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스 - 잭 터너 지음, 정서진 옮김/따비 |
스파이스, 즉 향신료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그리고 왜? 향신료가 이렇게 큰 인기를 끌고 교역 대상이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식문화사이자 미시사 서적입니다.
이 중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책 자체가 향신료 교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 부터가 아니라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등 포르투칼과 스페인 탐험가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읽다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더라고요. 모험과 탐험 이야기이니까 당연하겠지요. 특히 다 가마가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간단한 제노바어와 카스티야어를 할 수 있던 튀니지인을 만났던 순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튀니지인 : 빌어먹을, 당신네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데그레다도 (처음 외지인과 접촉하는 사람) :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향신료를 찾아서 왔다.
이 엄청난 대모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후 포르투칼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캘리컷에 포격을 퍼붓고 잔인하게 포로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처음 알았네요. 유럽인들의 자기 중심적인 논리가 극초기부터 작용했다는건 씁쓸하네요. 그들이 '미개인' 이라고 불렀던 신대륙이야 그렇다쳐도, 그들 이상의 문화와 문명을 가진 다른 세계는 대화를 통해 협조를 구하는게 마땅했을텐데 말이지요. 하긴, 이런 자국 중심 논리는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리고 본격적인 향신료 무역 역사가 소개되는데, 로마 시대에 이미 인도와의 향신료 교역로가 개척되어 존재했다는건 놀랍더군요.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라 홍해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홍해를 지나 아라비아 반도, 인도양을 지나 계절풍을 타고 서고츠 산맥 근처 항구에 기항하는 항로였지요. 여기서 확보한 후추 및 각종 향신료는 로마 사회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가격도 우리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더라고요. 후추 1파운드 (450g)가 자유 노동자 이틀치 일당이었다니, 대충 최저 시급을 9천원으로 계산하면 14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100g에 3만 2천원 정도라면. 아주 대단한 사치품이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겠지요. 조금 의외였던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향신료를 항상 과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도를 넘는 향신료 소비가 이어졌고, 이러한 향락, 사치 풍조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니, 향신료도 로마 멸망에 일조한 셈입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홍해 항로를 장악하며 직접 교역이 끊기면서 비잔틴, 이슬람 상인을 통해 향신료를 수입해 사용하다가 앞서 설명한 포르투칼과 스페인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려 향신료 수입 무역이 재개되었으며,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패권이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무너지고 현재에 이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왜? 향신료가 이렇게 널리 사용되고, 큰 돈을 벌어다 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몇가지 핵심만 요약하자면, 일단 유럽인들은 향신료가 파라다이스, 즉 지상낙원에서 자란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종교적 상상을 뛰어넘는 일종의 진리이자 신조에 가까왔다고 하네요. 즉, 향신료는 에덴 동산에서 온, 기쁨과 같은 의미를 가진 어휘였던 거지요. 향신료 중에는 이름이 아예 grains of paradise라는 것도 있었다니까요. (지금의 멜레구에타 후추입니다) 그래서 '향기' 를 이용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굉장하 중요하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의학의 중심이었던 체액론에서 향신료가 중요한 요소였던 탓도 큽니다. 건강, 그리고 '성' 측면에서 향신료가 치료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음식 부패가 심해서 냄새와 맛을 감추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향신료를 사용하는 것 보다 새로 재료를 사는게 더 싸니 당연하겠지요. 오히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이나 겨울철에 보존을 위해 소금에 절인 생선 등만 먹는 경우가 많아서 향신료가 어쩔 수 없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향신료 와인은 당시 술의 품질이 굉장히 떨어져서 생겨났다고 하네요.
이외에 당연히 사치, 과시를 위해 쓰여진 측면도 존재했기에, 이런 이유들로 왕실에서는 많이 사용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비쌌고, 무역업자들에게는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죠.
근대로 접어들면 후추는 수입이 늘어나며 꾸준히 가격이 하락했고, 상류층 관심은 좀 더 희귀한 향신료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클로브나 넛메그같은 향신료로요. 넛메그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 즉 뉴욕을 포기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러시아가 알라스카를 미국에 판 것과 비슷한 멍청한 행동으로 소개되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만 한 행동이었어요. 네덜란드가 넛메그로 벌어들인 이익은 원가의 2,000%에 달했다고 하니까요. 몇 년 장사를 잘 했다면, 다시 돈으로 뉴욕을 확보할 수도 있으리라 여겼겠죠. 이 뒤 설탕, 차, 초콜릿, 커피 등에게 그 지위를 넘겨준 현재가 짤막하게 소개되고 책은 마무리됩니다.
스파이스 시대의 종말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더군요. 스파이스가 흔해졌기 때문이지요. 종교 개혁 이후 탐욕을 금했고, 종교 시장에서 향신료는 퇴출되었으며, 근대에 접어들면서 향신료가 가지고 있었던 이런저런 신비로운 이미지는 모두 희미해지고 재료의 맛을 강조하는 레시피가 유행하는 등의 영향도 컸고요. 이 책에 언급된대로 지금은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는 왠지모르게 후진적이라는 이미지가 덧 씌워져 있죠.
이렇게 큰 틀에서 향신료, 스파이스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큽니다. 제일 큰 단점은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향신료가 널리 사용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엄청나게 지루했어요. 종교적, 의학적, 식문화적 등의 이유가 나열되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계속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제별로 묶어서 핵심만 요약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도판도 별다른게 없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디테일한 설명은 좋지만, 너무 세부적인 부분에 집착해서 거시적인 흐름을 보기 힘들다는 단점도 만만치 않아요. 향신료가 인기가 있었다는건 반복된 설명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향신료 교역은 항로를 개척했던 몇몇 인물들과 몇몇 교역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만 소개될 뿐, 어떻게 항로와 무역 흐름이 진행되고 변화되어 왔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국가간의 큰 흐름없이 세부적인 사건과 에피소드에만 집중하고 있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향신료 교역을 직접 인도 항구에서 시도했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교역을 했을까요? 또 어떻게 이들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빼앗아 올 수 있었을까요? 다른 유럽 국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와중에 인도양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 그리고 동방의 맹주 중국은 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요? 또 항로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대로 된 지도 하나 수록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에요. 읽으면서 계속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불편하기도 불편할 뿐더러 항로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도는 없어서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쓸데없이 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직전 읽었었던 <<외국어 전파담>> 처럼 세계사적인 흐름과 합쳐서 더 큰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정리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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