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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6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 정대식 : 별점 1.5점

죽음과 모래시계 - 4점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작은 산유국 제리미스탄은 고갈되는 석유 자원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감옥 국가"로 거듭났다. 거대한 사형수용 감옥을 만들고, 세계 각지의 사형수들을 돈을 받고 수감한 뒤 사형까지 집행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형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흉악 범죄와 무기수의 종신 수용을 위한 비용 증가에 고심하던 각 국은 사형수 한 명당 수만 달러의 비용으로 제레미스탄 "종말 감옥"에 처분을 맡겼다. 

이 "종말 감옥"에 부모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앨런 이시다가 수감되었고, 그는 사형수로 감방장을 맡고 있는 슐츠의 조수가 되어 감옥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2016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지만, 본격물의 애호가로서 놓치기 힘든 수상 이력이라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형수를 수감하는 "종말 감옥"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감옥의 운영, 죄수의 관리 및 감독 방식 - 죄수 몸 속에 삽입되어 죄수가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마이크로 칩 - 등을 꽤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들을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작 수만불로 흉악한 사형수를 받아들인다는게 말은 안되지만, 이 정도는 눈 감아 줘야겠지요. 안그러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거의 모두가 설득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망작들인 탓입니다. 그나마 처음의 두 편,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과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정도만 조금 볼만한 트릭이 나올 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다운 본격물도 별로 없고요. 읽어보신 분들이 대부분 칭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도 저는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평균 별점은 1점 이하 수준이지만, 종말 감옥의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었기에 0.5점을 더합니다. 강호순 같은 범죄자는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네요.

짤막하게 요약한 수록 단편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 담겨있으니 참고하세요.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맨 몸에서 칼이나 만년필을 끄집어내는 물질화 마술로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샤보는 사형 집행 전날 독방에서 난도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맞은편 독방의 용병 출신 사형수 난조는 목이 베여 죽었다. 완벽한 밀실이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데다가, 사형 집행 전날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샤보는 전쟁 때 손상된 엉덩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장착한 넙다리 인공골두 안이 텅 비어 있있지요.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다는게 물질화 마술의 정체입니다. 피부에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서 빼낸거지요. 때문에 물질화 마술로 꺼낼 수 있는건 가늘고 긴 물건들(만년필)로 한정되고요. 샤보는 이 트릭으로 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어 던져 난조를 죽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쟁 때 용병 난조에게 가족을 잃었는데, 그 복수를 직접 하기 위함이었지요. 난죠를 죽인 뒤 칼(에 묶어둔 실 따위로)을 회수하여 자신의 몸을 난자한 뒤 실혈사했습니다. 난자한 이유는 마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를 다 흘리기 전에 칼을 다시 숨길 수 있고, 상처가 많으면 칼을 꺼내는 구멍의 존재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물질화 마술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대담한 트릭은 볼 만 하지만 트릭이 그렇게 설득력 높아보이지 않으며, 자살한 뒤 칼을 다시 숨길 이유가 없다는건 눈에 거슬립니다. 마술의 트릭을 밝히지 않는게 마술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난자한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구태여 사형 집행 전날 난조를 죽인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그나마 이게 이 단편집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종말 감옥에서 탈옥한 사람은 딱 한명, 의사 출신의 반체제 정치범 첸 웨이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마이크로 칩을 무력화하였을까? 그리고 왜 훤한 보름달이 뜬 밤 탈옥을 하였을까? 왜 가장 건장한 경비원 다르위시가 감시탑에서 근무할 때 탈옥을 하였을까? 다르위시는 어떻게 죽였을까?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사리흐 아리 파힐은 슐츠에게 사건 해결을 명하는데...

감옥이 나오니 탈옥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겠지요. 두 번째 작품이 바로 탈옥물입니다.

첸 웨이츠가 의사 출신으로 중국인 죄수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마이크로 칩이 어디있는지 알아냈다는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100Kg이 넘는 다르위시가 경비하는 날을 노린 이유도 그럴듯해요. 다르위시의 목에 가죽 밴드를 엮은 끈을 걸어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버팀돌 삼아 감시탑을 올라간게 진상이니까요.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체중이 제일 무거운 경비원이 필요했던 겁니다. 보름달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다르위시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트릭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모두 설명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의무실의 허술한 보안으로 메스 한 두개, 죄수 구속용 밴드 여러개를 빼돌려 탈옥에 이용했다는 것부터가 그러하지요. 사형수들이 많은 감방에서 메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3미터 위의 감시원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고정된 목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경비원이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올가미를 보고 피하지 않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밝은 보름달 밤이라 죄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거에 비하면 담을 넘은 뒤 야생 낙타를 올가미로 잡아 사막을 가로질렀다는 탈출 방법은 오히려 쉬워보이네요. 이렇게 거대하면서 대단한 감옥 도시가 CCTV없이 감시원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며, 감시원도 2인 1조가 아니라 1명만 근무를 선다는 등의 허술함에 바탕을 둔 탈옥이라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영웅 첸 웨이츠가 탈옥 후 현실의 벽에 부딛힌 나머지 3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진짜 사형수가 되어 종말 감옥에 복귀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안 나오니만 못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추리 퀴즈 이상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종말 감옥을 감찰하기 위해 찾아온 감찰관이 배를 칼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감찰에 걸려 좌천될 예정이었단 옥졸 무바라크였다.

악덕 옥졸 무바라크의 혐의가 짙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중 최악의 빌런이 용의자라면, 없던 죄도 만들어 누명을 씌울 판인데 그를 위해 진상을 밝힌다? 영 와닿지 않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슐츠와 앨런 입장에서는, 감찰관이 자살했건 살해당했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진상을 밝힐 이유도 없고요. 감찰관이 자살하면서 악덕 옥졸인 무바라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진상도 별로입니다. 업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감찰관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를 그의 삭발과 구토 흔적으로 추리해내는 부분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많이 줘 봤자 1.5점입니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티벳 출신 사형수로 제리미니스탄 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불가한 죄수 라쿠파 걀포는 홀로 사형 집행된 죄수의 묘를 파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가 사체를 다시 파헤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조사를 통해 최근에 묻힌 사형수 사체의 일부가 훼손되어 사라진건 사실로 확인되었다. 슐츠는 고심한 끝에 이를 숨기지만, 사형수 로드리고 소토홀의 시체가 완전히 훼손된게 밝혀지자 걀포 역시 곧바로 사형 집행을 받게 되는데...

소토홀과 걀포가 친구였으며, 티벳인 걀포는 소토홀을 위해 최고의 장례인 '조장鳥'을 치뤄주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앞서 시체를 훼손했던건 그 고기(?)로 독수리를 모으기 위해서였고요. 이 정도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네요. 애초에 수천명의 사형수의 묘지를 감옥 내에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본국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증거도 걀포가 티벳인이라는게 전부입니다.

소토홀이 언어 천재였다는 복선으로 그가 걀포와 친구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감방과 분리된 여감방의 죄수 한 명이 임신했다게 알려지고, 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여감방 의사 라일라는 추리력으로 유명한 슐츠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슐츠는 이야기만 듣고 사건 조사를 앨런에게 위임했고, 앨런은 직접 여감방에 방문해서 임신했다는 여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죄수는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리아였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교도소 안에서 임신을 할 리 없지요. 그냥 앨런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앨런을 좋아했었고, 정말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레즈비언 관계였던 여의사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유와 동기, 결말 모두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앨런이 여죄수 감방에 방문한다는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슐츠와 앨런에게 사건 의뢰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거짓말의 뒷 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이미 임신 3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 시점에 앨런의 정자로 마리아를 임신시키면 주차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이 정도면 나무한테 미안한 수준이에요. 별점은 0점입니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앨런 이시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4일. 그 동안 앨런은 독방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부모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앨런 부모가 죽은 사건에 대한 앨런의 회고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나마 부모 사건의 도화선이 된 친아버지가 보낸 편지 - 자신이 TS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걸 밝히는 -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아버지가 슐츠라는걸 알아내는 과정만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슐츠는 생화학 병기를 연구하던 테러리스트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앨런의 어머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테러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 뒤, 종말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메일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건 감옥이었기 때문으로, 앨런은 종말 감옥의 편지지 등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걸 확신합니다. 예상대로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파힐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으로, 홀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이런 집행인 상대라면 인간 흉기급 사형수라면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발악이라도 해 보는게 당연하고요.
파힐이 앨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몰래 잠입한 슐츠가 파힐을 협박하여 통행증을 받아 앨런에게 건네주고 탈옥시킨 뒤, 파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감옥 경비의 허술함, 파힐의 무능함이 합쳐진 결과인데 이 정도라면 진작에 사단이 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또 파힐이 전 세계 부호들에게 사형 순간을 생중계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않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것 하나만 위안이 되는 졸작. 별점은 0.5점입니다.

