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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8

내 안의 야수 - 마거릿 밀러 / 조한나 : 별점 3점

내 안의 야수 - 6점 마거릿 밀러 지음, 조한나 옮김/영림카디널

아버지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혼자서 싸구려 호텔에서 살아가는 기이한 노처녀 헬렌 클라보에게 어느 날 에블린이라는 여성에게서 이상한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겁에 질린 헬렌은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알게 된 블랙쉬어에게 에블린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명성은 쟁쟁했으나 작품을 접할 길이 없던 서스펜스의 여왕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 작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정체 모를 협박자와 처음에는 장난스러웠지만 점점 치명적으로 변해가는 협박의 과정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평범한 사람 마음속에 숨어있는 야수라는 주제는 특별한 것은 아니죠. 루스 렌들의 "내 눈에 비친 악마"나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좋은 예가 있으니까요. 또 피해자와 협박자의 시점을 오가며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전개 방법은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쉬)"상복의 랑데뷰"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광녀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작품을 수도 없이 꼽을 수 있을 테고 말이죠.

그러나 단순한 아류작은 아닙니다. 발표 시기를 볼 때 위와 같은 유사한 작품들의 원전 격이라는 점이 명백하기도 하지만, 독특한 반전과 더불어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는 작품이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시기를 감안한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박감이 넘치고 현대적이기까지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스펜스의 여왕에 걸맞게 독자의 심리를 살짝살짝 조이는 맛이 특히 일품이라 과연 걸작이라는 평이 아깝지 않네요. 유사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독특한 반전도 좋았고요. 앞부분의 복선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서술 트릭의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협박의 동기가 전혀 밝혀지지도 않고, 협박의 재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최소한 더글러스의 성 정체성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불분명하며, 과연 전화 목소리를 베르나가 못 알아들었을까 하는 문제 등 전개 면에서 허점이 여러 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에블린의 인격이 분열하는 계기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점은 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가 살짝 보여지기는 하나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거든요. 과거의 일화 말고 현재 시점에서 뭔가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는 독자를 위해 짤막하게나마 설명해 주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지금 읽기에는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어쩔 수 없는 약점도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이건 작품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요...

때문에 약간 감점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허나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심리 서스펜스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한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고전 추리 - 서스펜스 스릴러 애호가분들께 원전 격인 재미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추천드립니다.

2011/11/15

서스피션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3점

"더 크레이터"를 읽고 좌절했지만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읽은 데즈카 오사무의 또 다른 단편집. 원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이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주로 심리 서스펜스 - 호러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심리 묘사가 상당히 탁월해서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거든요.

특히 "서스피션"이라는 표제로 연재되었다는 세 작품이 발군입니다.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첫 번째 작품인 "파리채"는 로봇을 이용한 살인 계획과 뒤이은 반전을 다룬 그럴듯한 SF 범죄 스릴러로 헨리 슬레서의 단편 "헬로 자스민"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대한 깊은 고뇌를 묵직하게 그리고, 비교적 현실적인 반전은 더 낫습니다. 

"벼랑의 두 남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쫓아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도착한 뒤 벌어지는 치밀한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특징은 심리 묘사입니다. 정말 최고예요. 일종의 갇힌 공간이고 인적이 없다는 점에서 폐쇄형 스릴러물 느낌도 드는데, 후쿠모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하거든요. 다만 결말이 뜬금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끌어서 주인공 채무자가 외려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에필로그라든가, 시점을 바꿔 의외의 진상을 드러낸다는 식으로 그려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P4의 사각"은 바이러스 SF물입니다. '홀로 갇히게 되는 실험체(?)의 비애'라는 흔한 설정도 그닥이지만, 반전이 너무 작위적이라 셋 중 가장 처집니다. 심리 묘사가 더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디테일과 현실감이라는 측면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에게 더 잘 어울렸을 이야기였어요. 그냥저냥 평작입니다.

이외에는 블랙잭과 유사한 캐릭터가 프로 곤충채집가로 등장하는 "인섹터" 시리즈와 풍자, 블랙코미디, 시사성 짙은 무난한 작품들이 이어지다가 정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요리하는 여자"로 마무리됩니다.

이 중에서는 "요리하는 여자"가 물건입니다. 앞선 "서스피션" 시리즈 못지 않아요. 노인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노인 실종 사건을 다루는데, 뻔한 이야기이긴 하나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디테일하게 잘 살아있고 반전을 잘 숨겨서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랄까요. 극화를 섞어 디테일을 강조한 그림도 상당히 잘 어울렸어요.

이곳저곳에 실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작품들의 편차가 좀 있다는 점, 그리고 호흡 조절에 약간은 문제가 있다는 단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별점 3점은 충분해 보입니다. 최소한 "서스피션" 시리즈 3작품과 마지막에 실린 "요리하는 여자"는 장르물 애호가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04/03/30

오후 3시 까지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외 / 정태원 : 별점 3점

오후 3시까지 - 6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정태원 옮김/글사랑

그동안 좀 뜸했었네요. 너무나도 지독한 독감에 걸리고 회사일도 바쁜 나머지...  오랫만이니만큼, 예전에 구입했었지만 읽지 않고 쌓아 두었던 책들 중에서 읽기 쉬워보이는 단편집을 골라 보았습니다.

이 책은 알프레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에 수록된 단편 중 13편을 엄선하여 편집한 앤솔러지입니다. 짤막하게 작품별로 소개해드리자면

"하인리히 헤런은 어디에?"
흑마술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공포 스릴러(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고 반전도 그냥 그렇지만 섬뜩한 이야기를 괴담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전개는 제법 괜찮았습니다.

“낡은 부적”
순문학 느낌 강한 단편. 보험사기를 다룬 심리물인데 끔찍한 사건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점점 붕괴되어 가는 사람의 심리를 극단적으로 다룬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피가 낭자한 잔인한 묘사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이는?”
일종의 완전 범죄를 다룬 범죄물. 잔인하다기 보단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마음에 안드는 버스기사 택시로 쫓아가서 때려주기”와 비슷한 이야기랄까요. 여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후 3시 까지”
수록작 작가 중 유일하게 아는 작가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아브라함 레빈 형사 시리즈 단편.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어떤 남자의 자살을 막으려는 레빈 형사의 심리를 한정된 짧은 시간동안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소품 느낌이 강하긴 하나 작가의 명성에 값하는, 읽는 재미는 충분히 넘치는 작품이었습니다.

“막다른 길”
전형적인 미국 헐리우드 형사물 스타일의 하드보일드 드라마.
나름대로 비비 꼬아놓기는 했지만 전형적이고 뻔한 이야기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리모트 컨트롤”
암살자의 완전범죄를 위한 변장, 그리고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꽤 재미있으며 치밀한 점이 마음에 드네요. 하지만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완벽하지는 않아요. 2% 정도 아쉬웠달까요?

“이중살인”
불륜 상대가 변태 성욕자에게 살해된 후, 아내를 변태 성욕자를 가장해서 살해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반전의 묘미가 상당합니다. 반전 하나때문에라도 읽어볼 가치 충분한, 괜찮은 단편이었어요.

“산타바바라에서 생긴 일”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브릿지”를 소재로 하여 사기와 살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치밀한 브릿지 묘사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고 특히나 결말부분이 실망스러웠습니다. 브릿지를 잘 안다면 즐길거리가 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수준이하였던 작품입니다.

“지하철에서 생긴 일”
한 선원의 과거 항해에 대한 회상으로, 예전 배에서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1등 부 기관사 폴란스키와 그의 그리스인 조수, 그리고 의사 출신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범죄 서스펜스물이라기 보다는 잔잔한 소품에 가까운 작품으로 교훈적이기는 하지만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였습니다.

“해리 해스팅스 방식”
해리 해스팅스라는 작가와 한 도둑이 벌이는 재미난 이야기.
아이디어 자체가 워낙 기발하고 글 전체가 유머스러워서 쉽게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추리 단편에서 보기힘든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이 앤솔러지 전체를 통틀어 베스트로 꼽고싶은 추천작입니다.

“도시의 풋내기”
독특한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 해결사와 현상금 사냥꾼을 섞어놓은 듯한 주인공의 캐릭터가 정말 괜찮습니다. 동시에 벌어지는 두가지 사건을 하나로 묶어 처리하는 깔끔한 이야기 구조도 좋았고요.

“동업자”
두 동업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다가 자멸한다는 작품. 유머스럽고 가벼운 소품입니다.

“2차선”
우연히 지방국도에서 만난 대형 트럭에게 쫓기게 된 운전사를 그린 서스펜스 물.
제가 옛날에 봤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듀얼”과 굉장히 비슷해서 조사해 봤더니 원작이 맞더군요. 영화보다는 덜 했지만 글이라는 수단으로 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서스펜스를 전해주는 작품입니다. 결말부분은 조금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말이죠.

이렇게 전체적으로 걸작들은 아니지만 평균작 이상의 작품들로 구성된 괜찮은 앤솔러지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매거진도 집에 몇권 있는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역시 머리를 식힐때는 추리 단편만한게 없는 것 같아요.

2011/06/16

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 이가형 : 별점 2.5점

누명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부유한 자선사업가인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쟈코 아가일은 감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2년 뒤, 지질학자 아서 캘거리는 아가일 가문을 방문하여 살해 당시 쟈코의 알리바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가일 저택에 거주하던 가족들 뿐이었다. 내놓은 자식이었던 쟈코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당연시 여기던 가족들은 누가 진범이냐를 놓고 큰 충격과 의심, 공포에 빠지게 되는데...

지난 주부터 저만의 애거서 크리스티 섭렵이 이어지고 있네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누명"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선정한 자신의 작품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사실 완독한 것은 며칠 전으로 리뷰 글을 다 써 놓았었는데, 편집 버튼 누른 뒤 알 수 없는 버그가 발생해서 다 날아갔네요. 망할 에버노트.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리뷰 내의 오류나 텐션이 떨어지는 것은 다 에버노트 탓입니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여사님 작가 인생의 비교적 후반기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작중에 폭스바겐 비틀과 스푸트니크가 언급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단순한 배경 뿐만이 아니라, 여사님의 유명 시리즈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등 전체적으로 이색적인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여러모로 원숙기를 넘어선 작가의 여유같은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여사님의 전공인 전통 본격 추리물보다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스타일의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성향이 엿보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과거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낸 뒤, 가족 중 누가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증폭되는 오해와 증오 등 복잡한 심리 묘사가 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촘촘히 짜여진 가족 구성원들의 설정도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심리 드라마는 아니며 여사님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특출난 부분이 있습니다. 앞선 여러가지 복선들, 예를 들어 자코의 중년 여성 대상 사기 행각이나 비밀 결혼 같은 별것 아닌듯한 정보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진상도 놀라운 점이 있고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팬들도 즐길거리가 많은 편이에요.

