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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0

다빈치의 부엌 - 데이브 드위트 / 김지선 : 별점 2.5점

다빈치의 부엌 - 6점
데이브 드위트 지음, 김지선 옮김/빅하우스

요새 너무 바빠서 블로깅할 시간도 별로 없네요. 오랫만에 리뷰 남깁니다.

이 책은 다 빈치의 노트 및 해당 시기의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 탐구하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다 빈치의 삶과 그의 노트 속 요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약간 "접시 위에 놓은 이야기 : 카사노바의 맛있는 유혹"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단순히 특정 인물의 삶과 특정 요리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전반적인 음식 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훨씬 방대하고 복잡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목차별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첫 번째 "음식 르네상스"는 새로운 요리들이 어디서 어떻게 전래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알려주는 전체 조망 항목입니다. 후추와 향신료들을 사용한 이유(후추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와 그 때문에 변한 맛, 그리고 "거대한 존재의 사슬"이라는 르네상스의 지식관을 바탕으로 한 식재료 분류 같은 것은 상당히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거대한 존재의 사슬"은 일종의 등급표인데 양파 같은 구근식물은 최하등급이고, 신 바로 아래에 있는 불의 범주인 불사조가 최상등급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른 식재료 순서는 돼지 - 양 - 쇠고기 - 송아지 고기 순서이며, 새들은 모든 동물 중 가장 윗자리로 오리와 거위 - 닭 - 일반 조류 순서라고 하네요. 이 기준이면 치킨은 상당히 상위권 음식이군요. 참새구이는 불사조 바로 아래고!

두 번째 "최초의 요리왕"은 당대 이탈리아에서 ‘요리왕’이라고 불렸던 마르티노의 요리책 "조리의 기술"에 실린 레시피가 중심인 항목입니다. 이후 르네상스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바르톨로메오 스카피의 요리책 "오페라"까지 소개됩니다. 암살을 막기 위한 연회의 구성까지 실려 있는 등 당대 문화를 잘 반영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 번째 "리조토, 마카로니, 설탕의 나라"에서는 제목 그대로 지금도 이탈리아 요리를 대표하는 리조토, 마카로니의 역사와 설탕을 이용한 요리들이 소개되고요.

네 번째 "화덕에서 주방까지"에서는 당대 주방의 모습과 주방에서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기구들이 등장하며, 다섯 번째 "다 빈치의 부엌"은 다 빈치가 고안한 주방기구 설명에 이어 다 빈치가 실제로 어떤 것을 먹었는지에 대해 추리하는 내용입니다. 다 빈치가 당시에 어떻게 살았는지가 함께 설명되기 때문에 책의 제목에서 기대했던 내용과는 가장 잘 맞는 항목이었다 생각되네요.

여섯 번째 "환상적인 연회들"은 르네상스 시대 초기를 빛냈던 화려한 연회들과 연회에 올라간 음식들이, 마지막 "세계 최고의 요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탈리아 요리의 르네상스를 다룬 책의 목차 순서로 아주 적절했다 생각됩니다.

내용도 재미있는데, 당대의 책들에서 가져온 참고용 도판과 레시피도 충실해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현대에도 재현할 수 있도록 일종의 대체 재료 및 현대 기준에 맞춰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해 먹어도 충분히 맛있을 것 같더군요. 개중 가장 간단할 것 같은 다 빈치의 샐러드 드레싱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선한 이탈리아 파슬리 10작은술 (간 것), 신선한 스피어민트 1작은술 (간 것), 신선한 타임 1작은술 (간 것), 올리브유 3/4컵, 와인식초 1/4컵, 소금과 새로 간 후추 (맛내기용)를 더해 1컵으로 만들면 된다'고 하니 참 쉽죠?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우선 목차가 시기나 주제별로 잘 정리된 느낌은 아닙니다. 또 제목과 다르게 다 빈치에 대한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도 기대와 달랐고요.
그래도 르네상스 초기 음식 역사에 대해서는 확실히 짚어줄 뿐더러 내용도 꽤 재미있는 편이라 음식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책도 상당히 예쁘게 나온 만큼 소장용으로도 괜찮거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3/11/2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식탁 - 와타나베 레이코 / 박유미 : 별점 2.5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식탁 - 6점와타나베 레이코 지음, 박유미 옮김/시그마북스

제목만 봤을때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먹었던 음식에 대한 구루메, 요리 관련 서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제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자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다 빈치의 일생에 대해 알려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 빈치가 남긴 수첩의 기록들을 통해 당시의 생활과 다 빈치에 대해 재구성한다는 취지는 괜찮았고, 내용도 그에 충실합니다. 예를 들면 다 빈치의 수첩 내용에서 "스파게티"라는 단어를 뽑아낸 뒤, 스파게티, 파스타의 역사와 함께 설명하는 식입니다. 평범한 수첩 및 장서 목록, 해부 수첩까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다 빈치의 수첩만으로는 뽑아낼 거리가 적었던 탓인지, 뒷부분은 당대의 유명 화가 폰토르모의 일기와 미켈란젤로에 대한 자료, 실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연회 관련 자료 설명이 이어집니다. 부록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장서로 알려진 "살레르모 학파의 양생훈", "아름다운 생활과 건강"이 실려있고요.

그런데 앞부분 다 빈치의 수첩과 생애에 대한 부분은 저자의 생각이 많이 개입되어 있으며, 실제 본 이야기와는 별 상관없는 개인적인 내용까지 등장해서 신변잡기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노트를 보고 몇 가지 단서, 키워드를 뽑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덧붙이는 과정에서 작가의 상상력과 경험이 많이 반영된 탓입니다. 덕분에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전문적인 자료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네요. 왠지 신뢰도 별로 가지 않고요. 원저가 된 수첩글들부터가 일상 생활속 단상을 끄적인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요. 또 앞서 말했듯 "식탁"이라는 주제, 취지를 살리기 위해 중요하지도 않은 키워드를 억지로 도출한 것도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실제 사료를 근거로 다 빈치에 대해서 조금 색다른 시각으로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입니다. 기대했던 당대 음식은 "폰토르모의 일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요리" 단락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되고요. 특히 당시 연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좋았어요. 부록 역시 독특하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다른 책에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그 외의 소소한 에피소드들,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관계라던가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요리가 무엇인지? 에 대한 이야기 등도 재미있었습니다. 솔직히 다 빈치에 올인한 전반부보다는 후반부가 훨씬 마음에 들었는데 차라리 "르네상스의 식탁"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이런 형식으로 책을 꾸몄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중세의 뒷골목 풍경" 같은 전문적인 미시사 서적으로 가던가, 아니면 "요네하라 마리의 가벼운 에세이" 같은 식으로 쓰여졌더라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라 추천하기는 조금 난감합니다. 독특한 점은 분명히 있고 후반부, 그리고 부록의 가치는 있는데 혹 이런 류의 책에 관심있으시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9/03/09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 서동인, 김병근 : 별점 3점

신안 보물선의 마지막 대항해 - 6점
서동인.김병근 지음/주류성

국내 고고학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신안 보물선의 발굴 물품을 통해 당대 역사를 설명해주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신안선에 실려 있었던 유물들을 종류별로 상세하게 분석하여 당시 어떤 문화가 융성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무역선의 항해 경로를 통해 당시 무역을 통한 문화 교류가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 신안선이 침몰했던 시기의 원나라와 고려를 중심으로 주변국의 당시 시대 정황과 정세는 어때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유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신안선에 가득 실려있던 당대의 고급 목재 자단목에 대해 '힌두어 찬단을 음역한 전단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이후 자단이라는 말로 바뀌었으며,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 사용한 고급 목재로 그 향도 귀중하게 여겨졌다'는 식으로 그 유래와 용도를 알려주는게 좋은 예입니다. 출토된 향로와 화분, 다완 (찻잔)과 주전자 등을 통해 분향, 꽃꽂이, 다도 문화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만 보완되면 온전히 한 권의 책으로 나와도 손색없다 싶을 정도였거든요.
그 외에도 유물을 통해 소개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주 많습니다. 도자기, 동전과 같은 명확한 유물말고도 목패와 같은 기록물과 게다, 숯돌과 같은 생활 용품 등 워낙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컬러 도판과 지도, 다른 관련 유물에 대한 정보와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는 구성도 좋습니다. 특히 도판 측면에서는 정말이지 나무랄데 없어요.

발굴 과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소소하니 재미있습니다. 신안선 발굴로 당시 도자기가 엄청나게 출토되어 우리나라가 당시 도자기 최대 보유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당연히 중국을 제외하고겠죠?) 국제 시장에서 해당 시기 도자기 가격이 폭락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눈길을 끕니다. 도자기만 무려 2만점이 넘게 출토되었다니 폭락할만도 하네요.
또 신안 보물선 덕분에 우리나라가 현재 중국 동전 최다 보유국이라는군요. 한과 후한에서부터 시작하여 신, 당, 북송, 남송, 요, 금, 원과 서하까지 아우루는 28톤, 8백만개에 이를 정도의 양이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동전은 일본에서 대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될 예정으로 보고 있는데, 만약 신안선이 침몰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 가마쿠라 대불과 같은 불상이 한 개 더 생겼을거라고도 하고요. 일본으로서는 아쉽겠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지만 주석이 모두 책 말미에 수록된 점은 아쉽습니다. 페이지 하단에 주석을 소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또 책의 목차가 두서 없는데, 신안 보물선 발굴에 대한 상세한 설명 뒤에 항해 경로를 설명하며 당대 무역, 그리고 주변국들의 상황을 알려준 후 유물 하나하나를 통해 관련된 문화를 차례대로 소개하는게 나았을 겁니다. 발견과 개괄적인 설명, 그리고 좀 더 미시적인 접근이 가능했을테니까요. 지금은 이런 내용이 약간 뒤섞여져 있는 편입니다. 문체도 읽기 편하지 않고요.
그리고 제가 이 쪽 공부가 부족하여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지나친 억측이 아닌가 싶은 부분도 몇 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 고려 개성 상인의 송도부기가 서양에 전해진 후 이게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기를 영어로 북 키핑 (Book Keeping) 이라고 하는게 '부기'의 발음을 베껴낸 표현이라는걸 증거로 제시하는데 좀 아니다 싶었어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르네상스 운운하는건 지나쳤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책 자체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이 조금 쎈 편이기는 하지만 분량과 전 페이지가 풀 컬러라는 점에서는 납득할 만한 수준입니다. 고려 시대 문화와 문화 교류사, 미시사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2/02/26

세계를 매혹한 돌 - 윤성원 : 별점 3점

세계를 매혹한 돌 - 6점
윤성원 지음/모요사

보석과 주얼리가 주제인 책인데, 이전에 읽었었던 "보석 천 개의 유혹"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석과 주얼리의 유행과 디자인 변천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행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건, 얼마전에 읽었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보석과 주얼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또 보석과 주얼리는 가격 때문에 사회 지도층이 관련될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단순한 보석, 주얼리 유행 통사가 아닌, 약간 미시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국가별로 달랐던 유행의 이유는 그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베를린 아이언은 철로 만들어진 주얼리로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 당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념품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군자금에 보태기 위해 금 주얼리를 기부하고, 철로 만든 베를린 아이언 주얼리를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 민족의식 발현이라는 속 뜻과 무관하게, 적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1 제정 몰락 후 왕정복고기에 문학, 건축 등 전 분야에서 중세 고딕 문화가 유행했던 탓에 베를린 아이언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왕정복고기에는 고가의 큰 보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현실도 한 몫 했었고요. 

