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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9

리피트 - 이누이 구루미 / 서수지 : 별점 2.5점

리피트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생 모리는 지진을 예언하는 기묘한 전화를 받았다. 예언이 실현된 뒤, 전화를 건 주인공 가자마는 모리를 비롯한 9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10개월의 시간을 점프할 수 있는 '리피트'에 대해 알려주며 리피트에 동참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경마 등으로 부자가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입시를 다시 치루어 도쿄대에 입학하는 등의 소망을 품고 그들은 과거로 향했다. 여행은 성공했고 모리는 함께 리피트한 미녀 시노자키와 커플이 되지만, 전 연인 유코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다시 리피트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리피트한 동료들이 차례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가자마도 두 번째 리피트를 허락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노자키의 임신으로 모리는 고뇌에 빠지는데....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유명한 이누이 구루미의 장편.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서술 트릭의 수작이지만 이상하게도 작가 이누이 구루미의 작품은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지요. 이 작품과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유이합니다. 이 작품의 존재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모처의 랭킹에서 소개해주어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작이더군요.

10개월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가는 '리피트'가 핵심 설정인데, 이렇게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은 정말 많습니다. 작중에서도 켄 그림우드의 <<리플레이>>라는 작품이 비슷한 내용이라고 소개될 정도죠. 시간 여행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추리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도 <<타임 리프>>라던가, <<나만이 없는 거리>> 등이 있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과거로의 이동은 주인공의 능력이 아니라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 '가자마'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리피터' 들 9명을 모아서 과거로 이동하게 도와주었던 것이니까요. 순수한 선의의 발로이며 그들이 선택된건 단순한 우연이었다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받은 사람들) 가자마의 말에 주인공 모리를 비롯한 9명은 얼떨결에 과거로 향하게 되지요. 가자마만 과거로 리피트 할 수 있는 검은 오로라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으며, 오로라로 이동할 수 있는 헬기 조종사였다는 설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과거에서 특이점이 발생할 경우 미래가 바뀔 수는 있지만, 아무리 미래가 바뀌어도 결국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는 결말은 정해진 미래, 특히 죽음은 바꿀 수 없다는 영화 <<데스티네이션>> 설정과 동일하지만, 이 작품에서 리피터들은 자기들이 죽는다는걸 몰랐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덕분에 다카하시, 요코사와, 쓰보이가 차례로 죽자 생존한 리피터들은 이 범행은 리피터를 노린 누군가의 짓이라 여기고 범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다양한 추리를 펼치게 되고요.
  • 범인은 리피트에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면 안되는 가자마일까? 하지만 가자마는 위험해져도 10월 30일까지만 버티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되는데?
  • 리피터들을 죽이기 위해 과거로 초대했던 걸까? 그랬다면 원래 세계에서 서로 모를 때 죽였을거야. 서로 모르면 남은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었을텐데, 리피터라는 연결 고리가 생겨서 경계 의식을 품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가자마는 계속 리피트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리피트한 과거에는 다시 9명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살인을 반복할 이유는 없다고.
  • 한 번 리피트 한 사람들은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한 가자마에게, '생명이 위험하니 다시 리피트하게 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덴도가 저지른 범행일까? 덴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니까.
  • 가자마가 다른 누군가에게 예언을 알려준 뒤, 너가 리피트하려면 다른 리피터를 먼저 죽여라고 시켰던걸까?
  • 이전 리피터 중 누군가 헬기로 뒤를 쫓아 리피트한게 아닐까?

이러한 여러가지 추리들은 상당한 재미를 선사해줍니다.

리피터 연쇄 살인 사건 외에도 리피터 시노자키가 모리의 아이를 임신한 것도 흥미를 끕니다. 모리는 옛 연인 유코를 살해한 탓에 리피트가 절실했는데, 시노자키는 임신때문에 다시 리피트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다시 리피트한다면, 아이가 없는 임신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마니까요. 그래서 극적 긴장감이 발생하게 됩니다. 시노자키의 예정된 죽음 - 헬기 추락에 의한 사고사 - 을 가자마로부터 전해들은 모리가 그녀를 죽게 내버려두고 혼자 리피트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고요. 그녀를 살게 해 주면, 모리의 리피트를 막을게 뻔하잖아요? 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임신 이야기를 들은 덴도가 이야기한, 갓 태어난 아이를 리피트시키면 폐 호흡을 하다가 양수로 돌아가버리는데 어떻게 될까? 라는 것도 사소하지만 꽤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어요.

