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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 무라야마 도시오 / 김윤희 : 별점 2점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 4점
무라야마 도시오 지음, 김윤희 옮김/21세기북스

라면 관련 서적은 그동안 꾸준히 읽어 온 책 중 하나입니다. 보통 라면의 유래와 지역별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즉석 라면을 만든 안도 모모후쿠에 대한 이야기 등이 주로 소개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딱히 새로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새로운 내용이라 놀랐습니다. 안도 모모후쿠 시점의 이야기가 아니라, 묘조 식품의 오쿠이 사장이 즉석 라면 시장에 뛰어들어 회사를 성장시키는 과정, 그리고 우리나라 삼양 그룹의 전중윤 사장이 라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거쳐 오쿠이와 손을 잡아서 기술 이전 등을 받은 끝에 결국 라면을 출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 그대로 바다 건너 라면을 오게 만든 이야기지요. 

이렇게 라면의 원료 등은 전혀 상관없는 일본과 한국의 특정 라면 회사의 성장기이며 '즉석 라면 산업' 하나 만을 바라보고 쓰여진 책이라는 점에서 다른 라면 관련 서적과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기업 성공담, 기업인 자서전과 더 비슷합니다. 오쿠이와 전준융 사장 두 명의 활약을 비롯하여 건면을 제조하던 묘조 식품에서 라면을 만들기 위해 설비를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이디어들, 닛신 그룹의 특허를 벗어나기 위해 묘조 그룹이 최초로 라면 스프를 별도 포장하여 제공했으며, 삼양 그룹이 최초로 들여온 라면 제조 설비는 묘조 식품 것으로 라면 제조 관련 기술은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등 소개되는 여러가지 일화들 대부분이 회사와 라면 산업 성공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삼양 식품의 전중윤이 라면 설비를 들여오기 위한 외화 확보를 위해 김종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장면도 기업인 자서전같다는 인상을 더욱 크게 해 줍니다.

그러나 좋은 책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과장된 드라마가 너무 많은 탓입니다. 오쿠이와 전중윤 사장 두 명을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대단한 인도주의자로 그리고 있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묘조 식품과 삼양 식품의 사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에 가까운 용비어천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전중윤이 제일 생명 사장으로 취임한 뒤, 라면 산업에 뜻을 품게 된 계기라는 남대문 시장에서의 꿀꿀이 죽 일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담배꽁초까지 들어 있는 쓰레기 꿀꿀이 죽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먹는걸 보고 충격을 받은게 계기라는데, 이를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고 묘사하는건 과장이 너무 심했어요. 이 장면에서만 이렇게 격한 감정을 드러내었더라면 극적인 장면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류의 묘사는 이외에도 너무 많아서 논픽션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중앙 정보부장 김종필마저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능력자로 그려지고 있는 등, 다른 인물 대부분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도 거부감이 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라면의 역사와는 크게 관계없는, 흔해빠진 비지니스 성공담을 그린 픽션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기도 해서 자료적인 가치도 별로고요. 라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시라도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5/10/09

라면이란 무엇인가 - 가와이 단 / 신은주 : 별점 1.5점

라면이란 무엇인가 - 4점
가와이 단 지음, 신은주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수많은 요리 만화 중에서 재미 면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라면 요리왕"의 작가 가와이 단이 새롭게 선보인 라면 만화라고 착각해서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맥이 풀릴 정도로 재미없고 지루한 책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라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시공을 초월하며 출몰하는 주인공 '박학다식 선생' 운치쿠 유조의 입을 빌려 대사로 전달하는, 일종의 라면 설명 찌라시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있는 드라마라면, 라면 오타쿠인 운치쿠에게 반한 아이쓰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라면 공부를 시작한 남자친구 쇼짱 이야기 정도인데, 이조차도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아 사실상 이야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다고 라면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대사 처리와 관련 라면 컷 한 장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함께 이어지고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라면의 뿌리는 중국, 1871년 청일수호조약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일본으로 이주한 후 처음 만들어졌지. 1880년, 요코하마에 2172명, 고베에 516명, 나가사키에 594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지. 요코하마엔 난징 거리가 생겼고, 이곳을 다닐 수 있는 일본인은 무역, 해운, 세관 일을 하는 한정된 사람들뿐. 이 즈음 등장한 일본 최초의 라면은 담백하게 소금 간을 한 돼지고기 국물에 하얗고 부드러운 면을 넣은 것으로 '난징 소바'라고 불렀는데 요즘 라면과는 꽤 거리가 있었지."

이런 식의 설명이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이어지며, 컵라면을 설명하는 챕터 역시 "기적의 프로젝트 X : 컵라면의 탄생" 쪽이 훨씬 드라마가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래도 작가가 정말로 라면을 사랑하는구나 싶기는 하더군요. 지루하긴 해도 라면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라면 요리왕"보다도 꼼꼼해서 완성도도 높고요. 무엇보다도 정보 전달이 중심이긴 하지만, 워낙 많은 정보를 소개하고 있어서 새롭게 안 사실도 많습니다.
덧붙이자면, 주인공 운치쿠 유조는 미디어 팩토리의 학습만화 고유 캐릭터라고 합니다. 이 학습만화 시리즈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라면, 그러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던 제 잘못도 분명 있겠지요.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라면 만화'로서는 최악의 만화로, 성립을 위한 최소한의 이야기조차 없는 구성이었기에 도저히 점수를 더 줄 수 없었습니다. 단, "라면 정보" 부분에서 그나마 0.5점을 얹었습니다. 가격도 꽤 비싼 편이었는데 전혀 제값을 하지 못한, 근래 보기 드문 최악의 충동구매 서적입니다. 어떤 책인지 꼼꼼히 알아보지 않고 구입한 제 잘못이긴 하지만, 입맛이 씁니다.

2026/05/23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4) 최선을 다해 못 만들다.

추리소설과 장르문학의 세계에는 맛있는 음식과 요리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사건의 무대가 되는 저택의 만찬, 탐정이 즐겨 먹는 단골 메뉴,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음료와 간식까지, 음식은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인상적으로 쓰이지요. 그런데 의외로 맛없는 음식도 꽤 많이 등장합니다.

대개는 그냥 못 만든 음식입니다.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가 차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이보다 더 맛없을 수 없는 카레라이스를 먹었다”고 하는 것처럼요. 정성 없이 대충 만들어져 아무런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음식들입니다. 현실에서도 한 번쯤은 만나 봤을 법한,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들이지요.

하지만 작중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의 처지를 보여 주는 경우입니다. 예전에 소개해 드렸던 메그레 경감 시리즈인 "생폴리앵에 지다"의 죄네가 먹는 소시지 빵이 대표적이지요. 그 빵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죄네의 궁상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소품이었습니다.

마거릿 애커우드의 귀족 영애 시리즈 중 한 권인 "야간 열차 살인 사건"에 등장하는 하숙집 요리도 비슷합니다. 귀족 영애 프란실르의 의뢰로 용의자가 살고 있는 하숙집에 잠입한 탐정 버트가 마주하는 식사인데, 하숙집이 얼마나 엉망이고 주인이 얼마나 비양심적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지요.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닦은 적 없어 보이는 식탁,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는 더러운 식기, 그리고 형편없는 식사까지. 그런데도 나름대로 코스 요리라는 점이 놀랍기만 합니다. 수프는 거의 꿀꿀이죽 수준이고, 말고기로 의심되는 육즙과 지방이 엉겨 있는 납작한 구운 고기와 총알만큼 딱딱한 감자, 밀가루와 기름 범벅인 구스베리 푸딩, 마지막은 찻잎 세 개로 우려 낸 뜨거운 물 순서입니다. 식사 후 버트가 침대에 누워 1차 대전 전장이 더 편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런 음식들은 말하자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맛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인물의 처지와 공간의 수준을 보여 주는 데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례도 있습니다. 단순히 못 만든 음식이 아니라,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맛없는 음식 말입니다. 바로 아즈마 나오미의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3작 "사라진 소년"에 등장하는 라면집 "현화원"의 라면입니다.

이 라면은 악명이 대단합니다. 택시 운전사가 “그 라면집 정말 별로예요! 손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정말 맛이 없어요!”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주인공이 그래도 가겠다고 하자 원통하다는 듯 입술까지 깨문다는 묘사에서는, 단순한 평판을 넘어 거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감정마저 느껴집니다. 주인공이 주문한 냉라면을 한 입 먹고 내린 평가도 압권입니다. 가게 주인의 배짱에 감탄하면서, 이런 라면을 먹이고도 돈을 받는다니 어지간히 대담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지요. 식욕이 지평선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표현까지 나오니, 얼마나 맛이 없는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삿포로 스스키노를 무대로 한 작품인데도 삿포로 라면의 대명사인 미소 라멘이 아니라 다른 라면처럼 보인다는 점도 묘하게 눈길을 끕니다. 아무리 엉망인 육수라도 어느 정도 맛을 보장하는 미소 라멘이 아닌데다가, 심지어 맛까지 없다니 황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라면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형편없는 음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최선을 다해 못 만든 라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싸구려 하숙집 음식이나 휴게소 카레라이스가 무성의함의 산물이라면, "현화원"의 라면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인공은 현화원 주인의 도움으로 실종된 아이가 다니던 중학교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고, 나름대로 실마리를 잡지만 결국 놓쳐 버립니다. 낙심한 채 새벽 거리를 헤매다가 현화원을 다시 찾는데, 여기서 비로소 "현화원" 아저씨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는 밤 10시까지 가게를 열어 놓고도 새벽 6시부터 다시 라면 준비를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육수도 돼지뼈 국물과 닭뼈 국물을 섞는 블렌드를 쓰고, 가게만의 비밀 재료까지 있다고 강조하지요. “어쨌든 라면은 국물 맛으로 승부가 나니까, 시판되는 육수를 사용하면서 프로라고 말할 순 없지.”라는 말까지 합니다. 심지어 지방의 단맛을 살리는 게 아주 어렵다며 직접 만든 차슈를 주인공에게 잘라 먹여 주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것 역시 맛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웃지 않을 수가 없지만, 아저씨의 장인정신과 도전정신에는 오히려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 정도면 안자이 미즈마루의 “최선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에 대응하는 “최선을 다해 못 만든 라면”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음식들 역시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주역은 아닙니다. 주인공의 좌절감을 드러내거나, 기묘한 유머를 만들어 내거나, 싸구려 하숙집의 수준을 보여 주는 보조적인 장치에 가깝지요. 제가 아는 한, 이야기의 핵심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한 맛없는 음식은 "전쟁터의 요리사들"에 나오는 분말 달걀 스크램블드에그가 거의 유일합니다. 말 그대로 군대 배급품인 분말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드에그로 봉지를 뜯어 거대한 볼에 가루를 쏟아 넣고, 물을 더해 주걱으로 섞은 뒤 뜨거운 트레이에 부어 만드는 음식이지요. 문제는 그 맛과 질감입니다. 스펀지를 씹는 느낌인데다 기름 냄새 비슷한 악취가 나고, 배에 유난히 가스가 찬다고 합니다. 전쟁터라면 웬만한 음식은 다 감사히 먹게 될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라니 대체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이 단지 맛없기만 했다면 이야기의 주역까지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요리가 핵심이 되는 이유는, 보급된 분말 달걀 수십 상자가 창고에서 사라진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목적은 보급 담당 장교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었지만, 주인공을 비롯한 몇몇 인물은 병사들 중 누군가가 그것을 먹지 않기 위해 훔쳐 갔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그만큼 맛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또 그 추리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렇게 보면 맛없는 음식도 충분히 이야기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읽다 보면 의외로 꽤 흥미롭기도 하고요. 전에 소개드렸던 '반전을 차린 식사' 속 요리들도 마찬가지지요.

