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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식탁 위의 한국사 - 주영하 : 별점 3.5점

식탁 위의 한국사 - 8점
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

다양한 음식을 통해 그 음식 및 관련된 역사를 알려주는 미시사, 식문화사 서적입니다. 음식과 문화사 관련 서적을 많이 집필한 주영하 씨의 저서입니다. 무려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역작이지요.

목차는 크게 다음의 5개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개항기" – 다양한 외래음식이 전래된 시기와 그 메뉴들을 다룸
  2. "국밥집" – 설렁탕, 추어탕 등 국밥에서 시작해 비빔밥, 냉면, 만두, 배추 등을 소개
  3. "조선 요리옥" – 유명 요릿집과 고급 요리인 신선로, 탕평채, 전복 등을 다룸
  4. "대폿집" – 서민들의 안식처였던 대폿집, 선술집에서 먹었던 술과 안주 이야기
  5. "해방 이후, 음식의 혼정과 음식접의 글로벌화" – 해방 이후 변화된 음식 문화를 다룸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음식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없을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소개된 요리들에 대해서는 기원과 역사, 당대의 레시피, 시조나 소설·영화 속 인용까지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동안 몰랐던 에피소드들도 풍부하게 담겨 있고요.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일제강점기 당시까지 전복이 굉장히 많이 잡혔다는 것, 편육이 원래 소고기 편육을 의미했다는 것, 전주의 명물인 탁백이국이 콩나물로만 만든 음식이었다는 것, 갈비구이가 원래는 대폿집의 저렴한 메뉴였다는 것, 빈대떡의 어원, 청어 과메기와 꽁치 과메기의 관계 등입니다. 간략하게라도 소개하고 싶지만, 책의 내용이 방대하고 자세하여 요약해서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목에서 기대했던 실제 역사와의 직접적 연계 구성이 아니라는 점, 도판의 부실함, 몇몇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예: "탁백이국", "빈대떡") 때문에 조금 감점하지만, 재미는 물론이고 자료적인 가치도 최상급이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한국 음식 문화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참고서 같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2014/03/28

Q.E.D 큐이디 46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큐이디 46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 큐이디 4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45권은 건너뛰고 46권 리뷰. 50권을 향해 달려가네요. 이번 권에는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실연"

애인 히로시를 소재로 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신인 만담가 아야메의 스승과 라이벌인 거장이 말다툼을 하다가 거액의 현금을 극장 안에 가져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난의 위험성 때문에 현금이 담긴 지갑을 항아리에 수갑으로 묶어 놓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현금은 종이뭉치로 바꿔치기 되어 있었다...

여러 명의 증언을 토대로 그 속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설정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이 설정은 Q.E.D에 한두 번 등장한게 아니죠. 뻔했지만 여러 증언 속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은 여전한 재미를 선사할 뿐 아니라, 항아리에 지퍼를 수갑으로 묶어 놓은 지갑 속 현금을 어떻게 빼냈는지에 대한 트릭도 조미료 역할로는 충분했습니다. 츠노마루와 가메기치의 관계를 샘 로이드의 퍼즐로 설명하는 것도 탁월했고요.

하지만 아야메라는 캐릭터가 나와서 "실연"이라는 결말을 맞게 만든 것은 불필요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기는 합니다. 일종의 성장기나 통과의례로 보기에도 딱히 와닿지 않았고요.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가나와 토마를 끌어들이기 위한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그래도 평균 수준의 작품은 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순례"

일본군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시절,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내의 살인범 재판에 참석하게 된 외교부의 엘리트 우스이는 중국 남창에서 하노이까지 무려 1,000Km를 도보로 이동했다. 운 좋게 탈 없이 재판에 참석하게 된 그는 야마이에게 사형만은 선고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 사건을 일본의 논픽션 작가 우치보리가 취재했는데 원고를 끝내지는 못했고, 우치보리의 사후 원고를 발견한 딸이 진상을 추적하게 되는데...

여러 증언 속 진실을 찾아낸다는 전개는 "실연"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실연"보다도 증언 자체는 훨씬 심플해요. 우치보리의 편집자, 당시 우스이의 부하였던 하쿠로, 그리고 당시 베트남 일본어 통역사였던 구엔의 손녀 3명만 증언하는데, 3명 중 2명은 우스이의 도보 여행은 순례 따위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 하고, 1명만이 순수한 자애심에서 비롯된 순례였을 것이라 답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거짓말을 한 것이 누구인지 뻔해 보이죠?

그래도 역사적 배경이 있는 흥미로운 사건과 결합된, 약간은 역사 추리물 같은 전개는 탄성을 자아냅니다. 시대 배경 덕에 "스파이 활동"을 위한 여정이었다는 설득력 있는 이유가 확 와 닿기도 하고요. 아울러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하면서도 중요한 포인트를 흐리며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만드는 솜씨도 정말 일품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상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왜 범인인 야마이가 자살했는지가 핵심인데, 앞부분에서 하쿠로가 말했던 사건이 의외의 반전 요소가 되는 것이 좋았거든요.

원패턴의 내용이지만,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단점이라고 말하기 힘들지요. 굉장히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전체 별점은 3점. 매너리즘에도 빠져 있고 패턴도 고정되었지만, 재미만큼은 여전하니 참 희한하네요. 다음 권도 기대가 됩니다.

덧붙이자면 사건에만 집중해서 토마와 가나의 관계 진전은 전혀 없이 공기화되고 있다는 점은 오래된 팬으로서 약간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이 둘의 관계도 약간이나마 진전이 있으면 좋겠네요.

2014/03/26

술의 여행 - 허시명 : 별점 3점

술의 여행 - 6점
허시명 지음/예담

술을 주제로 하여 해당 술의 고향을 찾아가는 기행문이자, 그 술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는 미시사, 식문화사, 그리고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레시피집을 겸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정 지역에 대한 기행문과 그 지역 문화재 소개가 결합되어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비슷한 맥락이지요. 개인적으로 미시사, 문화사류의 책을 좋아할 뿐더러 요리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목차는 지역별 16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두 꼭지는 일본의 술문화와 일본기업 월계관에 대해 다루고 있으므로 소개되는 지역은 14지역입니다.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는 안동의 고삼주 이야기입니다. 고삼주는 견훤과 왕건이 고창에서 대치하던 929년 겨울, 주모 안중이 견훤의 병사들에게 먹여 그들을 취하게 만든 뒤, 왕건을 찾아가 공격하라고 알려 대승하게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다는군요. 맛이 쓰면서도 단 탁주로 추정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경주는 당연하겠지만 신라주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목제주령구 각 면에 있는 벌칙들을 소개해주며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이 목제주령구가 복원과정에서 유실된 것은 몰랐었는데, 그나마 실측과 사진을 통해 복제품이라도 전해지는 게 다행이네요. 다음에 경주에 가게 되면 저도 기념품으로 하나 사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희석식 소주가 대세인 현재 시장에 증류주로 당당하게 도전하는 중인 경주법주의 "화랑"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금복주의 계열사이기도 한 경주법주가 독재정권 시절 일종의 특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배경설명까지 친절하게 소개되는데 뭐... 본의는 아니더라도 특혜는 특혜겠죠.