진상도 꽤 기발했습니다. 우선 리피터인줄 알았던 이케다도 가자마와 같이 리피트를 반복했었던 오리지널 리피터였습니다. 둘은 사고로 생명을 잃었을 사람들을 구해준 뒤, 그들과 함께 과거로 돌아거서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즐기려고 했던 겁니다. 리피트를 반복하다 심심해졌던 탓이죠. 그리고 가자마와 이케다가 손을 써서 원래 세계에서 죽지 않았던 리피터들은 리피트한 세계에서는 운명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유코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던 모리만 먼저 유코를 살해해서 죽음에서 벗어났고, 덴도는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서 가자마와 이케다가 구해준 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우선 모리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미래의 이야기를 적어두었던 노트를, 문단속을 잊은 탓에 방에 들어온 유코가 발견해서 리피트를 눈치채자 살해했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비교적 주인공다운 모습을 보여주던 모리라는 인물상과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모리가 유코에게 죽는게 운명이었다면, 미리 흉기까지 준비했다면 유코가 맥없이 살해당하는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목이 졸릴 때 당연히 칼을 꺼내 찔렀어야죠. 왜 이 부분에서만 정해진 운명이 다르게 흘러갔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과거를 바꾸는 특이점이 생기면 미래가 바뀌어서 이런저런게 바뀔 수 있다는 전제도 사실 해석하기에 따라 애매한 말입니다. 경마로 큰 돈을 버는 것도 특이점이잖아요? 리피터들을 죽인건 정의 구현에 한계를 느낀 미친 경찰관이었다는 것도 작위적이었고요.

결말도 많이 아쉽습니다. 덴도가 미국에서 헬기 면허를 따 왔다는거야 그럴싸했는데, 그 뒤부터는 정말 막 나가더라고요. 이케다와 덴도가 서로에게 총을 쏴서 죽는다는게 특히 그러했어요. 총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도 이상하지만, 이케다만 리피트 지점을 알테니 그 지점만 알아내고 강제로 헬기에서 쫓아내겠다!는 덴도의 계획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총이건 뭐건 이케다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리가 없잖아요?
둘 다 죽은 뒤 모리 혼자서 헬기를 조종해 오로라로 들어갔다는 것도 별다른 고민없는 작위적인 전개였습니다. 리피트에 성공한 모리가 곧바로 차에 치어 죽는다는 결말도 뻔했을 뿐 아니라 <<데스티네이션>>과 다를게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흔한 소재에 약간의 변주를 가해 흥미를 유발하게끔 만든건 좋은데, 아주 독특하고 새롭지는 않았기에 감점합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만큼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2010/06/13

이니시에이션 러브 (イニシエ-ション·ラブ / 2004) - 이누이 구루미 / 서수지 : 별점 3점

이니시에이션 러브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Side-A
시즈오카 대학에 다니는 "나"는 친구가 불러낸 미팅 자리에서 마유코를 보고 한눈에 반해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Side-B
나는 시즈오카에서 도쿄로 파견된 후, 마유코와 원거리 연애를 계속하지만 사내 동료인 이시마루와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연애 소설과 미스터리의 완벽한 조화라는 거창한 카피를 달고 있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작가 이름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고요.

그런데 생각과는 좀 많이 달랐어요. 미스터리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았거든요. 왜냐하면 사용된 "서술 트릭"이 "한번 속여보겠어!" 라는 생각이 지나쳤던 탓입니다.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어요. 서술 트릭은 "화자"와 "시점"의 변경이 대부분이라는걸 이제는 추리 애호가라면 다들 알고 있는 것이라 진부하기도 했고요.