현실에서도 우리는 맛없는 음식 이야기를 종종 재미삼아 나눕니다. 누구네 식당의 형편없는 반찬이 어떻다, 어디서 먹은 음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은근히 오래 가니까요. 게다가 작가들의 현란한 묘사까지 더해지면, 이상하게도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까지 생깁니다. 지금은 미식과 탐식이 유행하는 시대이지만, 언젠가는 괴식이나 맛없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장르문학 속에서는, 맛없는 음식 역시 이미 자기만의 자리를 꽤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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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8

라면요리왕 1~26 - 카와이 텐 / 쿠베 로크로 : 별점 3점

라면요리왕 26 - 6점
카와이 텐 글, 쿠베 로크로 그림/대원씨아이(만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다이유 상사에 근무하는 라면매니아 후지모토 코헤이와 카리스마 라면장인 라면 세류보의 세리자와의 긴 인연과 승부를 축으로 여러가지 라면들이 펼쳐지는 라면전문 요리만화. 자신의 꿈을 위한 수단으로 직장을 다니는 후지모토와 라이벌인 라면 장인 세리자와 캐릭터와 둘 사이의 대결 구도가 선명하며, 등장하는 라면이 워낙 멋드러지고 맛있게 묘사되는 탓에 인기가 있는 작품인데 26권으로 드디어 완결되었네요. 깔끔하고 완벽한 마무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후지모토가 세리자와에게 완벽하게 이기고, 필생의 꿈인 라면가게를 쇼코와 함께 개업한다는 결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세리자와가 패배한 원인이 결국은 1권에서부터 이어진 이유와 동일하다는 것 때문에 잘 안배된 느낌을 전해줍니다. 다른 사건과 복선, 인간관계도 티끌만큼의 여운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정리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마무리의 교과서라 불러도 될 정도에요.

때문에 괜찮은 만화 작품이 또 하나 끝났다는 아쉬움도 있긴 해도 완벽한 마무리라는 측면에서 작가에게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맛의 달인" 같은 재미와 흥미거리는 이미 다 떨어진채 좀비처럼 연명하는 장기 연재물보다야 이러한 깔끔한 끝맺음이 7만배는 낫죠. 최근 보기드문 미덕이기도 하고요.

아주 뛰어난 그림이나 거창한 사건 없이도 재미있는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완결도 되었으니 1권부터 한번에 차분히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7/07/29

라멘의 사회생활 - 하야미즈 겐로 / 김현욱, 박현아 : 별점 3점

라멘의 사회생활 - 6점
하야미즈 겐로 지음, 김현욱.박현아 옮김/따비

라멘이 현재의 위치를 점하게 된 이유를 다양한 사회 현상과 연결하여 설명해주는, 식문화서이자 미시사-사회사 서적입니다.

뻔한 라멘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라멘의 발전을 주변 환경 및 사회의 흐름과 함께 엮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 설명이 상당히 그럴듯하고 이치에 합당한건 물론이고요.
안도 모모후쿠의 '치킨 라멘'이 대세가 된 이유로 전후 극심한 식량난을 든다던가(쌀 부족으로 인한 밀가루 음식의 발전), 전쟁 전부터 있었던 '지나 소바', '주카 소바' 등의 명칭이 '라멘'으로 통일된 것은 닛신 식품의 텔레비전 광고 덕분이라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삿포로 미소 라멘이나 규슈 돈코츠 라멘은 모두 각자 독립적으로 발전한 음식이지만 이 모든게 '라멘'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된건 역시나 텔레비전 광고 때문이며 이러한 지역적 특산물 라멘은 원래부터 있던게 아니라 관광지화 되면서 그 지역의 유명 라멘이 순식간에 퍼져 굳어진 것이라는 등 새로운 분석이 가득합니다.
안도 모모후쿠의 '치킨 라멘'이 포드의 T형과 마찬가지로 대량 생산하는 공업 제품으로 접근하여 성공했다는 시각도 독특했어요. 여기서 피터 드러커의 그것과 유사한 '데밍'의 피드백 방법론이 도입되었다는 것도 그러하고요.
이런 내용을 "사자에 상", 마쓰모토 레이지의 최초 소년지 장기 연재 출세작 "사나이 오이동", 영화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 등과 같은 다양한 콘텐츠, "아사마 산장 사건"와 같은 당대 유명 사건 등과 함께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가 쉽다는 것 역시 큰 장점입니다. "사자에 상"의 경우는 무려 1948년 연재된 에피소드를 가지고 설명할 정도라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흔하게 접했던 라멘의 유래에 대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나름의 '고급' 정보들도 눈에 띕니다. 메이지 시대 중기 요코하마나 나가사키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길거리 음식 '난킹 소바'로 일본에 들어온 후, 도쿄 아사쿠사의 중화요리 식당 '라이라이켄'에서 지나 소바를 처음으로 내 놓았으며, 이 때 아사쿠사 말고 다른 지역에서 지나 소바의 침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게 바로 이동식 포장마차 "차루메라"라고 소개하면서 에도가와 란포가 이동식 포장마차를 했다고 알려주는 식입니다. 의외네요.

이외에도 재미있는 정보가 많습니다. 나폴리탄 스파게티에 대한 설명이 그 중 인상적이었어요.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이리에 시게타라고 전해지는데, 그는 종전 직후에 아쓰기 비행장에 내린 더글라스 맥아더가 처음 머물렀던 요코하마의 호텔 뉴그랜드의 셰프였습니다. 그가 미군 병사가 가져온, 스파게티에 토마토 케첩을 뿌렸을 뿐인 간이 전투 식량에 피망과 햄을 넣어 이 요리를 발명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이것이 미군 점령기를 지나 미국 것을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새로운 문화가 도래한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우리로 따지면 "부대찌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 특산물 라멘" 이야기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전통이고 뭐고 없는 음식으로, 관광지로 해당 지역이 유명해지면서 삽시간에 유명해졌을 뿐이라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진주 냉면'과 같은 동일, 유사 사례가 많지요.

라멘이 지금과 같은, "라면 요리왕"에 나오는, 장인이 요리하는 음식으로 발전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누벨 퀴진 및 슬로푸드 운동과 결합하여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도 누벨 퀴진의 특징은 현대 라멘집과 정말 딱 들어맞더군요.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며 지방의 서민적 음식 문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요. 구체적으로는 식재료의 풍미를 살리는 것과 전통보다 요리사의 창의력을 중시하고 그 지방의 제철 소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라면 요리왕"에 등장하는 라면 장인 세리자와의 "라면 세류보"가 바로 떠오릅니다. 오너 셰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말린 은어의 풍미를 살린 담백한 맛, 진한 맛 라면이 대표 요리라는 점에서요.

중간에 장인 정신으로 무기를 만든 탓에 미국의 생산성에 뒤져서 전쟁에 졌다는 난데없는 이야기는 황당했고 '라면 지로'에 대한 이야기는 분량에 비하면 알맹이는 별로 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아, 도판이 극히 드문 편임에도 가격이 16,000원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그래도 장점이 더 많습니다. 재미있는 정보, 새로운 시각이 가득 담겨 재미있게 읽었어요. 라면, 아니 라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1/31

라멘이 과학이라면 - 가와구치 도모카즈 / 하진수 : 별점 3점

라멘이 과학이라면 - 6점
가와구치 도모카즈 지음, 하진수 옮김/부키

라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밝혀나가는 책입니다. 음식 관련 과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죠. 이 책이 풀어낸 라멘에 관련된 내용은 크게 아래의 아홉 가지 항목입니다.

  • 1장_무엇이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가?
  • 2장_해장 라멘이 더 맛있는 이유
  • 3장_쫄깃쫄깃 면발의 과학
  • 4장_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라멘의 맛
  • 5장_화학조미료는 라멘의 친구인가, 적인가
  • 6장_기름과 건조 기술의 결정체, 인스턴트 라멘
  • 7장_라멘 명가의 맛을 과학으로 재현하다
  • 8장_라멘은 먹는 소리도 맛있다
  • 9장_사람들이 그 가게 앞에만 줄을 서는 이유

항목별로 간단히 살펴보자면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감칠맛'을 꼽고 있으며, 이 감칠맛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 줍니다. 일본의 맛국물은 보통 다시마와 가쓰오부시를 함께 사용하는데, 그래야 더욱 맛있어진다는군요. 이는 글루탐산의 단독 사용보다 이노신산과 조합할 경우 감칠맛이 7~8배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가쓰오부시나 다시마의 향 성분은 물에 녹아나서 라멘의 경우, 국물맛이 농후해진다고 하네요.

두 번째 장에서는 음주 후 숙취 해소를 위해 라멘이 땡기는 이유를 탐구합니다. 이 역시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술을 마시면 당을 만드는 원료가 부족해져서 혈당이 떨어지는 탓에 당이 필요해져서 단 것이나 탄수화물을 먹고 싶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알코올이 뇌 신경에 작용하여 공복감을 증가시키기 때문이고요. 과음 후 단 것을 먹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행복한 기분이 되는데, 술 먹고 라면을 먹으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군요.
당연히 술을 먹고 라멘을 먹으면 몸에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전문가가 추천하는 술 마시고 좋은 음식은 스포츠 음료에요. 이유는 당과 소금, 염분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즙 100% 오렌지 쥬스도 좋다는군요. 수분 섭취에 칼륨도 많아서 과하게 섭취한 나트륨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며, 지방과 당 분해를 촉진하는 비타민 B1, B2도 풍부하니까요. 앞으로 저도 음주 후에는 과즙 쥬스를 먹어봐야겠습니다.