반면 영국에서는 19세기에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낀 주얼리가 유행했습니다. 상류층이 19세기의 놀라왔던 예술, 문학, 과학 기술의 진보를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동일시했던 덕분이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갈 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유행이었겠지요. 아울러 이 때 로마, 이집트, 헬레니즘 및 에트루리아 유적 발굴로 고고학적 복고 양식도 함께 유행했다고 합니다.

특정 아이템의 변천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여성의 목을 감싸는 초커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유행이 시작되었었습니다. 색깔도 빨간색이었고요. 허나 19세기에 접어들며 검은색 초커는 매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 등으로 잘 알 수 있고요. 이후 영국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갑상선 수술 흉터를 감추기 위해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여러 줄 세팅된 폭넓은 초커를 착용하기 시작한 뒤, 19세기 말 ~ 20세기 초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네요. 지금의 문신 (타투) 유행과도 조금 비슷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문신은 범죄 등 안 좋은 이미지의 대명사였는데 요새는 인스타그램 셀러브리티 등을 통해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초커의 유행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으로도 잘 알 수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 속 초커 실물은 나치의 압류 이후 사라졌다니 이 역시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 속 일화로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입니다.

이러한 흥미로운 역사 일화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인류 역사상 안정과 번영을 가장 길게 누렸고, 그 어느 때 보다 탐미적이었던 '벨에포크' 시대에서 유행을 선도했던 사교계의 중심지 막심 레스토랑을 무대로 화려함을 뽐냈던 3대 고급 매춘부인 라 벨 오테로, 리안 드 푸지, 에밀리엔 달랴숑의 승부 이야기처럼요. 이 일화와 함께 소개되었던 당시 쥬얼리는 도판만 보아도 그 화려함이 남다른 수준이라 과연 '벨에포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사교계를 주도했던 에스터 가문의 안주인 캐럴라인과 신흥 부호 밴더빌트 가문의 안주인 알바 밴더빌트의 승부와 거래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 외에도 벨에포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와 그녀의 쥬얼리, 영국 메리 왕비가 혼란기에 수집했던 당대 유럽 왕실의 명품 쥬얼리들 이야기도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소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상징과도 같은 '블라디미르 티아라'가 어떻게 영국 왕실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공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셋째 아들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던 마리아 파블로브나 '미첸' 블라디미르 대공작 부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몸을 피하면서 진짜 값비싼 보물을 블라디미르 궁전 비밀 장소에 숨겨두었었는데, 그녀의 친구였던 영국인 예술품 딜러 앨버트 스토퍼드가 노동자로 변장해서 궁에 잠입한 뒤 보물을 꺼내어 런던으로 빼돌렸다는, 혁명과 모험이 모두 들어가있는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를 메리 여왕이 구입하여 지금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식 석상에 착용하고 나오게 되었다는건 참 많은걸 느끼게 해 주고요. Winners takes it at all 인 거겠지요? 

1차대전 후, 아르누보와 벨에포크 복고풍 로코코는 모두 옛 것이 되었고, 미래지향적이고 기하학적인 모티브의 디자인의 유행은 야수파, 입체파 등의 미술사조, 디자인의 바우하우스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네요. 부족해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쥬얼리 디자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인도 마하라자들의 어마무시한 쥬얼리 컬렉션들, 1922년 투탕카멘 발굴을 통한 동서양이 융합된 디자인의 유행과 2차 대전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얼리 유행 테마들 소개도 볼만했습니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이아몬드 제국 드비어스의 탄생과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로 기억되는 성공 공식에 대한 설명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광고를 누가 어떻게 집행했는지를 다루는 글은 처음 읽어보기도 했고요.

전문적으로 쓰여진 글로 보기에는 저자의 개인 경험과 개인 생각에 대한 비중이 높으며, 미시사 서적으로 보기에는 쓰여진 내용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도 있으면서 여러가지 자료적인 가치도 높은 책인 덕분입니다. 도판만 보아도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보석, 주얼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7/13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점

눈의 황홀 - 6점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

'많은 발상가들이 생각의 도구로 사용한 ‘개념’이나 ‘형태’, ‘방법’ 등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탐색한 책이다. 다양한 ‘개념’, ‘형태’, ‘방법’ 중에서도 쌍[對]이라는 관념, 속도, 원근법, 나선, 추상 표현, 스트라이프, 콜라주, 레디메이드, 데포르메, 오브제 등 인간의 눈을 현혹해 온 18가지 테마의 기원과 변천을 묻는다. 이 과정에서 마쓰다 유키마사는 비주얼 문화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인류 가치관의 변천이 갖고 있는 놀라운 반전들을 보여 준다.'는 책 소갯글에 혹해서 구입했습니다. 

이러한 개념, 형태, 방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자의 개인적인 주장이 강하기는 하지만, 뒷받침되는 근거들이 방대하고 역사적인 깊이도 느껴졌습니다. 자기 주장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데 굉장히 능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궁금했었던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는 주장들이 특히 흥미로왔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가 동서 종교관의 차이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서양의 일신교는 수직 지향이며, 이를 통해 수직선 끝에 한 사람의 신이 있는 소실점이 등장했다고 하는데, 요약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도판, 사료가 많아서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추상 표현을 기차의 도입과 연결시킨 발상도 기발했습니다. 늘 보던 풍경이 기차의 속도로 왜곡되어 보였고, 이를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으로 잘라낸게 추상파의 뿌리일 수 있다는건 생각도 못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크 로스코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디자인 전공자라 '폰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편인데(이런 책을 읽었었지요), 폰트와 타이포크라피의 역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의 주장으로는 구텐베르크의 좁고 날카로우며 새까만 블랙 레터체(고딕체)는 성서에 위엄과 무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에서는 이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해 경멸했던 고트인의 문자(고딕체)라서 거부했고, 고대 로마 서체야말로 로마인에게 어울린다며 '로마체'를 부활시켜 사용했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프랑스에서 사용된게 올드 로마체를 대표하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가라몽체' 였고요. 그리고 서체, 타이포그라피 요소만으로 아름다운 지면을 만들어내려 했던 영국의 존 바스커빌이 18세기 모던 로마체를 도입했고, 뒤이어 이탈리아의 보도니가 완성하여 산업 혁명에 적합한, 공업 제품으로서의 활자를 만들어 냈다는군요. 이러한 주장과 함께 문자 레이아웃 디자인의 발전사도 설명해주는데, 지금 보아도 기발한 시도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외에도, 청각을 시각화한 것의 대표는 '악보'이다, 토기로 끓이는 요리 때문에 주기성-시간 관념-과 재분배에 의한 문명이 생겨났다는 등 한 번 읽어볼만한 주장이 가득하며, 주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판도 많아서 시각적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최초의 자동판매기 설명과 도판은 이런 책이 아니면 어디서든 찾아보기 힘든 자료일테니까요.

대부분 일본 중심으로 동양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류의 주장을 펼 수 있는 전문가가 나와주면 좋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8/09/16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 - 윌리엄 시트웰 / 안지은 : 별점 2.5점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 - 6점
윌리엄 시트웰 지음, 안지은 옮김/에쎄

제목 그대로 특정 역사를 대표하는 요리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레시피 소개에 이어, 해당 레시피가 어떤 역사를 만들었는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상상 속 레시피는 아니며 모든 레시피가 명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레시피인 고대 이집트의 빵은 룩소르 세네트 묘실 벽 기록이 근거이며, 두 번째인 바빌로니아의 카나수 수프는 설형문자 점토판이 출처라고 하네요.

레시피만 보면 이게 뭔가 싶기도 한데, 읽어보면 "역사"를 만들었다는 제목에 수긍이 갑니다. 인류사, 아니면 최소한 요리계에 영향을 준 것들 중심으로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고대 로마 카토의 햄 레시피는 그 자체가 특별한건 아니지만 이를 '염장 보관' 과 연결하여 그 중요성을 드러내며, 로마 문화의 절정은 소스가 가장 맛있었던 시대였다는 해석처럼 설명도 아주 그럴듯합니다. 소개되는 소스는 후추, 로바지, 파슬리, 말린 박하, 회향, 포도주에 적신 꽃, 구운 견과류나 편도 열매, 소량의 꿀, 포도주, 식초를 섞은 수프를 가열하여 휘젖다가 녹색 셀러리 씨와 개박하를 넣는 소스인데, 이 정도의 재료를 갖추어 요리할 정도의 문명이라면 대단히 번성한건 분명할테니까요.
그 외에도 샌드위치가 이동이 잦아진 시대에 유행했다는 해석, 키치너 박사의 레시피와 책을 통해 영국의 쓸데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형식주의를 드러내고, 카렘의 유명한 과자 레시피로 프랑스 요리의 화려함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등 볼거리가 많습니다.
레시피를 통해 새로운 식재료가 전파된 것, 그리고 요리가 국가와 대륙 사이로 이동이 이루어 졌다는걸 당대 문화 교류사와 엮어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콜릿의 전파와 식민주의를 연결하는게 대표적인 예이고요.

근대 이후는 라디오 방송에서 시작된 쿡방으로 레시피가 널리 알려지고, 전자 레인지로 대표되는 여러 도구들의 도입을 통해 획기적으로 식생활이 변하는 과정, 전쟁 당시 배급제로 빚어진 열악한 레시피들, 풍요의 시대를 거쳐 즉석 식품의 유행, 그리고 방송과 언론, 미슐랭 가이드를 통해 연예인 수준의 유명인이 된 셰프들의 등장, 각종 먹거리의 범람에 대한 반동과 환경 운동으로 등장한 채식주의와 슬로 푸드 운동, 인터넷과 앱으로 매체가 변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중세의 레시피 재해석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절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역사의 흐름과 요리, 레시피가 특별한 해석 없이도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게 재미있어요. 브리아 샤바랭의 말 처럼 "무엇을 먹는지"를 통해 그 사람과 시대를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나저나, 다시금 중세 요리로 복귀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라면 중세의 그 으리으리하고 시끌벅적했던 쇼와 같은 만찬이 다시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겠네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직접 연출을 지휘하기도 했다는 르네상스 연회는 항상 궁금했었는데, 곧 실제로 보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세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레시피를 다루고 있기에 당연히 범위도 넓습니다. 고대의 경우는 중국을 포함해 모든 고대 문명의 레시피가 수록된건 물론이고 역사적으로도 고대 - 중세를 거쳐 타이방 이후 체계를 갖추는 과정, 중세 이후 근대, 현대,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를 대표하는 레시피가 소개됩니다. 타이방과 카렘에서 줄리아 차일드, 제이미 올리버 등 유명 셰프들의 레시피도 많으며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먹는 에그 베네딕트, 흘렌다이즈 소스, 피치 멜바 등 친숙한 요리 소개도 반가왔어요.