또 교묘한 장치와 단서를 적절히 배치한 것은 좋았지만 해설이 없이는 100%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일본의 1980년대 (정확하게는 1987년)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장치가 많기 때문인데, 이렇게 특정 장소와 지역에 국한된 단서라면 공감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죠... 그 외에도 이야기의 핵심인 마유코가 양다리를 걸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 그리고 첫 미팅때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것도 공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서술 트릭을 적절하게 연애 소설에 녹여낸 것은 독특했어요. 제목 그대로 통과의례와 같은 가슴 아픈 첫 사랑 이야기로는 완성도가 높고요. 그 외의 자잘한 장치들 - 예를 들자면 옛날 LP판처럼 Side A-B를 구분한 형식과 소제목으로 당시 유행가 제목을 가져다 쓴 것도 작가의 의도였다는 등 - 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 등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 제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90년대 초반 한국이 무대였더라면, 그래서 추리적으로도 공감할 부분이 많아졌더라면 별점 4점 이상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임에는 확실합니다. 80년대에 청춘을 보냈더라면, 그리고 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장치들을 같이 즐길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은데 그게 좀 아쉬울 뿐이네요.

2022/07/23

[2022년 버젼] 미스터리 소설 추천 35선. 신간부터 인기 고전 명작까지 랭킹으로 소개! from SAKIDORI

화제가 되는 여러가지들을 알기 쉽게 소개해준다는 일본의 웹 매거진 SAKIDORI에서 선정한 순위입니다.

개인적 평가로는, 초보자용과 반전계 랭킹은 나름 괜찮습니다. 초보자용은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제작되어 '친숙하고 읽기 쉬운' 측면을 많이 고려한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딱히 대단한 걸작이라고 보기 힘든히가시가와 도쿠야 작품 순위가 높은 점에서 추측해보자면 말이지요. 이 중 "푸른 불꽃"과 "거울 속 외딴성"은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2022.10.08에 읽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습니다.

반전계는 "까마귀의 엄지" 빼고는 다 읽어본 셈인데 ("가위남"은 영화로), 순위는 모르겠지만 선정 자체는 적절해 보입니다(*"까마귀의 엄지"도 2023.06.23에 읽었습니다). 일본판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표지의 치명적인 귀여움은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해외 미스터리 추천 랭킹은 좀 불만스럽습니다. 우선 비극 시리즈의 최고 걸작은 "Y의 비극"이라는건 정론입니다. "X의 비극"이 아니라요. "오페라의 괴인"이 미스터리에 속하는지도 의문이며, 잘 모르는 작품이 무려 세 편이나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수많은 걸작들을 제치고 애거서 크리스티, 코난 도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까요? 이는 찬찬히 읽어보고 평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보자용 미스터리 추천 랭킹 

반전계 미스터리 소설 추천 랭킹

해외 미스터리 소설 추천 랭킹 

2021/08/14

사일런트 페이션트 -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 남명성 : 별점 3점

사일런트 페이션트 - 6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해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리 상담사 테오 파버는 그로브 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화가 앨리샤 치료를 맡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의자에 묶인 남편을 총으로 사살했고, 그 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화상인 "알케스티스"만 남겼을 뿐이었다. 

앨리샤와의 첫 면담에서 그녀는 테오를 폭행했지만, 이윽고 그녀도 테오에게 마음을 열며 자신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테오는 그녀의 형부인 맥스, 사촌인 폴, 친구인 장 펠릭스 등과 만나서 얻은 정보와 일기장 내용을 조합하여, 그녀의 정신병의 원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냈던 교통사고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이런 치료를 통해 앨리샤는 다시 말문이 트였다. 그리고 테오에게 남편을 죽인 사람은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고 말해주었지만, 테오는 물론 병원장 디오메디스 교수 등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앨리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는데...

영국을 무대로 한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서술 트릭이 사용된 추리물입니다. 

앨리샤 시점에서 사건 전부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까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테오 시점에서 테오가 앨리샤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아내 캐시의 불륜을 알고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과정이 뒤섞여 전개되는데, 앨리샤의 일기는 사건 전부터이므로 과거 시점입니다. 당연히 독자들은 테오 시점의 묘사는 모두 현재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하지만 테오 시점의 묘사는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었다는게 사용된 서술 트릭의 핵심입니다. 테오가 앨리샤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만 현재에요. 아내 캐시의 불륜을 의심하다가 뒤를 밟고, 결국 불륜남의 집을 덮치는 이야기는 모두 앨리샤 일기와 동일한 과거 시점이지요. 그리고 앨리샤와 테오의 과거는 서로 만나게 된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엘리샤 일기 속 정체불명의 남자이자 진범은 테오였던 겁니다. 

