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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독서실력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지영 : 별점 3점

독서실력 - 6점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지영 옮김/생각의집

일본의 유명 장서가이자가 독서가, 서평가 오카자키 다케시의 독서 관련 에세이집입니다. 제목만 보면 책을 읽는 일종의 요령을 알려주나 싶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평상시 가지고 있는 독서에 대한 생각 중심의 에세이들을 모아 놓았을 뿐입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독서 실력은 별게 아닙니다. 요령이라는게 있을리도 없어요. 그냥 많이, 즐기면서 읽으면 느는게 당연하니까요. '읽을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전에는 몰랐던 것이 갑자기 보이기도 하고, 젊은 시절 읽고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 나이 들어 다시 읽었을 때 확 와닿기도하는 것'이지요.

원래 저자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책만 읽는 인생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맞게 쓰였다'라는 말머리부터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두에서 책 읽는 여자" 속 모드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멋있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독서 실력은 별거 아니다'라는 등 독서에 대한 저자의 여러가지 생각이 상당히 공감됩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린다면, 우선 "책은 효과가 서서히 나타난다. 책은 본디 불편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려면 집중해야 하는 장소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기타 등등 필요한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책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동의합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건 거짓말이다. 마음이 있다면 얼마간이라도 읽을 수 있다." 는 독서를 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주위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고, 책을 왜 읽는가? 라는 화두를 던지고 답하는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서 "즐기기 위해서"라는 말도 굉장히 와 닿습니다. 읽는 걸 즐기고, 더 알아가는 걸 즐기기 위해서인데 저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하거든요. 같은 이유로 자기개발서적은 즉효성을 기대하는 안일한 생각에 불과하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밖에 없어요. 

이러한 주장을 "즐기지 못하는 정신은 허약하다. 즐기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문화는 미숙하다. 시나 문학을 즐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얼마나 얕은 수준으로 현실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말로 마무리하는 것도 멋집니다. 

'베스트셀러가 존재하는 이유는 독서가 힘든 현대인들이 독서에 투자하는 시간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검증된 상품을 구입하는 행위 때문이다, 따라서 베스트셀러는 상품이며 화제일 뿐이다'는 "베스트셀러 論"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베스트셀러는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도 나중에 읽어서 재미있다는 베스트셀러 읽기 방법도 따라해보고는 싶네요. 재미와 가치를 떠나 책이 유행했던 당대의 트렌드와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좋은 방법이라는건 맞을테니까요. 80년대 일본 청춘 만화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겠지요.
마지막으로 만화를 읽는다고 타박하면 안된다는 것도 제 생각과 똑같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유도 같아요. 만화를 읽는 사람은 활자 책에도 손댈 가능성이 높고, 최소한 만화도 안 읽는 사람이 책을 읽을리는 없습니다.

이렇게 독서에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여러가지 자잘한 서평을 쓴다고 해서 책 추천을 받는건 난처하다는게 대표적인데 저 역시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 와 닿습니다. 최소한 자기가 보고 싶은게 어떤건지는 상세하게 알려줘야 그나마 추천이 가능하다는데, 맞는 말입니다! 저한테 "재미있는 추리 소설을 추천해 줘" 라고 물어본들 고전 본격물을 좋아하는지, 하드보일드를 좋아하는지, 현대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는지, 일본 쪽 작품이 취향인지 아니면 유럽 쪽 이야기가 취향인지 등 기본적인 정보는 알려줘야 좋은 추천이 가능하겠지요. 정말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읽어야 하는 걸작이라면 자신있게 추천하겠지만, 그런 작품은 적으니까요. 저자의 말대로 서평가는 책을 추천하는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독서에 대한 기묘한 발상들도 매력적입니다. 독서를 하면서 감정의 진폭으로 인해 가까이 가거나 멀어지는 것은 정신 쪽으로, 어떤 책이라도 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접해야 하고 감정의 진폭은 정신이 그 거리를 안배한다는 색다른 시각이 그러합니다. 책만이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체화 될 수 있다니 생각해 본 적도 없거든요. 독서가 걷기와 비슷하다는 발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을 처음 읽을 때 몰입 전 파장을 맞추기를 튜닝이라 표현한 것도 재미있었고, 서평가로서 서평 쓰는 요령도 짤막하게 실려있는데 이 역시 참고할 만 합니다. 저자는 800자 분량으로 그 책이 저자에게 어떤 책인지 평가하고, 줄거리, 읽을 만한 부분, 핵심 부분의 인용, 마무리 순으로 쓴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건 그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을 북돋아야 한다는데, 많이 반성이 됩니다.

언제나처럼 책 소개도 볼거리입니다. 대부분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소개된 책으로만 한정한다면, 우선은 자신의 학력에 자신이 없다면?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 (국내 출간명)이 있습니다. 자서전으로 배움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다는 내용이라는데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동화책 "코딱지"는 제 딸이 이런 책을 읽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긴 해서 아쉽게 패스하지만요.
국내 소개되지 않는 책 중에서는 이소다 가즈이치의 "소재 만다라, 책과 사투하는 사람들"은 정말 땡깁니다. 책에 미쳐 그야말로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데 제 꿈이기도 한 삶이라 어떨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저자의 말대로 소재는 성채고, 저는 작은 왕국의 국왕이 될 수 있죠. 한 때(1980년대?) 시대의 총아였다는 가타오카 요시오의 여러 작품들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옛 추억이 하나 떠올라 반가웠어요. 80년대 OVA 황금기에 발표되었던 "바비에 반해서"라는 애니메이션 원작이 가타오카 요시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꼭 한 명을 고른다면 선택한다는 작가 쇼노 준조의 작품들도 국내 소개된다면 한 권 정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독서가 취미인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공감되고 와 닿는 내용이 많기는 한데, 모든 내용에 공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버스 운전석 뒤에서 책을 읽는 게 최고로 좋다는 작가의 말입니다. 저는 멀미가 심해서 흉내도 못 내겠습니다.
저자가 일반 취미인 수준을 넘어선 광狂이라서 좀 무리한 주장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어요. 책을 쌓아놓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러하죠. 저도 마찬가지이긴하나 너무 과장하고 있어서 썩 공감이 가지는 않더군요. 순수하게 책을 읽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발상도 마찬가지고요. 재미야 있겠지만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독서인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같은 독서인 후배로서, 저자 만큼은 아니지만 저만의 독서 철학과 독서 세계를 언젠가는 정립하여 꾸며보고 싶은 욕심도 드네요.

덧붙이자면, 책의 맨 뒤는 저자의 추천 책 여러 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국내 정식 출간작은 기타무라 가오루의 "하늘을 나는 말" 밖에는 없네요. 소개된 작가도 별로 없고요. 일본 작가의 책이 대부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팔릴 일이 없을 책 관련 에세이 등이 많기는 하지만 조금은 아쉽군요. 그래도 검색하다 찾은 구시다 마고이치의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고전과의 대화"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합니다.

2011/10/01

조선의 베스트셀러 - 이민희 : 별점 3점

조선의 베스트셀러 - 6점
이민희 지음/프로네시스(웅진)

'세책'이라고 불렸던, 조선시대부터 일본 강점기 초기까지의 상업적 도서 유통 방식에 대한 책입니다. 영화 "음란서생"으로도 친숙한 바로 그 방식, 즉 인기 작품을 손으로 베껴 대여해 주던 시스템이지요. 

책은 세책의 역사와 독자층, 대여료와 대여 방식, 세책점의 위치, 인기 있었던 작품들까지, 세책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상세한 자료와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여 도서의 여백 등에 남겨진 낙서까지 분석할 정도로 깊이가 있습니다. 책의 두께에 비하면 도판도 충실한 편입니다. 학술서에 가까운 책이지만, 소재 자체가 흥미로운 데다 글도 딱딱하지 않고 편안한 문체로 쓰여 있어 쉽게 읽힙니다.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은 적절한 수준이고요.

다만, 후반부의 중국과 일본의 출판·서적 유통 관련 내용은 이 책의 방향과는 다소 맞지 않더군요.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홍루몽"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국내에서는 1800년 전후 이미 국문으로 번역된 시리즈가 384권이나 있었음에도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등의 정보는 당대 서적에 대한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지만, 책의 중심 주제와는 약간 동떨어진 느낌이었거든요. 차라리 우리나라 실학파 관련 자료에서 자주 언급되는 북경 서점가 '유리창'에 대한 정보가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적 가치와 읽는 재미를 적절히 만족시키는 훌륭한 책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관련 자료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영화 "음란서생"이 비교적 고증에 충실했지만, 실제 베스트셀러는 음란도서가 아니라 영웅소설 등이었다고 하네요. 핵심 소재가 픽션이었다는 뜻입니다...

2014/12/18

잭 리처 (2012) - 크리스터퍼 맥쿼리 : 별점 2점

도심 한복판에서 의문의 저격으로 5명의 무고한 시민이 살해당했다. 전직 군인 '제임스 바'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지만, 그는 자백을 거부한 채 ‘잭 리처를 데려오라’는 메모를 남겼다. 제임스 바는 호송 중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 빠졌고, 뒤이어 전직 군 수사관 출신이지만 실제 정체를 아는 이는 누구도 없는 의문의 남자 ‘잭 리처’가 나타났다. 리처는 제임스 바의 변호사 ‘헬렌’과 함께 사건 수사에 나서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영화만 찾아보게 되는군요. 이번에 본 영화는 개봉한 지 조금 된 영화 "잭 리처"입니다. 원작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명성이 자자한 슈퍼 베스트셀러이기에 관심이 가던 차에 영화부터 감상하게 되었네요.

