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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7

성운아 (星雲児 聖・少年戦士伝) 1~6 - 이케가미 료이치 : 별점 1.5점

'뇌제'는 지구를 파괴시켰다. 우주를 지배하기 위해 5개의 보주를 모아야 했는데, 보주 1개가 지구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택받은 소년 히마코토 이쿠루가 성모의 도움으로 지구의 보주를 입수했고, 보주를 가진 5명의 성전사를 모아 지구 부활 및 뇌제 처단을 위한 모험에 나서는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이케가미 료이치의 '소년 SF 판타지 액션 만화'입니다. 소년 선데이 연재작이지요. 국내에도 1권만 해적판이 소개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잊고 살았는데, 우연히 만보님의 리뷰를 읽고(잘 계시지요?) 찾아보게 되었네요.

무려 40여 년 전 작품이지만 이케가미 료이치의 작화는 압도적입니다. SF 판타지에 걸맞는 세세한 디자인들도 중반부까지는 나쁘지 않고요. 이즈부치 유타카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이 디자인을 맡은 덕분이겠지요. 

이야기도 두 번째 보주를 찾기 위해 향한 혹성 제피로스 에피소드까지는 재미있습니다. 특히 생명통화 '다나피아' 설정이 기억에 남네요. 뇌제는 다나피아를 전투대회 우승자에게 준다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생명통화라는 말 그대로, 많이 얻으면 그만큼 수명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에 혹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 대회에 참여했다가 무참히 죽어갑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다나피아는 전투 대회 희생자들을 통해 만들고 있었습니다! "소일런트 그린"이나 데즈카 오사무의 "2100년 보더플래닛"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는, 80년대에 유행했던 SF적인 반전으로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제피로스의 전투 대회도 단순히 격투 액션이 아니라 경주차 레이스까지 펼치는 풍성함이 좋았고요.

하지만 솔직히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출하 엔딩' 탓이겠지만 제피로스 에피소드 이후 심각할 정도로 줄어든 분량입니다. 앞 부분, 그러니까 기본 설정(5개의 보주와 성전사 등)과 마코토가 첫 번째 성전사 로고스를 만나는 제피로스 에피소드까지는 4권의 분량이 소모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세 명의 성전사와 보주를 입수하고, 뇌제를 물리치는 결말까지는 2권 분량 뿐입니다. 앞서의 분량을 감안하면, 나머지 세 명의 성전사와 함께 하기까지는 최소 6권 분량은 필요했는데 말이지요. 이래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분량이 부족한 탓에 보주도 제피로스에서처럼 어렵게 구하지도 않습니다. 동료가 되면 보주도 그냥 굴러들어오는 식이고, 심지어 메이야는 원래부터 보주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 연재분 한 편 분량으로 이루어진 결말은 특히 최악입니다. 뇌제가 우주를 창조했고, 5개의 보주를 모아 제대로 된 우주를 다시 창조할 수 있다 운운하는 결말은 대사만 오갈 뿐, 뇌제의 강력함이나 보주의 능력 따위는 전혀 와 닿게 묘사되지 못하거든요. 그야말로 "소드 마스터 야마토"와 다를게 없는 셈입니다.

당대 고전 SF 판타지를 지나치게 의식한 설정들도 눈에 거슬립니다. 제피로스 전투대회의 경주차 레이스는 "매드맥스 2"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바루루와 합류하는 에피소드의 수인들은 누가 봐도 "스타워즈"의 이워크이며, 바슈크가 성전사가 된다는 일종의 반전 역시 다스베이더 느낌이고요. 이는 신선하다고 볼 여지가 없지는 않은데, 분량 부족으로 전개가 엉망이라 급작스럽게 등장하여 소모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등장하는 여러 악당들, 기계 장치 및 여러 설정 디자인도 뒤로 가면 갈 수록 엉망입니다. 출하 엔딩이 결정된 후, 디자인을 맡은 전문가들도 기용되지 않았던걸까요? 전혀 SF스럽지도 않고, 유치해서 보기가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반부는 분명 괜찮았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더 큽니다. 만보님 리뷰에 쓰여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2024/04/23

IMBA 선정 20세기 최고의 미스터리 100선

미국 독립 미스터리 전문 서점 협회(Independent Mystery Booksellers Association)의 회원들이 선정한 20세기의 미스터리 소설 100선입니다.
출처는 dcinside 추리소설 갤러리입니다. 원글은 이 곳에서 확인하세요.

100편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리뷰를 올린 작품은 모두 링크를 걸어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The Tiger in the Smoke - 마저리 앨링엄 (Allingham, Margery) (1952)
4. Aunt Dimity's Death - 낸시 애서튼 (Atherton, Nancy) (1992)
5. In the Heat of the Night - 존 볼 (Ball, John) (1965) / 국내 출간: 밤의 열기 속에서 (하서출판사)
6. Sheer Torture - 로버트 버나드 (Barnard, Robert) (1982)
7. Track of the Cat - 네바다 바 (Barr, Nevada) (1993)
8. The Beast Must Die - 니콜라스 블레이크 (Blake, Nicholas) (1938) / 국내 출간: 야수는 죽어야 한다 (황금가지)
9. When the Sacred Ginmill Closes - 로렌스 블록 (Block, Lawrence) (1986)
11. The Fabulous Clipjoint - 프레드릭 브라운 (Brown, Fredric) (1947)
12. The Thirty-Nine Steps - 존 버컨 (Buchan, John) (1915) / 국내 출간: 39계단 (문예출판사)
13. Black Cherry Blues - 제임스 리 버크 (Burke, James Lee) (1989)
15. The Thin Woman - 도로시 캔넬 (Cannell, Dorothy) (1984)
17. Thus Was Adonis Murderd - 새라 코드웰 (Caudwell, Sarah) (1981)
18. The Big Sleep - 레이먼드 챈들러 (Chandler, Raymond) (1939) / 국내 출간: 빅 슬립 (문학동네)
19. The Murder of Roger Ackroyd - 애거서 크리스티 (Christie, Agatha) (1926) / 국내 출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황금가지)
20. The Concrete Blonde - 마이클 코넬리 (Connelly, Michael) (1994) / 국내 출간: 콘크리트 블론드 (알에이치코리아)
21. The Man Who Liked Slow Tomatoes - K. C. 콘스탄틴 (Constantine, K. C.) (1982)
22. The Monkey's Raincoat - 로버트 크레이스 (Crais, Robert) (1987) / 국내 출간: 몽키스 레인코트 (노블마인)
23. The Moving Toyshop - 에드먼드 크리스핀 (Crispin, Edmund) (1946)
24. Dreaming of the Bones - 데보라 크롬비 (Crombie, Deborah) (1997)
25. The Last Good Kiss - 제임스 크럼리 (Crumley, James) (1978)
26. The Yellow Room Conspiracy - 피터 디킨슨 (Dickinson, Peter) (1994)
29. Booked to Die - 존 더닝 (Dunning, John) (1992)
30. Old Bones - 아론 엘킨스 (Elkins, Aaron) (1987)
32. Time and Again - 잭 피니 (Finney, Jack) (1970)
33. Who in Hell Is Wanda Fuca? - G. M. 포드 (Frod, G. M.) (1995)
35. The Hours Before Dawn - 실리아 프렘린 (Fremlin, Celia) (1958)
36. A Great Deliverance - 엘리자베스 조지 (George, Elizabeth) (1988) / 국내 출간: 성스러운 살인 (현대문학)
37. Smallbone Deceased - 마이클 길버트 (Gilbert, Michael) (1950)
38. “A" Is for Alibi - 수 그래프턴 (Grafton, Sue) (1982) / 국내 출간: 여형사 K (큰나무)
39. The Killings at Badger's Drift - 캐롤라인 그레이엄 (Graham, Caroline) (1987)
40. The Man With the Load of Mischief - 마사 그라임즈 (Grimes, Martha) (1981)
43. The Silence of the Lambs - 토머스 해리스 (Harris, Thomas) (1988) / 국내 출간: 양들의 침묵 (나무의철학)
44. Tourist Season - 칼 하이어센 (Hiaasen, Carl) (1986)
46. On Beulah Height - 레지널드 힐 (Hill, Reginald) (1998)
47. A Thief of Time - 토니 힐러먼 (Hillerman, Tony) (1988) / 국내 출간: 시간의 도둑 (고려원미디어)
48. Cotton Comes to Harlem - 체스터 하임즈 (Himes, Chester) (1964)
49. Hamlet, Revenge! - 마이클 이네스 (Innes, Michael) (1937)
53. When the Bough Breaks - 조너선 켈러먼 (Kellerman, Jonathan) (1985) / 국내 출간: 큰 가지가 부러질 때 (청담문학사)
54. The Beekeeper's Apprentice - 로리 킹 (King, Laurie) (1994)
55. Dark Nantucket Noon - 제인 랭턴 (Langton, Jane) (1975)
57. To Kill a Mockingbird - 하퍼 리 (Lee, Harper) (1960) / 국내 출간: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59. Get Shorty - 엘모어 레너드 (Leonard, Elmore) (1990)
60. Sleeping Dog - 딕 록티 (Lochte, Dick) (1985)
61. Rough Cider - 피터 러브시 (Lovesy, Peter) (1986)
63. The List of Adrian Messenger - 필립 맥도널드 (MacDonald, Philip) (1959)
65. Bootlegger's Daughter - 마거릿 마론 (Maron, Margaret) (1992)
66. Death of a Peer - 나이오 마시 (Marsh, Ngaio) (1940)
67. Sadie When She Died - 에드 맥베인 (McBain, Ed) (1972)
68. The Sunday Hangman - 제임스 매클루어 (McClure, James) (1977)
69. If I Ever Rreturn, Pretty Peggy-O - 섀린 매크럼 (McCrumb, Sharyn) (1990)
70. A Stranger in My Grave - 마거릿 밀러 (Miller, Margaret) (1960) / 내 출간: 내 무덤에 묻힌 사람 (엘릭시르)
71. Devil in a Blue Dress - 월터 모즐리 (Mosley, Walter) (1988)
72. Edwin of the Iron Shoes - 마르샤 물러 (Muller, Marcia) (1977) / 국내 출간: 세계 여성 작가 서스펜스 걸작선 ‘쇠구두를 신은 에드윈’ (고려원미디어)
73. Death's Bright Angel - 자넷 닐 (Neel, Janet) (1988)
74. Mallory's Oracle - 캐럴 오코넬 (O'Connell, Carol) (1994)
75. Child of Silence - 애비게일 파젯 (Padgett, Abigail) (1993)
76. Deadlock - 새라 패러츠키 (Paretsky, Sara) (1984)
77. Looking for Rachel Wallace - 로버트 파커 (Parker, Robert) (1980)
79. Vanishing Act - 토머스 페리 (Perry, Thomas) (1995)
80. Crocodile on the Sandback - 엘리자베스 피터스 (Peters, Elizabeth) (1975)
81. One Corpse Too Many - 엘리스 피터스 (Peters, Ellis) (1979) / 국내 출간: 99번째 주검 (북하우스)
82. Blue Lonesome - 빌 프론지니 (Pronzini, Bill) (1995)
84. No More Dying Then - 루스 렌델 (Rendell, Ruth) (1971)
85. The Wrong Murder - 크레이그 라이스 (Rice, Craig) (1940)
87. Blood at the Root - 피터 로빈슨 (Robinson, Peter) (1997)
89. A Broken Vessel - 케이트 로스 (Ross, Kate) (1994)
90. Concourse - S. J. 로잰 (Rozan, S. J.) (1995)
91. Murder Must Advertise - 도로시 L. 세이어즈 (Sayers, Dorothy L.) (1933) / 국내 출간: 살인은 광고된다 (블루프린트) (ebook), 광고하는 살인 (동안)
95. Chinaman's Chance - 로스 토머스 (Thomas, Ross) (1978)
96. A Test of Wills - 찰스 토드 (Todd, Charles) (1996)
98. The Sands of Windee - 아서 업필드 (Upfield, Arthur) (1931)
100. Sanibel Flats - 랜디 웨인 화이트 (White, Randy Wayne) (1990)

다른 유사 리스트와 구분되는 특징이라면 한 작가 당 하나의 작품만 꼽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개되는 작가들이 다른 리스트에 비하면 훨씬 많고, 다른 리스트에서 찾아보기 힘든 작품들 - 예를 들자면 "스트라이크 살인" - 도 눈에 뜨이지요.

하지만 영미권, 특히 미국 작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단점이 큽니다. 몇 안되는 유럽 작품에 "뒤마 클럽"이 속한 것도 납득불가고요. 작가별 대표작들도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87분서 시리즈'라면 당연히 "살의의 쐐기"를 꼽아야 하지 않을까요? 온갖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망라하면서 정작 제임스 엘로이의 작품이 없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참고 수준에 그칠 리스트입니다. 어차피 작품 선정 기준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으니 당연하겠지만요.

2023/07/0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5. 즌부리코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5. 즌부리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사오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주면 먹고, 차를 내밀면 조용히 마셨다. 목적지도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마이코의 코트에 감싸여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차 여행 내내, 약한 비가 모든 곳에서 끝없이 내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들은 언제나 익숙한 표정과 모습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둘만 이질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타미의 바다는 하늘과 같은 회색으로 저 멀리에서 그대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다. 후지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후지산이 보이지 않는게 이 여행에 더 어울렸다.

