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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2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9) 축배와 흉기 사이

추리소설에서 와인은 익숙한 소재입니다. 독살에 사용되기도 하고,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식탁에 오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와인 병 자체가 흉기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술병을 휘두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오히려 드문 소재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와인병은 사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암포라 같은 토기나 참나무통이 와인을 담는 용기였습니다. 두꺼운 유리병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자리 잡은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와인병의 모양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보르도 와인은 어깨가 각진 병을, 부르고뉴 와인은 둥근 어깨를 가진 병을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병의 실루엣만 보고도 어느 지역 와인인지 짐작할 정도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병은 와인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두껍고 단단한 유리로 제작됩니다. 자연스럽게 무게도 제법 나가고, 목 부분을 잡으면 손에 쥐기도 편합니다. 축하와 만찬을 위한 물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둔기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한 형태인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에서도 와인병은 종종 인상적인 흉기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앤서니 호로위츠의 "숨겨진 건 죽음"입니다. 

유명 이혼 전문 변호사 리처드 프라이스가 자신의 집에서 와인병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현장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적힌 ‘182’라는 숫자가 남아 있고, 탐정 호손과 작가 호로위츠는 그 숫자의 의미를 쫓으며 수사를 시작합니다. 여러 용의자가 저마다 충분한 살해 동기를 가지고 있어 마지막까지 범인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정통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작품 속에서 흉기로 사용된건 1982년산 샤토 라피트 로트실드 병입니다. 보르도 1등급 와인의 대표격으로, 흔히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브랜드 중 하나이지요. 그 중에서도 1982년은 최고의 빈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아무리 와인병이 흉기로 적합했다 하더라도, 흉기로 쓰기는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비싼 와인이지요. 이 보다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와인이 흉기로 등장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쳐"입니다. 

이 작품은 사진가를 꿈꿨지만 월가의 변호사가 된 벤 브래드포드의 이야기입니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연인 게리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인기작입니다. 유난히 와인이 자주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벤의 인생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와인이 함께하거든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블랑입니다. 

클라우디 베이는 뉴질랜드 말버러 지역을 대표하는 화이트와인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벤은 아내의 불륜을 이 와인 때문에 눈치챕니다. 와인을 잘 모르던 베스가 어느 날 갑자기 클라우디 베이를 사 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가게에서는 이 와인을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웃인 게리가 즐겨 마시던 와인이었고, 베스 역시 그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습니다. 벤은 게리를 찾아가 같은 와인을 함께 마시다 말다툼 끝에 결국 클라우디 베이 병을 휘둘러 그를 살해합니다. 와인 한 병이 불륜의 단서가 되고, 결국 살인의 흉기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클라우디 베이 와이너리의 설립자는 더글라스 케네디와 친구였다고 합니다. 작가는 친구의 와인을 작품 속에서 최고의 소비뇽블랑이라고 극찬했지만, 그 와인을 살인의 흉기로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설립자는 처음에는 못마땅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클라우디 베이 역시 함께 유명해졌고, 와이너리도 고액에 매각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무척 고마와하지 않을까 싶네요.

와인병은 원래 축배를 위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에서는 때로 사건의 단서가 되고, 때로는 살인의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와인병이라도 작품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평범한 식탁 위의 와인 한 병도 작가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클라우디 베이를 보게 된다면, 저는 아마 먼저 이 소설부터 떠올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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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6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고영 : 별점 3.5점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8점
고영 지음/포도밭출판사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이 읽고 먹고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대로, 음식문헌 연구자인 저자가 본인이 경험했고, 맛보았던 식문화먹거리에 대해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크게 "아, 침이 고인다"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 그리고 "온전한 밥 한 그릇"이라는 세 개의 대 분류로 구분됩니다.
이 중 "아, 침이 고인다"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에 식문화와 먹거리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 가치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인 "온전한 밥 한 그릇"은 주로 저자의 '느낌'과 단상이 가득한,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 많고요.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주제가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식문화, 먹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탓이지요. 단순히 이미 널리 알려져있던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가 음식문헌 연구자인 덕분에 본인의 연구가 바탕이 된, 깊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글들이 오래전 한시와 옛 문헌의 한 토막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제일 첫 글인 "융도, 두 자의 뭉클함"를 보자면, 김려가 남긴 서사시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의 소개와 해설을 토대로 당시 먹거리에 대해 일람하다가 '융도'라는 두 글자에 주목합니다. 융도는 건국 초기 조선의 북쪽 끝, 여진과의 접경지대에서 나는 벼를 의미합니다. 이른바 조생종 벼인데, 보리를 먹어 치우고 벼를 수확하기 전 식량의 징검다리 역할과 냉해를 견디는 품종 확보를 목적으로 조선은 세종 때 도입 육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고 소개합니다. 시 한 구절에서 이러한 전문적인 역사 관련 지식까지 풀어내는 그 식견이 사뭇 놀랍습니다.

이 책 덕분에 옛 문헌 속 이런저런 몰랐던 식문화와 먹거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세종 때의 문헌 "산가요록"을 통해 우리에게는 일찍이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는 소개처럼요. 복숭아 김치, 살구 김치, 수박 김치 등이 있었다는데, 그 맛이 사뭇 궁금해지네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 수필집 "침초자"에 소개된 아마즈라와 13~14세기 원나라의 갈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빙수의 원형 이야기, 제빙 기술이 발달하여 1910년대 조선에서도 여름에 얼음 띄운 화채나 빙수 먹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빙수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광수 소설 "무정"에서도 빙수를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널리 퍼졌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와인에 대해 최초로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이기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는 1720년 북경 천주당에서 와인을 맛보고 "소림과 대진현이 또 나를 어떤 방으로 이끌었다. 탁자에 수정병이 하나 있는데, 높이는 세 자(약 30.3cm)쯤이고 술이 떠 있는 듯 담겨 있었다.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데 술맛이 감미로우면서도 상쾌하고 이채로운 향이 코를 찔렀다. 마시고 난 다음에는 그저 조금 취기가 오를 뿐이고 취하지는 않았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이기지가 이후 와인 제조법을 물어보아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와인은 '포트 와인' 이었습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북경 천주당의 예수회 신부들이 먼 북경까지 포도주를 옮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으로 설명됩니다. 도수가 높아야 쉽게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꽤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포트 와인은 높으면 도수가 20도를 넘어가는 제법 센 술이라 마시고 나면 취할텐데, 이기지는 술이 꽤 셌나 봅니다. 이 뒤 다른 자리에서 포도주 세 잔을 거푸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저자의 글은 뒤에 조선 땅에 상륙한 여러가지 외국 술에 대한 글로 이어집니다. 각 글이 항목별로 분리가 되어 있기는 해도, 와인과 브랜디 등 각종 서양 술, 맥주, 사케와 정종, 청주 등의 일본 술,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 등이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항목만 따로 떼어 놓아도 충분히 가치있는 술에 대한 미시사 문헌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그만큼 자료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풍성한 사료를 통해 깊이를 더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냉면 먹방"에서 소개되는 냉면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흔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당대 여러 기사들을 통해 냉면 먹는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조망해 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겨울에 평양 냉면'을 먹었다는게 전부가 아닌 것이지요. 1936년 "조선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냉면 미각의 절정은 삼복 (더위) 이전' 임이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매일신보" 1936년 기사에서도 여름 관청, 회사 점심시간이면 냉면집 전화통에는 불이 날 지경이라고 소개되었다고 하고요. 그러나 지금과 다른 점은, '경성 냉면은 평양 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냉면을 주문하면 20분은 기다릴 각오'를 했어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패스트 푸드가 아니었던 겁니다.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을 통해 풀어놓는 우리나라 소금 산업의 역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굽는 방식의 제법을 사용하였는데, 일본이 조선 강점 시기에 한국 해안에 대단위 천일 염전을 조성한게 대단위 소금 산업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소금을 만드는 염호가 옛부터 고단하고, 노비나 군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해 중국 산동 출신 노동자를 대거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네요. 이후 중국 노동자들의 파업, 퇴사 이후 1930년대에는 조선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요. 고되고 힘든데다가 사회적 인식까지 부족한, 지금의 염전 노예 사건의 단초가 이렇게 일본에 의해 강제된 천일염 제조 산업 초창기부터 있었다는게 참 가슴 아픈 사실이네요.

그러나 이렇게 정보 전달 측면에서 우수하며,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글들에 비해 저자의 느낌,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은 좀 별로입니다. 저자의 생각 - 식문화와 먹거리는 빈부에 상관없이 평등해야 한다 - 도 옛 문헌을 통해 먹거리가 빈부에 따라 큰 격차를 보였다는걸 소개하면서, 이런 격차가 그나마 평등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알려주는데 비슷한 주장의 반복이 많은 편입니다. 이러한 격차가 현대에도 이어지는걸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지나치게 과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보 전달 측면의 글들은 별점 4점도 아깝지 않으나, 비슷비슷한 에세이 류의 글로 약간 감점합니다. 저자의 음식 관련 미시사, 문화사 전문 서적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네요.

