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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2

스파이더 맨 브랜드 뉴 데이(2026) -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별점 4점

지금 최고 흥행작이죠. 마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OTT를 통해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왜 리뷰가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번 작품은 오랫만에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가장 돋보인 건 액션입니다. 화끈하고 속도감 넘칩니다. 특히 초반의 1인칭 시점 질주, 활강 장면은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연출이라 신선했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도 적절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진 그레이가 점프하듯 다른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CG가 필요없는 아날로그적인 촬영으로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구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탄탄한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진 그레이가 벌이는 일종의 테러에는 V-Max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이는 나중에 진이 갇혀 있던 연구소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브랜드에서 유래되었다는게 밝혀지면서, 진의 언니 세라가 연구소에 감금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과거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단서가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고, 동시에 진 그레이의 행동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구성인데 아주 훌륭해요. 복선을 제시하고 회수하는 과정도 깔끔하고요.

중반에 진이 MJ의 육체를 강탈했지만, MJ인 척 피터 파커를 속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이 역시 진의 농간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의 가공할 능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켜 주거든요. 

블랙 위도우와 헐크 등 다른 마블 히어로들의 등장도 반갑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퍼니셔와 스파이더맨의 조합이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보면 잘 어울리는 콤비는 아니지만, 상극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의외로 잘 맞습니다. 피터 파커가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퍼니셔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등 개그 장면들이 아주 발군이에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피터 파커가 MJ를 잊지 못한 채 4년이나 홀로 지내며 괴로워한다는 설정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21세기 MZ 세대의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MJ 역의 젠데이야가 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외모를 갖췄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고요.

마지막 절정부도 조금 아쉽습니다. 영화의 중심이 강력한 슈퍼 빌런과의 대결보다는 피터 파커 내면의 사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액션 대결이 없습니다. 핸즈와의 대결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질 것 같지 않은 상대라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마블 영화와 세계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100% 즐기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신선한 아이디어, 적절한 유머에 잘 짜인 이야기를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2026/01/23

수상탑의 살인 - 김영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년간의 연구 끝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지구환경과학부 전 교수 박종호는 거액의 돈을 들여 동해 바다에 스스로 떠 있일 수 있는 거대 건물인 수상탑을 만들었다. 

종호는 특별히 선정한 몇몇 사람들을 수상탑으로 초대했는데, 초대한 당일 수상탑에 폭우와 강풍이 덮쳤고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유일한 탈출 수단인 배마저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탑 정원 벤치에서 무언가에 찔려 죽은 종호의 딸 가온의 사체가, 종호의 잠긴 방 안에서 종호가 목이 베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건 해결을 위해 마침 지도 교수와 함께 수상탑에 방문한 이론입자물리학 전공 대학원생 한규현이 탐정으로 나서는데...

"법의 체면"에 이어 한국 추리 소설은 올해 벌써 두 번째네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제41회 한국추리문학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국내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 미스터리를 정면으로 내세우는게 특징입니다. 특히 트릭은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밀실 트릭과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플랫폼과 밸러스트 등을 이용해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기묘한 구조의 수상탑 설정과 잘 결합되어 있거든요. 이 설정과 수상탑 방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단단한 문, 기묘한 발코니 여닫이 구조가 트릭의 핵심이고요. 

박종호 사건에서 범인 가온은 범행 당시 수상탑을 바다 밑으로 가라 앉힌 뒤, 자기 방에서 5층 종호 방 발코니로 떠 갔습니다. 종호가 놀라 발코니로 나왔을 때 종호의 목을 칼로 그어 살해했고요. 한규현 등이 현장 조사를 했을 때 발코니 문은 열려 있었지만, 5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서 밀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1층과 다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종호의 애인 승희 살인 사건은 더 대담합니다. 가온은 약간의 조작(화약 폭발?)으로 승희 방문이 열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승희는 욕실 비상구로 탈출하려고 했는데, 위층인 3층 내부는 탑이 가라앉은 탓에 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상구를 열자, 4m의 물기둥이 승희를 직격해 사망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약간의 특수 설정을 활용한 본격물적인 트릭은 꽤 괜찮습니다. 추리를 위해 필요한 정보와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수상탑도 본격물 무대로는 완벽합니다. 외부와 단절된 클로즈드 써클이며 그 자체가 트릭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요. 이런 설정은 그간 한국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부분이라서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소설로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개가 느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약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한규현은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너무 평범합니다. 심약하고 수동적인 성격이고, 유머 감각도 전무하다시피해서 이야기를 이끌 만한 매력이 없어요. 독특한 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 하나 쯤은 필요했지만, 그런 역할을 해주는 캐릭터는 끝내 등장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도 과도하게 많습니다. 석승준 교수, 대학원생 박규리, 음모론자 태용제는 이야기에서 실질적인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사건 해결에도, 긴장감 조성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고요. 분량만 늘리는 인물들로 빼는게 더 나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동기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자신이 후원하던 아이가 아버지의 실험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는다?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종호와 승희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차별했다는 설정도 앞부분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동기는 뒤늦게 억지로 덧붙여진 느낌입니다.

그리고 트릭은 나쁘지 않은데, 세세한 부분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우선 승희 사건은 가온이 사망한 뒤 일어났는데 누가, 어떻게 수상탑을 침수시켜 트릭에 사용될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물론 가온이 종호 사건을 일으킬 때 3층도 침수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경우 다음날 범행이 발각될 우려가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범인을 찾기 위해 탑 전체를 수색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종호가 수상탑이 아예 가라앉을걸 예상하고 수상탑의 발코니와 문을 침수에 대비하는 형태로 만들었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수상탑이 가라앉은 건 가온이 완전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억지로 만든 상황입니다.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첫 방문한 한규현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설비를 갖출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거대 구조물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가 손쉽게 휴대폰 앱으로 가라앉히고, 폭탄으로 보트를 폭파시키고 단단한 문을 봉쇄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이에요.

무엇보다도 범인 가온이 종호 방에서 탈출하다가 청새치의 습격으로 죽었다는 진상은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니까요. 실제 사례를 좀 찾아보아도, 낚시 중이거나 배 위에서 잡은 청새치의 몸부림에 찔려 죽은 경우는 있어도 바다에서 공격받아 죽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불빛에 돌격한다는 습성도 없고요. 불가능 범죄를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에 불과합니다.
이후 가온의 시신이 부서진 수상탑의 정원 벤치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결과도 우연입니다. 시체가 떠내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트릭을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한건 큰 감점 요소입니다.

정보 제공이 지나치게 공정한 탓에 독자가 진상을 추리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탑'의 기묘한 설정이 트릭에 사용되었으리라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과 지적인 쾌감을 오래 느끼기는 힘듭니다. "유리탑의 살인"처럼 나름의 반전이라도 선보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국 추리 소설로는 보기 드문 본격물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분량을 줄이고 밀도를 높였다면 훨씬 나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2026/01/11

100m(2025) - 이와이사와 켄지 : 별점 2.5점

빠른 발로 반에서 인기가 많은 토가시 앞에, 항상 달리기만 하는 전학생 코미야가 나타났다. 토가시는 코미야의 재능을 알아보고 더 빨라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한동안 달리기를 피했던 토가시는 고등학교에서 다시 육상에 복귀해 전국 대회에 출전했지만, 그곳에서 다시 만난 코미야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성인이 된 토가시는 회사 소속 선수로 뛰다가, 슬럼프에 빠져 기록은 나오지 않는 중 부상을 입고나서야 처음으로 ‘왜 자신은 달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전 일본 육상대회 100미터 결승전에서, 다시 한 번 코미야와 같은 트랙 위에 서는데...

단거리 육상, 그중에서도 100미터라는 아주 짧은 거리를 통해 인물의 시간과 감정을 그려낸 독특한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실험적이면서도 개성 있는 연출입니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촬영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특히 비가 내리는 트랙 위에 선 선수들을 카메라가 패닝으로 훑는 장면은 엄청났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정말 대단하네요.
음악 활용도 좋고, 작화 역시 뛰어납니다. 손으로 그린 배경들은 여러 스타일로 변주되며, 상황에 맞게 잘 어우러집니다. 한 마디로 완성도 높은 잘 만든 애니메이션입니다.

