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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8

신입사원 강회장 (2026) : 별점 2점

얼마 전 종영된 최신작으로 재벌 회장 강회장과 신입사원 황준현의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살인 음모와 미스터리를 더한 드라마입니다. 티빙으로 감상했습니다. 

"재벌집 막내 아들" 원작가인 산경의 원작을 따르지만, 추리 요소를 크게 강화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회장이 황준현의 몸에서 깨어난 뒤 회사를 노리는 자식들의 음모와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는게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강회장의 호적수인 나병모 회장의 딸이자 강회장의 며느리인 나은세가 강재경으로 변장해 병원에 잠입하고 강회장을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인상적이에요. 동기와 근거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제법 추리적으로도 볼만했어요

원작 대비 바뀐 설정들도 매력적입니다. 특히 황준현의 설정이 좋습니다. 평범한 신입사원이 아니라 유망한 축구 선수였지만 뺑소니 사고로 꿈을 접은 인물이라는 배경은 강회장이 그의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니까요. 죽은 줄 알았던 강회장이 살아 돌아오는 반전과 황준현이 원래 몸을 되찾는 해피엔딩도 원작보다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식들 교육을 방치하고 황준현을 무시했던 강회장 자신의 잘못인 만큼, 피해자로서 복수를 이어가는 전개는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강재경과 강재성 남매가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처럼 보이지 않고, 황준현과 강방글의 러브 라인이 이루어지는게 급작스러웠던 탓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또 다른 몸 바뀜 역시 유치하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없는게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교하면 황준현(강회장)의 능력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약간 아쉬웠어요. 회장 시절 알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는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눈에 띄는 활약이 적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으며,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히 추천할 만합니다. 최소한 원작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1/09

러브데이 브룩, 탐정 -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인 러브데이 브룩 단편집입니다. 이전에 단편은 다른 앤솔로지(이거, 이거)를 통해 읽어본 적이 있지요. 그녀가 등장하는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편이 그녀 시리즈의 전부인데,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만료된 덕분에 국내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인 러브데이 브룩은 2025년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아도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뛰어난 관찰력과 ‘여성’이라는 점을 활용한 활약이 지금보다 여성 인권이 확연히 낮았을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추리라기보다는 관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도 당시 시대에 잘 어울립니다. 실종된 아가씨 방을 둘러본 뒤, 이건 하녀가 정리한 솜씨라는 걸 눈치채는 장면처럼요.

그러나 좋은 작품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전 본격물이라고 보기에는 추리적으로 보잘것없는 탓이 큽니다. 러브데이 브룩이 관찰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아요. 그래서 독자가 추리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정보로 자기의 추리 결과를 진상이라고 마지막에 털어놓는 게 전부일 뿐입니다.

그나마 추리의 핵심인 러브데이 브룩의 관찰도 비약이 심합니다. “공주의 복수”가 대표적입니다. 러브데이 브룩이 집사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눈빛’ 때문이었고, 결정적 단서인 모자 가게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러브데이 브룩이 탐정이라는 걸 밝히자 그윈 부인이 모자를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눈빛으로 수상한 사람을 알아챌 수 있다면, 추리가 왜 필요할까요?

트릭도 실망스럽습니다. 수록작 중 무려 네 편, “현관 앞 검은 가방”, “레드힐 수녀회”, “그려진 단검 사건”, “실종”에서 변장과 착각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종”에서는 죽은 어머니의 사체를 본 아버지가 딸로 착각하는 상황이 펼쳐지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둘이 닮았다는 설정이라도 쳐도, 이건 너무 말도 안되지요.

범행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레드힐 수녀회”에서 존 머레이는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수녀들이 강도단일지 모른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그녀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스스로 강도짓을 벌일 생각으로요. 하지만 그냥 강도짓을 벌였으면 사전에 주목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짜증 나고 이상한 사고방식도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망작입니다. 역시 잊혀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25/10/11

정체 (2024) - 후지이 미치히토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가족 살해로 사형 선고를 받은 카부라기는 자해 후 병원 이송 중 탈옥에 성공했다. 형사 마타누키는 카부라기를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카부라기는 계속 도주하다가 결국 '아오바 요양원'에서 발견되었다. 카부라기는 출동한 경찰들에 포위되자 요양원 동료 마이를 인질로 삼았다. 피해자 유족 요시코로부터 증언을 얻을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형수가 탈옥한 뒤 수백일간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스릴러 드라마입니다. 소메이 타메히토의 소설이 원작이네요.

이야기의 중심은 사형수 카부라기의 도주극입니다. 카부라기가 이송 중 구급차에서 도주한 뒤, 일본 각지를 전전하며 체포의 위기를 피하는 과정이 아주 상세합니다. 변장과 마스크를 이용해 사람들 속에 섞여드는 모습도 설득력 있게 표현되고요. 또 도주 과정에서 카부라기가 인연을 맺은 여러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도 큰 울림을 줍니다.
드라마적으로도 잘 구성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도 안정적이어서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좀 달랐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억울한 누명을 쓴 희생자의 도주극은 진범을 밝혀내는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중반 이후에 또다른 일가족 연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체포되면서 카부라기가 누명을 썼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반전도 없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맥이 빠집니다. 요시코의 증언만으로 누명을 벗는다는 점도 시시했고요. 
때문에 초반의 스릴러적 긴장감은 뒤로 갈 수록 느슨해지고, 드라마적 색채가 강해집니다. 이는 요시코의 행방을 알아내고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카부라기의 노력이 그리 잘 묘사되지 못한 탓도 큽니다. 솔직히 마지막 증언 요구 장면은 '강요'로 보여서 영 별로였어요.

카부라기가 마지막 체포되는 모습은 앞서의 도주극과는 다르게 허술합니다. 오사카 공사장이나 사야카의 집에서 도주 후 변장할 때는 관객도 깜짝 놀랄 정도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는데, 요양원에서는 마이가 잠깐 찍어 올린 SNS로 덜미가 잡힐 정도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탓입니다. 주연 요코하마 류세이 문제도 커요. 정체를 숨기고 도주를 이어가기에는 너무 잘 생겼으니까요. 보다 평범한 외모의 배우를 기용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또 카부라기를 돕는 주변 인물들의 동기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나마 마이는 자기 부친도 누명을 썼다는 이유라도 있지, 오사카 공사장에서 만났던 카즈야(점프)는 카부라기를 경찰에 신고했었고, 사야카는 그냥 카부라기 얼굴에 반했을 뿐인데 왜 끝까지 믿고 따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성장했다는 장면은 완전히 사족이었고요. 이들보다는 상부의 명령에 의심을 품은 채 카부라기를 추적하는 마타누키 형사의 내적 갈등을 더 잘 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촬영과 연기 모두 뛰어난, 잘 만든 영화이지만 추리극으로서의 재미는 다소 부족합니다. 기대와 달리 드라마적인 무게가 강했어요. 이런 드라마를 좋아하신다면 모를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2025/09/20

인사이드맨: 모스트 원티드 (2019) - M.J. 배셋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 연방 은행의 금괴를 노린 강도들이 대규모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협상 전문가인 FBI 브린과 NYPD 레미가 현장에 투입되어 강도단 리더 '수배자'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면서 강도단이 은행 지하에서 허드슨 강을 피해 뚫린 옛 터널을 통해 탈출하려고 한다는걸 알아냈지만, 브린도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그 뒤 강도단이 폭약을 잘못 쓴 탓에 터널이 붕괴하여 허드슨 강이 범람했고, 강도단은 일망타진 당하는데... 