"에필로그" 

슐츠는 파힐의 시체를 숨긴 뒤 바이러스 발작이 일어남을 느낀다. 그는 갓난아기 앨런에게 TS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균자로 만든 과거를 떠올리며 죽어간다...

읽어본 사람들 모두가 인상적이라 칭했던 반전이 등장하는 마무리입니다.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테러를 꿈꾸던 슐츠가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TS 바이러스를 흩뿌린다는 결말로, 앞서 망작이었던 5, 6편 이야기는 모두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 두 편이 왜 망작이었는지는 살짝 이해가 됩니다. 반전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뒷통수를 쎄게 후려치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그렇게 빼어난 반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앨런이 보균자였다면 투옥되기 이전 생활에서부터 착실히 주변인들에게 감염을 이어왔을겁니다. 앨런의 탈옥이 무슨 계기라도 된 것처럼 부풀릴 필요는 없어요. 잠복기 수십년인 바이러스의 발작이 때마침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다는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이런 류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나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24/08/23

괴물이라 불린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 김지선 : 별점 1.5점

괴물이라 불린 남자 - 4점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미해결 사건을 다루는 FBI 수사팀의 일원이 되었다. 팀의 첫 사건은 데커가 주목한, 고등학교 미식축구 스타 출신 사형수 마스 사건이었다. 멜빈 마스는 20여년 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집행 당일에 찰스 몽고메리라는 사형수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여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데커와 수사팀은 몽고메리가 돈을 받고 위증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냈지만, 몽고메리는 사형 집행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폭발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데커는 마스의 부모 사진이 없는 것, 마스가 전국구 스타가 된 뒤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마스의 부모가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와 같이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마스의 아버지 로이가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걸 밝혀내는데...


특이한 능력을 지닌 수사관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수사하다가, 사건 배후에 거대한 국가적인 음모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챈다는 흔해빠진 스릴러.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이어지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 수사관으로 과잉 기억 증후군에 시달리는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입니다.

멜빈 마스 시점에서의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사형 집행 당일, 누군가 자기가 진범이라고 고백해서 살아났는데 그 누군가가 알고보니 진범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시 사형수가 된다는 뜻이니 매 순간 순간이 긴장될 수 밖에 없지요. 20년이나 버려두었다가 사형 집행 당일이 되어서야 그를 구해준 '누군가'의 의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구해줄거면 더 빨리 구해주던가, 아니면 아예 죽게 내버려두는게 맞을텐데 왜 하필 이 시점에?
마스의 어머니가 말기 뇌종양이어서, 남편이 그녀가 편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준 뒤 살해당한 걸로 위장했다는 진상도 괜찮습니다. 원래 아버지 로이는 소싯적에 흑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테러에 가담했다가, 보험삼아 테러 증거물을 훔치고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스가 슈퍼스타가 되어 행적이 노출되자 다시 죽은척 몸을 숨기게 된 겁니다. 이는 마스의 부모님이 전국방송에 등장했던게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추리와도 연결되며, 숨어 지내고 싶었지만 아들의 출세가 발목을 잡고 만 아이러니한 상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스 이야기 외 다른 모든 부분은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너무 엉망이라서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우선 사건부터 설득력이 없어요. 마스에게 누명을 씌운게 아버지 로이였다는 것부터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약 조직의 성노리개였던 여자를 사랑해서 탈출했는데, 그 여자가 마약 조직 보스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그게 마스였다! 더러운 놈에게 복수를 직접 하지 못했으니 그 자식에게 복수하겠다!는 동기인데 황당하기가 그지 없어요. 이걸 추리해내는건 더더욱 말도 안되니, 추리물로 볼 여지도 없습니다. 등장하는 단서라고는 마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어를 잘했다던가, 집에 은제품이 있었다(조직의 물건을 훔쳐서 나온것)는 정도인데, 이걸로는 턱도 없지요.
마스에게 최면을 걸어 들은 '초차'라는 말을 근거로 로이가 죽은 척 몸을 숨겼다고 추리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초차'는 콜롬비아 칼리 지방의 방언으로는 '주머니쥐'이고 주머니쥐는 죽은척한다는 이유인데, 근거도 빈약하고 억지로 가져다붙인 느낌만 전해줍니다. '창녀'라는 명확한 일반 명사가 있는 단어에 전 세계에서 딱 한 지방에서만 쓰는 방언으로 해석한다는건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20년만에 구해준 이유도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의 '아이는 구해달라'는 유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처구니가 없지요. 병주고 약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과거 마스 사건에서 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사건 당일, 모텔 직원의 증언으로(나중에 위증일 수 있다는게 밝혀지지만) 마스가 집에 들러 범행을 저지를 시간이 있었다는건 증명됩니다. 그런데 마스가 사건을 저지를 동기는 제대로 증명되지 못합니다. 가정 불화가 특별히 언급되지도 않았는데, 얼마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의 계약금 일부 때문에 부모를 죽인다는게 그렇게 설득력있는 동기인가요? 누가 보아도 마스는 수천만불의 연봉을 받을 슈퍼스타가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어머니 루신다의 혈흔이 마스의 차에 남아있다는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이전에 코피를 흘리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변호사만 잘 선임했어도 마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로이가 마스에게 누명을 씌우는게 그렇게 철저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야기도 치밀함, 정교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데커가 NFL에서 뛰었던 미식축구 선수였고, 오래전 시합에서 마스와 겨루었다는 과거가 마스와 연결되어 사건이 시작되고, 결국 둘이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데커의 독특한 특기(?)인 과잉 기억 증후군이 이 작품에서 하는 역할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정체성을 흐립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팀을 꾸리지만 팀원들이 하는 역할도 없어요. 심지어 동료 대븐포트는 비교적 초반에 납치되어 멤버에서 빠지는데,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에요. 다른 멤버들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동료로 여겼던 마스의 변호사 올리버가 알고보니 과거 테러를 저질렀던 삼총사의 밀정이었다는 반전도 별로입니다. 올리버가 주장하던 마스를 위해 제기했던 소송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삼총사 중 한 명인 매클렐런과 함께 찍은 사진같은 억지 증거는 불필요했습니다.
로이가 소싯적 손재주(?)가 좋아서 폭탄을 만들어 테러에 가담했지만, 70대가 된 현재에도 신출귀몰하며 FBI와 거물 킬러들을 엿먹이는 전문가가 된 경력도 불분명하고, 죽기 전 데커에게 지갑을 남겨 도서관증 --> 대출한 책 --> 금고 열쇠로 이끄는 과정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과거 삼총사가 저질렀던 테러 증거가 황당할 정도로 상세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요. 뭐 하나 제대로 와 닿는게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반부는 분명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질낮은 흔해빠진 헐리우드 스릴러로 마무리됩니다. 인기 요소는 잔뜩 집어 넣었지만 설득력도 낮고 정교함도 떨어지는 탓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리즈가 이 뒤로도 몇 편 더 이어지는 듯 한데, 더 읽을일은 없겠네요.

2025/10/11

정체 (2024) - 후지이 미치히토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가족 살해로 사형 선고를 받은 카부라기는 자해 후 병원 이송 중 탈옥에 성공했다. 형사 마타누키는 카부라기를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카부라기는 계속 도주하다가 결국 '아오바 요양원'에서 발견되었다. 카부라기는 출동한 경찰들에 포위되자 요양원 동료 마이를 인질로 삼았다. 피해자 유족 요시코로부터 증언을 얻을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형수가 탈옥한 뒤 수백일간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스릴러 드라마입니다. 소메이 타메히토의 소설이 원작이네요.

이야기의 중심은 사형수 카부라기의 도주극입니다. 카부라기가 이송 중 구급차에서 도주한 뒤, 일본 각지를 전전하며 체포의 위기를 피하는 과정이 아주 상세합니다. 변장과 마스크를 이용해 사람들 속에 섞여드는 모습도 설득력 있게 표현되고요. 또 도주 과정에서 카부라기가 인연을 맺은 여러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도 큰 울림을 줍니다.
드라마적으로도 잘 구성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도 안정적이어서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좀 달랐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억울한 누명을 쓴 희생자의 도주극은 진범을 밝혀내는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중반 이후에 또다른 일가족 연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체포되면서 카부라기가 누명을 썼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반전도 없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맥이 빠집니다. 요시코의 증언만으로 누명을 벗는다는 점도 시시했고요. 
때문에 초반의 스릴러적 긴장감은 뒤로 갈 수록 느슨해지고, 드라마적 색채가 강해집니다. 이는 요시코의 행방을 알아내고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카부라기의 노력이 그리 잘 묘사되지 못한 탓도 큽니다. 솔직히 마지막 증언 요구 장면은 '강요'로 보여서 영 별로였어요.

