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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4/09/29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이광연 : 별점 2.5점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6점
이광연 지음/한국문학사

인문학이 문학이나 철학 등 문과 계열 뿐 아니라 수학이나 건축 등 이과 계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청소년용 교양서. 수학이 인간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학문이라는걸 여러가지 알기 쉬운 예제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딸 아이 논술 교재라서 겸사겸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중 수학 공부와 건축의 원리가 같다는 주장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건물을 설계하는게 책의 목차라는 주장이요. 수학책에서 목차를 보면 앞으로 공부할 내용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릴 수 있고, 목차를 알면 이미 50%를 알고 들어간다는데 수학책에서 목차가 중요하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 목차를 좀 더 꼼꼼히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어요.
또 기둥이 튼튼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데, 수학에서의 기둥은 기하와 대수이며 기하와 대수는 3,000년 전 고대 수학부터 통합되어 있었다는 주장과 매듭이론에 대한 쉬운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왜 필요한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딸은 음악에 대한 설명을 좋아하더군요. 그 중에서도 피타고라스가 음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요. 저는 피보나치수는 장음정 6도와 단음정 6도로 귀로 들어도 아름답다는게 기억에 남습니다. 유튜브로 한 번 찾아보니 과연 그러하네요.
또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다양하게 피보나치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악절을 황금비로 나누는 건데, 이건 과연 무슨 효과가 있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주식 시장의 엘리엇 파동 원리가 피보나치 수열이고, 블랙 숄즈 방정식은 확률 미적분 이론을 이용해 파생상품 옵션의 가격을 계산한 모델이라는걸 설명해 주는 부분에서는, 가난한 수학자가 이세계에 환생한 뒤, 그곳의 시장 경제를 가지고 노는 환생물이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용(드래곤)을 파는 시장을 지배해서 수학자가 용왕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영화를 가지고 수학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설국열차 등을 예로 드는데, 이 중에서 바이러스 감염률 한계 이론에는 놀랐습니다. 100만 명으로 모수가 늘어나면, 정밀도 99%의 검사라도 무려 9,999 명이 잘못 판단된다는데 여태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에요.
그 외에도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직선보다 훨씬 빠르게 특정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어서 겅사면에는 사이클로이드를 적용한다, 동물들, 독수리나 매도 땅 위에 있는 사냥감을 잡을 때 사이클로이드에 가깝게 목표물을 향해 곡선 비행을 한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전형적인 황금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금강비(5:7)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서양인보다 상대적으로 동양인이 키가 작아서 황금비보다 작은 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자 모양에서 중국에서 결승법 - 끈을 묶어 수를 표시하는 방법 - 을 썼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지만 뒷부분 이야기는 억지가 심해서 아쉬웠습니다. 대표적인건 삼국지 속 계륵이 암호이며, 이건 수학이는 주장입니다. 암호가 수학일 수는 있지만, 계륵은 수학과는 관련이 없는 심리적인 말장난에 가까우니까요. 또 그 뒤에 이어지는 암호에 대한 이야기는 수학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다른 책에서 지겹게 많이 접혔던 내용이 대부분이라 실망스러웠어요.
김삿갓, 이순신과 조선 수군 이야기도 수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수군에 훈도라는 수군직급이 있고 그들이 각종 계산을 담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수학자라는 말도 안되지요. 지금 육군의 관측병들이 모두 수학자인가요? 마방진 이야기도 분량에 비하면 별다른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 그리는 얘기도 황금비라든가 외상 예술 같은 건 뻔하고 대단한 수학적인 이론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카르타고를 세웠다는 디도의 문제라던가, 달리의 4차원 그림 같이 그림의 주제가 된 수학 문제를 설명하는게 훨씬 좋았습니다.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있어야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건질 내용이 없는건 아닙니다. 몇몇 주장은 와 닿기도 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학에 대해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2024/07/14

Q.E.D iff 증명종료 2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24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일상계, 다른 한 편에는 강력 범죄가 등장한다는 것도 언제나와 같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했고, 설명과 설득력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Q.E.D의 또다른 특징인 정보 전달 측면으로는, '내시 균형'은 잘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점수를 주는 부분 등 설명이 완벽하지는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권이 워낙 좋아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요새 몇몇 추리 만화 신예들이 눈에 뜨이는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모쪼록 다음 권에서는 폼을 좀 회복해 주기를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시 균형과 구기대회"
사키사카 고교에서 반 대항 구기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운동부 연습과 겹쳐 혼란이 일어났다. 그 뒤 운동부 비품을 누군가 망가트리고, 구기대회 실행위원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수수께끼의 가면을 쓴 괴인은 마지막 순간에 가나 등의 앞에서 허공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데....

제목에서처럼 '내시 균형'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운동부와 학교(구기 대회)측 대립을 내시 균형으로 풀어내는건 재미있었습니다.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학교는 구기 대회를 실행하고, 운동부는 연습장을 넘겨주는 상황에서 내시 균형이 출현한다.
  • 학교는 수고와 트러블이 늘고 운동부는 연습장을 쓰지 못해 양쪽 모두에게 손해이다.
이와는 별개로, 토마의 농구 시합 출전에 대한 내시 균형의 이득 행렬 설명을 통해, 사람의 감정은 계산할 수 없다는걸 드러내는 묘사도 좋았습니다.
가면을 쓴 괴인이 사라지게 한 간단한 트릭도 괜찮았어요. 만화적이기는 한데, 한 번 정도는 잘 써먹을 수 있었다 싶거든요. 현장의 자전거 바퀴 자국같은 증거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의 추리는 비약이 심합니다. 양쪽 모두 손해인데 왜 구기 대회를 실행했는지에 대해서 갑자기 야구부 감독이 술에 취해 이야기했을거라는건 근거가 부족합니다. 연습장 사용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진 장면에서 토마는 함께 있지도 않았고요. 감독이 이때다 싶어 안 쓰는 비품을 부수고 예산을 타낸건 분명한 범죄인데, 가볍게 넘어간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번역 문제인지 운동부와 학교 측 이득 행렬 부분이 조금 어렵게 설명되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점수 배정이 토마 마음대로라 공정하지 못한데, 이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7개의 사실"
A건설은 지체되고 있는 프로젝트 성사를 위해 컨설턴트 마루모리 유나를 고용했다. 그녀는 거물 의원에게 5천만엔을 몰래 준다는 계획을 내 놓았다. 그러나 비자금이 신문지로 바꿔치기된 후, A건설 사원 미야지는 살해당했다. 또 다른 사원 쥬몬지도 공격받아 결박된 상태였다.
계획의 핵심 인물 미노 부장과 장서 거래로 엮인 토마와 가나는 사장의 부탁으로 진상 조사에 나섰다.

토마가 사건의 핵심인 7개의 사실을 나열한 뒤, 이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며 선보이는 추리쇼는 깔끔했습니다.

하지만 전개 과정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처음에 유나가 쥬몬지를 만나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 이유부터 석연치 않습니다. 계획이 탄로나면 누군가 감옥에 가야 하는데, 좋은 대학을 나온 쥬몬지가 적합했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유나의 신분을 알고 쥬몬지가 먼저 접근했다는 것도 방법이나 과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고요. 어리숙해보였던 쥬몬지 캐릭터가 갑자기 돈을 훔치고 동료를 죽이는 흉악범으로 돌변한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쥬몬지가 미야지를 살해한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쥬몬지가 돈을 훔친걸 알아서 협박했기 때문에 죽였다? 어차피 비자금이니 돈을 주고 공범으로 만드는게 이상한 살인극을 벌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사건 당시, 미노 부장의 차가 딱 맞게 도착해서, 그 앞에 뛰어들었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유나는 창고로 오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수상하게 여겨 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장이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만약 부장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토마의 추리가 맞다고 한들, 증거가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미야지가 죽은걸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미리 알고 소리쳤다는건 정황 증거에 불과합니다. 불려나간 창고에서 미야지가 먼저 공격받은걸 보았다고 주장했다면, 범행을 입증하는건 불가능했을 거에요.

마지막으로 수학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대신 특이하게도 존 스타인벡의 작품인 "생쥐와 인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과도 별 관계가 없고요. 쥬몬지 캐릭터를 본다면 "생쥐와 인간"이 아니라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 쪽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4/07/05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정재승 : 별점 3.5점

일상과 과학 이론을 연결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책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수학에 관련된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수학은 물론, 작가의 전공 분야인 물리학에다가 심리학, 건축학 등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예시와 쉬운 설명을 통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게 해 준다는 특징도 있고요. 토스트를 떨어트렸을 때 버터를 바른 면이 바닥에 떨어지는건 토스트가 한 바퀴를 회전할 만큼 지구의 중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운터에 줄을 섰을 때 다른 줄이 먼저 줄어드는 이유는 1/n이므로 어떤 줄을 선택하든 다른 줄 중 하나가 먼저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으로 머피의 범칙은 실제로 존재하며, 이건 재수의 문제가 아니라는걸 알려주는 식입니다.

지프의 법칙과 파레토의 법칙을 통해 실제 우리 생활에 멱법칙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얻으려는 인간 본성과도 관련이 있다는데 꽤 그럴듯했어요. '진부하다는건 남들도 많이 썼다는 뜻인데, 남들이 많이 썼다는건 그만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는 제가 일하는 바닥(?) 격언과도 일맥상통하는게 아닐까 싶네요.

추리 애호가로서는 O.J.심슨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피해자 측이 평소 O.J. 심슨이 아내를 때리고 폭언을 일삼았다고 하자, 심슨의 변호사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아내 중 남편에 의해 살해된 경우는 0.1퍼센트도 안된다는 통계를 바탕으로 심슨이 아내를 때린건 아내를 살해했을 가능성과 별 관계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심슨 사건에서는 실제로 아내가 죽었습니다. 매 맞던 아내가 죽었을 때 평소 그녀를 때리던 남편이 범인일 확률은 80%가 넘고요. 전형적인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건축과 인간 심리를 연결하여 파헤친 쇼핑의 과학이라던가, 소음과 뇌파에 대한 이야기들 등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천장이 높은 건물에서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는 이론도 기억해 둘 만 하겠더라고요. 천장이 끝없이 높게 만들어진 오래전 교회 건축물에서 영적 체험이 잦은 이유도 비슷한 이유가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내용 모두가 이해하기 쉬웠던건 아니었으며,  몬티홀 문제, 잭슨 폴록의 그림은 그냥 물감을 뿌린게 아니라 정교한 자연의 패턴(카오스)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 이야기 등은 다른 책들에서 많이 다뤄진 내용들이라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왜 버스는 한꺼번에 오는걸까?"와 똑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프랙털 음악으로 히트곡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QR코드를 활용하여 직접 샘플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장기간 사랑받는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유사한 다른 책들과 비교해도 그 수준이 결코 뒤쳐지지 않는데, 해외에 번역 출간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05/11

우리 미술 이야기 2 : 영원한 현재 - 고려 - 최경원 : 별점 2.5점


우리 문화 유산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그리고 알아두면 좋을 이런저런 내용을 소개해 주는 책. 저자의 "한류 미학 1"을 재미있게 읽어서 뒤이어 읽게 된 후속 권입니다. 절판 후 재출간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네요.

