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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초록 캡슐의 수수께끼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3점

초록 캡슐의 수수께끼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시골마을 소드버리 크로스에서 독이 든 초콜릿에 의한 독살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해결을 돕기 위해 런던 경찰청의 엘리엇 형사가 수사에 합류했지만, 엘리엇이 도착하자마자 마을의 유지 마커스 체스니가 가족, 친지가 보는 앞에서 독살당했다. 마커스는 스스로 독살 사건의 증명을 위한 퍼포먼스를 벌였었다. 퍼포먼스로 빚어진 주요 용의자들의 확고한 알리바이 등으로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엘리엇은 기디온 펠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존 딕슨 카의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장편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된 작품입니다.

다른 존 딕슨 카의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소품 같은 느낌을 주며, 별다른 역사나 전설, 괴담과 연결되지 않는 점이 특징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피해자인 마커스 체스니가 스스로 '퍼포먼스'를 벌인다는 설정이고요. 이 퍼포먼스는 추리물의 맹점이라 할 수 있는 '가치 없는 증언'이라는 요소를 이용해 이중 삼중으로 꾸며진 일종의 추리쇼이며,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서 목격자들이 서로 다른 증언을 하는 등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퍼포먼스 추리쇼는 작품의 핵심 트릭이기도 합니다. 퍼포먼스와 이어지는 질문-답변을 통해 심리학자 잉그람 교수가 보여주는 진지한 두뇌게임 역시 볼거리 중 하나이고요.

기디온 펠 박사를 통해 작가가 독살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독살범이 감수해야 할 세 가지 위험 요소—독살은 독을 넣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을 넣을 기회와 동기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며, 독을 입수하는 과정에서 걸리지 않아야 한다—를 설명하는 부분은 현학적인 재미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도망가기 어려운 것이 독살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존 딕슨 카의 작품답지는 않더군요. 완벽한 추리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거든요. 피해자가 주관한 퍼포먼스가 우연히도 범인의 혐의를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설정이라 하더라도, 범인이 소드버리 크로스에서 무차별 독살 사건을 벌인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범인의 진짜 목적은 마커스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불필요한 사건을 벌여 마을에 수사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설정입니다.

또한, 윌버를 가격하여 뇌진탕을 일으킨 부분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윌버가 죽지 않았다면 모든 진상을 고백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범인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며 계획이 치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로 촬영한 필름 트릭은 억지스러운 요소가 강합니다. 낮과 밤의 구분이 그렇게까지 모호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리허설과 실제 퍼포먼스가 완벽하게 동일했을 것이라는 전제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주요 목격자가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트릭이 성공했다는 점은 지나치게 운에 의존한 설정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용의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작가의 솜씨는 여전히 훌륭하며, 뻔한 상황을 노련하게 극복하는 전개 역시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단점을 나열했지만, 공정한 두뇌게임이라는 본격 추리소설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작품이며, 정통 퍼즐 미스터리로서의 추리적 수준 역시 높은 편입니다. 다만, 작가의 명성을 고려했을 때 지나치게 작위적인 요소가 많기는 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존 딕슨 카 작품 완독을 목표로 이 책을 읽었는데, 드디어 완독했다고 생각했더니 신작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이 또 출간되었네요. 이 작품은 언제 읽어야 할까요...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2022/11/19

나의 차가운 일상 - 와카타케 나나미 / 권영주 : 별점 1.5점

나의 차가운 일상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는 우연히 알게된 지인 이치노세 다에코가 자살 시도 후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낼 약속을 했기에 나나미는 그녀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걸 믿지 않았고, 누군가 다에코가 쓴 '수기'를 나나미에게 보낸 뒤 나나미는 다에코 사건을 혼자서 파헤치기 시작했다. '수기'는 다에코가 친구 도모요가 식물인간이 된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회사를 옮겨가며 조사에 나섰고, 어렸을 때 부터 독살을 반복해 왔던 범인 세누마 도루가 누구인지 찾아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범인인줄 알았던 세누마 도루는 다에코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게 드러났고, 나나미 앞에서 세누마 도루마저 살해당하는데....


와카타케 나나미의 데뷰작이었던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의 후속 장편. 작가와 이름이 똑같은 '와카타케 나나미'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일상계 단편, 그리고 단편이 모여 하나의 큰 사건을 이야기하는 연작 구성이었던 반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장편에 가깝습니다. 지인의 사고에서 촉발된 조사가 거대한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방아쇠가 되고, 결국 비참한(?) 결말로 이어지는 내용이니까요.
전작은 꽤 성공적으로 국내 시장에 소개되었으며, 재판까지 이루어졌던 반면 후속작은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읽고나니 왜 소개가 늦어지고 그 존재도 알 수 없었는지 알겠더군요.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고, 여러 사건들 - 세누마 도루가 벌인 독살 사건들, 이치노세 다에코 자살 미수 사건, 세누마 도루 살인 사건 - 이 모두 따로 놀고 있어서 내용도 정리되지 않은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와카타케 나나미가 수사에 나선 계기가 된 다에코 자살 미수 사건과 세누마 도루가 독살범임을 밝혀내는 다에코의 수기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누마 도루를 살해한 것도 다에코 사건과 무관하게 가족이 저지른 범행이고요. 다른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들이 파생되는게 아니라, 그냥 우연찮게 전혀 다른 사건들이 한 인물 주변에서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런 우연이 한 번에 겹친다는 것, 그리고 자살 시도와 불합리한 죽음이 너무 많다는건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각 사건들의 세부 요소들도 제대로 짜여져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치노세 다에코의 '수기'가 좋은 예입니다. 이치노세 다에코가 세누마 도루의 수기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에요. 세누마 도루가 누나 이시하라 사와코에게 주었던걸 사무실에서 우연히 입수하여 복사를 했다는데 말도 안돼요. 사와코는 분신 자살을 선택하여 동생과 수기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했을 정도인데 수기를 그렇게 허술하게 놔 두었다? 그럴리 없지요, 애초에 연쇄 독살범이 버젓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자기 범행을 고백하는 수기를 남긴 것 부터가 말이 안되고요.

다에코 자살 미수 사고를 일으킨 이가라시의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다에코를 놓치기 싫어서 그랬다는데, 그와 다에코의 관계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불러올 정도였는지 독자는 알 수가 없거든요. 단순히 '놓치기 싫었다'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지나치게 치밀한 범행이라는 인상도 지우기 힘듭니다.
이가라시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추리만으로 자백한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자백도 결국 '다에코가 자살했다'는거라 허무했습니다. 결국 와카타케 나나미의 진상 조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거잖아요. 자살 동기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세누마 도루 살인 사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누나 이시하라 사와코는 동생이 연쇄 독살범이라는걸 수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동생의 범행으로 가족이 고통받을까 두려웠다면, 수기를 입수한 뒤 바로 죽였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범행이 계속되어 체포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구태여 한참 기다렸다가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마침 도루가 와카타케 나나미와 만나고 있던 그 시점에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사와코가 도루를 죽였다는 증거가, 와카타케 나나미가 담배를 피우는걸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라는건 비약이 심했습니다. 흡연자는 담배를 피우는걸 보지 않아도 냄새로 알 수 있으니까요.

캐릭터들도 별로였습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와카타케 나나미는 불행과 사고를 불러온다는 점에서는 하무라 아키라와 비슷한데, 시종일관 진지하고 어두워서 호감가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짜증만 유발하는 다른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성격들이 괴퍅하고 모가 나 있는 탓에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대표적인건 세누마 도루입니다. 정신병자이기도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심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이상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나마 밀실이었던 다에코의 방에서 가스가 누출되었던게 아니라, 그 전 노래방에서 가스 호스를 다에코 입에 직접 물려 가스를 흡입하게 하고, 술에 취한 것 처럼 위장해서 집으로 옮겼던 이가라시의 범행 정도만 괜찮았어요. 그리고 동행들과 집의 가스를 단속한 뒤 문을 잠겄던 겁니다. 나중에 이동할 때 가스 냄새가 나는 향수를 조합하여 뿌린 뒤, 그 때 집에 들어가서 가스를 누출시켰고요. 가스를 언제 흡입했는지는 밝혀내기 힘들고, 순전히 냄새로만 판단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괜찮은 트릭이었다 생각되네요.

하지만 이 트릭 외에는 말씀드렸듯 건질게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의 후속작이라고는 하지만, 제목 외에는 관련성을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완성도, 재미, 수준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으로 작가의 팬이 아니리시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2016/05/10

퀸 수사국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퀸 수사국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엘러리 퀸 단편집. 1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3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이라서, 이야기의 깊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1. 사건이 발생한다. 2. 유일한 단서로 OOO이 있다. 3. 용의자들 중 범인은 누구인가?' 로 구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엘러리 퀸이 쓴 "추리 퀴즈" 모음집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트릭이나 수수께끼의 수준이 굉장히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역시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어권"에서만 적절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일종의 말장난같은 트릭이 많은 탓입니다. "협박 부서 돈이 말한다", "희귀 서적 부서 괴상한 학장", "자살 부서 명예의 문제", "보물찾기 부서 구두쇠의 황금", "다잉메시지 부서 GI 이야기"의 다섯 편 트릭 모두 말장난입니다. "담합 부서 대리인들의 문제"는 특정 지식 전문성에 기반한 트릭이라 평범한 독자가 해독하기 어렵고요. "허위 주장 부서 타임 스퀘어의 마녀"는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형편없는 쓰레기라서 작가 명성에 누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아서, 동기와 용의자가 명백하여 범행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트릭만 믿고 범행을 저지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 역시 비현실적입니다. 훨씬 설득력있는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이 작품들이 '추리 퀴즈'가 아닌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면요.

물론 전부 폄하하기 어렵긴 합니다. 아래 작품별 리뷰에서 상세하게 설명드리겠지만, 엘러리 퀸의 명성에 걸맞는, 정통 본격물 황금기의 고급진 트릭을 사용한 작품도 있기는 하거든요. 저같은 정통파 고전 본격물의 팬에게는 번역되어 출간된 것 만으로도 아주 반가운 일이고요.

그러나 괜찮은 작품은 절반 정도에 그치며, 괜찮은 작품도 트릭을 활용한 '추리 퀴즈' 수준이라서 한 편의 "작품"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더해 별점은 2점입니다만,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각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꼭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협박 부서 돈이 말한다

촉망받는 오페라 가수 루치아를 협박하는 협박범의 정체는?
답은 중고 서점 직원 아널드였다. 루치아 출생의 비밀에 대한 협박인데, 비밀은 미국에서는 일언반구 꺼낸 적도 없으므로 영국에서 알려졌을 터였다. 즉 범인은 영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아널드는 고향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영국식 단어를 말해서 들통나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따지면 고향을 속여왔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경성탐정록"의 "운수 좋은 날"처럼 해당 언어권 독자가 아니면 풀 수 없는 트릭이라는 점입니다. 한국 독자로서 딱히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담합 부서 대리인들의 문제

엄청난 돈이 걸린 권투 시합의 도전자가 유괴된다. 범인들의 요구사항은 10만 달러. 그리고 돈을 전달하는 대리인으로 엘러리 퀸이 임명된다. 범인들의 대리인은 유명한 스포츠 기자 잭맨이었다.
돈을 건네주는 자리에서 엘러리는 범인이 기자를 가장했다는걸 눈치채고 그를 제압했다. 스포츠 기자라면 모를리 없는 권투 시합에 대한 잘못된 설명을 떠벌였기 때문이었다(오서독스 스타일의 권투 선수는 라이트 훅으로 치명타를 날릴 수 없다).

