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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8

밤 산책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5점

밤 산책 - 6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번째로 읽은 요코미조 세이시 작품입니다.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 요코미조 작품의 전형, 그러니까 "부유한 명문가이지만 실상 내용을 알고보면 콩가루 집안"을 무대로 한 "연쇄살인극"입니다. 여기에 뭔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덧칠한 것 역시 여전해서 이 작품에서는 "꼽추"와 "몽유병",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요도 "무라마사"가 주요 소재로 쓰이고 있죠.
다만 콩가루 집안의 상황을 이전 작품들보다 한층 업그레이드해서 표현하고, 3류 탐정 소설가 야시로를 화자로 내세워 야시로가 직접 쓴 소설처럼 진행되는 액자 소설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 1인칭 시점인 "팔묘촌"과 비교하자면, "팔묘촌"은 단순한 수기 형태였던 것에 반해 이 작품은 작중 작품이라는 형식도 독특하지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화자가 범인이라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고요.
하지만 본격 추리 소설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무려 3명이나 살해당하는데 트릭은 보잘 것 없고, 그 외에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탓입니다. 특히 첫 번째 하치야 사건의 경우, 하녀 후지의 결정적 증언 - 12시에 하치야가 방에서 자고 있었다 – 가 번복된 순간에 이미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증언 번복으로 야치요의 시간 조작이 곧바로 드러나 버리게 되니까요. 때문에 이후의 설명이나 사건은 사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애당초 하녀 후지가 처음에 거짓 증언을 한 것 자체가 단순한 운이었다는 등, 운에 의지한 부분도 너무 많아요.
그 외에도 나오키가 칼을 둔 장소를 야시로는 어떻게 알았는지, 왜 나오키가 시즈카를 감금하여 돌봐주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 모리에가 지시한대로 얌전히 독을 먹고 죽은 부분과 두 꼽추의 동일한 총상 역시 억지가 지나쳤습니다. 과장된 몽유병 설정도 거슬렸고요. (심지어 몽유병 환자가 물속에 들어가 무언가를 찾기까지 합니다!)

무엇보다도 동기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화자가 범인이고, 또 소설의 작가이기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 – 특히 나오키 – 에게 혐의를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하지만, “내가 범인이다!” 라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겨우 실질적인 동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공정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앞 부분에 야시로와 나오키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시즈카에 대한 설명을 조금이나마 복선으로 등장시켰어야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건 재미는 있다는 겁니다. 이 작품의 매력 요소는 괴기스럽고 기괴한 분위기와 묘사에 있기 때문이죠. 추리적으로도 이런저런 불만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럴듯한 트릭과 단서들이 계속 등장해서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 하나는 확실하고요. 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같이 해 줄 추리 괴담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10/24

안녕, 긴 잠이여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2.5점

안녕, 긴 잠이여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오즈미라는 청년이 사와자키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그는 11년 전 고시엔 4강전에서 승부조작 누명을 썼던 인물이었다. 의뢰 내용은 승부조작 수사 도중 자살했던 누나 유키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였다.

하라 료의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1995년에 발표되었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죠. 초·중반부는 야구 승부조작 관련 작품이 아닐까 싶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군요.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솔직히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나쁜 작품은 아니었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단점이 더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단점 중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운과 우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작위적인 전개입니다. 큰 흐름으로 본다면 사와자키가 진상에 이르게 되는 수사는 아래의 4단계를 거칩니다.

  1. 아키바 도모코의 증언이 허위임을 밝혀냄 : 사와자키의 넘겨짚기
  2. 유키와 친하게 지내던 오토바이 타는 사람 정보 입수 : 아키바 도모코를 통함
  3. 오토바이 타는 사람과 친했던 이나오카에 대한 정보 입수 : 관리인을 통함
  4. 오토바이 타는 사람의 성별 및 오토바이 번호 입수 : 이나오카를 통함

우선 1번의 경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냥 사와자키의 넘겨짚기에 불과합니다. 아키바 도모코가 끝까지 자기가 봤다고 우겼더라면 거기서 게임 끝이지요. 게다가 10여 년 전 자신이 바람 피운 것을 들켰는데 불구하고 다른 정보를 굳이 사와자키에게 전해주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3번은 유키가 살던 TK 맨션 관리인이 사진 찍는 취미가 있고 그 사진을 모두 앨범에 정리해놓았다는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역시 지나치게 운에 의지한 겁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소설적 장치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나오카가 10년 전에 잠깐 동거했던 여자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억지입니다. 물론 일종의 말장난 같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사와자키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는 복선은 좋았지만 설득력은 낮아요. 게다가 초반에 벌어진 가와시마의 죽음, 이어지는 우오즈미 습격이 모두 사건과 관계없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뭔가 있음직하게 끌고 가려는 작위성이 지나쳤달까요? 그 외에도 사건의 흑막이 신조 유스케라는 설정은 억지스럽고, 이 비밀을 우오즈미 효도가 짊어지고 함구한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부실합니다. 결국 사와자키의 부지런한 탐문과 발품에 운과 우연이 더해져 진상이 드러날 뿐, 추리로 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진상은 결국 당사자들의 자백에 의존할 뿐입니다. 사와자키의 근거 없는 직감 추리가 도를 지나친 것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거의 초능력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대표적으로 아키바 도모코 증언에 대한 직감 추리라든가, 우오즈미에게 승부조작을 제안한 것이 유키가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넘겨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다행히 추리적인 아쉬움은 꽤 그럴듯한 반전과 진상으로 어느 정도 덮이기는 합니다. 어차피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대단한 추리를 선보이는 것은 아니니, 추리 요소가 부족한게 큰 단점이라 보기 어렵기도 하고요. 명성에 걸맞은 좋은 부분도 많습니다. 콩가루 명문가의 복잡한 가정사, 폭력조직이 연계된 사기행위라는 미국 하드보일드풍 설정을 일본 현지화에 성공적으로 녹여낸 것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전통 있는 "노" 종가를 콩가루 명문가 설정에 집어넣은 건 아주 좋았습니다.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막장 가족사에 설득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와자키의 고독하면서도 건조한, 늑대 같은 캐릭터도 여전히 잘 살아 있었고 손에 잡힐 듯한 묘사 역시 탄탄합니다. 대사와 분위기 모두 근사해요. 제목부터 그렇지요. 또 작품과 직접 상관은 없지만, 오랜 팬으로서 사와자키와 신주쿠서의 니시고리 형사, 폭력조직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를 엮는 과거 사건 ― 13년 전 경찰 자금과 폭력조직의 각성제를 들고 도망친 옛 파트너 와타나베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밝혀지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설정 없이는 이후 시리즈가 이어지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시리즈 전작들에 비해 단점과 아쉬움도 있었지만 좋은 점도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하드보일드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한 번쯤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004/01/14

Y의 비극 - 엘러리 퀸 / 강호걸 : 별점 4점

Y의 비극 - 8점 엘러리 퀸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탐정 드루리 레인 시리즈의 대표작이자 세계 3대 추리소설로 알려진 그 작품입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어느날, 뉴욕만의 한적한 바다에서 처참한 시체가 발견됩니다. 조사결과 밝혀진 시체의 정체는 미치광이 해터 집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미치광이 모자”의 패러디)으로 알려진 부호 해터 가문의 가장인 요크 해터로 방수 지갑안에 “나는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자살한다”라는 짤막한 유서도 있었죠. 그리고 몇 주 후, 해터 집안의 딸인 벙어리이자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루이자 해터의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은 수사에 나섭니다. 내부의 인물 누구든 동기가 있고, 독을 넣을 수 있었던 상태.
어느날 밤, 실질적인 해터 가문의 주인인 에밀리 헤터 여사의 살인과 루이자 독살 미수가 다시 발생하고 드루리 레인은 친구 샘 경감의 요청으로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됩니다...

저는 사실 X,Y,Z 시리즈 중에서 Z부터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Z”에 굉장히 실망했던 터라 이 작품에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읽다보니, 과연 엘러리 퀸!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위의 줄거리 처럼 일단 콩가루 부잣집의 살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악과 음모의 상징 같은 콩가루 저택에서 살인이 달랑 한번 (두번이긴 하지만 두번째는 응징..에 가까우니)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인데 일본풍 (특히 “아마기 세이마루” 풍) 이라면 거의 전가족이 몰살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긴 장편을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으며 특유의 “독자와의 대결”도 공정한, 정통 추리소설로서의 미덕을 잃지 않습니다. 복선이나 트릭 역시 큰 줄기에서 파생된, 완벽한 형태로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범인역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겠죠. 발표당시에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범인이었겠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 충격이 많이 퇴색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단서 자체가 너무 상식 가능한 선인 것 같습니다. 중간 부분의 루이자의 증언으로 거의 밝혀지거든요… 사실 이 이후의 후반부는 레인이 범죄의 동기나 실제로 이미 죽어버린 “실체”를 찾기 위한 활동이지 범인을 드러나게 하는 트릭면에서는 별 비중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분명한 정보를 두루뭉실하게 표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삽화나 사진 등으로 직접 눈으로 보게된다면 보다 쉽게 진범을 알아낼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은 현장 묘사에 의한 트릭이 많아서 공감하기 쉽지 않았어요. 번역본이라 더 심하게 느껴진것 같기는 한데 특히 “만돌린”을 흉기로 쓴 타당성에 관한 묘사는 영문학적인 지식 없이는, 그래서 국내 독자에게는 조금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또 탐정인 드루리 레인 역시 불만스러웠어요. 원래 세익스피어극의 명배우 출신으로 부유하다는 설정까지는 이해해도 왜 귀머거리라는 설정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귀머거리라서 더 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당시, 추리소설 황금기의 명탐정들이 워낙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많았던 탓에 나름 색다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인 것은 알겠지만 단순한 설정에 불과하여 반세기 이상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목 역시도 불만스럽습니다. 말장난 같은데 이 “Y”라는 제목의 의미가 전~혀! 거~의! 내용과 상관없는 부분이거든요. 차라리 단편 “미친 티 파티” 처럼 아예 앨리스를 가져다 쓴 제목을 붙이던가…. 일부러 X,Y,Z로 글자를 맞추고 싶어한 의도는 알겠지만 너무 억지로 갖다 붙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나 이러한 단점들은 소소할 뿐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정통파 고전의 품격을 갖춘 명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른바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하나라는 명성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번역도 괜찮은만큼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PS : 전 이렇게 순위 매기는 것, 싫어하지는 않지만 너무 객관적 근거 없는 "세계 3대 어쩌구..."하는 말에는 거부감이 있네요. 사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 “환상의 여인”은 정통파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거리가 있지 않나요?

2019/08/11

브루투스의 심장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브루투스의 심장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한정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로, 1989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범행이 먼저 등장하는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입니다.

