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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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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기기괴괴공모전 수상작품집 - 백해인 외 : 별점 2점

기기괴괴공모전 수상작품집 - 4점
백해인 외 지음/팩토리나인

"오싹함"이라는 주제의 단편 공모전인 '기기괴괴' 공모전의 입상작 5편을 모은 단편집.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전래 미스터리"처럼 인터넷 게시판 수준은 아니더군요. 공모전 수상작다운 기본적인 완성도는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장점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제와 걸맞지 않게 별로 무섭지 않다는 문제가 도드라지며, 대부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이라 의외성이나 반전의 묘미를 찾아보기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흔한 설정과 전개의 양산형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탈피, 키스" 백해인
원인모를 피부 트러블 탓에 제대로 외출도 할 수 없던 수희는 고운 피부를 되찾았다. 목욕탕에서 만난 여성이 바토리 백작 부인의 축복이라며 욕탕에 뿌린 핏물 덕분이었다. 그러나 핏물이 떨어지고 다시 피부 트러블이 찾아오자, 수희는 자기를 농락한 애인 이진을 죽인 뒤 그 피를 뒤집어 쓴다....
'미'를 쫓다가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댄 뒤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지요. 이 공모전과 이름이 같았던 웹툰 "기기괴괴"의 "성형수"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흔한 설정이라면 나름대로 변주라도 있어야 했을텐데, '아름다운 사람의 피'가 도구로 활용된다는건 안일한 발상이지요. 여기에 "바토리 백작 부인의 축복"이라는 설정을 덧 씌운 것, 이진이 수희를 등쳐먹는 악질 사기꾼이었다는 설정도 뻔하기 그지 없고요. 별로 기괴하지도,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레바퀴 소리가 들리면" 백승빈
궁핍했던 평안도의 어느 마을 노름꾼 아비 밑에서 자란 쌍둥이같이 꼭 닮았던 자매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장날의 인기인이 되었다. 그러자 검은 도포의 남자가 나타나 거액을 주고 언니를 사갔다. 동생은 언니가 해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겨우 그녀를 찾아갔지만, 언니는 검은 도포의 남자가 피를 빨아먹는 사내들을 집으로 끌고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내들의 피를 먹고 사는 불사의 존재였다. 자매는 검은 도포의 남자의 아내의 도움을 얻어 그의 가슴에 말뚝을 박아 쓰러트리는데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언니가 그에게 물리고 말았다....
전형적인 흡혈귀 이야기지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자매가 '이야기 꾼'이라는 특기를 살려 흡혈귀와 맞선다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차별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넷플릭스의 "킹덤"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지치기" 신도윤
뭔가에 물린 뒤 물린 자리에서 사람 머리카락이 나더니 결국 '머리'까지 자라났다. 확인해보니 내 얼굴이었다. 얼굴을 식칼로 잘라내가며 대응했지만 온 몸에 나기 시작했고, 결국 진짜 머리마저 두 갈래가 되어버렸다...
"토미에" 류의 인간 복제(?) 상상력을 일상 이야기와 결합한 작품. 혐오스러운 묘사를 '잘라낸 머리를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어 버렸다'는 식으로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묘사한건 독특했지만, 자라난 머리가 결국 온 몸을 뒤덮는다는 결말이 예상 그대로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본인의 진짜 머리조차 자라난 머리에 침식당한다는건 "블랙잭"에서의 "인면창" 에피소드와 흡사하니까요. 전개와 결말에서 조금 더 의외성을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비어 있는 상자" 이승훈
코인 등 투자 실패로 돈이 필요했던 정훈은 이상한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상자에 들어있던건 살아있는 껍질같은 사람들로, 부자들이 껍질을 사서 입는 시장으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허세에 치중한 인간들은 겉 껍질밖에 없다는 세간의 비유를 그대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비유를 직유처럼 소화하니 색다르네요.
그러나 색다름보다는 진부한 요소가 더 많았습니다. 껍질 상태가 되어서도 허영은 남아서 어떻게든 부자들 눈에 들겠다고 발버둥친다는 반전도 그닥이었고요. 왜 사람들이 껍질만 남는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고 수집하는지? 이들이 사라져도 세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등 설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다소 기발해보이는 아이디어가 전부일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무미의 끝" 정현수
강어진은 오래전 친구 준혁의 회고록(?)을 배달받았다. 스트레스와 가정 문제로 미각을 잃은 준혁이 결국 식인까지 저지른 뒤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어진은 준혁이 자살했다는 장소로 달려갔는데, 그곳에서 완전히 식인 괴물이 된 준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미각을 잃은 준혁이 이런저런 재료를 거쳐 식인에 이르는 과정은 꽤 엽기적으로, 실감나게 묘사되지만, 역시나 신선함, 새로움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설정부터가 너무 뻔한 탓입니다. '맛' 때문에 식인을 감행한다는 작품은 워낙에 많으니까요. "특별 요리"도 그렇고, "금단의 팬더"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최고의 맛'을 위해 식인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미각'을 찾기 위해 식인을 저지른다는 동기 측면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게다가 식인을 저지르다가 아예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비교적 현실적인 분위기로 그럴듯하게 끌고가던 초중반부와 동떨어져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처음에는 어진의 회상처럼 시작하는데, 결말이 어진의 죽음이라면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0/04/25

폐허 - 스콧 스미스 / 남문희 : 별점 3점

폐허 - 6점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비채

멕시코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던 제프 등 4명의 미국인 커플은 그곳에서 만난 독일인 마티아스와 그리스인 청년들과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마티아스가 유적 발굴팀을 따라간 동생 헨리히가 있다는 발굴현장으로 떠날때 즉흥적으로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도착한 유적지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무장한 마야인 원주민들에 의해 포위되고 결국 인적없고 텐트 등만 놓여진 언덕위 공터에 고립되게 되는데...

"심플 플랜"으로 데뷰하여 초대박작가가 된 스콧 스미스가 13년만에 발표한 장편. 이미 북미지역에서는 대박을 이어간 작품이죠. (부럽...) 바로 전날 읽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와 비슷한 두께인 530여페이지의 책인데 이 책은 "잘린 머리..."와는 다르게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가 넘치거든요.
사실 설정은 굉장히 뻔합니다. 특정 장소에 고립된 청춘남녀가 생명을 위협하는 크리쳐에 맞서 싸운다는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작품은 널리고도 널렸죠. 개인적으로는 호수 위 뗏목위에서 기름막같은 아메바때문에 고립되는 대학생들이 등장하는 스티븐 킹의 단편 "뗏목/The Raft"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생명을 위협하는 이형 (異形) 괴물이 산성 식인 식물이라는 것이 일단 독특하고, 여행자들이 유적에 고립되는 방법과 이유도 비록 원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기는 하지만 분위기와 상황 묘사만으로도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충분히 차별화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스티븐 킹의 작품은 짤막한 단편이기에 위험상황과 괴물의 공격이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진행되는 것에 반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상황묘사, 식인 덩굴의 업그레이드되는 공격방식 - 1. 살며시 접근 2.직접 공격 3.말과 향기로 심리공격 4.주인공들을 조정하여 공격 등 - 을 단계별로 자세하게 펼쳐놓아서 읽어나갈수록 업그레이드 되는 공포가 잘 살아있는 것도 이 작품만의 매력이겠죠.
아울러 긴 분량답게 캐릭터도 확실하게 형성해 놓은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두뇌파와 행동파가 적절히 나뉘고 여자들도 나름의 생각들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이런류의 공포물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순진하고 멍청한 금발미녀와 덩치만 좋은 근육바보 미국 대학생 캐릭터는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말도 통하지 않는 그리스 청년 파블로를 주요 피해자로 내세운게 대박이에요. 말이 통하지 않는 극한의 상황 때문에 허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절단되는 처절한 상황이 더 설득력있게 와 닿거든요.
그리고 역시나 뻔하긴 하지만 결말도 마음에 들었어요. 주인공들의 패배야 예상했지만 어떠한 방식인지가 궁금했는데 기대치만큼은 뽑아내주니까요. 젊은이들의 실수가 반복된다는 부분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읽는 중간에는 워낙 몰입해서 단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다 읽고 리뷰를 적으려 하니 몇가지 떠오르긴 합니다. 일단 식인 덩굴의 지능에 대한 묘사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싶네요. 두뇌가 있고 약간의 소리를 흉내낸다는 것 정도가 좋았을텐데 식물이 "말"을 한다는 설정부터는 솔직히 오버로 보였거든요.
그리고 긴 고립의 기간동안 생명을 "유지"하려고만 하지 살아남기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한 부분이죠. 예를 들어 "소금"으로 원주민들이 식인 덩굴의 번식을 막는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소금뿌려진 흙을 가져오는 등의 방식으로 식인 덩굴의 위협을 뿌리치려는 시도는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마찬가지로 최후의 수단이긴 하지만 원주민들 사이로 탈주를 하기 위해 방패와 같은 방어막은 갖추려는 시도도 해봄직 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양장본으로 출간한 출판사의 만행(?) 탓에 출퇴근할때 들고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운동이었어요...

그래도 단점이야 어떻게 되든 확실한건 처음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만드는, 그야말로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한 웰메이드 호러 스릴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름날 서늘한 기분을 느끼기에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잘 모르는 곳에 함부로 여행을 떠나지 맙시다!"

덧붙이자면,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루인즈"라는 영화도 있는 모양인데 원작 그대로만 찍어도 본전치기는 할 것 같은데 어떨지 궁금하네요. 평은 별로 좋지는 않은 듯 싶고 예고편을 살짝 봤더니 식인덩굴 움직임이 강조되어 뭔가 포인트를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만...

2004/11/07

식인 달팽이 - 정태원 엮음 : 별점 3점

추리소설 매니아이자 번역가로 잘 알려진 정태원 선생이 직접 엮은, 도서출판 동숭동에서 발간한 정체불명의 환상문학 단편 앤솔러지. 어느 앤솔로지를 번역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꽤 괜찮은 작품들과 작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입은 꽤 오래전에 했는데 이제야 독파하게 되었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프레데릭 브라운 -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2. 오거스트 덜레스 - 또 하나의 아이
  3. 로버트 블록 - 변심
  4. 레슬리 폴스 하트레이 - 주말의 손님
  5. 레이 브레드버리 - 장의사
  6. 헨리 슬레사 - 신의 은총
  7. 존 콜리어 - 특별 배달
  8.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 식인 달팽이
  9. 잭 요네 - 암코양이 미나
  10. 재럴드 커슈 - 바다로 가는 슬픈 길
  11. 브랫리 스트릭랜드 - 묘비명
  12. 찰즈 보몬트 - 자장가
  13. 리차드 마티슨 - 나의 꿈꾸는 여자

제법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만족도가 상당했어요.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여, 개인적인 베스트 5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변심", "신의 은총", "바다로 가는 슬픈 길", "나의 꿈꾸는 여자"를 꼽고 싶네요. "식인 달팽이"는 스릴과 서스펜스 면에서는 괜찮긴 했지만 좀 뻔한 내용이었고 "장의사"는 공포와 기발함에서는 다른 작품에 뒤지지 않지만 결말이 약간 시시한 것 같아 아쉽게 뺐습니다. 작품별 간단 리뷰는 아래를 참고하시길.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거장 프레데릭 브라운 작품입니다. 한 기묘한 피리 ("오보아"라고 하더군요)를 둘러싼 한 음악인의 집요함에 대한 묘사와 특히 "하메룬의 사나이"까지 인용한 반전이 무척 괜찮은 소품입니다.

<또 한명의 아이>
한 그림속에서 환상을 본 노인이 결국 그림속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인데 TV시리즈 같은 곳에서 보아왔던 소재라 그런지 신선함이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동화적인 분위기는 괜찮았어요.