이야기는 특별한건 없습니다. 대부분 성장기에 가까운 스포츠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만의 매력도 존재합니다. 명확한 성장을 보여주고, 교훈을 또렷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점입니다. 경기 결과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 장면들이 반복되고, 마지막 최종 결전마저도 같은 방식으로 끝맺거든요. "러프"에서의 마지막 장면 같은데,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진지한 성장기라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스토리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다는 명확한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토가시의 시점에서 보면, ‘달리는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가 초등학교 때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토가시가 부상과 나약함을 극복하고 달리기와 마주하는 일종의 인간 찬가로 보기도 어려워요. 부상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마지막 경기의 결과가 어땠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 탓입니다.
코미야의 시점으로 달리기밖에 없는 절박한 아이의 성장기로 보기에는, 코미야의 절박함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어요. 초반 이후에는 이미 완성된 강한 선수처럼 묘사되어 성장기의 느낌도 약하고요.
그렇다고 토가시와 코미야의 청춘을 그린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학창 시절의 비중이 너무 짧고, 토가시의 육상부 부활 이야기는 진부한 클리셰의 반복일 뿐입니다. 자이츠나 카이도 등 다른 선수들의 서사도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100미터를 누구보다 빨리 달리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된다"는 작품의 명제도 참 별로입니다. 그게 뭐든, 누구보다 우수하면 대접받는게 당연하니까요. 이걸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처럼 풀어놓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단점은 명확하지만, 결과물 자체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워낙 완성도가 높아 추천할 만 합니다.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애니메이션을 비교적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일 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야기 맥락보다는 시각적인 새로움을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6/01/02

법의 체면 - 도진기 : 별점 2점

안녕하세요, 2026년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처음으로 리뷰를 올리는 작품은, 척박한 한국 본격 추리물 시장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 두 편은 좋습니다. 법을 잘 아는 작가가 법에 대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진기 작가만 쓸 수 있을 법한 작품이에요. "완전범죄"는 본격물을 방불케 하는 추리가 펼쳐지기도 하고요.
"애니"는 다소 독특한 설정의 SF인데, 이 역시 설정만큼은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천국"과 "행복한 남자" 두 편은 한마디로 망작이었고, 앞서의 세 편 역시 전개와 묘사 등 소설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빼어난 설정과 아이디어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작가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분명 있는데, 아쉽게도 단점이 더 많습니다.

수록작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

호연정 변호사에게 변상일이 찾아와 자신의 장물 취득 사건 3심 변호를 의뢰했다. 변상일의 유죄가 확실했지만, 시한부 인생이라는 변상일의 청에 못 이겨 호연정은 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상고는 기각되었다.

그러나 상고 기각 확정 후, 변상일이 강원도 홍천에서 일어났던 ‘청테이프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증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변상일의 쪽지문이었다.

호연정 변호사 시리즈 단편입니다. 변상일의 조작으로 유죄가 확정된 장물 취득 사건이 일어난 날짜가 청테이프 살인사건 발생 일자와 같아서, 변상일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지만 풀어줄 수 없는 딜레마를 다룹니다. ‘법의 체면’이라는 제목 그대로이지요. 법관들은 체면 때문에 이전 판결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는 굉장히 흥미롭고, 변상일이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딸과 아내를 잃었는데, 음주운전 가해자 장봉호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탓에 장봉호와 법에 복수하려고 결심했다는 서사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변상일의 범행 과정을 1인칭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처럼 묘사한건 반칙입니다. 독자는 변상일이 진범이 아니라고 오해하게 되니까요. 전개에 필요했던 부분도 아니니 빼야 합니다. 마지막 변상일의 자살도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을 잘 풀어냈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쉽습니다.

당신의 천국

국회의원 최명환에게 상담 차 장애가 있는 박성혜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환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막장 드라마를 쓰다가 시민단체로 고발당하고 취조당한 끝에 자살 시도로 몸을 망쳤다는 박성혜의 1인칭 고백입니다.

그러나 장황한 고백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낮고 시시합니다. 박성혜가 최명환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무슨 논리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최명환을 살해하는 방법도 생수통에 독을 풀었다는 것인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자가 생수통에 어떻게 약을 풀었는지, 청산가리는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묘사도 문제입니다. 28살 여성의 한 서린 독백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건질 만한 점이라면 박성혜가 ‘신시아’라는 필명으로 썼다는 막장 드라마의 내용뿐인 막장 범죄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완전범죄

석지연은 동거하던 직원 방미래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사인은 의심할 바 없는 뇌출혈이었고, 방미래가 술에 취한 줄 알아 방치했다는 변명은 설득력 있어 보였다.

의사 출신 김 검사는 피해자가 거액의 질병 사망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기소하는데...

과실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 완전범죄가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이자, 법정에서의 공방이 벌어지는 법정물 단편입니다.
작 중, 김 검사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동기. 단지 직원 방미래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인 사장 석지연이 그녀를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2. 범행 방법. 마침 그 시간에 뇌출혈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 검사는 첫 번째는 거액의 보험으로, 두 번째는 평소 피해자에게 뇌출혈 전조 증상이 있다는 점을 눈치챈 범인이 보험 가입을 유도했고, 뇌출혈이 일어났을 때 방치했다는 답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방미래의 연인 류소이의 증언 등을 통해 법정에서 전조 증상은 2개월 전 부터 있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이러한 본격 추리적인 재미에 더해 법적인 딜레마 부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 검사는 방미래의 의료 기록을 보고 그녀가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거의 즉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석지연이 방미래를 방치했던건 방미래의 죽음과 인과관계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녀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본격물적인 요소와 법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딜레마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나 황 판사가 의사인 아내를 통해 방미래의 사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 이를 숨긴 채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결말은 작품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아쉽기만 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애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던 동한은 금사원 박사의 연구에 피험자로 응모했다. 하룻밤에 한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꿈을 꾸게 해 주는 ‘영생’ 실험이었다.

설정은 정말 멋집니다. 한 평생의 꿈을 꾸게 하면 결국 그것이 영생에 가깝다는 발상은 정말 혹할 만 하니까요. 친구 수민에게 사 주었던 전기 충격기로 뇌에 삽입된 칩을 제거한다는 결말도 작가의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 깔끔합니다.

하지만 연구로 만들어진 ‘꿈’에 자아가 생겨 본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전개는 뻔합니다. 설명도 충분하지 않아 와 닿지 않고요. 애니와의 사투 역시 박진감은 넘치지만,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탓에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설정과 마무리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다른 작품들도 이 정도로만 정리되었다면 훨씬 좋을텐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행복한 남자

꽃뱀에게 당한 한 남자의 약 반년에 걸친 일기 형식을 빌린 독백으로 내용도 뻔하지만, 그나마의 설득력조차 낮습니다. 문체가 30대 남자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식이고, 과장되고 낡은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는 결말 역시 식상하며 전혀 현대적이지 못합니다.

낡은 설정을 낡게 풀어낸, 새로운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탓에 2025년에 읽을 이유가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2025/09/28

소스 코드(2011) - 던칸 존스 : 별점 2.5점

시카고행 열차 안에서 콜터 스티븐스 대위는 "션 패트리스"라는 남자의 몸안에서 눈을 떴다. 8분 후 열차는 폭발했고, 콜터는 어둡고 비좁은 캡슐 속에서 깨어났다. 지상 통제관 굿윈과 프로젝트 책임자 러틀리지는 그가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통해 션의 뇌파 잔상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제한 시간 8분 이내에 열차 폭발의 범인을 8분 안에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시카고를 향한 후속 대형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다.

콜터는 수없이 폭발로 인한 죽음과 소스 코드를 통한 귀환을 반복하며, 범인 후보를 줄여나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2차 테러를 선제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8분이 지나도 콜터는 소스 코드를 통해 복귀하지 않고 "션 패트리스"의 육체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콜터는 새로 가지친 시간선에서 굿윈에게 메시지를 보내 소스 코드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평행한 현실 분기를 생성함을 알려주었다.

군에서 개발한 실험 기술을 통해 사망자의 마지막 8분으로 진입해 폭탄 테러범을 찾아낸다는 타임 루프, 시간 여행, 멀티버스 설정의 SF 스릴러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흥행했던 작품인데 넷플릭스를 통해 이제서야 감상했습니다. 

타임 루프·시간여행·멀티버스 장르물은 흔해 빠졌지만, 군사용 ‘소스 코드’라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마법, 초능력이 주류였던 타임 루프 방법을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군에서 개발한 기술로 테러를 막기 위해 이용한다는 발상도 그럴듯 했고요.
또 이를 통해 정의되는 8분이라는 시간 제한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실패를 반복해가며 정답을 찾아내는건 다른 타임 루프물과 동일하지만, 8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엄청난 제약으로 작용하여 긴박함을 더해주거든요. 영화라는 매체에 잘 어울렸던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은 과거를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결말부에서 제시되는 해피 엔딩도 여운을 남깁니다. 콜터가 ‘션 패트리스’의 몸으로 평행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는건 예상 가능했지만, 죽을 뻔 했던 사람들과 즐기는 스탠딩 개그 쇼와 굿윈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콜터의 신체는 '잔해'만 남아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는건 확실한 단점이고, 핵심 설정인 ‘8분’이라는 시간 제약도 논리적으로 어설픕니다. 설명에 따르면 8분이 지나면 션의 의식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8분 뒤엔 반드시 죽는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원 시간선에서 션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데스티네이션"과 동일한 운명론적 설정이라면 크리스티나 역시 예외일 수 없는데 그녀는 살아남는 시간선이 있어서 모순이 생깁니다.
결말에서 콜터의 정신이 션의 육체에 남는 설정도 이상합니다. 소스 코드는 ‘덧씌움’이 될 수 없습니다. 8분이라는 찰나 동안만 임시로 의식을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되니까요. 만약 영원한 덧씌움이라면, 사고로 죽은 뒤 콜터에게 의식이 돌아온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션 패트리스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를 기용했음에도 액션이 별볼일 없고,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기차와 콜터의 캡슐 안에서 이루어지는 등 스케일이 작은 점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32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 탓이겠지만요.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 뻔한 전개, 헐거운 설정 등의 단점은 있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25/08/22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핫한 모큐멘터리 형식의 호러 장편입니다. 과거 기사와 취재 기록, 독자 투고, 인터뷰, 인터넷 게시글 등 서로 결이 다른 텍스트를 이어 붙여 실존하는 괴이 현상을 추적한다는 실감을 한껏 느끼게 해 줍니다. 한마디로 다큐멘터리와 괴담집이 섞인 느낌이에요.

