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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저스트 고고! 1~32 - 라가와 마리모 : 별점 3점

Just Go Go! 저스트 고고! 32 - 6점
라가와 마리모 지음/대원씨아이(만화)

중학 육상계의 스타 이데 노부히사는 다카다 히나코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가 다니는 마쿠노가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테니스를 시작한다. 한때 유명한 주니어 선수였던 타키타 루이 역시 마쿠노가와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테니스부에 가입한다. 이 둘을 중심으로 한 청춘 테니스 성장기 시작!

연말연시 연휴를 이용하여 완독한 작품입니다. 상당히 오래전에 읽기 시작했었고, 작년 초에 만보님 포스트를 보고 꼭 찾아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늦었네요.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때에는 사실 순정만화가의 스포츠물이라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기와 나"나 "언제나 상쾌한 기분"에서 접했던 잔잔한 개그에 대한 기대가 더 컸었죠. 그런데 주인공 두 명을 비롯한 다른 모든 동료들, 선수들, 친구들이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는 성실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밝고 건전한 청춘의 모습에 테니스라는 소재가 잘 더해진, '청춘 스포츠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재미있는 결과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댓가를 얻는다"라는 당연한 명제를 잘 그려낸 성장기로도 훌륭하고요.

또 타키타 루이와 이데 노부히사는 각각 '완성된 기계'(서태웅)와 '타고난 체력과 천재성으로 성장해 나가는 초보자'(강백호)라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 주인공이지만, 약간의 설정(루이는 유명 테니스 선수의 아들, 이데는 육상계의 슈퍼스타)과 함께 톡톡 튀는 대사, 여러 가지 상황극으로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해요. 순정만화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특출난 편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냥 바보인 이데보다는 츤데레 왕자 루이 쪽이 더 마음에 들기는 했습니다만….

메인 러브라인인 이데 - 히나코 커플의 완성, 그리고 나머지 커플들도 될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마무리한 완벽한 해피엔딩도 흐뭇하며 (루이 - 마코 / 슌 - 나디아 / 밀레뉴 - 코유키 등) 개그도 충분히 기대에 값합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순정만화 특유의 복잡한 가정사가 타키타 루이, 사세코 슌 모두에게서 선보인다는 점, 메인 히로인인 히나코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못한 점, 마지막으로 등장인물들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자세하게 펼쳐 보이는 점입니다. 마지막 단점은 특히나 최종 보스 사세코가 마지막 전국체전에서 이데와 타키타 두 명에게 차례로 패배하는 것에서 그 정점을 찍는데, 그냥 이데 - 타키타의 결승전만 그리는 게 나았을 거예요. 현실적으로는 이미 프로 진출하여 나름 세계에서 싸워온 사세코가 이 두 명의 레벨과 같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죠. 에필로그도 여운을 남기기에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생각되고요.

또한, 테니스 장면의 박력은 잘 그려내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순정 만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탓이지요. 물론 시합 장면 자체는 긴박감이 넘치고, 주인공들이 별다른 "필살기" 없이 순수하게 정석적인 랠리로 포인트를 쌓아 나가는 패턴이 나쁘다고 하기는 어렵긴 합니다. 마지막 전국체전 결승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연출을 보여주고요. 허나 "테니스"의 연출보다는 여러 가지 심리, 배경묘사 덕이 큽니다. 스포츠물이라면 기술에 대한 묘사는 좀 더 들어가는 게 좋았을 거에요.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밝고 건전한 청춘 스포츠물의 왕도를 걷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쌈질만 하는 청춘물, 필살기와 특훈과 근성으로 포장된 흔해빠진 배틀 스포츠물에 질리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7/04/15

몽키 턴 1~25 - 카와이 카츠토시 : 별점 3점

몽키 턴 25 - 6점
카츠토시 카와이 지음/세주문화

카와이 카츠토시의 히트작으로, 경정을 소재로 하여 청춘들을 그린 스포츠물입니다. 단행본으로 25권이나 되는 장편이지요. 

내용은 크게 3개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인공 겐지가 경정 선수가 되기 위해 입문하는 경정 학교 시절, 선수로 첫 더비 킹이 되는 이야기, 큰 부상을 입은 후 복귀하여 연말 상금왕 레이스를 우승하는 이야기로요.
스포츠 세계를 무대로 각자 주특기가 있는 주인공과 친구, 라이벌들이라는 캐릭터 설정과 주요 시합을 핵심 이벤트로 진행하는 전개, 그리고 주인공이 나름 천재이며 첫 등장부터 소꼽친구가 있는 커플이라는 점은 작가의 전작인 "캠퍼스 라이벌"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전 히트작의 단순 반복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경정'이라는 잘 모르는 세계를 정말로 자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경정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이 작품 이전, 이후 모두 전무후무하다 할 정도로 독특한데, 단지 새롭기만 한게 아니라 나름의 재미도 확실하게 선사해 줍니다.
물론 '보트'를 타고 물에서 진행한다는 점 외에는 흔하게 보아온 레이싱 물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머신의 성능과 드라이버의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장르니까요. 그러나 보트와 물이라는, 이 차이점을 극대화한 전개에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이 더해져 남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나름의 두뇌 게임이 펼쳐지는 것 역시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요. 주인공 겐지가 5km 더 빠른 라이벌 도구치의 신형 페라를 더비 경주에서 이기고 더비킹이 되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유도'에 미쳤던 전작 등장인물들에 비하면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등 주인공들의 사랑과 청춘이 보다 자세하게 그려지는 식으로 인간관계, 드라마가 훨씬 복잡해진 것도 마음에 들어요. 조금 가볍고 유쾌한 주인공과 그에 대항하는 쿨하고 과묵한 느낌의 천재 라이벌(심지어 좋은 가문!)이라는 인물 설정은 스포츠물, 청춘물에 흔히 나오는 뻔한 설정과 구도이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첫 등장시점부터 주인공의 커플이 완성되어 있다거나 정말로 나쁜 악당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등 작가만의 독특한 요소가 덧붙여져 차별화되고 있으니가요. 개그 요소도 적절한 편이고요.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한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뻔하고 진부한 설정, 전개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소재에 작가의 능력이 더해져 평균 이상의 재미를 전해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4/11/06

족구왕 (2013) - 우문기 : 별점 3점

학점도 별로에 토익 점수도 없는 식품영양학과 복학생 홍만섭. 그는 주변 사람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진할 때 "족구"와 첫눈에 반한 캠퍼스 퀸 안나에게 젊음을 건다.

족구를 소재로 한 청춘 스포츠 판타지 영화입니다. 전공과 무관한 공무원 시험 준비에 이성 친구는 만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학자금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전념하는 고단한 대학생들 모습에서 시대와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만섭이 학자금 대출 문제로 등록을 하지 못하고, 캠퍼스 킹인 강민도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허세만 부릴 뿐 고시원에 거주한다는 등의 현실의 벽 역시 끝까지 해결되지 못하고요.

그러나 이러한 것을 '족구'로 대표되는,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젊음이라는 에너지의 분출로 보듬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청춘예찬"이라고 생각됩니다. 암담한 삶이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것에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은 항상 멋있고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또 이러한 열정 분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족구"이기 때문에 스포츠물로서도 제법 볼거리가 많습니다. 강력한 라이벌 → 위기 → 각성 → 조력자의 등장 → 필살기와 함께 결말이라는 전형적인 열혈 스포츠 왕도물인데, 왕도물다운 몰입감이 제법이며 족구 시합 장면도 마지막의 허황된 필살기 말고는 꽤 설득력 있게 구성되어 있거든요. 중반에 등장하는 창호와 만섭의 더블 킥 장면이 대표적이겠죠.

그 외에도 "족구하는 소리 하고 있네"와 같은 대사들도 찰지고 코믹 요소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등장인물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게 캐릭터가 확실히 잡혀 있는 등 디테일도 빼어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어 수업 시간에 배트맨과 베인의 대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 대학생다운 아이디어 같았어요.

하지만 학교 이사장 - 학교장의 대립 같은 요소 등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 등 완성도 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얻은 것은 없다는 결말(벤츠?)도 씁쓸했고, 무엇보다도 영어 수업시간에 고백한 대로 정말로 미래에서 왔다는 엔딩은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제작진의 의도가 이런 불순한 청년은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고,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는 판타지구나 싶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현실이 슬프네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오랜만에 보는 돌직구 같은 청춘물로 재미와 주제의식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꼼꼼히 따져보면 부족한 점도 제법 있지만 인생 뭐 있습니까, 복잡하게 살지 말고 좀 쉽게 좀 살아야죠.
어렵고 힘들더라도 젊은 청춘들이 짧은 한때나마 무언가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아울러 독립영화 제작사 광화문시네마의 건승을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

2025/10/12

망각배터리(2024) - 나카조노 마사토 : 별점 3점

나카조노 마사토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TV 애니메이션 시즌 1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흔히 스포츠물이라 하면 진지하거나 극적인 시합 연출에 치중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청춘과 개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나름대로 야구라는 소재의 매력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캐릭터들의 개성 또한 매력적입니다. 투타 이도류 천재 키요미네는 외모와 분위기만 보면 완벽한 알파메일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큰 웃음을 줍니다. "야구는 내가 던지고, 케이가 받고, 내가 쳐서 이기는 게임이다."라는 명대사는 그의 캐릭터를 단번에 설명해주지요.
기억을 잃은 포수 카나메 케이는 엉뚱한 대사로 분위기를 이끌며, 야마, 아오이, 슌페이, 츠치야 같은 조연들도 스테레오타입에 가깝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잘 뒷받침합니다. 이들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좌절을 이겨내는 전형적인 청춘물스러운 서사도 작품과 잘 어울리도록 풀어내고 있고요.

이들이 어우러진 팀 구성도 괜찮습니다. 키요미네의 공을 왠만한 고등학생 선수가 외야로 보내기는 힘들테니 내야 수비가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핵심인 유격수, 2루수에 재능을 몰아넣고 이들의 공을 어떻게든 잡을 수 있는 야마를 1루수로 기용하는건 좋은 선택입니다. 

여자 캐릭터나 연애 요소를 넣지 않고 야구와 개그에만 집중하는 방향성도 좋으며, 작화도 꽤 안정적입니다. 야구 장면도 몰입할 수 있도록, 어색하지 않게 깔끔하게 그려낸게 돋보였어요. 케이의 기억 상실과 관련된 상황을 미스터리물 식으로 - 밤에 보던 애니메이션과 바보가 된 후 언행과의 연결 - 표현한 것도 흥미로왔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기억상실로 인해 케이가 바보가 된 상황 설정은 아무리 개그를 위해서라지만 억지가 심합니다. 솔직히 케이의 바보짓(가슴털~)은 별로 웃기지도 않았어요. 아오이와 슌페이의 과거사는 평면적이고 전형적이어서 다소 심심했고요.

그래도 청춘과 야구, 개그를 잘 버무려낸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가볍게 웃으면서도 스포츠물로의 재미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2/23

아가페이즈 - 야마다 레이지 : 별점 3점

아가페이즈 6 - 6점
레이지 야마다 지음/세주문화

비쥬얼 록밴드 "에로스"의 리더인 미즈키 유리는 천재 기타리스트 및 작곡가로 언더그라운드의 카리스마로 까지 불리우는 인기인이지만 16년동안 자신이 호모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된 불량조직 카르마 레인의 리더 우즈메는 유리에게 연민을 느끼고 유리가 짝사랑하는 야구부 스타 카네다 토라키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유리를 도와주고자 한다. 

하지만 얇은 선수층과 콩가루같은 팀 분위기라는 악조건에서 큐세이 고교를 갑자원에 진출시키기 위해 홀로 팀에서 고군 분투하는 토라키를 위해 유리가 야구로 도와줄 생각을 하고 전설의 풍수사 "세이메이"를 찾아가게 되면서 부터 모두의 운명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풍수마구 5행 5종을 익히게 된 유리는 마구를 하나 던질때 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게 된다는 계약을 하게되고 마구를 계속 던져간다. 기타 연주력, 작곡능력 등을 차례로 잃어가다가 최후의 마구 1개를 남기고 마지막 남은 계약대상인 유리의 목소리만이라도 지키기위해 우즈메와 토라키를 비롯한 팀원들이 힘을 합치지만 결국 지구대회 준결승에서 최후의 핀치에 몰린 유리는 토라키와의 대화끝에 마음을 정리하고 최후의 마구를 던지게 된다...

