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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6

작가 형사 부스지마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점

작가 형사 부스지마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제목처럼 전직 형사이지만 은퇴 후 작가로 데뷰해 인기를 얻으면서, 형사 지도원으로 복귀한 부스지마가 신참 형사 아스카와 함께 작가들이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런 저런 작품들로 많이 접해 보았었던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이지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극히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작가로 문학계에 정통하며 온갖 냉소와 비난을 사정없이 날리는 작가 형사 부스지마의 설정부터가 만화적이니까요. "부호 형사"와 별다를게 없는 과장된 설정입니다. 등장하는 편집자와 작가들에 대한 설정들도 억지가 느껴질만큼 과장되어 있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사회파에 가까운, 묵직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답게 마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출판계, 특히 작가들에 대해서 부스지마의 입을 빌어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건 나름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좀 부족했고, 이야기 구성이 대체로 한가지 패턴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간당간당한)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진상, 범인을 모두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워너비의 심리 테스트" 소설 스메라기 신인상 1차 심사위원이었던 도메키가 자루없는 날카로운 알루미늄 송곳에 꿰뚫려 살해당했다. 용의자는 도메키가 심사평을 험하게 썼던 신인상 출품 작가들 3명 - 다다노 구스오, 오우미 히데오, 아이카와 시오리 - 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심문에 넌더리가 났던 아소 반장과 이누카이 형사는 신참 아스카에게 형사 지도원 부스지마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설명을 들은 부스지마는 3명을 각각 만나, 그들 면전에서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

주요 설정과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 시리즈 제 1작. 이 시리즈가 어떤 작품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스지마가 얼척도 없이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감만 가득차 있는 신인 작가들을 통렬하게 깨부시는 장면이 가장 핵심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추리적으로 빈약하다는 특징도 두드러집니다. "자루가 없는 알루미늄 송곳"이 화살인건 너무 명백하니까요. 이를 초반에 알아채서 이야기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습니다. 부스지마가 용의자들을 도발해서 재차 범행을 시도하도록 만드는데, 범인이 이에 넘어가 부스지마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도 다소 유치했고요. 오우미 히데오가 기계 공작 회사를 다니다가 정년 퇴직했다는 정보를 이용하여 흉기를 추리해 낸 뒤, 가택 수사로 증거를 잡는게 더 추리물다왔을겁니다. 부스지마가 직접 표적이 되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과장된 추리쇼는 불필요했을 뿐더러, 억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방탄복을 입었다고 한 들, 화살을 머리에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신인 작가들에 대한 비난도 나름 새겨들을 부분은 있지만, 대상자인 3인이 안 좋은 신인 작가의 단점만 극대화하여 합쳐놓은 인물들이라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 만화적인 느낌을 부각시킬 뿐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편집자(編集者)는 편집자(偏執者)" 

편집자 마다라메 아키라에게 신인 작가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하고로모 사야는 데뷰 전 동인 작품의 출간을 막고자, 그리고 그녀 원고 속 트릭 아이디어를 반강제로 중견 작가에게 넘긴걸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덴도 구이치로 역시 항의가 목적이었다. 데뷰작에서 사용하라고 마다라메가 전해 준 트릭과 반전이 인기작가 아야메 작품을 베낀 것이어서, 덴도는 표절 작가로 낙인찍혀 작가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었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출판, 문학계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신인 작가들 약점을 쥐고,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폭언을 내뱉는 악덕 편집자 마다라메, 그리고 제대로 된 작가도 아니면서 자기 작품과 소설가라는 직업에 헛된 신념을 품은 신인 작가를 통해서요. 문단에서 라이트노벨 작가는 일회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등의 업계인스러운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 시선을 보자면, 편집자보다는 작가 문제가 훨씬 큰 것으로 그려져 이채롭더군요. 편집자가 작가와 이인삼각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 좋지만, 수익을 중시하는 편집자도 당연히 필요하다는게 나카야마 시치리의 논리거든요. 출판도 시장이니까요. 마다라메도 문제는 있지만,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는 측면으로는 우수한 직원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작가들은 일반인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의식에만 쩌든 괴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덴도 구이치로는 아예 동정도 가지 않을 정도에요. 소설가라는 놈이 편집자가 제공한 트릭과 반전으로 글을 썼다면, 이건 작가가 아니라 그냥 대필 기계일 뿐이니까요. 이런 주제에 자기가 창작자다 뭐다 운운하며 뭔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욕을 먹어도 쌉니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하고로모 사야도 마찬가지에요. 또 이런 작가들이 단순한 비지니스 파트너에 불과한 편집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도 통렬하게 꼬집습니다.

다행히 이 작품은 비판 외에도 추리물로도 볼 만했습니다. 사용된 알리바이 트릭이 꽤 괜찮았거든요. 우선 하고로모가 흉기를 준비하고, 범행 현장인 호텔 지하 주차장까지 마다라메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범행 시각에는 너무나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던 덴도가 화장실을 가는 척 잠깐 자리를 비운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트렁크 안에 가두었던 마다라메를 찔러 죽이고 바로 돌아온 겁니다. 나중에 하고로모가 차를 회수하면서, 시체도 유기했고요. 꽤 그럴듯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호텔은 CCTV가 완벽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거지요. 지하로 향하는 모든 입구, 엘리베이터와 주차장 CCTV만 조사해도 트릭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겁니다. 덴도가 호텔 바에 있었다는걸 검증하기 위해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했을테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테고요. 그런 점에서 정교한 계획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는 수사의 문제일 뿐, 트릭을 폄하하기는 힘들고 독자가 추리하기 위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는 만큼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상 수상작가들에게 쓴 소리를 하던 노 작가가 살해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쓴 소리를 들은 작가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식 과잉으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애송이들에 불과하고요. 부스지마가 풋내기들 정신 교육을 시킨다는 전개도 앞서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으로 일관하는 자기 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최악이에요. 트릭이나 단서, 증거같은건 등장하지도 않거든요. 부스지마의 정신 공격(?)에 무너진 범인이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는게 전부니까요. 작가들을 쓴 소리로 비판하면서, 본인은 이런 작품을 버젓이 발표하는건 무슨 정신머리인지 모르겠네요. 최악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애독자" 