하지만 쟈코가 유죄 판결을 받고나서 사망할 때까지,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 중 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는지가 설명되지 않은건 옥의 티입니다. 심리 묘사가 중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에는 헤스터의 심리 묘사에만 너무 치우치는 것도 문제고요. 심리 묘사의 디테일도 부족할 뿐더러, 가족 구성원 개개의 심리 묘사는 진범의 심리를 건드릴 수 없기에 깊숙이 진행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게임처럼 생각해서 장난스럽게 접근하던 필립 듀란트의 비중이 큰 것은 작품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필립 듀란트가 밝혀낸 진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관절 이 친구는 뭘 위해서 등장해서 기웃거리다 죽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네요. 뭔가 하긴 한 것 같은데 죽어서도 뭘 했는지 밝혀지지 않으니 정말로 안습한 캐릭터랄까요. 그 외에 탐정역의 아서 캘거리의 활약이 좀 뜬금없었고, 빅토리아 시대의 향취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은 시대에 걸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긴장감넘치는 심리묘사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대단한 걸작이 되었을텐데 앞서 언급한 한계가 발목을 잡은 느낌이에요. 그래도 고전 황금기 이후 현대화된 정통 본격 추리물과 심리 스릴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사실 이 작품은 오래전 TV에서 영상화된 작품을 먼저 접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심리 묘사를 다루면서도 그 중에 범인이 있는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상물이 더 어울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인 것 같은데 도널드 서덜랜드의 캘거리 박사,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레오 아가일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이 인상적이라 다시 구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이라.... 이 아줌마 의외로 크리스티 영화에 많이 나왔네요?

2010/08/27

사가판 조류도감 / 어류도감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4점 / 3점

사가판 조류도감 - 8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글 그림, 김동욱 옮김/세미콜론
사가판 어류도감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글 그림, 김동욱 옮김/세미콜론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은 "재괴지이",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 "서유요원전" 정도만 읽어보았습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은 완독한 셈이지만 대표작이라는 "암흑신화" 등을 읽지 못했으니 팬이라고 하기도 쑥스럽고, 작가에 대해 잘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작가만의 '흉내낼 수 없는 기이함' 이 워낙에 매력적이라 국내 출간된 작품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번에 출간된 두 편의 단편집을 같은 이글루스 블로거이신 '벨제뷔트'님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고난 소감부터 이야기하자면 그야말로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를 만끽하기에 충분한 작품집이라는 것입니다. "조류도감"에는 6편의 작품이, "어류도감"에는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판타지와 SF는 물론 환상동화, 개그, 일상계 호러와 서스펜스에다가 전기-기담물까지 작가가 손댄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어 내용도 풍성할 뿐 아니라 특유의 기이함이 전편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두 권 모두 다 작가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구태여 구분하자면 "어류도감"쪽은 '기이함'보다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편한 구성의 작품이 많고, "조류도감"은 조금 더 매니아적이고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류도감"이 더 마음에 들었고요. 작가의 진정한 매력은 '호러' 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제 생각을 만족시키는 작품이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조류도감"은 4점, "어류도감"은 3점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좋아하신다면 적극 추천할 수 밖에 없는 작품집입니다. 팬이시라면 '닥바구'(닥치고 바로 구입!) 해야 되는 책이랄까요. 좋은 기회를 주신 벨제뷔트님에게 다시금 감사드립니다(몰랐는데 학교 동문이시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학교 근처에서 만나 뵙고 싶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이야기 두 편만 소개해 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탑을 나는 새"

판타지 장르물입니다.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진 세계, 탑의 층마다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외부의 탑들도 각각 또다른 세계고요.

외부를 멀리하며 탑의 바닥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나선계단으로 이동한다는 세계관도 독특하지만("계단을 오르는 남자"와 조금 유사하기도 하네요), 외부 세계를 동경하던 주인공이 '천사'일 수도 있는 새 소녀와 사랑에 빠져 인간 세계를 버린 뒤 새들의 현실을 알게 되는 충격적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서늘한 맛이 정말 일품이었어요.

"새를 보았다"

두 소년은 거대한 새를 우연찮게 목격한 뒤, 새를 관찰하기 위해 찾아간 건물 옥상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다른 소년과 친구가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새의 정체를 나중에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상계 심리 서스펜스 호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공포는 없지만 새의 정체를 둘러싼 긴장감이 좋고, 마지막의 진상도 괜찮았어요. 일상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심리 서스펜스가 무엇인지를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 외의 작품들 중에서는 전기-기담물인 "호무치와케"와 "어류도감"의 "교인", 심리드라마 "물고기 꿈을 꾸는 남자"를 베스트로 꼽습니다.

덧 : 리뷰를 읽으신 트위터 지인께서 진짜 도감인줄 아셨다고 하시네요. 생각해보니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안의 온갖 상상의 동물들을 실제 도감형식으로 꾸며놓아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런 도감이 실제로 나온다면 그 역시 '닥바구!'

2004/11/24

죽음의 사냥개 - 애거서 크리스티 / 정성희 : 별점 2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해문출판사
드디어!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집 전권을 완독했습니다.
이 작품집은 11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인데 코난 도일경처럼 말년에 심령현상에 심취했던 여사의 취향을 반영하듯 대부분 심령 호러물로 채워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목차와 쟝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죽음의 사냥개 - 심령 호러 (?)
  2. 집시 - 심령 호러(?)
  3. 등불 - 심령 호러
  4.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 - 심령 서스펜스 (?)
  5. 목련꽃 - 심리 드라마
  6. 개 다음에 - 드라마
  7. 이중 범죄 - 추리
  8. 말벌 둥지 - 추리
  9.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 - 심리 서스펜스
  10. 이중단서 - 추리
  11. 성역 - 추리
그런데 호러와 서스펜스를 표방한 대부분의 작품이 21세기 독자의 시각으로는 심심한 편입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해주지도 않으면서, 공포의 실체조차 두리뭉실 표현하는 점은 역시 빅토리아 여왕 시대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고요. 한마디로 말해 썰렁했어요.
포함되어 있는 4편의 추리물 역시 단편집 전체의 성격을 반영하듯 전체적으로 시시한건 마찬가지입니다. 포와로가 활약하는 "이중범죄"와 "말벌 둥지", "이중단서" 3편 모두 대단한 사건다운 사건없는 영국 시골에서 벌어지는 촌극 느낌이고, 마플양의 "성역" 역시 추리물적인 성격도 적을 뿐더러 마플양 작품 같지도 않거든요.
트릭적으로 본다면 그나마 "이중범죄" 쪽이 제일 본격적인 추리물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닥 신선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으며 "이중 단서"는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처음 등장하여 포와로와 대결을 펼친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줄 만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전체적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집으로 보기에는 기대 이하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심령 미스터리 쪽으로 가려면 더 화끈하고 더 무섭게 가는 것이 좋았을텐데 말이죠. 단편집을 완독했다는 성취감은 크지만 그 이상의 즐거움을 찾아보기는 어렵군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죽음의 사냥개"
한 수녀의 고대로부터 전해진 일종의 초능력과 그 비밀을 둘러싼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정직하게 흘러가다가 끝나버려서 별다른 반전의 묘미가 느껴지지 않아 아쉽네요.

"집시"
사람의 운명을 예견하는 집시에 대한 이야기. 내용이 별로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갑작스러운 마지막 해피엔딩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등불"
저택에 살고있는 굶어죽은 아이의 유령과 새로 이사온 가족의 이야기. 결국 새로 이사온 가족의 아이가 죽은 다음 유령이 2명이 된다..는 어떻게 보면 섬뜩한 이야기로 그나마 제일 무서웠던 작품입니다. (물론 현대 독자의 시각으로는 많이 썰렁합니다만)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
꽤 유명한 작품이지요. 유산 때문에 의붓아들 아서 카마이클 경에게 고양이를 대입시키는 묘한 최면을 거는 계모의 이야기입니다.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참신하고 결말 또한 제법 설득력 있지만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목련꽃"
일종의 심리 드라마입니다. 한 여자가 남편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지만, 남편 때문에 배신했던 다른 남자에게 찾아가 남편의 죄를 증명하는 서류를 받아오려 합니다. 그리고 서류를 받던 그 순간, 자신이 남편에게도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상당히 공감가는 이야기로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개 다음에"
애견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져가는 한 여성이 개의 자살과도 같은 죽음 직후에 새로운 인생을 되찾게 된다는 드라마인데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심리 묘사는 탁월하지만 글쎄요....

"이중 범죄"
포와로 단편입니다. 포와로가 헤이스팅스와 같이 버스 여행 중 만난 아가씨의 귀중품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소품이지요. 사건이 소박한 만큼 내용도 그다지 멋진 트릭이나 전개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이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적인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멍청한 (?) 헤이스팅스를 잘 드러내는 부분만 재미있었지만요...

"말벌 둥지"
케이블 TV에서 이미 영상 버젼으로 감상한 작품으로 어떤 단편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보게 되었네요. 한 남자의 자살-살인을 병행하려는 계획을 포와로가 미연에 방지하는 내용으로 영상 버젼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극적인 요소가 별로 없이 무미건조하게, 평이하게 흘러갑니다.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
의상 디자이너들이 한 벨벳 인형에게 어느날 문득 공포를 느끼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냥 그뿐입니다. "사랑받고 싶었다"라는 결론은 허무할 뿐이고요.

"이중 단서"
포와로가 보석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으로 용의자도 4명뿐이고, 트릭도 러시아어와 영어의 알파벳을 이용한 트릭이라 대단치 않습니다. 그나마 포와로 작품에서 라이벌로 등장하는 백작부인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만 점수를 줄 만 합니다.

