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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5

베스트 미스터리 2000 1, 2 -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정태원 역 : 별점 3.5점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1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2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소문만 듣던 책인데 인터넷 서점에 마침 재고가 있길래 냉큼 구입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들의 단편선이니 구입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목과 서론을 보니 일본 추리작가 협회에서 직접 선정한 2000년도판 베스트 단편선 쯤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한국 추리 작가 협회가 매년 출간하는 베스트 추리소설 모음집과 유사해 보입니다. 

워낙 일본이 추리 강국이라 저변과 시장이 넓은 덕분이겠지요? 수록된 작품의 양이 상당합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출판되었는데 1권에는 11편, 2권에는 9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수준도 우수합니다. 재미도 있고요.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통 추리물을 비롯해서 형사물, 공포스릴러, 환상단편, 인간 드라마, 심리 서스펜스에서 패러디까지 각종 쟝르를 넘나들며, 전개와 설정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고요.
작가군도 풍성합니다. 사노 요, 노리츠키 린타로, 이마무라 아야, 모리 히로시, 니카이도 레이토 등 유명 작가들은 물론 끝부분 작가 소개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라고 표시된 작가도 상당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렇듯 작가진만 보더라도 정말로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엄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전체적으로 우수하지만, 개인적으로 1권의 베스트는 사기극 "영원표묘", 정통추리물에 가까운 "사용중"과 "일곱통의 편지"이며 2권의 베스트는 정통 추리 "흉소면", "까마귀의 계시"였습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평균 이상 수준은 충분합니다.

번역이 약간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 조금 더 작은 판형으로 예쁘게 장정하였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렇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추리 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진수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수고롭더라도 구해볼 가치가 있는 책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후 2000년만 아니라 다른 년도의 베스트 단편 모음집도 소개되면 좋겠네요. 자세한 각 단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1. 잠들 수 없는 밤을 위하여 - 오리하라 이치 : 

 잡지의 "고민 상담실"의 투고와 신문기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으로 소품에 가깝습니다.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지만 마지막의 여운이 인상적이었어요.

2. 거짓말쟁이의 다리 - 사노 요 : 

 형사수사물. 두 형사의 대화로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의 뒤에 감추어진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는 전개로 잘 짜여져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마지막 반전은 약간 억지스럽습니다.

3. 배반의 푸가 - 스즈키 기이치로 : 

영안차 운전수라는 독특한 직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여자의 집착을 서늘하게 그린 소품. 약간 로얄드 달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인데, 조금 더 압축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4. 영원표묘 - 구로카와 히로유키 : 

미술상을 무대로 한 독특한 사기극으로 만화 "갤러리 페이크"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초반에 제공되는 명확한 단서를 통해 결말까지 이끌어내는 추리극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독자까지 속이는 세련된 전개와 트릭이 돋보입니다. 작가가 미대 출신의 전문가라 그런지 이야기에서 보이는 미술품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고요.

5. 지난날의 사랑 - 오사카 쓰요시 :

사립탐정이 여배우의 의뢰로 애인의 불륜 뒷조사를 한다는 내용으로, 별다른 추리적인 요소는 없지만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고 무난합니다. 베스트로 선정되기에는 지나치게 심심한게 아닌가 싶지만요.

6. 얼음설탕 - 후지모토 유키 : 

한 주부가 과거에 사라졌던 애인과 우연히 재회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점점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여성 버젼의 스텐리 엘린 단편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심리 묘사가 탁월하며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7. 야수의 기억 - 고바야시 야스미 : 

호러 스릴러의 성격을 띈 작품입니다. 다중인격의 소유자로 다른 인격일 때의 파괴적인 행동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잘 묘사하며, 추리적인 부분도 확실한 편이고 반전도 좋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속이기 위해서 전개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건 감점 요인이네요.

8. 은폐꾼 - 가스미 야스시 : 

사회적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불상사를 국가 차원에서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단체가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설정과 전개가 스티븐 킹의 "금연 주식회사"와 유사하지요. 기발한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후반 전개는 좀 뻔해서 아쉽습니다.

9. 사용중 - 노리츠키 린타로 : 

한 추리작가가 살해되었는데, 그가 생각한 추리 소설의 전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입니다. 스텐리 엘린의 작품을 인용해가며 전개되는데, 밀실 트릭에 대한 생각은 노리츠키 린타로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더욱 재미있더군요.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짧은 분량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충분히 전해주는, 단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10. 일곱통의 편지 - 아사기 마다라 : 

동거하던 남자의 어머니와 왕래한 편지로 이면에 숨겨진 살인사건이 밝혀지는 작품으로 전개도 독특하지만 추리적으로도 일품입니다.

11. 먼 창 - 이마무라 아야 :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이 불구가 된 사고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환상특급"에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소녀의 일기로만 전개되는 구성도 독특하고요. 재미도 있고 후반부의 아버지의 일기에서 밝혀지는 진상도 좋습니다. 다만 결말이 예측 가능하다는건 단점이에요.

2권 

시효를 기다리는 여자 - 니이츠 키요미 :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직전 진범의 심리와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작품. 독자를 속이는 소설만의 효과로서 이루어진 트릭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반전과 결말은 수긍하기 조금 어렵더군요.

부하 - 곤노 빈 : 

부하를 믿고 신뢰한 경부보가 방화범을 잡는다는 내용의, 인간 드라마와 추리물이 잘 섞여 있는 소품입니다.

흉소면 - 기타모리 코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 처럼 대학의 민속학자가 한 고택의 오래된 가면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본격 추리물입니다. 트릭과 전개도 깔끔하지만, 무엇보다도 단편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범인의 동기까지 설득력있게 등장하는게 마음에 듭니다.

독점 인터뷰 - 노자와 히사시 : 

유괴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약간 사회파 느낌을 전해 주는 작품입니다. 사소한 단서로 진상이 밝혀지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구성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였지만,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힌 드라마가 잘 살아있어서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석탑의 지붕 양식 - 모리 히로시 : 

사이카와와 모에 커플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하지만 둘이 탐정으로 등장하는건 아닙니다. 모에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사이카와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이야기거든요. 결국 정답은 집사가 맞춰버린다는 "흑거미 클럽"과 유사한 결말도 독특하고요.
그러나 고대 인도의 수수께끼의 석탑 지붕 양식에 관한 수수께끼라는 설정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개중 설득력 있는 것"이라는 결말은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명성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출범 - 와카다케 나나미 : 

메이지시대를 무대로 천방지축 아가씨의 탈출 계획을 막는 하녀의 기지가 발휘되는 소품입니다. 일본어를 이용한 트릭이 하나 등장하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에요. 유쾌한 분위기는 즐거웠지만요.

까마귀의 계시 - 우타노 쇼고 : 

동네 쓰레기를 마당에 모아놓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사건 자체가 백만분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만 뺀다면,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전개도 깔끔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생환자 - 츠부라야 나츠키 : 

산악 경비대 대장을 주인공으로, 산에서 발생한 알 수 없는 프로 등산인의 추락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재와 설정이 독특하며 등산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별로 평가할 건덕지가 없었어요.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 -니카이도 레이토 : 

사람들이 식사 대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장소인 "독서 레스토랑"을 무대로 주인공 가스케가 건방진 싸구려 평론가 고토쿠를 추리소설 품평 내기를 통해 혼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서 레스토랑과 추리소설 품평 내기라는 설정도 참신하고, 등장하는 방대한 추리 작품에 대한 지식도 상세한데다가 무엇보다 유쾌한 꽁트 분위기가 즐거웠던 작품입니다. 작가가 평론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엿보이는 점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전개는 로얄드 달의 "맛"에서의 포도주 맞추기 게임과 거의 유사해서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트릭도 추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문제가 많고요. 여러모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03/12/15

두동강이 난 남과 여 -일본 추리 단편선- 별점 2점

두 동강이 난 남과 여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외 10명 지음, 일본 추리작가 협회 엮음, 한국 추리작가 협회 옮김/봉성기획
그동안 상당히 구해보고 싶었던 단편집이었습니다. 워낙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단편소설도 좋아하기도 해서인데 이 책이 인터넷 헌책방에 올라온것을 보고 주저없이 구입했습니다.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선정 기준은 상당히 젊은 작가들, 그리고 최근 현대 일본 추리 단편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선정되어 있는 듯 합니다. 이름을 알 수 있는 작가는 노리츠키 린타로, 히가시노 게이고, 나츠키 시즈코, 사노 요... 정도 였고 나머지 작가들은 잘 모르는 작가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일본 추리 단편집 같은 구성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표제작이기도 한 "두동강이 난 남과 여"와 "식인 상어" 두편만이 정통 퍼즐 미스테리에 가까왔고 나머지 작품들은 주로 인간의 심리와 인간관계를 그린 작품들이었습니다. 이런 작품들 중에서는 나츠키 시즈코의 "한마디에 대한 벌"과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이상한 인연"이 인간관계에 대한 냉정하고 어떻게 보면 잔인한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어서 재미있었고요, 나머지 작품들은 평이한 수준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허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약간 더 일본적인, 조금 더 엽기적이고 가슴 서늘한 작품들을 기대했었거든요. 힘들게 구하긴 했지만 약간 맥빠지는 단편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고려원이나 태동에서 나왔던 일본 미스테리 걸작선들이 더 제 취향인 것 같습니다.

