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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7

그 무렵 누군가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1.5점

그 무렵 누군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주말을 보내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입니다. 그간 읽어왔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그래도 무난한 수준들이었기에 이번에도 적당한 재미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후지 TV 드라마 "히가시노 게이고 미스터리즈"의 원작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 책 뒤 소갯글에 낚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주 별로였습니다. 폭탄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해요. 모두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기본적인 완성도를 갖춘건 "수수께끼가 가득", "레이코와 레이코", "재생 마술의 여인" 세 편 뿐이거든요. 다른 작품들은 너무할 정도로 수준이 낮거나 다른 여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2011년 일본에서, 그리고 2014년 우리나라에서 발표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과 내용이기에 조금 조사해보니, 실제로는 20여년 전 일본 버블 경제 시기에 발표되었던 단편들이더라고요. 대 인기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묻혀있다가 20여년 만에 발표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동안은 너무할 정도로 수준이 낮아서 책을 내 봤자 망할거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작가 이름값이 높아진 덕분에 겨우 출간되었고요. 그 정도로 한심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작가의 수많은 책 중에서도 최 하급을 차치할 유력 후보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시더라도 딱히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좋은 책들도 많으니까요.

수록 작품별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수께끼가 가득" 

야요이의 애인 다카노리가 살해당한 후, 야요이는 다카노리의 친구라 자칭하는 기타자와라는 남자 등으로부터 사건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카노리가 거부 나카세 고지로 사장의 유언장을 훔쳐 은닉하였다는 것이었다...

페라리와 베엠베, 고층 고급 빌라, 회원제 스포츠 센터 등 버블 시대의 환영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버블에 대해 정색을 하며 비판하던 기요미가 진범이라는 결말은 독자를 허탈하게 만듭니다. 야요이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이 돈만 쫓는 속물이라는 결말이니까요. 물론 어차피 진지한 버블 비판이 담긴 사 회파 작품은 아닌 만큼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작 중 등장하는 트릭은 두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마법사의 손"이라는 기타자와의 대사, 다른 한 가지는 다이잉 메시지 "A"입니다. "마법사의 손"은 "선인장"을 암시하는 말인데, 이미 작중에서 기타자와가 온실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트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작에 조사하지 않은게 오히려 이상하죠.
"A"라는 다이잉 메시지는 최악입니다. 범인을 나타내는 말도 아니고, 유언장의 트릭을 밝혀내는 키워드에 불과해서 죽기 직전에 쓸 말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 탓입니다. 게다가 이를 가지고 기요미가 범인이라고 하는건 불가능합니다. "다이잉 메시지"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작위적인 설정이라 이를 활용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기는 힘든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TV에서 영상화되었다고 소개되는데, TV로 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레이코와 레이코" 

변호사 요코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 레이코를 거두어 돌봐주었다. 그러나 레이코는 마에무라라는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수배된 상태인데...

"수수께끼가 가득" 처럼 버블의 환영이 가득하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청색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다니는 젊은 여성 변호사, 아르마니 양복과 롤렉스 시계로 치장하고 현금은 20만엔 씩 들고 다니며, 차량은 6백만엔짜리 청색 세르시오라는 29살의 증권 회사 직원 등이 등장하니까요. 이 정도면 여고생 지갑이 구치인 것은 굉장히 소박해 보입니다.

그래도 트릭 한 가지는 꽤 괜찮습니다. 레이코가 사나에의 결혼 상대에게 살의를 품는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된 마에무라의 아내가 그녀를 살해에 이용한다는 일종의 원격 조종 트릭인데, 꽤 그럴싸하게 그려져 있거든요. 과거 성폭행을 당한 탓에 정신 이상이 생긴 레이코의 상태를 전편에 걸쳐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도 이 트릭에 설득력을 더해주고요.
또 레이코는 다중 인격자이며, 현재의 상냥한 레이코는 과거 살인을 저질렀던 흉폭한 레이코에 대해 모든 것을 잊은 기억 상실 상태라는 결말에서, 사실 이 모든 것은 흉폭한 레이코의 '연기'일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반전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상당히 서늘하면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로 이렇게 소모되는게 아깝다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다중 인격이라는 설정은 분명 진부한 설정이고, 너무 극단적인 이상 심리 상태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긴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재생 마술의 여인" 

