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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책 사냥꾼 - 존 백스터 / 서민아 : 별점 4점

책 사냥꾼 - 8점
존 백스터 지음, 서민아 옮김/동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며 영화인이며, 스스로를 '책 사냥꾼'이라 부르는 존 백스터의 '책 수집'과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취미이자 직업이기도 한 '책 수집'이 중심이며, 존 백스터라는 인물의 저작이나 주요 활동은 언급되지 않아 자서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방대한 책을 읽고 수집하며 다양한 활동을 해온 사람답게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시골 마을 출신으로 철도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책의 세계에 빠져들고, SF 팬이 된 후 언론인과 작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닌 그의 일생도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책 수집'이라는 분야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설명입니다. 관련자들과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책을 구했는지를 상세하게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다양한 문학작품에 빗대어 이야기하거나 실제 작가들과의 일화를 통해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지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합니다.

특히, 저자의 인생을 바꿔 놓은 몇몇 작품들은 저도 꼭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이미 읽었지만, 할 클레멘트의 "중력의 임무"나 제임스 블리시의 "지구인, 고향에 오다" 같은 SF 작품, 그리고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집 같은 것들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먼 린지의 그림이나 앨런 존스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삶 자체도 흥미롭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책 사냥'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다양한 경험까지 아우릅니다. 심지어 '난교 파티' 경험까지 언급할 정도이니, 솔직한 수다라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단순히 책을 수집하는 것이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했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저 역시 오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절판되었던 구 동서출판사의 책을 선물받았을 때의 기쁨,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신촌 '숨어있는 책'에서 발견했을 때의 희열,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고속터미널 재고떨이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의 전율을 잘 알기에, 저자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또한, 형이 과거 로저 코먼이 방한했을 때, 모 영화제에서 그의 사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이런 기회가 있을 때 해당 작가의 책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책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를 떠나, 좋은 기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과거 이벤트를 통해 증정된 저자 사인본 "경성탐정록"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입니다. 번역 자체는 좋은 편이고, 작품별로 국내 출간된 정보를 알려주는 세심한 주석도 돋보였지만, 원문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이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어메이징 스토리즈'를 '놀라운 이야기들'로 번역하는 식이었는데, 물론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문 잡지명은 고유명사인 만큼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한 개인의 장황한 수다가 이토록 재미있고 유익할 수 있을까요? 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가까운 미래에는 전자책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화씨 451"과 같은 사회가 구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책'을 소장한다는 것이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우표 수집과 같은 취미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겠죠. 그렇다면 이런 책 사냥꾼들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요? 그 부분도 궁금해집니다.

2025/02/16

아틀라스 마이오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도책 - 강민지 : 별점 2.5점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아틀라스 마이오르"는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도책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의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결과물로, 단순한 지도책을 넘어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틀라스 마이오르"가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지도책을 단순한 지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인문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깊이 있게 분석한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예술, 인문학 서적이자 문화사, 미시사 서적 이라는 성격도 갖추고 있습니다. 지도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좋은 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무역국이었으며, 높은 문해율과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적과 인쇄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도책은 단순한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식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 도서 지관을 꾸려 장서를 자랑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크기가 크고 값비싼 지도책이 인기를 끌었고, 이는 곧 출판 시장에서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성장했습니다.'는 것이지요.

지도책 본연의 모습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를 중심으로 지도 제작의 발전 과정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텔리우스(상업 지도책의 선구자), 메르카토르(현재도 사용되는 평면 도법의 창시자), 블라외 가문(아틀라스 마이오르 제작 명문 가문), 혼디우스 가문(블라외 가문의 라이벌) 등 지도 제작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과 이들의 대표작을 통해 지도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를 넘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지도 제작과 출판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한 권의 지도책을 탐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지도 제작에 사용된 도판과 인쇄 기술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에 대한 방대한 양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을 묘사한 지도가 포함된건 반가왔고요. 또한, 인쇄 방식과 채색 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데, 컬러 인쇄 기술이 없던 시절 '채색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이 단순한 흑백 인쇄물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기여했으니,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울러 지도책을 단순한 과학적 산물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도 연구 분석하는데, 그 깊이가 대단합니다. 지도 제작에 사용된 물감을 단순히 색채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의 유행과 연결해 설명하며, 지도 속 도상(알레고리) 분석을 통해 지도책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는 식이거든요. 특히 지도에 등장하는 문양과 장식 요소를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시대적 사고와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요소로 분석하는 과정은 지도책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틀라스 마이오르" 외의 불필요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구성은 아쉽습니다. 지도책의 유행 이유나 지도 제작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필수적인 정보지만, 당대 경쟁 지도 제작자의 지도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문화까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건 과했습니다. 특히 60페이지에 걸친 '도상(알레고리)' 설명은 지나쳤습니다. 지도책에 문양이 들어갔다고 해서, 문양의 구성 요소와 의미, 디자인 규칙까지 세세하게 독자가 이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도판도 풍성하지만,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다소 작은 도판이 많은건 단점입니다. 주요한 도판은 접어 넣는 방식으로라도 보다 크게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자의 가벼운 문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최신 트렌드를 인용한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책의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느 정도는 교열 과정에서 조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도책을 다룬 미시사,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결과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허나 지도책을 벗어난 이야기도 많기에 감점합니다. 

2019/11/22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 - 정민영 : 별점 3.5점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 - 8점
정민영 지음/아트북스

부제는 '디자이너와 소통하기 어려운 편집자에게' 로,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북 디자인에 대해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편집자들을 위해 쓰여진 북 디자인 안내서입니다.

저자가 북 디자인을 잘 알고, 스스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편집자라서 단순히 심미적인 이유가 아니라 왜 그렇게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디자인 이론들도 전문적이라기 보다는 모두 상식선이라 이해하기 쉽고요. 이를 설명하기 위한 각종 자료와 도판도 굉장히 충실한 편입니다. 저도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북 디자인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는데, 직접 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좋고 나쁘고에 대해 어느정도 감은 잡을 수 있게된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제가 쓴 모 책의 경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디자인의 요소가 많이 결여되어 있는데, 어떤 점이 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표지부터 그러합니다. 제목과 부제, 저자명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고, 저자명의 경우 가독성이 심하게 떨어집니다. 제목도 보통 상단에 위치시키는데 하단, 그것도 부제와 거리가 멀게 비치해서 한 덩어리로 읽히지 않고요. 구성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로고도 빠져있습니다. 앞날개, 뒷날개도 없으며 약표제와 표제도 흐름을 고려하여 디자인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의 속표제면은 통상 오른쪽에 배치하는데, 이 책의 경우 각 단락의 시작은 모두 왼쪽 페이지부터로 디자인되어 있어서 어색합니다. 그 외에도 문제가 많은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이 책만 먼저 읽어보았다면, 뭔가 의견을 줄 수도 있었을텐데... 

아울러 한 권의 책이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지는지도 잘 알 수 있던 점도 수확입니다. 독자가 책을 처음 들고 정보를 입수하는 경로라던가, 표지와 약표제면, 표제면의 관계 등 그동안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자잘한 디테일 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많은 생각이 깃들어 있는지 처음 알았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우선 내용에서 표지에 대한 비중이 너무 높다는 점입니다. 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거든요. 물론 표지가 독자를 유혹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정도의 비중이냐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펭귄 출판사' 처럼 표지도 마스터 페이지로 구성하고, 제목과 저자명, 그리고 이미지만 교체하는 경우도 충분히 좋은 표지잖아요. 지나치게 디자인에 집중하여 설명한 느낌입니다.
또 본문 디자인도 실제 본문에 대한 구성보다는 도판 등 주변 요소에 너무 집중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몇 단 구성인지, 어떤 폰트를 쓰고 어떤 행간과 자간으로 이루어지는게 좋은지 등을 판형에 따라 최적의 구성을 선보이는 식으로 안내해주는게 취지에 더 잘 맞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완성된 3차원의 책'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지요.
 마지막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 도판으로 소개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어서 조금 당황스러웠고요.

그래도 북디자인 입문자라던가, 제목 그대로 북디자인을 잘 알아야 하는 편집자, 혹은 관련 직업인에게 굉장히 유용한 책이라는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책 자체가 저자가 주장하는 북디자인 원칙에 잘 맞게 디자인되어 있어서, 실제로 좋은 교과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북디자인에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7/12/03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미카미 엔, 구라타 히데유키 / 남궁가윤 : 별점 2.5점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6점
미카미 엔.구라타 히데유키 지음, 남궁가윤 옮김/북스피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의 작가 미카미 엔과 "R.O.D"의 작가 쿠라타 히데유키가 여러가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한 대담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얼마 전에도 읽었던 북스피어의 '박람강기' 프로젝트의 한 권이지요.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속 대화같은 대담이 인상적입니다. '술집 옆자리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더니 꽤 재미있더라'는 책 뒤 소갯글 그대로의 내용이에요. 구라타 스스로도 북 가이드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시시콜콜한 대담까지 책으로 출간되는 일본 출판 시장이 부럽기도 하네요. 우리나라 같으면 팟캐스트나 유튜브 방송 정도로 소모되고 끝날 내용이거든요. 좋게 말하자면 읽기 쉽고 나름 재미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다지 깊이가 있거나 진지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래도 독서광 작가들이 모여 수다를 떤 내용이라서, 독서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서에 있어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는 저로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순서대로 한 번 살펴볼까요?

우선 모던 호러가 주제인 수다에는 스티븐 킹, 딘 쿤츠, 클라이브 바커 등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다만 내용은 딱히 새롭지 않아요. 모던 호러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이야기할만한 내용이었거든요.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롱 워크"를 극찬하는 등 저와 취향이 다른 탓도 크고요. 하지만 잭 케첨 소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라타 히데유키 말에 따르면 "이웃집 소녀"는 구입한 그 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오늘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을 정도라니 꼭 읽어 봐야 겠습니다. 마침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소니빈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데뷔작 "비수기" 와 후일담 "더 우먼"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 두 작품은 아쉽게도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네요.

요코미조 세이시에도가와 란포, 야마다 후타로를 소개하는 챕터는 너무 뻔하더군요. 다 알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래도 딱 한 가지, 일본 초등학생이 읽기 힘들어했다는 토로는 색달랐지만요. 구라타 왈,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번역을 잘 한건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역사와 과거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냥 일본 초등학생보다는 제가 이해력이 좋기 때문인걸까요?
그래도 좋아한다고 언급하는 작품들이 대체로 저 역시 좋아하는 작품들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백일홍 나무 아래" 만 빼고 말이죠. 그 외 작품으로는 읽어본 적 없는 식인 테마 작품인 "어둠에 꿈틀거리다"가 궁금했습니다. 국내 출간되었는지 찾아봐야겠군요.
그런데 갑자기 야마다 후타로와 "마계전생" 이야기로 넘어가는건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야마다 후타로의 대표작이라는 "인법첩" 시리즈도 영화, 만화로 접한게 전부라 딱히 수다에 공감하거나 이해할 내용도 별로 없었고요.

영화화된 작품 원작에 대한 수다는 가도카와 하루키가 이끌던 가도카와 문고와 영화 전성 시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작가 시점에서 아카가와 지로를 나름 극찬하는 - 쉽게 대사를 쓴, 일종의 라이트 노벨 선구자라는 등 - 정도만 눈에 뜨일 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듯한 아카가와 지로가 쓴 크리쳐 호러 소설 "밤"이 그나마 궁금하지만, 최고 걸작이라는 "마리오네트의 덫" 수준을 미루어 본다면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좌절본은 읽다가 포기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아예 그 생각이 없었던 작품들에 대해 수다를 떠는 챕터로 보통은 어려운 책 - 커트 보니컷의 "제 5 도살장"이나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 등 - 이거나 너무 길어 포기한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100권이 넘는 "구인사가", 미완으로 끝났다는 일본의 시대소설 "대보살고개"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제 5 도살장" 이 어렵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고 "삼국지" 나 "삼총사" 같이 재미도 있고, 읽기도 쉬운 작품이 좌절본에 포함되어 있는 등 제 생각과는 조금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미카미보다는 구라타 취향이 특히 그런데, 뭐 이런 것이야 말로 개인 취향이겠지요. 허나 오래전 작품이라 요새 취향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읽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지의 제왕" 은 좌절본이다!라는 의견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런 류의 독서광들 수다라면 빼 놓을 수 없는 진귀한 책, 기이한 책이 이야기도 물론 들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희귀 도서들보다는 재미있는 아이디어의 책들 소개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아와사카 쓰마오의 "산 자와 죽은 자 - 명탐정 요기 간지의 투시술" 이 대표적입니다. 모든 페이지가 16 페이지 단위로 봉해져 있어서 그대로 읽으면 25페이지 짜리 단편이지만, 다 읽고 봉한걸 풀면 새로운 장편 소설이 된다는 책으로 여러모로 신기했거든요.
우리나라에도 소개되다 만 게모노기 야세이의 만화 "Palm" 소개도 기억에 남습니다. 무려 30년간 이어진 연재의 설정을 초기에 확립하여 그대로 끌고갔다니 대단해요. 미카미 엔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국내에는 절판되어 말 그대로 진귀한 책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구해보고 싶어 지네요.

