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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0

건널목의 유령 - 다카노 가즈아키 / 박춘상 : 별점 2점

건널목의 유령 - 4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름난 사회부 기자였던 마쓰다는 지금은 여성 잡지 계약직 기자로, 편집부에서 맡긴 '심령 특집' 기사 취재에 나섰다. 열차 건널목 사진에 찍힌 유령의 정체와 진상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취재를 통해 여성은 광역 폭력단 반도파의 사주에 의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라는게 밝혀졌다. 거물 정치가 노구치 스스무에게 상납된 뇌물이라서, 입막음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자 신원은 밝히지 못했고, 살인사건도 범인 시마지가 급사하여 종결되었다. 시마지 외에도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관계자들이 잇달아 사망했고, 마쓰다는 용한 영매의 도움으로 '쓰구미노'라는 지명을 알아내어 그녀의 신원을 밝히는데 성공한다...

"제노사이드"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11년만의 신작. 광역 폭력단과 부패한 정치인이 엮인 스캔들을 소재로 한, 약간의 사회파 분위기 물씬나는 취재 수사극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건널목에 나타나는 유령이 누구인지?를 추적해나가는 취재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경찰이 아닌 기자 신분으로, '취재'라는 활동을 통해 얼마나 진상에 가까와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캬바쿠라를 탐문하여 그녀와 동거했던 종업원 에미를 찾아내고, 에미를 통해 옛 집 주소를 알아내어 클럽과 거주지가 모두 폭력단 반도파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떠올리는 식으로요. 또 옛 집에서 발견되었던 피해자 어린 시절 사진의 확대 및 가공 작업으로 배경 건물에 적힌 이름을 알아내어 조사하는건 사진 전문가가 있는 잡지사에 딱 어울리는 수사 방식이었다 생각됩니다. 사회부 기자 시절, 그리고 현재의 잡지사 등 모든 연줄과 방법을 동원하여 단서를 그러모으는 묘사도 현실적이면서 설득력 넘쳤고요.
'유령'이 된 피해 여성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 의해 몸을 팔았다는 등의 충격적인 이야기도 사회파 분위기에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건널목의 유령이 진짜 유령이었다는 진상은 황당했습니다. 현실감넘치는 수사극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어요. 유령이 된 그녀가 자신을 죽인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복수에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도 설명하지 못하고요. 유령으로 대충 수습하지 말고, 미쓰다 신조의 작품("노조키메" 등)이나 "전기인간의 공포"처럼 최대한 추리를 통해 괴사건과 심령 현상을 설명해주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유령과 함께 살았던 접대부 에미가 건네준 종이접기 - 피해자가 가르쳐 주었다는 - 와 철도 건널목의 위치 - 그녀 고향으로 향하는 길 - 를 단서로 활용하여 '쓰구미노'라는 지명을 끌어내는 식으로요.
같은 이유로, 취재 과정에서 벽에 부딪힌 마쓰다가 영매의 도움으로 그녀의 고향과 신원을 알아내는 부분도 영 별로였습니다. 유령의 등장부터가 실망스러운데 영매라니! 앞서의 설득력넘치는 취재와 수사를 모두 걷어차버리는 설정이에요. 영매가 이리 용하다면 개인 돈과 시간까지 써가며 취재를 행한 마쓰다의 노력은 무의미한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영매의 등장과 뒤이어 진짜 유령이 나타났을 때의 묘사도 없느니만 못했습니다. 차라리 무섭기라도 했다면 조금 나았을텐데, 그렇지도 않았고요.

유령이 된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게 왜 이렇게 중요한지 잘 모르겠고, 부패한 정치가와 폭력단 조합과 성상납이라는 소재도 지금 읽기에는 너무나 낡았습니다. 2020년대 발표하려면 최소한 비트 코인 정도는 가지고 왔어야지요. 진부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08/27

영매탐정 조즈카 - 아이자와 사코 / 김수지 : 별점 2.5점

영매탐정 조즈카 - 6점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20회 본격미스터리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등 온갖 상을 휩쓸고, 자주 가던 추리 소설 커뮤니티에도 극찬하는 분들이 많으시길래 구입해서 읽어본 작품입니다. 아래의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화. 우는 여자 살인" 

추리소설가 고게쓰는 대학 후배 구라모치 유이카의 부탁으로 영매 조즈카 히스이를 찾았다. 우는 여자에 관련된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조즈카는 조사를 위해 고게쓰와 함께 유이카의 자택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유이카의 집을 찾은 둘은,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조스카는 유이카의 혼을 자신에게 빙의시켜, 경찰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2화. 수경장 살인"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추리소설가 구로고시 아쓰시의 별장 '수경장'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되었다. 수경장에서 발생하는 심령현상의 조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비큐 파티가 있던 날 밤, 구로고시 아쓰시는 살해되었다. 조즈카는 범인이 벳쇼라는걸 영능력으로 알아냈지만, 경찰은 구로고시와 불륜 관계였던 신타니를 체포하고 말았다. 고게쓰는 유일한 단서였던 조즈카가 꾼 꿈을 토대로 범인이 벳쇼라는걸 경찰이 믿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3화.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

고게쓰의 팬이라는 여고생 후지미 나쓰키가 자기 학교 여학생들이 살해된 사건 조사를 부탁했다.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경찰의 도움을 얻어 사건 현장 및 학교를 방문해서 조사에 나섰다. 조즈카의 영시를 통해 범인이 여자 아이라는걸 알게 된 고게쓰는, 프로파일링을 지어내서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지미 나쓰키까지 살해되고 마는데....

"최종화. VS엘리미네이터"

그런데 구성이 독특합니다. 1~3화는 각각 완성된 단편들인데, 네번째인 "최종화. VS엘리미네이터"를 통해 앞서 3개의 이야기를 뒤집는 반전과 앞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추리적인 장치들이 정리되고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장점이라면,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할 만 하더군요. 

우선 조즈카가 영능력으로 얻은 정보를 통해 진범을 알아내고, 트릭을 밝혀내는 1~3화에서의 고게쓰의 추리와 활약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수경장 살인"에서 조즈카의 꿈을 캐비닛 거울과 연결시켰던 추리,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에서 나쓰키가 살해되었을 때 범인이 카메라에서 필름을 가져갔고, 렌즈캡을 떨어트렸던걸 단서로 하스미 아야코는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추리 등은 설득력이 높거든요. 

그러나 이 정도였다면 흔해빠진, 그냥저냥한 추리물 수준에 그쳤을거에요. 조즈카가 던져주는 단서가 워낙 명확해서 고게쓰가 대단한 명탐정일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4화 덕분에 이 작품이 한 단계 수준을 뛰어넘는 완벽한 본격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4화에서 조즈카는 영매가 아니라, 천재 탐정으로 사건 현장을 쓱 보고 추리했던 걸, 영능력인양 고게쓰에게 단서를 던져주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앞서 세 건의 사건에서 그녀가 어떻게 모든걸 추리해 내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데, 이 추리들이 정말 대박입니다. 합리적이며 설득력 있는건 물론, 모두 독자에게도 주어졌던 공정한 단서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왠만한 고전 걸작 본격물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추리적 쾌감을 선사해주는 덕분입니다. 여고생 교살 사건에서 핵심 단서로 쓰였던 스카프 고리와 같은 디테일을 조즈카의 대사로 스쳐지나가듯 드러냈던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즈카가 추리력을 선 보일 때 셜록 홈즈라던가, 일상계의 정의 같은 지식을 피로하는 것도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부분이고요.

하지만 걸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다지 새로운 느낌이 없는 탓입니다. 1~3화 까지의 설정인, 영매가 영능력으로 탐정과 컴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는 쎄고 쎘으니까요. 귀신이 알려준 단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건 이미 만화 "카코와 가짜 탐정"에서 써먹었었지요. 고전 "싸이코메틀러 에지"라던가, 미쓰다 신조의 "사상학 탐정" 도 비슷한 류일테고요.

4화의 반전과 본격물로의 전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능력자로 알려진 순진한 미녀가 알고보니 추리력이 뛰어난 닳고 닳은 아가씨였다는건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과 똑같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하기 어려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천사에서, 마지막에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는 고게쓰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웃는, 닳고 닳은 건방진 아가씨로 변모한다는 조즈카 캐릭터도 오다기리 쿄코 판박이고요. 

지나친 과장과 억지도 불만스럽습니다. 캐릭터부터 만화같아요.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영능력(?)과 추리력을 갖춘 절세의 미소녀 조즈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그녀가 영능력(?)을 발휘할 때의 과장된 연기, 고게쓰와의 알콩달콩한 로맨스 묘사는 읽으면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였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영 부족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요. 

일개 추리 소설가가 경찰과 협력한다는 편의적인 설정이야 본격물이니 그렇다고 쳐도, 현장을 쓱 보고 진상을 모두 추리해냈다는 것도 과장이 지나칩니다. 말로 설명하는데 50분이나 걸리는 추리를 단 몇 초만에 끝냈다는게 말이 될까요? 이 정도면 영능력보다 더한 초능력이지요. 

추리도 설명은 그럴싸하지만, 결론에 단서를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2화입니다. 구로고시의 신작이 정확하게 몇 권 배달되었는지, 구로고시가 여분의 책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구로고시 서재에 책을 따로 둘 곳이 없었다는 걸 잠깐의 관찰 후 추리하여 단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이럴 바에야 그냥 뛰어난 영능력자라는게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겁니다. 

그 외에, 고게쓰가 여대생 연쇄 살인마 쓰루오카 후미키였다는 것과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이후를 그린 에필로그도 뻔하고, 억지스러운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여대생들을 칼로 찌르며 '아프지 않았지?'라고 물어보던 이유가 과거 누나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애초에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고게쓰에게 납치된 조즈카가 탈출하는 과정도 작위적이고요.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저에게는 일본 서브 컬쳐 특유의 과장된 묘사, 어디서 많이 보았던 뻔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들로 가득차 있다는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던 작품입니다. "사쿠라코 씨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처럼요.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은, 잘 짜여진 본격물이기는 하나, 제게는 소문만큼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화에 가깝게, 가볍게 쓰여진 작품이 먹히는걸 보면, 확실히 시대가 변하긴 변한 듯 합니다..