여러 형식으로 펼쳐지는 작품 속 괴담들은 짧지만 강렬한게 많습니다. 저주받은 아파트에 살던 어머니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린건 ‘누군가가 투신하는 순간’이었다는 고백, 그리고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가 점프를 반복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대목이 특히 섬뜩합니다. 빨간 여자는 자살한 아키라의 어머니였는데, 생전에 나무에 목을 맨 아들을 내려달라며 펄쩍 뛰던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는 설명이지요.
묘사도 발군입니다. 특히 ‘저주 스티커’는 굉장합니다. 기괴한 디자인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에 붙이고 다니는 이상 행동이 그야말로 섬찟함을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형식으로 괴담과 괴이현상이 소개되기 때문에 신선한 발상도 많습니다. 동영상 때문에 귀신에 씌운 대학원생의 에피소드에서의 공포물 반응을 실험하려고 여러 공포 체험 영상을 짜깁기했다는 설정처럼요. 공포물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되는 실험 결과도 재미있었어요. 인터넷 실황으로 심령 스팟 돌입을 생중계하는 등 새로운 형식도 선보이고요. 이런 독특한 형식은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어 더 소름돋게 만들어 줍니다. 확실히 영화화 되는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부분이 제법 많아요. 

이렇게 호러물로서 충분한 완성도를 지닌 개별 괴담들이 기사, 인터뷰, 인터넷 글, 독자 투고 등 서로 다른 형식으로 선보이다가, 이야기 전체가 하나로 묶여 완결에 이르는 과정도 꽤 깔끔합니다. 괴담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끝내버리는(원래 있었던 괴이 취급을 하며) 미쓰다 신조 스타일과는 다르게, 어쨌건 괴담, 괴이 현상의 정체는 결말에서 밝혀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제가 파악한 정체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긴키 지방 산속에서 여성을 꾀는 존재 : 과거 노총각 마사루의 원념입니다. 노모를 모시느라 결혼도 못 한 채 인형과 감을 애지중지하던 그는 한 여성을 돌로 때려죽인 뒤 스스로 그 돌에 머리를 박고 죽었습니다. 그 뒤 여자들에 돌에 머리를 박고 죽는 사건이 반복되자 돌은 신사에 모셔졌습니다. 사람들은 인형과 감을 공양했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잊혀져버리자, 다시 나쁜 짓 - 여자를 꾀어 데려오는 - 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빨간 코트의 여자 : 아키라의 어머니입니다. 아키라는 마사루의 원념이 원하던 ‘여자’의 대역으로 희생되었었지요.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뒤 마사루의 돌을 훔쳐 아들을 닮은 무언가를 되살렸습니다. 아울러 아이 유령 목이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건, 목을 메다가 부러졌기 때문이겠지요...
  3. 저주 스티커 : 아키라의 어머니가 아들의 ‘먹이’를 찾기 위해 퍼뜨린 장치였습니다. 스티커를 통해 저주에 걸린 사람의 혼은 아키라의 먹이가 되고, 남은 껍데기는 자살처럼 위장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 때문에 긴키 지방의 아파트와 댐에서는 자살 사건이 잇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단점도 있습니다. 몇몇 괴담은 반복 패턴이라 신선도가 떨어지고, 서로 다른 형식이 뒤섞인 서술은 때로는 산만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괴담과 괴이 현상의 핵심 정체는 밝혀주지만, 상세한 모든걸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편집자는 어디로 실종되었는지, 저주에 씌워진 희생자들이 외우는 기묘한 주문은 무엇인지, 스티커의 의미와 스티커를 눈에 띄는 전면에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궁금한게 많은데 모두 그냥 '저주'로 퉁치고 마는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너무 급작스러웠던 마지막 진상 고백은 다소 아쉽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쌓아올렸던 장치들과 무관한, 빨간 코트의 여자 독백 한, 두페이지로 끝나버리는 탓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완성도를 다소 떨어트립니다. 비유하자면 "링"의 사다코가 TV에서 기어나와 자신의 원한을 한, 두 페이지 독백으로 마무리하는 결말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매체 텍스트들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내는 방식이 능숙하고, 섬찟함을 유지하는 기술도 좋습니다. 호러 소설, 그중에서도 괴담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즐기실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서사적 완결성보다는 순간순간 장면의 섬뜩함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25

괴물 나무꾼 (2023) - 미이케 다카시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을 저질러왔던 변호사 아키라는 어느날 '괴물 나무꾼'의 가면을 뒤집어 쓴 괴한에게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입원한 병원에서 자신의 머리 속에 '칩'이 삽입되어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칩은 뇌를 건드려 평범한 인간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었고, 이는 아키라를 과거에 납치했던 토마 부부의 실험에 의한 것이었다.
괴한의 공격으로 칩이 망가진 아키라는 서서히 인간성을 되찾았고, 칩 이식 수술을 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괴물 나무꾼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데...

기괴하고 변태적인 상상력의 영화로 잘 알려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넷플릭스 전용 영화입니다. 어딘가의 추천을 읽고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흔해빠진 사이코패스물에 변주를 가한 설정은 괜찮습니다. 주인공 아키라 등 어릴 적 토마 부부에게 유괴당했던 아이들은 부부에 의해 모두 뇌에 ‘칩’을 삽입당했고, 칩이 뇌간을 건드려 감정과 공감 능력을 차단했기 때문에 모두 사이코 패스가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토마 부부의 아들이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였고, 그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이코패스를 만들었다는 동기도 설득력있습니다. 만들줄 알아야, 부술 수도 있다는 논리인데 그런대로 와 닿았어요.
아키라가 저지른 살인들에 대한 묘사, 사이코패스 아키라에 대한 표현도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영화는 ‘괴물 나무꾼’의 정체를 쫓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정작 추리적인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범인은 앞서 등장한 인물 중 하나일 수밖에 없고, 결국 켄모치가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 있는 복선이나 서사적인 개연성은 부족합니다. 사실상 유일한 단서는 켄모치가 이누이 형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머리를 부딪힌 장면뿐인데, 이로 인해 뇌에 삽입된 칩이 고장나고, 그로 인해 인간성을 되찾았다는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간성을 되찾은 그가 자신과 같은 실험체들을 죽인 이유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범행 동기가 모호해서 관객이 범인을 추론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탓에, 후더닛(whodunit) 형식으로서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켄모치는 죽었지만, 켄모치와 아키라의 사투 중에 아키라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이코패스라는걸 알게 된 아키라의 약혼녀가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도 시시하고 허무합니다.

설정상의 허점도 눈에 띕니다. 아키라는 자신이 뇌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아무리 어렸어도 그런 수술을 받았다는건 충분히 기억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또 켄모치가 왜 하필 ‘괴물 나무꾼’이라는 복장과 설정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도 없고요.
사이코패스인 아키라의 친구 스키타니나 프로파일러인 토시로 란코는 서사에 거의 기여하지 않아서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시나리오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사이코패스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설정 자체는 흥미롭고, 살인 장면들이 풍기는 감정의 결핍이나 공허한 분위기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도, 미스터리로서도 설득력이 약하고, 연출과 구성도 허술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적인 재미를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25/07/11

올드 가드 (2020) -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 별점 2점

앤디가 이끄는 용병단은 코플리의 의뢰를 받고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매복 중이던 군인들의 공격으로 전원이 사망했지만, 곧바로 되살아나 군인들을 전멸시키고 현장을 떠났다. 이들은 모두 고대부터 살아온 불사의 존재들이었고, 이들을 노리는건 제약회사 CEO 메릭이었다. 불사의 유전자를 이용한 생체 실험 및 신약 개발이 목표였다. 