도대체 이 만화의 쟝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얻은 비쥬얼 호모 열혈 고교야구 청춘 게이 애정 멜로 만화랄까요?

그동안 주류 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모든 코드들을 조합해서 16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면서도 실제적으로 드라마의 무대는 고교야구 지구 예선으로 설정하여 진행하는 엄청난(!) 만화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아다치 테츠의 만화 "세븐틴 러브"가 일단 연상되더군요.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문란한 사생활, 거기에 현란한 대사와 독백이 난무하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제대로 된 어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각각 어두운 가정환경과 주위 환경에 시달리며 여러 비정상적인 생활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도 비슷하네요. 그리고 대충 그린듯한 그림도요.

하지만 이러한 요소는 일부 막나가는 청춘물이나 성장물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왔던 점이라 이 작품만의 독특하거나 특별한 점으로 보기에는 힘듭니다. 결정적 차이점이자 이 작품만의 특징이 있다면 이른바 "청춘애정물"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풍수"와 "야구"라는 황당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서 말이죠.

이 작품에서 이질적인, 제대로 된 어른이 유일하게 붙어있고 재능과 어느 정도 행복한 가정이 있는 존재인 토라키(와 토라키와 연결되는 야무) 만을 제외한다면 작품안에서 크게 진행되는 두개의 사랑의 흐름, 우즈메->유리->토라키->야무->유리마츠오->다키니->류추다 라는 두개의 사랑 모두 당사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첫번째는 주 당사자인 유리는 호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특히 토라키) 노멀이라는 것 때문에, 두번째는 다키니의 죽음 때문에 당사자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지요.

또한 진정 자신에게 소중했던 모든것을 토라키를 위해 버린 유리의 경우를 비롯하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풍수의 이론 (등가교환의 법칙?) 때문에 모두들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전개는 이들의 상처를 더욱 깊고 암울하게 합니다. 이렇게 흡사 인과율의 법칙처럼 정해진 파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는 파국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베르제르크"와도 유사한 전개로 비슷한 전율을 안겨다 줍니다.

혹시 어디서 본듯한 설정이라고요? 최관->현지->오혜성->엄지->마동탁 이 생각나지 않나요? 무엇보다 최근에 거의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인 유리, 즉 오로지 사랑때문에 자신을 파괴해가는 모습은 흡사 엄지를 위해 장님이 되면서까지 시합에 져주기 위해 발광하는 오혜성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집니다. 그러나 오혜성과 미즈키 유리의 차이점은 오혜성은 사실상 더 잃을것이 없었지만 유리는 사랑을 위해서 가진 모든것을 잃게 된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도 결국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엄청난 점수차로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모든것을 희생하여 진출한 갑자원 1회전에서 무참하게 패하는 큐세이의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당연했지만 너무나 어둡고 비극적인 끝맺음이었죠. 때문에 대충 그린듯한 그림체에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더 비장하고 더 암울한 이야기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권에서 모든것을 잃게된 후 각자 스스로의 처지를 알게 되어 행복을 위해 다시 모인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유리의 마지막 피칭로 끝나는 8권정도에서 끝맺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의 전개는 에필로그-후일담 형식의 후반 이야기가 너무 길어 상당히 처지는 편이라서요. 차라리 음악을 포기하고 말없는 풍수 마구 투수로 프로를 재패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음악에 대한 집념과 천재적인 음악성에 대한 묘사가 설득력이 부족해서 마지막 부분에서의 비장함이 약해 8권까지 꾸준히 달려주던 감성이 좀 무뎌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단점을 지적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고교 청춘 애정물이면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전편에 걸쳐 명장면과 명대사가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심각한 대사와 전개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특유의 개그와 과장을 계속 선보여서 이질적이고도 해괴한, 하지만 작품에는 너무나 어울리게 구성하는 센스는 놀랍습니다. 아쉽게도 야구만화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설정과 잘 조합된 마구의 특성과 던지는 법,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라이벌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흡사 20여년전의 야구만화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작품 자체도 스토리는 황당무계하지만 사람을 잡아 끄는 매력이 특출나서 몇번이고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작품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그림만 조금 더 좋았더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었을텐데 아쉽군요. 뭐 그나마 요새는 구하기도 힘든 절판도서가 되어버렸지만요... 

개인적인 명장면 베스트...최후의 투구를 앞두고 토라키와 유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너 이 시합전에 자신이 게이라고 얘기했어.. 대답해 유리... 너...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싸워온거냐..?"
"핫 핫 하" 
[물론이야...] "바보-" 
[아주 좋아하고 있어] "시시껄렁한 소리 다 듣겠다" 
[너는...] "미안하지만..." 
[나의 전부야..]"내 타입이 아니야"

2006/07/15

쭉쭉빵빵 꽃미녀 탐정단 (전 18권) - 키타자키 타쿠 : 별점 2점

스피드 걸이라는 만화로 조금 알려진 키타자키 타쿠의 정통(?) 추리 만화입니다. 

일단 간단하게 추리만화에 대해 썰을 좀 풀어보자면, 추리 만화는 그동안 많이 있었고, 특히 추리강국 일본에서야 데즈카 오사무가 초기부터 쟝르물을 시도했을 정도로 그 저변이 깊고 넓습니다. 하지만 요새와 같이 하나의 "쟝르"로서 정의되고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 나온건 아무래도 "긴다이치 소년의 사건부 (소년탐정 김전일)" 대박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어요. 이후에 나온 이른바 "시리즈" 작품만 해도 한두개가 아니며 그 중에서도 "긴다이치 하지메" 처럼 누구누구의 후손이 활약한다는 이야기만 해도 제가 본 것만 두, 세개는 넘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시리즈는 유행에 편승했을 뿐 성공한 작품이 거의 없습니다. 이유는 캐릭터나 추리적인 분위기만 유사하게 잡았을 뿐, 추리물의 기본 - 잘 짜여진 단서들, 정교한 트릭 등 - 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긴다이치 소년이 추리만화 쟝르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다른 유행에 편승한 작품들이 인기에 있어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 쟝르가 활성화 되는데 공헌한 건 "명탐정 코난"입니다. 조금 낮은 연령 취향의 설정을 가지고는 있지만, 나름대로 정교한 트릭을 선보이며 정통 추리물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며 긴다이치 소년과 추리만화의 양대산맥을 이루었지요. 긴다이치와 코난의 성공과 "학원 추리물"이라는 쟝르물로서의 확고한 자리매김으로 이후에 등장하는 작품들도 정해진 공식을 잘 따라 추리와 트릭만 뒷받침 된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쟝르로 인정받게 된 것 같습니다. 이후의 작품들로 준척급 이상의 성과를 거둔 작품은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나 "탐정학원 Q", "Q.E.D" 등이 있겠네요.

서론이 좀 길어졌는데 지금 소개할 이 "쭉쭉빵빵 꽃미녀 탐정단"도 이러한 "추리물"과 "시리즈물"이라는 정해진 공식에 충실합니다. 그 중에서도, 시리즈를 끌고가는 탐정 캐릭터의 독특함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성 3인조 아이돌 그룹 "TriColore"의 멤버인 시라세 아키라거든요. 여자라는 점과 아이돌이라는 신분이 타 추리물 탐정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독특하죠. 

주인공의 라이벌로 "괴도 리스트"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 역시 공식에 충실한데 김전일의 괴도신사나 코난의 괴도 키드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거기에 시리즈 중반 이후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작품 전체를 꽤뚫는 악역인 - 김전일의 요이치나 코난의 검은 코트의 사나이들에 대응하는 - 연쇄살인마 "산타클로스"의 존재마저도 공식대로입니다. 

또한 옴니버스 시리즈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TriColore"가 연예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큰 기둥 줄거리를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됨으로서 단편물로서만이 아니라 긴 호흡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며, 그 외에도 고교생인 아키라의 학교 생활이나 청춘물 같은 사랑 이야기, 협력자 격인 경찰, 여러 다양한 친구들 등 친숙한 설정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 공식에 충실하다고 다 좋은 추리만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공식보다는 추리, 그리고 트릭이 추리만화라는 쟝르의 가장 중요한 점인데 이 만화는 유감스럽게도! 정통 추리물에 걸맞는 멋진 추리적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동기나 배경 설명 등은 꽤 그럴싸하지만 본격적인 추리 부분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맥이 빠질 정도로 어이가 없거든요. 다이잉 메시지, 과학적 트릭, 공간이동 트릭, 밀실 살인 트릭 등 거의 모든 추리적 트릭이 등장하고 있지만 문제가 없는 트릭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간단한 사건들의 소박한 트릭이 더욱 와 닿는 것은 정말이지 안타깝기만 하네요. 작가가 굉장한 트릭을 구상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장면이 눈에 선하긴 한데 원체 트릭들이 한심한지라....

또 트릭이 별볼일 없는 데 비해 이야기가 너무 장황한 것은 작가 스스로도 그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겠지만 외려 이야기의 흐름을 지루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라세 아키라의 아버지가 고고학자라는 설정, 다른 멤버인 리나, 카나코의 가족 이야기들은 군더더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거든요. 시라세 아키라가 학교에서는 정체(?)를 숨기고 히유가 아키라라는 본명으로 안경하나 끼고 다니면서 정체를 숨긴다는 슈퍼맨같은 변장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하고요. 그 외에도 후반부로 가면 그림쪽은 확실히 좋아지긴 하지만 전작에 비해 뭔가 무뎌진 듯한 뎃셍 등 그림에서의 문제도 눈에 많이 띄는 것, 노출이나 므흣(?)한 장면들로 승부수를 던지는 것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추리할 때에는 찬물을 머리에 끼얹고 추리하는 아이돌 시라세 아키라라는 존재만으로도 인기 시리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긴 했습니다. 추리물을 제외한 부분은 여러 인물들의 애정 관계나 인물 설정, 그리고 아이돌에 관한 여러 디테일 등으로 비록 뻔하지만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부분이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주요 멤버인 카나코가 개인 사정으로 탈퇴하는 것으로 하여 그룹의 멤버 체인지를 한다던가,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주인공들의 헤어 스타일이 바뀐다던가 하는 디테일이 마음에 들더군요. 이러한 재미때문에 18여권에 이르는 꽤 긴 시리즈로 연재된 것 같지만 위에서 설명한 추리만화로서 가지고 있는 결정적 약점, 즉 트릭이 후지다!는 것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인기가 없는 것을 떠나 다른 어디서도 관련 글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마이너 만화이지만 추리 매니아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얼마전 완결편까지 전권 구입에 성공한 기념으로 리뷰를 남깁니다. 차라리 절판된다면 책의 가치가 본의 아니게 올라갈지도 모르겠군요.

2017/04/14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도진기 : 별점 2.5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6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는 미모의 중년 여인 김명진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명진은 20년 전 죽은 남편 신창순, 그리고 남궁현, 임의재, 한연우 네 명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나, 장난스러운 내기 끝에 신창순과 결혼했었다. 과거의 남자 세 명과 김명진의 동생 김해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움에 나섰다...

현직 판사이자 소설가로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 해도 무방할 도진기의 장편으로 시리즈 캐릭터인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합니다. 