작가 다카모리 교헤이 토크쇼 간담회에 3명의 독자가 참석했다. 한 명은 인터넷에 혹독한 비판만 올리며 즐거워하는 일종의 악플러인 구와에 도모미.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강하게 연심을 품은 정신병자 스토커 마키시마 히나코. 마지막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어떻게든 자기 작품을 보여주려고 발악하는 작가 지망생 가노 이쿠였다. 그리고 간담회 직후 다카모리 교헤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여러모로 앞서의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에게 비틀린 애정을 품은 독자들이 주요 용의자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부스지마가 이 독자들에게는 독설을 날리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마지막 세 번째는, 범인이 따로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카모리 교헤이는 여자 관계가 복잡해서, 아내가 그를 살해했던게 진상이었습니다. 최신간 속지 부분을 뜯어내어 현장에 두었던건, 사인을 받았을 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것이고요. 이 페이지만 뜯어진 채 시체 밑에 책이 놓여져 있던 것, 사인이 번지는걸 막기 위함인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 것, 그리고 현장에 있던 책은 2쇄본이었는데, 2쇄본이 작가 서재에 없었던 걸로 보아 서재에서 꺼내온 책이라는 결정적 증거 등으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이 중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게 증거가 되기는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 내용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원 패턴이었던 전개를 탈피했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스포일러 가득한 악담을 리뷰랍시고 올리는 구와에 도모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하는데, 살짝 찔리더군요. 저도 거의 모든 리뷰에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리뷰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다는걸 더 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부스지마의 트리콜로 시리즈의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듀서 소네는 원작의 인지도만 원했기에, 주인공도 여자로 바꾸고 없던 러브라인, 해피엔딩을 추가했으며 핵심인 보험금 살인도 스폰서 눈치를 보느라 치정 살인으로 바꾸고 말았다. 결국 부스지마와 편집자 신보는 방송사 관계자와 담판을 짓는 자리를 갖고, 부스지마는 언제나의 말투로 이 모든걸 소설이나 기사 형태로 폭로하겠다며 관계자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소네는 살해당했고 부스지마도 용의자로 떠올랐다.

작가 지망생들보다는 TV 드라마 관계자들을 비웃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판할 악당의 악행을 먼저 묘사해서 독자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킨 뒤, 부스지마가 면전에서 한 방 먹이는 방식은 전작들과 거의 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이라 식상했어요. 

추리적으로도 건질게 별로 없습니다. 부스지마가 시나리오 작가 후세가 소네를 공격한 방법을 과거 드라마에서 찾아내는 등의 활약은 하지만, 후세와 신보의 발자욱을 현장에서 입수했기 때문에 추리로 범인을 밝혀낼 여지는 전무하니까요. 후세는 단순 폭행이었고, 실제로 질식사하게 만든건 편집자 신보였다는 추리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보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범행을 증명하기 쉽지 않았을겁니다. 기절한 사람을 돌려 놓으면 질식사 할 수 있다는 책을 함께 작업했다는 것 정도가 증거가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2인 3각으로 작품을 만든 신보를 직접 고발하는 부스지마가 자기는 작가 이전에 형사였다는 멋진 말을 한 직후, 이를 소재로 작품 하나를 쓸 수 있겠다고 하는 장면은 부스지마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드러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별로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3/07/25

'젊은 모색 2023' 관람

지난 달의 '게임사회' 전시에 이어, 이번달에 관람한 전시입니다. 회사에서 매달 실시하는 문화 행사를 이용하였습니다.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집에서 가까워서 딸 아이가 어릴 때 자주 데리고 갔었던, 여러가지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평일에 혼자서 방문한건 처음이네요. 이렇게 또 추억이 하나 쌓여 갑니다.

언제나 방문하면 찾아보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과 큰 화분을 둘러보고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저 큰 화분 위에 뭐가 있나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살짝 봤더니, 평면에 올록볼록하게 뭔가 나와 있는 형태더군요. 싹이 나기 직전의 무언가를 입체화한 것일까요? 살짝 궁금해집니다.
이번에 찾은 전시는 '젊은 모색 2023' 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정례전이라고 하네요.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전시는 주제가 전시의 무대가 되는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으로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순수 미술 뿐 아니라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다양한 직군의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고요. 같은 이유로 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도 굉장히 직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었고, 제 이해 수용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작품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작품들에 더 눈길이 많이 갔는데요, 대표적인건 과천 현대 미술관이 주제라면 누구나 생각해봄직한, 미술관 자체를 미니어쳐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공간 및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인 씨오엠 COM의 작품입니다. 누가 보아도 미술관임을 알 수 있는, 원뿔모양의 형태가 돋보이는 미니어쳐가 특히 귀여웠는데, 더 작게 만들어서 뮤지엄 샵에서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미술관이라는 공간 내에서 가장 존재감이 있는 사물인 기둥에 초점을 맞춘 작가가 여러명 있는건 신기했습니다. 작가들도 깊은 연구와 고민보다는,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사물에서부터 아이디어를 발산하는게 더 용이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오브젝트 자체로도 괜찮았으니 선택했겠지만요. 당연히 작품들 수준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시에서 시작하여 사진, 조각, 설치 미술 등 작품들이 보여주는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도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고요. 이 중에서는 개인적으로는 건축가인 김현종 작가의 <<범위의 확장>>이 가장 좋았습니다. 기둥을 손대지 않고 감싸서 새로운 무언가로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는게 좋았어요. 건축가답게 건축의 핵심 구조이지만, 전시장에서는 애물단지인 기둥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졌습니다.
미술관의 공간과 환경에 집중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래 황동욱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빛과 바람의 흐름, 움직임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키네틱 아트인데, 정말로 자연이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과 효과가 좋았어요.
 

그런데 이런 결과물이라면, 구조물 없이 원통 공간 안 360도를 커버할 수 있도록 빔 프로젝터 여러대를 설치하여 보여줄 수도 있어 보였어요. 원통형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제품이 나와도 괜찮겠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제 베스트는 추미림 작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평면 작업이지만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여 시간의 이미지를 씌운 <<횃불과 경사로>>도 인상적이었고, 과천 미술관을 단순하게 시각화한 평면 작업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려한 그래픽으로 과전 현대 미술관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점 정도 집에 걸어두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래와 같이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며 오랫만에 여유를 즐기며, 힐링하고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관람을 마치며 제가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라면 뭘 만들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라면 과천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가지고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만드는 시도를 해 보았을 것 같아요. VR로 다다익선을 뒤집어서, 감상하는 사람이 TV가 안쪽으로 쌓여진 탑 안에 들어가 있는 형태로 감상할 수 있도록요. 과연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요? 거울로 된 구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발광한다는 에도가와 란포 작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2014/11/14

데드맨 - 가와이 간지 / 권일영 : 별점 2점

데드맨 - 4점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머리, 몸통, 팔, 다리가 사라진 시체 여섯 구가 차례로 발견되었다. 수사본부장을 맡은 가부라기는 동료들과 함께 수사에 주력했지만, 마지막 범행 후 4개월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수사본부로 자칭 “데드맨”이 보낸 이메일이 도착하는데…

작가의 데뷔작이며, 신인작가 발굴을 위한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2012년에 수상했던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올드 타입 형사인 가부라기가 자신과 같은 타입인 마사키, 부호 형사 스타일의 뉴타입 히메노, 그리고 과학수사연구소의 프로파일러 사와다와 한 팀을 이루어 연쇄살인극을 수사해 나가는 수사물이지요. 

젊은 작가의 데뷔작답게 빨리빨리 속도감 있게 읽히는 맛은 있고, 선배 작가인 시마다 소지의 걸작을 인용하는 대담함도 눈에 띄는 점입니다. 여섯 구의 시체를 가지고 하나의 완성된 인간을 만든다는건, 작중에도 등장하지만 "점성술 살인사건"을 연상케 하거든요. 이러한 고전 걸작을 대놓고 인용하는 걸 보면 작가가 상당한 강심장이라 생각됩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나름 기대에 부응하기도 하고요.