사실 화자별로 병행 전개되는 이야기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걸 숨기다가, 마지막에 드러내면서 반전으로 이어지는건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한 명의 화자 시점의 이야기지만 시간이 다른 이야기 두 개가 진행되는 이야기라는건 "통곡"으로 이미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섞어서 진행하는 작품은 처음인데, 독자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솜씨도 일품이라 감탄했습니다. 트릭을 알고 나서 돌이켜보면, 두 이야기가 전혀 섞이지 않게끔 확실히 구분되어 있을 뿐더러, 캐시 이야기에서의 테오는 명백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식으로 나름 서술 트릭에 대한 단서도 제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을 수 밖에 없었어요.

또 남편에게 배신당한 뒤 말을 잃은 알케스티스 공주 이야기는 단순히 상징인줄 알았는데, 그게 앨리샤에게 실제로 닥쳤던 일이었다는 진상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테오는 앨리샤의 남편 가브리엘이 아내 캐시의 불륜남이라고 확신하고, 집을 덥쳐서 앨리샤와 가브리엘을 포박한 뒤 가브리엘에게 누굴 살릴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지요. 이 때 가브리엘이 자기를 살려달라고 이야기한게 앨리샤의 과거 - 어머니와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앨리샤가 죽었어야 했다고 절규했던 - 상처를 헤집어 폭발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테오가 사랑을 비웃으며 떠난 뒤, 앨리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가브리엘도 죽인거지요. 

맥스, 폴, 장 펠릭스 등 앨리샤 주변 인물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앨리샤의 일기 내용도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앨리샤가 테오를 처음 만났을 때 공격했던 이유는, 테오가 침입자였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은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하지만 조금 과장된 심리 묘사와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많다는건 아쉽네요. 두 화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 (특히 앨리샤) 모두 수상하고, 비정상적입니다. 앨리샤의 일기도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며 흥미를 더해주는건 맞지만, 그냥 읽으면 혼란스러워요. 명백한 사실은 테오가 앨리샤 집을 감시하다가 침입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 뿐입니다. 그 외의 내용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증거도 일기 외에는 전무하고요. 피해망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일기를 읽고 당사자들을 찾아가서 추궁하는 테오에게 거의 모두가 사실을 털어놓는다는건 작위적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적이 있다고 일기장에 쓰여있다며 테오가 크리스티안을 추궁할 때 처럼요. 크리스티안은 그로브에서 앨리샤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입니다. 앨리샤가 자신이 아는 정신과 의사 이름을 대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왜 생각해보지 않은걸까요? 테오야 지은 죄가 있으니 앨리샤의 모든 증언을 믿는다 쳐도,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침입한 이후 가브리엘을 죽인게 테오인지 앨리샤인지, 캐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건 맞는지, 그 불륜 상대남이 가브리엘이 확실한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테오의 심리 상태도 극히 불안하고, 마리화나도 피우는 탓에 1인칭 시점 묘사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이니까요.

테오가 앨리샤의 입을 막기 위해 약물 과다 복용을 위장하여 피하 주사를 놓아 죽이려 했다는 결말도 석연치 않습니다. 앞서 테오가 이끌어 내었던 앨리샤의 증언 - "앨리샤는 범인이 아니고, 그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범인" - 은 디오메디스 교수 등을 통해 부정됩니다. 그냥 봐도 제 정신으로 한 증언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정신병이 있는 환자의 이 정도 증언 따위가 테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 증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테오라고 주장한다는건 인정될리 없습니다. 뭐 앨리샤의 말문이 트인게 위협이라고 생각되어 살의를 품었을 수는 있습니다만... 구태여 피하 주사 자국을 찾았다는걸 밝힐 필요는 없었습니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타살이라는걸 부각시켜 얻을게 별로 없으니까요. 

