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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5/30

콜드 문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2.5점

콜드 문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뉴욕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 시계, 기묘한 시와 함께 자신을 '시계공'이라고 서명한 범인을 찾기 위해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가 나섰다. 한편 색스는 이 사건 외에도 자살로 위장한 사업가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경찰 118번 지구대가 범행에 연루되어 있다는게 드러났으나, 당장은 내사과 투입이 어려워 부시장 월러스와 경정 매릴린 플레허티의 합의로 색스 혼자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이었다.

전신마비 법의학자 링컨 라임과 그의 수족인 여성 경찰 아멜리아 색스 컴비의 활약이 그려지는 제프리 디버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서 해외편 6위에 당당하게 위치해 있는 탓에, 평소 궁금하게 여기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흡입력, 재미입니다. 거의 550여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인데 쉽게 읽힙니다. 시계공 던컨의 범죄 행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유행했던 "싸이코 연쇄 살인마와 천재 경찰의 대결"을 비튼 아이디어도 좋아요. 반전도 괜찮으며, 철저한 증거 위주의 수사로 수집한 증거를 통해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그것들이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마음에 듭니다.
새 캐릭터인 동작학 전문가 캐스린 댄스의 심문 과정에 대한 묘사도 그럴듯합니다. 거의 인간 거짓말 탐지기 수준으로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럴듯하게 묘사되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다른 링컨 라임 주변인물 묘사도 시트콤스러운게 유쾌했고요. 아멜리아 색스가 아버지의 추문, 경찰에 대한 신뢰 추락이라는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결말도 전형적이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잘 되고 나쁜 사람은 파멸하는 이야기가 감정이입이 잘 되더라고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에서 지난 30년간 작품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만하냐면,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다음 단계로의 진행은 모두 주요 관계자의 증언에 따를 뿐입니다. 빈센트 체포 후 빈센트의 증언으로 다음 피해자 대상이 좁혀지고, 이는 베이커의 작전이었지만 베이커 체포 후 던컨 본인도 체포되어 연쇄 살인극이 아니라는게 그의 입으로 밝혀지고, 던컨이 풀려난 뒤 그의 다음 목표가 델파이 메커니즘이라는 것도 빈센트와 이전 시계점 증언으로 밝혀지는 식이거든요. 이래서야 링컨 라임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솔직히 링컨 라임이 없어도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지나친 반전과 어처구니없는 진상도 문제입니다. 초, 중반까지는 연쇄 살인극을 꾸미는 시계공 던컨과 조수격인 성범죄자 빈센트가 몇 명의 여성 희생자를 집요하게 노리는 묘사가 이어지죠. 그러나 빈센트는 그냥 미끼였고, 던컨의 진짜 목표는 118번 수사대 비리와 연류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로 색스를 연쇄 살인범의 범행으로 위장해서 죽인다는 반전, 베이커 뒤에 흑막으로 부시장 월러스가 있었다는 반전, 시계공 던컨의 진짜 목적은 세슘 시계를 조작해서 이전부터 탐낸걸로 묘사된 '델파이 메커니즘'을 훔치려는 것, 인줄 알았지만 진짜 중의 진짜는 뉴욕 도시 개발 공사에서 뉴욕시와 국방부 등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사람을 다량으로 살상하는 테러였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반전이 너무 많다보니 가면 갈 수록 흥미가 떨어지더군요. 9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반전물' 들을 보고, "내가 진짜 반전이 뭔지 보여주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쓴 느낌인데, 지나쳤어요. 과유불급이랄까요....

게다가 '시계공의 목적은 무차별 대량 살상 테러였다!' 라는 진상도 너무 별로입니다. 작 중에서는 사람은 죽이지 않고, 이전에 사람을 죽였다고 언급헸던 범행의 대상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안티 히어로 모습을 보여주던 천재 범죄자 시계공이 왜 무작위로 사람을 살상하는 테러를 선뜻 받아들이는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계공의 캐릭터도 이상해져 버렸고요.
마지막 범행, 즉 테러를 위해 연쇄 살인 시도를 가장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역시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입니다. 자물쇠를 따고 숨어드는게 쉽다면, 루시 릭터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을 때 집에 침입해서 필요한 서류를 찍어가지고 오면 되는거잖아요? 꽃가게 조앤의 화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구태여 엄청난 숫자의 뉴욕 경찰이 동원될만한 살인극을 가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인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시계공의 범행이 가짜이고 해프닝에 불과했다는걸 구태여 드러낼 이유는 없어요. 테러를 위해서라면 그냥 연쇄살인극을 위장하는게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요? 구태여 아는 사람을 늘릴 이유도 없고, 베이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짜 동기 등 시계공의 모든게 가짜라는게 드러나는 것도 시간 문제인데 말이지요.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여 아멜리아 색스를 연쇄 살인범에 의한 것으로 가장하여 살해하려는 의도였다고 중간에 설명되지만, 이는 시계공이 베이커의 범행은 실패하게끔 총을 조작했다는 이야기 전개를 보면 역시나 합리적이지 않아요. 차라리 링컨 라임과의 대결을 위해 도전한다는걸 보다 명확하게 표현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습니다만, 비리 경찰 베이커와 아멜리아 색스의 아버지 이야기를 빼고 350~400 페이지 정도로 이야기를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13/03/03

본컬렉터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2.5점

본컬렉터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시가 UN 평화회의 개최로 축제 분위기에 젖어있던 중, 순찰 경관 아멜리아 1색스는 공터에서 살점이 모두 발라진 채 뼈만 남겨진 손을 발견했다. 주위에1는 살인범이 자신을 쫓으라는 듯 남겨둔 증거물들이 남아있었다. 전직 뉴욕시경 과학수사 국장 링컨 라임은 사고로 인한 전신마비로 3년 동안의 침대 생활에 지쳐 안락사를 꿈꾸고 있었는데, 옛 동료가 내민 사건 현장 보고서에 탐정 기질이 발동하여 사건 의뢰를 수락했다. 링컨은 아멜리아를 파트너로 삼아 '본 컬렉터'와의 두뇌 싸움을 시작하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의 기념할만한 제 1작. 덴젤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영화를 먼저 감상했었기에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으나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 리스트를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우선 전신마비의 천재 범죄학자 링컨 라임의 캐릭터가 잘 살아있다는 점입니다. 전신마비를 저주하며 죽음을 갈망한다는 설정도 좋고, "방이 너무 추워지면 콧물이 흐른다. 이건 마비 환자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일이다." 같은 묘사 덕분입니다. 또한 범죄학자로서의 전문가적 지식이 빛나는 범인과의 두뇌 게임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범인이 고의로 남겨놓는 단서와 그것을 밝혀내는 과정이 치밀하면서도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범인의 미션을 클리어하면서 하나씩 단서를 모아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마지막 보스전에 돌입한다는 점은 흡사 게임과 같은 재미가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전개지만, 서스펜스가 느껴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보스전에서 링컨 라임과 본 컬렉터의 한판 승부의 결말, 즉 링컨 라임의 스킬은 단 한개 뿐이지만 그것을 아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역전 한판승을 거둔다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많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사건의 전개와 동기가 너무 작위적입니다. 특히나 본 컬렉터가 희한한 단서를 남겨놓았다 하더라도, 경찰이 링컨 라임에게 사건 조사를 의뢰한다는건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짓을 했는지부터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미션도 왠만하면 클리어하기가 불가능했을터라 레벨 보정(?)은 어떻게 가늠했는지 알 수가 없고요. 이래서야 정말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는 설정일 뿐이죠.

