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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0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 요리후지 분페이 / 서하나 : 별점 2.5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 6점
요리후지 분페이.기무라 슌스케 지음, 서하나 옮김/안그라픽스

오래 전에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고 글을 남겼었고, 몇 권의 책을 읽기도 했던 일본의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의 에세이입니다. 디자이너로서 디자이너라는 업과 디자인이라는 일에 관련된 여러가지 생각과 가치관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현업 디자이너로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중 특히 요리후지 분페이의 대학시절 은사가 한 말은 디자이너로서 새겨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디자인은 감성적이지 않고 과학적이다"는 말입니다. 감각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것은 아무런 가치없는 자기만족일 뿐이며, 무언가를 만든다면 왜 그걸 하는지를 언어로 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은사가 전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했던 전공투 세대였기 때문에 그랬을거라는 부연 설명이 살짝 덧붙여져 있지만, 세대를 떠나 맞는 말입니다. 최소한 왜 만드는지는 생각하고 만들어야하는건 당연합니다. 단지 예뻐서, 멋져 보여서가 아니라요. 요리후지 분페이도 가슴 속 깊이 새겼는지, 이 책을 통해서 자기가 만든 다양한 작업물에 대해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작업도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다양한 요소를 모듈화하여, 이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일러스트를 만들고 그 모듈 킷의 사용료를 받는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조합 가능한 일러스트라는 아이디어는 흔합니다. 제 대학 졸업 작품도 비슷했었지요. 시기상으로 따져보면 거의 동시기라 뭔가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겨 상용화했다는건 아주 참신했어요. 제 아이디어는 머리, 몸, 다른 유닛을 조합하여 무궁한 몬스터를 만들어낸다는, 비교적 작은 범위의 딱히 효용성 없는 결과물이라 상업화에 성공한 요리후지 분페이의 작업물과 비교하기도 어렵고요. 

짤막하게 스쳐지나가는 2020년 도쿄 올림픽 엠블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도쿄는 물의 도시이고, 스포츠에서 땀은 빼 놓을 수 없고, 재생이 중요한 시대 환경을 감안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 엠블렘을 색깔만 파란색으로 바꾸어 재활용하는게 어떨까? 라는 건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디자인에 부가되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설명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중요해져 버린 시대 비판을 위해 든 예였지만, 2021년 올림픽 엠블렘으로 사용되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가 풀어놓는 본인의 경력들도 흥미로왔습니다. 디자인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실력만 가지고는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경제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여 피터 드러커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일화에서는 확실히 남다른 부분이 느껴졌고요. 저도 30대에 한 3~4년 정도 디자인 에이전시 사무실을 운영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의 요리후지 분페이보다도 나이가 많았음에도 이런 발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놀기 바빴었지요. 심지어 기껏 읽은 피터 드러커 관련 책은 이거 하나밖에 없고요. 많이 반성이 됩니다. 당시 읽었던 다른 책을 통해 '참신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면, 그 아이디어만으로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자세를 본받아, 그렇게 일하려 노력했다는 것도 대단해 보였고, 본인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자기의 디자인론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노하우를 참고할 만한, 프로 현업 디자이너로서의 조언들도 제법 됩니다. 그 중 아이디어를 형태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별로 특이한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막히면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라는 등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슬럼프가 왔을 때는 방법이 없으니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면서 슬럼프를 벗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건 괜찮은 조언이었어요. 홈런보다는 번트라도 대라는 건데, 젊은 디자이너들에게는 굉장히 유용할 조언이었다 생각됩니다. 여러 관련 부서, 담당자와 소통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라는 조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뒤에, 너무 자세하게 적으면 상대방이 생각을 하지 않게 되니 문제라고 바로 자기 말을 뒤집기는 하는데, 자세히 설명해서 나쁠건 없지요. 저도 한 때 디자이너에 대한 선민의식이 있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요리후지 분페이 말에 동의하는게 하나 있습니다. 전문가에게 맡기면서 정작 인쇄 감리처럼 현장에 가서 지켜보는건 확실히 이상해요. 당연히 믿고 맡겨야지요. 그림은 생각이 20%, 작업이 80%인데 디자인은 반대라는 이론도 좀 특이했고, 북 디자인은 관심이 많은 영역이 아니라서 기억에 많이 남지는 않지만 디자이너의 재능이라는 부분은 상당부분 알고리즘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의견도 굉장히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작가가 이 책을 왜 썼는지를 언어화해 두고, 이 책과 어떻게 만나고 싶은지를 상상한다는건 다른 디자인 작업에도 써 먹음직한 내용이었어요. 이는 '경험 디자인'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되네요. 잘 팔리는 책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큰 제목' 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디자이너를 본 적이 없다던가, 서로간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는 '인사하기' 라던가, 디자인을 포함해 어떤 것을 창조하는 일은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커다란 불안을 원동력으로 한다는 등의 경험이 뒷받침된 말들도 염두에 둘 만 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건 아닙니다. 내용에 두서가 없을 뿐더러, 유명 디자이너가 썼고, 본인 디자인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도판이 지극히 부실하다는 큰 문제가 있는 탓입니다. 컬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소개된 작품에 대해서는 도판을 모두 수록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원소생활"이라는 책을 만들 때 이야기를 꽤 길게 이어가는데, 정작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그 결과물은 함께 소개되지 않는건 너무하다 싶어요. 북 디자인이 책 표지만 있는건 아닌데, 표지만 잔뜩 도판으로 수록한 것도 문제이며 북 디자이너로서의 생각을 잔뜩 풀어놓지만 이 책의 디자인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용에서 설득력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이 책 디자인처럼 저자와의 간극이 느껴지는 결과물은 그 외에도 제법 많습니다. 픽토그램 활용한 디자인이 대표적이에요. 솔직히 좋은지 잘 모르겠더군요. 다리 사이의 구멍이 왜 그렇게 큰 완성도를 가져다 주는지 저는 알 수 없었거든요. 본인 스스로 픽토그램은 수도 없이 손 봤다면서, 그 다음에 바로 광고 카피 문구 자간에는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하는 맥락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후배 디자이너로서 경외감을 가지고 읽을 만한 부분도 없지 않고요. 그러나 단점도 확실하고, 취향도 많이 탈 것 같아 선뜻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3/01/23

사키 - 사키 / 김석희 : 별점 2.5점

사키 - 6점 사키 지음, 김석희 옮김/현대문학

국내 첫 출간된 영국의 쇼트쇼트 대가 사키 단편선. 무려 7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표작 중 절반에 가까울 정도에요. 몇몇 작품은 이런저런 경로로 읽었었는데, 꽤 인상적이었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를 앞서는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들도 많고, 기묘한 맛 스타일로 서늘한 느낌을 담뿍 전해주는 반전물, 피식거리게 만드는 웃음 가득한 작품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거든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라 부를 수 있고, 번역도 좋습니다. '께느른하다' 같은 단어까지 사용한건 놀라왔어요. 열심히 사는 농부가 화가인 이복형을 보고 느끼는 감정인데, 몸을 잘 안 음직이고 게을러 보이는 상태를 잘 표현한 말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아주 좋았다! 라고 말하기도 애매합니다. 대부분의 작품들 등장인물과 소재가 비슷하고 자가복제한 작품이 많은 탓입니다. 적당한 신분의 어떤 인물이 속물이거나 허영심 가득해서, 혹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탓에 낭패를 겪는다던가, 부르주아적인 습성으로 타인을 대하다가 예기치못한 상황에 처한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한 거짓말로 문제가 발생한다던가, '소악마' 캐릭터의 원조격인 악동들이 어른들을 골탕먹이는 내용도 많아서 읽다보면 지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나칠 정도로 짜증나는 인물들 묘사, 지나친걸 넘어서는 과한 장난들은 거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키우던 고양이가 아무리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고양이를 죽인 이웃집 아이를 돼지 먹이로 주려고 한다는 <<참회>>가 대표적입니다. 지나치다 못해 끔찍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말 엄선된 몇몇 작품만 읽는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몇몇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깜빡 잊은 지명>>
길에 버려진 시체로 자신을 위장하려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털어 놓은 고백.
기상천외한 발상과 온갖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는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 당장 체포되지 않는 이유가 그레이하운드들이 그를 쫓고 있고, 누가 먼저 잡는지에 대해 큰 내기가 걸려있었다는 묘사가 등장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화자가 자기가 사실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결론은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지명을 잊어버린 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 생김새 등 모든 면에서 이미 가짜라고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사냥 자루>>
사냥 클럽을 이끄는 펠러비 소령은 후핑텅 부인의 숲에서 오랫만에 사냥을 이끌 계획이다. 그러나 후핑턴 부인의 조카딸 엘리자베스가 데려온 러시아 청년 블라디미르가 여우를 먼저 사냥해 버리고 마는데...
블라디미르의 사냥 자루가 눈 앞에 대롱대롱 매달러 있는 상황을 통해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가져 오는 전형적인 작품. 굉장히 영국 부르주아스럽고 전형적이지만 긴장감만큼은 최고였습니다.
아쉬운 건 블라디미르가 잡은 건 사실 여우가 아니었다는 반전인데... 마지막에 슬며시 드러내는 것 보다는 조금 드라마틱하게 가져가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발표 당시에는 먹혔음직 하나 지금은 좀 낡은 방식이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생쥐>>
몸 속에 들어간 생쥐 때문에 시어도릭은 모르는 여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는데....
지금 보아도 괜찮은 반전이 돋보였던 작품. 앞에 앉은 여자가 장님이었다는 암시, 복선을 제공해 주었더라면, 그리고 긴장감을 조금만 더 높여주었다면 쇼트쇼트 역사에 길이 남는 희대의 걸작 중 한 편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토버모리>>
한 시골마을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서, 참석자 중 한 명인 코넬리우스 에핀은 저택에서 키우는 고양이 토버모리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는 곧바로 사실로 밝혀지지만, 토버모리가 그동안 보고 들은 사람들의 말을 폭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당황해했고, 결국 코넬리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토버모리를 죽이는데 동의한다.
영국 부르주아들의 가식을 비웃는 풍자물. 뒷담화, 불륜 등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면서 서로 만났을 때에는 고상한 척을 하는 가증스러운 상태를 말하는 고양이라는 소재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입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유머러스한 전개도 돋보이고요. 코넬리우스가 코끼리에게 말을 가르치려다가 밟혀 죽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토버모리의 폭로가 기대만큼 화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인데, 발표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 정도가 한계였겠지요. 별점은 4.5점. 풍자 블랙 코미디계의 H.O.F (Hall of Fame)에 입성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브로그>>
마을 최악의 말 브로그를 소유한 멀렛 가족은 수년간의 노력으로 새로 이사온 펜리카드 씨에게 드디어 말을 팔아치웠다. 그러나 펜리카드 씨는 멀렛 가족의 딸 제시에게 호감을 드러냈고, 가족은 브로그가 사고를 쳐서 그 호감을 없애버릴까 노심초사하게 되는데....
내용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내용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아래의 딱 한마디만큼은 기억에 남기에 소개해드립니다.
“펜리카드가 그 말을 타고 밖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건 분명합니다.” 클로비스가 말했다. “적어도 제시가 그 사람과 결혼해서 남편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는 안 돼요. "