추억 속에 깊게 남은 인상적이었던 책도 언급하는데, 구라타를 독서가로 이끈 책은 "투명인간", "우주전쟁" 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SF에 빠졌다가 미스터리로 관심이 이동한 전형적인 장르 애호가 루트를 밟았더군요. 또 다른 추억의 책은 폴란드 아동문학인 "크레크스 선생님의 학교"를 꼽았고요.
미카미 엔은 "마더 구스", 히노 히데시의 만화 "죠로쿠의 기묘한 병"를 이야기하는데 이 책들은 국내 소개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미카미 엔이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집 "에렌디라" 속 수록작인 "단순한 에렌디라 와 무정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 정도만 국내 출간되었을 뿐입니다. 마르케스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못했는데 '일정한 틀의 캐릭터에서 빠져나온 뭔가를 소설에서 배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미카미의 말이 마음에 들기에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저런 만화 이야기도 하는데, "블랙잭" 이야기에서는 확실히 두 사람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더군요. 미카미 엔이야 블랙잭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한 편에서도 소개되었으니 그렇다 쳐도, 그에 뒤지지 않는 구라타가 참 대단했습니다.
후지코 후지오 이야기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라 더 반가왔어요. "Utopia"도 아마 "비블리아 고서당" 에서 소개되었었죠? 개인적으로는 "만화의 길" 에서 접했기에 더욱 반가왔고요. 어차피 지금은 복간되어 구하기 그리 어렵지 않기는 하지만요. "모쟈코"와 "에스퍼 마미"는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언급되는게 기뻤습니다. 또 "유혈귀" 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내용을 상당히 길게 언급하는데 결말이 뭔지 궁금해 미칠 지경으로 만들어서 구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흡혈귀는 신인류고, 구인류는 선량한 신인류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유혈귀였으며 결국 주인공도 신인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간다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시대를 앞서간 호러물이더군요. "만화의 길" 에서는 데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다른 거장들보다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누가뭐래도 후지코 후지오 역시 뒤지지 않는 천재임에는 분명해요. 

그리고 소설가로 계속 활동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처음 안 사실은 계속 하는게 정말 어렵다는 점이라는군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쌓아두었던 것을 토해내면 첫 번째 책은 어떻게든 모양은 갖출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뒤로 세 번째, 네 번째 때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만이 프로로서 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인데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전해줍니다. 데뷰작이 가장 좋은 작가들이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겠지요.

책을 사랑해서 벌어진 에피소드들도 이야기하는데, 주로 재미있는 책을 읽었을 때의 경험들에 대한 수다입니다. 미카미 엔이 코니 윌리스의 "항로" 라는 소설을 읽을 때, 절묘한 부분에서 상권이 끝났지만 한밤중이라 문을 연 서점이 없었다는 이야기처럼요. 저도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용오"의 복제 예수 에피소드 다음 권을 사기 위해 업무 중 홍대 앞 한양 문고로 뛰어갔던 적도 있고, "불멸의 용병" 이라는 해적판으로 접한 "베르세르크" 의 그리피스 편 다음을 읽기 위해 한 밤중에 도서대여점을 돌아다닌 적도 있으니까요.
페이지를 접거나 메모하는 행동에 대한 대화도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같아 좋았습니다. 저는 둘 다 안합니다만. 책 때문에 담배를 끊고 심지어 하루에 라면 한 개로 버틴다는 이야기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의 베스트셀러는 왠지 꺼린다는 미카미와 구라타의 말도 공감이 갔습니다. 저도 좀 청개구리과라서, 인기가 있다고 하면 그냥 좀 싫거든요.

이렇게 다양한 책에 대한 수다가 장황하게 펼쳐지는데, 공감가는 이야기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래도 재미만 놓고보면 나쁘지는 않았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러나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리뷰에서 적었듯이, 수다 중 언급되는 작품들 중 국내 출간된 작품 정도는 조사하여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하루도 안 걸렸을 것 같은데,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2004/05/12

poirot님 블로그에서 퍼온 25문 25답

25문 25답

01. 당신은 책을 좋아합니까? (좋든 싫든) 그럼 그 이유는 뭐죠?

☞좋아합니다. 부자의 법칙 중에 "책을 많이 읽어라! 그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어쩌구.." 하는 글귀도 있잖아요. 물론 전 부자가 아니지만....

02. 한 달에 책을 몇 권 정도 읽나요?

☞음.. 많이 읽으면 15권 이상, 적게 읽으면 4권 정도....

03. 특별한 독서 취향이 있다면?

☞추리 단편집의 광적인 팬입니다.

04. 가장 최근에 읽은 책과 현재 읽고있는 책은?

☞읽은 책: 피터 크레머 "U-333"
☞읽고 있는 책: 제임스 레스턴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05.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어떤 거죠?

☞작가와 서지정보 정도랄까요...

06. 책은 사는 편인가요, 아니면 빌리는 편인가요? 빌린다면 어디에서 빌리죠?

☞사는 편이고 형이 사는 책을 공유하는 편입니다.

07. 특히 좋아하는 작가와 싫어하는 작가는 누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뭐고요? (장르 불문하고)

☞좋아하는 작가 : 좋아한다기 보다는 일본 작가들 책을 많이 읽습니다.
☞싫어하는 작가 : 아카가와 지로(!), 제임스 페터슨, 조갑제(!),

08. 특히 좋아하는 장르와 싫어하는 장르가 있다면 어떤 거죠? 그 이유는 뭐고요?

☞좋아하는 장르: 미스터리, SF, 역사물, 전기물, 잡다구레한 상식서적 들, "세계의 불가사의"류같은 장르들....
☞싫어하는 장르: 싫다기 보다는 순문학 장편은 지루하더군요. 그리고 성적인 묘사로 점철된 의미없는 장편 들....

09. 소설 속 인물 중에 특히 좋아하는 인물과 싫어하는 인물은 누구죠?

☞좋아하는 인물: 뤼뺑(!), 홈즈, 다아시경, 류젠이(불야성), 모스주임
☞싫어하는 인물: 가타야마 형사(^^) 딱히 기억이.....

10. 일반적인 책말고 만화책도 좋아하시나요?

☞광적입니다.

11. 만화책 중에서 인상깊었던 작품이나 작가를 꼽아본다면요?

☞추리만화는 거의 대부분 좋아합니다. 스포츠 만화도 굉장히 좋아하고요. 두 장르이외에 인상적인것은 초중반의 "베르세르크"(미우라 켄타로), "바나나 피쉬"(요시다 아키미), 아사리 요시토오 작품은 다 좋아하고요. TONO씨도 거의 전작품이 좋고..."현시연"이야 당근 좋아하고.. "갤러리 페이크"는 요새 관심있게 보고 있고..."도박묵시록 카이지" 중반부까지, "건담 Origin" (야스히코 요시카즈)도 관심대상이고... 너무 많군요. SKip!

12. 만화 속 인물 중에 특히 좋아하는 인물과 싫어하는 인물은 누구죠?

☞좋아하는 인물 : 너무 많아서...
☞싫어하는 인물 : 기억이....

13. 기억에 남는 대사나 문구가 있다면 말씀해보시겠어요?

☞"단순한 성욕보다 훨씬 고도의 지적활동이야!" (By 마다라메)

14. 특별히 게임, 영화 등 다른 매체로 제작됐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거죠?

☞"시민 쾌걸" 제작 진행중이라는데 왜 소식이 없는지...

15. 다른 매체로 제작된 것 중, 좋았던 작품과 나빴던 작품을 꼽으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좋았던 것: 39계단 (히치콕영화), 올드보이, 스캔들 (최근 1년간만 쳐서요)
☞나빴던 것: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했던 아르센 뤼팽, "체포하겠어" 드라마 판, 소년탐정 김전일 영상버젼 (전부!). "퇴마록"(쓰레기), "모방범""39계단" (이 일본원작의 두 작품은 너무 영화가 재미없어서...) 등등등 엄청나죠....

16. 미스터리 소설 장르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실래요?

☞어렸을 적 팔았던 홈즈 단편 1편씩이 실려있는 단행본 문고 시리즈 (어디 출판사인지는 기억이 안나네요)를 하나씩 모으면서....

17. 그 당시 미스터리 소설 장르에 대한 느낌은 어땠어요?

☞홈즈 나이스!

18. 읽어본 것 중 가장 인상깊었던 미스터리 소설을 꼽아주실래요?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10개의 인디언 인형"

19. 읽어본 것 중 가장 최악이었던 미스터리 소설은 어떤 것이죠?

☞"미스코리아 살인사건" 글쓰기의 기본도 안 되어있는 작가가 장편을 내 놓다니...

20. 요즘의 미스터리 소설 시장에 대해 어찌 생각하세요?

☞팬들의 사랑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21. 최근 읽은 작품 중 괜찮다 하는 미스터리 세 편을 꼽아보시겠어요?

☞ "얼굴에 흩날리는 비"-기리노 나츠오, "바리바"-모리스 르블랑, "엘러리 퀸의 모험"-엘러리 퀸

22. 미래의 미스터리 소설 장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 밝지 않나요?

23. 게임, 영화 등등 소설 외 미스터리 장르 중 좋았다 생각하는 것을 꼽는다면?

☞ "QED" 최고!

24. 특별히 추천하는 게임을 들어보실래요?

☞ WWE SMACK!DOWN, 하지만 주로 하는 것은 워크래프트3 입니다.

25. 기획 중이거나 집필 중인 소설이 있나요? 있다면 소개를 해주실래요?

☞ 한국형 안락의자 탐정이 나오는 소설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지식검색 탐정" 하하하!

2018/03/11

아주 오래된 서점 - 가쿠다 미츠요, 오카자키 다케시 / 이지수 : 별점 4점

아주 오래된 서점 - 8점
가쿠타 미츠요.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이지수 옮김/문학동네

원제는 "古本道場"입니다. 제목에 걸맞게 작가 가쿠다 미쓰요가 헌책 전문가 오카자키 다케시로부터 헌책에 대한 수련을 받는다는 에세이 모음으로, 오카자키 다케시가 지정한 특정 지역 헌책방에서 '미션' 에 따른 헌 책을 구입하는 여덟 번의 '수련'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션에 따른 가쿠다 미쓰요의 헌책방 투어와 그 결과를 평하는 오카자키 다케시의 글이 한 세트이고요. 

가쿠다 미쓰요와 오카자키 다케시의 에세이들은 모두 재미있게 읽어서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하기사,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글을 써 버렸으니 이거 참,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죠.

두 명의 저자 중 오카자키 다케시는 헌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론과 의견을 전해주는 '선생님' 역할이고, 가쿠다 미쓰요는 가르침을 받아 따르는 '학생' 역할입니다. 그래서인지 헌책 관련한 이야기는 오카자키 다케시 쪽 글이 더 기억에 남는 게 많네요.
몇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일단 헌책방에 있는 헌책은 '장서'라는 주장입니다. 일반 서점의 책은 반품이 되지만 헌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인이 한 권 한 권 구입한 그야말로 '남의 책'이라는 의미로요. 여태껏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딱히 신경 써서 책을 다루지도 않았었는데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또 헌책을 가격으로 보지 말라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정꾼이 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최우선으로 고르라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인데 정말 새겨들어야 할 말이지요. 헌책방 투어를 실제 다녀본 경험으로는 절판된 책이나 비싸게 팔 수 있는 희귀본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이고, 그래서 결국 필요없는 책을 사곤 하니까요. 저도 집에 왠지 귀할 것 같아서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많은데, 이 역시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고 싶을 때 안 사면 다음은 없다!' 라고도 하니 결국 사는 사람이 신중하게 생각하여 판단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헌책 관련된 이야기는 아닌데, 사진집을 읽고 소장하는 이유를 설명한 글도 근사합니다. '다양한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더욱 올바르고 깊게 세계를 이해하려는 무한에 가까운 시도다'라는 소설가 겸 사진작가 가타오카 요시오의 글과 함께, 좁은 시야를 넓히기 위한 용도로 산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물론 이 정도 의도라면 요새는 인터넷으로 보아도 충분할 것 같긴 합니다만.