2015/09/12

대프니 듀 모리에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4점

대프니 듀 모리에 - 8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레베카"로 유명한 데프니 뒤 모리에의 단편집입니다. "레베카"의 후속작이라는 "미세스 드윈터"는 아주 오래전 군대 있을 때 읽었었는데, 정작 "레베카"는 아직까지도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구해보기 힘들었으며, 정식 출간 이후에는 유명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재미없고 지루한 고전들에 많이 치였던 탓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단편집이 눈에 뜨이기에 워밍업 차원에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왠걸, 완전 대박이네요. 최근 읽어본 단편집 중에서는 최고였어요. 수준 높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한가득 수록되어 있거든요. 대체로 일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마주치는 기이한 사건과 위기를 다루고 있는데, 깔끔하고 깊이 있는 묘사와 독자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구성력이 아주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들의 설정 및 결말도 발표 시기를 짐작하면 놀랍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새로웠고요. 아울러 결말들도 무척 좋았습니다. 반전이 좋은 작품도 있고, 조금은 뻔하고 식상한 결말의 작품이라도 짤막한 묘사나 대사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는 솜씨가 인상적이더군요. 역시나 거장은 뭔가 다르구나 싶네요.

물론 시대를 초월하지 못한 식상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고, 몇몇 작품은 조금은 억지스럽고 뜬금없기는 합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소수의 단점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고 저의 선입견을 무색케 하는 좋은 단편집이에요. 장르문학, 그리고 단편집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레베카"도 바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 작품별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쳐다보지 마"

아이를 병으로 잃은 영국인 부부가 베네치아 관광 중, 부부의 죽은 아이 크리스틴이 보인다는 기이한 영매 할머니를 만나는데...

아내 로라가 사기꾼에게 걸렸다고 생각하는 남편 존의 심리묘사가 핵심이자 대부분인데, 묘사력이 대단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먼저 런던으로 떠난 로라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장면도 제법 박진감이 넘치고요. 영국인 관광객이 베네치아에서 무슨 모험을 즐길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이랄까요?

하지만 쫓기는 여자아이와 베네치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연결시키는 결말은 좀 뜬금없더군요. 존도 사실은 영매다!라는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고 말이죠. 이국적인 풍광, 영매와 유령, 연쇄살인마라는 소재를 조합시키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잘 마무리된 것 같지는 않아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도널드 서덜랜드 주연의 영화가 유명한데(특히나 베드신) 과연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새"

히치콕 영화로 유명한 단편. 읽어보니 과연 명불허전이네요. 한마디로 걸작입니다.

새들이 인간을 습격한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이렇게까지 재미있게 그려내었다는 점, 그리고 크리쳐물에 흔하디 흔한 고어스러운 묘사가 없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합니다.

주인공 냇이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설정도 돋보입니다. 덕분에 새들이 사람을 습격하는 사태의 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뭐건 간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에 강한 설득력이 생기거든요. 그 외에도 새들의 습격이 간조와 관련이 있다던가, 냇이 공습을 경험했기에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했다는 설정들도 적절하게 배치되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어찌되었건 우리 가족은 살아남을 것이다... 라고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정말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딱 하나 궁금한 거, 버틸 식량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새들을 먹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호위선"

2차대전 당시 흑해를 운항하던 화물선이 유보트에 쫓기다가 안개와 함께 나타난 영국 해군 범선의 호위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

"파이널 카운트다운"과 같은 시공간 이동물입니다. 안개에 휩싸이고 이동한다는 설정도 판박이네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긴박감이 넘쳐야 할 항해 묘사 역시도 이 분야 대표 작가인 알리스테어 맥클린에 비하면 별게 없고요. 전시 상황의 긴박함을 단지 1등 항해사의 심리로만 묘사하는 건 확실히 무리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자동차 사고로 20년을 타임 슬립한 엘리스 부인의 이야기.

1932년에서 1952년으로 워프한 뒤 여러 가지 낯선 상황에 난처해하는 엘리스 부인의 모습이 가장 큰 볼거리입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아줌마가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가 너무나 설득력 넘치게 묘사되고 있거든요.

그러나 잘 짜여진 타임슬립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누구인지 딸조차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해요. 일반적이라면 같은 시공간에서 이동했을 테니 타임 슬립을 하였더라도 동일 인물이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 그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로 옮겨온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도 발표 시점을 고려해보면 아이디어는 높이 평가할 만하며, 잘된 SF는 아니지만 볼만한 드라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이 당황스러운 하루를 영원히 반복한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으며, 그러한 오싹 일상계 호러물이라면 충분히 좋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낯선 당신"

우연히 만난 극장 매표원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자동차 정비공 이야기.

한 청년이 그야말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기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녀가 공습 때문에 죽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공군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라는 진상도 굉장히 뜬금없고요. 뭐라 평하기 어려울 정도로 짤막하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른 렌즈"

눈 수술 후 마다는 모든 사람들이 동물로 보이게 된다.

멋진 단편입니다. 발상부터가 놀라워요. 모든 사람들이 개, 뱀, 소, 양 등으로 보인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요? 나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 게 공포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또 살짝 설정에서 드러나듯 동물 형태가 사람일 때의 습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도 좋았습니다.

결말과 반전도 제대로예요. 다시 사람들을 보게 된 마다 부인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까라는 것인데 예상 가능하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몰아서 터뜨리는 작가의 솜씨가 참 인상적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남편과 앤설 간호사가 불륜 관계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은 마다의 재산을 노리는 남편이 벌인 수작질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전개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성모상"

남편 장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리는 그가 바다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모상 앞에서 필사적인 기도를 하는데....

다섯 장짜리 짧은 이야기. 꽁트라고 해도 좋겠죠. 마지막 단 두 줄을 제외하고는 마리가 얼마나 장을 사랑하고 걱정하는지, 그리고는 절박하고 필사적인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두 줄의 반전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성모상이 그녀 기도에 화답했다고 생각했던 환영은 마리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장이라는 것인데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이 반전이 단 두 줄이라니!
데프니 뒤 모리에가 단편의 대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주는 작품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경솔한 말"

주인공이 과거에 겪었던 꽃뱀 도둑 이야기.

결말은 예상 그대로라 의외성은 없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뻔한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있게 쓴다는 것이야말로 재능이자 실력이 아닐까 싶네요. 마지막 단 한마디, "아는 얼굴이군요. 워더가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도 깔끔하니 좋았고, 작품의 주제인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도 굉장히 공감 갔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몬테베리타"

등산이 취미인 사나이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몬테베리타라는 산 정상에 있는 원시종교 집단으로 향한다.

종교적 이상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잃어버린 지평선"이 떠오르는 작품. 차이라면 몬테베리타 산 정상의 종교 공동체는 가는 길이 숨겨져 있지도 않고, 그 존재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고, 빅터의 순애보를 그렸다고 보기에는 빅터의 비중이 많이 작은 것이 단점입니다. 아울러 미심쩍고 모호한 결말 역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워요. 애나가 애초에 나병에 걸려서 몬테베리타에 오게 된 것인지, 이 종교집단의 영생의 비밀은 무엇인지, 그들은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끝나거든요. 이들의 삶을 갈구하지만 속세와 거리를 두지 않는 주인공의 심정만이 이해가 될 뿐입니다.

그래도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등산에 대한 묘사는 탁월해서 놀랐습니다. 등산은 남자의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직접 등산을 해본 게 분명하다 생각될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6/25

심야의 손님 - 오쿠라 데루코 / 이현욱 외 : 별점 1점

심야의 손님 - 2점
오쿠라 데루코 지음, 이현욱 외 옮김/위북

잘 모르는, 전전(戰前)세대 일본 추리 작가의 2차 대전 전~후를 아우르는 대표 단편 일곱 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나쓰메 소세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문하에 있던 작가로 탄탄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득력 있게 파헤치는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 어쩌구 하는 홍보 문구에 낚여서 구입하게 되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나 형편없고 졸렬했습니다. 최근 읽은 책, 아니 제가 읽어왔던 천 권이 넘는 책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졸작이었어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선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심령 호러와 같은 작품도 있는데, 스릴이나 긴박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어서 섬찟한 느낌도 전혀 받을 수 없었고요. 홍보 문구에서 이야기하는 탄탄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있는 인과 관계 역시 단 한 작품에서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지금 읽기에는 의외성없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전개로 진행된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읽어볼 가치는 전무합니다. 활동기에도 유명하지 않았으며 지금 시점에서 그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 작가는 역시나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혹시나 궁금하시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천식>>은 명문가 후지와라 가문의 후계자 기미타카가 사라져 버린 사건이 등장합니다. 알고보니 후계자 기미타카는 살해되었었고, 범인은 친모였어요. 친모는 후지와라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평민 출신인 탓에 친척들에게 멸시를 당해왔었는데, 기미타카가 성장하면서 범죄자가 되어가자 자신이 질타를 받을 걸 우려하여 살해했다고 하네요.
아니, 아들이 범죄자가 되건 말건 친모가 아들을 살해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살해한 뒤, 아들을 미이라로 만드려고 불상 속에 사체를 집어넣었다는 설정은 또 왜 들어간걸까요? 에도가와 란포를 따라한 유치한 발상에 불과합니다. 설득력이 없다는것도 마찬가지고요. 아울러 이러한 진상은 기미타카의 친모가 남긴 편지로 드러날 뿐이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합니다. 별점을 주자면 0.5점.

<<공포의 스파이>>에서는 구 백작 마쓰오카 본가에서 장남 가즈오가 사라집니다. 진상은 동생 가오루가 형수에게 반해서, 형수와 가문을 손에 넣기 위해 형을 납치했다는 겁니다. 가즈오는 시베리아 파병 당시 소련 스파이로 일할 걸 서약했었다는 약점이 있었다는군요.
소련 스파이 설정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전후에 그런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사립탐정 사쿠라이 요코가 진범을 밝히는 과정도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조사나 추리 없이 그냥 마지막에 "얘가 범인이에요"라는 식이거든요. 이 작가가 추리 소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글을 썼다는 확신이 듭니다. 역시나 별점은 0.5점.

<<요물의 그림자>>는 비밀 암호를 몸에 지니고 여객선을 타고 이동하던 화자가, 여객선에서 만난 중국인 부녀로부터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내용입니다. 아파보이던 딸은 원래 죽어서 장례까지 치뤘었는데, 하인이 손에 낀 반지를 훔치려 시체 손가락을 자를 때 깨어났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중국인 부녀가 약을 써서 화자로부터 암호를 빼앗는 전개로 이어지고요.
왜 딸이 죽었다가 살아났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 어떻게 암호가 화자에게 있는줄 알고 접근해서 빼앗는지, 그리고 무엇에 대한 암호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 등 이야기의 완성도 자체가 한없이 낮습니다. 그냥 중국인 부녀 이야기만 "공포 특급" 정도에 수록될 짤막한 1~2페이지짜리 괴담으로 풀어내는게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요 괴담만 그나마 읽을만해서 별점은 1점입니다.