카부라기가 마지막 체포되는 모습은 앞서의 도주극과는 다르게 허술합니다. 오사카 공사장이나 사야카의 집에서 도주 후 변장할 때는 관객도 깜짝 놀랄 정도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는데, 요양원에서는 마이가 잠깐 찍어 올린 SNS로 덜미가 잡힐 정도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탓입니다. 주연 요코하마 류세이 문제도 커요. 정체를 숨기고 도주를 이어가기에는 너무 잘 생겼으니까요. 보다 평범한 외모의 배우를 기용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또 카부라기를 돕는 주변 인물들의 동기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나마 마이는 자기 부친도 누명을 썼다는 이유라도 있지, 오사카 공사장에서 만났던 카즈야(점프)는 카부라기를 경찰에 신고했었고, 사야카는 그냥 카부라기 얼굴에 반했을 뿐인데 왜 끝까지 믿고 따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성장했다는 장면은 완전히 사족이었고요. 이들보다는 상부의 명령에 의심을 품은 채 카부라기를 추적하는 마타누키 형사의 내적 갈등을 더 잘 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촬영과 연기 모두 뛰어난, 잘 만든 영화이지만 추리극으로서의 재미는 다소 부족합니다. 기대와 달리 드라마적인 무게가 강했어요. 이런 드라마를 좋아하신다면 모를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2009/05/02

처형 6일전 - 조너슨 라티머 / 문영호 : 별점 3점

처형 6일전 - 6점
조너슨 라티머 지음, 문영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로버트 웨스틀랜드는 이웃 사형수의 자살소동을 보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친 뒤, 자신의 돈을 이용하여 단 일주일 남은 사형 집행때까지 진범을 잡고자 한다. 유일한 단서는 그의 무죄를 증언해 줄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편지 뿐이었다. 웨스틀랜드는 유능한 변호사 핑클슈타인, 사립탐정 윌리엄 크레인과 그의 조수 윌리엄즈를 고용한 뒤, 자신의 지인과 친구들을 총 동원하여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하는데 남은 시간은 단 6일!

조너선 (조나단?) 라티머의 대표작이자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명편으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멋진 고전입니다. 어렸을 때 아동판으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이번에 알라딘에서 동서 추리문고 할인 행사를 하길래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새 야구만 보는 것 같아서 연휴도 되고 했기에 맘잡고 한번에 읽고 포스팅합니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위의 줄거리처럼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많이 연상케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두 작품을 착각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환상의 여인"은 정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단 한명의 목격자를 찾기 위한 고난의 과정을 강렬한 서스펜스와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서스펜스보다는 하드보일드적인 탐정의 수사과정과 주인공이 뒤집어 쓴 누명을 파헤치는 추리 부분이 더 돋보이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에 가깝다는 명확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맹점을 찌르는 밀실 트릭, 그리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나무랄데 없는 수준이며, 진범을 밝히는 과정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 중요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는 등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거리가 충분합니다. 트릭이나 구성이 지금 읽으면 굉장히 쉬운 발상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도록 구성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반전과 진범의 정체도 납득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타당한 결말이라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중반 이후부터 서스펜스가 확 죽긴 합니다. 추리물로 돌변하면서 주인공이 탐정 윌리엄 크레인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리묘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거든요.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체적인 균형 면에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뭔가 더 끄집어낼게 있어 보였던 옆방 사형수들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것도 좀 애매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윌리엄 크레인이라는 캐릭터가 작중에서 하드보일드 탐정다운 간지도 없고 일체의 호감도 느껴지지 않아 몰입하기 어려운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하드보일드 치고는 두뇌가 결합된 행동파 탐정이라는 독특한 면은 있지만 지나치게 본능 - 술과 여자 - 에 탐닉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성실해 보였거든요. 이런 친구한테 목숨을 내 맡긴 웨스틀랜드가 불쌍해질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고전적 하드보일드 스릴러물이면서도 "정통 추리"의 요소를 잘 도입한 이색적인 작품이라 지금 읽어도 그 매력이 충분한 고전명작이라 생각합니다. 걸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추리와 하드보일드 모두를 좋아하신다면 추천할만한 작품으로 제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웨스틀랜드는 살아나긴 했어도 잃은게 너무 많아 보이네요...

덧붙이자면, 솔직히 별점은 3점 이상을 줄 수 있는 작품인데 번역이 너무 별로라서 도저히 3점이상은 못 주겠습니다.... 동서 추리문고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한데 몰입해서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어요. 대사의 구분도 이상해서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한 장황한 묘사를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직역으로 표현하는 등 읽다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였거든요. 예를 들자면 '해걸음은 점점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환등기 앞에서 누군가가 모슬린을 두 겹 네 겹을 차곡차곡 접어서 포개 놓아가는 듯 했다' 라는 문장을 들 수 있겠네요. 뒷부분이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불필요한 묘사이기도 하고요. 그냥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도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이런 문장이 전편에 난무합니다...

2024/06/07

리뎀션 - 안데슈 루슬룬드, 버리에 헬스트럼 / 이승재 : 별점 1.5점

리뎀션 - 4점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베트 그랜스 경정은 손님을 걷어차 뇌출혈을 일으키게 만든 밴드 가수를 체포했다. 그런데 존 슈워츠라는 가수의 여권은 위조였다. 가수의 정체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존 메이어 프레이였다. 존 메이어 프레이는 오하이오의 사형수였는데, 6년 전 탈옥했었다. 그가 무죄라고 믿었던 교도관 버논 및 사형 폐지 연합의 도움 덕분이었다. 버논은 식사에 독을 섞어 건강 이상을 유발시킨 뒤, 사형 폐지 연합 소속 의사가 마취제 등을 투여하여 존의 사망을 위장했었다. 시체 운반 부대를 통해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존은 러시아 등을 거쳐 위조 여권으로 스웨덴에 입국할 수 있었다.
존의 생존을 알아낸 미국 정부는 송환 후 사형 집행을 원했다. 스웨덴은 사형과 같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개인의 송환요구는 거부하고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갈까 우려하여 존을 러시아로 추방하는데 합의했다. 존은 러시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끌려가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형제를 반대하던 교도관 버논의 계획이었다...


모르는 스웨덴 컴비 작가의 범죄 스릴러. 에베트 그랜스 경정 시리즈 중 하나로 내용의 핵심은 교도관 버논이 엘리자베스 피니건을 살해하고 존이 사형 선고를 받도록 만든 음모입니다. 존이 사형 집행을 당한 다음에, 자신이 진범임을 밝혀 체제를 뒤흔들 생각으로요. 사형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형과 같은 '동해보복'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살할 때 에드워드 피니건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조작하여 에드워드를 살인 사건의 피고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버논이 계획을 밀고 나가던 중간에 존을 불쌍히 여겨 교도소에서 탈옥하게 만든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약물로 심장에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킨 후, 교도소에 고용된 같은 편 의사들이 존을 언뜻 보기에 죽은 것처럼 마취시키도록 만들어서 사망 선고를 내렸고, 그 뒤에는 시체 안치실에 집어 넣었다가 부검 절차를 핑계로 시체 운반 부대에 넣고 빼돌리는 과정 모두가 설득력있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송환되면 죽을게 뻔한 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스웨덴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도 흥미로왔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딜레마는 항상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살인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게 만든 뒤, 이를 폭로한다는 핵심 계획부터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그가 살해했다는 피해자는 자살했었습니다. 피해자는 데이비드 게일의 공범이었고요. 이 사실은 게일의 사형 집행 직후에 드러납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죠. 게다가 이 작품은 이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피해자로 알려진 콘스탄스도 불치병에 걸려 자살했던 공범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버논은 무려 세 명 - 사형 선고를 받은 에드워드까지 - 이나 죽게 만든 살인범입니다. 버논의 존재가 사형 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근거인 셈이지요. 살인마가 사형 제도 폐지를 논한다는건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큰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살해당했던 엘리자베스 피니건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니건은 작 중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존에게 엄청난 복수심을 불태우는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에드워드 피니건을 복수심 때문에 제 정신을 잃은 변태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버논은 꽃다운 청소년 두 명을 희생시킨 살인범입니다. 에드워드 피니건마저 자신을 죽인 살인자로 조작한건, 에드워드가 그가 사랑했던  앨리스와 결혼한 것에 대한 복수로 보이고요. 그런데 작 중 버논은 시종일관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굳게 지키는 정의로운 인물처럼 등장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에드워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존이 갇혔던 사형수 동에 감금되었다는 에필로그도 억지스럽습니다. 끈을 이용하여 자살 후 총이 튕겨 나가도록 만들고, 끈은 까마귀가 먹어치우도록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경찰이 '초연 반응' 정도를 검사하지 않을리 없어요. 존이 자살한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걸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을겁니다. 설령 수사가 미비하여 에드워드가 버논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썼다고 치죠. 그래도 딸을 살해한 범인을 직접 처단한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버논이 그의 딸을 살해했다는건 이미 밝혀진 다음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워요.
다른 인물들도 엉망이거나 별볼일 없습니다. 기껏 목숨을 건진 존이 분노를 참지 못해 사건을 저질러 정체가 드러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멍청하다면 죽어도 싸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해서 지루했고요.
에베트 그랜스도 영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지 주변 인물들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뇌손상이 온 아내(?) - 전작을 읽지 않아 이 설정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은 안 됩니다만 - 안니에 대해 신경쓰는 것 밖에는요. 나이 많고 화도 많은, 붙임성 없는 거구의 경찰이라는 인물 설정도 "메그레" 경감과 똑같습니다. 그나마 독특한건 스웨덴 가수 시브 말름크비스트의 광팬이라는 것 뿐입니다. 마리안나 헬만손 경위도 이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미모의 여성 형사의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그리고 버논의 계획은 스웨덴 형사 에벤트 그랜스와 별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에베트 그랜스가 존의 무죄를 믿고 송환에 반대할 까닭도 없지요. 한 국가의 고위 경찰이 남의 나라 사법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니까요. 한마디로. 스웨덴 형사 에베트 그랜스 시리즈일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베트 그랜스의 등장 부분을 거의다 잘라내고, 존과 버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도 충분했어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탈옥에 대한 디테일 외에는 전부 꽝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014/05/27