2권은 고려 청자 중심으로 고려 문화 예술만 소개하고 있는데, '고려의 청자를 비롯한 문화 예술품은 '대량 생산'되었기에 '디자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장인이 모든 것을 다하는게 '공예', 산업 혁명 이후 기계적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품 형태를 고안하는 일이 '디자인'인데, 국가 주도로 대량 생산된 청자는 '디자인'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표준화' 경향으로 증명된다며 대체로 유사한 청자의 형태 등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꽤 그럴듯 했습니다. 디자인에 의한 대량 생산품의 우수함은 문화의 우수함을 증명한다는 주장도 아주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고요.

다양한 청자를 가지고 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설명해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도입부의 '청자의 색' 설명부터 눈길을 끕니다. 고려 청자의 다소 칙칙한 색이 찬양되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데, 고려청자는 '옥'의 색을 겨냥해 만들어진, '비취' 색이었기 때문입니. 옥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석 중의 보석으로,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옥의 색과 질감을 유사하게 재현했었지만 고려 청자가 진짜 비취색을 구현해서 당대의 명물이 되었다고 하네요.

명품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게 해 주는 여러가지 발견과 정보도 볼 만 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스케치를 통해 그림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도판도 매력적이고요. 아래와같이 돋을새김 상감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사진으로는 그 형태를 온전히 보기 어려운데, 스케치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3차원적 형태에 잘 어울리도록 그려지고, 이어진 형태로 감상해야 하는 그림이 많아서 전체를 돌려가며 보아야 된다는 착안도 좋았습니다. 이런건 박물관에서도 전시 시에 활용해주면 참 좋을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천천히 돌려서 전시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자만의 주장도 눈길을 끄는게 많은데, 그 중 두 가지가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는 황금 비례는 수학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시대의 정신적 습관으로 만들어진 결과로 특정한 하나의 양식이자 독특한 미적 가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황금 비례가 많이 사용되는건 사람의 눈의 구조가 똑같고, 보편적인 감정이 있어서 대체로 2:3이나 3:4 정도의 비례를 좋다고 느끼기에 그런 조형 결과물들이 많은 것 뿐이라서 특별히 대단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청자를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은 문화가 낙후된게 아니라는 일련의 주장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을 문화 퇴행기로 보는 건 일제 강점기 시기 총독부 소속의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문신들은 삼강오륜을 앞세운 근엄한 도덕적 생활을 해서 정서가 발달하지 못했고, 경제력도 보잘것 없어서 미술이나 미적 감각을 발전시킬 힘과 여유가 없었다는 김원룡의 시각도 마찬가지로 악의적 편견인 것이지요. 저자는 조선의 경향은 조형 예술 역사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추상'이라는 개념의 경향일 뿐이라며, 이를 맨 마지막에 소개된 '은진미륵'을 통해 설명해줍니다. 은진미륵은 세계에 관한 관심이 달라진 데에 따라 만들어진 새로운 미적 감각의 표현으로, 인자한 보살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단순화시킨 조형으로 특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걸 여러가지 분석으로 알려주거든요. 이러한 경향이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테고요. 또한 청자가 만들어지지 않은건 옥의 모조품이라는 목표가 더 이상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장은 재미는 있는데 완벽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황금비례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이론화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은진미륵에서도 추상성에 따른 아름다움은 솔직히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예가 좀 잘못된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외에도 많은 아름다운 유물을 보는건 좋았지만 청자가 대부분이고, 내용도 비슷한게 많아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청자의 형태가 유기적으로 이는 최신 디자인 경향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반복되는 탓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문헌, 사료적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문헌을 분석하는 것 보다 유물 자체를 관찰하고 추론하는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추론을 문헌을 통해 뒷받침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 주는게 보기가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 중심으로 분량을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4/05/05

우리 역사 속 수학 이야기 - 이장주 : 별점 2점

우리 역사 속 수학 이야기 - 4점
이장주 지음/사람의무늬

제목 그대로 우리 역사 속 수학에 대해 소개해주는 수학사 서적. 조선 이후 역사 속 유명 수학자를 소개하는 1부와 삼국시대부터 수학을 통해 이루어진 여러가지 성취를 알려주는 2부 구성입니다. 이를 통해 서양 중심의 수학사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도 옛부터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는걸 알려줍니다.

1부는 세종대왕이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실제로 수학 서적을 펴내거나 수학 관련 활동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역관 등 중인 계층이 수학을 공부했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세종이 공자의 말을 빌어 수학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수학적인 사고가 위대한 사상과 발명의 큰 축이자 기초이니, 위대한 발명가가 수학자이기도 했다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헤이그 밀사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수학자이기도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구한말에서 개화기에 이르는 시기에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수학 교육과 보급에 노력했다는건, 그가 얼마나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지요. 확실히 당대 조선 제일의 천재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나 봅니다.
2부는 우리나라의 문화 유산과 여러가지 문헌을 통해 우리 수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알려주며, 문헌에 소개된 문제들을 현대적으로 풀어 소개해줍니다. 덕분에 함께 따라 푸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죠.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신라 포석정의 주사위 주령구에요. 6개의 사각형 면과 8개의 육각형 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로, 굴려서 나온 벌칙을 따라 해야 한다는건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두 종류 이상의 정다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꼭짓점에 모인 면의 배치가 서로 같은 준정다면체'로 각 면의 넓이가 모두 동일하다고 합니다! 주사위는 모든 면의 확률이 공평해야 하지만, 애써 14개의 면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텐데 이를 적용한 주사위를 놀이기구로 썼다는건 신라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일 겁니다. 지금도 이를 손으로 만드는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조선 시대 수학 서적을 통해, 당시에 어떻게 방정식과 제곱근을 푸는지를 알려주는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이치에 맞게 풀도록 되어 있더라고요. 이런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도판도 충실합니다. 청소년용 도서답게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2부에서 문체가 들쭉날쭉한건 아쉬웠습니다. 3인칭으로 '소개'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1인칭으로 강의하듯 문체가 바뀌는 부분이 있는데 거슬렸어요. 계속 출간되려면 교정이 필요해보입니다.
역사 속 수학을 바라보기에는 내용 구성이 부실하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신라 이야기 약간 외에는 전부 조선의 이야기라면 '우리 역사 속'이라고 말하기는 다소 애매하잖아요? 그나마도 뒤로 가면 갈 수록 역사 속 수학 소개보다는 수학 문제 풀이의 비중이 높아지고요.

그래도 청소년들이 가볍게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책이라고는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3/12

여태까지 잘못 셌습니다. 정확하게는 1,212번째!

이전에 이런 글을 올렸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잘못셌더군요. "브라운신부 전집"의 "의심", "비밀", "스캔들"처럼 분명 다른 책인데 한 번에 리뷰를 올려서 같은 책으로 카운트 한 것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긴 장편이 분권되어 있는건 한 권으로 치고, 같은 책을 두 번 읽은 경우는 출판사가 다르면 카운트를 했지만 아예 똑같은 책은 카운트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준으로는 얼마전 올렸던 "10호실"은 오른쪽 카테고리 글에는 1,206번째 글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212번째 새롭게 읽은 책이 됩니다. 100번째부터 1,200번째까지 새로 읽고 리뷰를 올린 책들은 아래와 같고요.

100 :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2004.10.07)
200 : "여류 조각가" (2005.09.05)
300 : "사신 치바" (2008.02.28)
400 :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2009.11.25)
500 : "호수 살인자" (2011.02.19)
600 : "손 안의 작은 새" (2013.05.17)
700 : "살인을 부르는 수학 공식" (2015.03.02)
800 : "네버 고 백" (2017.02.17)
900 :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2019.06.21)
1,000 : "완전 범죄 연구" (2020.11.15)
1,100 : "심야의 손님" (2022.06.25)
1,200 : "스파이와 배신자" (2024.02.24)

숫자를 바로잡은만큼, 앞으로는 카운트를 잘 해가면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24/03/01

원티드 맨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원티드 맨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네브래스카 시골 마을 펌프장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2인조 범인들은 마을 술집에서 일하는 카렌을 납치하고, 그녀의 차를 타고 도주했다. 하지만 2인조라는게 들통났기 때문에, 인원수를 속이고자 히치하이커 한 명을 태웠다. 그 히치하이커는 잭 리처였다. 맥퀸과 킹에게 수상함을 느낀 잭 리처는 어떻게든 카렌을 구하려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둘이 카렌과 함께 떠나는걸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FBI 수사관 줄리아 소렌슨을 만난 잭 리처는 그녀의 차를 타고 뒤를 쫓다가 불에 탄 카렌의 차와 변사체를 발견했다. 줄리아에게 수사를 중지하라는 기묘한 상관의 압박이 들어오는 와중에, 카렌의 딸마저 유괴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FBI에 이끌려 그들의 은신처로 향한 잭 리처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카렌과 만났다. 카렌의 정체는 테러 조직 '와디아'에 잠입한 FBI 수사관 맥퀸을 지원하기 위한 또다른 FBI요원이었다. 그녀를 덥치려던 킹을 죽이고 불태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탓에 맥퀸의 정체가 드러났고, 최소 8시간 이상은 걸릴 SWAT 팀을 기다리지 못한 리처, 줄리아, 카렌은 맥퀸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잭 리처 시리즈 16번째 작품. 작품은 14번째 작품인 "악의 사슬"에서 이어집니다. 15번째 작품인 "하드웨이"는 리처가 아직 군대에서 복무 중일 때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지요.

한 때 유행했던 잠입 수사관이 등장하며, FBI 수사관 시점에서 수사가 이루어지는 범죄 수사극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히치하이킹으로 얻어탄 차의 3인조가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초반부터 잭 리처의 관찰력과 추리력이 잘 드러납니다. 그들이 똑같이 맞춰입은 셔츠는 자세히 보니 기업체 유니폼이 아니었고, 킹이 떠벌인 말과 다른 여러가지 오류들 - 3시간 동안 쉬지않고 달려왔지만 연료는 별로 줄지 않았다, 아무도 기름을 넣을 때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 이 대화 중에 속속 드러나며, 심지어 킹은 멤버인 카렌의 커피 취향마저 모르는 등 수상한 단서들이 계속 제시되거든요. 리처가 드러난 단서를 조합하여 내 놓는 추리들도 모두 합리적입니다.
범인들이 남긴 정보를 가지고 소렌슨에게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범인들은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며,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벌어졌다는 추리로 이어지며 이는 모두 사실로 밝혀집니다. 카렌의 딸을 왜 유괴했을까?라는 의문을 풀어나가는 '와이더닛' 방식 추리를 펼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1030" 리뷰에서 문제로 지적했었던 부분인데 말이죠. 참고로 납치한 이유는 카렌에게 딸을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카렌을 '은신처'로 옮길 때 그녀가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리처의 특기인 수학도 잘 활용됩니다. "지나쳤던 삼거리와 사거리의 비율은 2대 3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평균 13킬로미터였다. 땅딸보의 차에 남아 있는 기름으로는 대략 1시간을 달릴 수 있다. 따라서 그 1시간을 달린 뒤에도 리처가 킹과 맥퀸의 도주로를 그대로 쫓아가고 있을 확률은 약 650분의 1이었다."처럼 범인들을 제대로 쫓아갈 수 있는 확률을 순식간에 계산하는 식으로요.