<<허황된 이야기꾼들>>
잔돈푼을 구걸하려는 사람을 거창하면서 허황된 이야기로 단념시킨다는 이야기. 이야기는 뻔했지만 신사답게 구걸하는게 어떤 것인지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샤르츠 메테르클루메 교수법>>
기차를 놓친 귀부인 칼로타가 자기를 가정교사로 착각한 부인을 따라가 그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이야기.
끔찍할 정도로 지나친 장난을 그리고 있는 소품으로 개그 콘서트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리치는 방법이라며 허풍을 떤 제목의 교수법 아이디어만큼은 괜찮았어요. 로마 고대사의 사비니족 여인 납치를 실제로 실연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리지거든요. 다른 방식으로 녹여내었더라면 더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맹점>>
에그버트는 삼촌 롤워스 경에게 대고모 할머니가 요리사 세바스티앙에게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입수했다. 하지만 롤워스 경은 증거인 편지를 벽난로에 태워버렸다. “요리사로는 아주 비범하기 때문." 이라며...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범죄물로 흥미롭게 전개되다가 마지막 한 마디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초단편 (쇼트쇼트)의 교과서 같은 작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참고로, 롤워스 경의 심정은 어느정도 이해가 됩니다. 대고모가 살해당한건 먼저 세바스티앙을 자극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될 수야 없겠지만 컵에 든 커피를 얼굴에 끼얹은건 솔직히 심했습니다.

<<평화 장난감>>
전쟁 놀이에만 열중하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의회와 역사적 인물들 인형을 선물했지만, 아이들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또다른 전쟁놀이를 시작한다는 이야기. 다른건 모르겠지만, '평화 장난감'이라는 발상이 기발했습니다. 전쟁이나 파괴에 대한 장난감이 대세인 지금에도 먹힐만한 아이디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크리스피나 엄벌리 부인의 실종>>
집안의 독재자였던 엄벌리 부인이 사라진 뒤, 남편은 매년 2천 파운드의 돈을 은밀하게 요구받았다.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조건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붉은 추장의 몸값>>과 비슷한, 기발한 발상의 유괴극.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부인이 사라졌는데 경찰이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건 조금 아쉽네요. 이런 상황이라면 엄벌리씨가 부인을 죽여서 마당 어딘가에 묻어버렸어도 무방했을 거에요. 차라리 그런 인상을 주면서 마무리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엉뚱한 침입자들>>
평생을 원수로 지낸 울리히와 게오르그는 함께 나무에 깔린 뒤, 해묵은 원한을 청산하고 친구가 되기로 하는데...
숲을 둘러싼 오래된 원한이 살의에까지 이르른 원수 두 명이 산중에 고립된 뒤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그러나 둘은 구조대가 아니라 배고픈 늑대 떼들에게 둘러싸이고 만다는 반전이 인상적인 걸작 쇼트쇼트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메추라기 먹이>>
인기없는 상점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인은 연극을 펼치는데...
인기없는 마을 상점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상점에 정체불명의 손님이 방문한 뒤 무언가 드라마가 벌어지는 것처럼 꾸민다는 이야기. 전략은 성공해서 마을 주부들의 호기심을 가게에 집중시키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SNS 를 활용한 페이크 다큐성 타겟 광고라고나 할까요?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임시 정원>>
정원 자랑하기 좋아하는 밉살스러운 이웃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임시로 멋진 정원을 꾸며주는 서비스 업체가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은 다소 답답했지만, 역시나 독특한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브루주아들의 허영심 비판에 딱 맞는 아이디어이기도 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달력>>
클로비스는 예언을 적은 달력을 18펜스에 팔 생각을 했다. 예언은 모두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애매한 것들이었지만, 조슬린이 사냥터에서 화를 당할거라는 예언은 성공하기 힘들어졌다. 조슬린이 절대로 말을 타지 않고 사냥터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상품 아이디어가 등장합니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실하게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점쟁이의 뻔한 수법을 특정 시기와 결합된 달력이라는 제품에 도입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만들어 팔았어도 괜찮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불가피한 희생>>
천 파운드가 넘는 돈을 잃은 딸이 그 댓가로 홀어머니를 채권자 도박꾼과 결혼시킨다는 이야기.
다른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부르주아 풍자를 잘 그려낸 소품으로 대단히 신선하거나 재밌다기 보다는, 주인공 딸이 이 책에 등장하는 속물 부르주아 중에서도 뻔뻔하기로는 첫 손가락에 꼽을만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별점은 2.5점.

<<네모난 달걀>>
1차대전 참호에서의 참혹한 전투를 겪는 병사들의 위안은 술집가 카페가 합쳐진 공간 '에스타미네'에서의 한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자칭 양계업자를 만났다. 그는 품종 계랑을 통해 자기 양계장 닭이 네모난 달걀을 낳게 하는데 성공해서 거액을 벌었지만, 전쟁에 끌려온 뒤 양계장을 운영하는 고모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송 비용으로 수십 프랑을 요구하는데....
'나'의 마지막 말이 깨는 반전의 맛을 가져다 주는 작품. 그는 휴가를 얻으면 '양계업자'의 고향에 가서 네모난 달걀 산업 현황을 확인하고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양계업자'는 자기 말이 사실이라면 어쩔 셈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답하죠. "당신 고모님과 결혼하겠소"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울러 시키는 1차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데, 그런 경력답게 굉장히 탁월한 참호 묘사도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2014/12/22

탐정영화 - 아비코 다케마루 / 권일영 : 별점 3점

탐정영화 - 6점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포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사 FMW의 대표이자 귀재인 영화감독 오야나기가 촬영 중이던 최고의 추리 영화 결말 촬영을 앞두고 실종되었다. 영화사 직원과 스태프, 그리고 투자까지 한 여섯 명의 배우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감독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감독이 찍어놓은 96분 분량의 필름을 전제로 범인을 추리해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여섯 명의 배우와 세 명의 조감독, 그 밖의 스태프들은 십 분 남짓한 영화의 결말을 찍기 위해 시나리오 콘테스트를 열고, 누가 범인이어야 가장 그럴듯한 영화가 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출된 시나리오들의 결함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시나리오를 선정하고 영화 촬영을 마치는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장편소설. 데뷔 이듬해에 썼다는 초기작입니다.

위의 줄거리 소개에서처럼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궁지에 몰린 스탭들이 스스로 결말을 짜내는 과정에서 출연자와 제작진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추리가 펼쳐지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동호인들끼리의 추리 게임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결말 직전까지만 감상하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는 점에서요. 이런 점은 "독 초콜릿 사건"의 판박이기도 합니다. 미완성 영화의 결말을 추리해야 한다는 설정은 빙과 시리즈인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와 같고요. 하지만 읽다 보니 전개와 과정은 "허무에의 제물" 같은 안티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런 결말은 어떤가요?"라는 결말이 이어지는 "5인의 탐정가"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미스터리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니 광의의 의미로 볼때에는 작가 후기에 쓰여진 대로 메타 미스터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떠오르지만 다행히 작품의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는데, "영화"라는 소재에 굉장히 충실한 덕분입니다. 초반에 화자인 다치하라(나)가 출연진들과 이야기하면서 영화에 사용된 서술트릭에 대해 설을 푸는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영화에 관련된 정보들이 곳곳에 삽입되는게 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썼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추리적으로도 여러 관점에서의 재미있는 트릭들이 등장해서 풍성함을 전해준다는 설정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더해 진짜 트릭인 극적인 서술트릭 - 첫 장면은 시점적으로는 영화 속 내용이 모두 흘러간 다음의 일이다 - 은 단연코 기발했기 때문에 만족스럽습니다. 소설로도 가능하겠지만, '첫 장면과 똑같은 화면에서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장르에 아주 특화되어 있는 트릭이라 다른 데에서는 흉내내기도 힘들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그 외에도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문제로 지적했던, 결말을 창작해내야 하는 상황의 설득력이 높았던 것도 좋았습니다. 출연자들이 결말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높았어요. 자기가 "범인"이어야 영화에서의 비중이 높아지니 어떻게는 자기를 범인으로 만드는 각본을 들고 온다는 것인데 와 닿을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작품 속 추리는 진상이라고 부를 것이 없는, 픽션의 영역이라는 문제는 큽니다. 출연진이나 제작진 누구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찍더라도 작중에 표현된 대로 "가장 그럴듯"하면 되는 것일 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야부이 센조가 밖에서 사기누마 준코의 방문을 잠그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고요.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 완성된 결과물은 앞서 언급한대로 트릭 자체는 기발하나 그닥 공정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외부에서 모든 제작 과정을 지켜본 "독자"라면 수긍할만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 입장이라면 반쯤은 반칙이라 여길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관객이라면 사기누마 준코가 죽는 시점에서 다쓰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 같거든요. 이렇게 무리한 서술 트릭보다는 주인공 다치하라(나)의 아이디어나 배우 야부우치 젠조의 아이디어가 더 낫지 않나 싶었습니다.