혐의를 크리스티안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크리스티안이 과거 앨리샤를 진료했다는걸 숨겼다는게 살인 동기라는데, 이를 증명하는건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앨리샤의 증언과 일기장은 실체는 남아 있지 않았고, 오로지 테오의 증언만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티안을 옭아매는건 무리입니다. 앨런 형사가 일기장을 찾았다며 테오를 찾아와 그가 범인이라는 페이지를 읽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리샤의 몇 안되는 짐에서 일기장을 찾지 못하고 경찰에게 빌미를 준 테오의 행동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일기가 증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녀의 증언은 이미 정신과 의사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는데, 일기가 진실일 이유는 없잖아요. 일기는 굉장히 설득력있게, 잘 정리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일기 전체가 거대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최소한 테오가 범인이라는걸 밝히기에는 많이 부족했어요. "열심히 치료해 주었는데, 뒷통수를 맞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테오의 주장을 뒤집긴 힘들었을겁니다.
캐시가 연극도 포기하고, 정크 푸드만 먹는 돼지가 되었다는 결말도 불륜남 가브리엘이 죽은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이디어도 좋고 전개도 일품입니다. 비정상적인 심리 묘사가 많고, 결말이 석연치 않아 감점하지만 추천합니다. 색다른 추리 스릴러를 찾으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0/02/03

하우미스터리선정, 2009년 올해의 추리소설!

http://www.howmystery.com/zeroboard/zboard.php?id=news&no=215

국내 최고의 추리소설 사이트인 하우미에서 총 36명의 사이트 방문자를 대상으로 선정한 2009년 올해의 추리소설 리스트입니다. 표본수가 적긴 하지만 나름 의미있는 자료라 생각되네요. 1, 2위를 모두 읽지 않았는데 더 늦기 전에 챙겨봐야겠군요. 어쨌건 <경성탐정록>이 쟁쟁한 작품들을 뒤로하고 당당 4위에 랭크되었다는 것이 제일 기쁩니다!
상세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집계기간 : 2009년 12월 08일 - 2010년 1월 31일
참여자 수 : 36
방식 : 1인 3권 추천


1위 총 15표 <차일드44>, 톰 롭 스미스, 노블마인

2위 총 9표 <심플 플랜>, 스콧 스미스, 도서출판 비채

3위 총 8표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시공사

공동 4위 총 6표
<고백>, 미나토 가나에, 도서출판 비채
<경성탐정록>, 한동진, 북홀릭

공동 6위 총 5표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도서출판 비채
* 제가 읽은 건 구판입니다.
<마인>, 김내성

공동 8위 총 4표
<녹색은 위험>, 크리스티아나 M. 브랜드, 시작
<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고려원북스

공동 11위 3표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윌리엄 아이리시, 자음과 모음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 마쓰모토 세이초, 북스피어

공동 13위 총 2표
<파일로 밴스의 정의>, S.S.반 다인, 북스피어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시마다 소지, 시공사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데니스 루헤인, 황금가지
<은폐수사>, 곤노 빈, 시작
<블러드 워크>, 마이클 코넬리, 랜덤하우스코리아
<시인>, 마이클 코넬리, 랜덤하우스코리아

이하 1표 획득작
<경관의 피>(상하), 사사키 조
<검은 화집>(상중하), 마쓰모토 세이초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 수첩>, 와카타케 나나미
<두 번째 총성>, 안소니 버클리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오사키 고즈에
<천사의 나이프>, 야쿠마루 가쿠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에도가와 란포
<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무덤으로 향하다>, 로렌스 블록
<새크리파이스>, 곤도 후미에
<신주쿠 상어>, 오사와 아리마사
<유대인 경찰 연합>(2권), 마이클 셰이본
<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구루미
<루피너스 탐정단 시리즈 - 우수, 당혹>(2권), 쓰하라 야스미
<목소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레전드>, 로버트 리텔
<46번째 밀실>, 아리스가와 아리스
<방해자>(3권), 오쿠다 히데오
<밤의 의미>, 마이클 콕스
<위철리 가의 여인>, 로스 맥도널드
<악몽의 관람차>, 기노시타 한타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권, 아서 코난 도일-레슬리 S. 클링거