'와디아' 조직이 일종의 뒷세계 은행으로, 핵 폐기물 본위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는 참신했고, 조직의 근거지인 구 미사일 격납고 설정과 묘사도 탄탄합니다. "메탈기어"스러운 잠입 액션물 분위기도 잘 살리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 잭 리처가 맨손보다는 콜트 자동소총, 글록 19와 17등 총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것도 이채로왔습니다. 이는 "사라진 내일"과 유사한데, 아무래도 대형 테러 조직이 상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악의 사슬"바로 다음 작품이라 코뼈가 부러진 채로 이동하는, 그리고 코뼈가 부러진게 굉장히 강조되는 묘사도 반가왔습니다. 시리즈 팬이라면 이런 디테일들은 즐거울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에서 스테일이 커지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다. 핵 폐기물을 보유한 테러 조직이 미국 캔사스 시골 농장지대에서 암약한다는건 비현실적에요. 최초 피해자가 CIA 지부장급 요원인데, 알고보니 CIA에 잠입한 와디아의 고정간첩이었다던가, 알고보니 카렌이 캔자스시티 지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FBI 본부 출신 잠입 요원이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러웠고요.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펌프장에서 맥퀸과 킹이 자기들 차를 타고 오지 않은 이유 등 세세한 디테일들은 설명되지 않거든요. 펌프장에서 피해자가 맥퀸을 공격했던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맥퀸의 정체(잠입 수사 요원)을 알아챘다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맥퀸을 죽일 이유는 없었거든요. 본부로 돌아가 죽이는게 맞지요. 우리편이 훨씬 많으니...
맥퀸의 수사가 이렇게 이어져야 했을 까닭 역시 모르겠습니다. 맥퀸의 GPS 정보만 보아도 테러범들의 본거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 진작에 타격해서 섬멸하지 않은걸까요? 맥퀸이 사로잡힐 때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우리 쪽 '좋은 사람' 들이 죽어나가는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착한 시골 마을 보안관인 굿맨의 죽음이야 그렇다쳐도, 줄리아 소렌슨이 저격총에 맞아 사망한다는건 황당했어요. 리처의 분노에 불을 붙여 홀로 테러리스트들을 섬멸한다는 이야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이런 설정 없이도 리처라면 충분히 혼자서 쳐들어가 악을 물리치고 맥퀸을 구해냈을 겁니다. 지나친 흥미 본위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와디아 조직이 줄리아를 저격해서 죽였다면, 당연히 경계 태세를 강화했어야 했는데 이를 대충 퉁치고 넘어가는 전개도 어설퍼 보였고요.
마지막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카렌이 등장하여 리처를 구해준다는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차 주인이 알고보니 살인범'이라는 설정을 살린 수사물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24/01/13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톰 앵글버거, 폴 델린저 / 김영란 : 별점 3점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6점
톰 앵글버거.폴 델린저 지음, 김영란 옮김/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맥스가 다니는 뱅가드 중학교에 로봇 퍼지가 등교하게 되었다. 퍼지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로봇 통합 프로그램(RIP)의 핵심으로, 기술적 기반인 퍼지 논리를 발전, 완성시키기 위해 학교에 보내진 것이었다. 하지만 퍼지는 등교 첫날부터 시끌벅적한 복도를 걷다가 먹통이 되고 말았다. 연구팀은 퍼지를 완성시키기 위해 맥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맥스의 도움과 퍼지 스스로의 프로그래밍으로 퍼지는 진짜 '인간'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뱅가드 중학교를 철저히 관리하는 인공지능 바바라 교감은 맥스를 퇴학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맥스가 장래 학업을 방해하는 위험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게 된 퍼지는 맥스를 돕기 위해 자신의 전력을 다한다....


딸 아이의 논술학교 교재입니다. 별 기대없이 읽어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인공 지능의 발전과 '인간성'이 어떻게 비롯되는지, 그리고 인공지능에 '인간성'이 타당한지 등의 심각한 주제들을 인공지능 두 개를 통해 이야기로 잘 풀어나간 덕분입니다.
인공지능의 하나는 바바라, 또 하나는 퍼지인데 바바라는 일체의 오류를 허락하지 않는 수학적인 연산 기계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결론에 맞게 상황을 조작까지 하지요. 이로써 인간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기계는 전형적인 흑백논리에 의해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반면 퍼지는 오류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성장해나가면서 점차 인간적인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즉, 사람은 실수를 하지만 이를 통해 성장하며 어른이 된다는걸 퍼지를 빌어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고요. 반면 인간성은 인공지능, 로봇으로서는 필요한건 아니었기에, 인간의 명령을 듣지 않는 문제도 일으킵니다. 
이렇게 어느 쪽이 옳다는걸 확실히 알려주지는 않는 것과 이러한 퍼지의 반항(?)이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어지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잘 짜여진 느낌이에요. 인간성을 갖춘 퍼지보다는, 말 그대로 주어진 명령에 충실한 바바라야말로 훨씬 군대에 적합한 인공지능임에는 분명하기도 하고요.

바바라가 학업 성과를 올리기 위해 중학교 아이들을 통제 대상으로 삼는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덕분입니다. 
퍼지가 함정에 빠진 맥스를 돕기위해 벌이는 여러가지 활약, 맥스와 친구들의 활약이 그럴듯해서 모험 소설로도 괜찮습니다.

물론 '퍼지 이론'은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이론이기는 합니다. 냉정한 전자 계산기같은 기계와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의 대결도 친숙한 소재이며, 로봇이 학교를 통제하는 것 역시 "폭력 교실 1999"가 바로 떠오를 정도라 신선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국 회사임이 분명한 로봇 회사 순쭈사의 산업 스파이는 등장하지 않는게 좋다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설정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끔찍한 표지 일러스트와 유치한 제목은 최악입니다. 원제 (Fuzzy)를 살리고 보다 고급스럽게 디자인을 바꾸는게 높을거에요. 요새는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좋은 디자인이 뭔지 잘 아는 시대이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3/12/01

아홉살 인생 - 위기철 : 별점 2점

아홉살 인생 - 4점
위기철 지음/현북스

아주 유명한 성장 소설로 제 어린 시절 이런 류 책 대명사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였는데, 이 책도 지금의 위치는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또 최근에는 변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딸 아이 논술 교재용으로 구입했는데, 겸사겸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달동네'라고 불리웠던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거리를 무대로 아홉살 인섭이의 파란만장한 아홉살을 그리는데 긴 흐름의 이야기가 있다기보다는, 여러가지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빼어난 묘사입니다. 조금 덜 떨어진 친구 신기종을 비롯한 여러 캐릭터들과 대사들은 물론이고 당대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디테일이 아주 빼어납니다.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이는 모두 61년생 작가의 추억이 그대로 투영된 덕분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흔해빠진 '가난하고 팍팍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의 전형을 답습하는 탓입니다. 동네 악동들과의 다툼, 호감을 제대로 표시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사랑과 우정(?), 학교에서의 일화, 동네 사람들과 이리저리 얽히며 벌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대부분이 새롭거나 신선한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어요. 일본 학원물의 학원제, 체육대회, 시험 공부, 조리 실습, 발렌타인 데이, 수학 여행 에피소드의 반복과 다를게 없다 느껴졌어요. 주인공이 나름 화목한 가정에 속해 있으며, 이런 류의 성장기에서 주인공의 걸림돌 역할이 많았던 아버지가 굉장히 선하고 여러모로 능력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게 과연 교육적으로 적절한지?도 솔직히 의문입니다. 지금도 기본적인걸 누리며 사는게 힘든 사람들이 많으며, 과거에는 더 많고 더 힘들었다는걸 아이에게 알려주는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책처럼 적나라한 묘사가 필요한지는 의문이에요. 야만의 시대를 어려웠지만 정이 넘쳤다는 식으로 포장할 수는 없으며, 이런 묘사야말로 이런 류의 책에서 핵심 요소이기는 할겁니다. 허나 찢어질듯한 가난과 아이들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 묘사, 욕설 등이 너무 실감나는 탓에, 오히려 아이에게 읽히고 싶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나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잘 모르겠네요. 차라리 오래전 "쌍무지개 뜨는 언덕" 같은 작품이 더 낫지 싶습니다.

2023/11/29

Q.E.D Iff 증명종료 21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1점

Q.E.D Iff 증명종료 21 - 2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신작이 나온지 모르고 있었는데 뒤늦게 찾아 읽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졸작이었습니다. 20권이 간만에 높은 수준을 보여줬기에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수록작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디오판토스 방정식"
이즈미 코타는 수학 올림피아드 강화 학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토마와 가나를 만났다. 토마 덕분에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인연이 있었다...

수학 올림피아드 학습 중 일어났던, 합숙생 호즈미가 사유지 건물 옥상에서 사라진 방법을 해결하는 일상계 단편. 
이외에도 합숙 멤버들 책상에 놓여있던 인형의 정체, 그리고 아래의 상황에서 학생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와 마지막의 논리 퍼즐같은 소소한 수수께끼도 등장합니다.
호즈미 소실과 인형들, 논리 퍼즐은 모두 강사 세키의 계획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학생들이 단순히 수학 문제를 푸는 기계가 아니라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에 도전하고, 미지의 황야를 나아가기를 바랐는데, 그 때 불안과 고독을 느끼고 패닉에 빠질지도 몰라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호즈미는 세키의 제자로 계획에 참여한 공범(?)이었고요.

그런데 '문제를 잘 읽는게 중요하다'는걸 알려주기 위해 인형들을 사용한 것 정도는 그럴싸했지만 (인형에 표기된 글자는 모두 오자였다), 일상 속 불가능 범죄를 푸는게 수학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사유지 건물 옥상 트릭은 일종의 숨바꼭질(?)에 불과한 트릭이라서 수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요.

마지막의 디오판토스 방적식을 푸는 과정과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기쁨을 표현한 부분만 '학습 만화'로 약간의 가치가 있을 뿐,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망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사후의 편지"
폭력단 코단 조직의 말단 조직원 사사메 켄토가 밀실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용의자 와타보시는 투자회사 사장 마다라 에츠코의 사기 피해자로, 마다라 에츠코가 코단 조직을 이용해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사메의 애인 사키의 집에 조직원들이 쳐들어와 켄토가 남긴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조직은 켄토가 조직이 시킨 어떤 일의 증거를 남겼다고 여겼다. 사키와 안면을 튼 토마 덕분에 진상이 밝혀지는데....


켄토는 사키의 아이에게 마술을 보여주겠다며 조각이 들어있지 않은 빈 만화경을 샀었습니다. 그리고 켄토 사후에 사키에게 빈 봉투의 편지를 보냈고요. 트릭은 이 두가지를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빈 만화경으로 봉투를 보면, 봉투에 붙여놓았던 종이의 무늬가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무늬는 켄토가 사키에게 선물했던 지갑을 의미하는데, 지갑 안에는 SD 카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럼 SD카드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을까요? 켄토가 보스 시모아라메의 지시로 와타보시를 죽이려고 잠입했다면 (그리고 역으로 살해당했다면) 이에 대한 증거를 남겼을리 없습니다. 자기 범죄를 증명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토마는 "켄토는 시모아라메의 지시로 와타보시 집에 잠입해서 자살했으며, SD 카드의 내용은 그것을 증명한다"고 추리했으며, 그게 정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SD카드를 숨긴 곳을 알리는 만화경 트릭부터 실망스럽습니다. 만화경으로 빈 봉투를 들여다본다는걸 누가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런건 단서도 뭐도 아닙니다. 대단한 곳에 숨긴 것도 아니고, 지갑안에 숨겼을 뿐인데 암호를 남긴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발견되었을테니까요.
밀실 살인이 아니라 밀실 살인을 위장한 자살이라는 아이디어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일개 조직 폭력배 조직원이 보스가 자살하라고 했다고 선뜻 자살한다?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카리스마가 있는 보스라면 이미 일본을 제패했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그나마 추리 요소가 있을 뿐, 전작과 다름없는 망작이었습니다.