아울러 추리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많지는 않으나 “데드맨”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만큼은 괜찮습니다. 앞부분에서 제법 공을 들여 “아조트” 어쩌구 하며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설정이니만큼 결국 누군가가 그 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적당한 수준으로 풀어내는 덕분입니다. “다니무라 시즈”의 정체 역시 나쁘지 않았으며, "데드맨"의 시력과 로보토미 시술을 엮은 설정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 외에 프로파일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부분도 흥미로웠고요.

그러나 데드맨의 정체가 너무 뜬금없고, 시온이 여섯 명을 살해한 동기도 여러모로 무리가 따릅니다. 연쇄살인의 목적이 “데드맨”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함이라는 해석부터가 문제인데요. 어차피 요양원에 갇혀 있는 신세라면 신문기사를 위조해서 보여주면 될 일 입니다. 여섯 건이나 범행을 저지르는데 들키지 않았다는 것도 순전히 우연에 가까운 만큼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물론 "복수"의 일환이기는 합니다만, 정작 복수의 주적은 따로 있고, 그를 죽일 수 있는 날짜까지(요양원 방문)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이러한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습니다.

또 “데드맨”의 정체 역시 급조하여 끼워 넣은 느낌입니다. 실종되어 기억이 엉망진창이 된 정의로운 형사가 갑자기 등장하는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시온이 어떻게 그 형사를 넘겨받아 재활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저라면 이렇게 가둬두고 괴롭히느니, 차라리 중간에 죽였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후반부는 그야말로 최악입니다. 시온이 겐다에게 살인을 지시할 이유도 없고, 본인이 슌이라고 믿고 있는 겐다가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불명확합니다(본인이 시체를 조합한 인간이라 믿고 있다면 복수의 대상은 시온이었어야 하죠). 결국 겐다는 실패하고 시온이 직접 나선다는 결말은 어처구니를 잃게 만들고, 거기에 폭탄까지 등장하는 전개는 극적 긴장감을 높이려는 시도는 알겠으나,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 계속되어 몰입감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동기에 대한 상세한 독백 역시 현실성은 떨어졌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단점이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동일한 캐릭터로 시리즈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던 만큼 후속작을 기대해보겠습니다. 후속작에서는 작가도 실력이 늘면 좋겠네요.

2025/06/29

복면 작가는 두 사람 있다 (覆面作家は二人いる) - 기타무라 카오루 : 별점 2점

"하늘을 나는 말" 등 만담가 '엔시 씨와 나'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일상계 추리물의 창시자 기타무라 가오루(카오루)의 또다른 시리즈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필명이 복면 작가인 이중인격 아가씨 니이즈마 치아키와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 컴비가 여러가지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지요. 국내에는 아직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았는데, 작가의 팬인 탓에 원서를 번역해서 읽어보았습니다.

특징이라면 기타무라 카오루 작품답지 않은 가볍고 만화적인 설정입니다. 엄청난 가문의 영애로 미모와 추리력, 거기에 집 밖을 나서면 성격이 야성적으로 변하는 이중 인격 탐정 니이즈마 치아키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설정은 아주 많이 별로였습니다. 다른건 다 그렇다쳐도,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성격이 변한다는건 납득하기 힘드네요. 설득력도 없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며, 작품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니까요. 그냥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귀한 집 아가씨라는 설정의 안락의자 탐정물로 만드는게 훨씬 더 나았을 겁니다.
추리적으로도 평범합니다. 사소한 정보와 단서에서 진상을 끌어내는 전개 솜씨는 여전하나, 동기면에서 설득력을 가져가고 있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국내에 정식 소개되더라도 시리즈를 더 찾아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미노 미즈호의 만화가 조금 유명한 듯 한데(제 기억에 해적판으로 오래전에 소개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만화로 소개되는게 더 나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트릭, 진상 및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면작가의 크리스마스

잡지 '추리세계'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는 신인 작가 ‘니이즈마 치아키’를 만나러 갔다. 치아키는 엄청난 집의 아가씨로 귀족적인 외모에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문을 나서는 순간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해버리는 특징이 있었다.
그 무렵, 근처 여고 기숙사에서 한 여학생이 살해당한다. 단서는 딱 하나, 피해자가 선물받았지만 사라져버린 ‘토끼 오르골’이었다. 치아키는 오르골 포장이 뜯어져 있었는지에 주목한 뒤, 범인을 밝혀낸다.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 쌍둥이 형이자 경찰인 오카베 유스케, 그리고 복면작가 치아키 등 주요 등장인물과 치아키의 기묘한 특징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어요. 료스케와 치아키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어떤 여성이 가지고 있던 검은 트렁크 안에서 채찍이 나온 이유에 대한 추리는 좋은 일상계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기숙사 살인 사건에서는 핵심 단서인 '오르골의 포장이 뜯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자 째 사라진 이유는?'를 통한 치아키의 추리 결과 - '포장된 선물이 방 안에 흩어져 있었다면, 산타클로스가 범인이라는걸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 -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이 여고 기숙사는 산타가 돌아다니며 선물을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고, 산타가 범행을 저지를 때 선물이 흩어져 그걸 주워 담다가 피해자의 개인적인 선물까지 가져갔다는 것이지요. 사소한 단서에서 진상을 끌어내는 과정은 설득력 높고, 모든 정보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소개되어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범행 동기가 너무 사소했다는 문제는 있지만 일종의 사고같은 밤행이기도 하니, 이 정도면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잠자는 복면작가

오카베 료스케는 치아키에게 원고료를 주기 위해 수족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고 말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인근에서 유괴당한 아이 수사를 하고 있던 오카베의 쌍동이 형 유스케가 있었고, 서로의 오해가 겹쳐 치아키가 범인으로 의심받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이후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치아키는 유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낸다.

초반, 치아키가 잠복 중이던 유스케를 료스케로 착각하고 '돈 내놔'라고 이야기해서 유괴범으로 오인된다는 전개는 제법 웃겼습니다. 치아키는 원고료를 달라는 말이었는데, 유스케는 몸값으로 오해했던 거지요.
유괴범이 유괴당한 유우코의 언니였다는 진상, 그리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로 생긴 의붓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는 동기도 괜찮았어요. 이에 대한 정보 제공도 충실하고요. 