<변심>
이런저런 앤솔로지에 가끔 소개되는 로버트 블록의 작품으로 한 청년과 시계수리공 노인, 그리고 노인의 병약한 딸을 둘러싼 이야기인데 마지막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공포소설로도 읽힐 수 있지만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에요. 상당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주말의 손님>
유명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극중 인물에게 위협받는다는 내용으로 두번째 작품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보아왔던 약간은 흔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그닥 참신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장의사>
역시나 거장인 레이 브레드버리의 단편입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장의사와 그에게 놀아난 시체(?)들의 복수극으로 기괴하고 섬뜩하긴 한데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뭔가 조금 아쉬웠달까요. 클라이브 바커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바커 스타일의 적나라한 고어 호러가 더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신의 은총>
꽤 유명한 작가 헨리 슬레사의 단편으로 한 신부와 경마 도박꾼의 약간 기묘한 관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승부에서 이긴다!"라는 이유로 성당에 계속 헌금하는 도박꾼과, 그것을 말리면서도 결국 세속적인 감정에 흔들리는 신부의 아이러니컬 하면서도 유머스러운 묘사가 상당히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특별배달>
영화 "마네킹"의 원안쯤 되는 작픔입니다. 마네킹에 연정을 느끼는 한 청년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돋보이지만 그닥 재미도 없고 튀는 부분도 없는 작품이네요.

<식인 달팽이>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여사의 작품이긴 하지만 스티븐 킹 작품이라고 해도 통할만큼 여사 작품치고는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입니다. 식인 달팽이와 한 과학자의 사투를 그리고 있는데 "괴물"과 미약한 투쟁을 벌이는 인간에 대한 묘사는 스티븐 킹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바로 그것이더군요. 거장의 작품답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재미도 상당하고요.

<암코양이 미나>
이 작품집 중에서 가장 처지는, 워스트 작품입니다. 뻔한 소재에 뻔한 결말.... 반전도 그닥 없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로 보여집니다.

<바다로 가는 슬픈 길>
현대판 "죄와 벌".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수금원의 독촉에 시달리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항상 꿈꿔왔던 바다로의 도피를 시도한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다루는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문학적 수준도 상당한 편이고요. 왠지 다른 순문학 단편선에 실려야 할 작품이 잘못 온 것처럼 약간 쟝르가 맞지 않는 느낌도 주지만 완성도는 굉장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묘비명>
남북전쟁 후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한 청년이 느끼는 한 묘비에 대한 의문과 공포를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마무리 한 소품으로 그다지 언급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자장가>
한 어머니의 광기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소품입니다. 역시 다른 곳에서 많이 인용된 소재라 그런지 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나의 꿈꾸는 여자>
필립 K 딕과 쌍벽을 이룬다는 (하지만 들어본 적은 없는) 리차드 마티슨의 SF적인 단편입니다. 예지능력을 가진 여자를 이용한 협박자가 협박에 실패한 분노로 여자를 죽이는데 여자가 죽어가며 그 협박자가 죽게되는 상황을 예언한다는 내용으로 짧지만 인상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2023/09/17

전래 미스터리 - 홍정기 : 별점 1점

전래 미스터리 - 2점
홍정기 지음/몽실북스

DC인사이드의 추리소설 갤러리에서 괜찮은 한국 추리 소설이라고 누군가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된 작품.

결론부터 말하면, 대실망이었습니다. 완성도가 지나치게 낮은 탓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수준 이하에요. 전래 동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변태 스토커', '알리바이', '스위치' 라는 말이 나온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고증은 둘째치고서라도 문체, 묘사라도 고전처럼 가져갔어야 했습니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묘사가 쓸데없이 많은 것도 불쾌했으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어요. 
고전을 모티브로 잔혹함을 버무렸다는 점에서 한 때 유행했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의 괴담물인 <<삼개주막 기담회>>와 비교해도 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고요. <<삼개주막 기담회>>는 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에 비하면 노벨문학상 감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아마츄어가 어딘가 커뮤니티에 올렸던 반 장난스러운 글이 출판된 걸로 보여지는데, 결과물 수준에 대해서는 출판 담당자의 책임도 커 보입니다. 최소한 어느정도 완성된 글로는 보이게끔 방향을 알려줬어야 했어요. 뭐 지금 말해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만요. 앞으로 이 작가, 이 출판사 책을 두 번 다시 읽어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쥐 살인사건>>
콩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팥쥐가 원님과 결혼하기 위해 발목을 스스로 자른다던가, 원님의 칼에 언년이 머리가 토막난다단가, 마지막에 팥쥐 목이 배달(?)되어 오는 등 쓸데없이 잔인한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급작스럽게 언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트릭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팥쥐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방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트릭, 또 하나는 쥐가 언년이의 손톱을 먹은 뒤 언년이로 변신했다는 트릭이지요. 그러나 도깨비 감투 트릭은 창문이 작아서 어차피 성립할 수 없었고, 쥐가 언년이를 대신한 알리바이 트릭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쥐를 변신시킨게 아니라, 마침 쥐가 변신한걸 보고 즉흥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말이 안됩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니까요.
단서 제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콩쥐가 죽은 어머니로부터 기이한 보물을 물려받았고, 그 덕분에 계모가 시킨 말도 안되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정도만 앞에서 설명될 뿐입니다. 이런걸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는건 말도 안됩니다.

고전 설화 속 설정을 트릭으로 써먹는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물은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나무꾼의 대위기>>
사슴과 사냥꾼이 짜고 선녀 날개옷을 훔치도록 유도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극적인 반전도 생기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관음증 환자일 수 있다는 설정은 워낙에 흔해서 새로울게 없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신령이 갑자기 나오고, 탐정역으로 토끼가 나오는 등의 뜬금없는 전개는 황당했고요. 탐정역인 토끼는 이 모든게 나무꾼을 범인으로 몰기 위한 산신령까지 포함된 음모의 결과라는데, 그 때문에 산신령이 범인 선녀, 나무꾼, 사슴을 참살하는 결말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옥황상제 앞에서의 공식 재판도 아니었으니, 그냥 나무꾼을 죽이고 거짓말로 고해 바치면 되는게 아니었을까요? 이런 연극을 꾸밀 이유가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굶주린 사냥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팠다면 애초에 사슴을 죽여서 잡아먹었어야 하잖아요?

추리적으로도 엉망입니다. 범인 선녀가 물 속에서 죽은 선녀 다리를 끌고 움직이는 척 해서 옮긴 뒤, 온천의 뜨거운 열로 시체가 사후 강직이 풀리는걸 이용하여 스스로 주저 앉는것처럼 꾸몄다는 트릭인데, 만화에서도 써먹기 힘들겁니다. 뜨거운 물 속에 숨느라 갈대를 입에 물었다는 디테일도 유치하기 짝이 없고요. 애초에 사슴이 말하고, 선녀가 날아다니는 세계관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트릭을 쓴다는게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해와 달>>
떡장수 아주머니가 식인범에게 사로잡혀 산채로 먹히는 장면은 잘 그려냈습니다. 식인범의 설정도 꽤 탄탄하고 무서웠고요. 마츠모토 세이초의 <<전골을 먹는 여자>>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그만큼 설득력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식인범이 어미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쓰고  찾아와 딸을 속이려 하는 장면, 그 뒤 정체가 탄로난 식인범이 딸과 사투를 벌이는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크리처물인 <<사냥감>>이 떠오르는 박진감넘치는 묘사와 전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해와 달이 쌍둥이고, 해는 타고난 살인마였다는 진상은 영 아니었습니다. 시간대별로 풀어가는 전개도 불필요했고요. 착한 남매가 기지를 발휘하여 식인범을 없애는 식으로 - 썩은 동아줄을 활용한다면 더 좋고 -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연쇄 도살마>>
보름이 될 때마다 집의 가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큰 아들 일남은 막내 미호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먹었다고 하는데...

여우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추리적으로 풀어낸 이야기. 
알고보니 일남이 진범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문제 투성이입니다. 우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나중에 부모 형제까지 죽였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 번에 다 죽이면 되잖아요? 뭐하러 땅을 파고 몸을 숨겨가면서까지 범행을 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미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도 없어요.
미호의 짓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호의 신발을 신고 발자욱을 남긴건 괜찮았지만, 미호 시체를 소의 항문을 통해 쑤셔 넣어 은폐했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추리물 흉내를 조금 내기는 했지만 설득력 떨어지는 전개로 일관하는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스위치>>
나는 백정의 아들로 파란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눈을 누군가 나뭇조각을 댓가로 가져갔다. 나는 나뭇조각이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 능력이 마을 주민들을 기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든 연쇄 살인극의 진상이었다.

스위치라는 표현을 천연덕스럽게 쓴다는 것부터 황당했던 이야기. '혹부리 영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신체 전환(?) 설정은 그래도 볼 만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기 전에 뇌를 바꿨는데, 갓난 아이가 되어서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말로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한 10살 정도 되는 아이하고 뇌를 바꿨으면 될 것을 왜 갓난아이랑 바꿨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걸 모를리 없을 정도로 능력을 계속 써 왔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초반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연쇄 살인극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나간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9/11/29

회색 인간 - 김동식 : 별점 2점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꾸준히 업로드한 글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과거 하이텔 시기에나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의 재림이네요. 올린 글의 분량만 따지만 거의 "태백산맥"에 육박한다니 그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이텔 시기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등과는 명확히 다른 점은, 굉장히 짧은 꽁트, 아니 쇼트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무려 스물 네 편이나 수록된 단편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기묘한 설정, 그리고 그 기묘한 설정 때문에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탐욕이 생겨나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는 결말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기묘한 설정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지만, 그냥 기묘하다는 상황에만 매몰되어버린 이야기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건물이 급작스럽게 식인 괴물로 변하여 밖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식인 빌딩", 인간이 녹았다가 다시 돌아오면 완벽한 컨디션이 된다는 기적의 물 정화수가 대유행한다는 "흐르는 물이 되어"가 대표적이에요.
또 기묘한 설정에 기댈 뿐,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반전도 뻔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우팅"에서 인류 모두가 인조인간이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차라리 연구소 경비병들만 진짜 인간이었다는 반전이라도 넣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나마 조금 신선한 반전들도 대체로 기존 상식이나 그때까지의 현실을 반대로 뒤집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식상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에서 나이를 먹지 않게 만드는 영원의 구가 사실은 저주였다던가,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무적의 재생력을 안겨다주는 선물로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피노키오의 꿈"에서 피노키오의 소원이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건강한 소나무가 되는 것이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반전이라도 있는 이야기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특별한 반전 없이 인간미, 감동 쪽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 이야기들은 더 엉망이에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땅을 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먹을게 부족해서 문화는 사치였지만, 어느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화가 생겨난다는 결말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인간도 아니라는 주제인데, 솔직히 억지스럽죠. 이런 상황이라면 집단이 생기고, 자체적인 법률이 생기는게 타당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이 그냥 살기 힘든 상황만 길게 묘사되는 것도 지루하고요.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간미는 "도박묵시록 카이지 외전 반장의 일일 외출록" 에서 훨씬 더 재미있게 잘 그려졌다 생각됩니다.
손가락 여섯개인 신인류를 낳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계획이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밝혀진 후, 손가락 여섯개인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생각이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꿈같은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 없고요. 괴물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접했었던 설정도 많습니다. 어설픈 풍자, 별 것 아닌 내용을 길게 늘려쓴 이야기도 눈에 거슬렸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답게 반짝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이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노인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자 노인이 자신이 부자라면서 통조림을 5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 신에게 소원을 빌 당사자로 선택되는 개인에게 닥치는 집단 광기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신의 소원", 노인을 가상 세계에 모신다는 발상이 그럴싸 했던 "디지털 고려장" 등이 그러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의 전개가 뻔하고 결말의 반전이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거나 아예 없다는 단점은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