2023/11/26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고미네 하지메 / 민경욱 : 별점 2점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4점
고미네 하지메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설회사 대표 시바모토 겐지로의 딸 미유키가 임신 중절 수술 후유증으로 죽은 뒤, 아이 아빠 후보로 의심받던 야규는 친구 나이토의 도시락을 먹고 입원했다. 도시락에 비소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야규의 누나 미사코의 불륜 상대 가메이가 실종된 뒤, 야규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야규의 어머니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했지만, 노무라 형사는 야규의 알리바이를 깨버리고 진상을 밝혀내었다. 모든 사건은 엔메이, 야규, 나이토, 아라키 네 명이 결성한 아르키메데스 모임의 의도였다....

1973년 제 9회 란포상 수상작. 올해 일본 작품을 너무 많이 읽어서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지만, 란포상 수상작 완독 달성을 위해 읽게 되었네요.

야규가 가메이를 살해한 날, 수학 여행을 갔다는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습니다. 배에서는 정확하게 학생들을 확인하지 않고 사람수만 센다는 맹점을 이용한 겁니다. 일행은 야규대신 다른 학교 학생을 대신 세도록 만들었고, 배 안에서는 "야규와 함께 있었다"라고 엔메이가 거짓으로 증언해서 함께 탄 것으로 위장했지요. 간단하지만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트릭이었습니다.
야규가 살인범인지, 어머니가 살인범인지를 놓고 벌이는 마지막의 취조 과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손으로 목을 졸랐다는 야규의 증언과 실제 사체의 교살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잘 풀어냈습니다. 가메이가 죽은 줄 알고 시체를 파묻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걸 알고 어머니가 확실하게 목을 졸랐던 거지요.

그런데 그 외에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사건을 저지르는 주체인 "아르키메데스 모임" 부터가 전혀 와 닿지가 않아요. 이들이 주변의 부정을 벌한다고 계획한 것들 모두 정의로움을 느낄 여지가 없는 탓입니다. 임신중절 수술로 미유키가 죽은 사건만 놓고 보아도 그러합니다.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심지어 멤버 중 한 명인 나이토의 아이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를 어른에 대해 복수에 성공했다며 희희낙락하고, 이를 꾸짖는 어른에게 한 마디도 지지않고 맞선다? 어이가 없어요. 자괴감과 미안함에 몸부림치며 사죄해도 부족합니다. 나이토가 미유키가 죽은 뒤에도 아르키메데스 모임 멤버들과 우정을 이어나간건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아예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또 미유키를 임신시킨건 겐지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는 겐지로가 지은 건물이 일조권을 빼앗아 나이토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복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토의 할머니의 사망이 일조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겐지로 역시 그냥 건물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분명 정당한 보상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뭘 잘못해서 딸을 잃기까지 했어야 했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미유키를 질투한 엔메이의 치정이 결합된 치졸한 행동이 원인이었습니다. 정의와는 별 관계도 없는 셈이지요.
 
야규가 저지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연히 불륜을 저지르는 가메이같은 인간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불륜은 야규의 누나가 함께 저지른 겁니다. 왜 남자만 단죄하겠다는 걸까요? 그리고 단죄가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수학여행을 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갔다고 누나만 속여도 충분했으니까요. 즉, 이렇게까지 치밀한 알리바이를 만든건, 단지 혼을 내주려던게 아니라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며, 이는 파렴치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다는 아르키메데스 모임의 취지를 거스르기에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1급 살인 미수라는 점에서 처벌도 보다 강력해야 할 테고요.

"청춘 미스터리"의 효시라는 소개 역시 제가 보았을 때는 지나친 과찬입니다. 작품 속 청춘은 자기 확신에 가득찬 몰염치하고 비겁한 놈들입니다. 아르키메데스 모임은 극 중 노무라 형사의 말대로 그냥 야쿠자 조직과 다를게 없어요. 게다가 고등학생들이 기성 세대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묘사는 진부했고, 특히 전공투와 연합 적군파를 긍정하는 듯한 발언 등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주인공으로 청춘(고등학교 2학년생)이 등장할 뿐 청춘과는 거리가 멉니다. 차라리 평범한 학생이 누나의 불륜남을 응징하려고 하다가 사건이 벌어지는 식으로 진행되었더라면 모를까, 고등학교 범죄 조직의 범죄극에 불과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알리바이 트릭은 일견 괜찮아 보였지만, 부두에서 기차 등을 타고 거의 3시간에 걸쳐 집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목격자가 나타나서 트릭은 실패하고 말지요. 
그 외 사건에서 작위적인 부분들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야규의 누나 미사코가 자살한걸 의문스럽게 묘사한게 대표적입니다. 미유키가 죽기 전 아르키메데스라는 말을 남긴다던가, 야규 목격자는 신문 투서를 통해 알아낸다는 등도 마찬가지고요. 엔메이 등 다른 아르키메데스 멤버들이 왜 위증으로 처벌받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리바이 공작을 위해 형사에게 거짓 증언을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작품이 발표된 40년 전에는 나름 신선하고 가치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여러모로 함량 미달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3/11/17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유키 신이치로 / 권일영 : 별점 2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4점
유키 신이치로 지음, 권일영 옮김/시옷북스

일본 추리계의 신성이라는 작가의 단편집.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공정한 정보 제공과 추리의 연계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반전들도 강렬합니다. 뒷맛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기묘한 맛' 류라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일단 사건들이 일어나는 상황, 동기들이 비현실적입니다. 사건을 저지른 다음의 뒷 수습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고요. 여기에 더해 전개가 너무 뻔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어요. 추리는 이런 예상을 굳히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추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던가 하는건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나마 2021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는 마지막 작품인 "#퍼트려 주세요"만이 뻔하지 않은 진상과 결말로 이어지기는 합니다만, 비현실적이라는 단점은 마찬가지고 오히려 '추리' 적인 요소가 별로라는 문제는 도드라지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자면담
가정교사 소개 영업사원 가타기리는 야노 모자와 방문 상담을 진행하던 중, 무언가 수상하다는걸 느꼈다. 야노 부인의 신경질적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행동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유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노린다는 아이가 간단한 수학 문제의 답으로 110만 쓰고 있었다....

요약에서 설명한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소년의 이름이 한자를 일반적으로 읽는 발음과 달랐다던가 ('유'가 아니라 '하루카'였음), 소년이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치지 않는다던가, 분명 먼 사립 학교를 다니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논다고 하고, 무슨 문제를 내어도 110이라는 답을 내 놓는 등 정보 제공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이웃집 부인이 진짜 야노 부인을 살해했던 동기인 쓰레기 봉투 문제까지도 앞 부분에서 설명될 정도입니다. 하루카는 이미 사고로 죽었었으며, 야노 마리가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은 망상 탓에 불거진 일이었다는 반전도 섬찟했고요.
상황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살인범과 피해자의 아들, 그리고 평범한 일반인이 함께 삼자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은 서스펜스 넘칩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우선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가짜가 가타기리를 만나서 방문 상담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아파서 날짜를 조정하겠다 정도로 이야기하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무려 20분이나 걸려 현장을 대충 치워야 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무리 공포에 질려 있었어도 순순히 범인의 협박에 따라 행동한 것도 이상해요. 작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이면 성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언급할 그런 나이인데 말이지요. 전개도 너무 뻔합니다. 초반부터 야노 부인이 가짜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대 놓고 수상하다는걸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매칭어플
나는 kento라는 가명으로 매칭어플을 통해 마나를 만나 데이트한 뒤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을 관찰하고 샤워를 하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나가 원조 교제 남성들을 낚아 협박하는 조직의 멤버였으며, 마나의 자취방은 일당의 아지트였다는 내용은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마나가 데이트 중 했던 말과 방 안 사물들이 일치하지 않았고, 샤워기 높이 등도 잘못 놓여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위한 정보 제공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정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어요.

그러나 딸의 원조 교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딸이 매칭 어플로 원조 교제를 한다고 딸을 닮은 원조 교제녀들을 여러명 죽이고 다닌다? 이건 비현실적을 넘어서는 미친 설정입니다.
또 주인공이 매칭 어플을 사용하는 딸과 닮은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는데다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kento의 딸 미유키 역시 조직의 멤버였다는 반전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작위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문자 메시지가 배달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도라
명문대 출신인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힘들게 딸 마나쓰를 얻은 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자 제공을 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자 제공은 딱 한 번에 그쳤다. 그리고 1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자 어린이 연속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 호조지 재판이 잘못되었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어느날, 나의 딸이라는 아이 쇼코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잔잔한 드라마로 쇼코와의 대화를 통해 마나쓰가 친딸이 아니며, 아내도 다급한 나머지 정자를 기증받았던게 아닐까라는 깨닫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고 두 아이 모두 자기 딸로 인정하겠다는 결말이 괜찮았던 작품.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정자 제공을 한 상대가 호조지의 아내였다는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서 큰 단점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정체는 금방 밝혀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물도 아닐 뿐더러, 그녀가 정자 제공을 받으려 했던 동기가 영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호조지와 마지막 관계를 가진 뒤 그가 체포된 탓에, 혹시 임신되었을 때를 대비해 누구의 딸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 기증받은 정자를 주입했다고 합니다. 혹시 딸 쇼코가 아버지의 정체를 눈치채면 딸에게 "너는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 기증받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다"라고 말해주려고요. 그런데 유전자 검사라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결국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임신 중절을 하기 싫었다면,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키우느니 이민을 가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삼각간계
나 (기리야마), 모기, 우지하라는 대학 시절 친했던 "이쓰멘" 모임 멤버로 5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오사카에 사는 모기의 집 앞으로 우지하라가 전근온 것이 계기였다. 도쿄에 있는 기리야마를 고려해 온라인으로 가진 모임 중, 우지하라는 기리야마에게 모기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 약혼녀가 모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지하라가 보낸 사진 속 약혼녀는 기리야마가 사귀고 있는 여자 미나미였다...

전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우지하라 약혼녀의 불륜 상대가 기리야마라는건 전개 상 당연했거든요. 당연히 우지하라가 죽이려 하는 것도 모기가 아니라 기리야마였고요. 오사카에 있는 척 했던 트릭은 머리를 많이 쓴 것 처럼 설명되지만, 원격 미팅이 잦은 최근 시점에서는 새롭지도 않으며 기리야마가 눈치챈게 아니라면, 우지하라가 장황하게 설명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기리야마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원격 모임처럼 가장해서 속였다는 동기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약혼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우지하라는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쳐도, 친구 모기가 공범으로 살인에 가담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1점. 수록작 중 워스트입니다.