일종의 말실수로 꼬투리를 잡는다는 내용인데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엘러리가 권투에 이렇게까지 빠삭한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유괴범 중 한명이 배신했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독특한 소재 (권투 시합과 유괴) 외에는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불가능 범죄 부서 세 과부

새어머니의 유산을 노리는 두 자매는 그녀를 독살할 계획을 세웠다. 새어머니는 첫 번째 독살 기도 실패 이후 철저하게 조심하던 중이었는데, 결국 독살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녀를 독살할 수 있었을까?
답은 자매 중 한명이 새어머니의 주치의를 유혹한 뒤, 진찰 시 입에 넣는 체온계에 독을 바른 것!

오래전 "세계의 명탐정 50인 (이후 44인)"에서 접했던 트릭입니다. 트릭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빛을 발할만한 멋집니다. 문제는 동기가 명확하고 용의자가 뻔해서 트릭만 믿고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추리 퀴즈를 위한 이야기랄까요.

그래도 평균 이상의 트릭이 사용된 것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희귀 서적 부서 괴상한 학장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뉴욕 대학교 인문학부 학장 매슈 아널드 호프 교수는 엘러리의 하버드 시절 은사로 두음 전환을 하는 말버릇이 있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의 관계를 증명하는 중요한 서적을 1만달러에 구입할 약속을 한 후, 안전을 위해 엘러리와 아버지 퀸 경감이 거래에 입회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도착한 현장에서 엘러리는 쓰러진 교수를 발견했다. 교수는 "고먼"이라는 말만 남기고 기절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처음에는 영문학교 교수 오즈월드 고먼으로 의심되었으나 교수의 두음 전환 버릇을 반영하여 엘러리는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냈다. 진범은 바로 영문학 강사 "모건"이었다.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명확한 트릭이라 풀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추리 퀴즈라면 초심자용이랄까요? 솔직히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에요. 범행도 굉장히 허술합니다. 교수의 두음 전환은 차치하고라도 범인을 잡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아 보였습니다. 솔직히 추리적인 면보다는 셰익스피어 관련한 도서 거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살인 부서 운전석

세명의 브라더스 형제는 형수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다. 형수가 자신들을 알거지로 만들 권한을 소유했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동기가 있는 탓이었다. 그런데 범행 당일 세명 모두 자신들의 차(캐딜락, 롤스로이스, 쉐보레)를 타고 형수를 방문했기 때문에, 세 명 중 누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제비뽑기로 범인을 정한 뒤, 제비를 뽑은 사람을 다른 두 형제가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유일한 단서는 오른쪽 소매 끝자락이 푹 젖은 레인코트 뿐이었다. 범인은 누구일까?
오른쪽 소매만 젖은 이유는 비오는 날 팔로 수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며, 수신호를 오른쪽으로 보낸 이유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던 것. 즉, 영국 차 롤스로이스의 주인이 범인이다.

트릭과 단서가 뭐건 차종을 통해 범인이 드러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세 대 중 한 대만 영국차니까요. 이 경우 쓸만한 소재는 운전대 위치일게 뻔하고요.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수신호'를 선택했는데 시대를 느끼게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동기가 되는 주식 지분에 대한 이야기 등 세세한 재미도 있고요. 

허나 레인코트의 물기가 왜 마르지 않았는지, 레인코트가 범인의 것이 확실한지 등 세세한 부분에서의 설명이 부족한 건 문제입니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공원 순찰 부서 각설탕

기마 순찰 경관 윌킨스는 세익스 쿠니의 시체를 발견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그에게서 협박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상원의원 크레그, 금융업자 밀라드, 정치가 스티븐스 3명이었다. 유일한 단서는 셰익스 쿠니가 죽기 전 움켜쥔 것으로 보이는 각설탕 한 개라는 다이잉 메시지 뿐이었다. "설탕"을 "돈"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세 명 모두 부자이며 승마에는 문외한이라는 공톰점이 있었다. 그 외에는 사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설탕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최초 엘러리의 추리는 "당뇨"에 걸린 사람이 아닐까 였지만 세명 모두 당뇨와는 무관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범인은 기마 순찰 경관 윌킨스였다. 각설탕을 손에 들고 다닌다면, 말에게 먹이기 위해서 말고는 다른 답이 없기 때문이다. 세 명 모두 승마와 무관하다면 범인은 제 4의 용의자이기도 하고.

범인이 제 4의 인물이었다는 발상의 전환이 돋보였던 작품입니다. 수수께끼고 뭐고, 마지막에 메시지를 남기려면 범인을 곧바로 지칭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엘러리의 이론도 공감할 만 하고요. 허나 다이잉 메시지로는 너무 빈약해 보이긴 합니다. 기마경찰과 각설탕이 그렇게나 짝이 잘 맞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거든요. 발표 당시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떠 올릴 수 있는 보편 타당한 상식이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너무 쉬워지니 문제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공개 파일 부서 차가운 돈

챈슬러 호텔에서 필리 멀레인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맨해튼 급여 강도 협의로 10년 복역 후 출소한 상태로, 돈을 찾으러 온 것으로 의심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체는 깨끗이 면도가 되어 있었는데, 호텔 방 안에는 수건이 없었다. 범인은 누구?
범인은 바로 메이드였다. 쓰던 수건이 없는 이유는 메이드가 가져가고 수건을 교체한 것이었다.

사소한 단서를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전형적인 고전 황금기 본격물입니다. 돈을 호텔방에숨겨 놓았다는 설정도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횡령 부서 구관조

늙은 앤드러스 부인은 의사, 변호사, 말벗이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챘다. 세명의 횡령범은 그녀를 죽여 입을 막는데 성공했지만, 마침 경찰이 들이닥쳐 그들을 체포하고 말았다. 앤드러스 부인이 미리 퀸 경감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명 중 범인은 누구?

용의자들은 브릿지 게임 중 카드를 뽑아 범인을 뽑았다. 3, 9, 킹의 카드를 각각 뽑았는데, 킹을 뽑은 사람은 킹 옆 재떨이에 시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사 쿡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심장의 위치를 놓쳐 4번이나 칼질을 할 이유는 없으므로, 범인은 3을 뽑은 말벗 배곳양이다.

카드 추첨으로 실행범을 결정했다는 잔혹한 아이디어에 더해 누가 무슨 카드를 뽑았는지,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까지의 추리는 논리적이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심장의 위치를 잘 안다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 아닐까요? 손이 떨릴 수도 있는 등 변수가 많은데 말이죠. 범행 직후 경찰이 들이닥쳤기에 딱히 추리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고요. 

이런 점에서 추리 퀴즈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 듯 싶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살 부서 명예의 문제

중요한 결혼의 당사자를 협박하는 협박범과 교섭하기로 한 런던 경시청의 버크 경감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협박범이 버크 경감의 뒤통수를 쳐 돈을 빼돌린 탓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보였다. 유력한 용의자 애클리, 체이스, 벤슨 중 범인은 누구인가?
유서로 보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영국식으로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범인은 문서위조범 벤슨이다.

앞서 말씀드렸던 미국식 - 영국식 표현을 이해해야 풀 수 있는 트릭물이라 딱히 와 닿지 않았습니다. 단서가 뭐든, 유서를 위조했다면 범인은 벤슨일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세 명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짤막한 추리는 나쁘지 않았지만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노상강도 부서 라이츠빌의 강도

마을의 성공한 사업가 앤슨 휠러는 공장의 급여를 도둑맞았다. 범인은 의붓아들 델버트로 추정되었는데, 엘러리는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도둑맞은 돈뭉치를 찾아냈다. 그러나 5개월 여 방치되어 거의 썩어 못 쓰게 되어 버렸다. 범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돈을 방치할 이유가 없으므로 바로 찾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5개월이나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모종의 이유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탓이었다. 즉, 범인은 델버트를 쫓다가 부상당해 누워있는 경관 조킹이었다.

라이츠빌이 무대라 오랜 팬으로 무척 반가왔습니다. 내용도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나름 하나의 작품으로서 충분한 수준을 보여주고요. 주어진 단서도 공정하며 추리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사기 부서 돈을 두배로 돌려드립니다.

전형적인 폰지 사기로 투자자를 모으고 있는 시어도어 F. 그루스를 체포하기 위해 퀸 경감과 엘러리가 출동했다. 그러나 그루스는 개인 사무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서 앨버트 크로커가 사무실 문을 열지만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 그는 어디로 사라졌나?
방에는 출구가 단 두 개 - 문과 창문 - 뿐인데, 문은 경찰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탈출구는 창문일 수 밖에 없다. 그루스는 창문을 통해 옆방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대머리, 몸 속 패드 등을 뗀 후 변장하여 다시 사무실을 "크로커"라는 이름으로 방문했던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잠가 완전 범죄를 완성하려 했다.

독특한 인간 소실 트릭물. 트릭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문이 잠긴 상황 말고는 명확한 탈출 방법이 있다는 점에서 의외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현실적이라는 장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루스가 도주 후 변장하여 다시 돌아온 이유가 이해불가라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단지 불가능 범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설득력이 너무 약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보물찾기 부서 구두쇠의 황금

의사 벤과 서점 주인 이브 커플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전당포 주인 엉클 맬러키가 남긴 유산 4백만달러를 찾기 위해서였다. 유일한 단서는 멜러키가 "도둑맞은 편지"를 읽다가 "방 안에 명백한 단서가 있다"라는 말을 남긴 것 뿐이었다. 책으로 가득찬 그 방에서 엘러리가 찾은 단서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오 헨리의 "4백만 달러"라는 책이 단서이다. 책 속 목차를 통해 의미가 있는 유일한 제목인 "between rounds"라는 말을 찾아내어 돈을 찾아낸다.

요약된 줄거리 그대로 영어권 독자를 위한 트릭물입니다. 별로 코멘트할게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술 부서 7월의 스노볼

보석강도 다이아몬드 짐 그레이디를 교수대로 보낼 수 있는 증인 리즈벳의 열차 호송 작전에 퀸 경감과 엘러리가 동행했다. 그러나 전 역을 출발한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지 않았고, 경찰들은 두 역을 수차례 오갔지만 열차를 찾지 못했다. 열차는 어디로 갔는가?
전 역 역장이 매수되어 거짓말을 했던게 진상이다. 즉 열차는 전 역과 지금 역 사이가 아니라 전 역과 전전역 사이에 있었다.