2018/10/20

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 엘리자베스 아치볼드 / 서민아 : 별점 2점

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 4점
엘리자베스 아치볼드 지음, 서민아 옮김/스윙밴드

제목만 보면 실용 서적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학자가 중세 시대의 고문헌을 뒤적거려 뽑아낸 대단해 보이는 (?) 조언, 금언들을 당대 삽화와 함께 배치한 어른들을 위한 '우스개' 서적이거든요. 그만큼 내용이 뜬금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영주 부인 거절하는 법'이 있습니다. 1,200년 경 베클스의 다니엘이 쓴 "교양인 대장전"에서 뽑아낸 말입니다. 영주 부인이 자꾸 유혹하면 아픈 척하라는 조언이지요. 과연 교양인! 답네요.
물 속에서 발톱 깎는 법도 있습니다. 1789년 멜키세덱 테브노의 "수영의 기술" 에 나온 비법으로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발을 들어 오른쪽 무릎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걸 책으로 쓴 이유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글을 쓴 멜키세덱 조차도 별다른 쓸모나 장점은 없지만, 시간 관리 방법으로 추천할 만 하다고 했다는걸 보면 본인 스스로도 알맹이 없는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도 등을 대고 똑바로 눕는건 자살행위라는 1474년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의 말, 주위 사람에게 땅에서 무언가를 주워 달라고 해서 땅에서 씨앗 등 자라나는 걸 줍는다면 4시, 7시, 10시이며 돌 등 자라지 않는 걸 주우면 2시, 5시, 8시, 11시 경이다는 1658년 존 화이트의 '언제든지 시간을 알 수 있는 비법', 일곱살 이전 아동에게는 연령과 와인의 도수에 따라 적절한 양의 물에 희석한 와인을 먹이라는 미켈레 사보나롤라의 의학 지침 등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당대의 어처구니없는 레시피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11세기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라는 어마무시한 이름의 저자가 쓴 "성생활을 위한 책"에 수록된 발기 불능 치료약이 눈길을 끕니다. 흰 양파 씨, 금불초, 참새 뇌, 야자 숫나무의 꽃, 백향목을 같은 양으로 준비해 따뜻한 물에 개어 병아리 콩만하게 만든 후, 아침에 와인과 함께 일곱 알을 먹으라고 하네요. 참새 뇌를 대관절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와인을 마시기 전에 샐러드 오일을 한 모금 죽 들이켜고, 와인을 마신 후 마신 와인의 세 배의 우유를 마시는 1653년 휴 플랫의 술 취하지 않는 법은 왠지 모르게 시도해보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말도 안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1280년 경 아마뉴 드 세스카스의 "신사를 위한 자기계발서"에서 소개된 알뜰하게 멋 부리는 법처럼 지금 읽어도 와 닿는 조언이 없는건 아닙니다. 몸매부터 관리해야 하며, 옷을 살 돈이 없다면 좋은 악세서리를 챙기고 추레한 차림으로 다니지 말라는 조언인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니가요. 추레한 차림은 볼품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며, 진정한 멋쟁이는 평범한 것을 세련되고 품위 있게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라니 이 역시 맞는 말이지요.
그리고 따뜻한 맥주는 차가운 맥주처럼 갈증을 충분히 해소하지도, 더위를 식히지도, 속을 시원하게 해 주지도 않아서 별로라는 토비아스 베네르의 글은 특정 종류의 맥주는 상온에서 마시는게 좋다는 일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암요, 맥주는 시원하게 마셔야죠.

하지만 유용한 조언은 한 줌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내용은 피식하고 넘어갈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빵빵 터지는 이야기가 많지도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뜬금없는 내용과 한 쌍을 이루는 당대의 도판들이 꽤나 적절하고 책의 만듦새도 괜찮긴 하지만 아무리 가점을 한다 해도 별점은 2점입니다. 권해드릴 만한 책은 절대 아닙니다.

2010/11/14

위험한 호기심 - 알렉스 보즈 / 김명주 : 별점 4점

 

위험한 호기심 - 8점
알렉스 보즈 지음, 김명주 옮김/한겨레출판

그동안 진행된 여러 심리 실험 중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들만을 짧게 요약하고 정리한 책입니다. 심리 실험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와 비슷하지만, 실험의 의미나 후일담까지 자세히 분석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례를 최대한 많이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진지한 실험뿐만 아니라 가십성 실험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되도록 짧고 재미있게 요약해 놓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충실한데, 이것이 단점은 아닙니다. 충분히 재미있었고, 예상보다 유익한 내용도 많아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너무나 유명한 '스키너의 상자', 홀로코스트의 이유를 탐구한 '충격적인 복종 실험', 영화 "익스페리먼트"의 원형이 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키티 제노비스 살인 사건에서 착안한 '구경만 하는 구경꾼' 등 이미 알고 있던 실험들이 많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고 인상적인 실험'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내용의 깊이는 부족하지만, 흥미롭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큼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유형의 심리학 실험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책에 실린 실험 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페스팅거의 실험"

지구 종말을 예언한 도로시 마틴과 그의 추종자 집단에 잠입하여, 예언이 실패로 끝난 뒤의 상황을 기록한 실험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통해 집단의 믿음을 탐구했으며, 결론적으로 믿음은 끈질기고, 오히려 오류를 먹고 더욱 강해진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다미선교회의 '휴거 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지상 최후의 생존자는?"

핵전쟁 이후 바퀴벌레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SF적 주장을 실험을 통해 뒤집었습니다. 바퀴벌레에게 방사능을 쬐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바퀴벌레는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하며, 오히려 벌의 한 종류인 '기생봉'이 방사능에 가장 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와인 / 콜라 시음 맛 대결"

와인이든 콜라든, 사람이 '시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뇌는 혀로 느끼는 정보보다 시각 자료를 더 신뢰한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와인의 경우, 병을 먼저 보여주면 아무리 전문가라도 화이트 와인에 색소를 탄 것을 전형적인 레드 와인으로 착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순수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는 펩시와 코카콜라의 맛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맛'은 혀보다 광고나 시각적 요소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콜라 브랜드들이 광고에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는 이유가 이해되네요.

"모차르트 이펙트"

음악이 성인의 시공간 능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킬 수는 있어도, 아이들의 지능이나 학습 성취도를 높인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즉, 모차르트 음악을 이용한 아동 교육 사업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코끼리 기억 실험"

'코끼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서양 속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입니다. 특정 무늬를 선택하면 먹이를 주는 방식으로 학습을 시킨 후, 1년 뒤 같은 실험을 진행했더니 코끼리는 67%의 확률로 정답을 맞혔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상당히 뛰어난 동물임이 입증된 셈이죠.

"기억 전이"

뇌를 먹으면 기억이 옮겨진다는 가설을 검증하려 한 실험입니다. 성공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보며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의 한 에피소드("오메가의 성찬")가 떠올랐습니다... 웩!

"수면 학습 효과"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수면 학습은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구리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는 메시지를 들려주었더니 개구리 점프 대회에서 늘 우승했다는 실험 결과도 있었다고 하네요. 저도 자기 전에 영어 회화 파일이라도 틀어봐야겠습니다.

"검은 가방 사나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복면의 사나이를 통해 인간 심리를 분석한 실험입니다.

개인이 익명의 존재가 되면 반사회적인 행동을 더 쉽게 하며, 주변 사람들 역시 익명의 존재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쉬워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익명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특성도 있다고 하네요.

이 실험을 보니 '슈퍼히어로'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껴집니다.

"물에 빠진 주인을 구하라"

'명견 래시'에서 착안한 실험으로, 주인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연출하고 개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과는… 멍멍이는 주인의 생명을 구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일까요?

"타인의 물건"

미국 CSI 등에서 흔히 등장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타인의 음모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검증한 실험입니다.

과학수사국 직원들이 자신의 배우자와 관계를 맺은 후, 음모를 수거하여 분석한 결과, 타인의 음모가 발견된 확률은 17.3%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달되는 경우보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두 배 더 많았다고 하네요. 다소 애매한 수치군요.

2018/12/29

술 취한 식물학자 - 에이미 스튜어트/ 구계원 : 별점 3점

술 취한 식물학자 - 6점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구계원 옮김/문학동네

부제인 "위대한 술을 탄생시킨 식물들의 이야기" 그대로 을 만들때 사용되는 다양한 식물들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친숙한 사과나 보리, 포도, 쌀 등 고전적인 술의 원료에서 시작하여 바나나와 카사바와 같은 이색적이고 독특한 재료들,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 꽃과 나무, 열매들, 견과류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망라되고 있습니다. 이 재료로 만들어진 술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관련된 칵테일 레시피도 50여가지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요. 집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재료인 경우, 그 재배법까지 실려있고요.

분량도 400여 페이지를 훌쩍 넘어서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마시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술에 대한 소개입니다. 켄터키 버번이 첫 번째입니다. 켄터키가 지금과 같은 버번의 땅이 된 이유가 아주 매력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옥수수가 재배하기 쉬웠고 초기 이민자들이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출신이라 증류기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풍부한 석회암 매장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석회수는 지하에서 솟아 나올 때 1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이 온도는 냉각과 응결 과정에 꼭 맞는 완벽한 온도라네요. 석회수의 높은 알칼리성과 풍부한 칼슘, 마그네슘, 인산 함유도 맛을 더해주는 요소고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한 번 구입해야겠어요.
담배로 만든 술인 프랑스의 "페리크 리쾨르 드 타박"도 맛보고 싶습니다. 니코틴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데 과연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합니다. 참고로 담배로 고급 술집에서 수제로 "시가 비터즈"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담배와 향신료를 알코올 도수 높은 증류주에 우려내는 것으로 지나치게 많은 니코틴이 함유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군요.
포틀랜드 증류업자 스티븐 매카시의 갖은 노력으로 완성된 미송 증류주도 탐납니다. DOUGLAS FIR BRANDY 라는 술인듯 한데 1년에 250상자만 제조하는 술 치고는 가격도 5만원대로 저렴하군요. 우리나라에서 구하려면 그 배를 주어도 구하기 어렵겠지만요.