<<마성의 여자>>는 특별한 능력으로 남편 혼조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아내는 야스코의 이야기입니다. 혼조는 야스코의 감시와 집착에 질려 그녀를 살해하지만, 야스코의 영혼이 혼조와 하나가 되어 발광한다는 결말입니다. 자기가 증오해서 죽인 피해자가 '초능력자'여서, 그녀의 영혼이 나의 영혼과 합쳐진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랄까... 하지만 이를 제대로 풀어내지도, 마무리짓지도 못해서 완성도는 낮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야의 손님>>에서는 사립탐정 사쿠라이 요코가 부호 아리마쓰 다케오 살해 사건에 엮이는걸로 시작됩니다. 알고보니 아리마쓰 다케오를 죽였던 건 탈옥수인 의적 오고시였고, 그는 다케오의 양녀 미와코를 돕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 거지요. 다케오가 과거 미와코의 친부 조지를 함정에 빠트렸었는데, 그 당시 상황이 담겼던 레코드가 남아있어서 오고시는 미와코를 도울 결심을 했다고 설명됩니다.
그런데 요코가 하는건 전혀 없습니다. 요코에게 '심야의 손님'인 의적 오고시가 찾아와 진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왜 사립탐정이 등장해야 하는지, 그 이유 자체가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아리마쓰가 이 레코드를 진작에 없애지 않은 이유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함정에 빠트린 범인이 그 핵심 증거를 집에 잘 숨겨두고 보관해 둔다? 설득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지요. 이 쯤 되면 작가가 도대체 생각이라는걸 하고 글을 쓰는지 의심이 될 정도에요. 별점은 0.5점.

<<일본 동백꽃 아가씨>>도 사쿠라이 요코 시리즈입니다. 과거 미모로 '일본 동백꽃 아가씨'라고 불리웠던 히가시야마 씨 부인이 실종됩니다. 부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유명 가수가 제대로 간호받지 못하던 부인을 직접 돌보기 위해 납치했던 것이지요.
우선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다른 사쿠라이 요코 시리즈와 마찬가지로요. 히가시야마 씨에게 그렇게 부인을 돌볼거라면 자기에게 맡기라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범인이었거든요. 이래서야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부인에게서 과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절절했기에, 고풍스러운 로맨스물로서의 가치가 약간 있을 뿐입니다. 별점은 1점 정도?

<<사라진 영매>>는 가쓰다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내가 죽은 뒤 아내의 영혼을 불러오는 영매 레이코에게 푹 빠졌고 그러다가 아내가 과거에 썼던 별거아닌 편지를 발견한 탓에 폭주하여 레이코를 살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이 막장 단편집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매 레이코의 능력, 가쓰다가 폭주한 이유, 사체를 은행 대여금고에 맡겼다는 설정 등 뭐 하나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니까요. 당연히 무섭지도 않아서 심령 호러물로의 가치도 전무합니다. 가쓰다가 아내, 레이코와 화자인 S 부인 모두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는 반전이라도 잘 살렸더라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당연히 잘 살리지도 못했어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18/02/24

검찰측 증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강영길 : 별점 2.5점

이 바닥에서 전설급 명성을 자랑하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의 별점은 무려 5점입니다! 이 정도면 달려가서 구입해야 하는 걸작이지요. 이미 소장하고 있고, 읽어보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전에 읽은 탓에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리뷰도 올리지 않았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제가 소장한 책은 '동서 추리 문고' 출간본으로 "공략" 에 소개된 수록작은 일치하는데, 뒷부분에 "카리브 해의 수수께끼"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권 값으로 두 권을 읽는 셈이니 이득이죠? "카리브 해의 수수께끼" 은 별도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편집의 특징이라면 '정통 추리물' 이 아닌 심령 소재 오컬트 호러물이 많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심령 현상을 '영혼' 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주요 인물로 '정신 의학자' 가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했고요. 그런데 정신 의학자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영 와 닿지 않더군요. 종교인이 등장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여튼, 호러물인데 "공략"에서 언급되는 '지극히 연극적인 전개' 가 가득하다는 여사님 작풍도 한껏 느껴집니다. 표제작부터 그러해요. 레너드 볼이 결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게 되는 이유는 아내 로메인이 벌인 연극이 결정적 역할을 하니까요. 그 외에도 "라디오" 에서는 핵심 트릭이, "푸른 항아리의 비밀" 에서는 이야기 전체에 연극이 활용되며 "붉은 신호등" 이나 "네 번째 남자", "마지막 강령술""SOS"는 설정과 내용이 한 편의 연극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기에는 별로 무섭지 않으며, 낡았다 여겨지기까지 한다는 호러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부분은 분명 있지만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거죠. 솔직히 읽고나서 "공략" 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은데,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검찰측 증인" 

부유한 노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레너드 볼은 재판에 넘겨졌다. 범행 시각에 아내와 함께 있었다는 유일한 알리바이는 아내 로메인에 의해 부정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변호사 메이헌은 로메인의 증언을 뒤집을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데...

유명한 작품이기는 한데 "공략" 에서 몇몇 작품에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레너드 볼을 무죄로 만들기 위한 로메인의 노력이 너무 어설픈 탓입니다. 당시 시대에서는 위증죄는 큰 죄가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로메인의 위증은 엄밀하게 말하면 살인 미수에 가까운 중죄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텐데, 왜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중요한 재판에 편지만 증거로 제시될 뿐, 정작 법정에 로메인을 옭아매었다는 노파를 증인으로 부르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도 '일사부재리' 원칙과 배심원 제도의 맹점 등 현대 재판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주제 의식과 아이디어 만큼은 현 시점에도 건재합니다. 무엇보다도 레너드 볼이 진범이라는 마지막 로메인의 외침 하나만으로도 읽어볼 만 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붉은 신호등" 

절친 잭 트렌트의 부인 클레어를 연모하는 더못 웨스트는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인 백부 앨링턴 경에게 그 사실을 들킨 후 언쟁을 벌였다. 그러나 직후 앨링턴 경이 살해되자 웨스트는 범인으로 체포될 위기에 빠지는데...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위기에 빠진다는 서스펜스 단편입니다. 약간 윌리엄 아이리쉬 느낌도 나는데 서스펜스에 집중하기 보다는 웨스트의 짝사랑, 그리고 제목의 '붉은 신호등' 이라는 웨스트가 지닌 일종의 예지 능력이 더 중요하게 묘사되는게 차이점입니다. 이 능력을 활용하여 최대의 위기를 벗어나는 (경찰이 덥쳤을 때 하인인 척 연기) 장면이 클라이막스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궁지에 몰리는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를 잘 살리지는 못했으며, 클레어가 아니라 잭 트렌트가 광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이 부분에서 앨링턴 경이 웨스트를 압박하는 이유도 잘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뒤에 영국의 이혼법 등 몇가지 이유가 등장하는데 이국의 독자가 지금 읽기에는 설명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웨스트의 예지 능력 역시 설명이 부족한건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설정으로 윌리엄 아이리쉬가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네번째 남자" 

유명한 변호사, 의사, 종교인이 우연히 밤 기차에 동승했다. 그들 중 의사 캠벨 클라크 박사가 한 집에 사는 여러 사람들처럼 몸 하나에도 여러 개의 영혼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과거 '펠리시 볼' 이라 불렸던 처녀의 다중인격 사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번째 승객 라울 르타르도는 자신이 알았던 펠리스 볼과 아네트 라블이라는 소녀에 대해 말해주는데...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일종의 심령 호러물. 다른 수록작들은 모두 잊어버린지 오래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던 작품입니다. 다중인격에 대한 진상도 흥미로울 뿐더러, 펠리시가 자신의 몸에 침입한 타인을 격퇴한 결말이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딱 한가지, 이러한 펠리시의 격퇴를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점은 좀 아쉽습니다. 이미 그녀가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자살했다는게 밝혀진 후 과거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라울의 회상이 끝난 다음에 나오는게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울러 다중인격을 여러 '영혼' 이 한 몸에 깃든 탓이라는 설명은 구시대적인 발상이죠.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요.

하지만 지금 읽어도 서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멋진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단편집의 베스트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SOS"

정신 의학의 권위자 모티머 클리블랜드는 우연한 사고로 외딴 집에 살고 있는 딘스머스 씨 가족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딘스머스 가족에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이를 눈치챈 클리블랜드는 자신의 침실에서 SOS 신호를 발견했다.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딘스머스를 비롯한 가족들의 묘사, 주변 인가에서 수 km 이상 떨어진 외딴 집이라는 설정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내용은 꽤 깔끔한 추리물입니다. 무엇이 이상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추리하는 일종의 와이더닛 물이죠. 그런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으며 진상도 납득할 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사님의 비소 사랑도 눈에 뜨이네요.

딱 한가지, 탐정역을 정신과 의사에게 시켜가며 딘스머스 가족의 별장에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고 분위기를 끌고가는 묘사가 잘 살아나지 못한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부분만 공포스럽게 묘사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아무래도 여사님과 고딕 호러는 잘 맞지 않는 듯 합니다.

그래도 그 외에는 단점을 찾을 수 없는 깔끔하고 완성도 높은 수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죽을 뻔한 의붓딸 샬럿과 가족들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더 궁금합니다. 유산 상속만 되면 영원히 연을 끊고 살겠지만 그 전에 진짜 지옥이 열리지 않을까 싶은데요. 비소가 아니라 도끼가 등장할지도?

"유언장의 행방 (라디오)" 

리지웨이 부인의 돈을 노리는 조카 찰스가 라디오로 쇼크사를 일으키는 계획을 실행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신 패트릭 고모부를 가장한게 찰스라는게 너무나 뻔해서 부인이 죽을 때 까지 긴장감은 전무합니다. 솔직히 이대로 끝나는 시시한 이야기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유언장이 사라졌다는 반전이 기가 막힙니다! 덕분에 흔해빠진 범죄물에서 약간 오 헨리 느낌의 블랙 코미디로 작품이 확 살아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청자의 비밀"

회사원 잭 하팅턴 (24)의 인생 유일한 목적은 골프의 핸디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골프장 근처에 방을 얻어 살면서 매일 출근 전 1시간 연습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는 매일 아침 7시 25분에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는데...