아울러 감독의 실종이라는 상황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픽션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감독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최소한 조감독 한 명 정도는 사기니의 의도를 알려줘서 의도대로 움직이게끔 하는 공작이 추가로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다양한 추리가 펼쳐지게 만드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며 작가의 초기작답게 젊은 청춘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그야말로 좋았던 시절의 행복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추리소설 입문자분들께 추천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나중에 "살육에 이르는 병"을 쓰게 된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2024/10/19

채택되지 않은 아이디어 - 사토 오오키 / 이현욱 : 별점 3점

채택되지 않은 아이디어 - 6점
사토 오오키 지음, 이현욱 옮김/미디어샘

일본 디자인 오피스 '넨도'의 대표 사토 오오키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을 통해 그만의 디자인 방법론과 접근법을 알려주는 책.

제목처럼 채택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은 제 1장의 3가지 프로젝트 - 자동판매기용 쓰레기통, 롯데 껌 아쿠오, 클린룸 재배 양상추 판매용기 디자인 - 인데, 이는 별로 였습니다. 채택되지 않은게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는 디자인들이 많았고, 접근법도 다소 평이했기 때문입니다. 채택되지 않을 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다카라벨몬트'의 의뢰로 진행한 미용업계의 비즈니스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작업은 굉장했습니다. 제품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야말로 '비즈니스'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모습도 놀라왔지만, 접근법도 타당했고 결과물도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기존 비즈니스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사업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 대부분의 기업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상황에서, 사토 오오키는 자신의 역할은 '문제해결까지의 과정과 디자인을 통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당연히 그 과정과 해결책은 하나가 아닙니다.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으로 보고 하나하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경쟁업체와 정면으로 승부할 것인가, 아니면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것인가? 등 방향은 아주 다양하니까요. 그래서 기업이 어떤 경영전략을 취하는지에 따라 제안하는 아이디어나 디자인은 완전히 달라지는데, 사토 오오키는 이 때 극단적으로 방향성이 다른 방법을 다각적으로 제안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제안을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경영 전략이 공격적이라면 과감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반대로 방어적이라면 철저하게 안전한 옵션을 제시하는 식으로요.

다카라벨몬트에 닥친 현재의 문제는 저가격화, 고객방문 사이클이 장기화된 시장변화가 첫 번째, 노동환경 악화로 이직률이 증가하고 젊은 직원의 기술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낮아지는 인재 부족이 두 번째, 트렌드가 희박해지고 개인별 개성이 다양해져서 새로운 컨셉 서비스가 부족해지는 문제가 세 번째 였습니다.

사토 오오키가 제시한 첫 번째 컨셉은 '개인별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과 가변성'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고객이 팔걸이, 등받이 등을 고를 수 있는 의자와 색다른 공간, 화장품과 같은 제품과 서비스를 함께 제안했고요.

두 번째 컨셉은 '커뮤니케이션 활성화'입니다. 이를 위해 나란히 연결할 수 있는 의자, 개인별 공간을 제공하는 거울 등이 디자인되었습니다.

세 번째 컨셉은 비즈니스 모델 제안으로 '시간의 리디자인과 네트워크화'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고객이 바빠서 미용실에 갈 시간이 없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특정 서비스에 대한 전문 기술만 제공하는 매장을 운영한다는 것이지요. 커트만 하는 매장, 염색만 하는 매장이 있는 식으로요. 의자도 앉았다가 일어서서 스타일링을 확인하기 쉬운 형태로, 짧은 시간을 강조하기 위해 '신선도'가 돋보이도록 화장품을 냉장고에 넣는 컨셉 등이 제안되었습다.

이 세 번째 컨셉에서 발전시켜서 내 놓은 것이, 미용실 산업 트렌드 변화를 이겨내기 위한 3/30 (3주에 한 번, 30분) 컨셉입니다. 이게 진짜 와 닿았던게, 정말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저렴하더라도 짧은 시간만 서비스를 제공하니 저가격 문제 해결, 미용실을 자주 방문하게 되니 장기화된 방문 사이클 해결, 잘 하는 것만 하면 되니 직원 기술력 문제도 해결, 새로운 서비스 키워드로 '신선도'를 제시하여 새 컨셉 서비스 제안이라는 방식으로요. 정말로 디자이너가 비즈니스를 바꿀 수도 있다는게 실감이 나는, 좋은 프로젝트 경험담이었습니다.

반면 와세다 대학 럭비부 리브랜딩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장황하게 설명은 하고 있지만, 결국 유니폼 디자인이 거의 전부였던 탓입니다. 팀의 방향성도 디자이너가 정했다는게 특이했지만 이 역시 그리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스포츠팀이라면 디자인보다는 이기는게 더 중요하니까요. 유니폼이 멋있고, 캐치프레이즈가 좋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유니폼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과정만큼은 돋보였습니다. 제가 꼬꼬마 신입 디자이너 시절에 두산 베어스 리브랜딩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이런 접근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크게 반성하게 되네요. 유니폼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디자인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 뒤 IHI 브랜딩과 프로테카 가방 디자인도 그냥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라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IHI 브랜딩에서 가장 손쉬웠을 로고 변경을 하지 않고 가능했던 커뮤니케이션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좋았습니다. 하나는 '중공업의 이미지를 좋은 의미로 배신하는 시도'였고, 또 다른 하나는 'IHI'라는 세 글자와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여러가지 제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또 제안을 할 때 '요구범위 확장형'이라고 불리우는 방식으로 접근한게 눈에 뜨입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르는 제안과 요구에서 조금 벗어난 제안, 크게 벗어난 제안을 제안하는 것으로 클라이언트가 자극을 받아 원래 생각했던 요구의 범위를 수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범위를 크게 넓히기도 한다니, 프로젝트를 외주로 받아 진행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시도해봄직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같이 회사 소속 디자이너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이겠지만요. (시키는 것만 잘하는 것도 벅찹니다..)

이렇게 수록 프로젝트가 전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유익했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디자이너로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6/05/30

무영검 - 용대운 : 별점 1점

무영검 -하 - 2점
용대운 지음/데이즈엔터(주)

읽고도 화가 나서 줄거리는 대충 쓰겠습니다. 사실 줄거리는 한줄이니까요. "무림에 다시 출도한 12신마를 금마옥주 좌혼지가 소탕한다!" 입니다.
아래의 "태극문"과 같은 작가가 쓴 것은 작가이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작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자신의 작품의 좋았던 아이디어를 그대로 베끼고 스케일만 더 키운 어처구니 없는 소설인 탓입니다.

일단 태극문에도 등장하는 "평범한 초식이 고수를 제압한다"라는 아이디어와 "품검 대회"라는 가장 중요한 설정을 그대로 따서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아이디어와 설정을 좀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짜 맞추어도 고작 본전일 판에 아이디어와 설정은 이야기의 핵심과 따로 놀고 있다는 점입니다. "평범한 초식이 고수를 제압한다"라는 독특한 발상은 "태극문"과는 다르게 주인공 좌혼지의 강함을 설명하는 곁다리일 뿐이며 좌혼지 자신은 외려 무림 최고 수준의 무공을 몸에 익히고 있습니다. 결국 "평범한 초식"은 진정 극강한 무공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묵살하는 희한한 전개. 요걸로도 일단 마이너스 백만점.
게다가 "품검 대회"가 마인들을 끌어내기 위한 꼼수라는 전개는 설득력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일단 극강한 마인들이 3인이상이 모이면 좌혼지를 제압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정작 12명이나 있으면서 왜 더욱 고수가 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거든요. 나 같으면 12명이서 그냥 처들어 가서 쑥밭을 만들어 놓겠다. 3명씩 조를 짜서 제트 스트림 어택이라도 보여주면 될거야냐? 이거 역시 마이너스 백만점.
또 "태극문"의 단점이기도 했던, 왜 등장하는 지도 알 수 없는 여러 고수들은 정말 들러리(!)일 뿐입니다. 어디어디의 최고수, 어디어디의 넘버원이라는 작자들이 등장해서 진정한 마인들에게 일초에 피떡이 되는 장면은 한마디로 기가 막히는 수준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장면들이 정말로 수도 없이 계속된다는 점이죠. 이러한 어처구니를 쌈싸먹은 전개의 화룡점정은 이 최고수들을 일초만에 피떡으로 만드는 마인들이 주인공 좌혼지에게 일초만에 피떡이 된다는 전개인데 정말 소설 쉽게 쓰는구나..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정말로 이 작품의 무공 대련 장면의 대부분은 "파파박" "크아악!" 이 두줄로도 다 쓸 수 있거든요.
아울러 좌혼지의 정사장면은 사족을 넘어선 작가정신이 의심되는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장면이 꼭 나와줘야 책이 팔린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무런 흑심없이 미모의 여인의 옷을 벗겨 치료하다가 눈이 맞아 떡을 친다는 구닥다리 발상은 찰리 채플린 시대에 사라진 줄 알았었는데....
이러한 무의미하며 형편없는 묘사의 난무로 인해 단편 분량의 얄팍한 소설이 그나마의 미덕도 갖추지 못한채 품검대회라는 핑계로 질질 늘어지는 마이너스 삼백만점짜리 쓰레기가 되어 버렸네요.

어쨌건 최근 본 소설 중에서 가장 밑바닥 소설이었습니다. 솔직히 다른 작품을 모방하던 자기 작품을 모방하건 상관은 없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이거저거 설정을 끌어왔으면 독자에게 최소한의 재미는 안겨줘야죠. 용대운이라는 작가가 요새 무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소설 하나만큼은 아무리 욕을 먹어도 무방한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는 괜찮았고 하나는 밑바닥이었으니 "유섬검"과 "탈명검"을 읽어보고 작가에 대한 평가를 해 봐야 겠네요. 그나저나 "검" 시리즈는 거진다 쓰레기라는 평을 봤는데....

2021/02/24

추리소설 쓰는 법 -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보성사 : 별점 2.5점

추리소설 쓰는 법 - 6점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보성사

미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발표한 추리소설 작법서. 다른 작법서들처럼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지 않는게 특징입니다.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법, 플롯을 구성하는 법, 스토리 구성법 등 추리 소설을 쓰는데 중요한 요소들을 뽑아 놓기는 했지만, 이를 어떤 원칙에 따라서 소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 작가들이 각자 한 꼭지 씩 맡아서,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 구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원칙대로의 작법서라기 보다는 유명 작가의 비법(?)을 엿볼 수는 있는 일종의 족보 (?)에 가깝습니다. 