#퍼트려주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외딴 섬 몬메지마로 이사온 와타나베 초모란마는 자기처럼 도쿄에서 오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구와지마 사데쓰, 안자이 루주, 그리고 유일하게 토박이었던 소녀 린코와 친해졌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날, 섬에 방문했던 외지인이 나가사키에서 살해당했고 그날 이후 도쿄 출신 아이들에 대해 링크를 포함한 섬 사람들이 모두 서먹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마침 그 날은 린코가 아이폰을 보여주며 유튜버가 되자고 말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 린코는 초노를 불러내었다. 린코는 중요한걸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실패했고, 절벽에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섬에 살며 TV 정도를 제외하면 문명의 이기, 인터넷 등을 전혀 접하지 않던 섬 소년, 소녀들의 부모가 알고보니 인기 최고라는 6인조 유튜버였으며, 그 유튜브 컨텐츠는 섬에 사는 자기 아이들을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트루먼 쇼의 소규모 개인 버젼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기술력과 장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섬의 비밀을 밝히려는 외지인이 살해당한건 충성스러운 구독자들 때문이었고,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유튜버 가족들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관여하지 말자고 생각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일단 유튜브를 아이들에게 비밀로 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알려주었어도 상관없었을겁니다. 구독자들만 아이들이 '모르고 있다'고 속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영원히 속일 수도 없어요. 작 중 묘사처럼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섬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로 알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마을 주민들이 비밀에 동참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부모가 아이들 몰래 유튜브를 찍어 올렸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서 보호되고 통제가 되었을 겁니다. "귀등의 섬" 세계관처럼 고아들을 모아놓은 고립된 섬에서 선생들이 작당하고 학생들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면 모를까, 21세기에는 있을 수 없는 설정입니다.
아이 세 명의 부모 중 누군가가 아니라 루주가 린코를 직접 살해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자동차도 있고 힘도 좋은 어른들이 6명이나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 생에게 살인을 저지르라고 시킬 까닭은 없지요. 알리바이 트릭도 상당히 유치했고요. 이 모든걸 알아낸 초모란마와 사데쓰가 루주에 대한 응징을 라이브 방송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마지막 장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9/27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16 - 이시구로 마사카즈 : 별점 3점


마사토끼 등 여러 리뷰어들에게 낚여서 이런저런 만화책을 구입하곤 했는데, 별로 성공을 거두지를 못해왔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다시 구입하기로요.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한게 바로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히트작인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라 선택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천국대마경>>도 재미있게 감상하기도 했고요.

작품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더군요. 미치오 슈스케의 <<N>> 보다 앞서 시계열을 바꾼 전개를 시도했다는게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띄엄띄엄 발매될 때마다 한 권씩 읽었을 때는 쉽게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인데, 한 번에 읽으니 호토리의 헤어스타일 등으로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몰아 읽은 덕분에 대책없는 동네 말괄량이에서 '탐정'으로 성장해나가는 호토리를 비롯하여,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호토리의 도움으로 하나 씩 넘어서는 콘 선배 등 등장인물들의 성장도 눈에 더 잘 들어왔고요.
학원물로도 볼만했습니다. 예전에는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다시 읽어보니 수학여행, 학원제, 운동회, 부활동 등 청춘 학원물의 필수 에피소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부 합숙 정도만 빠져있는데 이건 등장인물들이 하리바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귀가부' 소속이기 때문인데, 대신 상점가 여행, 그리고 밴드 '메이즈' 활동이 등장하니 엇비슷하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초반의 번역은 아쉬웠습니다. 일본어 말장난을 억지로 한국말로 바꾼 탓에 "사나다 사카나 사라다 (사나다 생선 샐러드)"같은 언어 유희들이 사라져버리고 말았거든요. 후반부처럼 그냥 일본어로 쓰고 해석을 덧붙이는게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학원물, 청춘물, 추리물, 개그물 등 모든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주니까요.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추리물로 볼 수 있는, 추리가 핵심인 에피소드만 꼽아보며 글을 마칩니다. 
1권 
<<눈>>
모리아키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그린 기묘한 그림의 정체는?
호토리가 추리력을 발휘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 
가족들이 나눠 가졌다는 그림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2권
<<파자마 천사>>
화창한 날 정해진 시간에 선글라스를 끼고 정해진 장소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환자의 목적은?
일종의 일상계 추리물. 현장 조사만으로 풀 수 있는 수수께끼입니다.

4권
<<아라시야마 보물 조사단>>
시즈카 언니로부터 얻은 보물 지도가 품고 있는 보물은?
지도의 나무 그림과 강 형태가 일치하고, '황금 호수'는 안개에 덮인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진상 등 소소한 재미가 가득했던 작품. <<C.M.B>>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5권
<<시내 설방 이야기>>

타츠미야 시로를 찾는 온나 유키는 누구였나?
일상계라면 일상계, 말장난이라면 말장난.

<<학교 미궁 안내>>
학교 관찰 연못 속 괴수 메시의 수수께끼
경비 아저씨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소문으로 보였지만, 알고보니 진짜 괴물이 있다는 반전.

6권
<<환상의 소년>>

도랑 속 수박을 공으로 바꿔치기한 이유는?
일상계. "탐정 교훈 첫째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놈은 탐정으로서 실격입니다."가 딱 들어맞는 이야기.

8권
<<호토리와 수수께끼 왕국>>

판타지 세계에서 조세핀이 내 놓는 퍼즐을 풀어라!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레이튼 교수>>가 연상되는 판타지 퀴즈물.

<<대괴수 오야 고교에 나타나다>>
영화연구회에서 만든 촬영용 괴수 오야코돈을 부순건 누구?
추리물로 보기는 다소 부족했지만, 후쿠자와가 호토리를 '명탐정'으로 존경하게 되는 에피소드.

9권
<<대량구매 계획>>

베치코 과자는 어디서 만들어서 유통된 것인지?
추리물이라기보다는 SF에 가깝지만 시즈카 언니의 추적 수사는 볼거리.

10권
<<콘 데드엔딩>>

콘 선배가 방에서 살해한 사체를 힘을 합쳐 유기한다!
호토리를 위해 준비한 깜놀 이벤트. 나름의 반전도 좋았다.

<<Detective Girls 2>>
세탁소 아저씨 아라이는 어디로 사라졌나?
호토리의 추리에 탓층이 진심으로 놀라는 (그리고 호토리를 진짜로 인정하게 되는) 에피소드

11권
<<어둠 속에 도사린 목소리>>

옛 구민 센터 자리에서 있을리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토리가 타카부라는 별명의 아이를 착각했던게 진상. 
"탐정 교훈 첫째,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놈은 탐정으로서 실격입니다."

<<헌대판 얼룩 띠의 비밀>>
타케루의 친구 맛키가 줄넘기 줄에 다친 날, 친구들과 같이 쓰는 노트에 '긴 줄로 전원 죽인다'는 섬뜩한 문구가 써 있었다.
우연이 겹쳐 일어난 사건.

12권
<<호토리는 탁상 난로 안에서 추리한다>>

호토리 사촌이 취주악부 합숙을 갔는데, 스키장 통나무 집 1층 객실에 있을 남자아이들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1층이 2층이었다 - 눈에 파묻힌 1층이 있었다 - 는게 진상으로, 호토리 사촌은 2층을 1층으로 잘못 알았던 것. 추리 퀴즈에 가깝다.

13권
<<폐허촌>>

유령이 나온다는 폐촌 스사비 마을 탐험을 떠난 시즈카, 호토리, 콘은 마을에서 기묘한 조각상과 가면을 쓴 사람들을 목격하고 도주한다....
3부작으로 이어지는 긴 호흡의 모험 추리물. 재미와 흥미 모두를 갖춘 수작.

<<저주받은 비디오>>
오래전 영화 동호회 자료에서 발견된 수수께끼 비디오. 오야 고교의 이상한 풍경이 찍혀 있었다.
오야 고교 7대 불가사의를 찍었던 비디오로, 원래 불가사의였던 우물이 사라지고 화단이 새로 등장한 이유를 밝히는 조사로 이어진다. 세리자와 선생의 고백(?)으로 진상이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의 맛은 부족하지만, 일상계로는 나무랄데 없다.

15권
<<안경 행방불명 사건의 전모>>

안경을 잊어버렸던 토시코에게 돌아온 안경은 지저분해져 있었다. 수영 보충 수업을 받던 토시코가 사라졌던 사건과 관계가 있었다.
토시코에 빙의(?)한 호토리의 '메소드 추리'가 돋보인다. 일상계로는 나무랄데 없다 (2) 

16권
<<대사건>>
호토리가 협박장을 받았다. 모리아키 선생님과 사귄다고 착각한 누군가로부터였다.
과거 모리아키 선생님을 좋아했다는 여선생이 범인으로, 일상계스러운 추리에 더해 호러블한 작화가 인상적.
<<악>>
모리아키 선생님 할아버지가 남긴 붉은 그림에 블랙 라이트를 비추자 기묘한 그림이 떠올랐다.
1권의 주사위와 조합하여 금고를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암호였다는 내용.
암호도 재미있지만, 할아버지가 연구했던게 '사람을 죽이는 그림'이라는 진상도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까왔다.

2023/04/29

영어 조선을 깨우다 2 - 김영철 : 별점 3점

영어 조선을 깨우다 2 - 6점
김영철 지음/일리

1권에 이어 2권은 친미파의 형성에서 시작합니다. 갑신정변 후 미국에 상주 외교사절 파견이 시도되었습니다. 청의 내정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미국에 전권공사 박정양 일행이 파건됩니다. 일행 중 참찬관 이완용이 눈에 뜨이네요.
갓과 도포 차림으로 미국에 간 일행은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청의 분노로 박정양은 귀국하게 됩니다. 약속을 어기고 자주외교를 시도했던 탓이었지요. 그래서 외교적으로 딱히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영어 열풍에 일조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건 일행 중 이하영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하영은 조선 미국 공사관 근무자 알렌과 함께 일하며 3년간 일상 영어를 배운 이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일행 중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어서 미국 적응애도 성공했으며, 심지어 이하영은 미국으로부터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오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무려 16만 5천 달러를 로비 비용으로 쓰며 미국 사교계를 주름잡기까지 했습니다.귀국 후 일제 강점기에는 고무신 회사 대륙 고무 사장으로 거부가 되었고요. 원래는 찹쌀떡 장수였던 이하영이 성공을 이룬건 영어 하나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성공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영어에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또한 주미공사 일행들이 귀국 후 조선 정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외국어로서의 영어의 지위를 탄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갑오개혁의 요직이 이들로 채워지게 되니까요. 삼국간섭 후에는 내각 모든 자리를 영어파가 차지했고요.
친미파, 친러파가 뭉쳐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 구도였는데, 을미사변 직후 친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아관파천 성공으로 친일내각은 붕괴하고 그 자리는 다시 친미파, 영어파가 맡게 되고요.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에 있으니 당연히 친러파도 득세하는데, 친러파는 친미파처럼 영어를 배운 사람보다는 러시아 통역 김홍륙이 실세가 되었다는게 재미있네요. 친미와 친러파가 세력 다툼은 친러파 승리로 끝나고, 대한제국 성립과 패망까지 친미, 영어파가 세력을 회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벼슬아치 중 누구라도 러시아어 전문가가 있었다면 이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도 궁금합니다.