2022/08/15

헌책방 스탭의 추천 - 정말로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 50선

"'정말 아까운 (못타이나이)' 책방" 이라는 이름의 일본 중고 서점에서 선정한 랭킹입니다. 직원이 선정했다고 하네요. 일본 서점 직원이 갖추고 있는 책에 대한 지식은 상당하다는게 이런저런 컨텐츠에서 언급되어왔는데, 이 랭킹만 보면 조금 미묘합니다. 유명한 작품을 많이 꼽지 않은건 좋아요. 저도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 제법 될 정도니까요. 하지만 유명하지 않은건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제가 읽어보았던 몇 작품은 과연 랭킹에 언급될 정도인지? 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며, 특정 작가 (키타야마 다케쿠니, 오네자와 호노부, 미치오 슈스케 등)에 대한 편애도 눈에 띕니다. 그래도 보석같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몇몇 작품들도 선정되어 있는 만큼, 일본 서점 직원의 실력을 믿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몇 작품은 구해볼 생각입니다. 과연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트릭이 뛰어난 미스터리 소설

  1. "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2. "앨리스 - 미러 성 살인 사건" 키타야마 다케쿠니 (국내 미출간)
  3. "시인장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
  4. "조커 게임" 야나기 코지
  5. "악마의 공놀이 노래" 요코미조 세이시
반전이 놀라운 작품 5선
  1. "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2. "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3.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니시자와 야스히코
  4. "이 어둠과 빛" 핫토리 마유미 (국내 미출간)
  5. "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쿠루미
학창 시절 특유의 감각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학원 미스터리 5선
  1.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츠지무라 미즈키
  2.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3. "빙과" 요네자와 호노부
  4. "죽은 자의 학원제" 아카가와 지로 (국내 미출간)
  5. "신님 게임" 마야 유타카 (국내 미출간)
뒷맛이 상쾌한, 한모금의 청량제같이 읽고나서 상쾌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작
  1.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2. "슬로하이츠의 신" 츠지무라 미즈키
  3. "샤바케" 하타케나카 메구미
  4. "언제나 아침에" 이마무라 아이 (국내 미출간)
  5. "퇴출 게임" 하츠노 세이 (국내 미출간)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읽기 쉬운 단편집 5선.
  1. "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2. "우리들이 성좌를 훔친 이유" 기타야마 다케쿠니 (국내 미출간)
  3. "술래의 발소리" 미치오 슈스케
  4. "GOTH" 오츠 이치
  5. "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상급자에게 권하는, 독서 후에 싫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야미스 (싫은 미스터리) 5선.
  1. "고백" 미나토 가나에
  2.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치오 슈스케
  3. "보틀넥" 요네자와 호노부
  4. "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5. "악의 교전" 기시 유스케
SF와 미스터리가 융합한 신감각 5선.
  1.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2. "여왕의 백년밀실" 모리 히로시 (국내 미출간)
  3. "인격전이의 살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4. "클라인의 항아리" 오카지마 후타리
  5. "화성 다크 발라드" 우에다 사유리 (국내 미출간)
왠지모르게 분위기와 세계관에 끌리는 다섯 작품
  1.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나가와 히로코
  2. "성스러운 검은 밤" 시바타 요시키
  3. "클락성 살인사건" 기타야마 다케쿠니
  4. "백야행" 히가시노 게이고
  5. "광골의 꿈" 교고쿠 나츠히코
명작만 모았다! 추천 해외 미스터리 소설 10선 (* 해외는 일본 기준)
  1.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2.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3. "레베카" 다프네 뒤 모리에
  4. "차일드 44" 톰 롭 스미스
  5. "열세 번째 이야기" 다이안 세터필드
  6. "소피" 거이 버트 (국내 미출간)
  7. "모르그 가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8. "라스트 차일드" 존 하트
  9. "사자의 서" 조너선 캐롤 (국내 미출간)
  10. "닫힌 책" 길버트 아데어 (국내 미출간)