"성역"
미스 마플이 깜짝 찬조 출연하는 작품인데 추리적 요소는 거의 전무합니다.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내용 자체는 도난 당한 보석에 관한 이야기로 소품이기도 하고요. 단서도 의뢰인이 다 찾은 것으로 마플양은 경찰을 부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어드바이저 정도의 역할 뿐입니다. 마플양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처져보치는건 저만 그런걸까요?

2024/01/27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 권도희 : 별점 2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4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권도희 옮김/엘릭시르

"녹색은 위험", "제제벨의 죽음"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집. 5부 구성으로 모두 1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통 본격물, 범죄물,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등으로 수록작 장르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정통 본격물의 비중은 무척 적은 탓입니다. 트릭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추리도 억지스러워서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아요. '기묘한 맛' 장르 느낌으로 마지막 한 줄, 한 문단으로 반전의 매력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티는 역력하지만 이 역시 모두 성공한건 아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5부 구성도 1부 코크릴 칵테일을 코크릴 경감 시리즈로만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도로 분류하여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인 게임"은 앙트레로 묶기 어려운, 이 단편집 최고의 메인 요리라 생각되거든요. 오히려 앙트레 선택에 5부 블랙 커피에 수록된 심리물들을 포함시키고, 범죄물을 메인 요리로 묶어 구성하는게 더 일목요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범죄물도 심리 묘사가 중심이거나 조금 가벼운 이야기와 묵직한 본격물을 구분하여 배치하고요. 제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아페리티프(식전주) : 코크릴 칵테일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피를 나눈 형제"
* 기존 구성에서 코크릴 경감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 한 편, 그리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정.

2부 앙트레 선택
"이 집에 축복을"
"수군거림"
"발코니에서"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
* 심리 묘사 중심의 작품들로 구성.

3부 르 푸아송 (생선 요리)
"말벌집"
"너무나 괜찮은 사람"
"신의 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 말벌집은 '굴'이 사용되어서 생선 요리로 분류했고 다른 작품들은 심리 중심의 범죄물들.

4부 리플렛 프로스펠 (메인 요리)
"살인 게임"
"희생양"
"여기 잠들다"
"회전 목마"
정통 본격 추리 범죄물들.

5부 데세르 (디저트)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

6부 블랙 커피
"잔 속에 든 독"
도서 추리물로 '커피'가 핵심 소재라는 점에서 블랙 커피로 분류.


마지막으로 수록작들의 간략한 리뷰는 아래에 요약하였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부 코크릴 칵테일.
코크릴 경감이 활약하는, 늙은 형사의 회고담인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뺑소니 살인과 정부 살인 사건을 저지른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인 "피를 나눈 형제", 성질 고약한 부자 노인이 후처를 맞은 결혼식 날 독살당한다는 "말벌집", 남편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독살한 아내 시점의 도서 추리 소설 "잔 속에 든 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범인의 조작을 코크릴 경감이 간파한다는 작품들로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에서는 유명 극단의 톱 스타 주연 배우 제임스 드래건의 아내가 살해당했는데, 극단 배우들이 모두 나서 경찰 앞에서 연극을 펼칩니다. 이를 통해 제임스 드래건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알고보니 범인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서 드래건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피를 나눈 형제"에서는 쌍둥이 형제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이고, 한 명은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었다면 누구를 체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둘 다 자기가 알리바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밝혀내는건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옷에 증거를 남겼다는 반전도 기발했고, 결국 진흙탕 속으로 서로를 밀어넣어 파멸하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말벌집"은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1966년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이 후원한 영국추리작가 협회 회원 대상 단편소설 경연대회 1등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죠. 이유는 범인 엘레자베스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훈제 연어를 준비하는게 어려웠다'는 말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된다는건 믿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가 사건을 연출했다는 것도 정황 증거에 불과하며 굴 안에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먹였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고요.
"잔 속에 든 독"은 범인 스텔라가 범인으로 몰리자, 임기 응변으로 남편 등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내용으로 도서 추리 소설과 심리 스릴러를 잘 결합한 좋은 작품입니다. 완벽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독이 든 커피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마지막 한 마디도 좋았고요.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2부 앙트레 선택.
유명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살인 게임", 일종의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희생양", 거짓 증언으로 선량한 히피가 파멸에 이른다는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의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게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도 소개되었던 단편이지요. 이전에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경찰로 변장한 뒤 밀실이었던 현장에 숨어있다가, 밀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 중 한 명으로 위장했다는 트릭이 기발합니다. 마지막에 이야기를 듣던 노인의 한 마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도 서늘했고요. 다만 범죄자의 혈통은 유전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는건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낡은 사고방식이라 아쉽네요. 그래도 2부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희생양"은 13년 전, 유명 마술사 미스테리오소가 저격당해 충직한 하인 톰이 대신 죽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저격용 총의 방아쇠에 묶인 끈에 사과 봉투를 위에서 떨어트린 장치 트릭인 것 처럼 풀어나가지만, 일종의 시간차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릭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이었던 경찰이 사과 봉투를 터트려 총소리를 위장한 뒤 진짜 저격은 나중에 벌였다는데, 사과 봉투를 터트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총 소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마지막에 소년이 미스테리오소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같은게 있었던걸까요? 2부, 아니 수록작 전체를 통틀어서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는 웨일스를 무대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탈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짓말의 연쇄가 진범의 알리바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선량한 히피 무리의 리더 크리스토가 누명을 쓰고 마는 과정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묘사됩니다. 셜리 잭슨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방불케할 정도에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볼만한 범죄 심리 스릴러였습니다.

3부 입가심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한 편이 소개됩니다. 블란쳇 부인의 진주 목걸이를 훔치려는 컴퍼트 양과 스네이스 씨의 작전, 그리고 이들을 농락하는 진짜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호지 양이 얽힌 재미난 범죄극이 펼쳐집니다. 진짜 도둑은 하녀 글래디스였다는 마지막 반전도 일품이고요. 그야말로 '입가심'에 적절한 유쾌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쾌작입니다.

4부 프티 푸르
'프티 푸르'는 한 입 디저트라고 하는데, 수록작들 대부분이 완전범죄 계획 살인물입니다. 한 입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네요.
하여튼, "여기 잠들다"는 아내를 사고사처럼 위장하여 죽이려는 제럴드의 치밀한 계획을 그립니다. 아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익사시킨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거의 성공했고요. 하지만 알리바이를 위해 고용했던 타이피스트 부처 부인이 제럴드를 죽인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부처 부인의 외모라던가 성격 묘사를 덧붙여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회전 목마"는 자신을 협박하던 빈들 씨를 살해한 하틀리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범죄물로도 좋은 수준이지만, 빈들 씨와 하틀리 부인의 꼬마 아이들이 범죄에 대해 모든걸 알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채 진상을 이야기하는 묘사도 서늘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는 악당 호러호러 족장을 살해한 이야기인데, 계획에 따른 완전범죄는 아니었습니다. 범인이 풀려났던건 목격자였던 존스 부인이 유리창 반사로 일으켰던 착각 탓이었지요.
"발코니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웃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킨 제닝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의 심리 스릴러 범죄물입니다. 히치콕의 "이창"을 뒤집어 놓은 설정과 제닝스 부인을 바라보는 이웃 시점의 묘사를 곳곳에 삽입하다가, 이웃들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5부 블랙 커피
수록작 네 편 중 세 편은 여자의 심리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에 축복을"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믿는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괜찮은 사람"은 그야말로 딱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너무나 괜찮았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심리를, "수군거림"은 자신의 실수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촌과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여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신의 힘"은 완전 범죄물입니다. 범인 에반스 경관의 범행 계획은 그냥저냥이지만, 딸과 손녀를 죽게만든 범인 젤링크스를 옭아맨 설정은 일품이었습니다. 에반스 경관의 거짓 증언으로 젤링크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무죄를 받아들인 뒤 협박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습니다.

2005/06/15

베스트 미스터리 2000 1, 2 -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정태원 역 : 별점 3.5점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1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2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소문만 듣던 책인데 인터넷 서점에 마침 재고가 있길래 냉큼 구입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들의 단편선이니 구입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목과 서론을 보니 일본 추리작가 협회에서 직접 선정한 2000년도판 베스트 단편선 쯤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한국 추리 작가 협회가 매년 출간하는 베스트 추리소설 모음집과 유사해 보입니다. 

워낙 일본이 추리 강국이라 저변과 시장이 넓은 덕분이겠지요? 수록된 작품의 양이 상당합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출판되었는데 1권에는 11편, 2권에는 9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수준도 우수합니다. 재미도 있고요.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통 추리물을 비롯해서 형사물, 공포스릴러, 환상단편, 인간 드라마, 심리 서스펜스에서 패러디까지 각종 쟝르를 넘나들며, 전개와 설정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고요.
작가군도 풍성합니다. 사노 요, 노리츠키 린타로, 이마무라 아야, 모리 히로시, 니카이도 레이토 등 유명 작가들은 물론 끝부분 작가 소개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라고 표시된 작가도 상당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렇듯 작가진만 보더라도 정말로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엄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전체적으로 우수하지만, 개인적으로 1권의 베스트는 사기극 "영원표묘", 정통추리물에 가까운 "사용중"과 "일곱통의 편지"이며 2권의 베스트는 정통 추리 "흉소면", "까마귀의 계시"였습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평균 이상 수준은 충분합니다.

번역이 약간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 조금 더 작은 판형으로 예쁘게 장정하였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렇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추리 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진수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수고롭더라도 구해볼 가치가 있는 책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후 2000년만 아니라 다른 년도의 베스트 단편 모음집도 소개되면 좋겠네요. 자세한 각 단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1. 잠들 수 없는 밤을 위하여 - 오리하라 이치 : 

 잡지의 "고민 상담실"의 투고와 신문기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으로 소품에 가깝습니다.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지만 마지막의 여운이 인상적이었어요.

2. 거짓말쟁이의 다리 - 사노 요 : 

 형사수사물. 두 형사의 대화로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의 뒤에 감추어진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는 전개로 잘 짜여져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마지막 반전은 약간 억지스럽습니다.