등장인물들이 유령과 감응한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유명 정신과 전문의가 등장하는데, 정신과 의사 배빙턴이 영혼의 치료자로 자칭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뭔가 쎄~한 느낌이 들더군요. 심지어 영매의 존재를 믿기까지 하니까요. 이래서야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안 들기 어렵지요. 그런데 결국 이 모든게 잘 짜여진 사기극이라는 진상으로 넘어가서 잘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이걸 의도한건 아니겠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오히려 작품과 더 잘 어울리는 모양새가 된 셈이지요.

물론 단편인 탓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합니다. 래빙턴 박사가 실제로 유명한 의사라며 등장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잭이 백부의 컬렉션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옥의 티 수준일 뿐, 유쾌하고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집시"

집시 여인을 만나 경고를 받은 후 사망한 친구 사건에 대해 파헤치고자 집시 여인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로 일종의 예지 능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붉은 신호등"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핏줄로 전해지는 신비한 능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는게 차이점입니다. 합리성을 떠나 최소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탓이 큽니다. 집시 여인을 공포스럽게 조성하는 식으로 캐릭터 공포물처럼 시작하여 공포 분위기를 한껏 잡아나가지만, 불안에 떨던 주인공이 약혼녀 레이첼을 만나자마자 행복함에 휩싸인다는 결말이 뜬금없기 그지 없거든요. '두번 다시 보기 힘들겠다' 는 말 뜻이 주인공이 아니라 집시 여인의 죽음을 뜻했다는 일종의 반전은 신선했으나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램프"

오래 전 굶어죽은 아이의 유령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집으로 이사 온 3대 가족의 손자 조프리가 병으로 죽고, 소년의 유령과 함께 떠난다는 이야기로 이 단편집에 많이 수록된 영혼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 듯한 내용이에요. 아이의 눈에만 유령의 실체가 보인다는 설정도 그러하고요.
그런데 별로 무섭지도 않고, 결말도 시시합니다. 전개에 기복이 없고 묘하게 담백한 탓으로 하나 뿐인 손자가 죽었는데도 불쌍한 소년 유령과 함께 떠난 것에 만족하는 할아버지 윈버 씨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그냥저냥 잔잔한 평균 이하 소품이랄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서 카마이클 경의 이상한 사건"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의학박사인 에드워드 카스테아스는 친구 세틀 박사의 부탁으로 아서 카마이클 경의 저택을 방문했다. 준남작 아서 카마이클이 갑자기 백치가 되어버린 증상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회색 고양이와 관련된 기묘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데...

진상은 카마이클 부인이 의붓 아들과 키우던 고양이와 몸을 맞바꾸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시키기 위해서요. 그녀는 동양의 피가 흐르는 마녀로 흑마술이나 최면술, 혹은 또 다른 기묘한 재주를 지녔다는 설정이고요. 

만화 등에서는 흔히 보아온 것이지만, 이를 상당히 이른 시기에 작품화하여 발표했다는 선구자적인 부분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선구자적 부분 외에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이 단편집 수록작 대부분이 지닌 '설명이 부족하다' 는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탓이 가장 큽니다. 어떻게 정신을 바꾸었는지? 에 대한 설명도 없고, 청산가리로 살해된 고양이의 몸 속에 들어간 아서 카마이클의 정신이 어떻게 다시 본인의 몸으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에드워드 카스테아스 1인칭이며, 그가 실제 목격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는 설정으로 부족한 설명을 메꾸고 있지만, 독자는 카스테아스의 비망록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설명은 해 주었어야 합니다. 이래서야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도를 논하기도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날개의 부름" 

부호 사이러스 헤이머가 장애가 있는 거리의 악사의 연주를 듣고 높은 곳으로 향하는 꿈을 꾸지만, 속박으로 인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한다는 이야기.

장애인 악사가 신의 사자인 "목양신" 이라는 등 판타지 설정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내용은 "부" 가 현실적인 속박으로, 모든걸 내려 놓아야 "승천" 할 수 있다는 약간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 흘러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크로스오버인데... 다른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공포나 서스펜스는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무엇보다도 "공략" 에서 코즈믹 호러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굉장히 호기심이 생겼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실망이 컸습니다. 덕분에 "공략" 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감소해 버렸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지막 강령술" 

라울은 결혼을 앞둔 영매 시몬의 마지막 강령술 의식에 참석했다. 그것은 이미 죽은 딸 아메리를 구체화한 영혼을 불러내기 위해 거액을 지불한 마담 엑스를 위한 강령술이었다. 

영매가 불러낸 구체화한 영혼(엑토플라즘?)에 손대면 영매가 죽는다는 설정이 전부입니다. 구체화한 영혼이 진짜가 되었을 때 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이야기가 너무 알맹이가 없지요. "공략"은 논리를 철저히 관철함으로써 발생한 현상이라 무서운 작품이라고 설명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논리' 자체가 딱히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이 논리를 관철하는 이유는 작품 내내 강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의외성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반전, 혹은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공략" 신뢰도 감소 2연타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의 사냥개"

1차 대전 중 벨기에의 한 수도원에서 벽에 검은 사냥개 모양의 화약 흔적만 남긴 채 독일군 부대가 날아가 버렸다. "나" 는 이 사건에 관련된 수녀 마리 앤젤리크를 찾아냈는데, 그녀는 한 과학자의 연구 대상이었다... 

고대 문명 및 그 문명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초능력을 다룬 이색작입니다. 수녀가 제 2 그리스도, 수정궁의 지도자 운운하는 신성 모독을 서슴치 않는 등 뭔가 있음직한 분위기는 물씬 풍기지만... 다른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내용에서 제대로 설명되는게 거의 없어서 무척 답답했습니다. 수녀가 가진 능력은 무엇인지, 로즈 의사가 어디까지 알아내어 음모를 꾸몄는지 등 뭐 하나 드러나지 않거든요.
"공략"에서는 논리가 부족해서 불안하고 두려운 작품이라고 설명되는데, 논리가 부족한게 아니라 미완성으로 보일 뿐입니다. "공략" 신뢰도 하락 3 콤보 되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08/02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9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9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추리 만화 시리즈인 Q.E.D 시즌 2도 어느덧 10권 째를 향하네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두 편 모두 강력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편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한 트릭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전 몇 권은 평균 이상은 해주었었는데 조금은 아쉽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음화(陰火)" 

유령이 나온다는 집을 돌며 심령 현상에 대해 취재한다는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의 촬영을 위해, 예능인과 배우, 영매사와 프로듀서, 작가 겸 촬영까지 5명의 일행은 15년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저택에 모였다.
15년전, 아내 마사코는 머리를 맞아 죽었고, 범인으로 체포된건 남편 토시가미였다. 그는 술에 취한 채 시체 옆에 앉아 있었다. 결국 토시가미는 상해치사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자살했다. 그리고 그의 원령이 '음화', 즉 사람의 혼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각자 카메라를 들고 저택을 돌아다니던 멤버들은 음화, 피웅덩이를 목격했다. 이윽고 프로듀서와 영매사가 폭행당해 쓰러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영매사 하코네의 카메라에 선명한 '음화'가 찍혀 있었다...

유령 저택의 음화에 얽힌 15년 전 살인 사건과, 현재의 폭행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내는 내용으로, 토마가 이전 작품에서의 활약으로 사건에 휘말린다는 설정이 인상적입니다. 예능인 도바 쥬리가 2권에 등장했던 "벌거벗은 임금님"의 유바리와 동료라서, 그를 통해 가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든요. 인기없는 예능인이 방송에 목숨거는 절박함은 이해되지만 애초에 도와줄 이유는 없지요. C.M.B의 신라처럼 수수께끼를 풀 때마다 뭐라도 받는다면야 모르겠지만요. 토마가 사건에 나서는걸 귀찮아했던건 다 이유가 있던거에요.

하여튼, 2명이 폭행당해 방송이 중지되었지만, 그 수수께끼만 풀면 방송이 가능하니 도와달라는 도바의 부탁으로 가나는 사건 조사에 나서게 됩니다. 조사 결과, 방송 프로듀서 토고는 15년전 사건은 범인 토시가미가 누명을 쓴 원죄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부부는 야구에 취미가 전혀 없었는데 흉기로 야구 배트가 사용된 건, 누군가 가지고 왔기 때문이라는거지요. 그러나 검찰청에서는 반대로, 토시가미가 범인이 분명해서 원죄 사건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모든 증거가 확실해서 죽일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만 쟁점일 뿐이며, 배트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다면서요. 노부부가 호신용으로 구입할 수 있지 않냐고 되묻는데, 타당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토고 프로듀서가 사건 조사를 위해 찾아왔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토고는 이 사건이 원죄 사건이 아니라는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왜 가나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심지어 토고는 영매사 하코네가 학창 시절 직접 재판을 방청해서 토시가미가 자백하는걸 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말이지요.

원죄도 없으니 유령이 나올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유령 소동이 일어났다면? 원죄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널리 알리고 싶은 프로듀서의 조작인게 당연합니다. 프로듀서이니 저택에 미리 이런저런 장치를 하는 것도 쉬웠을테고요. 전개만 보면 프로듀서의 범행이 명확한데, 이를 잘 감추는 전개는 나쁘지 않았으며 프로듀서가 고교 시절, 선배였던 토시가미를 숭배했기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도 그럴듯했습니다. 토고 프로듀서가 자기 확신에 가득차 모두를 비웃지만, 가나가 한 마디로 뭉개버리고 경찰에 넘기는 마지막 장면도 나름 통쾌하고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트릭인, "5명의 출연자 모두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몰래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는 그냥 교묘하게 시간을 맞춰 범인이 피해자의 카메라와 바꿔친게 전부라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나중에 편집 등으로 손을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딱 들어맞게, 오차없이 맞출 수 있었을거라 생각되지도 않네요. 또 '원죄 사건'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면, 구태여 폭행 사건을 일으켜 방송을 막을 이유도 없습니다. 방송되어 화제가 되는데, 방송 중단으로 SNS에서 화제가 되는 것 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테니까요. 또 이 정도라면 토마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15년 전 원죄 사건은 합리적이지만 지나치게 길었고, 본편 핵심 트릭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덧붙이자면, 가나와 함께 조사해 온 내용을 듣던 토마가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유령 '같은 걸' 봤다', '오래전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다'' 는 말 만으로는 확실한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답을 해 줄 수 없다는 말이지요. 냉정한 토마를 상징할 뿐더러, 실제로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와 닿습니다. 최대한 철저하게, 확실하게 조사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져오는게 우선이지요. 단지 추리 만화가 아니라 일상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규칙일거에요.