2022/09/18

한 문장의 충격!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180도 뒤집히는 경악의 미스터리 소설! - 혼토 북트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소개드렸던 honto의 북트리 서비스에서 추천하는 '반전'이 있는 작품들. 그냥 반전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뒤집히는 작품들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본격물보다는 아무래도 서술 트릭에 가까운 작품들이 많은데, 전부 '반전'이라는 취지에는 충실한 좋은 작품들입니다. 일본 작품만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하지만요. 그나저나 이 서비스, 보면 볼 수록 괜찮네요. 다른 추천도 찾는대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뛰어난 구성에 잘 짜여진 작가의 안배로 때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 한 문장. 미스터리 소설 중에는, 마지막 단 한 문장으로 세상이 바뀌는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걸작들이 있습니다. 기분 좋게 속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이누이 구루미
'나'는 마유코와 만나, 곧 사랑에 빠졌다.
대학생에서부터 사회인에 이르기까지를 그리는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같지만, 마지막 한 문장 덕분에 걸작 미스터리로 변신하는 작품. 다시 읽어보면, 저자의 철저한 계획에 감탄의 한 숨을 내 쉴 수 밖에 없다.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대학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 젊은이들은 외딴 섬에 위치한 십각형 모양 저택을 방문했다. 그들은 반년 전에 타 죽은 건축가 수수께끼에 접근하려 했지만, 차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왜 살해당하며, 범인은 누구인가? 마지막 충격적인 문장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

<<미로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시가 지은 기괴한 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는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미로같은 관에 모인 젊은 작가들에게 닥치는 살인 사건.
이 작품은 '마지막 한 문장'이 여러 개 존재하기 때문에, 종반부에서 이야기는 여러 번 뒤집힌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여러 번 맛볼 수 있는 작품.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 로커>> : 이사카 고타로
대학생 '나'가 이사하자마자 이웃과 함께 서점을 덮친 이유는 코지엔 사전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세련된 대화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청춘 소설에 가깝지만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야기는 뒤집힌다. 조금은 잔혹하고 센티멘탈한 결말의 작품으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로
연속 엽기 살인 사건을 범인, 전직 형사, 범인의 가족이라는 세 명의 시점으로 그려나가는 작품. "범인"의 시점으로 그려져서 범인은 초반부터 확실하지만, 평범한 사이코 서스펜스로 끝나지는 않는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뒤집히는데, 충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작품.

2015/05/20

멀리 돌아가는 히나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2.5점

멀리 돌아가는 히나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고전부 시리즈" 네번째.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단편집입니다. 가을, 겨울을 거쳐 봄방학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고 있죠.

각 이야기별 줄거리 및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은 간략하게"

가미야마 고등학교 7대 불가사의 중 첫 번째라는 "비밀클럽의 권유 메모"를 찾는 내용입니다. 소박한 학교 관련 일상계 소품으로 추리적으로도 별다른건 없습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터에"라는, 브라운 신부 단편 "브라운 신부의 옛날 이야기"에서도 인용되었던 격언이 핵심이지요.

그래도 이야기 서두에 등장하는 음악실 괴담에서부터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호타로의 행동이 잘 연결되는 결말 부분의 반전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상계도 이런 반전이 가능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에요. 사토시도 의외로 정곡을 찔러서 만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요. 여기에 음악실 괴담까지 해결해주기 때문에 여러모로 풍성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추리지만 이런 게 고등학교 무대에 적합한 트릭이겠죠. 여기가 뭐 부동고교도 아니니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일상계 왕도를 걷는 작품이에요. 시리즈 팬에게 여러 가지 재미를 선사해 주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대죄를 짓다"

수학선생님이 진도를 착각한 이유에 대한 아주 짤막한 이야기. 진상은 소문자 a와 d를 착각했다는 사소하고 별거 아닌 것입니다. 그냥 화를 낸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지탄다의 생각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그것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과연 화를 내는 것도 에너지 낭비인 건지 좀 궁금하네요. 별 내용이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정체 알고 보니"

고전부원들이 온천 여행을 떠나는데 숙소인 여관에서 지탄다와 마야카가 목매달아 죽은 시체의 유령을 본다는 이야기. "고전부" 시리즈 추리의 핵심, 즉 "신경쓰이는" 지탄다를 납득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게 잘 드러납니다. 진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추리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전달되는 단서들을 조합하여 나름의 합리적으로 설명해주기는 합니다. 유카타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뭐 그런 변수까지 다 등장시키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겠지요.