한편, 새롭게 불사의 능력을 각성한 미 해병 나일이 등장했고, 앤디는 그녀를 데리고 프랑스에 있는 은신처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습격을 받아 조와 니키가 붙잡혔다. 조와 니키를 구하려는 과정에서 동료 부커가 배신했고, 앤디 또한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나일이 나서서 모두를 구해냈고, 앤디는 불사의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도 메릭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들이 팀을 이뤄 현대 사회에서 은밀히 활동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액션 판타지 영화입니다. 2020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작품이지요. 원작은 그레그 루카와 레안드로 페르난데스가 만든 그래픽 노블입니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주연 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입니다. 고대부터 살아온 전사 안드로마케(앤디) 역을 맡아, 강인한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의 퓨리오사를 떠올리게 하는데, 단순한 액션 연기뿐 아니라 오랜 시간 살아온 이의 내면까지도 설득력 있게 표현해냅니다. '미중년 액션물'의 여성 버젼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외모와 연기였어요. 강한 중년 여성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시는 분들께는 이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야기도 익숙하지만, 생각보다는 안정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사의 존재들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슈퍼히어로물의 틀에 현대 밀리터리물의 분위기를 결합한 형태인데, 과장된 판타지보다 현실적인 액션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살아온 불멸의 전사가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정은 "하이랜더"를, 불사의 존재들이 현대 밀리터리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과 제약 회사의 생체 실험 설정은 "아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뤄낸 편입니다. 특히 이들이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구해왔고, 그 구한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설정은 생각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이 항상 던지는, '불사의 존재가 세상에 남기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나름의 해답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전개도 빠른 편이라, 별 생각 없이 보기 좋은 팝콘 무비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깊이나 감정선보다는 액션과 설정 위주로 흘러가며,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 부담 없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이야기 속 설정과 인물들의 행동 사이에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띕니다. 예를 들어, 나일은 초반에 사람을 죽이기 싫다며 작전 참여를 거부하지만, 이후에는 주저 없이 총을 쏘며 메릭 본사에 난입해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이러한 심리 변화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메릭의 사주를 받아 앤디 일행을 납치하는 주역인 코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며 납치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앤디 일행의 일생을 조사하다가 그들의 사명을 깨달았다며 한편이 되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럴거라면 진작에 메릭의 손을 잡지 말았어야죠.
부커가 동료들을 배신하는 이유 역시 설득력이 약합니다. 죽고 싶어서 제약회사에 협조했다는 설정인데, 그럴 거라면 본인이 직접 연구 대상으로 나서면 될 일이지, 함께한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들의 죽음을 동기의 배경으로 제시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그리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배신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동료들이 100년동안 만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장면도 이상해요. 자기들을 팔아넘긴 핵심 인물은 코플리는 바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으니까요. 물론 부커와의 인연은 수백년 이어져왔기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설명이 부족하기는 했습니다.

액션 장면의 완성도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장면 구성이 다소 단조롭고, 최근 액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동선이나 창의적인 무기 활용도 부족한 편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의 매력 외에는 팀 전체의 조화나 전략적 액션에서 오는 시너지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들이 불사의 존재들을 상대로 단순 총격으로만 대응하는 부분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취탄을 쓰건, 되살아나기 전까지 계속 죽이면서 포획하건, 생각해볼만한 작전이 많은데 너무 단순하게 들이받다가 죽어나가서 시시했고, 긴장감을 느끼기도 어려웠습니다.

불사 설정도 "아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목을 자르면 어디서부터 재생되는 걸까요? 산산이 부서지면 재생이 가능한걸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완성도 높은 액션 영화나 탄탄한 드라마를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수 있지만, 큰 기대 없이 시간 보내기용으로는 그럭저럭 즐길만 합니다. 무겁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전용 영화로는 무난했어요.

그렇지만 이 정도 완성도의 영화가 넷플릭스 최대 히트작 중 하나라는걸 보니, 확실히 짧고 강렬한 자극에 주력하며 이야기가 점점 부실해지는게 트렌드인것 같습니다.

2025/06/13

아인 1~17 - 사쿠라이 가몬 : 별점 2.5점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단순한 콘셉트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내용은 꽤 독특한 밀리터리 액션물입니다. 주인공 나가이 케이와 아인 테러리스트 사토 간의 대립이 핵심인데, 사토가 군사 전략과 물리적 전투 능력 모두에 특화된 사이코패스라서 경찰 특공대, 자위대 군대와 교전을 벌이는 연출이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고증에 충실하게 잘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작품 속 '아인' 설정도 독특합니다. 아인은 단순한 불사의 존재가 아니고, 죽기 전까지는 보통 인간과 똑같기 때문에 마취제나 산소 결핍, 냉동 등으로 제압 가능합니다. 하지만 죽고 나면 놀랍도록 신속하게 부활하며, 이 부활은 원래의 신체 상태를 완벽히 복원함과 동시에 어떠한 물리적 장벽도 무시한다는 설정이 추가되어 있고요. 이 설정은 이야기 전개에 잘 활용되어 극적 긴장감을 더합니다.

등장인물들도 복잡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빌런 사토의 존재감은 압도적입니다. 냉혹하고 잔인한 사이코패스지만, 단순히 광기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투가이며, 리더십마저 갖춘 인물로, 작전의 구상과 실행 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거든요. 절단된 손을 튀겨 프라이드 치킨으로 위장하여 보안 업체로 보낸 뒤, 자신의 몸을 분쇄기에 갈아서 회사 내부에서 부활하는 침투 장면은 아인의 기묘한 설정 중 하나 - 몸이 조각나면 가장 큰 조각 기준으로 부활한다 - 를 활용하여 극대화한 명장면으로 기억될 만합니다. 공군 기지를 장악한 뒤 군용기를 직접 조종하여 정부 기관을 테러하는 장면도 사토라는 캐릭터가 가진 전략에 있어서 독보적인 창의성, 그리고 아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고요.
주인공 나가이 케이 역시 기존 소년 만화 주인공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인물입니다. 이타심이나 정의감과는 거리가 먼 그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캐릭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격이 사토와의 대립 구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둘의 대결은 단순히 강함의 여부가 아니라 심리전과 전략의 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케이와 사토의 대결 구도로 집중된 전개와 결말도 깔끔합니다. 인기에 영합해 불필요한 외전을 덧붙이거나 결말을 늘이지 않고, 처음 구상된 틀 안에서 완결을 짓는 모습은 만화계에서 보기 드문 미덕이라 마음에 드네요.

"기생수"처럼 사회 풍자적 메시지가 곳곳에 녹아 있는 점도 좋았습니다.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생체 실험에 활용하여 거액을 번 제약 회사가 테러 경고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을 계속 근무하게 만드는 모습, 아인 차별법안을 만든 국회의원이 실제로는 아인이었다는 반전 등은 작품이 단순한 SF나 액션에 머물지 않고 현실 사회의 모순을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아인이 아니지만 테러에 가담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 소셜 미디어 등을 활용한 무차별적인 메시지 전달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고요.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인이 조종할 수 있는 그림자형 존재 'IBM'은 표지에서도 적극 노출하는 등의 비중에 비하면 활용도가 너무 떨어집니다. 사토의 테러 장면 몇 군데 외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종의 초능력에 가까운 소년만화적인 발상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밀리터리 액션물인 작품 분위기와도 사뭇 차이를 보이고요. 

케이와 사토의 마지막 대결도 기대에 비해 밋밋합니다. 단순히 몸통 박치기(?)로 함께 물에 빠진 뒤 기절한 사토를 체포하는 식의 마무리는, 치열한 두뇌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이 결말보다는 사토의 잘라진 손을 놓고 벌이는 테러리스트와 케이 측의 대결이 훨씬 볼만했습니다.

이외에도 '플러드 발생', '일반인의 부활' 등 작품 내 여러 떡밥은 끝내 회수되지 않았고, 케이의 친구 카이토가 지나치게 무리하게 행동하는 이유 역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는 점도 단점이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세계관과 불사의 존재라는 콘셉트를 잘 활용했고, 무엇보다 강력한 빌런 사토의 존재와 그를 중심으로 한 치밀한 전개는 탁월합니다. 다만 일부 설정과 떡밥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대결의 맥빠진 마무리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래도 당대의 인기작이었던 이유는 충분히 잘 보여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영화도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2025/05/31

옥토버리스트 - 제프리 디버 / 최필원 : 별점 2점

옥토버리스트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라는 딸 세라를 유괴당했다. 유괴범 조셉은 가브리엘라의 사장인 찰스 프레스콧이 가지고 있던 '옥토버리스트'와 돈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가브리엘라는 우연히 만나 친해진 펀드회사 대표 대니얼의 도움으로 리스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조셉과 협상에 나서는데...

제프리 디버는 링컨 라임 시리즈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이 작품은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닙니다. 어딘가의 리스트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했던 기억이 나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무슨 리스트인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36장에서 시작해 1장으로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영화 "메멘토"에서 처음 접했던 방식인데, 소설로는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이 역순 전개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중요한 구조적 장치로 작용하며, 덕분에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씩 깨지는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였는데 실제로는 게임 속 상황이었고, 교회 집사라 선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던 노란 셔츠의 딕슨이 사실은 킬러였으며, 엘레나가 차에 치인 줄 알았던 장면도 알고 보니 연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일종의 반전 요소들은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가 더욱 커져 긴장감을 높입니다. 대니얼이 킬러였다는 첫 번째 반전을 시작으로, 가브리엘라는 대니얼을 잡기 위해 함정 수사를 벌이던 형사였다는 두 번째 반전, 그리고 가브리엘라 역시 다른 조직과 연계된 킬러로 애초에 대니얼 일당을 제거하는게 본래 목적이었다는 마지막 반전으로 이어지거든요.