갖가지 토막 상식도 재미를 더합니다. 금주법 시행 당시 캘리포니아의 포도 재배 업자들은 "과일 벽돌"을 팔았다고 합니다. 포토를 말려서 압축한 뒤 와인 제조용 효모와 묶은 상품으로 물을 더하면 양조가 시작되는 물건이었다는군요. 아이디어가 정말 빼어나죠?
또 프랑스 포도나무는 19세기 포도나무뿌리진디에 의해 초토화 된 후 미국 포도나무와 접목하여 살아남은 것이며, 현재의 칠레 와인이 포도 나무 뿌리 진디 이전의 포도나무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이유 외에도 칠레 와인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은 셈입니다.
호밀이 맥각균에 감염되면 LSD 성분이 생기고, 이 맥각중독이 중세의 무도병의 원인이라는것도 마찬가지로 처음 알았고요. 마약 중독자라면 호밀 재배를 시도해봄직 하겠네요.
"그로그"는 영국에서 선원들에게 럼을 배급할 때 홀랑 마셔버리지 않게 물과 라임 주스, 설탕을 섞어 배급한 음료입니다. 그런데 럼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선원들의 의심이 커지자 비중을 증명하기 위해 럼과 화약을 섞어 불을 붙이는 테스트를 했다는군요. 대략 57% 정도의 알코올이 함유되어야 불이 붙었다는데, 이 테스트 결과를 "프루프 Proof" 로 제시한 것에서 현재의 프루프 단위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즉 57%의 알코올이 함유된 병은 100 프루프인 것이죠. 미국에서는 더 간략화해서 50%의 알코올이 100 프루프고요.
그 외에도 중국 요리에 많이 사용하는 "팔각"은 허브 리큐어에도 사용되지만 독감약 "타미플루"의 원료이다, 스위트 우드러프라는 여러해살이 풀의 "달콤한 풀내음"은 잠재적 독성 성분인 쿠마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표시이다는 등의 설명도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풀내음에 대한 설명은 정말 맞는 말인지 궁금하네요. 달콤한 풀내음을 가진 풀은 많으니까요. 의외로 우리나라 들판에도 독초가 가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록된 칵테일 레시피도 볼게 많은데, 감자로 만든 보드카인 스웨덴의 칼손스 골드 보드카로 만든 "블랙 골드"는 심플함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칼올드패션드 글래스에 얼음을 채운 후 그 위에 칼손스 골드 보드카 1과 1/2온스를 붓고 후추를 갈아 뿌리는게 전부거든요. 상당히 터프한 느낌인데 맛이 궁금하네요.
사케 칵테일은 니코리 사케 4, 망고 복숭아 주스 2, 보드카 1, 도멘 드 캉통 진저 리큐어 소량을 잘 섞은 뒤 칵테일 잔에 따르고 셀러리 비터즈 한 방울을 떨어트려 만듭니다. 대충 느낌은 복숭아맛 호로요이 느낌이 아닐까 싶군요.

이렇게 많은 정보가 수록된, 술과 관련된 식물의 백과사전이라 해도 무방한 책으로 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소장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단순 정보의 나열 뿐이라 읽는 재미가 덜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1/07

오늘 한잔? - 하이시 가오리 / 안혜은 : 별점 3점

오늘 한잔? - 6점
하이시 가오리 지음, 안혜은 옮김, 아사베 신이치 감수/이다미디어

'애주가 의사들이 권하는 최강 음주법'이라는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된 책. 애주가 의사들이 풀어낸 올바른 음주 방법 가이드로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숙취를 예방하는 음주법이 대표적입니다. 숙취 예방을 하려면 술이 위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의 상승을 완만하게 만드는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이 많은 음식을 안주로 같이 먹는게 좋다는군요. 대표적인게 치킨입니다. 치즈, 낫토도 좋으며 위벽 보호를 위해서는 음주 전 미리 우유를 마시는 것 보다는 양배추를 먹는게 도움이 됩니다. 
또 숙취 예방을 위해서는 간이 알코올을 해독하는 능력을 알고, 이에 맞춰 음주를 하는게 중요합니다. 1시간 동안 분해 가능한 순수 알코올 양 (술에 함유된 에탄올의 양으로 도수/100*마신 양(ml)*0.8)은 '체중*0.1g'이라네요. 저는 7g이니 한 시간에 맥주 500cc 1/3이 적당량인 셈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음주법도 알아두면 좋은 정보입니다. 일본인 기준, 적정 주량은 순수 알코올로 하루 20g (맥주 500cc 한 잔, 와인 2잔 정도) 입니다. 일주일 총량으로 이 기준을 지켜야 하며, 일주일에 이틀 이상 '휴간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한 음주 후 구토가 하고 싶어질 때는 참으면 안됩니다. 자연스러운 생체 반응에 따르는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구토는 식도가 위산에 손상될 수 있으므로 구토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건 지양해야겠지요.
그리고 술과 함께 약을 먹는건 절대로! 안됩니다. 약은 원래 절반 정도 대사되는걸 전제로 처방되는데, 간에서 약과 알코올을 동시 처리해서 약리 효과가 지나치게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사의 절반을 알코올이 가져가므로). 그래서 음주 후 약을 먹어야 하면 최소 3~4 시간은 지나야 한다네요.

어떤 술이 어디에 좋은지?에 대한 정보도 실려있는데 고구마로 만든 전통 소주는 혈전 용해 물질을 증가시키며, 레드 와인 속 폴리페놀은 심질환과 동맥경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레드 와인의 레스베라트롤과 쓴 맛 나는 맥주 속 이소알파산은 치매 예방에도 효과적이고요.
이외에 만취 때 뒷담화가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전두엽이 마비되기 때문이며, 필름이 끊겨도 집에 찾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고정된 장기 기억 덕분, 술은 마실 수록 세지는게 아니라 무조건 (100%)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등의 재미있는 정보가 많습니다. 음주 후 목욕할 때 '히트 쇼크'가 와서 사망할 수도 있다는건 추리 소설의 트릭으로 사용해도 좋아 보였어요.

비슷한 조언이 반복되며, 관심이 없을 소재도 일부 섞여 있다는 단점도 있으나 여러모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책이 제공해 준 정보에 따라 앞으로는 한 주에 와인 1병 정도를 치즈 안주와 함께 즐겨볼까 합니다.

2017/02/26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 기타무라 가오루 / 오유리 : 별점 3점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리 옮김/작가정신

일상계 추리소설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가 출판사에서 일하는 코사카이 미야코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술 때문에 벌어진 온갖 에피소드들을 일종의 만담처럼 써 내려 간 작품입니다. 짤막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연작 단편 소설 느낌도 듭니다. 등장인물들이 한명씩 결혼하고, 마지막은 미야코가 화가 오코조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거든요.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술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 - 술 먹고 상사에게 실수를 한다던가, 중간에 잠들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던가 등 - 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고 뻔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냥 술 먹고 사고치는 이야기만 수록된건 아닙니다. 사건들의 디테일이 좋고 기승전결, 게다가 반전까지 맞아 떨어지는 재미난 이야기들도 많아요. 예를 들면 미야코가 술을 먹고 엔도 편집장에게 와인을 쏟게 되는 사건 이야기가 있습니다. 와인을 쏟는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이는 이야기로 따지면 '기승'에 불과합니다. '전', 즉 극적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은 아내에게 잡혀사는 엔도에게 술취한 다음날 아내가 화를 내면서 와인을 누가 쏟았냐고 물어보는 장면부터입니다. 엔도는 회사 여직원이 취해서 쏟았다고 이실직고하지요. 그런데 아내가 보여준 것은 런닝이었습니다! 엔도는 기겁을 합니다. 셔츠는 전날 술집에서 빨아주어서 얼룩이 없어진걸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술취해서 술을 쏟았는데 셔츠가 아니라 런닝에만 묻었다.... 여기가 '전' 부분입니다. 다행히 셔츠에 묻은 와인도 지워진게 아니라 어두운 조명 탓에 지워진걸로 보였다는 결로 이어지고요. 재미있지 않나요?

추리 소설가다운 에피소드들도 제법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토구치 마리에, 통칭 문 언니가 오랜 동료 이케이의 결혼 축하 회식에서 이케이의 결혼 반지를 잃어버리는 에피소드입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결국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반지를 찾지 못해 우는 문 언니를 이케이가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미야코의 추리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어쨌거나 문 언니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싶었던게 아닐까? 그러면 그 핑계로라도 울 수 있을 테니까...' 일상계다운 멋진 이야기였어요.
다음은 미야코가 친구 사나에와 함께 가루이자와로 출장갔을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함께 술을 먹고 미야코가 깜빡 잠든 사이, 사나에가 사라집니다. 미야코는 한참 찾다가 호텔 방 밖에서 자고 있는 사나에를 발견하지요. 그런데 그녀를 데리고 들어 오려다 호텔 방 문이 닫혀 못 들어 오게 됩니다! 만화 등에서 흔히 보아 온 이야기의 재탕이긴 한데 진상에 대한 추리가 그럴 듯 했습니다. 사나에가 사는 집 구조가 호텔과 비슷했기 때문에, 술에 취해서 집에 온 것으로 착각했던 사나에가 호텔 방 밖에서 뻗었던 겁니다. 집에서처럼 욕실에서 나온 다음, 좌측으로 돌아 문을 열고 난 뒤 바로 쓰러졌는데 방의 배치가 정 반대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묘사도 볼만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 해 주는 듯한 문체도 독특하고요. 특히 코사카이 미야코의 심리묘사와 대사들이 정말로 찰집니다. 정말로 어딘가에 있는, 현실 속 누군가를 그대로 그려낸 듯 생생한 덕입니다. "뭐가 구시렁이고 뭐가 불평인가. 그 기준점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전자에 약간의 유머와 여유가 있다면, 후자는 오로지 암흑의 구렁텅이 같은 이미지다." 같은 식으로 요. 이외에 온갖 맛있는 술과 안주에 대한 소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애주가, 특히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를 재미있게 읽은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취향 저격이실 겁니다.