"아름다운 그림"

러시아 마피아 두목 잉크가 부하의 렌트카 트렁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잉크는 버밀리온 가의 당주 포크스에게 빌려주었던 돈을 받은 뒤 저택에서 하루 머물렀었다. 그리고 돈과 함께 사라진 후,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런던의 본 경부는 손님으로 찾아온 토마, 가나와 함께 저택을 방문하여 사건 조사에 나서는데...

왜 잉크가 살해되었는지, 어떻게 그가 살해되는 시간에 모두가 알리바이가 있었는지, 어떻게 사체를 렌트카 트렁크에 넣었는지, 돈은 어디로 갔는지 수수께끼가 많은데, 이를 차분히 풀어내는 본격 추리물로 알리바이와 시체 순간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빼어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트릭이 현실적이지 않은 탓입니다. 백작 부인이 일에 몰두할 때, 시계의 시간을 조작하여 시간을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알리바이 트릭부터 이상합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시계관의 살인사건"과 비슷하지만, 그 만큼의 설득력은 없어요. 편지를 여러 통 쓰는 정도의 일을 하는데, 한 시간 시간을 앞당겨 놓은걸 눈치채지 못한다? 납득하기 어렵지요. 편지를 쓰다가 단 한 번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약점이고요. 차라리 집사이자 진범인 우드 브라운이 백작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시계 조작 트릭을 언급했을 뿐, 두 명 모두 입을 맞춘 공범이라는게 더 나은 설명이었을 겁니다.

그나마 순간이동 트릭은 좀 낫습니다. 렌트카라 번호는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시체가 들어 있는 자동차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인데 그럴듯하거든요. 똑같이 생긴 차를 빌려 시체를 실어놓고, 대리 주차하는 사람에게 바꿔치기 한 손님의 자동차 열쇠를 주면, 손님도 바꿔치기한 차를 타고 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똑같은 차종이라도 인테리어나 기타 세세한게 같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저도 제주도 등에서 렌트카를 몇 번 이용해 보았었는데, 같은 차종이라도 비닐을 뜯지 않았던 차를 한 대 몰아보았던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영국의 귀족 문화를 숭배하는 나이 든 집사가, 저택을 지키기 위해 사악한 채권자를 죽이고, 저택에 오랜 시간 동안 걸려있었지만 채무 때문에 팔아야 했던 그림을 다시 구입하려고한 동기만큼은 나쁘지 않았어요.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과거에는 얽매이는 모습은 안타까왔으며, 몰락해 가는 와중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귀족이라는 멸종 직전의 존재를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레베카"와 같이 묵직한 고전 걸작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그러나 최소 반 세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먹힐 이야기는 아니긴 합니다. 귀족 문화와 저택, 전통을 사랑하는 오래된 집사는 지금은 이미 다 죽어버렸을테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물이라는건 좋은데, 트릭과 동기 모두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아서 감점합니다.

2022/02/22

2021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매년 이맘때쯤 발표되는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 소설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추리 소설을 대상으로, 하우미스터리 회원들이 선정한 결과입니다. 이번에는 32명이 참여했네요.

2021년 1~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위 17표 "영매탐정 조즈카"

2위 16표 "샘 호손 박사의 불가능 사건집"

3위 10표 "마안갑의 살인"

"영매탐정 조즈카"는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만, 뭐 이런게 시대의 흐름이겠지요.

마지막으로, 이번의 제 선정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2021년에 출간된 책은 9권 밖에 읽지 못해서 추천은 애매했습니다만, 참가에 의의를 둡니다.

1. 샘 호손 박사의 불가능 사건집 

2. 홍학의 자리 

3.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2019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16/08/09

사쿠라코 씨의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1 - 오타 시오리 / 박춘상 : 별점 1.5점

사쿠라코 씨의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1 - 4점
오타 시오리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북스(D&CBooks)

소설 리뷰를 하면서 별점을 주는 데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이야기는 재미가 있는지, 묘사를 비롯한 전체적인 완성도와 설득력, 독특한 아이디어가 있는지, 그 외의 다른 가치가 있는지 등을 놓고 검토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준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전통적인 양갓집 아가씨로 엄청난 미인이지만 별난 성격에 "뼈"에 집착한다는 설정의 탐정역인 사쿠라코 씨 캐릭터부터 별로입니다.
양갓집 미인 아가씨라는 것은 진부함의 극치, 그리고 별난 성격은 도가 지나쳐 거북합니다. 누구를 대하더라도 반말조에, 상대방을 위한 배려 등 최소한의 예절도 갖추지 않아서 호감을 갖기 어려운 탓입니다. 만화에서 봄직한, 외계에서 와서 지구 습관을 잘 모르는 미녀 외계인 캐릭터 같은데 만화라면 모를까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왜 이런 성격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요.
탐정이 건방진건 문제가 아닙니다. 고전 본격물 황금기의 명탐정들은 대체로 잘난 척 대마왕들이기도 했으니까요. 허나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실력, 지위, 실적이 그들의 건방짐을 뒷받침했고, 아무에게나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실력, 지위, 실적 중 그 무엇도 갖추지 못하고 그냥 건방지기만 한 사쿠라코 씨는 인간 말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혐오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사건에 엮이는 원인이 되는 "뼈"에 대한 집착도 문제입니다. 진부함을 타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이야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독특함에 집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차라리 진부하더라도 뼈와 연관이 있는 전문 직종을 엮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렇듯 캐릭터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이야기가 대단히 재미있지 않다면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데, 재미 역시 합격점을 주기 어렵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고요. 세 편 모두 정교함이나 트릭이 돋보이지도 않고 억지가 너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북일본 아사히카와라는 독특한 지역을 무대로 그곳의 지형이라던가 명소, 특산물 등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진다는 정도인데,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냥 지엽적인 묘사에 그칠 뿐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라이트*캐릭터*미스터리*읽는 재미'라는 취지로 디앤씨북스에서 나온 시리즈 중 하나인데, 이 중 라이트(가볍게 읽을 만하다는 정도?) 외에는 해당되는 게 없네요. 사쿠라코 씨 신상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암시를 주는 등 노골적으로 시리즈임을 드러내지만, 후속작을 읽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애호가라면 근처에도 가지 마시고, 제 덕분에 지뢰 하나 피했다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제 리뷰를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 책을 읽으시리라 생각은 되지 않지만요.

"아름다운 사람"

화자인 나는 사쿠라코 씨의 호출로 그녀를 찾았다. 그녀가 가자미 뼈를 선물하는 와중에 화자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러 채의 임대 주택을 운영하는 어머니가 연락이 두절된 입주자 방문을 여는데, 입회해 달라는 부탁 전화였다. 내용을 전해들은 사쿠라코 씨는 자신이 사체 전문가라며 동행을 요구했고, 일행은 입주자 미즈시마 키요미의 방문을 열어 그녀의 사체를 발견했다. 그런데 방은 완벽하게 밀폐된 상태였다...

사쿠라코 씨와 주인공 소개와 함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밀실을 만드는 것은 제삼자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로, 얼핏 보아도 살인 사건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밀실을 꾸며야 할 이유는 없다는 사쿠라코 씨의 이론만큼은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20여 년 전 "nervous breakdown"에서 이미 접했던 것이라 신선하지는 않습니다. 그 외의 추리적인 내용은 거의 모두 억지스러웠고요. 우선 피해자의 동생 요시미와 피해자의 약혼자 하시구치가 불륜 관계였다는 것을 밝히는 추리부터 억지입니다. 언니의 죽음을 접하고 예비 형부에게 안겨 우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한 일일까요? 요시미의 스타일을 언급하는 것도 불필요했고요.
또 피해자가 독초 열매를 따먹고 죽은 것이라는 진상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약사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식물원까지 가서 열매를 몰래 따는 수고를 감행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극심한 고통도 예상되고, 사후 동공 확장 등으로 아트로핀 과다 섭취가 충분히 의심될 수 있어서 진상을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고통 때문에 방이 어질러졌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함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작위적이며 설득력이 낮아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캐릭터, 내용, 추리 모두 수준 이하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머리"

사쿠라코 씨의 "뼈 줍기"에 동행한 나는 마시케 초로 향했다. 해변에서 사람 두개골의 일부를 발견한 나는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 야마지 씨로부터 동반 자살 시체가 발견되었다는걸 들은 사쿠라코 씨는 잠깐만 사체를 보게 해 줄 것을 부탁했고, 잠깐의 관찰로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데...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을 묶은 이유, 보우라인 매듭이라는 독특한 매듭을 사용한 것과 매듭의 위치 정도의 단서로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주장한다는 내용입니다.

추리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변사체에 대한 추리를 펼치는 것이기에 사건성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여흥'에 불과하다는게 아쉽네요. 매듭을 묶은 손, 매듭의 위치 등 매듭 관련 추리는 이전의 많은 작품에서 반복된 것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지도 못하고요.

이 추리보다는 차라리 우연히 발견한 반려동물의 사체를 주인에게 가져다 주며 펼치는 추리가 더 괜찮습니다. 왜 사체가 정류장 지붕 위에 있었는지, 사인이 무엇인지 등을 담담하게 설명하는데 설득력이 아주 높아요. 이 이야기만 가지고 일상계처럼 푸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렇게 본편 이야기보다는 곁다리 이야기, 그리고 마시케 초의 먹거리(단새우 등)에 대한 소개가 더욱 돋보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네요.

"장미 나무 아래"

나와 사쿠라코 씨는 사쿠라코 씨의 지인인 장미원 운영자 쇼코 씨의 저택으로 향했다. 병문안을 위한 장미꽃을 얻기 위해서였다. 쇼코 씨의 부탁으로 저택에서 진행되는 강령회에 참석한 둘은, 강령회에서 영매를 통해 쇼코 씨의 죽은 남편 아키히토 씨가 사실은 살해당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아...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체적 난국인 작품입니다. '강령회'라는 주요 설정부터가 그러합니다. 이게 현대 일본에서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게다가 강령회를 이용하여 사기극을 벌인 이유가 사실은 피해자와 동성애 관계였다, 그것을 찍은 은밀한 비디오가 있었다는 진상은 어이를 상실케 만듭니다. 잘나가는 기업가, 정치가, 신부 등이 엮인 단체 동성애 그룹이라니 이거 참 소라넷을 능가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아닌가 싶네요. 그 외 영매를 가장한 요크 신부의 몇 가지 사기극은 너무나 유치했고요.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고, 추리적으로도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이야기로 별점은 0.5점입니다. 이 시리즈를 다시 볼 이유가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 유일한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2014/06/10

CMB 박물관 사건목록 2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24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 박물관 사건목록 2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24권 리뷰입니다. 최신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25권이 나와있네요.