2005/07/12

일본 서스펜스 걸작선 - 일본 추리작가 협회 추천 / 한국 추리작가 협회 편역 : 별점 2.5점

무슨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꽤 괜찮은 작품들이 실려있는 단편 앤솔러지. 다양한 분야의 장르들도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고, 수록 작가들도 야마무라 미사나 아카가와 지로, 아토다 다카시, 나쓰키 시즈코, 도가와 마사코, 하라 료, 모리무라 세이이치, 오사와 아리마사 등 유명하고 친숙한 작가들이 많아 풍성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여성 - 남성 작가의 비율 배분 역시 공평하네요.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 최대의 수확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항상 실망만 안겨줬었던 아카가와 지로의 정통 추리물 "곳에 따라 비"와 아토다 다카시의 서늘한 서스펜스 "취미를 가진 여인"입니다. "곳에 따라 비"의 우노경부와 대학생 유키코 컴비는 꽤나 유쾌한 캐릭터라 다른 시리즈도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사건과 트릭도 꽤 기발하면서도 잘 짜여져 있고요. "취미를 가진 여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건도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마지막에 꽤나 서늘한 반전을 가져다 주며 한방에 정리하는 전개가 괜찮았어요. 그 외의 작품들도 대체로 괜찮은 편입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작품도 실려있긴 합니다. "내가 죽인 소녀"의 사와자키 탐정이 등장하는 하라 료의 단편 "소년을 본 남자"는 마음에 들던 캐릭터가 등장하는 단편이라 기쁜 마음으로 읽었지만 작품 자체는 별로였습니다. 드라마에 너무 신경쓴 느낌이랄까요? 여튼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도가와 마사코의 "노란 흡혈귀"는 최악이에요. 약간 저능아인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축으로 진행되는 1인칭 시점의 서스펜스물인데 설정과 전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다른 작품들과는 내용이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생뚱맞기도 했고요. 미국에서 출간된 일본 추리 단편 앤솔로지에도 선정된 유명 단편이라고는 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단위의 야망"역시 기대 이하였습니다. 비정한 현대 조직 사회를 드러내기 위한 드라마이긴 한데 트릭도 거의 없다시피 한, 싸구려 치정극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80~9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 추리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들이 선정되어 있다고 생각되네요.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팬과 단편소설 팬이라면 만족하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7/04

Japan 미스터리 걸작선 1 - 한국, 일본 추리작가협회 추천 / 정태원 번역 : 별점 3점

J 미스터리 걸작선 1 - 6점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입니다. 그런데 선정을 한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했다는 점이 특이하네요. 예전에 읽었지만, 다시 구입했기에 읽고 리뷰 남깁니다.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띄는데, 책 뒤의 설명을 보면 다른 단편선 등에서 이미 소개된 작품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선정하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50주년 기념 앤솔로지라는 주제와는 좀 맞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그동안 소개된 작품들이 일본 추리 문학의 대표작에 더 가까운게 당연하잖아요. 또 이러한 기획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진짜 국내에 초역되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된 건 이상해요.
정통 추리나 스릴러가 아닌 환상문학과 호러, 그리고 SF에 가까운 작품까지 실려 있어 기준이 약간 모호하다는 것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수록된 작품들도 특정 시대나 작가별로 편찬된게 아니라 무작위로 수록되어 있는데, 에드가상 수상작품집처럼 어느 정도는 목차에서도 시대순 같은 기준을 가지고 분류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 추리문학 협회가 선정한 일본 추리 단편이라는 기획 자체가 그냥 놓치기에는 너무 흥미로울 뿐더러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까지 가져다 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광기의 계보", "정사의 배경" 그리고 "살의" 를 꼽겠습니다.
총 세 권이 발간되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건 이번에 구입한 이 1권 뿐인데, 언젠가는 2, 3권도 발견하여 책장에 추가하고 싶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아파트의 귀부인 - 아카가와 지로

새로 이사온 옆집의 미모의 귀부인이 하는 요리의 냄새를 알아 맞출 정도로 후각이 민감한 아내를 가지고 있는 구보는 옆집의 부인에게 호감을 느껴 아내가 집에 없는 틈에 옆집에 찾아간다. 

다른 앤솔로지에서도 많이 소개된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입니다. 추리 문학이라기 보다는 반전의 맛이 있는 스릴러에 가까운데, 너무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 나체의 방 - 호시 싱이치

일본 단편의 거장 중 한명인 호시 싱이치(호시 신이치)의 작품입니다. 우연히 여러 남녀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로 상황 설정이 재미있고 여운을 주는 맛도 잘 살아있어서 역시나 단편의 거장이구나! 싶네요. 다만, 추리물은 절대! 아닙니다.

3. 나폴레옹 광 - 아토다 다카시

아토다 다카시의 초 유명 단편이지요. 제가 이전에 "Y의 거리" 소개 때에도 리뷰했기에 패스합니다. 

4. 고양이의 목 - 고마츠 사쿄

고양이를 키우면 죽는 미래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는 일본이라서 나올 수 있던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반전의 맛도 어느정도 있고 재미도 있지만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니고 SF도 아니고... 여러모로 좀 어정쩡한 느낌입니다.

5. 광기의 계보 - 후지이 레이코

초등학교 교사 게이코는 우연히 들춰본 학생 기누코의 일기를 통해 그녀의 계모가 기누코를 광기로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된다... 

여성작가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작품으로 일기를 주요 매개체, 단서로 하여 전개된다는 특이함에 더해 극적 반전까지 뛰어납니다. 약간의 호러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런데 왠지 영상물에 더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6. 3억엔의 악몽 - 니시무라 교타로

평범한 올드미스 여사원 교코는 어느날 찾아온 변호사에게서 자신이 친절을 베푼 한 노인에게 3억엔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변호사는 자신과 다른 인물을 착각하고 있었고, 교코는 유산을 상속받는 진짜 인물인 아리사와 나미코를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하는데... 

여정 미스테리의 달인이라는 니시무라 교타로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지푸라기 여자" 같은 인물 설정을 가진 완전 범죄물입니다. 조금 의외였달까요. 그러나 기발한 발상에 비해 전개가 뻔하고 치밀함이 많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7.얼굴 - 마츠모토 세이쵸

살인 사건을 저질렀던 배우 이노 료기치는 자신이 주연인 영화가 전국 개봉되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이시오카를 살해하려 하는데... 

"거장" 세이쵸 선생의 작품입니다. 세이쵸 선생 단편은 대표작들에 비해 많이 격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 작품은 꽤 괜찮네요. 특히 범인이 배우이고 영화 개봉 때문에 목격자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은 참신합니다. 하지만 결말이 너무나, 너무나 심하게 아닙니다...

8. 정사의 배경 - 츠츠야 다카오

한 주부가 음독 자살했다. 그녀는 죽기 직전, Y타임즈의 독자 투고란에 과거의 애인에게서 협박받고 있다는 투고를 보내 상담을 의뢰한 상태였다. Y타임즈의 기자 소네는 단순 자살 사건은 아니라는 판단에 독자적인 조사를 개시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데 작품이 굉장히 좋아서 놀랐습니다. 독자 투고와 음독 자살한 여인을 연결시키는 발상도 뛰어나지만 실제 사건의 트릭도 괜찮고 무엇보다 전개가 굉장히 깔끔합니다. 진범과 동기도 납득할 수 있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단편 중 하나입니다.

9. 조건반사 - 오타니 요타로

여배우 미즈사와 미나코는 연기지도 담당 오모리 세이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아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며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알콜 중독으로 바닥으로 추락한 세이지를 거추장 스러워한 미나코는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른바 "조건반사"에 의한 다이잉 메시지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여기서처럼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때문에 기발하긴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져 보입니다. 그래도 꽤 재미있었어요.

10. 벽 - 고다카 노부미츠

아내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벽속에 파묻히게 된 남자의 이야기. 이 한줄이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

11. 살의 - 다카키 아키미츠

옆집의 이마노 부부를 돌봐주던 타누마 변호사는, 이마노의 부인 준코가 질투로 저지른 살인 사건 변호를 맡게 되었다. 타누마는 그녀를 감형시켜 집행유예를 받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어느 날 이마노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는데... 

거장 다카키 아키미츠의 단편입니다. 

이른바 "살인을 하기 위한 살의의 정도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잣대가 어디에 있는가?"가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이 살의를 최소한으로 나타내기 위한 범인의 치밀함, 법의 헛점을 잘 꿰뚫고 저지른 범행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195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보이지 않게 세련되고 꽉 짜여진 구성이 놀랍네요.

12. 소라 - 야마무라 마사오

추리물은 아닙니다. 못살던 시대의 불우한 가족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적나라하게 그린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13. 무서운 선물 - 유키 소지

한 여자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키스했다가 저주(?) 받는 한 바람둥이의 이야기. 전해주는 꽃들의 꽃말로 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 전개는 괜찮지만 마지막에 저주니 어쩌니 하며 마무리하는 결말은 납득이 안됩니다...

14. 연습게임 - 후지무라 쇼타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의 수다를 겨우겨우 참고 살다가 우연찮게 불륜을 저지른 상대 미와와의 달콤한 미래를 위해 그녀를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내와 몰래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아내는 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어 가지키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함정에 빠지는 인물이 등장하는 "함정물"인데, 어차피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를 죽이려 했으므로 그다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반전의 여운을 남기기는 하지만 좀 약합니다.

15. 우물이 있는 집 - 미나카와 히로코

과거 자신이 유괴당한 집에 신혼여행을 오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전개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흘러가는데,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미묘함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비해 결말이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16. 복안 - 소노 다다오

일본의 손다이크 박사라고 불리운다는 복안전문 범의학자 고이케 고로라는 캐릭터가 나와 두개골 복안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작품. 캐릭터 이외의 설정과 전개는 평이합니다.

