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본색 - 이재정 지음/책과함께 |
대표적인건 왜 조선에서는 금속 활자를 많이 만들었는지? 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태종부터 금속활자 계미자를 만든 이유를 인쇄 목적이라고 천명했지만, 어차피 똑같은 서적을 찍을 거라면 목판본으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 수 있습니다. 금속 활자로 인쇄할 수 있는건 하루에 많아야 20장 정도가 한계였다니 그다지 가성비가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때문에 저자는 왕들이 힘과 돈을 써 가며 금속 활자를 만든 이유를 왕권 강화, 왕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컸다고 풀이합니다. 문치주의, 유교 문화 영향 아래에서 사치의 상징으로 내세울게 금속 활자였다는 해석이지요. 정조를 도와 활자 정유자를 만든 서명응이 이를 '부서', 즉 상서로운 징조이자 왕권의 상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고요. 제왕의 상징인 '구정'과 같은 구리로 만들어서 그랬다는 해석은 참신했습니다. 때문에 왕권이 강했고, 나름 국력과 왕권이 강했던 시기에 많이 주조되었던게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고요. 활자로 당시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는게 재미있는데, 이런걸 보면 정조대왕 시기가 일종의 조선 후기 마지막 번영기였다는건 틀림이 없는 사실 같습니다. 화성이라는 거대한 건설 사업에 각종 기록들은 물론이고, 금속활자도 가장 많이 주조했다고 하니까요.
왕의 서체를 직접 활자에 반영한다던가, '역적' 안평대군의 서체로 만들어졌던 활자를 없애고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그를 대체한 것도 같은 이유였을겁니다. 기껏 애써 만든 활자를 활용해서 많은 책을 출판하지 않은 것도, 왕의 것이라 아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민간에서도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족보를 위조해서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는 새로왔습니다. 목판은 족보 위조 시 판 하나를 갈아치워야 하지만 금속활자는 이름만 바꾸면 되었기 때문에 간편했다나요. 하지만 결국 민간에서 활자 제작하는걸 막을 수 없었고, 심지어 국력이 약했을 때는 민간 활자를 징발해 책을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각 활자별 분류도 상세합니다. 어떤 왕이 어떤 활자를 만들었고, 각 활자별로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알려주는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신답게 조선시대 금속 활자를 망라하고 있는 도판이 아주 좋습니다. 상세할 뿐더러 초반부의 해서체에서 후반부 명조체로 이동하는 일련의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많이 친숙한 명조체는 원래 송나라 시대 목판 인쇄가 성행하면서 판목에 글자를 새기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사용은 명나라 시기부터였고, 이 서체가 서양 납활자로 만들어진 후 일본에 도입된게 현재 명조체의 기원이 되었다는 역사는 처음 알았네요.
또 서체의 변화는 한자 서체와 함께 한글 서체도 함께 알려주는데, 한자보다 한글이 서체의 변화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한 디자인 변형을 보여주거든요. 극초기 훈민정음 창제 시기의 서체가 한자 서체와 유사하게 정방형 구조 안에 글자를 넣었고, 창제 원리에 맞게 점, 선, 그리고 네모 형태 기준으로 조합하는 디자인이라 더 모듈화된 느낌을 전해주었고, 그래서 형태적으로는 현대적인 고딕 서체와 거의 동일했다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모던한 서체였던 셈이네요. 이러한 초창기 맛이 이후 한자 서체의 해서체를 바탕으로 한글 서체가 발전되어 사라졌다는게 조금 아쉽습니다. 다시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보아도 멋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활자의 제작 방식과 실제 활용 - 출판 - 등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습니다. 활자로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간행되었던 책들을 기준으로 알려주는데, 한자와 한글이 섞인 책의 레이아웃 구성 비교가 재미있었어요. 글의 중요도에 따라 나누어 인쇄했는데, 현재의 '마스터 페이지' 개념이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활자 제작 방식은 일종의 모래 거푸집을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줍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지는 못했을테니 국가적인 사업이 맞았고, 당연히 왕권이 강했어야 했겠어요. 지금 기술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게 아쉬운데, 제대로 복원이 되면 좋겠습니다.
또 활자를 어떻게 조판했는지, 어떻게 활자 제작 기술이 발달했는지, 심지어 종이와 먹, 인쇄와 제본, 활자와 책을 만든 장인들과 기관명에 대한 소개까지 이어지는데, 두 종류의 먹 중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먹보다 각종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사용한 유연먹이 금속활자 인쇄에 유리했다는 등의 토막 상식도 재미있었어요. 금속 재질에 기름으로 만든 먹이 더 잘 달라붙었다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마지막의 활자 보관장은 처음보는 가구인데, 어떻게 활자를 분류해서 넣었는지를 짤막하게나마 알려주어서 좋았습니다. 나름 부수를 통합하거나 분리했는데, 저자는 단지 부수별로 구분하면 글자수 편차가 심하니, 자주 쓰는 글자는 찾기 쉬운 서랍에 넣고, 나머지 글자들은 부수를 줄여 적당히 모아 놓은 방식이었을거라 추측합니다. 그래도 조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활자가 어느 서랍에 있는지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을텐데, 정말 전문가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 중반부까지의 설명에 비해 뒷부분 설명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은 듭니다. 책 한 권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조선의 금속활자에 대한 모든걸 망라하여 쉽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비교대상을 찾기 힘든 좋은 미시사 책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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