네기시 부부는 어렵게 아이를 입양했다. 아내를 먼저 돌려보낸 네기시 미네카즈에게 입양 센터의 책임자 나카오 아키요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과거의 범죄, 그리고 현재의 충격적인 진상과 뒤이어 반전으로 끝나는 전개도 무척 좋고요.

그러나 핵심 설정, 즉 '이미 사망한 피해자의 몸 속에 남아 있던 정액을 보관했다가 이를 7년 후에 체외 수정하여 아이를 만든다'는 걸 미네카즈가 믿는다는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20여년 전 이야기라고 해도 설득력이 부족해요. 이 정도 기술력이 있다면 정액의 DNA를 분석하여 범인을 찾아내는게 훨씬 빨랐을테니까요. 네기시 미네카즈가 공부만 좀 했더라면 별 일 없이 끝났을겁니다. 혹 공부와 자기 개발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작가의 큰 뜻이 담긴 것일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핵심 설정이 말이 안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빠 안녕" 

"비밀"의 원전입니다. 그러나 단편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에요. 사고로 딸 가나에의 몸 속에 엄마 요코의 영혼이 들어오고, 곧바로 딸이 결혼하면서 끝나버리거든요. "비밀"에서처럼 여러모로 복잡 미묘한 부부, 부녀의 관계를 디테일하게 그리지 않아서 영 볼게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여러모로 완성된 한 편의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무리인데, "비밀"을 쓰기 전 편집자에게 건네준 요약본이 아닐까 싶네요.

"명탐정의 퇴장" 

본격 고전 퍼즐 미스터리를 패러디하는, "명탐정의 규칙"의 원전격 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패러디 외에는 별다른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만화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패러디가 이어지더라도 결국 트릭과 진상이 존재하는, 그런 작품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자도 호랑이도"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를 연상케하는 초단편으로 사형수가 문을 세 개 열 수 있는데, 한 개는 여자, 또 한 개는 굶주린 호랑이, 마지막 한 개는 뭔지 모른다는 설정은 재미있었어요. 결국 또 다른 한 개는 여자이자 굶주린 호랑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이 여자가 '여자의 문' 속 여자인지, '제 3의 문' 속 무언가였는지 밝혀지지 않는 것은 좀 답답했습니다. 이게 핵심이라서 조금 더 정교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자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동경하던 야마사키 유카리와 데이트한 직후, 정신이 든 '나'는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이유를 추리하는데...

'나'가 이 상황에 처한 이유를 처음부터 되짚어 하나씩 밝혀내는 전개는 괜찮습니다. 야마사키 유카리의 완전 범죄 계획도 그럴듯하고요. 여러가지 상황에서의 목격자 증언을 활용한다는 것과, 간단한 바꿔치기 트릭이 핵심인데 간단한만큼 설득력도 높습니다.

그러나 과학 수사 시대에 맞는 트릭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가 탄 것으로 추정된 택시의 지문 조사만 해도 경찰이 상황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테니까요. 택시에 대한 상세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나'와 유카리의 남자가 동일 인물이 아닌 것이 증명될 방법은 많고요. 

수사적으로 부족한 부분이야 20년 전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이야기가 기승전결이 확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문제도 큽니다. '나'가 진상을 깨닫고, 자신이 수면제를 먹고 손이 묶인 채 목을 메달기 직전이라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탓입니다. 다른 장편이라면 도입부에 불과한 내용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느낌이거든요. 여기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아 복수를 하던가 해야 하는데, 그냥 이렇게 마무리 되니까 많이 당황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가 완성되지 못한 느낌이 강한데, 이어지는 속편이나 후속 이야기가 없다면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20" 

결혼해서도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남편 데루히코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내 아사코는 그를 미행하는데...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웠던 작품입니다. 평범한 가정 주부 아사코가 남편 데루히코가 지닌 비밀이 무엇일까?를 파헤치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평범한 대학생 등이 주인공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스탠드 얼론 작품들과 유사하지요.