17. 사랑 - 미야자키 준

동물 뇌세포를 집어넣은 육아 로봇이 저지른 아동 살해 사건 이야기. 아시모프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지만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18. 산키치의 식욕 - 와타나베 게이스케

어려운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고학생 산키치가 우연히 주운 3엔으로 한끼를 해결하는 이야기. 이야기는 꽤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순문학 단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작가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왜 이 단편선에 실려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19. 쇼윈도의 연인 - 요코미조 세이시

소설에 빠져드는 기이한 습성이 있는 청년 다마루 소진은 최근 간행된 소설 "쇼윈도의 연인"을 읽은 직후, 한 양품점 쇼윈도의 마케팅을 사랑하게 되는데...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요코미조 세이시의 단편이라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작품도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외국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성도착적인 애정에 대해 다루는 듯 했는데, 급변하여 놀라운 반전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발표 시대를 감안한다면 정말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거장다운 작품입니다.

20. 범인은 누구인가 - 구사카미 진

쌍동이 중 한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한데 누구인지를 몰라 궁지에 몰린 경찰이 사건을 결국 해결한다는 이야기. "음악"을 주요 소재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지만 트릭과 설정은 마음에 들었어요.

21. 계단을 오르는 남자 - 마유무라 다쿠 

세계가 거대 빌딩화되어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세계. 한 남자가 25.000층의 건물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는 계단을 올라 새로운 층에 도착할 때마다 점차 여행자에서 모험가, 그리고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가 꼭대기 층에 다다르게 되는 날이 오고 군중이 그를 보기 위해 운집한다...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초고층 빌딩 사회에서 목적없이 그냥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주변 인물들에 의해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되는 과정이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너무나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좀 더 생각했더라면 정말 마음에 드는 걸작 단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2013/10/21

귀동냥 - 나가오카 히로키 / 추지나 : 별점 2.5점

귀동냥 - 6점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추지나 옮김/레드박스

일본작가 나가오카 히로키의 단편집. 표제작 포함 전부 4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운좋게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 전에 자리를 빌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단 이력이 화려한데 2008년 표제작 "귀동냥"이 제 61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발표된 이 단편집이 2012년 "추천 문고 왕국 2012" (이건 무슨 상일까요?)에서 국내 미스터리 부분 1위에 오르며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판매도 꽤 괜찮았다고 하고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상을 수상할 정도의 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점이 없는건 아닙니다. 우선, 최근의 추세라 할 수 있는 연작이나 시리즈물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각 단편이 전부 다른 주인공과 설정, 배경으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작품으로 과거 오 헨리 시대에서나 봤었던 정통 단편물입니다. 뭐 연작, 시리즈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 입장에서, 또 판매나 마케팅 측면에서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는 이런 스타일로 창작했다는 것에서 작가의 신조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 모든 단편이 제가 좋아하는 잔잔한 일상계물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이야기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수록된 모든 단편이 사건 발생과 마지막 극적 해결이라는 오 헨리 스타일의 정석적인 단편 구성으로 전개되는데, 사건의 발생과 전개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예를 들자면 충분히 구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아 오해를 키운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억지스러운 설정이 눈에 뜨이는것도 불만이고요. (이러한 점들은 아래의 각 단편별 상세 소개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같은 일상계라 하더라도 추리쪽에 좀 더 많이 치우친 작품들 - 가노 도모코의 작품들이나 요네자와 호노부의 일상계 추리물,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의 일상계 작품들 등- 과는 다르게 추리보다는 심리 묘사와 전개에 더 주력하는 작품 -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들과 같은 - 인데,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을 싫어하는건 아닌데,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정보를 먼저 접해서 정통 추리쪽으로 기대가 너무 컸네요. 충분히 추리쪽으로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아 아쉽기도 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충분히 읽는 재미는 있으며 일상계를 좋아하시고 단편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작품집이나 추리적으로 약간 미묘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는 다시금 깊은 감사 드립니다.

아래 수록작별 상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경로이탈"

구급대원 하스카와는 대장 무로후시의 딸 가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가나는 6개월 전 외과의 마스바라의 차에 치어 휠체어에 의존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긴급한 상해사건으로 출동한 하스카와와 일행은 피해자가 가나 사건의 검사였던 구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고를 일으킨 의사 마스바라를 기소하지 않고 풀어주었었다.

칼에 찔린 구즈이를 병원으로 호송하는 와중에 무로후시는 바로 병원으로 이동하지 않고 사이렌을 켠채 병원 주변을 맴돌며, 하스카와에게 전화기를 주며 귀에서 떼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는데....

무로후시가 복수때문에 구즈이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인가?가 사건의 핵심인 작품. 결국 결말은 나름 훈훈한 일상계스러운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떨어진 핸드폰 + 사이렌 소리를 이용하여 위치를 알아낸다는 트릭 하나로 이만큼 이야기를 뽑아낸 것은 감탄스럽네요. 마스바라의 지병을 복선으로 배치한 것도 절묘하고요.

그러나 무로후시가 아무리 과묵하더라도 상황만 설명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지는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혹 사고라도 생긴다면 대장이 아무리 책임을 지더라도 다른 대원들한테 아무런 데미지가 없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것이 구즈이에게 원한을 품은 탓도 있다면, 마지막의 감동도 희석되는 느낌입니다. 구즈이가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자백하는 대사도 사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귀동냥"

경찰 하즈미 게이코는 딸 나츠키와 둘이서만 살아가는 모자 가정의 가장이자 경찰로 이웃에게 발생한 집털이 사건을 맡은 뒤, 유력한 용의자인 네코자키 (요코자키)가 이미 체포되어 구류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코자키는 하즈미에게 접근하여 면회를 요청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는데...

제목의 "귀동냥"을 상대방이 꼭 듣고 싶은 정보를 우연히 알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라고 정의내린 후, 이러한 귀동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입니다.

네코자키가 귀동냥을 이용하여 진범을 유도하는 것, 그리고 나츠키의 엽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귀동냥의 형식을 빌어 후사노 할머니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얽히는데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하즈미가 네코자키의 보복을 우려하는 부분에서부터 긴장을 쌓아나가다가 폭발시키는 과정도 일품이고요.
앞서 말했듯 "귀동냥" 설정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과 일상계 왕도스러운 훈훈한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도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설득력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단 네코자키가 구태여 귀동냥 형식을 빌려 진범에게 내사가 진행중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릴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냥 형사에게 이야기하는게 더 쉽지 않았을까요? 또 이렇게 정보를 들었다고 해서 사이토가 바로 자수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나츠키가 왜 엽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그냥 어머니한테 할머니를 안심시켜달라고 이야기하는게 더 나았을것 같은데 말이죠.

이런저런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899"

소방대원 모로가미는 이웃에서 홀로 갓난아기 아이리를 키우며 살아가는 하쓰미에게 반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사는 주택에 화재가 발생하고 상황이 899 (긴급구조자) 마루아카 (1세 미만의 영아)라는 암호로 전달되는데...

아이를 잃은 아픈 경험을 가진 소방대원 가사마가 아이리가 학대를 받은 것을 파악하고 잠깐 동안 아이를 숨겨 엄마에게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는 것이 핵심 내용인데....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이가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아이가 학대받은 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목적을 위해 아이를 비닐봉지에 넣어 잠깐 숨긴다는 발상은 애시당초 이해불가였어요. 구한 다음 바로 경찰을 부르거나 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이가 다치려면 어쩔려고 했던건지...

아이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던가, 가사마가 장을 본 뒤 큰 비닐봉투를 재활용을 위해 따로 챙긴다던가 하는 식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고, 모로가미의 애타는 심리묘사도 괜찮은 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이야기의 설득력이 제로에 가깝기에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고민 상자"

갱생보호시설의 원장 유코는 퇴소를 앞둔 우스이의 앞길에 왠지 모를 신경이 쓰였다. 그는 만취한채 자전거로 여자아이를 치여 죽인 죄로 구속된 뒤 출소한 인물이었다. 우시이는 입사한 이즈카 제작소 기숙사에 입주하는데 1주일에 걸쳐 가전제품을 보러 다니거나 선술집을 돌아다니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투신 자살을 시도하는데...

설정은 굉장히 묵직하지만 실제 내용은 아주 담담한 일상계의 왕도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핵심 단서(?)인 유코의 NHK 대담 방송이 중요한 소재로 계속 언급되기 때문에 진상에 대해 독자가 눈치채기 쉽다는 단점은 있지만 유코의 심리묘사 등 디테일한 묘사가 아주 뛰어나며, 우스이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도 충분합니다. 아울러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내용의 설득력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네요. 물건을 버리기 위한 "고민 상자"라는 모티브를 잘 엮은 것도 좋았고요.

이 작품집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019/11/16

추리 소설 30선

출처 : MLB park

영국추리작가협회 선정 1위부터 100위까지 작품과 미국추리작가협회 선정 1위부터 100위 작품들, 그리고 일본 미스테리 독자 선정 서양 추리소설 1위부터 100위에 뽑힌 작품들 순위를 기본으로, 여기에 추리소설 평론에 있어 가장 권위를 갖는 평론가들인 데이비드 레먼, 하워드 헤이크래프트, 줄리언 시먼스, H.R.F. 키팅이 뽑은 100대 추리소설과 미국 독립서점협회에서 선정한 100대 추리소설 리스트를 보완해서 뽑은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추리소설 30편 순위라고 합니다.
저도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 이라던가, 일본의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의 해외편 등을 관심깊게 보아 왔는데, 고전 중심으로 추리 소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친숙하고, 국내 소개된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한 리스트라 생각합니다. 