친미파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영어 보급은 더 확대됩니다. 앞서 이하영의 출세담이 세간에 널리 회자되기도 했고, 고종도 미국에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황태자도 영어 교육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또 갑오개혁 때 영어파가 권력을 잡고 학교 계혁을 주도한 것도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어요. 영어 학교는 지원금만해도 일어 학교의 3배나 될 정도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거든요. 성적이 저조하면 가차없이 낙급시키고, 학업 부진으로 쫓겨나면 관보 게제 및 다른 학교 입학과 관공서 업무를 하는게 배제될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규정에도 불고하고 1897년부터 16년간 거의 1,000에 가까운 입학생 중 졸업생은 79명에 불과했다니, 영어가 많이 어려웠긴 했나 봅니다만. (그래서 제가 영어를 못하는 듯....)
학교 외에도 외국인이 근무하던 제중원, 그리고 개인 교습이나 YMCA 등을 통한 영어 교육이 이루어져 점차 영어에 익숙한 인물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활동했던 499명의 외국인 선교사들, 고용 외국인들도 어학 보급은 물론 외국 문화 보급에 큰 역할을 했고요.
이런 영어 보급 와중에 독립 신문 등 초창기 신문들이 영어 판이나 영어 기사를 정기적으로 발행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서재필이 미국 시민이라서 미국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는건 문제였지만요. 예를 들어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이 넘어간걸 최선의 정책이라고 했다니, 독립과 애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지요. 게다가 기독교에 대한 찬양도 도가 지나쳤고요. 오히려 독립문을 세울 때 이완용이 했다는 연설 -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같이 망하든지 사람 하기에 다르겠지만,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 이 더 애국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후 유럽과의 외교를 위한 노력도 치열하게 이루어졌고, 공사들은 당연히 영어 능력자들이었습니다. 허나 외교적인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가쓰라 태프트 밀약, 러일 전쟁 등으로 조선은 패망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친미파 윤치호는 반미로 돌아서는데 그 이유는 루스벨트가 일본 침략을 옹호했기 때문이라네요. 침략을 옹호했다고 침략자에 붙어먹는건 뭐하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을사늑약 후 영어 수업은 대폭 축소됩니다. 그러나 미국 유학의 인기가 높아지고, 독립을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는 등 영어의 위상은 되려 높아만 갑니다. 무엇보다도 입시의 핵심 과목이 되어 영어는 출세를 위해서는 꼭 배워야 하는 학문이 되고 맙니다. 경성 제국 대학의 시험 과목이 국어, 영어, 수학이었던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2차대전 와중에는 영어가 잠시 금지된 적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다시 영어 인기는 치솟게 됩니다. 고등교육 이수 및 유학 등의 경험이 있는 친일파들이 중용된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반공을 내세운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건 통탄할 일이지요.

이런 영어를 중심으로 한 당대 조선의 역사적 흐름에 더해, 영어 교육 방법에 대한 소개도 상세합니다. 회화 중심의 초기 단계를 벗어난 이후에는 읽기, 쓰기 위주의 교육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서당식 교육 방법을 답습했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식 영어 교육이 이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는군요. 전근대적으로 보였던 서당식 암기 위주 영어 교육은 오히려 단기간에 수천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식으로 영어 구사능력을 높이는데 좋았다니 놀랍습니다. 오히려 독해 위주이며, 시험에서 점수를 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일제 강점기 시대 변질된 영어 교육이 조선 - 그리고 독립 후 한국 - 의 영어 구사 능력에 발목을 잡은겁니다. 일제강점기이후 회화가 아닌, 문법 규칙에만 얽메이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결국 시험 시장은 크게 성장하지만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는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방식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하여간, 일본은 뭐 하나 도움이 안되네요.

이외에도 영어와 함께 보급된 외국 문화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커피나 사진관, 손탁 호텔 등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 이미 접했던 이야기라 실망했습니다. 아예 이런 항목만 다룬 미시사 서적 - 커피, 사진, 호텔 - 도 따로 있으며, 영어 전파와 그렇게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서 구태여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단발성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인상적인게 없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영국 여행가 비숍의 식견입니다. 그녀는 조선인의 게으름의 원인이 관리들의 착취 때문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최소한의 의식주 이상의 물건은 빼앗기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면서요. 즉 조선의 패망은 수탈을 자행한 지배층의 문제로 귀결되는 셈입니다. 지금 MZ와 알파 세대라 불리우는 청춘들을 위해서, 반드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주는 건전한 사회로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소 불만이 없지는 않으나, 영어를 토대로 조선 후기 ~ 근대에 이르는 조선 정부의 난맥상과 사회 분위기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미시사 서적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런저런 생각할거리도 많이 주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2/10/22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애덤 쿠하르스키 / 정훈직 : 별점 3.5점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8점 애덤 쿠하르스키 지음, 정훈직 옮김/북라이프

여러가지 도박에 대해 수학적으로 연구된, 여러가지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
리처드 파인만의 책 도입부 일화부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파인만은 도박은 잃을 수 밖에 없다는걸 계산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프로 갬블러를 만나고 혼란에 빠집니다. 수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 갬블러 닉은 파인만에게 “베팅 판에 돈을 거는 게 아니라, 베팅 판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돈을 거는 것." 이라는 비결을 말해 주었답니다. 암요, 호구는 타짜의 먹잇감에 불과하지요.

뒤이어 각종 도박 및 베팅에 대해 수학자들이 연구한 방대한 사례들이 소개되는데, 뭐 하나 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맨 먼저 소개되는 무작위여야 할 룰렛에서 거금을 땄던 일화부터 말이죠. 룰렛이 마모 등의 사소한 결함으로 특정 숫자가 다른 숫자들보다 자주 나온다면, 상황이 갬블러에게 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게 비결입니다. 하지만 바퀴가 문제가 있어도 어느 숫자에 돈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내는게 문제인데, 물리학에다가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최대 20% 정도의 적중률을 확보했던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임의의 배팅일 경우의 확률은 2% 미만이라니 그 차이가 실로 엄청나네요. 휴대폰 등을 이용해서 2004년에도 130만 파운드를 따 간 일당이 있었다고 하고요. 이런 계산을 할 수 있을 사람이라면 저 돈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튼 대단합니다.

운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복권에서도 수학자들의 성취는 눈부십니다. 제일 간단한건 로또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구입하는 비용이 상금보다 적을 경우 모든 숫자를 다 사버리는 '브룻 포스 공격'법입니다. 문제는 모든 조합을 구매하는 수고, 그리고 공동 당첨자가 있을 때 상금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는건 정말 큰일일거에요.
경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적인 예측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는 조직이 있으며, 그 적중률이 높다는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인트는 잘하는 말은 배당이 낮고 못하는 말은 배당이 높아서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이 못하는 말의 확률을 후하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말의 예상 성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고요.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고배당으로 한 방을 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잘하는 말에 돈을 거는 것 만으로 돈을 무조건 딸 수는 없겠죠. 수수료 문제도 있고요. (이 책에 의하면19%) 그래서 여러가지 수학 기법이 적용된 경마 우승 확률 분석 프로그램이 많이 나타났는데, 대체로 프로그램 결과와 현재의 배당률을 조합하여 베팅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축구 경기도 수학 기법이 도입되는건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에 몇몇 학자들은 축구 한 경기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예측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수학의 발달로 이런 제약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는데, 예를 들어 팀이 골을 넣는 실력, 골을 얼마나 못 막는지를 뽑으면 골을 넣을 확률을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군요.
홈팀의 공격 능력 × 원정팀의 수비 취약점 × 홈그라운드 이점
이를 기반으로 만든 모델을 통한 예측 결과가 베팅 업체 배당률보다 10퍼센트 이상 가능성이 높았다니 놀랍습니다.
이렇게 모든 스포츠 도박은 이제 과학적인 분석 대상이 되었기에, 심지어 투자 회사까지 생겨 투자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주식과 다를바 없다는건데, 이 정도로 고도화된 분석에 따른 결과라면 수긍할 만 합니다. 물론 저는 제 돈을 이런데 투자하지는 않겠지만요.

책은 이런 수학 이론들을 통해 인공 지능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포커에서 블러핑까지 구사한다는건 놀랍습니다. 이는 냉정한 논리에 따른, 최적의 포커 전략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나 룰렛에 돈을 거는 행동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포커 선수들은 베팅으로 게임의 결과를 바꿀 수 있어서 선수인 셈이니까요.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절대로 지지않는 포커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다고 하네요. 온라인으로 포커 게임을 하면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블랙잭과 카드 카운팅은 많은 책에서 소개되어서 새로운건 없었지만, 카지노가 유리한 이유는 기억에 남습니다. 참가자의 차례가 항상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참가자가 카드 한 장을 쓸데없이 더 요청했다가 목표치를 넘어가면, 딜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기니까요. 그래도 딜러의 카드 숫자가 작으면 딜러가 카드 몇 장을 더 뽑아야 할 가능성이 높아져서 합계가 21이 넘어갈 위험이 커진다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딜러의 카드가 6이면 딜러 쪽이 21을 넘어버릴 확률이 40퍼센트라는군요! 10의 경우에는 그 확률이 반으로 줄어들고요. 따라서 딜러가 6을 갖고 있으면 자신의 카드 합계가 작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결과가 좋을 수 있다는군요. 잘 기억해 두어야겠어요.

곁들여 소개되는 이런저런 정보들도 흥미롭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징크스’처럼요. 이 잡지의 표지에 나온 선수들은 종종 그 후 성적 하락을 겪게 된다는데, 통계학자들은 실제로는 징크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수들이 잡지 표지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그 선수들이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시즌을 보냈기 때문인데, 이는 진정한 실력보다 비정상적인 변동에 의한 것으로 이듬해 성적 하락은 단순히 원래 실력으로 돌아간 것 뿐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현곤 선수의 타격왕 획득같은 경우겠죠.
갬블, 베팅에 관련된 정보도 많습니다. 카지노와의 대결에서 정해진 액수만큼 더 벌 수 있다고 기대될 때 걸어야 할 최적의 액수는 얼마일까요? ‘켈리 기준’이라고 알려진 수학 공식을 따르면 됩니다. 기대 수익을 이기면 받게 될 액수로 나눠서 나온 비율을 전체 자금에도 적용해서 그만큼의 액수를 걸어야 한다는군요. 예를 들어 동전 던지기에서 뒷면이 나오면 2달러를 주는 내기가 있다고 한다면, 켈리 기준은 기대되는 당첨금 50센트를 이겼을 때의 액수인 2달러로 나눈 것이다. 계산 결과는 0. 25로, 이는 이용 가능한 자금의 4분의 1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론상으로는 이만큼을 걸면 적절한 수익이 보장되는 동시에 자금 손실의 위험성이 제한된다는 겁니다.