작가 생활 초창기에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라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풍과는 사뭇 다른게 특징입니다. 흡사 70년대를 풍미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같았어요. 기차 시간표는 아니지만 상당히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과 재벌 가문의 문란한 생활, 출세를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야심가, 등장인물마다 엮여 있는 콩가루같고 불우한 가정사 등 모든 설정이 흡사한 탓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거의 보기 힘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인기를 얻기 전 무명 작가 시절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 시대의 인기작을 분석하고 따라해서 어떻게든 인기를 얻어보려 했던 결과물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악녀 야스코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꽤나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 돋보입니다. 최초에 등장한, 3명이 실행하는 사체 이동 계획부터 꽤 흥미롭습니다. 오사카, 나고야, 도쿄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잘 계산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나오키의 말대로 2명이라면 모를까, 3명이 실행하는 계획은 경찰도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을테고요.
두 번째 범행인 만년필을 이용한 살인도 그럴듯합니다. 만년필 잉크를 넣는 곳에 청산가리 결정을 넣어 놓고 잉크를 넣으면 청산가스가 발생하여 사망한다는 트릭인데, 청색 잉크만 산성을 띄고 있어서 청산가스가 발생한다는 등의 과학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든요. 이공계 출신 작가다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마지막에 다쿠야가 야스코를 살해한 방법도 기발하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미리 야스코의 방에 잠입해서 찻주전자 주둥이 안쪽에 청산가리를 발라 놓은 후, 저녁에 당당하게 방문해서 차를 직접 끓여마시게끔 유도하여 살해하는 계획으로 완벽하게 성공하니까요. 야스코도 이미 2명이나 살해된 상황이라 다쿠야를 조심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탄 차에 독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초기작인 탓인지 모두 헛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체 이동 계획은 나오키가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신칸센을 탔어야 했고, 다쿠야 역시 이용한 차량을 처리할 때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다쿠야는 이 때문에 덜미를 잡히죠.
두 번째 청산가스 살인도 경찰이 현장 조사할 때 가스가 남아 있어서 들통난다는 점에서는 완벽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마지막 트릭 역시 다쿠야가 직접 야스코의 집을 방문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운 좋게 들키지 않았을 뿐이니까요. 

물론 사람이 만든 계획에 헛점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를 작중에서 형사들이 치밀한 수사를 통해 밝혀내는 것도 볼거리로 이런게 도서 추리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고요. 정작 문제는 이야기 자체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3명의 사체 이동 계획부터 애매합니다. 애초에 나오키가 고로의 약점을 잡아 청부 살인까지 시킬 수 있었다면, 그냥 고로를 시키면 됩니다. 알리바이고 뭐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적은게 낫잖아요? 이야기를 보면 고로와 나오키의 연결 고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 고로에게 청혼을 받은 나오키의 비서 유미에마저 모르니 완벽한 청부 살인이 되었을겁니다.

또 하시모토와 다쿠야를 끌어들이는 이유도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나오키가 트럼프 카드 마술이 특기라는 설정도 고로의 존재 때문에 말이 안됩니다. 그냥 뽑으면 되죠. 최악인 살인이 걸린다면 고로를 시키면 되니까요. 다른 살인을 뽑은 관련자에게 빚을 지게 만들 수도 있고요. 이런걸 대단한 단서인 것 처럼 흘릴 이유는 없습니다.

진범 고로가 야스코 대신 나오키를 살해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살의를 품을 만큼 원한이 깊었다는 설명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면 진작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모를까 왜 이 때 저질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사체 이동 계획에 대한 종이가 차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시체가 야스코가 아니라 나오키였다'는 충격적인 설정을 제대로 설명할만한 합리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나오키를 죽인건 살인까지 시켜서 살의가 폭발했다고 치죠. 그러면 시체 이동 계획에 참여한 하시모토와 다쿠야까지 죽이려 한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었는지 먼저 간을 보는게 순서였을텐데 말이죠. 시체가 발견되어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 마당에, 연이어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아무리 봐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수사 와중에 직접 나서서 야스코를 죽이고 마지막에 고로까지 살해하려한 다쿠야의 정신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류의 설정이 너무 과한 것도 문제입니다. 주인공인 다쿠야가 온갖 어려움을 혼자 힘으로 이겨낸 자수성가형 엘리트이자 야심가라는건 흔해빠지긴 했어도 봐줄만은 합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의 근거로는 타당하고요. 그러나 니시나 나오키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버지 도시키를 증오한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3인 살인 계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로봇이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위장한다는 설정도 말이 안됩니다. 실제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로봇 '나오미'는 바로 폐기되고, MM 중공은 그 뒤로도 잘 나가고 있으니 무의미한 복수였어요. 차라리 로봇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걸 널리 알리는게 더 효과적이었을겁니다.
니시나 가문의 딸 호시코의 방자한 행동이라던가, 니시나 도시키의 문란한 사생활 역시 콩가루 재벌집 설정을 드러내는 역할 뿐입니다. 특히 니시나 도시키와 야스코의 관계는 충분히 재미있게 가져갈 수 있는 소재였는데 이래저래 이상하게 소모된 느낌이에요. 

마지막의 열린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쿠야가 고로의 존재를 눈치챈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쿠야는 고로를 살해할 이유는 없었어요. 경찰에 고로가 나오키를 죽였다고 알리면 그만이죠. 다쿠야가 시체 운반을 맡았던 이유는 예비 처남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하면 문제 없었을겁니다. 설령 3인 살인 계획의 증거인 연판장이 남아있었더라도, 이미 2 명은 확실하게 살해한 고로보다는 다쿠야 쪽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죠. 오히려 야스코 살인까지 고로가 뒤집어 썼을 거에요. 어차피 누가 죽였는지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쿠야가 만든 브루투스가 오작동하여 다쿠야를 죽인다는 결말은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로봇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도 아닌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등장해서 이야기를 끝맺는건 이상하다 싶었어요. 인간보다 로봇이 우수하다고 주장했던 다쿠야의 죽음으로는 어울린다 싶기도 한데, 그동안 뛰어난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왔으니 마지막 로봇을 이용한 범행도 멋지게 성공하는게 더 설득력은 높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세세한 문제점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벌 가문과 야심가, 알리바이 트릭이라는 3위 일체는 이미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질릴 정도로 써 먹기도 했고요. 거장이 되기 위해 겪었던 시행착오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11/04

고양이는 알고 있다 - 이상우 : 별점 1.5점

국내 대표적 추리 작가 중 한 분이신 이상우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꽁트 및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연찮게 읽어보았는데, 수준은 낮은 편입니다. 평균 별점은 1.5점 정도? 때문에 권해드리기는 무리지만 그래도 딱 한편, "황매실의 하룻밤"은 괜찮았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이 작품 하나만큼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낭랑 18세" 

수위와 짜고 빈 사무실을 터는 보일러실 직원의 실패담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재미있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지하에서 일하는 직원이 어떻게 빈 사무실을 알아냈나?는 것으로 답은 공범자인 수위가 휴게실에 틀어놓은 음악 테이프였습니다. 음악을 듣고, 보일러실 직원이 레코드 가게에서 그 노래의 길이로 몇 호인지를 알아낸 겁니다. 4분 12초 짜리면 412호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결국 덜미가 잡히는데, 그 이유는 가게 점원에게 부탁하여 낭랑 18세를 찾은 탓이었습니다. 점원이 찾아준게 오리지널이 아니라 최근에 유행한 리메이크 버젼이었기 때문이지요.

발상은 재미있지만, 문을 따기 전에 최소한 안이 비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최소한 확인하고 문을 땄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리 현실적인 아이디어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백사도"

김내성스러운 제목에, 주인공인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유명하다는 화가 김몽산도 김내성스러운 설정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내용을 보니 정말로 김내성의 백사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더군요. 김몽산의 최신 대표작 제목이 "백사도" 거든요.

그러나 내용 자체는 김내성 작품과는 무관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혹평하는 평론가 곽충빈에게 살의를 품고 독이 든 얼음을 만든 김몽산의 계획이 실패하고 허무한 결말에 이르는 내용으로, 독이 든 얼음을 직접 챙기지 않고 딸에게 운반시킨 잔꾀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김몽산의 계획이 성공하여 곽충빈이 죽었어도 김몽산이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도 지극히 회의적이고요.

거장의 명성에 기대기만 한 수준 이하의 내용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예고 살인"

유전공학을 이용한 제품으로 유명한 주식회사 무진에서 일하는 천재 학자 김묘숙 박사와 그녀와 함께 기술팀을 이끌던 장주석 기술 이사가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추경감과 강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이 단편집 속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으로는 완성된 편입니다. 김묘숙 박사에게 1시간 이상 지나야 녹는 독약 캡슐을 전해주고, 100kg이 넘는 장이사의 체중을 이용하여 일정 무게 이상의 사람이 밟아야 독이 주입되는 독 주사기를 장치하는 식으로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범인인 변사장이 범인으로 삼을 희생양(이이사)을 준비하여 사건을 꾸미고 이이사가 범인이라고 몰고 간다는 점, 마지막으로 변사장의 동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이 모든 점들이 잘 연결되어 완성되어 있지는 않아서 아쉽습니다. 일단 김묘숙 박사에게 준 캡슐이 1시간이 지나야 녹는다는 것은 마지막 추경감의 추리 외에는 그 어떤 단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요. 장이사 체중을 이용한 트릭은 조금 낫기는 하지만 너무 뻔할 뿐더러,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과체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건 문제입니다. 또 이이사라던가, 비서 미스 구 등을 엮어서 범인으로 꾸미려는 변사장의 계획도 그닥 치밀하게 전개되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인 "괴문서"를 만든 신문이 변사장 집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증거 앞에서 또 다른 추리들은 전부 불필요해져 버리니까요. 그 외에도 변사장의 계획은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추경감과 강형사의 툭탁거리는 캐미는 좋고, 앞서 말씀드렸듯 추리물로서의 기본 조건은 갖추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남자들"

우연찮게 추경감은 한 주부의 불륜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주부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 사건 수사를 돕기 위해 나섰다.

지극히 평범한 불륜 치정극입니다. 약간의 수사가 진행된 후 현장에 남겨진 증거 - 현장 도어 손잡이 지문과 체모 - 로 범인이 체포되기에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정숙해 보였지만 사실은 문란했던 한 주부에 대한 묘사를 선보이는게 목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쪽으로도 많이 부족했고요.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황매실의 하룻밤"

두 쌍의 젊은 부부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이동 중에 별장 옆 황매실이라는 작은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 모두 부부를 보고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급한 일로 밤에 전화를 쓰려 별장에서 황매실로 이동한 부부는 황매실 마을이 텅 빈 것을 보고, 황매실 마을이 전설처럼 구미호들이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려움에 떠는데...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꽁트인데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입니다. 공포스러운 상황도 설득력이 넘칠 뿐더러, 결말 역시 와 닿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진상은 바로 '황매실 주민들은 할아버지 제사로 밤에는 모두 아랫 마을에 다녀온 것이며, 제사드리는 날은 목욕 제계하고 외간 사람들과 말도 나누지 않는 법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그럴듯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공포스러운 하룻밤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더 생생했더라면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대로도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고양이는 알고 있다" 

최건일이 청산 중독으로 사망했다. 원인은 팔에 난 상처로, 경찰 수사를 통해 상처의 원인이 된 고양이 발톱에 청산이 발라져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수사를 통해 최건일의 복잡한 가정사에 주목하는데...