다행히 설정도 좋고, 전개도 괜찮으며 결말과 반전도 완성도 높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재활용" 입니다. 돈만을 위해 살아온 두석구가 딸이 교통사고로 죽자, 13일 내 시체 세 구를 섞어 넣으면 한 명이 부활한다는 주술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생존은 랜덤이라 딸이 살아나지 못하자 두석구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13일 동안 이 주술을 계속 시도하고요.
그런데 영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영혼들은 두석구의 딸 부터 영혼을 찢어발긴다는 마지막 반전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두석구는 딸이 살아날 때 까지 주술을 시도할테니 영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딸부터 처치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이를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마지막 대사도 좋았고요.
쇼트쇼트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합니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도 평균 이상입니다. 정대리가 가진 보물인 쇠구슬은 손을 대면 비가 오게 만듭니다. 김대리는 이를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을 대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흐려지기만 할 뿐이고요. 그런데 아기가 손을 대자 지진이 발생하여 결국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원리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날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지요. 기묘한 설정도 좋지만 제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모녀, 한 사내와 협곡에 갇힌 김남우가 극심한 굶주림 끝에 식량으로 희생될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협곡에서의 식인"도 기묘한 맛 측면에서는 꽤 괜찮습니다. 김남우의 편인줄 알았던 사내가 놀랍게도 급작스럽게 김남우를 살해하는데, 알고보니 그들 4명은 모두 가족이었던 반전 덕분입니다. 김남우가 가족을 경계하고 오히려 위협할까 두려워 남인척 김남우 편에 섰다가 배신을 했던 거지요. 살아난 가족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는다는 마지막 한 방도 묵직하고요.
아쉬운건 에이즈가 지금은 그렇게 위험한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좀 더 '천벌'에 가까운 병에 걸리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살인단백질 이야기"에 나왔던 프리온을 활용한 병이 어땠을까 싶네요. 식인으로 전염되고, 치사율 100%이니까요.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도 반전이 좋습니다. 사이비 종교 교주 두석구가 지옥에서 악마들의 부탁으로 죄인들에게 환생을 약속하는 환생교를 만들어 포교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 통제를 잘 하려는 악마들의 계획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나 1년 뒤, 절대자가 강림하여 두석구를 찢어 발기고 죄인들의 희망을 끝냅니다. 죄인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었다가 큰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말인데 아주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하여튼, 전체 평균해서 별점을 주자면 2점입니다. 모든 수록작 중 세네 편 정도가 중간 수준, 세 편 정도가 중간 이상, 한 편이 수작이고 나머지가 모두 기대 이하이니 이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반 타작도 하지 못한 셈이니 전반적으로 좋은 단편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 창작하여 발표한 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등단도 한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음에는 보다 완성도있게 다듬어 발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2014/02/14

BM 넥타 - 후지사와 유키 : 별점 2.5점

비엠 BM 넥타 12 - 6점
후지사와 유키 지음/삼양출판사(만화)

발표된 지 10여 년이 지난 크리쳐물이자 재난물인 만화입니다. 거의 모든 쓰레기를 섭취, 소화하며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궁극의 식량 대용 생명체 "BM (Bio Meat)"이 핵심 소재로, 당연히 사람도 먹을 뿐 아니라 그 번식 능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라 결국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총 3부 구성으로 각 부마다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초등학생, 중학생, 성인으로 구분되며, 1부는 주인공들이 사는 도시, 2부는 주인공들이 우연히 방문한 대형 주상복합 센터, 3부는 규슈를 제외하고 BM에게 점령당한 일본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BM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밖으로 나오게 되어 식인과 증식을 거듭하며 무대가 된 곳을 멸망시킨다는 뻔한 내용으로 일관하며, 주인공 파티도 행동파 리더 칸, 냉정한 두뇌파 신고, 괴력의 반바, 홍일점 카노미야 등 뻔한 스테레오 타입인데다가, 전개도 우연과 작위성이 지나치고 마지막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리한 해피엔딩은 그야말로 서둘러 끝냈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등 문제점은 많습니다. 그림도 뛰어나다 할 수 없는, 10년 전에나 먹혔을 낡은 작화고요.

그러나 이상화 선수 1,000미터 경기 시작이 늦어져 겸사겸사 보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읽고 자게 될 정도로 흡입력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아 졸려...). 이유는 바로 주 소재인 "BM"의 압도적 설득력 덕분입니다. "식인"과 "압도적인 증식력"이라는 키워드는 "좀비물"과 같지만, "좀비"와 다른 점은 BM은 '환경난과 식량난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창조한 것'이라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이유가 있거든요.

BM을 관리하는 방식의 설정도 꽤 디테일하게 잘 짜여져 있는 편이며, BM과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 일행이 BM의 약점 — "햇빛 아래에서는 움직일 수 없음", "불에 약함", "소리에 반응하여 움직임(특히 특정 소리에는 강하게 반응)" — 을 이용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꽤나 재미나게 그려지는 것도 디테일한 설정 덕분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물건이라서 한번 유출되면 해당 지역을 초토화시켜야 한다는 상부의 방침도 논리적으로 겹쳐지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사투가 더욱 인상적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BM에게서 도망쳐야 하는데, 정부가 지역을 폭탄으로 날려버릴 예정이라는 시간 제한마저 생겨버리니까요.

그 외에도 일반적 상식을 깨고 1부에서부터 초등학교를 무대로 BM의 식인 파티가 벌어지는 것을 묘사하는 식의 심리적 터부를 건드리는 잔인한 묘사, BM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사악한 인간 군상도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정말이지 이렇게 초등학생이 죽어나가는 만화는 처음 본 것 같네요.

결론내리자면 한번쯤 볼 만한 가치는 있달까요? 모든 분들께 추천해드릴 작품은 아니지만 "좀비물"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찾아 읽으셔도 좋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2/16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1.5점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및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물 모두가 감염될 수 있는, 치사율이 50%가 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여 인류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치료제를 만들었지만 인간에게만 유효해서 사람들은 채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양 섭취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유전자 공학의 1인자 후지야마 히로미는 식용 클론 인간을 대량 생산하여 고기를 보급한다는 계획을 내 놓고 '플라나리아 센터'라는 식육 가공 시설을 만들었다. 클론의 개인 제작은 엄격하게 금지하며, 클론 고기는 먹는 본인의 클론이어야 하고, 클론은 성장 촉진제로 빠르게 성장시키기에 개와 비슷한 지성밖에 갖추지 못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비난을 최소화했다. 사업은 성공했고, 일본 경제도 성장했지만 후생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던 후지야마는 매춘 스캔들이 터져 사임했다. 이는 클론 인간 제작을 반대했던 정적 노다 조타로 살인 사건 조사 때 드러났다.
그리고 몇 년 후, 후지야마에게 배달하기 위해 가공했던 클론 배달물에 '머리'가 함께 배달되는 사고가 터졌다. 유력한 용의자는 배달물을 포장했던 시바타 가즈시였다. 동료 유시마 미키오가 범인은 후지야마 본인이라는 그럴듯한 추리를 내 놓았지만 증거를 잡지는 못해서 둘 다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날 밤, 잃어버린 시계를 찾으려고 다시 플라나리아 센터로 항했던 시바타는 괴한에게 습격당했고, 다음날 센터가 테러 때문에 전소되는 대형 사고가 벌어지는데....

"명탐정의 제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시바타 도모유키의 데뷰작. 제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이었습니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미치오 슈스케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천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식인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식인은 단순히 미식이나 생존 목적은 아닙니다. 일종의 수단으로 식용 '클론'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었던 이유, 식용 클론을 만드는 플라나리아 센터에 대한 상세한 설정 등은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추리적으로도 풍성합니다. 후지야마가 잘린 머리를 배달받은 사건에서 시작해서 시바타가 밤에 센터에서 만났던 괴한 사건, 플라나리아 센터 폭파 테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며, "명탐정의 제물"처럼 여러 등장인물들이 서로 자신의 추리를 선보이다가 의외의 진상으로 이어지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식인, 그리고 클론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식인물과 충분히 차별화됩니다.
전개도 괜찮아요. 단서와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해줄 뿐 아니라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미노리로 화자를 바꾸어가며 전개하는데, 결국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이노리가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활용한 반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추리와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이 허황되고 비현실적인데다가, 사건들 대부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우연과 운이 많이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낮습니다.
핵심 트릭인 '클론으로 사람 바꿔치기'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후지야마는 노다 조타로를 살해할 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기 클론을 활용했습니다. 클론은 성장 촉진제를 사용하여 두뇌 개발이 더디다고 했는데, 어떻게 후지야마인 척 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게다가 알리바이를 만들거라면 대중들 앞의 노출된 장소에서 뭔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매춘부를 만나는 것 보다는 말이죠.
같은 이유로 시바타에 의해 가축으로 키워진, 실제 나이로는 몇 살 되지 않을 차보의 남다른 지성, 그리고 차보가 감금 장소를 마음대로 빠져나가며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클론이 후지야마를 살해한 뒤 그 자리를 꿰찼고, 차보가 후지야마의 클론과 손을 잡고 클론 해방과 시바타에 대한 복수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진상도 허황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보다는 성형 수술이나 쌍둥이 쪽이 더 말이 되는 트릭이었을거에요.
또 공들여 만든 클론 관련 설정이 이렇게 작가 편의에 따라 변경되는 탓에, 이는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억지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상식적으로도 사람을 위한 치료제를 만들었다면, 동물 대상으로 못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고액을 들여 인간 클론을 고기로 만드는 공장을 만드는 것 보다도 동물용 치료제를 만드는게 싸게 먹힐테고요. 설령 동물용 치료제가 만들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식물성 단백질은 많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건 아닙니다. 콩 등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고기를 만드는 공장도 최근 많이 늘어나고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뭔가 수수께끼가 많고 복잡해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별건 없습니다. 노다 조타로 사건은 클론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 후지야마 클론 머리 오배송 사고와 플라나리아 센터에 잡입한 괴한 사건, 테러 사건은 모두 시바타를 함정에 빠트리고 센터를 폭파시키려고 후지야마 클론이 실행범으로 일으켰다는게 전부거든요. 즉, 어떻게보면 시바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증거만 없을 뿐이었지요. 
이 와중에 시바타가 '후지야마는 약시다! '라는게 증거라고 믿었던건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약시인 것과, 범행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무엇보다도 약시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 괴한의 센터 침입 사건의 목격자는 시바타 본인입니다. 이걸 경찰이 어떻게 믿고 수사를 하겠습니까..... 설령 그 범행을 약시인 사람만 저지를 수 있었다 한 들, 그건 단순히 정황 증거에 불과하고요.
또 마지막 테러 사건까지의 모든 사건이 차보가 계획한 음모의 한 셋트인데, 여러모로 헛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플라나리아 센터에 잠입한 괴한을 시바타가 제압했다면? 시바타가 센터 테러 사건 와중에 공장 내부에 남지 않았다면? 유시마 미키오가 죽지 않았다면? 뭐 하나라도 변수가 생겼다면 성립할 수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권해드릴 수준의 작품은 전혀 아닙니다.

2020/05/02

악몽과 몽상 2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악몽과 몽상 2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엘릭시르

어쩌다보니 1을 읽지않고 2부터 읽게 된 스티븐 킹중단편집입니다. 1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보너스격인 논픽션 "고개를 숙여"와 시 "브루클린의 팔월", 우화인 "거지와 다이아몬드"를 제외하면 수록작은 9편입니다.

그간 순문학적인 부분으로 흘러가던 중, 단편집들과 비교해볼 때, 좀 더 화끈한 작품이 많다는게 특징이에요. 과거의 스티븐 킹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장과 과거에 대한 오마쥬 형식의 작품들도 신선했고요. 전통적인 크리쳐 호러인 "장마", 기발한 호러 액션 모험물인 "10" 등이 과거 킹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면, "다섯 번째 4분의 1"은 화끈한 마쵸 하드보일드 액션, "크라우치앤드"는 러브크래프트크툴루 신화 오마쥬, "의사가 해결한 사건"은 셜록 홈스 파스티쉬로 모두 나름 매력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클라이드 엄니의 마지막 사건"도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변주를 가한 독특함이 좋았고요. "10"을 제외하면 대체로 클리셰로 가득한 친숙한 이야기들이지만, 워낙에 필력이 원숙하고 묘사가 대단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걸 특별하게 만드는, 이런게 바로 장인의 솜씨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충고가 전부인 "내 귀염둥이 조랑말", 일종의 타임 슬립물인 "죄송합니다, 맞는 번호입니다", 기묘한 가족 드라마 SF인 "메이플 스트리트의 그 집"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화끈함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부록격인 논픽션과 시, 우화는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하고요.