2019/03/30

맛의 천재 - 알렉산드로 마르초 마뇨 / 윤병언 : 별점 5점!

맛의 천재 - 10점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윤병언 옮김/책세상

이탈리아인이 자국의 유명 요리와 그 요리에 관련된 주변 역사까지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는 요리 관련 미시사 서적입니다. 딱딱할 내용을 재미나게 써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세집 운운하는 박찬일 셰프의 소갯글부터가 재미난데 이어지는 본문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유머가 가득합니다. 

요리 역사에 대한 사료적 가치도 엄청납니다. 피자만 해도, 피자의 역사만 오롯이 다룬 책도 읽어보았지만 오히려 이 책 쪽이 밀도가 더 높을 정도니까요.
원래, 19세기 초 까지만 해도 반죽에 먼저 치즈 등 식재료를 올리고 그 위에 토마토 소스를 뿌렸다는데 언제 이 순서가 뒤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원래 있었지만 요리사 라파엘로 에스포지토가 재치(피자의 이름을 묻는 왕비에게 왕비의 이름이라고 대답한)를 발휘한 덕분에 역사에 길이 남았다는 등 시시콜콜하면서도 실제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스파게티의 마르코 폴로에 의한 중국 유래설은 오류라고 합니다. 1929년 미국의 "마카로니 저널"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근거없는 기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사를 읽어보니 베네치아 뱃사람 이름이 스파게티였다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어서 이 기사가 사실처럼 굳어진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애초에 재료부터 다르니까요. 물론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수마트라 지방의 파스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제 중국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전해주기는 합니다. 당연히 마르코 폴로보다는 훨씬 전 시대에 말이죠.
또 스파게티가 주력 국수가 되고 마카로니는 샐러드 용으로 밀려난 계기는 1927년 크래프트 사의 파마산 치즈 가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마케로니는 귀족들의 음식이었는데 안타까와요.

샐러드는 이탈리아 대표 요리의 하나랍니다. 로마에서부터 먹어왔다지요. 소개되는 로마식 샐러드 레시피를 보니 식초는 아끼되 기름은 아끼지 말고, 소금은 많이 후추는 적당히 쳐서 먹는다는데 완전 제 취향입니다.
프로슈토는 고대 로마에서도 먹었던 유서깊은 음식으로 포 강 유역의 에트루리아 문명터에서 발굴된 뒷다리가 없는 돼지의 뼈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돼지 종류는 지금과 달랐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좋았어요. 또 놀랐던 건 당연히 생으로만 먹을 줄 알았는데 볶거나 익혀먹는 레시피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튀김까지 있는데 그 맛이 궁금해집니다. 

카르파초가 그 명성에 비하면 만들어진지 고작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놀랐네요. 실존 인물로 의사가 건강 문제로 날고기를 권했던 후작 부인 니나 모체니고를 위해 만들어진 요리라는 역사도 흥미롭고요. 이름도 화가 카르파초의 이름에서 따온 직접적인 네이밍이라는데 역시나 처음 알았습니다. 요리 창조자인 베네치아 해리스바의 주세페가 아들 아리고와 요리 이름에 대해 고민하다가 앞 벽에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의 전시회 포시터를 보고 옳다쿠나 싶어 이름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화가가 즐겨 쓴 붉은 색이 요리의 색상과 유사했기 때문이라는데 무릎을 칠 만 합니다.

후반부 누텔라 이야기에서는 다시금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누텔라가 어떻게 생겨났고, 그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현재와 같은 세계 정복 (?) 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그야말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쟁 제품까지 소개하니 말 다했죠. 그나마 누텔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던 "오무라이스 잼잼"에서의 내용은 그냥 겉핥기에 불과하더라고요. 그 외에도 옥수수, 모짜렐라, 와인, 티라미수 등 친숙한 음식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과감한 발상도 돋보입니다. 포크에 대해 소개하며 샤를마뉴 재위 당시 왕과 귀족들은 사냥한 동물들을 끊임없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통풍이 직업병과 같았다는 반쯤은 우스개스러운 이야기도 좋은 예지만, 로마 시대에 늑대는 야수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로마인들이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에 기반하며, 그들이 양을 먹지 않았기에 늑대는 경쟁자, 야수가 아니라 친구였다는거지요. 그러나 인간이 양을 먹기 시작하면서 늑대가 야수가 되었다는데, 무척이나 그럴듯합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먹인게 늑대였던 것이 이 발상을 뒷받침합니다.
와인과 사과주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이 세계를 뒤덮은 이유를 기독교와 연결시켜 설명하거든요. 초기 기독교, 로마 교회는 포도주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는데 알프스 북쪽 드루이드 교도는 사과주를 마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드루이드들 천국 명칭 '아발론'은 아발의 섬, 즉 사과의 섬이라는 뜻이라는 말과 함께요. 결국 로마 교회가 승리한 뒤 사과가 지옥을 상징하며 종교 행사에서 사과주가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지요.
샐러드가 식사의 시작에서 식사 도중의 곁들임 음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다시 식사 시작 음식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실제 역사적 사실 - 식초가 들어간 음식을 거부하는 문화와 비타민 유행 - 과 결합해 보여주는 내용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디테일이 탁월한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의 연회 문화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다양한 책을 읽었지만 와인을 따르던 전문가 코피에레에 대한 묘사는 처음 봤네요. 온갖 좋은 점은 한 몸에 다 갖춘 듯한 사람이더라고요. 길게 늘어뜨린 옷에 주홍색 양말,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 벨벳 신발을 신는다는 패션 센스마저 돋보입니다.
또 당시 요리들은 모두 단품이 아니라 코스였으며 당시 설탕을 많이 사용했던건 소금의 짠맛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는 발상도 눈에 띕니다. 그리고 안 좋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가 필요했다는 것도 사실과 멀었다는군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비싼 향료를 살 여유도 없었을 거라는게 이유인데 확실히 와 닿습니다.
캐비아는 원래 굉장히 싸구려 음식으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 병사들에게 보급품으로 캐비아 캔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참치 대뱃살, 킹크랩과 같은 과정을 밟은 셈이네요.

그 외에도 유명한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의 손길이 닿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저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모카 에스프레소 디자인 등 디자인 강국 이탈리아스러운 이야기들도 마음에 들었고 다빈치가 실제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는 이야기, 그곳에서의 일화도 기억에 남습니다. 음식의 양을 줄이고 플레이팅에 신경을 쓴 최첨단의 세련된 레스토랑이었는데 손님들 모두 격분해서 경영은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과연, 플레이팅 따위보다는 가성비가 최고인거죠.

이런 내용이 재미난 글과 함께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 있습니다. 단점을 찾는게 힘들 정도로 재미있고 가치도 높은 책입니다. 2만원이라는 가격도 수긍할만 합니다. 제 별점은 5점! 요리, 특히 이탈리아 요리를 사랑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탈리아인들은 정말로 위대한 민족이에요. 요리와 예술 측면에서는요.

2020/04/19

중세 유럽의 레시피 - 코스트마리 사무국 / 김효진 : 별점 1점

중세 유럽의 레시피 - 2점
코스트마리 사무국 지음,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주제에 대해 깊숙히 파고들어, 일반 상식 이상의 정보를 전해준다는 취지의 AK Trivia books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제목 그대로 중세 유럽 요리의 레시피 43개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시피 외에 중세 요리 및 저자의 중세 축제 체험기를 다룬 컬럼 몇 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요.

특징이라면 중세 유럽의 레시피를 현대의 재료로 재현하는걸 중요한 포인트로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제인 "손쉽게 만들어 즐겁게 맛보는 중세 요리'에 충실한 셈이죠. 그래서 수록된 대부분의 레시피들이 실제로 현재, 그리고 가정 내에서 구현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맛이 짐작 가능해서 딱히 신선한 레시피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쿠민 수프'는 향신료 쿠민이 들어갈 뿐, 현재도 우리가 즐겨먹는 '달걀국'과 같아요. 버섯 수프 '펑거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닭 육수에 다듬은 버섯들과 파, 시나몬, 클로브, 후추를 넣고 끓이는 레시피와 결과물 사진을 보면, 닭 육수를 쓰기는 하지만 멸치 다시마 육수를 써서 만드는 버섯국과 별로 맛이 다를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새의 무덤' 이라는, 중세풍 이름의 요리도 그 정체는 다진 마늘, 소금, 후추와 버무린 닭다리살을 볶은 뒤 타임, 로즈마리를 넣고 레드 와인과 물에 조리는 와인 닭찜입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가 흔히 먹는 닭가슴살 간장 조림에서 간장만 와인으로 대체하면 되는 수준이라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어 먹을 수 있겠죠.
또 현대에 재현하기 위해 재료를 나름 응용한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중세의 허니 토스트를 재현하기 위해 '식빵'을 쓰는 식으로요.