3. 배반의 푸가 - 스즈키 기이치로 : 

영안차 운전수라는 독특한 직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여자의 집착을 서늘하게 그린 소품. 약간 로얄드 달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인데, 조금 더 압축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4. 영원표묘 - 구로카와 히로유키 : 

미술상을 무대로 한 독특한 사기극으로 만화 "갤러리 페이크"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초반에 제공되는 명확한 단서를 통해 결말까지 이끌어내는 추리극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독자까지 속이는 세련된 전개와 트릭이 돋보입니다. 작가가 미대 출신의 전문가라 그런지 이야기에서 보이는 미술품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고요.

5. 지난날의 사랑 - 오사카 쓰요시 :

사립탐정이 여배우의 의뢰로 애인의 불륜 뒷조사를 한다는 내용으로, 별다른 추리적인 요소는 없지만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고 무난합니다. 베스트로 선정되기에는 지나치게 심심한게 아닌가 싶지만요.

6. 얼음설탕 - 후지모토 유키 : 

한 주부가 과거에 사라졌던 애인과 우연히 재회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점점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여성 버젼의 스텐리 엘린 단편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심리 묘사가 탁월하며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7. 야수의 기억 - 고바야시 야스미 : 

호러 스릴러의 성격을 띈 작품입니다. 다중인격의 소유자로 다른 인격일 때의 파괴적인 행동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잘 묘사하며, 추리적인 부분도 확실한 편이고 반전도 좋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속이기 위해서 전개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건 감점 요인이네요.

8. 은폐꾼 - 가스미 야스시 : 

사회적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불상사를 국가 차원에서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단체가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설정과 전개가 스티븐 킹의 "금연 주식회사"와 유사하지요. 기발한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후반 전개는 좀 뻔해서 아쉽습니다.

9. 사용중 - 노리츠키 린타로 : 

한 추리작가가 살해되었는데, 그가 생각한 추리 소설의 전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입니다. 스텐리 엘린의 작품을 인용해가며 전개되는데, 밀실 트릭에 대한 생각은 노리츠키 린타로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더욱 재미있더군요.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짧은 분량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충분히 전해주는, 단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10. 일곱통의 편지 - 아사기 마다라 : 

동거하던 남자의 어머니와 왕래한 편지로 이면에 숨겨진 살인사건이 밝혀지는 작품으로 전개도 독특하지만 추리적으로도 일품입니다.

11. 먼 창 - 이마무라 아야 :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이 불구가 된 사고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환상특급"에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소녀의 일기로만 전개되는 구성도 독특하고요. 재미도 있고 후반부의 아버지의 일기에서 밝혀지는 진상도 좋습니다. 다만 결말이 예측 가능하다는건 단점이에요.

2권 

시효를 기다리는 여자 - 니이츠 키요미 :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직전 진범의 심리와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작품. 독자를 속이는 소설만의 효과로서 이루어진 트릭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반전과 결말은 수긍하기 조금 어렵더군요.

부하 - 곤노 빈 : 

부하를 믿고 신뢰한 경부보가 방화범을 잡는다는 내용의, 인간 드라마와 추리물이 잘 섞여 있는 소품입니다.

흉소면 - 기타모리 코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 처럼 대학의 민속학자가 한 고택의 오래된 가면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본격 추리물입니다. 트릭과 전개도 깔끔하지만, 무엇보다도 단편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범인의 동기까지 설득력있게 등장하는게 마음에 듭니다.

독점 인터뷰 - 노자와 히사시 : 

유괴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약간 사회파 느낌을 전해 주는 작품입니다. 사소한 단서로 진상이 밝혀지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구성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였지만,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힌 드라마가 잘 살아있어서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석탑의 지붕 양식 - 모리 히로시 : 

사이카와와 모에 커플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하지만 둘이 탐정으로 등장하는건 아닙니다. 모에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사이카와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이야기거든요. 결국 정답은 집사가 맞춰버린다는 "흑거미 클럽"과 유사한 결말도 독특하고요.
그러나 고대 인도의 수수께끼의 석탑 지붕 양식에 관한 수수께끼라는 설정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개중 설득력 있는 것"이라는 결말은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명성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출범 - 와카다케 나나미 : 

메이지시대를 무대로 천방지축 아가씨의 탈출 계획을 막는 하녀의 기지가 발휘되는 소품입니다. 일본어를 이용한 트릭이 하나 등장하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에요. 유쾌한 분위기는 즐거웠지만요.

까마귀의 계시 - 우타노 쇼고 : 

동네 쓰레기를 마당에 모아놓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사건 자체가 백만분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만 뺀다면,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전개도 깔끔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생환자 - 츠부라야 나츠키 : 

산악 경비대 대장을 주인공으로, 산에서 발생한 알 수 없는 프로 등산인의 추락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재와 설정이 독특하며 등산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별로 평가할 건덕지가 없었어요.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 -니카이도 레이토 : 

사람들이 식사 대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장소인 "독서 레스토랑"을 무대로 주인공 가스케가 건방진 싸구려 평론가 고토쿠를 추리소설 품평 내기를 통해 혼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서 레스토랑과 추리소설 품평 내기라는 설정도 참신하고, 등장하는 방대한 추리 작품에 대한 지식도 상세한데다가 무엇보다 유쾌한 꽁트 분위기가 즐거웠던 작품입니다. 작가가 평론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엿보이는 점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전개는 로얄드 달의 "맛"에서의 포도주 맞추기 게임과 거의 유사해서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트릭도 추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문제가 많고요. 여러모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1/10/31

철의 선율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3점

타쿠야는 여동생과 절친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살인 사건을 목격한 뒤, 사건의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친구 에디가 속한 마피아 조직 아르바니 가문의 청부였고, 타쿠야는 에디에 의해 양팔을 잃고 버려졌다. 그러나 타쿠야는 초능력을 이용해 강철 의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얻은 뒤 복수를 시작한다...

표제작 중편 외에도 서스펜스 심리 멜로 "하얀 환영"과 타임슬립 로맨스 "레볼루션"이 실려 있는 데즈카 오사무 만화전집 문고본입니다. 우연찮게 구해서 읽게 되었네요. 

표제작인 "철의 선율"은 근래 "풀어헤드 코코"의 작가 요네하라 히데유키가 장편인 "다이몬즈"로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사실 별 기대를 한 것은 아닌데 상당히 괜찮더군요. 표지만 보면 초인물 같은데, 의외로 하드하고 진지한 복수극입니다. 복수를 위해 강철 의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익혔지만, 의수가 타쿠야의 무의식 깊은 곳의 지시까지 받아들여 걷잡을 수 없이 살육을 펼친다는 아이디어가 무척 좋아요. 이 아이디어를 극대화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모두를 증오한다고 절규하는 타쿠야와 그를 둘러싼 에디, 경찰들의 뒤로 의수가 기어오는데 와, 정말 대단했습니다. 조금 설정을 더 보여주고 이야기의 밀도가 깊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 특히 에디의 개심은 이해가 잘 되지 않음 - 은 있지만, 지금도 먹힐 만한 멋진 복수극입니다. 

이어지는 두 편의 단편 중 첫 번째인 "하얀 환영"은 조난 사건에 휩쓸린 여주인공이 연인 노리오의 마지막 순간을 망막 속에 새긴 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로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 즉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의 각막을 이식받은 소녀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각막 속에 뭔가 새겨진다는 측면에서 말이죠. 그러나 우직한 분위기와 결말까지 깔끔했던 "블랙잭"에 비하면 초반부의 심리 서스펜스 분위기에서 순애물로의 전환이 너무 급작스러운 등 전개면에서 어설프고 너무 뻔한 느낌이 드는 등 많이 부족했습니다. 마지막 여운을 남기는 엔딩 정도만 괜찮았어요. 여러모로 평작 수준에서는 살짝 아래입니다.

마지막 작품 "레볼루션"도 소품입니다. 중상을 입은 아내 야스에가 정신이 든 뒤, 자신은 홋타 미치코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영혼 타임슬립물이지요. 그려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전공투 시대를 암시케 하는 몇몇 설정이 눈에 뜨입니다. 암울한 미래관도 뭔가 전공투 시대를 떠오르게 하고요. 그러나 딱히 새롭거나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몇몇 장면은 독특했지만, 주인공이 그 고생을 하고도 아기의 이름을 테츠지라고 짓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 등 허술한 점도 많은 편입니다. 역시나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이렇듯 평범한 소품들이 감점 대상이기는 하나 핵심 중편 "철의 선율"이 시대를 넘어 지금도 재미와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근래 개작(리메이크)된 것이 이해가 됩니다. 개작된 작품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증오의 감정으로 현실을 초월한다"가 갈수록 희석되어 뻔한 이능력 배틀물이 되어버린 탓에 읽다가 포기하기는 했지만...

2012/01/31

살해하는 운명카드 - 윤현승 : 별점 3.5점

살해하는 운명카드 - 8점 윤현승 지음/새파란상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0대 초반에 이미 십억 가까운 빚을 지고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루저 종민의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모종의 게임을 제안하며, 게임의 승자가 되면 거액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게임에 참가한 종민과 알 수 없는 다른 4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잭 - 킹 - 조커 - 에이스 -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한 장씩의 '운명카드'를 받아들었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운명카드에 적힌 운명을 거스르면 되는데, 잭 종민에게 주어진 운명은 "누군가를 살해할 운명!"

이 작품은 불특정한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을 다룬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입니다. 제가 접해본 이런 류의 작품만 해도 한 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을 정도로 흔한 설정이기도 하죠. 이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큐브"에서부터 시작해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등 수많은 작품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장르물에서 핵심 요소는 얼마나 게임이 합리적이고 재미있게 구성되었는지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운 설정이니, 게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는 조건도 충족해야 합니다. 독자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난해한 수학 공식같은게 난무하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게임 자체는 간단하지만, 규칙이 공정하게 짜여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또한, 게임의 규칙을 설명할 때 중요해 보였던 것들 - 언제든 나갈 수 있음 / 상대방에 대해 묻지 말 것 / 운명 카드를 보여주거나 강제로 보지 말 것 -보다,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 식사 시간을 반드시 지킬 것 / 반드시 포커 게임에 참가할 것 / 돈을 어떻게 받아갈지 정할 것 -이 더 중요한 규칙이었다는 의외성도 돋보였고요.