니키 에쓰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으로, 전형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콩가루 집안이 등장합니다. 빚에 쪼들리는 동생(최건식), 방탕한 아들(최호정),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와 교제하는 딸(최현아), 최건일의 오랜 불륜 대상인 가정부(석이네) 등 등장인물 모두 전형적이니까요.

그러나 콩가루 집안에 대한 묘사 외에는 추리물로 볼 만한 여지가 전무합니다. 강형사의 현란한 헛다리짚는 추리가 펼쳐지는 것 정도는 볼거리이지만, 실상 진상은 별 볼일 없기 때문이에요. 차라리 고양이 발톱에 바른 청산이 흉기였다는게 더 재미는 있었을텐데, 실상은 건식이 소독약을 바꿔치기한게 진상이라니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것도 최호정의 자백에 불과하고요. 도대체 고양이가 뭘 알고 있었던건지 당쵀 알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도 방탕하고 철없던 최호정이 마지막 순간에 휴머니스트로 돌변하여 눈물까지 쏟는다는 결말은 최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고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아내는 탐정"

술을 끊은 김말구는 아내 박순임, 딸 김민희와 무인도로 캠핑을 떠났다. 그런데 텐트에서 소주병이 발견되고, 김말구는 새벽에 몰래 술을 마시러 나오는데...

남편이 술을 사다가 텐트에 숨겨놓은 후, 오래전 술을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위장하여 다시 술을 입에 대려고 한 것을 알아챈 아내가 술을 물로 바꿔치기했다는 내용의 꽁트입니다. 아내가 이를 알아챈 이유는 술병을 쌌던 신문지가 올해 것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모로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한 수준의 작품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0/10/02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 와카타케 나나미 / 서혜영 : 별점 3.5점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 8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던 아이자와 마코토는 실직 후 바다를 찾아왔다가 익사체를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하츠키시에 머물게 된 마코토는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주인 베니코의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한 뒤, 그녀의 취업 제의를 받아들였다.

한편 그녀가 발견한 익사체는 하츠키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에다 가문의 히데하루로 밝혀져 장례 준비가 진행되는데, 그 와중에 마에다 가문의 현 주인 마치코마저도 어제일리어에서 살해되고 마는데...

소도시 하자키를 무대로 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라 주저 없이 선택했는데, 읽고 나서야 두 번째 작품이라는걸 알았네요. 

그런데 이 작품, 정말 재미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한 것에 더해 추리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가 수사와 추리의 과정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범인과 동기가 이치에 맞는 등 본격 추리적인 요소에 아주 충실합니다.

거기에 더해, 아이자와 마코토가 초반에 겪는 호텔 화재 사건이나 마코토와 치아키의 전화 통화, 베니코 여사의 옛날 이야기 같은 사소한 단서들이 모두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덕분에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복잡한 느낌 없이 추리 소설의 재미를 가득 느낄 수 있었어요.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 역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황당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만, 적절히 수위와 템포를 조절하며 작품과 어울리도록 녹이는 부분에서 작가의 내공이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코토가 처음 어제일리어를 방문한 뒤, 베니코 여사와 펼치는 '고딕 로맨스 퀴즈' 등 고딕 로맨스 소설에 얽힌 다양한 떡밥들은 매니아를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해 더욱 흥미로웠고요.

하지만 주요 사건의 깔끔한 해결에 비해 다른 사건들은 정리가 다소 부족하다는건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치코-구도가 얽힌 하쓰호 살해 및 유기 사건이 그렇습니다. 구도가 하쓰호를 죽인 이유도 명쾌하지 않았고, 시체 유기에 대한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거든요. 이 때문에 마치코 역시 유언장을 폐기하려면 차라리 불을 지르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하거든요. 유언장도 없애고, 생사가 불분명한 하쓰호의 행방을 파악할 수 있어 재산 상속에 문제가 없어지니 1석 2조가 되니까요. 어차피 자신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니, 마치코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구도가 마코토를 습격하면서까지 사체를 처리하려 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사건은 종결된 상태였으니까요. 이런 행동은 무리수였습니다. 차라리 고마지 반장의 추리로 밝혀내는 식으로 처리하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덧붙이자면, 히데하루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가 복수를 결심한 이후의 행동들 역시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복수 방법도 어설펐지만, 마이와 시노부가 얽히는 과정이 순전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점은 앞선 정교한 장치들과 비교한다면 너무 쉽게 처리된 듯 합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5점! 이상하게 단점을 리뷰에 상세하게 적기는 했는데, 장점이 훨씬 더 월등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빨리 1권을 구해 읽어야겠네요.

PS: '코지 미스터리'를 표방한 작품치고는 너무 강력한 사건이 등장하며,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재산 싸움이 펼쳐지는 점이 의외였습니다. 이런 작품도 코지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2010/10/16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3점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전후 일본, 오쿠다마 깊은 곳에 위치한 히메카미촌을 지배하는 히가미가는 '아오히메' 전승에서 비롯된 저주로 인해 아들들이 일찍 죽어왔다. 아들 조주로와 딸 히메코 쌍둥이가 태어난 지 13년째 되는 밤, 무사를 기원하는 ‘십삼야 참배’ 의식이 진행되던 도중 히메코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흘러 장성한 조주로가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혼담 모임을 여는 날, 신부 후보였던 마리코와 조주로가 목 없는 사체로 발견되는데...

야구 시즌이 끝나서 (최소한 제게는 끝났습니다) 이제야 겨우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 미쓰다 신조의 대표작으로, 정통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계보를 잇는 작품입니다. 작가 이름과 탐정 역의 캐릭터만 제외한다면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물씬 납니다. 2차 세계 대전 직전부터 시작되는 시골 지방 가문 내 암투와 이해할 수 없는 증오, 그리고 그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저주와 관련된 기이한 연쇄 살인 사건이 10년을 주기로 반복된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기이한 콩가루 집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 저주와 연관된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3종 세트'가 모두 모여 있지요.

전개 방식도 특이해서, 동네 주민이자 추리소설가인 히메노모리 묘겐이 잡지에 연재하는 소설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시체를 사는 남자"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현대에 정통 본격물의 스타일을 부활시켰다는 점도 그러하고요.

그러나 정통 본격 미스터리로서는 기대에 못 미친 부분도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사건, 즉 십삼야 밤의 히메코 살인사건은 가장 중요한 요키타카의 증언이 애매해서 사건 해결이 어려워졌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사건인 혼사 모임에서의 마리코-조주로 살인사건 역시 마리코의 얼굴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봤는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아쉬웠고요. '변장'을 극대화한 트릭인데, 이건 본격 추리물에서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워요.

또한 '목 없는 사체'라는 연출을 통해 아오히메 전승과 연관시키려는 목적에 지나치게 집착한 점도 별로였어요. 차라리 불을 지르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겁니다. 범인의 즉흥적인 발상이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질 정도로 착착 진행되었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운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물론 이러한 창작 방식은 작가의 특기이긴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억지가 더 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작품 속에서 다양한 단서를 곳곳에 배치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심지어 잡지 연재물의 특성을 살려 '막간'이라는 부분에 핵심적인 단서를 포함시킨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마지막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펼쳐지는 연속적인 반전과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인상적이었고요. 제가 일본 정통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형식 자체가 독특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핵심 트릭이 조금만 더 설득력이 있었더라면 굉장한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네요.

2013/06/27

심령 살인사건 - 사카구치 안고 / 유페이퍼 : 별점 3점

심령 살인사건 - 6점
사카구치 안고/유페이퍼

이북 전문 출판사 페가나 북스의 책. "그림자 없는 범인"에 이어 두 번째군요. 계속 관심이 가던 책인데 이번에 폰을 바꾼 기념으로 테스트도 겸해서 구입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일단 수록된 단편들이 모두 기본 이상은 하는 정통 본격물들이라는 점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솔직히 사카구치 안고의 작품은 "불연속 살인사건"으로 대실망한 터라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지요. 이 작품집에 후반에 수록된 작가 에세이도 본격물 작가다운 개념으로 충만해 있더군요. 이런 작가가 "불연속 살인사건" 따위를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물론 "산신 살인사건"이라는 망작이 수록되어 있고, 번역도 썩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작가 에세이도 별다른 가치는 느끼기 힘들고요. 그래도 2,000원이라는 값어치는 하고도 남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이북들도 쓸데없이 비싸게 만들기보다는 이렇게 압축된 몇 편으로 저렴하게 승부하는 게 나을 듯 합니다.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대신 읽을거리로 추천드립니다. 아울러 페가나 북스의 건승을 다시 한번 바랍니다.

수록작 별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수 살인사건"

300만 엔이라는 거액의 돈을 받은 뒤, 이를 연인에게 위자료로 주려고 했던 유망한 프로야구 투수 오오사카가 살해되고 돈은 사라졌다...

"프로야구 선수 계약"을 둘러싼 살인사건을 다룬 이색작. 그럴듯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며 독자와의 두뇌게임도 공정하게 펼쳐지는 본격물이라는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인물 설정 – 시대를 감안하면 큰 단점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 에 더하여 사건의 핵심 설정이라 할 수 있는 거액의 위자료가 썩 와닿지 않은 점은 아쉽습니다. 이혼을 위해 노력했다 정도의 설명은 추가되는 게 좋았을 것 같아요. 스카우트 전쟁도 그다지 치밀하게 그려지지 않아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진 못한 느낌입니다. 핵심 트릭 및 진상 역시 결국 경찰 수사로 밝혀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좀 허무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산신 살인사건"

불량하고 게으른 아들을 살해하려고 광신도와 모의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아무리 시대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아버지가 별거 없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아들을 걸림돌이라 생각해서 살해하려 한다는 동기는 전혀 공감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추리적인 요소 또한 전무하다는 점에서 도무지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아버지의 망상에 대한 묘사는 괜찮았지만 동기, 전개, 결말 모두 건질 게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심령 살인사건"

버마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려는 심령회에서 주최자인 고리대금업자가 살해당했다. 이에 심령회의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 참석한 마술사 쿠다유의 활약이 시작되는데...

표제작. 동기가 확실하며 트릭도 깔끔한 본격물.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점도 좋지만, 탐정역인 마술사 쿠다유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심령술사와 같은 사기꾼들의 정체, 그들이 벌이는 묘기의 비밀을 밝혀내는 전문가라는 설정이 본격 추리물에 딱 맞는 탐정역이라 생각되었거든요. 디테일한 세부 묘사가 없는 게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어요. 개인적으로는 TV에서 유명했던, 초능력자 사기꾼의 사기를 밝혀내는 랜디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전형적인 일본 추리소설의 콩가루 집안 설정 – 전제군주인 부유한 아버지, 그를 미워하는 장애인 아들과 미녀 자매 – 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자녀들은 그래도 사이가 좋고 잘 뭉친다는 차별화도 괜찮았어요. 왠지 모르게 막내딸 캐릭터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연극을 벌인 이유는 이해하기 힘들며(어차피 자신이 지배하는 가족인데 굳이 돈까지 들여가며 숨길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 범행을 저지르고 난 뒤를 범인이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점은 조금 거슬리지만 그 외에는 나무랄 데 없는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가면의 비밀"

별채에 화재가 발생한 후 밀실에서 불에 타죽은 손님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유일한 단서는 그날 방문한 맹인 안마사가 엿듣게 된 수수께끼의 협박 뿐이었다...

