종교나 돈과 무관하게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사실 대단한 문화에요. 서양에는 취미로 하는 카라쿠리 집들이 즐비하게 있어요.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카라쿠리 저택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집이란 살 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는 책상과 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되면 스님 같은 건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스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하면, 마와리의 나사 저택 정원에는 정교한 라비린토스가 만들어져 있답니다."
"미궁이라고요?"
"미로입니다."
토시오는 스님의 기상천외한, 초현실적인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호랑가시 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진 미로죠. 호랑가시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자라 있어서 건너편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길은 한 사람이 편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인데, 여러 가지 막다른 골목이 만들어져 있어 쉽게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미로의 중심에는 뭐가 있는 건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중앙은 다다미 10쪽 정도 넓이인데, 그냥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에요. 이 미로를 만든 호도는 자주 미로 중앙에 앉아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미로 안에서는 어떤 방해물도 들어오지 않으니 아주 좋았겠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미로 속을 돌아다니는 호도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답니다. 일종의 루드비히 2세 같은 느낌인데 뭐, 서양식 미로는 지금도 드물겠죠."
"서양에서는 정원 안에 미로를 자주 만들지 않나요?"
"미로가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바로크 시대였을 거예요. 미술사에서 말하는 매너리즘의 전성기였어요. 이상향 '유토피아'로서의 우주를 세련된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을 중시했던 시대입니다. 정원에는 반드시 미로와 분수, 카라쿠리와 시계인형이 놓여졌어요. 지하에는 동굴을 파고 물장난으로 움직이는 동물 등을 모아 놓았고요. 17세기 프라하 궁정에는 전 세계의 기괴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 '스펙타클라 파라독스렘(Spectacula Paradoxa)'이 있었습니다. 황제 루돌프 2세는 알킨볼트라는 예술가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에게 기괴한 그림 '트롱프뢰유'를 그리게 하고, 여러 가지 기괴한 물건을 만들게 했습니다. 황제의 취미의 영향일까요? 17세기 프라하에는 연금술사, 수정술사, 예언가, 마술사, 점성술사, 주술사 등이 우글거렸다고 하네요. 코펠리우스의 모델이 된 기계공 코펠키, 골렘을 만든 레웨 베자렐도 이 시대 사람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카라쿠리와 금발의 마녀와 같은 움직이는 인형을 제작한 트로이의 오르간 연주자 레잔도 이 시대 사람이었고요. 금발의 마녀는 훗날 존 팬리 경 살해 사건에서 신비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길은 좁아지고 오르막길이었다. 오노는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도시의 불빛은 멀리 눈 아래로 사라졌다.
"그 시대는 예술과 과학, 주술과 마법, 속임수, 사술이 혼돈의 미분화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켐페른 남작이 만들고 레겐스부르크의 기계학자 레오나르드 멜첼의 손에 의해 유명해진 자동 체스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인형을 움직이는 물건이었죠. 실제로는 속임수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당시 카라쿠리의 대부분은 이런 속임수를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이는 에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훈몽감초(訓蒙鑑草)”라는 마술의 수수께끼를 풀이한 책이 1730년에 간행되었는데, 기적적으로 현존하고 있어 당시의 마술을 알 수 있는데, 그 안에 천신기 승려의 차술이라는 속임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 살 정도의 어린이를 차대 위에 올려놓고 입과 팔다리로 인형을 다양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중국인 인형 휘파람 불기 장치 속임수도 비슷한 속임수에요. 인형의 휘파람 관이 지하를 통해 대기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이 관에 숨을 불어넣거나 목소리를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66년이 지나 1796년에 출판된 “기교도휘(技巧図彙)”를 보면 그런 속임수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오직 기계적인 장치만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명한 차 운반 인형을 비롯한 모든 카라쿠리는 지금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하여튼, 이 시기에 기술과 사술은 깨끗하게 분리된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은 다소 마술적이지만 매력 넘치는 아이디어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동 인형이 진지하게 '진지'해졌다는 것이군요."
"네. 옛날에는 연금술사들도 금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어떻게 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열중했던 것 같아요. 1780년대에 카리오스트로라는 이름의 연금술사의 실험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도가니 안에 구리와 마테리야프리마라는 비약을 넣고 봉인합니다. 무게는 정확하게 측정되고, 도가니는 교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가니가 뜨거워진 뒤 봉인을 풀면 용해물 속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금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모든 무게를 재는데, 실험하기 전의 무게와 실험 후의 무게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요."
"정말인가요?"