하지만 주로 "영국" 기준으로 쓰여진건 아쉬웠습니다. 세계사와 관련된 요리를 다루는 것도 앞부분의 잠깐일 뿐 결국 영국의 요리, 영국의 요리사, 영국의 식당이 관련된 레시피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근대 이후에는 동양권 요리는 찾아보기도 힘들고요. 그리 큰 비중은 아니더라도 일본의 제국주의의 시작과 "고기 감자 볶음" 정도는 연결해서 설명해줄 만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읽기 쉬운 글도 아니었습니다. 도판이 부실하여 글만으로 요리와 그 맛에 대해 상상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딱딱하고 단순한 번역투 문체가 상당히 거슬렸어요.
아울러 정말로 역사적인 레시피이냐? 라고 할 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레시피도 제법 수록되어 있다는 점도 약점이에요. 어떤 역사를 대표한다거나, 요리 역사에 있어서 변곡점이 되었다거나 하는 레시피가 많은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자체의 아이디어는 좋고 소장 가치가 있는 단락도 있지만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모두가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요리와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재미가 있는 책은 아닌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3/01/07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이소영 : 별점 3점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6점
이소영 지음/모요사

미술사를 바꾼 여러 가지 그림 도구 및 각종 계기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으로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제목에서처럼 도구들이 설명되고 있지만 화가의 직업병을 다룬 '백내장' 같은 챕터와 같이 다른 분야도 폭넓게 소개해줍니다. 

그 중 이런 도구와 각종 계기들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의 도입처럼요. 이동이 용이한 캔버스 덕분에 그림이 더 이상 교회와 건물에 붙박이 장식으로 활용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유행하게 되었다니 대단한 혁신을 이룬 셈입니다. 

나무 패널에서 캔버스로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습하고 소금기가 많은 대기는 프레스코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베네치아에서는 나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중요 자재였기 때문이었다니까요. 그래서 해양강국답게, 돛을 만들던 기술을 활용한 캔버스가 대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의 질감을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 소개도 좋았고요.

이런 캔버스만큼, 아니 더 큰 미술사의 혁명을 불러온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크릴 물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미술은 현실 세계에 없는 입체감 없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라는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경쾌하고 선명한 색감, 빠른 건조에 어디에나 그릴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춘 아크릴 물감의 등장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크릴 물감 챕터에서는 이렇게 아크릴 물감이 현대 미술을 그야말로 '접수'한 신소재라는걸 여러가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예를 들어가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결합된 현대미술의 큰 이바지를 한 빌리 클뤼버,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E.A.T 소개도 좋았습니다. 당연히 미술가들이 기계적인 작품을 혼자서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기술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몰랐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협의 기간이 오래 걸렸고, 심지어는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못할 때 다른 기술을 제시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했던 작품도 있었다니 - 앤디 워홀의 "은색 구름" - 이 정도면 함께 창작을 진행한 동료라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아요. 더 이상 기술의 도움없는 예술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템페라화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템페라화는 유화가 유행한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 나름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군요. 약간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질감과 색감이 현대 미술의 어떤 분야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라나요. 게다가 21세기에는 공장에서 제조된 물감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템페라 물감이 또다시 유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니까요. 또 달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처럼 부엌 재료들이 일찍이 물감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식인데, 확실히 화가들도 계속 연구와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라는걸 잘 알려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네요. 

'종이'에서는 터너의 수채화의 독특한 질감과 효과는 모두 그가 사용했던 종이 덕분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종이에 상처를 낸 뒤 물을 붓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무늬와 명암을 얻는 터너의 기법은 현재의 종이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종이 원료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용으로 '터너풍 수채화 종이'를 개발해서 판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팔레트'에서는 미술 도구로서의 팔레트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팔레트는 필요없는 그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가들이 팔레트에 뿌린 물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팔레트에는 대체로 열 개 정도의 물감만 쓰였고, 전통적인 팔레트는 혼색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혼색 대신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비비고 흩뿌려 작업했다고 합니다. 즉 인상주의의 탄생은 튜브형 물감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는 팔레트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튜브형 물감과 같은 합성 물감도 한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데, 일전에 다른 다른 책에서 읽었던 고흐의 독특한 노란색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은 독특하게도 화가들의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질환을 앓은 화가들이 많았다는데, 드가가 거의 완전 실명에 이르른 탓에 유화를 그리지 못해 파스텔화와 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는건 몰랐었습니다. 유별나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백내장 등의 질병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물감들에 포함된 납 성분,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 방식 등이 이유였겠지요. 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이 초기의 세밀하고 부드러웠던 그림에서 거친 파스텔 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에 걸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컴퓨터에서 재현하면 드가와 모네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도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림과 미술사, 각종 재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확실히 미술사 전문 출판사 모요사의 책 답게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잡고 있어요. 도판이 너무 작다는 점, 그리고 소개되는 모든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지 못한 점은 좀 아쉬우며, 전문가적인 이야기에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이 다소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옥의 티라 할 수 있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6/06/05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홍성욱 : 별점 2.5점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6점
홍성욱 지음/책세상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그림을 토대로 과학의 역사와 다양한 과학 이론을 알려주는 독특한 책입니다. 목차는 크게 세 부분 - "제 1부 근대 과학의 탄생, 제 2부 이성과 근대성, 제 3부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까지의 시대순리녀, 목차별로 다양한 소주제가 포함되어 있고요.

그림을 활용하여 설명해 주는 덕분에, 딱딱한 내용임에도 이해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준정다면체와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의 다면체 다섯 개를 이용한 기하학적 원리를 여섯 개의 행성에 대입하는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부분이 아주 좋았습니다(참고로, 케플러의 이론은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 이러한 수학적 조화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곤 하는군요).그림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나무"를 이용하여 진화론을 설명해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시대순으로 조목조목 짚어주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본인의 그림 실력을 활용하여 자세한 달 그림을 남겼던 갈릴레오도 이후 서적에서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만 사용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메디치 궁정의 철학자가 된 뒤 예술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석하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학이 예술보다 더 신분이 높다"는건 갓 암흑시대를 벗어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를 갈릴레오가 관측한 달 그림이 로도비코 카르디 다 치콜리의 "성모 마리아" 그림에 활용되었다는 것과 엮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울퉁불퉁한 갈릴레오의 달 해석을 카톨릭 교회는 반대했지만, 달은 "타락의 결점"을 상징하므로 성모가 짓밟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해석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정밀한 과학이 기존의 예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예술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술가들의 반격 역시 몇 가지 예로 설명됩니다. 백과전서의 권두화에 대한 항목, 예술가 블레이크가 "예술은 생명의 나무이고, 과학은 죽음의 나무이다"라고 과학을 비판했다는 항목 등으로요.
그런데 백과전서 권두화 이야기는 좀 과잉해석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 저자의 의도와 그림이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그림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일환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죠. 권두화를 창작한 화가가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 외, 볼테르의 연인이었던 샤틀레 부인이 뛰어난 과학자였다, 라부아지에의 아내 역시 만만찮은 능력으로 라부아지에를 충실히 내조했다 등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책의 특성상 도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대체로 우수한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에서 필요한 부분을 "확대" 해서 삽입하여 설명해주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큰 그림을 접이식으로 수록하는 것보다 훨씬 읽기 편했으니까요. "아테네 학당" 등 유명한 그림들이 사용된 것도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하지만 목차의 세 번째 부분인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는 내용과 분위기 모두 다른 부분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해서 아쉬웠습니다. 유명한 그림도 등장하지 않고, 과학사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이론에 치우친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프리온 이야기는 완전히 생뚱맞은 내용이라 굉장히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상술한 단점들로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재미있는 과학 도서는 분명하기에, 읽기 편한 과학사 중심의 과학 도서를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예술 두 분야가 영원히 양립할 수 없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현대의 미디어 아트 같은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2026/04/25

가구, 집을 갖추다 - 김지수 : 별점 2.5점

가구와 인테리어를 단순히 취향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생활사와 주거문화의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장점은 가구와 인테리어 전문가인 저자의 식견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화장대 설명에서 청동기시대의 거울 대체품 이야기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이후 화장 문화의 변화, 17세기의 로보이 화장대, 18세기의 토일렛 테이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더치스 화장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며 화장대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미의식, 계급 문화, 생활양식의 변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점을 알려주는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서양 가구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 말기의 경대, 유리 거울의 보급, 좌식 문화에 맞추어 발달한 소반의 구조와 쓰임, 사랑채와 안방의 변화를 통해 한국의 주거문화와 가구를 연결해 설명해 주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읽다보면 왜 과거의 가구들이 작고 이동하기 편한 구조였는지, 왜 안방이 오랫동안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지, 또 근대 이후에는 거실과 식탁 중심의 공간으로 어떻게 옮겨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온돌의 일반화와 좌식 문화의 정착, 그리고 그에 따라 소반이나 경대 같은 생활 가구가 발달해 나갔단 것이지요. 

현재의 생활 방식과 이어지는 제안들도 흥미롭습니다. 소파보다 식탁에 투자하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조언이 아니라, 거실과 부엌을 통합하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따라 하고 싶은지와는 별개로, 집을 꾸민다는 일이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와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이사를 계획 중인데 여러모로 참고가 됩니다.

엠파이어 스타일, 리젠시 양식, 아르데코 같은 서양 디자인사의 흐름을 대중문화와 사회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예술가와 장인, 파리지엔느와 프렌치 시크 등의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다만 책의 성격에 비해 도판이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시각 자료가 꼭 필요한 책인데 말이지요. 저자의 일러스트가 수록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울러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에는 전문성이 조금 부족합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넓은 범위의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근거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도 가구와 집을 둘러싼 역사, 문화, 생활양식에 대해 쉽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06/28

브루넬레스키의 돔 - 로스 킹 / 이희재 : 별점 3점

브루넬레스키의 돔 - 6점
로스 킹 지음, 이희재 옮김/세미콜론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을 완성한 천재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다룬 논픽션. 1418년 진행되던 돔 공사가 부딪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한 공모전에 참여한 필리포가 내놓은 기상천외하고 대담한 해결책은 중심틀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는,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방식이었으며 이 방식이 선정된 뒤, 건축장이 된 필리포가 천재성을 발휘하여 거대한 권양기와 기중기 카스텔로를 만들어 내고 돔을 쌓는 데 있어서도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을 당시 시대 상황 및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함께 드라마틱하게 그려냅니다. 단순한 위인전이라기보다는, 돔 공사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룬 일종의 건축 역사서라고 보아야 할 것 같네요.