전편에 이어 마술사 쿠다유가 탐정역을 맡는 작품. 밀실 트릭 및 교묘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며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풍성합니다. 저택의 상황을 잘 이용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맹인 안마사가 과연 순간적인 트릭을 간파하지 못하고 쉽게 속아넘어갔을지는 솔직히 의문이고 가면의 존재는 불필요하다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여러모로 이 작품만큼은 장편화했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타 에세이"

저자 사카구치 안고의 추리소설에 대한 두 편의 에세이. 그닥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으나, 트릭의 중요성과 본격물의 가치에 대해 강하게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카구치 안고라는 작가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2025/01/05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손지연 : 별점 3.5점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8점
사이토 미나코 지음, 손지연 옮김/소명출판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주부의 벗' 등 일본 여성지에 실린 요리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이 일본 가정의 식탁에 미친 영향을 알려주는 미시사, 식문화사 서적입니다. 잡지에 실린 요리 정보로 그 시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며, 전쟁 시기 일본인의 먹거리 변화도 굉장히 생생하게 알 수 있어서 전쟁의 실상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 순으로 보자면 1940년부터 '절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뭄과 흉작 탓으로, 일본이 쌀을 절약하기 위해 대체 음식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아빵'이라는 레시피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빵은 밀가루에 콩가루, 해초 가루, 말린 생선 가루를 넣어 만들었는데, 맛이 있을리가 없지요=.

1941년에는 국민의 영양을 고려한 '국민식 운동'이 도입되었으나, 배급제가 본격화되면서 이상에 그치고 맙니다. 배급제에서는 단백질이 특히 부족했는데 오징어와 조개가 단백질 공급원으로 활용되었고, 콩비지도 다양하게 요리되었습니다.
과달카날 패전 이후인 1943년에는 생쌀을 볶아 양을 늘리거나, 겨를 사용하는 레시피까지 등장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레시피에 설탕, 버터, 달걀과 같은 재료가 포함된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너무 비현실적이었거든요.

1944년, 공습이 심화되면서 죽과 집에서 키운 고구마, 호박이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길가의 잡초, 들풀, 곤충을 식용으로 권장하고, 심지어 차 찌꺼기를 채소로 먹으라는 권고까지 실리게 됩니다. 저자가 표현대로 '최후의 발악'이지요. 이런 쓰레기 레시피 중 하나가 '민들레 칼슘 무침'입니다. 

들풀 먹는 법 1 민들레 칼슘 무침

민들레 어린잎을 살짝 열탕한 후 물에 헹궈둡니다. 구운 생선 머리와 뼈, 달걀 껍데기 등을 갈아 으깨고, 다시마가 있으면 구운 후 갈아서 기호에 따라 맛을 내어 무쳐줍니다.

민들레의 쓴맛을 제거하려면 데친 후 얼마 동안 물에 담가 둡니다. 민들레의 쓴맛은 국화과 식물 특유의 영양소이므로 제거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전후에는 미국에서 제공된 밀가루 중심의 레시피가 많아졌고, 식량 사정이 안정되기 시작한 1949년 이후로는 점차 다양한 요리가 복원됩니다. 195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식탁은 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실상을 독특하면서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독서였는데,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요리를 현재 구현한 컬러 사진이 몇 장 실려 있지만, 더 많은 요리를 재현하거나 당시 잡지 자체의 도판을 함께 수록했다면 책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실생활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9/09/01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2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겐 가문의 현 당주인 할머니 야요이가 손녀 유카리가 실종된 사건을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맡겼다. 마침 호겐 가문의 본가가 있던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 에서 기묘한 결혼 사진을 찍은 혼죠 사진관의 나오키치도 결혼한 부부의 조사를 요청했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두 사건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조사 결과 유카리를 유괴했던건 결혼한 신랑 야마우치 도시오였다. 놀라운건 그가 여동생이라고 데리고 다니다가 결혼한 고유키가 유카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몇일 뒤, 야마우치 도시오의 목이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에 매달린채 발견되는데...

꺄! 완전 취향 저격의 독서였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극하는 고전적인 설정, 전개와 묘사가 아주 감탄스러운 수준이거든요. 각 챕터마다 곁들여진 짤막한 부제같은 단문도 옛스럽지만 참극! 공포! 저주! 악연! 증오와 원한의 불꽃! 배우는 모두 모였다! 같은 진부한 묘사도 눈길을 사로잡아요. 전화기조차 격렬하게 울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비련의 여주인공이 가혹한 운명 때문에 결국 총탄에 맞아 죽고, 그녀의 입으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까지 정말로 완벽합니다!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

그야말로 요코미조 세이시다운 설정과 묘사들도 애호가의 팬심을 자극합니다. 전형적인 "대부호 콩가루 집안의 복잡한 가정사가 낳은 비극" 이라는 동기부터요.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낡아빠지긴 했지만 이런게 바로 요코미조 작품의 매력이지요.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될 때 까지 1권 분량의 2/3를 사용할 정도로 진행이 느린 것도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이를 원숙한 솜씨로 등장인물과 기묘한 사건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 힘듭니다. 과연, 짬밥(?)은 날로 먹은게 아닌 셈이에요! 물론 호겐 가문과 이가사리 가문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4대째를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첫 단락은 과하긴 했습니다만...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전해주는 묘사도 고전적이기는 한데, 작가 인생의 말년에 발표했던 쇼와 시대의 작품이라 그런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묘사들이 눈에 뜨인다게 특이했습니다. 피해자인 야마우치 도시오가 재즈 악단 '앵그리 파이러츠'의 리더였다는 등 재즈 콤보 멤버가 사건의 주요 인물이라는 점부터 그러합니다. 또 앵그리 파이러츠의 멤버 중 한 명인 사가와 데쓰야는 애꾸눈인데 그의 안대는 시크하며, 그가 붉은 원색 코트를 입고 지휘를 하면 여자들이 모두 사로잡혔다는 묘사는 처절함마저 느껴질 정도에요. 재즈와 텔레비젼,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젊은 세대를 의식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젊은 세대의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보이기는 하네요.
 당대 풍광을 잘 느끼게 해 주는 묘사도 좋습니다. 전후 막 복구가 시작되던 분위기가 잘 느껴지거든요. 도쿄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부흥하는 부분의 설명이 특히 볼 만 합니다.

현실성 여부를 떠나 팬으로 즐길 거리도 많아요. 몇 년, 아니 몇 십년이 지났지만 더벅머리에 머리를 긁적이고, 볼품없는 하카마에 낡은 회색 외투와 삿갓 모양 모자를 쓴 긴다이치의 행색이 대표적입니다. 비올 때 쓰는 박쥐 우산마저도 친숙합니다. 도도로키 경부나 와 같은 친숙한 등장인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고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지라 일종의 후일담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도도로키 경부는 은퇴 후 잘 나가는 탐정 사무소 소장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경부보로 경찰에서 일하고 있으며, 거리의 양아치였던 다몬 슈는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요.
여기서 도도로키 경부가 생각 이상의 낭만파 꼰대라는 묘사도 재미있었어요. 지금 하는 불륜 조사같은 일 보다 긴다이치가 가져온 가슴이 뛰는 모험은 흥미로와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건방진 의뢰인과 예전에는 잔챙이 범죄자였던 다몬 슈와 함께 하는건 싫어하는데 이거야말로 꼰대죠. 전형적인 '왕년에 내가' 류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이런 완전 고전적인 즐거움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건 단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추리적으로는 완전 꽝이에요. 모두 3건의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양적으로는 풍성한데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한, 모든 사건의 발단인 첫 번째의 야마구치 도시오 살인 사건부터가 엽기적인 사건 현장의 묘사 외에는 억지스럽고 엉망입니다. 우선 후더닛 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야마구치 도시오의 부인 고유키가 실종되었으니까요. 나중에 고유키가 아니라 혼죠 가문의 딸 유카리가 실종되었다는게 밝혀지지만 이 역시 사건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이미 둘이 닮았다는걸 앞 부분에서부터 자세히 밝히고 있어서 수수께끼도 뭐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동기와 같은 와이더닛 측면으로는 괜찮은가? 역시나 별 볼일 없어요. 야마구치 도시오에게 농락당하고 분노한 유카리가 반대로 그를 농락하려다 둘 다 죽게 되었다게 진상이거든요. 트릭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들의 문란한 행각으로 벌어진 사고일 뿐입니다.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목을 풍경처럼 매달은 이유'가 정말 야마구치 도시오의 유언 때문이었다는 이유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 외의 괜히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들은 거슬리기만 합니다. 고유키가 야요이를 설득해 시체를 없앤게 대표적입니다. 그 집은 폐가에 가까와서 사건이 바로 발각될 이유는 없었던 만큼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둘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처럼 위장하고 시간을 번 뒤 집을 아예 재건축 하는 형태로 갔어도 무방했을거에요. 야요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요. 여러모로 사건을 억지로 만들기 위한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세 번째, 요시자와 살인 사건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적으로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범인의 분노로 인한 무차별 살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두 번째 사건만 후더닛, 와이더닛 측면으로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파티 참석자들 모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졌는데 이는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범행이 일종의 착각으로 벌어졌다는 의외성도 좋았고요.
문제는 사용한 트릭이 저자의 이전 작품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에 등장했었던 트릭이라는건데, 범인이 추리 소설을 통해 트릭을 익혀서 사용했다는 식으로 트릭의 자가 복제를 설득력있게 넘어가는 솜씨는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날로 먹은 듯 하지만 이 역시 거장의 재치겠지...요. 와이더닛 측면으로도 협박자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등장 인물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 범위 밖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범인 시게루부터 보자면, 아들 데쓰야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분노한다는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살인까지 저지를만한 인물이라는 묘사가 그 전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너무 갑작스러워요. 분노의 대상에 아내가 포함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요.
데쓰야가 도시오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후 방황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에요. 어머니가 유카리, 아니 고유키라도 그가 호겐 이가라시 가문의 후손이라는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유카리는 엄연히 야요이의 손녀이고, 고유키는 데쓰야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방황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혼조 도쿠베에가 과거 유카리의 사체를 숨긴 뒤 이를 통해 호겐 가문을 협박해 왔다던가, 이를 효도 후사타로가 눈치채고 협박을 이어간다는 설정도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무려 백만엔이나 되는 선금과 함께 사건을 의뢰받은 주제에 의뢰인이 죽도록 방관한 긴다이치의 무능함이고요.

이렇게 추리적으로는 너무 별 볼일 없기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설정도 기대 이하인 등 - 예를 들어 사가와 데쓰야는 최초 야마구치 도시오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될 정도로 격한 분노를 품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뮤지션으로 설명되는 식으로 - 솔직히 더 낮은 점수를 주어도 무방하긴 한데, 고전 애호가들은 여러모로 즐길 거리가 많기는 합니다. 최소한 저는 깔깔거리며 즐겁게 읽었답니다. 저 같은 고전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이 작품을 즐길 정도의 고전 애호가가 얼마나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2020/07/19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전통의 시리즈 Q.E.D의 두 번째 시즌도 벌써 여덟 권째네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작품들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발표되면 좋겠네요.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해변의 목격자"

Q.E.D 시리즈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토우의 1인칭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무토우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지고 전개됩니다. 무토우는 거울을 보는 장면 정도에서만 등장할 정도지요.