본 컬렉터에 대한 중요 복선도 중반 이후에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리 와닿지 않습니다. 정체는 너무 뜬금없었고요.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앞선 단서에서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한 탓입니다. 그나마 딱 하나 등장하는 정보, 슈나이더 - 테일러는 말장난에 불과해 보였거든요. 애시당초 왜 뼈를 모으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그 외에도 꽤나 매력적인 링컨 라임에 비해 현장 감식가로는 초보자이지만 정의감과 행동력이 빛난다는 아멜리아 색스 캐릭터는 평범하고 진부하다는 것도 약점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릴러로 평균 이상의 재미는 있으나 아주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솔직히 행동의 제약이 있는 천재가 초보자라 할 수 있는 여성과 컴비를 이루어 연쇄 살인범을 쫓는다는 설정부터가 "양들의 침묵"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니까요. "양들의 침묵"을 읽었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2025/05/25

케임브리지 살인사건 - 케이트 앳킨슨 / 임정희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현대문학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케이트 앳킨슨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잘 몰랐던 작품이지만,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에 선정되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세 개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초반, 한 가족의 뒷마당에서 여덟 살 막내딸 올리비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노환으로 사망한 아버지 빅터의 책상 서랍에서 올리비아의 인형 '블루 마우스'가 발견되자, 이에 의문을 품은 올리비아의 언니들인 줄리아와 아멜리아가 탐정 잭슨 브로디에게 진상 조사를 의뢰하지요. 두 번째는 10년 전, 테오의 딸 로라가 출근했던 사무실에서 노란 골프복을 입은 남자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던 사건입니다. 테오는 잭슨 브로디에게 진범을 찾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세 번째는 산후우울증과 남편과의 불화 끝에, 남편을 도끼로 살해한 여성 미셸의 이야기입니다. 출소한 미셸, 그리고 사라져버린 갓난아이 탄야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지요. 

이 세 가지 사건들 모두 상당한 흥미를 자아냅니다. 중요한 장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솜씨 덕이 큽니다. 빅터의 책상 서랍에서 올리비아의 애착인형이 발견되었다는걸 알리는 장면, 산후 우울증이 극에 달한 미셸이 도끼를 집어드는 장면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후의 사건 전개들 역시 독립적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 주고요. 그래서 한 번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들이 잭슨 브로디를 중심으로 교차되고 얽히며 하나의 큰 이야기로 수렴되는 전개도 좋습니다. 브로디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사건의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나가고, 인물들 간의 숨겨진 관계와 과거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밝혀내는 과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거든요. 브로디 자신의 상처와 삶의 궤적 역시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복잡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탐정 잭슨 브로디와 랜드 자매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한 현재 심정을 드러내는 섬세한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특히 혼란스러운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심리 묘사는 이 소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는걸 잘 보여줍니다.
인물 묘사도 매우 입체적이에요. 등장인물 모두가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고, 그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등장인물들 모두가 마지막에 치유되고 구원받는 서사 역시 납득할 만한 과정으로 묘사되고요. 또한 잭슨과 딸 말리, 잭슨과 노부인 빈키, 잭슨과 랜드 자매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관계도 매력적이며, 말리는 특히나 귀엽고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묘사 덕분에 영국 '인디펜던트'는 “장르를 초월한 복잡한 이야기 구성과 인물심리 묘사가 인상적”이라 평했고, '가디언'은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실은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교한 심리 소설”이라 언급했겠지요.

다만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읽는 독자라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는 단점은 분명합니다. 빅터가 올리비아의 인형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당연히 그가 올리비아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상은 큰 딸 실비아가 그날 밤에 올리비아를 깨워 놀려고 하다가 입을 막아서 올리비아가 질식사했고, 빅터는 올리바이의 사체를 이웃 빈터의 집 정원에 파묻었던 겁니다. 이는 빅터의 성폭행으로 정신분열을 일으켜고 지금은 수녀인 실비아의 증언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빅터가 소아 성애자가 아니라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정신분열 초기 증상을 보이던 실비아가 범인이었을게 뻔해서 의외성도 없고요.
테오의 딸 로라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더 한심스럽습니다. 로라를 쫓아다니던 옛 선생 이웃집 사람이 범인이었다는건데, 10년 뒤에 탐정이 간단한 조사로 알아낸 진상을 왜 당시 경찰 수사에서는 드러나지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셸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셸이 남편 키스를 도끼로 살해한게 아니라, 미셸의 여동생 셜리가 언니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미셸이 갓난아기와 아끼는 동생을 위해 죄를 뒤집어 썼다는 진상은 나름 반전이지만,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냥 캐롤라인(과거에 미셸이었던)의 회상으로만 그려낸 방식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잭슨 브로디를 중심으로 이 사건들이 모두 얽히는 전개는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잭슨에게 줄리아와 아멜리아 랜드 자매가 사건을 의뢰했는데, 이 자매의 옛집이 하필 빅터의 과거 의뢰인이자 지인이었던 늙은 노부인 빈키의 바로 옆집이라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빈키는 자매의 과거 회상 속에서도 ‘마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 잭슨에게 미셸의 여동생 셜리가 탄야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는데, 탄야는 로라 사건의 진범을 찾아달라고 잭슨에게 의뢰한 테오를 구해준 노숙자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임브리지에 탐정이 잭슨 브로디 한 명뿐인 것도 아닐 텐데, 이처럼 모든 인물이 하나로 연결되는 관계도는 너무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미셸이 출소한 뒤 신분을 바꿔 시골 대지주 귀족의 아내가 되었다는 설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사건을 저질렀을 당시의 심리 상태나 이후의 인생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인생 전환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은 탓입니다. 또한 셜리가 20년 이상이 지나서야 탄야를 찾아나선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개연성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세 가지 사건 중 미셸 사건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빈키의 유산 상속 문제로 인해 잭슨 브로디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이야기 역시 이야기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는 느낌이라서 빠지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고요.

작품 전반에서 성적인 언급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등장하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등장인물 중 아멜리아의 욕구 불만과 정서 불안은 나름 설명해주지만 그 외에는 상징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적절하게 활용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일 뿐인 로라가 처녀가 아니었다는건 전혀 중요한 정보도 아니니까요.  빅터가 친 딸을 성폭행한 성범죄자라는 설정도 식상했고,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반복되면서 싼티만 물씬 납니다. 마음에 들면 곧바로 섹스부터 한다는 식의 묘사도 지나쳐보였어요. 이게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인 걸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심리 중심의 문학 추리소설로, 인물 묘사와 감정선이 탁월하며 사건 간 연결 구조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추리소설'로는 별다른게 없고,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운 인물 관계나 개연성이 부족한 전개와 과도한 성적 묘사 등은 몰입을 방해합니다.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26/03/29

캐시 아웃 (2024) - 렌들 에멧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페이드 에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전설적 도둑 메이슨은 FBI 잠입 수사관 아멜리아에게 푹 빠졌다가 체포될 뻔한 다음 은퇴를 택했다. 그러나 자신을 뺀 일당이 동생 숀의 주도로 벌이던 암호화폐 강탈 작전에 문제가 있다는걸 알고 현장으로 향했지만, 곧바로 경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메이슨은 협상 전문가로 나타난 아멜리아와 밀땅을 벌이면서도,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한 플랜B를 고민하여 결국 회심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는데...