이 영화는 여러모로 어제 리뷰했던 "툼스톤"과 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스릴러 장르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라는 점, 헐리우드 빅스타가 주연이라는 점, 주인공은 과거 전문가로 실력 있는 수사관이지만 현재는 명확한 직업이 없는 인물이라는 점 등이 거의 똑같거든요. 차이점이라면 이 작품이 "툼스톤"에 비해 더 헐리우드 액션 영화의 문법에 충실하다는 점이고요. 잭 리처도 정의감 넘치는 쿨가이라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 주인공의 전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리썰 웨폰"의 마틴 릭스 느낌이에요.

그러나 단순히 뻔한 헐리우드 양산형 액션 스릴러는 아닙니다. 베스트셀러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돋보이는 점도 있는데, 특히 주인공 잭 리처가 인상적이에요. 최고 실력의 군인이자 헌병 수사관 출신의 떠돌이라는 설정이 아주 괜찮았거든요. 운전면허와 자동차도 없이 버스로 떠돌아다니며 옷도 필요할 때마다 한 벌씩 사서 입고 버리는 식으로 진정한 무소유가 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사실상 잃을 게 없기에 당연히 겁날 것도 없다는건 확실히 와 닿았고요. 당연히 엘리트 군인으로서의 사격, 격투 실력과 수사관 출신다운 추리력도 괜찮았습니다. 이야기도 이러한 잭 리처의 캐릭터에 많은 부분 기대어 전개됩니다.

허나 잭 리처를 뺀다면 작품 자체는 기대 이하입니다. 전개가 즉흥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든 탓입니다. 중반부까지 중요한 실마리로 보였던 양아치들의 습격은 실제로는 잭 리처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 쓰였을 뿐, 정작 사건 해결은 멍청한 미행자들이 대놓고 회사 차로 미행하는 실수 때문에 드러나는 식이거든요. 어차피 이 시점에서 잭 리처는 범행 동기를 눈치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장치이기도 했고요. 이외에도 동네 깡패들의 습격,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자동차 추격씬 등 불필요한 장치, 요소는 넘쳐납니다. 
불필요했어도 잘 찍었더라면 눈요기라도 되었을 텐데 액션씬 모두가 최근 트렌드에 어울리지 않게 단조로워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클라이맥스에서 악당이 동원한 부하가 10명도 안 되는 스케일, 라이벌 격인 악당이 그다지 강하지 못한 상성 관계도 실망스러웠어요. 제작비가 6천만 불이나 된다는데 제작비를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네요. 톰 크루즈 출연료로 다 나갔나?

아울러 캐릭터도 낭비가 심합니다. 히로인인 변호사 헬렌이 대표적입니다. 헬렌은 잉여 캐릭터에 불과하거든요. 아버지와의 갈등 말고는 작중에서 하는 게 없습니다. 피해자들을 조사해보라는 잭 리처의 지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모든 힌트가 드러난 다음에야 배후를 파악할 정도로 실력도 없고요. 이 작품에서 그녀의 유일한 비중은 큰 가슴밖에는 없습니다. 차라리 중간에 죽어버리는 샌디가 매력이나 작중 비중이 더 높아 보이니 말 다했죠.

정리하자면 영화의 핵심은 1. 잭 리처가 변호사에게 사격장 조사를 요청 → 2. 사격장으로 찾아가 CCTV 및 증언 확보 → 3. FBI에 관련 증거 전달로 끝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재미는 없었겠죠. 그래서 필요했을 드라마틱한 전개와 액션은 크게 튀지 않게, 설득력 있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악당들이 잭 리처를 엮어 넣기 위해 샌디를 살해하고, 잭 리처가 샌디의 죽음에 분개한다는 과정과 변호사를 납치한 뒤 이어지는 공사장에서의 클라이맥스 액션 같은 식으로요. 앞서 이야기했던 불필요한 장면을 조금 덜어내고 핵심 내용과 이러한 영화적 전개를 잘 결합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지금의 결과물은 스릴러적인 요소와 액션이라는 요소 두 개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흥미로운 추리가 가미된 액션 스릴러물로는 괜찮을 수 있지만, 전개가 지루하고 최근 트렌드에 맞지 않는 단조로운 액션 장면 때문에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툼스톤" 쪽을 권해드립니다.

덧 1 : 중후한 노인으로 등장하는 로버트 듀발과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 보스 역의 베르너 헤어조크와 같은 왕년에 한가락한 인물들의 모습은 반가웠습니다.

덧 2 : 월드와이드 흥행 수익은 2억 불을 넘은 나름 성공작으로 후속작이 기획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톰 크루즈가 캐릭터를 잘 살린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작에서는 거구의 덩치여서 캐스팅 당시부터 말이 많았나 보네요. 개인적으로는 비주얼적으로도 더 압도적인, 안티 히어로에 어울리는 배우가 연기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후속작에서는 WWE 출신 스티브 오스틴을 추천해봅니다.

2010/01/13

나의 독서취향 테스트

독서 취향 테스트

테스트는 여기서 

그런대로 맞는 듯? 출판계의 패셔니스타라니 좀 창피하긴 하지만요...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책을 눈여겨 봐 둬야 겠네요.

출판계의 패셔니스타, "몬순" 독서 취향
남들이 잘 모르는, 특이한, 트렌디한 책 좋아함
특징없는, 따라하는, 똑똑한 척 하는 책 싫어함

남부 아시아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기후로, 약 한달 간 비가 거의 오지 않다가 갑자기 엄청난 양의 폭우가 지속되는 장마철을 가진다. "몬순(Monsoon)"이라는 단어는 원래 대기의 순환을 뜻하는 단어로, 거대한 에너지 이동을 의미한다. 열대 지방에서 생성된 에너지가 육지로 올라와 폭발적인 강우로 변하는 것.

변덕스러운, 왕성한, 주기적인. 몬순 기후의 이런 면들은 당신의 책 취향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장마철 폭우 같은 변덕쟁이:
무언가를 심하게 좋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장마철 지난 건기처럼 관심이 쫙 빠지는 경우가 많음. 유행을 타는 것일수도 있지만, 본인이 워낙 독창적이고 발랄하며 에너지 넘치는 4차원 취향이라 그럴 수도 있음.

시원한 포용력:
건방지거나 추하거나 기형적인 책에도 큰 반감을 갖지 않는 편. 뭔가 특이한, 열정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콘텐트를 선호함. 하지만 때때로 (예상과 달리) 남들이 다 좋아하는 베스트셀러에 반하는 경우도 있음.

유행의 '에너지'를 일으킴:
뭔가 항상 새롭고 희귀하고 독창적인 것을 찾는지라 남들이 잘 찾아보지 않는 '진흙 속의 보석' 같은 책을 먼저 알아보고 먼저 남들에게 소개하는 편.
당신 취향은 출판 업계의 개척자, 스카우터와 같은 존재라 할만합니다. 업계의 베스트셀러를 예고하고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주는 메신저와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당신의 취향에 어필할만한 작가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박민규
일단은, 이란 생각에 나는 그대로의 절차를 따랐다. 그대로의 절차라 함은 말 그대로 1. 문을 연다 2. 아버지를 넣는다 3. 문을 닫는다 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를 냉장고에 넣는 데 성공했다. 꽤나 시끄러울 줄 알았던 그날 밤은 의외로 조용했다. 혹시 얼었나 싶어 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는 독서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온도는 맞으세요? 라고 물으니 이 안에 좋은 책들이 많구나, 라며 딴청이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 카스테라 中

더글라스 애덤즈
보고인들은 원래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대인 관계의 기술이라는 게 고작해야 얘기를 하는 도중에 침을 뱉지 않으려고 애쓰는 정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말은, 제대로 된 서류 작업이 없이는 당신의 행성을 날려버리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나 서류 작업만 제대로 처리되면 우주 끝까지, 필요하다면 몇 개의 평행우주까지 여행해서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中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책도 땔감으로 삼았다. 종이는 불길이 오래 가진 않지만 아주 잘 탄다. 샤토브리앙이여 안녕! 괴테여 안녕! 아리스토텔레스, 릴케, 스티븐슨이여 안녕! 마르크스, 라포르그, 생시몽이여 안녕! 밀턴, 볼테르, 루소, 공고라, 그리고 세르반테스여 안녕! 존경 받는 내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예술이 필요보다 앞설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야 당신들은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 장작더미와 책을 쌓아 올리고, 석유를 끼얹고, 나중에 쓸 땔감으로 책들을 모아 묶음을 만들면서 나는 한 사람의 고독한 삶, 그러니까 내 생명이 모든 인류의 천재, 철학자, 문인들의 작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차가운 피부 中

2022/02/27

미스테리아 36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3점

미스테리아 36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출간되는 것 자체가 고마운 추리, 장르 문학 전문 계간지 미스테리아 36호입니다. 80년대 대중 문화에 대해 분석하는 특집 때문에 구입하였습니다. 

잡지 특성 상 '대중 문화'도 추리, 장르 문학을 기반으로 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인간시장"과 "어둠의 자식들"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80년대 추리문학계의 왕성한 움직임을 '영상화'를 통해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 시선을 잡아 끌었습니다. "추리극장"과 "베스트셀러 극장"이 많은 한국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영상화했다는 것도 새로왔지만, 뒤이어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무단으로 번안하여 영상화했다는 건 정말 처음 알았거든요. 심지어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을 그냥 무단으로 표절해서 방영했다니 놀랍습니다. 그 외에도"과다 지불한 중매 사례비", "안개의 깃발", "얼굴", "수사권 외의 조건", "목소리", "조난"까지 모두 일곱 편이 드라마화 되었는데, 이 중 제대로 원작을 알린건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제작했던 3편 뿐이라니 정말 무식한 시대였네요. 