이런 류의 책답게 번역이 그렇게 좋지는 못하고, 아무래도 내용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도판은 아예 없다시피하고요.
그래도 재미와 정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도박을 좋아하고, 이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읽는다고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2021/10/03

법정에 선 수학 -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 김일선 : 별점 3점

법정에 선 수학 - 6점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아날로그(글담)

수학이 법정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재판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숫자가 잘못 사용되어서 재판 결과가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적인 조건으로 판단하고 곱하면 안되는데, 곱해서 숫자가 엄청나게 커진 경우처럼 대부분 통계와 확률 계산의 오류들이고요. "루시아 더베르크 사건", "샐리 클라크 사건", "콜린스 부부 사건", "조 스니드 사건" 이 대표적입니다. 

루시아 더베르크는 2001년 네덜란드에서 아동 연쇄 살인마로 몰렸던 간호사입니다. 여러 아이가 심정지로 사망했을 때,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현장에 있었을 확률이 왜곡되어 재판에 사용되었습니다. 수학은 단지 거들었을 뿐이고, 사실 무리했던 기소와 수사, 그리고 무능했던 변호사의 환장의 콜라보였기에 그녀는 결국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오류가 일어난 이유는, 모두 개별적으로 보아야 하는 독립 사건을 곱했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를 영아 돌연사로 연달아 잃은 뒤, 영아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던 샐리 클라크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샐리는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명명한 메도 박사의 증언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사는 아이 두 명의 죽음을 모두 독립적이라고 생각하고 확률을 계산했었고요. 그러나 유전적일 경우 두 죽음은 독립적이지 않을 뿐더러, 설령 확률이 맞았다 하더라도 이게 샐리의 범행을 증명하는건 아닙니다. 운 나쁘게 불행한 죽음이 닥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여러모로 확률이 잘못 사용된 거지요.

콜린스 부부는 범인과 인상착의가 같을 확률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검사측은 LA 시민 중 비슷한 특징을 지닌 커플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해서 증거로 제시했었습니다. 부부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지만, 배심원은 유죄를 선고했고요. 그러나 이 확률 계산이야말로, 오류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우선 사용된 값이 문제였어요. "여성이 머리를 묶었을 확률" 은 통계학적 근거에서 나온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건이 독립적이라고 확정하고 곱한 것도 실수였고요. 마지막으로, 설령 그 숫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건 샐리 클라크 사건처럼 실제 범인을 찾아낼 확률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대법원에서 판결은 뒤집혔습니다. 이 재판에서 그나마 긍정적이었던건 검찰측 오류를 밝혀내는데 활약했던 트라이브가 법조계 유명인사가 되었고, 법정에서 수학 사용이 자제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정도네요. 

"조 스니드 사건"은 1964년 뉴멕시코 실버시티에서 스니드 부부가 살해된 뒤, 용의자였던 아들 조 스니드 재판을 다루고 있는데 재판의 승패는 조 스니드와 권총을 구입했다는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인지를 입증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이를 수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권총을 구매한 사람의 특징 - 신장, 머리 색, 눈동자 색, 사서함 번호, 이름 등 - 을 독립적으로 보고 값을 뽑은 뒤 곱했는데, 이건 수학에 어두운 제가 봐도 설득력없는 숫자로 보입니다. 전체 인구에서 크로셋이라는 이름이 나올 확률을 추산했다? 가명을 썼다면서 그 이름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한다는건 이상하지요. 다른 조건과 값도 비슷해서, 결국 이 확률 계산은 재판과는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숫자일 뿐입니다. 설령 숫자가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숫자는 조 스니드와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과는 상관도 없고요. 오히려 이런 검찰의 삽질이 드러나서, 수학이 사용되지 못했던 항소심 이후의 법정 공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검찰은 다른 한 방을 준비해야 했기에, 변호인측과 드라마틱하면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니까요. 참고로, 여기서 검찰이 마지막 날린 한 방은 스니드의 전처를 증언대에 세웠던 겁니다. 그녀가 스니드의 폭력 성향을 입증했던 덕분에, 스니드는 종신형을 받게 되었지요.

이렇게 수학이 재판 결과를 왜곡시킨 사건도 있지만 수학이 잘 사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2007년 11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영국인 유학생 메러디스 커처가 살해된 뒤,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어맨다와 남자친구 라파엘이 체포되었던 "어맨다 녹스 사건"은 재판 결과야 어찌 되었건, 수학은 증거로 유의미하다는걸 나름대로 증명했습니다. 여기서 앞 뒤가 나올 확률이 다른 동전을 이용한 설명도 좋았어요.

그런데 몇몇 사건은 주제와 벗어나 좀 아쉬웠습니다 .폰지 사기의 원조 찰스 폰지 사건 재판은 그의 사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월가의 마녀로 불렸던 해티 부인 재판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은 수학이 서명과 필적 위조를 입증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실제 재판 결과와는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요. 재판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었지만요. 드레퓌스 재판은 워낙 유명해서 이 책에서 따로 짚고 넘어갈 필요도 없어 보였고요. 저 같은 초보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이나 계산이 사용된 경우가 많은 점도 단점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수학 교양서로도 충분했고, 소개된 재판들 대부분이 한 편의 법정물을 읽는 듯한 재미를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비슷한 책으로 "넘버스"가 있는데, 재미 면에서는 이 책의 압승입니다.

2021/08/29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 에리카 오크런트 / 박인용 : 별점 4점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 8점
에리카 오크런트 지음, 박인용 옮김/함께읽는책

자연 발생적인 언어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어에 대해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프롤로그를 거쳐 존 윌킨스와 진리의 언어, 루드비크 자멘호프와 평화의 언어, 찰스 블리스와 기호의 언어, 제임스 쿡 브라운과 논리의 언어, 스타트렉의 클링온 등 연대순으로 주요 인공어와 왜 그 인공어를 발명했는지가 발명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소개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수학에 바탕을 둔 언어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그동안 세계어였던 라틴어의 힘이 약화되면서 벌어진 일이었지요. 때문에 글자를 수 처럼 사용하거나, 말을 숫자로 바꾸거나, 아예 기호화하는 등의 아이디어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중, 언어를 수학화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네요. 예를 들어,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므로, 만약 동물 a가 2이고 이성적이라는 것 r이 3이면, 사람 h는 ar과 같아야 하며, 이 경우 2*3 즉 6이 될 것이다."는 식으로요.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각 항목별 '기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가 문제였는데, 이를 진지하게 파고든게 존 윌킨스였다는군요. 윌킨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모든 단어를 분류하여 계층화하였습니다. 자연 언어에서 '개'는 단순히 외우는 것이고, 그 발음도 임의로 정해진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윌킨스 체계를 통해서는 개를 나타내는 단어는 개가 무엇인지를 알려 줄 수 있습니다. 단어가 짐승 > 타원형 두개골 > 순으로 되어있는 계층도 하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분류도 지극히 임의적이고, 사용자가 개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는 탓에 사용하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도 단어가 아니라 완성된 '언어'로 만들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지요.

윌킨스의 언어에 비하면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 어는 분명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커뮤니케이션을 제공한다는 목적에 잘 부합했으니까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언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세계어가 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오그던이 영어 단어 갯수를 850개로 줄어 제안했던 '기본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동사를 없애고, Get, Put, Take. Come. Go, Have. Give 등의 기본 동사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윈스턴 처칠도 팬이었을 정도로 꽤 인기를 끌었었지만, 실제 사용할 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니까요. 하긴, 숙어라던가 관용적 표현 없이 언어가 존재하기는 힘들테니 당연하지요.

찰스 블리스의 블리스 기호는 단순한 기호들을 조합하여 여러가지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블리스가 중국 체류 시 배웠던 한자 조어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습니다. 해석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한 등 문제도 많았지만, 아예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장애아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이어서 온타리오 장애아 학교 등에서 아주 잘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찰스 블리스가 자존감이 낮은 정신병자였던 탓에, 지루한 법정 싸움으로 인해 이 기호를 활용한 교습법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는 상당히 유용했을테고, 온갖 이모지 사용이 일반화된 지금에 더 잘 먹힐 방식인데 아쉽네요.

제임스 쿡 브라운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할 수 있으므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인 객관성을 지닌 언어 '로글랜'을 발표했습니다. 소개된 내용을 보니, 수학과 논리학에 기반을 둔 언어로, 일반 언어라기 보다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가깝더군요. 그래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일반적인 언어처럼 사용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너무 컸습니다. 로글랜은 창시자 브라운에게서 벗어난, 비영리 단체 논리 언어 집단이 이끄는 '로지반'이라는 언어로 발전해 나갔는데, 어렵기는 별 차이가 없고요.

마지막에는 스타트렉의 '클링온'이 소개됩니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소수의 열광적인 팬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언어로, 특별한 목적이 없고, 유용하지 않아도 언어는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입니다. 저자는 클링온의 존재 이유를 '유희' 라고 단정하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아울러 이런 재미 요소가 앞으로는 신규 언어의 필수 조건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드네요.

이렇게 대표적인 인조어 외에도 언어로 여성의 관점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라아단'과 같이 파생된, 관련된 인조어도 조금씩 소개되고 있으며, 수많은 인조어들의 목록과 번역 예로 구성된 부록도 풍성합니다. 저자가 인공어들을 직접 배워서, 그리고 그 인공어들의 학습 코스나 세미나 등에 직접 참석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언어인지에 대해 보다 생생하게 제공해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고요. 덕분에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로글랜, 로지반과 같이 지나치게 어려운 언어는 그 사용 방식이 책만 읽어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으며, 찰스 블리스의 블리스 기호는 그 기호에 대한 설명보다는 정신병자 블리스의 인생 이야기가 더 길게 소개되는 등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책이었어요. 회사에서 UX 업무를 담당하는 저에게는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생각됩니다. 딱딱하고 어렵게가 아니라 저자의 체험 중심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재미있게 쓰여져 있기도 하고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상호 작용 (인터랙션) 등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7/10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애덤 쿠하르스키 / 정훈직 : 별점 2.5점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6점 애덤 쿠하르스키 지음, 정훈직 옮김/북라이프

수학자는 과연 논리적인 게임을 잘 할까?는 제 오랜 궁금증 중 하나였었습니다. 이 책은 여기에 대한 어느 정도 합리적인 답을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수학을 이용해서 룰렛, 복권, 경마, 블랙잭, 포커, 드래프트, 체스 등에서 이겼던, 혹은 이기려고 노력했던 여러가지 노력과 사례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자들이 이런 게임들에 도전해서 돈을 벌었던 실제 사례들이 특히 재미있더군요. 대표적인 예가 복권입니다. 복권 당첨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수학자들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더라고요. "스크래치 복권"의 공정한 지역 분배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복권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여섯 개가 아니라 그보다 적은 숫자가 당첨된 사람에게 당첨금을 분배하는 '롤 다운' 제도의 헛점을 이용한 전략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수학자가 계산해보니, 롤 다운 상황이 일어났을 때는 판매되는 2달러 복권 당 최소 2달러 30센트의 상금을 기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비가 이끄는 MIT 그룹은 롤 다운 상황을 이용해서 무려 70만 달러에 당첨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아일랜드 회계사 스테판 클린세비치의 전략은 더 단순합니다. 모든 당첨 가능한 숫자를 조합해서 복권을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이 100만 파운드 미만이라는 점을 알아낸 뒤, 당첨금이 100만 파운드를 훨씬 넘겼을 때 베팅을 시도한다는 전략입니다. 복권 구입에 품이 많이 든다는 점과 다른 사람이 당첨되면 당첨금을 나눠 가져야 하므로 이익이 떨어진다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어서 확실하다고만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블랙잭 전략은 "MIT 수학천재들의 카지노 무너뜨리기" 등에 나왔던 카드 카운팅 외에도, 다양한 전략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카드 카운팅이 핵심이기는 하지만, 카드 섞는 과정에서 패턴을 추출하는 방식은 꽤 그럴듯해 보이네요.