나치가 남겼던 금괴를 노리는 강도단의 치밀한 계획이 핵심인 하이스트 무비 장르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계획은 나쁘지는 않습니다. 경찰은 터널이 존재한다는 정보에 혼란을 겪으며 범인들이 그 길로 도주할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는 관객을 포함한 모두를 속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거든요. 실제 계획은 금괴를 녹여 은행 내부의 황동 장식물로 위장한 뒤, 은행 폭파 이후 잔해를 수거하는 업체로 변장해 금괴를 회수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계획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별로입니다. 우선 협상 전문가로 등장하는 주인공 브린과 레미는 이야기에서 거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브린은 심지어 스스로 인질이 될 정도로 무력하기만 합니다. 협상이 도움을 준 부분도 전무해요. 사건의 해결은 모두 강도단의 리더 아리엘라의 계획이었을 뿐입니다. 
괜찮았다는 계획 역시 설득력은 약합니다. 강도단이 금괴를 녹여 황동 장식물로 위장하는데, 그 양이 상당한 탓입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된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처럼 하루 만에 완료된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아리엘라의 목적도 애매해서 이야기의 중심축이 흔들립니다. 오빠를 살리기 위한 금괴 탈취와 나치 잔당 디트리히의 체포라는 두 목적이 충돌하거든요. 결말을 보면 디트리히를 체포되게 만드는게 동기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금괴를 탈취하러 나설 필요도 없었지요. 오빠는 어차피 죽을테니까요. 이렇게 동기가 모호한 탓에 결과적으로 서사의 설득력은 떨어집니다.

바라시 남매 중 막내 에이바는 경찰에 터널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뜬금없이 등장하고 갑작스럽게 퇴장해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나치 금괴라는 설정 또한 새로움이 없고 식상했습니다. 액션 역시 협상가를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 구조 탓인지 밋밋하며, 긴장감 있는 전투나 추격전이 부족해 몰입을 방해했고요.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건, 제가 이 영화를 본 건 인터넷 상에서 접했던 추천 때문인데, 이 영화는 그 영화("인사이드맨")싸구려 후속편이었다는 겁니다. 감독과 주연 모두 바뀐 채 전작의 명성과 설정에 기댄 졸작입니다. 극장 개봉조차 못했는데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한없이 1점에 가까운 1.5점입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금괴를 빼내는 기발한 트릭 하나에 그치는데, 그나마도 억지스럽습니다. 감상에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는 재앙에 가까운 쓰레기입니다. 찾아보실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06

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 기도 소타 / 부윤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유리코 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중 마지막으로 남는 유리코는 ‘유리코 님’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모든걸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쓰자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고, 그 뒤 다른 유리코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나' 야사카 유리코는 자신도 이 전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친구 미즈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일본 작가 기도 소타의 데뷰작인 학원 미스터리입니다.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괴담, 본격 추리, 인물 간 심리전이 어우러지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유리코 님 전설’이라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학교 괴담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주요 매개체로 결국 학교에 유리코는 딱 한 명만 남게 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작품 속 사건들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설에 따른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돋보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 추락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가 떨어진 옥상은 밀실이었습니다. 최소한 범인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미즈키는 불탄 교복과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항상 열려있다는걸 근거로 범인이 교복을 이어 로프를 만든 뒤 아래층 '흰 백합 모임' 방을 통해 탈출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탈출 후 방법을 숨기기 위해 교복을 불태웠던 겁니다.

이외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담긴 위화감을 단서로 삼아, 실제로는 그 일기가 1970년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초대 유리코 님이 사실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부분은 서술 트릭물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일기 속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독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배치해 둔 덕분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도 논리적입니다.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어야 하고, 해당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리코 님으로 변장할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작아야 했다는 조건들을 하나씩 밝혀내며 결국 ‘유리 선배’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교복을 불태운 뒤 어떻게 옷을 챙겨입고 도주했는지도 이 추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여자 교복 밑에 원래의 남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성정체성이 여성인 유리가 '유리코'들을 모두 죽이고 유리코 님이 되려고 했다는 동기도 유리코 님 전설 및 일기를 통한 서술 트릭과 잘 맞물려 있고요. 이를 학원제 연극 후 일종의 추리쇼처럼 밝히는 과정도 볼만 했으며, 다카미자와 선생이 과거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남긴 인물이며, 유리코 님 전설에 오랫동안 개입해 왔다는 반전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핵심 트릭인 교복을 로프로 만들어 탈출했다는건 그리 좋은 트릭은 아닙니다. 유치할 뿐더러, 아래에서 로프 교복을 불태웠다고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상입니다. 옷이 옥상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는건 현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마쓰자와 유리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추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도 큽니다. 범인이 범행에 성공한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이 점점 확대되는데 학교나 경찰 차원의 진지한 대응이 없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최소한 '유리코' 들에 대한 보호는 진행했어야 해요.
다카미자와의 정체에 대한 반전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흑막으로 사건을 조종했다는 추리는 다소 억지스러웠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합니다. 에필로그에 비교하면요.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미즈키가 친구 야사카를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진짜 학교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진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만 보이고,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명탐정 미즈키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탓입니다. 학교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미즈키는 유리가 유리코들을 살해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쩔 생각이었던걸까요? 직접 다른 유리코들을 죽였을까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에필로그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망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미즈키의 계획이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선배에게 간파당해 미즈키가 살해당한다는 결말도 엉망입니다. 차라리 미츠다 신조 스타일로 야사코 유리코가 인지를 벗어난 '유리코 님'으로 거듭나며 괴담이 진짜가 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발한 설정, 본격 추리 요소는 매력적이었는데 에필로그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에필로그만 없었어도 별점 2.5점은 줄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2025/06/08

미로장의 참극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사업가 시노자키 신고의 초대로 후지산 앞에 위치한 저택 ‘명랑장(미로장)’을 방문했다. 이 저택은 본래 구 백작 후루다테 다쓴도의 소유였으나, 시노자키가 이를 구입해 수리한 후 호텔로 개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과거 20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도주했던 외팔이 남자 오가타 시즈마가 이 명랑장 주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시노자키는 긴다이치에게 조사를 의뢰하고자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마침 호텔 개업을 앞두고 후루다테 가문과 관련된 인물들—후루다테 다쓴도, 그의 외삼촌 덴보, 아내 가나코의 여동생 야나기마치 요시에—도 모두 명랑장에 모였다. 시노자키 자신도 후루다테 가문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다쓴도의 아내였던 시즈코와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후루다테 다쓴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출동해 수사를 개시했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다가 다음 날에는 덴보마저 살해당했고, 하녀 다마코는 실종되었음이 밝혀졌다. 덴보가 죽은 방은 비밀 통로가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확인되며,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긴다이치와 경찰은 명랑장의 구조를 조사하던 중, 비밀 통로와 연결된 지하 동굴에서 다마코의 참혹한 시신을 발견했고, 바로 그 직후에 시노자키의 전처 소생 딸 유코가 중상을 입은 채 비밀 통로 출구 근처에서 구조되었다.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 “아빠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날 밤, 긴다이치는 다하라 경부보와 이가와 형사 앞에서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든 방법을 직접 시연했고, 지하 동굴 속 오가타 시즈마의 묘소로 경찰을 안내했다. 그리고 명랑장에 나타난 외팔이의 정체는 마부 조지였다는걸 밝혔다. 조지는 명랑장의 관리인 이토메와 함께, 다쓴도를 괴롭히기 위해 외팔이 행세를 했던 것이었다. 긴다이치는 이후 연이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냈다. 진상은 다음과 같았다.