"고전부" 시리즈의 핵심을 꿴다는 측면에서 꼭 봐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기억이 있는 자는"

"10월 31일, 역 앞 고분도에서 물건을 산 기억이 있는 자는 지금 즉시 교무실 시바자키한테 와라." 라는 교내 방송에 대한 호타로의 추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누군가가 한 말을 추리해서 의외로 숨겨져 있는 범죄에 대한 진상을 파헤친다는 건 "9마일은 너무 멀다"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진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호타로가 지탄다를 납득시켜 승부에 이기기 위한, 순수한 추론일 뿐이거든요. 몇 가지 증거, 즉 방과 후에 호출 방송을 한 것, 학생지도부가 아니라 교감이 불렀다는 것, 10월 31일이라고 날짜를 지칭한 것, 방송을 두 번 반복하지 않은 것 등만 가지고 추론을 이끌어내는 호타로의 솜씨는 인상적이지만 진상이 위조지폐와 관련된 범죄라는 것은 비약이 너무 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새해 문 많이 열려라"

새해 참배에서 창고에 갇히게 된 호타로와 지탄다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 너무 추운 날에 남녀 단 둘이서 신사 창고에 갇힌다는 설정은 만화스럽습니다. 궁지에 몰리고 별다른 수단이 없는 둘이 가진 몇 가지의 소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펼쳐지는 과정은 일종의 모험담이라고 봐도 될 테고요. 이전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팥을 담은 주머니 양 끝을 묶어 전달했다"는 고사를 효과적으로 써먹는건 좋았습니다. Side라는 부제로 구분하여 이바라와 사토시 시점, 호타로와 지탄다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는 "이니시에이션 러브" 같은 전개도 독특했고요.

그러나 유실물이 무녀 아르바이트 중인 마야카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운에 의지한 작전이라는 것, 창고에 갇힌 시점에서 지탄다의 체면을 그렇게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 잘 납득이 안 된다는 것, 무엇보다도 "고전부" 시리즈의 핵심인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계로 보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제 초콜릿 사건"

이바라 마야카가 사토시에게 주려던 초콜릿이 고전부실에서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별 건 없지만 고등학생의 순진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 즉 집착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면 더 편한 마음으로 지내던 사토시가 마야카에게 집착해야 하는 딜레마를 다룬 이야기라 생각하고 보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별로라 잘 와닿지는 않더군요. 특이한 캐릭터를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지만, 이런 류의 평범한 일상계 사랑이야기에는 적합한 캐릭터들은 아닌 탓입니다. 일상계라면 보다 일상계다운 주인공이 나와 주는 것이 훨씬 좋았을 거예요. 또 에너지 절약 주의, 즉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는다는 호타로만큼이나 특이한 사상을 가진 사토시 같은 고등학생이 실존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기도 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

표제작. 제목 그대로 히나 축제에서 히나 인형(으로 분장한 지탄다)이 다리에 생긴 문제로 멀리 돌아가게 된 경위를 밝혀내는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

그러나 이 추리는 곁가지일 뿐이고 내용은 히나 인형 옆에서 우산을 받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호타로와,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지탄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 편의 사토시의 심리묘사보다는 호타로 묘사가 괜찮아서 그런대로 괜찮게 읽혔습니다. 사토시는 3인칭이고 호타로는 1인칭인 덕분입니다. 훨씬 말랑말랑하고 귀엽고, 여튼 좋았어요.

아울러 히나 인형이 돌아가게 된 계기 역시 일상계답게 괜찮았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럴듯했거든요. 공정한 정보 제공도 돋보였고 말이죠. 별점은 3점. 묘사, 전개, 추리적인 부분 모두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일상계 작품다운, 평범하게 재미있는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챙겨볼 만한 시리즈임에는 분명해요. 이 시리즈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호타로와 지탄다의 관계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너무너무 궁금해집니다. 후속권이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