세 번째 장은 제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라멘은 자가 제면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소바의 경우 풍미가 바로 날아가므로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만들며, 공장에서 만들 경우 배송 중 향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가게에서 직접 면을 만들어야 하지만 라면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게 이유입니다. 면의 꼬불꼬불한 정도가 국물 맛이 배는걸 좌우한다는 것도 결국은 호불호에 불과해 보이고요. 게다가 물과 밀가루가 완전하게 섞이는 수화 작용에 시간이 걸려서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가 제면의 약점이에요. 공장에서 제대로 만든 면을 사용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 '간수'라는 말로 소개되었던 '간스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에 따르면 간스이는 라멘의 맛에 큰 영향을 주지만 단지 취향일 뿐이니, 가게와 손님들이 알아서 고르면 된다고 하네요.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건 면발 특성에 따른 팁입니다. 라멘을 밥과 함께 먹으려면 면은 부드럽게 삶아달라고 해야 한다네요. 그래야 간스이가 국물에 섞여 들지 않고 면도 퍼지지 않거든요. 면의 삶은 정도가 꼬들꼬들하면 면이 국물을 빨아들이고 국물에는 간스이 맛이 섞이게 됩니다.

네 번째 장은 라멘의 맛에 온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5미(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중 짠맛과 신맛은 온도에 따른 변화가 없지만 단맛, 쓴맛, 감칠맛은 온도에 따라 변화하므로 5미가 조합된 요리는 온도에 따라 맛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짠맛과 감칠맛의 밸런스가 온도에 따라 달라져서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적절한 온도로 먹어야 한답니다.

다섯 번째 장은 화학 조미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론은 화학 조미료를 적당히 써야 맛있는 라멘이 된다는 겁니다. 화학조미료 사용 여부보다 식재료를 듬뿍 사용한 국물인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팁도 좋았고요. 이유는 효모 추출물이나 단백가수분해물과 같은 첨가물은 '식품'으로 인정되어 화학조미료로 치지 않는데, 이런걸 많이 사용하는 가게들이 많기 때문이라네요.
또 라멘은 부족한 영양소가 있으니 제대로 만든 라멘에 무언가를 조금 더하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쇼유 라멘을 먹은 후에 채소주스를, 그리고 돈코츠 라멘의 영양가는 볶은 깨 간 것을 더하는 것만으로 훨씬 높아지고 쇼유 라멘에는 구운 김을 올리면 좋다, 미네랄을 보충하고 싶다면 미네랄이 풍부한 미소 된장으로 만든 미소 라멘이나 탄탄멘을 주문하라는 식입니다.

여섯 번째 장은 인스턴트 라멘이 정말 몸에 좋지 않은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지금의 인스턴트 라멘은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염분이 많다고는 하나 국물을 남기면 되고, 기름 열화로 식중독을 일으켰던건 다 옛날 이야기이며 용기의 환경 호르몬 역시 위험성은 오해에 불과했다는 내용이거든요. 이 정도면 앞으로 컵라면을 먹을 때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너무 자주 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초인 로크"로 유명한 만화가 히지리 유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구루구루박X"의 외계인들이 컵라면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로 "사람이 먹는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일곱 번째 장은 유명 가게, 노포의 라멘을 인스턴트로 만들어 제공하는 회사들의 비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탐방 취재 스타일의 리포트입니다. 사실 이런저런 엑기스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최대한 비슷한 맛을 찾아내는게 전부라 딱히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라면의 염분 측정 결과가 더 재미있었어요. 돈코츠 라멘의 염분은 1.48퍼센트, 미소 라멘의 염분은 1.35퍼센트인데 소유 라멘의 염분은 1.58퍼센트로 소유 라멘이 가장 높았거든요. 세가지 라멘 중 가장 감칠맛이 적은게 소유 라멘이라는 점에서 맛을 증폭시키는 감칠맛의 효과로 염도를 낮출 수 있다는건 사실이라는 뜻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도쿄의 새까만 소바 국물과 간사이의 투명한 소바 국물을 비교할 때, 간사이 소바 국물의 염분이 더 높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먹을 때 주로 표현되는 의성어 "즈루즈루"에 대해 탐구합니다. 뭘 이런것까지 조사하나 싶었는데, AI까지 동원해서 의성어의 느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데에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후루룩"과의 비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에요. 이 AI를 가지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비슷한 툴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 장은 사람들이 라멘 가게에 줄을 서는 이유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약과 동일하게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뇌에서 베타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모르핀이나 헤로인의 수용체이자 신경 전달 물질인 오피오이드에 작용하게 되거든요. 그러나 실제 마약과는 다르게 보상 회로 자극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리고 실험 결과, 먹기 전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하네요. 즉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동안' 음식을 곧 먹을거라는 생각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포방터 돈가스집에 줄을 서서 먹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이슈들이 있는데, 실제 줄을 서는 과정에서 이런 뇌내 보상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장기간 줄을 서는 것도 한 번쯤은 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라멘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재미나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라멘 그 자체보다는 주변 정보, 지식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난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재미와 교양 양쪽 측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이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본 라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02/12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4)

[고화질] 만화가 야식연구소 - 6점
무라타 유스케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아이실드 21"로 일세를 풍미했고, 지금은 "원펀맨"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만화가 무라타 유스케가 직접 만들어 먹는 야식을 소개하는 작품입니다. 만화가 생활을 하면서 밤 늦게 사러갈 시간도 없고, 배달도 안될 때 빠르게 만들어 먹던 야식들에 대해 트위터에 소개한게 계기가 되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나왔다고 하네요.

등장하는 레시피들은 구태여 이렇게 소개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유튜브 외 이런저런 매체에서 흔히 보는 간단 레시피들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또 손이 제법 많이 가는 튀김류나 제과제빵 류의 레시피는 취지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고요.

그러나 한 편당 5~6페이지 분량으로 레시피 중심의 짤막한 소개가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이 나름 완벽해서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구성과 전개에서 왜 인기 작가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할머니와의 추억을 그린 양배추 롤 에피소드라던가, 오래 전 불법 체류하던 태국인 이웃의 이야기, 보온기를 쓴 라면 조리처럼 상, 하편으로 이어지는 좀 긴 호흡의 이야기들도 당연히 좋았고요. 레시피도 두부 한 모 (200g)를 으깨어 녹말가루 약 60g 정도를 잘 섞은 뒤 랩을 씌워 전자렌지에 총 4분을 데워 만드는 두부떡같은, 따라해 볼만한 것들도 제법 수록되어 있습니다. 삿포로 소금 라면에 두유를 넣어 만든다는 '두유 라면' 같은 독특한 음식의 등장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대단한 걸작은 아니지만 읽는 재미와 함께, 쉬운 레시피 전달이라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 있습니다.

[고화질] 콘다 테루의 합법 레시피(단행본) 01 - 2점
우마다 이스케/시프트코믹스

고등학생 야쿠자 콘다 테루가 조직 생활과 학교 생활을 병행하며 접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요리로 해결하거나 해소한다는 내용.

요리의 맛을 야쿠자와 관련된 상황으로 비유하여 소개하는 장면(예를 들면 너무 맛있어서 마음을 빼앗기는걸 경찰에 체포되는 식으로 묘사하는 등), 그리고 콘다와 관련된 상황을 주변 사람들이 야쿠자인걸 몰라서 오해하는 몇몇 장면만 조금 재미있을 뿐이며 그 외에는 건질게 하나 없는 졸작입니다. 소개되는 에피소드들 모두 억지스러우며, 캐릭터의 현실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고등학생이면서 능력있는 야쿠자,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따뜻한 인물이라는건 아무리 만화라고 해도 용납이 안 됩니다. 등장하는 요리들이 에피소드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으며, 작화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1권 이후는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야쿠자를 미화하는 작품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합니다.

[고화질세트] 행복한 밥 (총4권/완결) - 6점
UNOME Santa/서울문화사/DCW

대사 한 마디 없이 그림만으로 짤막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독특한 작품으로, 조금은 팍팍한 일상을 그리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1권을 예로 들자면 직장에서 혹사당하는 이혼 중년남,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고향 내려갈 여비도 없는 OL, 젊은 나이에 머리가 벗겨져 여자에게 인기 없는 독신남,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전직 식당 주인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이 대사는 없지만 음식 하나로 위안을 얻는 과정이 잘 그려집니다.
음식도 당연히 대단한게 아닙니다. 라면과 고향에서 보내준 감자와 밑반찬, 풋콩에 맥주, 돈가스 덮밥 등이거든요. 그림도 순박하면서도 정성이 듬뿍 담겨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학교 선생 이야기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듯 하지만 부인 몫의 젓가락이 없는 장면처럼 이야기 뒤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에필로그에서 소개되는 디테일들도 마음에 듭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몇 명의 등장인물들이 반복해 등장하는 것도 재미를 더해주네요.

그러나 포맷과 전개가 길게는 끌어갈 수 없었던건 분명합니다. 후속권이 되면 될 수록 좀 지루해지거든요. 주된 이야기들이 대체로 가족 간의 정, 근면하고 열심히 사는 소박한 삶을 다루고 있어서 비슷비슷한 탓입니다. 변주를 주기 위한 이야기도 있지만 70대 후반 할아버지가 돈가스 푸드 파이팅에 도전한다는 "돈가스 카레"나 은혜갚기 위해 베를 짜는 학을 방치하고 노부부가 모듬 전골을 먹는다는 "모듬 전골" 같은 당황스러운 내용은 등장하지 않으니만 못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빼고 3권 분량으로 발표하는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최근 보기드문 착한 만화, 순박한 만화라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3)

2014/06/16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3 - 게임관 살인사건 : 별점 1점

소년탐정 김전일 2부 13 - 4점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유원지에 놀러간 김전일과 미유키는 일행과 떨어져 지나가던 버스를 잡아탔다. 그러나 버스는 통째로 납치당했고, 승객들은 기이한 생존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이상하게 만화만 읽게 되네요. 여러모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튼 간만에 읽은 김전일 시리즈입니다. 발표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제 기준으로는 가장 최신작이죠.