결말에서는 대니얼 일당은 가브리엘라의 계획대로 조셉에게 살해당하고, 경찰이 가브리엘라의 행방을 놓쳤던건 그녀가 소지품을 쓰레기차에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등 모든 떡밥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떡밥에는 '옥토버리스트'는 대니얼을 유인하기 위해 대충 만들어낸 맥거핀으로 명칭조차 "옥토버 페스트"에서 따왔다던가, 대니얼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했던 ‘프리스턴 솔루션’은 알고 보니 요트 커버 색깔에 불과했다는 등도 있고요.
책 맨 마지막에 수록된 목차의 진짜 제목들이 이런 정리를 도와주는데, 예를 들어 챕터 35의 제목은 ‘대니얼의 무덤’입니다. 대니얼은 이 챕터에서 죽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역순 전개가 반전을 위한 장치로만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설득력을 희생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케플러와 수나리 형사는 이미 가브리엘라가 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작품 중반까지 이에 대한 단서나 암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내용을 전부 이해한 뒤 돌이켜보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요 반전들이 충분한 복선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가브리엘라가 형사이자 킬러였다는 설정, 대니얼의 정체 등이 대표적인데요. 모두 과거 사건이나 대화 장면을 갑자기 삽입해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반전은 많지만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라가 킬러였다는 반전은 반드시 필요했는지 의문이에요.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져 버린 셈입니다.

또한 프랭크처럼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큰 역할 없이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보이기는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형식과 실험 정신은 분명히 흥미롭지만, 반전 위주의 전개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전체적인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굳이 찾아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10/20

히트의 탄생 - 유승재 : 별점 4점

히트의 탄생 - 8점
유승재 지음/위즈덤하우스

1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장수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알려주는 책. 미시사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제품과 브랜드의 역사 뿐 아니라 그걸 만든 사람들, 장수하게 된 이유, 광고 및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폭넓게 알려줍니다. 무려 25개의 항목이나 되어서 양도 풍성하고요.

덕분에 새롭게 알게된 정보들이 많은데, 몇 가지 소개해드립니다.

샘표 간장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수 브랜드로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는 '몽고 간장' 이름의 유래입니다. 몽골에서 전래된건 아니나,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더군요. 마산에 고려 충렬왕 시절,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겠다며 여몽 연합군을 주둔시켰던 곳에 군사들 식수공급을 위해 건설한 우물 '몽고정'이 있습니다. 이 몽고정을 수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몽고간장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한 겁니다.

'메리야스'는 일본말이 아니라 스페인어 '메디아스Medias' 혹은 포르투갈어 '메이아스Meias'가 일본을 통해 전해지면서 일본식 발음이 더해진 말로 원래는 상의나 내의가 아닌 '양말' 또는 '스타킹'에 가까운 뜻입니다. 오늘날 백양을 있게 만든 대표 상품은 흰색의 민소매 러닝셔츠인데 백양이 1958년 아염산소다를 활용한 표백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후 나온 상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입는 속옷의 사이즈 구분은 백양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1960~70년대 백양, 쌍방울과 함께 내의업계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던 '독립문'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향복 선생이 창업한 회사로,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며 보던 독립문을 떠올리며 정한 브랜드입니다. 1947년 '대성섬유공업사'로 시작한 사업이 확장해가면서 1953년 '평안섬유공업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듬해 1954년 5월 독립문을 상표등록했습다. 김향복 선생이 평안도 출신이라 회사 이름에 평안이 들어갔는데, 1971년에 평안섬유공업의 영어 이름을 따서 피에이티PAT(Pyong An Textile)를 새롭게 출시, 내의에서 성인 캐주얼 브랜드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나다. 지금도 건재한 코뿔소 브랜드인 PAT인데, 독립 운동가가 만든 브랜드라니 앞으로 관심을 더 가져야 겠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박카스를 마시면 피로가 풀릴까?"에 대한 답도 알려줍니다. 박카스는 비타민B의 일종인 니코틴산아미드와 카페인 등을 함유하고 있어서 각성 효과와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생성해준다네요. 지속 효과는 극히 짧아서 그야말로 반짝 하고 느낄 뿐이라지만요.

마몽드는 광고 캠페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어서 흥미로왔습니다. 이영애의 "산소 같은 여자' 시리즈가 마몽드를 국내 최고의 브랜드로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하네요. 프랑스어로 '나의 세상'을 의미하는 브랜드 이름처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식이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 "나의 삶은 나의 것", "성취는 남자의 것만이 아니다" 등 여성의 심리적 욕구를 자극하는 카피도 강력한 위상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고요. 마몽드가 매출 1천억 원을 넘었던 해에 출시한 라네즈는 마몽드보다 더 빠르게 1천억 원 매출 벽을 넘어섰는데, 이 역시 유명한 "영화처럼 사는 여자' 캠페인이 주효했던 덕분입니다. 태평양은 1970년대부터 광고마케팅에 많은 비용을 투입했고 많은 히트 캠페인을 남겼지만, "산소 같은 여자"와 "영화처럼 사는 여자"는 태평양 뿐 아니라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 나아가 광고업계 전체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법한 명작 캠페인이라고 합니다. 타깃 고객인 여성들의 심리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적절히 반영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콘셉트를 바탕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면서, 장기간 지속하며 브랜드 자산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도 아직 생생할 정도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몇몇 브랜드, 제품명의 유래도 재미있었습니다. '트리오'는 그릇 외에도 야채와 과일까지 세 가지를 모두 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군요. 처음부터 설거지 외에도 농산물을 씻어 먹을 수 있는 세제로 고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라운을 대표하는 '죠리퐁'은 뻥튀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다양한 곡물을 가지고 실험한 끝에 1972년 출시한 과자로, 처음에는 먹어서 즐겁다는 의미의 '조이 Joy'와 뻥튀기를 의미하는 '퐁'을 합성하여 '조이퐁'이라 했지만, 동일상표가 등록되어 있어 같은 의미를 지닌 '졸리Jolly'로 대체해 '죠리퐁'이 된 것이있고요.

모나미의 '사인펜'과 '매직'도 사인하는데 편리하다는 뜻의 사인펜, 신기하게 어떤 표면이라도 쓸 수 있다고 해서 매직펜으로 이름을 붙였던건데, 이제는 보통명사로 굳어져서 국어사전에까지 올라가 있다고 하네요.

이 외에도 여러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하고, 브랜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잘 알 수 있어서 유익했는데 딱 한 가지, 너무 많은 제품들이 소개되는 탓에 다른 책이나 자료에서 접했던 제품들 - 호빵, 활명수, 박가분, 삼양라면 등 - 이 많고, 최근까지 위상이 살아있는 제품들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비슷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브랜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10/09

삼대 기서의 다음은 이거다! 추리 소설의 틀을 넘는 실험적 미스터리

오랫만의 미스터리 추천 소개입니다.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에서 발견한 추천이지요.
이른바 '일본 삼대 기서'는 유명하기는 한데, 솔직히 큰 재미를 느끼기는 힘든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오래 전 동서 버젼의 "흑사관 살인 사건"을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고 중간에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그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에 '삼대 기서'라고 불리웠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못하는게 문제일 뿐이지요.
아래 소개 작품 중 두 편은 읽어보았는데, 새롭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했습니다. 평도 그럭저럭이고요. 언제나처럼 이런 리스트는 참고만 하는게 좋겠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미스터리 소설. 그중에는 "도구라 마구라", "흑사관 살인 사건", "허무에의 공물"처럼 '일본 삼대 기서'로 불리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추리 소설이나 탐정 소설의 형식을 뒤엎고, 메타픽션적 요소를 포함한 실험적인 기법으로 쓰인 안티-미스터리 같은 소설이다. 이번에는 그러한 독특한 미스터리 소설을 소개한다.

1. "불타버린 지도" - 아베 코보
- 반년 전 실종한 남편의 수색을 의뢰받은 탐정이, 수색을 하면 할수록 실종자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며, 결국 자신도 도심 속을 헤매게 된다는 기묘한 추리 소설. 도시는 타인만 존재하는 사막으로 묘사되며, 소외된 인간의 압도적인 고독감이 그려진다. 아베 코보 특유의 부조리와 탐정 소설 형식이 절묘하게 융합된 걸작.

2."신기하게도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살인 사건" - 하시모토 오사무 (국내 미출간)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를 읽고 탐정을 찾는 노파. 손녀를 통해 그녀를 찾아온건 탐정과는 거리가 먼 도쿄대 졸업의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주인공은 기토우 가문 옛 당주의 13번째 제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메타 요소가 빛나는 포스트모던 미스터리.

3.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 쓰쓰이 야스타카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추리 소설을 쓴다면? 이 작품이 그 답변. 교외의 서양식 저택 '로트레크'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참극을 맞이한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교묘한 트릭이 숨어 있어, 독자들이 사건을 추리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4. "누구나 할 수 있는 살인/관 속의 쾌락" - 야마다 후타로 베스트 컬렉션 (국내 미출간)
"인간장"이라는 목조 아파트에 이사 온 남자는 방 안쪽에 숨겨진 검은색 노트북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과거의 입주자들이 경험한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인간장"의 기묘한 인간 군상을 알게 된다. 단편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교묘한 장치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야마다 후타로의 필력이 돋보인다.

5. "우부메의 여름" - 쿄고쿠 나쓰히코 
'쿄고쿠도' 시리즈의 출발점이자 쿄고쿠 나쓰히코의 데뷔작.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는 구온지 산부인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친구 추젠지 아키히코(쿄고쿠도)에게 전한 세키구치 타미츠. 그들은 구온지 가문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예기치 못한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요괴, 유령, 철학 등 방대한 지식과 독특한 등장인물이 펼치는 탁월한 괴기 미스터리.