제가 읽었던 이전의 '어둠의 변호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법정에 선 고진'의 활약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법정 미스터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속에서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재판을 통해 피고인을 유죄로 만드는데 정평이 난 실력자 조현철 검사와 불꽃튀는 대결을 벌이거든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서로 배심원을 설득하고, 재판을 유리하게 이끄는 배틀이 아주 볼 만 합니다. 조현철 검사가 은근슬쩍 끼워넣었던 거짓말 탐지기 조사 결과를 뒤집는 변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말싸움도 현란하기 그지 없고요. 작가가 현직 판사이기에 쓸 수 있었던 묘사들,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재판 속행과 보석 신청 등 모든 상세한 설정들이 그러합니다. 이 정도면 해외 유수의 법정 미스터리물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만 하지 않나 싶을 정도에요.

법정에서의 대결이 중심이라서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수많은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딱 한 가지 등장하는 트릭의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신창순 살해에 사용된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체가 발견된 이유와 범인 임의재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역업자라는걸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하우더닛" 물로서의 진가도 발휘됩니다. 결국 유럽에 있는 사람만 가능한 트릭이기에 범인이 임의재다!는 건데 꽤 설득력 있었어요.

지고지순한 일종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6명의 청춘들이 처음 만난게 격동의 1990년대라 더 와 닿았고요. 저 역시 1990년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지요. 이 사랑의 중심에 놓여있는, 작가의 이상형을 투영해 놓은 듯한 김명진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팜므파탈과 정 반대인, 순진무구한 천사같은 캐릭터를 잘 그려 놓았거든요. 작중 한연우의 표현을 빌자면, 오디오 기기에 취미를 갖는 사람들에게 마크 레빈슨 같은 존재랄까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작위적 장치들이 많이 거슬립니다. 너무 '소설'을 의식한 티가 물씬 났어요. 신창순이 아내를 학대하던 인간 쓰레기였다는 중요 정보를 나중에 밝히는게 대표적입니다. 살인의 가장 큰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변론을 맡은 변호사에게 그러한 정보를 숨긴건 말도 안돼지요. 임의재가 차용증을 가지고 김명진을 겁박하는 장면 역시 나중에 고진과 이우현의 인기척을 느끼고 쇼를 했다고 밝혀지지만 억지스러웠고요. 독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 묘사였습니다. 그 외 많은 부분에서 작가가 한연우를 범인이라고 유도하는 것도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트릭도 순간 이동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디테일은 그닥입니다. 1주일에 걸친 운송기간 동안 사후 경직으로 뻣뻣해진 시체를 어떻게 무마했을지가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상당한 재산가로 묘사되는 임의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현지 조사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강도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언급되는데, 누군가를 고용하는게 훨씬 쉽고 간편했을겁니다. 중국인들이 당한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처리되었을 확률도 높고요.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기가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20년이 흘렀습니다. 과거가 다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백야행" 시대에나 먹혔음직한, 자신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여자를 위한 순애보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에요. 그나마 "백야행"은 현재진행형이기나 했지, 20년 후에도 그렇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달리기 시합에 이어서 김명진이 술을 먹은 후 강제로 관계를 가진 탓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는 설정도 영 와닿지 않더군요. 1990년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덧붙이자면 심장 판막증이 있는 임의재가 장거리에 도전할 만큼 김명진을 사랑했다는 것도 작위적이라 별로였어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랑했다면 중간에 포기하면 안되는거잖아요? 차라리 뛰다가 쓰러져 기절이라도 하던가..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대 착오적인 순애보는 거슬리며, 작위적인 요소가 많아 감점하지만 미녀와 청춘,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고 법정 미스터리물로는 평균 이상은 되는 작품입니다.
블라디보스톡과 한국을 오가는 스케일도 크고 법정물로는 충분히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미녀의 존재도 확실하니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네요.

2023/09/27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16 - 이시구로 마사카즈 : 별점 3점


마사토끼 등 여러 리뷰어들에게 낚여서 이런저런 만화책을 구입하곤 했는데, 별로 성공을 거두지를 못해왔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다시 구입하기로요.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한게 바로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히트작인 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라 선택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천국대마경>>도 재미있게 감상하기도 했고요.

작품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더군요. 미치오 슈스케의 <<N>> 보다 앞서 시계열을 바꾼 전개를 시도했다는게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띄엄띄엄 발매될 때마다 한 권씩 읽었을 때는 쉽게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인데, 한 번에 읽으니 호토리의 헤어스타일 등으로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몰아 읽은 덕분에 대책없는 동네 말괄량이에서 '탐정'으로 성장해나가는 호토리를 비롯하여,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호토리의 도움으로 하나 씩 넘어서는 콘 선배 등 등장인물들의 성장도 눈에 더 잘 들어왔고요.
학원물로도 볼만했습니다. 예전에는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다시 읽어보니 수학여행, 학원제, 운동회, 부활동 등 청춘 학원물의 필수 에피소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부 합숙 정도만 빠져있는데 이건 등장인물들이 하리바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귀가부' 소속이기 때문인데, 대신 상점가 여행, 그리고 밴드 '메이즈' 활동이 등장하니 엇비슷하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초반의 번역은 아쉬웠습니다. 일본어 말장난을 억지로 한국말로 바꾼 탓에 "사나다 사카나 사라다 (사나다 생선 샐러드)"같은 언어 유희들이 사라져버리고 말았거든요. 후반부처럼 그냥 일본어로 쓰고 해석을 덧붙이는게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학원물, 청춘물, 추리물, 개그물 등 모든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주니까요.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추리물로 볼 수 있는, 추리가 핵심인 에피소드만 꼽아보며 글을 마칩니다. 
1권 
<<눈>>
모리아키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그린 기묘한 그림의 정체는?
호토리가 추리력을 발휘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 
가족들이 나눠 가졌다는 그림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2권
<<파자마 천사>>
화창한 날 정해진 시간에 선글라스를 끼고 정해진 장소에 나와 시간을 보내는 환자의 목적은?
일종의 일상계 추리물. 현장 조사만으로 풀 수 있는 수수께끼입니다.

4권
<<아라시야마 보물 조사단>>
시즈카 언니로부터 얻은 보물 지도가 품고 있는 보물은?
지도의 나무 그림과 강 형태가 일치하고, '황금 호수'는 안개에 덮인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진상 등 소소한 재미가 가득했던 작품. <<C.M.B>>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5권
<<시내 설방 이야기>>

타츠미야 시로를 찾는 온나 유키는 누구였나?
일상계라면 일상계, 말장난이라면 말장난.

<<학교 미궁 안내>>
학교 관찰 연못 속 괴수 메시의 수수께끼
경비 아저씨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소문으로 보였지만, 알고보니 진짜 괴물이 있다는 반전.

6권
<<환상의 소년>>

도랑 속 수박을 공으로 바꿔치기한 이유는?
일상계. "탐정 교훈 첫째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놈은 탐정으로서 실격입니다."가 딱 들어맞는 이야기.

8권
<<호토리와 수수께끼 왕국>>

판타지 세계에서 조세핀이 내 놓는 퍼즐을 풀어라!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레이튼 교수>>가 연상되는 판타지 퀴즈물.

<<대괴수 오야 고교에 나타나다>>
영화연구회에서 만든 촬영용 괴수 오야코돈을 부순건 누구?
추리물로 보기는 다소 부족했지만, 후쿠자와가 호토리를 '명탐정'으로 존경하게 되는 에피소드.

9권
<<대량구매 계획>>

베치코 과자는 어디서 만들어서 유통된 것인지?
추리물이라기보다는 SF에 가깝지만 시즈카 언니의 추적 수사는 볼거리.

10권
<<콘 데드엔딩>>

콘 선배가 방에서 살해한 사체를 힘을 합쳐 유기한다!
호토리를 위해 준비한 깜놀 이벤트. 나름의 반전도 좋았다.

<<Detective Girls 2>>
세탁소 아저씨 아라이는 어디로 사라졌나?
호토리의 추리에 탓층이 진심으로 놀라는 (그리고 호토리를 진짜로 인정하게 되는) 에피소드

11권
<<어둠 속에 도사린 목소리>>

옛 구민 센터 자리에서 있을리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토리가 타카부라는 별명의 아이를 착각했던게 진상. 
"탐정 교훈 첫째,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놈은 탐정으로서 실격입니다."

<<헌대판 얼룩 띠의 비밀>>
타케루의 친구 맛키가 줄넘기 줄에 다친 날, 친구들과 같이 쓰는 노트에 '긴 줄로 전원 죽인다'는 섬뜩한 문구가 써 있었다.
우연이 겹쳐 일어난 사건.

12권
<<호토리는 탁상 난로 안에서 추리한다>>

호토리 사촌이 취주악부 합숙을 갔는데, 스키장 통나무 집 1층 객실에 있을 남자아이들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1층이 2층이었다 - 눈에 파묻힌 1층이 있었다 - 는게 진상으로, 호토리 사촌은 2층을 1층으로 잘못 알았던 것. 추리 퀴즈에 가깝다.

13권
<<폐허촌>>

유령이 나온다는 폐촌 스사비 마을 탐험을 떠난 시즈카, 호토리, 콘은 마을에서 기묘한 조각상과 가면을 쓴 사람들을 목격하고 도주한다....
3부작으로 이어지는 긴 호흡의 모험 추리물. 재미와 흥미 모두를 갖춘 수작.

<<저주받은 비디오>>
오래전 영화 동호회 자료에서 발견된 수수께끼 비디오. 오야 고교의 이상한 풍경이 찍혀 있었다.
오야 고교 7대 불가사의를 찍었던 비디오로, 원래 불가사의였던 우물이 사라지고 화단이 새로 등장한 이유를 밝히는 조사로 이어진다. 세리자와 선생의 고백(?)으로 진상이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의 맛은 부족하지만, 일상계로는 나무랄데 없다.

15권
<<안경 행방불명 사건의 전모>>

안경을 잊어버렸던 토시코에게 돌아온 안경은 지저분해져 있었다. 수영 보충 수업을 받던 토시코가 사라졌던 사건과 관계가 있었다.
토시코에 빙의(?)한 호토리의 '메소드 추리'가 돋보인다. 일상계로는 나무랄데 없다 (2) 

16권
<<대사건>>
호토리가 협박장을 받았다. 모리아키 선생님과 사귄다고 착각한 누군가로부터였다.
과거 모리아키 선생님을 좋아했다는 여선생이 범인으로, 일상계스러운 추리에 더해 호러블한 작화가 인상적.
<<악>>
모리아키 선생님 할아버지가 남긴 붉은 그림에 블랙 라이트를 비추자 기묘한 그림이 떠올랐다.
1권의 주사위와 조합하여 금고를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암호였다는 내용.
암호도 재미있지만, 할아버지가 연구했던게 '사람을 죽이는 그림'이라는 진상도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까왔다.

2023/07/23

N - 미치오 슈스케 / 이규원 : 별점 2.5점 (2점에 가까운)

N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수록작들 대부분이 정통 추리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건이 많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등장한다 해도 전형적인 범죄물이나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탓입니다. 예를 들어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은 살인, 사체 은닉과 같은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범죄와는 별 관계없는 인간 드라마입니다. 살인범이 체포되지도 않고요.

그래도 드라마들은 괜찮은 편이고 재미도 있습니다. 인간 드라마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일상계 추리물 (이름 없는 독과 꽃), 성장기 + 청춘물 + 인간 드라마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가족 드라마 + 일상계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등 선보이는 장르의 폭도 넓습니다.
정통 추리물이 아닐 뿐, 추리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특히 <<이름 없는 독과 꽃>>은 작가 명성에 걸맞는, 괜찮은 일상계 추리물이에요. 학교 무대의 가벼운 일상계라는 점에서 요네자와 호노부 느낌이 살짝 들더군요. 결말은 전혀 달랐지만요.

그러나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는 과장 광고였습니다. 세계관과 무대, 등장 인물들이 겹치는 연작 단편 소설일 뿐이에요. 읽는 순서에 따라 대단히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작가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작품이 그걸 잘 반영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기는 힘드네요. 소설이라는 매체에 적합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읽은 순서대로에요.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고등학교 야구부원 신야는 보결이지만 매일 새벽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형 히데오는 고시엔 진출을 눈 앞에 둔 결승전 직전 무리한 포크볼 연습으로 팔꿈치를 다쳤고, 그 이후 자살했다. 신야는 형에게 악질 DM을 보낸 누군가가 보란듯 형처럼 자기를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죽어 버려"라고 말하는 회색 앵무 리쿠짱과 주인인 소녀 나가미 지나미를 알게되었다. 지나미가 죽고 싶어 한다는걸 눈치챈 신야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한 원양어선 선원 니시키모 씨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서 함께 빛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꽃을 보게 되었다.