타인의 목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점

타인의 목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사형수 외르탱은 사형 직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사실 탈옥은 메그레 경감이 외르탱이 진범이 아님을 직감하고 진범을 알아내고자 벌인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이후 외르탱이 체코인 라데크를 만나려고 시도한다는걸 알아챈 메그레는 라데크를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라데크의 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하고, 외려 외르탱의 자살 시도 등으로 궁지에 몰린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5, 6, 7, 8번째 작품을 건너뛰고 선택하여 읽게 되었는데, 오래전 "황색견"과 함께 국내 소개되었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 대표작이겠거니 싶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라데크라는 일종의 소시오패스 악당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별난 재능은 사람의 약점을 파악하여 뜻대로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묘사되는데, 당대 유행하던 "팡토마스"의 영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당이라는 점에서도요. 노파 하나의 생명을 빼앗아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는건 "죄와 벌"과도 비슷한데, 라데크는 구원 따위는 믿지 않는 내추럴 본 악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캐릭터 크로스비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범죄를 단순한 욕망의 충족이 아닌,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기 위해 저지른다는 점과 결국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는 최소한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유감스럽게도 볼 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정교한 맛도 없고 전개도 뜬금없는 탓입니다. 메그레가 자신의 목을 걸고 외르탱 탈옥 작전을 벌인 이유부터가 석연치 않습니다. 외르탱이 라데크와의 접촉을 시도해서 라데크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후의 수사는 지지부진하기 그지없거든요. 라데크가 무전 취식 후 경찰과 함께 나가는 전략으로 외르탱과의 접촉을 무효화시키는걸 메그레가 막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수고를 덜 수 있었는데 가만히 지켜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생폴레옹에 지다"에서 메그레가 다른빈유를 방관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데, 과거의 실수에서 뭔가 배운게 없는걸까요?
또한, 메그레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외르탱이 짧은 시간 안에 귀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이 단순히 택시를 탔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허술합니다. 수사가 부실했다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라데크가 계속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는 듯한 허세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사건이 과연 쉽게 해결되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라데크가 최후의 순간에 메그레에게 총을 쏘는 우발적 행동 역시 큰 약점이고요. 이 장면 때문에 그나마 있던 천재 범죄자와의 두뇌 대결 분위기가 무너져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라데크가 무계획에 즉흥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은 L의 죽음 이후 급속도로 힘이 빠진 "데스노트"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찌질한 모습을 보여줘 실망을 안겨준 야가미 라이토와 다를게 없다는 점에서요.

이렇게 좋은 추리소설로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물론 멋드러진 제목만큼이나 문학적인 향취는 짙고, 외르탱의 탈옥을 지켜보는 메그레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한 등 심농이라는 작가의 필력은 유감없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차라리 "죄와 벌"처럼 라데크의 심리를 더욱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2021/03/07

ON 온 - 나이토 료 / 현정수 : 별점 1.5점

ON 온 - 4점
나이토 료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갓 형사과에 입사하여 서류 정리 업무를 맡은 신참 형사 도도 히나코는 미해결 사건 파일들을 암기하다가, 처음으로 자살로 보이는 어느 택배 배달원의 변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그 자살 피해자는 히나코가 암기 중이었던 미해결 성폭행 사건의 유력 용의자였다. 자신의 음부에 병을 박아 넣고 죽은 참혹한 시신은 당연히 살인으로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완벽한 증거가 곧 발견되었다. 피해자가 자신이 직접 자살하는 장면을 촬영한 스마트폰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경찰서에 보관된 스마트폰 속 자살 동영상이 어느 날 인터넷 동영상 투고 사이트에 공개되고, 연이어 유사한 자살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일본산 범죄 스릴러물로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던 범죄자들이 연쇄 자살한 사건 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범죄자들이 자살하게 만들었는지를 풀어내는게 핵심인데, 검시를 통해 자살한 범죄자들 뇌에 종양이 있다는게 발견됩니다. 당연히 자살은 뇌 종양이 원인이고요. 정상적인 검시 과정에서 밝혀진거라 추리의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추리의 여지를 남기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누가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뇌종양을 만들었는지?"를 밝혀내는 후더닛+하우더닛 이야기로 흘러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구조를 만드는데 실패했습니다. 우선 후더닛 측면으로 보자면, 유력한 용의지 나카시마 다모쓰가 초반에 등장해서 범인이라는 인상을 팍팍 심어주는 탓에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의외성이 전무하니까요. 

도도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양념통 지문과 자살 현장의 콜라병 지문이 일치한다는게 밝혀지는 클라이막스는 나쁘지는 않아요. 양념통을 나카시마가 만졌던 적이 있었고, 이를 통해 나카시마가 피해자 미야하라 아키오를 마지막에 만난 인물이라게 입증된 셈이거든요. 하지만 이미 나카시마가 근무하는 병원이 피해자들의 접점이라는게 드러난 이상, 곧 밝혀질 일이었어요. 뭔가 대단한, 결정적인 단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는 봐줄만 한데, 하우더닛 측면에서는 아예 빵점입니다. 상식적으로 뇌종양을 만들려면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했을겁니다. 이전에 읽었던 "숙명"에서 처럼요. 그러나 감옥에 수감된 사형수마저 종양이 생긴걸 보면, 다른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전혀 셜명되지 않습니다!

나카시마가 끼고 있던 큰 반지가 자살을 시작하게 만드는 하이테크 장치였다는 설정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초능력자가 염력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스캐너스"와 별로 다를게 없는 SF,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중간에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하며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조건반사, 최면술 조작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입니다.

캐릭터들도 진부하거나, 묘사나 설명이 지나칩니다. 주인공 도도 히나코는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에서, 이런 범죄 스릴러 속 스테레오 타입이었던 강단있고 강한 여형사가 아니라는 차별화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그러나 흔하디흔한 일본 컨텐츠 속 착하고 열심히 사는 여주인공 그 자체라서 스테레오 타입인건 마찬가지죠. 게다가 그녀가 절대적인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왜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든요. 히토미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잘생긴 점원에 대해 이야기한 걸 떠올린게 수사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허나 이 정도는 절대 암기력까지는 필요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구태여 이런 초능력같은 설정을 붙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살인 방법과 더불어 작품의 현실성을 급락시키는 또 다른 원인만 제공할 뿐이었어요. "탐정학원 Q"스러운, 만화같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연쇄살인마 오토모 이야기는 진부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전개 상 불필요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나카시마가 뇌를 조종하여 자살하게 만드는 장면을 히나코 앞에서 보여준다는, 극적인 클라이막스를 위해 억지로 등장시켰을 뿐입니다. 살해당한 히토미가 언급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잘생긴 직원이 오토모라는게 밝혀지면, 체포는 시간문제였을테니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그 외 범죄자들의 자살과 그들의 범행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거북했습니다. 지나치게 잔인한 탓이지요. 범죄자들이 천벌을 받게 만드는, 일종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는 합니다만 좀 지나쳤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는 독자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며, 천벌을 위해 뇌를 조작해서 자살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꽤 흥미로왔습니다. 그러나 그걸 이야기로 잘 풀어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득력도 낮고요. 싸구려 헐리우드 스릴러 수준에 불과해요. 시리즈라고 하는데, 후속권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21/06/04

사형에 이르는 병 - 구시키 리우 / 현정수 : 별점 2.5점

사형에 이르는 병 - 6점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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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케이 마사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승승장구했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전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3류 대학교에 겨우 입학하여 아웃사이더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린 시절 단골 빵집 주인 하이무라 야마토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9명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였다. 마사야와의 면회에서 그는 9번째 범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무라 야마토의 과거, 그리고 범행에 대해 조사에 나선 마사야는 어머니 에리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녀는 야마토와 같은 학대 아동으로 어린 시절 한 때. 같은 양모 밑에 있었었다. 그리고 결국 변해가는 자신과 함께 충격적 사실에 마주하게 되는데...