2024/09/21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의사 데지마 하쿠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었다. 어머니 데이코는 병원 재벌 야가미가 후계자 야스하루와 결혼해서 이복동생 아키토를 낳았다. 이후 하쿠로는 야가미가와 연을 끊고 데지마 성을 쓰게 되었고, 어머니마저 16년 전 고향 집에서 사고로 죽고나서는 가족과 아예 멀어졌다.
그런데 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는 미녀 가에데가 나타나 아키토가 실종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쿠로는 가에데를 도와 오랫만에 야가미 가문 사람들과 이모 준코 등 친척들을 만나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수수께끼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2016년에 발표했던 장편. 적당한 분량에 꽤 많은 수수께끼를 담아내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대충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성공한 사업가인 아키토의 실종
  2. 가즈키요의 기묘한 추상화와 야스하루의 연구
  3.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4. 데이코가 물려받았다는 귀한 유산의 정체
여기에 야가미 가문의 유산 상속 문제, 그리고 데이코가 고향집의 존재가 더해져 이야기는 아주 풍성합니다.

핵심 수수께끼 중 하나인 가즈키요의 그림과 야스하루의 연구에는 뇌과학, 그 중에서도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사용되어 재미를 더해줍니다. 과학과 관련된 최신 소재를 작품에 녹여내는데 능숙한 히가시노 게이고답더군요. 뇌를 자극하여 의도적으로 서번트와 같은 천재를 만들어내는게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하쿠로의 친부 가즈키요는 뇌종양에 걸린 뒤, 야스하루의 생체 실험에 가까운 치료를 받고나서 '서번트 증후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분포에 법칙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그림 '관서의 망'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상은 세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그리고 네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가 받은 유산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수학자였던 데이코의 동서(하쿠로의 이모부) 겐조가 그림을 알아보고 탐냈고, 이를 알아챈 데이코의 입을 막으려 그녀를 살해했던겁니다. 마지막 데이코가 받은 유산은 '관서의 망' 이고요.

또 겐조가 범인으로 드러날 때, 최소한 야스하루의 보고서를 고향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건 겐조밖에 없다는 추리는 아주 괜찮습니다. 유마가 보고서를 발견하기 전, 하쿠로가 왔을 때 보고서는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가져다 놓은 범인은 왜 진작에 가져다 두지 않있을까요? 그 이유는 고향집이 있다는걸 그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겐조밖에 없습니다. 하쿠로가 방문하여 진작에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거짓말과 함께, 준코 이모에게 어머니의 유품인 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겐조는 16년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기에 앨범이 고향 집에 있었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코가 하쿠로에게 앨범을 줄 수는 없으니, 하쿠로는 고향 집에서 앨범을 가져왔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겐조는 고향집이 그대로 있다는걸 그날 알아챘고, 보고서를 건네주어 하쿠로 일행이 고향집에서 손을 떼게 만든 뒤 '관서의 망'을 독차지할 속셈이었던 겁니다. 꽤 잘 짜여진 추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수수께끼와 이와 관련된 설정들은 모두 별로입니다. 아키토가 실종된 이유부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겐조가 아키토를 납치하려 했는데 그걸 사전에 알아챈 경찰이 아키토가 실종된 척 하고 아키토의 아내를 가장한 수사관 가에데를 사건에 투입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공개 수사로 전환해서 주모자를 체포했어야죠. 그랬다면 데이코의 고향집과 '관서의 망'도 불타지 않고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수수께끼는 거의 모두 겐조의 자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추리 소설로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드는건 주인공 하쿠로입니다. 첫 눈에 가에데에게 반했다치더라도, 엄연히 동생의 아내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최악이에요. 심지어 동생은 실종 상태인데 말이지요. 야가미 가문의 유마가 가에데에게 추근거리는걸 불쾌해하고 방해하지만, 하쿠로도 그에 뒤지지 않게 추근거리는 상황이라는걸 본인만 모르더라고요. 동물 병원에서 일하는 가게야마와의 관계도 뭔가 싶고요. 한마디로 '발암' 캐릭터였습니다.
가에데도 만만치 않아요. 비현실적이며 애매한 탓입니다. 팜므 파탈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목의 '위험한 비너스'는 가에데를 의미하는 듯 한데, 그 정도 비중과 현실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하쿠로라면, 그녀의 주장을 절대 믿지 않았을겁니다.
이런 별로인데다가 비현실적인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느니 아키토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키토가 재력과 힘을 손에 넣기 전인 중학생 쯤 시기에 어머니 살해 사건과 아버지 그림의 행방을 쫓는 이야기를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키도 크고 미남인데다가 천재이니까요. 하쿠로는 조력자가 어울리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기본적인 재미는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주인공과 기본 설정이 문제일 뿐이지요. 당연히 영상화되었던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네요. 영상물에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주연이 츠마부키 사토시!

2024/08/09

폭포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5점

폭포의 밤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단편집. "절벽의 밤"에 이은, '안 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수록작들은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제 1장 "묘진 폭포에서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에서 벌어진 여고생 히리카 실종 사건은 마지막 제 4장 "소원 비는 목소리를 연결해서는 안 된다"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4장에서 히리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 3장 "그 영상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3장에서 지기는 자신을 학대하던 아들 다카시를 살해한 뒤, 사체를 요메가 숲에 묻은 것처럼 경찰을 속인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사실은 자기 집 바닥에 사체를 숨겼지만요. 하지만 집 바닥에 사체를 묻으려다가 오히려 히리카의 사체를 발견했던겁니다. 다카시가 히리카를 살해하고 은닉했던 것이지요. 지기는 히리카의 사체를 요메가 숲에 암매장하였습니다. 다카시 사체를 요메가 숲에 묻은 척 했던 건 경찰을 속이려는게 아니라, 히리카의 사체를 찾게 만들어서 히리카 부모에게 진상을 알려주려던 마음이었고요. 

다만 2장 "머리 없는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독립적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1장에서 살아난 것처럼 보였던 모모카가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 목적보다는 2장의 주인공인 초등학생 신을 4장에서 활약시켜 경찰에게 히리카 사건 진상을 알게 하도록 만든 목적이 더 큽니다. 전개에 필수적인 징검다리 역할인 셈이지요.
 
이렇게 사건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고오리 시와 묘진 폭포, 가쿠레이 산과 등산로, 무쿠로 다리, 고코 강, 요메가 숲 등 시의 주요 장소들을 무대로 사건이 일어나고, 묘진 폭포에 소원을 비는 행위가 진상으로 이어지며, 서로 다른 사건들이지만 수사를 맡은건 모두 구마지마 형사라는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절벽의 밤"과 같은 시리즈답게 '사진'을 이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장치도 삽입되어 있으며,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1장에서는 시점과 상황을 속이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3장은 일부러 시간 제한이 있는 블랙박스 메모리를 남기는 아이디어가 괜찮았어요. 4장은 다카시의 폭주와 히리카 실종 시점의 일치, 히리카 핸드폰이 잠깐 켜졌던 이유 등에 대한 진상이 설득력있게 밝혀지고요.

각 단편별로 조금 더 내용과 의견을 덧붙이자면,
1장은 제일 처집니다. 모모카가 언니 히리카의 행방을 우연히 발견한 부계정 SNS를 통해 추리해내는건 볼만 합니다만 그 외 전개는 다소 식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장 관리인 오쓰키가 냉동고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오쓰키 어머니는 실종된게 아니라 아버지가 살해했다는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흥미를 반감시킵니다. 그렇다면 이를 눈치챈 모모카에게 위험이 닥치는 서스펜스라도 잘 표현했어야 하는데 이 역시 좋지 못합니다. 오쓰키 캐릭터를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버지가 죽여 은닉한 모친의 사체를 모모카가 발견했다고 그녀를 바로 살해할만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 외 단서들 - 오쓰키가 만든 눈인형, 모모카가 입고있던 옷 사진 - 도 평면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 없으면 진상을 완전히 알아내기 어렵다는 단점이 큽니다. "절벽의 밤"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던, 장난같이 여겨지는 장치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오쓰키를 뻔하더라도 전형적인 단순한 '산장 살인마'로 그리고, 사진의 역할은 배제하는게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더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장은 신의 삼촌이 은둔형 외톨이가 된게 어린 시절 물놀이 사고에서 아버지를 죽게 만든 트라우마라는게 드러나는 일상계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다소 무서운 진상 - 삼촌이 자살하고 말았다는 - 을 사진으로 보여주어서 단점이라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 주요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사진을 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더라면 더 완성도 높은 단편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3장은 지기 씨가 아들을 살해했다며 자수했지만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나고, 이는 지기 씨 부부가 의도했던(?) 완전 범죄였다는 범죄물입니다. 경찰과 범죄자의 두뇌 배틀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지기 씨가 '딱 한 가지 했다는 거짓말'을 형사 구마지마가 알아채고, 이를 통해 다카시의 사체를 찾아내려 하지만 이도 지기 씨의 계획이었다는 전개이니까요. 이야기는 흥미롭고 결말도 깔끔합니다. 다른 작품과의 연결없이 단독으로 읽어도 기승전결이 완벽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다만 딱 한 가지, 정황 증거와 자백까지 있는데 시체가 없다고 용의자를 풀어주는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4장은 1장의 히리카 사건, 3장의 다카시 사건이 한데 이어져 대단원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에서 설명드린 그대로입니다. 특별한 추리없이 지기 씨의 아내 지에코의 회상으로만 진상이 밝혀져서, 흥미롭지만 추리적인 맛과 정교함이 부족한게 아쉬웠습니다. 신이 지에코를 구한 뒤, 히리카 사건의 핵심 열쇠가 되는 핸드폰을 가져다 주는 결말은 앞서의 복선 - 빌린 물건은 제대로 된 상태로 돌려줘야 한다 - 로 설명되는 등 정교한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한건 좋아요. 하지만 신과 지에코가 엮이는 과정은 작위적이고, 목소리를 잃은 신이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다시 말문이 트였다는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별로 고민한 느낌을 주지 못해요.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 보다는 구마지마 형사의 추리와 활약으로 해결하는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들이 폭포에 빈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지만 그 대신 모모카, 히리카 자매가 모두 죽었다는 결말도 안타까왔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평이하지만 "절벽의 밤"보다는 좋았어요. "절벽의 밤"은 '사진'을 사용한 실험이 지나쳤는데, 여기서는 이야기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리즈 1작은 평균 이하, 2작은 평균 수준은 돼니 3작은 기대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6/02