특징이라면 특정한 일련의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펼치는 일종의 '게임'을 다루는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를 김전일 시리즈에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한창 유행했던 장르로 "큐브",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살해하는 운명카드", "다크 존" 등 관련 콘텐츠도 엄청나게 많은데, 김전일 시리즈답게 게임보다는 추리물적인 접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실패였습니다. 범인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는 탓입니다. 마지막 증언에서 버스가 어두워 일행을 못 찾았다는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일행인 딸이나 바텐더가 버스를 한 번도 훑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될까요? 승객이 열 명도 안 되는데!

또 게임을 벌이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한 동기인 100억의 유산도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거액이기는 하지만 외딴 곳에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춰 놓고 살인 게임쇼를 벌일 정도의 재력과 노력이라면 딸에게 전해주기에 충분했을텐데, 뭐 하러 사람까지 죽이는지 모르겠거든요. 이보다는 사람을 고용해서 그냥 한 명씩 교통사고 같은 걸로 죽이는 게 훨씬 쉽고 싸게 먹혔을 겁니다.

그리고 게임을 벌이는 이유가 밝혀지다 보니, 내용도 어처구니 없어져 버립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 중 2명을 원하는 순서로 살해하기 위해서라면,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게임쇼를 벌이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요새같이 검시가 발달한 상황에서 목격자 증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바텐더와 딸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여한 피해자들의 관계만 조사해도 동기가 손쉽게 들통날테니까요. 아니,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무기 마담 주변 인물의 조사만으로도 드러날 동기였기에 애초부터 게임쇼 자체가 불필요했던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게임'이 재미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첫 번째만 게임이고, 두 번째의 고리 풀기, 세 번째의 컵라면과 마지막의 에티켓은 게임이라 부를 수도 없으니까요. 또 에티켓에서의 와인 라벨은 와인에 취미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정보인데 너무 1차원적으로 접근한 듯 합니다. 첫 번째를 제외한 모든 게임에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요.

물론 아주 건질 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과 잘 결합된 첫 번째의 네 자리 숫자 맞추기 게임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두 번째 컵라면 이야기에서 컵라면 밑바닥에 열쇠가 없는 상황을 추리에 접목시킨 것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첫 번째 게임의 경우 재미있는 추리일 뿐 '증명할 수 없다'는 큰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 장점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는 기대 이하였고, 추리적으로도 별로이며 마지막 결말까지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억지스러워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군요. 별점은 1점입니다.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의 재미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김전일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시켜준 망작입니다. 돈 주고 사지 않은 게 다행일 뿐입니다.

2018/01/20

만화 재즈란 무엇인가 - 라즈웰 호소키 / 서정표 : 별점 2점

만화 재즈란 무엇인가 - 4점
라즈웰 호소키 지음, 서정표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술 한잔 인생 한입"으로 유명한 라즈웰 호소키가 재즈에 대해 설명해 주는 만화입니다. 필명부터 재즈 뮤지션인 트럼본 연주자 라즈웰 러드로부터 유래된, 재즈 애호가로 잘 알려진 작가이지요.

만화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즈 카페에서 재즈 전문가가 재즈에 대해 학생들에게 알려준다는 설정은 동일하지만 1부는 고교생 커플을 대상으로 "재즈가 무엇인지" 에 대해 설명해 주는 입문 파트, 2부는 한가해 보이는 사모님 3 명을 대상으로 재즈의 역사 및 주요 장르와 해당되는 앨범을 소개해주는 내용, 그리고 3부는 다양한 대상의 수강생들에게 재즈를 즐기기 위한 방법을 안내해주는 구성으로 입문에서 역사, 취미까지 아우르게 됩니다.

이전에 읽었던 "라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시리즈인 듯 한데, 다행히 "라면이란 무엇인가" 보다는 재미있습니다. 2~4 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한 에피소드가 최소한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될 뿐더러, 나름의 재미를 줄 수 있도록 기-승-전-결 이 갖추어져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라면이란 무엇인가" 보다 재미있다 정도일 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런 류의 만화라면 뮤지션들 중심으로 일대기와 그 음악을 소개하는 "페인트 잇 락" 같은 작품이 보통 떠오르잖아요? 뮤지션들은 대체로 워낙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서 그것만 보아도 충분히 재미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 재미는 전무합니다. 뮤지션들은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아요. 물론 명반, 명곡은 충실히 소개하고 있지만 만화책이라 직접 들을 수 있지도 않고, 락의 명곡들처럼 곡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한계도 명확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즈 입문서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만화적으로는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차라리 포털 등에서 실제 곡들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웹툰 서비스를 한다면 가치는 더 높아질 것 같은데, 다른 미디어로의 확장을 기대해 봅니다.

2012/10/11

스키야키 (極道めし, Sukiyaki, 2010) - 마에다 테츠 : 별점 1.5점

같은 감방 재소자 5명이 설요리를 놓고 각자 맛있게 먹었던 추억의 요리를 이야기하는 배틀을 펼친다. 새로 입소한 켄지는 어울리기 싫었지만 결국 동참하는데...

만화 "대결! 궁극의 맛"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원제는 "極道めし"죠.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은 특별한 레시피나 재료, 식당 소개 없이 개개인의 추억에 얽힌 요리가 이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덕분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다양한 음식이 나름의 드라마와 함께 자유자재로 등장할 수 있었고, 미약하지만 배틀 요소까지 있다는게 획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휴가 직전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는 군대 느낌도 들고 해서 왠지 마음에 들었었습니다.
에피소드 하나에 주인공이 한 명이라는 구성이라서, 영상화한다면 TV 드라마가 어울릴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영화화된 걸 알고 조금 놀랐습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여 애써 찾아보게 되었네요..

그러나 보고 난 결과는 역시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설요리를 걸고 같은 감방 재소자들이 추억의 요리 이야기를 선보인다는 구성은 같습니다. 허나 이야기 하나하나가 제각각이라 난잡합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하나의 영화가 아닌 옴니버스물로 만드는 게 나았을 겁니다. 이야기의 레벨도 들쭉날쭉입니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창코나 켄지의 이야기가 있는 반면, 그냥 요리 소개에 그치는 것도 있어서 여러모로 전체적인 완성도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만화 대비 교도소 생활의 디테일이 잘 드러난 것은 좋았고, 연극적인 효과를 살린 연출도 참신했지만 하나의 작품으로 볼 때는 부족한 부분이 더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마지막 켄지의 양배추 파기름 라면은 꽤 그럴싸하더군요. 켄지가 사고를 치고 연인과 헤어지기 직전, 라면집을 차리는 것이 꿈인 연인에게 끓여달라고 해서 얻어먹는 라면인데, 레시피를 소개해 봅니다.

1. 물을 끓이는 동안 양배추를 잘게 썰어 놓는다.
2. 냄비에 면을 넣는다.
3. 라면 조미료를 넣는다.
4. 잘게 썰은 양배추를 그릇에 담는다.
5. 그릇에 면과 국물을 붓는다.
6. 파를 잘게 썰어 듬뿍 얹는다.
7. 파기름을 두른다.

파기름까지는 힘들더라도 양배추 + 파 조합 정도는 집에서도 충분하겠죠? 공식 사이트에서 등장 요리 레시피를 소개해 주고 있으니 더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018/09/30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구스미 마사유키 / 최윤영 : 별점 2점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4점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인디고(글담)

국내에는 "고독한 미식가" 원작가로 잘 알려져있는 구스미 마사유키의 음식 관련 에세이집입니다. "고독한 미식가" TV 시리즈를 보신 팬이시라면 에피소드가 끝나면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가게에 찾아가 음식을 즐기는 구스미 마사유키의 모습이 친숙하실테지요. 고기구이, 라면, 돈가스 등 모두 26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습니다. 전부 저자가 특정 음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추억을 갖고 있는지를 털어놓으며, 맨 마지막에 아주 짤막한 4컷 만화로 마무리되는 구성이고요. 하나의 음식 이야기 전부 해서 10페이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을 뿐더러 만화 외의 그림도 많아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조금 특이했던 것은 음식에 대해 확고한 자기 생각이 있으며, 이와 다른 스타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컵라면은 갑자기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원조 닛신 컵누들이 제일 좋다. 이런 저런 맛을 낸다는 본격파 따위는 필요없다. 건방지다'면서 본격적인 라면이 먹고 싶으면 나가서 사 먹으라고 하는 식으로요. 자기 주장이 과하고 일방적이라 좋게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타츠하고 그야말로 판박이라 재미있었습니다. 몸에 좋고 맛있는 것 보다는 정크 푸드를 가끔이지만 찬양하는 모습 등 그 외에도 소타츠와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이런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라면 피곤하겠지만, 그냥 지켜본다면 재밌게 감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먹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체계와 룰도 재미있었습니다. 고양이 맘마는 대체로 단무지 두 조각이 나오는데 마지막 밥 한 입과 단무지 반 조각이 남도록 조절하여 함께 입에 넣어 음미하는게 마무리이다, 돈가스 조각을 먹는 순서와 돈가스를 맛있게 먹으려면 돈가스 양의 최소 다섯배의 양배추가 필요하다는 등 처럼요. 돈가스 관련된 내용은 "음식의 군사" 에 등장했던 내용과 조금 비슷하기도 합니다.

간단힌 레시피도 몇 가지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양배추 요리가 가장 땡깁니다. 밤새 뼈 째로 푹 고아 만든 토종닭 수프를 걸러낸 후, 여기에 십자로 칼집을 넣은 양배추를 통째로 넣어 소금으로만 간 한 후 통냄비로 한 시간 정도 푹 끓여낸 수프입니다. 누룽지밥에 유자 후추를 살짝 뿌려 먹으면 맛있다는데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닭 백숙 육수로 끓여내면 되려나요? 간단하게 치킨 스톡을 써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볼만한 내용이 적지 않지만, 만화였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구스미 마사유키라는 작가가 아니라 허구의, 가상의 캐릭터였다면 보다 마음 편하고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거든요. 너무 자기 주장이 센 부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또 딱히 건질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라 권해드리기는 조금 애매하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9/23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스핀 오프로 시작한 C.M.B도 이제 40권 째를 향해 달려가네요.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성장기, 한 편은 일상계이고, 나머지 두 편은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본격물입니다. 이 중 첫 번째 작품인 "상상 살인"은 아주 좋은데 다른 작품들은 그냥저냥입니다. 마우 주연의 이야기는 심지어 수준 이하이고요. 그래도 "상상 살인"의 하드 캐리 덕분에 전체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상 살인"

디자이너를 꿈꿨지만 이상과 다른 현실 때문에 괴로와 하던 디자인 회사 영업직 구보타 토미오는 출근길에 우연히 고등학생 시절 사귀었던 미와와 마주쳤는데 그녀와 왜 헤어졌는지를 떠올리지 못했다. 토미오는 그녀와 헤어졌던 과거를 고치면, 미래의 나도 바뀔거라고 생각하는데....