학원물이자 성장기인 작품. 거대한 꽃을 보았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서로의 속 마음을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곤충 연구원인 나는 버블 붕괴로 전 재산을 잃은 연인 다사카에게 폭행을 당해왔다. 마침내 살해당하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니시키모라는 남자가 다사카를 막는 와중에 먼저 다사카를 죽이고 말았다. 니시키모는 원래 자신이 다사카를 죽이려 했다며, 사체 은닉을 도와준 뒤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경찰이 뒤를 쫓는 상황에서 다섯 줄기 박명광선이 만드는 거대한 꽃을 보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 뒤 나는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니시키모는 원래 빈집털이였으며, 다사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걸 알게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를 구해주었던 동네 소꼽친구였고, 주폭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떠올려 나를 구해주었던 것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에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원양어선 선원으로 나왔던 니시키모의 과거와 정체가 드러나는 작품. '나'와 니시키모의 오랜 인연이 함께 소개됩니다.
범죄물이기는 하지만, 주폭에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에 대한 슬픈 드라마라고 하는게 맞겠지요.
 
하지만 너무 생각대로 뻔하게 흘러간다는건 아쉽습니다. 자기를 한 번 도와준 정체모를 남자에게 푹 빠지고 마는 전문직 여성이라니, 너무너무 뻔하잖아요..... 조폭과 사랑에 빠지는 여의사가 나오는 20여년도 더 지난 신파 멜로물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일일 드라마도 이것보다는 의외성이 있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아일랜드에서 호스피스로 일하는 가즈마는 일러스트레이터 홀리의 터미널케어(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를 맡았다. 홀리의 착한 딸 올리아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기 위해 가즈마에게 시 글래스를 찾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올리아나와 홀리의 언니 스텔라 모두 시 글래스를 찾았다. 그러나 두 개의 시 글래스 중 한 개는 가즈마가 만들어서 놓아둔 것, 또 하나는 원래 스텔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시한부 인생, 소원을 비는 아이템 등은 <<마지막 잎새>>와 비슷합니다. 착하디 착한 사람들만 나온다는 것도요. 착하기 그지없는 올리아나에 대한 묘사가 특히 빼어났습니다.
지금 읽기는 다소 낡은 소재이지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런 서정적인 작품도 쓸 수 있는 작가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이름 없는 독과 꽃>>
중학교 교사 요시오카 리카는 펫 탐정일을 시작한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와 파트너 에조에 마사미와 함께 외딴 섬에 개를 찾으러 갔다가 3학년 학생 이이누마 가즈마를 발견했다. 가즈마는 섬을 찾은 이유는 독 미나리를 캐기 위해서였다. 리카는 가즈마가 어머니의 사고사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허튼 짓을 막기 위해 뒤를 쫓는다.

독미나리를 왜 캤는지?에 대해 조사해나가는 일상계 추리물. 추리 자체는 대단한게 없는데, 중학교 선생과 학생이 얽혔을만한 작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세이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너무 깹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급전개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아울러, 책 뒤 해설에서는 결말에서 사고사한건 펫 탐정들이 찾은 개로 착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됩니다. 개가 죽었다면 에조에가 리카에게 자책하며 꾸준히 돈을 보낼 이유가 없거든요. 더 결정적인 증거는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세이치의 부모도' 나를 벌하지 않았다는 묘사입니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저는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읽는 순서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전대미문의 체험판 소설이라고 광고하는건 무리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중학교 영어 교사를 하다가 은퇴한 '나'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어 회화 실력 부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잔돈을 구걸하는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빼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매개체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 어머니가 죽기 전 말했던 무언가에 대해 들었다.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소녀 몰래 상자를 열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귀국 후 조사하다가 알게된 건 소녀의 죽음이었다. 소녀는 상자 속에 무언가가 없어졌다며 패닉에 빠져 뛰쳐나갔다가 버스에 치였다고 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에서 착하디 착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소녀 올리아나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 이유도 "아이소어호리브르...."라고 말한걸 "I saw a horrible"이라고 이해했던 영어 교사 -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성실한 영어교사 니이마 선생 - 의 무식한 착각 탓이라니 더 입맛이 씁니다. 올리아나는 사실대로 "I saw a holy-blue" 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남의 소중한 상자를 몰래 열어본 행동은 용서가 안되고,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 그것도 영어 교사가 - '리' 발음과 '러' 발음을 헛갈린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자 안에 정말 나비가 들어있있는지, 니이마 선생은 보지 못했는데, 올리아나의 믿음에 의한 환각이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해서 답답했습니다.

본인이 만든 감동을 본인 스스로 무너트리는 이런 작품을 왜 썼는지도 모르겠고,. 이 작품만 읽으면 내용 이해가 힘들다는 점에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도시에서 50년 만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키 부부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사라진 개를 찾기 위해 여형사는 펫탐정 에조에를 고용했다. 꼬박 이틀에 걸친 수색 끝에 에조에는 사라진 개 부차티를 찾아냈다. 하지만 개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알고보니 살해범은 이웃집의 히키코모리 청년 게이스케가 수상하다고 했던 부부의 아들 다카야였다. 여형사는 게이스케의 어머니로 아들이 유죄라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개를 찾아 나섰었다....

<<이름 없는 독과 꽃>>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여형사가 아들을 의심한 나머지 증거를 인멸하려고 개를 찾아 나섰다는 동기가 밝혀지는 장면이 마음에 들었어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자책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런 부분에서 다 큰 어른이지만 의외로 성장기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게이스케와 다카야 증언과 상황이 뒤바뀌는 일종의 반전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헐겁습니다. 다카야가 했던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는걸 에조에가 초반에 눈치채지 못한 이유부터 석연치 않아요. 개와 함께 했던 유년 시절 경험으로 개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자인데다가, 펫 탐정일을 하면서 쌓아온 경력도 있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 거짓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반에 무의미하게 반대 방향을 돌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범인이건, 개를 없앤다고 증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닐겁니다. 범인이 체포된 이유도 개와는 무관했고요. 평범 이하의 범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수록작의 시간대별 순서는 아래와 같은데, 이대로 읽는게 가장 좋아보입니다.
  •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 <<이름 없는 독과 꽃>>
  •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제가 4를 가장 먼저 읽은 이유는, 에이스였던 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Touch>>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2023/07/17

오전 0시의 상드리용 - 아이자와 사코 / 신우섭 : 별점 2점

오전 0시의 상드리용 - 4점
아이자와 사코 지음, 카토기 마리 그림, 신우섭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유리탑의 살인>>으로 추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아이자와 사코의 데뷰작. 제 19회 아유카와 테츠야 상 수상작입니다. 이전에 아유카와 테츠야 상 수상작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은 다 읽어본 줄 알고 포스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빼먹었었네요. 서둘러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나' (스가와) 가 한 눈에 반한 마술이 특기인 미소녀 토리노와 함께 학교 내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전형적인 일상계 학원 청춘 추리물로, '마술'이 주요한 요소로 사용되는게 특징입니다. 
단편들이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연결된 연작이라는 특징도 있는데, 수록된 4편의 작품이 자살한 소녀 '후지이 아야카' 를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작답게 여러가지 복선들도 이야기별로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2화에서 기호 fff를 설명하면서 등장했던 16진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 이야기에서 결정적 단서로 써 먹는 식으로요.

그러나 미소녀가 뛰어난 마술사라는 만화같은 설정을 무리하게 도입한 것 치고는 마술이 그다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습니다. 등장하는 사건 중 마술로 트릭을 풀어내는건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거든요. 장황하게 트럼프 카드를 이용하여 설명을 펼치는 정도일 뿐, 실제 트릭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장기를 그리기 위한 소재에 불과할 뿐이에요. 이래서야 마술이 아니라 육상이든, 대학교 진학이든, 고시엔이건 마찬가지였을겁니다. 이 중 마술이 선택된건, 작가의 마술 지식 과시 외의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네요.
추리적으로도 빼어나다고 보기 힘듭니다. 일상계답게 사건들도 별 볼일 없지만, 애초에 사건도 아닌걸 괜히 유령을 가져다 붙여서 이상 현상처럼 보이게 만든 탓입니다. 2화가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밀실에 나이프로 이상한 문자를 남긴게 유령의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니었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합니다. 4화도 마찬가지에요. 후지이 야아카가 학교 인트라넷에 접속해서 소란이 일어난다는데, 이게 왜 사건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정 정보만 알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지인이건 가족이건 누군가 후지이 아야카의 계정을 아는 사람이 접속했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한거 아닐까요?

1화는 평범한 일상계스러운 추리물 분위기가 좋았고, 3화는 예지능력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괜찮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토리노에게 스가와가 진심을 고백하며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는 마무리는 괜찮았는데, 이런 식으로 마술을 좋아하는 소녀와 추리 소설 매니아 소년간의 평범한 일상계 학원 청춘 미스터리로 가볍게 풀어나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자살한 소녀 이야기를 이야기 전편에 억지로 풀어가며 연작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었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헛도는 트라이앰프>>
도서실에서 발견한 작고 바퀴가 달려있는 책꽂이의 세 번째 단에 있는 잡지는 왜 전부 뒤집혀져서 꽂혀 있었을까? 잡지 중 딱 한 권, 한 가운데 있는 것만 책 등이 보였다.

화자인 스가와, 그리고 스가와가 빠져버린 미소녀 토리노라는 주인공들과 중요 설정이 설명되는 시리즈 제 1작.
빼곡하게 꽂힌 잡지 사이에 잡지를 꽂으려면, 표지가 말리지 않게 뒤집어서 꽂는게 좋다는 착안에서 시작되는 추리는 좋습니다. 책꽂이는 바퀴가 달려 있었기에, 누군가 책꽂이를 반대쪽으로 밀어 놓았던게 진상이었어요. 책 등이 보이던 잡지 한 권만 그 전에 누군가 밀어 넣었던 겁니다. 왜 책꽂이를 밀어 놓았는가?는 무언가 바닥에 있던걸 숨기기 위해서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그런데 도서부원 요시나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진을 숨기려고 책꽂이를 밀어두었다는 동기는 별로였어요. 도서위원이라면 도서실에 있는 시간도 많았을텐데, 사진을 진작에 회수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의외성도 별로 없고요.
그리고 책꽂이를 밀어두느니, 사진이 안 보이게 보이는 부분만 뜯어내던가, 아니면 아예 사진이 끼어버린 책장 밑으로 밀어 넣는게 더 상식적인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억지로 사건을 만든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가슴 속 카드 스탭>>
토리노가 학교 음악실에서 마술을 보여준 뒤, 깜빡하고 두고왔던 나이프가 책상 위에 새겨진 세 개의 f 기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음악실 위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던 후지이 아야카의 유령이 남긴 메시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음악실이 일종의 밀실 상태였다고 하지만, 알고보니 밀실이 아니었다는게 진상이라 도무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작품. 비상계단을 통해 한참 돌아가기는 하지만 밖으로 나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었으니까요. 이래서야 트릭이고 뭐고 없는 셈입니다.
책상에 f자 세 개를 남긴 동기도 억지였습니다. 칼로 자기 악보를 찢다가 후배 손수건을 망가트린게 이런 조작을 벌일 정도로 대단한 일일까요? 이 정도를 숨기려고 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이상한 조작을 하고, 괴소문을 퍼트린다는건 설명하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프레딕터>>
스가와는 '영'이 보인다는 이이쿠라가 분실했다는 수첩에서 미래의 영어 시험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정말 '영' - 후지이 아야카 - 이 보이는 걸까?
이런 스가와의 질문에 이이쿠라는 스가와가 떠올린 단어를 맞추는 솜씨를 보여주는걸로 답했다. 연극부의 미소녀 하탄마루와 함께 후지이 아야카로 보이는 형체까지 목격하게 된 스가와는 밤 잠도 설칠 정도로 겁에 질렸는데, 그를 도와준건 토리노였다.