천재 연쇄 살인범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진상을 더듬어가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천재 범죄자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감옥 안에 갖혀 있는 천재 범죄자는 하니발 렉터라는 거물이 수십년 전에 이미 보여줬던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에는 주인공과의 두뇌 대결이나, 주인공을 도와 또 다른 범죄를 막는 다른 천재 범죄자 작품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되는 점이 있습니다. 천재 범죄자 하이무라 야마토의 진짜 목적이 가케이 마사야를 조종하는데 있었다는 반전입니다. 이 반전이 몇 가지 의문들, 왜 마사야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9번째 범행인 네즈 가오루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등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이인 것 처럼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흥미로운 전개이지만, 이는 마사야의 모친 에리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리고 야마토가 사이코패스이며 자신의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마사야를 골랐다는게 밝혀집니다. 네즈 가오루를 살해한 진범으로 의심되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통해서요. 즉, 마사야는 수많은 야마토의 조종 희생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야마 이츠키를 우연히 만나게 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그 역시 희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이무라 야마토의 목적을 사이코패스에 대해 비교적 충실한 사례와 근거들로 뒷받침하면서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작가가 저도 얼마전에 읽었었던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많이 참조한 듯 싶더군요. 그 책에 나왔던 사이코패스의 특징 - '강력한 통제력'과 '빼어난 거짓말 솜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능력' - 이 이야기 안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아울러 사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야마토가 이츠키를 조종하기 위해 '3초 안에 대답할 것' 등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9번째 네즈 가오루 사건과 연결시키는 과정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어쨌건 9번째 범행도 야마토가 저질렀다는것 뿐만 아니라, 왜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범행 수법이 사뭇 달랐는지, 왜 네즈 가오루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는지, 왜 이츠키가 계속 그 사건과 엮였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건 반전이 있는 일본 범죄 스릴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은 큽니다. 전능한 천재 사이코패스 야마토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해 왔던 쿨한 천재 악당 그대로인 탓입니다. 그 외 캐릭터도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사람 대하는게 서투른 마사야가 여러 증인들과 만나 인터뷰를 서슴없이 능숙하게 진행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 외에 시점을 간혹 바꿔가며 독자에게 혼돈을 준다던가, 불필요하게 과장된 잔혹한 범죄 묘사 등은 그야말로 일본 범죄 스릴러물의 단점만 모아서 집대성한 느낌이었습니다.

야마토의 목적을 드러내는 전개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사야가 진행하는 야마토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의 경우,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9번째 살인을 야마토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조사라면, 야마토의 과거는 조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소설로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던 셈이지요. 

야마토의 피해자이자 사건 증인 중 한명이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9번째 범행 용의자라고 단정짓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마사야와 엮이기는 했지만, 다른 근거는 하나도 없어서 억지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도 마사야의 친부가 누구인지, 가나야마 이츠키는 어떤 인물인지를 조사하는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들인지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됐고, 가나야마 이츠키도 그냥 만나면 됐으니까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억지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리 일본 검찰이 기소한 범죄를 유죄로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3류 대학 법대생도 금방 눈치챌 정도로 이상한 사건을 엮어서 야마토의 범죄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애초에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찐따 가케이 마사야가 중학교 시절 약간의 접점밖에 없었던 야마토의 부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것 부터가 억지스러웠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마지막에 마사야와 사귀게 된 아카리도 야마토에게 조종받고 있었다는 에필로그도 과했습니다. 사족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녀는 야마토가 납치했지만 운 좋게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소녀일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야마토에게 조언을 얻으며 조종당하게 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 잔혹 서술 트릭 작품인 "살육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름의 독특한 맛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범죄 스릴러가 취향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5/11/16

O.헨리 미스터리 걸작선 꼭두각시 인형 - O.헨리 / 서계인 : 별점 3점

꼭두각시 인형 - 6점
0. 헨리 지음/지문사
이 책을 추리 관련 쟝르로 구분해야 할려나... 단편의 제왕 O.헨리의 미스터리 성향의 단편만 모아놓은 단편집입니다.

흔하게 접하는 "마지막 잎새"류의 작품이 아니라 제가 접해 보지 않은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목차는 크게 3개로 구분되는데 이것저것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있는 "사형수의 꿈" 챕터, "사기꾼 제프 피터스" 시리즈 챕터, 그리고 "명탐정 샘록 죤스" 시리즈 챕터입니다. 이 중 처음 접한 "사기꾼 제프 피터스"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사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짤막하게 담고 있는데 유머와 위트, 반전이 제법 괜찮은 시리즈더군요. "샘록 죤스" 시리즈도 인터넷 상의 번역으로 접해보긴 했었지만 정식 책으로 읽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홈즈를 제대로 패러디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일어 중역본인지 영문 직역본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이 깔끔합다는 것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예를 들면 "캐롤웨이의 암호"는 "암호 미스터리 걸작선"에 실려있기는 하지만 번역이 당쵀 이해 불가능한 수준이었던데 반해, 이 책은 최소한 내용전달은 확실하게 해 주고 있거든요.

개인적인 베스트는 추리적인 요소로 따진다면 간단한 보물 찾기 트릭이 등장하는 "숨겨진 보물", 특이한 인물 바꿔치기 트릭이라 할 수 있는 "X양의 고백", 여태 본것중 가장 기발하며 미국적이기 까지 한 암호 미스터리 트릭인 "캐롤웨이의 암호", 자신의 범죄를 증명하려는 범인이 등장하는 "허영과 모피", 그리고 괜찮은 착상의 보석 절도 트릭물인 "부정의 증명"을 꼽고 싶으며 사기꾼 제프 피터스 시리즈 중에서 "사기꾼의 양심"과 "외딴섬의 사업가", 제일 기발한 사기극인 "돼지의 윤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홈즈의 귀납법 추리방식을 여지없이 비꼬면서도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샘록 죤스 시리즈는 다 괜찮았어요. O.헨리 특유의 반전이 잘 살아있는 작품으로는 "추수감사제의 두 신사"와 "평화의 옷"을 꼽고 싶네요.

결론내지라면, 전체적으로 O.헨리 특유의 유머와 조크가 넘치면서도 나름 반전과 추리적 요소가 번뜩이는 작품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집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이라는 분야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잘 대변하는 O.헨리 특유의 짤막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작품이 가득하니 누가 읽어도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2/02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오혜진 : 별점 3점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6점
오혜진 지음/어문학사

6년전에 읽고 리뷰까지 남겼었는데, 어쩌다보니 깜빡하고 다시 구입해서 읽은 책입니다. 5년이 지난 탓에 새로 읽는 것과 다를게 없었네요. 다시 리뷰 남깁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5장은 맺음말로 내용은 4장 구성), 해방 전까지의 한국 추리 소설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으로 문학사니까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해방 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은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와 더 비슷한데, 내용이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각이 일관된 덕분에 더 나은 점도 많습니다. 이전에 유사한 책들을 많이 읽어왔지만, 여전히 눈에 뜨이는 부분도 제법 되고요.

우선 추리 소설을 어떤 기준으로 연구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브 뢰테르의 세가지 분류 - Mystery, Crime novel, Suspense - 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과 서구 추리 소설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짤막하게 소개하는 등의 도입부가 마음에 듭니다. 연구서다운 상세한 설명과 접근 방법이 좋더라고요.

이후 실제 한국 추리 소설의 역사 역시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우선 1920년대 중반 "취미"라는 용어가 일상화 되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원래 있던 단어인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당시 중산층의 개념이 1년 수입으로 1년간 채무 없이 살 수 있는 정도를 뜻하며, 극히 드물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취미"에는 돈이 들고,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값싼 인쇄물을 가까이 하는 책읽기가 그나마 일반적인 취미로 널리 퍼졌다고 하고요.
또한 이러한 출판 산업의 호황에 더해 당시 언론 통제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가 난무한 것, 그리고 "자본주의" 때문에 상업화로 흐른 등 "대중 소설"을 위한 토양이 갖추어져 결국 추리 소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던 것도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비싼 책 값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아울러 당시에도 코난 도일과 르블랑에 대한 편식이 심했다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이후 당시 발표된 여러 추리 소설을 소개하는데 이 역시 흥미로왔습니다. 최독견의 "사형수" 라던가, 신경순의 "피무든 수첩", "제 2의 밀실", 최유범의 여러 작품들이 그러합니다. 특히 최유범의 작품은 비록 일부 표절("브루스 파팅턴 설계도")이 있지만 미스터리 추리 소설로 장르의 규칙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고 하니 놀랍네요. 수수께끼 풀이가 완벽한 수준의 해방전 국내 작품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든데 말이지요.
그 뒤에 이어지는 다른 작품들은 국내 추리 소설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연애사"가 부각되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최유범의 작품이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 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박태원의 "우맹", 김유정의 "만무방"과 같은 추리 서사가 도입된 국내 소설 소개가 이어집니다. 염상섭의 "사랑과 죄" 역시 마찬가지죠. 영화에 나온 수법을 따라하는 모방 범죄가 등장하고, 살인 사건이 주요한 내용인 등 꽤 진지한 추리 서사가 도입된 작품이라는데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몇몇 부분은 안타까움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통속 소설", "대중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당시부터 존재했었다는 점입니다. 추리 소설이 싸구려 통속 소설로 폄하된 이유가 이 땅에 추리 소설이 소개된 시점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심지어 추리 소설을 창작, 번역하기까지 했던 일부 작가들조차(염상섭 등) 동일한 인식을 지녔다는 점에서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과학적, 근대적 사고가 널리 퍼진 것이 논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추리 소설의 유행과 관계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근대적 사고 방식을 토대로 한 작품이 이렇게까지 폄하되는 것도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물론 당시 미디어, 작가들의 잘못도 크겠지만요.