시즈코는 관계를 이어가던 다쓴도와 함께 남편 시노자키를 살해하려고 했다. 목적은 유산이었다. 다쓴도는 외팔이로 변장해서 시노차키를 살해할 계획이었는데, 범행 예행 연습을 요시에에게 우연히 목격당했다. 둘은 격투를 벌였는데, 외팔이로 변장한 탓에 다쓴도는 요시에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요시에는 현장을 급히 떠나 알리바이를 만든 뒤, 나중에 도르레를 이용하여 마차 위로 사체를 옮겼다. 그래서 복잡한 형태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덴보는 다쓴도와 시즈코의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을 가지고 시즈코를 협박했는데, 시즈코는 이를 빼앗기 위해 덴보를 살해했다. 그 현장을 마침 목격한 다마코 역시 시즈코에 의해 희생당했다는게 진상이었다.

마지막에, 외팔이로 위장해 남편 시노자키를 제거하려던 시즈코의 계획은 요시에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무너지는 비밀 통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1975년에 발표한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중후반부 작품입니다.‘명랑장(미로장)’이라는 기묘한 저택을 무대로 복잡한 가족사와 잇따른 살인 사건을 그려낸 본격 추리소설이지요.

장점이라면 사건들이 흥미롭고 풍성하다는 점입니다. 명랑장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연쇄 살인이 어우러지는 구성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덴보가 살해된 밀실 트릭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작품 속에 흩어진 단서들이 수수께끼 해결에 필요한 정보로 작용하는 점 역시 공정한 추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작품 속 핵심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죽은 다쓴도는 왜 외팔이인척 했는가?
  2. 범인은 다쓴도를 왜 번거롭게(둔기로 타격한 뒤 교살하여 마차 위에 올려놓는 식으로) 살해했는가?
  3. 덴보를 살해하고 밀실을 어떻게 만들었나?

여기서 1번 수수께끼의 답은, 다쓴도가 외팔이인척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다쓴도가 외팔이로 보이게끔 조작하지 않았다는건, 그의 복장과 가져온 짐으로 증명되었고요. 2번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역시 도르래와 모래 주머니, 그리고 범인 요시에의 조금 어긋나있는 알리바이 증언으로 증명됩니다.
3번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로는 이전에는 다른 곳에 놓여 있던 칠기 접시의 존재, 그리고 시즈코의 프랑스 자수가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범인은 접시에 바늘을 꽂은 뒤, 실을 회전창 너머로 넘기고 이 실에 열쇠를 매달아 접시 위로 내려보냈던 겁니다. 바늘은 밖에서 잡아당겨서 회수했고요.

그 외의 수수께끼들에 대한 추리 모두가 논리적으로 제시됩니다. 명랑장에 나타났던 외팔이의 정체가 조지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메가 조지를 외팔이로 변장시켰던건데, 선대 주인 가즌도가 죽은 이유가 다쓴도의 비열한 소문 때문이었으니 이토메가 원한을 품은건 당연합니다. 

긴다이치와 경찰이 탐험해 나가는 명랑장의 미로에 대한 묘사는 모험물을 보는 듯한 느낌도 전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약간 "팔묘촌" 느낌도 나더군요.

그러나 좋은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주요 범행이 일어난 이유가 우연이라서 범행에서 정교함을 느끼기 어려운 탓입니다. 다쓴도가 살해된 것은 요시에에게 살인 모의 장면이 들켰기 때문이었고, 다마코 역시 시즈코가 덴보를 살해한 직후 우연히 방을 찾은 바람에 희생당했으니까요. 이런 전개는 극적이긴 하나, 치밀한 계획 범죄의 인상은 줄 수 없었습니다. 

범행 동기의 설득력도 낮습니다. 시즈코가 신고와 결혼한 뒤에도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갔다는 핵심 동기에 대한 단서가 전혀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쓴도는 돈도, 외모도 특별히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지도 않고요. 재산, 외모 모두 시노자키가 압도적인데 시즈코는 왜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나가며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걸까요?
이런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약한건 비슷한 설정인 - 위장 결혼 후 재산을 노리고 배우자를 살해하는 - 걸작 "나일 강의 죽음"도 그렇다 치죠. 하지만 다쓴도가 살해당한 뒤, 범행을 이어나간 시즈코의 동기는 아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협박자인 덴보를 구태여 살해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불륜의 대상자인 다쓴도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는, 시노자키에게 고백하고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게 빠른 방법이었으니까요. 어차피 시노자키도 원죄 - 시즈코와 강제로 결혼한 - 가 있으니 괜찮았을거에요. 설령 협박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 치더라도,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리바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시간만 걸리는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이건 독자를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단순한 장치 이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즈코가 신고를 살해하려 했던 계획은, 외팔이 범인의 존재를 조작해 빠져나가려는 원래의 설정과 연결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명랑장에는 명탐정 긴다이치와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범행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에 희박했습니다. 게다가 원래의 외팔이가 누구인지 시즈코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진짜가 있는데, 그 진짜를 위장해서 경찰이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시즈코의 범행 시도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쓴도와 시즈코의 관계를 알아챈 시노자키가 1,000만엔을 주고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핵심 동기가 맨 마지막 에필로그에나 등장한건 반칙같이 느껴지네요.

후더닛 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명랑장에 모인 사람 중 비중이 있는건 주인인 시노자키와 시즈코 부부, 다쓴도, 덴보, 요시에와 시노자키의 딸 요코, 비서 오쿠무라, 종업원 이토메, 조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을 빼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요코와 오쿠무라, 동기가 없을 조지를 빼면 시노자키와 시즈코, 이토메만 남습니다. 시노자키가 시즈코와 다쓴도의 불륜을 알고 살해하려고 했다는건 있을 수 없고 - 본인도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 , 설령 그랬다쳐도 덴보를 살해할 이유는 없으니 시노자키는 범인일리 없습니다. 이토메가 범인이라면, 그녀 역시 덴보는 죽일 이유도 없지만 지난 수십년간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구태여 지금 범행을 벌일리 없고요. 그러니 유력한 범인은 시즈코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알리바이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기괴하고 뒤틀린 가족 관계도 뻔하고 식상했습니다. 명랑장이라는 무대 설정 역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이토메와 조지가 현재 주인인 시노자키에게 품고 있는 과다한 충정의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구조는 갖추고 있지만 주요 동기와 설정의 설득력 부족, 과도한 우연의 연속, 뻔한 인물 구성 등이 완성도를 낮춥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29

산마처럼 비웃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5점

산마처럼 비웃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고키 가문의 넷째 노부요시는 미뤄두었던 성인식을 위해 고향 구마도로 귀향했다. 그러나 노부요시는 산속 사당을 순례하던 중 길을 잃고 흉산 부름산에 들어서고 말았다. 노부요시는 부름산의 유일한 민가인 가스미 가문의 다쓰이치 일가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다쓰이치 가족은 노부요시만 남긴 채 밀실인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나선 노부요시는 과거 광부와 사기꾼들이 살해되었다는 금광터 여섯 무덤굴에서 망자의 비명을 듣고 도망치다가 정체불명의 사악한 존재까지 목격한 뒤,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도조 겐야는 노부요시의 병든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마도로 향했다. 지역 유지인 리키하라와 부름산에 오른 겐야는 다쓰이치의 집에서 얼굴이 불타고, 구전 동요의 지장 형태를 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다쓰지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쓰지 아들 고지의 시신이 흑색지장 사당에서 역시 동요에 나오는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후 리키하라도 실종되었고, 겐야는 다니후지 형사와 함께 여섯 무덤굴에서 토막난 리키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쓰지의 장례가 열리던 날, 가설 극장에 불이 나 경찰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 가스미가에 남은 다쓰지의 아버지 단고로, 아내 시마코, 첩 슌기쿠도 동요 속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하는데....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찾아 읽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네 번째 출간작으로, 반 년 전에 읽었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바로 전작입니다. 2008년 일본 현지 출간 당시에 각종 랭킹 상위권을 휩쓸었었지요.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만큼 대담한 추리와 충격적인 진상이 돋보입니다.