장점이라면 공사 과정 드라마 자체의 재미와 더불어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현학적인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이 건축물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혁신적인 방법으로 건축되었다는건 전혀 몰랐었거든요. 당연히 필리포라는 당대의 천재 역시 들어보지 못했었고요. 이 책에서의 모습만 본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뒤지지 않는 대단한 르네상스의 천재인데, 돔 공사에 올인한 나머지 천재성을 발휘하여 명성을 널리 알릴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좀 안타깝기도 하네요.

다른 발명품 중에서는 침몰해버린 디딜바퀴로 돌아가는 외륜선 일 바달로네, 이웃 도시 루카를 수공으로 위협하려던 댐이 무너져 되려 아군이 피해를 보는 등의 실패 사례가 등장하는데, 이는 현실성을 더 높여줍니다. 다빈치의 스케치도 결국 실제로 제작되었더라도 제대로 성공했을지 장담할 수 없고, 딱히 대단한 위력이나 효용성이 있었으리라 보기 어려운 것도 있으니까요. 그가 이룩한 돔 공사의 성공에 비교한다면 큰 흠이라 보기도 어렵고요.

그러나 브루넬레스키의 혁신적인 공법, 즉 중심틀을 사용하지 않고 돔을 쌓아나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이 책만 가지고는 알기 어렵다는건 단점입니다. 압력을 버텨낸다는 여러 개의 사슬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식으로 틀어지지 않게 만들 수 있었는지 등이 설명되기는 하지만 도판이나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보다 종합적인 도판, 즉 건축 순서대로 핵심 포인트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좀 큰 도판 하나가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되네요.
또한, 현재 실려 있는 도판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도 큽니다. 이런 점에서는 책 보다는 적절하게 이해를 돕는 화면이 삽입된 영상 다큐멘터리가 더욱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그래도 단점은 있으나 재미와 자료적 가치를 모두 만족시키는 보기 드문 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도판 이외에는 책의 디자인과 편집 모두 미려하여 완성도도 높고요. 무엇보다도 저는 알라딘에서 50% 할인 금액에 구입했기에 도저히 감점할 수가 없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1/05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니시카와 다카아키, 사카구치 와카코 / 박유미 : 별점 2.5점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6점
니시카와 다카아키 지음, 사카구치 와카코 그림, 박유미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역사 속 대표적인 의자 350가지를 선정한 뒤, 큰 판형을 잘 활용한 상세한 일러스트와 디자이너 정보와 함께 시대순, 지역별로 구분하여 소개하는 디자인 역사서입니다.

의자 디자인에 대한 책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의자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제품 디자인'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의자 디자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지를 잘 알려주는데, 책에 따르면 의자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의자의 형태가 이 때 거의 완성되었거든요.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황금 안락 의자, 그리고 좌석, 등판, 팔걸이, 4개의 다리, 하인방의 부재 (4개의 다리를 엮어 지탱하는 구조물)로 구성되어 오늘날의 의자 기본 구조와 거의 동일한 투탕카멘의 옥좌 등의 발굴로 증명되고요. 개인용 목제의자는 현대의 스툴 개념과 동일합니다.

그 다음은 현재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그림으로 확인 가능한 고대 그리스의 의자 클리스모스, 고대 로마의 카데드라를 거쳐 중세 유럽으로 넘어가는데, 중세 유럽은 문화와 건축 양식에 따라 구분됩니다.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의 세가지 양식으로요.
이러한 문화와 양식 측면의 구분은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으로 이어지며 해당 시기마다 그 양식을 대표하는 의자들이 소개됩니다. 로코코부터는 나라별로 신고전주의 (루이 16세 양식), 퀸 앤 양식 (영국 앤 여왕 제위 시대 양식) 등으로 더 상세하게 구분한게 특징입니다. 이 때부터 특정 문화와 양식에 종속되어 유행을 따라가지 않은 디자이너 -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토마스 치펀데일 - 가 등장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뒤는 특이하게 특정 '의자'의 소개로 넘어갑니다. 영국의 윈저 체어, 미국의 셰이커 체어, 토넷의 곡목 의자입니다. 한 시대를 거의 평정하다시피하며, 지금도 사랑받는, 일종의 '양식'과 '형태'를 만든 명작 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부터는 다시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 아르누보와 20세기 전반 모던 양식 등으로 이어지고, 20세기부터는 현대 의자라고 해도 무방한 의자들과 유명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친숙한 이름이 많아서 반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매킨토시와 힐 하우스 래더백 체어, 해릿 토마스 릿펠트의 레드&블루 체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야콥센의 스완 체어와 더 에그 체어, 베르너 팬톤의 팬톤 체어, 핀란드의 영웅 알바르 알토와 그의 의자들, 미국의 천재 찰스 임스와 그의 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아론 체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20세기부터의 소개는 조금 아쉽습니다. 19세기까지의 소개는 크게 특정 시기를 묶어서 의자의 발전사를 시대순으로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었는데, 그냥 유명한 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책의 소개만으로 특정 양식이나 흐름 등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어요. 이렇게 나열식으로 의자와 디자이너를 소개하면, 이전에 읽었던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와 같은 책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아니, 흑백 일러스트로 소개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못합니다. 큰 판형을 살리지도 못하고 대부분 작은 사이즈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뒤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형태, 계통도로 정리해 놓기는 했는데 실제 본문과 연결해 보기는 어려운 만큼, 차라리 이 형태와 계통도를 맨 앞에 목차처럼 수록하고, 의자들의 소개도 계통도대로 명확하게 소개해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목 그대로 '유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아울러, 일본이 제품 디자인 강국이기는 하나 '명작 의자 유래 사전'이라는 책에 한 꼭지를 할애하여 역사를 소개하고, 주요 디자이너와 의자를 소개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어쩔 수 없기는 하겠지만, 뭔가 공평한 시선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19세기까지는 별점 5점을 주어도 괜찮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감점합니다. 의자 디자인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뒤의 부록과 같은 형태, 계통도만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2015/08/08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릭 게코스키 / 박중서 : 별점 2.5점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6점 릭 게코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르네상스

도둑맞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파괴되고 소실된 여러 예술품들에 대해 쓴 책입니다. 해당 예술품에 대한 범죄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한 논픽션이라 생각했는데, 실제 내용은 에세이더군요. 희귀 초판본 거래를 업으로 하는 작가가 예술 작품들로 "상실", 그리고 "영원"에 대해 써내려간 것이 핵심이거든요. 예술 작품들이 사라진 과정도 상세하게 적혀있기는 하지만요.

예를 들면 <부재와 갈망이 주는 기쁨> 편을 보죠. 여기서 제임스 조이스가 아홉 살에 쓴, 최초의 인쇄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쇄물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수집의 강박"입니다. 물건 자체의 가치는 0이지만 물신화된 가치에 의해 가격이 100만 달러가 넘을 것이라는 이 인쇄물이야말로 수집의 강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수집은 물건 자체의 가치로 재단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에요. 참고로 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다라메도 말했죠. "가격만 비교해봐야 의미가 없어. 소프트의 재미는 결코 가격과 비례하지 않으니까.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하자. '이건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면 돈을 내는 거야. 난 그렇게 선택해 온 것들에 대한 긍지를 갖고 있어. 왜냐하면 그건 내 것이니까! 그게 야겜이건 동인지건, 옷이건 마찬가지야!!"

또 바이런의 자서전과 키츠의 일기를 상속인들이 파기한 일화를 소개하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예술 작품과 그 창조자의 개인적 사생활을 결부시키는 행위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자체만 가지고 판단해야겠지만 쉬운 건 아니죠. 얼마 전 이병현 스캔들과 그 때문에 개봉이 연기된 <협녀> 사태가 떠오르네요.
폰트 "길 산스"의 창조자인 조각가 에릭 길이 사후 일기를 통해 딸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이 정도 비밀이라면 일기에도 적지 말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뭐 이런 썅놈이 다 있나...

이라크 전쟁에서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 박물관에서 일어난 약탈 행위를 다룬 편도 인상적입니다. 부시 정권, 그 중에서도 국무부 장관 럼스펠드가 얼마나 무식한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지거든요. 유적에 있던 문화재를 각 나라가 떼어가 전시하는 행위에 대한 긍정과 부정 역시 읽을 만한 내용이었고요. 파르테논에 있는 조상을 떼어간 영국의 "엘긴 컬렉션"을 다루며, 엘긴경이 아니었다면 파르테논에는 조상이 아예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인데 일부는 수긍할 만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그동안 생각치도 못했던 색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나리자 앞에 모여든 인파는 그림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유명 인사를 보는 것이 목적이다. 심미적 파파라치인 셈이다"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단점이라면 단순 흥미로 읽기 어렵다는 점이겠죠. 특히나 저와 같이 범죄 관련 논픽션을 기대한 독자들은 많이 당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담고 있는 주제에 걸맞는 도판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이야기마다 한 개 정도 대충 실려 있는 수준이거든요. 언급되는 작품들이 방대하고 가격도 17,000원이나 한다면 도판도 그에 걸맞는 볼륨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많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로만 읽을 책은 아닙니다. 미술 역사, 아니면 예술품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14/05/06

사형집행인의 딸 - 올리퍼 푀치 / 김승욱 : 별점 3점

사형집행인의 딸 - 6점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문예출판사

18세기 독일을 무대로, 사형집행인이 마녀로 위심받아 화형당할 위기인 산파 마르타의 생명을 구한 뒤 마르타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고아들 사망 원인과 아이들 어깨에 있는 기이한 문양의 정체, 그리고 나병진료소를 파괴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상세한 시대 묘사, 독특한 직업의 탐정이 등장하는 역사 추리 소설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역사 추리 소설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추리, 역사에 관련된 소재를 모두 좋아하며 그냥 독서가 아니라 뭔가 배우는 느낌이 드는게 좋거든요.
이러한 현학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필수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 충분히 값합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 및 조력자인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 등 등장인물들은 물론 군인들, 짐마차꾼들과 같은 다양한 직업과 숀가우라는 도시 및 작품의 중요한 요소인 마녀 심문 (고문) 절차 등의 행정적 설정과 같은 모든 요소가 현실감있게 제대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야콥 퀴슬입니다. 전직 군인으로 고문에도 능한 사람 죽이는 명수가 실제로는 의사보다도 뛰어난 학식을 지닌 진짜배기 르네상스맨이라는 설정인데, 아주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수많은 역사추리물을 읽어봤고, 실존 유명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업 - 고대 로마의 포도주 상인, 로마 장군, 수도사, 18세기 영국의 해결사, 터키 환관, 중국 판관 등 - 의 탐정들을 봤지만 사형집행인은 처음 접해보거든요. 단지 직업의 기발함으로 승부하는건 아닙니다. 디테일 역시 장난이 아니에요. 작가 올리퍼 푀치가 실제로 바바리아 주의 사형집행인 집안인 퀴슬가(家)의 후손이기에 가능했던 아이디어와 묘사라 생각됩니다. 덕분에 야콥 퀴슬이 지나치게 먼치킨으로 미화되었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다른 역사 추리소설과 동일한 단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추리 소설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복선이 정교하거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거든요.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요. 그냥 특정 단계를 클리어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식의 전개가 대부분입니다. 비교적 초반부터 진짜 범인인 군인들이 드러나는 등 수수께끼 풀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도 비교적 많고, 악마가 고아들의 은신처를 때맞춰 발견한 경위나 흑막의 정체 등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녀의 표식이라는 것이 아이들끼리의 장난이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단서가 애들 장난이라니!