그나마도 제대로 베끼지 못해서 사건이 시작되는 기본 설정 정도만 따 온 정도에 그쳤다는데, 예를 들어 "제로의 초점"의 핵심은 어려웠던 시기 몸을 팔았던 과거를 은폐하려 했던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무단 영상화 버젼에서는 이걸 그냥 '화류계에 몸 담았던 과거' 정도로 퉁치고, 남편을 위해 자살한다는 순애보로 바꾸었다니 이래서야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신파극일 뿐입니다. "수사권 외의 조건"도 핵심 소재였던 흘러간 유행가가 '그때 그 사람' 이라는건 와 닿는 변주였지만, 역시나 내용은 치정 멜로물이었다고 하고요. 이 책에서 소개된대로,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사회성'과 '역사성'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남는건 개개인의 사연과 이를 포장하는 한국식 신파 밖에는 없게 된 셈입니다. 이런 류의 번안은 생각도 못했는데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런 반쪽짜리 표절 드라마 이야기 다음에는, 영화를 통해 80년대를 설명하는 글이 이어지는데, 당대의 히트작이었던 "적도의 꽃"은 '아파트'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서울 무지개"는 외설, 에로 영화가 사회물로 포장될 수 있었던 여러가지 배경에 대한 설명이 상세해서 볼 만 했습니다.

80년대 일어나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우범곤 대량 살인 사건'에 대한 글도 좋았습니다.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커졌고,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와 그 후일담까지 모두 알 수 있었던 좋은 르포르타주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여진 사건과 실화 논픽션을 모아 출간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유리 겔러의 초능력 소동을 다룬 글도 빼 놓을 수 없네요. 왜 '초능력'이 인기를 끌었는지를, 10년 전 일본에서의 대 유행과 결합하여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고 있는 덕분이지만, 무엇보다도 저 역시 유리 겔러 쇼를 80년대 TV로 직관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당시 사회에 준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 수록된 기사들이 80년대 사회, 문화 현상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TV 드라마와 영화, 추리 소설 등 굉장히 지엽적인 부분의 분석에 그치고 있는 탓입니다. 그것도 드라마의 경우는, 좋은 부분이 아니라 나쁜 부분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딱히 가치있는 정보는 아니었고요. 제 기억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번안했던 "열 개의 제웅 인형"은 노래와 분위기 모두 굉장했던 수작이었는데, 이렇게 성공적이었던 번안물도 함께 소개해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대중 문화, 특히 추리, 장르 문학과 관련하여 80년대를 조망한다는 특집의 기획 의도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좋은 기사들이였습니다. 제 기대에도 역시나 충분히 부합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수록된 단편 3편에 대한 상세 리뷰는 아래에 따로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약점" 

지후는 친구 이하리와 함께, 떡볶이 집 주인 동생 서소하의 부탁으로 한 2학년 여학생을 찾아 나섰다. 부족한 소하의 인상착의 설명에도, 가방이 없었던 등의 디테일에 주목하여 조사한 끝에, 그 여학생이 박재이라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소하가 여학생을 찾은 이유, 그리고 박재이가 멀리 떨어진 식자재 마트 근처에 간 이유 등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는데...

여고생들이 탐문 수사와 추리를 통해 특정 학생을 찾아낸다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단편 부문 상을 수상했다는 작품과 이어지는 세계관이라는데, 딱히 특별한 설정이 사용되지는 않아서 읽는데 부담은 없었습니다. 지후가 박재이를 찾아내는 과정은 잘 짜여진 추리물로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지후와 새아버지, 새언니와의 관계 설정은 비중에 비하면 딱히 의미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 볼 때는 말이지요. 그리고 서소하의 부탁을 지후와 하리가 선뜻 받아들이는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식자재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어묵을 사려던 할아버지의 행동을 목격했을지 모를 여학생을 찾는다는 서소하의 동기 역시, 여학생을 찾기 전에 걱정했던대로 소문이 날 거였다면 이미 났을 거라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오히려 그 여학생인 박재이를 찾아내어 입막음을 부탁했다면,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을테고요. 또 박재이 입으로 식자재 마트에 간 이유를 털어놓는 결말도 좋은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웠어요. 박재이가 이혼하여 따로 사는 친아빠를 찾아가려 했다는 이유는, 작중에서 추리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어서 공정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았던 평작입니다. 연작 단편 중 한 편이라 따로 떼어놓고 읽으면 좀 애매했던 부분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네요. 시리즈 전체를 한 권에 모은 단편집이 출간되면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사라진 궁녀" 

조선 태종 시대의 궁궐을 무대로 한 괴담물입니다. 기승전결이 없고, 제대로 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야기를 시대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궐 내에서 사라진 궁녀가 어디로 갔을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승은을 입어서 다른 신분이 되었다'는건 상당히 기발했지만, 그렇다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 리 없다는 점에서는 문제입니다. 사라진 정의궁주의 궁녀 단지의 행방도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였고요. 단지가 승은을 입어 궁주가 되었다면, 그걸 궐내 궁녀들이 모른다는건 애초에 말이 안되겠지요. 효순 궁주가 병화어였다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편의 이야기로는 완결성도 없고 여러모로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괴담물로는 나쁘지 않지만, 별로 무섭지 않다는 문제도 큽니다.

"수전 데어의 첫 번째 사건" 

여류 추리 소설가 수전 데어는 친구 크리스타벨의 저택에서 조 브롬펠의 아내 미켈라가 크리스타벨의 동생 랜디를 유혹하는걸 목격했다. 미켈라는 크리스타벨과 결혼을 약속했었던 조 브롬펠을 꼬드겨 결혼했던 악녀였다. 그리고 그날 밤, 조 브롬펠이 살해당했고, 자수정 반지를 끼고 있던 크리스타벨이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범인의 손만 목격했다는 하인 마스가 범인이 '붉은 색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다고 증언했던 탓이었다.

발표 당시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맞먹는 인기를 누렸다는 미뇬 에버하트의 명탐정 수전 데어 시리즈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리즈 첫 작품이기도 하지요. '수전 데어 비긴즈'랄까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추리소설 황금기 단편답지 않게 '트릭'이라는게 등장하지도 않고, 동기는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정하지도 않고, 독자가 풀어낼 수수께끼도 별로 없다는 뜻이지요. 

범인 트라이언 웰스가 끼고 있던 반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등장하기는 합니다. 반지 보석 알렉산드라이트는 주광과 야광에서의 색깔이 달라서, 낮에 확인했을 때는 초록색이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건 범인의 의도도 아니었고,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또 이 정도로 극명하게 색깔이 바뀐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차라리 총을 쏠 때 불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어서, 그걸 반지로 착각했다면? 이라는 식으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랜디에게 빌려준 돈 대신, 크리스타벨의 저택을 압류하여 사업상 급한 불을 끌 생각이었던 트라이언 웰스의 동기도 그럴싸 하기는 했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를 계속 숨길 수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동기만 드러나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을테니, 잘 짜여진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추리 퀴즈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나마도 그렇게 흥미로운 퀴즈는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03/05/16

시간의 침묵 - 제임스 패터슨 : 별점 1점

시간의 침묵 - 2점
제임스 패터슨/우리시대사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패터슨의 '알렉스 크로스'형사 시리즈 1작. 

심리학 학위를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도 근사한 흑인경찰 알렉스와 영화배우의 딸을 유괴하고 몸값을 가로챈 천재 유괴범과의 한판 승부를 그리고 있는데, 소설보다는 전형적인 한편의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흑인이라는 것을 빼면 주인공 알렉스 크로스 형사는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캐릭터와 똑같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정신이상범죄자 역시 영화에서 친숙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없이 쉽게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흥행요소들을 차용했지만 작가가 그다지 뛰어난 스토리텔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범인은 억지스럽고 평면적이라 진부하기 짝이없고, 꽤 공들인듯한 극적 반전도 너무 터무니 없는 탓입니다. 도저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추리소설로는 많이 부족한, 싸구려 펄프 픽션 형사물입니다. 영화로 만들면 더 효과적일것 같기는 하고, 그래서인지 영화화가 되긴 했는데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된건지 이해하기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딱 한가지, 알렉스 크로스 형사가 책에서는 건장한 중년 흑인으로 나름대로 섹시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영화에서는 모건 프리먼이 주연이라서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를 어떻게 표현했을지가 약간 궁금하긴 합니다. 덴젤 워싱턴이 적역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어차피 안볼거지만...

2009/08/04

행복의 건축 - 알랭 드 보통 / 정영목 : 별점 3점

행복의 건축 - 6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이레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의 건축에 대한 책입니다.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전문적이고, 건축 전문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개인적 상념이 많이 담겨 있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책이겠죠.

저자가 건축가는 아니지만 건축에 대한 역사와 건축물 자체에 대한 지식이 굉장히 풍성할 뿐더러, 본인 스스로도 많은 여행을 통해 다양한 유명, 혹은 무명 건축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 놓은 것을 바탕으로하여 미려한 문장력으로 맛깔나게 개인의 건축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목차는
  1. 행복을 위한 건축
  2.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
  3. 말하는 건축
  4.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5. 건물의 미덕
  6. 들의 미래
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파트별로 이해를 돕게 해 주는 다양한 예시와 도판의 사용이 적절해서 읽기도 쉽고 재미를 더해줍니다. 이것 역시 저자의 방대한 지식, 그리고 뇌내 DB 덕분이겠죠.

개인적으로 특히나 재미있었던 부분은 거장으로 칭송받는 르 코르뷔지에의 현실감 없던 이상적 건축물에 대한 다양한 비판(?), 그리고 그 예시였습니다. 너무나 모던하게 설계하여 주인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외려 비가 새는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빌라 사부와" 이야기, 노동자들을 위해 극도의 단순함과 심플함으로 프뤼게 공장 주택 단지를 설계하였지만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똑같은 삭막한 환경에서 일했기에 이 주택단지에 그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일화, 그리고 이상으로만 가득찼던 파리를 위한 "부아쟁" 계획 같은 이야기들이 실려있는데, 저야 거장의 좋은 면만 바라보다가 이런 일화를 접하니 재미도 있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자가 르 코르뷔지에의 안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밖의 다른 이야기들도 전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요.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것이 확실히 허언은 아닌것 같아요. 이만큼 지식과 상념을 맛깔나게 섞어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부러운 재능이죠. 저도 추리 이야기를 잘 하고는 싶은데 이상하게 완성된 글은 제 생각과는 다르게 많이 흘러가거든요...