이러한 정보 중심의 오카자키 다케시의 글과는 다르게 가쿠다 미쓰요의 글은 헌책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 정보보다는 개인 감상 위주입니다. 그런데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묘하게 정확해서 놀랐습니다. 특히 사물의 본질을 짚어내는 데 능숙해서 확실히 작가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어요. 설명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저 역시 작가를 꿈꾸는 입장에서 참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가쿠다 미쓰요가 구입한 책들도 볼거리입니다. 일본에서도 오래전에 절판된 책들도 많은 등 국내에서 구하기는 어려운 책들이 대부분이긴 합니다. 국내 출간된 책들도 절판 상태가 많고요. 하지만 소개가 멋진 몇몇 책들은 구해보고 싶어지더군요. 헌책방을 소개한 글에 소개된 헌 책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뒤져야 한다는 것도 뭔가 낭만적이고요. 가쿠다 미쓰요가 구입한 대충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시가 제가 찾아본 국내 출간작인데, 8권이 전부입니다).

진보초 - 이구치 분슈의 그림책 2권, 에토 준 "개와 나", *"싫어싫어 유치원", *"꼬마 모모", 다나카 고미마사 "야시의 여행", 노사카 아키유키 "서서 읽으면 안 되는 책", "비록 가와시마 요시코"
다이칸야마, 시부야 - 노미야마 고지 "사백 자의 데셍", "셀피시", *"그레이엄 그린 선집 9 (제 3의 사나이, 떨어진 우상, 패자가 모두 가진다", *콜린 윌슨 "현대 살인 백과", 이토 히로미 & 우에노 지즈코 "노로와 사니와", 다네무라 스에히로 "사기꾼 칼리오스트로의 대모험"
도쿄 역, 긴자 - 팀 오브라이언 "실종", 홋타 요시에 "다리 위의 환상", 무라마쓰 쇼후 "여경", 기시다 리오 "롱 굿바이", 구사카베 엔타 "정말로 사랑했다면", 스다 사카에 "전후 풍속 천일 야화", 쿠사마 야요이 "신주 사쿠라가쓰카"
와세다 - 가이코 다케시 "베트남 전기", 요시다 겐이치 "기묘한 이야기", *하야시 후미코 "삼등 여행기", 단 가즈오 "풍랑의 여행", 고보리 진지 "요괴를 보았다", 다나카 고미마사 "간음문답", 한스 헤니 얀 "열세 가지 으스스한 이야기", *"엘리엇 시집", 가이코 다케시 "시부이", "대화록, 현대 만화 비가"
아오야마, 덴엔초후 - "인민 사원", 도요시마 요시오 "에밀리안의 여행", *앙드레 지드 "여인들의 학교", 기무라 모토노리 "영혼이 고요한 때에", *"타고르 시집", 오야 소이치 "세계의 뒷길을 가다 - 남북 아메리카편"
니시오기쿠보 - 세토우치 하루미 "다무라 도시코", *마르케스 "사랑과 다른 악마들", 다케다 유리코 "말의 식탁", "도시에 널리 퍼진 기묘한 소문", 아유카와 노부오 "시대를 읽다", "하쿠슈 가요집", 나카가미 겐지 "이야기 서울", 다나카 고미마사 "아아, 수면 부족이다"
가마쿠라 - 가이코 다케시 "최후의 만찬", 후카자와 시치로 "고슈 자장가", "브로마이드 쇼와사", 오카베 이쓰코 "부처님과의 대화", 다쓰미 하마코 "손수 기른 나의 요리", 다무라 류이치 "저스트 예스터데이", 나가이 다쓰오 "홍차의 시간", 오사라기 지로 "시인"
다시 한번 진보초 - 미시마 유키오 "무예를 숭상하는 마음", 쇼와 전쟁문학 전집 11 "전시하의 하이틴", 가미사카 후유코 "스가모 프리즌 13호 철문", 요시카와 에이지 "남방기행"
그 외에 확실히 '일반인' 으로서 헌책방을 대하는 시선도 남 같지 않아서 좋았는데, "노라쿠로" 전 권을 사는 노년의 신사를 보며, 늙어서 "유리 가면" 이나 "더 파이팅" 전 권을 한 번에 살 것을 꿈꾸는 장면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일반인 취향이 짙게 느껴져서 더욱 반가왔거든요.

이렇게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고, 무엇보다 헌책방과 헌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을 수 밖에 없는 책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일본 도쿄 소재 헌책방을 주로 소개하고 있으며, 소개된 책방들도 지금은 문을 닫은 곳이 많다는 지역적, 시기적 한계와 소개된 책들 대부분이 미 출간작이라는 이유로 약간 감점했지만, 저와 같은 취향의 분들 모두에게 추천해 드리는 바입니다.

저 역시 한때 결혼 전에는 홍대 입구의 '숨어있는 책'을 비롯한 헌책방 투어를 정기적으로 떠났을 때가 있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보물과도 같은 책을 많이 샀었죠. 지금은 결혼 후 이사도 했고, 근처에 헌책방도 없으며, 그나마 가는 곳도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알라딘 헌책방이 전부라 예전과 같은 보물찾기 느낌이 들기는 힘든데 옛날이 그립기도 합니다.

2022/03/19

기억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3.5점

기억의 의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이전에 "액자"를 읽고 꼭 구입하기로 했던 사물들의 미술사 두 번째 책입니다. 제목대로 의자를 다루고 있고요.

의자는 제품 디자인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재라서, 의자 디자인에 대해 다룬 책은 저도 그동안 많이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 속 의미있는 의자에 대해 다룬 미술사 책이라기보다는, 특정 의자를 주제로 하여 그 의자가 있었을 때의 사회상을 조망하는 문화사에 가까운 책입니다. 의자의 디자인은 상세하게 소개되지만, 의자가 주인공은 아니에요. 

책에서 의자와 함께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섯 개입니다. 첫 번째는 중세 시대입니다. 대성당의 의자 스탈의 안장을 접으면 나오는 미제리코드 조각으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해줍니다. 두 번째는 루이 14세의 옥좌에서 시작해서 '위대한 은공예품'과 당시 아유타와 왕국 사절단 이야기 등으로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17세기 후반 프랑스에 대해 알려주고요. 세 번째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 형식 의자 '타부레'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따로 있었다는, 이른바 '타부레' 권한을 통해 부르봉 왕조 시기 프랑스의 귀족 서열과 예법들을 상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네 번째는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의 주문으로 만드는 루이 들라누아의 의자 제작 과정으로 18세기 가구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마지막은 전통적인 가구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대량 생산으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18세기 후반의 토머스 치펀데일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잘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많았고, 재미도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요. 우선 '미제리코드'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았네요. 엄격한 종교 기반의 사회였지만, 대성당 안 의자 속 미제리코드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각이 가능했다는 것도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갑니다. 도판도 풍부해서 자유분방했던 당시 목수의 솜씨도 충분히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루이 14세 옥좌에서 시작되지만, 이는 '은'이라는 소재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위대한 은제품과 왕의 권위 과시가 반드시 필요했던 시대를 다루기 위해서였지요. '위대한 은' 세공품들이 지금도 남아있더라면 아주 좋았을테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도판과 기록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알게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타부레'는 당시 왕실 서열과 예법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왕의 친척인 친왕들조차 함부로 의자에 앉지도 못했던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의 베르사이유 궁전 모습이 아주 재미있더군요. 이를 둘러싸고 왕의 정부와 왕의 제수씨의 기싸움 등 세세한 볼거리가 가득했던 덕분입니다. 당시를 다루었던 수많은 컨텐츠들에서 미처 접하지 못했던 디테일이기도 했고요. 저자도 당시 그림에서 이 예법을 지키지 않은 등장인물을 알려주고 있는데, 저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찾아보면서 고증을 되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 왕권의 대명사같은 루이 14세와는 사뭇 달랐던 루이 16세 시대에는 14세 때 만큼이나 엄격하지는 않았겠지만요. 

네 번째 이야기는 폴란드 왕이 루이 들라누와에게 의자를 주문하는 과정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압권입니다. 의자 디자인을 어떻게 고르는지와 같은 고객 입장에서의 디테일은 물론, 장인이 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여러가지 비용들, 장인간 협력 관계 등 장인 입장에서의 정보들도 살뜰히 챙겨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모든게 실제 사료 기반이라는 것도 대단하고요. 

마지막 치펀데일 이야기는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설명의 핵심은 치펀데일의 카탈로그였고요. 고객들은 조립식 가구 처럼 카탈로그를 보며 다양한 조합을 고를 수 있었고, 치펀데일도 유행하는 스타일을 모두 갖춰 제공했다는데 정말 시대를 앞서갔던 마케팅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책에서 말해준 대로 18세기의 이케아였던 거지요.

이렇게 새롭고, 재미난 내용이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미제리코드 부분은 관련 사진 설명 뿐이라 좀 지루했습니다. 종교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지만, 그걸 입증할 근거도 애매하고요. 그렇게까지 도발적인 풍자가 많다는 인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의자' 보다는 관련된 역사, 문화적 배경을 고찰한다는 책 컨셉도 마음에 들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의자는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약간 아쉬웠던 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의자를 억지로 엮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책의 판형입니다. 작은 판형은 저자의 의도였다고는 합니다. 들고 다니기 편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요. 그러나 도판이 너무 작게 들어가서 식별이 어렵다는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그림 속에 있는 의자를 설명하는 도판들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해당 부분만 확대해 주거나, 접이식으로 크게 삽입했어야 했습니다. 나름 비싼 책이고, 도판 수준도 우수한데 이런 세세한 고려가 뒷받침 되지 않은건 너무 아쉽네요.

그래도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문화사,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6/07/24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 오일우 / 오수현 : 별점 3.5점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 8점
윌리엄 브리튼 지음, 오일우 외 옮김/모음사

 괜찮은 추리소설들을 많이 내 놓았던 출판사 모음사에서 출간되었던 오래된 단편선. 동호회나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책이기는 하지만 구하기가 힘든 책 중 하나였는데 용산역 지하 서점에서 우연히 구하게 되어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표제작은 예전에 정태원선생님이 편집한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읽은 것이지만 이외의 2작품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제가 처음 읽은 작품들이라 더욱 그러했죠.

책은 국내 번역가 2명이 읽은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7페이지 정도의 짧은", "재미있는", "한 작가당 한편씩", "다양한 내용으로" 라는 기준으로 선정한 앤솔로지입니다. 아시모프의 "미스테리 환상여행", 그리고 퀸의 "미니 미스테리"와 유사한 기획인데 이 두 앤솔로지와 비교해 볼 때 수록된 작품의 수도 적지만 작품의 질이나 쟝르의 풍부함, 이색적 측면에서 외려 이 국내 편저 앤솔로지가 저는 더 나은 것 같군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편저자들 말대로 다른 앤솔로지나 단편집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가들을 제외한 것입니다. 작가들이 얼마나 다양하냐 하면 심지어 "작자미상"인 단편도 있으니까요. 그동안 엄청나게 발매된 이런저런 앤솔로지들은 편저자들이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중복 선정되는 작품들이 많아서 불만스러웠었죠. 예를 들자면 크리스티 여사님의 "야앵장"은 한 10가지 버젼은 읽은 것 같습니다.... 이 앤솔로지에도 물론 퀸과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은 포함되어 있지만 퀸의 단편은 편저자들의 의도에 충실하기 그지없는 작품이고, 여사님 작품은 도저히 뺄 수가 없어서 한편 넣었다는 편저자들 이야기가 이해가 되는 작가이니 만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단 그 작품이 "이중단서"라는 것은 좀 이해 불능이지만... 편저자들이 포와로 팬이었나?)
또 워낙 한편 한편의 내용이 짧아서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인 부분이며 수록 작품의 쟝르도 광범위하여 정통 추리물을 비롯하여 유머스러운 작품이나 스릴러, 약간 호러 취향까지 다양한 쟝르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38편이라는 많은 작품이 실려있는 탓에 개개의 요약은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인 추천작만 소개한다면 일단 표제작. 저자의 "...을 읽은 사나이" 라는 시리즈 중 한편으로 알고 있는데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위에 나온 다른 앤솔로지에도 수록된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죠. 딕슨 카 매니아인 한 청년이 유산을 노리고 완벽한 밀실살인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기지만 마지막에 실패하는 내용으로 뭔가 유머러스 하면서도 홀딱깨는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선량한 사기극의 일종인 페렌츠 모나르라는 작가의 "최선책", W.하이덴펠트의 작품으로 전쟁을 소재로 한 회고담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암호(?) 트릭이 등장하며 끝나는 "달빛".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사기극과 반전을 다룬 "목사의 오명", 역시 멋진 사기극의 일종이자 유머스러운 결말을 지닌 찰스 G 노리스가 쓴 "존 로시터의 아내" 를 꼽고 싶네요. 이외에도 조르주 심농의 "석장의 렘브란트" 역시 괜찮지만 다른 곳에도 실려 있는 작품이니 패스합니다. 적고 보니 제가 가벼운 사기극 취향인것 같기도 하군요.