프레드릭 브라운, 존 D 맥도널드, 렉스 스타우트, 그레고리 맥도널드, 스텐리 엘린, 헬렌 매클로이, 에드워드 D 호크 등 우리나라에도 그 이름이 익히 알려진 유명 작가들이 쓴 각자의 비법을 읽는건 확실히 재미있더군요. 추리 소설을 쓰기위한 요소 외의 정보들도 유용했고요. 작가들에게 보낸 앙케이트 결과를 소개하는 '왜 쓰는가?', '언제 어떤 식으로 집필하는가?'에 대한 내용들과 투고하는 요령 등이 기억에 남네요.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법'이 있습니다. 로스 맥도널드는 겉으로 보이는 사물을 뒤집어 보는 것부터 플롯을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D 호크는 우연히 생각난 제목에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고요. 로버트 L 피쉬는 트릭을 떠올리는게 가장 중요하며, 장편은 기상천외한 상황 설정에서 시작한다는데 과연 본격작가답습니다. 미리암 알렌 데포드는 신문 스크랩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데 무척 공감되었습니다. 이외에는 독특한 인물이나 꿈, 배경 설정, 결말, 중심 테마 등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가장 놀랐던건 존 볼의 '24시간 노동', 즉 항상 생각한다는 건데, 과연 유명한 '버질 팁스'의 창조자답습니다! 버질 팁스 시리즈가 정식 출간되면 좋겠네요. 

그리고 프레드릭 브라운이 플롯 구성법에 대해 짤막하게 쓴 글도 인상적입니다. '금붕어'라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해서 플롯을 짜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어에서 시작해서 등장인물, 테마, 사건, 배경 등을 차츰 덧붙여 발전시키는 방법인데, 거장답게 깔끔하면서도 재미있는 설명이 돋보였어요.
폴린 블룸이 알려주는, 쓰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결말을 알고 난 뒤 중심부 플롯을 만들라는 스토리 구성법도 유용해 보였습니다. 특히 강조한 '대립'을 스텐리 엘린의 "배반"을 예로 들어 설명해 준 것도 좋았어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짧은 작품 속에 열 개가 넘는 극적 대립이 드러나 있다는게 놀랍더라고요. 이를 위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른건 접어두고 "이 아이디어로부터 등장인물을 심각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직면할 만한 대립이 무엇이며, 뭐가 장애요소인지를 떠올리고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해 보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데이나 라이온 역시 스토리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는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사례로 나온건 아니지만, 얼마 전 읽었던 "숙명"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형사가 대기업 사장 살인 사건을 수사하게 되면서, 사건이 어린 시절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정신 지체 여성의 죽음및 어린 시절 라이벌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게 된다."가 되겠네요. 음... 이대로는 영 재미는 없어 보입니다만.... 

서두는 이야기를 결말까지 고려하고,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지 생각하고 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지적에는 감탄했습니다. 거장은 문장 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는 법이지요.

어떤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게 좋은지에 대한 여러 작가들의 생각, 대화는 액션과 마찬가지라는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설명과 작가들이 각자 소개해주는 여러가지 퇴고 및 수정 방법들도 앞으로 창작 작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 외 시리즈물과 단발물 (스탠드 얼론)의 차이점과 장, 단점에 대한 설명과 왓슨역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등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에 대해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던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1987년 출간된 버젼인데 번역이 정말 엉망이었어요. 지금은 쓰지 않는 용어도 많았고요.

또 이미 30년도 전에 출간된 책이니만큼,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내용들도 제법 됩니다. 아울러 플롯을 짜는 법 등 소설을 쓰는 기본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꼭 '추리 소설'에만 국한된 내용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번역도 좋고 완성도 높은 작법서를 읽는게 나을겁니다. 애써 구해 읽으실만한 책은 아니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03/18

화성의 존 카터 - 버로우즈 작 / 최인학 역 : 별점 2점

존 카터 청년이 애리조나의 산골짝에서 금광을 찾고 있을 때의 일.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카터의 몸은 어찌 된 셈인지 우주를 날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화성에 착륙하고 있었습니다.

자, 그럼 화성은 어떤 세계였을까요? 카터는 말 같은 8개의 발을 가진 괴물 짐승을 탔으며, 4개의 손을 가진 거인의 일행도 만났습니다. 그들은 녹색인이었습니다. 그밖에 붉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붉은 사람은 지구의 사람과 흡사했습니다. 여기는 싸움을 잘하는 자가 뽐내고, 항상 싸우는 것이 일인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카터는 쾌남자였습니다. 정의를 존중하는 사나이였으며, 칼싸움의 명수로서 무서움을 모릅니다. 녹색인에게 포로가 된 붉은 사람의 아름다운 왕녀를 지키며 놀라운 활약을 거듭합니다. 여러분, 통쾌한 카터 청년을 응원해 주십시오. <책 소개에서 발췌>

최근 개봉한 블록버스터 무비 "존 카터: 바슘 전쟁의 서막"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 영화 덕분에 정식 완역본도 출간되었지만 저는 직지 프로젝트의 아이디어 회관 문고본으로 읽었습니다. 아동 대상의 번역일 뿐 아니라 굉장히 요약되어 있어서 읽기는 좀 불편했지만(솔직히 번역은 아이디어 회관 문고본 최악 1, 2위를 다툴 듯), 뭐 일단 읽었다는 데 의미를 둘까 합니다.

내용은 다른 곳에서 접했던 대로 굉장히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아니 판타지더군요. 무대만 살짝 바꿔놓으면 전형적 이세계 판타지 군웅물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해당 장르의 전형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세계로 소환된(?) 주인공과 이세계에서 가지는 특수한 능력. 그리고 이세계 종족 간의 거대한 전쟁에 휩쓸리고 그곳의 공주를 돕게 된다는 설정. 이세계의 기이한 애완동물. 음...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신비의 세계 엘하자드 TV ver."?

이러한 판타지적 전형성에 더하여 역시나 전형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복수"를 사크족의 타르가스 대장 캐릭터를 통해 구현해 놓은 등, 흥행이 될 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더군요. 이 정도면 히트를 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겠죠.

그러나 아쉽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출간된 시기를 감안한다면 이러한 전형의 원조라 해도 무방할 터이나, 그동안 국내에는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오히려 이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후대 작품들 때문에 이 작품의 참신함이나 신선함이 훼손되어 버렸으니까요. 무려 백여 년이 지난 뒤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예산의 블록버스터로 재탄생했다는 데 위안을 삼아야 하려나요? 문제는 영화 역시도 너무 늦게 제작되어 참신함이나 신선함이 없다... 라는 이유 탓에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겠지만요.

사실 정식 번역된 결과물은 훨씬 재미있고 뛰어날 테지만 저 역시도 같은 이유, 즉 새로운 부분이 거의 없을 것이기에 구태여 원전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아바타" 전에는 소개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늦은 게 아쉬울 뿐이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SF라는 말에 어울리는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것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에테르 세계관과 라듐엔진 등의 몇몇 과학장치들 등이 그러한데, 특히나 중립을 지키는 공기 정화 시스템의 아이디어는 확실히 괜찮았어요. 이 역시도 "토탈 리콜"의 원전격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BC

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했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과 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되거든요.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입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합니다.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는 추리는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가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니며,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렸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극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났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추리로 아주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은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 역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6/27

네가 손에 쥐어야 했던 황금에 대하여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소설가의 평범한 일상을 풀어낸 작품집입니다. 소설가 생활을 시작한 뒤, '야마모토 슈고로 상' 후보가 되기까지를 아우르는 여섯 편의 연작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가와 사토시 특유의 독특한 발상들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 별다를 것 없는 일상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줍니다. 이와 동시에 소설이란 무엇인지, 창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작가적 성찰도 좋았고요. 

이야기마다 밀도나 완성도의 편차가 존재하며, 일부 수록작에서는 특유의 발상이 부족해 다소 평이하게 흘러간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프롤로그

독서광 대학원생인 '나'는 '당신의 인생을 원 그래프로 표현하시오'라는 입사지원서 항목을 높고 고민하다가, 여자친구 미리의 조언으로 입사 지원서에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구직을 위한 동기와 목적이 이야기로서 부족하다고 느낀 탓에 자신의 인생을 소설처럼 바꾸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진짜 소설 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설가가 되기 위해 미리와 이별한 나는 6년 후 소설가가 되었고 미리는 결혼했다.

연작 단편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입사 지원서의 항목 하나를 두고 주인공과 여자친구가 나누는 진지한 토론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여자친구 미리의 조언입니다. '입사 지원서에는 진실을 쓸 필요가 없고, 구직 활동 자체가 하나의 소설과 같으니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말로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이고 참신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생각도 되고요. 결국 주인공이 가짜 인생을 그럴듯하게 써 내려가려고 노력하다가 진짜 소설가가 되고 만다는 결말도 횡당하지만 좋았습니다.

작가 오가와 사토시 특유의 기발한 발상과, 일상을 다루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성이 잘 살아 있는 단편입니다. 미리와의 건조하면서 담백한 관계와 헤어짐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도 하고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3월 10일

대지진 3년 후인 3월 11일, 고등학교 동창 네 명이 모여 술을 마셨다. 다들 지진이 일어난 날에는 무엇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바로 전날인 3월 10일에 뭘 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이걸 계기로, 나는 인생의 대부분은 기억에도 남지 않는 평범한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3월 10일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예전에 썼던 핸드폰까지 찾아내어 조사했다. 바로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문자를 통해 홍차와 마들렌을 먹으면서 어릴 적 기억을 세세한 것까지 떠올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날 나는 아카네와 사귀기 위해 영화 초대권을 이용한 수작을 부렸었다는걸 알아냈고, 지금 아카네는 이별을 고했다.