넷플릭스에 떴길래 별 생각없이 감상한 영화입니다. 오랜만에 본 존 트라볼타는 반갑더군요. 잔혹하거나 무겁게 끌고 가지 않아서 가볍게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존 트라볼타와 크리스틴 데이비스의 중년 로맨스도 귀여워요.

그러나 그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습니다. 은행을 노리는 케이퍼 무비 장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범죄 계획이 케이퍼 무비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형편없는 탓이 큽니다. 숀의 계획이라고는 은행장을 데리고 개인 금고를 여는 것 뿐이었으니까요.

그 이후의 전개 역시 치밀한 준비나 단계별 장애물 돌파가 아니라, 우연과 억지로 상황을 이어 붙이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메이슨 일당은 개인 금고 안에서 특정 숫자가 찍힌 사진을 확보하고, 그것이 살리자르라는 거물 독재자의 비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개인 금고 속 사진에 표시된 숫자로 거대한 국제적 비밀에 접근한다는 설정부터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고, 애초에 그런 민감한 자료가 왜 그런 방식으로 보관되어 있었는지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침 은행장이 개인 서버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는 설정도 뜬금없고, 그가 메이슨 일당을 그 장소까지 안내하는 상황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냥 모른다고 우겼으면 됐을텐데 말이지요.

결말은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음의 결정체입니다. 메이슨 일당은 결국 경찰 특공대에 포위되고, 정상적인 범죄 영화라면 이 지점에서 가장 치밀한 탈출 설계나 마지막 반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플라워스라는 살리자르의 부하를 불러낸 뒤, 그와 협상하는 방식으로 이 상황을 정리해 버립니다. 그것도 메이슨의 요구가 꽤 무리한데도 불구하고 플라워스가 이를 선뜻 들어주는 식이라서, 관객 입장에서는 긴장감보다 허탈함이 먼저 듭니다. 수많은 경찰과 특공대가 현장에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입을 막았는지, 어떤 식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는지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또한 경찰에게 포위된 상황임에도 느릿느릿한 전개는 분통터질 정도이며, 액션도 뭐 하나 눈에 띄는게 없습니다. 공간도 작은 은행 내부가 거의 전부라 돈을 들인 티도 나지 않아요. 한마디로 별점 1점도 아까운 완벽한 망작입니다. 케이퍼 무비의 외형은 빌려 왔지만, 장르를 이루는 핵심인 계획의 정교함, 실행 과정의 묘미, 반전의 설득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시하고, 진행 과정도 엉망진창이며, 중요한 설정과 결말까지 납득하기 어려워 장르 영화로서의 재미는 전무합니다.

2006/12/06

나는 전설이다 - 리쳐드 매드슨 / 조영학 : 별점 3.5점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표제작 중편 이외에 10편의 단편이 같이 실려 있는 중단편집. 이 바닥에서는 유명하지만 호러 계열은 취향이 아닌지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형의 지인이 대여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읽게된 책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제 취향때문에 안 읽었더라면 큰일날뻔 했어요.
일단 표제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뱀파이어 호러물 "나는 전설이다"는 정말 대단한 작품으로 여러모로 생각해 볼 부분이 많더군요.
중편이긴 하지만 하나의 긴 기둥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4개의 시즌으로 구분하여 각 에피소드별로 나뉘어져 있는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살아남은 강아지 에피소드가 제일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만 다른 에피소드들도 전부 보통 이상입니다.
바이러스가 일종의 공기로 전염되는 것이라는 것이라던가 주인공이 뱀파이어 바이러스에 어느정도 면역이 있다는 등의 설정부터 쓰여진 시기를 생각한다면 굉장히 획기적이고 특이하며 홀로 집을 요새처럼 꾸며놓고 거의 좀비와 같은-사고(思考) 없는- 뱀파이어들과 싸운다는 설정은 후대 다른 많은 작품들, 특히 좀비물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또한 혼자서 뱀파이어들을 퇴치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의 리얼함이 정말 생생합니다. 읽다가 어느새 감정이입하게 될 정도로 말이죠.
아울러 뱀파이어라는 이질적 존재에 대한 나름의 과학적인 전개도 곁들여서 재미를 더하는데 주인공이 뱀파이어를 퇴치하기 위해 마늘과 십자가, 햇빛에 대해 여러가지 연구를 하는 부분, 또 그들의 라이프사이클(?)을 파악하고 낮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존과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구하고 만드는 부분 등은 리얼하면서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딱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 즉 작품 후반부에 중간존재(?) 격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영화적이고 작위적인 설정이었어요. 이 여성이 등장하지 않고 더 묵직하게 끝나면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모두가 비정상인 곳에서 혼자만이 정상이면 그 혼자가 결국 비정상, 괴물이라는 주제는 묵직하게 전달됩니다. 외눈박이 마을에 두눈박이가 가면 안되는 것 처럼요. 제목 그대로의 주인공 네빌의 독백이 정말로 와닿는, 재미도 있으면서도 작가의 철학과 주제가 잘 전달되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다른 단편들도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덧1 : 영화 "오메가 맨"의 원작인지는 몰랐는데 확실히 영화는 많이 달랐었죠. 영화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등장해서 주인공의 고독을 극대화시키지 못했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이번에 다시 영화화 한다는데 주인공 네빌의 절망과 음울한 분위기를 얼마만큼 잘 살릴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주인공 역으로 윌 스미스는 영 아니라는 생각이...
덧 2 : 읽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이마 이치코의 걸작 단편선 3권 "외딴섬의 아가씨"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 "침묵"이 생각나네요. 정상인인 듯(?)한 한 마을에 동굴을 통해 찾아온 이웃 마을 마법사의 이야기인데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주제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던지기 놀이 :
작은 마을의 카니발. 탁구공을 던져 어항안에 집어넣으면 상품을 주는 코너에서 한 남자가 연달아 탁구공을 집어넣기 시작한다.
사소한 작은 일상에서 점차 커져나가는 스릴과 공포를 잘 나타낸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결말이 약간 황당하긴 하지만 전개가 상당히 매끄럽고 탄탄하네요.

아내의 장례식 :
굉장히 짧은 꽁트 형식으로 내용 요약이 어렵지만 유머러스하고 섬뜩한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른바 "기묘한 맛" 류의 단편입니다.

죽음의 사냥꾼 :
아멜리아는 서른이 넘어서도 어머니에게 속박당한채 자유스럽지 못한 삶을 산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친구 아서에서 선물하기 위해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인형이 주술걸린 사슬이 벗겨져 그녀를 습격하는데...
스티븐 킹 느낌이 물씬 나는 호러물입니다. 약간의 배경 및 캐릭터 소개를 제외한다면 거의 전편에 걸쳐 주인공 아멜리아와 죽음의 인형의 사투를 다루고 있어서 깊이는 좀 없지만 내용 자체는 무척 재미납니다. 공포스럽기도 하고요. 그러나 마지막 결말에서의 반전은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드네요.

마녀의 전쟁 :
P.G 센터의 일곱명의 예쁜 소녀들은 사실 마녀로 적군을 마법으로 습격하는 작전을 시작한다.
굉장히 짧은 작품으로 마녀들의 저주와 술법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라 그다지 알맹이는 없습니다. 단지 아이디어만 좀 기발하달까... 작가의 이력에 TV시리즈 "환상특급" 원작을 여러편 썼다는 내용이 있는데 정말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영상화가 더 어울릴법한 소품이었습니다.