이이쿠라 수첩에 적혀있던 영어 시험 결과에 대한 추리, 진상, 그리고 동기는 모두 괜찮았습니다. 이이쿠라가 방과 후에는 '노는 아이'로 변신한다는게 단서였어요. 그녀는 방과 후 밖에서 츠루미 선생님과 사귀고 있었던겁니다. 남자친구인 츠루미 선생 수첩에 스티커 사진을 붙였는데, 그걸 츠루미 선생은 분실했고 이를 입수한 분실물 담당자 무코지마 선생은 스티커 사진만 보고 여자아이 것으로 오인했던 거지요. 츠루미 선생은 학생과 사귀는걸 비밀로 하기 위해 똑같은 수첩을 구입해서 사용하면서, 원래의 수첩은 이이쿠라가 잃어버린 척 해서 찾아오라고 시켰고요. 그 와중에 혹시 몰라, 분실한 수첩과 쓰던 수첩을 바꿔치기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영어 시험 결과를 적어 놓았던걸 스가와가 우연히 보고 미래의 영어 시험 결과를 예지했다고 착각한게 진상입니다. 수첩과 스티커 사진, 이이쿠라의 변신 등 여러가지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이를 조합해서 펼치는 추리도 깔끔했던 좋은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하지만 스가와가 하탄마루와 함께 본 유령의 정체는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하탄마루는 소녀 - 아마도 이이쿠라 (다른 사람으로 밝혀지지만) - 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스가와에게 들켰다는걸 숨기려고 그녀가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유령이 아니라는걸 하탄마루는 왜 스가와에게 숨겼던 걸까요? 옷을 갈아입는걸 목격당한 소녀가 창피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이쿠라와 토리노 간에 마술,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 이를 잘못 해석한 스가와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는 토리노의 모습은 다소 지루했습니다. 전형적인 청춘물스러운 전개라 식상했어요.이 시리즈에서 마술의 가치는 추리적인 요소보다는 청춘물 전개를 위해 필요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다른 작품들보다 확실히 빼어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습니다.

<<당신을 위한 와일드카드>>
후지이 아야카의 계정으로 학교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유령이 없다는걸 증명하기 위해 스가와가 하탄마루와 함께 조사에 나섰지만 정체를 밝혀내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스가와는 루리카와 선배의 자살 시도를 목격했다. 이를 막은건 토리노였다. 그녀는 후지이 아야카와 루리카와 사이에 있었던 과거와 아야카의 마지막 메시지를 알려주며 루리카와의 마음을 푸는데 성공한다....

진상은 별볼일 없었습니다. 후지이 아야카에게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는게 전부거든요. 동생이 요시나가라는건 첫 작품에서부터 삽입되었던 이런저런 복선으로 비교적 잘 설명되고요.

그러나 동생이 누구냐인 것 보다 후지이 아야카와 얽힌 친구가 루리카와 선배라는게 추리의 핵심인데, 단서인 후지이 아야카의 숫자 ID는 억지스러웠습니다. 숫자가 생일이 아니라 16진법으로 '루리색'을 의미한다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상상의 영역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생년월일에 가까운 숫자라서, 억지로 16진법 코드를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전개도 별로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를 유령 소동으로 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후지이 아야카가 루리카와에게 남긴건 글이 아니라 음악이었고, 그건 원망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06/27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초창기 단편집. 1990년에 발표되었던 <<성>>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발표되었기에, 초창기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BS 망가 야화에서 소개되었을 정도니까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방주가 오던 날
  2. 난파선
  3. 진수의 숲
  4.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5. 늪의 아이
  6. 유사(流砂)
  7. 쿠로이시지마(黑石島) 살인사건
  8. 성(城)
  9. 파란 무리
  10. 그림자의 거리
이 중 앞의 두 편은 아주 짤막한 가벼운 개그물로 언급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크리쳐 호러(?)물 <<진수의 숲>>, <<늪의 아이들>>은 <<자선단편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이고요 (궁금하신 분들은 이전 리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 작품들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자신이 외계인이며 UFO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고 말하는 동급생 후리오와 어울리다가, 약간의 차원 뒤틀림(?)을 경험한다는 내용.
작가의 말에 따르면, 폴 사이먼의 노래 (Me and Julio Down by the Schoolyard)에서 제목을 따 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가사를 잠깐 찾아보니 '훌리오와 내가 교정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는데 엄마가 뭔가 법에 위배되는걸 봤고, 그래서 나와 훌리오를 잡으면 구치소에 집어 넣는다'는 내용이더라고요. 정확한 의미는 영 알 수가 없는데 (폴 사이먼 본인도 엄마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변했답니다.), 이런 노래의 모호함이 만화의 결말과 일치한다는게 재미있습니다. 후리오가 UFO를 타고 갔는지, 그냥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떠났는지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여운을 남기니까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약간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일상계 SF물, 아니면 평범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성장기로 볼 수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SF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폴 사이먼, 그리고 모로호시 다이지로 스타일에 가까우니까요. 흥겨운 노래하고도 잘 어울리고요. 기껏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그냥 버스타고 이사간거라면 너무 슬프잖아요.
대표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유사>>
주인공과 친구들은 사막과 엄청난 유사 폭포 탓에 감옥과 다름없는, 미래가 없는 별 볼일없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그들을 막아서는데....

SF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나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고 위기에는 전혀 대응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젊은 청춘의 뒷다리만 잡는 기성 세대를 풍자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1980년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도 기성세대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나이라 그릴 수 있었겠지요? 사력을 다하는 청춘을 기성 세대가 뒤쫓는 결말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는 낡은 소재와 전개라는건 단점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을 탈출하려고 애쓰는 청춘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런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불법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총몽 (알리타)>>이 되는거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쿠로이시지마 살인사건>>
외딴 섬에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어 형사가 파견되었고, 섬 사람 누군가의 딸로 여겨져 장례식이 열렸다. 그런데 장례식 와중에, 그 딸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진다.
다른 사람이 피해자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살아있었고, 바닷물의 영향으로 사체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형사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며 반 쯤은 협박하듯이 부탁하는데....


우리나라 모 섬에서 일어났던 범죄가 떠오르는 작품.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모로호시 다이지로 그림체인데다가, 전개 방식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호러물스타일이라서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개그 콘서트 꽁트를 정극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하는 느낌이랄까요? <<유사>>처럼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성 세대에 대한 풍자로 볼 수도 있을테고요.
흔한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성>>
대기업에 서류 하나를 전해주러 왔던 사원의 출장은 서류에 관계된 회사간의 복잡한 정리, 대기업의 인사 이동 등으로 장기화되고 말았다. 팩스로 지시를 기다리는 자택 대기 명령을 받은 뒤,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죽었을 때 지시가 전달되었다. 일반 사원들은 1층 이상 올라가보는게 꿈이라는 본사 건물 15층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드라마.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했습니다. 결말도 다소 뜬금없었고요. 왜 마지막에 15층으로 부른 걸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란 무리>>
장기 매매가 일반화된 미래. 하층민은 장기를 팔고 인공 장기로 교체하여 삶을 이어나간다. 판매된 장기는 하나로 모아져 부자 노인의 뇌를 이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장기를 팔아 인공 장기로 교체하는건 단순한 빈민 대책으로 무의미한 시술이었고, 이 모든건 권력자들이 권력을 쥐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80년대 유행했던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SF물.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이야기였습니다. 기묘한 세포 덩어리로 피해자들을 변질시킨다는 결말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 특유의 이형 생태 결합을 선보이기는 하는데, 장기 매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더군요.  <<소일런트 그린>>정도의 충격적인 반전도 아니었고요. 지금 시점에서 다시 언급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자의 도시>>
한 초등학생이 모르는 아이에게 이끌려 낯선 골목길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과 건물을 잡아먹었다. 꿈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잡아먹혔던 아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잡아먹힌 학원도 불에 타 버렸다.
괴물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은 아이는 괴물에게 모델건을 쏘고 기절했다. 그리고 정신이 든 뒤, 싫은 일이 생길 때 마다 모르는 골목길로 항하게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영향을 주었다는걸로 유명한 작품. 아래의 장면 덕분일겁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뻔했습니다. 이세계에서 경험한 일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많으니까요. <<앨리스 죽이기>>가 떠오르네요. 때문에 지금 읽기에는 진부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화로는 작품의 분위기를 잘 시각화하지 못하고 있고요.

하지만 초등학생이 주인공이고 진짜 악당 - 싫어하는걸 없애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으니 - 이라는 점은 특이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2/13

2014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13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최고의 추리 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투표. 2014년 출간된 추리소설을 대상으로 각자 3권씩 투표하여 결과를 합산하는 방식이죠. 진짜 추리 애호가들이 뽑은 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이 좋은 책도 한 권 뽑게 되어 있고요. 1위~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전체 순위는 여기서 확인하시길.

1위 (14표)

"황제의 코담뱃갑" 존 딕슨 카, 엘릭시르

2위 (11표)

"미시시피 미시시피" 톰 프랭클린, 알에이치코리아

"체육관의 살인" 아오사키 유고, 한스미디어

베스트 커버 디자인

1위 (12표): 루이즈 페니 시리즈 ("냉혹한 이야기"를 비롯해 언급된 이전 시리즈 포함)

저도 이벤트에 참여했었는데, 제가 선정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기준은 제 블로그 리뷰 별점입니다.

공동 1위

"재앙의 거리" - 여태까지 읽어왔던 엘러리 시리즈 중 최고작

"황제의 코담뱃갑" - 고전 걸작의 힘. My All Time Best 중 한 권

공동 3위

"열흘간의 불가사의" - 엘러리의 패배가 인상적

"쿠드랴프카의 차례" - 성장기 청춘물과 일상계 추리물의 절묘한 조화

"파계 재판" - 사회파 속성에 깃들여진 높은 긴장감

이렇게 세 편의 공동 3위 중에서 묵직한 장편으로 고전 본격물과 사회파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법정물로도 뛰어났던 "파계 재판"을 선정하였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 디자인은 "녹스 머신"을 뽑았습니다. 일러스트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판형, 내부 편집, 커버를 벗겼을 때의 디자인 모두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잘 만든 다이어리 느낌이 들더라고요.

작년과 마찬가지로 1위인 "황제의 코담뱃갑"은 맞췄으니, 이제 2위를 기록한 작품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2016/08/03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10 - 이시구로 마사카즈 : 별점 3점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0 - 6점 이시구로 마사카즈 지음/서울문화사(만화)

"탐정 훈령 하나! 사람을 보이는 걸로 판단하는 녀석은 탐정 실격이다!"

아 더워라...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더운 날씨네요. 책이 손에 잘 안 잡힐 정도로요. 그러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몰아쳐 본 만화입니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정발이 띄엄띄엄이라 중간에 흥미를 잃었었지요.

그런데 읽지 않았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 했습니다. 단순히 일상계 개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추리물'의 성격도 강하고 수준 또한 높은 덕분입니다. 확실히 "외천루"의 센스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더라고요. 온천 여행을 갔다가 술 취한 호토리와 타츠노 방에 갇힌 사나다의 탈출 작전, 사나다의 추억 속 국수 찾기, 설녀가 찾는 남자의 정체, 호토리의 외가댁에서 일어난 수로가 넘친 이유 등 일상 속에 추리 속성을 녹인 일상계 에피소드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그냥 보면 별거 아닌데 묘하게 추리를 포함시키는 전개는 이게 바로 궁극의 일상계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물찾기 이야기, 학교 불가사의 탐험이라든가 호토리가 의뢰를 받아 사건을 해결한다는 전통적인 추리물도 좋습니다. 제법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의 작품들도 괜찮고요.