물론 현대에 중세 요리를 재현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나쁠건 없습니다. 문제는 내용의 깊이와 전문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지요. 레시피 하나하나의 분량은 많아야 2페이지 정도에 머물 뿐으로, 정말 '레시피' 이외의 다른 정보가 거의 소개되지 않을 뿐더러, 레시피들의 출처들도 소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저자의 마음 속에서 그럴듯하게 꾸며낸 중세 유럽의 요리인지, 아니면 실존했지만 이를 현대에도 맛볼 수 있게 어레인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전문성 측면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수록되어 있는 컬럼들도 중세 유럽의 장미, 백합, 제비꽃에 대해 알려주는 정도만이 괜찮았을 뿐 그 외에는 별볼일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쓸데 없는 저자의 중세 축제 체험기나 일본 내 중세 유럽 관련 행사에 대한 정보에 대한 사진과 비중이 높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풀 컬러지만 재현한 음식들 한 컷씩만 실려있는 수준의 도판도 딱히 대단하지 않으며 책의 완성도도 그냥저냥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중세 유럽의 레시피를 현대에 재현한다는 취지 외에 건질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17,000원이라는 가격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요. 이쪽 분야에 관심이 지극히 많으시더라도,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9/01/05

밥상 위에 차려진 역사 한 숟갈 - 박현진 : 별점 2.5점

밥상 위에 차려진 역사 한 숟갈 - 6점
박현진 지음, 오현숙 그림/책들의정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음식 관련 컬럼을 책으로 엮은 결과물로 부제는 "역사 속 한 끼 식사로 만나는 음식문화사의 모든 것"입니다. 모두 44개의 컬럼이 실려 있습니다.
항목별로 다양한 음식들의 유래 등 역사를 비롯하여 음식 관련 기술과 문화에 대해서 소개해 주는데, 생각보다 깊이있고 새로운 내용이 많아서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예를 들어 치즈를 응고하는데 사용되는 레닛이 생명 공학 기술로 대량 생산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오래전 "에이브"에 포함되어 있었던 "초원의 집" 소설에서 치즈를 만들기 위해 어린 송아지를 도살하는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데, 다행히 지금은 어린 로라가 송아지와 생이별할 일은 없겠군요.

와인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의 포도 재배와 포도주의 역사에 대해 소개한 글도 인상적입니다. 포도를 으깨어 즙을 낸 뒤 서늘한 곳에 보관하여 야생효모가 발효시키는 방식의 서양식이 아니라, 포도즙을 쌀과 누룩에 넣는 방식이라는데 꼭 한 번 맛보고 싶어집니다. 고려 시대의 포도주는 포도즙, 찐 찹쌀, 소맥가루를 섞어 만들었는데 그 맛이 아주 훌륭하다니까요. 전통주로 이런 술이 제조되어 시판되면 좋겠네요.
술 관련해서는 막걸리에 대한 글도 기억에 남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고칼로리 식사를 하지만 미국인보다 건강한 이유는 레드와인을 마시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로 시작되는 글로, 놀랍게도 막걸리는 와인보다도 더 건강에 좋다는 내용이거든요. 정확하게는 막걸리용 전통 누룩에는 급성 및 만성 위궤양 억제, 혈소판 응집에 의한 혈전 감소, 혈중 콜레스테롤 저하 등의 효과가 있으며 항암물질 파네솔이 포도주, 맥주보다 10~25배 더 많이 들어 있는 등 놀라운 건강식이라니 이제부터는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애용해야겠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음식 관련 역사 - 게장은 무려 500여년 전 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17세기 전주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퍼진 콩나물 비빔밥이 오늘날의 전주 비빔밥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의 김초밥 후토마키는 도박장에서 간단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초밥집에 주문하면서 탄생하였다,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 국수를 먹는 이유는 오래전 밀이 아주 귀한 것이었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등 - 와 토막 상식 - 쭈꾸미의 어원은 한자 속명인 죽금어竹今魚에서 비롯되었다, 조기助氣는 사람의 기운을 돋운다는 뜻, 굴비屈非는 이자겸이 귀양지에서 임금에게 굴비를 진상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글자를 써서 보내어 유명해졌다 등 - 도 가득합니다.

신문 연재물답게 각 컬럼마다 길어야 5~6 페이지 분량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 점이에요. 덕분에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깊이가 약간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판은 문제에요. 소개되는 음식에 대해서 단 한장의 가치있는 도판이 없고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러스트만 몇 컷 실려있을 뿐이거든요. 또 소개되는 몇몇 요리는 별도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레시피 형태로 수록되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테고요. 한마디로 책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디테일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가치있는 정보가 제법 된다는 장점은 높이 살 만 하지만 전반적인 완성도, 만듬새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해서 감점합니다. 음식과 요리 관련 이야기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

2019/05/26

80일간의 칵테일 세계일주 - 채드 파크힐, 앨리스 오 / 성중용 : 별점 2점

80일간의 칵테일 세계일주 - 4점
채드 파크힐 지음, 앨리스 오 그림, 성중용 옮김/아카데미북

제목처럼 80개의 세계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칵테일의 유래와 대표 레시피를 화려한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무려 80개나 되는 칵테일이 소개되기 때문에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리시 커피'는 아일랜드 서쪽 포이니스가 교통 요지였는데, 1943년 당시 이곳을 방문하는 부유층을 위해(당시 공항 이용 여행객은 부자였으므로) 제공되던 칵테일이었다고 하네요. 공항이 추워서 몸을 데우라는 의미로 뜨거운 커피에 약간의 아이리시 커피를 넣은게 원래 레시피고요.
'트웬티스 센츄리'는 진과 레몬 주스, 아페르티프 와인과 초콜릿 리큐어의 혼합물로 극진한 서비스로 유명했던 철도 회사 '트웬티스 센츄리' 노선에서 이름을 빌려왔다고 합니다. 트웬티스 센츄리 노선은 이른바 '레드 카펫'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정도로 고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군요. 지금 우리나라로 따지면 '호텔 신라' 라는 칵테일을 만든 셈이겠지요.

그리고 클래식 칵테일 레시피들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습니다. 칵테일은 비교적 현대적인 음료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요. 예를 들어 '다이키리'는 헤밍웨이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19세기 후반에 쿠바 산티아고 외곽 다이키리 마을에서 시작되었다던가, 피시 하우스 펀치는 조지 워싱턴이 18세기에 이미 마셔보았던 오래된 술이라는 등이 그러합니다.

집에서 쉽게 만듬직한 레시피도 눈에 띕니다. '키르'는 책에서도 간단하기 그지 없다는, 단 2가지 재료만 필요한 칵테일입니다. 추가 얼음이나 가니쉬도 필요없고요. 그러나 매우 세련되고 프랑스 특유의 우아함을 풍기며, 파리의 카페 테라스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니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화이트 와인 150ml에 크림 드 카시스 30ml를 와인 글라스에 넣고 조금만 저으면 된다니까요!
처음 보는 독특한 스피리츠들을 사용하는 칵테일들도 몇 개 있습니다. 브라질의 사탕수수 증류주 카샤사, 볼리비아의 특산주로 숙성하지 않은 투명한 포도 증류주라는 싱가니, 노르웨이의 린냐케비트, 폴란드 보드카 즈브로카가 그러한데 이들로 만든 칵테일들 모두 한 번 맛보고 싶어집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술이 많은건지, 진심으로 기쁘군요.

그러나 전체적인 책의 퀄리티,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글이 이상하게 읽기가 힘든 탓이 큽니다. 칵테일의 유래 등 에피소드를 소개하기에는 딱딱한 문체가 와 닿지 않고, 전문가적인 영역으로 보자면 딱히 깊이도 없어요. 한 페이지에 모든 내용을 넣으려고 압축한 탓인지,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듯 싶은데, 이럴 바에야 실제 여행하면서 맛본 칵테일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소개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80개의 지역 대표 칵테일이 무슨 기준인지 애매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정말로 책 기획 컨셉에 맞는 칵테일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고작해야 싱가폴 래플스 호텔하면 떠오르는 싱가폴 슬링 정도? 그 외에는 특정 지역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시도가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정도를 기대했고, 그 기대에는 값하지만 아주 좋은 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림보다는 글 쪽 문제가 커요.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2/05/12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 기 도이처 / 윤영삼 : 별점 4점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 8점
기 도이처 지음, 윤영삼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언어와 인식 (넓게 보면 문화)의 인과관계를 역사적인 이론들을 통해 해명해 나가는 책. 자주 찾는 블로그인 zariski님 블로그에서 멋진 리뷰를 읽고 호기심이 가서 바로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언어가 인식,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치느냐라는 것인데, 크게 색깔에 대한 이론이 펼쳐지는 1부, 방향과 성별에 대한 특징 분석이 이루어지는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제별로 역사적, 지역별 언어의 특징 분석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제목이기도 한, 왜 호메로스는 소와 바다를 와인 빛깔이라고 묘사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고민, 거기서 파생된 인간과 색깔 인지 능력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시대순으로 설명됩니다. 색깔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발달이 뒤따라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한 최초의 발상에서부터 다양한 고전을 거쳐 여러 가지 이론이 펼쳐지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2부는 급진적인 사피어 - 워프 가설에서 시작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설명됩니다. 이 부족은 동-서-남-북의 절대 좌표로 공간을 인지하고 말한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네 발앞에 개미가 있어"가 아니라 "네 발 동쪽에 개미가 있어"라고 하는 식이라죠. 이렇게 절대 좌표로 공간을 인지하는 것이 몸에 배면, 어떻게든 방향 감각이 생긴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부족하기는 하나 괜찮았습니다. 과연 언어 때문에 초능력(?)까지 생기는 것일까요? 어쨌건 몰랐던 내용이라 신선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구구이미티르어와 같이 역사적이고 사멸해가는 특수한 언어 말고도 현대어로 특징을 비교 분석한 성별 단락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이네의 시를 통한 영어, 독일어의 차이에서 시작하는데 여러모로 되새겨 생각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덧붙이자면 2부에서는 그 유명한 캥거루 어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원주민들 언어에 "캥거루"가 사실은 없고, 쿡 선장이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을 원주민에게 물어보자 "나는 모른다"라는 말로 "캥거루"라고 했다는 전설 말이죠. 사실은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에 회색 캥거루의 특별한 유형을 "강구루"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렇듯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예제들이 모두 쉽고 글 자체가 재미있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지식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보기 드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죠. 무엇보다도 다양한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책인데, 국내 번역이 충실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양한 예제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글이 그만큼 좋은 언어라는 뜻도 되겠죠. 별점은 4점입니다.