루피 댄스 :
순진한 소녀 페기는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건달인 버드와 렌, 그리고 렌의 파트너 바바라와 같이 금지된 우범지역 세인트루이스로 놀러가 "루피댄스"를 처음 접한다.
뭔가 전쟁이나 다른 이유로 약간 맛이간 세계를 무대로 해서 황폐하고 무절제한 젊은이들을 그린 작품. 초반부의 맛간 젊은이들 묘사는 스티븐 킹 작품의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데 괴물이 등장하는 등의 공포로 이어지지는 않고 "루피댄스"라는 기묘한 춤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끝납니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SF적인 몇몇 설정과 대사는 재치있지만 그다지 생각보다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어차피 제가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건지 무절제한 청춘 이야기는 식상하기도 했지만요.

엄마의 방 :
짧기도 하고 내용 요약이 힘든 작품이지만 나름 반전이 있는 소품입니다. 역시 "기묘한 맛" 류일까요? 루스 렌들 여사의 단편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드 하우스 :
한때 작가를 꿈꾸던 크리스는 허름한 집에서 결코 끝나지도 못할 소설을 붙들고 사는 말단 영어 강사로 삶에 대한 그의 분노가 너무 커져 그의 아내 샐리가 그를 떠난다고 통보한다.
분노와 성질이 누적된다는 굉장히 이색적인 아이디어로 설득력있게 쓰인 작품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말까지 깔끔해서 무척 마음에 드네요. 이 책의 단편들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장례식 :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 앞에 에스퍼라는 작자가 나타나 최고급 관을 주문한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소재이긴 하지만 무척 유머러스할 뿐더러 끝까지 유머의 끈을 놓지 않아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역시 영상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은 "환상특급"류의 작품 이었습니다.

어둠의 주술 :
의학박사 제닝스는 자신의 딸 패트리시아와 약혼한 피터가 광분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피터가 주술에 걸렸다고 이야기 한 덕분에 자신의 친구이자 주술의 권위자인 대학교수 하월박사를 불러 그를 치료하려 하는데...
주주 주술이라는 정체불명의 주술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주술에 대한 상상력과 그것을 묘사하는 내용은 리얼하고 생동감있지만 그다지 알맹이는 없는, 이색적인 소재에 많이 기댄 범작입니다. 괜히 길기만 기네요.

전화벨 소리 :
밀만은 새벽 3시에 걸려오는 전화때문에 미칠 지경. 그의 정신과 의사 팔머 박사의 조언대로 전화를 받아보지만 상대방은 정부 요원이니, 발명가니, 아버지니 하는 헛소리를 계속 해 대는데...
이 작품 역시 호러라고 보기엔 약간 썰렁하지만 나름 서늘한 맛이 있는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이색적이고 기발하면서도 서늘한 소재와 전개, 그리고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23/04/01

돌원숭이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1.5점

돌원숭이(THE STONE MONKEY)(개정합본판)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불법 밀항을 주선하는 스네이크헤드 중 고스트는 가장 악랄한 인물로 수많은 사건을 저질러 왔었다. 그를 잡기 위해 인터폴 적색 수배령이 내려졌고, 이민귀화국 INS와 연방 FBI, 뉴욕주 수사관 합동 작전이 시작되었다. 자문역으로 참여한 링컨 라임 덕분에 미국 해양 경비대는 밀항선을 발견했으나, 고스트는 배를 밀항선 승객, 선원들과 함께 폭파시키고 탈출했다. 
링컨은 자기가 배의 위치를 알아낸 탓에 승객과 선원들이 희생되었다고 자책하며 고스트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고스트는 운 좋게 탈출한 승객들까지 죽이려 암약했고, 그 와중에 링컨과 친구가 된 유능한 중국인 공안 경찰 소니 리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니는 죽기 직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링컨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남겼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 네번째 작품. 설정은 다른 시리즈들과 동일합니다. 악질이지만 유능한 범죄자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거든요. 이번에는 중국인 불법 밀항 브로커 고스트가 링컨 라임과 대결합니다. 제목의 '돌 원숭이' 부터가 손오공을 뜻할 정도로 중국 관련한 소재와 설정이 듬뿍 담겨있는게 특징이에요. 링컨 라임과 중국 공안 소니 리가 바이주를 마시며 바둑 대결을 벌이는 장면처럼요. 차이나타운에서의 중국인 범죄자 이야기의 클리셰들과는 다르게 중국 문화 혁명, 반체제 인사 등 사회적인 이야기가 가미되어 있는건 나름 진보한 측면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런 이국적인 설정 외에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전개가 굉장히 억지스러웠습니다. 불법 밀항 브로커 정도가 링컨 라임의 상대가 될 수 없기에, 무리하게 스케일을 키운 탓이지요. 예를들어 미국이 아무리 치안이 허술하다 하더라도, 대놓고 살인을 저지르고 - 푸저우통의 회장 지미 마 살해, 고스트를 배신하고 달아났던 제리 탕 살해, 백주대낮에 우씨 일가를 습격하려던 사건, 고스트의 거처였던 고급 아파트에서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 버젓이 도망갈 수 있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차이나타운 내에서야 그랬다쳐도, 백주대낮의 거리나 고급 아파트에서 손쉽게 탈출한다는건 말도 안돼죠. 
고스트의 정체가 존 성 박사였다는 반전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고스트는 처음에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성 박사를 살해한 뒤, 혼다 차를 훔쳐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차를 숨기고 난 다음, 의도적으로 죽을 뻔 한 척 하다가 경찰에게 구조된 후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말인데..... 고스트는 뉴욕 한복판에 은신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차로 숨어드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라고 수사팀도 이야기하고요. 몰래 뉴욕으로 숨어들어 은신처로 향하면 됐을걸 왜 경찰과 엮여서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죽을 뻔 하면서까지 말이지요. 망명이 허용될 정도로 유명한 반체제 인사였다면 누군가 알아채는건 시간 문제였을테고요. 경찰 보호를 받고 난 뒤로도 다른 밀항 승객들과 혹시라도 만나게 되었다면 바로 정체가 탄로났을겁니다. 
고스트가 마지막에 창씨 가족 거처로 향하는 색스와 동행하며 창씨 가족과 경찰을 죽이고 섹스를 납치할 계획을 짜는 것도 어이가 없었어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고스트가 가짜 존 성 박사였다는게 바로 드러났을테니까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체포 시 마지막 결말에서처럼 '콴시'에 따른 석방도 기대하기 어려웠을겁니다. 미국인 경찰을 죽인 외국인 범죄자를 풀어준다는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뜬금없었습니다. 고스트가 푸젠성 정치부와 결탁하여 반체제 인사를 밀항을 위장하여 살해해 왔다는 진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설득력도 있고요. 하지만 미국 해안까지는 온 다음에 살해해서 없애려고 했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어차피 죽일거였다면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어요. 식량과 연료를 소비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항구에서 승객들을 모두 살해하고 시체만 처리했다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드래곤 호'의 양심적인 선장과 승무원들을 속이려고? 미국 해안에서 죽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까요? 배를 폭발시킨 뒤, 곧바로 승객들을 죽이려 나선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혼자 탈출한 뒤, 조용히 죽이면 됐을텐데 미국 경찰이 쫙 깔린 해안가에서부터 총질을 한다는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죠. 실제로 제리 탕의 배신으로 위험에 처했었으니까요. 여러모로 무리수였습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아멜리아 색스의 조사에 따른 링컨 라임의 추리라는 기본 뼈대는 지키고 있기는 합니다. 몇 안되는 단서를 가지고 고스트의 위치를 좁혀나가기는건 볼만하고요. 그러나 결정적 상황은 모두 운과 우연에 의해 발생합니다. 링컨 라임이 활약한건 밀항선의 위치를 추리해 낸 것과, 우씨 일가 부인이 패혈증을 앓고 있을거라고 추리하고 그 행적을 밝혀낸 것 두 가지 정도 뿐입니다. 고스트의 은신처만 해도 어떤 아파트인지까지는 좁혔지만 결국 은신처가 드러난건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덕분이었죠. 고스트가 존 성 박사였다는걸 알게된 것도 소니 리가 죽어가면서 돌원숭이 목걸이 흔적을 부여잡았던 덕분이었고요. 소니 리가 이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면, 링컨 라임이 창씨 가족의 거처를 알아냈다 한들 아멜리아 색스의 납치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캐릭터들도 별로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별로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메인 빌런 고스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국인 캐릭터들 모두가 뻔하고 평면적이에요. 소니 리는 외국 독자가 보기에는 독특하다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전형적인 홍콩 영화 속 마초 형사를 따온 캐릭터로 느껴졌습니다. 이른바 '킬링 포인트'를 쌓아가며 죽음으로 이르는 전개도 뻔했고요. 거기에 더해 중국의 격언을 들먹이는 모습은 '찰리 챈'을 연상케 했습니다. 
나름 풍수에 주목하는 등의 활약은 있지만, 이 역시 억지로 끝나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풍수 전문가를 찾다가 고스트와 마주치는건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과했거든요. 애초에 이 시점에 고스트가 풍수 전문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문화 혁명에서부터 비롯된 고스트의 악행, 창씨 가족의 갈등이라던가, 우씨 일가의 이야기 등은 이야기 전개에도 불필요했을 뿐더러, 불법 이민과 가족에 대한 흔해빠진 담론을 반복할 뿐이라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뭔가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 같은데 작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헐리우드 양산형 범죄 스릴러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렇게 하면 깜짝 놀라겠지?" 라는 생각으로 의외의 범인을 드러내는데 촛점을 맞춘 나머지, 다른 부분의 설득력이 헐거워진게 아닌가 싶네요. 앞으로 이 시리즈도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25/06/20