마지막 4장에서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세 편의 작품 - 채만식의 "염마",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 김내성의 "마인"- 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당대 추리 소설의 수준, 그리고 어쩔 수없는 한계를 설명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내성의 여러 작품들을 소개해 주는데, 김내성의 "마인"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뜨입니다. 지금 읽으면 많이 허술하지만 당대 국내 추리 문학계를 대표했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 작품 소개 모두 읽을만 합니다. 그러나 책의 특성상(일종의 학술 논문) 전편 내용이 수록된 것이 아니라는게 좀 아쉽습니다. 관심이 크다면 별도로 구해 볼 수 밖에 없으니까요.

마지막에는 194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쟁 탓에 스파이 소설이 범람하였으며, 이른바 "친일 문학"으로 여러 작품이 발표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외국인 여성 마리에가 만드는 센닌바리가 경성의 방공 시설과 반도내 포대 위치를 말하는 모르스 부호가 숨겨져 있음을 폭로한다는 김내성의 "수놓은 송학"이 대표적인데, 꽤 괜찮은 아이디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지에서의 친일, 매국 문학으로 전락한 작가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이는 6년 전과 같습니다. 다른 유사 자료, 도서와 차별화되는 점도 크고, 나름의 재미는 물론 여러가지 정보와 함께 큰 흐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덕분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저는 두 번 읽었지만 여전히 좋은 독서였습니다.

2005/02/16

밀랍 인형 (Wax Work) - 피터 러브시 : 별점 4점

밀랍인형 - 8점
피터 러브제이 지음/뉴라이프스타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립 식물원이 있는 고급 주택가 큐 스트리트의 고급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진사 하워드 클로우머의 조수 퍼시벌이 독살당했다. 경찰은 그가 사진사의 아내 미리엄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미리엄을 기소했다. 그녀는 피해자가 즐겨 마시던 와인 디캔터에 사진관에서 쓰던 청산가리를 넣어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술서를 제출했고,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며칠 안 남은 어느날, 형사부장 크리브에게 이 사건에 대한 엄중 조사 명령이 하달되었다. 사실은 독약을 꺼낼 수 있는 금고의 열쇠는 피해자 퍼시벌과 남편 하워드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리엄은 열쇠를 손댈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건 수사에 나선 크리브는 미리엄 주변에 비슷한 형태의 자살-독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워드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하워드가 종적을 감춘 탓에, 크리브는 법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는 사형수 미리엄과의 면회를 통해 진상을 밝힐것을 결심하는데....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로 접했던 영국작가 피터 러브시의 작품. 작가에 대해 호감도 있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여러분들의 호평을 인터넷 상에서 익히 접해왔기에 헌책방에서 눈에 띄었을때 주저없이 구입하였습니다.

고전 황금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영국이 무대입니다. 손에 잡힐 듯한 시대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작가의 시대 묘사는 특출합니다. 3편의 장편 모두 다른 시대가 배경인데도 말이지요. 현대가 무대인 "마지막 형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 초엽의 "가짜경감 듀"나 이 작품 모두 창문 밖 거리를 보고 쓴 듯한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권이거든요. 특히나 이 19세기 후반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적당히 수사와 재판 등의 조직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한 듯한" 고전 추리소설적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인데 작품과도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작품 속 탐정역의 크리브 형사 부장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데, 상사에게 치여살며 만년 형사부장에 머물러 있는 궁상맞은 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자존심도 있고 행동력, 추리력이 탁월한 능력있는 탐정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홈즈를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당시 경찰에도 레스트레이드같은 무능한 인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설정은(출세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뭐 레스트레이드도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능력있는 인물이겠지만요.

하지만 이 크리브 형사 부장보다 이 작품을 빛내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리엄이라는 영국 스타일 "팜므파탈"입니다. 주로 "몸"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은 미국식 팜므파탈에 비교해서 상류계급의 귀부인이라는 사고방식, 엄숙하고도 단정하면서도 곧은 행동거지로 무장하고 약점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독사같은 면모를 갖춘 독특한 악녀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냅니다.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 역시 갖추고 있고요.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은 굳은 마음과 치밀함도 큰 무기입니다.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하며 무너지긴 했지만,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였습니다. 이야기도 스토리텔러로서의 피터 러브시의 진가를 잘 보여줍니다. 크리브 형사부장이 서서히 사건을 파헤치며 드러나는 과거의 또 다른 자살 사건, 그리고 과거 사건과의 이해할 수 없는 연관성에서 비롯된 추리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승부! 결국 마지막에 "일사부재리 원칙"이라는 결정적 법 조항으로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반전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를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드러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다왔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인과 타소 밀랍 인형관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다 긴장감을 자아내면서도,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는 연출 역시 발군이고요.

하지만 작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인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승부에서 크리브 형사부장이 이끌어내는 부분은 약간 치밀함이 부족했고(물론 이 사건에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전제조건이 있어서 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해답이 급작스럽게 돌출된다는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트릭으로 지적 흥분과 재미를 가져다 준다는건 분명합니다. 중편 정도의 부담없는 분량도 매력적이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만한 매력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PS : 그나저나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는 물론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좀 길었다고 느껴졌었는데 이 책은 깔끔하네요. 아무래도 이 정도 길이가 저한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2015/07/13

공허한 십자가 - 히가시노 게이고 / 이선희 : 별점 3점

공허한 십자가 (보급판)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자음과모음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하라는 딸이 살해당한 뒤, 아내 사요코와 이혼했다. 그리고 5년 후 그녀마저 살해당했다는걸 알았다. 이전 장인, 장모를 통해 사요코가 남긴 원고를 전해받은 나카하라는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강도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알라딘 이벤트로 무료 대여해 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수수께끼 풀이가 핵심인 추리물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 사요코가 그 신념으로 무리한 추궁을 하다가 본인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으로, 죗값과 사형제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볼 만한 메시지를 전달하는게 핵심이거든요. 이러한 메시지를 사요코의 죽음이 그녀의 신념과 관계되어 있다는걸 추리적 서사를 통해 밝혀내는 과정 안에 잘 녹여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베스트셀러 작가다운 솜씨에요. 그 외에도 생명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와 청소년 피임에 대해 확실한 주의를 주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사요코 사건이 단순 강도 사건이 아니고 다른 의도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초반에 밝혀진 후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은 작위적입니다. 나카하라가 지즈코를 우연히 장례식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러합니다. 아무래도 메시지 전달에 치중한 나머지 디테일을 놓친 느낌이 있습니다.

또한 사요코 죽음의 원인이 된 신념이, 딸아이의 죽음이라는 계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중생이 몰래 낳은 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심각한 범죄이지만, 사리분별 못하는 아이들이 벌인 일이라는 점, 공소시효가 훌쩍 지난 점, 중절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다가 사오리는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지옥일 정도로 인생 자체가 망가졌다는 점 등을 놓고 보면, 속죄나 정의를 실현해야 할 만큼의 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느낌이에요.