하지만 유괴 당일 언니가 쿠키를 따로 가져갔다는 등의 정보는 너무 과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쉽게 드러나 버렸어요. '불에 태워버린다' 등의 이상한 협박과 특수 효과(?)를 이용한 불타는 소리같은 정보는 아예 쓸데가 없었고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장난이라지만, 유괴라는 중대한 범죄를 가볍게 마무리하는 결말은 영 별로였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면 작가는 두 명 있다

료스케의 선배 사콘의 언니가 일하는 가게에서 연쇄 CD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유스케는 치아키가 집 밖에 나오면 성격이 변하는게 아니라, 자기들처럼 쌍둥이 두 명일 거라고 추리했다. CD 도난 사건과 치아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료스케는 치아키를 데리고 사콘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치아키가 사실은 두 명이 아닐까?'라는 추리는 료스케가 치아키와 함께 집 밖으로 나오면서 손쉽게 드러납니다. 수수께끼라고 할 수도 없어요. CD를 훔친 방법은 범인들이 사전에 걸리지 않는 '동선 확인'을 했다는게 진상이라서 영 실망스러웠고요. 이를 위해 스티커만 몰래 빼돌렸다는 등의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딱히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11/17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한도전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한도전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히가시노 게이고에세이집입니다. 미공개 단편 소설 3편이 수록되어 있다는 말에 낚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에세이 모음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노보드에 빠져 열중한 2002~2003년의 2년여 동안 연재된 에세이와 그 외 - 해당 시기에 벌어졌던 한일 월드컵 준결승, 결승전 관전 에세이 등 - 의 에세이 몇 편이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미공개 단편은 에세이를 가장한 단편,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를 비롯한 에세이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짤막한 꽁트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뭘 이런 책까지 번역해서 출간했나 싶을 정도에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열정과 노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겠더군요. 데뷰 이후 매년 2~3권 가량의 책을 수십년간 꾸준히 발표할 정도로 작업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짬을 내어 스노보드에 대한 열정을 붙태우며 스키장을 다니고 연습하는 과정이 정말 대단하니까요. 여기서 눈여겨 볼 건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노보드에 빠져든 이유입니다.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라 '향상'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면 탈 수록 어쨌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그런 성취감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이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어제는 못한 것을 오늘은 해냈다는 성취감, 이런 사소한 성취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성실한 노력가라는건 당연한 일일겁니다. 그러니 매일 몇 시간을 운전해서 스키장을 찾아가 십여회의 활강을 즐긴 뒤 다시 돌아가 작품을 쓸 수 있었을테고요. 아, 이런 노력과 꾸준함은 정말 부럽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겨울 스포츠를 싫어하는걸 넘어서 혐오하는 사람 -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의 안도의 말을 빌자면 "힘들여 이렇게 추운 곳까지 와서, 판대기를 밟고 눈 위를 미끄러지는게 뭐가 그리 신나는지" 모르겠다는... - 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진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글 자체를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 답게 별거 아닌 스노보드 당일치기 여행에도 어떻게든 이야기를 집어넣으려는 노력이 특히 눈에 뜨입니다. 실존인물이라도 등장 인물들에게 명확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캐릭터에 맞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과정이 잘 그려지고 있거든요. 어떤 이야기는 그 도가 지나쳐서 에세이가 아니라 아예 소설이 되어버린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요.

대부분의 에세이들 모두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추리 소설가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니카이도 레이토, 누쿠이 도쿠로, 신인작가 구로다 겐지 등과 스키 투어를 간 이야기로 여기서 구로다 겐지가 상당한 변태라는게 드러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 인기가 없는 작가라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팬이 읽었더라면 치를 떨 만한 그런 내용이거든요. 그 외에도 아비코 다케마루, 가사이 기요시라던가, 교코쿠 나쓰히코 등이 언급되는 등 이런저런 작가들이 자주 등장해서 깨알같은 재미를 안겨줍니다.
아울러 골프에 대한 독특한 시각도 기억에 남네요. 골프를 칠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가 이상한 옷 때문이라는 내용인데 꽤 그럴싸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 친구에도 보여줄 수 없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어야 하는 스포츠는 해 봤자 재미있을리가 없다는 논리지요. 요새는 골프 웨어도 상당히 괜찮은게 많고, 지극히 편협한 시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본인의 취향이나 철학은 확실히 확고하구나 싶더라고요.
한신 타이거즈의 팬으로 느낀 2003년 호시노 센이치의 기적과 같은 리그 우승에 대한 이야기도 야구 팬으로서 와 닿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우승 따위는 기대도 안하는, 눈 앞에서 열심히 뛰고 특히 자이언츠나 이겨주면 좋다는 마인드는 우리나라의 모 팀 팬을 연상케 했어요. 야구 팬은 어느 나라에 가도 똑같은가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지막에 수록된 스노보드 관련 꽁트는 솔직히 완전히 수준 이하였습니다. 그냥 팬 서비스에 불과해요. 스키장 상급자 코스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유력한 용의자는 스노보드 초보자라서 아래까지 내려오는데 오래 걸려서 알리바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용의자는 초보자로 가장한 실력자였지요. 스노보드 타는 방법 - 구피 스탠스와 레귤러 스탠스 - 을 이용한 간단한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정도로 범인이 빠져나가길 바라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라 생각됩니다. 피해자 주변만 조사해도 동기는 쉽게 드러날 테고, 그렇다면 트릭이야 어찌 되었건 범인 체포는 문제가 없었을테니까요. 흉기로 소음총을 썼다는 등의 무리수는 단점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이 많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에세이는 쉽게 읽을 수 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정과 노력도 잘 느껴졌고요. 우리나라에서 스노보드가 유행한지도 10년은 더 지난 듯 한데, 스노보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8/04/06

네 탓이야 - 와카타케 나나미 / 권영주 : 별점 3점

 

네 탓이야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캬캬. 결혼하고 간만에 몇만원 이상되는 추리소설을 질렀습니다. 첫번째로 읽은 것은 바로 이 책 "네 탓이야" 입니다. 이전에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을 재미있게 읽었었고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이기도 하니 안 살 이유가 없었죠. 책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읽어 보았습니다.

일상계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작풍과는 다르게 정통 추리 단편의 모양새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탐정역으로 두명의 인물, 프리터인 하무라 아키라와 시경 형사과 경위인 고바야시 순타로 2명이 번갈아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독특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하무라 편은 하무라 1인칭으로 사건 발생 후 단서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정통 트릭물, 고바야시 경위 편은 범인 1인칭으로 도서 추리물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또 작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인칭과 시점, 시공간의 변경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도 특징입니다. 물론 너무 남용되는 느낌이 있기에 좀 거슬리는 부분도 있고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에서도 어느정도 써먹은 것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물론 정통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들이 좀 약하긴 했습니다. 전개도 무척 쉬운 편이고요. 읽어나가면서 "범인이 누굴까" 라는 고민을 별로 하지 않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일상물과 정통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조금은 섬뜩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추리물로의 완성도는 약합니다. 
신경날카로운 노처녀와 약간 독특하고 순박해 보이는 형사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라서 징글징글한 묘사 외에 신선한 맛은 부족했고요.

그래도 대부분의 작품이 의표를 찌르는 맛과 약간의 섬뜩한 느낌, 그리고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작품마다 편차가 제법 있고 추리물로 보기에는 완전히 에러인 작품도 있기에 정통 추리 팬이라면 약간 애매한 작품이긴 할 것 같네요. 뭐 시대가 변한만큼 추리 단편의 속성도 변한 것이겠죠. 빠른 전개와 흡입력 있는 묘사는 추리팬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꽤 먹힐거 같기도 하고요. 단, 일반 독자에게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을 더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정통 추리적인 요소를 따진다면 "바다 속"과 "살인공작", 작가 특유의 시점과 공간의 변경을 느낄 수 있는 이색작으로는 "재생"을 추천합니다.