물론 너무 짧은 길이 안에서 반전을 노리다 보니 좀 뻔한 것도 있고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반전도 있어서 식상한 작품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수준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며 번역도 깔끔한 수준이고 읽기 편한 책이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저같은 추리 단편 매니아라면 어떤 분이든 좋아하실 만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저작권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책으로 보이기에 이제와서 다시 출간되는 것을 바라기는 좀 힘들것으로 보이지만 다행히 전 구했으니...푸훗!

덧붙이자면, 출판년도를 보니 1992년 책인데 당시 가격이 4000원이라는 것도 놀랍습니다. 당시 책이나 좀 많이 사둘걸....

2014/06/02

탐정사전 - 김봉석, 윤영천, 장경현 : 별점 1.5점

탐정사전 - 4점
김봉석.윤영천.장경현 지음/프로파간다

제가 어렸을 적,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출판사였던 해문은 "세계의 명탐정 50인"(이후 일본 탐정을 뺀 44인으로 축약 재간)이라는 책을 출간했었습니다. 명탐정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명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퀴즈를 한 개 선보이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었죠. 이런 핵심 내용 외 일러스트, 수록된 여러가지 추리 관련 정보도 인상적이었고요. "스포일러"라는 점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추리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던 추리 키드에게는 정말로 좋은 선물 같은 책이었습니다.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이라는 동일 구성의 유사 도서가 연이어 출간되었던 걸로 보면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네요.

이 책 "탐정 사전"의 출간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세계의 명탐정 50인"의 현대적인 재구성이 될 걸로 예상했습니다. 스포일러 문제 및 저작권 이슈로 추리 퀴즈 부분이 빠지더라도 그만큼 잘 만들어진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솔직히 실망이 큽니다. 이 책이 대체 누구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가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 문학 초보자를 위한 책이라면 정말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엄선하여, 그중 등장한 탐정들을 중심으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애호가를 위한 책이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탐정을 소개하거나, 기존에 소개된 탐정이라도 다양한 정보를 충실히 실었어야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뷔페에서 맛이나 코스 구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얹어놓은 쟁반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일단, 어떤 기준으로 탐정들이 선정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탐정을 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선정 기준은 막연하게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출판물이라면 판매 부수나 시리즈 권수, 방송물이라면 시청률이나 방영 횟수, 또는 역사적 의의 등의 기준이 있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솔직히 선정 기준은 그냥 저자들의 팬심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IWGP"의 마시마 마코토, "트릭"의 야마다 나오코와 우에다 지로, 니시오 이신의 이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일본의 3대 탐정 중 하나인 가미즈 교스케, 다카기 아키미쓰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우치다 야스오의 시나노의 콜롬보 다케무라 이와오나 경시청의 오카베 경부,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쓰가와 경부 등을 제치고 소개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꼭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걸작에서 활약했으며 추리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탐정들 중 소개되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프렌치 경감, 커크릴(콕크릴) 경감, 방코랑은 그렇다쳐도, 대체 뤼뺑은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보기엔, 그 외의 황금기 명탐정은 거의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차일드 44"의 레오 데미노프와 같은 스탠드얼론 작품의 주인공이 포함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작품이 추리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레오 데미노프가 전통적인 ‘탐정’ 역할에 충실한 인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소련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평가하고 싶었다면, 시리즈 캐릭터인 아르카디 렌코가 더 타당했을 것입니다. "토로스 & 토르소"의 헥터 라시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즈라고는 하나 국내에선 한 권만 소개되어 있어 스탠드얼론으로 보이고, 탐정 같지도 않은 인물인데 뤼뺑마저 빠진 명단에 포함되었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탐정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가 실려 있는 부분은 어이없음의 극치입니다. "지뢰진"의 이이다 쿄야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요. 굳이 추리만화에서 뽑고 싶었다면 "Nervous Breakdown"의 두 컴비나 "절대미각 식탐정"의 다카노 세이야를 꼽는 게 나았을 겁니다. 완성도를 떠나 최소한 ‘추리 만화’이긴 하니까요. 대중문화적 아이콘으로 넣고 싶었다면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가 더 적절했을테고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절판본이나 국내 미출간작에 등장한 탐정을 소개한 점도 아쉬웠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메이즈리크 시리즈를 소개하며 국내 절판이라 언급했는데, 이런 식이면 독자보고 어쩌라는 건가요? 커트 캐넌 시리즈도 한 권만 출간되었는데, 현재 절판입니다. 뒤렌마트의 베르라하(베를락) 경감 시리즈, 모돌이 탐정도요.

캐릭터별 글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도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전이라면 구성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캐릭터는 단순히 정보만 나열하는 반면, 어떤 경우는 작품 분석과 작가 소개까지 이어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정보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 항목도 많습니다. 반 두젠(밴 듀슨) 교수의 경우, '생각하는 기계'라는 별명과 대표작 "13호 독방의 문제" 언급만으로 그치는데, 이런 내용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개 작성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라리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항목에서 주요 작품과 그 속에서의 활약상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에요. 

그 외, 탐정들의 배열도 시대순이나 장르순이 아니라 이름순이라는 점도 의아했으며 실제 캐릭터가 묘사된 일러스트조차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건질 만한 부분도 없진 않았습니다. 결과물 자체는 아쉬웠지만, 고전 본격물부터 하드보일드, 현대물, 대체역사 판타지, SF, 만화, 드라마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범위는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하라 료의 사와자키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게 읽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스가무라 사부로 시리즈, 센도 타카시의 "폐허에 바라다"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로버의 악당들"의 빌 파믈리, 토니 힐러만의 인디언 탐정 조 리프혼과 짐 치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Q.E.D"의 토마 소같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적은 탐정 소개도 반가왔던 점입니다. "Q.E.D" 소개글은 작품의 매력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졌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괜찮았던 몇몇 항목에 비해 전체적인 만족도가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방향성이 없는 기획과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정보들이 대다수인 탓이지요. 30여 년 전 읽었던 "세계의 명탐정 50인"과 비교해 특별히 나은 점도 없고요. 가격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덧붙여 눈에 띈 몇 가지 오류를 정리해봅니다. 엉클 애브너 항목에서 "나보테(나봇)의 포도원"을 "나보프의 포도밭"이라 오기한 부분, "차이나타운" 작가 소개 영역에서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표기된 점(각본가가 언급되었어야 함), 유불란의 후속작이 없다고 언급한 점 등입니다.

2008/01/19

협상의 법칙 1,2 - 허브 코헨 / 안진환 : 별점 3.5점

협상의 법칙 세트 (전2권) - 8점
허브 코헨 지음, 안진환 옮김/청년정신

모 재테크 칼럼에서 보고 눈여겨 보고 있던 책입니다. 그 칼럼 저자가 꼭 읽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것이 인상적이라 한 2년전부터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읽은 것은 좀 늦은감이 있네요.

이 책은 쉽게 요약하자면 저자 자신의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일, 또 자신이 뭔가를 구입할 때의 경험 등 일상 생활 속의 협상은 물론 전문 협상가로 일할 때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협상론을 쉽게 풀어 쓰고 있는 책입니다. 1,2권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각 권 따로 읽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 특이하기도 하고 뭔가 낚였다라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 줍니다^^ 참고로, 1권은 보다 (그래봤자 약간이지만) 전문적인 내용이, 2권은 사례와 경험 중심의 쉽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더 많지 않나 싶은 생각은 들더군요. 그리고 제목은 협상의 법칙이지만 내용은 협상뿐만이 아닌 "처세"에 관한 내용도 폭넓게 담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의 대부분이 협상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요. 어쨌건 나름 저자의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재미나게 펼쳐놓아 상당한 분량임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 일단 "협상"이라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네 정서로는 좀 와 닿지 않는 내용도 제법 있는 편인데 아무래도 저자가 주장하는 협상이라는 것이 굉장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인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협상은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직위, 나이 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굉장히 많잖아요?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가오는 연봉협상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아쉽게도 연봉 협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요. 예를들어 이른바 협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저자가 강조한 T, I, P (Time / Information / Power)를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연봉 협상의 시한을 넘겨서 서로 좋을 건 없으니 첫번째 시간이라는 요소는 저든 회사든 강점을 지닐 수 없는 부분이고, 두번째 정보 부분에서는 제가 저한테 돈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회사쪽에 어떻게든 전달해 하는 부분인데 이건 쉽지 않은 거고.... 마지막 "힘" 이라는 것은 연봉협상에서는 제가 발휘하기에는 미약한 요소로 보이거든요. 차라리 이 책에 나오는 데로 회사의 양심을 믿고 "전 정말 열심히 일해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주시는 데로 받겠습니다" 라고 하는게 더 쉽고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협상의 기술이라는 것을 좀 더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틈날때마다 다시 뒤적여 봐야겠습니다. 최근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스트레스가 좀 심한편인데 혹시 모르죠. 이 책이 도움이 될지...

2021/01/09

가스트로노미 - 나가오 켄지 / 김상애 : 별점 3점

가스트로노미 - 6점
나가오 켄지 지음, 김상애 옮김/비앤씨월드

제목인 가스트로노미는 '식을 즐기기 위한 광범위한 지식'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구르망은 미식가를 뜻하는 단어고요. 브리야 사바랭은 "가스트로노미를 논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증거가 뒷받침된 고도의 지식이 요구되며, 이러한 지성을 겸비한 (혹은 겸비했다고 여겨지는) 상류 계급만이 이 새로운 단어의 배후에 펼쳐지는 풍부한 세상을 이해하며 얻을 수 있다"고 했다네요. '상류 계급'이라는 말만 빼면 "맛의 달인" 등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원형인 셈이지요. 저 역시 이렇게 가스트로노미를 논하는 구르망이 되고 싶네요. 

하여튼, 이 책은 '가스트로노미'를 논하기 위해서는 현대 프랑스 요리를 알아야 한다는 대 전제 아래에서, 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되짚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프랑스 요리는 왕실과 귀족 문화 중심으로 토양을 다지며 발전해 오다가 17세기 라 바렌이 쓴 "프랑스 요리사"로 '오트 퀴진'(고급 요리)의 씨앗이 뿌려지게 됩니다. 기본 요리와 부이용, 허브 등을 조합하여 풍부하고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처음 도입되었지요. 요리가 조직화되고 간소화된 덕분입니다.
라 바렌 이후 요리사들은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누벨 퀴진'(새로운 요리)라고 불렀고, 그 뒤 17세기부터 부르주아가 세력을 얻으면서 그들이 동경하던 귀족 문화 모방 유행에 따라 식탁 문화 역시 부르주아에게 전파, 보급되며 확장되었습니다.
18세기에 유명 요리사 므농, 라 샤펠 등에 의해 이런 문화들이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지다가 18세기 후반, 드디어 레스토랑이 출현했습니다. 귀족들이 누리던 식문화를 식당에서 먹을 수 있게 된 거지요. 화려한 인테리어와 조명, 정중한 접객과 서비스, 세련된 오트 퀴진이 조합된 레스토랑에 드나들던 상류층들로부터, 앞서 말한 '가스트로노미'가 탄생하였고요.
여기에 불을 붙인건 프랑스 혁명이었습니다 .혁명으로 귀족들이 몰락하자 고용 요리사, 파티시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부르주아들이 이권을 차지하여 사치스러운 오트 퀴진 레시토랑이 성황을 이루게 된 덕분입니다.

이후 정통 구르망을 자처하면서 고급스러운 식문화를 전파하고자 했던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가 가스트로노미에 대한 여러가지 기획, 식사회를 거치며 "식통 연감" 등을 발표하며 시작된 '미식 문화' '미식 저널러리즘'은 브리야 사바랭의 "미각의 생리학"이 성공하면서 뿌리내렸습니다. 이들에 의해 '구르망' 이 폭음폭식이 아닌 고상한 단어로 포장되게 되었고, 식 저널리즘은 19세기에는 여러 저널리스트 및 발자크나 뒤마와 같은 인기 작가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이런 흐름은 현대의 "미슐랭 가이드"까지 이어졌고요. 이들에 의해 '가스트로노미'를 위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제공됨으로써, 가스트로노미 역시 더욱 활성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나폴레옹은 탈레랑을 이용해 외교에 요리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탈레랑의 큰 힘이 되어준건 '요리사의 왕' 앙토넹 카렘이었습니다. 카렘의 노력으로 요리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고, 카렘이 쓴 "19세기의 프랑스 요리예술"을 통해 그가 구축한 프랑스 요리 체계가 수많은 요리사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부터 요리 왕국 프랑스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렘이 죽은 19세기에도 카렘의 제자 아돌프 뒤글레레와 줄 구페 등에 의해 카렘의 요리도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특히 뒤글레레의 제자격인 위르뱅 뒤부아는 러시아 외교관 오를로프 공의 메트르 도텔 (수석 요리인)으로 일하면서 러시아식 식사 제공법을 보급시켰습니다. 프랑스식은 많은 요리를 한꺼번에 식탁에 나열하는 반면, 러시아 식은 1인분씩 나눈 요리를 코스 순서에 따라 한 품목씩 제공하는 방식이었지요.