그래도 12편 중 6편, 제대로 된 수록작만 치면 9편 중 6편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니 전반적으로 괜찮은 작품집에는 분명합니다.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이 정도면 본전치기는 하는 셈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마"

시골 마을 윌로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젊은 부부에게 마을 사람들이 그날 하루만 다른 곳에서 보낼걸 요구했다. 이유는 그날이 칠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두꺼비 장마'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과 앨리스 부부는 객기를 부려 윌로에서 머무는데, 오래지않아 비처럼 내리는 무시무시한 식인 두꺼비 떼와 조우하게 된다.

그야말로 스티븐 킹!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크리쳐 호러물입니다.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마을 사람들, 비가 곧 오기 직전인 축축한 공기에 대한 묘사로 가득찬 도입부에서, 식인 두꺼비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부부를 습격하는 중, 후반부까지의 전개 모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정말로 두꺼비가 장마처럼 쏟아진다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두꺼비들이 모두 다음날 햇볕과 함께 녹아서 사라지는 이유가 젊은 부부를 장마 직전인 7년에 한 번씩 인신공양한 덕분일 거라는 결말도 꽤 참신했어요. 보통 이런 크리쳐 호러물의 경우,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책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게 대부분인데 최소한의 설명 정도는 덧붙인 셈이니까요.

달릴 때 확실히 달려주는 킹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읽는 재미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의 권유대로 부부가 장마날 다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한데, 소설의 결말처럼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졌겠죠?

"내 귀염둥이 조랑말"

할아버지가 "어른이 되면, 이상하게 시간이 빨리 갈 때가 있다"는 충고를 손자에게 해 주는게 전부입니다. 시골 마을에 대한 묘사도 좋고, 시간이 빨리가는 상황 설명도 흥미롭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데다가, 엄마는 알콜 중독에, 누나는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뭉쳐있다는 등의 불필요한 묘사가 많아서 읽기도 지루했고요.
아니나 다를까, 책 뒤 해설을 보니 손자 클라이브 배닝이 살인 청부업자가 된 이야기를 그린 오래전 '리처드 바크만' 필명으로 착수했던 동명 장편에서 뽑아낸 회상 장면이라는군요.

순문학적인 소양이 엿보이기는 하나,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죄송합니다, 맞는 번호입니다"

작가 빌 위더먼이 아내, 세 명의 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끔찍하고 처절한 목소리로 "제발 데려가..."는 말을 남기고 끊어진 전화를 받은 아내 케이티는, 그 목소리가 자기 가족이 확실하다고 느끼고 기숙사의 딸, 어머니 등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동생이 연락이 되지 않자 남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가는데....

시나리오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덕분에 시각적인 상상과 여러가지 배경 음악들을 머릿 속에 떠올리기 좋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게 다름아닌 '미래의 케이티' 였다는 진상도 그럴듯했고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족임을 확신했다는데 그게 바로 자기였다니! 이런거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싶네요. 시공을 초월하여 메시지를 나누는 작품은 많지만, 연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었다는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그러나 "제발 데려가.."는 그날 바로 심장발작을 일으킨 빌 위더먼을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뜻이었다는건 좀 허무합니다.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걸 때에 보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남기는게 당연하잖아요? 빌 위더먼이 처제의 집을 찾아가며 느끼는 서스펜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작가에게서 기대해 봄 직한 공포나 스릴, 서스펜스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고요.

소품에 가까운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대로 영상화되었다는데, 영상물로 보는게 훨 낫지 싶네요.

"10"

출근 후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온 브랜든 피어슨은 '박쥐 인간'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비명을 지르려던 그를 진정시킨건 같은 회사 프로그래머 듀크였다. 듀크는 '박쥐 인간'은 흡연자들에게만 보인다며 브랜든을 '박쥐 인간'을 본 사람들 모임에 초대했다. 그러나 모임은 리더 델레이의 배신으로 박쥐 인간의 습격을 받게 되고, 브랜든은 모임에서 처음 만난 캐머런, 모이라와 함께 탈출하는데....

아,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다니! 출근 후 10시, 지정된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끼리 일종의 유대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저 역시 과거 흡연자라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의 흡연자들만 그들을 지배하는 사악한 '박쥐 인간'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죠. 금연 열풍, 담배 혐오가 널리 퍼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역습이자 발버둥같은 작품이에요. 물론 흡연자들에게는 경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테고요. 스티븐 킹이 흡연자일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좋았던 아이디어에 비하면 전개는 그냥 그렇습니다. 일단 박쥐 인간과의 혈투가 시시합니다. 끔찍하게 생겼을 뿐, 별다른 능력이 있지도 않고 물리적 공격에 바로 격퇴되기 때문입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오마하로 탈출한 뒤, 브랜든 일행이 다시 '10시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박쥐 처단에 나선다는 한 페이지짜리 후일담으로 끝낼 이야기도 아니었고요. 서둘러 대충 끝낸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좀 아쉬웠어요. 아울러 '10시의 사람들'은 그냥 흡연자가 아니라 '담배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 디테일도 사족이었다 생각되네요.

하지만 그 어떤 단점에도 워낙에 아이디어가 압도적이라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이런 생각과 발상은 정말이지 본받고 싶네요.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제 주변 흡연자들에게 권해주고 싶습니다.

"크라우치 엔드"

남편이 실종되었다며 미국인 로니 프리먼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경찰 베터와 로버트 파넘 순경에게 부부가 방문했던 런던 근교 '크라우치엔드'에서 겪었던 기묘한 경험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크라우치엔드가 크툴루를 위한 '크라우치엔드 토운'으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부부가 크툴루를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러브크래프트를 위한 오마쥬로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의 팬이라면 제법 즐길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특별한 드라마는 없습니다. 부부가 겪는 공포스러운 상황만 이어질 뿐 크라우치엔드가 왜 크라우치엔드 토운으로 이어지는지, 어떻게 그 거리로 빠져들어 희생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물론 이런게 러브크래프트 작품이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한 마디로 요악하자면, "지나치게 잘 쓴 팬픽"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메이플 스트리트의 그 집"

장남 트렌트, 여동생 리사와 로리, 막내 브라이언은 의붓 아버지 루와 함께 사는 집에서 기묘한 금속 생명체가 자라난다는걸 알게 되었다. 트렌트는 엄마가 루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로 기절까지 하자, 금속 생명체를 이용하여 루를 없앨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집 안에서 기묘한 금속 생명체가 자라나고, 이윽고 그 생명체가 만든 시한장치에 의해 지하실에서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걸 트렌트가 알아채는 부분까지는 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은 '미국에 사는 남자아이라면, 시계가 0을 가리키면 폭발하든지, 이륙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걸 알고 있다'는 설정에 따른 결말은 좀 안이했습니다. 아이의 생각 그대로, 단지 카운트다운에 의해 나중에 '이륙해 버린다'는건 너무 단순한 발상이었으니까요. 또 이 기계 생명체가 무엇인지, 왜 성장한 끝에 이륙했는지 등 설명이 전무해서 답답했습니다. 어차피 가상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설득력을 조금이나마 보충해 줄 만한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엄마가 힘들었다 하더라도, 새 아빠에 집까지 없어져버리면 엄마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잘 살 수 있었을까? 라고 질문하면 그리 희망적인 답을 할 수는 없을거에요. 실제로 엄마가 루를 엄청나게 사랑했을 수도 있고요. 한마디로 무책임한 결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잔인함은 전혀 찾아보기 힘든, 가족 드라마스러운 내용은 이색적이나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이 잘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째 4분의 1"

바니의 친구 제리는, 키넌에 의해 죽어가는 바니에게 들은 정보로 키넌과 병장을 습격했다. 이유는 바니에 대한 복수와 그들 4명이 나눠가진, 현금이 묻힌 4장의 지도 조각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부제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4"을 쓴다면?" 인데, 내용도 그에 걸맞는 충실한 하드보일드 액션물입니다. 보물 지도 때문에 사람들을 서로 죽이는 고전적인 설정에 더해, 4인 중 마지막인 재거와 벌이는 죽음의 사투가 인상적이에요.

'다섯 번째 4분의 1'이라는 제목은 이미 죽은 바니와 주인공 제리, 그리고 키넌과 병장, 재거라는 등장인물 5명을 의미합니다. 등장인물은 5명 뿐이고 (심지어 한 명은 이미 죽었고), 장소도 키넌의 집과 병장의 집이 전부이며 분량도 굉장히 짧지만 화끈한 액션이 휘몰아쳐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라기 보다는 미키 스필레인에 가깝지 않나 싶더군요. 그만큼 파괴적이고 화끈했거든요.

한마디로 고전적이고 화끈한 마초 하드보일드 액션물로는 최고에요. 달릴 때 확실히 달려준, 그런 작품인 셈이죠. 딱히 드라마가 돋보이지는 않지만, 그런건 애초에 불필요해요. "터미네이터"에게서 내면 연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의사가 해결한 사건"

홈스에게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찾아왔다. 헐 경이 밀실에서 살해되었는데, 방이 완벽한 밀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헐 경은 가족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터라, 아내와 아들들 모두 동기가 있던 상태였는데, 함께 방을 조사하던 왓슨이 사건의 진상을 꿰뚫는다.

와, 이제는 이런 작품까지 등장하네요. 스티븐 킹의 셜록 홈스 파스티쉬이자,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을 쓰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작품도 놀라운 점이 많습니다. 홈스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제대로 현장 검증을 하지 못할 때, 왓슨이 진상을 꿰뚫고 추리 쇼를 벌이는 탐정 역을 맡는다는 과감한 설정, 피해자인 헐 경이 가족의 마음을 가지고 논 인간 말종이라 진범과 진상 모두를 알았지만 홈스, 왓슨, 레스트레이드 모두 진상을 덮고 단순 강도 사건으로 위장한다는 결말까지 모두 특이하거든요.

밀실 트릭의 정체는 화가인 둘째 아들 조리 헐이 엄청난 하이퍼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려낸 배경 그림을 테이블 다리 사이에 설치하고, 그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수 효과나 마술에서 쓰임직한 방법이죠. 주로 거울을 쓰는데, 하이퍼 리얼리즘, 극사실주의라는 미술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트릭을 예전 "경성탐정록" 창작 시절 써 먹어 볼까 고민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 반갑기도 했고요.
또 이 트릭 하나 뿐만이 아니라, 헐 경은 통풍으로 걸을 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리가 아버지를 지나쳐 서재로 먼저 들어갈 수 있었다던가, 조리가 방에 들어가 있던건 모든 가족이 알고 있어서 그들 모두가 공범이라는 등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다는게 놀라왔어요.

물론 본격물 치고는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헐의 아내와 아들들이 모두 공모해서 헐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복잡한 장치를 설치해가며 밀실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 모여있는 응접실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함께 현장을 조작하는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하인 스탠리의 증언? 정 필요하면 스탠리까지 죽이면 됐을테고요...
트릭도 비록 헐 경이 비명을 질렀다는 변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애초에 너무 거창한 장치가 필요한 트릭이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림자까지 가짜로 만들어야 해서 공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날씨에 따른 변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도 영 별로죠.
아울러 파스티쉬인데 캐릭터에 대해 지나치게 창조적인 해석이 들어간 것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호 쪽입니다. 왓슨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게 특히나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모로 독특하며, 제가 읽은 최초의 스티븐 킹 본격물이자 셜록 홈스 파스티쉬라는 가치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셜록 홈스 팬이시라면 놓치기 마시길 바랍니다.