또 야콥 퀴슬이 중요한 정보를 항상 한박자 늦게 알아챈다는 전개도 너무 반복되어 식상하며, 결말부에서 법원서기가 모든걸 알고있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정말로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마르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동기가 죄다 사라져버린 탓입니다. 흑막을 알고 있었다면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하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사건을 키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잖아요? 한명 죽인다고 나병진료소나 군인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파괴와 살인이 계속되면 수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당연할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은 작가의 데뷰작이라는게 이유라 생각됩니다. 너무 쉽게 써 내려 갔어요.

아울러 야콥 퀴슬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주인공만큼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젊은 의사 지몬은 처음에는 힘의 야콥 - 지혜의 지몬으로 역할이 분배되나 싶었는데 내용에서는 야콥이 훨씬 뛰어난 학식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기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위기와 문제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에요. 그나마 활약이라면 은신처에서 클라라와 조피를 구해낸 정도밖에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 역시 지몬과 야콥을 엮어주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고요. 미인에다가 나름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사건에 있어서는 후반부에서 군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식으로 민폐 역할에만 소비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왜 "사형집행인의 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사형집행인"이거나 "사형집행인과 사윗감"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흥미롭고 쑥쑥 읽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독특함은 물론 마녀사냥이라는 당대의 소재를 잘 녹여낸 줄거리는 매력적이고 산파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제한이 존재하여 긴박함을 더하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역사추리물이 아니라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싶더군요. 악인은 모두 응분의 벌을 받고 주인공 일행은 모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다는 완벽한 권선징악 서사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적나라한 고문과 처형 묘사가 관건인데, 이것만 조금 순화한다면 어린이용 모험소설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알렉산드르 뒤마나 쥘 베르느의 역사모험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2/03/12

워 사이언티스트 - 토머스.J.크로웰 / 이경아 : 별점 3점

워 사이언티스트 - 6점
토머스 J. 크로웰 지음, 이경아 옮김/플래닛미디어

역사 속에 길이 남은 전쟁 무기를 개발한 과학자들을 다룬 미시사 서적. 기원전부터 현대에 걸친 기간 동안 전쟁의 양상에 큰 변화를 가져온 25개의 무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하늘이 내린 무기 - 칼리니쿠스의 액화
  • 투석기, 갈고랑쇠, 살인 광선 - 아르키메데스의 기이한 전쟁 무기
  • 최초의 생물학 무기 - 한니발의 독사 항아리
  • 하늘을 날며 춤추는 화약 - 위백양의 진천뢰
  • 신에 맞선 행위 - 제갈량이 개량한 연발 석궁
  • 르네상스 시대의 만물 수선공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관총
  • 결집된 화력 - 마랭 르 부르주아의 부싯돌식 방아쇠
  • 천재의 노력 - 데이비드 부시넬의 잠수함
  • 매우 부도덕한 행위 - 윌리엄 콩그리브의 로켓
  • 안전하고 영양 많은 - 니콜라 아페르의 통조림 식품
  • 권총 - 새뮤얼 콜트와 서부를 이긴 리볼버
  • 죽음의 상인 - 알프레드 노벨과 다이너마이트
  • 군을 무용지물로 만들다 - 리처드 개틀링의 기관총
  • 느리지만 효과적인 -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어뢰
  • 석류를 닮은 - 수류탄을 완성한 윌리엄 밀스
  • 화학을 악용하다 - 프리츠 하버의 독가스
  • 불타는 관 -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군용기
  • 캐터필러 이동 요새 - 랜슬롯 드 몰의 탱크
  • 전염병 지역 - 이시이 시로와 세균전 과학자들
  • 세계의 파괴자 -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 구조 임무 - 최초의 헬리콥터를 만든 이고르 시코르스키
  • 반향을 기다리며 - 레이더를 발명한 로버트 왓슨와트
  • 달을 향하여 - 베르너 폰 브라운의 V-2 로켓
  • 가장 도덕적인 무기 - 새뮤얼 코언의 중성자탄
  • 총알 잡기 - 스테파니 크월렉의 방탄 섬유

이런 류의 책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워낙 잘 알려진 무기들 - 예컨대 다빈치의 무기들이나 다이너마이트, 독가스, 원자폭탄 등 - 도 포함되어 있어서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약점은 존재하나, 무기보다는 발명자를 중심으로 소개해 주면서 다른 유사 도서와 차별화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발명자의 신상과 개인사, 말년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꼼꼼함도 좋았어요.

25개의 병기 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칼리니쿠스의 액화", 즉 그리스의 불에 대한 이야기와 새뮤얼 콜트의 리볼버,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어뢰, 윌리엄 밀스의 수류탄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불은 다른 문서 등을 통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 비밀무기와 그 제조법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런 비밀은 보통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래도 딱 한 가지, 공기와 접하면 자연발화하는 물건은 아니었을 테니(그렇다면 과학을 넘어 마법의 영역이겠죠?) 따로 불을 붙였을 텐데, 그렇다면 공격하는 쪽도 리스크가 있는 만큼 방법이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호기심 해결사"에서 해결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그리고 새뮤얼 콜트는 이른바 "육혈포" 발명 뿐 아니라 사업가적인 수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뢰의 발명자 로버트 화이트헤드가 특허권을 팔지 않고 발명의 비밀을 독점하였으며, 그의 발명을 모방한 경쟁자들은 여지없이 실패하였다는 부분도 재미있었고요. 셜록 홈즈 시리즈의 비밀 설계도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었구나 싶더라고요. 그의 손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잠수함 함장 폰 트라프와 결혼하여 일곱 아이를 남겨두고 사망한 뒤, 폰 트라프가 견습 수녀 마리아와 결혼한다는 후일담(?)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류탄 이야기에서는 수류탄 자체보다는 "척탄병"의 어원을 알게 된 것이 더 큰 수확이었습니다. 손으로 폭탄을 던진다는 한자어 그 자체에 충실한 명칭이라니... 그나저나 프리미어 리그 스토크시티의 가공할 드로잉 능력을 갖춘 인간 기중기 로리 델랩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전쟁 때 태어났더라면 훌륭한 척탄병이 되었을 거예요. 아니, 야구선수들이 더 적당할려나요?

이렇듯 재미있는 기획이고, 세세한 정리와 소개는 정말이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이언티스트로 포장하여 소개한 경우가 제법 있다는 것은 취지와는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고대의 예가 특히 많은데, 제갈량이나 한니발 같은 경우겠죠. 물론 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고, 등장한 발명품들이 전쟁의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하기에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만... 오히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입니다. 많기는 한데 정작 중요한 무기 도판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석궁(쇠뇌), 화승총, 로켓, 수류탄 등 기본적인 도판 몇 장이 구조나 원리를 더욱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무기들이 많은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 설명하는 무기 중 제대로 된 도판이 등장하는 무기는 부시넬의 잠수함, 개틀링의 기관총, 화이트헤드의 어뢰, 시코르스키의 헬리콥터 정도뿐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도판만 조금 더 충실했더라도 별점은 1점 정도 더 높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전쟁이나 병기 관련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09/08/08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 어니스트 볼크먼, 석기용 : 별점 3점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 6점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석기용 옮김/이마고

전쟁에서 과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요지는 전쟁에서 혁신을 가져온 다양한 무기들은 결국 과학과 결합된 산물이었다는 것이고요. 

고대 전쟁에서 "전차"의 등장, 청동의 등장, 철기의 등장, 기병의 등장, 공성무기들의 등장 등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로마를 끝으로 중세로 넘어가서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영국의 장궁에서부터 철갑기사와 석궁, 그리스화약과 석유, 인쇄술 등을 다룬 뒤, 르네상스시대의 대포, 제국주의 시대의 해상 무역을 위한 다양한 기술들, 그리고 산업혁명과 나폴레옹 이후의 무기의 변화,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등장하는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과학기술과 무기의 결합, 베트남전의 무기들과 이후의 컴퓨터, 다양한 국가들의 무기 개발 시도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마지막 장은 전쟁에 사용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것을 알면서도 협조하는 과학자들의 양심을 묻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례들 - 예를 들어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본 관동군 731 부대라던가 나치의 생체실험 등 - 과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과학이 자연을 더 깊게 들여다 볼 수록 그것을 파괴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특히 과학이 국가가 하나가 된 이상.." 이라는 결론으로 끝맺습니다. 암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겠죠. 지금처럼 과학기술을 국가가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시기에 특정한 기술이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는다는것은 불가능할테니까요. 앞으로 과학자들이 애국심과 인간으로서의 양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 나갈지는 지켜볼 수 밖에요.

어쨌건 재미있는 책인데 약간의 단점은 있습니다. 특정 과학자들이 전쟁에 협력하는 모습을 비중있게 그린 나머지, 그 과학자들의 업적을 조금 간과하는 부분처럼요. 대표적인 예가 라부와지에겠죠. 이 책만 읽으면 프랑스 화약 개선 등의 작업을 진행한 화학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화학식의 도입, 질량 보존의 법칙 발견 ...등 프랑스 화약 개선따위는 먼지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많은 업적을 남긴 과학자였지요. 핵폭탄 관련 글의 분량도 과했고요. 