프랑스 요리사들의 활약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프랑스 요리의 우위는 전 유럽에서 이미 확고한 것이 되었으며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등장으로 현대 요리계에서 불멸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는 프랑스 요리가 정립되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에 따르면 에스코피에는 본인 능력도 있었지만 '아첨' 하는 능력이 빼어나 요리의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고 되어있는데, 아첨도 능력이지요.
참고로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유명 요리사들과 구르망들 - 타이방, 라 바렌, 앙투안 보빌리에, 브리야사바랭, 카렘, 에스코피에 - 이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에 등장하고 있어서, 비교해서 읽어보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상세히 알려주며, 주요 요리사와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도판도 꽤 괜찮은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요리에 대한 '가스트로노미'를 과시하는데에는 더 없이 필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책에 소개된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 이야기를 응용하여 김태권이 썼던 짤막한 글을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책 쪽이 훨씬 상세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김태권 씨에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울러 부록처럼 실려있는 단편 소설인 "바르드 알 딘 왕자의 타르트레트"도 재미있었습니다. 앙토넹 카렘이 정체불명의 흑인 여자가 만든 타르트레트를 맛보고 겪게 되었던 기묘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타르트레트 레시피는 대법관 캉바레세르, 파르마 공이 어린 시절 사랑했던 디아나와 함께 만들었던 것이었지요. 카렘이 흑인 여자를 시켜 만찬에 타르트레트를 내 보낸 덕분에 파르마 공은 디아나의 어린 딸을 만나 돌봐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 자체는 특별할게 없지만, 1840년대에 이미 요리사가 이렇게 대중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얻을 정도였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타르트레트'는 소형 타르트를 의미한다는데, 살짝 소개되는 재료를 볼 때 별 맛은 없을 듯 하지만 이 당시에 이미 이런 디저트를 이야기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놀랍고요. 확실히 프랑스가 요리 강국이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2020/07/12

붉은 눈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붉은 눈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여덟 편의 단편과 작가가 수집한 네 편의 짤막한 실제 괴담이 수록된 공포 단편집입니다. 즐겨찾는 블로거이신 각시수련님이 올리신 미쓰다 신조 관련 글을 읽고 구해 읽었습니다. 여름에는 역시 공포 소설이지요.

미쓰다 신조 작품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가 읽었던 작품들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모두 집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무섭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집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이어, 이런 집에 대한 사는게 정상적인 무언가일리가 없다는 식으로 긴장감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다른 장편과의 차이점이라면, 수록작들 대부분인 작가이자 편집자인 미쓰다 신조가 직접 수집했거나 경험했던 '괴담'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현실감이 더해져 무섭고 오싹하기는 한데,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소설로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괴담으로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본연의 목적에는 충실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눈"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동급생이었던 마도 다카리가 사람에게 찾아와 죽음을 선사하는 붉은 눈을 지닌 무언가였다는 이야기.

마도 다카리가 이상하다는 묘사에서 시작하며, '나'와 함께 마도 다카리의 집을 찾아갔던 요네쿠라가 병으로 죽어버리고, '나'를 무당이었던 할머니가 지켜주었다는 결말까지 전개는 일직선입니다. 사악한 뭔가에 씌워져, 친구는 죽고 나는 할머니 덕분에 겨우 살아남는다가 이야기의 전부니까요. 마도 다카리의 정체라던가 퇴치 방법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반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읽기 쉽고, 전개도 깔끔하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더군요. 

고전적인 설정과 내용인 탓도 큽니다. 무언가에 씌워지면 죽는다는 설정부터 고전적이잖아요? 꿈을 통해 마도 다카리가 근처에 있다는걸 느끼게 되면, 그 사실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알리라는 결말은 "링"과 흡사하고요. 마도 다카리가 이상한 아이라는게 초반부터 드러나서 별다른 의외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 성격에는 충실하나 그렇게 무섭지 않고 새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경험했던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괴담 사진 작가" 

월간지 부편집장인 '나'는 특집 기사 때문에 사이언 마스든이라는 괴기 사진 작가 사진집을 출간한 출판사 트레빌을 찾았다. 그리고 업무 후 귀가 중에 트레빌에서 일하는 미즈키 요리코라는 여성을 만나 모쿠노 요시미라는 사진 작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을 찾는데, 그 곳은 화마가 휩쓸고 간 흉가였다....

괴기 사진 작가가 온갖 괴기스러운 사진을 찍고 현상하다가, 그 현장에 있던 '무언가'를 집으로 데려온 꼴이 되어 결국 본인은 죽고, 여동생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광인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래전, 사진이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기피했었습니다. 사진이 영혼을 빼 내어 간다는 소문때문에요. 간단한 조작으로 사람을 그대로 종이로 옮겨버리니 그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만약 이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피사체의 영혼과 사진이 찍히는 장소에 있는 '무언가'도 빼 내어 갈 수 있다는 뜻도 될 테고요. 이런 발상을 토대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설정도 신선했고 모쿠노 요시미의 자택, 비서를 자칭하는 여동생, 자택 가득한 모쿠노 요시미의 사진들 모두 괴기스러운 묘사로 가득차 있어서 흥미진진합니다. 모쿠노 요시미와 그 여동생의 정체가 드러나는 클라이막스까지의 전개도 깔끔해요. 

편집자 미쓰다 신조 시점의 경험담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엄청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 덕분이죠. 그 중에서도 '나'가 발견한 모쿠노 요시미는 등신대 사진을 잘라놓은 종이 인형에 불과했고, 여동생이 '나'를 이 곳으로 끌어들인 미즈키 요리코였다는게 드러나는 클라이막스 묘사는 백미입니다.
또 이 클라이막스 반전을 위해 앞 부분에 뿌려놓은 복선, 단서도 적절하고 공정합니다. 번역자가 공들여 이 단서를 설명하기 위해 이름 부분만 공들여 한자를 병기하여 표기한 탓에 이게 뭔가 의미가 있다는 티가 물씬 났던건 문제였지만요. 어차피 한국 독자가 해석하기는 무리였고요.

그런데 미즈키 요리코가 '나'를 이 집으로 끌어들여 뭘 어떻게 하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미즈키 요리코는 그 저택에서 어떻게 되는건지, '나'가 저택에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도 마찬가지고요. 속 시원하게 밝혀진게 전무한 탓에 완성된 이야기로는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공포만큼은 확실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영상화에 적합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미쓰다 신조 시점의 현재와, 괴기 심령 사진을 찍다가 데려온 무언가가 여동생에게 씌워져 파멸하는 모쿠노 요시미 시점을 오가며 모쿠노 요시미에게 씌워진 무언가가 현재, 과거에서 동시에 '개화'하는 장면을 클라이막스로 만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내려다 보는 집"

어린 시절, 교차로 벼랑 위쪽에 지어져 '나'를 내려다 보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던 집이 있었다. 흉가는 아니었지만, 지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아무도 사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집 때문에 기묘한 느낌을 받던 나와 친구 K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조사해 볼 계획을 세운다. 마침 함께 있었던 K의 어린 동생과 함께 4~5명의 아이들은 집 수색에 나서는데...

작가 미쓰다 신조로 보이는 '나'의 어린 시절 있었던 추억 괴담으로 "괴담 사진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가 본인이 경험했었던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식의 묘사가 탁월하며,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내려다 보는 집'에서 K의 동생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만나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리 구슬을 받고 놀았다는 상황도 상당히 공포스럽고요.

그러나 '공포'를 전해줄만한 실체는 친구 K의 동생의 이상한 행동과 증언 뿐이며, '내려다 보는 집'에 대해서는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빍혀지는게 없는 결말은 많이 답답합니다. 이야기의 현실감을 유지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기묘한 이웃집을 무단 침입한 아이들 이야기 정도니까요. 덕분에 현실감넘친다는 장점도 있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한밤중의 전화"

공포 소설가인 '나'에게 새벽 2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린 시절 친구가 5년전 취한 채로 찾아갔던 심령 스폿에 방문해 있다는 전화였다...

친구인줄 알고 긴 통화를 이어가는데, 알고보니 친구가 아니고 이형의 존재였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건 고전 괴담 '너는 내가 아직 니 엄마로 보이니?'와 다를게 없지요.

하지만 심령 스폿인 묘지에 있는 괴상한 집에 대한 묘사 - 코 앞에 늪이 있는, 연한 빨간색에 집 안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온갖 불쾌한 쓰레기가 가득한, 창무하나 없으며 대문의 위치도 기묘한, 기분 나쁜 그림이 붙어있고 안 쪽에서 회반죽이 칠해져 입구가 봉해진 - 는 아주 빼어납니다. 전작들인 "화가", "기관"는 물론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모두 마찬가지인데, 미쓰다 신조는 공포스러운 공간을 그려내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불현듯, 미쓰다 신조가 개포동 은마 아파트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자체가 바로 괴담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단지 무서운 공간 묘사에 그치지 않고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니까.' "다 왔다.."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도 섬찟합니다. 뻔하지만 이야기로서도 잘 완결되기는 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나방 남자의 공포"

'나', 즉 미쓰다 신조는 S 지방의 어느 온천 마을에 머무르던 중, 온천 여관 뒷 쪽에 있는 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산책을 나섰다. 그 길의 끝에서 이런저런 정체 불명의 폐가와 폐허를 목격하고 돌아온 뒤, 자정이 넘은 시간 노천탕을 찾았다가 낯선 남자를 만났다. 그는 여관 선선대 부인의 오빠라면서, 미쓰다 신조에게 과거 '재나방 남자'라는 살인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재나방 남자 사건은 가즈오라는 소년이 기묘하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낯선 남자는 당시 용의자로 몰렸지만 곧바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곤도 순경의 증언 덕분에요. 그는 가즈오와 헤어진 5분 뒤, 곤도 순경과 스쳐 지나갔는데 곤도 순경은 시체가 발견된 연못 옆에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연못을 지나 반대쪽 길로 향하던 순경은 두부 장수 오누키와 마주쳤고, 바로 뒤 오누키가 시체를 발견했고요. 그래서 낯선 남자는 범인이 될 수 없다는게 증명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게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관 뒤 오솔길에서 발견한 폐허와 박쥐 남자, 재나방 남자라는 기묘한 살인귀 이야기가 덧씌우져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인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대담하며 그럴듯합니다. 범인은 곤도 순경이거나, 낯선 남자일 것이라는 추리인데, 낯선 남자가 범인일 경우 가즈오의 시체를 감춘 트릭을 파헤치는게 특히 인상적이에요. 낯선 남자는 사건 당시가 절분이라 가지고 있던 콩을 곤도 순경이 나타나기 직전 순간적으로 시체 위에 뿌린겁니다. 비둘기를 불러모아 시체를 숨기 위해서라는데, 주어진 정보 제공도 공정한 편이며, 실현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현실감있게 잘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담으로서의 역할도 그리 빠지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낯선 남자는 살인귀 재나방 남자로 오래전 죽었으며, 지금도 가끔 노천탕에 출몰한다는 마무리는 뻔하지만 확실해서 이야기 완성도 측면으로는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공포와 추리 양쪽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뒷골목의 상가"

미쓰다 신조는 E씨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를 "백사당" 안에 녹여내려다가, 무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오싹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는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쓰다 신조는 원고 속 E씨 체험담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뒤 취재원이었단 야카게 씨가 E씨가 죽었다며, 괴담에 대한 섬뜩한 원고를 보내오는데...

도입부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E씨 시점의, E씨가 겪었다는 괴담입니다. E씨가 어린 시절 야반도주하여 숨어 살게 된 교토 '뒷골목' 집에서 공포스러운 존재와 마주한다는 내용이죠.

어떤 거리, 공간이 특정 시간이나 특정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어 그 곳의 이형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에서도 보아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어떤 조건에서 이계와 연결되는지, 이형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형이 노리는게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공포스러운 존재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공포의 핵심도 E씨가 '지이이이이잇.....' 소리를 내는 소름끼치는 여자에게 쫓기는 과정이고요.