언어와 인식 (문화)의 인과관계와 상관관계가 궁금하신 몇 안 되는 특정 독자분들에게는 필독서이며, 단지 지적인 흥분과 인문학적 즐거움을 얻고자 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드립니다.

2014/03/26

술의 여행 - 허시명 : 별점 3점

술의 여행 - 6점
허시명 지음/예담

술을 주제로 하여 해당 술의 고향을 찾아가는 기행문이자, 그 술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는 미시사, 식문화사, 그리고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레시피집을 겸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정 지역에 대한 기행문과 그 지역 문화재 소개가 결합되어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비슷한 맥락이지요. 개인적으로 미시사, 문화사류의 책을 좋아할 뿐더러 요리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목차는 지역별 16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두 꼭지는 일본의 술문화와 일본기업 월계관에 대해 다루고 있으므로 소개되는 지역은 14지역입니다.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는 안동의 고삼주 이야기입니다. 고삼주는 견훤과 왕건이 고창에서 대치하던 929년 겨울, 주모 안중이 견훤의 병사들에게 먹여 그들을 취하게 만든 뒤, 왕건을 찾아가 공격하라고 알려 대승하게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다는군요. 맛이 쓰면서도 단 탁주로 추정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경주는 당연하겠지만 신라주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목제주령구 각 면에 있는 벌칙들을 소개해주며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이 목제주령구가 복원과정에서 유실된 것은 몰랐었는데, 그나마 실측과 사진을 통해 복제품이라도 전해지는 게 다행이네요. 다음에 경주에 가게 되면 저도 기념품으로 하나 사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희석식 소주가 대세인 현재 시장에 증류주로 당당하게 도전하는 중인 경주법주의 "화랑"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금복주의 계열사이기도 한 경주법주가 독재정권 시절 일종의 특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배경설명까지 친절하게 소개되는데 뭐... 본의는 아니더라도 특혜는 특혜겠죠.

한반도 최초의 포도주는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던지는 무주의 머루주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포도주는 원래 고려시대 원나라로부터 전래되었다고는 하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진짜 포도주는 하멜이 표류했을 때 난파된 잔해에서 건져내었던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클래릿 1통이었다고 하네요. 제주도 관리들에게 상납하였더니 관리들이 맛있다고 5일 만에 다 먹어버리는 바람에 조정으로는 진상되지 못해서 아예 알려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포도주는 "동의보감"과 "양주방"에 실린 대로라면 누룩과 찹쌀 고두밥, 포도즙을 섞어 빚는 중국식이었다고 하고요.
현재 한국 포도주는 "머루"로 만들고 있는데, 이 머루주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무주 지방의 와이너리 4곳 방문기 및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샤또무주의 머루주는 꼭 먹어보고 싶어요. 손수 농사지은 원료로 와인을 빚는 '도메인 와인'이라고 하는데, 주인이 있으면 팔고 없으면 그만 판다는 느긋한 마인드가 마음에 꼭 들거든요. 저자의 말대로 주인이 편안해야 술도 편안한 법이겠죠.

그 외의 이야기들도 모두 재미있고, 소개되는 술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조 과정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는데 꼭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맛깔난 글솜씨도 좋았고요. 일본과의 술문화 비교라든가 사라져가는 전통술, 누룩도가들의 이야기는 안쓰러움과 함께 전통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단점이라면 사진이 별로라는 점, 그리고 이왕지사 기행문처럼 쓸 것이라면 조금 자세한 지도를 함께 실어주었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복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은 것도 의아한 점이고요. 

그래도 유려한 글과 술에 대한 정보로도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중 저와 비슷한 취향이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 복간본인데 이미 절판되어 있네요. 이유가 무엇일지... 그 정도로 안 나갈 책은 아닌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덧붙여 부록에 실린 술도가 연락처 중 꼭 먹고 싶은 것과 그 연락처를 기록해 놓습니다. 구하기 쉬운 대형 주류업체 술부터 먼저 찾아 마셔봐야겠습니다. 이번 주말은 "화요"와 함께 해 볼까요?

1. "가을국화" - (주) 무학
2. "샤또무주 머루와인" - 샤또무주 와이너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 46-20 / 063-322-8101
3. "문경 호산춘"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번지 / 054-552-7036
4. "부자" - 배혜정 누룩도가
5. "운해" - (주) 금복주
6. "화랑" - (주) 경주법주
7. "화요" - (주) 화요

2016/10/10

미스테리아 8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별점 3점

미스테리아 8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창간호를 읽고 실망이 커서 더 구입하지 않을리라 결심했었는데, 우연찮게 최신호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호는 아주 좋더군요! 이전 실망감을 모두 날려버리고 앞으로 계속 구입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았어요.

우선 1호에서 지적했던 편집, 디자인이 일취월장 했습니다. 구성 면에서 나무랄 데 없습니다. 매 호 이어지는 장편 연재물이 없고, 연재물들 모두 한 회 분량으로 마무리되는 점도 좋습니다. 잡지를 계속 사 보지 않고 한 권만 구입해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으니까요. 수록 기사들 역시 모두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기본은 해 줍니다.

도입부를 장식하는건 요네자와 호노부 심층 분석입니다. 작가의 작품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집중 탐구에서 시작해 서면 인터뷰, "빙과"로 유명한 고전부 시리즈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걸작 9편에 대한 짤막하게 소개되는 마무리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자세하고 깊이 있는 내용도 많은 편이에요.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아홉 가지 레퍼런스" 중 7편을 이미 읽었는데, 남은 2편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기타무라 가오루의 "시간과 사람 3부작" "스킵", "턴", "리셋"과 히구치 유스케의 "나와 우리의 여름"입니다. 정확하게는 4편이군요.).

올림픽 시즌을 겨냥한 특집 기사도 볼거리입니다. 올림픽을 물들였던 도핑 스캔들에 대한 짤막한 논픽션, 그리고 스포츠 관련 추리 작품 소개가 이어지는데, 도핑 스캔들 기사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의 러시아 도핑 스캔들에 얽힌 뒷이야기라던가, 동독에서 약물을 복용했던 전 여성 투포환 챔피언이 성전환 수술을 받아 남성이 되었다는 등, 그간 몰랐던 내용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포츠 관련 추리 작품을 다룬 글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선정된 작품들 대부분이 프로야구 관련 소설("마구", "최후의 일구" 등)이라 관련성, 의외성 모두 떨어지는 탓이에요.

이어지는 신간 소개도 좋습니다. 1호와는 다르게 잘 쓰여진 글들로, 한 편의 잘 된 리뷰로 보아도 손색없는 수준입니다. 도진기의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루스 웨어의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미나토 가나에의 "리버스"는 소개글만으로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뒤이은 논픽션 기사 3편도 기대 이상입니다. 법의학자 유성호가 쓴 "적과의 동침",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의 원형인 '엘리자베스 캐닝' 사건을 다룬 "나를 찾아줘", 소설가 곽재식의 우리나라 옛 괴사건을 다룬 "왜 머리카락을 잘랐을까?"인데, 특히 마지막 기사가 압권입니다. 1966년 발생한 6세 여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범행 동기도 짐작이 안 되어서 경찰의 다각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질 뻔합니다. 그런데 시체의 머리카락이 잘려 있던게 머리카락을 잘라 판 가출 소녀와 이어지게 되고, 그녀가 머리카락을 팔기 위해 살인 사건을 저지른 것이 밝혀집니다. 아픈 시대의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에는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전부 시리즈" 단편이 포함되어 서두의 요네자와 호노부 특집과 이어지는 수미쌍관식 구성에 눈길이 가네요.

전체 분량 중 2/3 이상이 평균 이상의 가치와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기사들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권도 구해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록 단편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울에는 비치지 않는다"

'고전부 시리즈' 단편으로 특이하게도 이바라 마야카가 주역입니다. 중학교 졸업 작품 제작 당시 벌어진 사건 - 단체로 거울용 테두리를 만들기로 했는데 오레키 호타로가 자신의 팀 파트를 엉망으로 제출하여 작품을 망쳤던 사건 - 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이바라 미야카가 호타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지요. 팬이라면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큽니다.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제공을 하지 않는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거울 테두리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독자가 추리에 동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또 덩굴이 S자라는 것을 수상히 여긴 오레키의 행동도 석연치 않습니다. A라면 모를까, 덩굴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면 S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S를 뺌으로서 나름 정의구현을 한다는(아사미를 아미로 만드는 것) 결말로 가져가기 위함이었겠지만 억측이 지나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가 모토인 호타로가 왜 직접 뛰어들어 욕까지 사서 먹었는지 역시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팬이라면 읽어봐야 하겠지만 추리적으로는 약한 편이라 감점합니다.