한반도 최초의 포도주는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던지는 무주의 머루주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포도주는 원래 고려시대 원나라로부터 전래되었다고는 하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진짜 포도주는 하멜이 표류했을 때 난파된 잔해에서 건져내었던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클래릿 1통이었다고 하네요. 제주도 관리들에게 상납하였더니 관리들이 맛있다고 5일 만에 다 먹어버리는 바람에 조정으로는 진상되지 못해서 아예 알려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포도주는 "동의보감"과 "양주방"에 실린 대로라면 누룩과 찹쌀 고두밥, 포도즙을 섞어 빚는 중국식이었다고 하고요.
현재 한국 포도주는 "머루"로 만들고 있는데, 이 머루주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무주 지방의 와이너리 4곳 방문기 및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샤또무주의 머루주는 꼭 먹어보고 싶어요. 손수 농사지은 원료로 와인을 빚는 '도메인 와인'이라고 하는데, 주인이 있으면 팔고 없으면 그만 판다는 느긋한 마인드가 마음에 꼭 들거든요. 저자의 말대로 주인이 편안해야 술도 편안한 법이겠죠.

그 외의 이야기들도 모두 재미있고, 소개되는 술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조 과정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는데 꼭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맛깔난 글솜씨도 좋았고요. 일본과의 술문화 비교라든가 사라져가는 전통술, 누룩도가들의 이야기는 안쓰러움과 함께 전통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단점이라면 사진이 별로라는 점, 그리고 이왕지사 기행문처럼 쓸 것이라면 조금 자세한 지도를 함께 실어주었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복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은 것도 의아한 점이고요. 

그래도 유려한 글과 술에 대한 정보로도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중 저와 비슷한 취향이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 복간본인데 이미 절판되어 있네요. 이유가 무엇일지... 그 정도로 안 나갈 책은 아닌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덧붙여 부록에 실린 술도가 연락처 중 꼭 먹고 싶은 것과 그 연락처를 기록해 놓습니다. 구하기 쉬운 대형 주류업체 술부터 먼저 찾아 마셔봐야겠습니다. 이번 주말은 "화요"와 함께 해 볼까요?

1. "가을국화" - (주) 무학
2. "샤또무주 머루와인" - 샤또무주 와이너리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 46-20 / 063-322-8101
3. "문경 호산춘"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번지 / 054-552-7036
4. "부자" - 배혜정 누룩도가
5. "운해" - (주) 금복주
6. "화랑" - (주) 경주법주
7. "화요" - (주) 화요

2014/03/25

최후의 억만장자 - 박태원

인구 3,400명의 섬나라 트레몰로국은 위생시설이 완비되어 파리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천 마리의 파리가 나타나서, 경찰도 없는 소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억만장자 안단테 모데라토 옹은 범인 체포를 위해 명탐정 셜록 홈스 선생을 초청하는데...

소설가 박태원이 1935년 영화 "최후의 억만장자"를 보고 영감을 얻어 발표한 작품입니다. 즐겨찾는 부끄럼님의 블로그에서 읽고 포스팅합니다.

그런데 읽고 나서 좀 놀랐어요. 첫 번째 이유는 1930년대에 이미 이 땅에서 셜록 홈즈 패스티쉬가 창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홈즈가 수상한 동양 청년을 범인이라 단정하고, 그가 뤼팽의 변장임을 믿는다는 설정을 통해 일종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는 점(심지어 가니마르까지 언급됩니다)이고요. 마지막으로는 박태원 본인의 창작물인 소설가 구보씨가 진짜 탐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존 인물을 탐정으로 내세운 가상 역사 추리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창작물 속 캐릭터를 변주한 또 다른 창작물이 시도된 것은 국내 최초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꽤나 유쾌한 호청년으로 그려져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은 게 안타까울 정도이고요.

설정부터 개그스럽고(등장인물들 이름부터 그러하지요), 추리적으로는 패러디물에 가까운 탓에 딱히 언급할 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파리채와 파리약 분실과 룸바 종남작을 연결시키는 "독일산 파리채"라는 단서는 나쁘지 않더군요.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쓴 느낌이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짧은 꽁트로, 한 십여 분이면 읽을 수 있는 만큼 고전 단편 추리물과 홈즈 시리즈의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당시 한국 추리물인 "괴남녀 이인조""마희"도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좋은 작품을 소개해 주신 부끄럼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14/03/24

기생수 1~8 (애장판) - 이와아키 히토시 : 별점 4점

기생수 애장판 1~8 박스 세트 (완결, 묶음) - 8점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발표된 지 30년을 향해 달려가는 고전 명작. 지금 읽고 감상을 남기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긴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리뷰를 남깁니다."

"칠석의 나라"와 "히스토리에" 모두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이 작품은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더라고요. 취향이 아닌 작화 탓도 있지만, 저의 청개구리 마인드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남이 걸작이라 칭송하면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읽고 나니 역시나 명불허전. 왜 이제서야 읽었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만화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특히 재미와 함께 인간, 그리고 인간성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묵직한 주제를 결합하여 전달하는 솜씨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런 주제의 작품이 이만큼이나 재미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특히나 타미야 료코를 통해 인간성이 사랑과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 장면은 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우라카미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 한 번 더 묻고, 사토미를 통해 답을 알려주는 마무리도 깔끔하고 적당했습니다.

작품의 또 다른 핵심 중 하나인 기생수끼리의 사투 역시 잘 표현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설정이 조합된 두뇌 배틀 형식이 많아 단순 배틀물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는게 좋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신이치가 자신의 몸으로 오른쪽이와 연계 공격(제트스트림 어택?)을 하는 장면처럼요. 기생수 + 강화 인간의 조합이라서, 고토와 같은 특별한 적이 아니라면 웬만한 기생수는 혼자서 때려잡는 게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시청에서 기생수를 제압하는 자위대, 그리고 그들을 도륙하는 고토의 전투도 굉장히 임팩트 있었어요. 카나가 기생수들과 신이치를 과연 구별할 수 있었을지(신이치는 그래도 기생수와는 다른 존재일지)같은 세세한 디테일들도 볼거리였고요.

허나 몇몇 부자연스럽거나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지만 기생수에 협력하여 쓸데없는 인간을 정리하려는 히로카와 캐릭터는 훨씬 중요하게 사용될 수 있었는데 낭비된 듯한 느낌이고, 카나도 비중에 비하면 그다지 효과적으로 소비된 것 같지 않네요. 또 최종보스라 할 수 있는 기생수 고토와의 마지막 결전이 "운"에 의해 끝난다는건 좀 시시했어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환경 보호에 대한 것과 "인간이 가장 나쁘다"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사용되고 언급된 것이라 지금 읽기에는 진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견신"이라든가 "타지카라오"와 같은 유사품과는 격을 달리하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바닥 고전 걸작으로서의 가치는 강산이 두어 번 바뀐 지금에도 유효합니다.

2014/03/22

고르고 13 1~30 - 사이토 타카오 : 별점 2.5점

고르고 13 - 30 - 6점
사이토 타카오 지음/아선미디어

"고르고 13에 대해서"

전설의 만화지요. 관련 글을 읽고 포스팅합니다. 제가 읽은건 국내 출간된 전 30권 버젼입니다.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 내에서 선정한 베스트 에피소드 모음집이라고 소개되네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냉정하고 나쁜 놈인지는 몰랐는데 대단하더군요. 아이건, 여자건, 노인이건, 죽여야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입니다. 피해자가 불쌍한 경우 - 예를 들어 정말로 선한 사람이지만 악당에게 노려진 상황 - 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뢰를 고르고 13이 수락하면 그냥 죽는거에요. 암살자가 피해자에게 동조해서 악당들을 처단한다는 반전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치료해준 의사의 아버지까지 죽여버리니 말 다했죠.