하지만 이 여자가 E씨의 뒤를 쫓고, 집 안으로 숨어들어오는 과정의 묘사는 가히 일품이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겨우 드나들 틈새를 지나 뒤로 나타나서 뒷쪽 창틀을 움켜쥐는 장면 묘사는 특히 압권이었습니다.
E씨는 아직 그 곳에 살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E씨 원고의 결말은 E씨가 그 곳에서 이사를 갔다는 모순 가득한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할 바에야, 모든 걸 이렇게 모호하게 풀어내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네요.
괴담으로서는 최고 수준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맞거울의 지옥"

미쓰다 신조가 젊은 시절 교토에 있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때, 도쿄 출장 중 캡슐 호텔 화장실에서 맞거울을 보며 에도가와 란포의 "거울 지옥"을 떠올리다가 다른 손님을 만났다. 그도 괴담을 좋아해서 의기투합한 미쓰다 신조는 함께 호텔 로비에서 캔 맥주를 나누며 괴담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그 남자의 동생과 맞거울에 얽힌 괴담을 듣게 되는데...

거울과 거울 사이, 맞거울의 무한 공간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작품. 작품은 그다지 의외성이 없지만 겹쳐진 거울 속 어딘가에 있는 귀신이 거울을 건너뛰면서 나이를 먹고, 결국 나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나타난다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근사합니다. 소설로도 멋지지만 영상화한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클라이막스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 

사람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상, 즉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사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죽음 그 자체로 보였기에 슌이치로는 쫓아내지 않았다. 이누마는 자기처럼 괴담을 좋아하는 친구 가이즈카, 요코가와, 이와세와 함께 한 밤중에 인터넷 상에 유명한 오드아이 소녀가 얽힌 괴담이 있는 폐가를 찾았다가, 친구들이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 단편집 표제작이자 첫 번째 작품인 "붉은 눈"의 마도 다카리와 그녀의 집이 또 다시 등장하는 작품. 그리고 친구들과 무모한 심령 스폿 탐험을 나선다는 설정은 "한밤중의 전화"와 같습니다. 거기에 주인공이 사상학 탐정 슌이치로이고, 마도 다카리가 거주하는 흉가에 대한 오싹한 묘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가히 미쓰다 신조 월드를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집대성 작품답게 오싹한 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무너져가는 집을 탐험하는 과정부터 오싹해요. 불당 안의 불상 눈이 파내어져 있었다는 묘사가 특히 기억에 남네요. 무엇보다도 차로 돌아가던 4명에게 닥친 공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폐가 방문을 거절하고 차 안에 남아있던 이와세가 "그 여자애가 왔다. 계속 차에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들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지요.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친구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는 직후 묘사도 오싹합니다. 대체 무엇을 본 걸까요?

본인 경험 괴담이 아니라 소설적인 구성을 갖추어서 그런지 기승전결 구조도 좋습니다. 슌이치로를 찾아온 이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결말이 특히 좋아요. 이누마에게 사상이 보이지 않은 이유, 슌이치로의 고양이 보쿠가 이누마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니까요.

중반부의 오싹한 장소를 뒤지는 전개는 담력 시험 수준이라 특별한건 없고, 마도 다카리의 정체와 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죽게 만드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건 여전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2/12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더글러스 프레스턴 / 손성화 : 별점 3점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6점
더글러스 프레스턴 지음, 손성화 옮김/나무의철학

오래전부터 온두라스 밀림 속에 숨겨져 있다고 알려진 '시우다드 블랑카', 즉 백색 도시라 불리는 유적발굴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정복자 코르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색 도시가 실려있는 다양한 사료 소개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험들부터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특히 미국의 대부호 헤이가 1930년대 미첼헤이스, 1935년 R.S 머레이, 1940년 모드를 고용하여 탐사를 벌였던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사기꾼이었고, 특히 모드는 유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금광을 찾기 위해 탐험에 뛰어들었던 악질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잃어버린 도시 탐험이 시작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율 주행 기술때문에 널리 알려진 '라이다' 기기를 활용했다는 점이었어요. 비행기에 실은 라이다 장치로 조사하려는 장소 스캔을 통해 GPS 정보까지 링크된 완벽한 3D 지도를 만들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실제 밀림을 뚫고 나가는 과정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는데 여러모로 놀라왔습니다. 과거 '인디아나 존스' 등으로 상징되는, 고고학자가 발로 뛰어들어 조금씩 유적의 실체를 벗기고 유물을 발굴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백색 도시 탐사 초반부의 어려움은 발로 뛰는 현지 조사가 아니라 온두라스 정부와 발굴 교섭을 하는 행정 절차였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온두라스 쿠테타로 인해 새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 백색 도시 발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후원했다는 언급도 신선했고요.

백색 도시 실체를 3D 지도로 확인한 뒤, T1 지구라고 부르는 현지 밀림 속으로 들어가 유적을 확인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전직 SAS 장교 출신으로 위험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방송 관계자를 서포트하는 전문가들이 고용되고, 다양한 안전 장치를 거의 완벽하게 확보해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독사를 만나고, 온갖 벌레들에게 습격당하는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지 조사는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프로젝트 리더 스티브 엘킨스가 직접 참여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정글의 법칙" 보다 조금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백색 도시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며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확실히 '내셔널 지오그래피' 소속 기자다운 느낌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중반부까지를 차지하는 백색 도시 탐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책 서두에 던진 질문,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깜쪽같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는가? 에 대한 답이 설명되는 뒷 부분이 진짜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모스키티아 주민들입니다. 원래 이 지역에 작은 부락을 만들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모스키티아 문명은, 수백 Km 떨어진 마야 도시 코판이 강성해지면서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426년 마야인 케트살마코가 코판을 장악했는데, 이 때 코판 지역 원주민들은 모스키티아 주민들과 동일 어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당연히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 뒤 코판과 모스키티아는 5세기 이후 각자 교류하며 발전해 나갔지만 코판에서 왕족들이 신성을 강조하며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다가 기근이 닥치고, 신성이 무너져 주민들이 반기를 든 탓에 코판은 9세기경 붕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이때부터 모스키티아 문명은 더욱 발전하여 마야 스타일 도시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도시 파괴 후 흩어졌던 코판 주민들 일부가 유입된 덕분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밀림에서도 복합 농경 사회를 일구며 발전한 모스키티아 문명도 1,500년 경 갑자기 몰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서구 사회에서의 전염병 유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색 도시 제단에 남겨진 제물들 형태를 볼 때, 살아남은 주민들이 제물을 바치고 떠난게 분명합니다.

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그대로 놔 두고 도망쳐 버린 이유, 그리고 도시가 저주받았다는 전설이 널리 퍼진 이유는? 전염병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치에 맞습니다. 신세계에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을 들불처럼 퍼트렸고, 이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신세계 주민들은 거의 90%가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충분한 근거가 되고요. 코르테스가 단 500명의 군대로 아스텍 제국을 정복했던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로 전염병 덕분인 셈이니까요.
구세계 주민들은 전염병에 어느정도 내성이 있었는데 신세계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는지도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도 볼거리입니다. 구세계에서는 일찍이 온갖 가축을 키웠고, 밀집한 장소에 모여 살아서 병원균 침입 및 전파가 잦았고,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주어서 유전 저항이 생길 수 있었지만, 신세계에서는 가축을 많이 키우지 않고 넓은 공간에 살아서 상대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총, 균, 쇠"와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무자비한 구세계 전염병의 습격을 저자가 온두라스에서 걸려온 풍토병 리슈아만편모충증과 연결하여, 우리는 분명 저주받았으며 이렇게 신세계에서 발생한 미지의 전염병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로 글을 끝맺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와 어느정도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꽤나 깊은 울림을 전해 줍니다. 앞으로 어떤 미지의 병원체가 인류를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는데, 남의 일이 아닌 셈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천연 밀림으로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T1 지구가 온두라스 군대와 고고학자들이 머물며 파괴되어 가는 현재를 취재한 내용인데, 이렇게 사람 손 닿지 않은 비경이 훼손된 책임은 명백히 처음 도시를 찾아나선 전문가들에게 있으니까요. 때문에 그들은 저자처럼 훼손되는 숲을 보고 안타까와 하는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고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냥 발굴에 대한 명예만 얻고, 좋은 방송 콘텐츠 제작한걸로 끝내버리는 행동은 지극히 무책임해 보였어요. 하긴, 구세계 출신인 멤버들이 주도한 탐험과 발굴 자체가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망한 나라를 숨겨진 도시라며 다시 찾아와 마지막으로 바친 제물을 끄집어 낸다? 부관참시와 같은 죽은 자를 죽어서까지 모욕하는 행위와 별로 다를게 없지요. 이래서야 발굴에 참여한 구세계 출신 멤버들이 안 좋은 운명을 맞게 되는건 당연해 보여요.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고인능욕(?)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나라 그 민족 후예들이 중심이 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발굴과 조사도 무인 드론이나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무인 로봇개 등 무인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람 손 닿지 않게 이루어지는게 바람직할테고요.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건 물론, 비교적 재미있고, 건질게 많았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온갖 벌레와 독뱀이 사방에 천지라 쉽게 갈 엄두를 내기는 힘든 곳이지만, 제 평생 한 번 정도는 중남미 고대 문명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네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2023/01/07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이소영 : 별점 3점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6점
이소영 지음/모요사

미술사를 바꾼 여러 가지 그림 도구 및 각종 계기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제목에서처럼 도구들이 설명되고 있지만 화가의 직업병을 다룬 '백내장' 같은 챕터와 같이 다른 분야도 폭넓게 소개해줍니다.
특히 이런 도구와 각종 계기들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의 도입처럼요. 이동이 용이한 캔버스 덕분에 그림이 더 이상 교회와 건물에 붙박이 장식으로 활용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유행하게 되었다니 대단한 혁신을 이룬 셈입니다. 나무 패널에서 캔버스로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습하고 소금기가 많은 대기는 프레스코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베네치아에서는 나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중요 자재였기 때문이었다니까요. 그래서 해양강국답게, 돛을 만들던 기술을 활용한 캔버스가 대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의 질감을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 소개도 좋았어요.
이런 캔버스만큼, 아니 더 큰 미술사의 혁명을 불러온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크릴 물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미술은 현실 세계에 없는 입체감 없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라는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경쾌하고 선명한 색감, 빠른 건조에 어디에나 그릴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춘 아크릴 물감의 등장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크릴 물감 챕터에서는 이렇게 아크릴 물감이 현대 미술을 그야말로 '접수'한 신소재라는걸 여러가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예를 들어가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결합된 현대미술의 큰 이바지를 한 빌리 클뤼버,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E.A.T 소개도 좋았습니다. 당연히 미술가들이 기계적인 작품을 혼자서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기술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몰랐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협의 기간이 오래 걸렸고, 심지어는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못할 때 다른 기술을 제시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했던 작품도 있었다니 - 앤디 워홀의 <<은색 구름>> - 이 정도면 함께 창작을 진행한 동료라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아요. 더 이상 기술의 도움없는 예술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템페라화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템페라화는 유화가 유행한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 나름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군요. 약간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질감과 색감이 현대 미술의 어떤 분야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라나요. 게다가 21세기에는 공장에서 제조된 물감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템페라 물감이 또다시 유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니까요. 또 달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처럼 부엌 재료들이 일찍이 물감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식인데, 확실히 화가들도 계속 연구와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라는걸 잘 알려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네요.
'종이'에서는 터너의 수채화의 독특한 질감과 효과는 모두 그가 사용했던 종이 덕분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종이에 상처를 낸 뒤 물을 붓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무늬와 명암을 얻는 터너의 기법은 현재의 종이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종이 원료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용으로 '터너풍 수채화 종이'를 개발해서 판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팔레트'는 미술 도구로서의 팔레트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팔레트는 필요없는 그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가들이 팔레트에 뿌린 물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팔레트에는 대체로 열 개 정도의 물감만 쓰였고, 전통적인 팔레트는 혼색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혼색 대신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비비고 흩뿌려 작업했다고 합니다. 즉 인상주의의 탄생은 튜브형 물감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는 팔레트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튜브형 물감과 같은 합성 물감도 한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데, 일전에 다른 다른 책에서 읽었던 고흐의 독특한 노란색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은 독특하게도 화가들의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질환을 앓은 화가들이 많았다는데, 드가가 거의 완전 실명에 이르른 탓에 유화를 그리지 못해 파스텔화와 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는건 몰랐었습니다. 유별나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백내장 등의 질병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물감들에 포함된 납 성분,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 방식 등이 이유였겠지요. 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이 초기의 세밀하고 부드러웠던 그림에서 거친 파스텔 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에 걸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컴퓨터에서 재현하면 드가와 모네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도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림과 미술사, 각종 재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확실히 미술사 전문 출판사 모요사의 책 답게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잡고 있어요. 도판이 너무 작다는 점, 그리고 소개되는 모든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지 못한 점은 좀 아쉬우며, 전문가적인 이야기에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이 다소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옥의 티라 할 수 있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3/17