"클라이드 엄니의 마지막 사건"

유능한 사립탐정 클라이드 엄니는 어느날, 자신을 둘러싼 모든게 이상해졌다는걸 깨닫는다. 매일 시끄럽게 만드는 이웃 데믹 부부가 조용하고, 매일 아침 신문을 사는 신문팔이 피오리아가 복권에 담청되고, 단골인 식당 블론디스는 문을 닫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 안내원 버넌이 은퇴한다고 하는 등 익숙치 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클라이드 엄니 앞에 새뮤얼 D.랜드리라는 인물이 나타나, 그를 둘러싼 모든건 모두 소설 속 설정이며 자신이 그 모든걸 창조한 창조주, 작가라고 이야기하는데...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와 현실의 작가, 또는 현실 세계가 만나서 사건이 벌어지는 작품은 많습니다. 특정 컨텐츠로 현실 인물이 빠져들어 벌이는 모험담이야 쌔고 쌨고, 현실과 픽션이 결합하여 벌어지는 일종의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도 있지요. 오래전 "라스트 액션 히어로"처럼요.

이 작품은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후자 쪽에 가까운데, 특징이라면 픽션으로 빠져드는 현실 속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픽션 속 캐릭터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세계를 멋대로 비집고 들어와, 그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심지어 나 자신을 지워버리는 멋대로인 창조주의 희생양이라는 포지션이에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제대로 맞는 캐릭터인데, 이런 비현실적으로 암담한 상황 묘사야 말로 킹의 특기 중 하나이지요.

또 클라이드 엄니는 더쉴 해밋 등 정통파 하드보일드 작가의 영향을 짙게 받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작 중에서 상황에 휘둘리면서도 추리하거나, 또는 상황 반전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가지 행동들이 그야말로 클리셰대로라는 것도 재미있던 점입니다.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유도하는게 대표적이에요. 당연히 실패하지만요.

결국 새뮤얼 랜드리에게 자신의 세계를 빼앗긴 클라이드 엄니가 현실의 새뮤얼 랜드리가 된다는 결말도 독특합니다. 일종의 바꿔치기가 일어난건데, 클라이드 엄니는 하드보일드 탐정답게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여 자신의 세계를 되찾을 결심을 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게 탐정이니까요. 과연 클라이드 엄니가 새뮤얼 랜드리에 의해 붕괴한 자신의 소설 속 세계를 재 구성하여 되 찾을 수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뻔한 설정이지만 약간의 변화로 새로움을 안겨다 준다는 점, 특별한 액션 없이 둘의 대화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긴장감도 넘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고개를 숙여"

스티븐 킹의 아들 오언 킹이 뛰는 리틀 야구팀 뱅고어 웨스트가 지구 우승을 차지한 시즌에 대해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리틀 야구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회에 역전 홈런을 쏘아 올리는 등 상당히 드라마틱한 경기 묘사가 이어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별점을 주기에는 좀 애매한 결과물이에요. 제가 원한건 스티븐 킹의 논픽션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작품을 비롯하여 나머지 부록들에 대한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참고하시길.

2018/08/25

음식과 전쟁 - 톰 닐론 / 신유진 : 별점 2.5점

음식과 전쟁 - 6점
톰 닐론 지음, 신유진 옮김/루아크

부제는 '숨겨진 맛의 역사'인데, 처음에 제목만 보고 음식을 두고 둘러싼 전쟁을 다룬 미시사 서적, 혹은 전쟁으로 비롯된 음식을 다룬(이런 책 같은) 미시사 서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전쟁과는 무관한 몇몇 특정 주제를 가지고 해당 음식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전쟁 관련된 이야기는 없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동안은 잘 몰랐던 주제들이라 새롭기도 하고, 저자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이 엿보이는 내용이 많은 덕분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 컬러로 화려한 도판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주제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에서는 로마 시대 양어법이 대중화되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 잉어가 급격히 퍼졌는데, 이유는 잉어의 놀라운 생존 능력에서 비롯된 저렴하고 효과적인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특징에 더해, 카톨릭 교단이 금요일마다 육류 섭취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미국에도 도입되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며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왜 미국에서는 잉어가 각광받지 못했을까요? 달리 먹을게 많은 풍요로운 나라였기 때문일까요? 이런 점을 좀 더 자세히 짚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그리고 "4"는 식인에 대한 역사를 다룹니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 많지만 딱 한가지, 아즈텍 제국에서는 사람이 당연한 식재료였다는 설명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일종의 제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옥수수 중심의 불균형적인 식량 체계와 융통성 없는 수직적 사회 체제 덕분에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는군요. 당연한 식재료였기에 사람을 소금, 후추, 토마토와 함께 끓이는 표준 레시피까지 있었다니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시각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이스터 섬' 에서도 식인이 활발하게 벌어졌었어야 하니까요. 거대 석상 제조를 위해 자연을 파괴하여 식량이 부족한데, 거대 석상 제조가 이루어질 만큼 수직적인 조직 체계가 유지된 상황이라면 아즈텍 제국과 마찬가지잖아요? 이런 부분에서는 연구가 좀 더 필요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스 전쟁에서 살아남은 우스터셔 소스의 이야기를 그린 "6" 에서 우스터셔 소스의 복잡한 맛은 '카레'와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던 덕분이며 이는 창조자 샌디스 경의 동양에서의 경력 덕분일 것이라는 비화와 우스터셔 소스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 덕분에 성공했다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8" 에서는 바비큐가 소개되는데 단순한 직화가 아니라 오랜 시간 낮은 온도에서 익혀 고기를 둘러싼 섬유질 콜라겐을 젤라틴으로 바꾸는 요리법이라는 정의는 처음 알았습니다. 이게 저자의 의견인지 사전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위의 예에서 언급해 드렸던 몇몇 불만들처럼 내용이 부실해서 보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많아야 20 페이지 안팎의 분량으로 해당 주제를 소화하는데 도판의 분량이 1/3 정도를 차지하니 깊이있는 설명은 애초에 불가능한 탓입니다.
또 모든 이야기들이 다 마음에 든 건 아닙니다. 디너 파티와 초콜릿 등 별로 관심이 없거나 너무 잘 알려진 주제들도 많고, 무엇보다도 흑사병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가 레몬 껍질 덕분이었다는 "2"와 같이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화려한 도판 덕분에 소장 가치는 높지만 이 책만 가지고 특정 요리와 문화에 대해 깊이있게 이해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도 음식과 문화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재미삼아 도전해 보셔도 나쁘지는 않을겁니다. 책 가격이 2만원을 훌쩍 넘는다는 문제는 있지만요.

2018/06/08

메두사호의 조난 - A. 코레아르.H. 사비니 / 심홍 : 별점 2점

메두사호의 조난 - 4점
A. 코레아르.H. 사비니 지음, 심홍 옮김/리에종


뗏목에서 여러명의 사람들이 절박하게 구조를 기다리는, 메두사 호의 조난을 제리코가 그린 위의 그림은 한 번씩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이 책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메두사 호 해상 조난 사건의 피해자의 수기로 이루어진 논픽션입니다. 이런 류의 해상 재난 관련 논픽션"바다 한 가운데서"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책 소개도 그럴듯해서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네요.

책은 메두사 호가 항해하게 된 이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814. 15년 파리 조약을 통해 원래 프랑스 땅이었지만 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 서해안의 권리가 명확해 진 후, 프랑스가 자신들의 소유지인 거점 도시 생 루이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4척으로 구성된 세네갈 원정대가 출발한 것이 이유입니다. 식민지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3개 중대 250여명의 군인은 물론 신부, 의사, 정원사에 제빵 기술자 등 다양한 직업의 인원들로 구성되었고, 같은 이유로 다양한 물자도 운반하였는데 이 중에는 무려 10만 프랑에 이르는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능한 원정 함대 사령관 쇼마레 탓에 원정대의 기함 메두사 호는 케이프 블랑코 모래톱에 좌초하였고, 무익한 노력이 이어지다가 배의 파손이 심해져 결국 구명정 등으로 탈출하였습니다. 당연히 악천후 등에 의해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한 사고라 생각했었는데, 부주의로 인해 육지 근처 모래톱에 좌초했던 사고라는게 황당했어요.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났다면 당연히 이 사건이 그림의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겠죠? 조난자들의 절반 가까이인 152명이 프리깃함의 자재로 대충 만든 뗏목에 탑승했는데, 노 하나 없어서 다른 구명정 들이 끌어주어야 함에도 이들이 예인줄을 풀어버렸기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가 소수만 구조되는 처참한 비극이 찾아오고 맙니다.
이 비극이 책의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합니다. 주로 뗏목에서 당시 군의관 사비니와 인부 리더 코레아르가 활약하는 내용이고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조난당한 이유도 황당하지만, 무려 백 명이 넘는 사람이 타야 할 뗏목의 준비 역시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나침반 하나 없고 음식도 제대로 싣지 않고 출발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제가 닥치거든요. 심지어 일부 승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기까지 하니 말 다했지요. 이 과정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할 식인도 시작되고요. 결과적으로 10%인 15명만 생존하고, 이 중 5명도 구조되자마자 바로 죽어버리는 참혹한 표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뗏목 조난 외의 나머지 절반 분량은 다른 구명정과 상륙정에 탑승했던 조난자들이 육지로 상륙하여 도보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처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확실히 바다보다는 사막이 생존에는 더 낫다 싶긴 했어요. 물과 식량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고 탐욕스러운(이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습니다. 멀쩡한 남의 나라를 자기 멋대로 식민지로 만드는 무리들이 염치도 없지...) 무어인들을 만나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망한 사람은 소수라는 점에서요. 애초부터 메두사 호에 있던 군인들 중심으로 확실하게 규율을 잡고, 식량을 확실하게 확보한 후 도보로 이동하는게 더 나은 판단이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표류, 조난 외에도 구조된 이후의 후일담도 상세합니다. 생존자 대부분이 가진 재산 모두를 약탈당하고 알거지가 된 데다가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잊혀졌고, 심지어 사비니의 수기는 정치적인 음모로 이용되고 코레아르는 정부 관계자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등 살아 남은 뒤에도 고초를 겪었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수기가 쓰여진 목적은 사비니와 코레아르가 자신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걸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묘사들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어요. 식량이 없어 죽어나가며 식인도 했다고 서술하면서, 또 어떤 부분에서는 국왕 폐하의 신하들을 바닷 속으로 돌려보냈다는 식으로 장례를 치뤄 주었다고 쓰는 등 앞 뒤도 잘 맞지 않고요. 때문에 정말로 함대 사령관 쇼마레의 무능과, 총독의 무자비함도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류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문제는 보통 윗 사람들 때문이라는 고금동서의 전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 것 증명된 건 없으니까요. 솔직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도주를 독차지하고 죽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은 인간 말종들이었을 수도 있죠.
게다가 수기 내내 스스로의 영웅적인 행동과 박애정신에 감탄하고, 자기들이 조국과 국왕에 충성하며 헌신하는 국민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도 읽으면서 솔직히 짜증이 났습니다. 이유는 역시나 자신들에 대한 보상 목적이라 생각되는데 오히려 이런 불필요한 묘사로 정작 중요한 표류,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묘사가 희석되고 깊이가 없어지는 탓입니다.