토시오는 미시마에 내려 곧바로 공중전화로 에토를 불렀다. 에토는 상대가 토시오라는 것을 알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카츠? 라디오 들었어?"
"안 들었어."
에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살인 용의자와 함께 도망쳤다는 게 정말이야? 방금 뉴스에서 들었어."
오랜만에 듣는 에토의 억양에는 사투리가 돌아와 있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그보다 여관 방 하나만 잡아줘."
"그건 맡겨 둬, 지금 어디야?"
"미시마 역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거야? 되도록이면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 슈젠지까지 갈 수 있을까?"
"야, 잠깐만.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해. 이렇게 해. 오히토(大仁)에서 내려서 상가를 지나 가노가와(狩野川)의 오히토 다리 쪽으로 걸어가. 그러면 내가 차로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자 마사오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는 건가요?"
"당신이 신경쓰실 일은 없습니다."
토시오는 그렇게 말하고 걸어 나갔다.
미시마에서 이즈 하코네 철도를 탔다. 차 안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에토의 말에 따르면, 자신도 뉴스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토시오는 전철 구석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마사오의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전철은 느리고 정차역이 많았다. 오히토까지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오히토에서 내리는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적지도 않았다. 토시오는 에토의 배려를 알게된게 기뻤다.
오히토 역을 나와 앞에 있는 짧은 언덕을 오르면, 옆 쪽으로 상가가 펼쳐져 있었다. 상가를 오른쪽으로 가면 가노가와 강이 나온다고 에토는 말했다. 상가에 들어서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차가운 비바람이 거세게 두 사람을 감쌌다.
우산을 샀다. 비는 약하게 내렸지만, 우산을 쓰는게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상점가는 길지 않았다. 상점가 끝에서 제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걷고 있던 두 사람 곁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푸른색 경트럭이었다. 운전석에서 에토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로 봐서는 아주 건강해 보이네."
에토는 두 사람을 차에 태우며 말했다. 차 안은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미안해…."
토시오가 말했다.
"아냐, 오히려 날 기억해줘서 고마운걸."
에토는 뻣뻣한 얼굴의 수염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구마사카에 친숙한 여관이 하나 있어. 작지만 조용하지. 그곳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차는 가노강을 건넜다. 넓고 깊은 강바닥은 검은 돌로 채워져 있고, 물은 그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노강을 건너자 차는 좌회전해 제방 위를 달렸다. 건너편 제방 위를 달리는 차의 불빛이 작게 이어졌다.
여관으로 향하면서 에토는 자기 얘기만 했다. 약혼녀가 미인이라는 것, 일이 바쁘다는 것 등이었다.
제방을 내려와 밭을 지나 낮은 산자락을 돌았다. 산 중턱에 성처럼 생긴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히토 산이야. 아무리 채굴해도 더 이상은 광물이 나오지 않지만 폐광은 남아 있어. 여름에도 그 안은 시원하지."
좁은 길을 한참 달리다 '섬집'이라고 적힌, 불이 켜진 작은 간판 아래에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줘."
에토가 말했다.
"그리고 너 이름은 야마다 타로야. 한심한 이름이지만 워낙 급했으니 참아줘."
작지만 잘 정돈된 숙소였다.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은 별채로 안내되었다. 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조용하네."
마사오가 중얼거렸다.
토시오는 유카타와 단젠 (*일본의 남성용 겨울 실내복)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식판이 정리되자 마사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거짓말 같네요........ ......"
마사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에요. 하지만 카츠 씨까지 도망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이 곤경에 처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어요. 어떤 행운이 닥쳐오더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당신이 체포되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면 죽습니다."
"사형에 처해지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 같은 거에요. 사람을 죽여도, 안 죽여도 마찬가지에요."
마사오는 멍하니 말했다.
"당신이 죄가 있다는게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입니다."
마사오의 침착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시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경찰의 손에서 구해냈고, 앞으로도 운명을 함께 할 겁니다."
".... 내가 살인자라고요?"
마사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어요. 나한테만 숨기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면요?"
마사오는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너무 똑똑하고 아름다워요. 나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천천히 일어선 뒤, 등을 돌려 미닫이 문을 열었다. 옆 방은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마사오는 전등을 껐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져 방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단젠이 마사오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사오는 유카타의 끈을 뒤로 풀고 바닥에 떨어트렸다.
"......데츠바의 약병에 독을 넣은 것은 나에요."
마사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사오는 인형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사오에 대한 애정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그것은 광기 어린 격정으로 변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그 격정을 마사오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몸을 떼어내자 마사오는 눈을 떴다.
"...... 나, 이제 안 되겠어요."
목소리를 담은 숨결이 토시오의 어깨에 닿았다.
"안 된다는 말은 싫어요. 슬퍼지니까요.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 아닙니까?"
토시오가 말했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마사오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미로 속에 있는 것 같아요."
"...... 나사 저택의 동굴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군요."
"토모히로에게 들었어요. 토모히로는 동굴의 지도까지 만들어 놓았어요."
토시오는 문득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 동굴 어딘가에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이 있다는 것도?"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동굴에 들어갔었잖아요?"
"그야 저도 호기심은 있었으니까요. 토모히로가 죽고, 토모히로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토모히로의 지도를 믿고 동굴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겁이 났어요. 캄캄한 동굴의 맞은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
"폭포 소리예요."
"맞아요, 살아있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동굴 안에서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폭포를 보고 순간 겁이 났어요. 나는 중간에 돌아섰지만, 저렇게 큰 무대가 있는 걸 보니 토모히로가 말하는 숨겨진 재산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소우지, 카오리, 데츠바 씨 등은?"
"소우지 씨가 알았다면 바로 손을 대서 써버렸을 거에요. 카오리 씨가 알았다면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데츠바 씨가 알았다면 사업을 더 확장했을테죠."
"즉,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건 당신과 남편,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토모히로 씨는 그 재산을 혼자서만 갖고 싶었던 것이고요."
마사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 토모히로 씨의 유지를 당신이 이어받으려 한 것이군요."
마사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목구멍에 걸려서 마치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렸다.
"당신은 소우지와 인연을 끊지 못한 탓에, 토모히로 씨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속에 무겁게 쌓여 있었어요. 이번 여행에서 토모히로 씨에게 고백과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토모히로 씨가 기이한 사고를 당해 그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죄책감만 무겁게 남아 버렸죠."
"맞아요......."
"토모히로 씨의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토우이치 군까지 죽었죠. 토우이치 군의 죽음은 자신의 실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고였고요. 이 사고는 토모히로씨에 대한 죄책감을 더욱 더 키워서 당신이 짊어지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계속 남편을 외면하고 있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당신은 미쳤어요. 마음의 평형을 잃고 자신을 잃고 말았죠. 지금 당신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토모히로 씨에게 사과하기 위해 그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결심했죠."
마사오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귀로 흘러내렸다.
"당신의 마음속에 토모히로 씨의 인격이 들어갔습니다. 항상 토모히로 씨를 경멸하던 소우지가 미웠습니다. 소우지는 토모히로 씨의 아내까지 빼앗아 농락하고 있었으니 소우지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나는 소우지 씨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마사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노 벤키치의 역립인
형에 독침을 장치했어요. 그 인형은 오직 소우지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지가 당신에게 태엽을 감게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기계를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 있었어요."
마사오는 조용히 토시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역립인형에 독침을 장치했을 때, 당신은 이미 소우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대담해진 당신은 카오리 씨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총소리가 났을 때 나는 미로 속에 있었지요. 우다이 씨는 테츠바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요. 소우지는 방에서 막 뛰쳐나온 참이었습니다. 당신만이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어요........"
"맞아요, 나만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죠."
"그때 나는 절대로 당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죠. 그 범인은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했어요. 그런데 당신을 범인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설명이 되더라고요. 또 당신이 다가왔다면 카오리 씨도 경계를 하지 않았을테죠."
"카오리 씨를 쏜 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트릭이 사용됐어요. 나사 저택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인 사건은 모두 교활한 트릭이 사용된게 가장 큰 특징이죠. 소우지를 죽이기 위해 역립 인형을 이용했듯이,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카라쿠리 즌부리코가 사용되었어요."
"즌부리코?"
"예전에 길거리나 장터 등에서 장난감으로 만든 움직이는 오리를 팔았어요. 오리는 일반 셀룰로이드 재질로 만들어졌지만, 움직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장난감 오리 목에 실을 묶고 그 끝에 미꾸라지를 연결해 탁한 물이 담긴 수조에 넣는 거지요. 그러면 장난감 오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헤엄쳐 다니거나 먹이를 잡아먹는 듯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는 없앤 방식은 이와 같아요. 그때 당신 곁에는 연못의 오리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카오리 씨를 쏜 후 바로 종이끈으로 권총을 오리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리는 곧장 연못으로 돌아갔고요. 종이끈은 물에 녹아내리고 권총은 연못 바닥에 가라앉게 된 겁니다."
마사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그것을 패배자의 웃음으로 해석했다. 자신도 권투에서 패하고 나서 마사오처럼 웃은 적이 있었다.
"데츠바 씨의 약병에 독을 넣는 데에도 트릭이 필요했죠. 데츠바 씨는 두 자식가 죽고 나서 극도로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방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그 누구라도 거의 접근하지 못하게 했죠. 그 데츠바 씨의 약을 독약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요. 아무도 그 약병에 손도 대지 못했죠.”
"그래서 트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번 트릭에 사용된건 아무도 모르는 동굴이었고요. 당신은 데츠바 씨가 살해당하기 전날 밤, 미로에서 이어진 동굴로 데츠바 씨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든 사이, 약병의 캡슐을 독이 든 캡슐로 바꿔치기했고요. 당신은 자신말고는 나사 저택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다이 씨는 동굴을 찾아냈어요. 만약 동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누구도 당신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마사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 가지 범행은 모두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산에서 벗어난,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났어요. 그 중 첫 번째는 우다이 씨가 동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데츠바 씨의 약병 속 캡슐을 바꿔치기한건 당신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우지가 그 장소에서 역립인형을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소우지는 카라쿠리를 움직이려고 했고 당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억지로 막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되니까요. 그 결과 우리는 범인의 수법을 알게 된 겁니다. 역립인형 안에 독침을 장치해 둔 범인의 수법 말이에요. 범인은 역립인형으로 소우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죠.”
"알려지는걸 원치 않았다고요?"
마사오의 눈빛이 한 곳을 응시하며 멈췄다.
"그렇습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소우지의 시신은 무수한 장난감들 속에서 발견됐을 거예요. 역립인형은 다른 장난감들 속에 섞여 있고, 안에 장치된 독침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테고요. 당신은 범인이 외부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외부인?"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또 다른 미끼 주사기를 준비해서 나사 저택 밖에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겠죠."
"미끼 주사기......."
"그것도 오늘 우다이 씨가 찾아냈어요. 주사기 안에는 액체가 남아 있었고요. 분명 소우지를 죽인 독극물과 같은 것으로 밝혀질테죠. 바늘에는 소우지의 피가 묻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소우지에게 주사를 놓아본 당신에게 불가능한 공작은 아니였겠죠."
마사오의 눈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린 뒤 입술을 탐했다.
"...... 내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마사오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사라졌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 괜찮아요."
"다른 부분? 어디가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팔을 뻗어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 있어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 이대로, 힘을 주세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마사오의 상체가 드러났다.
토시오 밑에서 마사오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등에 팔을 두르고 몇 번이나 하얀 목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냄새를 맡았다.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토시오는 팔을 뻗었다. 토시오는 그렇게 하면서 마사오의 몸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시오의 팔은 하늘을 향해 뻗어 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마사오는 없었다.
방은 밝아져 있었다. 옆의 침구류가 가지런히 접혀서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시오는 옆방을 열었다. 정리된 책상 위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빨갛고 하얀 눈을 드러낸 마도죠가 문진으로 놓여져 있었다. 토시오는 마도죠를 치우고 종이를 손에 쥐었다.
"카츠 씨의 호의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부디 저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마사오”

…….죽으려고 하는구나. 토시오는 직감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마사오가 숙소를 떠난 시간은 7시였다. 한 시간 전이었다.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토시오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물었다. 물론 마사오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 뒤 전화가 걸려왔다. 에토였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에토가 물었다.
"......그게, 사라져버렸어."
토시오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망쳤지?"
"그래."
"이거 참… 도망가는게 유행도 아니고. 그럼 너는 어떻게 할거야?"
"......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사라져버리는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여자는 알 수가 없군."
토시오는 우스갯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에토의 말에 의심이 생겨났다.
“...정말 여자는 알 수 없네…. 라고?”
마사오는 나사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어제는 자기가 방해가 된 것이다. 마사오는 다시 한 번 동굴에 숨겨져 있는 비밀 재산을 되찾으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마사오는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무일푼으로 마사오가 따라올 거라 생각한 자신의 생각은 얄팍했다.
여종업원이 와서 아침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토시오는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가지고 온 새 손전등을 방 안의 비상용이라고 적힌 꼬리표 아래에 걸려고 했다.
"그건?"
토시오는 무심코 물었다.
"어머, 모르셨나요? 먼저 가신 손님분께서 실수로 떨어뜨려서 망가뜨렸다고 하셔서 ...... 네, 대금은 받았습니다."
마사오는 손전등을 들고 떠났다. 마사오의 행선지는 나사 저택의 동굴이다. 확실하다.
토시오는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여전히 가랑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산 우산은 그대로였다.
마이코의 코트를 입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마사오의 작은 등이 보이는 듯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7/02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4. 잠자는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4. 잠자는 인형
"그건 귀찮은데."
마이코는 호시자와에게 말했다.
"뭐가 귀찮아?"
호시자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이코도 굴복하지 않았다.
"첫째, 나는 데츠바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둘째, 아까 내가 온 것을 환영하지 않았잖아. 마지막으로, 나는 너무 바쁘다고."
"하지만 말이야. 데츠바가 죽었잖아. 그것도 너가 마침 왔을 때 말이야."
"내가 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너처럼 뚱뚱한 사신 따위가 어디있어. 혹시 너, 데츠바가 살해당할걸 알고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범인을 못 알아낸 모양이군."
호시자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라키 경감도 곤란한 상황이겠네."
"맞아. 그래서 부탁하는데, 혹시 만났을 때 경감이 뭔가 물어본다면 알고 있는건 대답해주라고."
"내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정말로 죽었다면 나 역시도 큰일이야."
"마이코가? 왜지?"
"나라키 경감이 말해주지 않았어? 데츠바는 내 마지막 증인이었다고."
"증인?"
"내가 경찰서를 그만두게 된 경위를 알고 있지? 나한테 지폐를 주고 도망친 차 사건 말이야. 그 차가 해바라기 공예의 차라는 걸 알아냈어. 데츠바는 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그럼 지폐를 마이코에게 건네준 사람은 누구였지?"
"운석에 맞아 죽은 마와리 토모히로였어."
"잠깐만. 그러면 마이코의 증인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건가."
"그래서 곤란한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마이코가 서에 돌아오게 되면 누가 가장 곤란할까?"
"교도 씨인가. 그 시끄러운 여자가 또 돌아온다고."
"다른 사람은?"
"이 사람이야. 또 실직하게 될테니."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며 말했다. 호시자와도 묘한 표정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동기는 너무 약하네. 예를 들어, 우다이 군 같은 경우는 어떨까?"
"우리 남편?"
"서에 마이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에 돌아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이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네, 그거. 하지만 그렇다면 소우지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할거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호시자와는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나라키 경감에게 가 봐."
"그 대신 교환 조건을 걸지. 마사오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건 안 돼."
"안 된다고? 왜?"
호시자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 마사오는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야."
"설마? 지금 어디에 있는데?"
"방금 전까지 카오리의 방에서 계속 조사를 받고 있었어"
"도대체 왜 그녀가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된 거지?"
호시자와는 힐끗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 말하지 않으면 나라키 경감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대로 돌아갈거라고."
"어쩔 수 없군. 마이코 상대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데츠바는 자신의 방에서 죽어 있었어. 사인은 청산성 화합물에 의한 중독사. 감식 보고는 아직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틀림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쓰러져 있던 책상 위에 약병이 놓여 있었는데, 그건 마사오가 주었던 약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마사오가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토시오가 항의했다.
"글쎄, 끝까지 들어봐. 그 약병 안에 독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어."
"그럼 그 약병 안에 독약 캡슐이 섞여 있었단 말이야?"
"그 약병이라고? 그럼 마이코는 그 약병을 알고 있는 건가?"
"토모히로의 철야 당시, 데츠바가 불편하다고 했었지. 마사오가 약은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복용하고 있느냐고 묻자, 데츠바는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아침마다 제대로 복용하고 있다고 대답하며 약병을 꺼내 보였어. 빨간 라벨이 붙어있었는데, 라벨 가장자리는 벗겨져 있었어."
"그건 중요한 증언이 될 거야. 그걸 본 사람이 또 있어? 그 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어?"
"그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소우지, 카오리........"
"모두 죽었어."
"그 약병이라면 나도 보고 있었어요."
토시오가 입을 열었다.
"라벨의 가장자리가 말려서 뒤집혀 있었어요. 틀림없어요."
"그 약병이 데츠바가 죽은 현장에 있었던거야."
마이코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약병에 독약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다는 거지?"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 약병의 캡슐에는 전부 독이 섞여 있었어."
"전부 다…….?"
마이코는 토시오와 눈을 마주쳤다. 의외의 일이었다.
"한 알도 빠짐없이?"
"그래, 한 알도 남김없이. 당연히 자살은 아니야. 자살을 하려면 모든 캡슐에 독약을 넣고 그 중에서 한 알만 마시는 짓은 하지 않을테니."
"데츠바는 정말 그 캡슐 독을 마신게 맞아? 다른 음식에 섞여 있던건 아니야?"
"아니야. 시체를 해부하면 녹아내린 캡슐도 발견될 거야. 약병이 마이코가 본 것이라면, 약병을 범인이 준비한 독약병과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라 캡슐만 바꿔치기한 것이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데츠바가 계속 그 약을 먹고 있던건 확실해?"
마이코의 목소리가 숨을 헐떡거렸다.
"데츠바는 매일 아침마다 약을 빠뜨리지 않았어. 특히 어제 아침에는 데츠바가 그 약을 먹는 것을 동거하는 가정부가 목격했어."
"어제는 죽지 않았었으니........"
"그래. 캡슐이 바꿔치기 된 건 어제 데츠바가 약을 먹고 오늘 아침 데츠바가 약을 먹은 지 24시간 사이에 이루어진거야."
"그 동안 약병은 어디에 있었지?"
"데츠바의 주머니에 있었어."
"밤에는?"
"데츠바의 방이야. 데츠바 저택은 문단속이 엄격할 뿐 아니라, 데츠바는 두 자식이 죽고 난 뒤부터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어. 밤은 물론 낮에도 필요 없는 문은 잠가두었어. 어제 나사 저택에 있었던 사람은 데츠바, 마사오, 가정부 세 사람밖에 없었어. 나사 저택을 드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낮에 누군가가 침입해서 나사 저택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사 저택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불가능해. 게다가 데츠바는 잠을 잘 때 자기 방에 자물쇠를 잠그고 잤다고."
"자물쇠를?"
"마이코도 가 봤으니까 알겠지? 데츠바의 방은 들어가면 서양식 응접실이고, 그 안쪽에 일본식 거실이 있어. 방의 출입은 응접실 문으로만 가능한데, 그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어."
"열쇠는? 찾았어?"
"데츠바 주머니에 있었어."
"그럼 마사오라도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을 갈아 끼울 수는 없잖아."
"나라키 경감은 마사오라면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그건 왜지?"
"데츠바는 마사오를 신뢰하고 있었어. 그래서 마사오라면 데츠바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군."
"그리고 마사오가 데츠바의 주머니에서 캡슐만 빼냈다는 거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다만 마사오라면 어떻게든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더라고. 말로 잘 다독여서 말이야."
"무슨 말?"
"그건 모르지."
"무슨 말을 해야 데츠바를 속일 수 있었을까?"
마이코는 팔짱을 끼고 미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마이코는 동굴을 통과하면 데츠바의 방에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데츠바의 약병의 캡슐을 바꾼 인간,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저녁에 데츠바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누구야?"
"가정부야. 이부자리를 깔고 데츠바를 방에 들여보냈고, 데츠바가 자물쇠를 내리는 소리도 들었다는군."
"아침은?"
"평소와 똑같아. 아침을 마사오와 함께 먹고 방으로 돌아갔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들이 이곳에 모이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간부들이 모인 건 9시 반부터 10시까지였어. 그때는 이미 데츠바는 죽어 있었지."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은 결국 데츠바를 만나지 못했군?"
"그래. 시간이 되어도 데츠바는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 응답도 없었고. 마침 우리도 왔던 터라, 그 자리에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지."
"데츠바가 죽어있었군."
마이코와 토시오가 데츠바의 방에서 동굴로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데츠바는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 이봐, 마이코. 이제 그만하자. 같이 가자고."
호시자와가 손짓했지만 마이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약병의 캡슐에 대해서."
마이코는 겨우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독을 넣은 캡슐을 오래 전에 데츠바의 약병 속에 섞어 놓은 게 아닐까 싶어서."
"마사오를 감싸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왜?"
"왜라고? 마이코답지 않네.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에는 모두 독약이 섞여 있었어. 그리고 데츠바는 어제까지 살아있었고. 마이코의 말대로 이전에 독 캡슐이 투입되어 있었다면, 범인이 약병 중 몇 개의 약병에 독을 섞어 놓았는데 데츠바는 그 다음 날부터 일반 캡슐만 골라 먹다가 일반 캡슐이 다 떨어진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독약 캡슐에 손을 댔다는거라고."
"그건 안 되나?"
"불가능하지. 데츠바는 일일이 캡슐을 고르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어. 누구나 하듯 약을 먹었어. 약병을 기울여 우연히 굴러나온 한 알을 집어 입에 넣는 거지. 가정부도 그렇게 증언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우연히 평범한 캡슐만 데츠바의 손바닥 위로 굴러나왔다는 것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
"절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을거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호시자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사관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라키 경감의 표정이 달라져있었다. 수사 도중 그의 눈앞에서 사람이 또, 세명이나 살해당한 것이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임에 틀림없다.
나라키는 끈질기게 질문을 반복했지만, 토시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로의 중심부에 동굴이 있다는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라키는 동굴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라키가 알고싶어한건 마이코가 자주 나사 저택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토시오는 자신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토시오를 대신해 마이코가 불려갔다. 마이코도 나라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이코가 카오리의 아틀리에에 배치된 수사본부에 들어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이코는 돌아와서 말했다,
"생각보다 마사오에 대한 혐의가 짙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사오 씨는 어디 계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데츠바의 응접실인 것 같아. 감시를 받고 있다는군.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요코누마 씨에게 보고서를 전달해야 해. 오늘 중으로 전달하기로 약속했거든. 대동 흥신소에 가야 해."
마사오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곁에 있으면서도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사오 씨는 어떻게 될까요?"
"저런 상태라면 구금될지도 모르겠어."
"우다이 씨는 정말 마사오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 데츠바가 죽어 있는 상태가 저렇다고 가정하면 말이야."
토시오는 침착함을 잃었다. 마사오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어느새 토시오의 손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구름이 낮아지고 있었다. 회색 하늘에 검은색 굵은 구름이 두 줄로,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기온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마사오가 데츠바의 캡슐에 독을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사오가 위험에 처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사 저택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마이코가 고개를 돌렸다. 토시오는 조용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마이코는 토시오의 발밑을 보았다. 토시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이코는 시선을 옮겼다.
"어?"
마이코는 한 점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사 저택을 크게 감싸고 있는 굵은 담쟁이덩굴의 뿌리 부근이었다.
"카츠 군, 보고 있어?"
토시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코가 무엇을 보고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잡초 속에 작은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이코는 몸을 숙여 눈을 땅에 가까이 가져갔다. 토시오는 별다른 관심 없이 그 빛나는 물체를 보았다.
"주사기네…… 아직 새 것이야."
마이코가 말했다.
그것은 가느다란 바늘이 빛나는 작은 주사기가 틀림없었다. 3분의 1 정도 액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왜 주사기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조금, 곤란하네."
마이코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런 걸 찾았다고 하면 또 발이 묶일 것 같아."
"제가 발견한 걸로 하고 형사에게 설명할게요."
그때의 토시오는 그저 나사 저택에 남아있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을까? 아니, 내가 남아 있을게. 너는 서류를 요코누마 씨에게 전달해줘. 전달만 해 주면 돼."
그래도 좋았다. 마이코와 헤어져 혼자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코는 에그의 문을 열고 서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전달하고 나면 사무실에 들러."
마이코는 하늘을 바라보며 에그에서 검은색 코트를 꺼냈고, 가방 속 양초와 손전등은 좌석에 올려 놓았다.
경관이 문에 매단 밧줄을 풀었다. 토시오는 에그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마이코는 경관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었다.
토시오는 도로로 나가자 속도를 줄이고 나사 저택 뒤편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잡목 숲 속에 좁은 길이 있었다. 에그를 거칠게 몰고 나아갔다.
미로 바로 뒤에 차를 세운 토시오는 에그에서 손전등을 꺼내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풀숲을 헤쳐 나가자 미로가 보였다. 인적은 없었다. 경찰은 미로 안쪽이 나사 저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듯 했다. 토시오는 미로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미로의 길은 이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중심부에 도착한 토시오는 마이코와 마찬가지로 울타리 아래를 살폈다. 곧 레버가 손에 닿았다. 세게 당기자 반응이 있었고, 중앙에 놓인 돌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몸을 날려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달리, 섬뜩함이나 공포감은 사라졌다. 손전등과 기억만 의지할 뿐이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좁은 통로를 지나 폭포가 있는 석실을 통해 동굴에서 가장 넓은 E 지점에 이르자 토시오의 심장 박동은 이미 빨라져 있었다.
마지막 돌계단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돌계단 위에 빛이 보였다. 토시오는 본능적으로 전등을 끄고 바위 그늘에 몸을 숨겼다.
빛은 천천히 움직이면서 돌계단을 내려왔다. 전등을 든 사람은 마사오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사오라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이나 놀라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마사오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자신을 알릴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용히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마사오가 돌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토시오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 부인"
전등 불빛이 멈췄다. 토시오는 계속 말했다.
"저입니다. 카츠입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전등을 켜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사오는 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토시오를 향해 서 있었다. 마사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기색은 알 수 있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계속 말하면서 다가갔다. 마사오는 뒤로 물러났다. 토시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토시오가 조용히 손전등을 비추자 마사오는 거부하는 듯 얼굴을 돌렸다.
토시오는 옆으로 다가가 손전등을 들고 있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저항하는 마사오의 힘은 너무 약했다.
"안심하고, 나를 따라오세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나직히 말했다.
"난폭한 짓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저를 어떻게 하려는거죠?"
마사오는 겁에 질린 눈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의 이런 눈빛을 전에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눈동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인, 저를 믿어주세요.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내 편? 그게 무슨 뜻이죠?"
마사오의 눈빛에 다소 침착함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쪽으로 가면 미로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어요."
토시오는 손전등을 검은 구멍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알아요."
이 말은 조금 의외였다.
"안다고요?"
"토모히로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토모히로에게 들었다고?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나가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소름끼쳐서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카츠 씨는 왜?"
그것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부인, 저를 싫어하세요?"
싫다고 대답해도 좋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싫다느니 뭐니 하는 것은 ......"
마사오는 토시오의 단호한 말투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세요. 길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려고요?"
"동굴을 지나서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미로 끝에 차를 두고 왔어요. 저와 함께 도망치시죠."
"도망친다고요?"
"조금만 더 있으면 당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올 겁니다. 데츠바 씨를 살해한 범인으로 말입니다."
"데츠바를 내가 죽였다고요 ......"
마사오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럴까봐 혼자서 나사 저택을 빠져나온거 아닌가요?"
"아니요."
부정하는 마사오의 말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마사오는 스타킹만 신고 있었다. 어떻게든 급히 도망칠 생각 뿐이었구나, 라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좁은 동굴에 들어가자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잡은 손의 촉감과 숨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시오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폭포야……. 이상하네요."
폭포의 석실에 들어서자 마사오가 작게 외쳤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소리였다.
"다리는 괜찮나요?"
토시오는 바위가 많은 길에서 말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마사오는 몇 번이나 걸려 넘어져 토시오의 가슴에 쓰러질 뻔했다. 출구가 가까워질 무렵에 두 사람은 거의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다.
미로 한가운데로 나오자 안개 같은 비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비가 오네요."
마사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시오는 아까부터 마사오의 무심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두려움이 사라진 마사오의 표정에는 천진난만함이 묻어났다.
동굴 입구를 닫고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을 잡으려 했다. 보니 손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팠나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으며 꽉 쥐고 있던 손전등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미로 출구에서 나사 저택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몸을 움츠리고 미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이 차로 도와주시는군요."
마사오는 길에 놓인 에그를 보고 말했다. 뒷좌석에는 마이코의 샌들이 놓여 있었다. 토시오는 샌들을 마사오의 발에 신겨주었다.
차를 도로로 올려놓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푸세요."
토시오가 말했다. 마사오는 뒤로 묶은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립스틱을 짙게 바르세요."
마사오는 가방을 열어 립스틱을 짙게 칠했다.
"뒷좌석에 우다이 씨의 코트가 있으니 입어보세요."
마사오는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마이코의 오렌지색 코트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사오의 행색이 많이 달라졌다.
국도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차량 검문때문인 것 같다고 토시오는 직감했다. 토시오는 에그를 길가에 세워두고 차에서 내린 뒤, 진흙투성이 옷 위에 자신의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다시 국도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예감이 맞았다. 검문이 있었지만, 경찰관들은 소형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마사오가 물었다.
"일단 슈젠지로 가죠."
토시오의 마음가짐은 정해져 있었다.
"슈젠지…… 여행 같네요."
마사오가 말했다.
"체육관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거리로 나가자 마사오가 신고 있는 마이코의 샌들이 눈에 띄었다. 토시오는 터미널 백화점에 들어갔다.
"돈이라면 있어요."
마사오는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이상하게도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갖고 싶어요."
마사오는 화려한 빨간 스카프를 보고 말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6/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3 나사 저택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3 나사 저택
"건드리지 마!"
마이코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건드릴 리 없었다. 토시오는 다다미방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이코는 데츠바 옆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데츠바의 양손 손가락이 비틀려 있었다. 죽기 직전에 데츠바는 어떤 고통에 시달렸을까. 의복 가슴 부분의 흐트러짐도 고통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방금 전에 죽었네."
마이코는 토사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검은 칠을 한 책상에는 주홍색 쟁반이 놓여 있고, 물이 반쯤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쟁반 옆에는 뚜껑이 잘 닫힌 작은 빨간 병이 놓여 있었다. 낯익은 병이었다. 병 바닥에는 여전히 몇 개의 빨간 캡슐이 들어 있었다.
마이코는 방을 둘러보았다. 방의 가구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미로로 돌아가자. 누군가 발견하면 귀찮아질테니까."
마이코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앉아있던 다다미 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다미방 안쪽으로 돌아갔다. 낡은 도구들이 쌓여 있는 방에 들어서자 마이코는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젠장 ...... 드디어 나의 마지막 증인까지 죽여버렸군……"
라는 말을 내뱉었다.