4년 전의 평범한 하루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은 일상 속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마치 추리 소설처럼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사소한 단서들을 따라가며 퍼즐을 맞추듯 과거를 되짚는 흐름이 꽤 흥미롭고, 일상계 추리물로도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약속에 늦잠을 자고는 부끄러워 그 이유를 '숙취'라고 꾸며낸 뒤,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이 자신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거짓이 반복되며 진실처럼 굳어지는 과정은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연결한 구성도 눈에 띄었습니다. 주인공이 아카네와 가까워지기 위해 인용한 질베르트의 이야기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유기적으로 활용되는 점이 돋보였거든요. 처음엔 지나쳤던 대사나 행동들이 나중에 의미를 드러내며, 이야기 전체에 짜임새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공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기억을 왜곡했던 경험을 고백하면서,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단한 사건 없어도 일상을 이렇게 깊이 있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소설가의 본보기

'나'의 친구 니시가키는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인물로, 마음에 들었던 여성 에리카와 가까워지기 위해 작가인 나를 이용하여 결국 결혼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결혼 후 니시가키는 나에게 에리카가 소설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려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알고 보니 에리카는 오라 리딩이라는 점술에 빠져 소설가가 되려고 했고, 니시가키는 그것이 사기라는걸 나와 함께 밝히기로 했다. 처음에는 니시가키가 점술가를 직접 찾아가 사기 행각을 증명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내가 직접 소설 속 인물을 빌려 점술가에게 접근해서 어느 정도 거짓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 역시 점술가의 말에서 분명 무언가를 느꼈다.

'소설을 써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겁니까? 내 경험을 말하면 지금까지 소설의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디어는 퍼즐 조각 같은 것이어서 늘 내 마음속에 몇가지씩 존재한다. 그 조각들을 끼워 맞추면 비로서 소설의 아이디어가 된다. 작품을 구상하는 기간의 태반은 딱딱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을 억지로 겹쳐놓고 겹친 부분을 잘라내거나 공백 부분을 채워넣으면서 모양새를 다듬어 가는데 시간을 쏟는다. 이기고 치대는 사이에 점점 아이디어의 형태를 갖춰 간다.'

점술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적인 의심과 믿음,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교차시키는 구성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오라 리딩이라는 점술이 어떻게 사람을 현혹하는지, 콜드 리딩이라는 간단한 사기 수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재미의 핵심이었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보며 교묘하게 말을 끌어가는 방식은 실제 사례로도 있을 법해서 몰입감 있게 읽혔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디어는 갑자기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끼워 맞춰 가는 과정이라는 설명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작가로서 겪는 고유의 고민과 구상의 실제적인 측면이 잘 전해졌습니다.

다만 이야기 자체는 결국 에리카가 회사를 당장 그만두지 않기로 하면서 비교적 평이하게 마무리됩니다. 앞선 단편들에 비해 기묘한 전개나 파격적인 발상은 덜해서, 그런 부분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다소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네가 손에 쥐어야 했던 황금에 대하여

나는 남이 내 일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타인에게도 참견하지 않는 반면 고등학교 동창 가타기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대로 거리낌 없이 타인의 일에 개입해왔다. 나는 그를 경멸했지만, 완전히 미워하지는 않았고 종종 괜찮은 행동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졸업 후 가타기리는 사기성 있는 투자로 동창들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고 2년 뒤 잠깐 만나 목욕탕을 함께 간게 전부였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잘 나가는 줄 알았던 가타기리는 다시 나를 찾아와 악성 댓글 대응법을 물어보았다. 알고보니 그는 폰지 사기를 벌이던 중이었고, 결국 모든게 밝혀져 파산하고 말았다.

가타기리는 실제로 돈을 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빌린 돈으로 배당금을 주며 허상만 유지해왔다. 나는 그가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삶의 보람을 느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그만의 ‘황금률’ 실천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가짜 황금을 좇는 점에서는 가타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재능 없음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길에서 발길을 멈추고 마는 굼뜬 성격,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완고함, 강박적으로 타인과 똑같은 걸 하기 싫어하는 비뚤어진 심사.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결손, 일종의 우매함이 필요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술술 풀리고 갈등이라곤 없는 인생에 창작은 필요 없다.

표제작.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소설가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작가는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오히려 ‘재능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나칠 일에 괜히 발을 멈추는 둔한 성격,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완고함, 타인과 똑같은 것을 하길 극도로 꺼리는 비뚤어진 심사—이런 결손이야말로 소설을 쓰기 위한 조건이라는 설명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갈등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인생에는 애초에 창작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에도 공감이 갔고요.

또 하나 마음에 남았던 건 학창 시절,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친구와도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완전히 연락이 끊기는 현실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친구들이 제법 있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더는 서로의 삶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반면, 가타기리의 사기가 그저 흔한 폰지 사기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기발한 반전이나 의외성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터라, 전개가 다소 평이하게 흘러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결말 부분—즉, 소설가인 ‘나’가 가타기리와 마찬가지로 ‘가짜 황금’을 좇는 사람이라는 식의 연결도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타기리의 행동은 엄연한 범죄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요. 이런 범죄 행위와, 자기 안의 무언가를 꺼내어 소설로 표현하는 창작 행위를 단순히 동일선상에 놓는게 과연 타당할까요? 이를 비교하려면 이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연결 고리 - 예를 들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글이나 아이디어를 도용한 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 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즉, 이 작품 설정보다는 바로 이어지는 "가짜"의 바바 이야기가 비교 대상이 되었어야 합니다.

황금률 등 이런저런 설정을 도입하고, 비교적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특유의 기발하고 기묘한 발상보다는 현실에 많이 매몰되어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짜

나는 교토에서 귀가하던 신칸센에서 만화가 바바 류지를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났던건 1년 전 설 연휴 즈음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술자리였다. 동창 가토가 그를 데려왔다. 바바는 "일본 고등학교 옛날 이야기"라는 만화를 준비 중이었고, 이는 동창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추억담을 수집하는 형식이라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창 도도로키는 바바가 짝퉁 시계를 차고 다닌다며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바바의 만화는 물론 인생 자체가 전부 남의 이야기와 재능을 빌린 표절이었다. 만화조차도 실제로는 그의 아내가 그린 것이었다.

끝없이 표절을 반복하는 바바라는 인물도 인상적이지만, 바바가 표절하게 만든 '나'의 기발한 발상들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나'가 이야기하는 미스터리 소설의 범인 맞추기 방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은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겨야 하므로, 언뜻 보아서는 동기가 없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유력한 범인 후보이다. 마찬가지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요소는 모두 고려한다. 미스터리 소설에 시력을 잃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 실은 눈이 보일 가능성을 고려한다던가, 범행 현장 창문 유리가 깨져 있다면 범인은 외부에서 침입하지도 않았고, 외부로 도망가지도 않았다. 유리가 깨진 건 침입, 도망과는 관계없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범행 시에 깨져버린 안경 파편을 감추기 위해서라던가' 등 재미있는 발상이 가득하거든요. 이 정도 이야기를 들으면 표절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와 함께 창작이라는게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는 듯한 내용 전개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바바가 워낙에 독특한 인물이니만큼, 이 인물에 대해 보다 깊숙하게 파고든 기묘한 이야기를 풀어내는게 재미면에서는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여러가지 독특한 아이디어가 가득한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수상 에세이

나는 신용카드 도용과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가 된 상황에서 자기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자기를 되돌아보며 일종의 마침표를 찍는 글입니다. 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해답같은 내용이 등장하거든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소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감동. 우리는 매일 지금까지 물렸던 것을 접한다. 크든 작든 그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여전히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지요. 이를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첫 문장에 대한 감상을 통해 펼쳐보이는데 여기서는 확실히 작가만의 색다른 발상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얼음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얼음이 항상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인터넷이 처음 연결된 날의 기억에 의존하여 얼음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는데, 이런 발상은 정말이지 부럽습니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만 별점을 주기는 어렵네요.

2017/10/09

허구추리 - 시로다이라 쿄 / 박춘상 : 별점 2점

허구추리 - 4점
시로다이라 쿄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북스(D&CBooks)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머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아이돌 나나세 카린의 유령이 마쿠라자카 시에 나타났다. 큰 가슴에 미니 드레스, 리본을 달고 손에는 큰 철골을 든 모습이라서 사람들은 그녀를 "강철 인간 나나세"라고 불렀다. 유령은 사람들을 습격하다가 결국 경찰마저 살해해 버렸고, 사건에 관련된 교통과 순경 사키는 우연히 만난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 그리고 전 애인 쿠로와 함께 강철 인간을 없애기 위한 승부에 나섰다... 

일본작가 시로다이라 쿄의 장편 소설입니다. 추리 만화 "스파이럴" 등의 원작으로 알려진 작가이지요. 본 작도 만화적인 설정이 가득찬 라이트 노벨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짜 진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어보이는 가설을 연달아 내 놓는다는,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이런저런 가설, 추리가 선보이는 작품은 그 중에서 "진상"을 찾아내는게 보통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 작품은 "허구(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추리"를 진짜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게 목적이거든요. 이 아이디어 덕분에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같은 이유로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애호가 모임인 "하우미스터리"에서도 추천하는 분들이 제법 계셨을 테고요. 저도 "하우미스터리"에서 관련 정보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던 차에, 기나긴 추석 연휴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라이트 노벨답게 쑥쑥 읽힙니다. 만화 원작을 많이 쓴 작가답게 캐릭터와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묘사, 재치넘치는 대사도 괜찮아요. 주인공인 일안일족 아가씨 이와나가 코토코도 마음에 듭니다. 귀한 집 아가씨이지만 상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남자친구 사쿠라가와 쿠로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개성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말로 '갭모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우선 "허구 추리", 즉 이와나가가 '강철 인간 나나세 종합 사이트'에 올리는 네 가지의 추리 모두 조금만 뒤집어보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반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로요.
그리고 네 번째 추리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추리를 내 놓는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테라다 형사가 혼자서 수사에 나섰다", "나나세 카린의 아버지가 악의를 가지고 수기를 남겼다.", "나나세 하츠미가 매스컴에 수기를 흘렸다."라는건 구태여 이렇게 가설까지 만들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니까요. 네 번째 추리의 핵심이 이 세가지 요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첫 번째 테라다 형사 이야기를 제외하면 결국 나나세 카린은 "궁지에 몰리고", "죽고 싶었다."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기에 외려 드러내면 안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네 번째 가설로 정면 승부를 하면 될텐데, 구태여 앞에 장황한 설명을 덧붙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 네 번째 "허구 추리"의 핵심인, 나나세 카린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시체 바뀌치기 트릭은 조금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았지만 솔직히 현대 경찰을 우습게 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만화적인 설정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특히 인어 고기와 쿠단의 고기를 함께 먹은 사쿠라가와 쿠로에 대한 설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쿠단의 "미래 결정 능력"에 불사의 능력이 결합되어 죽지 않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사건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탓입니다. 단지 강철 인간과 호각으로 맞붙기 위한, 액션용 소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능력이 있다고만 묘사되지 딱히 어떻게 발휘되는지 묘사가 없으니 독자는 알 도리가 없지요. 그냥 이와나가가 올린 글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 점은 쿠로의 사촌 누나이자 동일한 힘을 가졌으며, 강철 인간 나나세를 만들어낸 최대의 적 릿카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럴 바에야 이와나가는 귀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쿠로는 일종의 호위 무사라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겁니다. 아니면 "미래 결정 능력"을 좀 더 시각화하던가요("그래 결심했어!"와 함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던가...).