그래도 주석만 40여페이지가 될 정도의 치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자가 실시간으로 전쟁을 보도하는 듯한 현장감 있는 묘사로 글을 써내려갔기에 단순한 역사서를 뛰어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자면, 루이 14세가 파랑색과 흰색이 조합된 멋진 군복을 원했기 때문에 직조술과 근대적인 천공 카드 시스템의 효시가 태동했다라는 이야기같은 각 무기들과 전쟁 이면에 맞추어진 다양한 일화들과 프랑스의 대포가 처음으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전투인 몬테산조반니 요새 함락작전같은 몰랐던 전쟁 소사 (小史) 들의 설명 역시 흥미진진했고 말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는 제일 진지했던 독서인것 같아서 뿌듯하네요. 두께가 만만치않아 휴대하면서 읽기에 좀 무리가 따르기는 했지만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책이었기에 추천합니다.

2010/02/09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 권영주 : 별점 3점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 6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북하우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아르헨티나 추리소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보르헤스"가 공동 저자의 한명이라는 것으로 국내에서는 더욱 유명하지 않을까 싶네요.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는데, "퀸의 정원"에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나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몇주동안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은, 퀸의 정원을 통해 알게되어 구입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죠. 퀸의 정원 분류는 "르네상스", 딱지는 "H.Q.R" 입니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제목 그대로 여섯편의 단편이 실린 옴니버스 단편집입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전직 이발사 죄수 "이시드로 파로디"가 탐정역으로, 여러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전형적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그런데 찾아오는 방문객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 속물들인데다가 멍청하기가 서울역에 그지 없을뿐 아니라, 겉멋만 가득차서 외국어를 섞어가며 장황하게 늘어놓는게 정도가 지나쳐서 한마디로 짜증나는 놈들이라는 것이 문젭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한없이 간단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짜증나는 속물들의 거지같은 말주변때문에 쓸데없이 복잡해지거든요.
예를 들어 두번째 단편인 "골리아드킨의 밤" 같은 경우 유명 배우 몬테네그로가 자신이 뒤집어쓴 범죄에 대한 해결을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요청하며 팬아메리칸 특급에서 있었던 며칠을 이야기하는데, 이 작자의 설명이 너무 자기 중심적이라 중요한 단서를 독자가 포착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설명하면 "수상쩍은 보석상과 그 주변의 더욱 수상한 3명의 용의자" 일 뿐인데 이러한 관계가 몬테네그로라는 화자에 의해 불필요한 세부묘사와 더불어 대폭 각색되어 묘사되는 탓에, 추리는 별게 없는데 이야기만 지루하게 늘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황한 묘사만 견뎌낸다면 작품 자체는 특이하고 괜찮긴 합니다. 개인화되어 각색된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요소일 수 있으니까요. 동기는 변변찮지만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마술 트릭이 등장하는 "황도십이궁"은 첫 단편으로서 충분히 효과적인 작품이었고, 치밀한 동기에 더하여 서사적인 내용과 비교적 공정한 단서 제공이 돋보이는 "산자코모의 숨은 뜻"은 정말 파격적인 발상이 내포된 좋은 작품이었어요. 발상의 전환을 노리는 "타데오 리마르도의 희생자"와 합리적 전개의 "타이안의 기나긴 탐색" 역시 괜찮았고요.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제 3세계 추리문학이라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 외에도 상세한 주석이 포함된 번역과 책의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조금은 스테레오 타입일 수 있는 추리문학에 식상하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PS : 일본에서는 원저자인 "부스토크 도메크"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었는데, 국내에서도 아무리 보르헤스의 문명이 높다고 하더라도 원저자 이름으로 책이 나오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작가들의 의도를 따라 줬어야죠.

2021/01/15

외국어 전파담 - 로버트 파우저 / 혜화 1117 : 별점 2.5점

외국어 전파담 - 6점
로버트 파우저 지음/혜화1117

외국어 전파 과정을 통해 시대별로 당대 패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사,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책 속 저자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모어 외의 외국어를 개인이 배우는 이유는 '권력과 자본'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 잘 설명해 줍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층은 모두 모어 외 외국어로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귀족과 상인 세력이 성장하고, 제국이 붕괴되고 도시 국가가 융성하면서 고대 그리스어가 유행하게 됩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고대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걸 지원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문헌을 모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카톨릭 교회 견제를 위해 고대 그리스 문화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 과정에서 금속 활자로 독일어 성경이 출간되며 라틴어 영향력은 더 줄어들었고,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됨으로써, 영어와 프랑스어가 외국어에서도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의 영향하에 프랑스어도 밀려나 버렸습니다. 영어의 세계화는 외교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로 통일된 것으로 대표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당대 동아한시아 최강국 중국 영향권하에서, 모어와는 다른 한자어를 지배계층이 열심히 배웠다는 측면에서는 이와 다르지 않겠지요.

이러한 유럽 중심의 흐름과 함께, 제국주의와 식민지 하에서 유럽 국가의 언어가 제 3세계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의한 외국어 학습이라는 맥락은 동일하고요. 침략과 선교를 위해서, 일단 유럽인들이 현지 언어를 배웠다는 시작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빨간 리본"에서도 중국으로 향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인 '싼'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는 장면이 등장했었죠. 그러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현지인들이 권력, 자본을 손에 쥐고자 침략자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 뒤에는 식민지의 피지배층이 독립을 꿈꾸는 민족의식을 생성하지 못하게끔, 침략자들이 해당 식민지의 모어를 의도적으로 말살시키려 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공식 언어로 침략자들 언어를 쓰는 간단한 정책에서부터, 아예 민족 고유의 이름까지 바꿔버렸던 일본 제국 주의처럼 강력한 정책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렇게 식민지를 '내국인화' 하려는 강력한 정책은 식민지와 지배국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그 예로 아일랜드와 조선을 들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한 발상이에요.
민족 고유 언어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가 극대화된 파시즘적인 발상과 이 때문에 세계 공용어를 꿈꿨던 에스페란토어 관계자들이 히틀러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비슷한 관점으로,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꼭 필요한건 아니겠지만 화려한 도판도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냈고요.

그러나 이렇게 세계사 흐름과 동기화되는 언어 전파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왔지만 책의 또다른 축인 '어떻게' 배우는지, 즉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내용은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문법을 참고하는 학습법은 1471년 시작되었으며, 17세기에 예문으로 단어를 설명했고, 19세기 말, 벌리츠가 말하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학습법을 크게 유행시켰고 이후 습득 이론, 청각 구두 교수법, 의사 소통 중심 교수법 등으로 진화했다는 내용 등인데, 우선 각 학습법의 차이가 명쾌하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글보다 말이 중요하고, 독해보다 회화가 중요하다는 개념 정도만 이해될 뿐이었어요.

또 외국어 학습법과 외국어 전파 과정이 잘 연결된다는 느낌도 받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전파와 학습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처럼 세계사 흐름과 병행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어요. 세계사 흐름과 일치하여 머리에 쏙속 들어오는 외국어 전파 과정이 흐려질 뿐이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외국어가 전파되는 부분, 그리고 학습 방법의 진화 부분은 분리해서 따로 소개하던가, 외국어 전파 과정만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니다.

2019/03/30

맛의 천재 - 알렉산드로 마르초 마뇨 / 윤병언 : 별점 5점!

맛의 천재 - 10점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윤병언 옮김/책세상

이탈리아인이 자국의 유명 요리와 그 요리에 관련된 주변 역사까지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는 요리 관련 미시사 서적입니다. 딱딱할 내용을 재미나게 써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세집 운운하는 박찬일 셰프의 소갯글부터가 재미난데 이어지는 본문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유머가 가득합니다. 

요리 역사에 대한 사료적 가치도 엄청납니다. 피자만 해도, 피자의 역사만 오롯이 다룬 책도 읽어보았지만 오히려 이 책 쪽이 밀도가 더 높을 정도니까요.
원래, 19세기 초 까지만 해도 반죽에 먼저 치즈 등 식재료를 올리고 그 위에 토마토 소스를 뿌렸다는데 언제 이 순서가 뒤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원래 있었지만 요리사 라파엘로 에스포지토가 재치(피자의 이름을 묻는 왕비에게 왕비의 이름이라고 대답한)를 발휘한 덕분에 역사에 길이 남았다는 등 시시콜콜하면서도 실제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스파게티의 마르코 폴로에 의한 중국 유래설은 오류라고 합니다. 1929년 미국의 "마카로니 저널"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근거없는 기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사를 읽어보니 베네치아 뱃사람 이름이 스파게티였다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어서 이 기사가 사실처럼 굳어진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애초에 재료부터 다르니까요. 물론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수마트라 지방의 파스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제 중국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전해주기는 합니다. 당연히 마르코 폴로보다는 훨씬 전 시대에 말이죠.
또 스파게티가 주력 국수가 되고 마카로니는 샐러드 용으로 밀려난 계기는 1927년 크래프트 사의 파마산 치즈 가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마케로니는 귀족들의 음식이었는데 안타까와요.

샐러드는 이탈리아 대표 요리의 하나랍니다. 로마에서부터 먹어왔다지요. 소개되는 로마식 샐러드 레시피를 보니 식초는 아끼되 기름은 아끼지 말고, 소금은 많이 후추는 적당히 쳐서 먹는다는데 완전 제 취향입니다.
프로슈토는 고대 로마에서도 먹었던 유서깊은 음식으로 포 강 유역의 에트루리아 문명터에서 발굴된 뒷다리가 없는 돼지의 뼈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돼지 종류는 지금과 달랐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좋았어요. 또 놀랐던 건 당연히 생으로만 먹을 줄 알았는데 볶거나 익혀먹는 레시피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튀김까지 있는데 그 맛이 궁금해집니다. 

카르파초가 그 명성에 비하면 만들어진지 고작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놀랐네요. 실존 인물로 의사가 건강 문제로 날고기를 권했던 후작 부인 니나 모체니고를 위해 만들어진 요리라는 역사도 흥미롭고요. 이름도 화가 카르파초의 이름에서 따온 직접적인 네이밍이라는데 역시나 처음 알았습니다. 요리 창조자인 베네치아 해리스바의 주세페가 아들 아리고와 요리 이름에 대해 고민하다가 앞 벽에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의 전시회 포시터를 보고 옳다쿠나 싶어 이름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화가가 즐겨 쓴 붉은 색이 요리의 색상과 유사했기 때문이라는데 무릎을 칠 만 합니다.