절벽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절벽의 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각 단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편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연결고리를 가지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구조이지요. 마지막 단편은 총 정리하는 결론에 가깝습니다.
단편별로 여러가지 트릭이 사용되며 추리도 많이 펼쳐집니다. 의외의 반전도 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전개가 억지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개에 포함되었어야 할 내용을 마지막 사진으로 퉁친건 '실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편의에 따른 '반칙'에 가까왔습니다. 그나마 사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마지막 단편 뿐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미나게 절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구니오는 자살 명소 유미나게 절벽 옆 터널에서 사고를 당했다. 불법 유턴을 하던 차 탓이었다. 사고를 유발한 차 운전자 나오는 구니오를 구해주기는 커녕 현금을 빼앗은 뒤 살해했다.
구니오의 아내 유미코의 옛 연인인 형사 구마지마는 전력으로 사건 수사에 나섰지만, 나오가 살해당했고 동승자였던 히로도 실종되고 말았다. 구마지마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지만, 유미코를 또다른 동승자 마사가 노린다는걸 알고 황급히 유미코의 맨션으로 항했다....


구니오가 사고 당시 죽지 않고 실명했으며, 죽은건 조수석에 있던 네 살배기 아들 나오야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일당이 사건 당시 현금을 훔치려고 지갑을 확인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추리, 그리고 구니오가 집에 찾아온 히로를 손쉽게 살해한 방법 - 궁도부였던 아내 유미코의 화살을 이용 - 과 범행을 은폐하는 과정도 깔끔하게 진행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이비 종교 '십왕환명회'도 작품 내에서 단순히 들러리가 아닌 제 역할 - 히로 사건 은폐를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 마지막의 사고 등 - 을 충실히 해 주고 있고요.

하지만 구니오가 살아있다는걸 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리 잘 만들어진 서술 트릭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구니오가 복수를 위해 나오의 차 깜빡이 커버와 동일한 걸 구해 사건 현장 근처에 놓아두고 잠복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최소 몇십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의 깜빡이 커버를 알아챈다? 대단히 큰 덩어리도 아니고 부서진 조각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나오가 알아채고 차를 세운 뒤 커버를 회수했다 한들, 때마침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등 범행에 딱 맞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 정도 억지가 필요하다면 실명한 구니오가 나오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것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늘이 나오보고 살해당하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설득력없는 내용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건너온 초등학생 커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부모님의 방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볼 정도였다. 환영 퇴치를 위해 문방구를 찾은 커는 기묘한걸 목격했다. 젊은 남자의 묘한 모습, 안쪽 방 고타쓰 앞에 쓰러지듯 놓여진 발, 뒤섞인 문구류, 얼핏 보인 바닥 얼룩.... 커는 남자가 주인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멀쩡했고, 추리를 털어놓은 친구 야마우치도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문방구 할머니의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어른 문구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 문구가 놓여진 상황에서 출발하는 커의 추리는 깔끔합니다. 뉴스를 통해 진짜 피해자가 밝혀지고 범인인 조카와 할머니가 커를 납치하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하지만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 숨어 있다가 커를 구해준다는 결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야마우치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 커를 구해주는지도 설명이 없는건 마찬가지고요. 차 안에 숨었다는 것도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으로 살짝 알려주기는 하는데, 본 편에 녹여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칙으로 보일 뿐이에요. 커가 보아왔던 환영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데, 커가 환영을 본다는 설정보다는 커와 야마우치와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그려내는게 나았을 겁니다. 커 주변을 야마우치가 항상 멤돌았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는 안 된다"
십왕환명회의 간부 미야시타 시호가 자택에서 목을 멘 사체로 발견되었다. 신참 형사 미즈모토는 또다른 간부 모리야 다쿠미가 그녀를 살해했고, 이를 알아챈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마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시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고민했다. 그러나 미즈모토는 파트너이자 선배 다케나시와 술을 먹다가 트릭을 간파해내는데...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 미야시타 시호의 방은 제대로 잠겨진 밀실이 아니라 자석으로 '스마트록'을 붙여 임시로 만들어진 밀실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동산 회사 사장 앞에서 잠겼다는걸 보여준 뒤, 열쇠로 문을 열 때 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면서 회수했던 것이지요.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에요. 문제는 눈에 뜨이지 않고 록을 회수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실제로 현장에 함께 있던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에게 곧바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또 모리야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좋은 후더닛, 와이더닛 물이라기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나카가와 도루의 수첩을 조작해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렸고, 진상을 알아챈 미즈모토마저 살해했다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였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만....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수첩 조작도 마지막에 사진으로 설명해줄 뿐, 앞선 본문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살하려던 구니오는 옛 제자를 만난 뒤 다시 삶의 의지를 찾는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작품. 짤막한 에필로그에 가까우며, 이 작품만 단독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서 단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에필로그. 결말답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경찰 내 협조자가 누구인지? 사고를 당한건 누구인지? 히로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진상은?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건을 조작한건 누구인지? 미즈모토를 누가 살해했는지? 등 모든 떡밥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라서 첫 사건에서 구마지마의 사고사를 거짓 증언했고, 세 번째 작품 사건에서의 은폐와 미즈모토 살해를 저질렀다는 고백을 선보이는게 핵심이지요.
에필로그라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지만, 시력을 상실해서 아내 유미코에게 사건 진상 고백문을 쓰게 했지만, 알고보니 백지였다는걸 마지막 사진 한 장으로 밝히는 반전은 강렬했어요.
 
그러나 다케나시,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의 진범 모리야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는건 문제에요. 깔끔하게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이 한 편 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서 별점을 주기도 어렵네요. 구태여 준다면 2.5점? 반전만 좋았습니다.

2024/05/25

내가 읽었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분석

제 멋대로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라고 이름 붙힌 장르가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힘(또는 조직)에 의해 모인 뒤 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의 작품을 뜻합니다. 특별한 게임에서 이기거나,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정해진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이 게임, 혹은 찾아내야 하는 특별한 조건이 재미의 핵심입니다. 아래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면, 누가 뭐래도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1. 게임, 혹은 특별한 조건은 참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공평한가?
  2. 게임, 혹은 특별한 조건은 독자도 쉽게 이해해서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는가?
  3. 게임, 혹은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걸작은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첫 에피소드인 '한정 가위바위보'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2번과 3번은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지만 1번 측면에서는 다소 아쉽지요. 운과 체력이 중요한 게임이 많으니까요.
이 기준으로 제가 읽었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소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화와 만화도 많지만 그런 작품들은 워낙에 유명하니.... 작품별 상세 리뷰는 링크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미야베 미유키
  • 누가 모이는가? 죄를 지은 여섯 명의 사람들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생존,유일한 생존자만 가능.

"거울 속 외딴 성" - 츠지무라 미즈키
  • 누가 모이는가? 왕따를 당하는 일곱 명의 아이들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 줌, 조건은 정해진 시간 내에 소원의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낼 것.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누가 모이는가? 가상 공간 '앨리스'에 갇힌 사람들.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생존, 조건은 다른 생존자들을 죽일 것.

"인사이트 밀" - 요네자와 호노부
  • 누가 모이는가? 일주일간 진행되는 실험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12명.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돈. 살아남으면 복잡한 조건에 따라 돈을 수령하게 됨.

"살해하는 운명카드" - 윤현승
  • 누가 모이는가? 게임의 승자가 되면 거액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참가한 5명.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돈. 각자 받은 운명 카드의 운명을 거스르면 승리.

"24시간 7일" - 짐 브라운 : 별점 2점
  • 누가 모이는가? 미국 방송사 리얼리티 쇼 참가자 12명.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생존, 조건은 시청자들 투표를 통해 살아남을 것.