너무 오래되어 지금 읽기에는 큰 재미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작품들이 일부 있고, 어떤 작품은 순위와 선정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거든요. 특히나 고전과 역사적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입문자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을 듯 합니다.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가 있는 작품은 링크가 걸려 있으며, 리뷰는 없지만 읽었던 작품은 붉은색,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은 회색입니다. "레베카"와 "유리 열쇠"부터 빨리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 2020/02/01 "유리 열쇠" 링크 추가
* 2020/08.30 "레베카" 링크 추가
* 2020/12/31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링크 추가
* 2022/11/27 "로그 메일" 링크 추가

30. 유리 열쇠 (대실 해밋)

29. 붉은 수확 (대실 해밋)

28.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27. 로그 메일 (제프리 하우스홀드)

26. 재칼의 날 (프레드릭 포사이드)

25.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24. 광고하는 살인 (도로시 세이어즈)

23. 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22.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지)

21. 트렌트 최후의 사건 (E C 벤틀리)

20. 나인 테일러스 (도로시 세이어즈)

19. 대학제의 밤 (도로시 세이어즈)

18. 39계단 (존 버컨)

17. 사라진 완구점 (에드먼드 크리스핀)

16.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존 르 카레)

15. 실종당시 복장은 (힐러리 워)

14. 바스커빌가의 개 (아서 코난 도일)

13. 디미트리오스의 관 (가면) (에릭 엠블러)

12.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1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셔 크리스티)

10. 빅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9. 월장석 (윌키 콜린즈)

8.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7. 레베카 (다프네 듀 모리에)

6.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제임스 케인)

5.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4. 말타의 매 (대실 해밋)

3. 애크로이드 살인 (애거셔 크리스티)

2. 셜록 홈즈 단편집 (아서 코난 도일)

1. 진리는 시간의 딸 (조세핀 테이)

2020/06/20

어두운 범람 - 와카타케 나나미 / 서혜영 : 별점 2.5점

어두운 범람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엘릭시르

여름에는 추리 소설이지요. 좋아하는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단편집입니다. 재미와 완성도 모두 무난하고 평이했습니다. 전체적인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 5편에 대한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리 남자" 

하무라 아키라는 모토미야 하루로부터 군마현 이카호 온천 근처에 외따로 위치한 할아버지 집에 놓여있는 어머니의 유골 항아리를 회수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심령 연구가 히다리 슈지로로 사후 폐허가 된 그 집은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상태였다. 폐가가 된 히다리 슈지로의 자택을 방문한 하무라 아키라는 유골 항아리를 찾다가 '파리 남자'의 습격을 받아 지하실로 떨어졌고, 그 곳에서 예전 안면이 있던 작가 아사쿠라 교스케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굉장히 짧은 이야기이지만, 본격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추리적으로는 빼어납니다. 모토미야 하루의 오빠가 과거 하무라 아키라, 아사쿠라 교스케의 취재 당시 동행했던 카메라맨 오사무였으며, 그가 '파리 남자'라는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단서가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굉장히 짧은 분량임에도 등장하는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적절히 분배하여 단서와 정보를 전달하는 솜씨도 탁월하고요. 아사쿠라는 오빠 일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오빠가 일하다가 다쳐서 다리가 불편하다는 모토미야 하루의 말을 통해 당시 카메라맨이 하루의 오빠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파리 남자'로 보인건 방독면 때문이고, 이는 그 집에서 화산 가스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를 별 거 아닌 듯 했던 TV 속 뉴스 묘사등으로 범인의 동기, 즉 그 집 주변이 '온천 지대'로 확인되어 단순 매각이 아닌 개발을 원했다는걸 풀어내는 추리도 일품입니다.

물론 억지가 없지는 않아요. 아사쿠라에게 심령 스폿으로 공동묘지 터를 추천한건 그 땅의 소유주일 수 밖에 없다는 추리가 그러합니다. 아사쿠라가 인터넷 등 다른 루트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고 있으니까요.
또 집을 동생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유골함이 없다고 모토미야 하루가 집의 매각 계획을 철회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즉, 하무라 아키라를 습격해서 계단에서 밀어 떨어트릴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아사쿠라의 시체도 결국 모토미야 하루의 증언을 통해 행선지가 드러나면 영원히 감출 수는 없었을테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단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작위적인 전개, 약간의 억지는 아쉽지만 항상 위험에 처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추리적으로도 공정한 좋은 작품입니다.

"어두운 범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대단치는 않습니다. 일단 이소자키가 다섯명이나 죽이는 폭주를 저지를 때 부상을 입었던 "죽지 않는 남자" 후쿠모토 다이키치의 옛 여자친구가 유코라는걸 알아내고, 펜레터를 보낸건 유코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 다다노부라는걸 알아내기까지 사용된 페이지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아요. 그만큼 전개가 빠르며 추리의 여지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부각시키는건 이소자키가 왜 폭주를 저질렀는지? 유코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다다노부는 이소자키의 범행 전날 밤, 태풍이 불어올 때 유코는 사라졌는데 사실은 이소자키가 그녀를 죽이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폭주를 저지른게 아닐까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다노부의 계략이었습니다. 전일본이 미워하는 범죄자 이소자키에게 팬레터를 보낸건 누구인지 변호사가 흥미를 갖게하여 그 집을 조사하게 만들고, 그 때 시체를 발견하게 만든겁니다. 목적은 유코의 보험금이었습니다. 실종자에게는 보험금이 나오지 않으니 시체가 발견될 필요가 있었거든요.

이렇게만 보면 꽤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이소자키가 범행을 저질러 수감된 뒤 그의 아버지가 목을 맨 곳에 시체가 있었다는건 애시당초 말이 안됩니다. 자살 당시 현장 조사는 철저히 진행되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시체를 가져다 둔 건 이소자키가 아닌게 뻔하지요. 또 트렁크에 넣었다 한 들, 조사를 하면 사체가 오랫동안 묻혀있었다는 것도 바로 들통날테고요. 그럼 시체를 유기한 제 3자가 있다는 뜻이니 이소자키의 범행은 여러모로 불가능합니다. 즉, 다다노부의 계략은 헛점 투성에 불과해요. 아울러 이 과정을 통해 이소자키가 왜 폭주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유코의 백골에 많은 골절이 보여서 다다노부가 말한, 휠체어를 탄 어머니 범행설의 신빙성을 떨어트린다는 결말과, '나' 역시 다다노부처럼 노모 때문에 미칠것 같은 상황인데 다다노부의 범행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범행을 결심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은 꽤 모골 송연하기는 합니다.
이런 점을 본다면,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기묘한 맛' 류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고령자 부양 문제가 핵심 소재이며, 동기라는 점에서는 사회파 추리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고요. 이렇게 인간 본성의 어두움을 사회 문제와 함께 덜컥 내놓는건 와카타케 나나미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범인의 계획이 헛점 투성이라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이지만, 추리 외에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게 아닌가 싶네요.

"행복한 집"

착하고 성실해 보였던 사람이 악당이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범죄로 가득했다는, 하드보일드스러운 설정을 기묘한 블랙 코미디 느낌의 묘사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런 작풍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나미 하루히코는 바로 전작인 "어두운 범람"에도 출연했었고, 잡지를 위한 취재로 하자키 시의 헌책방에서 일한다는 독신 여성을 만나는 등 작가의 팬이라면 반가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또 고령자 부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점도 전작과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작가가 고령자 부양이라는 현실에 직면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나'가 고령자 부양에 대해 떠올리는 내용은 경험자가 아니면 모를 내용이라 생각되거든요.
추리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없지만, 범인 마쓰바라 사야카와의 취재에서 그녀가 수상하다는 단서는 모두 알려주는 등 정보 제공만큼은 본격물에 가깝게 공정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완성도는 미흡합니다. 내용에서 모호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력만큼은 인정받는, 한창 때인 편집자 세쓰코가 공갈 협박에 횡령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동기부터 불투명합니다. 그녀의 죽음이 마쓰바라 사야카의 범행 때문인지도 명쾌하게 드러나지도 않고요.
미나미 하루히코의 역할 역시 모호한건 마찬가지에요. 그가 세쓰코를 위해 협박 대상을 물색한 조사자인지, 아니면 공범자인지도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마쓰바라 사야카가 범인이라면, "cozy life"의 취재에 선뜻 응한 이유도 모르겠고, 그녀가 마쓰바라 할머니를 죽이고 집을 차지했다면 "cozy life"에 자신의 집을 독자 투고 형태로 소개해달라고 보낼 이유도 없었을겁니다.

와카타케 나나미 특유의 작풍을 잘 느낄 수는 있지만 이러한 점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작업의 일본"이 읽으면 잠이 오는 특효약이라는데, 국내에 출간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요새 불면증이 생겨서요.

"광취"

가리야 마나부의 1인칭 독백같은 이야기입니다. 처음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공손하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서 반말로 강하게, 협박조로 총을 들이대며 수녀들에게 이야기하는게 드러나는 구조가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특별하지는 않으며, 전개는 억지스럽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리야 마나부가 수녀들에게 분노를 터트릴 이유는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간 쓰레기인 가리야 마나부의 아버지입니다. 오기와라 미나코가 사생아 분지를 낳고 수녀원에서 쫓겨난건 그 탓이지, 수녀들의 잘못은 아니죠. 수녀원에 돌아가고 싶은 미나코의 소원을 죽은 뒤에도 받아주지 않은 수녀원 측의 처사가 문제가 없는건 아니지만, 이는 분지의 유괴 사건 후 마나부가 언론에 그 이유 - 미나코가 유일하게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건 어린아이의 실종 때 자원 봉사로 카레를 대접했을 때 뿐이라 분지가 유괴를 저지른 것 - 를 공개했다면 원만하게 해결될 수도 있었을겁니다. 구태여 총까지 들이밀면서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이유는 없어요.