다른 장르문학 속성(호러, SF 등) 작품들도 기본 이상이며, 의외로 진지한 이야기들도 상당합니다. "사람은 추억이 뭉쳐진 거다. 추억이란 엄청 크다. 그렇게 커다란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가끔 추억이 늘어가는 것이 벅차다."라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작가의 스펙트럼이 정말 광범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네요.

그 외에도 미스터리 마니아인 호토리가 새 책을 읽기 전 하는 행동들 - 추천문에 선입관을 갖지 않도록 띠지를 벗기고, 스토리의 흐름을 인식할 수 없게 차례를 건너뛰고 표지로 감싼다 - 라든가, 추리 작가 '카도이시 우메카즈'이기도 한 시즈카 언니가 호토리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고자 한다는 에피소드도 인상적입니다. 추리 애호가로서, 창작자로서 한번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였던 것 같네요.

아울러 이를 뒷받침하는 꼼꼼한 작화 역시 볼거리입니다. "외천루"보다 디테일한 묘사들을 선보이는데 실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제대로 완결되지 않는 에피소드들도 있고 너무 뻔한 청춘물 스타일의 이야기들로 조금 감점하지만 장점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국내 시장에서 잘 먹힐만한 내용은 아니에요. 일상계 학원 개그물로는 그럭저럭한 수준이지만 그 외의 에피소드들은 그 쪽 분야의 소양이 없다면 완벽하게 즐기기 어려운, 조금 매니아 취향의 이야기들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저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적극 추천하기는 여러모로 애매하네요. 이왕지사 잘 팔리지 않는다면 추리 에피소드만 뽑아서 별도의 애장판으로 재발매해주면 어떨까요? 아예 추리물로 홍보하면서 말이죠. 아니, 제발 그래주면 좋겠습니다!

2018/07/22

가제가오카 50엔 동전 축제의 미스터리 - 아오사키 유고 / 이연승 : 별점 2점

가제가오카 50엔 동전 축제의 미스터리 - 4점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이라는 어마어마한 별명의 일본 작가 아오사키 유고의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은 트릭과 추리의 과정만큼은 괜찮았던 정통 본격물임에는 분명했습니다. 별명이 허언만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동기, 전개 등 전체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는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아서 이야기를 충실하게 쌓아올리고 만들어가야 하는 장편보다는 트릭 중심의 단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왔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단편집이 발표되었네요. 작품 해설을 보니 이 단편집으로 가제가오카의 우라조메 탐정 시리즈 1기가 마무리된다는군요.

이전 장편들이 "~관" 시리즈였던 것에 반해 단편들 제목이 상당히 소박한게 눈에 띕니다. 표제작은 엘러리 퀸의 패러디이지만요.
그런데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추리들 모두가 비약이 심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장편에서 긴 호흡으로 쌓아올릴 수 있었던 논리가 단편 분량에서는 효과적으로 선보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형적인 학원 무대 일상계 청춘물인데, 경쟁작이라 할 수 있는 "소시민" 시리즈나 "빙과" 시리즈에 비하면 추리적으로나 캐릭터 측면으로나 모두 미치지 못하는 범작입니다. 시리즈의 팬이시라면 한번 쯤 읽어볼만 하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차라리 빠른 호흡으로, 시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해가며 전개하는게 용이한 만화였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원플러스원 덮밥"

학교 식당에서 금지된 식기 반출을 한 범인이 누군지 찾아낸다는 설정만큼은 학교를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의 교과서 같은 느낌입니다. 정말 있음직하고 그럴듯한 이야기니까요. 우라조메 추리의 댓가가 식권 20장이라는 점도 역시나 일상계스럽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추리보다는 비약에 가까운 탓입니다. 남겨진 트레이에 머리카락이 묻었다? 식판과 식기에 머리카락이 묻을 이유가 있을까요? 머리를 처박고 먹는 것도 아니고... 소스 개봉부를 얌전히 자주 쓰는 손 방향으로 놓아 둘테니 왼손잡이라는 추리도 비약입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거나 옮겨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식욕 때문에 운동계 동아리일 것이다 역시 지나친 비약입니다. 작은 체구의 사나에도 한그릇 뚝딱하는 덮밥이라고 묘사되기도 했고요. 점심 시간에 중요한 회의를 한 동아리를 찾는다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약속일 수도 있고, 정말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만 했을 수도 있어서 이 역시 비약인건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의 진상 - 여자친구가 돈가스 도시락을 주었는데 먹지 못하고 버린 후, 원플러스원으로 좋아하는 것 반, 돈가스 반을 시켜 젓가락만 지저분하게 해서 주었다 - 도 비약입니다. 제가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먹던가 아니면 돈가스는 빼고 다 먹었을 겁니다. 왜 도시락을 버리고 구태여 식사를 또 시켰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아울러 키에 대한 추리는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180cm 이상, 아니면 160cm 이하 등 용의자 범위를 대폭 줄일 수 있는 숫자면 모를까, 180 m이하의 학생이라는 건 가제가오카. 재학생의 90% 이상을 차지할 거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평범한 일상계지만 소설보다는 만화에 더욱 적합한 이야기입니다. 비약이 심한 내용으로 빠르게 전개하기 보다는, 단서가 조금 더 적더라도 정교하게 이야기를 쌓아나갔어야 했습니다.

"가제가오카 50엔 동전 축제의 미스터리"

표제작으로 왜 신사 축제 노점에서 거스름돈을 50엔 짜리로만 주는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축제를 즐기는 내용이 이야기의 2/3 이상을 차지하며, 추리적인 부분은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잔돈 숫자를 증가시켜 사람들이 분실을 더 많이 하게 만드려는 의도였다는 진상 역시 설득력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고요. 일본식 유타카 차림으로는 잔돈을 보관하기 어렵다는, 일본식 사고방식이 깔려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 역시나 정보의 제공이 시각적이며 전개와 호흡이 빠른 만화가 더 어울렸을 이야기입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클리셰라 할 수 있는 여름 축제가 무대라 더 그런 느낌이 드네요.

"하리미야 리에코의 서드 임팩트"

전작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던 하리미야 리에코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일상계 청춘 미스터리입니다. 그녀의 남자친구인 귀여운 후배 사오토메가 취주악부에서 왕따를 당하는 듯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우라조메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지요.

유노와 우라조메가 아니라 하리미야 시점의 이야기라는게 독특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더위와 싸우며 연습하는 상황에 대한 강조, 취주악부 연습실에 널부러진 다양한 쓰레기들, 연습하는 곡과 독주 파트에 대한 언급 등 독자에 대한 정보도 굉장히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또 불량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순진한 하리미야 리에코의 성장기 성격도 있고, 이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우라조메 덴마의 모습도 상당히 의외의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뭔가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 같은 커플이라고 느꼈던게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진상, 그리고 결말이 썩 개운치는 않습니다. 취주악부의 야마부키가 자신의 독주 연습을 위해서 사오토메를 일부로 쫓아내고 연습실로 쉽게 들이지 않은 상황은 일종의 왕따라고 해도 무방하니까요, 협주 파트를 모두 함께 열심히 연습하고, 독주 파트는 시간을 정해 따로 연습하자고 하거나, 최소한 선풍기를 빌리려는 시도를 먼저 해 보는게 당연한데 말이죠. 이를 하리미야가 쉽게 납득하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천사들의 늦더위 인사"

5년전 졸업한 시시도 선배의 노트에 적혀있던 두 소녀 소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서두에 유노와 사나에에게 노트에 묘사된, 일종의 백합 연애물같은 포즈를 취하게 하는 개그 외에는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이 없는 범작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우선, 아무리 학교 일에 관심이 없어도 모두가 대피 훈련을 하는 상황을 몰랐다는 것부터 말이 안됩니다. 우라조메의 추리도 두 소녀의 연극과는 무관하게 9월 1일이라는 날짜에 기인한 것인데, 날짜까지 적은 일기 같은 글에서 정말로 진상을 깨우치지 못한 건 이해할 수 없어요. 예전에 매월 15일마다 실시했던 우리나라 민방위 훈련같은 거니까요. 소녀들의 소실은 사다리차를 이용한 탈출 훈련 때문이었다는 진상도 그럴 수 있었겠다 싶기는 하지만 장비에 준비가 필요하고, 탈출 순간의 환성도 있었을텐데 외부 상황을 몰랐다는 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두 소녀가 껴안는 연극에 대한 유노의 반응은 여러모로 재미있고, 우라조메가 가오리 외에도 연극부 부장 가지와라 같은 지인이 있고 나름 학교 생활을 잘 한다는 묘사도 팬이라면 볼 만 합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어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 꽃병에는 주의를"

가제가오카가 아닌, 사립 히텐 학원 중등부를 무대로 우라조메의 동생 교카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일상계 소품으로 복도에 놓인 꽃병을 깬 범인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나름 정교한 무대 설정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왜 범인이 꽃병을 가져왔는지 추리하여 동기를 밝혀내고, 그 결과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 주는게 괜찮습니다. 특히 "물"의 사용법에 대한 추리 두 가지가 아주 그럴듯했어요. 구태여 생수를 구입한 건 화분이 깨진 장소를 위장하기 위해서!라는 추리에서,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화병의 물이 필요했던 것! 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설득력이 높았던 덕분입니다.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았던 교카의 학교 생활, 교우 관계 및 범인 야가라스의 논리적인 반박, 비야냥에 분노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성격 등의 디테일도 좋았고요.

문제는 야가라스의 말대로 나카자와와 소프트볼 부 아이들의 증언을 믿을 이유도 없고, 2층 교실에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이렇게 한 방 먹은 다음에 재차 휴지통을 뒤져 폭죽을 찾아내는건 어설펐고,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교카의 캐릭터 설정 자체가 굉장히 만화적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백합계 쿨데레? 친구 센도 히메마리도 만화 등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학생회 캐릭터라 너무 뻔했어요. 묘사를 디테일하게 하더라도 이렇게 뻔하면 딱히 깊이가 느껴지지는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말로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사건을 다룬 일상계라는 점, 교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 형식의 성격은 마음에 들었지만 중반부 전개와 앞서 말씀드린 전형적인 캐릭터 묘사로 감점합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만화였다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짤막한 부록은 우라조메와 그의 아버지가 우연하게 사우나에서 마주친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라조메 남매의 추리력은 아버지로부터의 유전임을 드러내는 이야기인데 추리에 있어 비약이 심한건 마찬가지며 워낙에 짧아 점수를 줄 만 한 부분도 없습니다.

2015/04/21

꿈의 화석 - 콘 사토시 : 별점 2.5점

꿈의 화석 - 6점
콘 사토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2010년 사망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콘 사토시가 발표했던 단편 만화들을 모은 작품집입니다. 작가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 중반~후반에 발표한 단편 15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부제가 "콘 사토시 단편전집"인 만큼 단편은 이 15편이 전부로 보입니다.

화풍은 오토모 가즈히로 스타일의 극화체이며, 디테일한 펜선과 사실적인 묘사가 눈에 띕니다. 실제로 오토모의 어시스턴트 경험도 있어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내용은 오토모의 디스토피아 중심 SF와는 다릅니다. 밝은 분위기의 작품들도 많고 장르도 다양하거든요. 청춘 스포츠 코미디 "얼빠진 대소동", 열혈 청춘 드라마 "한여름 밤의 긴장", "날 다 밝았네", 일상계 탐정물 "포커스", 유괴 코미디 "KIDNAPPERS", 코믹한 폭주 추적물 "태양의 저편", 따뜻한 홈 드라마 소품 "JOYFUL BELL", 전국시대 크리쳐 호러 "와이라" 등 폭넓은 장르를 소화하고 있습니다. 수준도 괜찮고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콘 사토시 특유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느낌은 거의 없고, 초기작이라 그런지 컷 구성이나 이야기 전개가 만화적으로 미흡한 탓입니다. 작화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만화 연출로 살려내지 못한 부분은 이케가미 료이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도 뒤로 갈수록 실력이 급성장한다는게 확실히 보입니다. 이후 만화가로 계속 활동했더라면 분명 더 좋은 작가가 되었겠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금 보기엔 다소 낡고,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도 있습니다. 19,000원이라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그래도 몇몇 단편은 지금 읽어도 재미있고, 콘 사토시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팬이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덧: 작품 발표 시기와 "아오이 호노오"의 시대가 겹치기에,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카브"

1985년 발표된 초기작으로, 오토모 가즈히로의 영향이 짙은 디스토피아 SF물입니다. X-Men과 비슷한 설정을 일본식으로 변주한 내용도 흥미롭고, 기본기 역시 탄탄합니다. 다만 케이가 기계인간이 되었다는 반전은 현재 기준으론 다소 낡아 보이네요. 