후반부 누텔라 이야기에서는 다시금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누텔라가 어떻게 생겨났고, 그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현재와 같은 세계 정복 (?) 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그야말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쟁 제품까지 소개하니 말 다했죠. 그나마 누텔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던 "오무라이스 잼잼"에서의 내용은 그냥 겉핥기에 불과하더라고요. 그 외에도 옥수수, 모짜렐라, 와인, 티라미수 등 친숙한 음식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과감한 발상도 돋보입니다. 포크에 대해 소개하며 샤를마뉴 재위 당시 왕과 귀족들은 사냥한 동물들을 끊임없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통풍이 직업병과 같았다는 반쯤은 우스개스러운 이야기도 좋은 예지만, 로마 시대에 늑대는 야수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로마인들이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에 기반하며, 그들이 양을 먹지 않았기에 늑대는 경쟁자, 야수가 아니라 친구였다는거지요. 그러나 인간이 양을 먹기 시작하면서 늑대가 야수가 되었다는데, 무척이나 그럴듯합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먹인게 늑대였던 것이 이 발상을 뒷받침합니다.
와인과 사과주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이 세계를 뒤덮은 이유를 기독교와 연결시켜 설명하거든요. 초기 기독교, 로마 교회는 포도주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는데 알프스 북쪽 드루이드 교도는 사과주를 마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드루이드들 천국 명칭 '아발론'은 아발의 섬, 즉 사과의 섬이라는 뜻이라는 말과 함께요. 결국 로마 교회가 승리한 뒤 사과가 지옥을 상징하며 종교 행사에서 사과주가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지요.
샐러드가 식사의 시작에서 식사 도중의 곁들임 음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다시 식사 시작 음식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실제 역사적 사실 - 식초가 들어간 음식을 거부하는 문화와 비타민 유행 - 과 결합해 보여주는 내용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디테일이 탁월한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의 연회 문화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다양한 책을 읽었지만 와인을 따르던 전문가 코피에레에 대한 묘사는 처음 봤네요. 온갖 좋은 점은 한 몸에 다 갖춘 듯한 사람이더라고요. 길게 늘어뜨린 옷에 주홍색 양말,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 벨벳 신발을 신는다는 패션 센스마저 돋보입니다.
또 당시 요리들은 모두 단품이 아니라 코스였으며 당시 설탕을 많이 사용했던건 소금의 짠맛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는 발상도 눈에 띕니다. 그리고 안 좋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가 필요했다는 것도 사실과 멀었다는군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비싼 향료를 살 여유도 없었을 거라는게 이유인데 확실히 와 닿습니다.
캐비아는 원래 굉장히 싸구려 음식으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 병사들에게 보급품으로 캐비아 캔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참치 대뱃살, 킹크랩과 같은 과정을 밟은 셈이네요.

그 외에도 유명한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의 손길이 닿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저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모카 에스프레소 디자인 등 디자인 강국 이탈리아스러운 이야기들도 마음에 들었고 다빈치가 실제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는 이야기, 그곳에서의 일화도 기억에 남습니다. 음식의 양을 줄이고 플레이팅에 신경을 쓴 최첨단의 세련된 레스토랑이었는데 손님들 모두 격분해서 경영은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과연, 플레이팅 따위보다는 가성비가 최고인거죠.

이런 내용이 재미난 글과 함께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 있습니다. 단점을 찾는게 힘들 정도로 재미있고 가치도 높은 책입니다. 2만원이라는 가격도 수긍할만 합니다. 제 별점은 5점! 요리, 특히 이탈리아 요리를 사랑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탈리아인들은 정말로 위대한 민족이에요. 요리와 예술 측면에서는요.

2023/05/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2. 카라쿠리 미로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2. 카라쿠리 미로
다음 날, 토시오가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이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한 장의 종이를 놓고 몰두하고 있었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차나 마시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 테이블에 가져온 종이를 펼쳤는데, 그것은 소우지의 노트에서 복사한 미로의 개략도였다.
"카츠 군, 이 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이코는 미로가 그려진 그림을 토시오 앞에 내밀었다.
"커피, 커피로, 괜찮지?"
토시오는 우물쭈물 대답하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카츠 군은 카오리와 함께 미로에 들어갔지만, 미로의 중심부에는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형과 복연결형 두 종류가 있는데, 단연결형 미로에서는 한 손을 미로 벽에 대고 진행하면 돼. 손이 항상 벽에 닿아 있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맞지?"
"맞습니다."
"이 미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다지 어려운 미로는 아니야. 그게 문제였어.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미로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네가 시도한 방법으로 미로를 진행해보았어."
마이코는 성냥개비를 꺼내 토시오에게 건넸다.
"자, 이 그림으로 네가 실제로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미로를 통과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 끝을 미로의 왼쪽 벽에 대고 조용히 따라갔다. 성냥개비는 몇 개의 막다른 골목길을 돌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오각형의 중심에 도달했다.
"어때?"
마이코가 미로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도착했어요."
"반대편 벽으로도 시도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를 오른쪽 벽에 대었다. 결과는 같았다. 성냥개비는 똑같이 마지막에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카츠 군은 그때 벽에서 손을 뗀 적은 정말 없었어? 아니면 앞만 보고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걸 빼먹은건 아니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이 그림이 잘못 그려진건 아니야. 실제로 그날 소우지가 미로를 안내할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굽이굽이마다 구석구석 확인해 두었어. 이 미로는 단지 단연결된 미로에 불과해."
"그럼 저는 왜 미로 중심부로 골인하지 못했을까요?"
커피가 나왔다. 마이코는 설탕을 컵에 듬뿍 담아 제대로 섞지도 않고 마셨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꽤나 머리를 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미로로 보여. 하지만 실제로 미로에 서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골인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어.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의 세심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
"첫째, 이 모양에 주목해야 해. 오각형말이야. 이 모양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야."
"오각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요?"
"그래. 이상하게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형태는 삼각형도 아니고, 오각형도 아니야. 언제나 사각형이야. 네모난 집,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침대, 네모난 종이, 네모난 책 ...... 인간이 보통 접하는 대부분의 물건이 네모야. 잘 정비된 도시는 반드시 바둑판의 눈처럼 깔끔한 사각형으로 구분된 길이 붙어 있기도 하고. 길을 잃기 쉬운 길은 그것의 형태와 구분이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각형의 굴곡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사각형의 굴곡으로 인식될 것 같아."
"이 미로의 모든 면이 휘어져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것도 있지. 그리고 또 하나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의 시야를 없애는거야. 미로를 나아가다가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느낌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도록.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
"그랬어요.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햄튼 코트의 미로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일부에 이런 갈림길이 쓰여 있더라고. 하지만 부채꼴 모양으로 장식성은 있을지언정, 나사 저택의 미로처럼 현기증을 유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아. 나사 저택처럼 모든 길에 현기증이 나는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또 이 미로를 자세히 보면........"
마이코는 빨간 연필을 꺼내 미로의 바른 길을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바른 길 말이야. 미로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심부를 향하게 돼. 그래서 당연히 중심부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른 길은 미로의 중심을 등지고 돌아가야만 하는 갈림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 ……. 뭐, 이것은 미로의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건 이렇게 다양한 장치를 담은 미로가 결국 단연결 미로였다는 점이야."
"단연결 미로는 안 됩니까?"
"안 돼지. 카츠군이 시도한 방법, 즉 손을 벽에 대고 나아가는 방법은 미로를 소개하는 책에는 반드시 설명되어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풀 수 있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야. 오각형 등 여러가지 장치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말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저는 미로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죠......"
"그게 핵심이야. 이 미로를 굳이 단연결로 만든 것은, 때로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이 절대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해."
"절대로 골인할 수 없는 장치?"
토시오는 무심코 미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실제로 토요일에 카츠 군이 미로 중심부에 골인하는데 실패했잖아? 그거야말로 단연결 미로 해결 방식으로는 중심부로 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그런가요?"
"다시 한 번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이코는 비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코트를 에그의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나사 저택 안에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웠다.
마이코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라키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나라키 대신 호시자와가 저택에서 나왔다.
"당신이 오면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
호시자와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혼잡한 것 같네."
마이코는 늘어선 차를 보며 말했다.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이 모였어. 사장님을 중심으로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핵심 간부를 두 명이나 잃었으니, 회사로서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일 것이다.
"데츠바씨는 잘 지냈어?"
"건강해 보여. 강인하더군. 아들과 딸을 잃고도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약한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 대단한 분이야."
"마사오 씨를 만나고 싶은데..."
"안 돼."
"안 된다고? 설마, 용의자로 지목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안 돼. 바빠서 말이야."
"언제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용건인가?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나라 공이 그렇게 시켰겠지. 변함없이 융통성 없는 남자로군."
"우리가 알면 안돼는 용건인가?"
"뭐, 됐어. 그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닐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술에 취한것 같은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아.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나쁜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거야."
"경찰이 민간인의 협조를 거부하게 된 건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괜찮지 않아? 호위병이 있어도 상관없어."
호시자와는 마지못해 차를 통과시켰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쉬고 나면 바로 돌아가. 오늘은 마사오 씨와 만날 수 없어."
라며 말렸다.
마이코는 어슬렁어슬렁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호시자와는 한 순경을 붙잡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호위병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정자의 흙에는 아직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흙에 흡수되어 신경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마이코는 정자 앞의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미로 쪽으로 걸어갔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따라 천천히 미로를 돌았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마이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라고 말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토시오도 뒤따라 달렸다. 마이코는 그대로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이코는 미로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확하게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지도대로야."
마이코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카츠 군은 왜 그날 실패했던 걸까?"
마이코는 돌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뭔가 ......."
마이코는 돌로 된 테이블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탁자 밑으로 몸을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성냥개비의 타버린 조각이었다. 끝이 씹혀서 부서져 있었다. 마이코는 지겹다는 듯 성냥개비를 탁자 밑에 버렸다.
"미로 안에 돌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토시오는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 그림에도 제대로 적혀 있어요."
마이코는 그림의 ○표를 가리켰다.
"올바른 길은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도록 되어 있군요."
"맞아. 올바른 길로 지나가면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아. …….잠깐만. 의자 앞을 지나쳤다고?"
마이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날 의자 앞을 지나쳤어?"
"네."
마이코는 지도를 두드렸다.
"이 지도에서는 의자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표시되어 있어."
마이코는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중앙을 벗어나 미로를 거꾸로 따라간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쪽에 타원형의 돌이 보였다.
"의자는 이걸 말하는거지?"
"맞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나는데요."
마이코는 몸을 굽혀 타원형 의자를 면밀히 살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마이코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의 속임수를 알아챈 것 같아."
마이코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다시 미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심부 입구의 울타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울타리의 바로 뒷편에 돌 의자가 놓여 있어."
마이코는 계속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울타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버 같은 것이 나와 있어. 잡아당겨 보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마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울타리는 마치 문처럼 움직여 오각형의 중심부 광장을 꽉 막아 버렸다.
"즉, 의자 앞의 통로가 열려있으면 ……. 이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반대로 이 중심부는 닫힌 방으로 변해버리게 돼지. 여기가 닫히면 더 이상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이코는 다시 한 번 닫혀 방처럼 변해버린 미로의 중심부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기에는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이 장난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토시오는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땅속에서 물이라도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오각형 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에 있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탁자는 튕겨져 나오듯 일어섰고, 탁자 밑에 있던 오각형의 포석이 가라앉으면서 오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구멍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구멍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꽤 깊었고, 돌계단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희미하게 불어왔다.
"이게 뭐죠?"
토시오는 깜짝 놀라며 마이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이야."
마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조경은 인공적인 도원향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었어. 정원에는 이국적인 정자, 분수, 미로, 실물 크기의 자동 인형이 놓여 있고, 동굴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
"이 동굴은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상상으로는 반반인 것 같아. 오나와라는 땅에서는 고대인의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니, 고대인이 살던 동굴을 조금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오나와라는 지명은 다혈(多穴)이라는 뜻의 '오아나(おおあな)'가 사투리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이 큰 돌 탁자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력인가요?"
"전력 따위가 아니야. 수력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들리네요."
"이 동굴은 꽤 넓은 것 같아. 연못의 물이 흘러서 동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저 레버를 당기면 그 물이 한꺼번에 흘러서 그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동굴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나사 저택은 마와리 호도가 만들었지만, 이 동굴은 호도의 아버지인 사쿠조가 만든 것 같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사쿠조는 이상향으로 이 동굴을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닌것 같아. 이 미로부터가 매우 폐쇄적이니까. 단지 재미나 장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장난은 불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동굴이 열려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미로를 닫아놓는 거군요."
"내려가 보자."
마이코는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손전등과 양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다이 씨는 미로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토시오가 놀랐다.
"마와리 가문의 철야 때 만났던 스님이 미로를 만드는 동기도 다양하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어."
마이코는 직접 촛불을 들고 손전등 쪽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지금도 이 미로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군가가 이 미로를 손질한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양초가 필요해. 만약 양초의 불이 꺼지면 산소가 없다는 뜻이니까."
마이코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구멍 옆에 섰다. 동굴의 바람이 불어서 양초의 불이 꺼져버렸다. 마이코는 불을 다시 붙인 뒤 바람을 피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뒤따라가며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돌은 검고 축축하고 가팔랐다. 동굴 안은 따뜻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이코는 돌계단 중간에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의 성냥개비 조각이 떨어져있었다. 동굴의 문이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온걸로 보였다.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계단은 꽤 깊었다.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여섯 장 정도의 넓이의 돌방이 나왔다. 바닥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하얀 거미 같은 벌레들이 도망쳐 나갔다. 석실 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나란히 눈동자처럼 열려 있었다.
"보라고."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마이코는 방금 내려온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박쥐의 손아귀처럼 녹슨 쇠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로 미로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지."
마이코는 막대기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물러섰다,
"지금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지. 호위 아저씨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이코는 두 개의 동굴 안쪽에 촛불을 비췄다.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물론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카츠 군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마이코는 촛불의 반짝임 속에서 섬뜩하게 웃었다.
토시오는 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근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론적으로 풀려고 하네."
마이코는 토시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하지만 두 동굴 어느 쪽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또 한 쪽 손을 벽에 붙이고 가야할까? 이 구멍은 꽤 길 것 같은데?"
"그럼, 우다이 씨는 어느 길이 맞는지 알 수 있나요?"
불만을 품은 듯한 토시오의 목소리에 마이코는 다시 웃었다.
"물론, 왼쪽이야."
마이코는 망설임 없이 왼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꺾는 순서를 메모해 둘까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어."
"그럼 동굴의 길찾기 지도를 찾았나요?"
"그런 것,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천장이 낮아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걸어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이코가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바라보았다.
"왁스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 내 생각이 옳았던 것 같군."
그러다 길이 다소 넓어지고 평탄해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로 접어들었다.
"봐."
마이코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구멍은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를 거야. 한쪽은 벽을 깎은 흔적이 새롭지. 그러니까 이 두 구멍이 생긴,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새로운 구멍은 동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길을 선택하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새로운 구멍은 불완전했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길 순서는 새로운 구멍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요?"
"결국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이코는 얼른 오래된 쪽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의 폭이 넓어지고, 왼쪽에 좁은 도랑이 뚫려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이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상하네. ...... 누군가가 미로의 문을 닫은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걸음을 옮길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 폭포가 있어."
"폭포가? 동굴에?"
토시오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코는 촛불을 들었다. 그 빛 끝에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가느다란 폭포였다.
폭포가 있는 곳은 꽤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석실 양 옆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고, 두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듯한 바위가 있고, 물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표면은 물보라로 빛나고, 떨어지는 물은 도랑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폭포는 두 갈래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각각 뾰족한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접시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고인 물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폭포를 바라보던 마이코가 몸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동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요?"
토시오는 마이코가 선택한 동굴에 전등을 비췄다.
"아하, 동굴의 지도가 있었군요."
마이코가 돌아보았다.
"있었어. 엄청나게 큰 녀석이."
"어디에요?"
마이코는 천장을 가리켰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땅 위에 있었어."
토시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마이코는 양초를 토시오에게 건네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 나사 저택의 주인인 마와리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했다고 하지. 장난감의 창작보다는 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작은 회사였던 츠루슈도를 해바라기 공예라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장난감 나라에나 나올 법한 나사 저택 같은 집을 지었을까?"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요?"
"아니야. 호도는 장사도 잘한걸 보면 굉장히 계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일거야. 변덕스럽게 이런 이상한 건물을 만들지는 않았을테지."
"그럼 또 다른 동기가 있었나요?"
"그래. 나는 나사 저택 같은 기괴한 건물이라면, 정원에 이상한 미로가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있을 거라는게 이유라고 생각해. 만약 일반 가정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봐. 미로만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미로에 집중되었을거야."
"그럼 미로를 만들고 싶어서 호도는 나사 저택을 만든 건가요?"
마이코의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그 미로는 왜 만들었나요?"
토시오는 그때까지 미로를 만들어야만 했던 호도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왜 미로를 만들었을까?"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오각형의 미로 그림을 펼쳤다.
 