여튼, 24권에는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잔잔한 일상계 없이 네편 모두 사람이 죽는 등 심각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점은 동시기 발표된 "Q.E.D 45"와 같군요. 작업 당시 작가에게 뭔가 안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수록작 2편의 "Q.E.D", 3~4편의 "C.M.B"로 목차도 굳어져가는 느낌이네요.

전체 별점은 반올림해서 2.5점. 두편은 괜찮고 두편은 평범했습니다.

상세한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니쇼테이"

"니쇼테이"라는 실존했던 기묘한 건축물을 재현하는 괴짜에 대한 이야기. 진상은 과거 있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였는지를 밝히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쇼테이를 재건하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아서 본 줄거리와 그렇게 잘 연결된다고 볼 수 없고 내용도 작위적인 부분이 한가득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니쇼테이 재건은 단지 "돈을 물쓰듯 쓰는" 행동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라도 상관없는 것이니 별 관계도 없고, 진범이라는 이모부부가 구태여 그 건축물안에서 여보란듯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당쵀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니쇼테이라는 건축물에 대해 접한 작가가 기묘한 부분이 좋아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지 못한 느낌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이상의 독특한 시를 주제로 추리소설을 써야지!"라는 생각까지는 좋았으나 그 결과물은 실제 시와는 유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희대의 졸작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아예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니쇼테이는 지금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영화 세트"로 허가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해내어 곁가지 진상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 하나만큼은 괜찮았고 특유의 박물학적 지식의 전달 측면에서도 니쇼테이라는 건축물을 알게 해 주었다는 점은 좋았으니까요. 관심이 생겨서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는데 확실히 신기하긴 하군요.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여튼, 별점은 2점입니다.

"다이아몬드 도둑"

미술관에서 사라진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찾는 이야기. 도둑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전개도 깔끔하고 진상도 그럴듯합니다. 마지막에 진범이 새롭게 드러나는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신라가 진범을 깨닫게 되는 사소한 범인의 실수가 저는 그렇게 와닿지는 않더군요. 자포자기를 했을 수도 있고 다른 경로로 명확하게 진품이 아니라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일 수도 있는데 너무 지레짐작이 심했던 것 같거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확실히 깔끔해서 이번 권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꼽을 만한 에피소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레이스"

아버지와 삼촌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만 놓고보면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딱히 재미가 없어요. 막장드라마의 제국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정도야 뭐 장난 수준이니까요. 총을 쏘았던 경비원의 증언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너무나도 쉬운 전개라는 것도 불만이고요, 반전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평균 이하의 졸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옷장 속의 유령"

C.M.B가 아닌 M.A.U로 제목이 달려있는, '암시장의 마녀' 마우가 주인공인 사건목록 번외편입니다. 마우가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강령회 도중 쇠사슬로 묶인 옷장 안에서 영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지요. 

조작된 랩소리라던가 강령회에서 들려왔던 유령의 목소리, 어떻게 밀실과 같은 옷장 문을 열었는지 등 트릭만큼은 풍성합니다. 대저택, 강령회, 밀실 등의 고전적인 설정과도 잘 맞물려 있어서 고전 본격물을 즐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추리적으로는 괜찮았어요. 구태여 이런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는 설정상의 헛점과 랩소리, 빗을 이용한 유령 목소리 등이 실제 가능했을지와 같은 장치 트릭의 문제점까지도 고전적이라 저는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마우를 주인공으로 또 스핀오프를 벌려놓느냐는 겁니다. 솔직히 마우라는 캐릭터는 너무 만화적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타츠키를 더욱 잘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이래서야 진히로인은 마우라고 해도 할말 없겠어요.
게다가 이 작품에서 마우의 활약은 나쁘지는 않지만 "고전적"이라는 설정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기에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토마가 주인공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4/28

2024년 교토대학교 추리소설 연구회 신입회원 추천 도서

출처는 하우미스터리.

'교토대학교 추리소설 연구회'는 아야츠지 유키토, 노리즈키 린타로, 시마다 소지 등 일본 추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다수 배출한 명가지요.
신입생들에게 첫 모임 때까지 읽고 오라고 골라준 책 같은데, 고전 황금기의 본격 미스터리부터 일본 고전, 스릴러, 신본격 및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최신작까지 폭넓게 선정한게 돋보입니다. 이 중 각자 자신에게 잘 맞는 취향을 골라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동호회에 가입할 정도라면 이미 다 읽어 보았을 작품들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국내 미출간 작품 외에는 저도 다 읽었는데 저는 "용의자 X의 헌신"과 "모든 것이 F가 된다"가 좋았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평균 이상은 되는 만큼,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2/02/28

미스터리 심리학 - 리처드 와이즈먼 / 김영선 : 별점 3.5점

미스터리 심리학 - 8점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김영선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세상에 알려진 각종 기현상을 파헤치는 내용의 교양서적입니다. 마술의 비법을 밝히고 사기꾼들의 수법을 폭로하는 책들과 유사한데, 저도 전에 "신비의 사기꾼들"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심리학적으로 접근한게 특징이며, "재미있게 쓰여졌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상당히 위트 있고 유머러스하게 구성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어요.

또한, 각종 기현상을 꼭지별로 나누어 역사부터 소개하는 자세한 설명이 좋았으며, 심리학자 등이 전문적 능력과 다양한 실험을 통해 수수께끼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적인 재미도 느껴졌습니다. 이런 류의 책들은 항상 기본 이상의 만족도를 주는 것 같습니다.

실려 있는 모든 내용이 흥미진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매나 점술가의 콜드 리딩을 설명하는 첫 번째 꼭지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상대를 칭찬하며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듣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인데, 결국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 여러 실험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정말 무릎을 칠 만한 내용이었어요. 이건 단순한 콜드 리딩이 아니라 사기의 기법이기도 하니까요!

이왕이면 동양의 사주팔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 (사주팔자는 일종의 DB 개념으로 봐야 할까요?)

그 외에도 영화 제목으로까지 사용된 영혼의 무게, 강령술과 테이블 움직임, 위저보드에 대한 해석, 영혼과 유령에 대한 과학적 접근, "오렌지로드" 팬들에게는 익숙한 예지몽의 허구성, 독심술과 최면 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한, 사기는 단순할수록 효과적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기도 했고요.

문체는 좋았지만, 이론적인 설명이 지나치게 직역에 가까워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고, 뒤로 갈수록 주제 면에서 흥미와 몰입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 그래도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6/01/05

용의 이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용의 이 - 6점
이영수(듀나) 지음/북스피어

"면세구역"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연휴 기간 읽은 듀나의 중·단편집입니다.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전 "면세구역"과 장·단점 모두 유사합니다. 책 기준 출간 시점이 7년이나 차이나는데도 불구하고요. 때문에 성장하는 작가라는 느낌은 받기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작품들의 성향이 많이 달라 전체를 요약하는 대신, 아래에 작품별 상세 리뷰를 올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너네 아빠 어딨니"

아빠에게 학대당하던 두 자매가 아빠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하는데 아빠가 좀비로 부활한다!

이전 "판타스틱"에 게재되었던 단편입니다. 뻔한 좀비물이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혹 행위를 일삼는 편부 슬하의 두 자매가 견디다 못해 저지른 살인이 좀비 아포칼립스의 시작이라는 점, 아빠가 좀비로 살아나는 이유가 묻은 창고의 황토 때문이며 두 자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사의 부적 때문이라는 등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이 재기발랄했던 덕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궁금했던 것, 즉 '동물이 좀비가 되면 어떻게 되나?'에 대한 나름의 해답도 반가웠습니다. 아빠 등이 잡아먹은 쥐가 좀비가 된 뒤 탈출하여 서울을 좀비 도시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매일매일 좀비를 죽이고 또 죽여나가는 자매의 비밀이 마지막까지 유지되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한 방에 폭발한다는 스피드와 박력 넘치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허나 좀 쉽게 간 느낌도 듭니다. 도라지 도사의 부적이 대표적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어요. 위기에 처했는데 갑자기 UFO가 나타나서 외계인이 도와줬다는 설정과 다를 게 없어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자체인데, 차라리 아빠를 매일매일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좀비에 익숙해져서 살아남았다고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결국 뭔가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낙관적인 결말 — 자매는 살아남아서 80억이나 되는 현금과 보석을 나누어 보관한다 — 도 크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지옥 같았던 두 자매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렸다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천국의 왕"

죽은 후의 영혼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로 사고로 죽은 민서를 영체화시키는 이야기와 주인공이 아버지와 연구를 진행할 때의 이야기 두 개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민서 이야기는 순전히 사족일 뿐이며, 아버지와 연구 진행할 때의 이야기 역시 다소 늘어집니다. 영매 능력이 있었던 어머니의 영혼을 가둔 첫 번째 병에 대한 이야기, 특히 병 속에서 어머니의 영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장면 하나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고 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간단한 이야기로 끌고가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영혼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디테일과 아버지의 광기 역시 빼어나게 묘사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어머니 영체 이야기만큼은 별점 4점도 부족함이 없지만 다른 곁가지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

지성을 가진 나무들이 창조한 드라마 속 생명체가 자신의 능력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수페이지짜리 꽁트.

전형적인 듀나 스타일의 작품이에요. 재미있는 설정은 돋보이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2점입니다.

"용의 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고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자인 소녀가 우주선 불시착 후 홀로 살아남았다. 불시착한 별은 토착민들의 유령이 숭배하는 '여왕'의 존재를 놓고 유령들 간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였다.

기묘한 분위기의 판타지 SF로 260페이지가 넘는 중편입니다.

일단 강력한 능력을 가진 소녀가 나옵니다. 정신을 조합하여 새로운 인격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소유했고,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흡수한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리도 있습니다. 여왕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은 누구인지, 대체 이 별은 무엇인지 등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거든요.
액션도 화끈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적, 그리고 다양한 유령과 생명체, 기계와의 사투도 그려지니까요.