그래도 풋풋한 에너지와 마무리까지 괜찮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얼빠진 대소동"

고시엔 진출을 앞둔 고교 야구부 주포와 축구부 주장 간의 다툼이 전교생의 폭주로 이어지는 청춘 코미디입니다. 사소한 장난이 큰 스케일로 커져가는 과정은 설득력 있지만, 이야기 구조나 개그는 다소 약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한여름밤의 긴장"

자전거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여성과 엮이며 추격전에 휘말린다는, "바츠 & 테리" 느낌의 청춘 드라마. 뜨거운 여름 분위기와 80년대 감성이 잘 살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여름이었다!".

단점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와닿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포커스"

지도 학생의 어머니에게 미행을 의뢰받은 대학생 마루야마의 이야기. 평범한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학교 선생과의 불륜이라는 반전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인공도 입체적으로 그려졌고, 조연도 괜찮고요. 만화가로의 성장이 눈에 뜨이는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의 저편"

노인 요양병원의 침대가 폭주한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액션감 넘치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설정 면에서는 "노인 Z"가 떠오르네요. 콘 사토시의 폭주에 대한 집착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JOYFUL BELL"

산타 복장의 배달원이 소녀와 만나 겨울밤의 에피소드를 겪고 아내를 다시 만나는 이야기. "도쿄 갓파더"의 원형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으로 이 단편집의 최고작입니다. 콘 사토시는 SF보다 오히려 이런 일상 소품이 더 뛰어난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감옥"

ID로 통제되는 미래 사회, 담배를 사려다 근신 처분을 받고 마더 컴퓨터를 파괴하려는 청년의 이야기. 오토모풍 디스토피아 SF지만, 만화로서는 미완성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설정 등 콘 사토시 감독 스타일의 원형을 맛볼 수 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1/28

서술트릭의 모든 것 - 니타도리 케이 / 김은모 : 별점 1.5점

서술트릭의 모든 것 - 4점
니타도리 케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서점의 명탐정"의 작가 니타도리 케이단편집입니다. 원제는 간단하게 "서술트릭 단편집"이네요.

처음에는 서술트릭을 쓴 작품들을 모아놓고, 트릭들을 분석해 놓은 책일거라 생각했는데 단편집이라서 의외였습니다. 서술트릭은 작가가 독자를 속이는게 핵심인데,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모두 서술트릭물이다! 라고 서두에서 알려주는 것도 독특했고요. 한 마디로 "속일테니 맞춰봐라!"라는 마술사의 마술 공연같은 발상이었달까요? 독특하면서도 신선했고, 그 패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품들 수준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서술 트릭을 사용하려고 무리수를 둔 작품들이 많은 탓도 크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만화적이고 과장된 탐정 캐릭터 벳시의 존재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뻥 뚫어주는 신" 

주식회사 세븐티즈의 2층 화장실 변기가 막혀 물이 넘쳤었는데, 업자를 부르기 전에 뚫렸고 바닥도 깨끗하게 청소된 채 발견되었다. 누가 몰래 이런 기특한 짓을 하였을까? 궁금해하던 직원들에게, 지나가던 프리랜서 기자 벳시가 난입해 사건을 해결한다.

한 명을 제외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70세가 넘은 노인들이라는게 서술트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내용에서 설득력이 거의 전무한 탓입니다. 막힌 변기를 뚫고 바닥 청소를 하는걸 몰래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것도 1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2층 화장실 창문으로 몰래 기어 올라가면서까지 말이죠. 때문에 이런 무리한 활약은 노인인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리였고, 그래서 유일한 여고생인 아르바이트 우미짱이 범인이었다! 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어요. 서술 트릭은 중요하게 사용되지도 못한 셈이지요. 화장실 매니아 벳시는 억지를 넘어선, 만화같은 존재라 더 와닿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등을 맞댄 연인" 

호리키 히카루는 히라마쓰 시오리가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을 본 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오리도 히카루의 다정한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똑같은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명 다 서로에게 다가갈 기회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와중에, 시오리가 속해 있던 사진부에서, 암실 사진 확대기 필터가 0호로 바꿔치기된 사건이 일어났다. 유력한 용의자는 사진부 부장의 연인으로 부장과 싸운 뒤, 부장에게 복수심을 품었을 마쓰모토였다. 그러나 그녀는 범행 시각에 사진부와는 반대쪽에 있는 도서관 앞에서 호리키 히카루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호리키 히카루와 히라마쓰 시오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각자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를 시점을 바꿔가며 전개하는 청춘 연애물에서 급작스럽게 일상계 추리물로 전환되는 작품입니다. 

청춘 연애물로는 좋습니다. 두 청춘의 감정이 풋풋하면서도 귀엽게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트릭도 깔끔합니다. 서술 트릭의 핵심은, 호리키 히카루가 마쓰모토라고 생각했단건, 사실은 히라마쓰 시오리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쓰모토의 알리바이는 없어지고, 그녀가 범인이라는게 밝혀지게 되지요. 호리키 히카루가 시오리를 마쓰모토로 오해하게 된 계기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서술 트릭을 위한 억지도 눈에 뜨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벳시'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인물을 끼워넣은게 문제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상계 추리물에 갑자기 만화 주인공이 등장한 느낌이거든요.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묘사와 행동은 유치할 정도였습니다. 벳시를 등장시켜 전체을 연작 단편 시리즈로 묶으려는 어리석은 노력을 하느니, 차라리 독립된 단편 작품으로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을 잘못 알았다는건 바로 드러났을테 어차피 탐정이 필요하지도 않으니까요. 오해의 원인은 호리키 히카루의 여동생 소라나가 등장해서 설명해주면 되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서술트릭이 사용된 완벽한 청춘 연애 일상계 추리물이 될 수 있었는데, 벳시의 존재가 오점을 남겨 아쉽습니다.

"갇힌 세 사람과 두 사람"

강도단의 일원 아담, 해밀턴, 윌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세 명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샘슨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장에 있던 일본인 두 명은 꽁꽁 묶어 놓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서술 트릭은 강도단이 묶어 놓은 일본인 2명이 벳시와 조수 우미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둘은 강도단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왔던 거지요. 처음부터 미국을 무대로, 미국인 강도단이 나와서 뭔가 싶더라고요. 너무 비현실적이었으니까요. 진상도 역시나였고요. 왜 일본을 무대로, 일본인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었을지 의문입니다. 독자를 속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속일 수도 있다는걸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을까요?

서술트릭을 사용한 단편이라는 목적에는 충실했고, 강도단이 서로를 범인이라고 단정지으며 죽이는 과정의 추리는 제법 볼만했지만 작위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별 생각없이 산 책의 결말"

벳시가 바텐더로 일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잡담을 나누다가, 최근에 읽었던 책 속 트릭을 풀어내는 퀴즈를 내었다. 형사 사에지마 시리즈로, 산에서 낚시를 하던 네기시 기요시가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나'와 벳시의 잡담 이후, 곧바로 '형사 사에지마 시리즈' 이야기가 이어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나 착하고 성실했던 네기시 기요시가 살해당했던 이유는, 단골 스낵바에서 다른 단골 아라이에게 억지로 술을 권해서 먹였기 때문입니다. 아라이는 술만 먹으면 사람이 변해 폭력적이 되는 탓에, 오래 금주를 해 왔지만 네기시의 권유로 실패하고 말았던 거지요. 아라이의 음주 폭력으로 가족은 지옥같은 상황에 처했고, 그래서 둘째 아들 데쓰야가 복수를 하게 된 겁니다. 사용된 서술 트릭은 시점을 착각하게 만든 것이고요. 소설은 오래 전, 80년대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서술 트릭은 사에지마 사건의 트릭을 풀어내는 것과는 무관했다는 겁니다. 데쓰야의 알리바이 - 범행 시각에 친구 누마타가 전화를 받았다 - 는 그 시간에 집 근처에서 있었던 선거 연설 방송을 다른 동네에서 미리 녹음해 두고, 친구에게 전화할 때 그 녹음을 틀었다는 간단한 조작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휴대용 플레이어만 있다면 어느 시대에나 가능했을 이야기입니다.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는 묘사로 1985년 단기간에 생산되었던 NTT의 숄더백 핸드폰 '숄더폰'을 썼다고 추리하는건 완전 억지스러웠어요.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도 녹음했다가 틀면 되잖아요? 사에지마 소설 속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 작품이 80년대 작품이라는걸 밝히는건 재미있었지만, 서술 트릭을 사용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작품의 시점이 다를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또 벳시 씨는 책이 오래 전 발표되었을 수도 있다는걸, 그동안 있었던 동네 서점 이벤트로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공정함도 부족한 편이고요.

그냥 사에지마 시리즈 단독으로만 보아도, 녹음기 트릭이 잘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트릭이 없었어도 범인 체포는 어렵지 않았을 거에요. 매주 일요일 네기시를 감시했던 데쓰야의 행동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면 바로 체포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아라이 가족에 대해 수사하고, 아라이 이사무의 주폭 행위를 추리해 내는 등의 디테일은 괜찮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많이 사용된 편이지만, 핵심 서술 트릭은 무의미했고, 이야기의 설득력도 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빈궁장의 괴사건" 

너무나도 저렴한 방세 덕분에 외국인 유학생과 고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유명장'은 흡사 교도소나 폐가같은 상태로 '유령장' 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어느날, 세입자 중 한 명인 중국인 리의 귀중한 '하이셴'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사건 발생 시간에 있었던 유령장 세입자가 분명했다. 일본인 유아사, 세네갈인 응가보, 태국인 마시, 한국인 최선배였다...

태국인이 두 명이었다는게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시 오카를 닮은 라챠시챠나논미챠시브와실라, 잘생기고 양복을 입는 '챵' 라챠시챠논이챠시브와실라 두명이었던 거지요. 챵은 왼손잡이인데, 범인은 오른손잡이라는게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둘이 '마시 오카' 한 명으로 오인된 탓에 그가 범인이 아닌 것 처럼 착각하게 만든 겁니다. 하지만 실제 소설 속 사람들에게는 명백히 두 명이라서, 이 서술 트릭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긴 태국인 이름의 글자 한 자를 바꿔쳐서 독자를 속이려고 했던건 너무 조잡해 보였어요.

마시 오카가 벽 시계 위에 가짜 시계를 붙여서 응가보가 시간을 착각하게 만든 장치 트릭이 더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장치 트릭은 나쁘지 않고, 나름 설득력은 있었던 만큼, 억지로 서술 트릭을 넣으려고 몸부림 치는 것 보다는, 이 장치 트릭 중심으로 풀어나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벳시의 등장도 유치하고 만화적이었던건 마찬가지라, 당연히 빼는게 더 나았을 테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서술트릭 연작을 만들기 위해 잃은게 더 많았던 작품입니다. '하이셴'이 결국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등 유쾌한 분위기만큼은 나쁘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아쉽네요.