하지만 다 읽고 나서도 저는 제목이 의미하는 "행복의 건축"이 무엇인지는 솔직히 책을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아름다움과 본인의 철학과 주변과의 어울림과 다양한 상징이 제대로 사용된 그러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자같은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있는 제 입장에서는 꿈같은 일이기때문에 조금 화도 나고요. 앞으로 나이 들어 은퇴할 때가 되면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면서도 검소하고 소박한, 하지만 저의 꿈이 담긴 전원 주택을 하나 짓고 싶기도 한데 그때쯤은 이 책이 제대로 참고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별점은 3점. 재미있었어요.

2003/05/16

그녀에게 키스를 - 제임스 패터슨 : 별점 1점

그녀에게 키스를 - 2점
제임스 패터슨/우리문학사
자신을 '카사노바', "'젠틀맨'이라고 자칭하는 두명의 변태 성범죄자들과 납치당한 자신의 조카를 찾기위해 사건에 뛰어든 크로스형사와의 대결이 주요 줄거리인 작품.
작가의 전작 '시간의 침묵'에 이어 흑인 경찰 앨릭스 크로스를 주인공으로 한 전형적인 스릴러 형사물입니다. 영화화가 되어서 꽤 흥행하였기 때문에 나름 재미있나보다..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범죄묘사만 제외하고는 사건의 수사과정은 볼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고 사건 해결 또한 모조리 우연에 의지하고 있어서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제로에 가까워요. 반전이랍시고 준비해 놓은 범인의 정체도 너무 난데없어서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실망이 너무 큰 나머지 '키스더걸'이라는 모건프리먼 주연의 영화 역시 보기가 싫어지는군요.

싸구려 헐리우드 오락물에 불과한 펄프픽션, 그것이 이 책에 딱 맞는 수식어입니다. 이런 추리/스릴러 쟝르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그 시장환경은 놀랍고 부럽지만 책의 수준이 너무 낮아 한심할 뿐이네요. 우리나라 출판사도 '베스트셀러''영화화!'라는 수식어에만 목숨걸어 쓰레기같은 대중소설이나 출판하지 말고 과거의 명작들을 꾸준히 찾아 복간하고 출간하는 노력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2024/08/03

빅 픽처 - 더글라스 케네디 / 조동섭 : 별점 2점

빅 픽처 - 4점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밝은세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때 사진가를 꿈꿨지만, 월가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변호사로 살아가는 벤은 아내 베스가 이웃집 사진가 게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베스와의 결혼 생활이 끝장날 위기에 처하는 등,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게리를 살해하고 말았다. 벤은 범죄를 숨기기 위해 자기는 요트 사고로 죽은척 꾸몄다. 그리고 게리가 되어 머나먼 몬태나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몇 년 전 크게 성공했던 베스트셀러 범죄 스릴러 드라마. 벤이 요트 사고로 죽은척 위장한 뒤, 자신이 살해한 피해자 게리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는 중간 부분은 범죄물로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설명하고 안배함으로써 설득력도 높은 덕분입니다. 핵심인 요트에 설치한 수제 폭탄에 대한 설명은 대충이지만, 그 외 과정은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신분 위장물이라는 장르가 있다면, 그 장르를 대표할만하다 싶을 정도에요.

그러나 그 외 내용은 허술합니다. 특히 게리가 된 벤이 몬태나로 이주한 뒤 부터는 최악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사진가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는 과정은 모두 운과 우연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 전국구적 명성을 얻는것도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요. 얼마전 트럼프 암살 시도 당시 사진으로 유명해진 미국 사진가도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한 정도이지, 무슨 대단한 스타가 된건 아닙니다. 성공과 실패는 단지 운에 의해 좌우되며, 행복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걸 알려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억지스러웠어요.
유명해진 벤 앞에 전처 베스가 나타나고, 루디 워렌이 벤의 정체를 알아내서 협박을 하는 등의 후반부는 급하게 마무리지은 티가 물씬 납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루디가 벤으로 오인되었다는건 비현실적이고요. 작가 편의적인 결말입니다. 모든 부분에서 앞서 신분 위장에서의 치밀함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기 힘듭니다.

게리를 살해한 결정적 동기를 제외한 다른 부분도 공감하기 힘들었습니다. 무너진 결혼 생활부터가 말이 안돼요. 바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던 베스가 전업 주부가 되고 나서는 소설을 쓰지 않게된걸 벤 탓을 한다는 것 부터가 이상했습니다. 벤이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던 조언을 따른건 본인 선택이었으니까요. 작가의 길을 포기한 것도 역시 본인 선택이고요. 그런데 벤 탓을 하며 가정의 화목을 깨고 불륜까지 저지른 주제에 벤에게 적반하장식으로 이혼을 통보한다? 저는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이혼 통보 시점에 벤은 베스와 게리의 불륜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혼 소송에서 유리했을거에요. 그런데 벤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 역시 이해 안됐습니다. 심지어 벤은 변호사로 베스를 탈탈 털어서 끝장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차라리 벤이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조금 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2/04/22

숲 - 할런 코벤 / 최필원 : 별점 2.5점

숲 - 6점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폴 코플랜드는 얼마전 살해된 채 발견된 마놀로 산티아고가 20년 전, 캠프장 살인 사건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진 길 페레즈라는걸 알게 되었다. 당시 피해자 중 마고 그린과 더그 빌링엄의 시체는 발견되었었지만, 길 페레즈와 폴의 여동생 카밀 코플랜드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폴은 20년 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동생 카밀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사에 나서는데....

할런 코벤 작품은 처음 읽어봅니다. 전미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는 하지만, 제가 현대물보다는 고전 취향인 탓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격리 중 읽을 거리를 찾다가 드디어 읽어보았습니다.

이야기는 폴이 주도하는, 젊은 대학생 젠레트와 마란츠가 스트리퍼 샤미키를 강간한 사건 재판과 20년 전 있었던 숲에서의 여름 캠프 참가자 살해 사건이 겹쳐져 진행됩니다. 가해자 젠레트의 아버지가 사건을 무마하려고, 협박할 거리를 찾아서 폴의 과거를 뒤지기 위해 풀어놓은 탐정에게 길 페레즈가 접촉해서 정보를 전해준게 20년 전 사건의 재조사로 연결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드러내가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면서, 결국 이 모든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전개는 과연 베스트셀러 작가답더군요. 

20년 전 사건에 얽혀있는 주요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폴의 여동생 카밀이 살아있는지?
  2. 어떻게 폴이 루시와 밀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그 날 웨인 스튜벤스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3. 왜 폴의 아버지는 카밀을 찾기 위해 2년간 숲을 뒤지다가 포기했는지?
  4. 왜 폴의 어머니는 폴을 남겨 두고 홀로 집을 나갔는지?
  5. 페레즈 가족이 카밀이 살아있다고 했는데,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
  6. 길 페레즈의 부모는 왜 마놀로 산티아고가 자기 아들이라는걸 계속 숨기는지?
  7. 마놀로 산티아고는 누가 살해했는지?
이 수수께끼들은 폴의 수사와 일련의 증언들로 하나씩 풀리는데, 우선 카밀은 살아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카밀은 아니지요. 그리고 검시를 통해 유골은 출산했던 여성이고, 40~50대의 나이로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이 조건에 부합되는건 폴의 어머니고요. 즉, 폴의 아버지는 떠나려는 어머니를 죽여 매장한 뒤, 숲을 수색하는걸 포기했던 겁니다. 길 페레즈의 부모가 아들이 마놀로 산티아고라는 가명으로 살아왔다는걸 알면서도 부정했던건, 과거 캠프장 사건의 유족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이고요.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진상이 모두 이치에 맞고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거기에 더해 젠레트와 마란츠 강간 사건에서 변호사 플레어와 대결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과정은 한 편의 좋은 법정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젠레트와 마란츠가 '짐과 칼' 이라는 기묘한 가명을 댄 이유를 클럽하우스에서 빌렸던 DVD 목록을 뒤져서 찾아내고, 그 DVD를 법정에서 상영하는 장면은 아주 멋졌어요. 단순히 20년 전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한 동기로 사용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말이지요. 

카밀이 돌아오고, 젠레트와 마란츠 사건은 젠레트 아버지의 힘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20년 전 사건 당일 루시가 폴을 유혹했던 건 의도되었던 일이었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주인공 폴이 이런 류(법조인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의 스테레오 타입이라는건 다소 아쉬웠고, 몇몇 부분에서 눈에 뜨이는 헛점도 있습니다. 우선 마놀로 산티아고를 루시의 아버지이자 당시 캠프장 주인이었던 아이라가 살해했다는건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라가 나이를 많이 먹고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살해했다는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뒤이은 아이라가 폴을 살해하려는 과정은 더 억지스러웠고요. 

루시에게 젠레트의 아버지가 고용한 탐정사가 20년 전 사건에 대한 편지를 보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폴의 치부라고 생각했으면 공론화해서 폴을 검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게 맞습니다. 왜 아무 관계도 없는 루시에게 편지를 보낼까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동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길 페레즈의 부모가 마놀로 산티아고가 아들이 아님을 주장하는건, DNA 조사 앞에서는 무력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DNA 샘플을 얻는건 어렵지 않았을텐데 왜 조사를 하지 않는지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요. 심지어 폴은 검사인데 말이지요. 