첫번째 이야기 "바다 속"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바다가 내다보이는 고급 호텔로 하무라 아키라는 대학 선배 엔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다. 불려간 이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인 작가 아카쓰키 부이치의 실종과 관련된 핏자국을 지우는 일. 다양한 프리타 생활로 청소쪽도 능통한 하무라는 불만을 가지면서도 핏자국을 지운 뒤,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작품집의 시작과 캐릭터의 소개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작품으로 무대공간의 독특함, 그리고 시작과 끝이 인상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안에 있다는, 어떻게 보면 좀 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설정과 설득력있는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가 충분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겨울 이야기"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나는 소꼽친구이지만 나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긴 요시모토를 살해하고 시체를 은닉한다. 며칠 뒤, 시경 형사과의 고바야시 경위가 찾아오는데...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로 겨울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입니다. 범인 시점의 전개와 디테일한 완전 범죄 시나리오의 구성은 미국 미스테리 단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전해 주더군요. 이 작품도 "소금"이라는 단서를 통한 결말부는 사실 예상 범위 안에 있긴 한데 고바야시 경위와 범인과의 문답을 통한 반전이 효과적이라 그러한 단점이 묻히면서 재미를 극대화 시켜 주는 점이 참 탁월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 "당나귀 구덩이"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화 고민 상담소에서 일을 시작한 하무라.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상담원 중 한명이 자살하고, 최근 그 회사 직원 중 여러명이 자살한 사건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이 작품은 "일상계"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작품입니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범행이 아닌 정신적 공격을 통한 범행이라는 것이 그러한데요.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전화라는게 어떤 것인지 영 감이 안와서 설득력이 좀 떨어지긴 했고 결말이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걍 그냥저냥한 수준이랄까요.

네번째 이야기 "살인공작"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하루미의 사체를 은인 가타쿠라 조교수의 사체와 같이 놓아 두어 동반 자살로 위장한다...
세번째 이야기와 같이 이 작품도 직접적 살인을 담고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일종의 누명 공작 이야기인데 작품 전체에서 보이는 공작이 너무 허술하고 단서가 굉장히 쉽게쉽게 드러나는 등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더군요. 약간의 반전이 있긴 하지만 작품 자체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이야기 "네 탓이야"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하무라는 대학 동창이긴 하지만 과거의 악연으로 얽힌 가요코의 일방적 약속 통보를 받은 뒤 약속을 어기고 술을 먹으러 나가지만 그 뒤 해당 시간에 있었던 가요코의 연적 피살 사건에 연루된다. 결국 가요코에게서 탐정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인연으로 사건을 반 강제로 의뢰받게 되는데...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단편으로 작품 자체의 완성도 보다는 사건이 일어나는 전반적인 동기, 즉 "네 탓이야" 마인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어떤 일도 자기 때문이 아닌 남 탓으로 여기는 이 마인드에서 벌어지는 범행이라는 것이 무척 독특했거든요. 추리적으로는 단 한번의 돌발 사건에 의해 범인이 밝혀지기에 썩 완성도 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동기와 심리묘사가 좋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섯번째 이야기 "프레젠트"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사에키 리리의 피살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날, 피살 사건 당일 그녀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었던 지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한 진실게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 중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전개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솔직히 증언들의 배후에 감추어진 진상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증언 자체들도 별로 꼬이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어서 추리적으로는 낙제점에 가깝더군요. 범인이 내뱉는 말들이 정말 뜬금없이 등장하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땅짚고 헤엄치기였으니까요. 이런류의 작품은 정교한 플롯이 제일 중요할텐데 시작부터 설득력이 없어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표제작이라 의외였습니다. 작품의 수준도 별로고 1인칭 주인공 하무라가 아닌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가 표제작이라니 좀 난데없었거든요. 저와는 달리 작가는 의외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군요.

일곱번째 이야기 "재생"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하무라가 일하는 탐정 사무소에 사무소장의 친구인 작가가 찾아와 사건을 의뢰한다. 사건은 자신이 작품때문에 방에 갖혀 있던 어느날, 알리바이를 위해 몰래 비디오 카메라를 셋팅하고 잠깐 방을 비운 뒤 카메라에 찍힌 영상 때문. 그날 벌어진 살인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증거인데...
첫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하무라의 선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인칭의 혼용을 통해 소설적 트릭을 구사하는 작품입니다. 단서가 명확하게 마지막에 등장하기에 그다지 놀라운 반전은 없지만 발상 하나만큼은 기발하네요. 추리적 요소보다는 심리묘사와 아이디어가 돋보인 작품이었습니다. 단, 이 작품처럼 두명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트릭을 동일한 장치로 구현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지는 의문입니다만....

여덟번째 이야기 "트러블메이커"
하무라 아키라와 고바야시 경위 만나다. 빈사상태의 여성이 발견되고 그 여성의 소지품을 통해 여성의 신원을 하무라 아키라로 파악한 고바야시 경위는 사건 조사를 위해 도쿄로 향한다.
이 단편집의 마무리 작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점에서 전개되는 사건과 고바야시 경위가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뒤쫓는 사건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특기이기도 한 시점과 시공간의 변경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단서가 애매하고 범인들의 조작이 좀 치졸해 보인다는 약점도 있지만 마지막 부분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도록 잘 짜여진 작품이었습니다. 한국 판형에서만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섬뜩한 마지막 대사 한줄이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있는 책의 구성도 인상적입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20/06/13