"데츠바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동굴의 세 갈래 길, 마이코가 말한 E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 토시오는 물었다.
마이코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그것은 데츠바의 죽음을 목격한 뒤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 몸을 추스르기 위한 것 같았다.
"자살이 아니야. 독약을 먹은 거야."
마이코는 그렇게 단정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병을 기억하겠지? 그건 마사오가 데츠바를 위해 준 약이었어. 만약 데츠바가 자살했다면 죽기 직전에 그 병을 놓아두었을리 없어."
"그렇군요."
"데츠바는 아침 식사 후 늘 그렇듯이 그 약을 먹었을거야."
"식사에 독극물이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토시오는 마사오가 준 약에 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지. 식사에 독이 들어있었다면 당연히 식사 중에 쓰러졌을테니까."
"식사를 누군가가 치웠을 수도 있잖아요?"
"안 돼. 책상 위의 토사물은 책상이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에서 토한 것이니까."
"컵의 물 속에 독극물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마이코는 멍하니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책상 위에 약병이 있는 이상, 독극물은 그 약에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럽지 않겠어?"
"그건 그렇긴 하지만 ......"
"당신은 마사오가 데츠바에게 건네준 약병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분명 누군가가 똑같은 캡슐에 독을 담아서, 그 약병과 똑같은 약병에 담아서 바꿔치기 한 것이겠죠."
"하지만 데츠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썼을 거야. 최근에 가족이 네 명이나 죽었으니까. 데츠바가 가지고 있는 약병을 바꿔치기 할 틈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걸."
"......독극물 캡슐을 하나만 준비해서 데츠바의 약병에 몰래 넣었다는건 어떻습니까? 카오리 씨와 소우지가 죽기 전에요. 데츠바가 아직 자기들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말입니다."
"호오......."
마이코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그럴싸한 말을 하는군. 맞아. 독약 캡슐을 하나만 넣었다면 가능성은 있어. 책상 위에 있던 약병 안에 얼마나 많은 캡슐이 남아있었을까?"
"열 알도 채 안 됐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그 약병이 캡슐로 가득 차면 몇 알 정도 들어갔을까?"
"오십 알은 들어가겠지요."
"데츠바는 그 캡슐을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습관이 있었어. 따라서 범인이 독극물을 넣었다면 거의 40일 전에 넣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역시 가장 쉽게 독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마사오야"
"독은 무엇일까요?"
"청산성 독극물인 것 같더군...... 마사오는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
"독극물은 꼭 병원이 아니어도 구할 수 있어요. 청산가리라면 도금에도 쓰이지 않나요? 해바라기 공예는 작지만 도금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
마이코는 손전등으로 동굴의 바위 하나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거울로 햇빛과 놀고 있는 것처럼 전등 불빛이 춤을 추었다.
"마사오 씨는 동기가 없어요."
토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
마이코는 무심코 말했다.
"데츠바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와리 가문의 유산은 마사오의 것이야."
"유산이라니........"
"있어."
마이코는 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건, 제니야 고헤에가 덴포 14년에 오노 벤키치에게 상담했던게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야."
"제니야 고헤에가 ......"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 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오노 벤키치의 츠루슈일록 첫머리에 적혀 있었잖아.
‘….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카네이시는 당연히 고헤에의 집이야. 비가 오든 말든 벤키치는 카네이시에 갔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었음을 알 수 있지. 카네이시에서 은밀한 회의가 있었고, 고헤에는 중요한 일을 벤키치에게 부탁했던거야. 하지만 쉽게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고심 끝에 승낙을 미루었고."
"그게 뭐였을까요?"
"다음 날들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 다음 날은 ‘도면은 진전이 없다….. ‘라고. 너무 큰 일이라서 도면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던거야. 그리고 다음 날, 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를 가지고 찾아왔어.…..구우에몬에게 맡길까, 벤키치는 고민했지. 또 다음 날,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통풍이 회복된 우타는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들었어. 이 기록은 구우에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 벤키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
"그 구우에몬이란?"
"마와리 사쿠조야."
마이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은 가명을 지을 때 아예 엉뚱한 이름으로 짓지는 않는 법이야. 그때 스승 벤키치는 칼로 베지 못하는 말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 ……..말을 베는 마와리 사쿠조, 어때? 딱 맞는 이름 아니야?"
"............"
"구우에몬은 그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번을 떠나 도망쳐 버렸어. 명목상으로는 시녀에게 손을 댔다고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야. 구우에몬은 가나자와를 떠나 오나와로 옮겨왔지."
"사쿠조의 아내는 오나와 태생이었어요."
"거기서 비롯되었겠지. 구우에몬은 생계를 위해 가나자와에서 배운 기우라기리코보시(起上り小法師)와 쌀을 먹는 쥐에서 힌트를 얻은 키츠키(きつつき)를 만들기 시작했어. 카라쿠리를 배웠던 만큼, 섬세한 일에 능했을테고. ……생활이 안정된 후, 구우에몬은 가게 이름을 츠루슈도(鶴寿堂)로 짓고, 아이에게도 도키치(東吉)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 벤키치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지 않아?"
"그렇다면 구우에몬이 물려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제니야 고헤에의 입장이 되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 모르겠습니다."
"이봐.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 고헤에는 절정의 시기였어. 나이는 칠십. 하지만 가가번에서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세간의 시기와 질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 오히려 더 강하게 느꼈을거야. 지금 손을 잡고 있는 히데미도 병이 들었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으면 내일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요도야 진고로(淀屋辰五郎)의 사례도 있다, 사소한 일로 상인이 재산을 몰수당한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시대였어. 자신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이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말했다,
"재산의 일부를 은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토시오는 생각에 잠겼다. 재산의 은닉.......그래, 그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 금화를 담은 항아리가 발굴되는 경우가 있다. 재산을 은닉하는 것은 당시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식적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제니야 고헤에의 자산이 삼백만 양이었다니 10%만 해도 삼십만 양이야. 천량상자가 삼백 개나 된다고."
마이코는 회계업자처럼 계산을 했다.
"고베에가 아무리 해운업자였더라도 그런 막대한 돈을 다른 번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노 벤키치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벤키치는 젠고 재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두뇌였어. 하지만 벤키치는 거절했어. 벤키치의 은둔 생활을 보면 상상이 가. 벤키치는 지금까지 없던 가라쿠리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번주의 눈을 피해 재산을 은닉하는 일은 꺼려했어. 너무 세속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벤키치는 고민 끝에 모든 것을 구우에몬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어."