그래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여러가지 디테일들 - 뗏목에서 더위를 잊기 위해 모자에 바닷물을 담가 얼굴을 씻고, 머리를 적시고, 물속에 손을 넣는 것을 반복했다, 사막을 도보로 횡단하던 중 약 2미터 깊이로 모래를 파면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무어인은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불을 붙인 나무뿌리와 함께 잡은 황소를 던져 넣고 모래로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숯불을 덮어 조리했다. 무어족 가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염소 가죽은 방수가 완벽했다 등 - 은 나쁘지 않습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도보 횡단 중 만난 무어인의 왕 자이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이드 왕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는 국제인으로 소개되거든요. 왕이라기 보다는 좀 큰 유목민을 이끄는 리더로 보이는데 당대 아프리카 서부 세네갈의 한 지역 부족장이 이 정도의 국제 감각과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건 상당히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토착 민간 요법으로 열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럼주를 넣은 매우 뜨거운 펀치를 '카엔 후추'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추 삶은 물과 함께 큰 잔에 넣어 마시는 것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 먹는 것과 진배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 묘사는 그닥 상세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애초 글이 쓰여진 목적이 조금은 불순하고, 그래서 저자 시점에서 왜곡된 내용이 많은 듯 하여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인쇄 상태, 폰트 등 책의 만듬새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류의 해상 조난 관련 논픽션을 원하신다면 이보다는 "바다 한 가운데서"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디테일, 깊이 모두 차원이 다릅니다.

2013/05/28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 - 아토다 다카시 / 유은경 : 별점 2.5점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 - 6점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행복한책읽기

단편의 명수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집. 책 소갯글을 보니 첫 단편집이라고 하네요.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간 놓치고 있다가 뒤늦게 읽게 되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
취미를 가진 여자
가장파티
해초
기묘한 나무
행복통신
미지의 여행
나는 먹는 사람
밤의 진주조개
에너지 법칙
노래를 잊어버리지 않는 앵무새
진실은 강하다
내기에 미친 부인
마음의 여로
유령과 만나는 기술
홈 스위트 홈
최후의 배달인
공포의 연구

460페이지 분량의, 그렇게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수록작은 18편이나 됩니다. 작품들의 밀도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죠? 가장 짧은 작품은 4페이지에 불과합니다. 

일단은 기대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서늘함을 안겨다주는 반전을 지닌 작품이 많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시나 "단편의 명수"이자 "기묘한 맛"의 대표 작가다웠어요.

또 다른 특징으로는 70년대 작품답게 확실히 옛스럽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마음의 여로"는 "유니버셜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에 실린 단편 "Ω의 성찬"과 동일한 소재이지만, "Ω의 성찬"의 적나라한 묘사와 자극적인 느낌은 전무하고 여백 가득한 묘사로 그려집니다. 때문에 시종일관 전개와 반전에서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직접적인 돌직구 스타일 현대물보다 이러한 고전적인 분위기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가의 단편집 모두가 그렇듯 수록 작품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단점입니다. 모든 작품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요. 또, 지금 읽기에는 반전들도 조금 낡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묘한 나무"의 핵심 반전인 성형수술, "나는 먹는 사람"과 "마음의 여로"의 식인 행위, "에너지 법칙"에서 주인공이 쥐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결말 등은 솔직히 뻔했습니다. 아울러 "나폴레옹 광"이나 "방문자" 같은 작가의 대표작이 실려 있지 않다는 점도 감점 요인이고요.

그래도 지금 읽어도 여전한 힘을 지니는 작품도 많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들자면 "가장파티", "행복통신", "유령과 만나는 기술"의 세 편입니다.

"가장파티"는 아내의 사망 후 내리막길을 걷는 샐러리맨이 아내와 꼭 닮은 술집 여자를 만나 회사 가장파티에 데려간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딱 몇 줄로 정리되어 폭로되는, 사실 아내는 사장의 정부였다는 냉혹한 현실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마 과장"의 곤도가 떠오르는 이야기였어요.

"행복통신"은 구조조정을 앞둔 주인공에게 기이한 투자 관련 전화가 온다는 이야기인데, 전화를 건 이유를 수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솜씨가 좋았고요.

"유령과 만나는 기술"은 기원전 15세기의 크레타를 무대로, 뫼비우스의 띠를 이용하여 죽은 자와 통신한다는 내용을 진짜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작가의 폭이 상당히 넓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어요. 하긴... 역사 소설도 많이 쓰긴 했죠.

그 외에도 "기묘한 맛"의 원조 격인 스텐리 엘린, 로얼드 달 스타일 가득한 "해초"라던가 "노래를 잊어버리지 않는 앵무새"도 서늘한 맛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덧붙이자면 기이할 정도로 먹는 것에 집중한 작품이 많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었습니다. 먹는 것 자체가 주제인 "나는 먹는 사람"이 대표적인데 식인 행위를 다루고 있음에도 너무나 맛깔스럽게 묘사해서 입에 군침이 돌 정도였어요. "나폴레옹 광"도 오징어포에 대한 묘사가 남다른데 작가가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묘한 맛"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4/02/17

바다 한가운데서 - 나다니엘 필브릭 / 한영탁 : 별점 5점!

바다 한가운데서 - 10점
나다니엘 필브릭 지음, 한영탁 옮김/중심

1920년 실제로 일어났던 미국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조난을 둘러싼 이야기로 아주 오래전, 딴지일보였었나... 에서 소갯글을 읽은 뒤 관심을 가지게 된 책입니다. 그러나 폭풍 절판되어서 얼마 전까지는 도저히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원하는 헌 책을 구입하는 노하우는 제법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헌책방은 물론 근처 도서관 어디에서도 구할 방법이 없었더랬죠. 그런데 얼마 전 알라딘에 중고도서 매물이, 심지어 "알라딘 직배송"으로 저렴하게 떴길래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이 책을 찾아 헤맨 시간이 거의 10여 년이라 손에 들어오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했습니다.

사실 이전의 책 소갯글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표류한 에식스호의 선원들이 결국 식인까지 저지르며 살아남는 과정에 대한 처절함, 그리고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최초 표류 시 보트의 방향을 "식인종"이 살고 있으리라 여겨진 소시에테 제도가 아니라 남아메리카 쪽으로 잡은 탓이 크다는 아이러니함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으로, 어떻게 보면 자극적인 소재에 끌린 탓입니다.

그러나 책 자체는 생각과는 약간 달랐습니다. 총 300여 페이지의 분량 중 거의 절반은 에식스 호 선원들의 처절한 표류와 생존기이지만, 그 외의 약 절반은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디테일에 할애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19세기 초의 낸터컷이라는 포경의 도시와 포경이라는 조업에 대해 다큐멘터리와 같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당시 포경을 위한 원양 어업의 과정, 어장, 실제 포경의 방법, 잡은 고래의 처리 등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디테일이 한가득이에요. 지도와 사진 같은 도판도 기대 이상이고요.

그리고 에식스호가 향유고래의 공격으로 침몰하게 되고 이후 처절한 표류가 허먼 멜빌의 굴지의 걸작 "백경"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허먼 멜빌은 "백경" 출간 1년 뒤에 실제로 낸터컷을 방문하여 에식스호의 선장이었던 폴라드와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니 이 사건과 사건을 다룬 회고록이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물론 당연하게도 표류, 생존에 대한 디테일도 최고입니다. 생존자들이 다음에 먹힐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투표를 했다던가, 뼈만 남은 잔해를 뒤지고 빠개어 골수까지 빨아먹었다는 등의 처절한 행위뿐 아니라 가장 먼저 죽은 4명의 선원이 흑인이었다는 것, 결국 살아남은 최후의 5인은 이른바 "낸터컷 출신자"뿐이었다는 불편한 사실도 가득합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갈증이 인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설명 및 굶주림으로 체지방이 극한으로 떨어진 살코기를 섭취하면 그다지 효율이 좋지 않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순 살코기보다는 적당히 기름이 낀, 마블링 좋은 고기가 더 맛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그 외에도 실제 바다에서 있었던 각종 사고들의 사례를 들어 함께 설명해 주는 것도 아주 좋았던 부분이에요. 유사한 조난자들이 시체를 다른 방법으로 활용(낚시의 미끼로 사용함)하여 전원 생존한 사례를 함께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죠. 덧붙이자면 바다 사나이들이 왜 바다에서 식재료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는 참으로 의아한 부분이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들이 조난하게 된 바다가 극단적으로 물고기들이 없는 해역이었다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재수가 없었던 거죠.

마지막으로 사건에 대한 에필로그도 충실합니다. 폴라드 선장이 조난 후에 다시 포경선의 선장이 되고 , 같이 조난당했던 2명의 선원이 함께 배를 타는 최대급의 신뢰를 얻지만 또 난파당하여 바다 사나이로서의 생명이 끝난 뒤, 낸터컷에서는 하위 계급인 자경단원을 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며 살았다, 1등 항해사로 조난 중에 나름의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선보인 체이스는 이후 당당히 선장으로 활약했지만 정신병원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는 등 모든 생존자들의 후일담도 빠짐없이 알려주거든요. 심지어 "낸터컷"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까지 서술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나저나, 이런 사고를 겪고도 결국은 다시 바다로 나가다니...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삶이네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명성에 걸맞는 가치와 재미를 가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간 이 책에 대한 갈망을 감추지 못하고 유사한 책을 몇 권 구해 읽어보았으나 모두 완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거나 중반에 종교적인 내용 같은 삼천포로 빠지는 책들이었는데 확실히 원조는 다르네요. 10여 년을 기다려 입수했을 때의 기쁨까지 감안하여 별점은 5점! "2000년 최우수 논픽션" 등 여러 논픽션 관련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허언이 아닙니다. 이런 좋은 책이 나오자마자 절판된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쉽기만 합니다. 해양 조난, 식인, 포경 (그리고 "백경")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어떻게든 구하셔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무한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저라면 어땠을까요? 저 역시 폴라드 선장처럼 조카를 잡아먹어서라도 살아 남았을 겁니다. 꼭 살아남아서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니까요. 책 내용에서 밝혀지지는 않지만 저는 이러한 원초적인 생존 본능은 돌아갈 곳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21/07/17

THE 좀비스 - 중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중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좀비가 핵심인 단편들을 모아놓은 앤설러지 두 번째 권인데, 전에 읽었던 상권보다 별로입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에 좀비를 끼워넣었거나, 좀비가 왜 등장하는지도 모를 이야기가 많은 탓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끔 노력했지만,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고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도 많고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어요. 차라리 정통 좀비 아포칼립스물이라면 평작은 될 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권 남았는데,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톡홀름 증후군"

좀비 떼로 둘러쌓인 집에 갖힌 나는 아들과 닮아서 '빌리'라고 이름지은 좀비 관찰에 재미를 붙였다. 빌리는 이웃집 침입을 위해 판자를 뜯어내는 일에 골몰하는데...

제목 그대로 가해자인 좀비와 동질화되어, 좀비가 사람을 죽이는걸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감정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통해, '살아있는 것과 사는 건 다르다'는 걸 알려주는 작품. 그냥 버티기만 할 뿐, 이렇게 살아가는건 좀비와 다를게 없다는 거지요. 동질화된다는 측면에서는 전권의 "나처럼 죽어봐"와 조금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는 절박함이나 처절함은 다소 부족한 반면, 조금 더 설득력이 높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집을 좀비떼가 습격하는 장면 묘사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주인공 사고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더군요. 일반적으로는 총알이 딱 한 발 남을 때 까지 살아남아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거리로 뛰어들어 좀비가 되어 버리던가....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저런 상황들이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고 방식과 행동은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난극" 

페스트로부터 구해진 오버라머가우 마을 전통의, 10년에 한 번 진행되는 예수 수난극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위해, 좀비를 분장시켜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을 생각이었다. 마이어 신부는 이를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에 신의 저주와 함께 파국이 찾아오고 만다.