사고로 위장한 살인이 등장하는 본격물입니다. 미와의 남편 아키요시는 몸을 내밀었던 베란다 발코니가 떨어져서 추락사하는데, 이게 사실은 계획된 조작에 의한 살인이었지요.

범행은 베란다 안전핀을 뽑는 간단한 조작이 전부이며, 아키요시가 베란다 쪽으로 몸을 내밀게 한 트릭 (물뿌리개 안에 중고 휴대폰을 넣어서 울리게 함)도 간단하다는 점에서 무척 현실적입니다. 이 휴대폰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신라가 사건에 엮이게 되는 이유도, 피해자 아키요시가 떨어진게 신라가 눈독들이던 개구리 조각이기 때문이라는 우연도 재미있었습니다. 토미오가 확실하게 죽게 만들려고 조각을 베란다 밑으로 옮겨 놓아서 조각이 깨지고, 분노한 신라가 무보수(?)로 사건 해결에 나서거든요. 

무엇보다도 토미오가 2층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사람이 죽을리 없다며, 누군가 떨어진 아키요시를 죽였을거라고 주장하는 마지막이 기가 막힙니다. 이는 진범은 미와임을 암시하지요.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무서운 추론이라 소름끼칠 정도였어요.

그러나 회사를 그만 둘 정도의 결단력도 없는 토미오가 살인을 결심해 실행에 옮긴다는 전개는 조금 석연치 않았습니다. 상상한건 모두 이루어진다는 긍정맨 토미오 캐릭터와 범인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도 단점이고요. 미묘한 미친놈인데, 캐릭터 구축이 어설픈 탓입니다. 그냥 미와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정도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려다 폭주하는 소시민 정도면 적당했을텐데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토미오의 범행을 밝히기도 어려울거라 생각되네요. 그가 베란다에 조작을 가하는게 목격되지 않았다면, 단지 물뿌리개 속 대포폰으로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는 불가능해 보이거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물로는 나무랄데 없는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팔레오파라독시아" 

고등학교 1학년 미쿠와 하야토는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여동생과 함께 외딴 산 속 숙부 집에서 황금 연휴를 보내게 되었다. 마침 숙부는 산 속에서 '팔레오파라독시아'의 화석을 발굴 중이었다.

신라는 학교 공부에 의미가 없다며 징징대는 하야토에게 '모두가 언제나 의미있는 답을 낼 수 없다, 하지만 답을 내기 전에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그리고 숙부가 화석을 발굴하는 상황을 이에 대입하지요. 답보다도 문제의 쪽을 오히려 모르고 있다는 뜻으로 말이죠. 일종의 성장기로서 나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같은 신라가 명확한 인생관을 들려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하야토가 고생물학자로 선생님이 되었다는 결말 역시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러나 추리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위기에 처한 하야토가 '문제를 이해하여' 적합한 답을 내여 생존한다는 클라이막스는 작위적이었고요. CMB 특유의 현학적 재미 역시 '팔레오파라독시아'라는 동물에 대해 박물학 지식을 살짝 인용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미그라스의 모험" 

마우는 부호 브렌드가 밀실에서 책꽂이에 깔려 죽었을 때 쥐고 있던 책을 입수했다. 그 책은 90년대 발표된 판타지 소설 "미그라스의 모험"으로, 대신 미그라스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이웃 제국과 맞서 싸우다가 패한 뒤,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별 볼일 없는 내용에 절망한 마우는 책을 방치하다가 도둑맞고, 브랜드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다가 그가 교통사고 합의 관련 분쟁에 휘말렸던걸 알게 되는데...

신라의 등장없이 마우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작품입니다. 브렌드가 죽은 밀실을 만든 트릭은 문 옆에 놓인 갑옷 기사를 이용한 장치 트릭인데 꽤 그럴싸합니다. 갑옷 기사가 들고 있는 칼을 돌리는 방식의 자물쇠 위에 잘 얹어 놓는 거에요. 그러면 칼 무게로 자물쇠는 돌아가고, 칼은 떨어져 제자리에 오게 되지요. 균형을 잘 맞춰야 겠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이는 트릭이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범인이 조카 시로노와였다는건 억지스럽습니다. 동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탓입니다. 시로노와가 일으켰던 교통 사고를 브랜드가 합의해 주었었는데, 시로노와는 합의를 기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해서 살해했다는게 동기죠. 그러나 기사도와 시로노와의 관계가 설명되고 있지 않아서 완전 뜬금 없었어요. 차라리 유산이 동기라면 모를까, 21세기에 기사도라니?
또 이를 극중 극 형태로 소개되는 미그라스의 모험과 연결시킨 전개도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미그라스가 가난한 마을에서 침략해온 제국군과 싸운다는 이야기인데, 전쟁을 하지 말라는게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렇게 싸워보지도 않고 협상을 한건 기사도 정신에 위배된다는거지요.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미그라스가 일으킨 전쟁으로 온갖 비극이 일어납니다. 마우의 말 대로 미그라스야말로 전쟁의 원흉이자 비극의 씨앗인 셈입니다. 도대체 이야기 어디에 기사도라는게 있는걸까요?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로노와를 협박해서 돈을 쥐어짠 뒤, 경찰에 넘기겠다는 마우의 사악함도 나쁘진 않지만, 설득력이 낮습니다. 아무리 피해자와 책의 관계를 밝힐 수 없었어도, 시체에 '기사도'를 의미한 책을 남겨놓은게 범인이라는게 증명되는건 아니니까요. 피해자가 어딘가에서 빌려왔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작해야 시로노와가 마우에게서 책을 훔쳤다는 정도만 증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밀실 트릭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그닥이며, 특히나 판타지 소설을 우겨넣은건 아무리봐도 무리수였습니다.

그나저나, 작가가 왜 이렇게 마우에게 미련을 갖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지극히 만화적이며 딱히 매력도 없는데 말이지요. 제발 그만 좀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빈 터의 유령"

야스다 시노는 인터넷을 쓸 수 없는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다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던 곳에 갑자기 나타나 서 있던 사람을 목격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네코와리와 하츠키 등 친구들은 모두 현장을 방문했다가 그 '유령'을 목격하고 도망치는데...

오래전 추억 속 라면 가게를 다시 열기 위해 그 곳을 방문한 아저씨가 유령의 정체였으며, 우체통 때문에 사각이 생겨서 아저씨가 지나가는 걸 못 봤다는게 진상인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충분히 그럴싸한, 설득력 넘치는 아이디어로 동네 유령 이야기 진상으로는 아주 잘 어울렸어요. 추억 속 라면 가게, 편지 쓰기 등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도 풍성하고, 편지를 쓰기 싫어하는 시노가 이 사건에 대해 사진 중심으로 편지처럼 꾸며서 보낸다는 마지막 장면, 그리고 아저씨의 라면 맛이 별로였다는 에필로그까지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트릭이 대단한건 아니고, 순전히 우연에 불과한 사건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또 시노 혼자라면 모를까, 함께 갔던 친구들 모두 동일한 '사각'으로 아저씨를 보지 못했다는건 설득력이 낮아요. 그래서 조금 감점하여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경이의 방으로 안내하는데 요금을 받지 않는데, 친구들의 부탁이기 때문인지 불분명합니다. 캐릭터가 바뀐걸까요? 이런 설정마저 없어져 버린다면 정말로 Q.E.D와의 구분이 애매해지는데 말이죠.

2020/09/06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 정대식 : 별점 1.5점

죽음과 모래시계 - 4점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작은 산유국 제리미스탄은 고갈되는 석유 자원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감옥 국가"로 거듭났다. 거대한 사형수용 감옥을 만들고, 세계 각지의 사형수들을 돈을 받고 수감한 뒤 사형까지 집행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형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흉악 범죄와 무기수의 종신 수용을 위한 비용 증가에 고심하던 각 국은 사형수 한 명당 수만 달러의 비용으로 제레미스탄 "종말 감옥"에 처분을 맡겼다. 

이 "종말 감옥"에 부모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앨런 이시다가 수감되었고, 그는 사형수로 감방장을 맡고 있는 슐츠의 조수가 되어 감옥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2016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지만, 본격물의 애호가로서 놓치기 힘든 수상 이력이라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형수를 수감하는 "종말 감옥"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감옥의 운영, 죄수의 관리 및 감독 방식 - 죄수 몸 속에 삽입되어 죄수가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마이크로 칩 - 등을 꽤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들을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작 수만불로 흉악한 사형수를 받아들인다는게 말은 안되지만, 이 정도는 눈 감아 줘야겠지요. 안그러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거의 모두가 설득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망작들인 탓입니다. 그나마 처음의 두 편,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과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정도만 조금 볼만한 트릭이 나올 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다운 본격물도 별로 없고요. 읽어보신 분들이 대부분 칭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도 저는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평균 별점은 1점 이하 수준이지만, 종말 감옥의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었기에 0.5점을 더합니다. 강호순 같은 범죄자는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네요.

짤막하게 요약한 수록 단편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 담겨있으니 참고하세요.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맨 몸에서 칼이나 만년필을 끄집어내는 물질화 마술로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샤보는 사형 집행 전날 독방에서 난도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맞은편 독방의 용병 출신 사형수 난조는 목이 베여 죽었다. 완벽한 밀실이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데다가, 사형 집행 전날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샤보는 전쟁 때 손상된 엉덩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장착한 넙다리 인공골두 안이 텅 비어 있있지요.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다는게 물질화 마술의 정체입니다. 피부에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서 빼낸거지요. 때문에 물질화 마술로 꺼낼 수 있는건 가늘고 긴 물건들(만년필)로 한정되고요. 샤보는 이 트릭으로 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어 던져 난조를 죽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쟁 때 용병 난조에게 가족을 잃었는데, 그 복수를 직접 하기 위함이었지요. 난죠를 죽인 뒤 칼(에 묶어둔 실 따위로)을 회수하여 자신의 몸을 난자한 뒤 실혈사했습니다. 난자한 이유는 마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를 다 흘리기 전에 칼을 다시 숨길 수 있고, 상처가 많으면 칼을 꺼내는 구멍의 존재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물질화 마술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대담한 트릭은 볼 만 하지만 트릭이 그렇게 설득력 높아보이지 않으며, 자살한 뒤 칼을 다시 숨길 이유가 없다는건 눈에 거슬립니다. 마술의 트릭을 밝히지 않는게 마술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난자한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구태여 사형 집행 전날 난조를 죽인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그나마 이게 이 단편집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종말 감옥에서 탈옥한 사람은 딱 한명, 의사 출신의 반체제 정치범 첸 웨이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마이크로 칩을 무력화하였을까? 그리고 왜 훤한 보름달이 뜬 밤 탈옥을 하였을까? 왜 가장 건장한 경비원 다르위시가 감시탑에서 근무할 때 탈옥을 하였을까? 다르위시는 어떻게 죽였을까?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사리흐 아리 파힐은 슐츠에게 사건 해결을 명하는데...