폴의 작은 아버지같은 존재인 소시가 카밀이 살아있음을 폴에게 끝까지 숨긴 이유도 불분명해요. 길 페레즈의 부모는 살아있지만, 폴의 부모는 모두 죽은 마당에 보상금을 받았던 죄를 물을 수도 없잖아요. 폴의 아버지가 죽은 순간, 진실을 이야기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지나치게 곁가지 이야기가 많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폴의 아내가 일찍 죽고, 폴은 아내의 이름으로 처제 가족과 신탁 기금을 운용하지만 이를 처제 남편이 횡령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폴의 아버지는 KGB 출신이었고 자신의 장인, 장모를 고발해서 아내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는건 어머니 살해의 동기로 써먹기는해서 좀 낫긴 하지만 과하게 거창했던 느낌이고요. 등장하는 여성들이 거의 대부분 엄청난 미녀라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구태여 이런 설정들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흥행할만한 요소는 충분히 갖춘 범죄 스릴러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3/12/15

나무 - 베르나르 베르베르 : 별점 1.5점

나무 - 4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열린책들

몇개월간 국내 베스트셀러 정상을 차지했던 베르베르의 단편집입니다. 개인적으로 베르베르를 좋아하기도 하고 단편집을 좋아하기도 해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도 없어서 띄엄띄엄 읽게되어 완독하는데 무척 오래 걸렸네요. 저에겐 기대이하의 책이었습니다.
베르베르의 잡기장같은 아이디어 노트를 대충 구성하여 만들어 놓은 책이랄까요?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것들도 있었고 완성도 높은 이야기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쉽게쉽게 쓴 책 같습니다. 수준이하의 습작을 작품집으로 꾸며 놓은 결과물 인 것 같아요.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 1위를 하다니 국내에 베르베르 팬이 많긴 많은가 봅니다. 저는 실망스러웠어요. 뫼비우스의 그림은 좋았습니다만.....

2023/05/25

에도가와 란포상 베스트 10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미스터리로의 초대장 - 柳町正蔵

일본의 주간지 MONO에서 연재되는 柳町正蔵의 미스터리 관련 칼럼인 '미스터리 캐스킷 (ミステリー・キャスケット)' 지난 과월호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주제가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번역이지만, 모쪼록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매년 여름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는 9월 중순, 「에도가와 란포상」수상작이 서점에 진열된다 (올해는 제반 사정으로 9월 말이었다). 내 생일 가까운 날짜인 탓에, 발표와 동시에 일찌감치 수상작을 사서 읽는건 매년 개인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만약 그 해 작품이 별로라면 그 해 전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하다. 
올해로 제66회를 헤아리는 이 상은 1954년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했으며, 3회부터 신작 장편소설을 모집해서 최종 후보 4, 5편 중 베테랑 작가 5명이 선정한 최고 작품에 상을 수여한다는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일반 모집 형태라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사람도 응모할 수 있으므로, 특정 해에는 고급스러운 작품이 많이 응모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신인 추리작가의 등용문적 성격이 강하다. 주요 수상작가로는 니시무라 쿄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쿠리모토 카오루, 히가시노 게이고, 이케이도 준 등 당대의 빅네임이 줄을 잇는다. 야마무라 미사와 나츠키 시즈코는 몇 번이나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나카이 히데오의 대표작 「허무에의 제물」도 수상을 놓쳤을 정도이다. 지금은 예전만큼 주목도가 높지는 않지만 수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건 분명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미스터리계 최고의 어워드 중 하나이다.
그럼 여기서 2020년까지의 수상작 총 71편 중 (1957년~2020년. 수상작 없음이 4회. 2편 수상이 11회)  완전히 개인적인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을 선정해본다.

「란포상 수상작 베스트 10」
  • 제10위 「고양이는 알고 있다」니키 에츠코 (제3회/1957년). 쇼와 30년 당시, 추리 소설 팬을 10배로 불렸다는 일본의 크리스티의 라이트 미스터리.
  • 제9위 「천사의 나이프」야쿠마루 가쿠 (제51회/2005년). 예선부터 최종 심사까지 거의 일사천리로 수상한, 소년법 본연의 자세를 묻는 사회파 문제작.
  • 제8위 「어둠 속에 풍기는 거짓말」시모무라 아츠시 (제60회 / 2014년). 시력을 잃은 남자가 친형 출생의 비밀을 쫓는 서스펜스. 10년에 한 번 있는 걸작이라는 평판.
  • 제7위「암갈색 파스텔」오카지마 후타리 (제28회/1982년). 2인조 작가의 경마 미스터리. 아마추어 여성 탐정 콤비의 활약이 신선!
  • 제6위 「샤라쿠 살인 사건」타카하시 카쓰히코 (제29회/1983년). 수수께끼에 싸인 전설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의 정체를 밝히는 와중에, 학계에 소용돌이치는 권력과 욕망을 그리다.
  • 제5위 「거대한 환영」 도가와 마사코(제8회/1962년). 남자 엄금의 아파트에서 전개되는 인간군상. 란포상 사상 최고 걸작으로 불리는 스릴러.
  • 제4위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고미네 하지메 (19회/1973년).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작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어두우면서도 경쾌한 청춘 추리물의 금자탑.
  • 제3위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4회/1995년). 일본인 감성의 하드보일드. 주인공 바텐더가 만드는 핫도그가 맛있을 것 같다.
  • 제2위「13계단」타카노 카즈아키 (제44회 / 2001년).  가석방중인 청년과 고독한 교도관이 사형수의 누명 벗기기에 도전하다. 긴박한 타임 리미트가 존재.
  • 제1위「사루마루 환시행」이자와 모토히코 (제26회/1980년) 현대의 대학생이 젊은 날의 오리구치 노부오와 함께 펼쳐나가는 SF+역사+암호가 뒤섞인 전기 미스테리.
'사루마루 환시행'은 그 시마다 쇼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긴 수상이라는 훈장도 받았다.
일본 추리 작가 협회의 사이트에는 심사위원의 선정평이 실려 있어, 선택된 포인트를 잘 알 수 있다 (단 스포 주의). 선정평이 매서운 것은 매번 있는 일로, 특히 낙선작에는 "추리소설로 통하지 않는다.", "설명이 너무 서툴다." "응모자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 등 재기불능이 될 것 같은 신랄한 코멘트가 많다. 수상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과의 궁합도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2018/11/23

맥파이 살인 사건 - 앤서니 호로비츠 / 이은선 : 별점 3점

맥파이 살인 사건 - 6점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고 없는 조용한 마을 색스비온에이번에서 대저택 파이 홀의 가정부 메리 블래키스턴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추도식을 맡은 목사, 음흉한 앤티크 숍 주인, 고인과 갈등을 겪은 아들, 시신을 발견한 관리인 등 등장인물들의 미심쩍은 행동과 죽음을 둘러싼 소문들이 밀도 있게 흘렀고, 이후 파이 홀의 주인인 매그너스 파이마저 기이한 죽음을 맞았다. 소식을 접한 탐정 아티쿠스 퓐트는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는데... 라는 내용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 최신작 "맥파이 살인 사건" 원고를 읽던 담당 편집자 수전 라일랜드는 소설의 결말이 누락된 것을 알아챘다.
원고를 전해 준 출판사 사장 찰스로부터 작가 앨런 콘웨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전은, 사라진 원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앨런의 자택과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앨런 콘웨이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작 중 최고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중 하나인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맥파이 살인 사건"과, 이 책의 출판을 담당하는 클로버리프 북스의 소설팀 팀장 수전 라일랜드가 저자인 앨런 콘웨이 사망 사건에 얽힌 진상을 추적하는 두 개의 소설이 함께 수록된 작품입니다.
본 이야기 속에 하나 이상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인 액자 소설이라기보다는 "맥파이 살인 사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완성된 추리 소설로 수전 라일랜드 이야기의 동기로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보통 액자 소설은 본편 주인공에게 소설 내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 작품에서의 "맥파이 살인 사건"은 강력한 동기 외에는 딱히 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인기 시리즈로 베스트셀러가 확실한 작품인데다가 수전 라일랜드부터가 굉장한 추리소설 매니아라서 안 찾고는 못 배겼을 거라는, 굉장히 확실한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은 높습니다. 

문제는 "맥파이 살인 사건"이 앨런 콘웨이 사건에서 큰 단서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앨런 콘웨이가 추리 소설을 싫어하고 증오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만 사용될 뿐입니다. 딱히 대단한 단서나 트릭이 숨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도구로의 사용도 대부분 앨런 콘웨이의 장난에 불과해서 크게 와 닿지 않고요. 오히려 "맥파이 살인 사건" 이라는 추리 소설 자체만으로의 완성도가 높은 수준이라 이렇게 사용되는게 아깝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1955년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크리스티 여사님으로 대표되는 당대 본격 추리물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였거든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모든 등장 인물들이 동기가 있고 수상하다는 전개도 본격물스러우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도 무척이나 합리적이며 범인의 동기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전 라일랜드의 활약을 그린 본 편도 흥미롭습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딱히 대단한 능력은 없는 출판사 직원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대치를 뽑아내는 전개도 좋으며 ,본격물답게 엄청나게 많은 용의자가 엄청나게 많은 수상한 점을 드러내지만 이 모든게 마지막에 제대로 밝혀지는 결말까지는 아주 완벽했어요.