"구우에몬이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랬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벤키치에게 푹 빠져 있었고, 동시에 제니야 고헤에의 신봉자였다고 생각되는군. 그렇지 않다면 벤키치가 구우에몬에게 상담할리도, 고헤에가 일을 맡길리도 없었을테니까."
"구우에몬은 그 일에 성공했군요?"
"그렇지. 구우에몬은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탈번 후 가나자와를 떠났지. 벤키치는 그 때 마지막 작별의 선물로 역립 인형을 주었을테고. 그리고 어떤 계획에 의해 고헤에의 재산의 일부가 이 오노와에 숨겨졌던거지. 장소는 이 동굴 안이 틀림없을거야."
"그 재산은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구우에몬은 정직한 사람이었어. 고베에의 재산을 맡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스스로 장난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던 중 가가 번에서는 결국 집정관 히데미가 죽어버려서 반대파가 득세하게 되었어. 고헤에는 공식어선의 지위를 빼앗긴 뒤, 하호쿠가타 매립공사에 착수했다가 투독사건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했고, 제니야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했어. 구우에몬은 가슴이 아팠을거야. 유산을 제니야에게 돌려주어야 했는데 불가능해져버렸으니까. 결국 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병으로 죽고 말았지."
"그 사실을 자신의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물론, 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들 도키치는 한, 두 가지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어."
"마와리 호도말씀이시죠?"
"그래. 도키치는 자신의 이름도 버린 뒤 호도라 자칭하고, 츠루슈도를 없애고 해바라기 공예라 했지. 문장까지도 바꾸었고. 이유는 하나야. 가나자와와의 인연을 끊고 고헤에의 재산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했던거야."
마이코는 손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호도는 요코하마의 도박판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그 자금은 고헤에의 재산 중 일부였을거야. 하지만 호도는 상술에 능한 사람이었어. 은닉 재산의 대부분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마이코는 계속했다,
"호도는 요코하마를 떠나 오노와로 이주했어. 물론 동굴에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야. 그리고 기괴한 나사 저택을 지었어.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이런 건물을 지은건 아까 말했듯이 이 저택에 미로 같은 것이 있어도 부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야. 그 미로는 지하 동굴의 지도이자 입구였고. 평범한 건물에 미로 따위를 만든다면, 미로는 금방 관심의 대상이 되었겠지. 그러면 미로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동굴도 발견되고 말았을테니까."
"나사 저택 전체가 입구를 숨기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미로였던 셈이군요."
"그리고 호도의 언행도 생각해보면 마찬가지야. 호도는 기행이 많은 남자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격 역시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꾸민 것이었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서 숨겨진 재산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동굴 속에 재산을 숨겨놓는건 과연 호도가 할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호도가 나사 저택을 만든 진짜 속뜻은 바로 이것이야."
"호도는 이 사실을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아마도? 미로로 그린 지도만 남겼지. 설령 아들에게 전했을지 몰라도 데츠바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어. 데츠바는 전쟁 후 가난을 경험했잖아? 만약 알았더라면 당연히 은닉 재산을 사용했을 거야. 그리고 둘러보니 이 동굴이 발견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 같아."
"누가 발견했을까요? 토모히로, 아니면 소우지?"
"둘 다겠지. 소우지는 오노 벤키치의 역립 인형을 발견했어. 역립 인형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 작은 방에 있었고........ 토모히로가 가나자와의 다카라다 노인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두 사람 뒤에 찍힌 소나무 숲의 모양이 카네이시의 소나무 숲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토모히로는 가나자와에 갔었군요"
"그렇다면 마사오도 당연히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에 대해 들었을거야. ...... 이제 가 봐야겠다."
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약한 햇살이 비췄지만,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눈에는 꽤나 눈부셨다.
마이코는 남은 양초와 손전등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의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마이코는 진흙을 털어낸 뒤, 닫힌 담벼락 문 아래로 손을 뻗었다.
물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돌판이 조용히 동굴 입구를 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미로의 문을 열었다.
"정말 잘 만들었어."
마이코는 오각형의 돌탁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타리 사이로 몸을 넣었다.
미로를 걷던 중, 미로 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을 만났다. 두 사람의 모습을 쫓고 있던 순경이었다.
"어머, 마중 나왔어요?"
마이코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
경찰관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길을 잃었어요. 출구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게 ......"
"그건 곤란하네요. 아마 이쪽인 것 같은데요."
마이코는 순경과 자리를 바꾸어 먼저 나섰다.
미로를 빠져나와 소정 쪽으로 가니 호시자와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덕분에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어요."
마이코가 지나가려고 하자,
"나라키 씨가 만나고 싶대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오호. 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구나."
"그런 게 아니야. 데츠바의 시체가 발견됐어. 이제는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고. 각오해."
마이코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5/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2. 카라쿠리 미로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2. 카라쿠리 미로
다음 날, 토시오가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이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한 장의 종이를 놓고 몰두하고 있었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차나 마시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 테이블에 가져온 종이를 펼쳤는데, 그것은 소우지의 노트에서 복사한 미로의 개략도였다.
"카츠 군, 이 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이코는 미로가 그려진 그림을 토시오 앞에 내밀었다.
"커피, 커피로, 괜찮지?"
토시오는 우물쭈물 대답하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카츠 군은 카오리와 함께 미로에 들어갔지만, 미로의 중심부에는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형과 복연결형 두 종류가 있는데, 단연결형 미로에서는 한 손을 미로 벽에 대고 진행하면 돼. 손이 항상 벽에 닿아 있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맞지?"
"맞습니다."
"이 미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다지 어려운 미로는 아니야. 그게 문제였어.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미로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네가 시도한 방법으로 미로를 진행해보았어."
마이코는 성냥개비를 꺼내 토시오에게 건넸다.
"자, 이 그림으로 네가 실제로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미로를 통과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 끝을 미로의 왼쪽 벽에 대고 조용히 따라갔다. 성냥개비는 몇 개의 막다른 골목길을 돌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오각형의 중심에 도달했다.
"어때?"
마이코가 미로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도착했어요."
"반대편 벽으로도 시도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를 오른쪽 벽에 대었다. 결과는 같았다. 성냥개비는 똑같이 마지막에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카츠 군은 그때 벽에서 손을 뗀 적은 정말 없었어? 아니면 앞만 보고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걸 빼먹은건 아니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이 그림이 잘못 그려진건 아니야. 실제로 그날 소우지가 미로를 안내할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굽이굽이마다 구석구석 확인해 두었어. 이 미로는 단지 단연결된 미로에 불과해."
"그럼 저는 왜 미로 중심부로 골인하지 못했을까요?"
커피가 나왔다. 마이코는 설탕을 컵에 듬뿍 담아 제대로 섞지도 않고 마셨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꽤나 머리를 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미로로 보여. 하지만 실제로 미로에 서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골인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어.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의 세심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
"첫째, 이 모양에 주목해야 해. 오각형말이야. 이 모양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야."
"오각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요?"
"그래. 이상하게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형태는 삼각형도 아니고, 오각형도 아니야. 언제나 사각형이야. 네모난 집,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침대, 네모난 종이, 네모난 책 ...... 인간이 보통 접하는 대부분의 물건이 네모야. 잘 정비된 도시는 반드시 바둑판의 눈처럼 깔끔한 사각형으로 구분된 길이 붙어 있기도 하고. 길을 잃기 쉬운 길은 그것의 형태와 구분이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각형의 굴곡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사각형의 굴곡으로 인식될 것 같아."
"이 미로의 모든 면이 휘어져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것도 있지. 그리고 또 하나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의 시야를 없애는거야. 미로를 나아가다가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느낌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도록.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
"그랬어요.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햄튼 코트의 미로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일부에 이런 갈림길이 쓰여 있더라고. 하지만 부채꼴 모양으로 장식성은 있을지언정, 나사 저택의 미로처럼 현기증을 유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아. 나사 저택처럼 모든 길에 현기증이 나는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또 이 미로를 자세히 보면........"
마이코는 빨간 연필을 꺼내 미로의 바른 길을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바른 길 말이야. 미로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심부를 향하게 돼. 그래서 당연히 중심부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른 길은 미로의 중심을 등지고 돌아가야만 하는 갈림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 ……. 뭐, 이것은 미로의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건 이렇게 다양한 장치를 담은 미로가 결국 단연결 미로였다는 점이야."
"단연결 미로는 안 됩니까?"
"안 돼지. 카츠군이 시도한 방법, 즉 손을 벽에 대고 나아가는 방법은 미로를 소개하는 책에는 반드시 설명되어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풀 수 있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야. 오각형 등 여러가지 장치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말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저는 미로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죠......"
"그게 핵심이야. 이 미로를 굳이 단연결로 만든 것은, 때로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이 절대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해."
"절대로 골인할 수 없는 장치?"
토시오는 무심코 미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실제로 토요일에 카츠 군이 미로 중심부에 골인하는데 실패했잖아? 그거야말로 단연결 미로 해결 방식으로는 중심부로 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그런가요?"
"다시 한 번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이코는 비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코트를 에그의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나사 저택 안에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웠다.
마이코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라키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나라키 대신 호시자와가 저택에서 나왔다.
"당신이 오면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
호시자와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혼잡한 것 같네."
마이코는 늘어선 차를 보며 말했다.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이 모였어. 사장님을 중심으로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핵심 간부를 두 명이나 잃었으니, 회사로서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일 것이다.
"데츠바씨는 잘 지냈어?"
"건강해 보여. 강인하더군. 아들과 딸을 잃고도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약한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 대단한 분이야."
"마사오 씨를 만나고 싶은데..."
"안 돼."
"안 된다고? 설마, 용의자로 지목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안 돼. 바빠서 말이야."
"언제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용건인가?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나라 공이 그렇게 시켰겠지. 변함없이 융통성 없는 남자로군."
"우리가 알면 안돼는 용건인가?"
"뭐, 됐어. 그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닐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술에 취한것 같은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아.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나쁜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거야."
"경찰이 민간인의 협조를 거부하게 된 건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괜찮지 않아? 호위병이 있어도 상관없어."
호시자와는 마지못해 차를 통과시켰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쉬고 나면 바로 돌아가. 오늘은 마사오 씨와 만날 수 없어."
라며 말렸다.
마이코는 어슬렁어슬렁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호시자와는 한 순경을 붙잡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호위병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정자의 흙에는 아직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흙에 흡수되어 신경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마이코는 정자 앞의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미로 쪽으로 걸어갔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따라 천천히 미로를 돌았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마이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라고 말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토시오도 뒤따라 달렸다. 마이코는 그대로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이코는 미로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확하게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지도대로야."
마이코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카츠 군은 왜 그날 실패했던 걸까?"
마이코는 돌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뭔가 ......."
마이코는 돌로 된 테이블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탁자 밑으로 몸을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성냥개비의 타버린 조각이었다. 끝이 씹혀서 부서져 있었다. 마이코는 지겹다는 듯 성냥개비를 탁자 밑에 버렸다.
"미로 안에 돌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토시오는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 그림에도 제대로 적혀 있어요."
마이코는 그림의 ○표를 가리켰다.
"올바른 길은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도록 되어 있군요."
"맞아. 올바른 길로 지나가면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아. …….잠깐만. 의자 앞을 지나쳤다고?"
마이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날 의자 앞을 지나쳤어?"
"네."
마이코는 지도를 두드렸다.
"이 지도에서는 의자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표시되어 있어."
마이코는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중앙을 벗어나 미로를 거꾸로 따라간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쪽에 타원형의 돌이 보였다.
"의자는 이걸 말하는거지?"
"맞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나는데요."
마이코는 몸을 굽혀 타원형 의자를 면밀히 살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마이코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의 속임수를 알아챈 것 같아."
마이코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다시 미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심부 입구의 울타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울타리의 바로 뒷편에 돌 의자가 놓여 있어."
마이코는 계속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울타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버 같은 것이 나와 있어. 잡아당겨 보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마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울타리는 마치 문처럼 움직여 오각형의 중심부 광장을 꽉 막아 버렸다.
"즉, 의자 앞의 통로가 열려있으면 ……. 이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반대로 이 중심부는 닫힌 방으로 변해버리게 돼지. 여기가 닫히면 더 이상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이코는 다시 한 번 닫혀 방처럼 변해버린 미로의 중심부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기에는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이 장난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토시오는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땅속에서 물이라도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오각형 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에 있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탁자는 튕겨져 나오듯 일어섰고, 탁자 밑에 있던 오각형의 포석이 가라앉으면서 오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구멍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구멍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꽤 깊었고, 돌계단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희미하게 불어왔다.
"이게 뭐죠?"
토시오는 깜짝 놀라며 마이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이야."
마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조경은 인공적인 도원향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었어. 정원에는 이국적인 정자, 분수, 미로, 실물 크기의 자동 인형이 놓여 있고, 동굴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
"이 동굴은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상상으로는 반반인 것 같아. 오나와라는 땅에서는 고대인의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니, 고대인이 살던 동굴을 조금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오나와라는 지명은 다혈(多穴)이라는 뜻의 '오아나(おおあな)'가 사투리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이 큰 돌 탁자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력인가요?"
"전력 따위가 아니야. 수력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들리네요."
"이 동굴은 꽤 넓은 것 같아. 연못의 물이 흘러서 동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저 레버를 당기면 그 물이 한꺼번에 흘러서 그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동굴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나사 저택은 마와리 호도가 만들었지만, 이 동굴은 호도의 아버지인 사쿠조가 만든 것 같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사쿠조는 이상향으로 이 동굴을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닌것 같아. 이 미로부터가 매우 폐쇄적이니까. 단지 재미나 장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장난은 불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동굴이 열려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미로를 닫아놓는 거군요."
"내려가 보자."
마이코는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손전등과 양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다이 씨는 미로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토시오가 놀랐다.
"마와리 가문의 철야 때 만났던 스님이 미로를 만드는 동기도 다양하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어."
마이코는 직접 촛불을 들고 손전등 쪽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지금도 이 미로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군가가 이 미로를 손질한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양초가 필요해. 만약 양초의 불이 꺼지면 산소가 없다는 뜻이니까."
마이코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구멍 옆에 섰다. 동굴의 바람이 불어서 양초의 불이 꺼져버렸다. 마이코는 불을 다시 붙인 뒤 바람을 피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뒤따라가며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돌은 검고 축축하고 가팔랐다. 동굴 안은 따뜻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이코는 돌계단 중간에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의 성냥개비 조각이 떨어져있었다. 동굴의 문이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온걸로 보였다.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계단은 꽤 깊었다.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여섯 장 정도의 넓이의 돌방이 나왔다. 바닥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하얀 거미 같은 벌레들이 도망쳐 나갔다. 석실 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나란히 눈동자처럼 열려 있었다.
"보라고."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마이코는 방금 내려온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박쥐의 손아귀처럼 녹슨 쇠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로 미로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지."
마이코는 막대기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물러섰다,
"지금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지. 호위 아저씨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이코는 두 개의 동굴 안쪽에 촛불을 비췄다.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물론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카츠 군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마이코는 촛불의 반짝임 속에서 섬뜩하게 웃었다.
토시오는 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근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론적으로 풀려고 하네."
마이코는 토시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하지만 두 동굴 어느 쪽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또 한 쪽 손을 벽에 붙이고 가야할까? 이 구멍은 꽤 길 것 같은데?"
"그럼, 우다이 씨는 어느 길이 맞는지 알 수 있나요?"
불만을 품은 듯한 토시오의 목소리에 마이코는 다시 웃었다.
"물론, 왼쪽이야."
마이코는 망설임 없이 왼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꺾는 순서를 메모해 둘까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어."
"그럼 동굴의 길찾기 지도를 찾았나요?"
"그런 것,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천장이 낮아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걸어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이코가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바라보았다.
"왁스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 내 생각이 옳았던 것 같군."
그러다 길이 다소 넓어지고 평탄해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로 접어들었다.
"봐."
마이코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구멍은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를 거야. 한쪽은 벽을 깎은 흔적이 새롭지. 그러니까 이 두 구멍이 생긴,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새로운 구멍은 동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길을 선택하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새로운 구멍은 불완전했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길 순서는 새로운 구멍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요?"
"결국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이코는 얼른 오래된 쪽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의 폭이 넓어지고, 왼쪽에 좁은 도랑이 뚫려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이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상하네. ...... 누군가가 미로의 문을 닫은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걸음을 옮길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 폭포가 있어."
"폭포가? 동굴에?"
토시오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코는 촛불을 들었다. 그 빛 끝에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가느다란 폭포였다.
폭포가 있는 곳은 꽤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석실 양 옆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고, 두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듯한 바위가 있고, 물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표면은 물보라로 빛나고, 떨어지는 물은 도랑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폭포는 두 갈래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각각 뾰족한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접시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고인 물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폭포를 바라보던 마이코가 몸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동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요?"
토시오는 마이코가 선택한 동굴에 전등을 비췄다.
"아하, 동굴의 지도가 있었군요."
마이코가 돌아보았다.
"있었어. 엄청나게 큰 녀석이."
"어디에요?"
마이코는 천장을 가리켰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땅 위에 있었어."
토시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마이코는 양초를 토시오에게 건네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 나사 저택의 주인인 마와리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했다고 하지. 장난감의 창작보다는 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작은 회사였던 츠루슈도를 해바라기 공예라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장난감 나라에나 나올 법한 나사 저택 같은 집을 지었을까?"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요?"
"아니야. 호도는 장사도 잘한걸 보면 굉장히 계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일거야. 변덕스럽게 이런 이상한 건물을 만들지는 않았을테지."
"그럼 또 다른 동기가 있었나요?"
"그래. 나는 나사 저택 같은 기괴한 건물이라면, 정원에 이상한 미로가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있을 거라는게 이유라고 생각해. 만약 일반 가정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봐. 미로만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미로에 집중되었을거야."
"그럼 미로를 만들고 싶어서 호도는 나사 저택을 만든 건가요?"
마이코의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그 미로는 왜 만들었나요?"
토시오는 그때까지 미로를 만들어야만 했던 호도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왜 미로를 만들었을까?"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오각형의 미로 그림을 펼쳤다.
 