마지막 분지가 만든 카레 재료의 정체가 무엇이냐는게 반전처럼 등장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되는데, 장르 문학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미나코의 사체가 카레집 '파라다이스 로스트'에 놓여져 있다는 묘사에서 충분히 떠 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기와라 히로시"어머니의 러시아 수프"가 바로 떠올라서 새롭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인물을 등장시켜 나름의 가족애를 그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 수프의 정체가 '파라다이스 로스트'의 특제 카레와 정체라는 반전과 똑같으니까요.
허나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는 절박한 굶주림이라는 이유가 명확하지만, 이 작품에서 미나코의 사체를 재료로 쓸 이유는 딱히 없어서 그만큼 와 닿지도 않습니다. 이유를 좀 더 모골송연하게 끌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지금으로서는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함과 읽는 재미는 좋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도락가의 금고"

하무라 아키라가 "조용한 무더위"에서처럼 '살인곰 서점'에서 일하게 된 시작을 알리는 단편으로 지방마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모두 디자인이 다른 일본 전통 민예 장난감 고케시의 줄무늬를 금고를 여는 암호로 썼다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 아이디어도 꽤 기발하며, 고우다가 미스터리와 고케시 양쪽 모두의 매니아라는 설정이 덧붙여져 있어 설득력은 높은 편입니다. 후처가 고케시 장인의 여동생이었다니, 장인에게 시켜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암호 고케시를 찾는 하무라에게 고케시 진열장을 넘어트려 상처입힌 범인의 정체는 너무 뻔했습니다. 후쿠시마 별장에는 관리인이 있는데, 그 관리인이 고케시를 만들었던 장인이자 고우다의 매형 안도였다니 이래서야 추리의 여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안도 측에서 하무라를 다치게 만든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안도는 고케시를 만들었기 때문에 암호 고케시 본체 없이도 금고를 여는게 가능했으며, 하무라가 고케시를 가지고 오기 전에 이미 금고를 열어 속의 원고를 빼돌렸으니 하무라와 고케시는 없어도 되니까요.

고우다가 남긴 원고의 내용이 고우다를 배신했던 후처의 언니와 그 연인의 동반 자살과 같은 내용이었다는 결말만큼은 섬찟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안도가 이 원고를 대충 읽었으면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설정 구멍으로 보이네요. 안도는 원고가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보아 읽어본걸로 보이는데, 내용이 자기 동생의 자살이 위장된 살인일 수 있다는걸 모를 수는 없지요. 즉, 설정만 놓고 보면 안도는 고우다가 오래전 에로 소설을 썼다 정도가 아니라, 살인자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즐길 거리가 있기는 한데,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2006/02/16

Japan 미스터리 걸작선 3 - 한국, 일본 추리작가협회 추천 / 정태원 편역 : 별점 2.5점

J 미스터리 걸작선 3 - 6점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예전에 읽었던 1편에 이어 지인인 석원님의 도움으로 구입하게 된 책. 2편은 결국 구하지 못했는데 언젠간 구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전반부 수록작들은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작가들을 접하는 기쁨도 컸고요. 베스트를 꼽자면 약간은 변격물적인 도착증을 소재로 진행되지만, 이야기 자체가 정통 추리이고 디테일한 묘사도 뛰어나며 반전도 깔끔했던 야마자키 요코의 "삼층의 살의"와 굉장히 독특한 발상의 추리물로 주인공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던 이시자와 에이타로의 "지나치게 소문을 모은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 후반부까지는 조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특히 "정통 추리"로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이 많았는데 후반부 작가들이 좀 고전(?) 급에 속하는 작가들이라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SF같은 유머소설 "좋은 이름"이나 완전한 유머소설 "퀸 감옥" 같은 작품은 너무 어처구니 없을 정도라 이 앤솔로지에 포함된 이유가 되려 궁금해지더군요.

물론 재미나 수준은 그냥저냥하더라도 추리 역사에 관한 글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1900년대 초반 출생의 작가들의 글들을 접한 것 만큼은 기쁜 일이었으니 아주 실망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겠네요. 이 당시 작가들의 작품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만큼, 귀중한 경험임에는 분명하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끝없는 추적"의 이쿠시마 지로나 "역설의 일본사"를 지은 이자와 모토히코의 작품들도 반가왔습니다. 두 작품 모두 제 기준에 미달하는 수준이긴 했습니다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전체적인 수준이 균일하지 못하고 선정 기준이 애매하며 작품 목차도 연대순이 아닌 것 등의 문제로 감점하나 일본 추리물과 단편 소설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소금과도 같은 기획이긴 했습니다. 2편을 빨리 구해보고 싶네요.

2023/11/17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유키 신이치로 / 권일영 : 별점 2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4점
유키 신이치로 지음, 권일영 옮김/시옷북스

일본 추리계의 신성이라는 작가의 단편집.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공정한 정보 제공과 추리의 연계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반전들도 강렬합니다. 뒷맛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기묘한 맛' 류라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일단 사건들이 일어나는 상황, 동기들이 비현실적입니다. 사건을 저지른 다음의 뒷 수습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고요. 여기에 더해 전개가 너무 뻔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어요. 추리는 이런 예상을 굳히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추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던가 하는건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나마 2021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는 마지막 작품인 "#퍼트려 주세요"만이 뻔하지 않은 진상과 결말로 이어지기는 합니다만, 비현실적이라는 단점은 마찬가지고 오히려 '추리' 적인 요소가 별로라는 문제는 도드라지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자면담
가정교사 소개 영업사원 가타기리는 야노 모자와 방문 상담을 진행하던 중, 무언가 수상하다는걸 느꼈다. 야노 부인의 신경질적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행동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유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노린다는 아이가 간단한 수학 문제의 답으로 110만 쓰고 있었다....

요약에서 설명한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소년의 이름이 한자를 일반적으로 읽는 발음과 달랐다던가 ('유'가 아니라 '하루카'였음), 소년이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치지 않는다던가, 분명 먼 사립 학교를 다니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논다고 하고, 무슨 문제를 내어도 110이라는 답을 내 놓는 등 정보 제공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이웃집 부인이 진짜 야노 부인을 살해했던 동기인 쓰레기 봉투 문제까지도 앞 부분에서 설명될 정도입니다. 하루카는 이미 사고로 죽었었으며, 야노 마리가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은 망상 탓에 불거진 일이었다는 반전도 섬찟했고요.
상황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살인범과 피해자의 아들, 그리고 평범한 일반인이 함께 삼자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은 서스펜스 넘칩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우선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가짜가 가타기리를 만나서 방문 상담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아파서 날짜를 조정하겠다 정도로 이야기하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무려 20분이나 걸려 현장을 대충 치워야 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무리 공포에 질려 있었어도 순순히 범인의 협박에 따라 행동한 것도 이상해요. 작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이면 성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언급할 그런 나이인데 말이지요. 전개도 너무 뻔합니다. 초반부터 야노 부인이 가짜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대 놓고 수상하다는걸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매칭어플
나는 kento라는 가명으로 매칭어플을 통해 마나를 만나 데이트한 뒤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을 관찰하고 샤워를 하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나가 원조 교제 남성들을 낚아 협박하는 조직의 멤버였으며, 마나의 자취방은 일당의 아지트였다는 내용은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마나가 데이트 중 했던 말과 방 안 사물들이 일치하지 않았고, 샤워기 높이 등도 잘못 놓여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위한 정보 제공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정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어요.

그러나 딸의 원조 교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딸이 매칭 어플로 원조 교제를 한다고 딸을 닮은 원조 교제녀들을 여러명 죽이고 다닌다? 이건 비현실적을 넘어서는 미친 설정입니다.
또 주인공이 매칭 어플을 사용하는 딸과 닮은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는데다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kento의 딸 미유키 역시 조직의 멤버였다는 반전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작위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문자 메시지가 배달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도라
명문대 출신인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힘들게 딸 마나쓰를 얻은 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자 제공을 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자 제공은 딱 한 번에 그쳤다. 그리고 1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자 어린이 연속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 호조지 재판이 잘못되었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어느날, 나의 딸이라는 아이 쇼코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잔잔한 드라마로 쇼코와의 대화를 통해 마나쓰가 친딸이 아니며, 아내도 다급한 나머지 정자를 기증받았던게 아닐까라는 깨닫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고 두 아이 모두 자기 딸로 인정하겠다는 결말이 괜찮았던 작품.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정자 제공을 한 상대가 호조지의 아내였다는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서 큰 단점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정체는 금방 밝혀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물도 아닐 뿐더러, 그녀가 정자 제공을 받으려 했던 동기가 영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호조지와 마지막 관계를 가진 뒤 그가 체포된 탓에, 혹시 임신되었을 때를 대비해 누구의 딸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 기증받은 정자를 주입했다고 합니다. 혹시 딸 쇼코가 아버지의 정체를 눈치채면 딸에게 "너는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 기증받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다"라고 말해주려고요. 그런데 유전자 검사라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결국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임신 중절을 하기 싫었다면,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키우느니 이민을 가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삼각간계
나 (기리야마), 모기, 우지하라는 대학 시절 친했던 "이쓰멘" 모임 멤버로 5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오사카에 사는 모기의 집 앞으로 우지하라가 전근온 것이 계기였다. 도쿄에 있는 기리야마를 고려해 온라인으로 가진 모임 중, 우지하라는 기리야마에게 모기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 약혼녀가 모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지하라가 보낸 사진 속 약혼녀는 기리야마가 사귀고 있는 여자 미나미였다...

전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우지하라 약혼녀의 불륜 상대가 기리야마라는건 전개 상 당연했거든요. 당연히 우지하라가 죽이려 하는 것도 모기가 아니라 기리야마였고요. 오사카에 있는 척 했던 트릭은 머리를 많이 쓴 것 처럼 설명되지만, 원격 미팅이 잦은 최근 시점에서는 새롭지도 않으며 기리야마가 눈치챈게 아니라면, 우지하라가 장황하게 설명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기리야마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원격 모임처럼 가장해서 속였다는 동기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약혼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우지하라는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쳐도, 친구 모기가 공범으로 살인에 가담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1점. 수록작 중 워스트입니다.