딱 한명 (전 역 역장)만 매수하여 기차가 사라진다는 놀라운 불가능 범죄를 구현한 아이디어가 기발했던 작품입니다. 변장 호송 작전, 화끈한 총격전 등 잔재미도 괜찮으며, 리즈벳의 대사 등에서 엿보이는 유머도 돋보였어요. 현실적으로 과연 잘 되었을지 궁금하기는 하고 엘러리 퀸이 명탐정답지 않게 너무 헤메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평작급은 되지 싶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허위 주장 부서 타임 스퀘어의 마녀

위칭검 양 사후, 그녀의 재산은 조카에게 가기로 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두 명의 조카가 나타났다. 둘 중 한명은 가짜. 누가 가짜인가?

엘러리가 말도 안되는 이론을 들먹여 범인을 자백처럼 밝혀내는데... 솔직히 추리물로 볼 수 없을 만큼 조잡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

투기부서 증권 투기자 클럽

증권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16명으로 구성된 클럽 멤버 3인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자신들에게 지난 세 번에 걸쳐 좋은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이 2만 5천달러를 주면 진짜 핵심 정보를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했기 때문이었다.
진상은 퀸 경감의 말대로 16명의 그룹원을 반으로 나누어 반대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었다(반은 오른다, 반은 떨어진다). 이렇게 3주가 지나면 호구(?)는 두명만 남는다. 때문에 찾아온 3명 중 한명이 범인이다.

퀸 경감의 이론이 재미있었던 작품. 시대를 감안하면 아주 선구자적인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이 작품이 원조인지가 좀 궁금하네요.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추리쇼를 할만한 범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 명의 재정 상태만 조사하면 될 일이잖아요? 게다가 두명의 돈을 가져가려면 당연히 가장 늦은 시간대에 찾아갈 사람이 범인일 확률이 제일 높을테고요. 안 그러면 두번 가야할테니 금방 들통날 거잖아요. 이러한 전개면에서의 작위적인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잉메시지 부서 GI 이야기
라이츠빌의 가정용 조명 기구 상점 주인 클린트 포스딕이 살해된다. 용의자는 포스딕의 의붓아들들 중 하나인데, 유력한 상황 증거에도 불구하고 클린트가 죽기전 남긴 "GI"라는 글과 부합하지 않아 골머리를 썩는 중. GI의 의미, 그리고 범인은 누구인가?
GI는 조지 워싱턴 스미스의 이름을 쓰려 한 것이고, E의 세로획까지만 쓴 것이다.

다잉메시지가 아니라 다이잉 메시지 아닌가요? 여튼, 누가 자기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안다면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라는 당연한 논리가 핵심입니다. 이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에 트릭은 별거 없어요. 아들들의 풀 네임만 알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추리 퀴즈 초심자용 작품이라 할 수 있죠. 

당연한 이야기에 뻔한 트릭, 나름 가치는 있지만 많이 부족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마약 부서 검은 장부
미국 내 주요 지역 마역 공급책의 이름이 적혀있는 52페이지짜리 장부를 뉴욕으로 옮기는 임무를 맡은 엘러리 퀸. 그러나 출발과 거의 동시에 마약왕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약왕의 꼼꼼한 수색에도 장부는 발견되지 못했다. 장부를 어떻게 옮겼을까?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은 뒤 파이프 속에 숨긴 것.

일종의 장치 트릭이 등장하는데, 시대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허나 본격물 특유의 공정한 맛(담배맛에 대한 묘사로 넘어가기에는 너무 부족하죠)은 없다시피하며, 트릭 역시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냥 몸만 뒤지고 고이 풀어주는 마약왕의 행태가 설득력없어요. 당연히 고문이라도 했어야죠. 트릭과 내용 모두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유괴 부서 아이가 사라졌다!

뉴욕에 사는 빌리 하퍼가 유괴된 후, 유괴범의 몸값 편지가 도착했다. 그러나 몸값 전달 장소가 로스앤젤리스로 지정된 탓에, 편지 도착 후 2시간 뒤 몸값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괴상한 편지는 무엇이고 유괴범은 누구인가?
엘러리는 옛 신문을 뒤져 협박 편지가 1년 전 기사화된 유괴 사건에서의 편지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범인은 사건을 벌였지만 뉴욕과 로스앤젤리스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즉, 어린 아이 빌리 하퍼로 사건은 부모의 이혼을 앞두고 벌인 자작극이었다.

유괴범의 편지로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던 작품. 단서들도 공정하게 배치된 편이며 이야기의 설득력도 높습니다. 가족간의 행복을 다룬 주제와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 엔딩도 마음에 들고요. 추리소설 입문자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괜찮은 소품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5/07/08

영국식 살인 - 시릴 헤어 / 이경아 : 별점 3점

영국식 살인 - 6점 시릴 헤어 지음, 이경아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약한 워벡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지들을 초대했다. 초대된 사람들은 아들인 로버트, 가까운 친척이자 재무장관인 줄리어스 워벡, 로버트와 연인이었던 백작가의 딸 레이디 커밀라, 오래된 지인 카스테어스 부인, 그리고 워벡홀에서 사료를 연구하던 보트윙크 박사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 차이, 로버트의 무례함 등 여러 이유로 참석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던 중, 크리스마스 자정에 로버트가 모두의 앞에서 독살당하고 마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저는 정통 고전물의 팬입니다. 허나 고전 퍼즐 미스터리의 팬일 뿐, 이른바 "영국식" 스타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신사 숙녀라 불리는 귀족과 부르조아들이 등장하여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유머로 예법이다 뭐다 하며 장황하게 기이한 가식과 가증을 떠는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잘난척이 보기 싫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피터경 시리즈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제가 싫어하는 정통파 영국식 스타일의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무대부터 전통 있는 워벡 가문의 오래된 저택이고, 정통 영국식 추리소설답게 눈으로 고립된 클로즈드 서클 상황에 놓이거든요. 범행 현장에 있던 인물도 워벡 가문의 후계자, 가문의 친척인 재무장관, 오래된 친구인 정치가의 아내이자 부유한 숙녀, 후계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백작 가문의 딸, 충직한 집사, 마지막으로 가문에 연구차 방문해 있던 보트윙크 박사라는 구성입니다. 귀족, 신사, 숙녀, 하인에 손님까지 정말 완벽한 구성이지요. 게다가 하나같이 영국식 귀족, 부르조아 예법에 쩔어 있는 건 물론이고요. 덕분에 첫 피해자로 로버트가 독살당했을 때에는 쾌재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재수 없고 짜증나는 극우 파시스트 귀족 떨거지였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러한 정통 영국식 스타일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영국식 스타일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의 핵심 장치로 사용된 덕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집사 브리그스가 자신의 딸과 로버트의 결혼 사실, 손자의 출생을 손님들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브리그스의 함구는 정통 영국식 부르조아 예법 덕분에 완벽한 설득력을 갖추었고, 사건의 동기, 전개, 결말이자 파국을 만드는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 탐정역인 보트윙크 박사가 외국인이자 역사학자라는 설정도 뛰어납니다.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영국식 관습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좌충우돌하며 깨닫는 과정과 사건의 핵심 동기가 과거 영국에 실존했던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을 간파해 내는 것에 높은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별다른 단서나 증거가 있는건 아니라서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윌리엄 피트라는 실존 인물이 관련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역사 추리물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동기 역시 정말로 "영국식"이라는 점에서 장르적 기대를 충족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도 분명합니다. 카스테어스 부인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독약병이 워벡 저택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점에서 보면 범행은 즉흥적인 결심으로 보이는데, 재무장관이 경호 차원에서 형사까지 대동한 상황에서 독살을 결심하고 실행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 저택이 고립된 상황이라,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범인인 게 분명하고 누가 득을 보게 될지가 명확하다면 빠져나가는건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유일하게 배신이라는 동기가 있는 레이디 커밀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을 수도 있으나, 범행 시점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줄리어스를 설득해 자살로 몰아가려는 시도 역시 작중 묘사대로라면 잘 되지 않았을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작위를 이용한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줄리어스를 직접적으로 독살하고 정치적으로 날선 대립을 보인 파시스트 로버트에게 뒤집어씌우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심리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영국식 설정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솜씨가 탁월하여 무척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이기는 하나, 상기 단점도 분명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국식"이라는 설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고전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이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21/06/26

안개의 항구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5점

안개의 항구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시내 한 복판에서 머리에 수술을 받은 채로 기억을 잃은 남자가 발견되었다. 신문 광고를 통해 그는 위스트르앙의 항만 관리소장인 조리스 선장이라는게 밝혀졌다. 하녀 쥘르 르그랑이 나타난 덕분이었다. 조리스 선장은 쥘르, 메그레 반장과 함께 위스트르앙 자택으로 귀가했다. 하지만 귀가한 바로 그 날, 조리스 선장은 독살당했고, 메그레 반장은 끈질긴 수사를 통해 이 사건에 마을 시장 그라메종과 쥘르의 오빠 그랑 루이, 그리고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1932년에 발표되었던,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 초기작입니다. "피해자가 총상을 입은 뒤 정성껏 치료를 받고 살아났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독살당한다"는, 다른 메그레 반장 시리즈에서는 보기 드문 기묘한 사건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선장을 누가 공격했으며, 결국 누가 죽였는지? 다친 선장을 깔끔하게 치료해준건 누구인지? 선장에게 30만 프랑의 거액을 입금해 준 건 누구인지? 등 여러가지 본격물스러운 수수께끼도 가득하고요. 

이를 밝혀내는 메그레 반장의 추리도 빼어납니다. 메그레가 그랑 루이와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레몽)를 체포하고, 그랑메종 시장을 자살하게 만든 것은 모두 수사 과정에서 알아낸 정보를 통한 추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추리력보다는 경험과 통찰력이 돋보이며 범죄 드라마에 가까운 다른 메그레 시리즈보다는 본격 추리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밝혀진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는 그랑메종 시장의 조카 레몽이었습니다. 과거 부정을 저지르고 외국으로 쫓겨났었지요. 그 뒤, 그랑메종은 장의 연인 엘렌과 결혼했고요. 그런데 엘렌은 레몽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거부가 된 레몽은 아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랑메종으로부터 아들을 빼앗아 오기 위해 작전을 벌였는데 이 때 레몽을 도와주던 조리스 선장이 그랑메종의 총에 맞았고, 레몽은 그를 정성껏 치료하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30만 프랑까지 입금해 주었지만, 조리스 선장이 입을 열 걸 두려워했던 그랑메종이 그를 독살했던 겁니다.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 느낌이 들만큼 대중적으로 먹힐만한 소재 - 기억 상실, 거액의 유산, 숨겨진 아들, 복수 등등등 - 들이 가득하여 아주 흥미로왔어요.

