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인문학 - 사이먼 가필드 지음, 김명남 옮김/다산초당(다산북스) |
시대 별 중요했던 지도 22개를 선정하여, 그 지도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주는 인문학, 미시사, 잡학 (?) 서적. 각 지도별로 20~30 페이지 정도가 할당되어 자세하게 소개되기 때문에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합니다.
읽기 전에는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지도들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역사적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시대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낸건 지도였을테니까요. 그런데 제 생각과는 좀 다르게 역사적 흐름 보다는 '지도' 그 자체에 집중해서 소개해주고 있더군요. 미술 사조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사실주의 화풍에서 인상파, 입체파 등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훝어주며 대표작과 대표 작가와 함께 화풍이 변한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원했는데, 그냥 대표작만 소개되는 셈입니다.
물론 미대륙이 왜 '아메리카'가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설명처럼,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1507년 만들어진 '발트제뮐러 지도'에 '아메리카'라고 명기한 뒤 다른 지도 제작자들이 그 이름으로 대량 생산해서 지도를 유통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이는 아메리고가 했던 거짓 주장을 발트제뮐러가 믿었기 때문으로, 발트제뮐러는 고작 3년 뒤 그 선택을 후회하고 아메리고의 이름을 본인 저작물에서는 삭제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인거지요.
덧붙이자면,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1519년 정복자 코르테스는 멕시코 상륙을 앞두고 선주민 몇 명을 자기 배로 초청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곧 약탈하려는 장소 이름을 그들에게 물었죠. 한 남자가 "마 쿠바 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코르테스와 부하들은 "유카탄"이라고 알아듣고 지도에 그렇게 적었고요. 그로부터 정확히 450년이 흐른 뒤 마야어 전문가들 조사 결과 "마 쿠바 단 (Ma c'ubah than)'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라는 뜻이라는걸 밝혀냈다고 합니다. '캥거루' 이야기가 떠오르지요?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지만요.
그 외에도 빈 아프리카 지도를 통해 제국주의의 탐욕을 설명한 내용, 찰스 부스가 런던 시내를 사는 계층으로 구분했던 '런던 가난 지도'도 제 기대에 값하며, 그 양은 많지 않지만, 서구 유럽 뿐 아니라 중세 일본과 중국의 지도가 소개된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12세기 제작된 중국의 '우적도'는 지금 시점으로 보아도 으스스할 정도로 정확하다니, 중국이 얼마나 앞서가는 국가였는지를 또 다시 느끼게 해 주네요.
하지만 이렇게 역사적 흐름을 함께 알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지도 그 자체에 대한 설명에 치중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빈랜드 지도' 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보면, 제 생각대로의 글이라면 빈랜드 지도를 작성했음직한 1,000년 경, 당시 바이킹들의 항해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분석하여 그들이 정말 미대륙을 방문했을지를 검증하는 내용이었어야겠지요. 그러나 이 책에서는 빈랜드 지도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이며, 이 지도의 진위여부를 어떻게 검증했는지에 대한 내용 뿐입니다. 재미있는 내용임에는 분명하지만, 제 기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래도 다행인건, 이렇게 지도 자체에 집중한 덕분에 새롭게 알게된 내용도 많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자면, 첫 번째는 매리 애시퍼드 살인 사건 때 사건 현장과 용의자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설명한 '살인 지도' 입니다. 지금은 신문 기사 등에 널리 활용되는 방식이고, 이 매리 애시퍼드 사건 지도가 첫 번째 살인 지도는 아니지만 이를 만든 사람이 영국 우편제도를 혁신한 젊은 시절의 롤런드 힐 경이었다는게 신기했습니다. 콜로라 유행 당시, 식수가 원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도에 펌프의 위치와 근처 사망자를 함께 나타낸 존 스노의 지도는 말 그대로 '닥터 하우스'를 연상케 했고요.
보물 지도 이야기도 있습니다. '트리니나드 지도'와 같은 사기극, 보물이 묻힌 장소를 암호화하여 책 <<가면 무도회>>에 수록해서 발표했던 진짜 보물 지도 이야기 모두 아주 흥미로왔어요. 책에 삽입된 삽화 속 인물들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 시선의 방향을 연결하여 마지막 글자를 이어 붙여 문장을 만들고, 문장 앞 철자만 조합하여 키워드를 뽑아내는 방식인데 그럴듯 하더라고요. 마지막 암호를 풀었다는 사람도 책 저자의 전 여자친구의 증언을 통해 단서를 잡았다는 일종의 반전까지 완벽해서, 한 편의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도를 만드는 기법에 대한 설명도 상세판 편입니다. 그래서 메르카토르 도법을 발명한 메르카토르와 그의 지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메르카토르 지도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내용도 재미있었습니다. "구"를 "평면"으로 바꾸면 왜곡이 생기는건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지도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건 큰 문제니까요. 당연히 지구본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글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도를 읽는 방법에 대한 소개도 있습니다. 특히 남자가 여자보다 지도를 더 잘 읽는다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조사 결과가 아주 재미있었어요. 여자는 광범위한 2차원 공간보다 랜드마크에 더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는 과거 수렵을 담당했단 남자와 채집을 담당했던 여자 유전자의 차이가 아닐까라는 가설이 등장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있다 생각되었습니다. 채집은 지금도 그렇지만 '어디어디 무슨 소나무 밑' 처럼 지형지물에 의존해야 하니까요.
그 외에도 지도책을 뜻하는 '아틀라스'라는 말의 유래, 지도에 그래픽적 요소가 도입된 시기, 진정한 '거리 지도'의 시작, 여행용 가이드 맵의 유래 등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하며, 아우르고 있는 지도도 게임 속 지도와 지도를 사용했던 보드 게임까지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담고있는 정보의 질과 양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지도가 얽혔던 사건 설명은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습니다. 도입부인 제 2장, <<세계를 팔아넘긴 간 큰 남자들>>에 등장하는 '마파문디'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마파문디'는 중세에 그려진 세계 지도를 통상적으로 일컫는 말로, 이야기 속 주인공은 1290년대에 영국 헤리퍼드에서 그려진 지도입니다. 하지만 온갖 상징으로 가득차 있다는 설명 외에는 그 지도를 경매로 팔고자 했던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더욱 자세합니다. 최소한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정도는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경매 이야기가 딱히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리고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도보다는 기술에 집중하는 듯 한데 지루했습니다. <<카사블랑카>>와 <<인디애나 존스>> 등에서 사용된, 지도를 가로지르는 화살표로 등장 인물의 여정과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방식 소개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게 지도와 무슨 관계가 있나 싶었고, GPS는 이미 일상이 되어서 구태여 책으로 설명을 봐야 하는 내용도 아니었거든요. 게임 속 지도에 대한 이야기는 책 방향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고요.
무엇보다도 지도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도판이 그닥 미려하지 않다는게 큰 단점입니다. 컬러였어야 하지만, 컬러 수록된 지도는 앞뒤 내지에 인쇄된 영국 지하철 노선도밖에는 없습니다. 접는 방식으로 확대 인쇄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하고요. 책 판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도 않아서, 세부를 보는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지도들은 대부분 인터넷 검색을 통해 큰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특정 항목은 담고있는 정보가 과하거나 심하게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크게 흠잡을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류의 '잡학'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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