#퍼트려주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외딴 섬 몬메지마로 이사온 와타나베 초모란마는 자기처럼 도쿄에서 오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구와지마 사데쓰, 안자이 루주, 그리고 유일하게 토박이었던 소녀 린코와 친해졌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날, 섬에 방문했던 외지인이 나가사키에서 살해당했고 그날 이후 도쿄 출신 아이들에 대해 링크를 포함한 섬 사람들이 모두 서먹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마침 그 날은 린코가 아이폰을 보여주며 유튜버가 되자고 말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 린코는 초노를 불러내었다. 린코는 중요한걸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실패했고, 절벽에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섬에 살며 TV 정도를 제외하면 문명의 이기, 인터넷 등을 전혀 접하지 않던 섬 소년, 소녀들의 부모가 알고보니 인기 최고라는 6인조 유튜버였으며, 그 유튜브 컨텐츠는 섬에 사는 자기 아이들을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트루먼 쇼의 소규모 개인 버젼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기술력과 장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섬의 비밀을 밝히려는 외지인이 살해당한건 충성스러운 구독자들 때문이었고,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유튜버 가족들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관여하지 말자고 생각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일단 유튜브를 아이들에게 비밀로 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알려주었어도 상관없었을겁니다. 구독자들만 아이들이 '모르고 있다'고 속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영원히 속일 수도 없어요. 작 중 묘사처럼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섬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로 알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마을 주민들이 비밀에 동참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부모가 아이들 몰래 유튜브를 찍어 올렸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서 보호되고 통제가 되었을 겁니다. "귀등의 섬" 세계관처럼 고아들을 모아놓은 고립된 섬에서 선생들이 작당하고 학생들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면 모를까, 21세기에는 있을 수 없는 설정입니다.
아이 세 명의 부모 중 누군가가 아니라 루주가 린코를 직접 살해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자동차도 있고 힘도 좋은 어른들이 6명이나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 생에게 살인을 저지르라고 시킬 까닭은 없지요. 알리바이 트릭도 상당히 유치했고요. 이 모든걸 알아낸 초모란마와 사데쓰가 루주에 대한 응징을 라이브 방송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마지막 장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6/17

아내의 여자친구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 별점 3점

아내의 여자 친구 - 6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대교북스캔(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

석원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와 리뷰를 읽고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장정과 디자인, 제목만 보아서는 추리쪽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 석원님 글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은데 먼저 감사 드립니다.

일본에서 꽤 잘 나간다는 여성 작가 고이케 마리코의 단편집으로 총 6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단편들의 소재가 주로 "가족"과 그 갈등관계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사건들도 이 갈등관계를 축으로 벌어지고 있어서 스케일이 작은 대신 현실감이 넘쳐서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예를 들자면 첫번째 작품 "보살 같은 여자"는 고모, 새엄마,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여성 중심 가족과 돈줄인 아버지와의 갈등관계. 두번째 작품 "추락"은 장인을 정점으로 하는 "가키누마 패밀리"에 속한 데릴사위 대학교수 가키누마의 은밀한 문제. 세번째 작품 "남자 잡아먹는 여자"와 네번째 작품 "아내의 여자 친구" 역시 한 가정 내에서 커지는 갈등관계를 다루고 있죠.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하고 감칠맛나는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추리적 요소가 많지는 않았고 괜찮은 설정에 비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여운을 남기는 깊은 맛은 로얄드 달이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작가들에 비해서는 부족한 편이에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 되는 맛이 제법 있어서 추리적인 요소에 치우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여성판 아토다 다카시 느낌, 혹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쓴 추리소설같은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의 베스트는 제일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까운 "보살 같은 여자"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남자 잡아먹는 여자", 표제작 "아내의 여자친구"입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는 재미는 있는 만큼 주위에서 발견하신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보살같은 여자" :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요시마루 가문. 집안의 돈줄인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의 거동이 어려워지며 점점 히스테리가 심해지고 집안의 다른 모든 가족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살의를 서서히 품게 된다.
이 작품으로 89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했네요. 제일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트릭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동기와 수법이 확실한 제일 정통 추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추락" :
여사원 사카모토 미야코는 소설가를 꿈꾸며 자신이 다니는 문화센터 창작반의 강사 가키누마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와중에 사고로 추락사하게 된다. 하지만 가키누마는 미야코와 드라이브할 때의 뺑소니 사건을 은폐했던 이유로 그 기록을 미야코가 남기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미야코가 추락사하기 전에 남기는 글 때문에 자살로 포장되는 사고사 과정이 기발합니다. 뭔가 다른 트릭으로 포장해서 쓴다면 근사한 정통 추리물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좀 실망스럽네요.

"남자 잡아먹는 여자" : 
하나뿐인 남동생이 결혼만 하면 남편이 사고로 죽는 여인과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먼저 오랫동안 키워온 개가 죽고 다음에는 주인공의 아들이 사고로 죽게되며 이에 앙심을 품은 주인공은 시동생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을 주로 묘사하는 심리드라마로 설정이 굉장히 좋습니다. 실제로도 있을법한 이른바 "남자 잡아먹는" 여인을 공포와 사건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이야기구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설득력 있고 결말도 깔끔하면서도 나름의 반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서 애완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보이네요.

"아내의 여자친구" :
약간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주인공이 아내가 학창시절 여고 동창과 친해지며 집밖에 나가는 시간이 잦아지자 그 여고 동창을 살해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를 현장에 두고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주인공의 심리를 처음에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주인공이 아내를 지극히,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과 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며 마지막 반전으로 독자의 뒷통수를 칩니다. 이 단편집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군요.

"잘못된 사망장소" :
한 방송인의 불륜상대인 여성이 그 방송인을 살해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방송인의 가족에게 사실을 고백하지만 가족은 오히려 온 가족이 나서 그의 시체만 서둘러 본가로 옮기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가족"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이 좀 특이하군요. 내용도 쉽게쉽게 진행되며 그다지 긴장감도 없고 설득력이 떨어져 이 책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종막" :
감독의 아내와의 불륜으로 주연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은 그 여자의 집착을 견디지 못해 살의를 품고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통해 알리바이를 위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비하여 범행을 실행에 옮기는데...
범인, 그리고 범행의 과정이 먼저 나오는 도서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트릭을 단서에 의해 밝혀내는 구조는 아니고 범인의 실수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때문에 완벽한 추리물로 보기는 좀 어렵네요. 그래도 알리바이 트릭 자체는 단순하지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13/01/06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오혜진 : 별점 3점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6점
오혜진 지음/어문학사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문학적 위상을 지녔는지를 알려주는 논문집.

1930년대 추리소설이 유행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총독부의 언론 장악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언론이 경쟁 과열 등으로 급격하게 상업화가 진행되어 독자의 흥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글들이 많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 하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김동인, 최독견, 방인근, 염상섭, 박태원, 김유정, 김내성 등 당대 유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자료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되는 것이 큰 장점인데, 이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얻기 위해 급파된 서인준과 뉴욕에 본부를 둔 범죄집단 LC당이 윤백작 공채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이고, 이를 형사 이필호가 쫓는다는 이야기로 스파이 모험소설의 서사를 갖춘 작품인데, 줄거리만 봐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또한 1940년대로 넘어가면서 김내성이 친일문학에 손을 대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유불란이 적국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태풍", 그리고 결국에는 유불란이 이름부터 친일스러운 "애국방첩협회" 회장으로 등장하여 미·영의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매국노"라는 작품 발표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건 뭐 면죄부를 줄래야 줄 수 없네요.

그 외에도 당시 추리서사의 작품들이 유행하였고 유명 작가들도 많이 창작하기는 하였으나, 대중문학이라서 순수문학에 비해 평가절하당하고 냉대받았다는 것, 동아일보에서 (1934.3.6~7) 세계 10대 탐정 작가로 소개한 작가들의 이름들(오픈하임, 르블랑, 췌스터턴, 반 다인, 필립 포츠, 엘러리 퀸, 프리먼, 레오나드 메릭, 프레챠, 비-스톤), 조선뿐 아니라 일본 추리문학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글들(그중에서도 1918.7.7 중앙공론 정기증간호를 통해 "비밀과 개방"의 '예술적 탐정 소설' 특집이 발표되었으며, 여기에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두 예술가의 대화"(금과 은으로 개제), 사토 하루오의 "지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개화의 살인", 사토미 톤의 "형사의 집"이라는 유명 작가 작품이 실렸다는 사실!) 등 유념해서 볼 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논문집이기에 단지 재미만 따지기는 어렵고, 2만 원에 가까운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하나, 식민지 조선에서의 추리소설이 어떤 시대적·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어떠한 작가들에 의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2007/12/23

아카쿠치바 전설 - 사쿠라바 가즈키 / 박수지 : 별점 3.5점

아카쿠치바 전설 - 6점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노블마인

렛츠리뷰에 당첨되어 받아 읽은 소설입니다. 사실 작가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제 60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광고 카피에 끌려 신청해서 운좋게 당첨되었네요. 