"이건 땅에 그린 동굴의 지도인 것 같아."
"지도? ...... 에서도 이 동굴은 오각형이 아니잖아요."
"지도라는건 실물과 똑같은 축척으로 그려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도쿄의 야마노테 선의 지도는 만두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잖아. 즉, 실제 길과 그림이 상대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림은 아무리 변형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나사 저택의 미로와 이 동굴의 길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지."
"위상적?"
"오각형 미로의 입구와 골목을 잇는 길에 밧줄 하나를 놓았다고 하자. 그 밧줄에 갈림길, 즉 막다른 길에도 밧줄을 뻗어 본길과 연결해 주는 거지. 미로 안의 모든 길에 밧줄이 깔렸을 때, 밧줄을 빼내어 양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라고."
"내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융통성 없는 남자네. 로프를 훨씬 더 짧게 만들어서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될 거야."
마이코는 미로 그림을 토시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는 그림의 모서리에 나뭇가지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미로나 동굴의 길을 생각할 때 길의 길고 짧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의 굴곡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길이 아무리 구불구불하고 각이 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다만 문제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지."
"오각형의 미로와 동굴의 길이 같다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갈림길에서는 미로와 같은 방식으로 꺾어 왔던 거군요."
"맞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것 같네."
"동굴의 지도를 그리는 데 왜 이런 엉뚱한 방법을 택한 거죠?"
"호도는 일반인에게 동굴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어. 그런데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놓을 경우,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저택 안에 동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문제가 많지. 그래서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미로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생각해냈던거야."
"미로 자체가 지도였던 거군요"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지상에 크게 그린 거지. 설마 이것이 동굴의 길을 표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숨기려고 한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궁에는 왕과 크로커다일이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호도는 그저 통로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나사 저택 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마이코는 다시 한 번 지도를 훑어본 후 촛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의 굴곡은 점점 심해져 불규칙한 계단과 언덕이 이어졌고, 땅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로 둘러싸인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길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듯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각형의 미로에 대응시키면 E의 지점에 해당되지."
마이코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로의 E 지점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이코는 주변의 바위를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동굴 안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고 해. 물론 다양한 장식도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는 벽면에 많은 불상 등이 새겨져 있었어.”
"이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나요?"
"없군. 보이지 않아. 그냥 맨땅과 흙이 있을 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용주의적인 냄새가 나네요."
마이코는 바위 틈새에 몸을 넣었다.
"오각형의 미로에는 본 길에 대해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 막 여섯 번째를 지나고 있는 중이야. 내 생각대로라면 드디어 출구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 출구에 도달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길은 쉴 새 없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좁은 곳은 몸을 옆으로 눕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처음에 돌계단을 내려왔던 곳과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넓이도 거의 비슷했고,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도 있었다. 토시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는 레버가 없어."
마이코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이코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마이코의 말대로 돌계단 옆에 있던 막대가 이 방에는 없었다. 막대기뿐 아니라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 보자"
마이코가 먼저 서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 중간쯤에 뾰족뾰족한 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두꺼운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녹슨 철제 틀이 끼워져 있고, 나무 껍질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름을 바른 흔적이 있네."
문의 경첩을 보고 있던 마이코가 말했다.
마이코는 문에 살며시 체중을 실었다. 문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마이코는 촛불을 껐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해."
마이코가 작게 말했다. 토시오는 시키는 대로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문 반대편 상황을 살폈다.
마이코는 몇 숨을 쉬고 나서 문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크게 움직였다. 문 반대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희미하고 먼지가 자욱한 방이었다. 사방이 거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빛은 천장 가까이 열린 작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토시오는 어렸을 때 친구 집에 있던 낡은 창고를 떠올렸다. 바로 그 창고 안과 똑같았다. 낡은 인형, 제등, 검은 상자 더미, 큰 화로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무심코 방금 들어온 문을 닫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문은 방에 면한 쪽이 사방의 벽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당황하여 문을 찾으려고 벽을 쓰다듬고 돌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문이 없어졌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말했다. 마이코는 벽의 위아래를 살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마이코는 문이 사라진 곳의 기둥을 세게 잡아당겼다. 기둥과 벽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뒤에 기둥과 벽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코는 문을 다시 닫으면서 오른쪽 벽에 주목했다. 이 벽이 미닫이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마이코가 벽에 손을 얹고 힘을 주자 벽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틈이 나타났다. 마이코는 틈새에 눈을 대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대로군. 데츠바의 방이야."
마이코는 벽을 크게 당겼다. 벽의 구멍 맞은편에 갈색 종이가 걸려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대담함에 놀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종이는 족자야. 이곳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이고. 이 족자는 산수화지. 그날 나는 이 방에서 산수화를 보며 데츠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
마이코는 족자를 치우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이코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
마이코는 신발을 걷어차고 구멍을 빠져나갔다. 토시오도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방.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상 위에 데츠바가 엎드려 있었다. 데츠바는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열린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듯 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