감옥이 나오니 탈옥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겠지요. 두 번째 작품이 바로 탈옥물입니다.

첸 웨이츠가 의사 출신으로 중국인 죄수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마이크로 칩이 어디있는지 알아냈다는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100Kg이 넘는 다르위시가 경비하는 날을 노린 이유도 그럴듯해요. 다르위시의 목에 가죽 밴드를 엮은 끈을 걸어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버팀돌 삼아 감시탑을 올라간게 진상이니까요.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체중이 제일 무거운 경비원이 필요했던 겁니다. 보름달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다르위시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트릭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모두 설명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의무실의 허술한 보안으로 메스 한 두개, 죄수 구속용 밴드 여러개를 빼돌려 탈옥에 이용했다는 것부터가 그러하지요. 사형수들이 많은 감방에서 메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3미터 위의 감시원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고정된 목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경비원이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올가미를 보고 피하지 않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밝은 보름달 밤이라 죄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거에 비하면 담을 넘은 뒤 야생 낙타를 올가미로 잡아 사막을 가로질렀다는 탈출 방법은 오히려 쉬워보이네요. 이렇게 거대하면서 대단한 감옥 도시가 CCTV없이 감시원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며, 감시원도 2인 1조가 아니라 1명만 근무를 선다는 등의 허술함에 바탕을 둔 탈옥이라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영웅 첸 웨이츠가 탈옥 후 현실의 벽에 부딛힌 나머지 3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진짜 사형수가 되어 종말 감옥에 복귀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안 나오니만 못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추리 퀴즈 이상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종말 감옥을 감찰하기 위해 찾아온 감찰관이 배를 칼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감찰에 걸려 좌천될 예정이었단 옥졸 무바라크였다.

악덕 옥졸 무바라크의 혐의가 짙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중 최악의 빌런이 용의자라면, 없던 죄도 만들어 누명을 씌울 판인데 그를 위해 진상을 밝힌다? 영 와닿지 않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슐츠와 앨런 입장에서는, 감찰관이 자살했건 살해당했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진상을 밝힐 이유도 없고요. 감찰관이 자살하면서 악덕 옥졸인 무바라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진상도 별로입니다. 업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감찰관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를 그의 삭발과 구토 흔적으로 추리해내는 부분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많이 줘 봤자 1.5점입니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티벳 출신 사형수로 제리미니스탄 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불가한 죄수 라쿠파 걀포는 홀로 사형 집행된 죄수의 묘를 파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가 사체를 다시 파헤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조사를 통해 최근에 묻힌 사형수 사체의 일부가 훼손되어 사라진건 사실로 확인되었다. 슐츠는 고심한 끝에 이를 숨기지만, 사형수 로드리고 소토홀의 시체가 완전히 훼손된게 밝혀지자 걀포 역시 곧바로 사형 집행을 받게 되는데...

소토홀과 걀포가 친구였으며, 티벳인 걀포는 소토홀을 위해 최고의 장례인 '조장鳥'을 치뤄주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앞서 시체를 훼손했던건 그 고기(?)로 독수리를 모으기 위해서였고요. 이 정도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네요. 애초에 수천명의 사형수의 묘지를 감옥 내에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본국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증거도 걀포가 티벳인이라는게 전부입니다.

소토홀이 언어 천재였다는 복선으로 그가 걀포와 친구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감방과 분리된 여감방의 죄수 한 명이 임신했다게 알려지고, 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여감방 의사 라일라는 추리력으로 유명한 슐츠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슐츠는 이야기만 듣고 사건 조사를 앨런에게 위임했고, 앨런은 직접 여감방에 방문해서 임신했다는 여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죄수는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리아였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교도소 안에서 임신을 할 리 없지요. 그냥 앨런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앨런을 좋아했었고, 정말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레즈비언 관계였던 여의사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유와 동기, 결말 모두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앨런이 여죄수 감방에 방문한다는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슐츠와 앨런에게 사건 의뢰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거짓말의 뒷 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이미 임신 3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 시점에 앨런의 정자로 마리아를 임신시키면 주차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이 정도면 나무한테 미안한 수준이에요. 별점은 0점입니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앨런 이시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4일. 그 동안 앨런은 독방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부모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앨런 부모가 죽은 사건에 대한 앨런의 회고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나마 부모 사건의 도화선이 된 친아버지가 보낸 편지 - 자신이 TS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걸 밝히는 -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아버지가 슐츠라는걸 알아내는 과정만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슐츠는 생화학 병기를 연구하던 테러리스트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앨런의 어머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테러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 뒤, 종말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메일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건 감옥이었기 때문으로, 앨런은 종말 감옥의 편지지 등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걸 확신합니다. 예상대로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파힐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으로, 홀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이런 집행인 상대라면 인간 흉기급 사형수라면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발악이라도 해 보는게 당연하고요.
파힐이 앨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몰래 잠입한 슐츠가 파힐을 협박하여 통행증을 받아 앨런에게 건네주고 탈옥시킨 뒤, 파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감옥 경비의 허술함, 파힐의 무능함이 합쳐진 결과인데 이 정도라면 진작에 사단이 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또 파힐이 전 세계 부호들에게 사형 순간을 생중계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않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것 하나만 위안이 되는 졸작. 별점은 0.5점입니다.

"에필로그" 

슐츠는 파힐의 시체를 숨긴 뒤 바이러스 발작이 일어남을 느낀다. 그는 갓난아기 앨런에게 TS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균자로 만든 과거를 떠올리며 죽어간다...

읽어본 사람들 모두가 인상적이라 칭했던 반전이 등장하는 마무리입니다.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테러를 꿈꾸던 슐츠가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TS 바이러스를 흩뿌린다는 결말로, 앞서 망작이었던 5, 6편 이야기는 모두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 두 편이 왜 망작이었는지는 살짝 이해가 됩니다. 반전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뒷통수를 쎄게 후려치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그렇게 빼어난 반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앨런이 보균자였다면 투옥되기 이전 생활에서부터 착실히 주변인들에게 감염을 이어왔을겁니다. 앨런의 탈옥이 무슨 계기라도 된 것처럼 부풀릴 필요는 없어요. 잠복기 수십년인 바이러스의 발작이 때마침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다는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이런 류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나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6/04

요리책 쓰는 선비, 술 빚는 사대부 - 김봉규 : 별점 2.5점


요리책 쓰는 선비, 술 빚는 사대부 - 6점
김봉규 지음/담앤북스

우리나라 유명 종가와 그 종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음식, 을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제목처럼 내용은 크게 두 항목, 먹치레와 술치레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고요. 두 항목 구성은 약간 다른데 소개되는 내용은 항목별로 같습니다.

먹치레의 1장 '선비, 셰프가 되다'를 예로 들자면, 안동 계암종가와 삼색어아탕을 소개하면서 "수운잡방"이 안동 광산 김씨 가문의 탁청정 김유와 그 손자 계암 김령이 저술한 것이며, 이 책이 안동 계암종가에 물려 내려오면서 관련된 음식들이 전해졌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수운잡방"에 나오는 30여가지 음식과 술을 재현하는데 삼색어아탕이 그 중 대표격으로 간략한 레시피를 알려줍니다. 은어, 숭어를 이용해 완자를 만든 후, 은어 삶은 물에 집간장으로 간을 한 탕을 만들어 완자, 녹두묵, 대하에 탕을 부어 완성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김유'라는 인물에 대해 2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을 추가하며 마무리합니다. 먹치레 편의 모든 항목 구성이 이와 같습니다.

종가와 종부들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를 알게 되니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당연하지만 서애 류성룡이 '중개'(일종의 약과)를 좋아했다, 고산 윤선도는 의술에 밝아서 직접 장수를 위한 술을 담궈 먹었다는 것 처럼요.
처음 안 인물이지만 독특한 인물도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 바둑고수 노근영이 그러한데, 그의 삶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천재로 유명했다는 노사 기정진의 청나라 사신 수수께끼 풀이도 아주 인상적이었고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류이주를  알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그의 자택인 '운조루'에는 항상 쌀 두가마니가 들어가는 뒤주가 있어서 배고픈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퍼 갈 수 있었다고 하네요. 심지어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굴뚝까지 낮았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종가 고택에 대한 설명들도 재미난게 많습니다. 전주 인재종가의 판소리 공연을 위해 지었다는 칠량집 학인당, 앞서 말씀드린 노근영의 자택이었던 노참판댁 고가는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집니다. 노참판댁 고가는 특별한 건 없지만, 노근영이 바둑 내기에 건 탓에 주인이 27번이나 바뀌었다는 이력이 호기심을 당기거든요.

또 잘 모르는 종가라도 음식만큼은 흥미로운게 많습니다. 지촌종가의 여름철 고급 별미라는 '건진국수'는 정말 맛있을 것 같아 꼭 한번 먹고 싶어집요. 국수를 삶아 바로 건져 사용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예상외로 뽑아낸 국수가 아니라 칼국수라는게 의외였습니다.
성주 사우당종가의 '은어 국수'는 은어를 잡아 내장을 제거하고 손질한 뒤 푹 고아 육수를 만드는데, 지금은 물이 오염된 탓에 은어를 거의 잡을 수 없어서 요리가 끊길 위기라는 소개에서 "라면 요리왕"에 나오는 세리자와의 라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라면은 말린 은어로 육수를 내는 것이었는데, 말린 은어를 이용하여 육수를 내어 재현하면 맛이 많이 달라질까요?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술치레 역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술치레는 종가를 별도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술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차이점은 있는데, 항목별 구성은 마찬가지로 전부 동일합니다. 어떤 집안에서 어떻게 전승되어 왔으며, 지금은 누가 비법을 이어서 빚고 있다는 유래와 어떻게 빚는지에 대한 방법의 상세한 소개, 뒤이어 술의 특징과 잘 어울리는 안주, 그 집안 유명인에 대한 짤막한 소갯글로 마무립니다.