보통 이런 류의 콘텐츠에서 봤었던, 숙적이 친구가 된다던가, 목숨을 노리던 여자가 사랑에 빠져 애인이 된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비슷했던 게 "스파르타커스"라는 동종 업계 경쟁자와 누가 최고인지 한판 승부를 겨루고, 그 승부가 돈 많은 부자들의 유흥거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죽어가는 스파르타커스의 의뢰를 받아들여 부자들을 처치한다는 것 정도? 아주 약간 스파르타커스와의 유대감이 느껴지는, 그나마 인간적인 에피소드였습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저격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먼치킨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인간 병기에다가 못 하는 게 없는 엘리트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군대를 상대로도 이길 뿐 아니라 거의 웬만한 것(예를 들자면 등산 등)은 해당 분야의 프로를 능가할 정도의 실력자로 묘사되거든요. 특정한 에피소드에서는 과장이 심해서 이게 개그 만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실제로 개그적으로 패러디도 많이 되었죠.

이런 점에서는 "분노의 늑대" 오가미 잇토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암살 따위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기는 전혀 어렵지 않을 텐데, 왜 위험한 삶을 살아가는지 살짝 궁금해집니다.

아울러 추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는데, 고르고 13의 과거를 살짝 밝히며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이 등장하는 "세리자와 일가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 기본적인 현장 검증을 망각한 경찰의 실수가 눈에 거슬리지만, 내용 자체는 실제로도 있었던 사례인 만큼 제법 설득력 있었어요.

주인공 직업에 걸맞게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디테일이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습니다. "자칼의 날" 같은 이 바닥 고전이 떠오를 정도에요. 예를 들어 철통같은 보안으로 이동 중인 중국인 망명자를 암살하는 에피소드의 경우, 고르고 13이 레즈비언 킬러의 정체를 알아낸 뒤 레즈비언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 외에도 널리 알려진 여러 가지 사실들 — 절대로 악수를 하지 않음, 누군가 자신의 뒤에 서면 응징함, 의뢰를 위한 방법 등 — 도 실제로 보니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장기 연재가 될 만한 작품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고, 소문만큼이나 국제 정세를 잘 다루었냐 하면 딱히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전설의 작품을 실제로 접한 기쁨도 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03/20

톰슨의 고양이 - 로버트 무어 윌리엄스 : 별점 3점

톰슨의 고양이 - 6점
로버트 무어 윌리엄스/유페이퍼

지구에서 온 탐험대의 대장 톰슨은 도착한 행성에 도시가 존재하지만,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기이한 현상을 접했다.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 채 지구로 귀환하던 우주선 안에서 미지의 바이러스가 발병하고, 선원들이 차례로 사망하자 톰슨은 전원이 죽는 상황을 대비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는데...

고양이 출판사의 무료 e-book 두 번째 작품으로, 종이책으로 환산하면 20여 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입니다.

그러나 짧은 분량 안에서 ‘기 – 문명의 멸망’, ‘승 – 멸망의 이유로 보이는 바이러스 발병’, ‘전 – 지구로의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 ‘결 – 고양이 그랜트의 활약으로 밝혀지는 원인’이라는 전형적인 4단 구성의 깔끔한 전개를 보여주는게 매력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벌새?"라는 병원균 매개체 설정도 신선했고요. 독특한 아이디어와 간결한 전개 측면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단편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소재일 수도 있으나, 분량도 간결하고 무엇보다 무료로 제공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감점할 이유는 없습니다. 완독까지 30분이면 충분하고 SF 단편의 매력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으니, 장르문학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처음 접한 작가인데 꽤 인상적이라 다른 작품이 있는지도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울러 고양이 출판사의 무료 e-book 시리즈 두 권 모두 "고양이"가 제목이자 주요 소재라는 점도 흥미로운 기획입니다. 고양이 출판사의 건승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4/03/19

열세 번째 배심원 - 아시베 다쿠 / 김수현 : 별점 2점

열세 번째 배심원 - 4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다카미 료이치는, 책이 팔리지 않아 궁지에 몰린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그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의 범인으로 일부러 체포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집필해 출간한다는 이른바 “누명 계획”. 다카미는 이 계획에 따라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꾸고, 의도대로 경찰에 체포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체포 직후 상황은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자신이 연루된 사건이 단순한 위장된 범죄가 아닌, 실제 강간 살해사건이며, 결정적인 증거는 그와 피해자의 DNA가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였다.

다카미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모리에 슌사쿠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과 조작된 증거의 진실을 파헤치며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홍루몽 살인사건"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아시베 다쿠의 장편소설로,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두 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전업작가를 꿈꾸지만 실패한 다카미 료이치가 '누명 계획'이라는 이름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꾼 뒤, 가짜 살인사건을 연출해 경찰에 체포되기까지의 과정. 두 번째는 그렇게 체포된 다카미가 뜻밖에도 실제 강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며,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의 법정 투쟁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한번에 읽히는 흡입력이 있어 독자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은 법정물 특유의 긴장감을 잘 살리고 있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설정 역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충분히 이슈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아주 미세한 단서를 활용한 마지막 반전도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을 깨지는 않으며, 무엇보다 DNA 감정이라는 과학적 수사기법의 맹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추리극이나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작가가 스스로 밝힌 대로 “역본격 추리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설득력도, 완성도도 부족해 보입니다. 진상 자체는 그럴듯한 편이지만, 근간이 되는 설정이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도입되지 않은 배심원 제도가 전제된 가상의 세계관이 이 이야기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가공의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SF적 상상력에 기대는 방식으로, 마치 밀실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의 범인이 초능력자였다는 식의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접근으로는 현실 속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완성도 높은 법정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배심원 제도에 대해서 다룬 작품이라면 QED 27권의 "입증책임" 에피소드나 헨리 데커의 "복수법정" 쪽이 훨씬 더 나아요.

또한 이야기의 핵심 장치인 “누명 계획”—조혈간세포를 이식해 DNA를 바꿔치기하는 설정—은 실제 골수이식 사례에서도 확인된 적 있는 방식이라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전제하고 있는 경찰 수사의 허술함이 문제입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듯 혈액이 아닌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다른 유전자 샘플로 검사를 했더라면 바로 들통날 일이기 때문이죠. 물론 작품 속에서는 정치적 개입으로 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변호인 측에서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 사안이기에 서사의 긴장감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결말 역시 지나치게 급하게 흘러가는 해피엔딩입니다. 다카미를 다시 유죄로 만들려는 시도가 왜 실행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미요시 기요히코가 센노 마치코 살인범으로 체포된다는 전개는 작위성의 극치입니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체포가 이루어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고, 미요시 역시 혈액만 바뀌었을 뿐이라면 모발 샘플을 통해 얼마든지 DNA 감정이 가능했을 텐데, 이런 간단한 접근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단순한 해피엔딩보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활용한 보다 치밀한 반전이 있었더라면 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겁니다.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 캐릭터 자체도 아쉽습니다. 의뢰인의 결백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너무나 착한,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인물로 그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나 개성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리즈를 이끌어갈 중심 인물로서의 흡인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근미래 SF 판타지처럼 끌고 갈 요량이었다면 다른 복잡한 설명도 대충 요약하고 길이만이라도 줄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분량은 450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누명 계획"의 핵심 트릭인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한 DNA 바꿔치기라던가 "배심원 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니까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작가가 영향받은 유사 작품들을 소개하는데, 소개된 작품들이 훨씬 재미있어 보입니다.