"일본을 짊어진 고케시 인형" 

벳시 탐정 사무소에 정계 여당의 거물 다와라다 고사부로가 찾아왔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걸고, 일본 내 유명 동상에 장난을 치는 걸로 유명해진 헤드헌터를 붙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벳시는 헤드헌터의 다음 목표물이 미야기현 센다이에 있는 세계 최대 고케시 오타네 짱이라는걸 알아냈고, 우미와 함께 현장으로 향해 잠복했다. 그러나 잠복에도 불구하고 오타네 짱도 헤드헌터의 장난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단편집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수록작 중 최악이었어요. 헤드헌터의 장난은 정부에 비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정치단체 모션을 몰락시키기 위한 음모 - 모션의 리더가 연설하는 장소에서 헤드헌터가 장난을 친 뒤, 모션의 리더가 헤드헌터라고 음해할 목적 - 였다는 발상부터가 유치했고, 등장하는 벳시 씨가 전부 5명이었다는 서술 트릭도 한 번 속여보겠다!는 의도가 지나쳤어요.

뭐 이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코케스 오타네 짱 얼굴에 낙서를 한 핵심 트릭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벳시 씨 5명이 잽싸게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서, 도장을 찍듯 낙서를 완성했다는건데 할 말을 잃게 만드네요. 이게 가능할거라고, 그것도 짧은 시간에 가능할거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습니다. 3명 정도였다면 모르겠지만요. 오타네 짱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타네 짱으로 향하는 입구에만 카메라를 설치한 비상식적인 행동도 나중에나 트릭 때문이었다고 설명되지, 실제 잠복할 때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이전 이야기에 등장했던 벳시 씨는 모두 다른 사람이었고, 등장했던 우미 짱도 이전 이야기에 전부 등장했다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도, 작품 내용이나 추리하고는 무관했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이라,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 후기" 

간단한 소설과 함께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설은 딱히 언급할 수준이 아니었고, 앞서의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에 모든 작품을 풀기 위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며 공개하는데,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빈궁장의 괴사건"에서 등장인물 이름을 메모해보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열쇠는 없더군요. 앞서 말씀드렸듯 이름을 가지고 장난친 조잡한 트릭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내용 및 트릭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11/01/31

이층의 악당 (2010) - 손재곤 : 별점 2점

문화재 밀매를 주업으로 하는 창인은 20억 원의 가치가 있는 청화용문찻잔을 찾기 위해 작가로 위장하고 연주의 집에 세를 얻었다. 중학생 딸과 함께 사는 과부 연주의 집에 그 찻잔이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찻잔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고 계속 꼬이기만 하며, 구입을 의뢰한 재벌 2세 하 대표의 압박도 거세져만 가는데...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대박을 터뜨렸던 손재곤 감독의 작품으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코믹 범죄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 작품입니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인의 완벽한 계획이 계속 틀어진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지만 - 최근의 예로는 "뉴욕을 털어라"를 들 수 있겠죠 - 도둑질하려는 집에 세를 든다는 한국적인 설정이 인상적이네요. 덧붙여 오랜만에 적역을 소화한 한석규 - 김혜수라는 두 중견 배우의 연기도 무척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한석규의 작전(?)이 꼬이는 과정이 중반 이후, 그러니까 창인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급격하게 김이 빠진다는 점과 재벌 2세와 조폭까지 곁들여져 한석규를 압박하는 악당들 캐릭터가 코믹하게 변주된 것은 아쉬웠습니다. 특히 재벌 2세와 조폭은 작품 특성상 설득력과 더불어 긴장감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중요한 캐릭터들이었는데, 웃음 쪽으로 너무 많이 간 느낌이에요. 거기에 더해 김혜수의 딸인 '우유소녀' 성아의 고민과 갈등은 TV 학원청춘물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족일 뿐이었습니다. 덕분에 2시간이 안 되는 러닝타임임에도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결말도 시시했고 말이죠.

아울러 복수의 화신으로 돌아온 창인이 갑작스럽게 우울증 모드로 돌변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속편을 염두에 두고 연주를 끝까지 추격하는 창인의 모습을 살짝 그려주는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요?

TV의 "출발 스포일러 여행" 등에서 접하고 기대가 컸었는데, TV에서 보여준 화면들이 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충분했어요. 좀 더 캐릭터를 덜어내더라도 깨알 같은 웃음과 긴장감을 주는 쪽으로 주력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이디어가 아깝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3/12/19

빙과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2.5점

빙과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회색을 선호하는 에너지 절약주의자 오레키 호타로가 누나의 부탁(협박?)으로 가미야마 고교의 특활동아리 "고전부"에 입부한 뒤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을 다룬 일상계 단편 연작집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국내에서 예상외로 사랑받는 작가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출간은 순전히 애니메이션으로 더욱 유명해진 덕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없었더라면 작가의 데뷔작일 뿐더러, 무슨 상을 탄 것도 아니기에 딱히 출간될만한 임팩트는 없거든요. 뭐 저 개인적으로야 작가에게 호감이 있는 편이라 국내 출간된 작품은 챙겨 읽는 편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상계 미스터리물이기도 해서 주저 없이 읽어보게 되었지만요.

작품은 기대했던 대로, 그야말로 일상계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일상계 작품이더군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소소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분명히 열려 있던 부실의 문이 잠긴 이유, 매주 금요일에 똑같은 책이 대출되고 반납되는 이유, 고전부의 회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찾아내는 정도의 사건들이니까요. 이후 지탄다의 삼촌이 남긴 말과 33년 전에 학교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지탄다의 삼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리하는 약간 긴 분량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역시나 딱히 큰 사건은 아닙니다. 빙과라는 회지의 제목이 삼촌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는 것 정도가 인상적일 뿐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소소한 사건이지만 충분히 우리 주위에서 있었음직한 것들이라 설득력 높고, 사건의 이유와 진상을 파헤치는 추리적인 재미 역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살인범이 넘쳐나는 부동고교가 비정상적인 거지, 고등학교에서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건 당연하니까요.

필요 없는 에너지를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의 소유자이지만 주어진 정보를 조합하여 정확한 결과를 추리해내는 의외의 능력을 갖춘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 오감이 발달해 있고 섬세한 감성을 갖췄지만 의외로 행동파인 지탄다 등의 캐릭터들도 생동감 넘치면서도 현실에 있음직한 고등학생들 그 자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친구들도 감초 역할은 충분히 해 줍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작품 내에서 무리하게 성장기를 그려가는 전형적인 청춘물 느낌을 많이 전해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고전부에 입부한 뒤 평범한 사건과 소소한 일상을 거치며 약간은 회색에서 물든 오레키 호타로의 변화 정도가 딱 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일상계의 단점인 밋밋한 이야기가 도드라지기는 해서 살짝 감점했습니다만, 일상계 추리물의 왕도를 걷는 작품으로 충분히 추천할 만합니다. 책의 장정과 크기 등 만든 모양새도 최근 본 책들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네요. 애니메이션도 구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고교를 무대로 한 설정과 소소한 일상 속 사건을 다룬 내용, 거기에 오레키 호타로와 고바토라는 탐정역 캐릭터의 속성까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소시민 시리즈와 굉장히 유사한데 왜 별개의 시리즈로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궁금합니다. 뭐 하나라도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없기에 하나의 시리즈로 일관되게 끌고가도 충분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2024/05/31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 미야지마 미나 / 민경욱 : 별점 2.5점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 6점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왜 매일 가려는 거야?"
"올여름의 추억 만들기랄까?"


평이 좋길래 읽어본 최신 일본 단편 연작 소설. 2024 제 21회 일본 서점 대상 수상작입니다. 서점 대상은 서점 직원들 투표로 선정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먹힐만한 오락성이 보장된 작품이 많은 편이지요. 이 작품도 확실히 읽는 재미만큼은 전혀 빠지지 않더군요. 재미있게,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루세 아카리의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까지를 다루는 6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청춘 소설로 나루세 아카리가 작품의 핵심입니다. 나루세는 공부와 운동 모두를 잘하는 슈퍼 우먼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엄청난 마이 페이스 소녀입니다. '다,나,까'에 가까운 딱딱한 말투도 독특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특징은, 한 번 세운 목표는 몸과 마음을 다해 전념한다는 겁니다. 천하를 잡을 목표를 세우면 정말로 잡을지도 모를 정도로요. 
이러한 특징은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 백화점!"과 "제제에서 왔습니다"라는 두 편의 단편에서 제대로 선보입니다.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 백화점!"에서는 곧 문을 닫는 도시의 유일한 백화점에 폐점 때까지 매일 방문해서 지역 방송에 매일 나오겠다는 여름 방학 계획, "제제에서 왔습니다"는 만담 경연대회인 M1 그랑프리 예선전 출전이라는 계획과 실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견 황당무계한 계획이 점차 틀을 갖춰가는 과정이 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등과 얽혀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아울러 이 두 편에서 화자 역할로 등장하는 나루세의 유일한 친구 시마자키 미유키가 불러일으키는 재미도 큽니다. 만담의 보케 - 츳코미 관계와 비슷하거든요. 황당한 계획을 세우지만 자신만의 기준으로 이를 강행하는 나루세가 보케, 상식인으로 계획의 황당함을 지적하는 미유키는 츳코미 역할이라 할 수 있는데, 둘의 티키타카가 정말 볼만합니다! 미유키가 결국 어느새 말려들어가서 계획의 일부분이 된다는 전개도 뭔가 만담스러웠고요. 정작 M1 그랑프리 출전은 보케가 미유키, 츳코미를 나루세가 맡는다는 의외성도 좋았어요. 
이렇게 황당함이 강한 캐릭터를 바라보는 평범한 주변 사람을 소재로 한 작품은 "멋지다! 마사루"를 비롯하여 엄청나게 많습니다. 1년 전에 소개해드렸던 "유가미군은 친구가 없다"도 별다를게 없죠. 그러나 이 작품은 소녀 청춘물스러운 분위기로 '개그'보다 추억 만들기같은 '일상'에 주력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황당 캐릭터를 여성 작가가 여성의 마음으로 바라본 따뜻한 묘사로 소녀스럽게 그려내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시가현'이라는 무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뭔가 중요한게 빠져있는 동네이지만 비와호라던가 빅쿠리돈키 등 나름의 매력이 가득하다는게 잘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오래전 시가현 출신 일본 개그맨의 히트곡 '시가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세븐 일레븐도 없어' 같은 가사가 있었는데....
"레츠 고 미시간"은 화자가 미유키가 아니라 나루세에게 호감을 가진 남학생 니시우라로 바뀝니다. 미유키처럼 분석적이 아니라 그냥 순수한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츳코미'보다는 단순 관객으로 보이는데, 이것도 나름의 맛이 있더군요. 나루세의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녀가 깊이 고민하고 니시우라의 마음에 어렵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장면은 아주 상큼했어요. 이 작품이 영상화된다면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세 단편들은 재미가 덜합니다. 화자가 바뀌는 탓이 큽니다. "선이 이어지다"가 특히 별로였어요. 나루세와 정 반대로 어떻게든 평볌함을 연기하려는 동급생 오누키가 화자인데, 그녀의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루세의 기이함만 강조되는 듯한 전개가 영 별로였기 때문입니다. 끝 부분에서 약간의 이해 정도로 수습하고 넘어가기는 하는데, 너무 무난한 결말이라 썩 개운치는 않았어요. 마지막 "도키메키 고슈온도"는 화자가 나루세 본인인데, 타인이 바라본 그녀의 독특함을 잘 느끼기 어려워 아쉬웠고요. 유일한 친구 시마자키 미유키와의 우정과 제제카라의 존속을 그리며 끝맺는 마무리도 지나치게 평범했습니다. 천하를 잡으러 가는 소녀 이야기의 결말로는 너무 부족하잖아요!
"계단에서는 달리지 않아"는 아예 나루세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아저씨들이 주인공이라 붕 뜹니다. 첫 단편과 엮이기는 하는데 다소 작위적이며, 구태여 엮을 이유도 없었고요. 내용도 흔해 빠져서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루세와 시마자키 컴비의 캐미가 폭발하는 앞의 두 편은 별점 5점도 아깝지 않은데, 뒤이은 단편들이 평균을 많이 깎아 먹었습니다. 혹시라도 후속작이 나온다면, 미유키 시점으로 나루세의 황당한 계획을 계속 그려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