이렇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전형적인 '사나이'인 메그레 반장과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그랑메종 시장의 대비, 그리고 둘의 알력 다툼도 눈에 띄는 부분이었습니다. 짜증나긴 하지만 당대 부르주아를 잘 묘사했을 그랑메종 시장 캐릭터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짜증나는 부르주아 독신녀들 묘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니까요.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읽는 재미도 좋은데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관계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는 설정은 답답할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레몽은 선장을 독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른다쳐도, 그에게 총상을 입힌게 그랑메종 시장이라는걸 경찰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시장이 자살한 뒤에도 입을 다물 이유는 더더욱 없고요. 단순 조력자였던 생미셀호 선원들이 입을 다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선원들간의 의리'로 입을 다물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조리스 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선원들간의 의리에 해당하지 않는걸까요? 

그랑메종의 행동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엄연히 남의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까닭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는 건지... 또 선장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걸 알았을텐데, 돌아온 날 바로 살인을 저지를만한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파리에서 온 형사가 함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거부인데도 범행을 직접 저지를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긴, 레몽과 일당들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형사가 있는데도 다시 아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으니, 다들 메그레 반장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추리적인 요소들은 좋았지만, 이런저런 비현실적이고 지루했던 전개는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하니, 메그레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여, 쥘리의 오빠 그랑 루이가 쥘리를 찾아왔을 때 쪽지를 남겼으리라는건 당대 프랑스인의 상식이었을까요? 쪽지가 있다는걸 당연하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소한 점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궁금합니다.

2008/05/24

쇠못 세개의 비밀 - 로베르트 반 훌릭 / 이희재 : 별점 4점

쇠못 살인자 - 8점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황금가지

디 판관은 새로운 부임지 북주에서 충실한 4명의 수하와 함께 새롭게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최초에 접수된 사건은 랴오 조합장의 딸 랴오 렌팡 처녀 실종 사건이었다. 사랑의 도피로 여겨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지물포를 하는 예씨 형제들의 여동생이 살해당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 목 없는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걸 계기로 다시 신중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북주의 유명한 권법가 란 사범이 독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결국 우여곡절끝에 각각의 사건의 용의자를 알아낸 디 판관은 용의자를 심문하나 결정적 증거는 잡지 못해 고민해 빠졌다. 결국 금기시 되어 있는 시체 발굴 부검을 자신의 직위와 목숨을 걸고 착수하는데...

어제 읽은 "종소리를 삼킨 여자" 에 필받아 연달아 읽어버린 디판관 시리즈 2번째 작품입니다. 재간되긴 했지만 저는 예전 디자인 하우스 판본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옛스러움과 이색적인 분위기는 전작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몇가지 세세한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요. 일단 가장 큰 차이점은 싯구와 더불어 전작의 무대인 푸양과는 다른 엄청나게 추운 북주의 겨울 풍광이 더해지며 섬세한 드라마가 더욱 강조되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호쾌한 맛은 부족하지만 감성적인 면에서 은근한 멋을 풍기네요.

여러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도 전작 그대로인데 랴오 처녀의 실종 사건과 머리없는 시신 사건, 권법가 란 사범의 독살 사건, 그리고 쇠못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중간에 사탕과자 상인의 에피소드와 같은 곁가지 추리담도 담겨 있긴 하지만 중심 내용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고요. 

또 이 네가지 사건이 두가지씩 -실종사건과 머리없는 시신 사건, 그리고 독살과 쇠못 살인 사건 - 조합되어 연관된어 진행된다는 점에서 전작보다 더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추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머리없는 시신 사건"은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처럼 시체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복선과 단서가 명쾌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독살 사건"은 고대 중국의 퍼즐 놀이라 할 수 있는 "칠반 (탱그램이라고도 하죠)"을 이용한 다이잉 메시지는 특이하지만 범인이 너무 초반에 드러난다는 점과 별다른 트릭은 없어서 약간 부족한 맛이 느껴졌는데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쇠못 살인 사건"의 고전적이고도 독특한 트릭이 부족한 점을 충분히 보충해 줍니다. 이 쇠못 살인 사건 트릭은 국내 추리 만화 "다모"에서도 접했었던 것이라 아주 새롭지는 않았지만요.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다모" 쪽이 더 정교한 느낌이라 생각됩니다. "흉기"의 은닉이 고려되었어야 할 거 같으니까요.

어쨌건 다시 읽어도 무척이나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전작에 비하면 사건이 보다 소박하고 드라마가 강조되었다는 점과 여성에 대한 가혹한 묘사나 잔인한 처형에 대한 묘사 등 껄끄러운 부분이 줄어들고 잔잔한 맛이 느껴진다는 점 때문에 전작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고요. 역시나 뒷부분 저자 해설에서 밝히듯 고대 중국의 실제 사례나 범죄 소설집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원전에 대한 설명도 충실해서 자료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충분히 다시 재간될 만한 재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보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디 판관 시리즈의 계속된 출간을 기원합니다~

그나저나.. 원제도 단지 "중국 쇠못 살인사건" 인데 왜 이 번역본은 "쇠못 세개의 비밀"로 제목이 붙은걸까요? "쇠못 두개의 비밀" 이었으면 이해가 되는데 당쵀 알 수가 없군요. 번역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 euphemia님의 비밀덧글을 보고 이유를 알았습니다. (다른 분들께 스포일러가 될까봐 비밀 덧글로 달아주셨는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쇠못은 세 개가 맞다고 합니다. 프롤로그 화자의 유령 이야기까지..... :]) 앞부분 프롤로그를 아무 생각없이 넘긴 제가 착각한 것이었네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2009/02/18

화형법정 경성버젼 시놉시스

엊그제 읽은 화형법정의 경성 버젼을 업그레이드 해서 몇줄 적어보았습니다. 트릭같은것은 대충 구상이 끝났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뭐 이런 번안 소설이 지금와서 먹히진 않을테니.. 그냥 재미 삼아 쓴 것이니 만큼 가볍게 읽어 주세요. 일단은 전반부만 작성되었습니다.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이완두 - 에드워드 스티븐스 : 경성의 모 일보 기자.
마리아 - 마리 도브리 : 이완두의 아내
다구치 - 마크 데스파드 : 이완두 옆집에 사는 지인. 조선 총독부 관리.
배동천 - 파딩턴 : 다구치의 오래된 친구로 전직 의사.
현씨 노인 (현씨 아범) - 헨더슨 노인 : 다구치 집안 고용인
고구수 - 고던 클로스 : 유명 작가.

** 전반부 줄거리 **

조선인으로 동경제국대학 유학 후 경성에서 신문기자를 업으로 먹고 사는 "이완두"는 유학시절에 만나 교제 후 결혼한 미모의 신여성 아내 마리아가 자랑거리이다. 별다른 사건 없이 평탄하고 무난한 나날이 이어지던 중, 완두는 신문사에 새로 연재하게 된 유명 작가 "고구수"의 최신작인 "전설 열전" 이라는 원고를 주말에 집에서 읽기 위해 가져가던 중 우연찮게 전차에서 정조시절 저잣거리에서 유명했던 무당이자 저주에 능했다는 한 여인에 대해 쓴 원고를 읽다가 그 여인의 설명에서 자신의 아내와 굉장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또한 사실상 아내의 과거라던가 고향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집에 도착한 뒤 아내에게 몇가지 물어보려 하지만 갑작스럽게 옆집 사는 일본인 "다구치"의 방문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만다.

큰 교제는 없었지만 제국 대학 동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몇번의 왕래가 있었던 다구치는 조선 총독부 식산과에 근무하는 관리로 얼마전 같이 살던 백부가 사망한 것 때문에 문상도 갔었던 터. 다구치는 자신의 친구라는 전직 의사 "배동천"과 함께 완두를 방문한 뒤 비밀스럽게 방문 목적을 털어놓는다. 방문 목적은 백부가 사실은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깊어져서 이문리 묘지에 매장된 백부의 묘를 몰래 파내는 일을 도와달라는 것. 물론 전직 의사 배동천이 시신을 검시하여 독살에 대한 확증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독살에 대한 의심은 백부가 사망하던 날 우연찮게 백부의방 옆에서 라디오를 듣던 고용인 현씨어멈이 무당같이 보이는 행색의 여인이 독이 든 음료수를 전해주고 유령처럼 사라졌다고 말한 것과 실제로 독이 든 음료수잔이 백부의 방에서 발견된 것 때문이었다.

그다지 멀지 않지만 한밤중에 몰래, 소문이 나지 않게 빨리 파내기 위하여 다구치의 고용인인 현씨 어멈의 남편이기도 한 현씨 노인까지 4명의 일행은 곧바로 묘역에 도착하여 묘 발굴에 착수한다. 그러나... 발굴된 관에는 시체가 없었다! 다구치는 당시 상여꾼으로 직접 참여했었기에 시체가 확실히 매장때까지 관에 들어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시체가 없는 것에는 도리가 없는 상태. 어쩔 수 없이 일행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는 다구치가 한밤중의 발굴을 숨기기 위해 여행보냈던 다구치의 아내와 여동생이 백부가 독살되었다는, 레이시치 경부가 보냈다는 의문의 전보를 받고 이미 돌아와 있는 상태.

다음날 여러가지 사건과 분위기 탓에 잠을 설친 이완두 앞에 다구치 백부의 고용 간호사와 다구치의 동생 오구리가 나타나고 뒤이어 실제 레이시치 경부 본인이 등장하는데....

2026/08/07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 까지(till death do us part) - 존 딕슨 카: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작가 리처드(딕) 마컴은 식스 애시즈 마을에서 레슬리 그랜트와 약혼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마을 바자회에서 레슬리가 점쟁이의 천막을 찾은 뒤 이상할 정도로 동요했고, 심지어 사격장에서 레슬리가 우연히 쏜 총탄이 점쟁이를 맞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저명한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는 세 번이나 남편들이 밀실에서 청산가리를 주사하여 자살한 것처럼 만든 독살범이라는 이야기를 딕에게 들려주며, 레슬리가 딕을 초대할 때 자신이 집에 숨어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하비 길먼 경도 밀실에서 청산가리 주사로 사망한 사체로 발견되었고, 현장에 나타난 기디언 펠 박사는 피해자는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유명한 사기꾼 샘 드 빌라라는걸 밝히는데...

존 딕슨 카의 장편으로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초반 설정입니다. 주인공 딕 마컴의 약혼녀 레슬리는 한 점쟁이에게서 불쾌한 말을 듣고 분개하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총으로 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유명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가 과거 남편들을 청산가리로 살해한 독살범이라고 주장하고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하비 길먼 경마저 자신이 설명했던 사건과 똑같은 형태로 밀실 안에서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은 채 발견됩니다. 마컴은 레슬리를 믿고 싶지만, 피해자가 남긴 말과 똑같이 벌어진 죽음은 그녀를 의심하게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아, 정말이지 두근두근합니다.