경마에서 성공하기 위한 전략은 출발 위치 등 여러가지 측정치를 통해 특정 말의 우승할 확률을 먼저 계산하는. 이른바 예측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갬블러들은 모델을 통해 얻어낸 데이터와 실제 배당률을 비교하여 베팅을 하고요. 축구 경기도 이러한 예측 모델이 존재합니다. 홈팀이 넣을 골의 기대치는 "홈팀의 공격 능력 * '원정팀의 수비 취약점 * 홈 그라운드 이점' 이다" 처럼요. 이 모델은 기초적인 상태에서도 베팅 업체를 능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니, 스포츠 토토를 한다면 관심을 한 번 가져볼만 하겠습니다. 선수 영입 시에는 득점할 골의 수 보다는, 만들어 낼 슈팅의 수를 예측해 봐야 한다는 말도 기억에 남고요.

스포츠 베팅은 제가 야구를 좋아하기에 관심있게 읽었는데, 잘 알려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징크스'에 대한 설명처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 표지 모델이 되었던 선수들은 종종 그 뒤 성적 하락을 겪게 된다는 징크스인데, 통계학자들에 따르면 징크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수들이 잡지 표지에 나올 수 있었던 건,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시즌을 보냈기 때문이며, 이는 그들의 진짜 능력이라기 보다는 불규칙한 변동으로 보는게 타당하기에, 이후의 성적 하락은 단순히 평균 회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몬스터 시즌'을 보낸 뒤 성적이 급격하게 하락한 몇몇 선수들이 떠오르네요.

실제 베팅을 위해 유용한 정보도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켈리 기준'입니다. 장기적으로 기대 수익을 이기면 받을 액수로 나눠서 나온 비율을 전체 자금에도 적용하여 그 만큼의 액수를 거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동전 던지기에서 1달러를 건 뒤, 뒷면이 나오면 2달러를 주는 도박이 있다면 절반의 경우 1달러를 잃고, 절반의 경우 2달러를 따니 기대 수입은 50센트 입니다. 얼마를 거는게 적절할까요? 켈리 기준 적용 시,기대 수입 50센트를 이겼을 때의 액수 2달러로 나눈 0.25, 즉 이용 가능한 자금의 1/4을 걸면 된다는군요. 참고로 켈리 기준은 블랙잭 등에는 적절하지만, 경마 등에서는 부적절합니다. 일어난 확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계산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마 예측 모델의 확률은 추정치에 불과하니, 이대로 계산할 경우 위험도가 증가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경마에 대한 이야기 뒤로는 주로 예측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예측 모델이 잘 만들어져 있을 경우, 나름대로 안정적인 투자처로 이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베팅 회사가 존재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이 쪽 세계의 발전이 놀라운 것 같습니다. 불확실성이라는게 존재하는 세계인건 맞지만, 사람들은 놀라운 사건의 빈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 책의 말 처럼 너무 마음에 둘 필요는 없어요. 연 15~25%의 수익률을 올린다면 충분히 투자를 고려해 봄 직 하지요. 예측 모델도 유명한 IBM의 딥 블루나 왓슨처럼 점차 '인공 지능'에 가까운 연구들이 소개되는 식으로 최근(책이 쓰여진 기준으로)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건 포커를 이기는 모델이 굉장히 만들기 어렵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확률이 중요한 게임이니 수학자들에게 유리할 것 같은데 의외였거든요. 그런데 읽다보니 과연 그럴만 하더군요. "블러핑"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폰 노이만에 의해, 블러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게 수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플레이어가 최악의 카드를 가졌다면, 상대가 게임을 접지 않는 한 승리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블러핑 전략을 펼쳐야 하니까요. 그 외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가장 많이 딸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잃을 수 있을까?"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던가, 후회의 감정이 없어지면 위험 요인이 관련된 게임 숙달이 힘들다는 등 다양한 이론과 전략이 가득해서, 포커 자동 프로그램 제작은 쉽지 않았다네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프로 포커 플레이어도 원숭이에게 질 수 있는게 포커라는 뜻입니다!

또 각종 도박에 승리하기 위한 수학적 노력이 단지 돈벌이가 아니라 새로운 이론과 기술의 시작점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예를 들어 룰렛은 일반적인 패턴에서 무작위로 전환되는데, 이를 카오스적 전환의 실제 사례로 보고 여기서 카오스 이론이 파생되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예측 모델이 결국 인공 지능으로 발전한 것도 마찬가지일테고요.

하지만 기대했던건 수학자의 이론이 바탕이 된 '필승 전략'은 많이 없어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기기 위한 여러가지 수학적 방법은 결국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카드 카운팅부터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요. 그나마도 카지노에서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다고 하니, 결국 카지노에 가는 것 보다는 탄탄한 예측 모델을 가지고 있는 베팅 그룹에 투자하는게 훨씬 나은 선택으로 보이네요. 또 수록된 내용들도 쉽게 쓰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노력은 한 것 같지만, 애초에 수학 초보자가 쉽게 이해하기는 워낙에 어려운 이론들이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기대와는 사뭇 달랐고,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장벽이 높기에 감점합니다. 수학적으로 저보다는 기초가 탄탄하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두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는 살짝 스쳐지나갔는데, "인기"에 대한 연구 결과가 기억에 남습니다.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사람들을 그룹으로 나눈 실험을 통해, "대중적 인기와 유명세는 퍼트리는 사람에 더 관련이 많다"는 결과가 나왔거든요. 여기서는 운과 실력, 갬블링과 투자는 명확하게 분리하기 어렵다는 근거로 이 결과를 활용하는데, 이 주제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를 읽고 싶어지네요.

2021/06/27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별점 4점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8점
배한철 지음/매일경제신문사

국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은 역사서입니다. 역사적인 가치와 담고 있는 의미는 물론 국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가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구입했던 고령 가야 금관이 도굴품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12개국이나 되는 나라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듯 'OO가야'가 아니라 가락국, 가라국, 아라국과 같은 이름이었다. 임나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문무왕릉비 설명도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비에 따르면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 왕손의 후예라는 것 처럼요. 비 외에도 거대 무덤, 북방 민족이 신성시하는 나무와 사슴뿔로 꾸며진 금관, 왕의 명칭이 '칸'과 비슷한 '마립간'이라는 등의 다른 근거들도 꽤나 그럴듯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신라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평지에 목곽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넣은 뒤봉분을 올리는데, 이게 바로 카자흐스탄 양식이랍니다. 동시기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인데 말이죠. 금관도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때 등장하며, 아프카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 무덤 유물과도 흡사합니다. 또 이러한 거대 무덤과 금관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으로, 후대 법률왕 무덤은 규모가 작은, 돌로 무덤방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며 부장품들도 주로 투기류였다는 것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법치 체계가 확립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결말은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정말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은 아니고, 단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데, 근거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어요. 

화엄사 석탑 설명에서 소개되는 여러가지 국보 탑 소개도 재미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차례 수정되었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불상의 명칭과 뜻을 알려주는 부분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는 '샤카족 (인도 종족)의 성인' 이라는 의미, 비로자나불은 지혜와 진리의 부처를 부르는 칭호로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의 음역이라는 것, 아미타불은 '무한한 수명의 것'이라는 범어 '아미타우스'에서 유래, 미륵은 석가모니 제자 중 한 명으로 사후 부처로 신격화 보살은 부처처럼 깨달았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존재라는 등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밀레 종의 유명한 인신공양 설화는 일제 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공한 설화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어요.

그 외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관촉사 은진미륵이 이름처럼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데 놀랐습니다. 생긴 걸로는 영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관촉사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이 따로 없고, 법당 벽 창으로 야외 불상이 보이도록 만들었다는데, 다음에 관촉사에 가면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일본이 계속 노렸었고, 심지어 '구변국'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사칭하면서까지 달라고 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이 때 조선은 유교 국가라서 딱히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태종과 세종 모두 주려고 했지만, 예조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난중일기가 국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여기서 왜 난중일기가 국보인지에 대한 설명이 특히 와 닿았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귀중한 '기록 유산'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뿐 아니라 전략과 전술, 일반 백성 모습까지 고스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누군가의 일기도 내용에 따라서는 국가 1급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저도 일기를 열심히 써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선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과연 '충'무공이다 싶더군요. 

1968년과 70년, 중국에서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 한나라의 가장 중요했던 유물이 나온 곳이 우리나라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910년대, 일본 학자의 낙랑 고분군 발굴에서 수습된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인데, 손바닥만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정말 엄청나더군요. 중요한 유물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러한 국보들의 입수, 보존 경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라면 간송 전형필 관련 일화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 중에서 특히 훈민정음 혜레본을 입수한 경위가 인상적이었어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지하 조직원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가보를 판 것이라고 하거든요. 이 항목에서 훈민정음은 오롯이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도 나왔었던 승려 신미 창제설의 경우, 신미는 산스크리트어의 자음, 모음 설명에 그쳤다는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식입니다. 훗날 문종이 된 세자와 정의 공주의 도움이 오히려 컸다는데, 특히 정의 공주 관련 사료들을 보면 공주는 정말 똑똑했었나 보더라고요. 신미보다는 정의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와는 반대인 문화재 훼손과 도난 등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내용이 많았습니다. 훼손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억지로 복원해서 망가진 문화재들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석굴암이야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 떡칠을 해서 복원에 십 수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던가, 부석사 무량수전의 해체 복원 때 철물을 사용하여 건물을 망쳐놓았고 해체 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내용은 화가 날 정도였어요. 물론 불국사 복원 같이 광복 후 복원도 엉망인건 사실입니다. 개발 독재 시대 성과 주의에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습성이 결합된 아쉬운 결과물들이지요. 지금이라도 다시 잘 복원하기를 바랍니다. 제 생전에 제대로 복원된 유물을 볼 수 있도록요.

국보 도난 사건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 2019년 말 기준으로 도난 피해를 입은 국가지정문화재는 2,438점이었고 이 중 1,552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니 놀랍습니다. 문화재 도둑들에게는 제발 천벌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200명이나 되는 괴한을 동원하여 해체 후 도쿄로 빼내려던 다나카 미쓰아키의 계획이 실패했던 사건, 해방 후 미국에 국보급 백자를 팔아먹으려는 시도를 막아내었다는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의 활약 등은 다행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국내로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일은 안타깝더군요. 이런 일은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쉽고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으며, 도판도 좋습니다. 단순한 국보 사진이야 인터넷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긴 한데, 일제 강점기 등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이 많이 수록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문화재가 어떻게 방치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에요. 수학여행 때 첨성대를 둘러싸고, 올라거서 찍은 사진을 보면, 이래서야 도굴만 문제는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책 초반부를 장식하는 무령왕릉 발굴과 유물에 대한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 관련 이야기, 백제 금동 대향로 이야기 등 다른 자료를 통해 많이 접했던 이야기가 제법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국보와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