진상은 다쓰이치 씨 가족과 다쓰지 씨 가족이 실은 동일 인물들이었다는 겁니다. 다쓰이치의 딸 유리는 소년 다쓰하루가 변장한 것이었고요. 이들은 마을에 들어온 유랑극단 ‘태평극단’으로 모습을 바꾸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부요시가 유리에게서 느낀 섬뜩함은, 결국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위장한 데서 비롯된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단발머리는 연극 "거미줄 활시위"에 등장하는 단발머리 시동의 가발로, 그것 자체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요. 고지와 히라히토가 닮은 이유 또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다쓰지의 얼굴을 훼손한 이유 역시 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얼굴이 온전하게 발견되면, 다쓰이치와 다쓰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쓰지 일가가 변장을 택한 동기도 납득할 만합니다. 작년 백중 무렵, 다쓰하루가 부름산에서 금이 섞인 암석을 발견했고, 이를 다쓰지 혹은 고지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가즈토리 가문 소유였고, 가즈토리 리키하라의 사위 마사오는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금을 빼앗기고 채광 기회도 잃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쓰지 일가는 다쓰이치 가족으로 변장하여 몰래 금을 캐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쓰이치 가족이 사라진 밀실 트릭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 유리가 혼자 남아, 두 문의 안쪽에 직접 빗장을 걸고 노부요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목욕통을 가리는 칸막이 뒤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겼고, 노부요시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는 사이 2층으로 올라가 노부요시가 자던 방에 다시 숨은 것이지요.

이외에도 노부요시가 성인식 도중 겪었던 괴이 현상들에 대해, 겐야의 추리로 합리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야생 여우나 염주 비둘기의 울음이었고, 소름끼치는 절규는 발정기의 야생 여우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다른 짐승들과 대치하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산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파였으며, 나병에 걸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게라의 길’이라는 외길을 이용해 이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무 위의 시뻘건 불덩이는 날다람쥐였고, ‘어어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형들이 노부요시를 찾으러 산에 들어왔을 때 외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작품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서를 흘려두고, 이를 추리를 통해 조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정통 본격 추리물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다쓰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시신 훼손에 사용한 '두꺼비 기름'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점은 추리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다쓰지, 고지, 시마코, 슌기쿠, 다쓰하루, 노부요시 단 여섯 명뿐입니다. 이 중 다쓰지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아이 다쓰하루가 범인일 수는 없기에 남는 사람은 노부요시뿐입니다. 

다쓰이치 가족의 정체를 밝혀내는 단서로, 소노코의 혼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활용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노부요시가 소지한 물건 중 상대가 알지 못했던 건 혼례 시간 변경을 알리는 편지뿐이었고, 그걸 읽고 이들이 갑작스레 자리를 떠났다는 걸 통해 정체를 유추해낸 것입니다. 이유는 '태평극단'이 혼례 축하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구전 동요를 따라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인데,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공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 동요가 ‘금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어서, 사건의 핵심 동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은 전개가 조금 처지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진상인 ‘다쓰지 일가의 변장’ 설정의 설득력 부족입니다. 아무리 가즈토리 가문과 가스미 가문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해도, 어릴 적 친구였던 리키하라가 다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무리입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요. 가족 모두가 변장을 했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금광을 몰래 캐기로 했다면 다쓰지와 고지만 변장했어도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다쓰지만 변장해서 머무르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불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조 겐야는 처음에는 마사오를, 그 다음에는 수행자 단부로 변장한 다쓰이치, 다쓰지의 동생 다쓰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마사오는 금광을 캐는걸 주장해 왔었기에 이를 반대했던 장인과 몰래 금광을 캐던 다쓰지 일가를 없앨 수 있었고(딸 유리의 실종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고요), 다쓰조는 이미 금광 때문에 여섯 명이나 살해했었으니까요.

반면, 진범인 노부요시의 동기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인식을 실패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며, 다쓰이치 일가가 장난을 쳤다고는 해도, 이로 인해 여섯 명이나 살해한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입니다. 그럴 거였다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혔던 형들을 먼저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또한 금맥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묘사하다가, 결국 사냥용 총에 사금을 넣어 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금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런 사기를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소하지만 다쓰이치 가족이 나타난건 작년 백중 무렵, 태평극단이 나타난건 작년 여름께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건 국내 독자에게는 이해가 힘든 부분이라 아쉬웠고요. 이런건 번역할 때 통일시켜 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시리즈 특유의, 일본 촌락에 전승되는 괴담이 실제 사건과 얽히며 전개되는 플롯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단점이 커서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입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유골이 있다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유골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는데, 리샤르트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요.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어렵다는 겁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

2024/11/17

걷는 망자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 별점 3점

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걷는 망자"는 일본 미스터리 작가 미쓰다 신조가 선보이는 단편집으로,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핀오프 입니다. 괴이 민속학 연구실 '괴민연'을 배경으로 영능력 소녀 도쇼 아이와 도조 겐야의 제자인 덴큐 마히토가 각종 괴담의 진상을 추리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다섯 개의 단편은 각각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며 기묘한 괴담과 이를 해결하는 추리적 재미를 선사합니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도조 겐야 시리즈에서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던 길고 장황한 민속학적 설명이 전부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순수하게 괴이 현상과 그 진상에 대한 추리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괴이 현상과 추리의 결합도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괴담을 이야기하는 영능력 소녀 아이와 이를 듣고 진상을 추리해내는 덴큐 마히토 컴비의 매력은 떨어집니다. 아이의 영능력은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덴큐 마히토는 도조 겐야의 조수격임에도 괴담을 무서워한다는 유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 탓입니다. 이 둘이 "사상학 탐정"슌이치로의 조부모가 된다는 '미쓰다 신조 월드' 설정도 억지스러워서 별로였습니다.

총평하자면, "걷는 망자"는 개별 단편마다 흥미로운 설정과 논리적 추리를 선보이지만, 일부 이야기는 완성도가 아쉽고 설정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쓰다 신조 특유의 괴담, 민속적 분위기와 참신한 트릭은 독자들에게 충분한 매력을 선사합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상, 트릭 등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걷는 망자

이야기는 어린 시절 '망자길'에서 '살아있지만 죽어있던' 남자 구지라다니 쇼지를 목격했던 도쇼 아이의 경험담에서 시작됩니다. 쇼지는 산책 후 귀가했지만 곧바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그의 죽음을 수사하며 요시코라는 여성과의 밀회에 주목하지만, 아이가 목격한 쇼지의 존재와 가정부의 증언이 요시코를 범인으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사건의 진상은 덴큐 마히토의 추리를 통해 밝혀지는데, 범인은 요시코가 맞았습니다. 그러나 쇼지의 머리를 잘라 자신의 머리 위에 얹고 '망자길'을 통해 귀가한 척한 요시코의 동생 무쓰코 덕분에 알리바이가 생겨서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있지만 죽어있던 망자'라는 괴이와 알리바이 트릭을 논리적으로 엮은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무쓰코의 키와 마을 여성들의 특이한 풍습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치밀하게 연결된 점도 인상적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 다가오는 머리 없는 여자