피해자가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변장한 사기꾼 샘 드 빌라였고, 레슬리가 독살범이라는 거짓말로 마컴을 속여 그녀의 집에 몰래 들어간 뒤 보석을 훔치려 했다는 계획도 좋아요. 점쟁이의 예언과 독살범이라는 폭로가 모두 절도 계획을 위한 연극이었다는건데 상당히 잘 짜여져 있는 사기극이라는 느낌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원래 밀실 살인 트릭은 없이 이 사기극만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다는데, 납득이 되는 완벽한 구성이라 생각되네요.

딕슨 카 작품답게 밀실 트릭도 괜찮습니다. 벽에 난 구멍으로 실을 빼낸 뒤, 그 실을 당겨 창문의 잠금 장치를 잠근다는, 아래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지극히 단순한 트릭이지만 단순해서 현실성은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에 벌인 총격 소동으로 장치에 사용했던 구멍을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빼어나며, 이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고전 본격 추리물답게 공정합니다. 총 구멍이 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애시 경의 증언처럼요.

하지만 진범인 미들스워스 박사가 직접 기디언 펠 박사를 데려와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는 전개는 이상합니다. 자신의 범행을 밝혀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스스로 현장에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미들스워스 박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능한 지방 경찰들에 의해 샘 드 빌라는 자살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을 산 레슬리는 마을을 떠나게 되고, 딕과도 헤어지게 되겠지만 둘의 사랑을 미들스워스 박사가 지켜줄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독자를 속이기 위한 설정도 과합니다. 새벽에 레슬리가 피해자의 집 앞까지 갔는데 몽유병 상태라 기억하지 못했다던가, 금고 속 내용물 때문에 신시아와 격투를 벌였다는 설정들이 대표적입니다. 마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상황 묘사와 신시아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도 모두 혼란스럽고요. 쓸데없는 작전으로 마을 우편소장이 살해당한 것도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크지는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묘사는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었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일 테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강한 도입부와 효과적인 밀실 트릭이라는 장점만으로도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힙니다.

#여태까지 내가 읽었던 존 딕슨 카 작품 순위

2014/12/05

덴카와 전설 살인사건 - 우치다 야스오 / 김현희 : 별점 2.5점

덴카와 전설 살인사건 - 6점
우치다 야스오 지음, 김현희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 신주쿠 중심가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피해자 가와시마의 사인은 독살로 밝혀졌지만, 범인과 이유는 미궁에 빠졌다. 유일한 단서는 그가 지니고 있던 삼각형 모양의 기이한 방울 하나 뿐이었다. 비슷한 시기, 노가쿠 명문 미즈카미류의 후계자 가즈타카가 "도조지" 공연 중 죽었다. 심근경색이라고는 했지만, 독살이 아닌가 의심되었다. 

한편 아버지 지인의 부탁으로 취재 차 노의 본고장인 요시노와 덴카와 신사 근처에 머무르던 아사미 미츠히코는 우연히 미즈카미류 종가 가즈노리 실종사건에 연루되어 사건에 뛰어드는데...

1988년 발표된. 우치다 야스오의 아사미 미츠히코 시리즈 23번째 장편입니다. 그동안 읽어본 아사미 미츠히코 시리즈들은 대체로 기대 이하였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5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명성과 인기가 이해되는, 대중 소설로의 미덕을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루해질만 하면 사건이 벌어지는 전개(가와시마 살인사건 → 가즈타카 살인사건 → 가즈노리 실종사건 → 아사미 체포 → 가즈노리 변사체 발견 ...)로 흥미를 유발시키는 솜씨도 일품이고, 일본 전통 무용 노가쿠와 덴카와 신사와 엮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도 상당한 재미를 선사해주기 때문입니다. 

"노가쿠", "노", "노멘"이 핵심 설정이자 트릭으로 이용되어서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데, 이 역시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이런 설정은 "탐정 레이디 X 시리즈 - 거울 속의 나"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가부키, 고토 종가 가문의 후계자 다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설정 자체는 거의 판박이니까요. "도조지" 공연 중 종 안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는 "갤러리 페이크"가 떠올랐고요(여기서는 일종의 사고였지만요).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제목이기도 한 요시노 지방 및 덴카와 신사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아주 인상적이에요. 풍광이라던가 다양한 행사, 먹거리까지 꼼꼼하게 소개되는데 한 편의 기행문이라 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아사미 미츠히코 캐릭터의 매력도 볼만합니다. 인기 시리즈가 된 게 이해가 될 정도로 독특한 맛이 느껴졌어요. 명문가의 훈남으로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카 렉서스 소아라 (1세대겠죠?)를 타고 다니는 멋쟁이지만 허술한 면모도 보여주는게 여심을 자극할 듯 합니다. "바쿠만"에서 대박이 나려면 여성 독자가 읽어야 한다고 나왔었는데 왜 이 시리즈가 대박이 났는지 조금 알 것 같네요.

그러나 읽히는 재미에 비하면 추리적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이유로는 첫 번째 범행, 즉 가와시마 독살사건이 너무나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탓이 커요. 협박범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우편배달부를 살해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또 메신저를 살해했다면 바로 협박범도 찾아가서 죽였어야지, 왜 진짜 협박범은 그냥 살려둔 걸까요? 협박 당사자인 나가하라 도시코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 역시 이해 불가에요. 자기 대신 찾아간 사람이 죽었다면 겁이 나서라도 경찰에 신고하는 등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게다가 가즈타카가 죽은 시점에서 도시코가 가만히 있을 이유도 없고, 종가인 가즈노리가 도시코를 찾아가서 무슨 결말을 지었는지도 설명되지 않는 등 일련의 과정이 대충대충 진행되는게 영 별로였습니다.

아울러 가와시마 사건을 추적하던 경찰이 가즈노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 시점에서 가와시마 살해가 가즈노리의 자살로 이어졌다는 당연한 추리와 수사를 하지 못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수사만 제대로 했어도 가와시마 살해 동기를 본격적으로 밝혀서 보다 손쉽게 진상이 드러났을 텐데 말이지요. 특히나 덴카와 신사의 미스즈로 인해 두 명의 연결고리가 드러난 이상, 이렇게 수사하지 않은건 직무유기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중 명탐정이라 불리우는 아사미의 활약도 거의 없습니다. 작중에서의 아사미의 추리는 본인 스스로 "감"이라는 것에 의존할 정도로 비논리적입니다. 가와시마가 독살당한 사건에 "여자"가 관련되었을 것이다라고 추리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노멘 가면에 독을 발라서 살해했다는 트릭도 너무나 친절하게 설명되는 탓에 명탐정의 추리가 필요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었고요. 또 가즈노리 사건이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사미의 추리는 수사에 방해가 되었을 뿐이에요. 결국 죽을 사람이 다 죽은 뒤에나 진상을 알게 된다는 점도 당황스러운데, 일본 추리소설 속 명탐정들의 전통이자 특징인걸까요? 하지만 어차피 죽을 사람 다 죽으면 탐정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다행히 가즈타카 살인사건 하나만큼은 동기도 명확하고 트릭도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동기나 트릭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본격물스러운 맛을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주요 설정인 노가쿠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트릭인 만큼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가와시마 사건은 지워버리고 가즈타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가와시마의 딸 치하루 시점에서 쓰여진 배경 묘사도 다 들어내는 식으로 정리하면 300페이지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었을 것 같은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맛은 있고 추리소설계에 이름을 남긴 명탐정 아사미 미츠히코의 매력은 가득합니다. 추리애호가로서 "추리" 요소가 부족한 탓에 감점하지만, 추리소설 초심자, 특히 여성분들이라면 꽤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덧붙이자면 일찍이 영상화가 여러 번 된 작품인데 (심지어 첫번째 작품은 가도카와 제작 - 이치가와 곤 감독이라는 상상이상의 컴비!) 추리적으로는 간단하고 오히려 훈남 주인공과 주위의 미녀들, 아름다운 풍광 등이 부각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영상물로 감상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한 번 구해봐야겠습니다.

2009/05/01

벨벳의 악마 - 존 딕슨 카 / 유소영 : 별점 3점

벨벳의 악마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고려원북스

1925년, 58세의 역사학 교수 니콜라스 펜튼은 악마와 계약해서 240년 전, 헨리 2세 통치하 영국의 니콜라스 펜튼 경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는 아내 리디아의 독살을 막고 자신과 관련된 정치적 암투를 해결하며, 헨리 2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화요추리클럽'의 운영자로 유명한 장경현님이 감수하셔서 이른바 "장경현의 MOM(Magnum Opus Mystery)"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고려원북스의 걸작 미스터리 시리즈 두번째 작품 - 첫번째 작품은 역시 딕슨 카의 "구부러진 경첩" 이었죠 - 입니다.
유명 추리애호가의 감수답게 국내 미출간된 거장의 작품을 선정하여 출간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 역시 딕슨 카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어 저같이 영어가 딸리는 추리 애호가들의 맘을 아프게 했었는데, 이번 출간으로 오랜 갈증을 해소한 것 같아요.

그런데 작품은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 물이라 놀랐습니다. 저는 그동안 역사 추리소설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작품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과거로 타임 슬립한다는 상상 밖의 이야기더라고요.

그런데 이러한 전개는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유치하다는 느낌까지 받았으니까요. 유사한 시공 이동 판타지를 너무 많이 접한 탓이지요. 하여튼, 작품 발표 당시에 발휘되었을 새롭고 신선한 맛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아울러 시공 이동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타임 패러독스의 딜레마" - 역사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꿀 경우 현재가 영향을 받아 결국 과거로 이동한 자신마저 영향을 받게 된다는 - 역시 편법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기 때문에 실망스럽습니다. 

내용도 부실하고 황당한 부분 역시 많습니다. 원래는 58세인 주인공의 행동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초딩스러운 행태를 많이 보이는 점이라던가 팜므파탈로 설정한, 그야말로 악마의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의 존재와 정체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또 역사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정도로 추리와 역사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역사 추리물이라면 실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후대의 추리적 고찰이 반영되어야 할텐데, 이 작품은 단지 2세기 전을 무대로 한 독살 사건일 뿐이며, 사실 시대적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트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단점만 가득한 작품은 아닙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명성에 값하는 재미도 충분한 덕분입니다. 일단 헨리 2세 치하의, 이른바 토리당 - 휘그당의 대립을 소재로 쓴 역사 이야기 부분은 제대로 된 활극의 재미가 넘칩니다. 주인공 니콜라스 펜튼이 "벨벳의 악마"라 불릴 정도의 영국 제일의 검사이자 과격한 인물이라는 것 덕분에 "검의 대가" 나 "스카라무슈" 만큼이나 검술 액션이 가득하니까요. 검술의 기술, 칼의 고증 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딕슨 카의 디테일도 제대로라서 볼거리가 많습니다.
다만 이러한 디테일은 실제 2세기전의 영어로 대사를 표현하는 등 이 작품에서 신경쓴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한글로 번역되면서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긴 하네요.

