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산림재벌 페르 귄트(PG)는 사립탐정 율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시체 사진의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회사 주주총회 이후 만찬 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필름이 끊겨, 사진이 찍힌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PG는 사진 속 피해자가 자신의 형 베르테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의 시골 저택 ‘만하임’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옆에 위치한 맥주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저택에는 자정부터 경보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에, 사진은 저택 부지 내, 특히 맥주 공장에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아와 시드니는 저택에 머무르며 수사를 이어갔고, PG의 사촌 형제인 비에른, 안드레, 시리를 만났다. 비에른과 안드레는 과거 베르테르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만하임을 팔자는 문제로 PG 부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막내 시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PG의 아내 모니카와는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호수 위로 베르테르의 시체가 떠올랐고, 부검 결과 그는 일요일 오후 3시에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모니카는 시리와 함께 있었고, 안드레는 애인과 있었으며, PG와 비에른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율리아는 장애가 있는 줄 알았던 비에른이 실제로는 홀로 걸을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맥주 공장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거두었고, 우여곡절끝에 진상을 깨달은 뒤 베르테르의 장례식 날 관계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추리쇼를 펼쳐 범인을 지목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현대 스웨덴 장편 추리 소설. 사립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복고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들이 율리아의 추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풀이됩니다.
1. 베르테르는 왜 전 재산을 시리에게 남겼는가?
→ 베르테르는 시리를 동생이자 애인, 그리고 자기 소유물이자 희생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 PG와 베르테르의 아버지 쉴베스테르는 아내 린네아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해서, 갓난 딸 시리를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린네아는 자식을 빼앗긴 상실감에 자살했고, 시리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베르테르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시리를 농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2. 베르테르는 왜 살해당했는가?
→ 모니카가 베르테르와 맥주 공장에서 만날 때 시리와 동행했었습니다. 베르테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장소에서 1의 사실을 알게 된 시리가 분노에 휩싸여 베르테르를 살해했습니다.
3. 범인은 누구였는가?
→ 주범은 시리였고, 모니카는 공범이었습니다. PG에게 전송된 베르테르의 이메일을 숨기고, 공장 열쇠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는 모니카뿐이었습니다. 범행 후 두 사람은 범행 시간에 함께 보트를 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고요.
4. 왜 PG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가?
→ 모니카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울증을 앓고 있던 PG가 자신이 범인이라 오해하고 자살하게 되면, 그의 모든 재산이 모니카에게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5. 왜 시신을 댐에 유기했는가?
→ 숲에 묻었다면 절대 발견되지 않았을 테지만, PG가 탐정까지 불러 자기 범행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 하자 급해진 모니카가 사체가 드러나도록 유도했던 겁니다.
추리는 본격 추리물답게,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단서와 복선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모니카가 일요일에 시리와 함께 보트를 탔다고 말하면서 ‘손에 녹이 묻었다’고 했던 대목은, 열쇠가 녹슬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모니카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유추하는 단서가 됩니다. 피해자 사진을 본 시리가 베르테르라는걸 알아챈 배의 흉터는,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범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또한,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내 휴대폰에 살해된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왔어요. 300여페이지 남짓한 분량도 합리적이고요.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주로 음식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음울하지만 귀족적인 만하임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탐정의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설정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율리아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에서 혼자 생존한 후 PTSD를 앓으며, 타인과 접촉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야기 전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전남편 시드니를 못 잊고 맴도는 묘사 또한 장황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요. 솔직히 중간에 졸 정도였습니다.
율리아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멈춰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가는 디테일과 표정을 포착한다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만화적일 뿐이며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하니까요.
또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 추리쇼는 극적이긴 하나 설득력은 다소 부족합니다. 시리가 PG와 베르테르의 친동생이었다는 사실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 나머지 추리는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 근거 없이 진행되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비에른이 열쇠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비에른의 형 안드레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네주거나 복제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용인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PG 또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베르테르가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리와 모니카가 범인이라는 사실도 시리의 자백이 없었다면 증명이 어려웠을 겁니다. 사건의 주요 현장인 맥주 공장이 불에 타버려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치밀하게 설계된,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이라는 제목과 작중 대사로 상징되는(핏줄이 사악해서 대를 끊어야 한다!), 일본 고전 변격물에서나 봄직한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콩가루 집안 설정도 와 닿지 않았고, 카리스마와 사악함을 모두 갖춘 최고 악당인 베르테르가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제대로 뭔가 보여줬을만한 설정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 구성은 돋보이지만, 심리 묘사의 과잉과 논리적 비약 등 아쉬움이 많아 감점합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