2014/03/18

노상강도 - 에드 멕베인 / 박진세 : 안타깝지만 별점 2점

노상강도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여성을 노린 연쇄 노상강도 범인이 범행 후 정중한 자기 소개 — "클리퍼드가 감사를 전합니다. 마담" — 로 유명해졌다. 87분서는 검거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한편 순찰경관 버트 클링은 오랫만에 찾아온 친구 벨의 부탁으로 그의 처제 지니 페이지를 도와주려 하나 실패했고, 그 뒤 지니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노상강도 사건과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총력 수사가 진행되는데...

"경관혐오" 바로 다음에 발표된 87분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스티브 카렐라 형사는 작중에서는 내내 신혼여행 중으로 묘사됩니다. 때문에 주역으로는 순찰경관 버트 클링이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경관혐오"에서 총에 맞아 입원했었지요. 내용은 줄거리 요약에 있는 대로 노상강도 사건을 축으로, 지니 페이지 살인 사건이 함께 진행됩니다.

이 중 노상강도 사건은 윌리스 등 형사들의 수사과정이 꽤나 자세하게 묘사되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끄나풀이 등장하고, 불법 도박장에 잠입하고, 심지어 여성 경관을 이용한 함정 수사까지 펼치는 등 수사 방법도 다양하게 선보입니다. 결국 범인을 잡게 된 단서가 함정수사를 통해 입수한 종이 성냥이었다는 식으로 체포까지의 과정도 아주 깔끔한 편이고요. 한 마디로, '발로 뛰는 수사로 확보한 단서를 토대로 한 범인 체포'라는 수사물의 왕도격 전개를 보여줍니다. 범인이 가명이 아니라 정말로 "클리퍼드"라는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경찰 수사가 너무 미진한 게 아니었나 싶기는 하지만요.
유도 고수 윌리스나 폭력 형사 하빌랜드와 같은 형사들의 독특한 캐릭터도 돋보이고, 마이어 마이어가 끝까지 미는 농담 — 고양이 절도 사건과 그 진상인 Instant pussy — 까지 깨알같은 재미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또다른 이야기인 지니 페이지 살인 사건은 영...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에드 멕베인의 또다른 필명인 에반 헌터 명의의 주정꾼 탐정 커트 캐넌 시리즈 중 한 편인 "프레디는 그곳에 (Now Die in It)"와 완벽하게 똑같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을 제외하면 친구가 처제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의뢰하고, 처제가 살해당하고, 처제의 남자를 찾아나서고, 결정적 단서는 받았던 메모였다는 전개와 내용 모두 동일합니다. 시기상으로도 이 "노상강도"가 3년 뒤 발표된 것이니 표절, 혹은 확대 재생산된 작품이 맞는 것이죠. 심지어는 왜 탐정–경찰에게 처제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의뢰하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단점까지 같아요.

물론 자신의 단편을 장편으로 만든 사례가 다른 거장들에게 없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님 등 유사한 전례는 제법 되니까요. 어차피 본인의 작품을 본인이 표절한 것이니만큼 비난하기도 뭐하고요. 허나 최소한 책 소개에서는 언급해주었어야 합니다. 읽다보니 완벽하게 똑같은데, 이래서야 돈을 주고 구입한 독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뒷통수 맞은 기분이에요.

그래서 개인적인 별점은 2점입니다만, 버트 클링 순경의 재담과 클레어 타운센드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그리고 시적인 몇몇 묘사는 좋습니다. 초기작다운 순수한 하드보일드 스타일 전개도 인상적이고요. "주정꾼 탐정"을 먼저 읽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고득점이었을 겁니다.  "주정꾼 탐정"을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아울러, 버트 클링이 이 사건 이후 특진되어 87분서에 형사로 배속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후 작품에 등장하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2014/03/17

CMB 박물관 사건목록 21, 22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과 3점

CMB 박물관 사건목록 21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 박물관 사건목록 22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그간 격조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것은 전통의 강자 중 하나인 CMB의 21, 22권입니다. 24권까지 나와 있기는 하지만...

21권부터 살펴보죠.

"후유키씨의 하루"

동네에서 살고 있던 후유키씨라는 노인의 일상 속 숨겨진 비밀이 무엇이냐는 내용. 잔잔한 전개와 노인이 "선택한 것"이라는 진상은 마음에 들지만 일상계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건성이 있지는 않은 소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호수 밑바닥"

과거 벌어졌던 호수에서의 사고사는 알고보니 물 속에 장치해 놓았던 풍선을 터트린 살인이었다는 이야기. 실제로 이렇게나 잘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이만한 풍선을 장치하는데 고용한 사람들 입막음은 어떻게 했을지, 왜 찌꺼기는 치우지 않았는지 등 소소한 의문도 생기지만 전개도 깔끔하고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엘프의 문"

마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신라를 끌어들여 어렸을 적 부모님을 속였던 사기꾼을 처단한다는 내용. 신라가 마우에게 속아 넘어간다는 점 이외에는 특기할만한 내용 없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

"발렛트의 촛대"

몰타 공화국의 구 기사단장 발레트의 촛대를 둘러싼 이야기. 오래간만에 C.M.B스러운 박물학적 지식 가득한 작품입니다만, 내용이 현실성 없고 동기도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츠키가 기사단장 갑옷을 입고 펼치는 결말도 영 아니었고요.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론적으로 평균 별점은 2점 정도... 추리적으로도, 박물학적으로도 그냥저냥인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22권은

"여름 보충 수업"

태양열 자동차를 파손한 범인을 찾는다는 학교 내 일상계 소품. 

항상 어린아이 같은 신라가 학교 선생님에게 던진 이과계를 위한 명제 —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공부는 인생에 별 쓸모가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기 위해서" — 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입니다. 내용 면에서도 일상계스러운 설득력 가득하고 즐거운 청춘들의 여름 한나절을 다룬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유리의 낙원"

갈라파고스섬에서 벌어진, 밀어를 하던 어부가 다친 채 발견되는데 그를 쫓던 과학자를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기이한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과거 갈라파고스를 방문해 조사하던 다윈에게 벌어진 사건과의 교차 편집이 아주 좋았습니다. 현대의 사건은 일상계에 가까워서 말실수를 통해 간단하게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다윈 사건은 퓨마의 생태라는 나름 박물학적 설정이 들어갔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그리고 결국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결말도 괜찮았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나선 골동품점"

나선 골동품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나선 골동품점의 교묘한 내부 구조를 이용한 트릭이 좋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여러 가지 정보(암모나이트 화석, 피해자의 사진, 관계자의 증언 등)도 공정하게 제공되는 편이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Q.E.D였어도 괜찮았을 트릭과 내용인데, 구태여 스핀오프로 전개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그래서 평균 별점은 3점. 21권은 평균 이하였는데, 22권은 평균보다는 높은, 기대에 걸맞는 수준을 보여주어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작품별 편차가 되도록 없이 고르게 수준을 유지해 주었으면 하지만, 이 정도면 후속권도 기대가 되네요.