기대와는 다르게 전후부터 현대까지의 3대에 걸친 한 가족의 역사를 장대하고 다루고 있는 일종의 대하 소설이라 추리소설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장편은 지루하기도 하고, 시간도 없어서 최근에 몰입해서 읽은 기억이 없는데 이 책은 49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만에 몰입해서 읽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3대, 특히 여성들만 주인공으로 한 설정의 소설은 그렇게 드물지는 않지만 50년대에서 70년대까지의 아카쿠치바 만요, 80년대에서 90년대 후반까지의 아카쿠치바 게마리, 2000년부터 앞으로의 아카쿠치바 도코라는 3명의 아카쿠치바 여인들이 워낙 독특했을 뿐더러, 각 세대별로의 자세한 인생과 생각, 고민, 주변인물들을 사진기처럼 묘사하는 묘사력이 좋고, 디테일한 부분에서 발상이 기발해서 신선하게 와 닿았습니다.
세대별로 상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단 분량으로 따진다면 아카쿠치바 만요의 분량이 제일 많은 편인데, 그녀의 이른바 "천리안"이라 불리우는 예언능력 등은 마르께스의 "100년동안의 고독"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환상적이고 기묘한 느낌이 딱 제 취향이더군요. 여러 묘사나 분위기 역시 당대의 느낌과 만요의 심리를 잘 전해주면서도 작품의 독특함을 잘 드러내고 있고요.

그러나 2대째인 아카쿠치바 게마리 부분은 혼란한 당시 일본 사회상을 반영하기는 했지만 환상적이라기 보다는 만화적이라 기묘하고 재치 넘친다는 느낌은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폭주족 여왕이 당대 최고 인기의 만화가가 된다는 설정은 이시카와 쥰도 이야기 했듯이 경험이 만화가의 제일 큰 무기라는 점에 부합하기는 하나 솔직히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주변인물들, 예를 들어 모모에나 초코같은 캐릭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어떻게 보면 만화같은 삶이라는 것을 강조한 묘사일 수도 있는데 지나쳐서 되려 부담스러웠습니다.

다행히 실제 화자이기도 한 3대째의 도코 이야기부터는 다시 괜찮아집니다. 작품의 유일무이한 추리적 요소가 부각되는 덕분입니다. 이 추리적 요소, 즉 도코가 만요의 유언, "살인을 한 적이 있다"는 유언을 듣고 그 진상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은 작품 제일 첫 머리의 만요의 환상과도 맥이 닿아 있어서 작품이 순환하는 느낌도 전해 주는 등 나름 잘 짜여졌다고 생각하게 만들고요. 이러한 복선과 순환구조 역시 "100년 동안의 고독"과 유사하지만 독특한 나름의 맛이 잘 살아있습니다. 약간의 반전도 추리 매니아인 저에게는 적지 않은 기쁨이었습니다.

과연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무엇일지, 책에서 이야기하는 미래의 뷰티풀 월드가 과연 있는지 고민하기에는 제 나이도 적지 않은 편이지만 희망과 미래,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게 하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주말에는 꼭 외할머니를 찾아가 인사드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눠 보고 싶네요. 최소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것 하나만이라도 이 작품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5/05/10

너의 퀴즈 - 오가와 사토시 / 문지원 : 별점 3.5점

너의 퀴즈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문지원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퀴즈 최강자를 가린다는 Q1 그랑프리 결승에서 미시마 레오는 도쿄대 출신의 천재인 유명 방송인 혼조 기즈나와 맞붙었다. 팽팽한 6:6 상황에서, 혼조 기즈나는 사회자가 문제를 말하기도 전에 정답을 맞추어 우승했다. 레오와 퀴즈 마니아 동료들은 방송국의 '짬짜미'를 의심했고, 레오는 스스로 조사에 나섰다.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퀴즈 사랑에 대해 반추해 나가던 레오는 결국 이건 '짬짜미'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혼조를 만나 진상에 대해 듣게 되는데...

2023년 제23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신예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작품입니다. 작가의 "거짓과 정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어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책 소개만 보았을 때는 퀴즈 마니아의 퀴즈 관련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퀴즈라는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퀴즈에 대한 진지한 접근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과 전략이 존재하는 진지한 ‘시합’으로 설명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퀴즈에는 '확정 포인트'가 있다고 합니다. 문제 중에 퀴즈의 답을 확정할 수 있는 포인트이지요. 그리고 퀴즈 플레이어는 상대보다 빠르게 답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답을 알고 누르는게 아니라 답을 '알 것 같은' 단계에 눌러야 한다는 등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퀴즈 대회 Q1은 실제 대회를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며, 미시마 레오가 퀴즈를 풀어내는 사고를 세밀하게 그려내어 정말 하나의 '스포츠'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안겨줍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퀴즈 관련 정보들도 실제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등장한 서술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듯해 보일 정도로 잘 설명되고요. 작가는 이런 세심한 설정을 통해 퀴즈가 단지 지식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사고와 감각이 살아 있는 장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퀴즈와 인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이 부분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주인공이 겪었던 경험들이 정답과 우연히 연결되었었는데, 이 작품은 퀴즈의 정답, 아니 퀴즈 자체가  레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인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퀴즈의 정답을 맞힌다는 것은 그 정답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해 왔다는 증거다.'라는 레오의 말 처럼요. 그리고 작품에서는 Q1에서 레오가 맞춘 문제를 통해 레오의 인생을 어린 시절 - 퀴즈를 몰랐던 때 부터 퀴즈에 빠지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 부터 돌이켜보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레오가 퀴즈를 정말 사랑한다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고요. 레오가 알고 있던 ‘일본에서 가장 낮은 산’의 정답이 ‘덴포잔’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히요리야마’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레오는 퀴즈가 '살아있다'는걸 깨닫고, 퀴즈에 대해 더 충실감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는 단순히 지식을 외울 뿐이었던 혼조와 비교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미시마 레오도 호감이 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청년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단지 퀴즈에 대한 애정만으로 잘 하게 되었다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등장인물 뿐 아니라, 작가가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여러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하루의 시간대를 나타내는 단어는 모두 태양의 움직임이 기준인데 심야만 성격이 다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 그리고 그게 퀴즈 정답을 말했을 때의 전율과 엮이는 묘사는 정말 빼어났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물로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답네요. 핵심은 ‘혼조 키즈나가 어떻게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말했는가?’라는 수수께끼 풀이인데, 레오가 과거 영상과 시합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은 긴장감이 넘칠 뿐더러, 작은 단서에 의해 하나 둘 씩 수수께끼가 풀려나가는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재미 또한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 비해 진상 자체는 다소 아쉬움을 남깁니다. 혼조가 퀴즈 프로그램의 본질을 꿰뚫고 문제 출제의 경향을 파악했다는 점까지는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Q1 그랑프리에서는 참가자들이 반드시 정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설정은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혼조가 마지막 문제로 과거 악연이 있는 연출자 사카다와 관련된 문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건 도박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외친 이유가 화제를 유도해 이후 자신의 온라인 및 유튜브 사업 홍보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건 최악이었어요. 레오와 박빙의 승부를 펼칠 정도의 인물이기에, 보다 더 강렬한 철학이나 신념을 기대했는데 너무 세속적인 동기라 실망스러웠어요. 이보다는 혼조가 레오를 만났을 때 해 주었던 이야기 - 아픔을 주었던 '곰의 장소'였던 야마가타가 정답을 알려주어 퀴즈에 진정한 매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 가 훨씬 나았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혼조가 도박을 벌인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결정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진상이 실망스러웠던건 혼조의 묘사가 별로였던 탓도 큽니다. 도쿄대 의대 출신의 천재로 사전을 머릿 속에 집어 넣고 있다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설정도 별로고, 어린 시절 학폭같은 불필요한 서사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서 말한 '곰의 장소' 이야기로 끌고갈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퀴즈를 단순한 게임이 아닌 삶과 연결된 진지한 시합으로 그려내며, 미스터리적 긴장감과 감성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08/02/28

사신 치바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 별점 2.5점

사신 치바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워낙 이 바닥에서 호평이 자자한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으로 그동안 손이 선뜻 가지 않다가 외근 나갔을때 마침 읽을거리가 필요해져서 근처 서점에서 구입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전부 6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길이도 부담없고 쑥쑥 읽히는 맛도 괜찮았으며 말랑말랑하면서도 신선한 감수성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던가, 1주일의 조사기간을 두고 대상자의 죽음에 대한 가부를 결정한다는 등의 설정이 재미있더군요.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한 음침한 여성을 사신 치바가 조사하는 첫번째 이야기 "치바는 정확하다"는 고객 불만 접수 센터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계속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에 대한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앞뒤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구성이 꽤 재미있었어요. 이야기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설정과 내용이 완성도가 높은 것도 높은 점수를 줄 만 하고요. 단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건 약간 걸리긴 합니다. 

두번째 이야기 "치바와 후지타 형님"은 후지타라는 야쿠자를 조사하는 치바의 이야기인데 그다지 큰 반전은 없지만 이른바 "형님물"로의 이야기 전개가 충실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유쾌한 작품이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 "산장 살인사건"은 부제에서부터 "탐정 소설"을 강조하고 있어서 기대가 컸는데, 사신들이 여러명 얽히는 등 사신 설정이 추리소설로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트릭도 그닥이고 치바의 추리도 잘 녹아들지 못하고요. 첫번째 희생자의 죽음에 대한 설명 정도만 인상적이었습니다. 뭐 그정도만 건져도 나쁘지는 않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네번째 이야기 "연애 상담사 치바"는 한 청년의 로맨스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사신이 얽힌 로맨스이기에 해피엔딩일 수 없고, 결국 비극적인 범죄물(?)로 끝나는건 독특했고요. 크게 와닿지는 않은 소품인데, 중간에 등장하는 "임의의 전화번호로 주소를 알아내는 방법" 은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단 역시나처럼 치바의 추리는 작품에 전혀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다섯번째 이야기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는 부제 그대로 일종의 로드무비 같습니다. 오이라세 계류라는 곳의 묘사가 워낙 좋아서 저도 가보고 싶어지더군요. 또한 치바의 추리가 작품 내에서 결정적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됩니다. 물론 추리가 중요한 요소로 쓰인 것은 아니라 좀 애매하긴 합니다만... 

