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레이터"를 읽고 좌절했지만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읽은 데즈카 오사무의 또 다른 단편집. 원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이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주로 심리 서스펜스 - 호러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심리 묘사가 상당히 탁월해서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거든요.
특히 "서스피션"이라는 표제로 연재되었다는 세 작품이 발군입니다.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첫 번째 작품인 "파리채"는 로봇을 이용한 살인 계획과 뒤이은 반전을 다룬 그럴듯한 SF 범죄 스릴러로 헨리 슬레서의 단편 "헬로 자스민"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대한 깊은 고뇌를 묵직하게 그리고, 비교적 현실적인 반전은 더 낫습니다.
"벼랑의 두 남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쫓아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도착한 뒤 벌어지는 치밀한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특징은 심리 묘사입니다. 정말 최고예요. 일종의 갇힌 공간이고 인적이 없다는 점에서 폐쇄형 스릴러물 느낌도 드는데, 후쿠모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하거든요. 다만 결말이 뜬금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끌어서 주인공 채무자가 외려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에필로그라든가, 시점을 바꿔 의외의 진상을 드러낸다는 식으로 그려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P4의 사각"은 바이러스 SF물입니다. '홀로 갇히게 되는 실험체(?)의 비애'라는 흔한 설정도 그닥이지만, 반전이 너무 작위적이라 셋 중 가장 처집니다. 심리 묘사가 더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디테일과 현실감이라는 측면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에게 더 잘 어울렸을 이야기였어요. 그냥저냥 평작입니다.
이외에는 블랙잭과 유사한 캐릭터가 프로 곤충채집가로 등장하는 "인섹터" 시리즈와 풍자, 블랙코미디, 시사성 짙은 무난한 작품들이 이어지다가 정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요리하는 여자"로 마무리됩니다.
이 중에서는 "요리하는 여자"가 물건입니다. 앞선 "서스피션" 시리즈 못지 않아요. 노인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노인 실종 사건을 다루는데, 뻔한 이야기이긴 하나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디테일하게 잘 살아있고 반전을 잘 숨겨서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랄까요. 극화를 섞어 디테일을 강조한 그림도 상당히 잘 어울렸어요.
이곳저곳에 실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작품들의 편차가 좀 있다는 점, 그리고 호흡 조절에 약간은 문제가 있다는 단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별점 3점은 충분해 보입니다. 최소한 "서스피션" 시리즈 3작품과 마지막에 실린 "요리하는 여자"는 장르물 애호가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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