2014/03/12

한중일 밥상문화 - 김경은 : 별점 2.5점

한중일 밥상문화 - 6점
김경은 지음/이가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음식 비교를 통해 문화적 고유성과 유전자를 탐색한다는 취지의 책입니다. 같은 재료를 다르게 조리하거나, 같은 조리 방식이지만 다르게 진화한 것 같은 비교 가능한 주제들로 엮여 있습니다. 식은 밥을 요리해 먹는 것의 대명사가 한국에서는 비빔밥이고 중국에서는 볶음밥이라는 차이, 김밥과 스시의 차이, 누룽지를 이용한 숭늉과 누룽지탕의 차이, 빈대떡과 전병(라이빙), 오코노미야키를 비교하여 소개하는 식으로요.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풀어나가는 과정은 요리와 식문화 중심이기 때문에 꽤 재미있습니다. 새로 알게된 정보도 제법 됩니다. "가이세키(회석) 요리"의 명칭 유래처럼요. 누룽지탕의 유래, 고추에 관련된 쓰촨과 후베이 출신 혁명 동지들의 일화 등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중국 4대 미인 요리도 처음 알게 된 것인데, "서시설"은 서시가 희생된 바닷가에서 잡히는 사람의 혀를 닮은 조갯살 요리. 상하이의 "귀빈계"는 포도주로 간을 한 암탉 요리로, 양귀비가 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취하게 만든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초선두부"는 모두부와 미꾸라지를 함께 끓인 추두부탕이고요. 간교한 동탁은 미끌미끌 미꾸라지, 하얗고 부드러운 두부는 초선으로, 두부로 미꾸라지를 요리했다는 직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왕소군의 "소군오리"는 당면으로 오리탕을 끓인 음식이라네요. 상상이 잘 가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단순히 해당 국가에서 그 음식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며, 문화적 고유성과 유전자를 탐색한다는 취지에 걸맞는 수준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음식 진화 방향에 대한 배경은 객관적이라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학술적 근거도 명확하지 않고요. 

책 소개에 - 한ㆍ중ㆍ일 DNA음식, 국민음식이 된 유래와 재료는 물론 음식을 대하는 그 나라 국민의 태도, 정치에 투영된 음식문화, 식생활과 습관 그리고 미용(美容)과 보양식 등을 동원하여 그 흔적과 함께 3국 국민성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존이라는 보편적인 욕구가 독창적 요리로 발전, 각 국 고유의 음식문화로 정착되고 이웃나라와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규범과 정치적 이해 그리고 권력의 기호 등에 의해서 설정된 규칙이 독특한 ‘밥상문화’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 라고 언급되는데, 대체 저런 시각과 논리가 어디에 등장하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럴 바에야 요리, 식문화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과 관련된 에피소드만 실어주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딱히 요리를 비교해서 뭔가 얻어낼 게 없다면 말이죠. 요리 자체가 문화적, 사상적, 역사적으로 강한 의미가 있지도 않으니까요. 아예 주제를 좁혀서 그 주제에 맞는 음식, 요리, 식문화만 걸러내는 게 낫지, 어렵게 주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해봤자 사실 와닿지도 않을 뿐더러 그러한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어려운데 왜 어려운 길을 가려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슷하게 접근했던 주영하 씨의 "챠폰 쟘폰 짬뽕"이나 "음식 전쟁 문화 전쟁"이 떠오르네요.

주영하, 윤덕노 씨의 저서 내용이 인용되는 등 다른 곳에서 읽은 내용도 적지 않고, 오히려 다른 콘텐츠에서 소개한 것과 다른 정보를 전달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특히 "자장면", "짬뽕" 이야기는 아무리 3국을 비교하기 쉬운 소재였다 하더라도 너무 많이 알려진 것이라 후발주자 위치에서 또 소개하기에는 적절치 못했습니다.

소를 잘 먹지 않은 중국과 한국에서 소는 그만큼 중요한 가축이었다고 이야기한 뒤, 바로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소를 세분화하여 먹는다고 소개하는 식의 전개도 좀 어이가 없더군요. 중국이 김치의 종주국임을 주장한다던가, 일본의 기무치도 호시탐탐 김치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던가 하는 식의 국수주의적인 글도 문화사와는 별 상관이 없지 않나 싶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앞서 이야기한 대로 특정 재료, 음식을 주제로 하여 3국의 차이와 소소한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식문화를 재미와 함께 전달하는 취지의 책이 더 나았을 겁니다.

2014/03/10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의 행진 - 브라이언 이니스 / 이경식 : 별점 3.5점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의 행진 - 8점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저명한 범죄관련 저술가 브라이언 이니스의 저서. 출간된지도 몰랐던 책인데, 알고나니 절판되었더군요. 작가의 명성 덕에 항상 읽고 싶다가, 운 좋게 중고 도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역시나 내용은 명불허전! 총 8개 챕터로 고금동서의 다양한 위조와 사기에 대해 집대성하여 알려주는데 정말 기상천외하고 놀라운 사건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조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을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번째는 영국 1파운드 금화가 시장에서 2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지만, 원가는 9달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위조하여 유통했던 베라하 사건입니다. 영국 당국이 그가 거주하는 스위스에 범인 인도 요청을 하였지만, 1파운드 금화는 영국에서 더 이상 법률적인 화폐가 아니라는걸 변호사가 증명하여 무죄로 풀려났다고 하네요. 심지어 영국 재무부에서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성격은 다르지만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와 왠지 유사하기도 한데, 지켜볼 일입니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의 자서전을 둘러싼 사기극도 흥미로왔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나름 영향력 있는 거부의 자서전을 날조해 출판할 생각을 하다니! 읽으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돈을 토해냈다는 이야기는 없고, 작가였던 어빙은 이후 이 사건을 다룬 "거짓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후일담을 보고 그럴 법도 하구나 싶었네요. 조금 고생해도 역시 돈이 더 중요한 것이겠죠.

사해 문서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재미있었어요. 일찍이 사기꾼과 연결되었던 샤피라라는 인물이 사해 지역 동굴에서 나온 양피지 조각을 대영박물관에 팔았지만, 샤피라의 전력과 조각들의 몇 가지 특징으로 위조범으로 몰린 뒤 자살하였는데, 과연 위조를 한 것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인지, 본인의 세계 최대 업적 중 하나가 폄하된 것에 대한 분개인지는 알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사해 쿰란에서 샤피라가 가지고 있던 양피지 조각 같은게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최초 공개되었던 15장의 양피지 조각은 모두 사라졌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설적 사기꾼 폰 루스티그가 알 카포네에게 친 일종의 "정직한 사기?"는 5만 달러를 주면 두 배를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기간이 되자 작전이 실패했다며 1,000달러 지폐 50장, 5만 달러를 그대로 가져다 준 사기입니다. 알 카포네가 이유를 묻자 이 돈만 빼고는 알거지가 되었다고 고백했고, 이에 알 카포네는 다섯 장의 지폐를 뽑아서 건네주었다고 하네요. 이거야말로 범죄가 아닌 범죄, 그야말로 궁극의 사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기꾼 '옐로우 키드' 웨일의 사기 행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하나는 영화 "스팅"의 실제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기입니다. 웨일은 얼뜨기 부자를 꼬드겼습니다. 전화 통보 담당자를 매수하여 경마 결과를 2~3분 늦게 알려주게 한 뒤, 그 사이에 마권을 사게 해 주겠다면서요. 그 뒤 마권 영업장을 가짜로 꾸며낸 뒤, 마권을 부자가 살 시점에 소동을 일으켜 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권을 못 산 건 부자 잘못이고, 전화 통보 담당자라던가 다른 동료들에게 줄 돈과 여러 손해 배상 명목으로 원금의 세 배 정도를 뜯어내었다고 합니다. 웃긴 건, 얼뜨기 부자가 돈을 뜯기고 나서도 웨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번 더 합시다."