이렇게 독특함 외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 연령대가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로도 발표되었는데 만화가 훨씬 괜찮을 것 같네요.

2004/09/28

열흘간의 불가사의 - 엘러리 퀸 : 별점 3점

열흘간의 불가사의 - 6점 엘러리퀸/시공사

2차 대전 이전, 프랑스 파리에서 잠시 교분을 가졌던 하워드 밴 혼의 갑작스러운 부탁으로 엘러리는 라이츠 빌의 밴혼 저택에 머물며 하워드의 기억 상실 발작을 도와준다. 하지만 하워드는 자신의 새어머니 샐리와의 부정한 관계로 고통받던 상태로 마침내 협박까지 받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러리는 사건에 뛰어들지만 하워드의 발작이 결국 의외의 사건을 부르며 엘러리는 이 모든 사건은 성서의 "10계"가 바탕이라는걸 깨닫는다.


엘러리의 "라이츠빌" 시리즈의 3번째 작품입니다. 엘러리의 유머와 잘난척이 줄어든 대신 잔인한 인간성에 보다 촛점을 맞춘 작품이죠. 역시 "옥수수밭" 님 덕분에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제목처럼 열흘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성서의 "10계"와 연결시켜 진행해 나간다는 점입니다. 독특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10계의 범죄를 하나씩 행하면서 결국 살인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은 역시 정통파의 거장답더군요. 거기에 더해 굉장히 효과적이고 충격적인 반전을 던져주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너무 아이디어에 치중한 탓인지 중간 과정에 몇몇 핵심적인 오류가 보인다는 것은 아쉽네요. 하워드의 기억 상실은 예측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범인이 효과적으로 써먹은 여러 자료들이 전부 허구였다는 사실 역시 그간의 치밀함에 비추어 볼때 너무 무신경한 부분이었다 생각됩니다. 범인이 의도한대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던가, 엘러리가 1년전에 받은 쪽지 뒷면을 한번도 보지 않다가 마지막에 뒷면을 보고 진상을 깨닫는다던가 하는 등의 설정 역시 현실성이 떨어지고요.
기발한 아이디어에 치중한 나머지 치밀한 전개가 부족하다는건 다른 엘러리 작품과 유사합니다. "악의 기원" 처럼요.

그래도 엘러리의 패배(정확하게 보면 1승 1패지만 제가 보기에는 패배가 맞습니다)가 선보이는 이야기 전개는 독특하며,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시 한번 책을 영구대여(?)해 주신 옥수수밭 님께 감사드리며....^^

2020/11/15

완전 범죄 연구 - 사노 요 / 김한경 : 별점 2.5점

일본 추리 작가 사노 요가 쓴 단편 6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이전 "금색의 상장" 리뷰에서 언급해 드렸듯, "금색의 상장"과 함께 국내에 유이한, 사노 요 단행본이기도 하지요.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했던 차에, 우연히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발견하고 구입하였습니다. 가격은 배송료 제외하고 2만원으로, 1991년 발간 당시 정가는 210여 페이지에 3,500원이었지만 이 정도면 적절한 가격이라 생각합니다. 절판본 중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형성된 책도 많으니까요. 잠깐 찾아보니 "환영박람회" 1~4 권 셋트는 최소 160,000원에서 시작하네요.

하여튼, 읽어보니 그동안 구전되어 왔던 명성의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디어' 만큼은 확실히 좋았거든요.

그러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다소 아쉽습니다. 좀 더 길게, 설득력있게 전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작품이 꽤 되거든요. 단편에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빼어나기 때문에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오랜 숙제를 끝낸듯한 후련한 기분은 보너스고요.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시체이동" 

"중앙일보" S 지국 지방판에 기묘한 기사가 실린다. 누군가 자동차 3대에 벌거벗은 마네킹을 가득 담고 이동했던 사건이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오이카와는 기사에 흥미를 보이고, 기사를 쓴 젊은 기자 사쿠라이에게 사건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사쿠라이와 중앙일보 지국 조사를 통해, 자동차 3대에 실렸던 마네킹 18개 중 17개가 별장지인 '학자촌'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오이카와는 마네킹 사건은 친구인 심리학 교수 이나무라 가즈히코와 관련되어 있다는걸 눈치채고 그를 추궁하는데...

이야기는 이나무라가 참석했던 대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대담에서 문학 평론가 시노다는 차로 시체를 산 속에 버리는건 완전 범죄에 가깝지만, 불시 검문이나 불의의 사고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나무라는 이에 동의하지요. 

문제는, 여기에서 마네킹은 벌거벗은 여성 사체를 위장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되는데 이건 말도 안됩니다. 사체를 버리러 가면서 구태여 이상한 티를 낼 이유는 없으니까요. 실제로 마네킹 운반자들은 무려 2번이나 검문을 받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이동 경로도 곧바로 밝혀지고요. 이럴 바에야 불시 검문, 불의의 사고와 같은 예상치 못한 불운은 무시하고, 혼자서 차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이동하는게 훨씬 상식적이고 납득이 가는 행동일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결말까지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마네킹 관련 사건은 오이카와가 날조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동기는 이나무라가 오이카와의 횡령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오이카와는 이나무라를 독살한 뒤, 이나무라가 범행이 드러날까 두려워 자살했다며 완전 범죄를 완성시키지요. 말 그대로 '완전 범죄 연구'라는 표제에 딱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또 오이카와는 이나무라를 살인범처럼 보이도록 매스컴을 이용했는데 그 발상과 과정에 대한 묘사도 꽤 그럴듯했습니다. 기자가 기사로 자살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기자가 기사를 만들어서 있지도 않은 범행을 엮은 뒤, 그걸 남에게 뒤집어씌워 자살을 위장한채 죽인다는 이야기는 처음 봤네요.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하지만 이나무라가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라는건, 오이카와의 주장 뿐입니다. 이나무라가 살해했다는 여대생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요. 앞서 이야기한대로 마네킹 작전은 어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고용한 학생과 자동차 번호로 이나무라가 주도했음이 뻔하게 드러날 겁니다. 조금만 조사가 이루어져도 이나무라가 살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는건 금방 드러났을 거에요. 그런 점에서 치밀한 계획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사건을 풀어가는 전개에 문제가 너무 많아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위장 자살"

K시에서 부정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요 증인이었던 시장 비서 자살 후 수사는 중단되었고, 시장은 구속되지 않았었다. 얼마 뒤, 도쿄에서 살던 K시 출신 아키코는 자살했다는 비서를 긴자에서 목격한 후 비서 나카바야시가 국회의원인 삼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아키코의 이모 사에코는 애인인 전직 기자 다자키 류이치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자키는 비서가 비슷한 사람을 자신으로 위장하여 살해했다고 추리하는데...

다나카가 내놓은 추리는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은 나름 반전이 있어서 신선했어요. 우선, 다자키 때문에 근무하던 은행에서 횡령을 저지른 사에코는 이 트릭을 그대로 이용하여 도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 자기와 꼭 닮은 카페 주인 도무라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도무라를 죽이고 자신이 자살한걸로 위장한 뒤, 다자키와 함께 도주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카바야시 비서건은 아예 조작이었고, 다자키와 아키코가 공모하여 사에코를 죽이려고 했다는 진상이자 반전이 드러납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나카바야시 비서 사건과 관련된 추리 모두가 아예 조작이었다는 발상이 인상적이에요. 아키코의 말 외에는 증거가 없는데,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어서 깜빡 속아 넘어갔습니다.

문제는 다자키와 아키코가 손을 잡고 사에코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에 의외성이 없다는 겁니다. 사진 한 장, 그리고 아키코와 다자키의 말 외에는 사에코와 꼭 닮았다는 도무라라는 여성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거든요.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리도 없으니, 다자키와 아키코가 꾸민 계략이라는건 뻔합니다.
또 아키코와 사에코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사에코가 다자키에게 나카비야시 목격 증언을 이야기하게 해서 추리를 듣는 흐름도 좀 이상해요. 사에코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차라리 함께 사는 아키코와 사에코가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높지요.

모든게 거짓이라는 대담한 발상은 좋지만, 이렇게 전개에서 보이는 단점 때문에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증거 인멸" 

어느 날 작가인 나에게 미카미 노리코가 찾아 왔다. "반대급부" 라는 단편 속 주인공이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골 현청 만년 과장 구로카와가 간부후보생인 엘리트 다가가 저지른 음주 교통 사고를 자신이 낸걸로 뒤집어 쓰는 내용인데, 실제로 미카미 노리코의 아버지 미카미 조키치도 시골 현청 만년 과장으로 교통사고를 저지른 이력이 있었다. 미카미 조키치는 퇴직 후 일자리를 찾아 도쿄에 상경한 후 육교에서 투신 자살했고, 노리코는 아버지를 죽인건 교통사고를 실제 저지른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순수하게 창작한 작품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 우연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로 미카미 조키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미카미 노리코가 살해당한게 진짜 핵심 사건이라는게 재미있었습니다. 