어린 시절 가즈히라가 목격한 '가슴은 크지만 머리가 없고 닭 같은 다리를 가진 여자'라는 괴이에서 출발한 사건은, 가즈히라의 친구 다케루의 집에서 이 괴이를 목격한 가정부 다도코로 스에가 습격당하며 점점 미궁으로 빠집니다.
덴큐 마히토는 머리 없는 여자가 다케루의 변장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물구나무를 섰기 때문에 가슴이 크고 다리 관절이 반대로 보였던 것이지요. 다케루는 이 괴이를 통해 집을 떠나려 하지 않는 할머니에게 충격을 주려 했습니다. 스에 습격 사건에서는 사당 장지문 둘레에 금줄을 둘렀다는 일종의 원격 조작 장치 트릭이 사용되어 추리적으로도 풍성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3. 배를 가르는 호귀와 작아지는 두꺼비 집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일관하는 수준 이하의 작품입니다. '소인'이 살고 있어서 집이 작았으며, 더 작아진 이유는 '소인'에게 성장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괴이 현상의 진상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소인이 피해자 아이들 배를 갈랐다는 진상 역시 마찬가지고요.
폐쇄적인 마을과 몰락한 지배 가문이라는 배경 설정은 식상했습니다. 더불어 일본식 발음을 이용한 트릭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영역이라 와 닿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4. 봉인지가 붙여진 방의 자시키 할멈

괴담 연구회 회원들이 자시키 할멈이 나온다는 여관방을 봉인까지 해 가며 철통같이 지켰지만, 다카코 회장이 습격당하고 말았다는 괴이 사건이 등장합니다.
진상은 여관 주인의 동생이 여관을 방문한 여대생을 공격해서 괴이 현상을 가장했던 겁니다. 그런데 동기가 명확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힙니다. 핵심 밀실 트릭도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2층에서 자던 마사요를 옮긴 뒤 그 밑의 다다미를 들어올려 1층에 있던 다카코의 목을 졸랐다는 건데, 모두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는 걸로 대충 덮고 넘어가는건 많이 허술해 보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5. 서 있는 쿠치바온나

이 단편에서는 민속학자(도조 겐야 선생)이 고갯길에서 입이 초생달처럼 찢어진 여성 '쿠치바온나'와 만났던 것, 그리고 마을 장례 행렬을 미행하다가 우연찮게 관에서 시신이 빠져나오는걸 보았다는 두 가지 괴이현상을 다룹니다.
쿠치바온나는 밤길에서 남성을 만난 젊은 여성이 긴 머리를 입에 물고 변장한 모습이었으며, 관에서 빠져나온 시신은 마을 사람들이 학자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벌인 연극이었습니다. 폐쇄적인 마을이었다는 진부한 설정이지만, 덕분에 연극을 벌인 이유도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두 괴이 현상이 마을의 이상한 전염병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6/15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살인의 쌍곡선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야카와 혼자서 운영하는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에 회사원인 예비 부부 교코와 가쓰로, 역시 회사원인 야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야코, 범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이가라시, 택시 운전사 다지마가 초대되었다. 누군가 설상차를 망가트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야베를 시작으로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는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원에 사선을 그은 기묘한 부호가 그려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하야카와, 교코, 아야코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되어 경찰과 취재 기자들이 곧바로 찾아왔지만, 관설장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으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 니시무라 교타로의 초기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명성에 걸맞는 여정 미스터리, 기차 시간표 트릭이 활용되었었던 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고립된 공간에서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당한다는 점, 그 때마다 볼링핀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설정은 거의 똑같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했다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와 같은 질낮은 졸작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덕분입니다. 특히 '고립된 호텔에서 범인은 투숙객들을 전부 죽이고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트릭이 일품이었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범인 하야카와 형제는 쌍둥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호텔 지배인으로 변장하고 투숙객들을 살해했지요. 그리고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외부에 흘려 경찰과 기자들이 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기자로, 처음에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호텔로 달려왔지만 호텔 앞에서 은근슬쩍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남아있던 범인이 기자인 척 했던 겁니다. 지금 읽어도 그럴싸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앞서 작가가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을 사용했다'고 직접 밝히고, 본문에서도 쌍둥이 고시바 형제가 강도 행각을 벌이지만 경찰이 체포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호텔 연쇄 살인 사건과 겹쳐 진행시켜 트릭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활용한 쌍둥이 트릭 이야기는 하야카와 형제 탈출 트릭이 아니라 고시바 형제 사건에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시바 형제의 강도 행각과 형제를 뒤쫓는 경찰과의 밀땅도 재미있었고요. 
참고로, 이 트릭은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에 사용되었던 트릭과 같습니다. 당시 모 드라마와 표절 시비가 있었던 듯 한데, 애초에 특별히 오리지널임을 내세울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네요....

여기에 더해, 아야코가 범인임을 의심하게 만든 초대장 필적과 유서 - 초대장은 이가라시가 필적 감정을 한다며 모두에게 쓰게했고, 유서는 첫 날 일종의 내기 결과에 따른 자필 문장이었을 뿐 -를 확보한 방법, 다지마가 스키를 부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 등도 괜찮았습니다. 아야코 범인설을 보도하여 하야카와가 기자를 사직하게 만든 결말-진짜 기자가 아닌 가짜였으니-까지 안배한건 보통 솜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호텔에 갇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심리가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교코는 약혼자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각 등장인물들의 매력도 제대로 그려져있지 못합니다. 깔끔하고 담백한건 좋지만, 이 작품은 너무 과했습니다.
범인 하야카와 형제가 이런 거창한 범행을 벌인 동기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만원 전철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니지만, 무려 6명(정확하게는 7명이지만요)을 살해할 정도의 동기인지는 설명해 주었어야 합니다. "상복의 랑데뷰"처럼요. "상복의 랑데뷰"는 짤막하게나마 연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려주고, 그 뒤 이어지는 복수극 과정에서도 1인칭 심리 묘사를 삽입하여 복수와 범행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지요. 이 작품도 그런 묘사가 반드시 나와 주었어야 했습니다.

고시바 형제가 벌인 강도 행각도 소소한 부분들은 억지스러웠습니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고 범행을 저지를 필요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서 형제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요. 쌍둥이라서 당장 체포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체포는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고시바 형제도 복수 대상이어서 강도짓을 제안하고 체포되게 만든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으며, 고시바 형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하야카와의 가면을 벗기는 마무리도 작위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없지만,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졸작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의 좋은 작품입니다. 명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분량도 짧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4/06/12

명탐정 코난 : 흑철의 어영 (2023) - 타치카와 유즈루 : 별점 3점

전 세계 경찰의 CCTV를 연결하여 감시 및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 '퍼시픽 부이'가 도쿄 하지조지마 근해 바다 속에 건설되었다. 여기에 도입된 신기술 '생장 인식 프로그램'은 어떤 인물의 특정 시기 사진을 입력하면, AI로 현재의 모습을 알아내어 전 세계 카메라를 이용해 그 인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을 노린 검은 조직에게 엔지니어 나오미가 납치되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장인식 프로그램 데이터로 하이바라가 셰리라는게 드러났다. 검은 조직은 하이바라마저 납치했고, 이를 막으려던 코난 일행을 피해 잠수함으로 도주했다. 한편 퍼시픽 부이에서는 검은 조직의 내통자를 추궁하던 직원 레온하르트가 살해당하는데....