게임의 규칙과 중간중간 탈락하거나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정교하게 엮이는 전개도 훌륭하며, 서스펜스와 스릴도 굉장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는 데 2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곳곳에 헛점도 많습니다. 에이스의 무리한, 합리성을 잃은 배팅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킹은 본인이 조심만 했어도 "살해당한다"는 운명을 거스르기 가장 쉬운 존재였다는 점 등이 그렇죠.

무엇보다도 퀸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해서 돈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정말 말이 안 됩니다. 20억이면 충분했을 텐데 100억이라니? 거기에 에이스가 종민의 운명카드를 우연히 보게 된 뒤 퀸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는 전제가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더러(숟가락을 이용한 공작이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참가자들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루 만에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는 점 등은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조커를 구태여 자살로 위장하려 했던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요. 마지막 종민의 상황 역시 충분히 정당방위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를 위해 억지로 몰아간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구성이 나름 신경 써서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종민은 다른 사람들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릴 적 저지른 작은 실수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루저로 묘사되는데, 아무리 봐도 주인공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서 갑자기 의외의 행동력을 발휘하는 전개가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뭔가 인연이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접해왔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 중에서도 재미 하나만 놓고 본다면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추리 요소가 적다는 단점은 있지만, 에이스의 광기 어린 행동과 종민의 심리 묘사 등이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높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설정과 앞서 언급한 단점들 때문에 최고점을 주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건투를 빕니다.

덧: 좋은 추리소설 소개로 자주 방문하는 카구라님 블로그에서 리뷰를 보고 읽게 된 책인데, 카구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소개가 없었다면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립니다!

2020/12/25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3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루스 렌델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중심의 단편집입니다.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몰입,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상은 열쇠, 시계, 저택과 같은 사물도 있고, 여장이나 동물로 변장하는 등의 독특한 취미도 있지요. 주인공들은 결국 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되는데, 파국을 맞는 장면이 마지막 몇 줄로 정리되는 반전 묘미가 빼어난 작품이 많습니다. 등골 서늘한 반전을 짤막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 장르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교하게 계획된 범죄가 등장하는 "휘파람 부는 남자"와 "늪지 저택, 펜 홀"은 등장 인물들 심리와 주변 배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조금 뒤처진 느낌도 들고, 반전도 뻔한 작품들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표제작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겠지요. "헤어가 살던 집", "아버지의 날" 등도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뻔하더라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구성과 전개, 묘사가 빼어나서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닌 거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남성 공포증이 있는 여자와 장난삼아 여장을 즐긴 남자가 겪는 파국을 그린 작품.

원제는 The New Girlfriend인데, 영화 때문에 제목이 바뀐걸가요? 여튼 여장한 데이빗을 진짜 여자로 생각하는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볼거리였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데이빗이 크리스틴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로 돌아오자,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남편 외 남성에 대해 갖는 혐오가 앞서서 상세하게 설명된 탓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더군요. 저는 영화 결말보다는 원작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푸른 히아신스 향기" 

아내 캐서린이 불륜 뒤 임신하자 이혼하고 40년간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캐서린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건 알고보니 그녀의 딸이었다.

남자가 캐서린에게 집착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일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살의와 살인이라는 직접적 행위가 설명되고요. 죽인 여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그녀의 딸이었다는 반전 역시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과수원 울타리"

나는 공습을 피해 엘라 이모가 사는 인치필드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엘라 이모가 남편이 징집된 틈에 병가를 받고 돌아온 조종사 데니스 클리프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밤에 총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에 매달린 허수아비를 데니스 클리프턴의 시체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킨 뒤 런던으로 쫓겨났다. 엘라 이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에서 머리에 산탄총을 맞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작품도 '나'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작품입니다. 또 어린 시절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려내는 영국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도 좋고요.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불륜으로 긴장감을 싹 틔우고, 이를 목 매달린 시체 (허수아비)로 터트리는 전개도 거장답습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마지막 반전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발견된 유골은 데니스 클리프턴일겁니다. 그렇지만 데니스 클리프턴은 전시에 병가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실종된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륜을 알고 입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전시라는 상황이면 문제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헤어가 살던 집"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싸게 나온 집을 구입한 노먼은 아내 리타와 함께 이사왔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속 신경을 쓰던 노먼과 리타는 욕실 창문이 자꾸 열리는걸 가지고 다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타를 거의 죽일 뻔 한 노먼은 다시 이사를 마음먹은 뒤, 헤어 사건이 알고보니 자기와 같이 욕실 창문이 열린 탓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이 쌓이면 사소한 일로 살의가 폭발하는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일상 속 이야기처럼 그려내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살의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네요. 일상 속 사소한 문제로 폭발한 살의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했습니다. 별다른 반전도 없고요. 창문 문제가 살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걸 이웃은 알고 있던걸로 보이는데, 이웃에 대해서 반전 형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뇌물과 부패" 

니컬러스는 여자에게 홀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엄청난 덤터기를 쓸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해고했던 아버지 회사의 보스 소렌슨이 식사비를 대신 지불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렌슨이 아내가 아닌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걸 목격했던 탓으로 여긴 니컬러스는 식사비를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소렌슨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니컬러스를 협박범, 그리고 바보 취급을 할 뿐이었다.

며칠 뒤, 소렌슨의 아내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렌슨은 식당에서 그를 목격했던 니컬러스만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자존심만큼은 갖춘 니컬러스가 펼치는, 자신을 무시했던 소렌슨에 대한 복수극입니다. 독자가 니컬러스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니컬러스가 울분을 쌓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 전개가 돋보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빌드업'이 완벽해요. 이러한 빌드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니컬러스의 한 마디, "보지 못했습니다. 절대로요."가 작품의 백미고요. 소시민의 잔혹 복수극이자 일상계라는 독특한 작품의 정체성도 인상적입니다.

식당에서 소렌슨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은 아쉽지만, 그 외에는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휘파람 부는 남자"

매뉴얼 밑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는 제레미는 영국인 불법 체류자이자 좀도둑으로, 일하던 중 모르는 집 열쇠를 줍게 되었다. 이 집을 털어서 인생 역전을 꿈꾼 제레미는 집 열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은 매뉴얼의 본가였고, 잽싸게 도망치던 제레미는 이 모든게 매뉴얼의 복수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이 결혼할 여자인 루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쿠바 이민자가 영국인 좀도둑을 가지고 놀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몇 줄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완성되는, 오 헨리 스타일의 반전물이기도 하고요. 반전을 통해 매뉴얼이 이상하게 돈이 많았다는 복선도 회수되지요. 

개인적으로는 호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영국인 제레미가 죗값을 치룬다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밉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력은 정말이지 부럽네요.

그런데 제레미가 집을 터는 동안, 제레미 짐 속에 마약을 숨긴 뒤 세관에서 걸리게 만든것 자체는 엄청난 복수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레미가 집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물론 매뉴얼은 다른 복수를 준비했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나팔꽃 시계" 

트릭시는 데본셔에 사는 친구 시빌에게 놀러갔다가 그곳 갤러리인 아티팩트에서 충동적으로 나팔꽃 시계를 훔쳤다. 시계는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고, 시계를 알아본 친구 미비마저 사고를 위장해 살해했다. 시계를 몰래 돌려 놓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트릭시는 순간적 광기로 시계를 부숴버리는데....

특정 물건에 대한 충동적인 집착이 파국을 불러온다는 심리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이 노인이며, 시계 때문에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파국이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일상계 속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트릭시가 "똑딱똑딱, 나팔꽃 시계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도 대단했어요. 그녀 정신이 붕괴했다는걸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탈" 

'나'는 임박한 결혼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연극에 쓰는 늑대탈을 쓰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걸 알아챘다. 같은 취미를 숨기고 살던 어머니와 함께 하게 되자, 늑대탈을 쓰는 행위와 늑대가 될 때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던 행위는 점점 폭주하게 되었다. 마침내 약혼녀 모이라가 양가죽 외투를 입고 찾아온 날, 야생동물 두 마리가 양을 덮치고 만다....

두 마리의 야생 동물이 바닥에 쓰러진 양을 덮쳤다는 것이다. 는 마지막 문구는 섬뜩했습니다. 전형적인 '기묘한 맛'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이라를 먹은 건지도 살짝 궁금해지고요.

그러나 정신병자가 쓰는 글이라는걸 계속 알려주고, 늑대탈을 쓰면 늑대가 된다는 행동 묘사가 상세해서 반전의 묘미는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신선함도 부족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늪지 저택, 펜 홀" 

프링글과 친구들은 아버지 친구 리던 씨가 사는 늪지 저택 펜 홀 근처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리던 씨는 저택 관리를 위해 모든걸 걸었지만 돈과 인력,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리던 씨 아내 플로라는 저택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물건에만 집착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쓰레기장같아 보였다.
태풍이 불어 포퓰러 나무가 쓰러진 다음날, 나무 구덩이에서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좋아하는 플로라는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리던 씨가 해체하던 쓰러진 나무가 구덩이로 떨어져 그녀는 깔려 죽고 마는데...

서로 다른걸 원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당연히 남편이 사고처럼 위장해서 저지른 범행이고요. 이렇게 내용은 굉장히 뻔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린 아이인 프링글 시점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묘사만큼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직접적으로 죽이는걸 본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묘사하는 식이거든요. 