경찰이 이를 밝혀낸 추리도 합당합니다. 처음에 노리코는 원래 책을 읽지 않는 조키치 유품 속에서 이 책을 남편 유사쿠가 발견한 뒤 장인 어른 이야기 아니나며 건네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키치는 책을 읽지 않는데 어떻게 이 책 속 단편이 자기 이야기란걸 알았을까요?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조사한 결과, 책에는 조키치의 지문이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즉, 이건 노리코의 남편 유사쿠가 꾸민 거짓말이었습니다. 유사쿠는 장인어른이 자살한 사건을 이용하여 노리코를 움직이게 만든 뒤, 그녀를 살해하고 그 죄를 실제 작품 속 또다른 모델인 엘리트 공무원 이케다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겁니다.

'진짜처럼 보였던 이야기가 사실은 특정 인물의 말 외에는 증명할 도리가 없는 거짓말'이었다는건 이 단편집 수록작들 대부분에 해당되는 설정인데, 이 작품에서 특히 적절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쓴 소설같은 과거가 있었으며, 조키치는 그 사실이 폭로되는걸 두려워한 이케다가 살해한게 아닐까 하는 화자인 작가 생각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인상적이고요.

그런데 유사쿠가 별다른 조작없이 살인을 저질러 체포된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앞서 이 정도로 꼼꼼히 조작한 증거를 내세울 정도였다면, 실제 범행도 본인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교묘하게 저질렀어야 했는데 알리바이 하나 없이 체포되자마자 자백한다는건 많이 시시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유사쿠가 저지르는 범행만 더 꼼꼼하게 그려낸, 중편 정도 분량이었다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살인계약" 

재계의 거물인 후나사와 료스케가 살해당했다. 공개된 유언장에는 여류 추리 소설가 에모토 유리노에게 7천만엔을 상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경찰은 7천만엔을 받기 위해 에모토 유리노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다. 밀회를 위해 가명으로 호텔에 드나든 탓에 그녀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데...

무고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완전 범죄를 완성시키는 범죄극입니다. 후나사와 료스케가 살해당한건, 에모토 유리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무효화 시키기 위해 저지른 자작극이라는게 진상이거든요. 회사를 손에 넣기 위해 비열한 수단을 동원했던 증거를 그녀가 몰래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노인성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료스케는 그녀를 살인범으로 몰고 죽습니다. 세상은 살인범이 가진 증거 따위는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고, 보기 좋게 성공합니다. 에모토 유리노가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 지옥에 빠졌다는 결말은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료스케가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건 좀 설득력이 없고, 살인범이 가진 증거라도 회사에 치명적일 수는 있다는 점에서는 헛점이 보입니다. 이 쪽 바닥 걸작인 카트린느 아를레가 쓴 "지푸라기 여자"와 비교한다면, 에모토 유리노가 정말 무고하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완전 상속"

유산한 충격으로 아내가 자살한 미즈키에게 한 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아내가 다카라이라는 남자 때문에 매춘을 하다가 자살했다고 알려 주었다. 미즈키는 경찰 시로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상담했고, 어떤 여성이 다카라이를 중상모략하는 전화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카라이가 정말로 살해당하는데...

중상모략하는 전화를 건 범인은 아내 아키요였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서른 살 이상 차이나는 다카라이와 결혼했었습니다. 유산을 목적으로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암에 걸린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다카라이보다 먼저 죽으면 아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게 되기 때문에, 다카라이가 먼저 죽은 뒤 자신이 죽게끔 수를 쓴 겁니다. 억울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다카라이가 범인이라고 전화를 걸다 보면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다카라이를 살해할걸로 생각한거지요. 다카라이가 살해되면, 그 유산은 아내인 본인이 상속받고, 본인이 죽으면 아들에게 모든 유산이 상속되게 되니까요. 이는 제목 그대로 '완전 상속' 범죄인 셈입니다. 당시 수사 기술로는 전화를 누가 걸었는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으니, 아키요가 전화를 걸었다는걸 밝혀내는건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설령 전화를 걸었다는게 드러나더라도, 직접 범행을 저지른건 아니기도 하고요.

순전히 운에 의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아쉽지만, 계획만큼은 정말 비상했습니다. 약간의 설득력만 더하면 걸작이 될 수 있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심리 살인"

경찰인 나에게 조카딸 미나코가 찾아와 괴상한 편지,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미나코의 남편인 신용금고 이사 하야마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 않나 의심했고, 하야마가 어떤 여성과 아이를 몰래 만난다는걸 알게 되었다. 장난은 더욱 심해져 미나코가 자살 미수까지 저지른 탓에 나는 하야마를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 착란을 일으킨 미나코가 하야마를 살해하는 사건을 저지르는데..

자신이 미친 걸로 위장해서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심신 미약 등으로 무죄 방면된 뒤 유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야마가 아니라 미나코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며, 불륜남이 전화를 거는 등으로 조작에 협력한거지요.

증거를 잡을 수 없는 완전 범죄이기는 한데, 좀 뻔했습니다. 미나코에게 장난을 걸 사람이 없다면, 장난 자체가 조작이라는건 당연하니까요. 미나코에게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도 이미 나온 상황이고요. 경찰이 불륜남을 조사하지 않은건 직무유기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네요. 불륜이라는 동기도 식상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수록작 중 워스트로 꼽겠습니다.

2013/10/30

킹을 찾아라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2.5점

킹을 찾아라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이한 별명의 네 사람이 모여 교환살인을 모의하고 대상과 순번을 정했다. 방법은 트럼프 카드 뽑기. 첫 번째 범인 와타나베 기요시의 범행을 시작으로 아무 관련 없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는 명확한 살인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노리즈키 총경은 아들 린타로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노리즈키 린타로 장편. 이 작가 장편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이후 두 번째네요.

작품의 시작은 네 명의 사람이 모여 교환살인을 모의하는 장면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일종의 도서 추리물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이후 범인 중 한 명인 와타나베 기요시의 범행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만들었고요. 이후는 일반적인 추리물 형식이긴 하지만요.

어쨌거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작보다는 쉽게 읽힙니다. 그러나 추리적인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이유는 우연과 작위적인 전개에 더해, 내용에서 경찰 수사의 헛점이 여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교환살인이 발각되는 이유가 와타나베의 바보 같은 실수였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실수는 노리즈키 총경이나 주변 증인들의 말을 빌리면, '한 번만 만져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위조지폐'로 비롯된 것인데, 와타나베는 맨손으로 지폐를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또 지갑에는 어떻게 넣었을까요? 이후 와타나베가 은행에서 도주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다는건 작위적인 전개의 극치입니다. 여기서 체포되었더라면 진상은 한 번에 밝혀졌을 테니까요. 교환살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카드 발견 역시 나라자키가 카드를 남겨두고 도주한 탓으로, 순전히 운에 불과했습니다.

또 카드 발견 이후,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하여 교환살인에 대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얽혔다고 추리하는데 이건 딱히 대단한 추리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다면 네 명도 당연히 가능하겠죠. 추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워요.

이러한 점들로 인해 페이지가 중간을 넘어갈 때까지는 솔직히 별볼일 없었습니다. 작가의 이름값에서 기대되는 정통 추리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러나 후반부, 경찰이 숨통을 조여오고 위조된 협박장을 받은 이후 범인들이 오히려 자수하여 혐의를 축소하려는 공작을 벌이는 부분부터는 괜찮습니다. 첫 장면부터 독자를 범행모의에 끌어들여 앞부분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지만, 중요한 정보를 교묘하게 감춘 탓에 독자와의 두뇌게임이 제대로 벌어지는 덕분입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와 독자가 공정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은 물론이고요.

덧붙이자면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도 탁월합니다. 교환살인을 테마로 한 작품은 많았지만 여태 이런 발상의 작품은 본 적이 없네요. 남겨진 용의자가 "살인을 모의했지만 나는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니! 교환살인 모의가 중죄일 수는 있으나 범행 실행 이전이라면 그 형량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라는 것을 이용한 건데, 교환살인의 가장 큰 맹점인 '첫 범행으로 이득을 본 뒷사람은 범행을 주저하게 되기 때문에 누가 먼저 범행을 저지르냐가 중요하다'를 한방에 해결해 준다는 측면에서도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작품의 진상과는 살짝 어긋나지만, 누가 살인을 저지른 다음이라면 뒤에 남은 사람은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반은 장난이었다"라고 자수하면서 범행을 불어도 되니 정말로 타당한 발상이죠.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경우에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라는 것인데, 순수하게 원한 관계였다면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되네요. 단지 이 맹점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 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이라면, 이 작품은 이 맹점을 가지고 두뇌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요.)

허나 탁월한 발상과 빅재미의 후반부 역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먼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경찰 수사의 헛점 부분인데, 세키모토 마사히코에 대해 충실히 수사했다면, 그래서 그의 진짜 동기를 알아내었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되었을 겁니다. 이런 대형사건이 자수한 용의자의 자백에만 의지하여 수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나라자키를 살해했다는 내용은 완전히 사족이었습니다. 나름 교묘한 작전으로 혼자서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조시마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한 작가적 의도로 보이긴 했지만, 좀 오버한 듯 싶더군요.

마지막으로 카드에 이름을 맞추었다는 발상과 그에 따른 진상은 꽤 그럴듯하고 재미도 있긴 하나 작위적이라는 점에서는 감점 요소이긴 합니다. 사실 카드가 킹이냐 조커냐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설정과 전개는 진부하고 사건은 우연이 많이 개입되어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이 많지 않으나 마지막 부분의 아이디어는 돋보입니다. 후반부 아이디어를 보강하고, 정통파 추리소설보다는 범죄 스릴러로 전개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16/10/03

러시아 유령 군함 사건 - 시마다 소지 / 김동주 : 별점 2점

러시아 유령 군함 사건 - 4점 시마다 소지 지음, 김동주 옮김, toi8.스즈키 쿠미 그림/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배우 레오나가 받은 기묘한 펜레터에 흥미를 갖게 된 미타라이는 이시오카와 함께 펜레터에 쓰여진 하코네의 호텔을 찾았다. 목적은 본관 1층 매직룸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19년, 하코네에 나타났던 "러시아 유령 군함"에 대한 사진과 함께 관련된 괴담을 들었다. 미타라이는 사건이 미국의 안나 앤더슨, 그리고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와 관련되었다는걸 알아냈고, 이후 몇 가지 조사와 추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기나긴 연휴를 버티기 위해 별 생각 없이 집어들었습니다. 제목만 봤을 때에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국명 시리즈"류의 작품이라 여겼는데 읽어보니 "아나스타샤 황녀"를 소재로 한 작품이더군요.