명탐정 코난의 26번째 극장판. 지난 주말에 딸아이와 함께 티빙을 통해 감상했습니다. 
사실 이전에 감상했던 최근 극장판들(대표적으로 "비색의 탄환")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추리와 액션 모두에서 재미를 주는데 실패했고, 황당하게 스케일을 키우는 바람에 탈선한 기차가 날아올라 도시를 덮친다는 등, 아무리 만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가득했던 탓입니다. 극장판이란 강박관념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재미있더군요! 우선 설정이 돋보였어요. "명탐정 코난"의 핵심인 '몸은 작아졌어도 두뇌는 그대로!'를 활용한 '생장 인식 프로그램'은 하이바라가 납치당하는 상황의 설득력을 높여줄 뿐더러, 주인공들에게 또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불어넣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전세계 CCTV를 실시간 감시하고 언제든 데이터 확인이 가능한 '퍼시픽 부이'의 설정도 괜찮았고요. 검은 조직이 자신들이 기록된 영상을 조작하기 위해 퍼시픽 부이 시스템을 노린다는건 충분히 말이 되지요.
하이바라가 셰리일지 모른다 여긴 검은 조직이 하이바라를 납치하는 사건 중심의 스토리도 깔끔하며 액션도 좋았습니다. 검은 조직 요원 핑가와 란의 격투, 워커의 차를 쫓는 카체이스는 최근 보기 힘들었던 몰입감을 선사해 주었으니까요. 해상 시설물 퍼시픽 부이를 검은 조직의 잠수함이 공격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았고요. 말도 안되게 스케일을 키웠다기보다는, 비교적 상식적인 수준으로 그려진 덕분입니다. (악의 조직이 잠수함까지 갖추고 있다는건 좀 그렇지만... '백팔용'인가?)
검은 조직의 레귤러에 아무로와 아카이, 경시청의 메구레 경부와 시라토리 등 괴도 키드와 하츠토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여 각자의 역할을 선보이는 것도 팬으로서는 감사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에요. 추리할만한 사건은 퍼시픽 부이에 잠입한 검은 조직 요원 핑가의 정체를 밝히는 것 뿐인데, 손동작이라는 단서는 제공해주지만 용의자가 워낙 적은 탓에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이지요.
핑가가 코난 일행을 상대하기에는 확연히 처지는 모습만 보여준 것도 - 란에게 발차기를 얻어맞고, 코난에게 도주 경로가 드러나 범행이 탄로나는 등 - 별로였습니다. 이렇게 약하다면 먼가 사연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진에 대한 쓸데없는 라이벌 의식만 불태우는 잔챙이로 보여 실망스러웠어요. 
검은 조직이 퍼시픽 부이를 파괴한 것도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백도어 등으로 외부 조작이 가능했으니 그냥 놔 두는게 훨씬 유용했을텐데 말이지요. 하긴, 한 명이 잠입한 것만으로 동영상 데이터 조작과 백도어 삽입을 이렇게나 쉽게 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시스템을 장악하는게 더 나았을까요?
무엇보다도 베르무트가 직접 변장을 하여 조직이 '생장 인식 시스템'은 오류 투성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는건 답답했습니다. 그녀도 이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정체가 탄로날 수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지면 좋겠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명탐정 코난" 팬 입장에서, 그리고 '하이바라 아이'의 팬으로서 두말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즐겼던 작품이에요. 일본에서의 대박 흥행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흥행을 거두었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6/09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곽재식 : 별점 2.5점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6점
곽재식 지음/인물과사상사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 중,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괴사건 15개를 소개하는 범죄 논픽션. 곽재식 작가의 '미스테리아" 연재물에서 추려냈다고 합니다. 연재된 글들을 재미있게 읽어왔기에, 출간되었을 때 부터 관심있게 지켜보았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네요.

범죄를 다룬 논픽션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계보"처럼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여 거의 그대로 전해주는 글, 그리고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처럼 여러가지 정보를 짜 맞추어서 의미있는 새로운 추리를 들려주는 글로요. 
이 책은 전자 스타일입니다. 신문 기사와 유사한 글이지요. 기사 스타일로 범죄, 사건 자체는 물론 사건의 배경이라던가 당대 시대상 등 이해를 돕는 상세한 설명이 명확한 근거를 통해 제공됩니다. 
당대 한 시점만 촛점을 맞추지 않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 사건의 후일담을 10년 이상 지난 다른 신문의 다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도록 연결해서 소개해주는 덕분입니다. "소매치기 전성시대"를 예로 들자면, 혼자서 범행하는 소매치기는 '특공대'의 일본식 발음인 '독고다이'로, 여러 명이 움직이는 팀은 '회사'라고 불렀다, 교통이 발달하자 소매치기 회사는 대중교통수단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등의 당시 소매치기 수법에 대한 소개는 1975년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하고 있으며, 헌병으로 변장하여 범행을 저질렀던 소매치기였던 '꼬마' 문씨에 대해서 1955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그리고 10년도 더 지난 1966년 경향신문, 또 10년이 지난 1975년 6월의 다른 기사를 통해 알려주는 식입니다. 한 범죄자의 20여년의 행적을 - 본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아도 -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셈이지요. 문씨가 "순교자" 영화 제작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등 재미있는 정보도 굉장히 많았고요.

당대 시대상과 관련된 사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1959년 남대문 권총강도의 범행 동기가 '영어학원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였다던가, 1967년 나일론 백이라고 속인 쓰레기를 운반하던 워싱턴 메일호 사건은 '수출보국' 분위기에서 해외 수출 실적을 가짜라 남기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었다는 것처럼요. 해방 직전, 일본인들이 명동 어딘가에 전재산을 바꾼 보석을 묻어놓았다는 '명동의 보물을 찾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은 연재 당시에도 재미있게 읽었었지요. 마곡사 5층 석탑 꼭대기 구조물의 재료라는, 황금보다 더 귀한 금속이라는 '풍마동'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고요.
이런 재미있는 사건들 외에도 어린이 3명이 백주대낮에 실종 후 처참한 모습의 사체로 발견되었던 1960년대 초의 사건, 마을 왈패들이 공공연하게 노리던 젊은 처녀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1956년의 '보호받지 못한 피해자' 사건같은 끔찍한 사건도 소개됩니다. 참으로 무참했던 시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요.

하지만 소개된 모든 사건이 인상적이거나 재미있는건 아닙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다소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진 사건들과는 다르게, 미제 사건은 아무래도 답답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한 보강 취재나 조사도 없고, 당시 기사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이런 사건은 관련된 기사를 시간과 관계없이 모아서 의미있는 내용으로 전달해주는 , "소매치기 전성시대"와 같은 구성이 필요했는데 아쉬웠어요. 그러기에는 분량이 부족했으려나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잘 알려지지 못했던 오래 전 우리 나라 사건들을 전해준다는 의도와 취지는 마음에 드는데, 몇몇 사건의 경우는, 분량을 더 늘리더라도 보다 깊이있는 취재와 정보가 덧붙여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연재가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2024/06/05