이렇게 보면 되게 재미있고 좋은 작품 같지요? 허나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불친절한 전개와 묘사 탓입니다. 주인공 소녀 외에는 모두 유령이라 대화나 별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요. 대사와 의식의 흐름이 구분되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여러모로 깔끔하지 못해요. 그나마 중반까지는 제법 흡입력 있었는데,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습이 힘든 작가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별에 존재하는 유령들은 모두 오래전 멸종한 달팽이들의 강력한 잔유 사념에 지배당한 결과라는 진상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합니다. 묘사 탓에 그냥 평이하게 흘러가고 끝나버리는 탓입니다. 어차피 주인공 소녀의 생각밖에는 근거가 없어서, 이게 미치광이 소녀가 정신병원에서 꾼 꿈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렵고요.
아울러 별의 문이 멋대로 열린다는 설정은 생각 흘러가는대로 써 내려간 느낌이라 더욱 별로였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재료는 엄청 많은데 정작 결과물은 그냥 그런 비빔밥에 불과한 결과물입니다. 그나마도 고추장, 참기름이 빠져서 엄청 심심한… 물론 이게 입맛에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게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일로 보다 명쾌하게, 속도감 있게 쓰는게 좋았을 겁니다.

2023/06/10

유리탑의 살인 - 치넨 미키토 / 김은모 : 별점 2점

유리탑의 살인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물 전달 시스템 트라이던트를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쥔 코즈시마 타로는 자신의 저택 '유리관'에 조촐한 행사를 위해 여러 손님 - 유명 추리 소설가 쿠루마 코신, 편집자 사쿄 코스케, 영능력자 유메요미 스이쇼, 형사 카가미 츠요시, 그리고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 - 을 초대했다. 유리관에는 손님 외에 집사 오이타 신조, 메이드 토모에 마도카, 요리사 사카이즈미 타이키와 코즈시마 타로의 주치의 이치조 유마가 함께 있었다.
행사 직전, 이치조 유마는 코즈시마 타로를 독살했다. 코즈시마가 동생의 난치병 치료를 특허 분쟁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사로 위장할 계획은 즉사하지 않은 코즈시마가 전화를 건 탓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뒤이어 집사 오이타, 메이드 마도카가 연달아 밀실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자, 유마는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의 조수, 왓슨 역을 자처하여 컴비를 이루게 되었다. 두 사건의 범인에게 코즈시마 살해까지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발표 당시, 미스터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 대부호가 만든 기묘한 저택이라는 무대
  • 저택이 고립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3건의 연쇄 살인 사건
  • 모든 사건들은 일종의 밀실 상황
  • 사건은 명탐정이 해결
는 점에서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이 중 한 사건은 화자인 이치조 유마가 이미 저지른 도서 추리물이기도 하고요.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는 모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또 사건의 이런 저런 상황이 여러 미스터리 명작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애호가들을 자극하는 요소입니다.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유리관의 살인>>이라고 부르고, 코즈시마가 남긴 다이잉 메시지는 <<비뚤어진 집>>, <<Y의 비극>>, <<독 초콜릿 사건>>을 의미한다던가, 마도카 사건에서 남겨져 있던 메시지는 '관 시리즈'와 관련이 있으며, 결국 이 모든 진상은 '관 시리즈'와 연결된다는 식입니다.
트릭도 모두 유명 작품에서 따 왔습니다. 오이타 신조 사건에서 특정 시간에 자동 발화시킨 트릭은, 의도적으로 창문이 아침 햇빛을 집중시키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과 유사합니다. 토모에 마도카의 시체를 밀실 안으로 집어넣는 트릭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듯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가 떠오르고요. 만화 <<외천루>>에서는 아래와 같이 아예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미스터리 애호가들이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온갖 작품들이 언급되고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후기 퀸 문제 - 작품 속 해결이 진짜 해결인지를 작품 속에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 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던가, 비밀 통로와 암호, 심지어 '독자에게의 도전장'까지 삽입된건 그야말로 미스터리 애호가의 피를 끓게 만들지요.

무엇보다도 '작위적인 상황들은 알고보니 저택 주인 코즈시마 타로가 꾸민 연극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반전은 신선했습니다. '작위적'인게 당연한 상황을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이보다 나은 아이디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았어요. 엄청난 부자인 코즈시마 타로는 미스터리에 푹 빠진 나머지, 스스로 위대한 걸작을 쓰고 싶어서 트릭을 고안한 뒤, 추리와 관련된 이런 저런 손님들 - 명탐정, 추리 소설 작가, 편집자, 영매 - 을 초대하여 실제로 추리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연극이니 당연히 코즈시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죽지 않았었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등산 조난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게 들통나서 살해당했다는 유치한 동기 역시 가짜였고요.
코즈시마가 연극을 위해 '유리탑' 안에 이중 나선 구조와 같은 비밀 나선 계단을 설치했다는 진상도 적절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이 진상이 <<미로관>>과 유사하다는 점도 과연 코즈시마 타로답더군요). 영능력자 유메요미, 그리고 화자 유마까지 알 수 없는 인기척을 계속 느꼈다는 식으로 비밀 계단과 통로에 대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고요.
트릭도 다른 작품에서 따 온게 많다고는 했지만, 그런대로 볼만했습니다. 특히 오이타 사건에서 식당을 밀실로 만든 트릭은 괜찮았어요. 각설탕을 회전 빗장에 꽂아 넣고 화재를 일으키면, 스프링쿨러가 작동하여 각설탕이 녹아서 빗장이 걸린다는 것인데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체에 등유를 끼얹어 화재를 일으킨 원인도 위장하는 등 디테일도 꼼꼼했고요.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가 괜찮았다고 말할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 애호가를 위한 장치와 반전 외에는 과연 그렇게까지 절찬을 받을만한 작품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우선 본인이 명탐정임을 주장하는 아오이 츠키요는 작위적인걸 넘어서는, 그야말로 현실과는 백만광년은 떨어진 듯한 만화같은 캐릭터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모든게 '연극' 이라서 작위적이었다"는 아이디어는 빛이 바랩니다. 그래봤자, 핵심 등장인물이 가짜보다 더 한 만화라서 영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서는 보다 진지한, 현실적인 탐정으로 묘사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아오이 츠키요의 비현실성은 진상 부분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녀는 연쇄 살인이 연극임을 초반에 간파하고 실제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졸작 <<유리관의 살인>>을 납득할 수 없어서 본인이 범인이 되는 걸작 메타 미스터리로 만들기 위해서라고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살인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이러한 '메타' 방식 설정은 일본 일부 작품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적절히 잘 사용된 경우는 생각나지 않네요.
명탐정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명탐정을 부르기 위해 불가능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는 아오이 츠키요의 또다른 배경 설정도 한심하기 그지 없었어요. 시로다이라 쿄의 <<명탐정에게 장미를>>에도 등장했던 설정인데, 그 때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리뷰를 남겼었지요.
그리고 악당 - 명탐정 대신 명범인 - 이 되기로 결심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면, 초지일관 그렇게 나갔어야죠. 마지막 순간에 유마를 구해주고 키스까지 한 다음 사라지는건 최악이었습니다. 캐릭터만 희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만화나 라이트 노벨 세계관이라면 모를까, 정통 본격물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코즈시마 타로의 추리 소설이 엉망이라는건 츠키요가 이미 언급했지만, 실제로도 트릭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소설에서 진범은 카가미였습니다. 딸이 코즈시마 일당 - 코즈시마와 집사 오이타, 메이드 마도카 - 에게 납치되어 생체 실험을 받다가 죽었다는걸 알고 복수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난 뒤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다며 자살합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마치고 죽을 결심을 한 범인이 밀실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경찰이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카가미의 동기가 밝혀지는건 시간 문제였습니다. 어차피 빠져나갈 방법도 없으니 트릭을 사용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없지요. 손님들이 초대되었을 때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당연히 없습니다. 카가미는 이전에도 코즈시마를 방문해서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음에도 혼자 찾아와 모두를 죽이는게 더 쉬운 복수였을거에요. 관 시리즈, 특히 <<십각관의 살인>>이 걸작인 이유 중 하나는 범인이 트릭을 만든데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처럼 아무런 설득력없이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해 트릭을 사용한게 아니고요.
또 딸의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조가타케산 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이상했고 - 딸은 조가타케산 사건의 피해자라기 보다는, 최근 사건의 실종자이므로 -, 코즈시마 일당의 범행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돌려 말할 까닭도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복수의 이유를 쓰면 되지요. 나카무라 세이지를 죽이라면서 비밀 통로를 은근히 알려주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코즈시마가 유마가 자신을 독살하게끔 유도하여 연기했다는 설정도 어처구니를 상실케 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원래는 모든게 연극이었다는 발상을 제외하고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쉽게 읽히는 라이트 노벨스러운 작풍은 분명한 장점이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진지한 본격 추리물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전 <<데드 트릭>>리뷰 에서, 본격 미스터리는 프로레슬링과 비슷하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했었는데, 프로레슬링도 형편없고 장난스러운 각본은 욕을 먹기 마련입니다. 제가 나이가 있는 탓에 요새 트렌드와 거리가 있어서 이런 작품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건 사실이겠지만, 살인을 장난스럽게 다루는 작품은 진심으로 없었으면 합니다. 

2022/07/15

2022년 7월, 일본을 달군 '최강의 미스터리 소설 10선' 트윗

일본의 독서중독 블로거 히로타츠가 트위터에 올려서 화제가 되고 있는 글입니다. 2022년 7월 1일 기준으로 리트윗 4,9만회, 좋아요 19.6만회를 달성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군요. 히로타츠가 추리 소설 애호가 260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앙케이트를 바탕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이 글 때문에 소개된 작품이 품절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해서 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대충 번역해서 가지고 와 봤습니다. 원글은 '이곳'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SNS의 최강의 미스터리 소설 10선
1위 "십각관의 살인"
부동의 걸작

2위 "모든 것은 F가 된다"
지적쾌감의 난타에 뇌세포가 기뻐한다.

3위 "점성술 살인 사건"
미스터리의 여신조차 미소지을만한 트릭.
사람의 뇌수에서 떠올릴 수 있는 트릭의 한계점.

4위 "살육에 이르는 병"
아름다운 내장을 좋아하십니까? 최강의 그로테스크 순도 100% 미스테리.

5위 "용의자 X의 헌신"
최고의 작가가 쓴 최고의 이야기.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만 '최고'.

6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지구상의 미스터리 소설 중 올타임 베스트. 이 작품을 뛰어넘을 작품은 아마도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등장하지 못할 것이다.

7위 "가위남"
전대미문의, 범인이 범인 맞추기 미스테리.

8위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희대의 트릭 메이커가 쓴 최고 걸작.

9위 "영매탐정 조즈카"
강렬한 일격.

10위 "쌍두의 악마"
독자를 아득히 뛰어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 최고 걸작.