이러한 1인칭 시점 덕분에 무토우의 목격 정보가 여러가지 조사를 거치면서 '누군가'로 덧칠되어 가는 전개가 빛을 발합니다. 기억이 조작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당사자 기억에 덧칠하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섬 소년들의 마돈나인 교우코가 비참한 희생자에서 옛 연인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가며 현실을 탈출하려는 악녀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1인칭 전개보다 더 잘 그려낼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을 잘 활용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빚더미 때문에 궁지에 몰려 범행까지 저지른다는 동기도 설득력 높아서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류의 범행에서 간과하기 쉬운, '범인역'으로 교우코의 옛 연인 구리바야시를 써먹는다는 점도 돋보였어요.

물론 교우코의 배가 수리 중이라 본토로 갈 수 없었다는 건, 수리하는 상황만 목격되었을 뿐이라 정말로 움직일 수 없었는지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사체를 숨긴 곳이 집 안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던 그녀 아버지의 병상 속이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요.
즉, 무토우의 조사 이후 구리바야시 범인설이 불거지기는 하지만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 (무토우)의 왜곡되어 가는 목격 증언 말고는 누가 봐도 교우코가 범인인 상황인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또 1인칭 전개라는 독특한 방식을 트릭 등에 활용하지 못한 것도 조금은 아쉽네요. 잘만 이용한다면 서술 트릭의 또 다른 형태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었을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와 재미 양 쪽에서 성과를 거둔, 좋은 에피소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흰 까마귀"

특별한 범죄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1, 2부 구성인데 1부는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 비슷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와누마의 애인도 유산 상속을 받는 4명 중 한명이며, 10억엔에 가까왔던 유산도 투자 실패 탓에 700만엔 밖에 남지 않았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이지요. 변호사와 애인이 만나는 걸 본 나머지 일족은 둘이 한 패로 유산을 빼돌린다고 생각하고요. 1부 마지막까지 변호사와 애인은 악당처럼 보입니다. 나머지 일족은 자신들의 돈을 찾기 위한 절박한 노력에 나서고요.

하지만 2부에서 일족들은 모두 무능한 기생충들이었고, 변호사와 애인이라는 여자가 우리 편(?)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납니다. 이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큰 딸, 그리고 가즈타 모두 자신들의 실수와 무능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는게 설명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1부에 등장했던 여러가지 복선들도 잘 사용되고 있어서 만족도가 높아요.

그러나 결국 일족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통장 확인만으로 남은 재산이 700만엔 밖에 안된다고 납득한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0억엔이나 되는 돈을 누가 은행 통장 하나에 그냥 넣어 둘까요? 일본 노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재산 관리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와누마 할아버지는 페루의 광산에까지 투자할 정도로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인데 통장 하나로 이 모든걸 관리한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끌고나가는 전개 과정의 설득력은 높은데, 통장 만큼은 납득하기 어렵기에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흰 까마귀'는 딱히 이야기하고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이와누마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토마와 나눈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일족이 재산이 700만엔 밖에 없다는걸 납득하게끔 증명해 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이 굉장히 어렵다는걸 빗댄 표현이지요. "흰 까마귀가 없다는걸 증명하는건, 다른 모든 까마귀가 희지 않다는걸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가나가 흰 까마귀를 보고, 토마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세계에 있다! 고 생각하는 결말에서 써먹기는 하는데,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가나와 토마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간걸까?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권을 지켜봐야겠네요.

2015/11/09

붉은 손가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붉은 손가락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년 가장 아키오는 어느날, 아내 야에코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서둘러 귀가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어린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범인은 중학생인 아들 나오미였다. 다급히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아키오는 시체를 버렸지만 곧바로 들통났다. 거듭되는 수사에 큰 압박을 느낀 아키오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범인으로 내세우는 폐륜을 저지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 최근 가가 형사 시리즈를 주로 읽는 이유는 도서관 탓입니다. 회사 근처에 생겨 자주 이용하게 된 도서관이 소설류는 책장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자료는 빈약한데, 가가 형사 시리즈만 이상하게도 전권이 있더라고요. 사서분 취향이겠죠. 덕분에 몰아서 읽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리즈 중에서 비교적 최신작으로 2007년도 고노미스 9위를 차지 했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깝습니다. 원래 단편으로 발표된 작품을 개작했다고 하는군요.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일본 현대 사회 문제점을 대변하는 마츠우라 집안에 대한 묘사입니다. 고부간의 갈등과 가사, 가정 교육 모두를 아내에게 맡기고 바람까지 피우는 무신경한 아버지, 시가에 애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머니, 왕따를 당한 뒤 극도의 이기적 성향을 보이는 아들, 거기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까지! 겉보기에만 정상일 뿐 썩을 대로 썩은, 더 이상 가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가정 묘사가 정말이지 아주 빼어나요.
아울러 콩가루 집안 묘사는 극도의 개인화를, 치매 노인을 모시고 사는 문제는 노령화를, 그리고 어머니의 치매를 이용하여 아들의 범행을 덮으려 하나 정작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세대 간 단절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반전은 정말 대단합니다. 몇 년간 함께 산 가족이 어머니의 치매 여부도 모르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막장 패륜 범죄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얼개와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네요.

이렇듯 현대 일본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발하고 있는 병폐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이라는 점에서 더 무섭더군요.

그리고 아들 나오미 캐릭터가 상상 초월의 비호감이라 읽는 내내 짜증남과 동시에 소년범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확신이 또다시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놈이 커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것 같지도 않거든요. 끽해야 여든살 아버지를 살해한 쉰살 (실제로는 49) 히키코모리처럼 살게 될 테니 차라리 감방 속에서 사회생활이라도 익히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놈이 마지막에 가가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와 체포되는 장면은 아주 좋았습니다. 멱살이 아니라 쌍욕을 하면서 작살을 내 버렸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요.

여튼, 이렇게 장점이 많은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추리적으로 별로라는 겁니다. 그간의 가가 형사 시리즈는 트릭 측면에서, 아니면 와이더닛 계열로 추리적인 완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최초 범행을 근처 주택 거주자로 특정하고 용의자를 짚어낸 가가의 추리는 볼 만하고, 범인이 먼저 밝혀진 뒤 여러 가지 범인의 계획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는 식으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띤 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던 반전도 대단하고요.

그러나 피해자가 확인한 e-mail을 추적했다면 진범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니 마츠우라의 계획은 그냥 약간의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전혀 드라마가 될 수 없죠. 또 어머니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인 "붉은 손가락" 역시 별 의미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들이 계속 자신을 범인으로 몰면 진상을 고백할 심산이었으니까요.

어머니가 치매가 아니었다는 것을 가가가 알게 된 것이 "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등, 극적 반전과 관련해서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읽기 편한 작품도 아니고 추리적으로 별로라 감점합니다만 사회파 미스터리로 기본은 해 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긴 하니까요. 제 경우에는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가 얼마 전 돌아가셨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요양원에 모시긴 했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뭔가 해결책이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은 정말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 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도 꽤나 상세하게 등장합니다. 가가의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하는 사촌동생 마츠미야가 등장해서 가가와 컴비를 이루어 수사를 펼치고, 가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꽤나 굵직한 개인사가 펼쳐지죠.

그런데 가가의 아버지가 가가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는 찾아올 사람이 찾지 못해 홀로 죽어갔지만, 찾아올 사람이 있는데도 오지 말라고 하는 건 그것 때문에 자식이 먹을 욕을 생각하지 않은 자기 욕심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유언 대신이라면 저도 따르기야 하겠지만 이런 억지 외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습니다. 게다가 아들은 안 되는데 마츠미야는 된다? 무슨 기준인건지 모르겠네요.

2022/06/11

기만의 살의 - 미키 아키코 / 이연승 : 별점 1.5점

기만의 살의 - 4점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레 가문의 당주 하루시게가 아내 사와코, 양자 요시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자켓에서 독이 들어있던 초콜릿 포장지 조각이, 그리고 사와코의 서재에서 그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범행을 인정한 하루시게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40년 후, 가석방된 그는 사랑했던 니레 가문의 둘째 딸 도코에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으며 사형 선고만을 피하려 거짓 자백을 했다며 40여년 간 고민해왔던 범인의 정체와 트릭을 알리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도코로부터 온 답장에는 그의 추리를 반박하는 도코의 추리가 담겨 있었다....

1947년 생이라는 노인 작가의 고전적인 정통파 본격 추리물입니다. 

콩가루 지역 유지 가문에서 발생한 의문의 독살 사건이라는 기본 설정부터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 모두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심지어 맨 앞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수록되어 있는 구성까지도요. 대부분의 전개가 하루시게와 도코 사이에 오간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독특한 요소지만, 손으로 써서 편지 봉투에 넣고 보냈다는 점에서도 고전적인 스타일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로 이루어지는 작품이 나오는 시대이니까요.

설정과 구성, 내용 외에 추리적인 부분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을 충실히 따릅니다. '트릭' 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점에서요. 하루시게와 도코의 편지를 통해 같은 사건에 대해서 무려 4개의 추리가 펼쳐지는 풍성함도 좋고요. 특히 사와코의 자작극이었다는 추리와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가 공범이었다는 추리는 무릎을 칠 정도로 그럴듯했습니다. 사쿠라와 스미에의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써 먹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양복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트릭도 괜찮습니다. 처음에 요헤이와 하루시게 자켓을 바꾸어 걸어 놓은 뒤, 라이터를 꺼내는 척 양복 주머니에 조각을 집어 넣었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맨 처음에 효도가 범인임을 주장했을 때, 흰 커피잔에 다량의 아비산을 넣고 그 위에 물엿 코팅을 했다는 장치 트릭 이야기는 조금 별로였어요. 하루시게는 이 장치를 만든건 요시오였을 거라고 추리했습니다. 효도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목숨을 맡기는 장치를 시킨다는건 그다지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독특한 장치 트릭인건 사실이고, 이외에도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하루시게가 죄를 인정했던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정도, 변호사 출신 작가답게 잘 풀어내고 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았을 뿐더러, 작위적이이라는 본격물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우선 전개의 핵심인 둘 사이에 오간 편지와 결말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 번째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양복 속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방법은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니레 가문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효도 유타카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도코는 하루시게의 아내 사와코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자신의 추리를 보내옵니다.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그리고 남편 상복을 준비했기에 포장지 조각을 쉽게 넣을 수 있었다는게 증거라면서요.
다음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도코의 남편 요헤이와 사쿠라, 그리고 가정부 스미에가 공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와코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와 함께요. 그리고 도코가 사실은 요헤이를 사랑했던거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도코는 요헤이는 사고사한게 아니며, 자신이 살해한 것과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하루시게의 마지막 편지는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시게가 감옥 생활을 하게 한 진범이라는걸 밝히는 내용이었고요.
둘의 자살 이후 이 편지들이 발견되었고, 하루시게의 변호사이지 친우 기시가미의 도움으로 경찰은 도코가 하루시게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42년 간의 수감 생활 중 도코가 진범임을 확신했던 하루시게의 복수였다는게 드러나며 마무리 되는데, 이 편지의 왕래 자체가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뒤, 도코가 "맞아요, 효도가 범인일거에요" 라는 답장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사와코가 범인이며, 사실 하루시게는 사와코를 사랑했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낼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답장을 보냈다 한들, 하루시게의 두 번째 편지 -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 - 에 응해 사실 자기가 요헤이를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낸다는건 더 말이 안됩니다. 솔직히 도코가 이런 장문의 답장을 쓴 것 부터가 억지에요. 42년은 긴 세월입니다. 아무리 불같은 사랑을 했더라도 수십년간 연락도 뜸했던 남자가 저런 편지를 보내왔을 때, 도코가 기꺼이 반기며 열정적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결국 다시 사랑에 불타오른다는건 별로, 아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도코가 범인이라는걸 증명할 수 없다는, 본격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결함도 큽니다. 도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자백도 없기에 이는 하루시게의 확신에 불과합니다. 즉, 하루시게의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이 진짜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루시게가 니레 가문의 당주가 된 시점에서,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동기가 없는 탓이고요. 딸들도 아버지가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걸 묵인했을 정도로 니레 가문 당주의 위치는 확고했습니다. 불륜 따위로는 흔들리지 않았을거에요. 