"지금 이대로 실험을 해도 학자라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요. 학자는 마술사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속임수가 있는 거군요."
"그렇져. 카리오스트로는 처음에는 도가니를 갈아 끼우는 유치한 방법을 썼는데, 그것이 들통난 뒤, 이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합니다. 자랑할 만한 트릭이에요. 도가니의 바닥에 금을 깔았던 겁니다. 금 위에 아말감으로 만든 얇은 바닥을 만들어 덮었고요. 열을 가하면 저온에서도 녹는 성질이 있는 아말감이 녹으면서 밑에 숨겨져 있던 금이 ......"
그때 갑자기 좌회전하는 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토시오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토시오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어이쿠,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사 저택의 미로 이야기였어요."
마이코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탈선할 것이 뻔했다.
"그랬지. 그 미로는 좀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건 말씀드렸나요?"
"모양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미로는 정오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앙에 놓여 있는 돌 테이블도 오각형인 거죠. 울타리로 만드는 형식은 햄튼코트의 미로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역시 호도답게 똑같이 흉내내지 않았더라고요. 호도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재미도 알고 있었던 거지요."
"햄튼코트의 미로라고 하면?"
"윌리엄 3세의 햄튼코트 궁전에 만들어진 미로를 말합니다. 이 미로는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나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파란 눈을 가진 여자와 함께요."
"로맨틱하네요"
"그런데 관광객이 가득 차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죠. 관광객이 가득 차서 빙빙 돌고 있었거든요. 둘만 남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 거지요.. 미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로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가고, 다음 두 갈림길은 모두 오른쪽으로, 그 다음에는 모두 왼쪽으로 꺾으면 미로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는게 순서거든요. 미국에서는 1941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하모니 미로가 복원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미로는 종교적인 교회 미로죠."
"재미로 만든게 아니라요?"
"애초에 인간의 참된 길과 죄악으로의 길이 뒤섞인 미로는 올바른 참된 길을 걷는 것의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아까 말한 크레타 섬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 왕의 미궁 안에는 소머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서식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전설 역시 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종교적 동굴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산 하나를 깎아 만든 오부네의 대동굴도 지금까지 종교적 수행의 도장이 되고 있고요. 또한 로자몬드 궁전의 미로는 헨리 2세가 애첩 로자몬드를 왕비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에 따라 미로를 만든 동기도 다양하죠."
"마와리 호도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호도는 본질적으로 장난감 같은 것을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그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지요. 벼락부자 시대에는 10엔짜리 지폐의 10을 1로 바꿔서 요정에서 1엔으로 썼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으니...... 자, 나사 저택이 저기 보이네요."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길 왼쪽은 다소 가파른 경사면에 관목인 관목이 이어져 있다. 오른편 안쪽, 나무들 사이로 달빛에 비춰진 검푸른 덩어리가 보였다. 그  덩어리는 불규칙하게 늘어선 바위처럼 보였다. 토시오는 속도를 줄였다.
나사 저택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 아니었다. 보통으로 지었다면 평범한 2층짜리 양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강렬하게 대칭을 기피한 것 같았다. 아메바를 닮은 비대칭 형태가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저 첨탑은 프랑스의 포 성을 모방한 것 같은데, 나사 저택의 탑은 오각형으로 되어 있네요."
탑이라기보다는 건물을 관통하는 창끝처럼 보였다. 건물 중앙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저택의 맞은편은 저지대여서 작지만 연못이 있어요. 바위 사이를 뚫고 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하는데, 크기에 비해 물의 양이 많습니다. 연못 건너편에 예의 오각형 미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물론 차 안에서는 연못도 미로도 볼 수 없었다. 저택 안에는 불빛 하나도 없다. 낡은 대문 기둥에 약한 불빛이 켜져 있을 뿐이다.
차는 곧 나사 저택을 지나쳤다.
5분 정도 더 가니 나사 저택 옆으로 오래된 절이 보였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요."
스님이 마이코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로, 프라하의 궁정, 햄튼코트의 궁전, 나사 저택 ......
토시오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좁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서로서의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편함에 엽서가 들어 있었다. 에도 시게오(江藤重雄)가 보낸 것이었다. 토시오와 동일본 신인왕전에 출전하기 직전, 에도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에도는 이 소식을 듣고 슈젠지(修善寺)로 돌아간 뒤 체육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생선가게의 가업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도는 토시오의 패배를 알고 있었다. 놀러 오세요. 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읽은 토시오는 차가운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 같은 시각, 마사오의 아들 토우이치(透一)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토시오는 이 사실을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