제가 술을 좋아해서인지 먹치레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렇게나 모르는, 안 먹어본 술이 많다는 것에도 놀랐고요. 모두 18종의 독특한 전통주가 소개되는데,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것은 '교동법주'와 '안동소주' 뿐이니 말 다했지요. 그나마 교동법주와 안동소주도 제가 먹어본 것과는 뭔가 다른, 더 깊이있고 전통있는 술이 소개됩니다.

몇가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술들 소개를 꼽자면, 교동법주는 오랫동안 만석꾼이었던 경주 최부잣집 가양주입니다.
술 이름에 '춘'자가 붙는 춘주는 귀한 술에 붙는 별칭으로 당나라 때 생겨났고요.
이화주가 점성이 높아 숟가락으로 떠 먹기도 했고, 이화주의 梨花가 배꽃이 재료라는 뜻이 아니라 '배꽃이 필 무렵 빚는 술'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육당 최남선이 꼽은 조선 3대 명주는 '관서감홍로', 전라도 '이강고', '죽력고'라는데 세가지 맛 보고 싶습니다. 감홍로는 특히 이런저런 곳에서 언급되는데, "별주부전"에서는 자라가 토끼에게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다고 꾀어 냈지요. "춘향전"에서 춘향이 이도령과 이별하는 장면에서의 이별주도 감홍로고요. 아~ 맛이 정말 궁금합니다.
안동소주는 최근 '명인 안동소주'에서 세계적 위스키가 되고자 2015년부터 오크통 숙성을 하고 있다는데 이 역시 꼭 한 병 소장하고 싶습니다. "맛의 달인"에서 일본 술에는 스피리츠가 없다고 한탄하던 평론가가 오키나와 고주를 마시고 감탄한다는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이렇듯 재미있는 내용은 많지만, 음식과 술에 대한 소개에 그친다는 단점은 큽니다. 이런저런 정보들이 많기는 하지만 깊이도 많이 부족하고요. 종갓집 한 곳에서 음식 하나만 소개하는 구성도 아쉽습니다. 대표 음식이 많은 곳도 있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책보다는 영상 다큐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지금 사업체로 발전한 종가와 종가 음식의 소개는 광고로 보이는게 좀 많았습니다. 물론 어떻게 하면 쉽게 먹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는 취지였다고 생각은 됩니다. 의련 백산종가의 '설뫼 망개떡'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산 안희제를 위함이라는 명분까지 있고요. 그러나 '오희숙 전통 부각'처럼 그냥 광고에 그치는건 빼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복원 전통주들 역시 광고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하고요. 내용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거라면 협찬 형식으로 좀 더 저렴하게 내 놓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으며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입문서로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비싼 편이고 편집에서도 페이지 낭비가 심해서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점은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종갓집별로 분리하여 책 한권씩을 따로 내는게 좋은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살림 지식총서' 정도 두께로 말이죠. "한국 종가의 먹치레와 술치레' 시리즈! 멋지지 않습니까? 가격만 괜찮다면 저는 구입 용의 있습니다.

2024/12/21

이세린 가이드 - 김정연 : 별점 2점

이세린 가이드 - 4점
김정연 지음/코난북스

"혼자를 기르는 법"을 그렸던 김정연 작가의 두 번째 만화로, 음식 모형 제작자 이세린의 이야기입니다. 이세린이 음식 모형을 만들며, 해당 음식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며 독백 형식으로 전개되는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가족과의 추억이라던가 현재의 고민,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찾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작품의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다양한 음식 모형을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라면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 시판되는 플라스틱 면에 열을 가하여 구불구불하게 만드는 등, 작가가 실제로 음식 모형을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디테일이 뛰어납니다. 
작가 특유의 다소 기발한 상상력도 볼거리입니다. 컬러칩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는데, 음식 모형 제작가답게 '대만 카스텔라', '진도 구기자', '초당 두부'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 "올해의 색은 광천토굴 새우젓입니다!"라는 발표를 하는 상상을 하는 장면처럼요.
해당 음식이나 음식 모형과 관련된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재미를 더합니다. 한국 라면이 매워진 이유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던가, 국회의사당 건축 당시 해태상 밑에 ‘노블 와인’ 200병을 묻었다는 이야기, 모카포트의 창안자인 비알레티의 유골함이 모카포트라는 사실 등 흥미로운 정보도 많아요. 그동안 음식 관련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되는 일화들이 계속 있는게 신기합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이 작품은 이세린 혼자만의 독백이 중심이라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합니다. 그녀의 과거사와 가족사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극적인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여성 서사에 대해 많이 언급되었으나, 이 역시 뻔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어 특별히 와닿지는 않았고요. 작화도 전작에 비하면 좀 별로였습니다.
무엇보다 음식 모형보다는 음식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저에게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다수의 음식이 등장하지만, 마지막의 ‘주말 전골’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음식과 연계된 매력적인 이야기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모형 제작에 더 무게중심이 쏠려있는 탓입니다. 참고로 주말 전골은, 혼자 사는 독신 여성이 재료를 남기지 않고, 설겆이 거리도 최소화하면서 주말 하루를 차려 먹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냄비에 물과 장국을 넣은 뒤, 온갖 재료를 넣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끓여먹는 것입니다.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다츠라면 정색을 할 요리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모로 와 닿았어요.

결론적으로, “이세린 가이드”는 음식 모형 제작이라는 독창적인 소재와 이를 통해 엮인 감정적 서사를 담아냈으나, 극적인 재미와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7/10/02

최훈의 G.M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고 있는 야구(?) 만화입니다. 국내 최초, 아니 거의 세계 최초의 프런트가 중심이 된 만화라 색다르기도 하지만 야구쪽에 깊은 내공을 지닌 최훈씨의 지식이 어우러져 무척 볼만한 작품이 되었다 생각됩니다. 또한 약물 문제를 정면으로 짚고 넘어가는 등 그간 야구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이 많이 펼쳐져서 야구 팬으로서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침 1부격인 1차전이 끝났는데 야구팬으로서 몇가지 생각이 들어서 적어봅니다.

1. 용병 2명 중 한명은 대박, 한명은 쪽박인 상황
용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사실 한명이 대박난다고 해도 다른 한명이 쪽박이라면 팀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생각됩니다. 뭐 2명 모두 쪽박인 경우 (국내에서 무지 흔하긴 하죠) 보다야 낫겠지만 1명은 최고 에이스급의 스터프를 지닌 투수지만 다른 1명이 부상 전력이 무척 심한 수비 전담 포수, 그것도 타 포수의 백업으로 쓰기 힘든 선수라면 용병농사를 잘 지었다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예인데, 국내에서는 조금만 부진해도 퇴출이 워낙 잦은지라 인상이 강한 선수는 많지 않지만 구태여 예를 들자면 데이비스를 제외한 나머지 한화의 용병들이 대표적이겠죠. 아니면 작년 롯데 호세와 그의 파트너 (조온-갈로 대표되는) 라던가. 대체로 팀 성적은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작품 전개상 용병 선발투수라면 매일 등판할 수도 없고, 등판시에 전담 포수 때문에 타선에 구멍이 생기고 수비도 문제이므로 아마 마무리로 기용하지 않을까 싶은데 역시 용병 마무리가 성공한 적이 없는 국내 프로야구 현실 상 좀 무리가 있는 설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2. 젊은 유망주들. 하지만 군문제는?
트레이드라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재미있는 설정과 전개를 보여주지만 국내 프로야구 유망주들의 화두인 군문제를 너무 다루지 않는 느낌이 강합니다. 특히 주인공의 소속팀인 램스의 트레이드 카드 2명은 나이와 메이저 진출 가능성 운운하는 설정을 볼 때 군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여집니다. 트레이드 상대 3명은 전부 2년차 이내의 신인들로 고교 졸업 직후 갓 입단했다 쳐도 5년 이내에 군 문제가 분명 대두될 것입니다.
유망주는 꽃을 피울 수도, 아니면 그냥저냥한 선수로 끝날 수도 있는 위험성이 항상 존재할 뿐더러 트레이드가 만약 전부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3, 4년 후를 본다면 램스측에도 악영향을 미치리라 생각됩니다.

3. 최고의 마무리와 트레이드?
오승환 급의 선수를 누가 유망주하고 맞트레이드를 할까요? 작품에서는 마무리는 인기가 별로 없다고 설명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로 "황금독수리" 송지만 선수를 셋업맨 권준헌 선수와 맞트레이드했던 국내 전례도 있듯이 마무리 부재의 팀에게는 사실 경험많고 실적있는 중심타자보다는 마무리 투수가 더 탐나는 매물임이 분명합니다. LG가 올 시즌 막판 우규민의 블론으로 흘린 눈물이 크다는 것이 극명하게 증명하지요 (수비가 문제가 되긴 했지만 삼진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우규민 선수 탓도 있으니까요) 또한 팀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라면 유망주 보다는 경험많은 선수가 더 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2021/02/08

이글루스에 바랍니다.

제가 이글루스에 블로그를 개설한 날짜는 2003년 12월 7일로 이글루스 블로그 서비스가 2003년 6월에 시작되었으니, 거의 초창기 유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동안 블로그 서비스를 공짜로 거의 17년간 써 온 것에 대해서는 이글루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글루스가 한창 인기있고, 유입자도 많았던 호시절이었던 2010년대 초반 역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뭔가 바꾼다고 해서 이용자가 늘어나고, 조회수와 트래픽이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이용자로서 상실감, 문제점을 느끼지는 않도록 지원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에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건 에디터입니다. 글을 작성해서 올려야 하는 블로그에서 가장 중요한 툴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글루스 에디터는 멋대로 폰트 사이즈를 정해버리는 버그, 링크 경로를 멋대로 http를 한개 더 붙여 오류를 일으키는 버그와 같은 다양한 버그를 자랑합니다. 모바일 웹 버젼으로는 에디터 입력도 제대로 안되고요. 그 외에, 쓰지도 않는 포토로그 버튼이 아직도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가끔 싸이월드 공감 버튼이 표시되는 등 정말 기본적인 수정과 업데이트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여기에 더해 에디터에서 광고 플랫폼도 잘 지원해 주면 좋겠어요. 아마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들은 대부분 구글 애드센스와 같은 광고 플랫폼 도입을 생각하고 있을텐데, 현재 에디터로는 구글 애드센스를 완벽하게 운영할 수 없습니다. 저만해도 크롬에서 쓰면 구글 애드센스 삽입이 불가하며, 기껏 삽입한 광고도 예전 글에서는 때때로 보이지 않는 등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광고 플랫폼 운영만 반자동으로, 제대로 되도록 개편해도, 이용자가 조금은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네요.
마찬가지로 모바일 앱도 지원할거라면 제대로 개발해서 서비스했으면 합니다. 베타라며 나온지 수년이 지나도록 베타라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은 모바일 앱을 설치할 이유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결과물이거든요.