그리고 본 편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늪지 저택 펜 홀과 숲에 대한 묘사가 훨씬 굉장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작나무 줄기는 은색, 너도밤나무는 백랍색, 플라타너스는 회색과 노란색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굉장히 상세하면서도 맛깔나는 묘사였어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의 날" 

테디는 처제 가족과 그리스 섬으로 여행왔다. 처제의 남편 마이클은 아내 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떠나는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아내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절벽에 떨어질뻔했던 테디와 아내 앤의 사고를 묘사하여 이어지는 사고와 연결시키는 전개는 너무 뻔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였달까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지만 이혼이 만연한 세상에 두려워하는 마이클의 강박증 설정은 괜찮았지만, 테디 시점에서 묘사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못한 것도 아쉽고요. 더 광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면 했는데, 지금의 작품은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탓에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케판다로 가는 초록길" 

나는 인기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 아서 케스트렐과 친구였다. 그러나 그가 발표했던 15권에 달하는 '칼리나스 연대기'는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베스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서는 어느날 '나'에게 런던 외곽선이 폐쇄되고 생긴 아름다운 산책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 그가 이야기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서는 혹독한 비평이 신문에 실린 뒤 자살을 택했다. 바로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아서를 찾아왔다가 귀가하던 중 아서가 이야기했던 산책로를 발견하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들이 꿈 꿔볼만한 일종의 판타지 작품.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쓴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서가 만들어낸 산책로의 아름다운 묘사가 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비교할 때 극적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6/06/23

십자 저택의 피에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십자 저택의 피에로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즈호는 이모 요리코의 급작스러운 자살 사건 이후, 1주기를 맞아 다케미야가(家)의 십자 저택을 찾았다. 그러나 1주기 다음날 그녀와 다케미야 가족, 그리고 손님들 앞에 현재 다케미야 산업 사장인 무네히코와 정부 미타 리에코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미즈호는 새벽에 깨었을 때 발견했던 단추가 현장에서 조작된 것 등으로 집안 사람 중 누군가 범인일 것으로 의심하고, 마침 누군가의 공작으로 다케미야 산업의 이사인 가쓰유키가 범인으로 밝혀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 작품으로, 34살 때 발표한 비교적 초기작이지요. 정통 본격물로 독자에게 정정당당히 승부를 거는 내용, 인형사 고조라는 독특한 캐릭터 및 피에로 시점의 묘사가 들어가는 등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에서 확실히 젊은 작가의 패기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과 시도는 작품에 좋게 작용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우선 설정과 트릭 모두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이 큽니다. 본격물 대부분이 작위적이긴 하지만, 십자 저택이라는 공간은 아무리 봐도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티가 물씬 납니다. 공들인 설정일 수는 있지만 흔하게 볼 수 없는 구조인 탓에, 이를 활용한 트릭이 있으리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리고 인형과 인형사의 등장은 뜬금없습니다. 요리코 자살 사건 당시 장식장의 인형을 피에로 인형으로 바꿔치기한 이유, 인형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문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건 잘 설명되지만 이 정도 역할을 위해 "비극을 부른다"는 인형, 정체불명의 인형사를 등장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장식장에 인형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좌우 대칭인 소품은 화분 등이라도 무방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인형사 고조에게 만화 같은 기묘한 캐릭터성을 부여한건 유치했습니다. 피에로 시점의 묘사 역시 독특하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건 마찬가지고요.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고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추가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괜히 복잡해지기만 했어요.

미치코와 고조 두 명이 아니, 중간에 살해당하는 아오에마저 탐정이니 무려 세 명이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전개도 좋지 않습니다. 상호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동일한 정보를 제공받아(아오에의 단서 포함) 동일한 결론에 이르는 탓입니다. "W의 비극"처럼 외부인에 가까운 미치코 혼자 탐정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깔끔했을 겁니다. 진짜 사건의 핵심인 가오리의 역할만 고조의 입으로 설명되는데, 미치코만 단독물로 쓰였더라도 전개에 문제는 없었을 거예요. 덧붙이자면 중간에 진상을 파악한 탐정역 (사람들이 싫어하는)이 살해당하고 다른 인물이 뒤를 이어받는다는 전개는 크리스티 여사의 "누명"이 떠오르는데, 차라리 "누명"처럼 심리 서스펜스 분위기로 끌고가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네요.

그 외의 디테일들, 초중반 상자가 찢어진 것을 발견한 경찰의 수색, 무네히코가 마술책에 메모를 남긴 것, 나가시마가 리에코의 집에 침입해 워드프로세서의 리본을 교체하는 것 등 모두 지나치게 편의적입니다. 요리코로 분장한 미타 리에코의 지문이 인형에 묻어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되리라는 생각도 안 들고요. 심하지는 않다고 해도 막장 재벌 가문의 설정도 너무 진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년탐정 김전일"의 초기 연재 에피소드와 유사한 설정, 트릭도 거슬린 부분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1989년에 발표되었고 "김전일"은 1992년 이후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허나 "김전일"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어려워요. 예를 들어 어머니를 농락하고 버려 힘들게 살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는 "이인관촌 살인 사건"과 유사합니다. 타 작품에서도 흔하게 쓰였지만 범인의 심리는 왠지 모르게 비슷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를 살해하는 극한 심리를 보여준 "이인관촌 살인 사건" 쪽이 설득력 측면에서는 한 수 위였습니다.
십자 저택의 구조를 활용한 거울 트릭도 "학원 7대 불가사의 사건"과 거의 동일한데, 사용된 소품과 방법 모두 "학원 7대 불가사의 사건"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는건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건질 게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가 있는 다케미야 가오리의 나가시마에 대한 집착은 아주 인상적이에요.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난 뒤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나가시마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인데 여성 심리 묘사에 탁월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솜씨가 더해져 상당히 섬찟하게 다가옵니다.

범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즈카 할머니와 가정부 스즈에 아주머니를 통해 증거가 조작되어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된다는 초반 전개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통 본격물답게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미덕 역시 잘 살아 있습니다. 읽는 재미도 작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수준이고요.

허나 단점이 많아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 없는 범작입니다.
여러모로 욕심이 너무 과했다는 느낌입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내고 보다 깔끔하게 정리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2017/10/22

걸 온 더 트레인 - 폴라 호킨스 / 이영아 : 별점 2점

걸 온 더 트레인 - 4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임으로 인한 알콜 중독 탓에 이혼과 퇴사로 인생이 엉망이 된 레이첼에게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정차하는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이첼은 부부 중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가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인어 다크, 다크 우드"와 동일한, 요새 유행하는 1인칭 시점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영화화되었다는데, 영화화될 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전해줍니다. 사라진 메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 계속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전개 덕분입니다. 이 중 메건이 실종된 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의 기억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특히나 일품이에요. 레이첼이 메건을 죽인걸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이러한 전개가 모두 3명의 여성 - 레이첼, 메건, 애나 -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교차되는 전개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읽은 이런 류의 전개 방식은 보통 서술 트릭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 작품은 애나가 톰이 거짓말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 애나가 톰이 숨겨둔 전화기를 찾아내는 장면 등 레이첼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을 보강해주는 장치로서, 또 톰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이유에 대해 레이첼에게 한 말과 애나 시점의 심리 묘사가 반대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첼은 모르지만 독자에게만 해당 정보를 살짝 알려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등 정직하게 전개를 위해서만 사용해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레이첼이 메건을 엿보며 "제스"라고 혼자 부르다가 갑자기 "메건" 시점으로 넘어올 때의 기묘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아울러 "일상계" 느낌이 가득하다는 독특함 역시 큰 장점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현 상태만 보면 오히려 그 이하)인 레이첼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좌석의 기차를 타면서 똑같이 정차 하는 곳의 집을 쳐다보다가 사건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설정부터 아주 매력적이지요. 게다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사소한 사항에 불과했고, 사건의 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는 진상도 마음에 들고요. 우연히 찍은 사진에 거대 조직의 음모가 담겼다! 이런 것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범죄 스릴러냐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는데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리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작 중 레이첼이 벌이는 일종의 탐정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밝혀질 뿐이에요. 단지 메건 사건 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씩의 비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비밀들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메건의 비밀은 비교적 초반, 즉 심리치료사 카말과 면담 때 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철없을 때 낳았던 딸을 부주의로 잃었다는건데, 이걸 아는 사람은 헤어진 아이 아빠 맥 밖에 없으므로 본 사건과 관계가 있을리 없으며, 심리치료사 카말이 이 것을 안다고 해도 딱히 뭘 할 리가 없지요.
레이첼이 술을 마시는 이유? 불임 때문에 알콜 중독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톰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역시 본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요. 

톰이 진범임이 드러나는 장면도 황당합니다. 메건 시점으로도 작품이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메건 시점의 마지막 날 범인은 밝혀지게 됩니다. 때문에 최대한 레이첼, 애나 시점에서 범인을 제대로 드러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정교한 맛이 없어서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결정적 단서는 애나가 우연찮게 발견한 톰의 또다른 휴대전화가 전부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왜 휴대전화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톰이 뜬금없이 둘 앞에서 "내가 범인이야. 놀랐지?"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이는 "톰은 거짓말을 잘한다"를 드러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범인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 탓이 큽니다. 레이첼이 필름이 끊겼을 때 톰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요.
이럴 바에야 레이첼 1인칭 시점으로만 작품을 전개하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메건과 애나 시점의 전개는 실상 본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장황한 묘사로 페이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레이첼 시점의 묘사가 너무 많은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고, 이혼에 대해 자책하고 항상 알콜 중독을 의식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도피처를 찾는 묘사들로 솔직히 짜증 났어요. 무능력한데다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오지랖은 넓어서 쓰잘데 없는 사건에 뛰어들어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 자체니까요. 경찰 라일리가 그녀를 못견뎌하는게 충분히 이해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 역할도 불가능한 인물이 탐정역을 한다? 어불성설도 유분수여야지요.
레이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 모두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에요. 메건? 남편 덕에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바람을 피면서 사람 가지고 노는게 취미인 유부녀로,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해요. 카말은 자신의 환자와 바람을 피는 부도덕한 심리치료사, 스콧은 의처증 가득한 정신병자, 톰은 거짓말을 일삼는 살인자라는 점에서요.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 애나, 그리고 "좋은 사람"은 레이첼의 친구 캐리가 유일할 정도로 작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아, 캐리는 거의 마더 테레사 수준입니다).

또 최근 접했던 이런 류의 여성 1인칭 시점의 스릴러물의 대부분이 "아이"와 "임신"이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도가 지나칩니다. 레이첼이 알콜 중독이 된 이유는 그녀의 불임이고, 톰과 애나의 불륜과 재혼은 애나의 임신 때문이고, 메건의 불면증의 원인은 그녀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탓이고, 메건이 살해당한 이유는 톰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고.... 모든 사건이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는 그럭저럭인데, 최근 유행(?)에 편승한 작품으로 딱히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말이죠.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걸"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제목이 "걸 온 더 트레인" 일까요? 이 역시 미스테리입니다...

2016/04/01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코넬 울리치 / 이은경 : 별점 2.5점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6점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단숨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 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미모의 여인을 구했다. 그녀 진 레이드는 아버지 할란 레이드가 기묘한 예지 능력자 톰킨스에게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삶이 지옥에 빠진 탓에 자살하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숀은 그녀를 돕기 위해 상관 맥마너스에게 사건을 보고했고, 맥마너스는 여러 부하들을 선발해 사건의 뒤에 숨은 진상을 밝혀내려 하는데....