그 외에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들의 최신 정보를 접하게 된 것도 수확인데, 예를 들면 아나스타샤를 자칭한 안나 앤더슨의 정체는 역시나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폴란드 처녀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등입니다. 이른바 "오파츠"라고 불리는 아즈텍의 수정 두개골에 현대의 연마기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더욱 자세한 설명 및 충실한 도판, 비교적 근래 출간된 책답게 후일담도 충실히 기술하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 에펠탑을 팔아넘긴 사기꾼의 말로, 히틀러의 일기를 위조한 사기꾼의 말로 등은 처음 본 것 같긴 합니다 -,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무슨 백과사전류에서 읽었던 것들부터 시작해서 다른 여러 책, 최근에는 "정말이야?"와 같은 책들에서 접했던 내용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이렇게 다른 책에서 접한 이야기가 많기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결론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추리, 호러 계열 장르문학과 전문가 속성의 만화와 자료들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딱 맞는 책이었어요. "위조"와 "사기"라는 범죄의 전문가들 이야기일 뿐 아니라, 여러 이야기가 책 한 권에 담뿍 담겨 있는 단편집 속성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갤러리 페이크"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께서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쿠로사기"의 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2014/03/07

심판의 날 - H.G 웰스 / 도서출판 불새 : 별점 2점

심판의 날 - 4점
H. G. 웰스/도서출판불새

"타임머신"으로 잘 알려진 SF소설의 선구자 H.G. 웰즈의 작품. 국내 미발표 SF를 엄선하여 번역 출간하는, 용기 있는 출판사 도서출판 불새의 e-book 단편집으로(날아오르라 주작이여~!) "심판의 날", "시간탐험대", "에피오르니스의 섬"이라는 총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재미는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SF 소설이 아니라 신학, 풍자소설이 아닌가 여겨지는 작품 성격 탓입니다. 소개된 홍보문구와 작가의 이름에서 기대한 결과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목요일의 남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심판의 날"은 최후의 날에 벌어지는 신의 심판을 우화처럼 풀어낸 작품인데, 아무리 착한 인물이라도 흠결이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장황하게 펼쳐 놓았을 뿐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시간탐험대"는 흉가로 이사 온 박사가 온갖 수상한 행동을 벌여 마을 사람들이 그를 타도(?)하기 위해 들고 일어나지만, 박사가 그들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타임머신을 발명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말은 제목으로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박사가 살던 저택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의 괴이한 진상(사실은 박사가 범인일지도 모른다?)은 나름 여운을 남기지만, 반전으로 보기엔 약하고 설명도 부족해서 아쉬웠고요. 아울러 전개 역시도 너무나 장황하고 지루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에피오르니스의 알"은 그나마 재미 면에서 제일 괜찮았어요.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에피오르니스의 알을 발견한 모험가가 무인도에 표류한 뒤 알이 부화하고, 새가 커지면서 모험가를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다는 내용인데 나름 그럴듯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대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렇게 별점 평균은 1.6점이나, 국내 초역되었다는 것과 역사적 의미를 더하여 별점은 2점으로 하겠습니다. 권해드리기는 조금 어렵습니다만 불새 출판사의 건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4/03/05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시공사

아사쿠사의 건어물 가게에서 소비세 12엔을 내려 하지 않던 노인이 가게 주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말았다. 범인이 명확해서 사건은 쉽게 종결될 수 있었지만, 노인의 범행 동기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수사 끝에 사건이 30여 년 전 있었던 기이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사회파 추리소설과 같은 사회 고발 의식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범인인 나메카와 — 여태영이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된 조선인으로 본인과 가족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걸 드러내는게 작품의 핵심이라는 점이에서요. 여태영의 인생은 일본 때문에 그야말로 기구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꼬일 대로 꼬여서 불행의 극을 달리기에 굉장히 처절한 느낌을 전해줄 뿐 아니라, 작중에서 "전쟁 탓이라고 해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도리에 어긋난 일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은 진정한 일등 국가가 못 될 것이다"라고 일갈하기까지 합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인데, 일본인이 사죄해야 한다는 글을 보니 작품 완성도와는 별개로 무척 반갑더군요.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감정이입이 용이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또 "누명"이란 무리한 질서 유지 혹은 치안 유지의 결과로 경찰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이른바 '일본인의 행복을 위해 행해지는 정의라는 명목의 불합리한 폭력'이며, 데이코쿠 은행 사건, 시마다 사건, 마루쇼 사건, 무레 사건의 범인들은 모두 누명을 썼다고 확신한다고 작중 인물인 하타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점, 일종의 파시즘적인 광기를 비판하는 점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파적 사회 고발로 볼 수 있습니다. 단체로 광기를 벌이지 않으면 일본인은 타인을 죽이는 전쟁을 거국적으로 행할 기력을 일으킬 수 없는 인종이라고 단정짓는데 상당히 그럴듯했어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준다는 게 특이했는데, 홋카이도나 센다이는 물론이고 도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감성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첫 사건이 벌어지는 아사쿠사라던가 요시와라, 구레시타 노인의 산책길인 세이로카 병원 – 쓰쿠타오하시 다리 근처에 대한 묘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사쿠사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한 번 가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여행도 갔다 온 지 참 오래되었군요.

아울러 거의 50여 페이지에 걸쳐 에도시대 요시와라 유흥 문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현학적인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시키 형사가 피해자의 과거 근무처였던 요시와라를 탐문하며 요시와라와 에도시대 유곽 문화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식인데,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었거든요. "에도 일본"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상세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사회파, 여정 미스터리, 현학적 요소 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명성에서 기대했던 신본격 추리소설로의 가치는 기대 이하라 아쉽습니다. 무려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건만 놓고 보면 스케일 크고 전개도 꽤 흥미롭긴 합니다. 열차 안에서 피에로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권총 자살을 하였는데 그 직후 시체가 사라졌다, 투신 자살로 머리가 잘린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가 기차가 탈선했다는 등의 상상하기 어려운 불가능 범죄가 연이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가능 상황에 여름벌레의 날갯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빨간 색으로 눈이 빛나는 거인이 보였다는 등의 기이함도 더해져 있고요.

하지만 밝혀진 진상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피에로 사건만 해도 여태영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는게 동기라는고 설명되데, 여태영은 그냥 도망쳤어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여태명과 아라마사의 시체가 함께 발견되면 서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었을 테니까요. 아니면 여태명의 시체만 중간에 숨기고 그냥 삿쇼선을 타고 도주하면 되잖아요? 어릿광대가 여태영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여튼 들인 노력에 비하면 얻은 게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아라마사 사건의 경우 여태영은 용의선상에조차 오르지 않았으니 완벽한 뻘짓이었어요.

게다가 열차의 탈선은 순전히 우연이었고 거인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작중에서 "기발한 발상이 하늘을 움직인 결과"라고 설명될 정도로 우연에 기인한 현상으로, 불필요한 장치였습니다. 이야기의 복잡성을 더하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에요. 어차피 독자가 여태영 – 여태명 형제의 존재를 알게 되면 투신 자살한 시체와 트릭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기차 시간표가 등장하지만 핵심 요소는 아니고, 오히려 공정한 추리를 방해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지도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탓에 핵심 트릭이 뒤늦게 밝혀지는데, 그 동네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트릭이라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게 외려 더 이상했습니다. 참고로, 조금 이채로웠던 것은 우시코시 형사가 요시키와 만나기 위한 편지에서 기차 시간표를 보고 어떤 기차 몇 호를 타라고 지정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기차 시간표 형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좀 웃겼어요.

마지막에 진상이 밝혀지니 나메카와(여태영)가 처음에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없어진다는 것도 그닥입니다. 소비세 때문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하거나, 과거 사건의 복수 때문으로 밝혀지거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아라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라면 어차피 공소시효가 지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상황은 충분히 정상 참작을 받을 만한 것인데... 왜 치매에 걸린 것처럼 위장해서 입을 다물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초절정 미소녀였던 사쿠라이가 30년이 지난 뒤 폭삭 삭아버린 것에 대해서 설명이 없는 것도 조금 의아한 점이었고요.