아이가 없는 집 - 알렉스 안도릴 / 유혜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산림재벌 페르 귄트(PG)는 사립탐정 율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시체 사진의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회사 주주총회 이후 만찬 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필름이 끊겨, 사진이 찍힌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PG는 사진 속 피해자가 자신의 형 베르테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의 시골 저택 ‘만하임’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옆에 위치한 맥주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저택에는 자정부터 경보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에, 사진은 저택 부지 내, 특히 맥주 공장에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아와 시드니는 저택에 머무르며 수사를 이어갔고, PG의 사촌 형제인 비에른, 안드레, 시리를 만났다. 비에른과 안드레는 과거 베르테르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만하임을 팔자는 문제로 PG 부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막내 시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PG의 아내 모니카와는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호수 위로 베르테르의 시체가 떠올랐고, 부검 결과 그는 일요일 오후 3시에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모니카는 시리와 함께 있었고, 안드레는 애인과 있었으며, PG와 비에른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율리아는 장애가 있는 줄 알았던 비에른이 실제로는 홀로 걸을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맥주 공장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거두었고, 우여곡절끝에 진상을 깨달은 뒤 베르테르의 장례식 날 관계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추리쇼를 펼쳐 범인을 지목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현대 스웨덴 장편 추리 소설. 사립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복고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들이 율리아의 추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풀이됩니다.

1. 베르테르는 왜 전 재산을 시리에게 남겼는가?
→ 베르테르는 시리를 동생이자 애인, 그리고 자기 소유물이자 희생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 PG와 베르테르의 아버지 쉴베스테르는 아내 린네아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해서, 갓난 딸 시리를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린네아는 자식을 빼앗긴 상실감에 자살했고, 시리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베르테르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시리를 농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2. 베르테르는 왜 살해당했는가?
→ 모니카가 베르테르와 맥주 공장에서 만날 때 시리와 동행했었습니다. 베르테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장소에서 1의 사실을 알게 된 시리가 분노에 휩싸여 베르테르를 살해했습니다.

3. 범인은 누구였는가?
→ 주범은 시리였고, 모니카는 공범이었습니다. PG에게 전송된 베르테르의 이메일을 숨기고, 공장 열쇠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는 모니카뿐이었습니다. 범행 후 두 사람은 범행 시간에 함께 보트를 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고요.

4. 왜 PG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가?
→ 모니카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울증을 앓고 있던 PG가 자신이 범인이라 오해하고 자살하게 되면, 그의 모든 재산이 모니카에게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5. 왜 시신을 댐에 유기했는가?
→ 숲에 묻었다면 절대 발견되지 않았을 테지만, PG가 탐정까지 불러 자기 범행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 하자 급해진 모니카가 사체가 드러나도록 유도했던 겁니다.

추리는 본격 추리물답게,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단서와 복선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모니카가 일요일에 시리와 함께 보트를 탔다고 말하면서 ‘손에 녹이 묻었다’고 했던 대목은, 열쇠가 녹슬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모니카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유추하는 단서가 됩니다. 피해자 사진을 본 시리가 베르테르라는걸 알아챈 배의 흉터는,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범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또한,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내 휴대폰에 살해된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왔어요. 300여페이지 남짓한 분량도 합리적이고요.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주로 음식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음울하지만 귀족적인 만하임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탐정의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설정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율리아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에서 혼자 생존한 후 PTSD를 앓으며, 타인과 접촉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야기 전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전남편 시드니를 못 잊고 맴도는 묘사 또한 장황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요. 솔직히 중간에 졸 정도였습니다.
율리아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멈춰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가는 디테일과 표정을 포착한다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만화적일 뿐이며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하니까요.  

또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 추리쇼는 극적이긴 하나 설득력은 다소 부족합니다. 시리가 PG와 베르테르의 친동생이었다는 사실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 나머지 추리는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 근거 없이 진행되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비에른이 열쇠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비에른의 형 안드레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네주거나 복제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용인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PG 또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베르테르가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리와 모니카가 범인이라는 사실도 시리의 자백이 없었다면 증명이 어려웠을 겁니다. 사건의 주요 현장인 맥주 공장이 불에 타버려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치밀하게 설계된,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이라는 제목과 작중 대사로 상징되는(핏줄이 사악해서 대를 끊어야 한다!), 일본 고전 변격물에서나 봄직한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콩가루 집안 설정도 와 닿지 않았고, 카리스마와 사악함을 모두 갖춘 최고 악당인 베르테르가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제대로 뭔가 보여줬을만한 설정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 구성은 돋보이지만, 심리 묘사의 과잉과 논리적 비약 등 아쉬움이 많아 감점합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03/27

코핀 댄서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3점

코핀 댄서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컬렉터' 사건 이후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으로 일하는 전신마비 범죄학자 링컨 라임은 시카고 외곽 상공에서 폭발한 민간 제트기 사건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사망자는 거물급 무기상 필립 핸슨의 재판에 증언을 하기로 했던 조종사 에드워드 카니였다. 그러나 라임의 관심을 더더욱 끈 것은 이 사건에 청부살인업자 '코핀 댄서'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코핀 댄서에게 5년 전 부하들을 잃은 적이 있기에 댄서를 잡으려는 라임의 의욕은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이제 남은 핸슨 재판의 증인은 카니의 부인인 퍼시와 동료 헤일. 재판까지 정확히 45시간이 남은 상황, 링컨 라임은 최강의 암살자 코핀 댄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자신의 손으로 댄서를 잡아들일 함정을 준비해야 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제프리 디버의 빅 히트한 전신마비 범죄학자 링컨 라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링컨 라임과 살인청부업자 코핀 댄서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흥미를 자아냅니다.