"이건 땅에 그린 동굴의 지도인 것 같아."
"지도? ...... 에서도 이 동굴은 오각형이 아니잖아요."
"지도라는건 실물과 똑같은 축척으로 그려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도쿄의 야마노테 선의 지도는 만두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잖아. 즉, 실제 길과 그림이 상대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림은 아무리 변형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나사 저택의 미로와 이 동굴의 길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지."
"위상적?"
"오각형 미로의 입구와 골목을 잇는 길에 밧줄 하나를 놓았다고 하자. 그 밧줄에 갈림길, 즉 막다른 길에도 밧줄을 뻗어 본길과 연결해 주는 거지. 미로 안의 모든 길에 밧줄이 깔렸을 때, 밧줄을 빼내어 양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라고."
"내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융통성 없는 남자네. 로프를 훨씬 더 짧게 만들어서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될 거야."
마이코는 미로 그림을 토시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는 그림의 모서리에 나뭇가지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미로나 동굴의 길을 생각할 때 길의 길고 짧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의 굴곡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길이 아무리 구불구불하고 각이 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다만 문제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지."
"오각형의 미로와 동굴의 길이 같다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갈림길에서는 미로와 같은 방식으로 꺾어 왔던 거군요."
"맞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것 같네."
"동굴의 지도를 그리는 데 왜 이런 엉뚱한 방법을 택한 거죠?"
"호도는 일반인에게 동굴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어. 그런데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놓을 경우,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저택 안에 동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문제가 많지. 그래서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미로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생각해냈던거야."
"미로 자체가 지도였던 거군요"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지상에 크게 그린 거지. 설마 이것이 동굴의 길을 표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숨기려고 한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궁에는 왕과 크로커다일이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호도는 그저 통로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나사 저택 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마이코는 다시 한 번 지도를 훑어본 후 촛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의 굴곡은 점점 심해져 불규칙한 계단과 언덕이 이어졌고, 땅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로 둘러싸인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길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듯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각형의 미로에 대응시키면 E의 지점에 해당되지."
마이코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로의 E 지점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이코는 주변의 바위를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동굴 안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고 해. 물론 다양한 장식도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는 벽면에 많은 불상 등이 새겨져 있었어.”
"이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나요?"
"없군. 보이지 않아. 그냥 맨땅과 흙이 있을 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용주의적인 냄새가 나네요."
마이코는 바위 틈새에 몸을 넣었다.
"오각형의 미로에는 본 길에 대해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 막 여섯 번째를 지나고 있는 중이야. 내 생각대로라면 드디어 출구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 출구에 도달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길은 쉴 새 없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좁은 곳은 몸을 옆으로 눕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처음에 돌계단을 내려왔던 곳과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넓이도 거의 비슷했고,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도 있었다. 토시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는 레버가 없어."
마이코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이코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마이코의 말대로 돌계단 옆에 있던 막대가 이 방에는 없었다. 막대기뿐 아니라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 보자"
마이코가 먼저 서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 중간쯤에 뾰족뾰족한 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두꺼운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녹슨 철제 틀이 끼워져 있고, 나무 껍질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름을 바른 흔적이 있네."
문의 경첩을 보고 있던 마이코가 말했다.
마이코는 문에 살며시 체중을 실었다. 문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마이코는 촛불을 껐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해."
마이코가 작게 말했다. 토시오는 시키는 대로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문 반대편 상황을 살폈다.
마이코는 몇 숨을 쉬고 나서 문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크게 움직였다. 문 반대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희미하고 먼지가 자욱한 방이었다. 사방이 거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빛은 천장 가까이 열린 작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토시오는 어렸을 때 친구 집에 있던 낡은 창고를 떠올렸다. 바로 그 창고 안과 똑같았다. 낡은 인형, 제등, 검은 상자 더미, 큰 화로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무심코 방금 들어온 문을 닫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문은 방에 면한 쪽이 사방의 벽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당황하여 문을 찾으려고 벽을 쓰다듬고 돌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문이 없어졌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말했다. 마이코는 벽의 위아래를 살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마이코는 문이 사라진 곳의 기둥을 세게 잡아당겼다. 기둥과 벽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뒤에 기둥과 벽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코는 문을 다시 닫으면서 오른쪽 벽에 주목했다. 이 벽이 미닫이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마이코가 벽에 손을 얹고 힘을 주자 벽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틈이 나타났다. 마이코는 틈새에 눈을 대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대로군. 데츠바의 방이야."
마이코는 벽을 크게 당겼다. 벽의 구멍 맞은편에 갈색 종이가 걸려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대담함에 놀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종이는 족자야. 이곳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이고. 이 족자는 산수화지. 그날 나는 이 방에서 산수화를 보며 데츠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
마이코는 족자를 치우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이코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
마이코는 신발을 걷어차고 구멍을 빠져나갔다. 토시오도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방.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상 위에 데츠바가 엎드려 있었다. 데츠바는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열린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듯 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5/2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1. 베이지 않는 말
에그가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사가미호(相模湖)를 왼쪽으로 보고 오쓰키(大月), 사사코(笹子) 터널을 지나 코후(甲府)에서 주오자동차도로 나올 때까지 마이코는 뒷좌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이야."
그 말대로, 그녀는 조금만 틈이나면 정말로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
스와코 호수에서 밤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호숫가에 방사형 빛이 비쳤다. 시오지리에서 북쪽으로 마츠모토로 향했다. 마츠모토에서 국도 15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아즈미(安曇)의 댐군을 통하며, 왼쪽으로 노리쿠라(乗鞍)산, 오른쪽으로 야리가다(槍ヶ岳), 호다카(穂高)의 산맥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사카마키, 히라유 온천을 지나면 히다이였다.
구름이 흐려지고 안개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그는 깊은 산속을 지나 에치츄 도카이도에서 신토우 강변을 따라 히다 가도로 향했다. 도야마에 도착한 후 호쿠리쿠 자동차 도로를 달리니 어느새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에그는 쇼와강을 건너 후카야 온천을 거쳐 가나자와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아사노 강과 사이 강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에는 오래된 민가와 상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수와 흙담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가 백만석 성곽 마을의 풍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점심은 고린보(香林坊)의 우동집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마이코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오노에 갈 거야."
마이코가 말했다.
"오노 벤키치, 본명은 나카무라 벤키치. 오노에 살면서 오노 벤키치라고 불렸어. 오노초 덴센지(伝泉寺)에 벤키치의 무덤이 남아 있지."
토시오는 지도를 보았다. 가나자와 성터, 겐로쿠엔(兼六園), 혼간지(本願寺), 노마치(野町), 데라마치다이(寺町台) ......
오노는 가나자와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해에 면한 가나자와 항구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가와호쿠가타에서 흐르는 오노가와 사이카와 강 하구에 끼여 있는 오노의 바로 옆은 카네이시(金石)로, 제니야고헤에(銭屋五兵衛)의 유품관이 있었다.

일본해는 거칠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묵직한 구름의 움직임, 하얀 거친 파도, 검은 항구도시의 지붕.
"호쿠리쿠의 바다는 이제부터가 진짜야."
마이코가 말했다.
덴센지에 있는 벤키치의 무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덤은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작고 낡은 비석으로, 벤키치의 이름은 알 수 있었지만 뒷면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였는데, 묘비명은 같았지만 비석에 일월오봉도 문장이 새겨져 있는 훌륭한 비석이었다.
덴센지 주지스님은 최근 가나자와에 사는 한 독지가가 벤키치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기념관이라고 해도 건물 한 칸이 전부지만, 흩어져 있던 벤키치의 유품이 꽤 많이 모였으며, 열렬한 벤키치 팬이라서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했다.

사설 오노 벤키치 기념관 관장 다카라다 고로(宝田五郎)는 일흔이 넘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지금 병원 일은 대부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고 있다고 했다.
"벤키치의 역립 인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었어요."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을 개조한 기념관 관장실의 방 전면에는 커다란 패널 세 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오래된 사진을 복제한 것으로, 표면에 얼룩과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그 양옆에는 유리 케이스가, 방 중앙에는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혹 소문을 들은 애호가들이 관람하러 오면 다카라다 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 주지스님께서 사설 기념관이라고 하셨나요?"
다카라다는 반쯤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념관이라고 하는건 사실 부끄럽습니다. 유품도 적고, 벤키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테에보시(立烏帽子)에 산바소(三番叟) 의상을 입은 산바소 인형이었다. 이 인형은 태엽 장치로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움직인다고 했다.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있는 가라코 인배대는 고쇼차 위에 잔을 올려놓으면 두 명의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차 나르는 인형 ...... 노시메(熨斗目)의 옷에 금란(金襴)의 하카마(袴)를 입고, 눈이 동그란 동자(童子)로, 양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의상은 곳곳이 낡았지만, 얼굴에 칠한 호분(胡粉)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대학 교수님이 오셨어요. 내부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다카라다 씨는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말했다.
다카라다의 말에 따르면, 유물이 적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금속으로 만든 원경(遠鏡), 안경, 전기 텔레비전, 사진기, 자명종, 점화기, 라이터, 권총, 도자기 자동 분수대, 증기선 모형 ......
또한 벤키치는 유리 세공과 조각, 대나무 세공과 금속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고 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살펴보니, 카라쿠리는 엄청난 지식과 고도의 기술로 형성된 벤키치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인형 제작자가 아니야. 소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노 벤키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이코는 수많은 벤키치의 작품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렇죠. 이토록 뛰어난 천재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첫째, 벤키치에 대해선 너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비범한 학예를 가졌으면서도 평생 어느 번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호쿠리쿠에 은거하다 죽은 기인(奇人)이니......."
"교토의 깃털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호오,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시조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더군요. 스무 살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서양화도 배웠다고 합니다. 벤키치에 대해서는 이시카와현 출신의 정치가 나가이 유타로(永井柳太郎)씨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벤키치가 나가사키에 있었던 시기와 일본 서양학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시볼트 박사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부임한 시기가 같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여기서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에서 역법, 의학에서 항해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은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볼트는 간첩혐의로 고발당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로 떠나 나가사키에서 모습을 감췄지요. 벤키치는 그 후 대마도, 조선으로 건너갔고요. 이 역시, 시볼트 사건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귀국 후에는 기이(紀伊)에서 기마술, 포술, 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벤키치가 오노에 살게 된 계기는요?"
마이코가 물었다.
"덴포 2년, 벤키치가 서른 살이었을 때입니다. 성곽 마을의 외곽에 있는 오노 마을은 교토에서 결혼한 아내 우타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 후 메이지 3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벤키치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 땅도, 바닷모래에 파묻혀서 집도 없어졌지만......"
그리고 다카라다 씨는 정면의 벽에 걸린 세 장의 패널을 가리켰다. 가운데 한 장이 오노 벤키치의 사진이었다.
큰 눈과 콧날, 뼈가 굵은 얼굴이었다. 개국론자로서의 강한 신념이 그 풍모에서 느껴졌다.
"오른쪽 사진은 벤키치의 아내 우타 씨입니다. 덴포 말기, 벤키치가 직접 만든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죠. 당시 사진은 기독교의 요술이라며 벤키치가 사진을 찍는 것을 다들 꺼려했죠. 부인도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벤키치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래요. 깊은 지식과 정교한 기술, 그것만으로는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 수 없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번주가 벤키치에게 명령해 차를 나르는 인형을 만들게 했어요. 인형은 예의상 영주 앞에 차를 가져다 주었죠. 번주는 문득 부채로 인형의 머리를 두드려 보았어요. 그러자 인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갑자기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어 자르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깜짝 놀라서 벤키치에게 물었더니, 벤키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형에 미리 장치를 해 두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번주는 분명 요술이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이야기라면 또 있습니다. 벤키치는 술장수 인형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어느 술집 앞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인형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술장수는 인형이라며 술의 양을 줄였는데, 인형은 술장수의 마음을 알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술장수가 어쩔 수 없이 술의 양을 가득 채워 주자 인형은 돌아갔다고 하고요.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요. 인형은 술병이 일정한 무게가 되지 않으면 마개가 빠지지 않고, 기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거에요."
"원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과 같다는 거군요"
"차를 나르는 인형에 대해서는 벤키치도 자필 설계도를 남겼는데,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본을 보여드릴까요?"
다카라다 씨는 유리 케이스에서 한 권의 제본된 책을 꺼냈다. 제본된 표지에 '동시궁록(東視窮錄)'이라고 적혀 있었고, 내용 중 한 장에 정밀한 차 나르는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자동 인형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사진기, 화학약품, 색유리 제조법부터 자동분수대 내부, 볼타식 파일 도해 등이 세세한 설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이코는 그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키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묘한 힘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학력과 창의력이 뛰어났있으니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많았겠지요?"
마이코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해서 벼슬길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벤키치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아주 적었어요. 불과 대여섯 명도 안 되는 제자 뿐이었지요, 카라쿠리는 요네하라 린하쿠에게, 의술은 다카라다 이스케에게 가르쳤어요. 다카라다 이스케가 제 증조부이십니다."
"그래서 벤키치의 유품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군요."
다카라다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벤키치는 매독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요. 수은을 이용한 요법입니다. 벤키치는 은광 채굴에 종사한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다카라다 이스케가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구한 기간은 극히 짧았어요. 가가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즉, 기존의 집정관인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가 죽고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젠고(銭五)씨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죠."
"잠깐만요."
마이코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다카라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고 씨라고 하면 그 비극의 호상이라 불리는 제니야 고헤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가가, 카네이시의 호상 제니야 고헤에. 카네이시는 이 오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럼, 오노 벤키치와 제니야 고헤에는 친분이 있었나요?"
"그렇죠. 벤키치와 젠고 씨는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카라다는 세 장의 사진 패널 중 왼쪽 사진을 가리켰다.
"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벤키치, 오른쪽에 있는 큰 사람이 젠고 씨예요."
토시오는 벤키치보다 더 큰 제니야 고헤에의 사진을 보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키치는 젠고 씨의 틀니를 만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를 알면 알수록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요. 특히 자신이 미국에서 구한 권총과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벤키치는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지구본을 젠고에게 보여주기도 했어요. 벤키치는 젠고 씨이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실수로 지동설 따위를 입에 올리면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도 벤키치가 만들어 젠고 씨에게 선물했다는 원안경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의 지식에 의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니야 고헤에는 오노 벤키치의 후원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벤키치의 지식을 빌리면서 약간의 금품이 오갔겠지만, 벤키치는 젠고 씨의 비호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벤키치의 가난을 본 젠고 씨는 쌀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벤키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젠고 씨는 거액의 재산을 모은 뒤에도 장작과 등잔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보통 거상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유흥비, 쓸데없는 사치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단성 있는 결단을 상훈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벤키치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동안 물건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즐거움은 고양이와 원숭이를 키우는 것 정도였다고 하고요. 이런 두 사람의 성격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죠?"
"제니야 고헤에는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확실히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젠고 씨의 집은 가나자와 항구도시 미야노코시(宮腰), 지금의 카네이시(金石)에서 환전상과 간장업을 하고 있었어요. 안에이 2년, 젠고 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가독(家督)을 이었고요.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가업을 이어받아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어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서른 아홉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이미 한창 때는 진작에 지난 나이였을텐데..."
"그게 바로 젠고 씨의 비범한 점이죠. 그는 전당포에 있는 오래된 배를 개조해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에는 배를 새로 한 척 만들면 두 번의 항해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젠고 씨는 해운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해운업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출몰했죠. 하지만 수익은 엄청났어요. 젠고 씨의 배는 홋카이도의 해산물과 비료를 도호쿠로 운반하고 도호쿠의 목재와 호쿠리쿠의 쌀을 간사이로 운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의 잡화를 싣는 등 운송 이익 외에도 많은 거래가 얽혀 있었죠. 상술에 능했던 젠고 씨는 순식간에 거액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젠고 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 가가번이었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거군요"
"가가번에서는 젠고씨에게 자꾸만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어요.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두말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젠고 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기꺼이 돈을 바쳤어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도 젠고씨의 상훈 중 하나였습니다. 공납금에 대한 보답으로 번의 물자 수송용 배를 한 척 맡을 수 있었고, 젠고 씨의 배는 곧바로 가가번의 공식 수송선이 되어 백만 석의 문장, 가가 매화 그릇을 염색한 깃발을 내걸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가가번의 집정관은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였는데, 그와 손을 잡은 젠고 재벌은 흔들림 없이 성장해 나갔죠."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네, 천석선이 열 척. 오백 석선이 열한 척. 오백석선이 십일척.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이백 척의 선주였고, 전국에 서른네 개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추정 자산은 삼백만 양이라고 하는데요."
"삼백만 양--"
"그렇다고 해도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을 훨씬 넘을 겁니다."
"수백억!"
마이코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과 3억 엔의 강도 사건이 시효가 지나기 전까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젠고 씨는 오쿠무라 히데미와 함께 밀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다케시마를 중심으로 한 조선 근해 무역, 카라우타의 산탄(山丹) 무역, 사쓰난(薩南)열도에서는 대영국 무역, 북해에서는 대러시아 무역.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남쪽으로 태즈메이니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벤키치의 원양 항해술, 천문학, 어학에 대한 조력이 있었을테고요. 또한, 젠고 씨는 다양한 과학 기계를 밀수입해 벤키치에게 사용법을 배웠을 겁니다. 덕분에 벤키치도 몰랐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지식이 더욱 풍부해졌을테고요."
"여러 가지 과학 기계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마이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패널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해나가던 젠고 재벌은 정말 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봉건제 하의 재력은 정치적으로는 정말 무력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죠 ......"
다카라다는 수염을 몇 번이고 빗어 넘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덴포 14년, 젠고와 함께 번영했던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젠고 씨는 71세였어요.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죠."
다카라다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니야 고헤에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했다.
"당시 가가번에는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라고 해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오쿠무라 히데미 사망 후 검은 하오리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젠고씨의 번(藩) 공식 상인 지위를 박탈한 거였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젠고 씨는 어디까지나 상인일 뿐이었으니,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젠고씨가 좌절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음에 정말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그 유명한 하북 매립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레가 26km, 약 2천6백 헥타르나 되는 곳을 20년 계획으로 매립해서 논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 공사가 완료되면 가가 백만석에 수만 석이 더 추가될 것이었어요."
"일흔일곱 살에 20년 계획이라니…… 정말 이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군요."
"공사는 가에이 4년에 착공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공사였어요. 게다가 매립으로 인해 생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한 어민들의 격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젠고씨의 가훈 세 번째는 '세인의 믿음을 얻아야 한다’였는데, 이 때 세인의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과거 천보 대기근 때에도 쌀 수탈과 타 지역 유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매립 공사 시기에는 현지 노동력보다 임금이 싼 이주 노동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심해져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북 투독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극물 투척 사건이라니, 하북에 독극물을 투척한 건가요?"
"네, 하북의 물고기만 죽으면 어민들의 반대 운동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셋째 아들 요가 독극물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요가 석회에 냄새나는 물인 쿠사미즈, 기생충인 고나무시의 기름 등을 섞은 것을 몰래 하북에 투입했다고 했지요. 그 결과, 붕어, 고니 등이 죽어 떠올랐고, 이를 먹은 가마우지, 비둘기, 까마귀, 고양이와 개가 죽었고,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먹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가에이 5년, 젠고씨 가문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헤에 일가와 공사 관계자를 합해 51명이 감옥에 갇혔죠."
"하북에 독극물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일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하북은 원래 수질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수초가 너무 많이 번식하면 물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왜 고헤에가 체포된 거죠?"
"가가번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젠고 씨를 마음껏 이용해, 말하자면 번 전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죠. 그 밀무역이 막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그것이 표면화되어 막부의 추궁을 받게 되면 번 존폐와도 관련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번은 밀무역의 죄를 젠고 씨 한 명에게만 뒤집어씌워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하북의 집단 중독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젠고 씨는 번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매립 공사는 중단되었고요."
"물론 그렇죠. 대체로 간척이라는 공사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같은 시기에 막부는 인바누마(印旛沼)의 간척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한편 막부에서는 젠고 씨의 밀무역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죠. 막부 내부에서도 대외무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대정봉환이 눈앞에 다가왔고요. 일일이 밀무역을 감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거기까지 왔던 거죠."
"번에게 시대를 판단할 힘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당시 상업 자본은 정치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오사카의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郎), 하마다번의 아이즈야하치(会津屋八) 우에몬(右衛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사건의 결말은?"
"제니야 고헤에는 체포된 지 석 달째 되는 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젠고는 80세였어요. 요와 그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지금도 십자가의 소나무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니야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요. 이것이 젠고 재벌의 마지막이 되었죠. 벤키치가 51세 때였습니다."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노 벤키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마이코가 물었다.
"좋은 지인을 잃은 외로움은 누구보다 컸을겁니다.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점점 더 강해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일개 촌부로서 일생을 마감했어요. 한편, 카라쿠리 기우에몬의 다나카 히사시는 젠고 씨가 투옥된 해에 교토에 기공당(技巧堂)이라는 가게를 열었죠. 이후 차근차근 키워나가 마침내 긴자에 다나카 제조소를 개업했고요. 그게 오늘날 도시바의 기틀이 된 겁니다. 같은 천재였지만, 인간의 일생은 정말 명암이 엇갈리는 법이에요. 이것은 그저 운의 좋고 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츠루슈일록(鶴寿日録)에 따르면........"
다카라다의 장탄식을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츠루슈..…"
"츠루슈 일록. 아까 말씀 안 드렸나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 츠루슈일록이라는 건?
"벤키치의 일기의 일부가 남아 있어요. 그걸 츠루슈일록이라고 합니다."
"왜 츠루슈인가요?"
"벤기치 씨의 호가 츠루슈였거든요. 또 이치토(一東)라는 호도 사용한 적이 있어요 ......"
"츠루슈에, 이치토 ......"
오노 벤키치와 오나와에 이주한 마와리 사쿠조와의 인연은 이미 분명한 것 같다. 사쿠조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鶴寿堂(쓰루슈도)'라고 짓고 자신의 아들을 '東吉(도키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도, 암시도 아니다.
"오노 벤키치의 제자 중에 마와리 사쿠조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이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벤키치의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마와리 사쿠조 ...... 라는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츠루슈일록은 벤키치의 일생을 기록한 일기인가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던, 오쿠무라 히데미 씨가 병사했던 해인 덴포 14년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벤키치의 유언대로 사후에 소각되었는데, 이 기록만 우연히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볼 수 있나요?"
"복사한 것이라면 거기에 있습니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東視窮錄)'이 들어있던 같은 유리 케이스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카라다는 츠루슈일록의 사본을 꺼내 마이코 앞에 놓았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과 같은 정갈한 서체로 세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일상 기록이라 길지 않았다.