그리고 일본 연호로 연도를 표시한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국내 독자를 위해 모두 현대의 서력을 병기하여 주는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문체, 예를 들자면 "신호에 멈추어 섰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강이었다. 바람에 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벚꽃 냄새와 비슷했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학생처럼 보이는 옆에 선 젊은이의 어깨 밑에 가려질 정도로 키가 작았다"와 같은 묘사는 신호에 멈춘 것과 벚꽃 냄새, 노인의 체구를 두서없이 나열한 느낌이고요. 보다 깔끔하게 "신호가 빨강이라 멈추어 섰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가 느껴지는 봄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라는 식으로 정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뭐 제가 문체를 지적할 수준의 전문성이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사회고발적인 성격은 높이 평가할 만하고 특히 강제 징용 조선인에 대한 부분은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또 다른 면을 접한 것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추리적인 요소가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치고는 알맹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일본인 작가가 반성의 의미로 쓴 "강제 징용된 조선인"에 대한 텍스트로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03/04

다크 존 - 기시 유스케 / 한성례 : 별점 2점

다크 존 - 6점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장려회 프로 장기기사 출신 쓰카다 히로시는 어느 날 어두컴컴한 폐허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곳은 "다크 존"이라는 공간이었다. 쓰카다는 다크존의 "홍왕"이 되어 17명의 병사를 이끌고 "청왕"과 7전 4선승제의 기묘한 시합을 벌이게 되는데...

다양한 장르물에서 필력을 과시해 왔던 기시 유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장르를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지 망설여지지만, "판타지 호러 게임 스릴러"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작자가 창조한 호러블한 게임이 벌어지는 내용이니까요. 

일본 장기를 바탕으로 한 게임이 작품의 핵심 요소로,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설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각 말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상대방의 말을 잡으면 내가 불러내어 사용할 수 있다.
  3. 시간, 적을 죽인 포인트가 모이면 승격이 가능하다.

이러한 룰과 말들의 특징을 잘 활용한 7전 4선승제의 게임 묘사만큼은 발군으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화려하게 펼쳐져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임 외의 부분은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 쓰카다에게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전개 탓이 큽니다. 동거하던 이구치를 임신시킨 것, 함께 방문한 군함도에서 그녀를 내버려 둬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하게 만든 것, 장려회에 남아있을 수 있는 기회를 건 마지막 승부에서 오쿠모토에게 진 것 모두 본인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이구치 죽음의 책임을 물어 오쿠모토를 죽인건 순전히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습니다.

그 외에 여러가지 행동들도 — 유원지에서 커플에게 시비를 건다던가, 대학 강의실에서 여교수에게 지적을 받고 쫓겨난다던가 — 쓰카다의 잘못이 없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민폐 캐릭터에요. 이 놈만 없었어도 이구치와 오쿠모토는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겁니다. 옮긴이의 말에서 극단적인 경쟁사회에서 누구나 무너질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글쎄요... 극단적인 경쟁사회에서 실패한다고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건 아니죠.

또 지나치게 게임 위주라는 것도 불만입니다. 작가의 또 다른 클로즈드 서클 호러 액션 스릴러 "크림슨의 미궁"은 상황에 대한 설명이 나름대로 등장하지만, 이 작품은 순수하게 쓰카다의 마음속, 죄책감과 죄악감이 불러온 연옥이라는 설정이거든요. 이럴 거면 그냥 게임에 대해서만 쓰는게 나았습니다. 불필요한 쓰카다 이야기는 왜 나왔나 싶네요. 초반부에 게임 디자이너 메카로 겐고를 비중 있게 등장시켜 뭔가 합리적인 설명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단순한 떡밥일 뿐이라는 것도 불만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더 이야기하자면, 연인 이구치가 다크 존의 모태인 "군함도"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설정이라던가 쓰카다의 과거 회상 모두 역시나 별거 없는 떡밥이라 실망스러웠어요.

또 홍왕 쓰카다는 물론, 독자에게 게임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정교한 맛이 떨어집니다. 게임을 하면서 그 내용을 하나씩 알아가는 식인데, 게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룰에 대해 명확히 숙지부터 하는 게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스타크래프트" 전성기 시절 임요환 선수의 플레이가 놀라움을 자아냈던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닛의 창의적인 활용 때문입니다. 그러한 맛은 부족해요. 이러한 점에서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깊이 고민하고 쓴 작품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작가 스스로 창조한 기묘한 게임으로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개한 솜씨는 분명 놀라운 재능이고 본받을 만한 점이지만, 게임 외의 다른 요소는 건질 게 거의 없는 작품입니다. 여태 읽은 작가 장편 중 최악인데 차라리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계를 소설로 옮기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나저나 찾아보니 출간된 지 2년도 안 되었는데 이미 절판되었더군요. 딱히 어렵게 구해볼 책은 아니지만 의외이기는 합니다. 그렇게 인기가 없었나?

2014/03/03

스쿨 인어 (スクール人魚) 1~2 - 요시토미 아키히토 : 별점 2.5점

스쿨 인어 (スクール人魚) 1~2권 (완) : 인어 먹는 소녀들

"이트맨"의 작가 요시토미 아키히토의 단편 옴니버스 판타지 호러 연작. "이트맨" 이후 발표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블랙잭 스핀오프였던 "레이"는 역대급 쓰레기였지요. 그래서 한동안 관심을 끊었었는데, 이 작품은 인터넷에서의 평이 좋아서 구해보게 되었습니다.

읽다 보니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 시리즈가 떠올랐습니다. "인어 고기를 먹으면 뭔가 얻을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댓가가 있다"라는 핵심 설정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카하시 루미코 작품은 일본 괴담 분위기가 물씬나는 전형적인 호러물로, 인어는 일종의 크리쳐로 등장했었지요. 반면 이 작품은, 호러보다는 판타지 성향이 강하며 순애, 백합물 성향을 담뿍 담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본 설정부터가 "영원한 생명"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사랑"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야기들도 조금은 가볍게 느껴집니다. 물론 실제 사춘기 소녀들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는 게 "사랑"이기에 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도 나름 매력적이었어요(waterlotus님 블로그를 참조하시길...).

또 인어를 불러내는 방법에 대한 노트의 중요한 페이지가 찢어져 있는데, 이 페이지에 '시간 내에 인어고기를 먹지 못하면 주문을 말한 사람이 인어가 된다'는 중요한 사실이 적혀있었다는 등의 부가적인 설정들이 여러 가지 반전을 이끌어내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초반부의 한두 개 에피소드는 "이트맨"의 좋았던 분위기가 아주 약간 떠오를 정도였어요.

인어들은 인어를 불러내었지만 고기를 먹는 데 실패한 당사자들로, 학교 수영복을 입고 있다는 디자인적인 참신함도 괜찮았습니다. 좀 대놓고 밀어붙인 감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여튼 확실히 현대적이고 경쾌한 맛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트맨"과 비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첫 이야기에서 밝혀지는 설정 이외의 것이 별로 없어서 반전이 놀라운 이야기는 드물고, 떡밥도 제대로 회수가 안 되는 이야기가 있는 탓입니다. 또 "사랑"은 작중 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노처녀 노리코 선생 말대로 직접 부딪쳐서 얻어내도 충분한 것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 감정이입이 어렵다는 문제도 큽니다. 과연 목숨을 걸 정도로 절박하냐 하면 별로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쉬운 점은 분명 있습니다만, 평균 수준의 재미는 전해 줍니다. 장르물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4/03/02

일년 반만 기다려 / 一年半待て (2010) : 별점 2점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을 TBS에서 드라마 스페셜로 영상화한 작품.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영상화도 수차례 되었는데 제가 본 것은 2010년도 버전입니다. 종전 직후를 무대로 한 원작을 현대물로 각색하였더군요.