그래도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전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무료로 읽어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참고로 죗값과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작중 나카하라의 입을 통해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아마 이 의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라고 설명됩니다. 이것도 정답일 수는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사형 제도에 찬성합니다. 무기징역 같은 처벌로 제 세금을 흉악범들에게 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작중에서도 설명되듯, 감옥 안에서 반성하거나 갱생하는 걸 기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목 그대로 공허한 십자가일 뿐이죠. 아울러 저 역시 딸아이 아빠로서, 작중 사건처럼 어린 딸이 무참히 살해당했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부모라면 이런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사형 제도의 문제라면 "데이비드 게일" 등에서 지적하듯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13계단" 등에서 말하듯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 역시 또 다른 살인이라는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범인에게, 그것도 모두에게 공분을 산 흉악범에게는 확실하게 사형을 적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예를 들면 강호순, 유영철 같은 사형수들 말입니다. 제발 이런 인간들은 사형이 빨리 집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에서 사요코가 쓴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2019/07/21

귀신나방 - 장용민 : 별점 1점

귀신나방 - 2점
장용민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로드웨이의 한 뮤지컬 극장에서 오토 바우만이 열일곱 살 소년을 살해했다. 소년은 좋은 부모에게 좋은 교육을 받은 흠잡을 것 없던 아이였다. 소년과 살인범은 아무 관계가 없어서 경찰은 살해 동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목격자 앞에서 소년을 죽인 오토 바우만은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사형 집행일을 사흘 앞둔 날 그는 갑자기 특별 면회 요청을 하는데, 상대는 과거 전도유망했던 기자 크리스틴이었다. 갑작스럽게 사형수와 인터뷰를 하게 된 크리스틴은 바우만으로부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한국 작가 장용민의 장편 소설입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히틀러의 부활을 다루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한국 작가가 섣불리 손 댈 소재는 아니라 생각했으니까요. 또 히틀러의 부활에 대한 창작물은 굉장히 많아서 차별화를 통한 비교 우위를 가져가기도 쉽지 않을테고요. 예를 들어 히틀러의 머리 (뇌)만 따로 보관했다가 다른 몸에 이식한다는 "모레", 클론을 만든다는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 있지요.
이 작품에서는 요제프 멩겔레의 뇌이식을 통해 젊은이로 거듭난다는 설정을 보여주는데 아니나다를까, 예상대로 차별화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방법만 조금 다를 뿐, 유대인 생체 실험을 통해 기술을 터득한 멩겔레가 주도하여 히틀러의 부활을 이끈다는 케케묵은 설정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나마 뇌이식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도 거의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부활까지는 히틀러의 뒤를 쫓는 비밀 조직 아디 헌터와의 악연 등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부활 이후부터입니다. 아담 휘슬러로 새롭게 태어난 히틀러가 미국 정복(?)을 위해 일으킨 사건들과 여러 계획이 펼쳐지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탓입니다.
첫 번째로 아담은 시골 마을에서 6명이 죽는 참극을 일으킵니다. 일종의 심리 조작을 통해서요. 그런데 이 참극을 통해 그가 얻은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보였다고 하기도 어려워요. 원래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끼리 다 틀어지게 만든 것도 아니고, 악감정이 있던 두 집안 사이에 불똥을 튀긴 정도니까요. 경제학 서적을 독파해가며 자본주의를 통달한 세기의 악마가 하는 일 치고는, 그리고 사악함을 드러내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합니다.

그 뒤 미국 연방 준비 위원회를 손에 넣겠다는 두 번째 계획은 그야말로 실소를 자아냅니다. 무려 800톤이 넘는 금괴의 댓가로 하는게 연방준비위원회 의장 밀턴의 비서가 되는 것 뿐입니다! 2019년 7월 현 시세로 금 1kg은 6천만원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48조의 현금성 자산으로 2019년 기준 세계 부자 순위 20위권이에요. 현금성이라 투자 시 자본 증식과 대출 가능 규모를 감안하면 몇 배가 될 수 있고요. 한마디로 스스로의 돈과 능력으로 세계 금융계를 지배할 수 있는데 고작 비서가 되는게 다라니 이게 말이나 될까요? 비서가 되려는 목적도 루 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밀턴에게 뇌수술을 알선하는 댓가로 밀턴의 주식을 넘겨받으는건데, 이를 위해서는 구태여 비서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경로건 간에 자신이 히틀러라는걸 증명만 하면 죽기 직전인 밀턴이 알아서 접근해 왔을 테니까요.
게다가 연방 준비 위원회 주식을 소유한다고 그가 미국을 지배하는게 되는지도 의문입니다. 어차피 연방 준비 위원회 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상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요. 이보다는 차라리 세계를 지배하는 대기업 회장이 되려는 계획이 더 설득력이 높아요. 2019년 현 시점에서 연준 위원장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보다 세계 파워 랭킹 순위가 낮으니까요. 아니면 직접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던가....

세 번째 계획인(두번째 계획에서 이어지는) 케네디 암살에 히틀러가 있었다는건 황당하고 어이없는 픽션의 정점입니다. 일단 케네디 암살의 이유는 그가 은본위의 새로운 화폐계혁을 단행하여 연준을 무력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케네디에게 알려준건? 히틀러입니다! 연준의 권력을 먹으려는게 계획인데, 연준에 괜한 위험을 가하고 그걸 또 스스로 이겨낸다? 이 쯤 되면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하는게 무의미해 보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암살이라는 무모한 계획은 리스크도 너무 크고요.

거기에 더해 무리수 설정도 너무 많습니다. 우선 옛 연인 에바 브라운, 그리고 그녀의 전생인 죠안나 이야기는 없으니만 못합니다. 사악한 카리스마만 희석될 뿐입니다. 등장하는 비중에 비하면 아무것도 하는게 없기도 하고요.
하기사, 죠안나 설정은 그나마 낫지 연쇄살인범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만든다는 설정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특수부대 출신 킬러들을 불러모아도 시원치않을판에 왠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UFC 파이터를 이길 수 있을까요? 게다가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는 방법은 한니발 렉터를 표절한 천재 교수의 설명되지도 않는 수학 공식이고, 그들을 자기 부하로 만드는 방법은 히틀러가 혈혈단신 찾아가 말로 설득하는게 전부니 더 말을 해 무얼하겠습니까.

이와 반대편에 서 있는 경찰 바우만의 집요한 추적도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고작해아 달라스 경찰서 형사인 그가 온갖 배후 정보에 손을 대 가면서 히틀러를 추적하는 과정부터가 설득력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히틀러라고 확신하고 쏴죽인 애덤이 사실 히틀러가 아니라 뇌수술을 받은 밀턴이라는걸 정작 조사를 시작한 지 몇일 되지도 않은 크리스틴이 밝혀낸다는 이야기도 당황스러워요. 바우만의 반평생은 대체 뭔가 싶거든요.
작위적인 전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케네디 암살 현장에서 모사드 요원이 바우만을 구해주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 정도 지켜봤으면 누가 흑막인지 당연히 알아채고 아담을 죽이거나 납치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총 한자루 전해주고 손을 터는건 영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히틀러는 살아있다는 극적인 진상이 귀신나방 이야기와 함께 드러나는 장면도 실소를 자아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껏 자신이 살아있는걸 아는 사람을 다 죽여놓고 퓰리처 상까지 수상한 여기자 크리스틴 앞에서 살아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떠난다? 그것도 직접 칵테일을 대접하는 등 있는대로 폼을 잡으면서?

이렇게 어디서 본듯한 설득력없는 설정, 전혀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계획들, 작위적인 수사, 개연성없는 전개라는 환장의 4종 셋트가 모인 망작으로 종이가 아까운 수준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가 희대의 망작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를 발표한지도 수 십년이 지났지만, 발전한 부분은 전무하네요. 앞으로 이 작가 작품을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12/04/27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 - 문국진 지음, 강창래 인터뷰어 : 별점 3점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 - 6점
문국진 지음, 강창래 인터뷰어/알마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이신 문국진 교수 인터뷰집. 사실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책은 처음 접해보네요. 그래서인지 큰 기대를 가지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왠걸! 서두에 인터뷰어 강창래 씨가 자신과 문국진 교수와의 인연을 말하며 언급하는 81년의 윤노파 살인사건부터 예상외의 재미를 가져다줘서 각 잡고 한 번에 읽게 되었습니다. 문국진 교수의 위치, 그리고 경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언급된 것인데 사건 자체도 굉장히 흥미로웠거든요. 이 부분에 등장하는 박원순 변호사의 "야만시대의 기록", 조갑제의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덧붙이자면 조갑제가 '변신'하기 이전에 쓴 책들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본격적인 인터뷰를 통해 문국진 박사가 어떻게, 왜 법의학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에서 시작해서 박사가 관련되었던 다양한 사건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함께 하나둘씩 펼쳐지는 본편도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만 몇 가지 뽑아보자면,

첫 번째는 "새튼이 무당" 사건. 새튼이라는 귀신과 대화한다고 주장하는 무당이 수사 대상이 되는데, "쏵~ 쏵~" 하는 이상한 소리가 정말로 났다고 합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그런 소리가 날 만한 장치가 없었는데, 우연히 보게 된 무당의 치아 구조가 특이했다고 하네요. 결국 알고 보니 특이한 앞니 틈새를 이용해서 소리를 낸 것이었다는데 희한하네요.

두 번째는 중년 부부의 성행위 도중 아내가 갑자기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사건. 박사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새튼이"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 영화 "용서는 없다"에도 언급되었다고 하네요. 이유는 남편이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는데, 아내가 페니실린 과민성 체질이라 페니실린 쇼크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도 놀랍지만, 이 사건을 클림트의 그림과 함께 엮어 설명하는 것도 아주 좋았어요.