아무도 문밖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 매슈 설리번 / 유소영 : 별점 2.5점

아무도 문밖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 6점 매슈 설리번 지음, 유소영 옮김/나무옆의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디아는 일하던 서점에서 목을 매고 죽은 청년 조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조이의 주머니에는 리디아가 열 살 때 단짝들과 함께 했던 생일 파티 사진이 들어 있었다.
리디아는 자신에게 남겨진 조이의 유품 속 책들을 오려낸 빈 공간이, 짝이 되는 다른 책을 맞추면 메시지를 표시하기 위한 구멍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는 조이가 남긴 메시지를 통해 그녀의 잊고 싶었던 어린 시절 "망치 살인마"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아무런 정보 없이 우연찮게 e-book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리디아가 과거 망치 살인마의 연쇄 살인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였으며, 이를 억지로 잊고 살다가 조이가 자살하고 남긴 메시지 때문에 반 강제로 망치 살인마의 정체를 더듬어 나가는 과정이 아주 흥미로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망치 살인마가 리디아가 숨어있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었다는 현장 묘사, 그리고 수상쩍은 아버지 토마스의 행동을 결부시켜 아버지가 진범이 아닐까?라는 전개로 진행되었지만, 조이가 라지의 이복 동생이었다는게 밝혀지면서 드러나는 반전이 괜찮습니다. 조지가 사진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리디아가 아니라 이복형 라지가 같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망치 살인마는 아내의 불륜 상대를 가혹하게 응징한 파텔 씨라는게 드러나지요.
이는 파텔 씨가 엄청나게 호전적이고 무서운 성격이며 조지가 유품으로 남긴 정장(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 입으려고 산 것), 조지와 라지 모두 잘 생겼으며 파텔 부인이 미인이었다는 묘사, 파텔 부인이 망치 살인마 사건 직후 인도의 고향으로 가서 9개월 후에 돌아왔다는 등의 여러가지 복선으로 잘 설명되고 있어서 나름 설득력도 높습니다. 아버지 토마스의 수상쩍은 행동 역시 피해자였던 오툴 부인과 불륜 관계였다는 설정으로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모든 진실이 밝혀진 후 파텔 부인이 더 이상 참지 않았다는 결말도 깔끔합니다. 또 트라우마를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은 많지만 장황한 심리 묘사가 많지 않아서 읽기 수월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전반적으로 묘사에 군더더기가 없어서 경쾌하고 깔끔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주인공이 서점 직원인 덕분에 등장하는 많은 책들도 반가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리디아가 서점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지배인에게 추천했던 책은 "백 년 동안의 고독", 리디아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량들을 지칭할 때 쓰는 '책 개구리'라는 표현은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속 멋쟁이 개구리 제레미 피셔에서 따온 것, 조이가 남긴 책 중 리디아가 추천해서 산 책은 "나사의 회전"과 폴 오스터의 뉴욕 이야기 3부작 등인 식으로요.

그러나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정교하다고 보기는 힘든 탓입니다. 우선 당시 형사였던 모버그의 말대로 토마스는 유력한 용의자 No.1입니다. 리디아를 찾는다는 이유로 현장을 모두 들 쑤셔 놓았을 뿐 아니라 흉기까지 들고 설쳤으며, 피해자 중 오툴 부인에게만 그의 핏자욱을 남긴 등의 정황 증거부터 차고 넘치니까요. 알리바이도 없고, 무엇보다도 리디아가 숨어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살려주었다는 건 누가 뭐래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이 정도면 유죄 판결을 받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여요. 그런데 단지 '리디아가 충분히 고통을 겪었다' 는 이유만으로 윗 선에서 압력이 가해져 토마스에 대한 수사와 기소가 중지되었다는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어금니 아빠 이영학을 딸이 불쌍하다고 풀어준다는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게다가 조지가 리디아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유품을 남긴 이유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구태여 리디아를 찾아가 얼쩡거린 이유, 자살하면서 유품과 메시지를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지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었을텐데요. 작 중 리디아의 서점 동료인 플라스의 말대로 '웨이터에게 팁도 안 주는 짓거리' 같은 민폐에 불과합니다.
메시지도 이렇게 장황하게 남길 필요는 없습니다. 종이에 힘들게 칼질을 해서 구멍을 뚫는 것 보다는, 요약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어머니가 나를 부정했다, 그래서 나는 죽는다' 라고 써도 충분합니다. 암호 트릭 자체로는 그럴싸하지만 지나치게 멋을 부린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이 확실한데 읽는 재미는 충분한 만큼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으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겠습니다.

2006/11/12

북오프 방문기

한국 1호점이 생긴지는 꽤 되었지만 못 가보다가 오늘 일요일이기도 하고, 할인행사 이야기도 들어서 가보게 되었습니다.

첫 인상은 일본 직영점이 맞구나 하는 생각. 점원도 일본인이지만 손님도 일본인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안에만 있으면 흡사 도쿄 시내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더군요.

책들은 구색을 그런대로 갖추어는 놓았지만 그다지 특별히 땡기거나 괜찮아 보이는 책은 많지 않았습니다. 만화는 정말 너무 뻔한 작품들만 있어서 실망스럽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문고판이 더 많았으면 했는데 문고판 보다는 일반 코믹스가 훨씬 많아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만화만 사러 간다면 구태여 여기 북오프에 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쨌건 호시사토 모치루의 "오무라이스" 4권을 일단 1000원에 겟! 한국판으로 1~3권은 구했는데 4권을 못구했던 차에 눈에 띄여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소설로 넘어갔는데 하야카와 미스테리 문고같은 문고본은 거의 없고 거의 일본 작가 추리물로 가득해서 그다지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습니다. 아카가와 지로와 니시무라 교타로 책이 2/3는 되는 듯 하더군요. 장편을 고르고 싶기도 하지만 일어 실력이 너무 딸려서 장편은 선뜻 손대기가 어려워 포기하고 주로 단편집 위주로만 찾아 보아서 더더욱 손이 가는 책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고르고 골라 몇권 샀는데 제일 먼저 고른 것은 "와트슨 박사의 미발표 수기"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셜록 홈즈 모작 "셜록 홈즈의 굉장한 모험"이라는 니콜라스 메이야의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7퍼센트 용액" 이군요. 홈즈 관련 모작을 저도 요새 쓰고 있기도 하고 뒷표지 작품 소개를 보니 실존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드까지 등장하는 등 왠지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그리고 고른 것은 아토다 다카시의 정통 추리 단편집인 "A 사이즈 살인사건" 입니다. 그동안 아토다 다카시는 "Y의 거리"에서와 같이 섬뜩한 느낌을 주는 단편을 많이 접해 보았지만 정통 추리물까지 썼는지는 몰랐는데 의외더군요. 좋아하는 작가라 무지 반갑기도 했고요. 맨 앞의 표제작만 우선 읽어 보았는데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로 꽤 괜찮은 수준의 트릭과 내용을 보여주어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탐정역이 "스님" 이라는 것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이 왜 "A 사이즈 살인사건" 인지는 그다지 명쾌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페르시야 고양이의 수수께끼"라는 이른바 "국명 시리즈" 단편집 한권을 집어들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러시아 홍차의 비밀" 과 같은 국명 시리즈의 하나인데 그런데로 읽을 만 했었거든요. 이 책은 충동구매한 느낌이 강하지만요.

그 외에 구입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은 헨리 슬레셔의 "괴도 루비의 모험"이라는 단편집인데 뒤의 요약을 보니 정통 추리물은 아닌 듯 해서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꽤 호기심이 가는 작품이라 다음에 혹 방문할 기회가 되면 다시 고민해 봐야겠네요.

전체적으로 일본 북오프 왠만한 매장보다 작은 규모에 책들도 그닥 땡기는 작품들이 없어서 좀 실망하기는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렇게 구입해도 전부 만원이 안되니 상당히 기분이 좋더군요. 원서를 읽으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그 덕에 당분간 책 살 일은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차피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는 제 취향에 딱 맞는 서점이긴 합니다. 가끔 간다면 오늘처럼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가끔 시간날때 들려 봐야 겠습니다.

2025/07/05

미치도록 잡고 싶다 - 정락인 : 별점 3점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범죄 전문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미제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사건의 흐름은 물론 왜 지금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1년에 발생한 "'그놈 목소리'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저자는 이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된 가장 큰 원인을 초동 수사 실패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사건 초기 세 번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거든요. 첫 번째는 범인이 돈을 전달하려 할 때 접근했던 수상한 남성을 놓친 것이고, 두 번째는 경찰이 다른 장소에 잠복하느라 범인이 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지게 만든 점, 세 번째는 범인이 은행에 돈을 찾으러 왔지만 현장에서 놓친 경우입니다. 오늘날 CCTV 등의 수사 인프라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적인 추리입니다. 앞서의 "그놈 목소리" 사건의 경우, 저자는 범인이 최소 세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합니다. 범인의 언행, 범행 방식, 통화 기록 등을 종합한 분석이 그 근거입니다. 또한 사건의 최신 수사 현황도 책에 충실히 담겨 있습니다. 이형호 군의 외가 친척인 이 모 씨의 성문이 범인과 완벽하게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명확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급됩니다. 그런데 만약 범인이 여럿이라면, 알리바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희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지금이라도 체포해서 수사할 수는 없는지 독자로서 궁금해지네요.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에서도 실제로 추리 소설의 소재로 활용될만한 추리가 선보입니다. 14층 피해자의 집까지 찾아가려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CCTV에 범인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면 마찬가지로 비디오폰에 촬영되고요. 그러나 두 카메라 모두에 범인이 찍히지 않았고, 아파트 문을 억지로 열지 않았으며, 범인이 화장실까지 이용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피해자와 친분이 있는 아파트 내부자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의 추리입니다. 현관 비디오폰 촬영은 노크를 해서 피했고요. 이 정도면 어느정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대부분 워낙 유명한 사건들이라, 이미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여러 차례 다뤄진 내용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엽기토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정동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평소 저자의 '사건 속으로'라는 이름의 칼럼을 꾸준히 읽어온 저에게는 책에 담긴 정보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접했던 것이었고요. 이런 점 때문에 새로운 정보나 미공개 기록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몇몇 사건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홍해 토막 살인 사건"은 남편의 혐의가 짙은 정도가 아니라 명백해 보이는데도 왜 체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김해, 부산 부녀자 연쇄 실종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사체를 찾지 못해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는데, 최근에는 '시체없는 살인 사건'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최신 판례와 수사 기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았을 겁니다.
미제 사건과 무관한, 저자의 기자로서의 활약과 소회를 담은 컬럼인 "정락인의 사건 추적"은 책의 성격과 많이 다른 탓에 차라리 추가되지 않는게 좋겠다 싶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제 사건 자체의 흥미와 저자의 분석력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알려진 사건 중심의 구성과 정보의 신선도 부족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완전범죄"보다는 깊이있는 정보가 많고, "표창원의 사건 추적"보다는 추리와 분석 측면으로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2020/03/22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희망장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시리즈 탐정 중 하나인 스기무라 사부로가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유명세에 비하면 제가 많이 읽은 작가는 아닙니다. "화차"는 제 올타임 베스트 10에 언제나 꼽을 수 있는 걸작이고,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평균 이상이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는 않더라고요. 가장 큰 이유는 500페이지는 훌쩍 넘기는 대장편이 많은 탓입니다. 두께만 봐도 먼저 질리는 느낌이거든요. 에도 시대물은 재미있긴 했지만 별로 취향이 아니었고요.
이 책 역시 거의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활동이 극히 적어진 요즈음, 이런 책이 집에서 진득하게 읽기에는 오히려 좋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고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탐정과 일반인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있으며, 추리력과 더불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관찰력을 선보이는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는 "탐정 사전"을 통해 존재를 알게된 뒤,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해 왔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하네요. 평상시 흠모하던 스타와 우연히 동석하여 식사를 했는데, 스타가 밥값까지 내 준 격이랄까요. 두 번째는 평균 이상되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고요.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전부 평균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전작을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성역"

이혼한 독신남으로 사립 탐정업과 조사로 먹고 사는 38살의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이 찾아왔다. 이웃 맨션 파스텔 다케나카에 사는 독신 여성 모리타였다. 그녀의 의뢰 내용은 유령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것으로, 그녀의 아래층에 살다가 사망한 할머니 미쿠모 가쓰에를 꼭 닮은 사람을 보았는데 가난에 허덕이던 미쿠모 할머니와는 다르게 그녀는 유복해 보였다고 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조사의 의뢰비는 착수금 5천엔과, 2년 동안의 쓰레기장 청소 당번 대행이었다.