추리적인 부분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비소 독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제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의표를 찌르는, 예상밖의 트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소개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악마가 영혼을 거래할 때 맺는 계약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 가 잘 드러나면서도, 이 계약 내용을 복선으로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서 나름 본격물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점입니다. 딕슨 카는 역시나 딕슨 카 였달까요. 역사 추리물은 아니지만, 시공 이동 판타지 물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는 대가의 노련함이 엿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부러진 경첩" 보다는 확실히 의표를 찌르는 맛이 넘치는 의외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통 추리 애호가라면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는데 재미와 아이디어, 독창성 측면에서 충분히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1/22

호저의 축제(湖底のまつり)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1.5점

湖底のまつ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4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리코는 시시코 협곡에서 급류에 휩쓸렸다가 하니다 코지에게 구조된 뒤,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코지가 참석할 예정이라는 '오마케상 축제'에 따라갔지만, 끝내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코지는 한 달에 독살당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코지 독살 사건을 담당한 칸자키 형사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여학생 오기 쇼코를 주목했다. 쇼코의 일기에는 그녀가 'P'라고 부른 누군가에게 실연당한 뒤,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황상 'P'는 코지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칸자키 형사가 마을을 찾은 뒤 쇼코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사건 수사는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마을과 사건 현장은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고 만다. 그러나 댐은 붕괴되었고, 덕분에 칸자키 형사는 쥬키치 바위 밑에서 실종되었던 쇼코의 시체를 끝내 발견하는데...

이 작품은 일본 추리소설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11장의 트럼프"도 재미있었고, 아야츠지 유키토가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하기도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댐 건설로 수몰을 앞둔 일본 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난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지방의 댐 건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회파 추리 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전통 축제인 '오마케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재미를 더해주고요.
무엇보다도 아와사카 쓰마오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사회파 치정 미스터리물'이라는 엄청난 특징이 돋보입니다. 수준도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쓴게 아닐까?하는 느낌을 줄 만큼 강렬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한 달 전에 살해된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수수께끼도 단순한 서스펜스를 넘어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당기며, 댐 건설과 지방 마을의 수몰이라는 사회적인 주제도 신선한 편이에요.

그러나 솔직히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점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우선 성애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노골적입니다. 불편함을 줄 정도로요.
사건의 진상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합니다. 노리코가 만난 남자가 사실은 하니다 코지가 아니라 그의 아내 히사에였다는건데, 충격을 준다기보다는 헛웃음을 자아냅니다. 일단 히사에가 자신을 코지라고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상당한 미인으로 묘사되는 히사에가 남자 옷을 입고 남자 흉내를 냈다고 노리코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역시 무리고요. 남자로 착각하는데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성행위 시 사용한 도구(일종의 딜도?)는 그야말로 어이를 상실케했습니다. 이건 뭐 포르노도 아니고... 이런 설정(남자인줄 알았는데 여자였다! 또는 그 반대)을 트릭에 이용할거였다면 나쓰키 시즈코의 "흑백의 여로"에서의 성전환 수술같은 설득력있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딜도보다는 말이지요.
히사에가 축제 현장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건 여성인 '오마케상'으로 등장했기 때문인데, 이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노리코가 오마케상을 직접 봤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봤다면 아무리 화장을 했다 한들, 오마케상이 코지(히사에)라는걸 충분히 알아챘어야 합니다. 

독살 사건에서 히사에가 쇼코와 코지와 함께 독을 마셨으나, 독을 토해낸 히사에만 살아남았다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다 건장했을 남자 코지가 여러모로 더 살아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편의적인 발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작위적인 요소도 너무 많습니다. 1년 전 물에 빠진 히사에를 구한 코지와의 관계가, 1년 후 노리코와 히사에 사이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작품에서 사용된 'P'와 'N'이라는 별명이 "베니스의 상인"의 '포샤'와 '네리샤'에서 유래했다는 점 등도 그리 와 닿지 않았고요.

결말도 억지스럽습니다. 댐이 붕괴되며 쇼코의 사체가 발견된 덕에 사건이 종결되는데, 상황도 과장되어 있지만 쇼코의 자살로 충분히 설명되는 상황에서 히사에가 굳이 의심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끌고가는건 말이 안됩니다. 설령 의심을 받는다 해도 독약을 구한 증거는 쇼코의 일기로 확인되므로, 사건은 그냥 마무리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칸자키 형사와 히사에가 갑자기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고 하다가, 히사에가 다시 만난 노리코와 연결된다는 마지막 장면은 혼란의 극치에요.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서사를 흐트러뜨리기만 합니다.

캐릭터들도 시시합니다. 히사에에 집착하는 쇼코는 흔해빠진 스토커 캐릭터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댐 건설 이권에 대한 유착에 관련된 시모스지 의원, 이누이시 촌장, 코지의 동창 카나미 등은 그냥 지나가는 인물에 불과하고요. 중요한 인물로 보였던 칸자키 형사의 딸 아구리는 한술 더 뜹니다. 비중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하는게 없는 탓입니다. 아빠가 벽에 부딪힌 사건을 추리해내는 진짜 명탐정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카라즈카' 팬이라는 설정을 통해 사건이 남장 여자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은근슬쩍 드러내는게 전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모리무라 세이이치로 대표되는, 당대 추리물의 탈을 쓴 치정극 유행에 편승하기 위해 쓴 졸작입니다. 읽으면서 "흑마술의 여자"가 떠올랐는데, 문제는 그 정도 수준도 안된다는 것이지요. 아야츠지 유키토의 극찬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요. 번역하면서 읽은 시간만 아까울 따름입니다.

2026/06/20

케이트 (2021) - 세드릭 니콜라스-트로얀 : 별점 1.5점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키워진 케이트는 일본 야쿠자 두목 키지마 암살에 실패한 뒤, 치명적인 독을 먹었다. 딱 하루의 생명이 남은 상황에서, 케이트는 자신에게 독을 먹인 사람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나섰다. 알고보니 이는 키지마의 자리를 노리는 렌지의 음모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액션 영화입니다. 요새 운동할 때 액션 영화만 찾아 본 탓인지,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작으로 표시되었길래 보게 되었네요.

케이트가 키지마의 행방을 쫓는 초, 중반부에서 펼쳐지는 액션들은 볼 만합니다. 도쿄가 무대이기 때문인지 총기 액션보다는 몸과 몸이 부딪히고, 칼부림이 난무하는 날것 액션이 중심인데 여성 주연 액션물치고는 속도감과 타격감이 괜찮은 편입니다. 타격, 단검, 총기, 자동차 추격전 등 액션의 종류도 다양하고요. 이를 처절하게 펼쳐내는 케이트 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캐스팅도 괜찮습니다. 비교적 큰 체구가 묵직함을 살려주거든요. 덕분에 중반부까지는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아 소녀를 데려다가 킬러로 키운 스승과 소녀 킬러라는 설정, 스승이 결국 제자를 배신했다는 전개, 냉혹한 킬러가 어린 소녀와 우정을 나누며 변한다는 흐름 등 의외성이라고 찾아보기 힘든 지극히 뻔한 설정 투성이인데다가 케이트와 애니의 교감은 진부하고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애니 입장에서 케이트는 처음부터 자신을 위협한 인물입니다. 그런 상대와 한두 시간 함께 있었다고 해서 깊은 감정의 교류가 생긴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애니가 케이트에게 동경심 정도를 품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영화가 보여주려는 감정적 유대감을 느끼는 단계까지 나아가기에는 과정이 너무 빈약합니다.

음모의 구조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베릭이 렌지와 손을 잡고 키지마를 제거하려 했다고 해도, 키지마 암살이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렌지가 케이트를 독살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베릭 역시 렌지와 손을 잡고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키운 귀한 킬러만 잃은 셈이에요. 만약 베릭이 렌지의 독살 계획을 알았다면 렌지를 제거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몰랐다면 케이트의 복수 대상이 베릭으로 향하는 것도 애매해집니다. 적어도 베릭이 직접 독살을 지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이는 복수극에서 가장 중요한 복수의 대상을 불명확하게 만듭니다. 케이트가 렌지를 증오하는건 이해할 수 있지만, 베릭이 최종적으로 단죄해야 할 대상이라는건 설명이 빈약하니까요. 

제일 큰 문제는 절정부입니다. 키지마와 손을 잡고 렌지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후반부는 앞서 보여준 장점마저 제대로 이어받지 못합니다. 초중반의 화려하고 거친 액션은 찾아보기 어렵고, 긴장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키지마와 렌지의 검술 대결은 뜬금없고, 케이트와 베릭의 일기토 역시 기대에 비해 허무합니다. 특히 케이트에게 총 한 발 맞고 죽어버리는 베릭의 최후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우디 해럴슨이라는 배우를 기용해 놓고 이렇게 소모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액션 장면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볼거리는 있지만 한 편의 영화로 성립하는 이야기를 갖추지 못한 망작입니다. 굳이 본다면 액션 장면만 모아보는 쪽을 추천드립니다.

2018/03/18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브리짓 허스 / 조윤경 : 별점 4.5점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8점
브리짓 허스 지음, 조윤경 옮김/동아엠앤비

법의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해주는 일종의 미시사, 과학사 서적입니다. 통사처럼 '법의학'의 흐름을 일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별다른 과학적인 수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로, 비소가 특별한 검사법이 없어서 널리 쓰이던 1751년에 영국 여성이 아버지 독살 혐의로 기소되면서 과학 수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사건 소개입니다. 비소는 가열하면 마늘 향을 내뿜는데 용의자 메리의 약갑 속 물질을 가열하니 마늘 냄새가 났다는,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그야말로 과학 수사의 한 걸음을 내딛은 방법이 등장합니다. 이 증거로 메리는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806년 로제 교수가 '로제 검사법' 이라는 비소 검출법을 고안해 냅니다.

그리고 의사가 검시관이 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라까사뉴가 1881년 리옹에 '법의학 연구소'에 합류하여 부검에 참여하고 여러 제자를 양성하여 많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집니다. 특히 유명한 '크리펜 사건' 은 대중에게 라까사뉴와 같은 법의 병리학자의 존재 및 그 유용함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병리학자 스필스베리가 크리펜 자택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가 크리펜의 실종된 아내라고 판단한게 사형 선고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참고로, 최근 조사 결과로는 이 사체는 '남자의 사체' 였다고 합니다. 스필스베리의 추리대로 독살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총으로 쏘고 사체를 절단하여 유기하는 건 일반적인 독살범 행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이었고요. 하지만 코라 크리펜은 결국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크리펜의 범행은 성공했지만 우연에 의해 정의의 철퇴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여튼 이러한 최근 조사로 스필스베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또 다른 유명 연쇄 살인 사건인 '욕조 속의 신부들' 사건 당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조사하여 증언한 내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삭 의사 부인 사망사건' 이라는 유사 사건이 있어서인지 더 기억에 남네요. 의사인 주제에 100년전 사기꾼보다도 유치하게 현장을 조작하다니,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1925년 노먼 쏜 재판에서의 논란으로 스필스베리의 완벽함에 균열이 가고, 대중도 병리학자의 결점과 오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늦은 1918년 법의관 제도가 시작되는데 법의관들의 활약으로 여러 건의 사건이 해결됩니다. 부검이 아니라 정말 탐정 뺨치는 추리로 범인을 밝혀낸 사건도 있습니다. 하숙집에서 노부인이 시체로 발견되어 자연사인줄 알았는데, 현장에 도착한 법의관이 '가정부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는 뜻인데, 그럼 열쇠는 어디 있는걸까?'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이어간 끝에 열쇠를 소지한 범인을 잡는다는 결말인데, 당장 추리 소설에 응용해도 좋은 멋진 추리였어요.