우리 모두 혼자야. 우리들 모두 각자라고. - 톰킨스. 아버지의 삶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예언을 들은 진이 아버지가 혼자여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자 하는 말.

윌리엄 아이리쉬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한 코넬 울리히(울리치)의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전통적인 하드보일드와는 거리를 둔, 그야말로 "느와르"라고 할만한 작품입니다.

대표작에 걸맞게 작가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1차원적인 폭력적인 묘사는 거의 전무하며, 감성을 자극하는 특유의 묘사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섬찟하게 만드는 심리 서스펜스 중심이라는 점에서요. 특히 어둠에 대한 공포심을 그리는 묘사가 압권입니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제목이 좋은 예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눈에 비유하여, 밤을 두려워하는 여인의 심리를 묘사했는데 정말 멋드러진 글이라 생각됩니다.

시대를 앞서간 오컬트 설정, 즉 톰킨스가 정말로 예지 능력자였다는 것도 볼거리에요. 초반에 진과 레이드 부녀가 그의 기묘한 예언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톰킨스는 부녀에게 기묘한 예언 - "무릎에 다이아몬드 시계를 찬 저녁 만찬 손님들에게, 주식 중개인에게, 그리고 주식 매입을 위해 어서 돌아가시오. 그리고 가는 길에 어떤 여자아이를 부딪쳐 쓰러뜨리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 을 남기는데 그 예언이 하나씩 사실로 판명되죠. 아주 놀라우면서도 독자를 사로잡는 부분이었어요. 무릎에 다이아몬드 시계를 찬 이유는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그리고 2부에서 예언을 사건으로 처리하려 하는 맥마너스의 지시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활약과 이에 따른 전개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당신은 사자의 아가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요."라는 레이드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토대로 사자에 대해 조사할 것을 부하 한명에게 지시하는데, 실제로 서커스 사자가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식이거든요. 심지어 이 사건은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려 한 범죄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요!

사건이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레이드의 재산을 노린 음모가 얽혀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톰킨스 집 근처에 잠복한 두 명의 형사에 의해 밝혀지는데, 이렇게 예언에 관련된 사건의 또 다른 진상이 밝혀지는건 정통 수사물을 보는 맛도 제법 느껴졌습니다. 그만큼 잘 짜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오래된 탓일텐데 지금 읽기에는 묘사가 너무 장황하고 지루한 감이 크다는 단점은 큽니다. 맛있는 것도 너무 많이 먹으면 물리듯 아무리 좋은 묘사라도 끝도 없이 이어지니 지루했습니다. 이런 장황한 묘사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예를 들자면 진이 밤을 두려워한다는 설정을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기에 하루하루, 일분일분이 소중할 수는 있지만 딱히 밤이 두려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는 건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잖아요? 차라리 시계를 무섭다고 하던가. 이런 설정과 묘사는 다소 공허함을 남깁니다.
그리고 2부의 내용 대부분은 몇 시간 남지 않은 삶으로 괴로워하는 레이드, 그리고 그를 보며 괴로워하는 진과 숀에 대한 묘사로 채우는데, 이렇게까지 절대적으로 절망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의 기묘한 저녁 만찬과 룰렛 도박은 뜬금없기 그지없었고요. 그야말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가 팍팍 났달까요?

무엇보다 마지막은 정말 최악입니다. 자정이 되자 레이드가 착란을 일으켜 사자가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다는건 너무 편의주의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기억상실 설정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저택 입구의 사자상이나 스테인드글라스를 써먹어 레이드를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충 마무리할거라곤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최소한 외부에서의 공격, 예를 들어 음모를 꾸민 월터 마이어스가 톰킨스와의 만남 이후 저택에 침입하여 레이드를 살해하려 한다는 정도의 장치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덧붙여,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톰킨스의 예지 능력이 사실이었다는 설정은 조금 허무했습니다. 예지한 것들이 인간의 힘으로 조작하기 어려운 것들이 존재하기에 (대표적인 것이 무릎에 다이아몬드 시계를 차는 것이겠죠) 당연했지만, 이 탓에 서스펜스 스릴러라기보다는 오컬트 호러에 가까와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가 마이어스에게 휘둘린다는 것도 말도 안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거장의 대표작으로 "느와르"가 무엇인지 한껏 느낄 수 있긴 합니다만 지금 읽기에 지루한 부분이 많기에 감점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0/05/06

줄어드는 남자 - 리처드 매드슨 / 조영학 : 별점은 2.5점이지만 표제작은 3점

줄어드는 남자 - 6점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리처드 매드슨의 장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장편 "줄어드는 남자"와 9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원래의 판본도 이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편 한편에 단편이 덧붙여진 구성이 상당히 독특합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줄어드는 남자"
이유를 알 수 없이 하루에 0.36cm미터씩 줄어드는 주인공 스콧에 대한 이야기. 줄어드는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정통 SF라기보다는 서스펜스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고독한 한 남자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대표작 "나는 전설이다"를 연상케 하니까요.

작품은 스콧이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자괴감,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무력감과 싸워나가는 이야기와 완전히 줄어든 이후 지하실에서 갇힌 채 먹고 사는 본능적 욕구와 더불어 그를 노리는 거미와 사투하는 이야기 두 개가 교차하여 전개됩니다.
이 중 줄어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성장 드라마같은 느낌이 강하고, 주인공의 히스테리도 거북스러워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성에 대한 집착도 현실적일 수는 있지만, 광기가 더욱 두드러지는게 별로였고요.
하지만 지하실에 갇힌 뒤 물을 구하고 먹을 것을 마련하면서 거미와 싸워나가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사투의 묘사가 대단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스콧에게 닥치는 위험과 공포에 대한 묘사가 압도적이고, 그에 맞서는 스콧의 영웅적 행동에는 몰입할 수 밖에 없었기에 크기가 "0"이 되는 순간부터 다시 조금씩 성장한다는 해피엔딩 결말을 바랬지만 예상외로 결국 "무" 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이른바 마이너스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마무리는 좀 의외였습니다. 주인공 괴롭히기를(?) 즐기는 작가 성향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결말일 수도 있겠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잔 리쓰고우 주연의 "환상특급" 영화판 에피소드로 유명한 단편이죠. TV로 봤던 것 같은데 원작을 보니 새롭네요. '비행 공포증'에 '나만 보이는 귀신'이라는 테마를 더해 어마어마한 심리 묘사를 뽑아내고 있습니다. 영화 "식스센스"에서 주인공 꼬마가 다락방에 갇힌 뒤 경기를 일으키며 울부짖던 장면의 심리 묘사가 소설로 쓰여졌다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시험"
미래의 합법적인 고려장 제도를 다루고 있는 서늘한 단편입니다. 어딘가의 다른 앤솔로지에서 본 적이 있는, 아이들을 일정 나이에 테스트해서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을 걸러낸다는 단편이 떠올랐어요. 정 반대의 설정이긴 하지만...
어쨌건 아버지를 거추장스러워하면서도 걱정하는 아들의 처절한 심리 묘사는 역시나 일품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사람들의 죽음의 순간을 모두 알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단편.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장르조차 짐작이 안 갑니다. 차라리 직업이 저승사자였다는 결말은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별점은 1.5점.

"몽타주"
한 소설가 지망생이 영화를 보고 인생을 압축해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소원한 뒤, 흡사 영화와 같은 85분동안의 압축된 인생을 산다는 이야기. 아이디어는 재미있지만 이야기 전개는 결말까지 별로 새로울게 없어서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2점.

덧붙이자면 "몽타주"는 영화 용어로는 쇼트와 쇼트를 이어붙여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지요. 이는 작품 내용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제목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배달"
한 마을에 이사온 불청객이 편지 등을 이용하여 딱 2개월만에 이웃들을 작살내 버린다는 이야기. 다른 앤솔로지에서 보았던, 한 존경받는 노부인이 사실은 마을의 소문을 이용하여 불화를 일으키는 편지를 보내는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물론 조금 더 하드하고 과격하긴 합니다만... 그런데 흥미진진한 과정에 비한다면 불화를 일으키는 작전이 별로 치밀해 보이지 않는 등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예약손님"
부두교를 이용한 악덕상인(?)이 등장하는 아주아주 짤막한 단편. 재미있긴한데 반전이 예상대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버튼, 버튼"
이전 리뷰 참고하세요.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초창기 영화의 원작. 트럭 운전사와의 신경전에서 촉발된 죽음의 레이스에 대한 이야기로 서스펜스가 넘치는 걸작입니다. 사실 영화는 좀 지루한 감도 있었는데, 단편 길이가 딱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다른 앤솔러지에서 "2차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작품을 읽었을 때에는 상당히 별로였었던 기억이 납니다. 번역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파리지옥"
사업과 인생에 짜증만 남은 중년 남자가 파리 한 마리를 잡으려다 분노가 폭발한다는 일상계(?) 단편. 파리를 잡으려는 행위에서 발전하는 심리 묘사가 너무 극단적이라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폭발력 하나만큼은 대단했어요. 묘사력 때문에라도 별점은 2.5점입니다.

전부해서 총점은 24점으로 9로 나누면 (10작품인데 "버튼, 버튼"은 이전에 리뷰하였기에 뺐습니다) 2.6666666..... 이니 평균은 2.5점. 하지만 표제작이자 제일 긴 장편인 "줄어드는 남자"는 별점 3점은 충분한 괜찮은 작품이었어요.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작가를 좋아하신다면, 쟝르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08/09/24

도쿄겐지 이야기 - 아기 타다시 : 별점 2점

도쿄겐지 이야기 - 4점
아기타다시 지음/서울문화사

Act 1 나비의 장송 :
어렸을때부터 친구와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등 주위에 죽음을 몰고다니는 겐지 (별명). 그녀는 자신의 메일 친구인 아게하의 남자친구로부터 그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Act 2 사신의 키스 :
친구 린과 함께 인기 그룹 "기요틴"의 라이브를 찾아간 겐지는 "기요틴"의 보컬 토우야의 목소리에서 묘한 기지감 (旣知感)을 느끼게 된다. 토우야의 초대로 자리를 함께 하지만 먼저 자리를 뜬 겐지는 토우야를 제외한 기요틴 멤버들에게 연락을 받고 린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Act 3 장미의 낙인 :
메일 친구 유리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만난 겐지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언니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Act 4 냉혈의 론도 :
연쇄 강도 살인사건이 발생하던 와중의 어느날, 겐지는 후배 쥰을 우연히 만나고 그가 자신의 애인을 소개해 주는 자리에 따라가게 된다.