하지만 범인이 드러난 직후부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일단 범인이 찰스였다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게 밝혀지는 이유가 잠깐 스쳐지나간 해고된 비서와의 대화에서 비롯된다는건 우연에 기댄 작위적인 전개일 뿐 아니라, 찰스의 행동이 너무나 허술해서 황당할 정도에요. 앨런 콘웨이을 사전에 만났고, 이미 완성된 원고를 전달받았다는걸 수전이 아는 순간 모든게 끝나 버리잖아요? 마지막에 수전을 죽일 생각이 들었다면 비서부터 죽였어야지요.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낮습니다. 앨런 콘웨이가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를 완벽한 조롱거리로 끝장내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의 계획과 인터뷰는 책을 화제로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작품 자체의 수준도 높은 만큼, 판매에 지장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아요. TV 시리즈야 물 건너 갈 수도 있겠지만 판매량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한다면 영상화 판권을 소유한 업체가 쉽게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즉, 수전 라일랜드가 처음에 찰스를 의심하다가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리 없다'고 생각을 접은게 타당한 추리입니다. 수전만큼의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을 찰스가 보였다면 그나마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래서야 현실성이 없죠.
아울러 앨런 콘웨이가 시리즈 제목을 활용하여 '애너그램' 이라는 말을 만들어 안배한게 고작 '아티쿠스 퓐트의 이름을 풀어서 해석하면 욕이다'라는 핵심 동기는 물론, 앨런이 추리 소설을 우습게 보았다는 각종 설정(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하철 역 이름이나 만년필 회사 등으로 대충 지은 것)도 딱히 이상하다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고 그것을 조롱하고자 했더라면 좀 더 거대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출판계 동료들이 수전을 배신자라 생각하여 등을 돌렸다는 후일담도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앨런 콘웨이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해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더라도,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엄연한 범죄인데 배신자는 무슨 배신자입니까... 마지막 수전이 그리스로 옮겨가는 에필로그는 솔직히 완전한 사족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두 편의 완성도 높은 추리 소설을 한 권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굉장하지만 위의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욕심이 좀 지나쳤달까요? 차라리 "맥파이 살인 사건" 만으로 출간되었더라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부분이 많고, 현대에 전통 본격물을 제대로 복원한 공 만큼은 인정합니다. 추리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3/01/02

그림자 없는 범인 (일본 추리소설 단편집) - 사카구치 안고 외 : 별점 2점

그림자 없는 범인 - 일본 추리소설 단편집 - 4점
사카구치 안고 외/유페이퍼

장르문학 전자책 전문 독립 출판이라는 미증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페가나 북스의 책. 현재까지 페가나 북스 출간작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 (페가나 북스 자료 참조)라고 합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난, 총 5편의 퍼블릭 도메인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불연속 살인사건"의 사카구치 안고, "도구라 마구라"의 유메노 큐사쿠,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사오 주란, "연애곡선"의 코사카이 후보쿠, "혈액형 살인사건"의 코가 사부로로 구성된 저자 목록은 꽤 화려한 편이라 할 수 있죠.

상세하게 소개하자면, 첫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사카구치 안고의 "그림자 없는 범인"은 마에야마 이사쿠라는 재산가의 죽음 뒤 벌어진, 이해관계자들의 좌충우돌 군상극입니다. 그런데 누가 진범인지도 드러나지 않는 등, 사건만 있고 추리의 과정이 없어서 추리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좀 더 과장되게 묘사했더라면 시대를 앞서간 괜찮은 블랙코미디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범죄소설도 아니고 풍자소설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인 유메노 큐사쿠의 "S곳 교살사건 서양부인"은 기이한 상황에서 벌어진 문신녀 마리 부인 살인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나가는 내용으로, 그로테스크한 범행 현장, 종잡을 수 없는 증언, 명탐정 이누타 박사의 등장 등 고전 정통파 분위기를 한껏 내 주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밝혀진 진상이 영 아니라는 점과, 추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비현실적이면서도 대충대충 넘어가는 요소가 너무 많다는 점이죠. 예를 들면 문신은 설득력 없는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도구일 뿐이고(비밀 정보를 숨기기 위한 문신이라는 설정이 과연 말이 될까요? 어떤 멍청한 정보원이 핵심 증거를 몸에다 새긴답니까?), 수수께끼의 핵심인 토사쿠 노인의 증언—보름달을 보았다—은 단지 각성 상태에서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 등이 있겠습니다. 이런 점을 전부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세 번째 작품인 히사오 주란의 "곤충도"는 변격물 분위기의 초단편 호러 판타지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오싹한 맛을 전해주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외에는 너무 짧아서 별로 이야기할 건 없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코사카이 후보쿠의 "바보의 독"은 정통 추리 단편으로, 잘 짜여진 설정과 복선에 의외의 반전까지 등장하는 통쾌한 소품입니다. 오쿠다 부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을 놓고 부인의 아들인 켄키치, 야스이치에게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게 전개하다가, 부인 죽음의 진상과 야마모토 의사의 살의를 밝혀내는 결말이 아주 깔끔하거든요. 야마모토 의사가 켄키치의 연적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밝히는 것이 약간 반칙 같기는 하나, 그 외에는 완벽한 좋은 의학 미스터리물입니다.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 작품은 코가 사부로의 "호박 파이프"로, 이전에 읽었던 "혈액형 살인사건"에도 수록된 작품입니다. 작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합니다. 별점은 역시나 2점.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쳤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사카이 후보쿠의 "바보의 독" 한 편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되기에 초창기 일본 추리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네요.

물론 단편 5편(그중 1편은 초단편) 수록된, 일반 책으로 친다면 문고판 100여 페이지짜리 전자책 가격이 2,000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긴 하나, 최소한 저는 돈은 아깝지 않았습니다. 우려했었던 번역 문제도 크지 않았으니 만족합니다.

덧붙여 페가나 북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 첫 번째로 출판사명으로 책들이 검색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알라딘에서는 유페이퍼가 출판사로 잡혀 있어서 검색이 안되더군요. 두 번째로는 네이버북스에서도 구입할 수 있었으면 하고요.

마지막으로, 국내 장르문학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페가나 북스의 도전이 성공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퐈이팅~!

2005/09/02

저격자 (The Bourne Identity) - 로버트 러들럼 / 김명렬 : 별점 4점

지중해의 노아섬에 한 환자가 실려왔다. 영국인 알콜중독 의사 조프리 워시번은 그를 성심껏 수술, 치료하여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그는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이며 유일한 단서는 그의 몸 안에서 발견된 필름에 적힌 스위스 은행 구좌 번호 뿐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스위스로 향한 그는 은행에서 500만불이라는 거액에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제이슨 보언이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곧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인물들과 차례로 만나 숱한 위험을 거쳤고, 그 와중에 마리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뒤이어 보언은 생명을 노리는 자가 국제적인 암살 전문가 "카를로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서히 기억도 돌아왔지만 혼란에 빠졌다. 암살과 파괴에 대한 기억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보언은 자신의 과거를 되찾고 500만불을 입금한 트레드스톤71이라는 조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카를로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본 아이덴티티"의 원작 소설입니다. 로버트 러들럼의 책은 처음 읽어보네요. 

제이슨 보언에 관련된 모든 설정과 계획이 복잡하면서도 여러가지로 꼬여있고, 전개면에서 치밀해서 지루함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제이슨 보언의 진짜 정체입니다. 상당한 반전의 묘미를 주는 덕분입니다. 그러고보니 "무간도"와 약간 비슷하기도 하네요.
결말에 이르기까지 상황을 밝혀나가는 전개도 설득력있고 교묘해서 시종일관 땀을 쥐게 해 주고요. 그만큼 트레드스톤과 카를로스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여러 상황들이 디테일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번역으로 "인의" 출판사라는 곳에서 발간된 책으로 읽었는데 오류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문체가 지나칠 정도로 딱딱하다는 점입니다. 내용 몰입에 방해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 거슬렸어요.

그래도 로버트 러들럼이라는 작가가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지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후속작을 암시하는 듯한 끝맺음 역시 "팔리는" 작가다운 마무리라 생각되는데 영화가 계속 히트치고 있는만큼 국내에도 시리즈가 계속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덧붙이자면, 영화 말고도 아주 오래전에 TV에서 리처드 챔벌레인이 나오는 미니시리즈를 본 기억이 나는데 영화보다는 TV 쪽이 훨씬 원작에 충실합니다. 영화는 초반 은행을 찾아갈 때 까지만 비슷하고 이후는 각색이 엄청 심하거든요. TV 미니시리즈가 영화보다야 시간이 긴 만큼 (기억에 2부작으로 합쳐서 4시간 정도?) 복잡도 높은 원작을 구현하는데 더 적합한건 당연하죠. 그래도 영화도 원작에 조금이나마 더 가깝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은 너무나 단순한 액션 영화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2009/05/17

꼬리 아홉 고양이 - 엘러리 퀸 / 문영호 : 별점 3점

꼬리 아홉 고양이 - 6점
엘러리 퀸 지음, 문영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엘러리 퀸의 1949년 작 장편. 국명 시리즈나 라이츠빌 시리즈같은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는 조금은 독특한 작품입니다. 정통 고전파 퍼즐 트릭물의 거장으로서의 엘러리 퀸의 모습보다는, 헐리우드 스릴러에 가까운 모습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제임스 페터슨이나 마이클 코넬리 같은 후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선구자적인 모습이 엿보인달까요? 대도시 뉴욕을 무대로 벌어지는 무차별 연쇄살인극을 그리고 있는 점이라던가, 이 연쇄살인에 어떤 트릭이 있다기 보다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특정하게끔 하는 일종의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 사건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점 등이 그런 느낌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이런 작품에서는 특히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이 범인을 밝혀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 부분을 상당히 공들여 잘 표현하고 있기에 중간부분까지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색다른 공통점이라 생각되며 맹점을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설정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좀 오래된 탓인지,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제일 큰 아쉬움은 피해자들에게서 찾아낸 공통점이 너무 한가운데 직구라 그때부터 범인이 특정화되면서, 마무리까지는 지루해진다는 점이었죠. 가장 마지막 부분에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사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추리적으로는 무가치한 수준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범인의 동기 부분이었습니다. "정신병"으로 몰아가는 것은 21세기에 읽기에는 너무 뻔했거든요. 쉬운 설정이고 작품에도 어울리긴 했지만, 진부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 헐리우드 스릴러물에 가깝기 때문에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저같은 독자에게는 기대에 갚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겠죠.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에는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추리의 과정에 독자가 동참할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실망도 좀 컸고요. 물론 어설픈 트릭과 트릭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무너지는 억지스러운 작품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만 제가 "엘러리 퀸"이라는 작가에게 기대한 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독자에게 도전" 하던 정통 퍼즐러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연쇄살인범 "고양이"와 엘러리 퀸의 대결을 통해 엘러리 퀸의 색다른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싸이코 연쇄살인극의 선구자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쉬움도 있지만 별점은 3점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2020/05/30

콜드 문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2.5점

콜드 문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뉴욕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 시계, 기묘한 시와 함께 자신을 '시계공'이라고 서명한 범인을 찾기 위해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가 나섰다. 한편 색스는 이 사건 외에도 자살로 위장한 사업가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경찰 118번 지구대가 범행에 연루되어 있다는게 드러났으나, 당장은 내사과 투입이 어려워 부시장 월러스와 경정 매릴린 플레허티의 합의로 색스 혼자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이었다.