3일, 맑음 저녁에 복어국을 먹다
4일, 흐림. 베지 못하는 말 도면 그리기. 우타가 통풍을 일으켰다.
5일, 비, 도면 그리기를 계속.
6일,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7일, 맑음, 하루 종일 고민하다.
8일, 맑음, 도면은 진전이 없다.
9일, 맑음, 久右衛門(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森八の千歳, 일본 전통 과자)를 가져옴. 久右衛門(구우에몬)에게 일을 맡기고 계속 도면을 그리다.
10일, 맑음, 우타가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듬.
11일, 맑음, 도면 그리기를 계속하다…..

마이코는 열심히 츠루슈일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카라다 노인은 다른 방에서 다도 도구를 가져왔다.
"이 일록의 앞부분에 '무자마(無斬馬)'라고 되어 있는데, 무자마(無斬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마이코는 다카라다 노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물었다.
"베이지 않은 말이란,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라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실물은 남아있지 않겠군요."
"네, 아쉽게도 실물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장난감이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벤키치가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서적에 그 장난감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지 않는 말이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베어도 목이 다시 연결되는 목을 가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네요."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목?"
"이 말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포도주 잔을 대면 안의 술을 다 마시죠. 장치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해요. 그냥 말의 중앙에 있는 관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겁니다. 그 후 날카로운 칼로 말의 목을 베는데, 칼은 말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 아래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베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목은 제대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을 대면, 말은 다시 포도주를 다 마시고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2천 년 전이겠군요."
마이코는 놀란 듯 말했다.
"헤론은 증기기관, 압착기, 압착 펌프, 사이펀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동시에 많은 장치도 만들어 냈어요. 제단의 불로 춤추는 신상, 흐르는 물로 우는 새, 동전을 넣으면 일정한 성수가 흐르는 그릇,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판기의 원조겠지요."
"그럼,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의 목의 장치는 뭐죠?"
"원래 말의 목에는 잘리는 절삭점이 있어요, 말의 목은 세 개의 고리로 연결됩니다. 칼이 첫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칼이 지나갈 길을 만들지만 목은 두 번째, 세 번째 고리가 지탱합니다. 칼이 두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원래대로 제자리에 연결되고요. 이렇게 해서 칼이 완전히 목을 통과해도 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포도주가 지나가는 길의 개폐도 있어서 실제로 만들기는 아주 어려운 장치였습니다. 벤키치는 그 장치 제작에 도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벤키치는 구우에몬이라는 사람과 자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예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라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스즈키 구스에몬, 마에다 도사마모루(前田土佐守)의 직행(直行) 가신으로 30석 봉록 무사였습니다. 당시 30살을 갓 넘겼을 것입니다. 벤키치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입니다. 벤키치는 직행의 대우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출입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구스에몬은 벤키치의 학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배우는 도중에, 봉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죠."
"가가번의 개혁 때문이었나요?"
"아니요,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입니다.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번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구우에몬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다른 몰락 무사와 비슷한 길을 갔겠지요."
마이코는 아쉬운 듯 츠루슈일록을 덮었다.
"그런데 최근에 벤키치에 대해 조사하러 이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이코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어?"
다카라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요즘은 옛날로 갈수록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 가까운 일이라면 어제의 일도 잘 떠올릴 수 없어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로부터 최근에 오노 벤키치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다카라다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틀니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오노 벤키치 기념관을 나와서 젠고 유품관으로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품관은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마이코는 그리 아쉽지 않은 듯 말했다.
에그는 젠고 유품관을 나오자마자 고베의 보금자리인 혼류사 앞을 지나 그대로 해안으로 향했다.
마이코는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진눈깨비 길에 섰다. 검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제니야 고헤에의 동상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일본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헤에는 손에 원안경을 들고 있다. 오노 벤키치가 최신의 지식과 뛰어난 기술로 만든 원안경일 것이다.
다카라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젠고 씨, 벤키치라고 불렀다.
고헤에가 팔십,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시오는 격렬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2023/05/14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0. 밥을 먹는 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0. 밥을 먹는 쥐
나라키 경감의 짜증은 누구의 눈에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초기 수사 도중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난 것이 나라키의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게 만든 것 같았다.
"소우지 씨가 역립 인형을 꺼내기 전과 후,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습니까?"
토시오가 소우지의 방에서 일어난 일을 다 말하자, 나라키가 말했다. 눈썹 사이사이의 주름이 쭈뼛쭈뼛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소우지 씨는 유쾌했고,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어요."
"유쾌하다고? 자기 여동생이 살해당한 직후에 즐거워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마사오 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지 씨는 그녀를 어떻게든 기쁘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라도 밝게 행동하려고 했습니다."
나라키는 입을 다물었다. 토시오의 말에 설득당한 모양이다. 나라키의 옆에 있는 인품 좋아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소우지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기억하십니까?"
"소우지 씨가 인형의 태엽을 다 감았을 때였어요. '아, 아프다'라고........'
"그 뒤는?"
"우리는 인형의 신기한 움직임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소우지 씨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그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네, 소우지 씨도 마지막까지 인형을 보고 있었어요. 인형은 소우지 씨 곁을 지나가려고 했어요. 그 때, ‘멈추지 않는다, 이상하다’고 중얼거렸습니다"
"’멈추지 않는다, 이상하다?’ 나라키 경감님, 인형은 거기서 멈춰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요?"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인형의 기계가 이상하게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댄 건가?"
나라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옆의 남자는 다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소우지 씨가 한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 소우지 씨는 인형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우다이 씨가 일으켜 세웠을 때 ...... 소우지 씨는 '하지만 훌륭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건 무슨 뜻일까요?"
나라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시오는 소우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우지는 죽기 직전까지 인형에 대해 진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헛수고에 가까웠다.
"소우지 씨는 그 역립 인형을 보여주겠다는 것은 예전부터 약속한 것이었습니까?"
나라키가 말했다. 질문의 주도권을 되찾는 듯한 분위기였다.
"약속은 없습니다. 다만 예전에 우다이 씨에게 주모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라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모우?"
"소우지 씨 방에 있었잖아요. 비누방울을 뿜어내는 자동 인형입니다."
"비누방울을요?"
"그게 계기가 되어 소우지 씨는 카라쿠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역립 인형도 꺼냈어요"
"소우지 씨가 역립 인형을 꺼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군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역립 인형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나라키는 오늘만 아니었으면,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우지 씨가 역립 인형을 보여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희박해 보이는데요."
"뭐라고요?"
"역립 인형을 소우지 씨가 복원했다는 것은 최근이라고 합니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귀중한 인형이라는게 자랑거리 중 하나였어요. 인형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소우지 씨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요. 카라쿠리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역립 인형도 보여주고 싶어질 수밖에 없죠."
"카라쿠리 얘기가 나오지 않으면?"
"소우지 씨의 방은 장난감이 가득 차 있어요. 카라쿠리가 화제가 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나라키는 또다시 말꼬리를 잡혔다. 나라키는 험악한 말투로 토시오 일행이 왜 마와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토시오는 있는 그대로를 차분하게, 자세히 대답했다.
"..... 정말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범행입니다."
나라키가 높은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토시오와 마이코, 마사오는 카오리의 방에 머물게 되었다. 토시오가 방에 들어서자 마이코와 마사오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땠어?"
마이코가 토시오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정말, 긴장되더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마사오에게 말했다,
"말하기 싫은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수사관이 먼저 데리러 온 것은 마이코 쪽이었다. 마이코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마사오는 침착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이코가 나가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미안해요."
마사오가 말했다. 토시오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도 자신의 진심이 전달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친 다리는 괜찮으세요? 먼저 물어봐야 했는데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먼 옛날을 떠올리는 듯 대답했다.
"당신이 침착해서 안심이 되네요."
토시오는 토우이치가 죽던 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다이 씨가 저를 위로해 주셨어요. 그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을 기쁘고 행복할 때 만날 기회가 없었던게 아쉽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나는 항상 상상하고 있어요. 행복할 때의 당신은..."
"마찬가지에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나는 항상 이랬어요. 늙어 보이잖아요. 하지만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니에요."
"늙어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고요."
"카츠 씨는 젊어요. 우다이 씨가 말했어요. 아주 순수한 청년이라고."
"순수하지 않아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요,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답니다. 카츠 씨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될 거예요. 멋진 여자와도........"
"다른 여자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나는........"
"우다이 씨는 경찰관이었군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다이 씨가 경찰서를 그만둔 이유도, 토모히로를 쫓은 이유도 말해줬어요. 그 분은 어떤 액운을 만나도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다이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왠지 모르게 힘이 솟아나더군요. 카츠 씨는 우다이 씨와 함께 일한 지 얼마나 됐나요?"
"오늘로 엿새째입니다."
"엿새째... 나는 더 오래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조사관이 된 것은 당신을 처음 본 그 날입니다."
"그럼 저와 함께한지도 엿새째군요. 나에 대해서 잘 알 수는 없겠네요."
"알고 있습니다."
토시오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알아요. 내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우지와 관계를 끊지 못한 더러운 여자라는걸 알고 있죠."
"당신은 소우지에게 협박을 당한 것뿐입니다."
"나는 나쁜 여자야."
"나쁘지 않습니다, 더럽지도 않아요. 괜찮습니다. 단 이틀만 못 만났을 뿐인데 나는......."
"안 돼요. 그런 말을 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해요"
"오랜 시간? 얼마나 오래요?"
"2년, 아니 3년정도라도"
"그땐 내 말을 들어줄 거죠?"
"들어줄게요. 어떤 일이든요."
"예를 들어 ...... 샹보르관에 초대한다고 해도?"
"어디든 상관없어요."
마사오는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토시오는 매우 기뻤다. 동시에 마사오와 정을 통하던 소우지가 살해당하자마자, 마사오에게 이런 대답을 하게 한 자신이 매우 어리석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보는 동안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어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라 공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봤지........"
차 안에서 마이코는 비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을이라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강한 냉기가 에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토우이치는 수면제 중독으로 죽었어. 외상도 없었고 충치 외에는 질병도 없었어. 체질도 정상, 혈액형도 B형.......내가 한 장의 카드를 주기는 했지. 나라공은 토우이치가 마신 약병의 뚜껑이 얼마나 단단한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시더군."
"경감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병의 뚜껑을 연 건 토모히로 자신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
"토모히로가? 그렇다면 토모히로는 집을 떠나기 직전에 수면제를 먹은 셈이네요."
"토모히로는 약을 먹지 않았어. 하지만 마사오의 말에 따르면, 토모히로는 마사오가 산 수면제를 건네주자마자 포장을 뜯어 버렸다고 했는데, 나라공은 그 때 뚜껑도 열지 않았나 싶다네."
"마사오 씨는 병뚜껑을 여는 것까지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군요."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 기억이 없다는군."
"그렇다면 토우이치의 죽음은 순전히 누군가의 과실일까요?"
"글쎄, 아무튼 토모히로는 마시지도 않은 약병의 뚜껑을 열었잖아."
마이코가 토우이치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토모히로의 사고에 이은 토우이치의 죽음. 그리고 카오리와 소우지까지 죽었다. 카오리와 소우지의 죽음은 완전한 살인 사건이었으니까 이 죽음의 연쇄 관계는 당연히 파헤쳐야만 했다.
"소우지는 어떻게 살해당한 겁니까?"
토시오가 물었다. 아직도 소우지가 왜 쓰러졌는지 잘 몰랐다.
"소우지는 그 역립 인형에 의해 살해당했어."
"설마 인형이?"
그 때, 소우지는 확실히 인형의 태엽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인형의 태엽을 감았을 때, 인형에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인형이 사람을 죽인다고?
"역립 인형에 독침이 박혀 있었어. 태엽 감는 나사의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독을 넣은 가느다란 주사기가 꽂혀 있었지. 테엽이 어느 정도 단단하게 감겨지면 주사기가 튀어나와서 한꺼번에 독액을 주입하고 바로 다시 들어가는 구조야. 기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가공이라고 해. 게다가 노리는 사람을 확실히 찌를 수 있다고 하더군. 나사를 감는 손가락은 반드시 주사바늘 바로 위에 오기 때문이지."
"독은 뭐예요?"
"현재로서는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 볼 때 알칼로이드의 일종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알칼로이드가 뭐죠?"
"모르핀, 스트리키니네, 코카인, 니코틴 같은 것들이지."
"소우지는 역립 인형의 나사를 감을 때 마사오 씨에게 감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죠?"
토시오는 자신의 말에 겁이 났다. 만약 마사오가 나사를 감았다면, 살해당한 것은 마사오가 였을 터였다.
"그래. 마사오가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어."
"범인이 죽인 것은 역립 인형을 움직이려고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되겠지.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인형을 다루었던 소우지지만, 그런데 소우지는 마사오에게 인형의 태엽을 감아보라고 권유했었지. 소우지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어. 카라쿠리에 독침을 심을 정도로 철저하게 계획적인 범인이 이 정도 변수를 예측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야. 나는 범인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만약 우리가 없는 곳에서 소우지가 카라쿠리을 움직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격자가 없었다면 수사는 상당히 어려웠을거야. 첫째, 사인 규명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거야. 사인이 밝혀져도 설마 카라쿠리에 독침이 박혀있을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았을테고, 역립 인형은 다른 장난감들 속에 섞여버렸을테니까. 만약 방 안쪽에서 열쇠를 걸어 놓았다면 수사는 오히려 더 좁혀질 수 있었겠지. 방 안의 인형을 철저히 조사하면 되니까. 하지만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다면, 상식적으로는 누군가 주사바늘을 들고 소우지의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수사도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수사는 난항을 겪게 되었을 거야. 그리고 소우지는 자신의 방에 지금까지 한 번도 자물쇠를 채운 적이 없었다고 하는군."
"범인은 왜 수사를 방해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어 그날만이라도 인형을 잠시 숨기는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카오리 씨가 살해당했다면 당연히 많은 경찰관이 출입하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범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카오리 씨와 소우지를 죽인 사람이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뭐라 말할 수 없군."
"토우이치의 사인도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나도 나라공에게 말했어. 만약 이 모든걸 같은 범인이 저질렀다면, 그는 하늘에서 운석을 떨어뜨려 토모히로를 죽이는 것과 같은 엄청난 짓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역립 인형에 독침을 꽂은건 누구였을까요?"
"방금 말했듯이, 소우지는 방에 열쇠를 걸어둔 적이 없어.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기 때문에 소우지는 집에 없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인형에 독침을 꽂을 수 있어. 설령 여자라도 말이야."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이 신경 쓰였다.
"마사오 씨에 대해 말하는 건가요?"
"네 사람이 죽은 결과, 당연히 결론은 하나야. 즉, 이번에 데츠바가 죽으면 마와리 가문의 유산은 모두 마사오의 것이 된다는 것."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토시오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와리 가문의 유산 따위는 있을 수 없어요. 스페이스 레이스의 실패 탓에 조만간 나사 저택도 처분될 거 아닙니까. 설령 처분하지 않더라도 해바라기 공예가 다시 살아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과연 팔릴만한 물건이 계속 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지. 최소한 그것 때문에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인다는건 생각하기 어렵지."
"우다이 씨는 데츠바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농담이 아니야. 그렇게 놔둘 리가 있겠어? 그러면 내 뇌물죄를 풀어줄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는 거잖아."