특히 링컨 라임과 동료들 시점과 살인을 실행하는 청부업자 스티븐 콜 시점을 오가는 구성에서 전해지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스티븐 콜의 현재 행동을 통해 그가 앞으로 범행을 어떻게 저지를지?를 궁금하게 만든 뒤, 이를 알아챈 링컨 라임이 간발의 차이로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뻔하기는 하지만 몰입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스스로는 전화도 걸 수 없는 링컨 라임이 범행 수법을 알았지만 전화를 거는데 실패해서 타겟 중 한 명이 희생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이었다면 Siri로 쉽게 전화를 걸 수 있었을 텐데("스마트 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처럼요), 당시 음성 인식 기술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기도 했고요.
스티븐 콜이 링컨 라임이 장애인임을 알아챈 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장면도 아주 멋졌습니다. 왜 링컨 라임이 강한지를 잘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범죄학자, 법의학자이자 감식 전문가인 링컨 라임이 주인공다운 디테일도 압권입니다. 애밀리아 색스 등을 활용하여 수집한 미량 증거물들을 통해 스티븐 콜을 추적해 나아가는 묘사가 아주 빼어나요. 대체로 범행 과정을 검증하는 정도에 그치기는 하지만, 지문 인식이 불가능한 지문 조각을 긁어모아 하나의 지문을 만드는 등, 실제 수사에 활용하는 장면들도 제법 많은 편입니다. 스티븐 콜 범행에서도 폭탄의 디테일 등 볼거리가 아주 많고요.

허드슨 에어와 퍼시 플레이 시점으로 보여지는 여러가지 비행 관련 전문 정보들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공항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폭탄을 비행기 외부에 부착한다는, 공항 구조를 잘 활용한 아이디어처럼요. 공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에서도 숨어있는 파일럿을 끌어내기 위해 비행기를 쏜다는 발상 등에서 많은 연구와 조사가 뒷받침된 티가 납니다. 무엇보다도 퍼시 플레이가 고도가 낮아지면 폭발하는 폭탄 때문에 마지막 비행에서 겪는 고군분투는 정말이지 인상적이었어요. 범인이 설정한 고도보다 높은 공항 (덴버)으로 향한다던가, 부족한 연료를 근처 사막이 태양빛을 받고 만들어낸 상승기류로 해결한다는 등의 아이디어들도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이야기를 빛내 줍니다. 이 이야기만 가지고도 한 편의 이야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정도에요. 그만큼 드라마와 긴장감이 잘 살아있었습니다.

약간은 서술 트릭을 갖추고 있으며, 두 개의 반전이 존재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야기 구조에서 링컨 라임과 시종일관 대등한 대결을 펼치던 또 다른 주인공 스티븐 콜은 '댄서'가 아니라는게 나중에 밝혀지거든요. 이건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외에도 악덕 사업가 핸슨이 아니라 허드슨 에어 멤버 론 탤봇이 청부를 의뢰했다는 반전도 놀라왔고요.

그러나 반전에 지나치게 집착한 느낌을 전해주는건 조금 아쉬웠어요. 스티븐 콜이 그냥 댄서였어도 이야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론 탤봇이 사장 퍼시를 비롯한 3명의 소유주를 없애고 회사를 가로채려고 했다는 청부 의뢰 동기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론 탤봇의 횡령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단순 횡령과 살인 청부는 급이 다른 범죄인데 말이지요. 잘나가는 항공사의 경영진 중 한명으로 이익을 나누는 것 대비해서 얼마나 큰 이익을 보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동기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3명을 죽이려다가 경찰, 보안관을 포함하여 거의 20여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 미량 증거물로 그가 이 모든걸 꾸몄다는게 증명된다는 것도 무리였다 생각되고요. 끝까지 부인해서 법정까지 갔다면, 아마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겁니다.

또 이야기 전개에 억지가 많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댄서'가 색스에게 총상을 입고 체포되는 마지막 장면을 한 번 볼까요? '댄서'는 원거리 저격을 가장한 뒤, 뒤로 돌아가 기습하려는 작전이 들켜 체포되고 맙니다. 하지만 자리만 조금 높은 곳으로 이동해도 쉽게 색스와 퍼시, 롤랜드를 저격해서 쉽게 죽일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카드를 버리고, 질 수도 있는 별로 좋지 않은 카드를 선택할 이유는 없어요. '댄서'가 체포되게 만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합니다. 

댄서의 전지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한 설정들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댄서가 스티븐 콜에게 살인 청부를 재하청 준 뒤, 그를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댄서는 '조디'라는 약물중독 노숙자로 변장하고 스티븐 콜과 접촉하지요. 그런데 이 때 스티븐 콜이 만나자마자 그를 죽이지 않은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었습니다. 이후, 조디가 배신한걸 알아챈 스티븐 콜의 저격이 실패한 것도 우연이고요. '댄서'가 체포된 뒤 "모험 없는 인생은 없다. 그래도 난 대응책을 강구했다. 스티븐 콜의 잠재적 동성애 성향을 이용했다." 고 링컨 라임에게 떠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디'가 스티븐 콜의 동성애 성향을 알아챈 방법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가 스티븐 콜의 취향이었다는 정보도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되짚어 생각해보면, 에드가 죽은건 어쩔 수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들 생명을 노린다는걸 알고 난 뒤에도 비행에 집착했던 퍼시 플레이 탓에 사건이 커진 탓이 너무 큽니다. 경찰과 FBI가 시키는대로 안전 가옥에 얌전히 있었다면, 사건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거에요. 퍼시는 회사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죽고 나서는 그런건 아무 필요가 없잖아요? 악당 론 탤봇이 회사를 차지했을 수는 있지만, 다른 친구와 경찰, 보안관 들의 희생은 없었겠지요. 그녀는 살아도 산게 아닐거에요.
링컨 라임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아멜리아 색스의 무모함, 그녀가 느끼는 질투심과 링컨 라임과의 러브 라인 등도 이야기에는 별로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네요. 지나치게 헐리우드 식이었달까요?

하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충분히 읽을만 하고, 링컨 라임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한 설정도 잘 써먹고 있으니까요. 영화화되기 좋은 내용인데, 영화 소식이 없는게 좀 신기하군요.

2021/05/22

밤과 낮 사이 1 - 마이클 코넬리 외 / 이지연 : 별점 2.5점

밤과 낮 사이 1 - 6점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자음과모음(이룸)

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단편 컬렉션이라는 책입니다. 장르 문학 단편을 좋아하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볼륨은 풍성합니다. 무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열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 추리물, 범죄물, 스릴러, 액션물에 섬찟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묘한 맛' 계열 등 수록 장르도 다양한 덕분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 마이클 코넬리와 같은 유명 작가들 작품이 수록된 것도 반가웠고요.