이러한 법의관 제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적인 수사 방법도 상세합니다. 지금은 일반 상식이 된 범죄 현장의 증거를 토대로 한 수사는 1세대 법과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셜록 홈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홈즈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에드몽 로카르를 비롯, 오스트리아의 한스 그로스, 프랑스의 빅토르 발타자르, 미국의 벤자민 모건 밴스 등 여러 선구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된 사건이 연대별로 흥미롭게 소개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과거에는 분석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정보로 현대에는 어떻게 사건이 해결되었는지를 병렬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뒤이어 각종 분석 방법들을 한 챕터씩 할애하여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챕터별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해당 분석법의 역사와 주요 인물, 그리고 해당 분석법이 활용된 주요 사건이 소개되는 식이죠. '지문'의 경우, 뎁퍼드가 살인 사건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내용은 이전에 읽었던 "지문"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딱히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도 샤를리즈 테론의 "몬스터"로 잘 알려진 에일린 워노스 사건 소개는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문'을 숨겨야 했던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시체를 자신이 죽은걸로 위장하려고 기도한 사건인데 황당한건 시신의 신원만 위장했지 정작 범인 자신의 신원은 위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다른 사건 사례를 통해 지문의 결함이 있다는 점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이와 함께 베르틸롱(베르티용) 측정법도 함께 실려 있는데, "지문"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베르틸롱 측정법의 심각한 문제인 "쌍둥이는 구분할 수 없다"의 실제 사례는 흥미로왔습니다.

총기 분석에서는 유명한 '사코와 반체티 사건' 에서 최근 분석 결과 사코는 진범이었을 수 있다는 결론. 그리고 알 카포네의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 관련 수사가 재미있었어요.

혈흔 분석 챕터에서는 "도망자"의 모델 샘 셰퍼드 의사 부인 살인 사건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혈흔 분석을 통해 재판 결과가 뒤바뀌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조사 결과와 결론을 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 그리고 결론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피해자학(희생자가 살해될 요소가 무엇인지? 를 분석하여 동기, 용의자를 알아내는 기법)'을 토대로 메릴린이 희생자가 될 확률은 오로지 불안정한 결혼 생활 뿐이었다고 단언합니다. 현장이 조작된 증거도 상세하게 실려 있고요.

시신 분석 사건에서는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의 살인 청부업자가 피해자의 시신을 수 년간 냉동한 후 유기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실제 범행은 수년 전이지만 3~4 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여러가지 증거를 토대로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체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은 흡사 미드 "CSI"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유골 분석은 다른 챕터에 비하면 사례의 재미가 조금 덜한 편입니다. '아나스타샤 사건'으로 법의인류학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정도만 괜찮았어요.

마지막은 프로파일링과 DNA 분석이라는 최신 수사 기법으로 마무리됩니다. 프로파일링은 익히 수많은 책을 통해 접했던 내용의 요약이지만, FBI 행동 과학부의 수사관들이 활약한 사건들은 흥미진진합니다. 사건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의 활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DNA 분석은 이를 통해 해결한 사건보다도 증거가 왜곡된 사건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DNA가 악수 등으로 쉽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는 물론, '바이트 마크' 와 같이 오류가 있는 증거가 채택되어 발생한 문제 등이 함께 소개되는데 참 무섭더군요. 요새도 증거 조작이나 오인식, 각종 오류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가끔 보도되는데,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법의학, 법과학에 대한 통사적인 이해는 물론, 실제 사건과 연계하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도 전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으며, 도판들도 적절한 수준으로 삽입되어 있는 등 전체적인 책의 완성도도 빼어납니다. 한마디로 재미와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보기드문 좋은 책이에요.
분량 상 개략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많으며, 이미 각 분야별로 상세하게 설명한 다른 책들을 통해 제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제법 된다는 점은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2006/04/10

독살 - 우에노 마사히코 / 박의우 : 별점 2.5점

독살 - 6점 우에노 마사히코 지음, 박의우 옮김/살림

일본의 저명한 법의학자이며 작가인 우에노 마사히코 박사가 본인이 실제 담당하였던 사건들을 가지고 저술한 책입니다.

일단 전문 법의학 서적처럼 어렵고 자세하게 기술했다기 보다는 일반인도 쉽고 재미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저술한 노력이 돋보입니다. 책도 작고 콤팩트 한 것이 이쁘장하기도 하고요. 또한 일본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훝어보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선사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와카야마 현의 마을 축제 카레에 섞인 비소로 67명이 구급차로 실려가 그 중 4명이 사망한 사건이라던가, 전쟁 직후 제국은행 독살 강도 사건, 신주쿠 역 청산가스 사건, 글리코-모리나가 사장 납치 사건, 그리고 유명한 옴 진리교 사린 가스 사건 등 다채로운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또 전문 법의학자의 저서이니만큼 몇몇 사건에서의 추리적인 시각과 전개 과정은 꽤 괜찮았습니다. 자살인 것으로 알았지만 후에 타살로 판명된 사건, 사고사인줄 알았지만 결혼 사기범의 연쇄 살인극이었다는 사건 등이 있는데 개중 독특한 보험금 관련 사건을 하나 소개해 보죠.

"사업에 실패하여 거액의 부채를 짊어진 무역상이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호텔 4층 발코니에서 혼자 술을 먹다가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조사를 통해 그가 일본에서 거액의 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저자는 시체 소견을 통해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가 실수로 떨어졌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다양한 증거 (상처의 위치등을 토대로 한 떨어질때의 자세 재구성 등)를 제시하여 자살임을 밝혀낸다..."

하지만 너무 쉽게 쓰려한 탓에 전문적인 내용이 희박해지는 단점도 있고 개인의 신변잡기적인 글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 부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전체적으로 법의학 서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개인 수필집처럼 보이기도 해서 전문 도서를 원한 독자라면 실망할 책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저는 실망스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그래도 CSI 의 인기 이전에 기획되어 국내에 출간되었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반가운 일이기도 하고, 쉽게 쓴 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도 하니 저자의 다른 전문 서적을 기대해봅니다.

2020/04/10

로마 모자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이기원 : 별점 1.5점

로마 모자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월 24일 월요일 저녁 로마 극장. 인기리에 공연 중이던 연극 "건플레이"의 2막이 끝나갈 무렵, 좌측 LL32번 좌석에서 앉은 채로 독살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이름은 몬테 필드로, 변호사이지만 수많은 악행으로 유명했다. 수사에 나선 퀸 경감과 아들 엘러리는 피해자의 모자가 사라진 사실에 주목하는데.....

기념비적인 엘러리 퀸데뷰작으로 이른바 '국명'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엘러리 퀸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문체가 지나치게 딱딱하고 장황하며, 탐정인 엘러리 퀸의 과시욕과 허세가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의 저자 다카미 요시히사처럼 잘난 척 하는 탐정과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거죠. 이 작품은 그래도 데뷰작인 덕분인지 그렇게까지 허세가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이런저런 고전 속 대사를 인용하는 정도라 충분히 참을만 하더군요.

하지만 의외로,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에서 기대했던 추리적인 요소가 완전 실망스러웠습니다. 변호사이자 비열한 악당인 피해자 몬테 필드의 시체 옆에는 그가 쓰고 왔을 모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게 핵심 요소인데, 엘러리는 '범인이 몬테 필드의 모자를 자기 것 대신 쓰고 갔고, 범인의 모자는 극장 안에 남아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즉 연극 소품의 모자일테니, 연극 배우가 범인이다'라고 추리합니다. 그런데 모자를 겹쳐서 쓰거나, 자기 모자 안에 몬테 필드의 모자를 어떻게든 구겨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모자를 구겨서 품 안에 넣을 수도 있었을 테고요. 몬테 필드가 쓰던 모자는 크고 화려하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런 모자를 쓰면 눈에 더 잘 띄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꼭 배우인 스티븐 배리가 아니라 극장 지배인이나 극장 홍보 담당자 등이 범인일 가능성은 왜 배제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티븐 배리만 사건 당일 극장 밖으로 나갈 때 양복을 입고 있었다는 설명이라던가, 초반에 꽤 중요하게 언급했던 머리 크기에 대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에의 도전'이 있기는 하지만, 책에 등장한 정보만으로 범인을 특정하기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게다가 몬테 필드가 모자 안에 협박에 사용한 서류를 넣고 다녔다는 설정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몬테 필드는 협박 대상자와 같은 수의 모자를 구입한 뒤, 이를 비밀 장소에 숨겨 놓고 협박 대상자를 만날 때 마다 비밀 장소에서 모자를 꺼내어 쓰고 나갔다고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런 비밀 장소가 있었다면, 서류만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가지고 가면 되잖아요? 왜 비싼 모자를 다수 구입해 가면서 그 안에 서류를 숨겼을까요? 마지막으로, 묘사만 보면 당시 신사들이 모자없이 다니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나 본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도 잘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모자를 중심으로 추리가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한 추리와 설정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 외의 여러 등장 인물의 묘사도 불필요한 부분이 많고 지루했고요. 어차피 극장 내 관계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에서, 극장 외 다른 인물들로 분량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독살에 사용된 테트라에틸납이라는 독약은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휘발유에 첨가되기 시작한 물질로, 작 중 전문가 존스 교수에 따르면 독살에 굉장히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색투명하고 오로지 희미한 냄새만 나지만 독성은 강력할 뿐 아니라, 양조용 증류 장치만 있으면 휘발유를 가열하여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완벽한 독약은 본 적이 없는데, 왜 다른 작품에 사용되지 않았을까요? 궁금해집니다. 참고로 테트라에틸납은 오래전에 첨가되던 물질로 지금은 모두 퇴출되었다니, 혹시라도 시도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독특한 독약의 존재가 작품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작가와 탐정의 데뷰작이라는 역사적 가치 때문에 0.5점을 더했을 뿐 그 외의 다른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준이 그닥 높지 않은 편인 국명 시리즈 중에서도 최악으로, 엘러리 퀸의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11/06/11

3막의 비극 - 애거서 크리스티 / 강남주 : 별점 2점

3막의 비극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강남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한 유명 배우 찰스경이 주최한 파티에서 교구목사 배빙턴이 의문사했다. 찰스경은 살인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런 동기가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비슷한 상황에서 찰스경의 친구인 의사 바솔로뮤경이 독살당했고, 찰스경은 친구 새터드웨이트, 그를 흠모하는 아가씨 에그와 함께 사건 진상 추적에 나섰다. 그런 그들 앞에 조력자로 에르큘 포와로가 나타나는데...