전신마비 법의학자 링컨 라임과 그의 수족인 여성 경찰 아멜리아 색스 컴비의 활약이 그려지는 제프리 디버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서 해외편 6위에 당당하게 위치해 있는 탓에, 평소 궁금하게 여기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흡입력, 재미입니다. 거의 550여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인데 쉽게 읽힙니다. 시계공 던컨의 범죄 행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유행했던 "싸이코 연쇄 살인마와 천재 경찰의 대결"을 비튼 아이디어도 좋아요. 반전도 괜찮으며, 철저한 증거 위주의 수사로 수집한 증거를 통해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그것들이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마음에 듭니다.
새 캐릭터인 동작학 전문가 캐스린 댄스의 심문 과정에 대한 묘사도 그럴듯합니다. 거의 인간 거짓말 탐지기 수준으로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럴듯하게 묘사되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다른 링컨 라임 주변인물 묘사도 시트콤스러운게 유쾌했고요. 아멜리아 색스가 아버지의 추문, 경찰에 대한 신뢰 추락이라는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결말도 전형적이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잘 되고 나쁜 사람은 파멸하는 이야기가 감정이입이 잘 되더라고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에서 지난 30년간 작품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만하냐면,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다음 단계로의 진행은 모두 주요 관계자의 증언에 따를 뿐입니다. 빈센트 체포 후 빈센트의 증언으로 다음 피해자 대상이 좁혀지고, 이는 베이커의 작전이었지만 베이커 체포 후 던컨 본인도 체포되어 연쇄 살인극이 아니라는게 그의 입으로 밝혀지고, 던컨이 풀려난 뒤 그의 다음 목표가 델파이 메커니즘이라는 것도 빈센트와 이전 시계점 증언으로 밝혀지는 식이거든요. 이래서야 링컨 라임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솔직히 링컨 라임이 없어도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지나친 반전과 어처구니없는 진상도 문제입니다. 초, 중반까지는 연쇄 살인극을 꾸미는 시계공 던컨과 조수격인 성범죄자 빈센트가 몇 명의 여성 희생자를 집요하게 노리는 묘사가 이어지죠. 그러나 빈센트는 그냥 미끼였고, 던컨의 진짜 목표는 118번 수사대 비리와 연류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로 색스를 연쇄 살인범의 범행으로 위장해서 죽인다는 반전, 베이커 뒤에 흑막으로 부시장 월러스가 있었다는 반전, 시계공 던컨의 진짜 목적은 세슘 시계를 조작해서 이전부터 탐낸걸로 묘사된 '델파이 메커니즘'을 훔치려는 것, 인줄 알았지만 진짜 중의 진짜는 뉴욕 도시 개발 공사에서 뉴욕시와 국방부 등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사람을 다량으로 살상하는 테러였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반전이 너무 많다보니 가면 갈 수록 흥미가 떨어지더군요. 9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반전물' 들을 보고, "내가 진짜 반전이 뭔지 보여주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쓴 느낌인데, 지나쳤어요. 과유불급이랄까요....

게다가 '시계공의 목적은 무차별 대량 살상 테러였다!' 라는 진상도 너무 별로입니다. 작 중에서는 사람은 죽이지 않고, 이전에 사람을 죽였다고 언급헸던 범행의 대상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안티 히어로 모습을 보여주던 천재 범죄자 시계공이 왜 무작위로 사람을 살상하는 테러를 선뜻 받아들이는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계공의 캐릭터도 이상해져 버렸고요.
마지막 범행, 즉 테러를 위해 연쇄 살인 시도를 가장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역시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입니다. 자물쇠를 따고 숨어드는게 쉽다면, 루시 릭터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을 때 집에 침입해서 필요한 서류를 찍어가지고 오면 되는거잖아요? 꽃가게 조앤의 화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구태여 엄청난 숫자의 뉴욕 경찰이 동원될만한 살인극을 가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인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시계공의 범행이 가짜이고 해프닝에 불과했다는걸 구태여 드러낼 이유는 없어요. 테러를 위해서라면 그냥 연쇄살인극을 위장하는게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요? 구태여 아는 사람을 늘릴 이유도 없고, 베이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짜 동기 등 시계공의 모든게 가짜라는게 드러나는 것도 시간 문제인데 말이지요.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여 아멜리아 색스를 연쇄 살인범에 의한 것으로 가장하여 살해하려는 의도였다고 중간에 설명되지만, 이는 시계공이 베이커의 범행은 실패하게끔 총을 조작했다는 이야기 전개를 보면 역시나 합리적이지 않아요. 차라리 링컨 라임과의 대결을 위해 도전한다는걸 보다 명확하게 표현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습니다만, 비리 경찰 베이커와 아멜리아 색스의 아버지 이야기를 빼고 350~400 페이지 정도로 이야기를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15/12/20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수십 년 전, 80년대 초반 고민 상담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빈집이 된 지 오래인 나미야 잡화점에 3인조 빈집털이들이 숨어들었다. 그런데 잡화점에 고민 상담을 위한 편지가 들어왔다. 상담에 응하게 된 3인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재의 나미야 잡화점이 1980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일상계 판타지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5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로 알고 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 재미있더군요. 3인조 어설픈 빈집털이범들이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잡화점에서 고민 상담글을 받은 뒤, 그 공간이 30여 년 전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이야기부터 눈길을 사로잡아 마지막 이야기까지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읽어버렸습니다.

사실 특정 공간이 시공을 초월해 연결된다는 아이디어는 그동안 많이 있어 왔습니다. 편지만 시간을 넘어 전달된다는 설정도 영화 "시월애"와 똑같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5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이 거의 모두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 고민 상담과 아동 복지시설 "환광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독특한 구성으로 차별화됩니다.

상담이 중심인 작품답게 상담 과정의 디테일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특히 상담이 일종의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의뢰인이 상담 결과에 따르던, 따르지 않던 모두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는 점도 와 닿았습니다. 상담은 참고일 뿐, 답은 결국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아울러 80년대 배경의 이야기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음악 등 세부 묘사는 아련하면서도 추억을 불러일으켰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3인조 얼치기 범죄자들이 1장, 2장, 5장에 걸쳐 주요 상담자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얄팍한 상담글들이라 감동이나 깊이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상담이 성공하는 것도 애초에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능했을 뿐이고요 — 일본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다, 가쓰로는 사고로 죽지만 명곡을 남긴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80년대에 시작되어 90년대 초에 끝난다 등 —. 이래서야 제대로 된 상담이라고 보기 어렵지요.

이에 반해 4장에서의 나미야 할아버지의 직접 상담은 따뜻한 애정과 진지한 고민이 묻어나 확실히 비교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4장의 이야기만큼은 별점 5점을 줘도 될 만큼 마음에 들었어요. 상담에 따르지 않고 부모를 떠난 고스케가 나미야 잡화점 부활의 날에 동네를 방문한 뒤 우연히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 뒤 감사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비틀즈와 영화 "Let It Be"와 엮어 풀어내는 솜씨 또한 너무나 탁월했습니다. 70~80년대 감성에 더해진 감정을 건드리는 디테일한 묘사는 흡사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하더군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새롭지만은 않은 설정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변주하고 새롭게 풀어낸 솜씨는 탁월하며,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잘 팔리는 작품은 역시 이유가 있네요. 가슴 따뜻해질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이야기별 간략한 요약 및 연결고리는 아래에 설명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제1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얼치기 빈집털이 3인조는 잠시 숨어지내기 위해 찾아든 빈집 "나미야 잡화점"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달토끼"라는 닉네임의 의뢰인의 상담글을 받은 뒤, 나미야 잡화점이 뒤틀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에 응하게 됩니다.

의뢰인의 고민은 암에 걸린 연인을 간호할 것인가, 아니면 둘의 꿈이었던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노력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본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보이콧)을 알기에 연인 옆에 있기를 강조하는 3인조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의뢰인 달토끼는 꿈을 위해 노력하고 결과를 받아들인 뒤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결말 이어집니다. 

이야기의 시작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무엇보다 3인조의 답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결심을 굳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지만(올림픽 선수 선발 탈락과 연인의 죽음), 오히려 스스로 더욱 값진 것을 얻었기에 감사한다는 달토끼의 말이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3인조가 아닌 가수 지망생 가쓰로(생선 가게 예술가) 시점의 이야기. 그의 고민은 가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는 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명제에 어울리는 이야기랄까요. 뭔가 세상에 남겼다면 그 자체가 의미있는 삶이었다는, 약간은 고전적 사고방식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뭔가를 남긴다는 자각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더 클 것 같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긴 했습니다만, 뭐 이런 삶도 있는 것이겠죠.

참고로 작품 전체의 관계도로 보자면, 1장의 3인조가 환광원 출신인데 2장의 가쓰로가 작곡한 노래가 환광원 출신 유명 가수 세리가 부른 노래의 오리지널이고, 가쓰로는 환광원 화재 당시 숨을 거둡니다. 이러한 사실을 3인조는 환광원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기에 음악을 듣기 전에는 현실적이고 신랄하게 답변하지만(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듣고 난 후에는 전력으로 상담에 응하지요.