하지만 워낙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별 편차가 큽니다. 첫 수록작인 "그들 욕망의 도구"처럼 좋은 작품도 있지만, 뻔한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다던가, 심리 묘사에 치중할 뿐,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등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앤솔러지인데 선정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하여 출간한 것일까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대략 2.5점입니다. 1권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볼륨을 자랑하는 2권도 있는데, 읽어볼지 말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욕망의 도구" 

'나'는 죽기 전, 짐 오빠를 만나 그가 로니 언니를 이용했던 70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1931년, 아버지 가출 후 어려워진 가족을 위해 짐 오빠가 로니 언니에게 몸을 팔게 했었던 사건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몸을 팔았던건 로니 언니가 아니라 짐 오빠 자신이었다는 충격적 반전까지 완벽했던 단편입니다. 탁월환 회상과 심리 묘사는 독자를 반전으로 이끄는 선입견을 잘 쌓아 올려주고요. 

아빠 실종에 관련된 설정은 지금 읽기에는 뻔하고, 짐 오빠의 고백 후 결말까지가 조금 늘어지는 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단편의 맛을 잘 살린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밤과 낮 사이" 

표제작. 주인공이 겨우 열기구에 매달려 있고, 두 명이 열기구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첫 장면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열기구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결국 열기구 속 아이를 잃게 된 아버지이자 살인 강도인 브래들리가 주인공에게 복수심을 품고 습격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탈옥해서 주인공을 습격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 작위적이라는건 단접입니다. “전적이 있는 은행 강도로 풀려난 지 고작 이삼 일 만에 기구를 탈취해서 도와주려던 착한 이웃을 죽게 만든 놈인데, 그래 그놈을 튀게 놔뒀다고요?”라는 주인공 말 처럼 쉽게 이루어진 브래들리의 탈옥, 브래들리가 탈옥 후 주인공 집을 바로 찾아와 주인공을 납치한 것, 마지막 죽기 일보 직전에 사라진 열기구를 발견하는 것 등 모두가 말이지요. 주인공이 브래들리가 3만달러라는 돈을 숨겨놓았을 코인 락커 열쇠를 강탈한 뒤 죽게 만든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주인공의 뉴요커 스타일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이라면, 주인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게 나았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인공이 3만 달러를 거의 손에 넣었지만, 로키 산맥 끝자락까지 몰고 왔던 머스탱이 고장나서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쇼트쇼트스러운 결말로 마무리하던가요.

그래도 도입부만큼은 역대급이며 스릴과 서스펜스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환상특급"같은 TV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책 제본가의 도제" 

베네치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미국인 졸리 매독스는 부유한 괴짜 노인 샌본과 친해진다. 그는 졸리와 여자 친구 루치아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데....

굉장히 뻔했던 작품입니다. 제목과 책 제본에 대한 장인 정신 가득한 묘사, 희귀 서적 수집가와 책 제본가가 루치아의 피부 문신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에서 결말이 쉽게 예상된 탓입니다. 마지막에 졸리가 받은 선물이 인피로 제본된 책이라는것 역시도 뻔했고요. 

샌본과 제본가 주치니가 인피 제본 책을 졸리에게 선물할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졸리가 책 제본에 매력을 느껴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할 거라는걸 알려줄만한 단서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편의적인 전개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다른 재미도 느끼기 힘들어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차라리 졸리는 사실상 이용가치가 없고 루치아의 인피만 중요한 상황인 것 처럼 끌고 가서 결국 졸리가 체포되도록 만드는 결말이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졸리의 여자친구 사체 (머리?)를 여행가방에 몰래 넣어 두는 식으로요.

"스킨헤드 센트럴" 

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뒤 시골 마을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스킨헤드 머리를 한 데일에게 집안 일을 시킨 뒤, 짐 아내의 패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일의 동생 제이슨이 패물을 돌려주는데...

가정 폭력에 따른 범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야기가 명쾌하지 못해요. 동생 제이슨을 폭행한건 형 데일인지? 그렇다면 형 데일을 폭행해서 사과하게 만든건 그 아버지인지? 짐 부부 집에 데일이 불을 지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또 형제의 아버지가 폭력 성향을 간직한채 10여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데일이 저지른 범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데일은 절도를 저질렀고, 이는 맞아도 싼 짓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아이를 매질했다고 짐이 이야기하는건, 그 아버지 말대로 오지랖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에 집에 불을 지른 데일을 육군 훈련소에 보내는 결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당연히 경찰을 불렀어야 했습니다. 방화는 굉장한 중범죄니까요. 이미 성인이 된 데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비교적 길게 설명되는 짐 부부 아들이 죽은 비참한 사고도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데일 가족 이야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데일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이 역시 오지랖이죠.

좀 있어보이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지만, 알맹이는 그닥인 모래성같은 이야기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 

늙은 노파가 온갖 사람들에게 심술궂은 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다는 설정은 고전 영국 추리 소설에 등장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속에서 이런 편지는 은근한 협박이나 스캔들 폭로였던 반면, 이 작품 속 생크스 여사의 편지는 훨씬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이 은근한 심리 서스펜스라면, 이 작품은 현대물답게 스플래터 하드고어물인 셈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 상황 묘사와 엮어서, 독자에게 이 노파는 죽어도 싸다는걸 확실히 알려주거든요.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교사 시절 학생의 게이 성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었어요. 진작에 살해당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에 생크스 여사가 살해되지만, 동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아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끔찍한 범행'과 '처단' 자체의 자극적 쾌감에 비해 이야기가 평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란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첫 남편" 

잘 나가던 변호사 리오나드가 아내의 첫 남편 사진을 발견한 뒤, 자격지심과 질투로 오해를 만들고, 결국 첫 남편 야드만을 죽인다는 범죄극입니다. 비교적 분량이 긴데, 리오나드가 붕괴해가는 심리 묘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긴 만큼 디테일한 묘사는 좋지만, 전개는 평이합니다. 리오나드가 야드만을 죽인다는 결말은 뻔했고요. 아내 발레리도 죽였을 거라는 암시가 살짝 등장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야드만을 죽인 뒤, 그의 렌트카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차안에 있던 야드만의 애견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거나 범행이 드러난다는 결말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도 개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차량이 있었다는 작위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길이만큼 좋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운이 좋아" 

텔레파시 능력자 수키 스택하우스와 마녀 아멜리아 브로드웨이에게 보험 사업을 하는 그레그가 사건을 의뢰했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서류철을 뒤졌는데,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는 의뢰였다.