마지막 이야기인 "치바 VS 노파"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대단한 사건보다는 사신을 꿰뚫어 보는 노파와 치바와의 오래된 관계가 중요하게 부각되지요. 또 항상 이 세계에 머물러 있을때 에는 계속 비만 맞았던 치바 앞에 처음으로 맑은 하늘이 보여진 편이기도 하고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마무리적인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필로그로는 충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야기 모두 대체로 재미있지만 정교하거나 꽉 짜여진 느낌은 별로 없는 탓에 감점합니다. "추리"적 요소를 기대한 저에게는 많이 부족하기도 했고요. 확실한 것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일본 추리작가 협회 단편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이쪽 바닥의 세계가 정말이지 넓고 깊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네요. 쉽고, 편하고, 부담없고, 복잡하지 않다는 점에서 화장실에서 읽거나 출퇴근 시간에 읽는 것이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작가의 장편을 보면 좀 다를것 같긴 한데, 장편을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2025/08/09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구수영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 단편의 고수라는 작가의 단편집, 제74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했으며, 제2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까지 수상하며 2관왕의 영예를 누린 책입니다. 

"매미 돌아오다"부터 "서브사하라의 파리"까지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곤충을 관찰하며 다니는 에리사와 센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단편별로 특정 곤충이 주요 소재가 되는 일상계 추리 연작물입니다. 곤충과 생물학, 생태학과 같은 과학 지식이 추리와 결합된게 특징으로, 사건의 단서 배치나 해결 방식도 정교합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시되고요. 

"반딧불이 계획"이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과학 지식과 결합된 추리의 완성도가 뛰어나며 결말의 반전도 좋기 때문입니다 . "염낭거미"는 현실적인 일상계 미스터리로 완성도가 높고, "매미 돌아오다"는 매미라는 소재와 함께 잔잔하게 풀어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이고요. "저 너머의 딱정벌레"와 "서브사하라의 파리"도 나쁘지는 않은데, 앞선 세 작품보다는 전개나 결말이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관왕을 괜히 탄건 아니네요.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한 작품을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매미 돌아오다

헤치마는 16년 전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방문했던 산골 마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쓰루미야 교수와 에리사와 신에게 16년전 과거 자신이 목격했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6년 전 목격한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풀어내는 전형적인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당시 헤치마가 보았던 유령은 사실 실종된 소녀 오에 미키의 친구였습니다. 미키는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신의 연못’에서 수영을 한 뒤 실종되었고, 이를 부추겼던 친구가 죄책감 때문에 여성 출입이 금지된 신사에 몰래 들어갔던 겁니다. 자기를 대신 벌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요. 헤치마가 본 건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사에서 노숙 중이던 자원봉사자 이와쿠라가 사정을 눈치채고 그녀를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 준 덕분에 일종의 유령처럼 기억에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쓰루미야 교수의 글을 통해 그녀가 '유령'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에리사와의 추리가 맞았음이 확인되며 인상 깊은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핵심 인물들이 16년이 지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다시 모인다는 설정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장소에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능력을 지닌 에리사와가 우연히 함께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죽은 이를 기리는 ‘매미 공양’이라는 마을 풍습과 매미를 먹기 위해 숲을 찾은 쓰루미야 교수의 행위, 그리고 그날이 오에 미키의 17주기라는 상황이 잘 맞물려 있어서 설득력을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일상계답게 트릭이나 수수께끼 풀이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리는 합리적이고 과거 사건과 현재의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매미라는 소재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미스터리를 선호하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염낭거미

중학생 다이라 마치코는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사고는 어머니가 집에서 쓰러져 구급차가 출동한 직후에 일어났다. 그런데 마치코가 하교 후 곧장 집에 왔다면,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도 20분 넘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사고가 난 방향도 이상했다. 마치코가 그쪽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다.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트리고 도주하다가 사고가 났던 것일까?

주어진 상황만 놓고 본다면,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죄책감에 도망치다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상은 그 반대입니다. 어머니가 남자를 집에 들이고 있어서, 마치코는 하교 후 집에 곧장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뒤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마치코는, 어머니와 함께 있던 남자가 범인인게 분명하기에 그 남자의 차를 막기 위해 도로로 뛰어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처럼 느껴지는 설득력 있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일상 속 사건을 다룬 본격 추리물로서 손색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앞서 구급차가 도로 공사 때문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등 단서들은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다만, 제목에 등장하는 ‘염낭거미’와 작품 중에 언급되는 ‘고추잠자리’는 이야기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연작 설정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가져온 느낌이에요. 에리사와가 사건 해결자로 등장하는 설정도 다소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연작 중 한 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본격물 스타일의 구성은 좋은 만큼,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읽어볼 만합니다.


저 너머의 딱정벌레

에리사와는 지인 마루에가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랍인 투숙객 와그디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 와그디가 절벽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에리사와는 와그디의 신앙과 유품을 단서로 진상을 추리해낸다.

와그디는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기 위해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스카라베 장식 속에 숨겨진 나침반을 지니고 있었고요. 그런데 발견된 유품의 나침반은 고장 나 있었습니다. 와그디가 나침반을 몸에서 뗀 건 단 두 번, 목욕을 할 때와 낮에 급류타기를 했을 때 뿐입니다. 그런데 나침반이 고장 난 시점은 기도 전이었습니다. 즉, 범인은 급류타기 담당 직원인 가키모토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지요. 가키모토는 와그디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 장난을 쳤는데, 이를 알고 분노한 와그디가 다툼 끝에 가키모토를 죽인 줄 알고 자살을 선택한게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리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추리 전개는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키모토의 편견을 아르바이트생 사에키의 입을 통해 드러내며, 독자가 사에키를 진범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흐름도 나쁘지 않고요.

그러나 여러모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키모토가 스카라베 안에 나침반이 들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조차 몰랐던 정보인데 말이지요. 또 나침반을 고장 내는 방법이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일반인 입장에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실행하기에는 손도 많이가고 어리석은 장난이라 생각되고요. 스카라베가 쇠똥구리라면서 이야기 속에 곤충을 끌어들이는 방식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집니다.

반딧불이 계획

과학잡지 아피에의 편집장 사이토는 5년 전 연락이 끊긴 기고자 가이코에 대한 편지를 받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가이코를 따르던 학생 밧타의 도움으로, 사이토는 가이코가 그곳에서 '반딧불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반딧불이 계획'은 논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던 마을 풍경을 되살리는 계획이었다. 사이토는 가이코 집에서 숨겨진 네거티브 필름을 찾아 인화했고, 사진에서 최근 사망한 도토 이과대학 오사카베 교수를 확인했다.

에리사와 신 대신 사이토의 취재(?) 및 추리가 펼쳐집니다. 사이토는 남겨진 단서들을 통해 오사카베 교수가 유전자 조작으로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물고기를 만들었다는걸 알아냅니다. 이 사실이 가이코에게 발각되었고, 교수는 책임감과 압박 끝에 자살을 택했으며 가이코는 교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달랐습니다. 교수는 자살 직전 가이코를 살해했고, 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위령비 아래에 시신을 묻었고요. 죽기 전 유언처럼 “유령비에 묻어 달라”고 했던건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이토도 이 진상을 추리해냈지만 앞서의 이야기를 꾸며낸건 가이코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밧타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밧타 역시 빼어난 추리력으로 진상을 깨닫고 이 사실을 사이토에게 알리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밧타가 어린 시절의 에리사와 센이였다는게 밝혀지며 또다른 놀라움을 독자에게 안겨주고요.

놀라운 진상과 반전이 이어지는 추리적인 구조도 좋지만, 과학적인 소재도 이야기에 잘 녹아들고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입니다. 원래 교수가 만든 물고기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루시페린이라는 발광물질을 외부에서 받아들여야 빛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으로 흘러든 물고기들은 빛을 냈지요. 이건 논에 루시페린을 지닌 생물이 살고 있었고, 물고기가 그것을 섭취해 빛을 내게 되었다는 뜻이며, 가이코가 추진한 ‘반딧불이 계획’이 성공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 설정과 플롯이 정교하게 연결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작물로서의 설정과 생물학적, 과학적 소재에 추리가 잘 결합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물고기가 빛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싶네요.

서브사하라의 파리

대학 동창인 의사 에구치와 오랜만에 만난 에리사와는, 에구치가 체체 파리 번데기를 일본으로 반입한 이유를 추리해내는데... 

체체 파리 수면병은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는 풍토병입니다. 문제는 전염병이 아니라 감염된 파리를 통해서만 퍼집니다. 그래서 체체 파리가 서식하지 않는 선진국은 치료법 개발에 관심조차 갖지 않지요. 그런데 에구치가 사랑했던 아야나가 수면병에 걸려 죽자, 에구치는 이에 분노해서 체체 파리의 번데기를 일본으로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체체 파리의 번데기, 유충에는 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이 없습니다. 성충이 감염자의 피를 빨아야만 기생충을 얻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기발한 트릭은 에구치가 수면병에 걸린 상태로 귀국했다는 겁니다. 에구치는 번데기를 부화시킨 후, 자신의 피를 빨게하여 일본에 수면병을 퍼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렇게 생물학을 이용한 테러 계획은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리사와에 계획을 접는 결말은 다소 허무했습니다. 제 아무리 테러를 벌였다 한들, 겨울이 있는 일본에서 수면병이 고착화되는건 불가능했다는 점 등 계획도 상세하게 뜯어보면 어설픈 점이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강한 동기와 설정은 좋았지만, 마무리는 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