물론 불륜 상대방이 자기 동생이라걸 사와코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하루시게가 당주가 된 직후에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령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했다 하더라도, 하루시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듭니다. 누가 봐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곧바로 야심을 드러낸 사쿠라나 효도의 양복 속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는게 당연했을 테니까요. 사건을 무마하고, 이후 니레 가문의 터전을 다지는데도 훨씬 쉬웠을테고요. 

하루시게가 경찰에서 '사와코가 진범이다' 라고 주장했을 거라는게 도코의 바람이었다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당신 아내를 죽이고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당신은 똑똑하니까 당신 아내 자작극이라고 경찰에 말하면 될꺼야!" 라는 건데, 뭐라 말하기도 힘든 억지 주장일 뿐이지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지막 반전(?)도 딱히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새롭게 출간된건 반가왔지만,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사실 도코의 두 번째 답장부터는 읽으면서도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어요. 딱히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5/09/17

폭스 이블 - 미네트 월터스 / 권성환 : 별점 3.5점

폭스 이블 - 8점
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영림카디널

영국의 한적한, 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지로 알려진 시골마을 센스테드. 이곳의 유지인 로키어-폭스 가문의 장원에서 에일사 부인이 얇은 잠옷만 걸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연사로 판단했지만, 마을 주민 사이에서는 에일사의 남편이자 장원의 주인 제임스 대령이 살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제임스 대령의 집에는 괴전화가 계속 걸려오기 시작했고, 대령은 손녀 낸시를 찾았다. 그런데 낸시는 대령의 딸이 아버지를 모르고 낳은 딸이었던 탓에, 대령이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몰래 입양시켰던 과거가 있었다. 그래서 낸시는 유산 상속을 거부했다. 그러나 협박이 계속되어 낸시는 결국 대령을 돕기로 결심하고, 크리스마스에 장원을 방문했다.
대령의 변호사 마크와 낸시는 힘을 합쳐 대령을 도왔고, 에일사의 죽음에 관련된 배후의 진상을 조사했지만 수수께끼의 남자 폭스 이블이 행동을 개시하는데....

앞선 미네트 월터스의 장편 2편을 읽고 주저없이 구입해서 읽게 된 작가의 3번째 장편입니다. 데뷰작 "냉동 창고"가 존 크리지 상을, 두번째 작품 "여류 조각가"가 에드가 상을, 이 작품이 골드 대거상을 수상했으니 정말 상복 많은 작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담이지만 그동안 이 상들을 수상한 작품들은 기대를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어느 정도의 재미와 수준은 갖추고 있었지요. 수상작들은 어떤 작품을 선택해도 후회는 없으리라 판단됩니다.

하여튼, 이 작품은 전작 중에서 "냉동 창고"와 같이 시골 장원을 주 무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타입의 동네 사람들과의 갈등관계를 그리고 있는 점, 콩가루 집안의 내력을 묘사하는 점도 전작들과 비슷합니다. 이런 하드보일드스러운 복잡한 갈등관계의 묘사가 작가의 특기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도 큽니다. 대표적인건 남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가고 있는 점입니다. 제임스 대령의 변호사 마크와 수수께끼의 악한 폭스 이블을 축으로 극이 전개되거든요. 특히나 폭스 이블이라는 인물의 묘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여성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낸시는 "강한 여성"을 표방하던 그간의 작품들과 비슷한 캐릭터라 조금 단조로운 느낌은 들었습니다만, 특유의 치밀한 심리 묘사로 전작들과 다른 차별점을 가지면서 잘 그려냈다고 생각됩니다.
또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잔인하고 똑똑한 폭스 이블의 정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전행에 맞춰 여러 단서를 하나씩 던져주면서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의 깜짝쇼처럼 진상이 밝혀지며 반전이 연속되는 부분은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좀 난데없기는 합니다만, 나름 괜찮은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기사와 인터뷰, 편지 등이 상당히 중요하고 적절하게 사용되는데, 이런 부분을 표현하는 책의 편집도 좋습니다. 기사들 중에서 "얼음 창고" 주인공 중 한명이었던 여기자 앤 카트렐이 잠깐 언급되는 것은 팬으로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마지막으로 "우리편"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으니 재미가 더 컸습니다. 솔직히 앞선 두 작품보다 조금 지루하고 단조로운 면이 있고 사건의 "충격"적인 면에서도 전작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앞선 두 작품은 형편없는 번역 때문에 미네트 월터스라는 작가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거든요. 흥미와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좋은 번역과 좋은 출판 기획이 얼마나 작품에 중요한 요소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가격도 적당한 편이고 재미도 있으니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11/06/09

0시간으로 - 애거서 크리스티 / 안동림 : 별점 3점

0시간으로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안동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제작 외에 <포켓에 호밀을>까지 총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된 동서추리문고 판본입니다. "13인의 만찬"을 읽은 뒤, 갑자기 생겨난 크리스티 여사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읽게 되었습니다.

"0시간으로"는 시골 노부인의 별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여사님 특유의 후더닛물입니다. 서로의 악의와 증오가 교차하는 전반부, 그리고 사건 후 해결 과정을 그리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일단 배틀 총경이 활약한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했습니다. 배틀 총경은 "4개의 시계" 등에서는 우직하고 끈기 있는 형사로 탐정의 조력자 역할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경험에 기반한 끈기 있는 수사 능력에 더해 감수성과 자애로움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벨기에인 탐정 포와로를 들먹이며 단서를 찾아내는 모습에서는 ‘과연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하는 동물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깔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해결 과정은 약간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장소에 있던 제3자가 우연히 등장해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는 급작스러운 전개도 별로였고, 단지 정신병으로 치부된 살인의 동기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도 많고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전처에게 집착한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이혼 후 더 예쁜 아내를 얻어 잘 살고 있으면 그게 복수지, 뭐 이리 어렵게 일을 꾸몄나 싶었습니다.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원했다면 차라리 직접 죽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요.

또 후더닛물의 공통적인 단점이기도 한데, 모든 등장인물을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다루다 보니 초반부 전개가 약간 늘어지는 감이 있었습니다. 배틀 총경이 ‘눈빛이 어쩌고’ 하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딱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따뜻한 배려심의 소유자 배틀 총경의 모습과 함께,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나름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별점 2점, 추리적으로 완전범죄에 가까웠던 범인의 계획과 독자에게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0.5점을 더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 "호밀 속의 죽음"은 독특한 점이 많았던 "0시간 속으로"와는 달리 전형적인 여사님 작품입니다. 콩가루 대저택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마더 구스 동요를 바탕으로 한 살인사건이라는 설정이 딱 그러합니다. 작품도 중박 이상은 되는 편이라, 용의자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면서도 공정하게 독자와의 두뇌싸움을 펼치는 고전 정통 추리물의 미덕이 아주 잘 살아 있습니다. 또 미스 마플 팬이라면 시리즈에서 가끔 언급되곤 했던 글래디스 마틴이라는 하녀가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좀 과하긴 했습니다. 저택의 왕고모님이 뭔가 아는 척하면서 던지는 이야기들이 모두 진상을 흐리는 별 볼 일 없는 내용이라는 것은 그렇다 쳐도, 마더 구스 동요를 끌고 들어온 것은 확실히 무리였어요. 최초의 티티새 장난은 범인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이었다는 점, 그리고 범인이 과거 티티새 광산주의 딸이 어떤 식으로든 복수에 관여했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기에, 그냥 흥미거리 소재에 머물고 맙니다.

범인이 자신의 범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을 만한 다른 용의자가 딱히 없었다는 것도 완전범죄라는 측면에서는 감점 요소였어요.

그래도 트릭과 함께 사건의 진상은 상당히 놀랍고 동기도 나름 합리적이기에 만족합니다. 마지막 글래디스의 편지도 심금을 울리는 적절한 에필로그였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그래서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중박 이상은 되고 즐길 만한 요소가 많기에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9/12/29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1947년, 10명을 독살하고 보석을 강탈한 전대미문의 천은당(天銀堂)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츠바키 자작은 알리바이를 대고 간신히 혐의를 벗지만 곧바로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맨다. 이후 긴다이치에게 츠바키 자작의 딸 미네코가 찾아와 석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과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의 유령()을 조사해 줄 것을 부탁하고, 조사를 수락한 긴다이치 앞에 몰락한 귀족이자 츠바키 자작의 장인인 다마무시 백작가를 노리는 연쇄살인이 펼쳐진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혼진 살인사건" 이후 옥문도 - 팔묘촌 - 악마의 공놀이 노래 - 이누가미 일족 - 에 이어 꾸준히 읽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입니다. 이로서 6작품째네요.

이 작품이 특이한 점이라면 도쿄의 번화가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외의 기본 설정은 다른 작품들과 거의 비슷합니다. 즉 "부유한 명문가이지만 실상 내용을 알고보면 콩가루 집안"을 무대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것이죠. 뭔가 괴기스러운 분위기로 끌고나가는 것도 여전한데 이 작품에서는 제목 그대로 "사건 현장마다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묘사가 등장하는 식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시리즈를 제외하고라도 여러 콘텐츠를 통해 하늘의 별만큼 접해본 너무나도 뻔한 설정이며 캐릭터들 역시 진부하다 싶을 정도로 전형적인 이야기죠. 그래도 이야기를 굉장히 빠른 템포로 전개하고 있으며 사건도 상당히 많이 시체가 전부 6구가 등장할 정도로 사건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일단 "긴다이치" 시리즈이기에 당연히 기대해 봄직한 추리적요소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첫번째 다마무시 백작 살인사건 트릭은 괜찮은 편이지만 사건자체가 우발적이었으며 핵심 트릭인 밀실 트릭이 여러가지 우연에 기댄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첫번째 사건 이외의 두번째, 세번째 사건은 아쉽게도 정교한 트릭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분위기"만 한껏 끌어낸 사건이기에 언급할 필요도 없겠죠. 용의자가 너무 뻔하다는 것과 "악마의 문장"으로 대표되는 몇가지 지나친 작위적 설정 역시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트립니다.
그나마 첫번째 사건에서의 동상을 이용한 트릭 하나만큼은 신선했고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설정을 드러내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에 대한 합리적인 연출과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복선만큼은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때 많이 부족했어요.