세 번째는 일본 동북지방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Y양이 성폭행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진상은 그녀와 연적이었던 M양이 교살하고 다른 남자의 정액을 바르고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나 "완전범죄는 없다"라는 명제에 충실한 이야기라 인상적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여대생이 자기 하숙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 그녀의 연인인 의대생 출신 편집자 P군이 유력한 용의자. 그러나 사인이 될 만한 약물의 흔적도 없었고 단지 상·하지에 가벼운 압박 흔이 있는 정도. 결국 문초 끝에 밝혀진 진상은 수면제로 재운 뒤 상지·하지를 고무밴드로 묶었다가 푼 것이라고 합니다. 혈액순환 장애가 오래 지속되면 히스타민양 물질이 생겨 쇼크가 발생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죠.
'문초'라고 점잖게 묘사된 부분은 고문임을 짐작케 해서 수사 과정 자체는 별로지만, 의대생 출신의 의학을 이용한 난생 처음 보는 기발한 트릭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이야기 뒤로 이어지는, 문국진 교수가 은퇴 후 전념한 북 오톱시 관련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유명인의 사인을 이후 남겨진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분석한 뒤 정확하게 규명한다는 것인데,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사인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집니다. 비슷한 유형인 동서고금의 명화를 통하여 그림 주인공의 병을 설명하는 이야기들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라 예수님의 내장위역증에 대한 이야기나 밀레의 "괭이를 든 사람"은 전형적인 디스크 환자의 모양새라는 것 등의 새롭고 신기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이렇듯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하여 정신없이 다 읽었습니다. 법의학 사건집이 아닌 인터뷰이기 때문에 각 사건들이 단지 한 예로만 이야기될 뿐이라 전체적인 과정과 결말이 없는건 아쉬웠지만, 한 분야의 시조이자 거목인 분의 생각을 온전히 접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박사의 다양한 저작을 빨리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일단 "새튼이"와 "지상아"부터 찾아봐야겠네요.

2006/12/14

Prison Break Season 1 : 별점 3점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수가 되어 집행일자만 기다리는 형 링컨을 탈옥시키기 위해 마이클 스코필드는 완벽한 준비를 끝낸 뒤, 무장강도 사건을 일으키고 형이 있는 폭스리버 교도소에 수감된다...

탈옥은 그동안 참 많은 추리물에서 다루어 왔던 소재입니다. 어떻게 보면 완벽한 감시하에 있는 무엇인가를 훔쳐낸다는 소재와도 일맥상통하며 이러한 소재는 뤼뺑시리즈를 비롯해서 너무나 많은 작품에서 쓰이고 있죠. 탈옥만 똑 떨어트려 놓고 보더라도 사고기계 반 두젠 교수의 대표 단편인 "13호 독방의 문제" 등 고전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중엽까지의 감시체계는 아무래도 허술한 곳이 많아서 지금 보기에는 완성도도 좀 떨어져 보이고 뭔가 허술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편이었죠.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보다 완벽한 감시체계를 추구하며 교도소 자체가 첨단화 되어가기 때문에 탈옥이 점점 불가능해지면서 더욱 정교하고 세밀한 탈옥 트릭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아무래도 스케일이 크고 정교한 맛이 있어서인지 영상물에서 이러한 작품이 흔한데, 이번에 본 "Prison Break" 는 가장 최근 발표된 탈옥물 답게 고전적인 탈옥물의 정석에 충실하면서도 정교하고 스릴도 넘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이미 밖에서 완벽하게 모든 준비를 끝낸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장애물이 생길때 마다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마이클의 계획 자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자세하게, 관객에게도 어떻게 탈옥할 것인지에 대해 전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단계별로 보여줌으로써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TV 드라마의 장점이기도 하죠. 또 방영시간이 타 매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여러가지 준비와 장치들이 보다 디테일해진 점도 좋고요.
이렇듯 탈옥 자체만 놓고 본다면 탈옥물 최고 걸작인 "알카트라즈 탈출"에 맞먹는 재미를 선사할 정도로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습니다. 22편이나 되는 만큼 꽤 길긴 하지만 킬링타임용으로 즐길만한 재미는 충분했고 저도 1주일간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습니다. 첫번째는 별 생각없이 방영했다가 의외의 인기를 끌어서 연장 방영할 계획이 중간에 급히 수립된 듯한 분위기입니다. 탈옥을 한번 실패하는 거야 그렇다쳐도 불필요한 음모론을 집어넣어 쓸데없이 이야기를 부풀리는 것, 그리고 본편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곁다리 이야기를 질질 끈다던지 하는 것인데 장기 연재만화의 폐단 그대로입니다. 
두번째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형 링컨을 제외하고는 같이 탈옥에 가담하는 모든 죄수들이 전부 질나쁜 악질 범죄자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문제는 이야기가 너무 커지면서 희생자가 점점 늘어가는 것이고요. 첫번째 문제야 불필요한 부분은 대충 넘기면서 탈옥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면 해결할 수 있지만 두번째 문제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아동 연쇄 성폭행 살인마라던가 마피아 보스 같은 놈들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인간 말종들이거든요. 
마지막 세번째 문제점은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형을 위하는 부분의 정통성이 많이 희석되서 드라마가 약해지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차라리 형만 그냥 죽었으면 형의 전처와 전처의 남편, 증인들 등등등이 희생되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season 1만의 별점은 3점, 그런데 탈옥을 한 다음의 이야기인 시즌 2는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군요. 어차피 탈옥이야 당연히 성공할테고 결국 흔해빠진 음모론과 그 배후를 찾는 이야기, 그리고 숨겨진 돈을 찾는 이야기로 흘러갈텐데 이러한 부분은 별 관심 없거든요. 듣자하니 평도 좋지 않은데 대부분 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이야기겠죠? 아무래도 시즌 2는 제가 보기에는 방송사의 오판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도 탈옥물 자체로의 완성도는 상당히 뛰어난 만큼, 이쪽 쟝르를 선호하신다면 즐겁게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저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2011/07/04

사냥꾼의 밤 - 찰스 로턴 (1956) : 별점 2.5점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기꾼 전도사이며 결혼 사기꾼인 해리는 형무소에서 알게 된 사형수 벤이 은행에서 훔친 돈 1만 달러를 두 명의 아이들에게 맡겨 놓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리는 출소하자마자 아이들이 사는 마을에 나타나 벤의 아내로 과부가 된 윌라와 결혼했다. 그 뒤 그는 1만 달러를 숨겨 놓은 곳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데...

배우 출신 감독 찰스 로턴의 유일한 감독 작품인 고전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1956년도 작품임에도 20세기 초엽의 무성영화, 그중에서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영향을 짙게 느낄 수 있습니다. 로버트 미첨을 중심으로 한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와 세트 중심으로 촬영되었는데 세트의 구도가 기이하고, 조명 효과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요소가 너무 과합니다. 공들여 연출했지만, 이미지 위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강해요. 연기도 어색합니다. 로버트 미첨이 아무리 명배우라지만, 무성영화 스타일의 과장된 연기는 살리기 어려웠나 봅니다. 아이들을 상대로 한 추격전은 어설픈 슬랩스틱으로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이러한 연기와 장면에 깔리는 뻔하면서도 과한 음악도 관객을 지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1만 달러가 어디 숨겨져 있는지에 대한 서스펜스를 제대로 끌고 가지 못한 것이 이 영화 최대의 패착입니다. 중반부 펄이 돈을 꺼내 종이공작을 하는 장면에서 약간의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었을 뿐, 이후에는 완력과 우격다짐으로 숨겨진 장소를 알아내고 아이들을 끝없이 뒤쫓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뒤의 추격전도 별다른 요소 없이 단조롭게 전개되면서 스릴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로버트 미첨의 찬송가를 이용한 연출은 인상적이었으나, 스릴보다는 은근한 분위기 정도였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영화를 구닥다리 영화라고 평가절하하기는 어렵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은 이유도 분명합니다. 사이비 전도사로 양손의 문신을 이용하여 카인과 아벨을 연기하는 로버트 미첨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한 독특한 살인마 캐릭터로 길이 남을 만하니까요. 핸섬한 외모와 목소리는 그가 스무 명이 넘는 여자를 등쳐먹었다는 설정을 충분히 뒷받침 해 줍니다. 또 서스펜스 스릴러와 느와르, 아동 모험물 등 다양한 장르를 하나의 영화에 녹여 냈다는 점도 대단했습니다. 윌라의 사체가 낡은 포드 차에 태워진 채 물속에 잠겨 있는 등 인상적인 장면도 많았고요.

압도적인 포스를 내뿜던 악역이 점점 개그 캐릭터로 전락하며, 마지막에는 안쓰럽게 무너져서 황당했던 후반부만 좀 더 잘 다듬어졌더라면 걸작이 되었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