Q.E.D. iff 증명종료 23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5점

Q.E.D Iff 증명종료 23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오랫만의 수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화"
가나는 캐스터네츠를 돌려주기 위해 플라멩코 댄서 지망생 타케다 사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달 쯤 전 사라졌다. 애인 유키토 때문에 엮인 뒤 친해진 부잣집 딸 마츠자와 리카의 별장 파티 직후였다. 리카는 사키에게 매료되어 절친이 되었지만, 강하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 인물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를 한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던 리카는 가나에게, 자신에게 동화된 사키를 위해 거금을 주어 그녀가 스페인으로 유학가도록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는 사키 방에 있던 수상한 인형, 사키가 리카를 협박했던 증거가 담겨있는 스마트폰을 회수하지 않은 것, 유키토에게 더 이상 사키와 리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한 것, 사키가 스페인으로 간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캐스터네츠를 누군가 훔쳐간 것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리카가 아니라 사키가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이후 리카로 살아가게 되었다는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진상입니다. 앞서 둘이 닮았다는 묘사도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이를 위한 단서와 설명은 부족했습니다. 유키토만이 둘 모두를 사귀었어서 둘을 구분할 수 있을터라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이에요. 친한 사람이 그 외에 없었을까요? 리카에게는 부하는 물론 가족도 있었습니다. 모아서 파티를 열 정도로 친구도 많았고요. 이들 눈을 모두 속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키 자신이 스페인으로 떠난 것으로 소문내고 꾸몄다면 모든게 깔끔했습니다. 구태여 자신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 - 침실에 있던 인형과 현장에 남겨진 스마트폰 - 를 남겨둘 필요는 없었어요. 수사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단순 실종과 살인 사건은 그 수준이 다르잖아요?
가나가 캐스터네츠를 보여주었을 때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플라멩코 방식으로 캐스터네츠를 사용한게 중요한 단서라는 것 역시 설득력이 약해요. 리카는 사키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으니, 캐스터네츠 사용법은 당연히 알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래도 캐스터네츠에 지문이 남겨졌기 때문에 그걸 훔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착안은 좋았고, 마지막에 현장에서 발견한 사키의 핸드폰을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지문인식 해제하도록 만들어 리카가 사키라는걸 밝혀내는 장면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덕분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의 전개만 좀 더 타당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형식적 진실"
우마오이 토비나가의 사후, 유산이 네 형제와 집사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막내는 불륜으로 입적한 탓에, 형과 누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유산 분배 현장에서까지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현장을 목격한 토마와 가나는 막내 쇼료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장남, 차남은 피해자가 먼저 화장실에서 폭행을 저질러서 방어한 것이라 주장했다. 가나가 반격했지만, 형제가 다시 입을 맞추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집사 코바도 사건 이후 행방불명 상태라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합의금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사의 '형식적 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 '형식적 진실주의'는 쌍방 서로 다툼이 없이 합의한 부분은 진실로 다루는 민사재판의 원칙입니다. 반면 형사 사건은 합의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각적으로 사실을 분석, 검증하는 '실체적 진실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작 중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형들의 위세에 눌려 합의하고 말았습니다. 아를 통해 형들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는게 '형식적 진실주의"에 따라 법률적으로 입증되었고요. 하지만 이는 쇼료의 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형들과 집사 코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챈 뒤, 복수에 나섰던 겁니다. 먼저 화장실에서 코바를 살해하고, 형들에게 자연스럽게 폭행 당하도록 설계했지요. 이후 코바의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 사건 수사를 통해 화장실이 범행 현장이라는게 밝혀집니다. 그리고 앞서의 민사 소송 합의 내용을 통해, 쇼료는 알리바이가 생겨나고 형제가 범인이 되어 버립니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범인일 수 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민사지만, 다른 증거가 없으니 경찰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마도 형제가 이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벽한 계획입니다!
쇼료의 어머니를 살해한 트릭도 '폭포'라는 현장을 잘 이용하고 있고요.

형제가 화장실에서 쇼료에게 반드시 시비를 걸었으리라는 보장이 부족하다는건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학습 만화로서도 우수한 Q.E.D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빼어난 오랫만에 보는 수작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4/06

파노라마 섬 기담 - 에도가와 란포 / 박용만 : 별점 2점

에도가와 란포 파노라마 섬 기담 - 4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박용만 옮김, 이성규 감수/시간의물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유토피아를 그리는게 취미인 인기없는 작가 히토미 히로스케는 어느날, 친구로부터 대학 동창인 거부 고모다 겐자부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모다와 히토미는 쌍둥이처럼 닮았었기에, 히토미는 자신이 고모다가 될 계획을 꾸몄다.
계획이 성공해서 고모다가 된 히토미는 고모다가의 돈을 이용하여 공상하던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제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모다의 아내 치요코가 히토미의 정체를 눈치챘고, 히토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살해할 결심을 굳히는데....


에도가와 란포의 대표작 중 한 편. 1926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중편 분량으로 히토미가 고모다가 되기 위해 벌이는 작전을 그린 전반부, 고모다의 재산으로 꿈꿔오던 유토피아를 만든 뒤 그곳을 아내 치요코와 둘러보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꽤 재미있습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었던 변장, 자살로 위장하여 히토미 히로스케의 존재를 없앤 방법, 원래 있었던 고모다의 시체를 파낸 뒤 옆의 다른 묘에 묻어 은닉한 방법 등 모두 비교적 현실적이면서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간질 발작으로 사망한 뒤 다시 살아난 사례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설득력도 높고요.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특히 고모다의 시체를 파내는 장면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렇잖아도 공포스러운 상황을 자극적으로 풀어나가는 솜씨는 역시다 싶더군요.
다만 아무런 조명도 없는 칠흙같은 밤에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꺼낸 뒤 옆의 무덤에 파묻어 깜쪽같이 위장한다는건 실제로는 무척 어려웠을겁니다. 약간 부가적인 설명이 덧붙여졌더라면 좋았을겁니다.

반면 후반부의 유토피아(아마도 '파노라마 섬')를 치에코와 둘러보는 장황한 묘사는 별로였습니다. 상상력만큼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그림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요.
설득력도 낮습니다. 아무리 눈의 착각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넓이 자체를 혼돈할 만큼의 조작을 자연 환경에서 구현했다는건 어림반푼어치도 없지요. 게다가 이 공간을 많은 사람들까지 고용하여 채웠다는건 더욱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숙식 및 기본 생활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탓입니다. 차라리 제목처럼 거대 파노라마를 만들었다고 하는게 말이 되었을겁니다.
치에코를 살해한 뒤 기둥에 숨겼는데, 이를 탐정 기타미 고고로(아마도 아케치 고고로?)에게 들킨 뒤 자살한다는 결말도 급작스러웠으며, 기타미 고고로가 고모다의 정체가 히토미라는걸 눈치챈건 히토미가 과거 습작처럼 투고했던 습작 때문이었다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쌍둥이처럼 닮았다는건 대학 동창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테니, 이런 증거를 내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전반부만 따로 떼 보면 2.5점, 전체 통합해서는 2점입니다. 발표 당시 시점으로 본다면 볼만한 가치가 충분했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할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구현한 이상한 공간들을 수없이 접한 시대니까요.

2024/03/23

중간의 집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중간의 집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러리의 지인인 변호사 빌의 매제 조가 살해당했다. 현장을 찾은 엘러리는 피해자가 뉴욕 상류층 사람인 조지프 켄트 김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볼은 조 윌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빌의 여동생 루시와 결혼했고, 본래 신분으로는 돈많은 과부 제시카 보든과 결혼했던 중혼자였다.
현장에서 조 윌슨의 아내 루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수집되었고, 김볼로 가입했던 1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수취인이 얼마전 루시로 변경된걸 근거로 경찰은 루시를 체포했다. 빌은 동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분투했지만 루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엘러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볼의 의붓딸 안드레아의 결정적 증언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여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검은숲의 엘러리 퀸 전집 중 한 권. "도중의 집"이라는 제목의 자유추리문고 버젼도 이미 읽었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러리 퀸 1기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와 3기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 2기 시기를 연 작품이라고 하는데, "스웨덴 성냥 미스터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았을 거라는 언급이 작중에 등장할 정도로 '국명 시리즈'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후더닛'에 충실한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이며, '독자에의 도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명 시리즈'보다는 드라마의 변화 폭이 넓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반부는 아예 법정물로 간주해도 될 정도니까요. 법정물로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범인의 다분히 고의적이고 어설픈 행동들을 열거하며, 이는 루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는 빌의 마지막 변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범인이 충분한 휘발유가 있었는데도 구태여 주유소를 방문해 베일을 쓴 얼굴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등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역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변론을 펼칩니다. '범죄자들은 아둔하며, 뛰어난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은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럴듯했습니다.
거의 빌이 이길 뻔 했지만 흉기에 루시의 지문이 묻어 있있다는 증거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는 결말도 현실적이었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핀치의 만년필에 독특한 초록색 잉크가 들어있었다는 것, 범인이 립스틱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여 코르크를 태워 필기구로 쓴 것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의 도전' 단계 전까지 독자들에게 정말로 공정하게 제공된다는건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통해
  1. 범인은 남자다.
  2. 범인은 흡연자고, 아마도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3. 범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낼 내용이 새겨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다.
  4. 범인은 김볼과 루시에게 적대적인 동기가 있다.
  5. 범인은 필기구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소유한 필기구를 사용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어 사용하기를 꺼렸다.
  6. 범인은 아마도 김볼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7. 범인은 앤드레아에게는 우호적이다.
  8. 범인은 오른손잡이다.
  9. 범인은 김볼이 보험 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리를 끌어내고, 관계자들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런 후더닛 추리 외에도 '중간의 집'으로 명명된 집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만으로 그 용도를 꿰뚫어 보는 추리도 볼만한 등, 확실히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점은 많았어요.