또한 이 작품은 추리적 요소보다는 사실 사건의 동기가 되는 관계, 즉 "근친상간"에 대한 놀라운 진상이 핵심인데 이 진상을 끌고나가기 위한 설득력이 너무나도 많이 떨어집니다.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너무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의 우연이 도가 넘을 정도라 도저히 현실세계에 있음직한 이야기로 보이지 않거든요. 너무 충격과 자극적인 소재에 집중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은데 그나마도 발표 당시인 50년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충격적이기라도 했겠지만, 21세기에 읽자니 비슷한 류의 다른 작품이 이미 너무 많이 나온 탓에 별다른 새로움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만해도 처음 "차이나타운"을 보았을때의 충격은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 외에도 전후 일본에 충격을 안겨준 "데이코쿠 은행 사건" 을 이야기의 곁가지로 쓴 것도 무리수가 아니었나 싶고 츠바키 자작이 자살한 동기도 석연치 않은 등 읽고나니 단점만 눈에 들어오네요. 제가 긴다이치 시리즈의 팬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확실히 시대에 뒤쳐진 거장의 평작 이하의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여태까지 읽은 긴다이치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네요. 다음 작품 "밤산책"이나 기대해 봐야 겠습니다.

2005/02/23

아가페이즈 - 야마다 레이지 : 별점 3점

아가페이즈 6 - 6점
레이지 야마다 지음/세주문화

비쥬얼 록밴드 "에로스"의 리더인 미즈키 유리는 천재 기타리스트 및 작곡가로 언더그라운드의 카리스마로 까지 불리우는 인기인이지만 16년동안 자신이 호모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된 불량조직 카르마 레인의 리더 우즈메는 유리에게 연민을 느끼고 유리가 짝사랑하는 야구부 스타 카네다 토라키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유리를 도와주고자 한다. 

하지만 얇은 선수층과 콩가루같은 팀 분위기라는 악조건에서 큐세이 고교를 갑자원에 진출시키기 위해 홀로 팀에서 고군 분투하는 토라키를 위해 유리가 야구로 도와줄 생각을 하고 전설의 풍수사 "세이메이"를 찾아가게 되면서 부터 모두의 운명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풍수마구 5행 5종을 익히게 된 유리는 마구를 하나 던질때 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게 된다는 계약을 하게되고 마구를 계속 던져간다. 기타 연주력, 작곡능력 등을 차례로 잃어가다가 최후의 마구 1개를 남기고 마지막 남은 계약대상인 유리의 목소리만이라도 지키기위해 우즈메와 토라키를 비롯한 팀원들이 힘을 합치지만 결국 지구대회 준결승에서 최후의 핀치에 몰린 유리는 토라키와의 대화끝에 마음을 정리하고 최후의 마구를 던지게 된다...

도대체 이 만화의 쟝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얻은 비쥬얼 호모 열혈 고교야구 청춘 게이 애정 멜로 만화랄까요?

그동안 주류 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모든 코드들을 조합해서 16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면서도 실제적으로 드라마의 무대는 고교야구 지구 예선으로 설정하여 진행하는 엄청난(!) 만화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아다치 테츠의 만화 "세븐틴 러브"가 일단 연상되더군요.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문란한 사생활, 거기에 현란한 대사와 독백이 난무하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제대로 된 어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각각 어두운 가정환경과 주위 환경에 시달리며 여러 비정상적인 생활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도 비슷하네요. 그리고 대충 그린듯한 그림도요.

하지만 이러한 요소는 일부 막나가는 청춘물이나 성장물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왔던 점이라 이 작품만의 독특하거나 특별한 점으로 보기에는 힘듭니다. 결정적 차이점이자 이 작품만의 특징이 있다면 이른바 "청춘애정물"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풍수"와 "야구"라는 황당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서 말이죠.

이 작품에서 이질적인, 제대로 된 어른이 유일하게 붙어있고 재능과 어느 정도 행복한 가정이 있는 존재인 토라키(와 토라키와 연결되는 야무) 만을 제외한다면 작품안에서 크게 진행되는 두개의 사랑의 흐름, 우즈메->유리->토라키->야무->유리 와 마츠오->다키니->류추다 라는 두개의 사랑 모두 당사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첫번째는 주 당사자인 유리는 호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특히 토라키) 노멀이라는 것 때문에, 두번째는 다키니의 죽음 때문에 당사자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지요.

또한 진정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것을 토라키를 위해 버린 유리의 경우를 비롯하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풍수의 이론 (등가교환의 법칙?) 때문에 모두들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전개는 이들의 상처를 더욱 깊고 암울하게 합니다. 이렇게 흡사 인과율의 법칙처럼 정해진 파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는 파국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베르제르크"와도 유사한 전개로 비슷한 전율을 안겨다 줍니다.

혹시 어디서 본듯한 설정이라고요? 최관->현지->오혜성->엄지->마동탁 이 생각나지 않나요? 무엇보다 최근에 거의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인 유리, 즉 오로지 사랑때문에 자신을 파괴해가는 모습은 흡사 엄지를 위해 장님이 되면서까지 시합에 져주기 위해 발광하는 오혜성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집니다. 그러나 오혜성과 미즈키 유리의 차이점은 오혜성은 사실상 더 잃을것이 없었지만 유리는 사랑을 위해서 가진 모든것을 잃게 된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도 결국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엄청난 점수차로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모든것을 희생하여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무참하게 패하는 큐세이의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당연했지만 너무나 어둡고 비극적인 끝맺음이었죠. 때문에 대충 그린듯한 그림체에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더 비장하고 더 암울한 이야기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권에서 모든것을 잃게된 후 각자 스스로의 처지를 알게 되어 행복을 위해 다시 모인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유리의 마지막 피칭로 끝나는 8권정도에서 끝맺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의 전개는 에필로그-후일담 형식의 후반 이야기가 너무 길어 상당히 처지는 편이라서요. 차라리 음악을 포기하고 말없는 풍수 마구 투수로 프로를 재패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음악에 대한 집념과 천재적인 음악성에 대한 묘사가 설득력이 부족해서 마지막 부분에서의 비장함이 약해 8권까지 꾸준히 달려주던 감성이 좀 무뎌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단점을 지적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고교 청춘 애정물이면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전편에 걸쳐 명장면과 명대사가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심각한 대사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특유의 개그와 과장을 계속 선보여서 이질적이고도 해괴한, 하지만 작품에는 너무나 어울리게 구성하는 센스는 놀랍습니다. 아쉽게도 야구만화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설정과 잘 조합된 마구의 특성과 던지는 법,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라이벌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흡사 20여년전의 야구만화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작품 자체도 스토리는 황당무계하지만 사람을 잡아 끄는 매력이 특출나서 몇번이고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작품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그림만 조금 더 좋았더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었을텐데 아쉽군요. 뭐 그나마 요새는 구하기도 힘든 절판도서가 되어버렸지만요... 

개인적인 명장면 베스트...최후의 투구를 앞두고 토라키와 유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너 이 시합전에 자신이 게이라고 얘기했어.. 대답해 유리... 너...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싸워온거냐..?"
"핫 핫 하" 
[물론이야...] "바보-" 
[아주 좋아하고 있어] "시시껄렁한 소리 다 듣겠다" 
[너는...] "미안하지만..." 
[나의 전부야..]"내 타입이 아니야"

2012/06/09

너무 친한 친구들 - 넬레 노이하우스 / 김진아 : 별점 1.5점

너무 친한 친구들 - 4점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북로드

환경운동가로 지방도로 건설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던 고교 교사 파울리가 살해당했다. 보덴슈타인 반장의 지시로 수사를 진행하던 피아 형사는 유력한 용의자인 동물원장 산더와 미청년 루카스의 구애를 받게 되는데...

하아... 그간 격조했습니다. 거의 1주 만이네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블로그가 방치 상태가 되어 갑니다... 주말이라도 부지런히 글을 올려야겠습니다. 

블로깅 목적으로 이번에 읽은 책은 요새 대세라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형이 구입했길래 별 고민 없이 덩달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독일 가정주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읽어보니 여러모로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더군요.

첫 번째로는 최근의 인기작임에도 고전적인 정통 추리 수사물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피해자에 대한 설정입니다. 환경운동가로 활동해서 생겨난 적 뿐만 아니라, 전처와는 재산 문제로 싸우고, 옛 친구의 숨기고 싶은 과거도 알고 있고, 가르치던 학생과 졸업 문제로 격하게 싸우는 등 가는 곳마다 적을 만든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5만 유로라는 거액의 현금 소지까지 밝혀지고, 알고 보니 의외의 자산가이며 여러 보험도 얽혀 있는 등 여태까지 살아 있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근 추리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그야말로 모범적인 피해자입니다.
일본 고전 추리소설에서 봄직한 콩가루 집안에 대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집 나간 아들들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거의 모든 커플이 불륜을 저지르며, 심지어 자기 아들의 여자친구와 놀아나는 아버지까지 등장하는 등 일본 소설을 능가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용의가 짙은 인물을 순차적으로 등장시키고, 부수적인 사건이 벌어짐에 따라 용의자가 계속 이동하는 등의 수사 과정도 역시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전적이기만 했더라면 이만큼의 인기는 얻을 수 없었겠죠? 형이 "추리를 가장한 로맨스소설이다"라는 평을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다른 장르 문학 작품과 비교하면 로맨스 소설 느낌을 많이 전해 줍니다. 등장인물도 미남미녀가 많고(잘생긴 정육점 주인이라든가...), 주인공인 피아 형사를 향해 구애하는 인물도 중후한 중년과 잘생긴 애송이라는 조합으로 두 명이나 등장하는 등 여성 독자를 끌어들일 만한 요소가 많아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진범의 정체와 결말에 큰 문제가 있더군요. 너무 뜬금없기도 하거니와, 정교함이나 치밀함과는 담을 쌓은 범죄로 단지 운이 좋았던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트릭 같은 요소는 전무합니다.