미스테리아 23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23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엘릭시르에서 출간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추리 전문 잡지로 2019년 3월 출간된 과월호입니다. 특집이 "명탐정 코난"이라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알라딘에서 중고를 발견해서 저렴하게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에 가깝습니다. 과월호로 산게 다행이다 싶더군요. 특집인 "명탐정 코난"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이 "소년탐정 김전일"의 대 히트로 기획되어, 당시 신인 만화가였던 아오야마 고쇼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첫 출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소개해주고 있는 구성은 나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나무위키 등 인터넷 상에 있는 각종 정보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코난" 속 주요 등장인물 이름과 지명의 유래에 대한 소개가 대표적입니다. 주요 등장인물마다 이 특집 전체 분량만큼을 할애하고 있는 나무위키에 비하면 턱도 없는, 그야말로 기본 정보만 알려줄 뿐이라 무척 실망스러웠어요.
만화 속 에피소드를 클로즈드 서클, 밀실, 암호, 다잉 메시지, 독살, 마술사, 알리바이, 미스터리 투어, 물리 트릭의 8종으로 분류하여 소개하는 내용은 더 별로에요. 일단 분류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클로즈드 서클과 미스터리 투어는 이야기의 '상황' 이고, 밀실, 암호, 다잉 메시지, 알리바이, 물리 트릭은 '트릭' 이며, 독살은 방법, 마술사는 직업이라 아무리 보아도 동일한 수준의 분류가 아닙니다. 주요 소재를 끄집어 내었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키워드를 도출한 뒤 관련된 추리 소설 등을 풀어놓는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요. '마술사'를 이야기하는데 마술사 탐정인 그레이트 멀리니 인용이 없는 등 내용도 부실합니다. 이런건 아무래도 저자 편의에 따른 특집 기사 페이지 보충용 글 뭉치가 아니었나 싶은 의심이 듭니다. 저만 해도 이런 키워드에 '변장'이나 '축구' 를 추가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건 금방 할 수 있거든요. 변장이 등장하는 범죄물은 수도 없고, 축구는 "파리의 밤은 깊어" 정도만 당장 떠오르지만, 다른 스포츠 물도 인용하면 충분히 한 꼭지 글은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정보, 무의미한 키워드 도출말고 코난에 대해 의미있는 컬럼이나 분석이 실리는게 더욱 좋았을겁니다. 추리 만화계 전반의 흐름과 함께 코난이라는 작품의 위치를 짚어주어도 좋았을테고요. 이 특집은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특집 기사 외에도 책 소개라던가, 드라마 작가인 도현정 작가 인터뷰도 이번 호는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도현정 작가 인터뷰는 두 번째 핵심 기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분량이기는 한데, 드라마들 전부를 보지 못했고 딱히 관심도 없어서, 드라마 중심으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내용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기사와 글이 없는건 아닙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속 음식들을 작품과 함께 재미나게 소개하는 정은지 작가의 컬럼은 언제나처럼 포만감을 주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법의학을 통해, 상세한 과학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 과거 사건을 소개해 준다던가, 옛 사건을 기록한 논픽션들도 마음에 드는데 이 중에서도 1950년대 말,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HLKZ의 화재 사건은 몰랐던 사건이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보험금을 노린 고의 방화인지, 정말 실수인지, 누군가의 음모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결말도 재미있었어요.
"겨울 여자"를 쓴 조해일의 범죄 소설 "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한 글도 인상적입니다. 대중 소설의 1인자가 추리, 범죄 소설의 수법을 차용하여 사회파스러운 작품을 일찌기 발표했었지만, 작가 스스로도 한계를 느낀 범작에 머무른 이유를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해방 후 20세기까지 한국 추리 소설의 한파가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소설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작가 송시우의 "누구의 편도 아닌 타미"는 엄지 척! 입니다. 작가의 단편집에 등장했던 서행물산 총무부 과장 임미숙이 등장하는 시리즈 단편인데 일상 속에서 벌어진 비일상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 빚어진 범죄를 일반인 임미숙이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행물산의 문제아 신입사원 추예나의 집을 찾아간 임미숙이, 그녀의 집에서 나타난 수상한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추예나의 건방진 전화를 받고 진상을 깨다는 부분이 백미에요. 간단한 암호 트릭인데, 그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설득력은 충분했습니다. 다른 시리즈 작품을 꼭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실리아 프렘린의 "정말 필요한 경우"는 오싹, 불쾌하면서도 서늘한 반전이 있는 일종의 '기묘한 맛' 류의 작품입니다. 80이 넘은 독신 노처녀가 공짜 전화를 놓는게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를 그리고 있는데, 앞 부분의 복선과 함께 하는 반전은 꽤 그럴싸 했습니다. 빼어나지는 않아도, 평균은 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마지막의 "가스등"은 히치콕 영화로 유명한 작품 시나리오를 3부작으로 나누어 1부를 싣고 있는데, 영화를 한 번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흥미진진하더군요. 굉장히 오래되었지만 서스펜스만큼은 명불허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다른 장점들이 없는건 아니지만 특집 때문에 구입했는데, 특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음에 들었던 논픽션들만 별도로 출간되기를 기다리는게 훨씬 낫아 보이네요.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010/04/27

만화제국의 몰락 - 니시무라 시게오 / 정재훈 : 별점 3점

만화 제국의 몰락 - 6점
니시무라 시게오 지음, 정재훈 옮김/스튜디오본프리

"안녕 내 청춘의 소년점프"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전(前) 소년점프의 편집장 (3대째)이었던 니시무라 시게오씨의 자서전입니다. 수년전 번역 출간되었는데 우연찮게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점프 초창기 연재작가였던 작가 우메모토 사치오 장례식 이후 자서전을 쓸 것을 결심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소년 점프의 창간부터 저자가 편집장을 역임했던 80년대까지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며 이후 600만부 시대를 지나 몰락까지의 간략한 후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소년 점프 편집부의 모토라던가 원가 등 잡지의 운영방식에서부터 편집부의 소수정예 체계라던가 "전속" 및 "인기투표"로 대표되는 가혹한 작가관리, 작가 발굴을 위한 신인들의 기용 방법 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여러 인간관계가 얽힌 편집부 분위기는 어땠는지를 그야말로 현장의 입장에서 상세하게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그 외로 모토미야 히로시라던가 나가이 고에서 시작해서 죠지 아키야마, 쿠루마다 마사미, 테라사와 부이치, 유데 다마고 등의 작가들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들과 "사나이 골목대장", "파렴치 학원", "서킷의 늑대", "닥터 슬럼프" 등 당대의 히트작에 대한 이야기도 확실히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저자가 모토미야 히로시를 데뷰시키고 첫 히트작 "사나이 골목대장"을 세상에 내 놓은 장본인이라 관련 이야기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고는 좀 다른게 제목의 "몰락"은 나오지 않고 사실 약간 언급되는 몰락의 과정 역시나 지금은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많이 접한 내용들이라 크게 새로운 것도 없었습니다.
덧붙여 저자의 비겁하고 자기방어적이며 권위주위적인 모습이 많이 비추어지는 것은 좀 불편했어요. 예컨데 전속제도와 같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전임 편집장에게 떠넘긴다던가, 막판에는 줄타기의 와중에 밀려난 듯한 모양새인데 그것을 자기가 더러워서 떠난 것 처럼 묘사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러했는데 역시 사람사는 곳은 그게 어디던 똑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만화 잡지를 만드는 현장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소개한다는 측면에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만화 "바쿠만"을 좋아한다면 편집자 Side와 작가 Side를 비교해가면서 읽어도 재미있겠더군요. 취향을 굉장히 탈 책이긴 하지만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9/16

[소설가 감수] 미스터리 소설 추천 인기 랭킹 33선 (2023년 최신판)

NTT에서 운영하는, 리서치 설문조사와 접속수를 바탕으로 모든 장르의 랭킹을 망라한 종합 랭킹 사이트인 goo 랭킹에서 선정했던 랭킹입니다.
전부 33편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랭킹을 감수했다는 소설가 OO씨가 선정한 작품 5개만 소개해드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스릴은 미스터리의 묘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세계에서도 미스터리는 인기 있는 장르이지요.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번에는 소설가 OO 씨의 감수를 받아 '읽고 싶다! '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해 드립니다. 수상작과 영상화된 작품, 그리고 선택 방법도 함께 소개하니 꼭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설가가 알려드립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고르는 방법
취재 협조 소설가 OO :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작품을 출간하고 있는 소설가. 일반 소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을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작품도 창작에 활용하기 위해 열심히 보고 읽는다.
OO 씨에게 미스터리 소설을 고를 때 중요한 포인트를 물어보았다.

POINT① :
각종 랭킹 상위권이나 문학상 수상작은 수준이 높다! 그런 작품인지 체크!
화제작이나 실력파 작가의 작품을 우선적으로 읽고 싶은 분들에게는 '고노미스', '서점대상', '나오키상' 등 각종 미스터리 랭킹 상위권 작품이나 문학상 수상작을 추천합니다. 매년 진행되는 랭킹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이 높고 읽기 쉬운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발표될 때마다 체크해서 소설을 쓸 때 참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골라 읽다 보면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작품들의 줄거리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골라보세요.