"나사 저택의 경호는 철저하겠죠?"
"그래, 두 사람이 동시에 살해당했으니까. 범인이 어떤 꾀를 부려도 데츠바를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마사오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분간은 나사 저택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내일은 토모히로의 초칠일이에요."
"벌써 그렇게 될까? ...... 마사오와 무슨 얘기 했어?"
"그다지 대단한건 ......"
"그래? 마사오는 정말 마음씨 좋은 여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이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그런데, 역립 인형을 만든 오노 벤키치. 소우지가 죽기 전에 했던 말에 따르면 가나자와 사람이라고 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나자와라는 땅이 마와리 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선, 해바라기 공예의 마와리 가문이 만든 장난감이 뭐였지?"
"후쿠나가 씨가 밥 먹는 쥐가 원형이라고 알려준 장난감이었죠"
"밥 먹는 쥐는 어느 지방에서 만든 장난감인지 알아?"
"아뇨.."
"얼마 전에 생각나서 찾아봤더니 가나자와의 장난감이었어. 덴포(天保) 때 마에다 번의 하급무사가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는, 작지만 유명한 장난감이야. 가나자와에는 그.외에도 유명한 장난감이 있어. ‘하치만 기아게리’라는 아름다운 기아게리 인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전신인 츠루슈도(鶴寿堂)의 마와리 사쿠조(馬割作蔵)가 판매한 장난감에 이 기우게리가 들어있었지. ……. 그리고 마와리 가문의 문장을 알아?”
"...... 안은 명아주(藿藿). 하지만 원래는 나사 매화였다고 하네요."
"호오, 대단하군."
"카오리 씨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나사 매화는 매화그릇의 가치평가가 높아. 매화그릇으로 유명한 다이묘가 있지. 가가번의 마에다 가가 매병. 가가 백만석의 정문 '자요몬(慈陽門)'. 가나자와는 성곽 마을이야. 가신에게 공적이 있으면 매화 그릇의 대체 문양인 '가에몬'의 사용을 허락해 주었었지."
"그럼 마와리 사쿠조는 가나자와 출신인가요?"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일이 일요일이었지?"
"맞습니다."
"가나자와에 가볼까?"
"저도 갈게요."
"카츠군은 괜찮아. 이건 일이 아니야. 불필요한 경비를 들일 수 없어."
"에그를 운전해서 가면 됩니다. 물론 당일치기로요."
"가나자와까지 꽤 멀잖아. 24시간 내내 운전할 자신이 있나?"
"네,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거든요."
"그럼 나도 도움이 되긴 하지만."
마이코는 토시오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때 사랑에 빠진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 것뿐이야."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2023/05/07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9. 역립(逆立)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카라쿠리의 과거 등은 제대로 번역하기 힘드네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9. 역립(逆立) 인형
카오리가 아틀리에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캔버스, 이젤은 한쪽으로 치워졌고, 책상은 수사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밝지만 장식이 적은 방이라 그림과 화구가 없으면 수사관들이 어슬렁거려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총소리를 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지?"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경찰관이다. 현경본부 수사 제1과의 노련한 호시자와 형사였다. 마이코가 아직 쇼조와 결혼하지 않았을 때 같은 서에서 근무했고, 마이코의 술친구였다. 너무 마음이 잘 맞은 탓에, 두 사람 모두 결혼 대상으로 서로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호시자와는 나라키 경감보다 한 살 위었다. 나라키 때문에 호시자와가 연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고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말했다.
"호시자와 군이 현경에 배치된 것은 분명 나라공 때문일 거야."
마이코는 아무래도 나라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라키의 얼굴도 보였다. 변함없이 눈썹 사이에 깊은 세로 주름을 짓고 있었다.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연이은 사고사. 거기에 더해 카오리의 기이한 죽음. 당연히 경찰은 흥분 상태였다. 소우지의 신고로 즉시 여러 대의 경찰차가 도착했다. 나사 저택에는 수많은 수사관들이 긴급 배치되었다.
"미로 속에 있었어요."
토시오는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자에서 쓰러졌을 때, 넘어지면서 뭔가에 부딪힌게 아닐까 생각했다.
"총소리는 어느 방향에서 났지?"
"모르겠습니다. 미로 속을 빙빙 돌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위치는 기억나지 않나요?"
"알 것 같아요. 저는 백묵으로 길을 표시하면서 가고 있었으니까요."
"그 위치에 서면 총소리가 들린 방향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실제로 미로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미로를 빠져나온 후에는?"
호시자와가 질문을 이어갔다.
"연못 주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니 화단으로 나왔습니다. 저택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무슨 일인지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연못 주변 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아무것도요.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후로?"
"우다이 씨를 만났습니다."
호시자와는 마와리 저택의 약도를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만났던 곳과 소우지가 서 있던 곳, 세 사람이 정자까지 달려온 경로를 표시했다. 그리고 카오리가 쓰러진 상태, 마사오가 서 있던 위치 등을 설명했다.
"당신은 카오리 씨가 쓰러진 정자에서 뭐든 떨어뜨린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 떨어뜨린 물건? 글쎄요........"
"시체를 본 게 처음인가요?"
호시자와의 말에는 가벼운 경멸이 섞여 있었다.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끔찍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토시오는 말을 멈췄다. 여성인 마이코도 마사오도 기절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미로에서 나와서 ...... 의식을 잃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 그림자라든가, 풀의 움직임이라든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라도 괜찮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나중에 미로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소우지의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소우지의 방을 두드리자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우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유리 선반이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선반은 수많은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장난감이 아닌 것 같았다.
수많은 인형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자 위에 앉아서 기타를 들고 있는 검은색 낡은 인형. 상자 아래에 나사가 보여서 전원을 켜면 바로 기타를 울릴 것 같았다. 아름답게 채색된 상자는 깜짝 상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다. 그 옆의 상자는 옛날 하코네 세공품일까? 회전목마에는 분명 오르골이 달려 있을 것이다. 시계를 내려놓은 인형이 그냥 그 자세를 계속하고 있을 리가 없다. 소우지의 손에 들어온 인형은 모두 생명을 얻어 보는 사람을 이차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그 외 분라쿠(文楽)의 목, 동물, 자동차, 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알 수 없는 톱니바퀴. 언젠가 마사오가 이야기했던 단쥬로의 숨은 병풍 ....... 새로운 것으로는 팬텀 램프, 밸런스 토이, 파이버 옵틱스 ....... 선반에서 넘쳐나는 장난감은 바닥과 책상 뿐 아니라 손 닿는 곳마다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장난감 상자를 뒤집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벽에도 여러가지 시계가 걸려 있는데, 모두 인형이나 오르골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 중 몇 개는 확실히 동작하는 물건이었다.
그 한가운데 소우지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역시 여동생의 죽음때문인지 평소의 가벼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이코는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이코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에 토시오는 살짝 놀랐다.
토시오의 뒤를 이어 수사관이 찾아와 소우지를 데리고 갔다.
"총에 대해 물어봤지?"
둘만 남았을 때 마이코가 물었다.
"총? 네, 정자에 뭐든 떨어뜨린 물건이 없었는지 물어보더군요."
"흉기를 찾지 못했어."
"흉기?"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이 방도 구석구석 다 뒤졌지. 그리고 소우지가 가지고 있던 사냥총이 압수당했어."
"소우지가, 설마?"
"수사관이 총구 냄새를 맡았지만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없는 것 같았어. 22구경 볼트액션으로 구 제국 육군이 사용하던 38식 보병총과 같은 형태야. 이 총은 원래부터 저택에 있었다고 하더군. 소우지가 손질해서 사용한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총으로 사냥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해.”
"그렇다면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총을 손에 발견했을 때 수사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어. 그리고 카오리의 방도 '당연히' 수색을 당했어."
"카오리 씨는 피해자잖아요"
"자살 가능성도 고려한 모양이야. 하지만 자신의 눈을 쏘는 자살자는 드물고, 현장에는 총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살인이지. 카오리 씨의 뇌에서 총알이 검출됐어."
"총알이요…."
"그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것 같아."
"우다이 씨도 총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어. 좀 더 빨리 저택에서 나왔더라면 범인을 보았을지도 몰랐는데."
"마사오 씨가 가장 빨리 현장에 도착한 것 같네요."
"그래. 하지만 마사오 역시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어."
"그녀는 어디 있었는데요?"
토시오는 카오리의 방 창문을 통해 미로 근처에 있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사오는 연못 근처를 걷고 있었다고 하더군."
창밖으로 연못이 보인다. 연못 주변에는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보였다.
"연못 속을 수색하는 걸테지."
"총을?"
"맞아. 경찰은 마와리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의 범행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듯 해."
".....설마......."
"이러면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죽음도 다시 한번 문제 삼을 것 같군"
"마와리 저택 안 사람이라고 해도 마사오 씨, 소우지와 테츠바. 그리고 가정부밖에 없잖아요?"
"우리도 포함이지. 물론 이 저택은 담이 무너진 곳도 있고, 정원 안쪽은 그대로 숲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범인이 외부에서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정자 주변에는 마사오와 소우지, 나와 너, 그리고 카오리, 이 다섯 명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그래. 정자 부근의 길이 부드러워졌지? 범인이 카오리에게 접근하면 당연히 발자국이 남았을 거야."
"데츠바는 우다이 씨와 함께 있었죠?"
"그랬지. 만약 카오리가 권총으로 살해당한게 맞다면, 테츠바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될거야."
"데츠바와의 대화는 잘 됐습니까?"
마이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데츠바는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어. 그리고 토모히로가 나에게 돈을 주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증언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 이런 상태니 나를 위한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증언해 주는 것이 좋지만,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토시오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카오리는 이기적이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얼굴에 범인은 무자비하게 총알을 쏜 것이다. 그것은 악마의 소행과 다름없었다.
"마와리 가문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것같군."
마이코는 천천히 방 안의 장난감들을 둘러보았다.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와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스케치북 사이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뭐야, 그게 뭐야?"
마이코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미로의 설계도입니다. 예전에 그렸던 게 생각나서요. 경찰이 이걸 원하더라고요."
누렇게 변색된 켄트지 위에 오각형 무늬가 보였다. 마이코는 눈을 반짝였다.
"소우지 씨, 저거 베껴도 될까요?"
"좋아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적 없으니까."
마이코는 종이를 받아 재빨리 미로 그림을 베꼈다.
"한번 해볼래?"
소우지가 나간 후 마이코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그림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너 군데, 손가락 끝이 막다른 골목에 빠졌지만, 그래도 중앙을 찾아갈 수 있었다.
".......52초"
마이코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손가락 끝이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본 느낌은 어땠어?"
"이 방법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골인 지점까지 도착하지 못했어요."
"그렇겠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이코는 서둘러 그림을 접었다.
경찰관이 얼굴을 내밀고 토시오를 향해 미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이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사하러 온 사람은 호시자와 형사와 젊은 수사관이었다.
토시오가 먼저 서고, 소우지, 두 명의 수사관, 마지막으로 마이코가 억지로 따라 왔다.
길에 새겨진 백묵의 흔적은 토시오가 직접 밟아서 사라질 뻔한 곳도 있었다. 그래도 표시를 따라가다 보니 토시오가 총소리를 들었던 곳에 도착했다. 선은 그 지점에서 끊어졌고, 떨어져 있던 백묵이 밟혀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이 밟은 것일까.
토시오는 일어서서 기억을 떠올렸다. 토시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호시자와는 그림과 나침반을 비교했다.
"틀림없는 것 같군. 정자의 방향과 일치한다."
그리고 소우지를 향해 말했다,
"미로의 중심부로 가고 싶은데, 안내해 주세요. 지도를 볼까요?"
소우지는 지도가 없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대신해 소우지가 먼저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미로는 여전히 깊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마지막 굽이굽이에서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보였을 때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대단한 미로네요."
호시자와는 돌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이 미로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입니까?"
"이 저택이 지어질 때 동시에 만들어졌어요. 다이쇼 초기에 호도라는 분이 설계했어요. 제 증조부이십니다."
"무엇을 위해 정원에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무엇을 위해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곤란하죠."
같은 질문은 많은 카라쿠리 제작자들도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인형을 움직이는 것에 몰두하느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토시오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을 앞에 두고 주변 울타리를 둘러보았다. 그래, 혼자 있고 싶을 때 이곳이 가장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일곱 겹 여덟 겹의 울타리 방벽은 한 겹의 철문보다 더 견고했을 것이다. 기행가 호도는 이 미로 속에서 무엇을 사색하고 있었을까?
호시자와는 불이 꺼진 성냥개비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저택 안에 우물은 없나요?"
호시자와는 소우지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물? ...... 조리실에 한 개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우물은 말랐나요?"
"글쎄요. 우물이 왜요?"
"사실 총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정자로 달려간 사람은 마사오 씨인데, 그때 카오리 씨는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죽지 않았다고?"
소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카오리의 최후를 떠올린 것일까.
"카오리 씨는 자꾸만 입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중 한 마디만 귀에 쏙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른 우물'이라는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미로를 빠져나오자 수사관 일행을 만났다.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마사오의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마사오는 짙은 감청색 정장을 입고 흰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색은 입지 않았지만 인상은 거의 상복에 가까웠다. 마사오는 토시오 일행을 발견하고는 바람에 날리듯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하네요."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내 방으로 오세요. 우다이 씨도 함께 있어요."
소우지가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봐요, 이렇게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카오리 씨의 방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건 무신경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우다이 씨."
마이코는 나라키 경감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경감님, 마사오 씨가 소우지 씨 방에서 쉬어도 되겠지요?"
나라키의 눈썹 사이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다만 소우지 씨는 남아서 우물 안내를 부탁합니다."
소우지는 작은 혀를 내밀며 껌을 입에 집어넣었다.
소우지의 방에 들어가자 마사오는 잠시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다.
"밝고,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마사오는 카오리를 회상했다.
"토모히로와 함께 신혼여행을 갔을 때가 기억나요. 숙소에 도착하니 방에 큰 꽃다발이 놓여 있었어요. 꽃다발 사이사이에 메시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카오리 씨로부터 온 것이었어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요.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창문을 크게 열어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어요. ......"
정말 카오리답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마이코는 가만히 마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오리 씨가 당신에게 이 저택에 살 것을 권유했다고 들었어요."
마사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카오리 씨의 배려에 감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카오리 씨는 저와 소우지와의 사이를 모르시거든요. 만약 이 저택에서 소우지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나를 농락할 거예요."
마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데츠바 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아까 만났을 때는 안색이 좋지 않으시던데요?"
"혈압이 조금 높은 것 같아요."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권유했어요. 하지만 진정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여전히 약을 복용하고 계십니까?"
"그것만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이런, 저들은 이 집을 유령의 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마른 우물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정자까지 이어져 있는것 같다고 하면서, 방금 젊은 녀석 한 명이 뛰어들었어요."
"그래서, 구멍은 찾았나요?"
"아니요, 바닥에는 물이 있고, 옆에 구멍은 없는 것 같았어요. 덕분에 한 명의 진흙 인형이 만들어졌지요."
마사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우지는 눈치를 보며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진흙 인형, 그것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인형이지요."
마사오는 소우지의 과장된 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나, 웃고 있었어."
"아니, 당신이 슬픈 표정을 짓게 해서는 안 돼죠. 카오리는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오늘 계획을 세웠으니까요. 마침 우다이 씨도 왔으니, 비스크 인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일어섰다. 발판에 올라가 유리 선반 안쪽에서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화려한 패션 인형이었다. 루이 왕조풍의 의상은 다소 색이 바랬지만, 손이 가득 찬 꽃 자수에서 당시의 사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인형의 특징은 도자기로 만든 머리였다. 피부는 지금 막 가마에서 꺼낸 것 같은 선명한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원형의 굵은 눈썹 아래에는 커다란 눈이 있었다. 푸른 홍채가 방사형으로 빛나서 쳐다보고 있노라면 섬뜩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풍만한 뺨과 작은 입매. 전체적인 얼굴형은 확실히 마이코를 닮은 것 같았다.
"에밀 주모우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요. 게다가 이 인형은 자동 인형 - '오토마티즈크' - 입니다."
인형은 왼손에 접시를 들고 오른손에는 작은 나팔 모양의 관을 들고 있었다. 소우지는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안에 있는 액체를 접시에 부었다.
소우지는 병을 치우고 인형의 등 뒤로 손을 뻗어 태엽을 감았다. '딱딱',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잘 보세요."