텔레파시 능력자, 마녀, 뱀파이어, 마술사 등이 나오는 판타지 범죄물로 그레그의 경쟁 업자 중 한명이 그레그의 비정상적인 행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수키 스택하우스가 더듬어 밝혀내는 과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동으로 뒤섞인 상황에 대한 정리도 깔끔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며, 판타지적인 설정과 능력들을 조사 과정과 이야기에 잘 써먹고 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화스러운 설정만큼이나 만화스러운 전개는 아쉽습니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게 많아요. 그레그가 주변 행운을 빨아들여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거야말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충분한 설정인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버지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단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벌어졌던, 더운 날씨에 차 안에 방치되어 사망한 아이 사건이 그려집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게 진상인데, 아내와 남편을 분리시킨 뒤 심문하여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 묘사가 빼어납니다. 아내가 먼저 자백했다며 자백을 유도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이고요. 또 그냥 심증이 아니라 '이미 그만 둔 보모를 재 고용하는 광고를 내지 않은 점' 에 착안하여, 어차피 아이가 죽을걸 예상했다는 추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부모 시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의 동기가 치열하게 드러나지 않는 탓에, 드라마의 깊이가 부족했어요. 전개와 결말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경찰 수사물로는 기본은 하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저명한 해리 보슈 시리즈다웠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개 산책 시키기" 

토론토에 사는 부유한 미시 로라 프랜시스는 개 산책 중에 단역 배우 레이를 만난 뒤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레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남편 로이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정부에게 남편 살인 청부를 맡기지만, 남편이 선수쳐서 정부는 죽고, 선수친 남편도 정부가 의뢰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왔던 -헨리 슬레셔였던가요? - 뻔하디 뻔한 내용이라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로라와 레이가 벌이는 질퍽한 정사 장면 묘사는 그나마의 수준을 더 낮고 저렴하게 보이게 만들고요. 이럴 바에야 뻔해서 짝퉁스러운 반전을 끼워넣지 말고, 포르노에 가까운 싸구려 펄프 픽션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볼 만한 부분이 있었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모자족인" 

부유한 의료기기 사업가 제더버그 마틴이 살해당했다. 스무살이나 어린 젊은 아내 나네트는 정체불명의 거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언니의 전 남자 친구인 카일 헤이에스 형사 밑에서 일하게 된 감식관 테스 캐시디가 주인공인 작품. 

단서, 증거, 동기 모두 애매하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입니다. 테스 캐시디가 몇 가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 귀납법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두가지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불을 두려워했으며, 친아들이 반대하는데도 나네트가 화장을 고집한 이유가 첫 번째, 흉기인 도끼에 찍힌 커다란 엄지손가락 지문이 두 번째입니다. 테스는 도끼에 찍힌 엄지손가락 지문은 고인의 엄지발가락 지문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 것으로 추리합니다.

이 엄지발가락 지문에 대한 추리를 우연히 테스가 알게 된 '모자족인' - 아이가 바뀌는걸 방지하기 위해 엄마의 손가락 지문과 어린아이의 엄지발가락 지문을 찍는것 - 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법의학으로 발가락과 손가락 구분이 불가능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구분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동기가 있는건 나네트와 아들 스티븐 뿐이니 어떤 식으로든 범행은 드러났을테고요. 이런 점에서 현대물보다는 근대물에 더 적합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아울러 테스와 상관과의 관계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뱁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뒷골목 싸구려 범죄극. 주인공이 스트리퍼 뱁스와 함께 마약 전달책을 찾아가 마약을 강탈해오는게 전부입니다.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특기할 만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주인공이 때때로 '십자가'를 본다던가, 대학교를 나왔다던가 하는 기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잠" 

묘지 관리인 그레이브 디거는 과거 마크 틴들이라는 과거 용병이었다. 실수로 포로가 되었었지만, 상관 월터 잭슨의 희생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지에 월터의 시신이 매장되게 되는데, 얼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시신을 모욕하자 그는 용병 마크 틴들로 돌아간다....

그레이브 디거가 용병으로 돌아온다는, 영화로 따지면 캐릭터 탄생을 알리는 도입부 격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각성은 조각내버렸다는 한 마디로 끝이고요. "존 윅"에 빗대어 보면, 자동차와 개의 복수는 하지도 않고, 다시 킬러로 각성해서 집에 쳐들어온 마피아 조직원을 죽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즐거운 응원단" 

고등학교 응원단에 미모의 호랑이 코치가 부임했다. 그녀는 단원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는데, 단원 중 3명은 그녀가 스터드 하사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했다. 코치는 그녀들을 꼬드겨 친해지지만, 3명 중 한 명인 베스의 도발로 결국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치가 불륜을 저지른 뒤 아이들을 입막음 시키려고 억지로 친한척을 한건 알겠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인 베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그녀를 견제한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코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륜남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다? 한국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남 스터드의 친구 프라인이 베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말도 뭔가 싶어요. 죽인 것도 아니고, 설령 이 자리에서는 죽였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게 뻔하잖아요? 볼짱 다 본 막장 인생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되지 않고 답없는 전개와 결말을 그려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로" 

3인조 은행 강도인 잭 일당은 서부 텍사스 일대를 떠돌다가, 교차로에 있는 작고 낡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더브와 로이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둘은 충동적으로 가게 주인인 노부부를 살해한다. 둘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목 잭의 분노가 두려워, 잭에게도 총격을 가하는데....

서부 텍사스의 황량한 묘사, 그리고 작은 가게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묘사가 볼 만했던 범죄 액션극. 가게를 찾은 꼬마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잭이 기사회생하고, 꼬마가 잭의 새로운 동료가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주어진 암시와 내용을 보면 잭은 악마이고, 나이가 들어 쓸모없어진 인간 부하들을 때때로 교체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액션 장면만으로도 별점 2점은 충분합니다.

"악마의 땅" 

소몰이꾼 출신으로 서던퍼시픽 철도탐정으로 일했지만 해고당한 형제는, 핑커튼 탐정사 취직을 위해 바바리 해안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형은 사람을 관찰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셜록 홈즈같은 취미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 메그가 둘에게 수상쩍은 일자리를 제안했다. 구스타프는 동생에게 일행인걸 들키지 말자고 말했고, 찾아간 술집에서 갑작스럽게 구스타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에 대해 기묘한 독촉을 하는 편지에서 시작해서, 편지를 쓴 사람이 형 구스타프와 겪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작품.

사람이 술집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본격물로 셜록 홈즈만큼 똑똑하다는 구스타프 형이 아니라, 힘쓰는 쪽인 동생이 추리를 하는 탐정과 이야기를 하는 화자 역할인 왓슨, 그리고 액션 담당인 브라운 신부의 동료 프랑보우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경구를 떠올리며 추리하는 과정은 홈즈 팬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술집에서 급작스럽게 피아노를 친 이유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이며, 좌, 우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위나 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추리하는 식입니다. 결국 동생은 바닥에 문이 있다는걸 알아내고 형을 구해내게 되지요. 

또 소몰이꾼 1인칭 시점의 말투로 전개하는 묘사, 특히나 중간중간 삽입된 소몰이꾼 감성 유머가 아주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근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 무식한 막노동꾼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탐정 피트 모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닥의 문은 셜록 홈즈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메그의 술집에서 벌어진 다툼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감점 요소이지만, 장점이 명확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구스타프 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킴 노박 효과" 

제목은 주인공이 벌이는 사기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애착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돈을 울궈내는 사기지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 역할에서 따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

주인공의 킴 노박 효과 사기 생각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정조역전세계처럼 나이든 과부들에게 킴 노박 효과를 일으키며 돈을 빼 먹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이게 바로 남녀평등이겠죠. 질퍽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된 범죄와 심리 묘사도 볼거리였습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교님'에게 사로잡힌 주인공이 빠져나온 뒤, 남창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은 설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완벽한 범죄자였던 주인공을 몰락시키려면,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쉽게 약점을 잡혀버려서 인생이 막장에 몰려 버린다면, 앞서 대단해 보였던 사기와 범죄 행각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 작품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버리고 마니까요.

주인공과 성형외과 의사, 킴 노박 효과를 일으켰던 배우, 피해자 등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괜히 복잡하게 보일 뿐, 이야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킴 노박 효과도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랑했던 애인이나 전처, 혹은 영화배우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게 과연 사기일까요? '그 사람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건 당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거짓말로 돈을 울궈내는건 사기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추억에 대한 댓가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들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은 단편에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훨씬 길고 정교한 작품으로 만들었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