제3장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

나미야 할아버지와 아들 다카유키의 이야기로 나미야 할아버지는 자신이 상담한 미혼모의 사고사를 접하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 나미야 잡화점이 시공을 초월해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상담한 사람들에게 감사 편지를 받는데, 그 중 미혼모가 낳은 아이의 편지를 통해 안식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인격이 묻어나는 좋은 이야기. 잔잔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 중 가장 시공 이동을 잘 활용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 관계도로는 여기서 나미야 할아버지가 백지 편지에 대한 상담글을 쓰는데 이 백지 편지는 5장에서 3인조가 시험삼아 넣은 편지입니다. 미혼모가 낳은 아이는 환광원 출신으로 2장에 등장하는 유명가수 세리의 친구이자 현재는 그녀의 매니저고요.

제4장 묵도는 비틀스로

비틀즈 매니아 폴 레논 고스케가 야반도주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

앞서 말씀드렸듯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오사카 만박이 열리고 비틀즈가 해체한 1970년대를 무대로 하여 비틀즈 매니아인 주인공 고스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배경 묘사도 좋지만 고스케(폴 레논)의 고민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글이 정말로 심금을 울립니다. 저 역시 아이 하나를 키우는 가장이기에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멋진 날이 되리라.' 맞아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 가족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배에 타고 계속 항해해 나가야죠.

관계도로 보자면, 고스케가 위탁된 보육시설은 당연히 환광원이며, 환광원 화재 사건때 5장의 주인공 하루미를 만나게 됩니다.

제5장 하늘 위에서 기도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환광원 출신의 하루미가 성공하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3인조의 예언으로 큰 돈을 벌게 되지요.

그런데 3인조의 성장, 백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변 - 백지이기에 모든 것은 너 마음먹기에 달렸다 - 은 너무 뻔해서 좀 지루합니다.

그래도 하루미와 3인조가 결국 엮이고, 3인조가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대단원까지 깔끔하게 이어지는건 괜찮더군요.

관계도로는 하루미는 1장의 상담자 시즈코의 이웃사촌이자 3인조 강도행각의 피해자입니다. 또 환광원의 설립자와 나미야 할아버지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연결고리가 밝혀지며, 3장에서 쓴 나미야 할아버지의 백지 편지 답변을 3인조가 받게 됩니다.

2022/08/14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마이클 코넬리 / 조영학 : 별점 2점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물 변호사 미키 할러는 운 좋게 거물 부동산 업자 루이스가 한 여성을 잔인하게 폭행했다는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미키 할러는 루이스가 무죄라는걸 확신하여 변호에 임했지만, 어느 순간 루이스가 유죄일 뿐 아니라 과거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루이스에 의해 조사원 라울이 살해당했고 유력한 증거마저 빼앗겼을 뿐 아니라, 라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루이스는 이런 미키 할러를 협박하여 자신의 변호에 힘을 쏟게 만드는데....


마이클 코넬리의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엄청난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입니다. 매튜 매커너히 주연의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었고요. 작가가 생각했던 멋진 트릭과 설정을 아낌없이 쏟아붓기 때문에 시리즈의 경우는 첫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경우가 많기도 하고, 이전에 읽었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 대한 기억도 좋아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완독했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일단 미키 할러 캐릭터부터가 별로에요. 정의로운 변호사와 악덕 변호사 사이의 애매한 무언가로 그려져 있거든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미키 할러는 의뢰인들이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만드는데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는걸로 묘사됩니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고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으로, 나 역시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지 않는다" 면서요. 이 과정에서 "돈이 없으면 죄를 짓지 말라"며 엄청난 돈 욕심도 부립니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의뢰를 받아들일 때 그가 무죄임을 확신하고 변론에 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던대로 법의 헛점을 찾아내어 의뢰인을 빼내면 그만이지요.
같은 이유로 루이스가 연쇄 살인범이고, 미키 할러가 과거 사법 거래를 유도해 징역을 선고받게 만든 지저스 사건의 진범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저스는 돈이 없었고, 루이스는 돈이 많으니까요. 피고만 풀려나게 해 주고 돈만 벌면 되지요.
게다가 앞서 여러 명의 마약 사범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하는데에는 일말의 주저도,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으면서 루이스에 대해서만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도 앞 뒤가 맞지 않았어요. 이를 미키의 부친 말을 인용하면서 '무고한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식으로 포장하고는 있는데 이 정도로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물론 루이스가 라울을 살해했기 때문에 복수심을 갖는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는 미키 할러가 불필요한 정의감을 불태워 루이스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즉, 주객이 전도된 상황인 것이지요.
그 외 다른 캐릭터들도 별로인건 마찬가지입니다. 변태 연쇄 살인마 루이스에 대한 설정이라던가 미키 할러와 전처이자 검사 매기와의 관계 등도 진부했습니다. 특히나 루이스의 경우는, 다른 작품들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왔던 두뇌파 연쇄 살인마들과 흡사했을 뿐더러, 다소 뜬금없이 살인마라는게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설득력있게 그려냈어야 했습니다.

이야기도 작위적인 전개가 많아서 잘 짜여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차리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옛 의뢰인 지저스 사건의 피해자 마사 렌테리아와 루이스 사건의 피해자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는걸 알아채고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확신합니다. 허나 두 피해자가 그렇게 닮았다는 것 부터가 비상식적이고 작위적이에요. 루이스가 미키 할러의 총을 훔쳐 라울을 살해할 때 사용했다는건 작위적인 설정의 끝판왕 격입니다. 총은 루이스가 미키를 옭아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만약 미키 할러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루이스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미키 할러를 협박할 생각이었을까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치밀하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법정에서 밀고자의 입을 빌어 루이스가 과거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정도인데, 그 밀고자의 증언이 허술하다는건 이미 법정에서 미키 할러 자신이 증명해 버립니다. 경찰이 이 증언으로 보강 수사를 벌일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유력한 용의자였던 지저스가 사법 거래를 통해 이미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걸 자백해버렸는데, 경찰이 다시 수사에 나설만큼 한가할리도 없고, 심지어 담당 형사는 미키 할러를 미워하기까지 하는데 왜 다시 수사를 벌일까요?
루이스의 범죄 행각도 왜 진작에 체포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대충이었습니다. 루이스는 CCTV에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히 피해자를 찾아가거든요.

그나마 전자 발찌로 모든 행적이 추적당하는 루이스가 어떻게 라울을 살해했는지? 에 대한 트릭은 하나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루이스의 어머니가 대신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지요. 상당히 설득력이 높을 뿐더러, 라울이 죽기 전 손가락으로 남긴 다이잉 메시지 - W, 즉 여자가 범인이다! 라는 것 - 와 연결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들이 더 많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영상화가 되었으니, 소설보다는 영상화된 버젼을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2024/08/07

키스 더 걸 (1997) - 게리 플레더 : 별점 1.5점

알렉스 크로스의 조카 나오미가 납치되었다. 범인은 젊고 아름다우며 능력있는 여성들을 연달아 납치하는 '카사노바'였다. 알렉스 크로스는 '카사노바'를 잡기 위해 관할이 아닌 노스캐롤라나 더램으로 향해 수사팀에 합류했다. '카사노바'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한 여의사 케이트의 도움이 수사에 큰 힘이 되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본 1997년도 영화. 제임스 패터슨의 알렉스 크로스 시리즈 중 한 편을 영화하였습니다. 원작 소설은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군요. 리뷰도 올리지 않았고요. 그래서 처음 보는 작품처럼 볼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의 제임스 패터슨 작품이 그러하듯, 전형적인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입니다. "양들의 침묵" 이후 대 유행했던 천재 연쇄 살인마와 수사관의 대결이 뻔하게 펼쳐집니다.
그래도 몇 가지 차이점을 두어 변주를 꽤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범인 '카사노바'가 연쇄 '살인마'는 아니고, 사랑을 갈구하여 여성을 납치하는 연쇄 '납치마'라는 점입니다. 이게 꽤 중요합니다. 납치한 여성들을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경찰이 알아내지 못해서, 알렉스 크로스를 비롯한 경찰이 용의자를 추격할 때 쉽게 총격을 가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혹여 죽기라도 하면, 납치된 여성들이 굶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두 번째는 서부(LA)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쇄 살인마 '젠틀맨'과 '카사노바'는 동일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명이라는 진상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헐겁습니다. 알렉스 크로스가 FBI에게 알리지 않고 케이트와 루돌프 검거에 나서 그를 놓친다던가, '카사노바'의 은신처에 대한 단서를 얻은 뒤 둘이서만 찾아나서는 것처럼 알렉스 크로스와 케이트 컴비의 비중을 높이기 위한 비합리적인 전개도 많습니다. 루돌프가 범인이라는걸 케이트가 확신한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루돌프는 범인의 지인이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카사노바가 은신처를 손에 넣은 방법도 모르겠고요.
'카사노바'가 생각보다 별로 뛰어난 범죄자가 아니며(증거를 계속 남김), 하는 짓도 뻔하기 그지없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덕분에 대결 구도는 초반부를 지나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합니다. 액션이 별볼일없는데 두뇌 싸움도 없으니, 영화가 재미가 있을리가 없지요.
경찰이 '카사노바'였다는 반전도 지금 보기에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범죄도시 3"에서도 써먹을 정도로 널리 퍼진 설정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앞서 별다른 비중도 없던 인물이 갑자기 범인이라고 등장하는건 뜬금없었습니다.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합리성을 결여한 결과랄까요.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모건 프리먼은 알렉스 크로스와 별로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포르쉐를 타고다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의사이자 형사인 인물에는 좀 더 섹시(?)한 배우가 나았을 겁니다. 애슐리 쥬드가 연기한 케이트와의 관계 설정을 위해서도요. 영화에서는 거의 부녀 관계처럼 보이더라고요.

건질 장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알렉스 크로스가 케이트에게 투여된 약물의 출처를 조사하여 LA의 의사 루돌프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는 장면, 마지막에 경찰 서명과 카사노바 서명을 비교하여 정체를 알아채는 장면은 추리적으로 볼만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역시 저는 제임스 패터슨과는 안 맞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