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조선을 깨우다 2 - 김영철 지음/일리 |
갓과 도포 차림으로 미국에 간 일행은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청의 분노로 박정양은 귀국하게 됩니다. 약속을 어기고 자주외교를 시도했던 탓이었지요. 그래서 외교적으로 딱히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영어 열풍에 일조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건 일행 중 이하영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하영은 조선 미국 공사관 근무자 알렌과 함께 일하며 3년간 일상 영어를 배운 이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일행 중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어서 미국 적응애도 성공했으며, 심지어 이하영은 미국으로부터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오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무려 16만 5천 달러를 로비 비용으로 쓰며 미국 사교계를 주름잡기까지 했습니다.귀국 후 일제 강점기에는 고무신 회사 대륙 고무 사장으로 거부가 되었고요. 원래는 찹쌀떡 장수였던 이하영이 성공을 이룬건 영어 하나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성공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영어에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또한 주미공사 일행들이 귀국 후 조선 정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외국어로서의 영어의 지위를 탄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갑오개혁의 요직이 이들로 채워지게 되니까요. 삼국간섭 후에는 내각 모든 자리를 영어파가 차지했고요.
친미파, 친러파가 뭉쳐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 구도였는데, 을미사변 직후 친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아관파천 성공으로 친일내각은 붕괴하고 그 자리는 다시 친미파, 영어파가 맡게 되고요.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에 있으니 당연히 친러파도 득세하는데, 친러파는 친미파처럼 영어를 배운 사람보다는 러시아 통역 김홍륙이 실세가 되었다는게 재미있네요. 친미와 친러파가 세력 다툼은 친러파 승리로 끝나고, 대한제국 성립과 패망까지 친미, 영어파가 세력을 회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벼슬아치 중 누구라도 러시아어 전문가가 있었다면 이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도 궁금합니다.
친미파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영어 보급은 더 확대됩니다. 앞서 이하영의 출세담이 세간에 널리 회자되기도 했고, 고종도 미국에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황태자도 영어 교육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또 갑오개혁 때 영어파가 권력을 잡고 학교 계혁을 주도한 것도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어요. 영어 학교는 지원금만해도 일어 학교의 3배나 될 정도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거든요. 성적이 저조하면 가차없이 낙급시키고, 학업 부진으로 쫓겨나면 관보 게제 및 다른 학교 입학과 관공서 업무를 하는게 배제될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규정에도 불고하고 1897년부터 16년간 거의 1,000에 가까운 입학생 중 졸업생은 79명에 불과했다니, 영어가 많이 어려웠긴 했나 봅니다만. (그래서 제가 영어를 못하는 듯....)
학교 외에도 외국인이 근무하던 제중원, 그리고 개인 교습이나 YMCA 등을 통한 영어 교육이 이루어져 점차 영어에 익숙한 인물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활동했던 499명의 외국인 선교사들, 고용 외국인들도 어학 보급은 물론 외국 문화 보급에 큰 역할을 했고요.
이런 영어 보급 와중에 독립 신문 등 초창기 신문들이 영어 판이나 영어 기사를 정기적으로 발행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서재필이 미국 시민이라서 미국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는건 문제였지만요. 예를 들어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이 넘어간걸 최선의 정책이라고 했다니, 독립과 애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지요. 게다가 기독교에 대한 찬양도 도가 지나쳤고요. 오히려 독립문을 세울 때 이완용이 했다는 연설 -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같이 망하든지 사람 하기에 다르겠지만,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 이 더 애국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후 유럽과의 외교를 위한 노력도 치열하게 이루어졌고, 공사들은 당연히 영어 능력자들이었습니다. 허나 외교적인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가쓰라 태프트 밀약, 러일 전쟁 등으로 조선은 패망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친미파 윤치호는 반미로 돌아서는데 그 이유는 루스벨트가 일본 침략을 옹호했기 때문이라네요. 침략을 옹호했다고 침략자에 붙어먹는건 뭐하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을사늑약 후 영어 수업은 대폭 축소됩니다. 그러나 미국 유학의 인기가 높아지고, 독립을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는 등 영어의 위상은 되려 높아만 갑니다. 무엇보다도 입시의 핵심 과목이 되어 영어는 출세를 위해서는 꼭 배워야 하는 학문이 되고 맙니다. 경성 제국 대학의 시험 과목이 국어, 영어, 수학이었던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2차대전 와중에는 영어가 잠시 금지된 적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다시 영어 인기는 치솟게 됩니다. 고등교육 이수 및 유학 등의 경험이 있는 친일파들이 중용된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반공을 내세운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건 통탄할 일이지요.
이런 영어를 중심으로 한 당대 조선의 역사적 흐름에 더해, 영어 교육 방법에 대한 소개도 상세합니다. 회화 중심의 초기 단계를 벗어난 이후에는 읽기, 쓰기 위주의 교육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서당식 교육 방법을 답습했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식 영어 교육이 이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는군요. 전근대적으로 보였던 서당식 암기 위주 영어 교육은 오히려 단기간에 수천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식으로 영어 구사능력을 높이는데 좋았다니 놀랍습니다. 오히려 독해 위주이며, 시험에서 점수를 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일제 강점기 시대 변질된 영어 교육이 조선 - 그리고 독립 후 한국 - 의 영어 구사 능력에 발목을 잡은겁니다. 일제강점기이후 회화가 아닌, 문법 규칙에만 얽메이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결국 시험 시장은 크게 성장하지만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는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방식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하여간, 일본은 뭐 하나 도움이 안되네요.
이외에도 영어와 함께 보급된 외국 문화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커피나 사진관, 손탁 호텔 등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 이미 접했던 이야기라 실망했습니다. 아예 이런 항목만 다룬 미시사 서적 - 커피, 사진, 호텔 - 도 따로 있으며, 영어 전파와 그렇게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서 구태여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단발성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인상적인게 없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영국 여행가 비숍의 식견입니다. 그녀는 조선인의 게으름의 원인이 관리들의 착취 때문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최소한의 의식주 이상의 물건은 빼앗기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면서요. 즉 조선의 패망은 수탈을 자행한 지배층의 문제로 귀결되는 셈입니다. 지금 MZ와 알파 세대라 불리우는 청춘들을 위해서, 반드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주는 건전한 사회로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소 불만이 없지는 않으나, 영어를 토대로 조선 후기 ~ 근대에 이르는 조선 정부의 난맥상과 사회 분위기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미시사 서적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런저런 생각할거리도 많이 주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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