POINT②
깜짝 놀랄 만한 트릭과 논리가 충분히 전개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인지 확인하자.
미스터리라고 하면 예상치 못한 트릭이나 논리적인 구조가 재미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은 본격만을 다루는 상이므로 트릭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POINT③
숨 막히는 전개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 작품인지 확인하자
서스펜스 요소가 있는 작품은 독자로서 비일상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경찰 소설이나 모험 소설, 하드보일드 소설 중에서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작품이 많으니 그 중에서 고르는 것도 추천합니다.

POINT④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싫다면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작품인지 확인하자.
'사람이 죽거나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는 이야기는 싫다'는 분들에게는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을 추천합니다. 가게나 학교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수수께끼와 궁금증을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여운이 남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편집부
미스터리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피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나 선택 포인트가 있을까요?

OO 씨
사회파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는 트릭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읽을 수 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등은 좋은 작품입니다.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와 같은 가벼운 미스터리도 쉽게 다가갈 수 있고요.
그중에서도 첫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붐의 시발점이 된 작품으로, 다양한 정수가 응축된 작품이거든요. 이 작품을 발판 삼아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면 좋겠습니다.

편집부
반대로 '대부분의 작품은 다 읽었다'는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의 종류와 선택 방법이 있나요?

OO 씨
미스터리 계열의 신인상은 많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스타일이나 설정 등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고, 보다 폭넓게 미스터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 트렌드 장르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입니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그 안에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으로, '시인장의 살인', '젤리피쉬는 얼어붙지 않는다' 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소설가 OO 씨 추천! 미스터리 소설 5선
<<까마귀의 엄지>>
사기가 생업인 중년의 두 남자의 이야기. 점차 동거인이 늘어나면서 인생을 건 거대한 계획이 시작된다. 충격적인 전개와 감동적인 결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걸작.
'고노미스'의 단골손님인 미치오 슈스케의 첫 나오키상 후보작으로, 제6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상쾌한 느낌의 초인기 작품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사기꾼인 중년 2인조가 동거인들과 함께 사기 계획을 세웁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에 '당했다!'는 놀라움과 함께 짜릿한 쾌감도 느낄 수 있는 명작입니다.

<<13계단>>
가석방 중인 청년과 정년을 앞둔 교도관 두 사람은 10년 전 살인사건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조사를 하게 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범행 당시의 기억이 없고, '계단을 올라갔다'는 단서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무고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뷰작이자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 2003년에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서스펜스를 충분히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사형수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 주인공 교도관. 단서 몇 개와 사형 집행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과연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숨 막히는 서스펜스와 함께 독서 후의 만족감도 큰 작품입니다.

<<제 3의 시효>>
F현 경찰 수사 제1과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으로, 등장하는 형사들의 개성이 강하고 경찰 내부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장감 넘치는 걸작. 제16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작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독서 후의 충격과 고양감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형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살인사건의 공소시효에 얽힌 '제3의 공소시효'를 파헤쳐 나가는 형사들. 시효 성립 직전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경찰소설이자 단편소설의 대가인 저자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소설집입니다.

<<최후의 증인>>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인 주인공이 불리한 상황에 도전하는 법정 미스터리 작품. 점차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과 충격적인 전개에 빠져들게 된다. 2015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시리즈도 방영되었으니, 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겼다면 확인해 볼 것.
OO 씨 comment :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가 활약하는 법정 미스터리. 반전이 있는 법정 장면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데, 꼭 시리즈 전부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말>>
사람이 죽지 않는 '일상계 수수께끼'의 명작으로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 수수께끼'를 추리해 나가는 연작 단편집. 살인 사건이나 흉악 범죄와 같은 무서운 소재가 아닌, 일상에 숨어 있는 위화감을 풀어간다. 미스터리 추리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따뜻한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두 사람의 여유롭고 차분한 분위기와 곳곳에 등장하는 라쿠고(만담) 이야기 등 전체적으로 느긋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내용의 이야기나 인간의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묘사도 존재.
OO 씨 comment :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본격 미스터리로, '일상계 수수께끼' 장르의 선구자격 작품입니다. 살인 사건 등 흉악 범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이면서도 안심하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2022/06/24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잇폰기 도루 / 김은모 : 별점 2점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4점
잇폰기 도루 지음, 김은모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도권에서 세 건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단서가 없어서 수사가 난항을 겪던 와중에 진범 '백신'이 다이요 신문의 기자 잇폰기 도루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인간은 바이러스이며 자신은 백신이라며 잇폰기 도루와 다이요 신문 지면을 빌린 토론을 제안했다. 잇폰기 도루는 범인의 체포와 추가 범행을 막기 위해 토론에 응했고, 적자로 치닫던 다이요 신문의 경영도 급속도로 회복했다. 그리고 백신이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발표된 뒤, 잇폰기에게 에바라 요이치로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자신의 집에 배달되었던 예고장을 들고....

신인작가 잇폰기 도루의 작품입니다. 제 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에서 "시인장의 살인"에 뒤이은 우수상 수상작이었다고 하네요. 드라마로까지 제작될 정도니 꽤 인기를 끈 듯 합니다. 정통 본격물 애호가로서 '아유카와 데쓰야 상'의 권위를 잘 알고 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신문사 내의 조직 체계와 구성, 신문이 제작되는 과정, 신문사의 경영 상황 등 신문에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작가가 61년 생으로 오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데뷰했다는데, 분명 신문사에서 일했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전성기 정통 사회파 추리물이 연상될 정도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며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대조'를 통해 양 쪽 모두를 극대화시키는 수법을 사용한게 독특했어요. 신문이 수행해야만 하는 사회적인 역할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과의 대조, 백신의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주장과 그걸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광기와 추악함 설명과 함께 에바라 요이치로 시점에서 에바라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대조시키는 식입니다. 아울러 연쇄살인범이 신문 기자와 신문 지면을 통해 토론을 벌인다는 아이디어도 흥미로왔으며, 살인범 에바라가 잇폰기 도루에게 집착한 이유가 아들 요이치로의 친부였기 때문이었다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요소를 잘 살렸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개의 핵심인 '토론' 부터가 문제니까요. 비슷한 주장이 반복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내용까지 인용해가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척은 하지만, 길게 묘사될 내용은 아니었어요. 신문에 실렸을거라 생각되는 글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보다는 백신의 성명을 기자와 각계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식의 기사 형태가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것 같습니다. 

전개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왜 토론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부터 부족합니다. 에바라가 잇폰기에게 구태여 연락을 해서 요이치로의 친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이 부분을 뺀다 하더라도 전개에 별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바라가 과거 아동 학대의 피해자로 잘 성장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암에 걸린 아내의 사망으로 갑자기 분노가 폭발했다는 동기도 별로 와 닿지 않네요. 여러 등장 인물들이 모두 가정 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불필요한 일종의 맥거핀일 뿐입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이라는 이름에 기대해 볼 만한 정통 본격물적인 요소도 기대 이하입니다. 진범이 에바라였다는 반전 자체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잇폰기에게 보낼 편지를 아들 요이치로가 봤다고 착각한 나머지,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는 식으로 둘러댔지만 자기가 받은 예고장과 실제 보낸 예고장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은게 발목을 잡는다는 상황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예고장을 언제 받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는게 문제에요. 이 탓에 독자들은 공정하게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이래서야 정통 본격물로 보기는 힘들지요. 