밸리의 인기글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지켜보니 정치 관련 글은 꼬박꼬박, 특히 현재 집권 여당 욕하는 글은 한 번 빼먹지 않고 부지런히 인기글로 올라가더군요. 물론 집권 여당을 욕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조회수가 높아서 그 글이 인기글로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밸리 인기글은 왜 안올라가나요? 제가 주로 이용하는 도서 밸리는 인기글이 선정된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밸리로 카테고리를 구분해 놓았으면, 밸리별로 조회수 높은 글이 자동으로 인기글이 되도록 시스템을 꾸미는게 당연합니다. 밸리 전체를 통틀어 인기글을 뽑기 때문이라면 밸리별로 인기글이 뜨는 기능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도 대충 살펴보니 인기글이 있는 밸리는 손에 꼽네요. 한 때 이글루스의 최대 장점이었던게 밸리인데, 이렇게 망해가니 서글프기까지 하지만 이럴거라면 인기글과 밸리를 아예 구분하는게 맞습니다.
덧붙이자면, 혐오스러운 인기글은 두 번 다시 보지 않도록, 보기 싫은 블로그를 차단하는 기능도 있었으면 합니다. 특정 블로그는 정말이지 썸네일조차 보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추가를 원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백업 기능입니다. 글과 댓글까지 모두 일괄 추출하여 저장하는 형태로 백업했으면 하는데 왜 공식적으로 지원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네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글루스 백업을 위해 개인이 만든 툴들이 몇 개 존재하던데, 저는 아쉽게도 백업에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저처럼 역사가 오래된 사용자라면 누구든 원하는 기능이라 생각합니다. 이 기능을 위해 유료화가 필요하다면, 지불 용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관심있는 연례 행사였던 올해의 블로거는 꾸준히 진행해 주었으면 하고, 줌 인터넷과 연계하여 좋은 글들은 홍보가 좀 되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과 함께 글을 마칩니다. 운영자가 이 글을 볼 것 같지도 않지만...
마침 엊그제 뉴스를 보니, 줌 인터넷에 새로운 대표가 선임되셨더군요. 이글루스는 줌 인터넷 회사 소개에서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새 대표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블로그 서비스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기회를 빌어 뭔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2010/02/10

햣코 Hyakko 4 - 카토 하루아키 : 별점 3점

햣코 Hyakko 4 - 6점
카토 하루아키 지음/중앙books(중앙북스)

2권까지는 재미있었는데 3권에서 등장한 토라코의 과거 이야기 등으로 잠깐 텐션이 떨어졌었죠. 3권도 사실 아주 별로는 아니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고 무엇보다도 토라코의 가족으로 나온 키츠네와 오니유리가 별로였어요. 키츠네는 너무 오바스럽고 오니유리는 너무 교과서적이라 튀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그러나 다행히도 4권에서는 기존의 잔잔하면서도 유쾌한 재미를 다시 회복한 느낌입니다. 페이지마다 적절하게 배치되는 개그 요소들과 더불어 그동안 벌려놓은 캐릭터들을 요긴하게 써먹으며 제대로 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이전에 걱정했던대로 신캐릭터로 떼우는 전개도 더이상 보이지 않고 말이죠. 이런 류의 고등학생을 일상적으로 다룬 만화라면 반드시 등장하는 여름의 주요 이벤트인 여름방학, 수영장, 바다, 축제와 불꽃놀이, 다같이 모여 숙제를 하는 모습 등이 한권에 모두 집약되어 있는 것도 좋았어요. (딱 한가지 빠진거라면 알바 정도랄까요?)

캐릭터와 상황설정에서 좀 아즈망가의 영향이 너무 짙은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조금 들기도 하지만 이 정도라면 더 지켜보아도 괜찮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2/01/03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노코는 애인 준이치에게 결별을 통보받았다. 그녀의 하나 뿐인 친구 가요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 뒤, 소노코는 자살로 추정되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이자 경찰인 야스마사는 사건 현장에서 타살의 증거를 발견했다. 야스마사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어 단죄할 것을 결심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높은 지명도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는 아니라서 큰 관심이 없었던 작품인데, (취향 존중!) 물만두 홍윤 님의 유작 리뷰집에 실린 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물만두 님의 리뷰대로 정통 본격 추리물이더군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완성도도 높았고요. 특히 탐정 역할을 하는 야스마사가 발견한 단서와 거기서 비롯되는 의문들을 독자와 공정하게 공유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수사 단계별로 와인과 와인병, 복사 키, 태워버린 종이의 정체, 소노코가 죽기 전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곳, 빌린 비디오데크의 의미 등 다양한 단서가 제시된 후 설명을 덧붙이며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성인데, 독자에게 "이것이 단서다"라고 제시하면서 함께 추리하고 수사하도록 유도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해졌습니다.

피해자의 오빠 야스마사가 가가 형사와 경쟁하며 범인을 쫓는 구도로 이루어진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지는 두뇌 싸움도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만의 단서를 갖고 있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독자는 야스마사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수사가 막힐 때마다 가가 형사가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든요. 이러한 구조 덕분에 앞서 이야기한 단계별 진행 방식과 맞물려,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독특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준이치의 알리바이 트릭 같은 곁가지 트릭도 잘 짜여 있었고, 마지막 결말에서 이어지는 반전도 어차피 둘 중 한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구도 속에서 의외의 재미를 주는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인 '진범이 누구인지 끝까지 독자에게 밝히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열린 결말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작가의 머릿속에는 정리된 답이 있을 텐데 명확한 해답 없이 끝내버리는 것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확실한 단서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다양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된 '약봉투의 뜯어진 모양'이 오른손잡이라면 준이치, 왼손잡이라면 가요코라는 설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정을 근거로 마지막에 펼쳐지는 야스마사의 처형 쇼 역시 억지스러웠어요. 단순히 가가 형사의 공정한 수사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극적인 연출을 위해 설정을 밀어붙인 인상이 강했습니다.

더불어, 가요코라면 몰라도 준이치의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여자친구의 과거가 밝혀진다고 해도 준이치가 잃을 것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소노코를 떠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순정파도 아닌 듯한 캐릭터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만족스러웠고,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말랑말랑한 로맨스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불확실한 결말도 흥미로운 아이디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고요. 그러나 본격 추리물이라면 최소한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장점은 분명한 만큼,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만두 님의 리뷰를 더 찾아봐야겠네요.

2023/07/25

'젊은 모색 2023' 관람

지난 달의 '게임사회' 전시에 이어, 이번달에 관람한 전시입니다. 회사에서 매달 실시하는 문화 행사를 이용하였습니다.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집에서 가까워서 딸 아이가 어릴 때 자주 데리고 갔었던, 여러가지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평일에 혼자서 방문한건 처음이네요. 이렇게 또 추억이 하나 쌓여 갑니다.

언제나 방문하면 찾아보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과 큰 화분을 둘러보고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저 큰 화분 위에 뭐가 있나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살짝 봤더니, 평면에 올록볼록하게 뭔가 나와 있는 형태더군요. 싹이 나기 직전의 무언가를 입체화한 것일까요? 살짝 궁금해집니다.
이번에 찾은 전시는 '젊은 모색 2023' 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정례전이라고 하네요.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전시는 주제가 전시의 무대가 되는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으로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순수 미술 뿐 아니라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다양한 직군의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고요. 같은 이유로 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도 굉장히 직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었고, 제 이해 수용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작품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작품들에 더 눈길이 많이 갔는데요, 대표적인건 과천 현대 미술관이 주제라면 누구나 생각해봄직한, 미술관 자체를 미니어쳐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공간 및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인 씨오엠 COM의 작품입니다. 누가 보아도 미술관임을 알 수 있는, 원뿔모양의 형태가 돋보이는 미니어쳐가 특히 귀여웠는데, 더 작게 만들어서 뮤지엄 샵에서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미술관이라는 공간 내에서 가장 존재감이 있는 사물인 기둥에 초점을 맞춘 작가가 여러명 있는건 신기했습니다. 작가들도 깊은 연구와 고민보다는,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사물에서부터 아이디어를 발산하는게 더 용이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오브젝트 자체로도 괜찮았으니 선택했겠지만요. 당연히 작품들 수준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시에서 시작하여 사진, 조각, 설치 미술 등 작품들이 보여주는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도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고요. 이 중에서는 개인적으로는 건축가인 김현종 작가의 <<범위의 확장>>이 가장 좋았습니다. 기둥을 손대지 않고 감싸서 새로운 무언가로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는게 좋았어요. 건축가답게 건축의 핵심 구조이지만, 전시장에서는 애물단지인 기둥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졌습니다.
미술관의 공간과 환경에 집중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래 황동욱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빛과 바람의 흐름, 움직임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키네틱 아트인데, 정말로 자연이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과 효과가 좋았어요.
 

그런데 이런 결과물이라면, 구조물 없이 원통 공간 안 360도를 커버할 수 있도록 빔 프로젝터 여러대를 설치하여 보여줄 수도 있어 보였어요. 원통형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제품이 나와도 괜찮겠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제 베스트는 추미림 작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평면 작업이지만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여 시간의 이미지를 씌운 <<횃불과 경사로>>도 인상적이었고, 과천 미술관을 단순하게 시각화한 평면 작업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려한 그래픽으로 과전 현대 미술관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점 정도 집에 걸어두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래와 같이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며 오랫만에 여유를 즐기며, 힐링하고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관람을 마치며 제가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라면 뭘 만들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라면 과천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가지고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만드는 시도를 해 보았을 것 같아요. VR로 다다익선을 뒤집어서, 감상하는 사람이 TV가 안쪽으로 쌓여진 탑 안에 들어가 있는 형태로 감상할 수 있도록요. 과연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요? 거울로 된 구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발광한다는 에도가와 란포 작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