에르큘 포와로 시리즈로 1935년에 발표된 23번째 작품입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필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쓰인 작품이죠.

연이어 벌어지는 세 건의 독살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정교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사건에서 "독살된 피해자가 마시던 잔에는 독이 없었다!"라는 상황을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트릭을 사용하여 구현했다는건 만족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하기 위해 살인극을 이용했다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나 작품의 핵심인 '집사 엘리슨의 정체'의 해답이 변장이었다는건 실망스러웠습니다. 직전에 읽은 "13인의 만찬"보다는 현실성이 더 있긴 했지만,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신분을 감추고 몇 주 동안 다른 사람인 척한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했어요. 특히 변장까지 해 가며 실행한 살인극의 무대가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지들 앞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개연성이 떨어지고요. '손님들은 집사나 하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심리적 트릭이 결합되었을 수는 있지만, 몇 주 동안 함께 생활한 동료 하인들까지 속일 수 있었다는건 아무리 명배우라도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 명에게는 정체를 들키기까지 했으니, 더욱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치밀한 계획과 잔인한 수법에 비해 범인의 동기가 약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정신병원에 감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범행의 주된 동기였지만, 주변 인물들 — 특히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취미라는 새터드웨이트조차 - 이러한 성향을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인의 계획과 살인의 동기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마무리된 점도 문제고요.

그 외에도, 찰스 경의 본명에 대한 정보 역시 설득력이 부족했고, 탐정을 흉내 내며 사건을 키운 이유도 명확하지 않았습니다.(만약 첫 번째 사건 없이 두 번째 사건만 저질렀다면, 극작가 윌슨 양에게 정체가 드러나긴 했겠지만 포와로의 개입은 막을 수 있었겠죠.) 또한, 범죄를 뒤집어쓸 희생양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범인이 포와로를 가장 먼저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헛점입니다.

헤이스팅스에 비하면 너무 신사인 척하는 새터드웨이트도 비중에 비해 하는 일이 없어서 왜 등장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새터드웨이트는 포와로 시리즈의 조력자 역할보다는 "할리 퀸" 시리즈 쪽이 더 어울리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적으로, 평작 수준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같은 해 발표된, 비슷한 아이디어가 사용된 "ABC 살인사건"보다 완성도가 낮고, 이야기와 전개도 다소 평이합니다. 형제작이라 불러도 될 만큼 유사한 작품이지만, "ABC 살인사건"이 훨씬 더 정교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이 작품보다는 "ABC 살인사건"을 추천드립니다.

2017/09/14

누런개 - 조르주 심농 / 임호경 : 별점 2.5점

누런개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브르타뉴의 항구 도시 콩카르노에서 지역 유지 모스타구엔이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메그레 반장이 부하 루르와와 함께 수사를 위해 현장으로 향했지만, 모스타구엔의 절친이며 항상 라미랄 호텔에서 만나던 지인들인 장 세르비에르, 르포므레가 각각 실종되고 독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또 다른 지인 닥터 미슈까지 구금된 상황에서, 메그레는 서서히 사건의 진상에 접근해 가는데....

'열린책들'의 메그레 시리즈 5편입니다. 메그레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지요. 과거 국내에서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읽어봤었지만, 너무 옛날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던 차에 알라딘의 15일간 무료 대여 이벤트 기회를 통해 다운로드 받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역시나, 대표작은 대표작이네요. 메그레 시리즈의 모든 장점이 잘 드러나 있는 덕분입니다. 우선 당대 프랑스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패하고 방종한 지역 유지들과 피해자인 엠마, 레옹 커플의 비참한 삶과 현실을 대비시키는 부분은 백미이고요. 사회의 모순, 가진 자들의 횡포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시공을 초월한 사회파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아울러 사건 현장마다 나타나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자극하는 누런개를 둘러싼 긴장감도 잘 드러나고요.

또 인간 심리를 깊게 파고들어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메그레 반장의 능력도 유감없이 펼쳐질 뿐 아니라, 그동안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었던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다르게 메그레 반장의 추리법인 '소거법'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반장은 모스타구엔 사건, 라미랄 호텔 독살 미수 사건, 장 세르비에르 실종 사건, 르포므레 독살 사건에 대해 각각 범행이 가능한 인물을 설정하고, 여러가지 이유를 통한 소거법으로 결국 범인을 추리해내지요.

진범 닥터 미슈에게 단두대 행이 아니라는 것은 아쉽지만 나름의 응징이 가해지고, 불행했던 엠마 커플이 단란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 대부분인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 사뭇 분위기가 다른데, 저는 이런 결말이 더 좋더라고요. 고생은 이미 할 만큼 한 엠마에게 더 이상 괴로운 일이 없었으면 했으니까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전개에 있어 작위적인 부분이 눈에 많이 띕니다. 초반부, 페르노에 다량의 스트리크닌이 함유된걸 닥터 미슈가 알아챈게 대표적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는 순전한 우연에 불과해서 정교한 맛은 부족합니다.
메그레 반장이 옥상에 숨어 엠마와 레옹 커플의 애정 행각을 엿보는 동안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레옹이 진범이 아님을 눈치챈다는 것 역시 완전한 우연입니다. 또한 이 때 레옹의 은신처를 알아낸 방법도 설명되지 않고, 결국 마지막 추리쇼에서 진상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는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것 역시 단점이고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추리적으로 괜찮다고 해도 메그레 시리즈 기준이지 일반적인 추리소설 기준으로 보면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지금 읽기에 낡았다는 것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고전으로서, 또 유명 시리즈의 대표작으로서의 가치는 아직 유효합니다. 고전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0/11/16

셜록 홈스의 과학 - E.J 와그너 / 이한음 : 별점 4점

셜록 홈스의 과학 - 8점
E. J. 와그너 지음, 이한음 옮김/한승

제목만 보면 셜록 홈즈가 등장해 다양한 과학 상식을 설명하는 교양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일부를 인용하며 당시 과학 수사—즉, 법과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한마디로 법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미시사 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총 13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주 자세한 내용까지 다루지는 않지만 과학 수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또한, 다양한 사건 사례가 풍부하게 실려 있어 자료적 가치와 재미를 모두 충족시키는 보기 드문 책이었습니다. 특히, 모든 내용을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에피소드나 대사를 인용하며 설명하는 방식이 홈즈 팬들에게는 더욱 반가운 요소였습니다.

다만, 과학 수사 초창기에서 셜록 홈즈의 전성기, 즉 20세기 초반까지의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어 그 이후의 발전상을 심도 있게 알기는 어렵다는 점, 그리고 참고도서로 보기에는 도판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래도 별점은 4점. 과학 수사의 역사에 대해 이만한 책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과학 수사에 관심 있으시거나 다양한 사건 사례를 접하고 싶으신 분들께 꼭 추천드립니다.

"사자와의 대화"

시체를 분석해 범죄를 해결하는 법과학의 역사를 다룹니다. 사망 시간의 추정, 부검 및 해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죠.

특히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19세기 후반 헝가리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린 하녀가 실종된 후 유대인들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박해받던 중, 익사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깨끗하게 보존되어 실종된 하녀가 아닐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이후 세밀한 부검을 통해 뼈의 성숙도로 나이를 판정한 결과, 시신이 깨끗했던 이유가 피부의 진피층이 떨어져 나간 것과 강물이 차가워 시신이 3개월 동안 잘 보존되었기 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야수 이야기와 검은 개"

"바스커빌가의 개"를 토대로,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고대 민담과 전설에서 비롯된 수상한 사건들을 설명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평이했지만, 마지막에 소개된 사례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사건에서 주인이 살해된 현장에서 죽은 채 발견된 앵무새의 부리에서 살인자의 피를 채취해 범인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는데, 용감한 앵무새가 범인을 공격한 덕분이었습니다!

"옥에 티"

곤충과 범죄 수사의 연관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이 왜 "옥에 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분야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파리가 잡은 범인"을 함께 읽어보시면 더욱 흥미로울 것입니다.

"독살의 증거"

제목 그대로 독살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또한, 시체에서 독을 검출하는 방법, 특히 비소 검출 기법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얼룩끈"에서 뱀의 이빨 자국을 통해 해결한 사건을 예로 들며, 피하 주사 흔적을 발견해 독살 사건을 해결한 사례를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단서를 실제 사건과 연결해 설명해 주니 더욱 흥미로웠거든요.

"변장과 수사관"

비도크를 중심으로 변장과 관련된 실제 사례를 소개합니다. 비도크의 활약도 대단하지만, "가짜 경감 듀"로 유명한 크리픈 사건(정부를 아들로 변장시켜 도주했던 사건)도 다루고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내용은 심하게 절뚝이는 범인을 잡기 위해 그의 변장을 간파하고, 범인이 특수 구두를 신었을 것이라고 추리한 사립탐정 헨리 고다드의 활약이었습니다.

"범죄자의 초상"

범죄자의 신원 파악을 위한 방법의 발전 과정을 소개합니다. 초기에는 문신이나 흉터를 기록하는 수준에서 시작하여, 이후 사진술, 베르티용 측정법을 거쳐 지문 감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마지막에 소개된 사건이 인상적이었어요. 1920년대 리옹에서 대낮에 열린 창문을 통해 여러 물건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이 매우 독특했습니다. 이랑이 모두 수직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범인은? 놀랍게도 원숭이였습니다! 한 편의 추리 소설 같은 이야기였네요.

"오물"

범죄 현장에서 발견되는 먼지와 오물에 대한 법과학적 분석을 다룹니다. 1904년 독일에서 벌어진 재봉사 살인 사건에서는 범인의 손톱 밑 찌꺼기를 긁어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관련된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중 놀라운 사건은 자신을 흡혈귀라 주장한 영국의 존 조지 헤이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피해자를 황산에 녹여 증거를 없앴다고 확신했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조약돌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조약돌은 피해자의 담석이었고, 담석은 황산에 녹지 않았던 것이죠. 이런 기막힌 반전이야말로 현실이 소설보다 놀랍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화, 의학, 살인"

19세기 범죄 수사에 영향을 미친 여러 기상천외한 이론들이 등장합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언급된 '골상학'이나 '범죄 유전 이론'을 비롯해, 자위행위가 해롭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등장한 황당한 치료법들, 흡혈귀에 대한 미신, 살해당한 사람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보존된다는 믿음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렸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지병인 고혈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분입니다.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요.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또 미스 마플의 은밀한 탐정 활동도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입니다.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든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세 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은 설득력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는 컸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 모양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