Act 5 만화경의 개미 :
후배 쥰이 주워온 만화경을 보던 겐지는 갑작스럽게 과거의 사실을 알게되고, 과거 친구의 살인사건의 조사를 위해 고향을 찾아간다.


40여일만의 추리 소설 관련 포스팅입니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차에 이글루스 렛츠 리뷰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리뷰에 앞서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이글루스와 서울 문화사에 감사 드립니다.

이 책은 "신의 물방울" 로 국내에서의 지명도를 크게 높인 만화 원작가 아기 타다시(필명)의 소설입니다. 추리 애호가들에게는 김전일의 원작가 "아마기 세이마루 (필명)" 으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죠. 총 5편의 단편이지만 서로 이어지는 일종의 연작 소설집으로 심리 서스펜스와 추리물이 뒤섞여 있습니다.

일단 만화 원작가로서의 작가의 경력을 읽으면서 계속 느낄 수 있었는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쉽고 빠르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겠죠. 1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독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머리속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음직한 묘사 방법도 괜찮았습니다. 주인공 겐지의 왜곡된 기억에 관련된 이야기는 얼마전 읽었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에 접했던 내용이라 왠지 반갑기도 했고요.

그러나 단점 역시 존재합니다. 인물 설정부터 굉장히 만화적인데 주인공 겐지의 독특한 분위기 감지 능력, 그녀의 "사신" 인 파트너 토우야가 초미소년에 천재 음악가이자 격투의 달인이라는 등의 설정이 그러하고 피해자나 용의자들의 설정 또한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더군요. 그리고 트릭들이 왠지 "그림" 에 더욱 어울릴 것 같은 것들도 많았다는 것과 그다지 참신한 트릭이나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예를 들자면 그나마 트릭이 등장하는 "Act 2 사신의 키스" 는 경찰의 첫 현장 수사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미흡했을 뿐더러 현대의 과학수사로 충분히 범행 증거를 밝혀낼 수 있는 사건으로 생각되거든요. 3번째 단편 "장미의 낙인"과 4번째 단편 "냉혈의 론도" 는 일종의 서술 트릭물로 볼 수 있긴 합니다면 별로 새로운 것도 없고, 서술트릭에 사용하기에는 서술이 부족할 정도로 짤막한 단편이라 설명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라이트 노벨과 추리물의 경계선상에 있어보이는 쉽게 읽히고 나름 자극적인 묘사가 담긴 추리 성향의 캐릭터물로, 본격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심리 스릴러로 보기에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는 알맹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겐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괜찮았는데 관련된 내용만 장편화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만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작 단편 소설로서 자립할 만한 가치를 느끼기 어렵더군요. 고어 요소를 덜어낸 "GOTH"라고 생각할 수 있는 책인데 단점 역시 비슷하네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만큼 평가가 많이 나뉠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에게는 단점 쪽이 더 눈에 들어온 책이었습니다. 비록 좋은 기회를 통해 공짜로 얻어 읽게 된 책이지만 리뷰는 냉정해야죠....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2/03

유리 감옥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김미정 : 별점 2점

유리 감옥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횡령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힌 카터는 징계를 받다가 엄지 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고 모르핀에 중독되고 말았다. 횡령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가윌의 부정을 밝혀내는게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변호사 설리번은 가윌의 뒤를 캐는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설리번의 노력은 실패했고, 카터는 교도소에서 사귄 친구 맥스가 폭동 와중에 살해되는 사건 등을 겪으며 7년 만에 가석방되어 세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석방 후, 아내 헤이즐이 설리번과 부정을 저질렀다는걸 알아챈 카터는 충동적으로 그를 살해하고 마는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야기는 끔찍했던 감옥에서의 생활과 출소 이후의 현실로 완벽하게 나뉩니다. 핵심은 이 두 공간이 카터 기준으로는 개념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요. 카터의 현실 속 주변 인물들은 모두 범죄자이며, 카터가 마음 편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는 점에서요. 카터의 말 그대로 이 세상은 거대한 감옥과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을 빼어난 심리 묘사로 그려내고 있는데, 감옥 안에서 헤이즐과 설리번의 관계를 의심하는 부분, 그리고 출소 후 범행을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는 과정에서의 카터의 심리를 그린 부분, 그리고 카터가 범행을 저지르고 가윌과 협상한 뒤, 경찰의 취조에 맞서는 장면이 특히 좋았습니다. 심리 서스펜스의 달인인 작가의 솜씨를 여실히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은 대체로 실망스럽습니다. 범행이 작위적이며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제대로 된 범죄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카터가 설리번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까지는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그 시점이 가윌이 설리번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했던 청부업자 오브라이언이 습격한 직후였다는게 문제입니다. 상식적으로 누군가 자기를 목격했는데, 바로 살인을 저지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오브라이언이 카터가 진범임을 밝히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카터와 오브라이언 모두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브라이언 혼자 증언을 뒤집는다고 그게 사실이 되는건 아니니까요. 또 오브라이언도 범행 당시 설리번을 방문했었다는 이야기니, 오브라이언이 범인으로 몰릴 여지도 높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건 협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면 괜찮았을텐데, 카터가 오브라이언마저 즉흥적으로 죽인 뒤 가윌을 협박하여 알리바이를 만든다는건 최악의 정점입니다. 카터는 가윌이 설리번을 죽이기 위해 오브라이언을 고용했고 실제로 사건 당일 오브라이언을 현장에서 목격했다고 협박하는데, 가윌은 잃을게 없습니다. 오브라이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가윌이 고용했다는걸 증명할 방법도 없고요. 오브라이언을 가윌이 고용했다는 다른 증거가 있었다면, 진작에 경찰에 체포되었을 테지요. 

카터가 '오브라이언 때문에 골머리 썩일 사람은 가윌이지 제가 아닙니다.'라고 경찰에게 말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경찰도 오브라이언이 카터가 진범이라는걸 알고 협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가윌이 골머리 썩을 일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카터가 오브라이언을 죽인 뒤, 진짜 완벽한 천재 범죄자로 거듭난다는 "리플리"스러운 결말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결과물은 억지만 남아 있는 느낌입니다.

또 읽기 힘들다는 문제도 큽니다. 감옥에 대한 여러가지 묘사는 지루하고 진부했으며, 캐릭터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인 탓입니다. 헤이즐이 자기도 힘들었다며 불륜을 정당화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 친구가 된 맥스와의 관계를 들먹이면서 정당화하는데, 맥스와 카터의 관계는 친한 직장 동료 사이와 비슷했습니다. 불륜과 비교할 이유는 없습니다. 카터의 마약 중독을 언급하며, 그 역시 잘못이 있다는 주장도 똑같습니다. 카터가 마약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정말 카터가 싫어졌다면, 이혼하면 됐습니다. 이혼하지 않는건, 감옥에 간 카터를 버리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카터가 상속받은 10만달러가 넘는 돈을 놓치기 싫었을 뿐입니다. 결국 카터가 격분해서 설리번을 죽인건 다 헤이즐 때문입니다. 두 남자를 모두 움켜쥐려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지옥에 빠져들게 만든거지요. 아들 때문에 이혼 생각을 못했다? 그 결과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생긴 것이고요.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카터가 이런 상황에 빠졌음에도 헤이즐을 어떻게든 품으려고 하는 노력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렇게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너무 많아서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리뷰를 쓰기도 힘든, 그런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짜증나는 인간 군상의 묘사가 목적이었다면, 그건 분명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재미나 가치는 딱히 찾기 어려웠던 작품이에요.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2004/01/04

유니스의 비밀 - 루스 렌들 : 별점 4점

유니스의 비밀 - 8점 루스 렌들 지음/고려원(고려원미디어)

간만에 추리소설 한권을 독파했습니다. 제목은 "유니스의 비밀", 한때 추리 매니아들의 희망이었지만 현재는 별 소식이 없는 고려원 미스터리 문고 시리즈 9번 입니다.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 이라는 나름대로 멋들어진 울림을 주는 제목인데 한국판 제목은 좀 난데 없네요. 하지만 고려원 미스터리 문고 시리즈 답게 제목을 제외하곤 전체적인 번역이 나무랄 데 없습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아무런 동기도 사전 계획도 없었다. 돈을 훔친 것도, 일신상의 안전을 꽤한것도 아니었다. 범죄 결과 오히려 자신의 무능력이 한 일가와 몇 안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일로 인해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 말고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기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인 공범은 미치광이 였지만 유니스는 달랐다. 그녀는 20세기의 인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난, 격세유전한 원숭이의 무서우리만큼 현실적인 광기를 품고 있었다...." 라는 문장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유니스라는 뒤틀린 광기를 품고 있는 문맹 여자가 커버데일가의 가정부로 고용되어 스스로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생활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상황을 부풀려 가다가 결국 폭발하고 마는 상황을 적나라하고 냉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영화 "하녀"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특히 유니스와 그녀의 미치광이 친구 조안의 광기넘치는 심리 묘사와 첫 문장으로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독자들을 그 결말로 서서히 이끌면서 소설로 끌어들이는 재주는 역시 루스 렌들 여사! 라는 고수의 필력을 느끼게 해줍니다.
루스 렌들 여사 작품은 읽어 본것이 단편, 장편을 포함해도 몇개 되지는 않지만 뭔가 문제가 있고 뒤틀린 인물들의 이러한 심리 묘사는 정말 탁월 한 것 같습니다. (별로 재미 없었던 장편 "내 눈에 비친 악마" 도 그러한 부분의 묘사는 대단했었죠.)

사실 추리라기 보다는 독특한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라고 할까요? 하지만 미국식 공포물보다는 조금 격조높고 고급스러운, 영국스러운 분위기의 잘 만들어진 스릴러 물입니다. 특히 읽으면서 서늘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별점은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