마이어 신부는 좀비도 영혼이 있어서, 인간이 그들을 잔혹하게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좀비에게 영혼은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니까요. 종교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여지도 없어요. 좀비를 연극 소품으로 잔혹하게 대하는 행동은 조금 거슬렸지만, 좀비들은 그동안 더 잔혹한 행동을 보여 왔으니 딱히 큰 문제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게 문제라면 가축 도살이 더 큰 문제아닐까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마이어 신부의 행동은 도무지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좀비를 구해주려는 신부의 행동에 분노한 관객들이 신의 저주로 좀비가 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페스트 유행 당시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페스트에서 안전했던 성에서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보이지만, 결국 성주에게 페스트가 전염된다는 결말이었는데, 페스트가 좀비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맥락이지요. 아니, 그보다도 못해요. 페스트는 어쨌건 공기로도 전염될 수 있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급작스럽게 사람들에게 퍼진다는건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종교를 끌어들인 전개는 무리수였을 뿐더러 새로움도 없고, 잔혹함도 덜합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점수를 줄 여지가 별로 없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름다운 것" 

테러로 희생된 러스티는 시체 소생 기술로 되살아났다. 정치인이 그의 희생을 선거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연설 당일, 러스티는 정치인 요구와는 다르게 죽음은 아프니, 삶을 즐기라는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죽은 사람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의 행태는 우리도 익히,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를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좀비로 비판한다는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되살아난 테러범과 희생자 모두가 정치인 생각과 전혀 다른 진심을 털어 놓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그들의 진심이 "죽기 전에 즐겨라!" 라니? 황당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좀비들이 이런저런 소품들에 환장한다는 설정도 기발했지만, 이 황당한 메시지 전달에 활용될 뿐이고요. 또 딱히 좀비가 등장할 필요도 없었어요. 유령이라던가, 빙의한 영혼이라던가, 뭐든 좋을 그런 이야기거든요. 진짜 아이디어가 아까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 

좀비들이 연극을 한다는 이야기로 공포 문학의 거장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좀비물에서 기대할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좀비들이 나름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특이했지만, 그들은 연극 외에 다른 목적이 없거든요. 식인 따위는 원하지도 않고요. 죽은 여배우가 섹스를 요구하는 장면이라던가, 사악한 제작자를 죽이는 장면 정도가 조금 섬찟했습니다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좀비들이 벌이는 연극으로 현재의 연극계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로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다면 더 웃기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으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시체의 길" 

신으로부터 이 땅에서 악을 몰아내라고 명 받은 총잡이 목사 제비디아는 보안관보가 체포한 악당 빌을 호송하기 위한 여정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괴물이 나온다는 '시체의 길'을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일행은 괴물이 된 양봉업자 기멧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기멧이 괴물이 된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납치했던 소녀가 죽은 뒤, 소녀 어머니가 저주한 것이지요. 그런데 저주로 죽기는 했지만, 기멧이 이내 벌통이 가슴 속에 위치한 괴물로 되살아났다는건 좀 이상하더군요. 이게 저주가 맞나요? 어차피 악당이었으니, 무적의 괴물이 되면 더 좋은거 아닌가 싶은데 말이지요. 

또 괴물의 설정도 죽은 자가 돌아온 것이지만, 벌 떼와 함께 이동하며, 초인적인 힘과 빠르기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인 좀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식인이 목적도 아니고요. 그래서 좀비물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크리쳐물에 가깝습니다. 악을 없애기 위해 악을 접하면 불타는 성서, 악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은총알 등의 설정이 곁들여진 것도 크리처물 설정일테고요. 이야기 전개도 고생 끝에 괴물을 처치하는 크리처물 그대로라 특별한건 없습니다.

그래도 제비디아 목사의 활약은 화끈합니다. 괴물의 잔혹함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덕분에 머리를 비우고 단순하게 읽는 킬링 타임 물로는 나름 적당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부 개척 시대를 무대로 악을 멸하는 총잡이 신부가 등장하는 크리쳐물이라는 점에서는 "프리스트"가 연상되더군요. "프리스트"는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도 되었던 만큼, 나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바비 콘로이, 살아 오다" 

바비 콘로이는 배우로서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서 맡은건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이라는 영화의 좀비역이었다. 톰 새비니가 해 준 좀비 분장을 한 바비는, 촬영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해리엇과 재회했다. 그녀는 결혼해서 아들과 함께 분장하고 영화에 참여 중이었다...

좀비가 주제이기는 한데 방향이 굉장히 독특했던 작품입니다. 좀비가 아니라, 기념비적인 좀비 영화 "시체들의 새벽"에서 좀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이야기거든요. 아 이런 발상, 아주 마음에 들어요. 좀비를 주제로 단편을 써와! 라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가이드에 맞춰서 첫사랑과 현재에 대한 달달하면서도 아련한 이야기를 써 온 셈이니까요.

하지만 행복한 해리엇 가족에게 바비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결말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바비는 해리엇 가족, 특히 그 아들에게는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되는, 좀비물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지금 이야기는 발상에 비해 평이하고, 조금 뻔한 그런 이야기라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들" 

칼라는 메레디스를 찾아와 심장마비로 죽은 남편 아서의 소생을 부탁했다. 그녀가 바람피운걸 사과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되살려보니 아서는 칼라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죽었던 것이었다. 살해된 좀비는 살인범을 죽이는게 본능으로, 칼라는 죄책감때문에 자살할 생각이었다...

작가의 인기 캐릭터라는 시체 소생 전문가 메레디스가 등장하는 작품. 살인자가 죄책감으로 피해자에게 죽기를 원한다는 설정과 시체 소생에 대한 이런저런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서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걸 알고 난 후, 칼라가 죽는 결말까지는 좀 시시합니다. 예상대로의 이야기였거든요. 뭔가 좀 의외성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은 2.5점은 충분합니다.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농학자 닥 프리먼은 좀비 떼를 피해 콜로니를 만들고 생존자들의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콜로니는 안전했지만, 생산과 성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출산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가 생긴 톰 부부는 낙태를 지시받고, 콜로니 외부 클리닉으로 수술을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좀비 때문에 격리된 폐쇄 공간은 생산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출산까지 관리한다는 설정은 꽤 설득력있었습니다. 낙태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부 수술실로 향하는 아이러니도 기발했고요. 무엇보다도 낙태한 태아가 살아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들은 생명이 아니라는 시각은 아주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좀비가 된 낙태 반대주의자를 날려버리는 결말을 더하니, 저자가 낙태를 찬성한다는건 잘 알겠더라고요. 

내용도 신선했고, 여러가지 볼 거리가 많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두에 소개된 저자가 주제를 찾은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동안의 좀비 주체 작품이 극단적 섹스 장면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며,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는 터부를 고민해보다가 정치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하네요.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정치 이슈가 '낙태' 였다면서요. 우리나라도 따지면 '부동산'을 주제로 좀비물을 쓴 격이겠지요? 아 이거 재미있겠네요.

"죽은 아이" 

동네 깡패 루크 브래들리의 무리에 가입하고 싶었던 나에게 브래들리는 조건을 내걸었다. 살아있는 아이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공 소년이 희생양인 좀비 아이를 악으로부터 구해주고 구원받는다는 내용의 작품.

주인공 설정과 분위기 등은 모두 스티븐 킹"그것"이나 "스탠 바이 미"를 연상케합니다. 특히나 시골 마을에서 또래 깡패와 맞서 싸우는 아이의 성장기이며, 아이 시체가 중요한 소재라는건 "스탠 바이 미"의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아류작이면서도 "스탠 바이 미"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겁니다. 주인공과 동생 앨버트는 좀비 시체를 상자에서 꺼내준 정도 밖에 한 게 없고, 이들의 여정도 하룻밤 나들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에요. 뭔가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과정이지요. 이 과정도 환상 소설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 고생스러움도 전혀 느낄 수 없었고요. 단편 분량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브래들리의 패악질만큼의 설명은 해 주었어야 해요. 루크 브래들리의 깡패짓 말고는 드라마라고 부를 내용도 없고요. 게다가 아이 시체가 좀비일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시체여도 무방한, 그런 이야기거든요.

좀비 소재 단편을 의뢰받고 "스탠 바이 미"에 좀비를 우겨넣은 만들어낸, 졸속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졸작. 별점은 1점입니다.

"좀비들과 함께라면" 

중 2병에 걸린 소녀의 성장기랄까요. 서정적인 1인칭 묘사는 괜찮았고, 좀비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 현실은 가혹하다는 메시지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직장 생활도 20년차가 넘은 아저씨에게는 별로 와 닿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가혹하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리고 현실은 최소한 좀비보다는 낫습니다. 아울러 아무리 봐도 좀비물로 보기는 힘드네요. 작품에서 좀비가 진짜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만도 못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방탕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날 마약과 술에 취한 채로 이상한 클럽을 찾았다. 좀비를 학대하고 죽이는 스너프 필름을 상영하는 곳이었다. 클럽에서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은 일행이었던 제인을 죽이고 마는데...

변호사인 저자가 쓴, 브렛 이스턴 앨리스 소설의 패러디라는 작품. 원작을 모르니 뭘 어떻게 패러디했는지 모르겠는데, 내용도 잘 모르겠어요. 젊은이들의 타락과 방황을 묘사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게 좀비물인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좀비인건가요? 설령 그들이 좀비라 해도 그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뭔가 있어보이게끔 한 묘사들도, 결국은 별다른 알맹이는 없고요.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내용이 뭔지 이해할 수 없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미트하우스 맨" 

시체 취급자들이 시체를 조종해서 온갖 일을 하는 시대. 유능한 시체 취급자 트래거는 사랑을 찾아 이런 저런 곳을 전전하게 되는데...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R 마틴의 작품. 사랑없는, 자극만이 넘쳐나는 미래 세계에서 사랑을 찾아 떠도는 트래거의 모습은 "쿄시로 2030"의 쿄시로가 살짝 연상되더군요. 순정으로 접근하던 트래거가 여자에게 배신당한 뒤, 뒷골목 깡패나 하는 시체 검투 경기에 참여하게 되는건 곽철용의 명대사 "니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가 떠올라서 좀 웃겼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며,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 탓입니다. 요약하면 "사랑을 믿었던 트래거가 배신당한 뒤, 돈과 향락을 택했다"는 지극히 뻔하고 뻔한 이야기가 전부에요. 작가가 쓸 때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고 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왠만한 단편보다는 긴 분량을 갖춘만큼, 소개되는 방대한 설정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특히 제목의 '미트하우스' 관련 설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체를 살아있는 것 처럼 조종해서 성욕을 채워주는 곳인데, 시체 취급자가 아니라 피드백 회로를 통해 조종되고 있다는 등 이런저런 디테일이 빼어나거든요. 시체 취급자 (스트레커)와 관련된 설정들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야기가 별로라면, 좋은 설정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6/19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상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여러 단편들에서 엄선했다는 좀비 관련 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여름에는 좀비물이지요. 원래 책으로는 무려 서른 네 편,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상, 중, 하로 분권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한 번에 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양이니까요.

상권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 댄 시먼스, 제프리 포드 정도가 제가 아는 작가인데, 다른 작가들도 소갯글만 보면 모두 나름대로 유명 작가들로 보입니다. 좀비라면 바로 떠오를 고어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비롯하여, SF, 범죄 드라마, 풍자, 블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들이 수록되어 있고요. 덕분에 풍성하기는 한데, 작품들 편차는 큽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과 같은, 기존 좀비물 팬을 만족시키는 걸작도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거나, 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분만"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과 몽상 1"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출산을 앞둔 임산부 시점에서 그려낸 작품이지요. 

그런데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좀비의 기원까지 설명되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 문제였는지 뭔가 누락된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보통은 주인공이 도와주는 역할은 임산부가 주인공이며, 무대가 섬마을이라서 한 개 뿐인 묘지만 사수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상황이 독특했습니다. 버티는 와중에 죽은 남편을 한번 더 죽이는 처절함,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인공과 무대 설정의 독특함을 더해 스티븐 킹의 필력으로 써 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픈 변화구 보다는, 그냥 한가운데 직구 승부가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심지어 그 공을 던지는게 스티븐 킹이라면 더더욱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슴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재벌들이 과시용으로 데리고 사는 '트로피 와이프'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뒤 벌어진 일들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좀비로 돌아온 트로피 와이프는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고, 사람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부활시켰는지를 찾아 헤멜 뿐이지요. 이런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더군요.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탓이에요. 시체가 되살아난건 충분히 드라마틱한 사건인데, 이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묘사는 탓입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부활시켰다는 여동생이 찾아 오는건 아주 뜬금없었고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외모, 돈과 사치품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주는가 싶은데, 자동차 한 대 값을 들였다는 실리콘 가슴만 쳐지지 않고 영원이 남았다는 묘사에서 '적절한 투자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서, 뭐가 맞는지는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재미만 놓고 보자면 후자 쪽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만.