자신을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던 미국인 안나 앤더슨은 유명하지요. 안나 앤더슨과 그녀의 미국 정착을 도운 남편 마나한의 비참하고 불행한 말년 - 집은 개와 고양이 배설물로 엉망인데다가 죽을 때까지 이런저런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렸다 - 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되었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안나 앤더슨의 주장과 수수께끼는 이미 많은 매체와 콘텐츠를 통해 상세하게 검증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안나 앤더슨의 주장의 진위는 이미 판명난 지 오래라 이미 쉬어버린 떡밥이기도 합니다. 거의 10년 전 DNA 검사를 통해, 그녀가 로마노프 황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안나 앤더슨이 진짜 아나스타샤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아직 안나 앤더슨 주장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던 2001년 작품이니 이건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잘 알려진 역사 속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재미의 핵심이고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 경쟁, 유사작과 차별화되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안나 앤더슨 주장 중 가장 큰 맹점인 "왜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점입니다. 작중 미타라이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이론으로 '두개골 부상 당시 뇌손상을 입어 특정 언어에 대한 회화 능력을 잃고 극심한 정신병이 생겼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뇌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만큼 아이디어만큼은 정말 칭찬해주고 싶어요. 안나 앤더슨이 앓았던 정신병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하지만 미타라이가 소설 속에서 강하게 주장한 "뇌의 모국어 담당 영역이 손상되고 외국어 담당 영역이 무사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라는 것 자체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전례가 없는 뇌손상이 가능했을까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요. 뭐, 소설 속 재미있는 가설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싶네요.

이것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러시아에서 탈출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신선했습니다. 바로 제목인 "러시아 유령 군함"입니다. 소설 속에서 1919년 하코네 호수에 나타난 러시아 군함을 의미하죠. 정체는 당시 존재했던 도르니에의 거대 비행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물에서 뜨고 내릴 수 있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등 나름 조건에 부합합니다. 게다가 날개, 프로펠러만 뺀다면 물 위에 떠 있는 배라는 것도 맞고요. 여러모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탈출 시 제공된 로마노프 황제의 금괴를 이용했다는 설명도 그럴듯 했고요.

그러나 전개상의 헛점과 억지가 상당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아나스타샤가 감금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어떻게 탈출하였는지는 정작 설명되지 않는 게 대표적입니다 구라모치와 독일로 향한 후 베를린에서 갑자기 착란을 일으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 역시 엉터리고요. 히틀러가 환영했다는데 자살 소동을 벌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러한 설정 구멍 전부를 정신 이상을 내세워 해결하려 한 건 여러모로 모양이 빠지고요.

또 아나스타샤와 황제 가족에게 닥친 잔인했던 능욕의 현장 묘사는 불필요했으며, 이후 아나스타샤가 성폭행으로 잉태한 아들이 일본에서 아나스타샤와 사랑에 빠졌던 일본군인 구라모치에게 입양되어 '네무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작중 설정대로라면 네무리가 로마노프 가문의 정통 후예임은 분명한 만큼, 당연히 일본 정부에서 관리했어야 하잖아요? 홀로 남은 러시아 황녀가 일본군인 구라모치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솔직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왜 미타라이 시리즈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미타라이가 다국어에 능통한 데다가 뇌과학 전문가, 그리고 직접 로마노프 왕가 유골 발굴까지 참여했다는 등 설정 비약이 너무 심하고, 이시오카 역시 정말 하는 게 없으니까요. 이럴 바에야 일본인은 일본 현지 후지야 호텔의 러시아 유령 군함 괴담과 사진을 미국 저널리스트 제레미에게 연결시키는 정도의 역할 정도만 수행하고, 제레미가 모든 것을 밝혀내는 전개의 스탠드 얼론물로 그려내는게 더욱 깔끔하고 보기도 좋았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시리즈에 욕심을 낸 탓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요약하자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역사 속 미스터리를 기발한 아이디어를 덧붙여 소설로 만들었다는 점은 인상적이기는 합니다. 설득력이 아주 높다거나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배울 게 많거든요. 그러나 단점이 너마누다ㅗ 명확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역사 속 미스터리를 다룬 "진리는 시간의 딸"이나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실제 사건을 변주한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등 쟁쟁한 미스터리 실화소설 경쟁작에 비하면 완성도도 턱없이 부족하며,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이야기라 지금 읽기에는 시효가 다 되었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긴 하였으나 이러한 이유들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3/09/21

순서의 문제 - 도진기 : 별점 2.5점 (그러나 강추!)

순서의 문제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현직 판사이시기도 한 추리소설가 도진기씨의 단편소설. 한국 작가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변호사 고진 시리즈 장편(이거라던가 이거)은 트릭은 인상적이었지만 전개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워낙에 트릭이 뛰어난 작가라서, 차라리 트릭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단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이 책은 그러한 저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작품별 편차가 커서 평균이 깎였지만, 뛰어난 작품은 한국 추리문학 역사에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한국 추리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순서의 문제"

대리운전을 하는 주인공 진구에게 한 손님이 원주 터미널에서 전화 한 통만 걸어주면 50만 원을 준다는 알바를 제의했다. 의뢰를 수락한 진구는 알바의 이면에 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서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전 법대생이자 철저한 이성주의자인 주인공 김진구가 첫 등장하여 거액이 얽힌 범죄의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협박하는 이야기. 안티히어로 스타일의 주인공 캐릭터가 독특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서 단순히 원주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과 집주소, 주변 탐문에서 시작하는 개인적인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됩니다. 강현의 동기인 이른바 '순서의 문제'가 적절하게 사용된 것도 마음에 들고요. 트릭도 순간이동 트릭을 두 가지나 복합해서 사용하고 있어서 풍성합니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시체를 이동시키는 방법의 설득력이 약간 낮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강현을 협박하는 장면이 작위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단점은 사소할 뿐이며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대모산은 너무 멀다"

진구가 여자친구 혜미가 목격한 지하철의 수상한 남자의 행적을 가지고 순수한 추리를 펼쳐보이는 안락의자 탐정물.

추리적으로 논리정연하고 그럴듯하기는 하나 정말로 그것이 사실로 맞아떨어졌다는 것은 좀 억지스럽더군요. 자기 얼굴이 할퀴었다고 손을 잘라서 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정말이지 몇 명이나 될까요? 그것도 잘 모르는 산으로 버리러 간다... 솔직히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진구의 추리는 그럴듯하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추피추의 꿈"

진구가 혜미와의 마추피추 여행에서 비행기를 놓친 뒤의 이야기를 다룬 일상계.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려우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결국 목적지는 같다는 콜럼버스적인 마인드가 돋보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티켓다방의 죽음"

해미의 외숙부가 출장 중 여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결과는 자살. 그러나 보험금 문제가 있어서 혜미의 부탁과 보험금의 20%를 조건으로 진구는 타살 여부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진구의 목적은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라 외숙부 양문요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걸 경찰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라는 설정부터가 독특합니다. 

진구가 벌이는 여러 가지 작전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흉기 집중 효과를 응용하여 목격자인 다방아가씨 유현아에게 다른 사람 사진을 보여주어 증언을 헛갈리게 하고, 외숙부 양문요가 첫 자살을 시도할 때 1/3 남아있던 청산가리가 시체 발견 시에는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타살설을 주장하는 식인데 경찰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럴 듯 했습니다.

결국 노력이 벽에 부딪힌 뒤 우연히 얻은 단서를 바탕으로 진상에 접근하는 과정과 보온병을 이용한 작전 역시 탁월했고요.

단점이라면 여관주인 여춘길이 5만 원권을 1만 원권으로 바꾸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우연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춘길 방에 침입했을 때 관련된 단서를 발견했다는 식으로 전개했더라면 더 깔끔했을 것 같습니다. 여춘길이 1만 원권으로 바꾼 동기도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지폐에 청산가리를 묻힐 생각을 하느니 돈을 숨긴 장소에 숨어 있다가 미행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 행동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마지막에 첫 등장에 보여준 지폐를 이용하여 극적 반전과 함께 독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결말도 아주 좋은,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신 노란방의 비밀"

살인범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한 소녀 은비의 증언은 그곳이 노란색 방이었다는 것.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의 집은 노란색과는 거리가 멀어 경찰 수사가 난항을 겪는데...

공감각을 가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소리와 시각의 치환을 다룬 소품. 제목은 거창하나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벌이는 느낌이라 딱히 와닿지는 않았어요. 외려 진구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더 재미있었던, 쉬어가는 작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뮤즈의 계시"

진구, 해미는 살인 사건의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해미의 직장 동료 김주희와 그의 동거남 하성남의 집들이 파티 때, 하성남의 아내 선혜영이 살해된 사건 재판이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시체를 옮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구, 해미와 함께 있으면서 살인을 저질렀는지? 라는 두 가지 수수께끼를 만든 트릭이 돋보입니다. 특별한 곳에 위치한 집과 그 집의 구조도를 잘 이용한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이 이용되었는데 아주 괜찮았거든요. 결정적 단서가 되는 USB 음악 재생 아이디어는 정말 기가 막혔고요. 트릭의 정교함과 아이디어는 고전 황금기 걸작에 비교될 만 합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해서 팬에게 서비스하는 모습도 좋았고, 작가의 경험을 잘 살린 법정 장면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과연 살해 현장에서 시체를 옮겼다는 것을 현대 법의학이 알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생기기는 하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최고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환기통"

보석 도둑을 쫓던 경비원이 살해된 사건의 진상을 다룬 소품.

진구와 해미가 처음 만나게 된 당시에 벌어졌던 사건을 그리고 있는데 트릭은 실제 사건 현장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되었더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에 그다지 눈여겨볼 건 없습니다.

오히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과정이라던가(어차피 체포되었으니까), 환기통 안에서 구멍을 내었는데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어색한 부분이 거슬릴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