소우지는 인형에서 손을 뗐다.
작은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 왼손으로 들고 있는 접시 안에 관 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에 옮기더니 손아래에 있는 튜브를 입에 넣었다.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인형의 가슴이 크게 숨을 쉬자 튜브 끝에서 비눗방울이 튀어나온 것이다.
비눗방울은 관을 벗어나 일곱 빛깔로 빛나며 공중에 떠올랐다.
"가슴의 움직임을 보세요. 솜씨가 아주 섬세하죠?"
인형은 여러 개의 비눗방울을 뿜어냈다. 귀여운 어설픔에 약간의 섬뜩함까지 더해진 인형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소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기계를 멈춰 세웠다.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겠죠?"
마이코는 인형이 움직이지 않자 소우지에게 물었다.
"기원전 2천 년 전의 인형이 이집트에서 출토된 적이 있어요."
"기원전 2천 년 전이라니......."
"인간은 도구를 만들면서 동시에 인형도 만들기 시작했나 봐요. 게다가 자동 인형도요. 이집트 인형은 몸통과 팔다리를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한 것으로, 허리에 있는 끈을 당기면 손이 위아래로 움직여 빵을 반죽하는 동작을 하지요. 일본의 고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형이 출토되었어요."
"인간이 장난감에 쏟아 부은 에너지는 엄청났군요."
"쇼소인에 남아 있는 물건들도 투호, 탄환궁, 바둑, 스고쿠 등 사치와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놀이기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요. 그 중의 하나가 카라쿠리 바둑판입니다. 양쪽에 바둑돌을 넣는 서랍이 만들어져 있는데, 한쪽을 당기면 다른 쪽도 나오도록 되어 있지요. 엑스레이를 통해 내부의 장치가 알려졌는데, 매우 정교한 장치가 돋보입니다. 문헌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건 고사기 속 기록입니다. 고야쿠 친왕이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요."
언젠가부터 소우지의 표정에서 어둠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카라쿠리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았다.
"......카라쿠리가 성행한 것은 에도 시대였을 거에요. 그 당시에는 시계도 카라쿠리 중 하나였는데, 간분(寛文) 4년에 시조가와라(四条河原)에서 시계 놀이가 유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고 해요. 원래 시계와 카라쿠리의 관계는 깊습니다. 간분 2년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카라쿠리 연극의 기치를 올린 다케다 오오미는 원래 시계 장인이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에이세이 시계라는 백과사전만한 대형 시계를 나무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가에이(嘉永) 연간에 다나카 히사시게가 만년시계를 만들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건 알고 계신가요?"
"언젠가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카라쿠리 하면 히다다카야마(飛騨高山)의 카라쿠리 수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그렇네요. 아이치, 기후의 축제를 위해서 정교한 카라쿠리가 만들어졌죠. 바닷가에서는 가메자키의 조수제, 산에서는 다카야마의 산왕제.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布袋台)일 것입니다. 우다이 씨, 알고 계시나요?"
마이코도 소우지의 말에 이끌려 장난감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 생각나요. 본 기억이 있어요. 무대에 내밀어진 팔 위에서 천으로 된 칠복신이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리고 두 명의 가라코 (唐子 *중국풍의 옷을 입은 아이)가 여러 개의 가라코를 넘나들며 곡예를 했어요. 마지막에는 두 사람 모두 칠복신의 어깨와 팔에 올라타게 되고요. 칠복신이 손을 흔들면 긴 깃발이 흘러나왔습니다. …….인형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작들이었어요."
"가라코 인형은 그네를 타고 날아갈 수 있거든요. 이른바 자유분방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분세이 5년에 우에노산 아래, 화재 대피용 공터에서 행해진 축포세공 웃음 주머니는 더 대단합니다."
"웃음 주머니?"
"원래 제목은 '나니와가타하나노 스가타미(なにわがたはなのすがたみ)'. 오사카의 오오에 우베에(大江宇兵衛)라는 사람의 작품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카라쿠리는 눈알을 움직이면서 여유롭게 화살촉을 닦는 화살촉의 고로(矢の根の五郎), 옷깃에 꽂힌 바람개비에 손을 들며 기뻐하는 아이. 흙다리를 건너는 미인 등 십여 종이었습니다. 춤추는 모습과 말투, 문지기까지 모두 카라쿠리 인형이며, 마지막에 웃음 주머니를 팔았습니다. 칠복신과 가라코들의 놀이에서는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와의 연관성도 느낄 수 있지요. 마지막에 이 축포세공 칠복신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얼굴 표정이나 몸놀림은 말할 것도 없고 배꼽까지 흔들렸다고 하니, 에도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앞 다투어 산 아래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나라도 그렇겠네요."
마이코가 말했다. 마사오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소우지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덴포 4년, 에도 후카가와 하치만(深川八幡)에서 수호전이 상연되었습니다. 이는 하세가와 칸베에(長谷川勘兵衛)의 작품이며, 수호전의 호걸들이 대거 등장해서 활약하죠. 무대도 간도라케, 세리아케, 텐지라케 등이 많이 사용되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 외에도 오오후네 사계절의 순풍, 요코덴, 기야만선의 카라쿠리 등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케일이 컸던 것은 아사히나(朝日奈)의 대작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금화로도 남아있는데, 머리의 크기가 한 뼘이 넘고, 담뱃갑이 두 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인형도 움직였나요?"
마이코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마,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사히나가 들고 있는 연통 위에 인형의 다이묘 행렬이 지나가고, 케누키 위에서 처녀가 춤을 추고, 연통에 달린 네츠케에서 입이 나오는 등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개막 직전에 이 인형은 사사(寺社)봉행관으로부터 흥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너무 커서?"
"그래요. 당시에는 대형 인형극 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걸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금지령이 내려진 분세이, 덴포 시대에는 큰 구경거리가 즐비했다고 하네요."
"그런 장난의 유행은 계속 이어져 왔던 건가요?"
마이코가 물었다.
"아니, 카라쿠리라는 것은 공예의 천재가 나타나면 번성하다가, 그 천재가 없어지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아요. 독창적인 천재성과 정교한 기술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거죠. 따라서 평범한 인형사는 인형을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 어떻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제작의 노력을 쏟게됩니다. 그들은 인형의 표정에 움직임을 더하고, 자세에 쓸데없는 고심을 거듭하지만, 정작 인형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죠."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인형에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예술 아닐까요? 소우지 씨의 말을 들어보면 예술적 표현보다 기발한 장치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사람에게는 다양한 입장이 있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웃었다.
"예술가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들은 얼마나 엉성해 보일까요. 아무리 훌륭한 인형극이라도 그들은 절대 예술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반대로 과학자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 에디슨은 보캔슨에게 "어린아이 속임수 기계”라고 말했죠."
"카라쿠리 인형은 두 세계 모두에서 어린아이 장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군요"
"하지만 사기꾼의 눈에는 예술도 과학도 모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 아시겠나요?"
"주모우의 인형을 보니까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 하여튼, 이런 카라쿠리 인기도 초대가 죽은 후 기껏해야 3대 정도까지만 이어질 뿐이었지만, 후대의 연극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분라쿠의 '카시라(かしら)'가 그렇죠."
소우지는 일어서서 다른 선반에서 한 개의 인형 목을 꺼냈다.
인형은 둥근 상투머리로 묶여 있다. 부분적으로 칠이 벗겨졌지만, 고운 눈썹과 통통한 뺨에서 기품 있는 유부녀의 색기가 느껴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목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속임수가 숨겨져 있어요."
소우지는 목 아래쪽에서 튀어나온 나무 돌기를 눌렀다. '쿵'하고 많은 단단한 나무가 한꺼번에 결합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인형의 이마에서 커다란 뿔이 두 개가 튀어나왔다. 눈이 위로 치솟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평온한 유부녀가 순식간에 귀녀로 변해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귀신의 인상이 마사오의 가방 속에 있던 ‘마도죠’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코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귀신을 보면서,
"소우지 씨, 나에게 토모히로 씨가 마도죠라는 인형을 보여 준 적이 있어요. 그 인형은 이 목에서 힌트를 얻은 거였나요?"
"토모 씨가 마도죠를?"
소우지는 목을 다시 돌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네. 그 인형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 뭐, 이 목이 힌트가 되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 목은 인형의 한 표정이 그대로 바뀌는데, 마도죠는 한 목에 두 개의 얼굴이 있어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취향은 아니라서 나는 제작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뭐, 바보짓이였죠. 토모 씨도 시제품을 한두개 만들다가 결국 내 의견에 동의한 것 같습니다. 판매할 생각도 없던 것 같고요."
소우지의 말 속에는 토모히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마이코는 마사오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 분라쿠의 목도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장난이잖아요?"
"이런, 날카로운 질문이군요."
소우지는 다시 한 번 풍자극 세계의 얼굴이 되었다.
"이집트의 빵 반죽 인형은 당연히 손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우다이 씨가 본 다카야마의 호테이타이에서 무대에 튀어나온 팔은 '카라쿠리도이(からくりどい)'라고 합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줄은 여러 개의 기관통을 통해 줄잡이의 손에 전달되는데, 복잡한 줄타기를 하려면 40조에 가까운 줄을 8명의 줄꾼이 협력하여 조종해야 합니다. 당연히 줄을 다루는 장인의 명인에 가까운 기술이 필요한거라 완벽한 카라쿠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웃음 주머니도 마찬가지에요. 천가방 옆에 희미하게 어두워진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는 촛불이 놓여져 있어 살짝 비춰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거기에 장치가 있을 거라고 간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블랙매직과 같은 원리죠. 당시의 속임수는 모두 똑같았어요.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형을 조종했던 거죠. 즉, 멜첼의 자동 체스 기사와 같은 발상이었어요."
"즉, 속임수라고요?"
"네, 트릭입니다. 사람이 인형을 움직이는 거죠.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을 사용하는 방법. 천으로 된 자루대를 사용하는 방법.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이 사람이 인형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 웃음보처럼 교묘하게 조명의 공조로 인형을 움직이는 인간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법 ......"
"정말 많네요."
"이런 트릭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책이 쿄오호오(享保)년도에 출간되었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죠? '기공훈몽감초(機工訓蒙鑑草)'라는 책인데, 방금 이야기한 트릭이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동 체스 기사의 트릭의 원리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케다의 속임수인데, 인형극에서 배우까지도 5촌 상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죠. 사람이 5촌짜리 상자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속임수고요. 의상만 남기고 배우는 무대 위 구멍을 통해 바닥으로 도망쳐 버리는 거였죠."
"그럼 주모우처럼 완벽한 카라쿠리는 없었나요?"
"그게 바로 ......."
소우지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있어요. 많이 있어요. ‘기공훈몽감초’가 출간된 지 66년 후에 출간된 ‘기공도휘《카라쿠리즈이》’는 완전한 카라쿠리만을 모아놓은 해설서입니다. 실이나 현기증을 유발하는 트릭은 일절 없어요. 기본은 태엽 장치이기 때문에, 첫머리에 시계의 도해가 제대로 붙어 있고요. 각 인형에는 치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런 책이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소우지의 눈빛이 빛났다.
"가장 유명한 카라쿠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이에요. 주인이 인형의 양손에 들고 있는 쟁반 위에 찻잔을 올려놓으면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걸어갑니다. 손님이 찻잔을 가져가면 인형은 걸음을 멈추고요. 손님이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다시 놓으면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해 좌석을 돌아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하라 사이카쿠도 이 인형을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는 지금도 소중히 보존되어 있지요."
"그것도 고래의 수염으로 만든 태엽 장치를 사용한 것인가요?"
"초기 것은 그렇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금속제 기어와 태엽을 이용한 인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또 수은을 사용한 카라쿠리 인형도 만들어졌고요."
"수은이 인형에?"
"오단반지나 연리반지라는 인형에 수은으로 만든 카라쿠리 인형이 사용되었어요. 이 인형은 손에 들고 봐도 장치가 보이지 않아요. 인형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수은의 이동에 의한 것이지, 태엽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 인형을 맨 윗 단에 올려놓으면, 어느새 양손을 들어 올리고, 몸을 뒤틀고, 돌고 돌기를 반복하며 5단의 단을 이동해 나갑니다. 그 밖에도 잉어가 폭포를 타고 올라가 용으로 변하는 용문폭포, 아이가 북을 치면서 피리를 부는 고테키지도(鼓笛児童), 앞에 놓인 물건이 됫박을 내려놓을 때마다 네 가지로 변하는 물건 인형, 소년이 말의 목을 타고 노는 하루고마(春駒) 인형.... ..."
"정말 많네요."
에도 시대 중기에 이미 대규모 카라쿠리 연극이 상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토시오에게 있어서는 처음 알게 된 놀라움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완전 자동화된 여러 가지 카라쿠리를 듣고 있자니, 그 기술을 이용하여 소정에서 카오리를 쏘아 죽이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인형을 만드는건 아주 쉬운 공작처럼 느껴졌다.
"너무 수다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만 들어서는 재미없을 것 같네요. 이제부터 실물을 보여드릴까요?"
소우지는 마사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 씨, 역립(逆立)인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습니까?"
"역립 인형... 들어본 적 있어요."
마사오는 바로 대답했다.
"언젠가 토모히로가 흥분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소우지 씨가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창고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토모 씨와 둘이서 고쳐서 움직이게 만든 자동 인형이에요."
소우지는 일어서서 책상 위에서 네모난 포장지를 꺼내 세 사람 앞에 놓았다.
낡고 오래된 회색 면 봉투였다. 펼치자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오동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오동나무는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위에 '역립인형(逆立人形)'이라고 적힌 필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목화솜으로 감싼 물건이 들어 있었다.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에치고 사자 의상을 입은 어린아이 인형이었다. 인형은 사자 목을 달고 만자(万字)의 문양이 새겨진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소우지는 인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공도휘'의 목록에도 없는 희귀한 카라쿠리입니다. 태엽 장치에 수은까지 내장되어 있지요. 처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았어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까 수은이 증발해서 수은의 양이 줄어들었더라고요. 수은을 보충해 주었더니 신기하게도 작동이 되더라고요. 작가도 분명합니다. 오노 벤키치(大野弁吉), 가에이 2년의 작품입니다."
소지는 상자 뚜껑을 뒤집었다. 표지와 같은 필체로 '嘉永二年三月 大野弁吉 |拵 之《これをこしらう》'라고 적혀 있었다.
"오노 벤키치…… 사기꾼인가요?"
마이코가 흥미롭게 물었다.
“'사기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학문을 익힌 과학 기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카라쿠리 기에몬(からくり儀右衛門)의 다나카 히나시(田中久重) 등 카라쿠리를 만든 사람은 모두 걷는 사자를 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학식과 기예가 여러 방면에 이르렀습니다. 오노 벤키치는 가나자와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가나자와의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라고도 불리며, 시조류(四条流)의 그림과 조각을 잘했고, 목조각, 죽세공, 금세공, 도자기, 유리공예, 마키에(蒔絵) 등의 작품이 남아있지요. 학식은 의학, 이화학을 비롯해 약학, 천문학, 역학, 항해술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그의 천재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테이블을 옆에 두고 카펫 위에 공간을 만들어 인형을 꺼내 들었다.
"태엽을 감아볼래요?"
그 말에 마사오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태엽이 어디에 있죠?"
"허리 옆쪽. 하카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안 돼요. 떨어뜨리면 안 돼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감아 드릴게요."
소우지는 세 사람의 곁을 떠나 바닥에 앉았다.
"이 시대가 되면 태엽도, 기어도 모두 금속으로 만들게 되죠. 그래서 보존도 잘 되어 있습니다."
소우지는 즐거워하는 듯이 태엽을 감았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한 번 감았을 때였다.
"아, 아퍼!"
소우지는 갑자기 오른손을 인형에서 떼어냈다.
소우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손가락 밑부분에서 엷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엽이 끊어진건 아니야. 이상하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인형을 세 사람을 향해 세우게 했다.
인형은 가벼운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목에 달린 사자 관이 좌우로 흔들렸다. 양손이 움직여 허리춤에 달린 북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하는 북소리와 톱니바퀴 소리가 삐걱거리는 인공의 생명을 움직이고 있었다.
에치고 사자 소년은 세 사람 앞에 이르자 멈춰 서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잘 보세요 ......"
소우지의,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토시오는 그 목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인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형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뒤로 젖혀졌다. 두 발이 땅을 딛고 인형은 거꾸로 서게 되었다. 두 손 사이로 하얀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인형은 주인에게로 걸어갔다.
소우지 앞에서 인형은 멈춰 서서 천천히 두 발을 다시 땅으로 내려놓았다.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걸음걸이가 다소 어정쩡하게 소우지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멈추지 않아요 ...... 이상하네요 ......"
소우지가 신음하듯 말했다.
토시오는 처음으로 소우지의 얼굴을 보았다. 소우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소우지 씨!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가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소우지는 걸어가는 인형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순간 무게 중심이 무너지면서 소우지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괜찮아!"
마이코가 달려와 소우지를 일으켜 세웠다. 소우지는 열심히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 하지만, 훌륭하군, 그렇지......."
격렬한 고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소우지는 마이코를 튕겨내고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마사오가 무언가 외쳤다.
"의사를 불러!"
마이코가 소우지를 내려다보았다. 토시오도 일어섰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어 소리가 들렸다. 에치고 사자 인형이 구석에 쌓여 있는 장난감 상자에 부딪혀 옆으로 쓰러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토시오는 무의식적으로 인형에 손을 뻗으려 했다.
"만지지 마!"
매서운 마이코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자 수사관들이 달려왔다. 한 수사관은 소우지의 상태를 보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의사가 도착해 맥박을 쟀을 때, 소우지의 숨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방 전체가 기어 소리로 가득 찼다. 여러 개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르골이 울려 퍼지고, 시계 인형이 움직였다. 또 다른 시계의 창문이 열리고 기괴한 짐승이 얼굴을 내밀고 짖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