개인적으로는 7위 <<가위남>>을 빼고는 모두 읽었는데 (<<가위남>>은 영화로 감상했습니다), 솔직히 순위에 동의하기는 좀 어렵네요. 이런 랭킹은 언제나 그렇듯 그냥 재미로만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개인의 기준은 모두 다른 법이니까요.

2010/02/25

더 박스 - 리처드 매드슨 / 나중길 : 별점 2.5점

더 박스 - 6점
리처드 매드슨 지음, 나중길 옮김/노블마인

"나는 전설이다"의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비롯해서 전부 10편의 작품이 실려있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버튼, 버튼
  •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 매춘부 세상
  •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 옷이 사람을 만든다
  • 카페에서 생긴 일
  • 충격파
  • 벙어리 소년
  • 특이한 생존 방식
  • 소름 끼치는 공포
반전물로는 "버튼, 버튼", "매춘부 세상", 그리고 범위를 좀 넓게 잡으면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까지 총 4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작품들은 범죄 서스펜스 스릴러 ("카페에서 생긴일"), 썰렁 판타지 ("옷이 사람을 만든다"), 풍자 블랙 코미디 ("소름 끼치는 공포") 등 다양한 장르가 실려있어 일견 풍성한 느낌을 전해주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별로였어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좀 옛날 작품이라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온다는 것과 반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 많았거든요. "나는 전설이다"와 비교한다면 한참 처지는 단편집이라 생각되더군요.
예를 들자면, 표제작인 "버튼, 버튼"의 경우 20년전 환상특급 (Twilight Zone)의 에피소드를 연상케하는 작품인데 반전으로서의 설득력도 부족했고 너무 예상 가능한 결말이 아니었다 싶었어요. 버튼을 누를 경우 모르는 사람이 죽는 대신 5만달러를 받는다는 기본 설정은 분명 거장의 솜씨인데 전개와 마무리가 너무 약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버튼을 누르면 특정 "방"의 전원이 완전히 차단되고 그 전기료를 한전이 버튼 주인에게 보내준다는 소박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매일 아내가 버튼을 눌러 적게나마 용돈벌이를 하는데 어느날 남편이 버튼의 작용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고 안에서 질식해서 죽는다는 이야기... 이게 더 재미있지 않나요?
그리고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그야말로 "썰렁한" 이야기더군요. 반전물도, 범죄물도 아닌 드라마인 "충격파"는 독특하기는 한데 기대와는 너무 다른 작품이라 겉도는 느낌이 강했고요. 차라리 두 작품 모두 "스멀스멀" 계열로 쭈~욱 끌고 갔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좀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 진지하고 짤막한 드라마 "특이한 생존 방식" 도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고 풍자성격이 강한 블랙코미디 "소름 끼치는 공포"도 독특함은 좋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 특화된 발상과 풍자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하지만 거장다운, 기대에 값하는 좋은 작품도 물론 실려있습니다. 영매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는 마지막 부분의 서늘한 느낌이 일품이었고, 블랙코미디스러운 맛과 독특한 설정, 반전까지 깔끔한 "매춘부 세상"은 그야말로 반전물 단편의 교과서같은 작품이더군요. 고딕 호러에서 시작해서 완전범죄 추리물로 끝나는 "흡혈귀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는 추리 애호가로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고요. 초능력에 대한 작가의 색다른 시각이 돋보이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뻔해졌지만) "벙어리 소년"도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 특유의 서스펜스와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진지한 범죄물 "카페에서 생긴일"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돋보이이기에 이 단편집 베스트로 꼽고싶습니다. 디테일하게 파고든다면 범죄가 너무 빨리 들통난다는 것과 주인공 여성을 범인들이 너무 쉽게 놓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지만 이런 단점을 뛰어넘을 정도로 숨막히는 전개가 돋보이는 명편이거든요.

결론내리자면 절반정도는 괜찮았고 절반정도는 그냥 그랬던 어중간한 책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읽는 재미는 있고 짤막한 작품들이니 만큼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적합한 단편집이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되도록 구입보다는 빌려읽으시기를 권합니다.

PS : "버튼, 버튼"은 카메론 디아즈 주연으로 영화가 개봉되었다는데 보지는 못했지만 대관절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원작 단편은 30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들어도 충분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2009/05/20

인체 모형의 밤 - 나카지마 라모 / 한희선 : 별점 3점

인체 모형의 밤 - 6점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일본 작가 나카지마 라모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단편들은 제목처럼 인체모형에 관련된 기괴한 묘사에서 시작되어, 눈-피-코-귀-다리-무릎-배꼽-팔-뼈-위-유방-날개와 성기 라는 인체의 부분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보고 구입하게 되었네요.

각 단편별로 분위기가 굉징하 다른 것이 특징인데, 유령이 등장하는 정통(?) 심령 호러물에서 부터 시작해서, 일종의 괴물이 등장하는 스플래터 호러, 심리 스릴러에 더불어 진지한 드라마와 1인칭 시점의 블랙 코미디까지 실려 있어서 굉장히 풍성합니다. 그야말로 색다른 인생을 살아온 작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품별 수준의 편차가 크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예상 가능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좀 아쉽네요. 뭔가 한번 정도 더 비틀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하게 마무리한게 아닌가 싶거든요. 또한 앞서 말했듯 쟝르가 다양해서 호러 소설이 취향이 아니더라도 즐길 작품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외려 정통 호러로 보이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인 "사안"과 "코" 처럼 오싹하면서도 의외성이 있는 작품들이 더욱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충동구매에 가까운 구매였는데 다행히 평균 이상은 해 주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해서 점수가 더 높을지도 모르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프롤로그 : 인체모형의 밤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작품을 한데 묶는 이야기로 별 특기할 점은 없습니다.

사안(邪眼) : 싱가포르를 무대로 한 심리 스릴러물로 스멀스멀 계열의 작품입니다. 일본인 싱가포르 주재원의 아내가 임신하였는데, 현지 고용인인 가정부가 임신한 아이가 "사안"을 지녔다.. 라고 믿는다는 내용으로, 사안이라는 전설과 푸른눈이라는 설정을 잘 결합한 좋은 단편입니다. 진실이 괴담보다 무섭다는 마지막 반전도 톡 쏘는 맛이 아주 좋았고요. 이런 류의 단편으로는 모범답안이 아닐까 싶네요.

세르피네의 피 : 세르피네라는 섬을 그야말로 "낙원" 이라고 믿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사실 "낙원"의 실체는 달랐다.. 라는 반전이 있는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반전에 이르기까지 교묘하게 장치한 복선을 풀어나가는 맛은 괜찮지만 반전 자체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아서 약간은 심심했습니다. 또 "피"를 연관시키기에는 좀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 조향사인 주인공은 옛 남자친구의 소개로 싼 맨션을 얻어 이사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수없는 물소리와 냄새 때문에 곤란해 하던 차에, 전 세입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입니다. 뻔하게 흘러가서 뻔하게 끝맺긴 하지만 유령 이야기의 무서운 점, 즉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를 조향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냈으며 특히나 "돼지뼈 라면 국물 끓이는 냄새"의 정체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전 정말이지 일본 욕탕이 물을 그렇게 데우는 시스템이라는걸 몰라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네요.

굶주린 귀 :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통해 접한 것이 이 단편의 소개였죠.
옆방을 엿듣는것이 취미인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새로 이사온 집 옆집을 엿듣던 중 분명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인데 여자만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옆집에 인사를 가는 척 하며 여러가지를 물어보던 중에 옆집 여자 남편이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조금은 허무한 마음에 술을 사러가던 주인공은 여자 집을 우연히 올려다 보는데.... "남자 빨래가 하나도 없어!"
이 줄거리만 놓고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아쉽게도 결말이 너무 예상 가능한 범위내에 있었습니다. 좀 더 반전다운 반전이 등장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것 같아요. 예를 들면 레즈비언 부부였다던가, 남편이 게이바 사장이나 트랜스젠더였다던가....

건각(健脚)-국도 43호선의 수수께끼 : 전직 드라이버 지망생이었던 주인공과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된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괴담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 단편집 안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뭔가를 전해준다는 것 하나가 독특할 뿐 별로 남는건 없는 그냥 홈드라마같은 느낌의 소품이었습니다.

무릎 : "인면창" 이 실제로 그 주인을 먹어버린다! 는 내용의 이종괴물 스플래터 호러 단편입니다. 전개는 한마디로 일직선이라 별로 평할게 없는 평작인데, 주인공의 설정이 독특하고 전개가 어울리지 않게 유머스러워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나저나, 인면창이라니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인면창이 있는 피해자(?) 가 "블랙잭"을 만났더라면 완치되고 생명을 건지지 않았을까요?^^

피라미드의 배꼽 : 대 부호의 데릴사위인 가난뱅이 학자가 도심 한복판에 피라미드를 건축한다! 는 SF 단편입니다. 피라밋과 피라밋 파워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이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색작으로, 작가가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 박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역시나 좀 뻔해서 별로 특기할건 없더군요.

EIGHT ARMS TO HOLD YOU : 비틀즈의 존 레논의 미발표 곡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의 방대한 지식세계를 다시한번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비틀즈 4명이 안아준다는" 노래의 제목과, 마지막의 반전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좋았고요. 반전이 너무 끼워다 맞추는 것이 지나쳐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평작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뼈 먹는 가락 : 1인칭 시점의 공원묘지 판매원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었는데, 이유는 주인공이 왜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너무 다양한 내용을 펼쳐만 놓았지 이야기의 맥락이 전무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도 어설퍼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수준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장의사" 정도로는 이야기를 끌고가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다카코의 위주머니 : 거식증에 걸린 채식주의자 소녀가 최후의 순간에는 부모에게 살의를 품는다는 이야기로 "채식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내용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문제는 별다른 공포도, 반전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겠죠. 그냥저냥 홈드라마 소품입니다. 이게 호러가 되려면 다카코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가르는 정도는 되어야겠죠. 어쨌건 저는 읽고나니 로스트비프가 먹고싶어질 뿐이었습니다.^^;

유방 : 영매사가 불러온 유령을 거짓이라 치부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짤막한 블랙코미디 꽁트로 약간의 반전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별로 특이하지는 않더군요.

날개와 성기 : 무슨 이야기인지? 성기를 없애고 스스로 "무성", 천사와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인공이 명상을 통해 접한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묘사는 현실적이고 와 닿지만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라 평가 자체가 어렵네요....

에필로그 목저택 :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역시나 별로 특기할 것은 없습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