짤막한, 거의 꽁트에 가까운 단편을 1시간 30분짜리 영상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부가적인 것들로 이야기를 늘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법정물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게 특징이고요. 그것도 정통 법정물이 아니라 타키코 변호사가 머리카락을 잘라 현장에 버린다든지, 꽃집 총각을 빼돌리고 정보를 언론에 미리 흘리는 식의 페리 메이슨 스타일 느낌이라서 조금 신선했습니다.

가정 폭력의 증거로 블로그가 사용되는 등의 현대적인 설정도 괜찮았고, 원작에서는 순수한 선의로 움직이던 타키코 변호사가 영상물에서는 개인의 이득을 최우선시하는 속물로 그려지고, 사토코도 1억엔을 남에게서 훔쳐내는 식으로 악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각색되었는데 이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진정한 승자는 타키코 변호사라는 결말도 인상적이고요.

그러나 확실히 원작보다는 별로에요. 사토코의 치밀한 계획이 원사이드하게 전개되는 빠른 템포의 원작에 비하면, 영상물은 길게 늘이기만 했을 뿐 딱히 재미있는 부분은 없는 탓입니다. 아울러 원작에서는 사토코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반전의 매력이 더 컸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약간은 뻔한 법정물이 되어버리면서 일사부재리 설정도 별로 부각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것을 살리지 못하는, TV 영상물의 한계로 보이는 저렴한 화면도 몰입을 저해합니다. 솔직히 화면만 봤을 때는 80년대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던 원작 쪽이 훨씬 좋았어요. 원작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30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2014/03/01

아 아이이치로의 도망 - 아와사카 쓰마오 / 권영주 : 별점 1.5점

아 아이이치로의 도망 - 4점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시공사

"아 아이이치로의 사고" - 아와사카 쓰마오 / 권영주 : 별점 2점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의 3작째이자 완결편. 이전 시리즈와 동일한 단편 옴니버스 연작 단편집입니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전편만한 속편의 예는 몇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영화 "터미네이터"를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건, 3편이 전편보다 나았던 경우는 없습니다. "터미네이터", "에일리언", "다이하드", "대부", "영웅본색"...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이 작품은 위의 명제를 아주 충실히 따릅니다. 2편이 1편보다 못했는데, 3편은 그냥 엉망이라는 뜻입니다. 기상천외한 사건들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듯한 전개, 얼굴이 세모꼴이고 양장을 한 노부인이 매 작품마다 계속 등장하여 연작이나 시리즈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점은 전편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전편의 문제점으로 지적했었던 작위적이고 형편없는 트릭, 과장된 전개는 여전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상황만 기발할 뿐 트릭의 현실성도 없고, 동기도 억지스러운 이야기 뿐입니다. 슬랩스틱 코미디도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고 유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결말에서 아 아이이치로가 "후쓰 국"이라는 나라의 왕자였다는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어이가 없습니다. 국왕인 아의 아버지 톨레미 대박사가 초천재로 특허와 발명에서 거둔 수익만으로 국가 운영이 가능해 국민들은 세금도 전혀 내지 않는다는 부분에서는 의식을 잃을 뻔 했고요. 차라리 외계에서 왔다고 하던가... 왜 이런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이 들어갔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굉장히 대단한 비밀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죠.

별점은 종합 평균 1.5점. 1점 줄까도 했는데 그나마 완결되어 이제 더 이상 이 시리즈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약간 점수를 더합니다. 2편 리뷰에서 다음 단편집은 기대가 전혀 안된다고 썼었는데,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아카시마 섬 모래톱"

나체주의자 클럽의 집회가 있는 아카시마 섬에 괴한이 여자를 납치하러 찾아온 사건의 진상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등에 문신이 있는 현상수배자가 나체주의자 클럽에 숨는다는 건 경우가 다르죠. 아무리 화장술이 뛰어나도 들통나기 십상이잖아요? 차라리 어디 지방 여관에 숨어 지낸다는 게 더 현실적일 텐데, 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인 "상황은 기발하나 트릭도 비현실적이고 동기도 억지스러운" 이야기의 전형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구형의 낙원"

전쟁과 지진에도 버틸 수 있는 캡슐 안에서 시체로 발견된 괴짜 부자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그립니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경찰 수사로 알아낼 수 있는 사건이라 생각됩니다. 캡슐에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기도 어렵고 말이죠. 차라리 전갈의 춤이라는 스트립댄스와 관련된 왁자지껄한 소동이 차라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치통의 추억"

아, 이이, 우에오카... (아이우에오 카키....)로 이어지는 말장난 이름부터 불길했는데 내용도 역시나, 병원에서 대기하던 환자의 이상한 몸 동작으로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알아낸다는 말도 안 되는 추리가 등장합니다. 방식은 "9마일은 너무 멀다"와 유사하기는 합니다만,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쌍두의 문어"

호수 안의 보트에서 총격으로 살해된 것으로 보이던 피해자가 사실은 보트 안에 같이 있던 동승자에 의해 날카로운 흉기로 찔려 죽었고, 총알은 이후에 쑤셔넣었다... 는게 사건의 진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법의학, 검시를 너무 물로 봤습니다. 수사만 잘 했다면 미궁에 빠질 이유가 없는 사건입니다. 괴물 전문 기사를 쓰는 사기꾼 기자 가메자와의 기사가 본 사건과 내용보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바치 산 중턱"

자동차 좌우에 보행자가 읽기 쉽도록 글자를 정상 방향과 역방향으로 쓰는 것을 이용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자동차의 앞뒤를 착각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렇지... 디자인 자체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동차의 앞뒤를 판단하는게 운전자의 유무라고 보기도 어렵잖아요. 그야말로 트릭을 위한 트릭입니다. 무리수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적색 찬가"

카부라기 쇼이치로가 작품 생활 초기에는 절규하는 듯한 적색 그림을 그렸지만 이후 달달한 적색을 다루는 식으로 화풍이 바뀐 이유는?

절규하는 듯한 적색 화풍으로 그린 이유가 명쾌하고 공정하게 설명되며, 화풍이 바뀐 이유 역시 합리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히 강력 사건이라고 보기 힘든 일상계스러운 전개도 좋았고요. 결말도 깔끔합니다.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화재 주류점"

마을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아의 활약을 다룹니다. "소방관은 키가 커야 한다"라는 단순한 상황이 핵심 증거가 되는 발상은 괜찮았어요. 범행도 나름 합리적으로 벌어지고요. 그런데 트릭은 바로 직전에 읽었던 "반전"의 한 단편과 굉장히 유사한데, 과연 동네 소방대원들이 아무리 방화복을 입고 있더라도 낯선 이를 몰라보았을까요? 최소한 한 명의 낯선 소방대원이 있었다는 건 밝혀졌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내용은 아주 잘 짜여져 있고 결말까지 유쾌하지만 핵심 트릭의 설득력이 조금 약해 아쉽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 아이이치로의 도망"

한적한 온천 마을 호텔에 투숙한 아가 자신을 찾아온 얼굴이 세모꼴인 양장의 노부인에게서 도망친다는 내용을 다룬 소품. 그다지 대단한 트릭도 아닐 뿐더러 순전히 운(자연재해)에 의지한 상황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아가 왕위 계승자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에필로그에 불과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