조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스기무라는 곧 죽을거라는 전화만을 남기고 사라진 미쿠모 할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 죽지 않은 그녀가 지금 유복해보이는건 뭔가 인생 역전의 계기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옛 주소지에서 연을 끊다시피한 딸 역시 행방불명이라는걸 알아내 둘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걸 알아내지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복권 당첨에 당첨된 할머니가, 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둘이 새로운 삶을 찾아 과거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는 결말까지 차분히 이어집니다.
이를 위한 중간중간의 디테일들도 꼼꼼합니다. 38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그런데 작중 배경인 2010년에 38살이면, 저와 동갑이네요. 호감도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스기무라 사부로도 무척이나 호감가게 그려지고요.

조금 특이했던건, 불쌍한 할머니를 염려하는 동네 주민의 의뢰와 조사 중 자상한 동네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 따뜻한 분위기와 딸인 지독한 이기주의자 미쿠모 사나에의 표독스러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였던 스타차일드 멤버들마저도 알고보니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게 밝혀집니다. 이들에 비하면 사나에는 그야말로 자기만 아는 압도적인 악역이에요. 문제는 사나에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서 더욱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할머니의 무사는 축하할 일이지만 이런 딸과 함께 산다면, 결말은 안 봐도 뻔할 거라는게 무섭게 다가옵니다.

스타차일드 멤버인 벨과 사나에의 악연, 그로부터 비롯된 가노쿠라 풍아당과의 관계는 사족이었다 생각되지만,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희망장"

세상을 떠난 무토 간지는 죽기 전, 양로원 관계자와 아들에게 과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고 아들 아이자와는 스기무라에게 이 사실의 진위여부를 밝혀줄 것을 부탁했다. 주변인들을 통해 밝혀진건, 간지 씨가 쇼와 50년 8월, 젊은 여성이 습격당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자와의 말에 따르면, 무토 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아이자와 가문으로부터 절연당한 뒤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도 탓으로, 그가 특정 여성에게 발끈하여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건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설명되지요. 하지만 스기무라의 조사로,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직접 표현한 적은 없다는게 곧바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밝혀내기 위해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단서를 찾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 활동은 정겹습니다. 오래전, 35년 전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메는데, 나름의 노하우가 눈에 띕니다. 음식점, 이발소, 미용실, 세탁소나 술가게 등 배달도 하는 업종의 가게 등을 돌아다니지만, 바나 스낵에는 기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둑 모임이나 장기 살롱은 있으면 좋은 정보원이지만 마작이나 파친코는 그 반대이고, 편의점은 별로 도움이 안되지만 학원은 도움이 된다던가, 파출소에는 들르지 말아야 한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조사를 한다면 참고할 만한 정보네요.

하여튼, 이러한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로 35년 전 강간 살해 사건의 범인과 무토 간지가 같은 아파트 '희망장'에 살았다는게 밝혀집니다. 처음 방문했던 술가게에서 정보를 얻었더라면 이후의 조사는 별로 필요가 없었지만, 이런 시행착오가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줍니다. 또 이 과정에서 탐정은 아무리 일상계라도 비정할 수 밖에 없다는걸 전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차가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스기무라의 추리에 따른 가설도 그럴듯합니다. 35년 전 사건의 진범이 무토 간지였거나, 진범 가야노 지로의 아주 친한 지인이었을거다라는 가설이지요. 당연히 35년전이라고 해도, 경찰을 우습게 보면 안되니 두 번째 가설이 정답이고요.
그렇다면 왜 무토 간지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이상한 말을 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스기무라가 양로원 청소 스태프가 청소할 때 스포츠 타월을 접어 바닥에 까는 걸 보고 알아채게 됩니다. 무토 간지는 살인범을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양로원 청소 스태프 하자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알고 그걸 은밀히 드러내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최근에 일어났던 성폭행 미수 살인사건과, 35년전인 쇼와 50년 8월 사건 두가지가 마지막에 맞물리는 전개가 정말 멋집니다. 일평생 고독하지만, 정직하고 한결같이 살아온 무토 간지의 매력도 빛을 발하고요.

하지만 욕심이 조금은 지나친 느낌입니다. 35년전 피해자 다나카 유미코의 동생을 이야기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그녀는 원래부터 재였다. 사람의 모습을 한 재다."와 같은 멋드러진 묘사에 비하면 등장해서 하는게 없고, 묘사도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담아내기에는 지나친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5점입니다! 지금도 좋은 작품이지만 불필요한 요소를 들어내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아니면 다나카 유미코 사건도 더 깊숙히 파고들어 더 긴 호흡의 이야기로 전개하던가요. 그랬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래 남자"

스기무라의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의 삶, 가키가라 스바루를 만나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 등이 차분히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호토 가게 '이오리'의 주인 마키타 히로키가 이노우에 다카미와 불륜 끝에 사랑의 도피를 한 사건의 조사와 추리와 함께 진행되지요.

남편 마키타 히로키는 과거 문제아로 아버지에게 절연당했다, 지금 그의 사진은 남아있는게 없다, 사진을 확인조차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당연히 과거 문제아 가가와 히로키는 지금의 마키타 히로키와는 다른 인물이라는건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카미가 문제아 시절 과거를 노리코와의 친분 덕분에 알게 되었고, 돈이 궁해진 지금에 와서 그 정보를 협박의 도구로 썼으리라는 추리도 역시나 상상력 범주 안에 있고요.
하지만 이를 마키타 집에서 풍겨온 염소 냄새, 집 근처에 묘지가 있다는 상황 등과 연결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는 오싹합니다. 협박을 '공포'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감각,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공포, 후회를 드러내는 솜씨도 실로 발군입니다.

하지만 이노우에 다카미가 살아있었으며, 이 모든건 히로키의 부탁으로 벌인 연극이었다는 진상 이후부터는 시시해집니다. 히로키가 지나치게 착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요. 한 번 희생양은 영원히 그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느껴졌거든요.
같은 이유로 진짜 히로키로부터 위협받던 가짜가 진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건 의외이기는 했지만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모든걸 알게 된 다카미가 어머니와 함께 사과했다는 후일담은, 결국 히로키의 연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카미의 철없는 악의가 결국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본인은 잘못을 느끼지 못하며, 잘못을 깨닫고도 결국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예 사악함을 뿜어냈던 "성역"의 사나에보다도 더 질이 나빠요.

결론내리자면, 사건보다는 스기무라의 과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도플갱어"

후쿠시마 사태를 일으킨 도호쿠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작품.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태가 일본인에게 얼마나 공포였는지가 작품에서 은근하게 표현되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스기무라 사부로의 입을 통해 '일본은 키를 잃고 폭주할 것이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절망 속에서 떠돌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대표적이지요. 소시민과 상대적인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미야베 미유키의 특성이 잘 드러난 말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핵심 사건인 유타카 실종 사건의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지진으로 실종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살해되었다는건 좀 뻔한 이야기죠. "브라운 신부"에서도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도 동기가 그의 결혼 결심이었다는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결혼을 결심하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고, 프로포즈를 위해 고가의 반지를 구입했으며 이를 범인이 유타카를 살해하고 빼돌렸다는 진상은 충분히 합리적이니까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작위적인 전개가 눈에 거슬립니다. 애초에 아스나가 스기무라에게 실종 조사를 의뢰한 것 부터가 작위적이에요. 스기무라가 그 의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조사를 한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작 중 묘사되듯 '자원 봉사'로 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런 실종은 전문 단체에 의뢰하는게 맞는 상황이니까요.
마쓰나가가 유타카를 살해한 직후, 대형 재해가 때마침 벌어진 것 역시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해가 일어난 후, 유타카가 프로포즈를 결심하고 , 그 탓에 마쓰나가와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사부로가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 계기인 아스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이 사건에 엮인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단서를 끄집어 내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억지스러운 느낌이 강했어요. 이 친구들이 등장하느니, 마쓰나가가 아스나에게 직접 연락하여 사귀자고 한 뒤, 그 징표로 비싼 반지를 선물한다는 식으로 풀어나갔더라면 더 어땠을까 싶네요.

명백한 살인 사건을 스기무라 사부로가 해결하는 정통 추리물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물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그만큼 본격물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경찰도 아니고, 정식 탐정도 아닌 스기무라 사부로 수준에서는 더욱 한계가 느껴질 수 밖에 없지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집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10/20

to Cats 고양이에게 - 권윤주

To Cats - 4점
스노우캣 글.그림/모요사

스노우캣으로 더욱 유명한 권윤주씨의 사진+카툰집입니다.

스노우캣 사이트는 자주 찾아가는 편이지만 저와는 상당히 기호가 다르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획 자체도 책보다는 하나의 Contents로서 온라인에서 보여지는 것이 더 맞지 않았을까 싶었고, 풀 칼라에 종이도 좋은것을 쓴 탓인지 180페이지 정도의 책이 무려 12,800원(!)이라는 가격이라 구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애묘인도 아니고요. 그런데 우연찮게 같은 회사 팀장이 구입하고 칭찬해서 한번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윤주씨의 고양이 "나옹"군의 사진과 카툰으로 이루어진 내용으로만 본다면 사실 그다지 알맹이가 있는 책은 아닙니다.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팬시라고 생각되네요. 애묘인들은 다양한 고양이 "나옹"의 사진을 보며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애묘인이 아니라면 별로 땡기는 책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 그다지 재미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하지만 같이 실려있는 만화와 글에서 권윤주씨의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뭍어나오는 것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를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도 참 행복한 일이 아닐까 싶군요.

2016/10/03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유승훈 : 별점 2.5점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6점 유승훈 지음/살림

한국의 도박사를 다룬 미시사 서적입니다. 도박은 제의와 점술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이론에서 시작하여 신라, 백제, 고려, 조선, 근현대에 걸친 각종 도박을 소개해 줍니다. 도박에 관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주제이지요.

목차는 크게 9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개인적으로는 "윷놀이", 조선을 주름잡았던 "쌍륙"과 "투전"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도박들에 비하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될 뿐더러,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백제인의 저포, 윷놀이의 조상인가"에서 소개되는 윷놀이는 중국의 저포에 가깝지만 한국에 특화되어 토착화된 것이라는 기원에서부터, 윷놀이판이 하늘의 천체를 상징하며 말이 가는 길은 해가 가는 길로 비유된다는 것, 도개걸윷모의 확률 - 윗면이 곡면이라 확률은 평면 대 곡면이 6:4,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걸-개-윷-도-모 순으로 나오게 됨 -, 윷사위 이름의 유래 - 도: 돼지, 개: 개, 윷: 소, 모: 말, 걸은 다양한 이론 존재 - 등 내용 모두가 흥미로웠습니다.

"양반과 기생, 쌍륙판에서 내기를 벌이다"와 "조선 후기의 투전, 도박의 전성시대를 열다"에서 소개되는 쌍륙과 투전은 고전 소설이나 근대 개화기를 다룬 미시사 서적에서 접했었지만 정체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에 어떤 것인지를 도판과 함께 설명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투전 - 짓고땡과 거의 동일! - 에 비하면 쌍륙은 소개된 내용 정도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가려운 데는 충분히 긁어주었습니다.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가 여진족과 쌍륙 승부를 할 때 원하는 숫자가 나오도록 조작한 주사위로 야바위를 쳐서 이겼다는 고사와 같이 사료로 확인되는 관련 일화들도 자주 등장하여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어지는 식민지 시기 화투 이야기도 상세합니다. 매국노 이지용의 도박 중독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접했었지만, 당시 '골패 세령'이라는 것이 제정되었다는 등 새로운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록 내용 모두가 기대에 값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안압지 출토 주사위를 가지고 풀어나가는 "신라의 귀족, 주사위 놀이로 밤을 지새다"는 근거부터가 도박과는 거리가 있어서 주제에 걸맞지 않습니다. 고려시대의 격구를 스포츠 도박이라고 장황하게 소개하는 "고려시대의 격구는 스포츠 도박이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격구가 도박일 수는 있지만 "스포츠"에 더 가까운 것인데 비약이 너무 심했어요. 현대 이후 고스톱을 다룬 부분 역시 관심사와 다를 뿐더러 내용도 특별하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울러 저자가 연구자일 뿐 도박과는 거리가 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앞서 말씀드렸듯 소개되는 도박의 "방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아쉽습니다. 뭐, 비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묘수 정도는 소개해 주는 것이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 최초의 도박사(史)라는 점에서 의의를 둘 만하지만 내용의 깊이가 아주 깊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도판 및 책의 장정, 디자인은 그냥 무난한 수준이고요.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출판사가 "살림 지식 총서"로 유명한 살림출판사인데, 흥미로웠던 주제(윷놀이, 투전과 쌍륙)를 살림 지식 총서처럼 분권으로 출간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