"크림슨의 미궁" - 기시 유스케
  • 누가 모이는가? 아르바이트에 응모한 10명의 플레이어
  • 보상과 조건은? 보상은 상금 500만엔. 조건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것.

2024/03/30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밤비 뱅큇에서 컴패니언으로 일하는 교코의 친구 에리가 호텔에서 죽은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다. 에리가 죽은 호텔 방문에 도어 체인이 걸려있었고, 독약을 고향에서 챙겨 왔다는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밤비 뱅큇 사장 마루모토와 팀장 에자키 요코와의 삼각관계가 원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미심쩍은 이유로 형사 시바타는 자살설에 의문을 품었고, 마침 이웃이 된 교코와 함께 조사에 나섰다. 여기에 에리의 전 직장 동료 유카리도 합세했다. 그녀 역시 에리의 자살을 믿지 않았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에리는 전 애인 이세의 자살과 얽힌 사건 진상을 밝혀내려 노력해왔고, 그 목적으로 밤비 뱅큇으로 이적했다는걸 알아냈지만, 유카리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장편. 1992년 발표작입니다. 원제는 "ウインクで乾杯 (윙크와 건배)"입니다.
'복고풍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그대로인 작품이에요. 특히 부자와 결혼하는게 꿈이라는걸 서슴없이 밝히는 여주인공 교코, 그리고 '프린세스 프린세스'와 '티파니'를 즐겨들으며 교코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귀엽게 선보이는 형사 시바타는 80~90년대 유행했던 일본 트렌디 드라마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교코의 철없음과 연인 미만 우정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시바타의 모습은 "롱 바케이션"의 미나미와 세나와 아주 흡사해 보였거든요.
컴패니언이라는 직업과 화려한 보석상의 파티, 부동산 재벌과 함께 하는 데이트도 80~90년대 버블 경제의 편린을 느끼게 해 줍니다. 80~90년대를 떠오르게 만드는 장치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LP와 CD가 공존하던 시기, 테이프로 앨범을 녹음하고 워크맨으로 듣는 모습 등처럼요.
조금 찾아보니 오래전에 영상화(1988년, "화요 서스펜스 극장")가 되었던데, 아니나다를까 시바타 형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포스터만 붙여진 원룸에서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는 장면 등 화면이 완전 트렌디 드라마더군요.
 

'복고풍'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고전 본격물적인 성격도 일부지만 갖추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본격적인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에리 살해 사건은 여러가지 트릭과 상황이 잘 어우러져 추리 애호가들을 만족시킵니다. '방 문에 걸려 있던 체인'이라는 밀실 트릭을 비롯해서, 어떻게 에리가 독을 먹었는지, 마루모토가 어떻게 알리바이를 만들었는지 등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거든요. 체인은 걸려있던게 아니라 양면 테이프같은걸로 방 문에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는 간단한 트릭이지만, 범인 마루모토가 처음 방문을 확인했고 나중에 회수할 기회가 확실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 높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에리가 살해당한건 9시 30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서 마루모토의 알리바이가 성립했으며, 이는 연인 에자키가 공범으로 에리인 척 프런트에서 열쇠를 빌렸기에 가능했다는 추리도 그럴듯했고요. 이 추리가 에리가 마루모토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프런트에서 구태여 이름을 밝힐 이유가 없다는 착안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설득력 높은 이유였어요.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시바타가 여러가지를 생각한 뒤 직접 확인해보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체인을 끊고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범인이 욕실에 숨어 있다가 몰래 나가지 않았는지를 직접 실험해보는 장면처럼요. 이런 모습은 현실적이며 경찰이라는 직업 성격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체인 하나를 벌려 밖에서 이어 놓은 뒤, 그 체인을 펜치로 끊어 증거를 인멸한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체인에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실현은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추리가 계속 등장하는건 추리 애호가로서는 반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단서인 이세가 남긴 유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건 억지였습니다. 비틀즈를 녹음한 테이프 뒷 면에 진짜 유서를 적어 놓았다는건데, 이렇게 꼬아서 암호처럼 전달해야 했을 이유가 없었던 탓입니다. 이세가 자살한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유서는 경찰, 그리고 유족에게 전달될 터이니 테이프에 적어 두었던 글을 유서에 적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겁니다. 이세가 죽는 시점에 자기 유서를 겐조가 먼저 발견하리라는걸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말이 되려면 공범인 겐조 등이 이세가 자살하게끔 유서를 적고 목을 메는걸 협박으로 강요했어야 했습니다. '페이퍼백 라이터'라는 곡 명을 '페이버 백'이라고 표기해서 '종이 뒷면', 즉 녹음된 테이프 뒷 면을 보라고 했다는 것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전개도 초기작답게 어설픈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다카미에게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로 그를 수상쩍게 만드는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이 사람이 진범이다!'라는걸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 했어요. 에리가 겐조를 살해하려다가 잔을 바꿔치기한 겐조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진상도 마찬가지고요. 맥주야 안 마시면 그만인데 말이지요. 진범이 겐조라는 것도 급작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마루모토 선에서 끝내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저처럼 80~90년대 일본 트렌디 드라마에 향수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트렌디 드라마 풍의 '복고풍 미스터리'로 홍보하려면 원제를 살리는게 좋았을겁니다.

2024/03/29

딜리셔스 - 롭 던. 모니카 산체스 / 김수진 : 별점 4점

딜리셔스 - 8점
롭 던.모니카 산체스 지음, 김수진 옮김/까치

진화생물학과 인류학 관점에서 먹거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과학, 식문화사, 인문학 서적.

이 책에 따르면 동물들의 거주지가 제한되는건, 동물들의 미각 수용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입맛에 맞는 먹이가 있는 장소를 떠나기 힘들지요. 그러나 인류는 조리를 통해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료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인류가 불을 사용한 것도 불로 조리한 음식이 더 맛있어졌기 때문이고요.
음식 조리는 음식 소화 시간도 단축시켰습니다. 침팬지는 깨어 있는 시간의 40%를 먹이를 씹는데 씁니다. 하지만 인류 조상들은 이 시간을 대폭 줄였고(현재는 평균 하루의 4.7%를 씹는데 소모),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조리가 문명을 발달시킨 한 요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맛있는 요리에 대한 집착은 수렵 채집으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조사한 결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선호하는 음식 - 1위는 꿀 - 을 구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거든요.
이런 집착은 북아메리아에서는 거대 동물(매머드 등)의 멸종도 불러왔습니다. 불법이지만 코끼리 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에 따르면 엄청나게 맛있다니까요. 특히 코끼리는 발 요리가 최고라고 합니다. 당연히 매머드도 맛있었을테고, 그래서 크로비스인들도 멸종할 때까지 매머드를 집중적으로 노렸던 것이지요.
맛있는 동물만 사냥하는건 지금도 수렵인들을 통해 증명됩니다. 현실적으로는 찾아서 죽이기 쉽고, 가공하기 쉽고 많은 열량을 제공하는 동물을 잡아 먹는게 일반적이겠지만, 연구 결과 사냥꾼들은 맛있는 동물들을 발견하면 무조건 추격한다고 합니다. 사냥하기 쉬운 동물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맛없는 동물들은 아예 사냥 대상에서 배제되고요.

향미에 대한 추구는 향신료의 사용도 불러왔습니다. 처음에는 항균제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쾌락적 경험을 불러오는 효과 때문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고추의 캡사이신을 조금씩 늘려 제공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매운 맛이 가장 맛있다고 골랐다는 연구 결과로도 증명됩니다. 통각을 자극하는 맛은 실제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도 위험을 피할 때의 황홀감을 느끼게 해 주는게 아닌가 싶네요.
발효도 항균제 효과와 같은 이치로 생겨났을 겁니다. 장기 보관을 위해서요. 같은 이치로 염장, 훈제, 건조도 발명되었고요.
참고로 이 부분에서 아예 고기를 물에 담궈놓는 일종의 습식 숙성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말 한마리를 호숫물에 담궜던 실험이 소개되는데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진공 포장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장기 보존되었다는데 이유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일종의 발효같은 과정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손이 많이 가는 복잡한 숙성 연성 치즈가 만들어진 것도 맛에 대한 추구때문이라는 이론도 흥미로왔습니다. 노동과 근면을 장려하고, 재료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먹는건 제한적이었던(고기를 먹지 못햇던) 수도사들이 심혈을 기율여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치즈를 제조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게 숙성 연성 치즈 제조의 원인이라는데 참 그럴듯했어요. 이 이론은 숙성 연성 치즈의 맛은 고기와 흡사하다는걸로 증명될 수 있고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 요리에 대한 추구가 문명 발전과 인류 진화를 이끌었다는걸 알려주는데, 목차 구성이 다소 정리가 불충분한 느낌이 드는건 아쉬웠습니다. 주제에 맞게끔 통사적으로 구성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도판과 등장 레시피 소개도 부실합니다. 

그래도 맛에 대한 집착이 진화를 이루어냈고, 식문화의 발달을 만들었다는걸 여러가지 연구 결과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좋은 책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보니 맛에 대한 집착이 많은걸 이루어낸건 분명한 만큼, 맛에는 다소 엄격해져도 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