"사라진 앨리스"

갓 결혼한 남편이 호텔방을 구하지 못해 아내를 홀로 호텔에 남겨두는데, 다음날 아침 아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숙박계는 물론 호텔 매니저, 주유소 직원에 결혼식을 주관한 판사마저 모두 사실을 부정하고요.
그러나 손수건에 새겨진 이니셜 하나만을 믿고 형사 에인슬리가 캐넌을 도와 사건을 파헤치게 됩니다. 에인슬리의 논리는 확고합니다. "이 혼란의 핵심은 호텔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 실종의 과정보다는 이유를 밝혀내는 게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 모든 일을 거슬러 점점 앞선 시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서 앨리스를 처음 만난 저택으로 돌아간 뒤, 사건을 해결하게 되는 내용으로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입니다. 아내가 사라진 말도 안 되는 상황 묘사가 발군인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위기에 처한 여성을 구하는 모험극이기도 한데, 특히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서스펜스의 제왕’ 코넬 울리치의 작품다운 남다른 몰입감을 자랑합니다. 상황 설정부터가 기가 막히잖아요?

아쉬운 점이라면 서스펜스 스릴러(아내가 사라졌는데 모든 사람들이 아내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분에 비해, 어느 정도 진상이 드러난 이후의 모험극 쪽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아니지만, 아내의 존재를 돈으로 막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지 조금 의문도 들고요. 존재를 지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니까요.

그래도 작가 명성에 어울리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908년산 포트와인 독살 사건"

몬터규 에그는 고객인 보로데일 경을 방문한 자리에서 경이 독살되었다는걸 알았다. 독은 경이 마시던 포트와인에 들어 있었고, 경찰은 몬터규 에그에게 몇 가지 확인을 부탁했다. 에그는 간단한 조사와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낸다...

도러시 세이어스 여사의 초단편으로, 이름만 들어보았던 와인 판매원 탐정 몬터규 에그 시리즈입니다.

일단 몬터규 에그 캐릭터만큼은 좋았습니다. 약간 허세 끼 있는 떠벌이로, 그가 이야기하는 수다들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인데 밉지 않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국적인 느낌도 한가득 전해주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완성도가 무척 낮습니다. 추리 자체가 비약이 심할 뿐 아니라, 범인과 경찰이 누가 멍청한지 경쟁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선 범인들은 왜 희생양을 내세우지 않았을까요? 보로데일 경이 자살하지 않은 것이 밝혀진다면 범행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였을 텐데요. 그리고 경찰 역시 멍청함과 무능함으로 이에 견줄 만합니다. 범행 현장에 있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신원조사조차 하지 않고 무슨 수사를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몬터규 에그 캐릭터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은 조금 더 낫기를 바랍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2/01/03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노코는 애인 준이치에게 결별을 통보받았다. 그녀의 하나 뿐인 친구 가요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 뒤, 소노코는 자살로 추정되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이자 경찰인 야스마사는 사건 현장에서 타살의 증거를 발견했다. 야스마사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어 단죄할 것을 결심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높은 지명도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는 아니라서 큰 관심이 없었던 작품인데, (취향 존중!) 물만두 홍윤 님의 유작 리뷰집에 실린 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물만두 님의 리뷰대로 정통 본격 추리물이더군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완성도도 높았고요. 특히 탐정 역할을 하는 야스마사가 발견한 단서와 거기서 비롯되는 의문들을 독자와 공정하게 공유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수사 단계별로 와인과 와인병, 복사 키, 태워버린 종이의 정체, 소노코가 죽기 전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곳, 빌린 비디오데크의 의미 등 다양한 단서가 제시된 후 설명을 덧붙이며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성인데, 독자에게 "이것이 단서다"라고 제시하면서 함께 추리하고 수사하도록 유도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해졌습니다.

피해자의 오빠 야스마사가 가가 형사와 경쟁하며 범인을 쫓는 구도로 이루어진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지는 두뇌 싸움도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만의 단서를 갖고 있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독자는 야스마사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수사가 막힐 때마다 가가 형사가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든요. 이러한 구조 덕분에 앞서 이야기한 단계별 진행 방식과 맞물려,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독특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준이치의 알리바이 트릭 같은 곁가지 트릭도 잘 짜여 있었고, 마지막 결말에서 이어지는 반전도 어차피 둘 중 한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구도 속에서 의외의 재미를 주는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인 '진범이 누구인지 끝까지 독자에게 밝히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열린 결말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작가의 머릿속에는 정리된 답이 있을 텐데 명확한 해답 없이 끝내버리는 것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확실한 단서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다양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된 '약봉투의 뜯어진 모양'이 오른손잡이라면 준이치, 왼손잡이라면 가요코라는 설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정을 근거로 마지막에 펼쳐지는 야스마사의 처형 쇼 역시 억지스러웠어요. 단순히 가가 형사의 공정한 수사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극적인 연출을 위해 설정을 밀어붙인 인상이 강했습니다.

더불어, 가요코라면 몰라도 준이치의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여자친구의 과거가 밝혀진다고 해도 준이치가 잃을 것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소노코를 떠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순정파도 아닌 듯한 캐릭터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만족스러웠고,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말랑말랑한 로맨스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불확실한 결말도 흥미로운 아이디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고요. 그러나 본격 추리물이라면 최소한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장점은 분명한 만큼,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만두 님의 리뷰를 더 찾아봐야겠네요.

2017/03/12

치즈의 지구사 - 앤드류 댈비 / 강경이 : 별점 2점

치즈의 지구사 - 4점 앤드류 댈비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에서 간행한 음식들에 대한 미시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디자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 몇권 구입한지는 좀 되었지만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세계의 유명 치즈를 모아 놓은 치즈 보드를 가지고 각 치즈별 유래, 역사를 설명해 주는 챕터부터 시작됩니다. 12개의 치즈가 올라가 있는 치즈 보드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리와 모짜렐라라던가 고르곤졸라, 파르미자노 레자노, 체더 등 친숙한 치즈들이 많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간혹 사먹는 브리가 중세 말 유럽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치즈 중 하나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심지어 프랑스 사람들의 과장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영국 저자들도 인정했다니, 앞으로 더 열심히 먹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치즈'에 대해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000년 경 중앙 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낙농업으로 전환이 일어나고 젖 짜기가 이루어진 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젖을 안정적이며 고정적인 식량원인 치즈로 만드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는 치즈의 시작, 그리고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치즈 역사가 소개됩니다.
기원전 3000년 이집트 지역 유물에서 발굴된 유기물 흔적이 치즈였다는 등 사료가 바탕이 된 상세한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당대 치즈 요리 레시피가 소개되는 것도 볼거리에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포싯 - 가루치즈를 와인에 섞어 만든 것 - 이 대표적입니다. "오디세이아"에서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을 환영하며 대접하는, 치즈와 보리죽, 노란 꿀을 프람니아 와인에 섞은 포싯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하게 만든 음식이라 더 기억에 남는데, 레시피만 보면 약간 치즈 수프 비슷할 것 같네요.

세 번째 챕터에서는 '지속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온갖 다양한 치즈 제조법을 소개해 줍니다. 지역과 시대별, 재료별(양젖, 소젖, 염소젖 및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구분되는 레닛 등) 로 구분된 다양한 치즈들이 소개되는데 이 역시 아주 상세합니다. 좋은 치즈의 여섯 가지 특징 등 읽을거리도 많고요.

마지막 챕터에서는 세계가 치즈를 소비하는 방법이 다루어지는데, 당연하겠지만 주로 다양한 음식들과 레시피 소개가 중심입니다. 시칠리아의 미식가 시안 아르케스트라토스의 레시피, 소크라테스의 채식 식단 등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레시피가 가득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약처럼 먹었다는 일화나 치즈가 언어별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전체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지는 않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200여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읽기 힘들고 이해도 어려울 정도였어요. 이유는 통사적인 내용보다는 각각의 치즈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통사적으로 접근한 챕터도 고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의 초창기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고요. 이래서야 "~의 지구사"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치즈에 대해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연대순으로 주요 변곡점마다 존재했던 치즈를 보다 상세하게 알려주는게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네요.

2014/06/16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3 - 게임관 살인사건 : 별점 1점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3 - 4점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유원지에 놀러간 김전일과 미유키는 일행과 떨어져 지나가던 버스를 잡아탔다. 그러나 버스는 통째로 납치당했고, 승객들은 기이한 생존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이상하게 만화만 읽게 되네요. 여러모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튼 간만에 읽은 김전일 시리즈입니다. 발표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제 기준으로는 가장 최신작이죠.

특징이라면 특정한 일련의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펼치는 일종의 '게임'을 다루는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를 김전일 시리즈에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한창 유행했던 장르로 "큐브",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살해하는 운명카드", "다크 존" 등 관련 콘텐츠도 엄청나게 많은데, 김전일 시리즈답게 게임보다는 추리물적인 접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실패였습니다. 범인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는 탓입니다. 마지막 증언에서 버스가 어두워 일행을 못 찾았다는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일행인 딸이나 바텐더가 버스를 한 번도 훑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될까요? 승객이 열 명도 안 되는데!