하여튼 좀비물로 보기는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고, 쟝르도 모호하며 이야기도 딱히 볼만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 

노년의 가이스 선생은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 혼자 살아남았다. 그녀는 포획한 좀비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데...

좀비 설정에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어요. 그냥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한 뒤를 그리고 있거든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물입니다. "가정 분만"과 같이, 뻔한 설정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더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교육' 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꽤 잘 그려내고 있기도 하고요. 좀비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는 결말은 깊은 울림을 가져다 주네요. 단지 치킨 너겟 때문에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뭐 그것도 학습이라면 학습이니까요.

"칼리의 노래", "테러호의 악몽" 등의 공포 소설로 유명한 댄 시먼스다운 필력도 돋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디테일이 특히 압권이에요. 좀비 아이들을 포획하고, 이들을 교실에 묶어 놓은 뒤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학교를 요새처럼 만든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아주 빼어난 덕분입니다. 좀비물로서의 기본 재미도 놓치지 않습니다. 학교로 수백명의 좀비가 몰려오고, 이를 가솔린 해자와 레밍턴 소총, 권총으로 처단하는 가이스 선생의 활약이 그려지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화끈합니다.

뻔하지만 독특한 설정에 더해, 재미도 기본 이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작가적 명성은 허투루 얻어진게 아니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유령의 춤" 

커스터 기병대가 좀비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추격하던 FBI 요원 에드거는 좀비의 습격에 대한 모든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쓰레기 백인 경찰관이 인디언을 몰래 학살하다가 되살아난 좀비 커스터 기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도입부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그냥 에드거 요원이 좀비 기병대의 잔학한 행동을 모두 알게되는 신기한 능력을 얻었다가 전부인 뒷부분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니까요. 군대식 명령으로 좀비떼를 제어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로 좀비떼를 격퇴했다던가 하는 결말도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제 기준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시체" 

아프리카 수용소를 통해 좀비를 대량 생산하여 유통시킬 계획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도널드는 좀비 격투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좀비 매춘부를 만난 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에요. AI,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과 별다를게 없거든요. 하지만 AI를 좀비로 바꾼 아이디어가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가치가 폭락하고, 심지어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 큰 충격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죽음과 선거권" 

시체가 되살아나 투표를 하기 시작해서, 대통령 선거는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버튼 후보의 보자관 롭은 지고있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었던 소녀 데이나 맥과이어가 되살아나 좀비가 된 모습을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고, 버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의가 이루어지는걸 보기 위해서라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 롭이 어린 시절 저질렀던 총기 오발 사고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펼쳐질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거든요. 시체들이 되살아난게 롭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고요. 또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버튼이 대통령이 되는게 왜 정의인걸까요? 좀비물이나 호러물적인 속성이 전무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초원" 

모종의 탐험대가 대륙 횡단을 하면서 괴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항해 시기 쯤, 그러니까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탐험대가 굶주림과 초현실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댄 시먼즈의 "테리호의 악몽"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탐험대는 시체들과 산 사람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저지르는 악당들이라는 차이는 큽니다. 화자인 '나' 조차도 대륙 횡단에만 골몰해서 학살, 식인을 꺼리지 않는 정신병자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사뭇 부족하고요. 왜 시체가 되살아나 배회하는지, 시체를 되살린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결말도 모호해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잔혹하기만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시체"

매춘부를 유혹한 뒤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리치의 희생자였던 '나'가 되살아나서 리치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복수극으로 보이기도 하고, 멜로물로도 보이기도 하고, 범죄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별로 의외성이 없고, 리치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말도 밋밋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무엇보다도 무섭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밤처럼 아름다운" 

성인 모델들 촬영으로 거부가 된 네이선 그라임스는 좀비 사태 발발 후 카리브 해의 섬 요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모델들과 좀비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좀비 사태가 끝나면 아름다운 모델 수요가 폭증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모델들은 좀비가 되어버렸으며 심지어 이성이 남아있는 듯 네이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네이선도 생존자를 가장했던 좀비에게 물려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데...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주인공과 성인지 모델들이 좀비가 되고, 좀비들이 생전의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행동한다는 설정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전개는 뻔했고, 애매한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처럼 죽어봐"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그리고 있습니다.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습격하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리나 냄새, 체온 등에 반응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단순하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한 곳을 찾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요. 실제로 주인공은 그렇게 좀비 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와중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지를 만나 섹스를 하는 설정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의지인 상황인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설명은 부족합니다.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니까요.

물론 자기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죽어봤자 좀비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나름 와 닿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해도 저라면 진작에 자살을 택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맬더시안의 좀비" 

이웃 노인 맬더시안은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뇌 수슬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맬더시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나는 그가 숨겨두었던 좀비를 떠맡아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데...

기존의 '좀비', 즉 부두교 주술로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뇌 수술처럼 뭔가 있어보이는 장황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환상 소설에 가깝게 풀어나가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뭔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라는 환상 소설을 쓴 작가 작품다왔달까요. 결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점 까지 말이지요. 좀비가 등장해서 급격하게 노화한 뒤, 맬더시안이 되었다는게 결말인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멜더시안이 심장마비로 죽은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젊은 좀비가 되었고, 다시 급격하게 노화해서 멜더시안이 된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환생이라면 젊은 육체로 있는게 맞을텐데, 이런 일을 벌인 동기도 잘 모르겠고요. 

주인공도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끝맺는데, 작가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데, 그런 평가가 가능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2013/01/20

미스터리의 계보 - 마쓰모토 세이초 / 김욱 : 별점 4점

미스터리의 계보 - 8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북스피어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마츠모토 세이쵸의 논픽션. "전골을 먹는 여자", "두 명의 진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이라는 세 편의 이야기와 상당한 분량의 해설이 실려 있습니다.

"전골을 먹는 여자"는 군마현 호시오 마을에서 종전 직후 벌어진 식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 도와주는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산골 마을의 무지와 야만이 결합해 벌어진 끔찍한 범죄입니다. 작가가 이 일대를 여행했을 때의 과정을 설명하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말이지 엄청난 오지더군요.

내용은 사실 뻔합니다. "벽장 속의 치요"의 한 이야기와도 유사하지요. 그러나 논픽션이기에 훨씬 충격적일 뿐 아니라,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도라는 왜 죽였어!"라고 윽박질렀을 때 범인이 답하는 "먹었어"라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찟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는 노구치 오사부로, 스기무라 가즈요의 범행 역시 굉장히 흥미로웠고요.

근친 결혼으로 인한 저능한 가족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영국의 소니 빈 일족 일화, 기아로 인한 범죄라는 점에서는 "얼라이브"나 난파선 구명보트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두 명의 진범"은 스즈가모리 석탑 부근에서 살해된 다나카 하루 사건을 다룹니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두 명 중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일본의 사형 및 재판 제도 문제와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억울한 용의자 다카무라의 자백 및 심문 조서에서 모순을 밝혀나가는 세이쵸의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특히 "흰색 고시마키가 두꺼운 플란넬 소재였다"라는 중요한 사항을 짚어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경찰의 갖가지 증거 조작과 고문으로 날조된 자백 탓에 두 번째 범인이 생겼으며, 진범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에도 재판이 계속되어 6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무죄로 풀려났다는 점에서, 제도적인 야만을 규탄하는 사회파적 의미도 강하게 느껴졌고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은 미스터리, 범죄 매니아에게는 친숙한 쓰야마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무려 3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량 살인 사건이죠. 워낙에 유명한 사건이라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범인 도이 무쓰오의 출생에서부터 범행에 이르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그리고 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릴 정도로 흡입력 넘쳤습니다.

외딴 산골의 문란한 성 풍속, 소문으로 비롯된 따돌림, 한 개인의 컴플렉스가 결합하여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는데, 피해 의식이라는 것은 주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의 두 사건과는 다르게, 이 사건은 시대적 야만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이쵸의 글만 보면 사회적인 따돌림과 본인 스스로의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설명되지만, 한 마을 자체를 거의 날려버린 잔인무도한 범행에는 그 어떤 핑계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보이네요. 우리나라의 우범곤 순경 사건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루었던 농약 음료수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적 격리가 필요한 인간 말종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결론 내리자면, 세 편의 이야기 모두 흥미롭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읽으면서 전율이 느껴지는 충격적인 내용도 가득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줍니다. 또한,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미려하고 흡입력 있는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무지와 야만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사회파 작가다운 고발 정신도 살아 있는 명편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왜 거장이 거장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되네요.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 세이쵸의 원고지라는 부록이 들어있는데, 전혀 쓸데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차라리 책값을 천 원이라도 낮추는 방안을 출판사에 건의드리는 바입니다.

2023/08/06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관람

지난 달의 '젊은 모색 2023' 전시회에 이어, 이번 달에도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관람하였습니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입니다.
동산방화랑의 설립자 동산 박주환이 수집하고 그의 아들 박우홍이 기증한 작품 209점 중 90여점을 선별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입니다.

주로 한국화 중심으로,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한국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남종 화단의 명맥을 이었다는 허백련의 그림을 비롯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이용우, 최우석 등의 산수화나 매화도 등은 익히 알고 있던 조선시대의 그림 바로 그것입니다.
노수현의 <<추경>>은 공들인 인왕산의 바위 암벽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근대 회화라 그런지, 의외의 디테일도 재미있었습니다. 아래의 이용우의 작품 속 작은 인물과 같이요. 이런 디테일들이 쌓여 다름 단계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렇게 나무들을 '마계'의 식물들처럼 묘사한 이유가 조금 궁금해지더군요. 이용우의 작품 외에도 아래와 같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마계의 식인 식물같은 나무들이 눈에 뜨였거든요. 조금 손을 대고 가공하면 현대적인 게임 일러스트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근대 초기를 넘어, 중기 이후 작품들이 이어지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운보 김기창의 <<매>> 였습니다. 상당히 큰 그림인데,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된 배경, 큰 붓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나무와 깃털, 거기에 엄청나게 디테일한 매의 얼굴 묘사가 잘 어우러지는게 아주 멋졌습니다. 거장이 왜 거장인지를 알려주네요.
운보 김기창이 아니더라도, 아래와 같이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양화에 뒤지지 않는 작품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한국화의 저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한국 전쟁 이후, 현대로 접어들면서는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동양화의 번짐과 같은 효과로 원근법, 일렁이고 출렁이는 물과 바람을 표현한 아래의 작품들은 한국화임에도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입니다.
현대적인 한국화라면 빼 놓을 수 없는게 아래의 <<신몽유도원도>>였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한 작품이라는데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원색적이면서도 오묘한 색 표현이 아주아주 빼어나다고 생각되거든요. 영화 <<바비>>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핑크핑크하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시리즈라는게 충분히 이해되더라고요. 저도 한 점 걸어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전형적인 산수화 스타일이지만 거친 마띠에르를 느낄 수 있는 <<북한산>>도 또 다른 현대적 한국화이면서도, 제 마음에 쏙 든 작품입니다. <<신몽유도원도>>가 다소 여성적이라면, 굉장히 남성적인 작품이라서 두 작품을 같이 전시하면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굉장히 눈이 즐거웠던 전시였습니다. 한국화에 애정이 깊은 컬렉터가 엄선하여 수집한 작품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다른 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딱 한가지, 한국화임에도 불구하고 액자로 설치된 작품이 많았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조명이 반사되는 탓에, 온전히 그림을 감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유리없이 감상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