불특정 다수라 생각했던 피해자들의 연결고리가 '상수리 나무집'이라는 아동 보호 센터에 맡겨진 아이가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를 경찰과 취재한 기자들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족들 신상부터 파악하는게 수사와 취재의 기본이 아닐까요? 물론 저 단서만 가지고 진범 에바라를 찾아내는건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동기만큼은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에바라가 게가사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행했던 여러가지 공작은 눈여겨볼만 했지만, 교수의 알리바이가 없었던건 어떻게보면 '운'의 영역이고, 신문사에서 협박 전화를 걸었던게 발각되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벽하게 누명을 씌웠는데, 잇폰기 도루의 추리만 듣고 경찰도 에바라가 범인이라고 여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범행 현장에 남겨졌던 담배 꽁초의 DNA는 게가사와 교수의 것이었고, 게가사와 교수 연구실에서 백신이 편지를 보낼 때 썼던 봉랍과 스탬프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 여러가지 증거들 모두가 게가사와 교수가 범인임을 가리키니까요. 백신의 편지보다 훨씬 명확한 증거잖아요?

또 사회파 추리물같았던 부분도 변죽만 올리고 끝나서 아쉽습니다. 특히 적자를 보던 다이요 신문이 살인범과의 토론으로 돈을 벌어서 기사회생한다는 딜레마를 잘 끝맺지 못한 탓이 커요. 괜히 다이요 신문 관계자가 범인이 아닐까하는 분위기만 살짝 풍기는게 전부거든요. 이런 사회파스러운 내용과 정통 본격물스러운 내용이 잘 결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아니, 완벽하게 분리된 다른 이야기라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아예 사회파다운 이야기로 풀어내던가, 아니면 보다 본격적인 요소를 도입하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양 쪽 모두에서 기대 이하인 이도저도 못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2023/06/04

아유카와 테츠야 상과 국내 출간된 작품들 소개 (2023년 6월 기준)


아유카와 테츠야 상 국내 출간작 완독 기념 포스팅입니다.

아유카와 테츠야 상(鮎川哲也賞)은 도쿄 소겐샤(東京創元社)가 주최하는, 신인 대상으로 공모하여 뽑는 문학상입니다. '독창성과 열정이 넘치는 강렬한 추리 장편'을 모집한다고 하지요. 1988년 도쿄 소겐샤가 총 13권으로 구성된 추리소설 시리즈 '아유카와 테츠야와 열세 개의 수수께끼'를 출간할 당시 마지막 권을 '열세 번째 의자'라는 제목으로 일반 공모했었는데, 그 다음 해 기획을 발전시킨 형태로 창설된게 아유카와 테츠야상입니다. 상은 코난 도일의 동상을 수여하며, 상금으로 인세 전액을 주고 있습니다. 수상작은 매년 10월 전후에 도쿄 소겐샤에서 출판되고요.
다른 미스터리 문학상과의 차이점이라면 본격적인 추리물을 지향하는 작품이 많다는 점입니다. 2022년까지의 수상작 27편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은 모두 6편으로, 일상계 추리물 (<<일곱 가지 이야기>>,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두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4편은 모두 밀실 중심의 불가능 범죄트릭이 등장하며, 이를 풀어내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거든요. 일상계 두 편도 일정 수준 이상의 추리를 보여주고요.

이렇게 요새 보기드문 본격 추리물을 지향한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신인의 데뷰작인 탓인지 소설적인 완성도가 떨어지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난무하는 등의 단점이 눈에 띄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목록을 보면 수상 이후 철저하게 잊혀진 작가가 많다는걸 알 수 있는데, 일생일대의 트릭을 사용한 첫 작품 발표 뒤 바로 벽에 부딪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역시 본격물은 어려운 법이지요. 덕분에 국내 출간도 요원해 보입니다. 작가가 계속 작품을 발표하면서 지명도를 얻어나가야 그 유명세가 조금이나마 전해져야 판매에 도움이 될 텐데, 데뷰작 수상 후 잊혀진다면 소개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나마 <<체육관의 살인>> 처럼 나름의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면 모르겠지만.... 작가도 잊혀지고 작품도 그리 유명하지 않은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가 국내 출간된건 기적에 가깝습니다. 잘 팔리지는 않았을테지만요.

그동안의 수상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은 옆에 표기하였습니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국내 출간작만 놓고 보면 <<얼어붙은 섬>>이 최고였고,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는 평균 이하 수준의 최악으로 꼽습니다.

  • 1회 (1990년) : 이시베 타쿠, <<살인 희극의 13인>>
  • 2회 (1991년) : 石川真介, <<不連続線>>
  • 3회 (1992년) : 가노 도모코, <<일곱 가지 이야기>> (국내출간)
  • 4회 (1993년) : 곤도 후미에, <<얼어붙은 섬>> (국내출간)
  • 5회 (1994년) : 愛川晶, <<化身>>
  • 6회 (1995년) : 기타모리 고, <<광란사계절>>
  • 7회 (1996년) : 満坂太郎, <<海賊丸漂着異聞>>
  • 8회 (1997년) : 谺健二, <<未明の悪夢>>
  • 9회 (1998년) : 飛鳥部勝則, <<殉教カテリナ車輪>>
  • 10회 (1999년) : 수상작 없음
  • 11회 (2001년) : 門前典之, <<人を喰らう建物>>
  • 12회 (2002년) : 後藤均, <<スクリプトリウムの迷宮>>
  • 13회 (2003년) : 森谷明子, <<異本・源氏藤式部の書き侍りける物語>>
  • 14회 (2004년) : 神津慶次朗, <<月夜が丘>>
  • 15회 (2005년) : 수상작 없음
  • 16회 (2006년) : 麻見和史, <<ヴェサリウスの柩>>
  • 17회 (2007년) : 山口芳宏, <<雲上都市の怪事件>>
  • 18회 (2008년) : 나나카와 카난,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국내출간)
  • 19회 (2009년) : 아이자와 사코, <<오전 0시의 상드리용>> (국내출간)
  • 20회 (2010년) : 安萬純一, <<ボディ・メタ>>
  • 21회 (2011년) : 山田彩人, <<眼鏡屋は消えた>>
  • 22회 (2012년) : 아오사키 유고, <<체육관의 살인>> (국내출간)
  • 23회 (2013년) : 市川哲也, <<名探偵 The Detective>>
  • 24회 (2014년) : 内山純, Bハナブサへようこそ>>
  • 25회 (2015년) : 수상작 없음
  • 26회 (2016년) : 이치카와 유토,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국내출간)
  • 27회 (2017년) : 이마무라 마사히로, <<시인장의 살인>> (국내출간)
  • 28회 (2018년) : 川澄浩平, <<学校に行かない探偵>>
  • 29회 (2019년) : 方丈貴恵, <<時空旅行者の砂時計>>
  • 30회 (2020년) : 千田理緒, <<誤認五色>>
  • 31회 (2021년) : 수상작 없음
  • 32회 (2022년) : 수상작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