그러나 완성도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던, 앞서 안드레아가 목격했던 성냥부터가 그러합니다. 이를 토해 엘러리 퀸은 범인은 담배를 피운게 분명한데, 재와 꽁초와 같은 흔적이 없으니 파이프를 피웠다고 추리하지요. 하지만 애초에 엘러리 퀸 스스로가 범인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파이프로 흡연이 가능했다는걸 초반에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냥 모두가 코르크를 태우는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억지이자 반칙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의 아내 루시가 빌에게 선물하려고 산 문구 세트 칼을 만졌다는 완전한 우연이 재판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 것, 핀치의 간단한 변장이 주유소 사장이 루시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전개 면에서는 수수께끼가 모두 엔드레아의 위증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점이 큽니다. 앤드레아가 중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했던걸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 거에요. 앤드레아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었고요.
엘러리 퀸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은 여전히 짜증스러웠으며, 빌이 엔드레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무고한 동생이 20년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덕 중혼자의 의붓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설명도 대체로 부족합니다. 빌이 처음에 '중간의 집'에서 발견했던 앤드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겼던 이유는?(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 김볼이 빌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마음먹은날 앤드레아까지 중간의 집에 부른 이유는? 대체 핀치는 그 날 그 시간에 김볼이 중간의 집에 혼자 있을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명 시리즈'보다는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냥저냥합니다.

2024/03/02

출입통제구역 - 리 차일드 / 정세윤 : 별점 2점

출입통제구역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바니아, 우크라이나 조직이 양분하고 있는 이름모를 도시를 지나던 잭 리처는 강도를 당할 뻔한 노인 셰빅을 구해주었다. 셰빅은 알바니아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으러 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사채업은 우크라이나 조직으로 넘어가버렸고, 잭 리처의 기지로 노인의 빚은 탕감되었다. 하지만 셰빅에게는 딸 메그의 치료비로 거액이 더 필요했다. 리처는 셰빅을 대신하여 셰빅인 척 우크라이나 조직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그리고 집을 알아내려던 조직원들을 없애버렸다.
그런데 조직원들을 없앤게 알바니아 조직이라고 오해한 우크라이나 조직의 보스 그레고리는 복수를 명령했고, 두 조직은 서서히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리처는 메그의 보스 트롤렌코의 거처를 찾아 나섰다. 그에게 메그의 치료비 손해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롤렌코는 우크라이나 조직이 가짜 뉴스 배포를 위해 보호하고 있었다. 결국 리처는 두 조직 모두를 몰살시켜 버리고 말았다.


잭 리처 시리즈 24번째 작품. 원제는 "Blue Moon"입니다.
이전 "악의 사슬"에서 "피의 수확"이 떠오른다고 언급했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잭 리처 버전의 "피의 수확"입니다. 한 도시를 두 세력(우크라이나 - 알바니아)이 양분하고 있는데. 초반에 잭 리처가 저지른 살인을 서로 상대 조직에서 저지른 일이라 여겨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 잭 리처를 잡으려다가 각개격파당하고 내분까지 일으켜 자멸한다는 점에서 아주 흡사했습니다.
또 제가 보았던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잭 리처 본인의 무력이 가장 엄청납니다. 맨손은 물론 다양한 총기를 활용하여 수십 명의 악당 조직원 상대로 무쌍을 찍습니다. 조직원들 모두가 죽어 마땅한 놈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손속에 자비란 없습니다. 그냥 전부 죽입니다. 전체 킬 수로는 아마 시리즈에서도 탑일거에요. 아래처럼 딱 한 번 자비를 베풀긴(?) 했지만, 거의 죽은 상태의 상대에게 그냥 손을 더 대지 않았을 뿐이지요.
"숨을 쉬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 그게 나에게는 승자의 관용이오. 보통은 놈들을 죽이고, 가족들을 죽이고, 조상의 무덤에 오줌을 싸지."

리처가 '외로운 늑대'가 아니라 전 해병대, 기갑부대원들과 한팀이 되어 행동을 펼치는 전개도 독특합니다. 약간 "1030"과 비슷한데, "1030"보다 팀원의 활약이 오히려 많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했던 트롤렌코의 은신처 입구를 돌파하기 위해 조직원들과 체형이 비슷했던 반트레스카가 사로잡힌 조직원으로 변장하여 적들을 끌어내는게 핵심이거든요. 이외의 활약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요.
잭 리처의 말주변도 확실히 선보여 줍니다. 본편의 히로인 애비에게 "함께 가자"는 권유를 할 정도 상당히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잭 리처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인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잭 리처가 일부러 두 조직을 와해하려 했던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치밀한 작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악당들이 제발로 찾아와 죽어주니 작전이 필요할 이유도 없고요.
우크라이나인의 보스 그레고리가 사무실에 탈출구를 마련해두었다는 추리는 급작스러웠어요. 아무런 단서도 없었고요. 이치에 맞게끔 나름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솔직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좀 더 탄탄한 복선, 단서를 제공해주었어야 했습니다. 

트롤렌코의 위치 파악은 그나마 추리와 조사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낫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난공불락의 19층에 있던 경비원들이 케이지를 열고 나온다는 설정은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누가 들어와도 버틸 수 있는데 왜 밖의 일을 신경쓰겠습니까? 그레고리 조직이 괴멸해서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한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조직의 가짜 뉴스 관리 업무의 핵심입니다. 당연히 온갖 통신망이 연결되어 있고, 당연히 밖의 뉴스는 바로 알 수 있어요. 밖에서 별로 대단한 뉴스가 펼쳐지지 않는 한, 공격은 비공식적이며 빠르게 해결될거란건 짐작 가능합니다. 트롤렌코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돈도 천만 달러가 넘으니 다른 조직이나 인력을 고용할 수도 있고요.
설득력없는 설정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애비는 물론 반코, 호건과 반트레스카처럼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는 지인들이 목숨을 걸고 리처를 도와 총격전에 뛰어든다는 것 처럼요.
러시아 정부가 가짜 뉴스를 뿌리기 위해 트롤렌코를 이용하고 있다는 설정도 과했습니다. 트롤렌코 이야기는 아예 빼고, 두 조직간의 암투를 조금 더 극적으로 그리는게 좋았을겁니다. 지금은 마지막 결전에서 악당들이 무모한 돌진을 감행하다가 차례대로 총에 맞아 죽으며 마무리되는데, 이보다는 더 박진감있게 풀어냈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역시나 1.5점에 더 가까운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