또 게임을 벌이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한 동기인 100억의 유산도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거액이기는 하지만 외딴 곳에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춰 놓고 살인 게임쇼를 벌일 정도의 재력과 노력이라면 딸에게 전해주기에 충분했을텐데, 뭐 하러 사람까지 죽이는지 모르겠거든요. 이보다는 사람을 고용해서 그냥 한 명씩 교통사고 같은 걸로 죽이는 게 훨씬 쉽고 싸게 먹혔을 겁니다.

그리고 게임을 벌이는 이유가 밝혀지다 보니, 내용도 어처구니 없어져 버립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 중 2명을 원하는 순서로 살해하기 위해서라면,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게임쇼를 벌이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요새같이 검시가 발달한 상황에서 목격자 증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바텐더와 딸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여한 피해자들의 관계만 조사해도 동기가 손쉽게 들통날테니까요. 아니,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무기 마담 주변 인물의 조사만으로도 드러날 동기였기에 애초부터 게임쇼 자체가 불필요했던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게임'이 재미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첫 번째만 게임이고, 두 번째의 고리 풀기, 세 번째의 컵라면과 마지막의 에티켓은 게임이라 부를 수도 없으니까요. 또 에티켓에서의 와인 라벨은 와인에 취미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정보인데 너무 1차원적으로 접근한 듯 합니다. 첫 번째를 제외한 모든 게임에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요.

물론 아주 건질 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과 잘 결합된 첫 번째의 네 자리 숫자 맞추기 게임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두 번째 컵라면 이야기에서 컵라면 밑바닥에 열쇠가 없는 상황을 추리에 접목시킨 것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첫 번째 게임의 경우 재미있는 추리일 뿐 '증명할 수 없다'는 큰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 장점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는 기대 이하였고, 추리적으로도 별로이며 마지막 결말까지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억지스러워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군요. 별점은 1점입니다.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의 재미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김전일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시켜준 망작입니다. 돈 주고 사지 않은 게 다행일 뿐입니다.

2011/07/23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 히가시가와 도쿠야 / 현정수 : 별점 2.5점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 - 6점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현정수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부호 호쇼 가문의 딸이지만 신분을 숨기고 형사로 근무하는 레이코가 자신이 맡게 된 괴상한 사건을 집사 가게야마에게 털어놓으면 – 제목 그대로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 식사 후에 – 가게야마가 그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추리해내는 전통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이라면 읽기 편하고 유머러스한 전개, 그리고 정통 안락의자 탐정물에 걸맞은 추리적인 재미와 공정한 단서 제공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재미는 상식을 뛰어넘는 괴이한 사건 현장이 굉장히 상식적인 이유로 그러한 결과가 빚어졌다는 점을 밝혀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과정은 정통 본격물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고요. 단편으로 구성된 점 역시 고전물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고, 트릭들도 꼼꼼하고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과장된 캐릭터와 배경 설정 때문에 작품을 읽는 내내 소설보다는 만화나 드라마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호 형사와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명탐정 집사 가게야마라는 캐릭터의 설정과 성격은 재미는 있지만, 정통 추리소설 애호가에게는 다소 가벼워 보이거든요. 물론 모든 추리소설의 명탐정들이 팍팍하게 살아가는 알코올 중독 독신남일 필요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현실성은 유지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트릭이 꼼꼼히 배치된 것은 맞지만 다소 작위적이며, 몇몇 트릭은 추리 퀴즈 수준이라 더더욱 만화나 드라마로 완성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밝고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유머러스한 전개와 트릭이 잘 결합된 작품이라 추리소설 입문자에게는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살인 현장에서는 구두를 벗어주십시오.

부잣집 아들 형사, 재벌가 아가씨 형사 컴비와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집사 캐릭터가 소개되는 단편집의 도입부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입니다. 집 안에서 부츠까지 신은 채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찰의 치밀한 수사로 해결될 수도 있지만, 목격 증언의 맹점을 찌르는 전개와 시체 상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추리가 잘 결합된 소품으로 범인에 대한 추리까지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 도입부로는 적절했어요.

독이 든 와인은 어떠십니까.

자살로 보이는 동물병원 원장의 죽음이 사실은 타살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풀어내는 작품으로, 밀폐된 와인병에 독을 주입하는 트릭과 한밤중 촛불 같은 불빛에 의지해 범행의 뒷처리를 한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두 가지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트릭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죠. 추리 퀴즈 수준의 내용이라 다소 아쉬웠어요. 꼼꼼한 묘사가 필요 없는 만화라면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살의가 있습니다.

장미 덤불 안에서 미녀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고양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추리의 과정이나 논리가 합리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동기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설득력은 있었고요. 

그러나 시체를 옮긴 방법이 독자에게 단서를 제공하기 위한 설정일 뿐, 실제로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장미 덤불에 시체를 옮겨 놓은 이유도 작위적인 느낌이 들고 말이죠. 본격물다운 공정함에 너무 신경 쓴 탓일까요? 과유불급이란 말이 떠오르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신부는 밀실 안에 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미수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트릭은 뻔하지만,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을 이용해 진상을 밝혀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어요. 일상계 추리물로는 상급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재벌가의 결혼식이라는 과장된 설정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약점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을 전개에 녹여냈다는 점에서는 플러스 요소가 될 수도 있겠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양다리는 주의하십시오.

자신의 집에서 알몸 상태로 발견된 키 작은 남자 사건을 다룬 이야기로, 현대인의 필수 소품이라 할 수 있는 '키높이 깔창'을 가장 중요한 트릭으로 사용한 점이 돋보였습니다. 시의적절하기도 하고,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어요.

그러나 범인이 무려 두 명이나 되는 목격자에게 목격된 상황에서 단순히 키 차이만으로 빠져나간다는 설정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인상착의에 대한 별다른 언급 없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점도 아쉬웠고요. 또한, 키 차이를 부각하기 위해 허리를 삐끗한 환자를 등장시킨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불가사의한 현장을 일상적인 트릭과 결합한 구성은 좋았지만, 전개가 아쉬웠달까요. 그래도 여러모로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 별점은 3점입니다.

죽은 자의 전언을 받으시지요.

사설 금융업체 여사장 살해 사건을 다룬 이야기로, 대단한 트릭은 등장하지 않지만 지워진 다이잉 메시지와 창문으로 던져진 흉기 등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깔끔했습니다. 또, 가게야마가 액션을 펼치며 대활약하는 등 팬서비스적인 요소도 확실히 느껴졌어요. 무리수가 좀 보이긴 했지만, 평균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7/07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 레너드 위벌리 / 박중서 : 별점 4점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뜨인돌

유럽에 위치한 가로 5Km, 세로 8Km의 초미니 독립국 그랜드펜윅. 이 공국은 일찌기 그 주권을 인정받은 독립국가로 와인 수출로 주 수입원을 충당해 왔으나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와인에 물을 섞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쟁에 휩싸였다. 선거결과 희석당과 반희석당은 동수의 의원이 선출되어 논쟁은 답보상태에 빠졌고, 지도자 글로리아나 12세 대공녀는 난국 타개를 위해 강대국 미국에 선전포고 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지는, 미국은 패전국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 주므로 월요일에 선전포고를 해서 목요일쯤 점령당하고, 금요일에 그 차관으로 부흥시키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랜드펜윅의 선전포고는 장난으로 치부되었고, 결국 그랜드팬윅은 미국에 공격부대를 보냈는데 마침 뉴욕은 그때 가상 공습을 대비한 민방위 훈련으로 텅텅 빈 상태여서 그랜드팬윅의 사령관 털리 배스컴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당대 최고위력의 폭탄 Q폭탄과 개발자 코킨츠 박사를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그리고는 Q폭탄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랜드팬윅은 세계 정점의 강대국이 되는데....

국내에 50여년만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 성인들을 위한 풍자 소설입니다.

일단 무척 재미있습니다! 그랜드팬윅 공국의 설정이 치밀하고 유머러스해서 그 묘사만 따라가도 즐겁게 읽을 수 있거든요. 선전포고 장면에서부터 읽는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20세기에 아직 장궁과 갑옷으로 무장한 24명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미국 정벌기라는 아이디어는 정말 높이 살 만 합니다. 심지어 전투를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하며 귀환할때에는 포로와 노획물, 거기에 희생자까지 더한 완벽한 모습까지 보여주는 부분은 정말로 감탄스러웠어요. 미국과 소련, 영국등 강대국의 행위에 대한 통렬한 풍자 역시 유머로 포장해서 읽는 사람을 너무나 즐겁게 해 줍니다. 

아울러 이상적인 국가로 그려진 그랜드팬윅의 모습이야말로 성인들을 위한 환타지에 걸맞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말해 즐겁고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디테일도 잘 살아있는, 그야말로 성인들을 위한 동화랄까요? 별점은 4점입니다. 미국에 대한 묘사가 완전한 비판이나 풍자보다는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쉬우며, 냉전시대에 발표된 풍자소설답게 내용은 지금 읽기에는 약간 낡은 감도 있고 엔딩이 너무 이상적인 해피엔딩이라 약간 허무하다는 것은 아쉽지만 충분히 납득할 만 한 수준입니다. 최소한 그랜드펜윅 공국만큼은 행복해 질 권리가 있거든요. 미국을 이긴 나라이니까!

덧 1 : 약간 스탠리 큐브릭의 블랙 코미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연상될 정도이니만큼 영화화하기 무척 좋은 소재라 생각되며 당연히 영화화가 되었다지만 저는 아쉽게도 감상하지 못했네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꼭 보고 싶습니다.

덧 2 : 원제대로 "생쥐, 울부짖다 (Mouse that roared)"라고 출간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데 너무 설명적인 번역 제목이 붙어서 약간 아쉽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