그렇다고 수사 과정이 치밀하냐 하면 그것도 영 아닙니다. 첫 범행 때에는 목격자도 있고, 두 번째 범행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를 남겼음에도 범인이 용의선상에조차 오르지 않는건 솔직히 경찰의 무능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거든요. 용의자들 혈액 검사만 했어도 충분했을 것을...
또 최초 파울리 살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반더베르크를 살해하려 한 동기는 도저히 알 수도 없었고, 독자의 혼돈을 노리고 뿌린 떡밥(예를 들어 파울리의 전처와 현 여자친구의 수상쩍은 밀회라든가)도 제대로 회수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는 등 완성도 면에서는 현격한 결격사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산더와 루카스를 색안경 끼고 보는 보덴슈타인의 심리 묘사는 대놓고 노리고 쓴 티가 물씬 나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독자에게 "얘하고 얘가 수상해!"라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공정성이라는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요소를 무시해버린 것이니 도저히 좋게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맨스 소설 느낌을 넘어서 시시콜콜한 심리 묘사가 너무 많은 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주인공이 잘생긴 미중년 동물원 원장에게 끌리는 감정을 주체 못하는 피아 형사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보덴슈타인 반장의 캐릭터도 일과 가정 모두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등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앞서 말한 독특함과 그에 따른 장점, 즉 고전 느낌의 로맨스 분위기, 확실한 여성스러운 묘사는 분명히 괜찮았습니다. 각 요소들은 전통적이나, 그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괜찮은 시도이긴 하죠. 헐리우드 스릴러화되는 최근 유럽 장르소설과의 차별화 포인트도 확실하고요.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읽어야 할지 심히 고민됩니다...

2004/07/13

사쿠라 신부의 사건 노트 - 영광관 / 고도관 살인사건 : 별점 2점 / 3.5점

사쿠라 신부의 사건노트 1 - 6점
고로 아오키 글, 고신 오가와 그림/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사쿠라 신부의 사건노트 2 - 8점
고로 아오키 글, 고신 오가와 그림/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이사와 더불어 발굴한 잊혀진 추리만화. 원작은 Goro Aoki, 그림은 Koshin Ogawa입니다.
국내에 2권까지 출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 대로 “사쿠라 소이치로”라는 카톨릭 신부가 탐정이며, 두 권 모두 토코요다 마나미가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권 영광관 살인사건
“영광관”이라는 대 저택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던 토코요다 코우스케가 살해당했다. 장녀 리쯔코의 결혼식을 얼마 앞둔 시점이었다. 이후 리쯔코의 약혼자 토쿠다 토오루마저 살해하고 말았다.
영광관에 거주하고 있는 토코요다 패밀리는 콩가루에 애정결핍 증상을 심하게 보이고 있는 인물들로, 그 중 코우스케와 싸우고 실종 중인 리쯔코와 차녀 마나미의 아버지 켄스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경찰 조사로 켄스케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2권 고도관 살인사건
이찌노세 가문의 소유인 외딴섬 코모라 섬의 “고도관”에 찾아온 손님들. 그들은 모두 이찌노세 카오리라는 여성을 알고 있던 사람들로 초대장을 보고 찾아왔다. 하지만 섬과 고도관에는 카오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냉동실 안에서 그녀의 자살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정기 연락선이 올 때까지 섬에 고립된 손님들은 “묵시록”의 글귀와 같이 한명씩 살해당했고, 결국 그들 중 카오리와 알고 지내던 프리랜서 카메라멘 카노우 에리카의 조수로 이 섬에 우연히 찾아온 마나미만 살아남았다. 
그녀는 사쿠라 신부에게 진상을 밝혀줄 것을 요청하는데...

1,2권 다 제목에서 보이는 것 처럼 “관 시리즈”를 상당히 의식한 듯 싶고, 내용도 "관 시리즈"와 유사하게 특정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그 중에서도 밀실 트릭이 핵심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1권 “영광관 살인사건”은 길이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운 트릭과 내용이었습니다. 만화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고, 만화적인 전개도 내용을 잘 뒷받침 해 주지 못한 탓입니다. 소설로 썼으면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주인공이자 탐정역인 “사쿠라 신부”의 캐릭터가 너무 눈에 띄지 않는 점도 아쉬웠고요.
그래도 “독자에게 도전”하는 식으로 페이지를 분할해서 완벽한 퍼즐 미스터리 물로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고 싶네요. 중요 알리바이 트릭 자체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니까요.

2권 “고도관 살인사건”은 훨씬 낫습니다. 보통 만화책이라면 2권으로 나옴직한, 3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인데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재미가 상당하거든요. 1권에 비해 스케일도 클 뿐더러 “묵시록”의 글귀에 따라 사람을 살해하는 패턴은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미 써먹은 방식이지만, 만화에서 보여지는 시각 효과 때문에 그 맛이 훨씬 더 잘 살아납니다. 트릭 자체도 흠잡을 데 없을 만큼 괜찮고요. 중간 중간 물론 약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추리 만화에서 오리지널로 이 수준의 트릭이라면 “김전일”의 최고 에피소드하고도 견줄 만 합니다. 1권과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도전”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사쿠라 신부

하지만 이야기의 주요 화자가 “마나미”라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코모라 섬과 고도관에서의 이야기에 “사쿠라 신부”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나마도 희박했던 사쿠라 신부의 캐릭터가 더욱 약해져 버린건 아쉽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카톨릭 신부”라는 특성을 그다지 잘 살린 것 못한 점도 감점 요인이네요. 세례명이나 카톨릭의 장례 습관 등 전문 지식이 어느 정도 나오기는 하지만 “신부”라는 캐릭터에 걸맞는 수준이라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브라운 신부”와 비교해 보면 그 수준이 현격히 차이가 납니다.
작화도 나름의 스타일은 있고 열심히 그리기는 했지만 뎃생력이 미흡하고 지나친 펜선 남용으로 지저분해 보이는 등 부족함이 더 눈에 뜨입니다. 배경이나 묘사 같은 디테일은 좋지만 보다 인물과 작화에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을 주자면 1권은 2점, 2권은 3.5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위의 단점, 즉 부족한 캐릭터와 작화 때문에 0.5점 정도 감점합니다.
그래도 원작의 수준이 상당한 만큼 꽤 괜찮은 추리 만화 시리즈가 될 것으로 보이기에 후속작을 기대했는데 2권 이후 별 소식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제목에 "Afternoon Detective Series"라고 찍혀 있는 걸 보면 다른 시리즈도 있을 법 한데 말이죠... 서울 문화사에서 다시 한번 출간해 주었으면, 후속편이 없다면 "Afternoon"의 다른 시리즈라도 계속 발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2020/07/04

머더 미스터리 Murder Mystery (2019) - 카일 뉴어첵 : 별점 1.5점

오래전 약속했던 유럽 여행을 드디어 떠나는 뉴욕 경찰(애덤 샌들러)과 그의 아내(제니퍼 애니스턴) 부부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한 가족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고령의 억만장자와 그의 가까운 가족들만 모이는 초호화 선상 파티! 꿈 같은 상황에 들떠있을 때, 억만장자가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그들 부부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악몽이 시작되는데... (넷플릭스 소개 인용)

더운 여름 생각없이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감상하게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3일만에 3천만이 봤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어딘가에서 '정통 미스터리' 라고 소개된 글을 읽었기에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엄청나게 실망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라고 소개했던 글을 꼭 찾아서 분노의 댓글을 달고 싶을 정도로요. 일견 전형적인 미스터리물로 보일만큼 추리 소설의 온갖 설정들과 클리셰를 따라 하고는 있습니다만, 실제 내용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불과하며 미스터리로는 수준 미달의 이야기이었기 때문입니다. 정교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고, 이야기 전개는 구멍투성이거든요. 맬컴이 살해되고, 그의 아들 토비가 유서와 함께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 이후에는 범인들이 추가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전무합니다. 닉과 오드리 부부가 사건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해도 범행이 드러날 이유는 없으니까요. 부부를 권총으로 죽이려 해 봤자,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만 드러내는 꼴입니다.

또 부부를 죽이려 할 때(그러다가 실수로 세르게이를 죽였을 때) 후안 카를로스가 실제로 범행을 저질렀다는건 더 말이 안됩니다. 맬컴을 살해한건 토비고, 토비를 죽인건 그레이스입니다. 카를로스는 그레이스를 부추키고, 범행에 도움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직접 범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복수도 이미 완료되었는데, 복수 대상도 아닌 미국인 부부를 죽이기 위해서 직접 나선다? 이건 말도 안되지요. 

중간에 수지가 총을 들고 나타나서 닉과 카를로스를 협박하다가 독침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지는 왜 총을 들고 그들 앞에 나타났을까요? 앞선 범행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그녀가 맬컴과 결혼한 뒤에도 찰스 캐번디쉬와 관계를 지속했다는건 지금 시점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말이죠. 총질을 서로 해 대는 와중에, 부는 독침으로 사람을 죽이는 그레이스의 행각 역시 황당함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입니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의 무의미하고,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로 점철된 영화가 제대로 굴러갈리 없고, 당연하게도 추리적으로도 건질건 전무합니다. 그나마 추리적으로 볼 만한건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첫 번째는 이야기의 도입부인, 콩가루 가족들만 모인 유람선 연회장에서 억만장자 맬컴이 살해당하는 장면입니다. 전형적인 영국식 본격물의 얼개를 잘 가져온 느낌이었어요.
두 번째는 그레이스가 맬컴의 사생아였지만 버림받았기 때문에, 유산과 복수를 목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그레이스의 동기입니다. 동기야 진부하고 전형적이지만, 이를 찰스, 세르게이, 대령 등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나름 미스터리의 원칙에 부합하거든요.

그러나 그 외 모든 부분은 빵점이에요. 맬컴 살인 사건부터 찬찬히 생각해 보면, 당연히 수지와 찰스 캐번디쉬는 범인이 아니에요. 둘이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는 증거가 뒤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수지가 전 재산을 상속 받게 되면, 언젠가는 둘의 재산이 될 테니까요. 구태여 범행을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과 재산을 나눌 까닭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토비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고 불이 꺼지게 만들 수 있는건 승무원들을 고용하지 않은 이상, 자리를 비웠던 그레이스밖에는 없으니 공범은 그녀입니다. 토비가 죽었다면 범인은 그레이스일테고요. 동기가 있는 대령과 카를로스가 복수를 위해 벌인 범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령의 수족인 세르게이는 살해당하고, 그레이스와 대령은 알리바이가 확실하니 실행범은 카를로스라는 결론입니다. 즉, 그레이스와 카를로스가 공범인거죠. 

이렇게 유산이 누구에게 상속되는지만 확인해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닉과 오드리를 범인 취급하는 무능한 프랑스 경찰의 행각도 짜증나고, 그레이스의 이마에 난 상처가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라는 클라이막스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증거가 된 단 말입니까? 무슨 특별한 흉기나 장치에 의해 난 상처도 아니니 그냥 걷다가, 운전하다가도 다쳤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말이죠.

또 애덤 샌들러가 연기한 닉 캐릭터도 무척이나 비호감이었습니다. 능력도 없는데다가 색드립이나 일삼는 한없이 가볍고 경박한 캐릭터거든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애덤 샌들러 캐릭터인데, 이런 류의 캐릭터가 먹힌 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도 아내인 오드리가 추리 소설 매니아라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던 만큼, 아내의 도움으로 무능한 경찰 남편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식으로 흘러갔더라면 봐 줄만 했겠지만 작품에서는 그런 설정도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둘 다 실수만 연발하고 좌충우돌의 연속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촬영 등 기술적인 완성도는 높지만 단점이 너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헐리우드 코미디 팬이라면 모를까, 추리 애호가 분들이라면 쳐다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