하지만 데루히코의 비밀이 너무 별게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어린 시절 유괴되어 살해된 니시노 하루미와 나비를 잡으러 가기로 하고 가지 않은 탓에 그녀가 죽었다는 자책을 안고 살아간다는건데, 이 사건과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심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이 진상 자체를 이미 시미즈 부부가 알고 있던지 오래되었다는 허무한 결말은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좀 더 충격적이고 설득력 있는 과거 사건이 드러났더라면 아주 괜찮았겠지만 이대로는 아닙니다. 하기사, 그랬더라면 여기 수록된 단편 수준으로 끝나지는 않았겠죠.

2021/03/13

범죄소설 - 김용언 : 별점 3점

범죄소설 - 6점
김용언 지음/강

얼마 전 읽었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와 유사한, 추리 및 범죄, 하드보일드 장르 문학에 대해 분석한 문학 이론서입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미국 역사 흐름에 따른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가 장르 문학 스타일 변경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이 책 역시 동일한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확대, 남성들의 불안 등이 주요 동기였다는 주장은 별다를게 없거든요. 특히 하드보일드 문학 장르에 대한 분석은 거의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소개되는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대동소이하고요.

그렇지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서는 순수하게 하드보일드 소설만 분석하고 있으며, 시대가 변할 수록 '감상주의'가 강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이 책은 고전 본격물과 이후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을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두 장르를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이 책에 따르면 고전 본격물은 외부적 자극이나 변화의 계기를 일절 고려하지 않은, 모든 원인과 결과가 세심하게 고려되고 창안되고 배치된 '닫힌 계'입니다. 추리 소설은 하나의 기계와 같고, 독서는 경악과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호기심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요. 탐정이 멕스웰의 도깨비 역할을 해서, 무질서를 통제하고 질서를 찾게 만드는 것이지요.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며 사물의 일상적 질서가 회복되는 평화로운 결말로 끝납니다. 이를 호기심이라는 에너지가 최대에서 최소로 옮겨가고, 엔트로피가 최대인 '평형 상태'가 되는 열역학 엔트로피 이론과 동일하다는게 요지입니다. 이렇게 마지막에 '열 죽음'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한 번 읽고 결말을 알게되면 그 책을 다시 읽게 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고요. 

하지만 20세기 하드보일드는 다릅니다. 셜록 홈즈처럼 완벽한 멕스웰의 도깨비 역할이 불가능하다는걸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할 수 있는건 사회의 부패와 범죄가 들끓는 현상을 낮추고, 일시적이나마 숨겨진 질서의 패턴을 찾아내려 애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완벽한 무질서의 해결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가 더 큰 무질서를 낳기도 하니까요. 엔트로피 이론에 따라 결국 어느정도 안정화되기는 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고요. 

또 이 논리에 따르면 1980년대 일본에서 신본격 소설이 등장하여 유행한건, 일본이 버블 경제로 최고 호황을 맞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19세기 산업 혁명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 되면서 사람들이 '닫힌 계', 즉 범죄가 해결되고 안정적인 질서로 끝나는 체계를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처럼 개인이 발버둥쳐서 좌절하거나 약간의 희망과 소득만 얻을 뿐, 부조리한 세계는 그냥 알아서 움직인다는 어두운 이야기는 먹히지 않게 된 거지요. 반대로 버블이 붕괴한 1990년대 이후, 기리노 나쓰오 등에 의해 처절한 범죄 소설이 등장한건 당연한 수순이고요.

이렇게 재미있는 발상은 돋보이는데, 문제는 책이 쑥쑥 잘 읽히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정말 어렵게 쓰여져 있거든요.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읽기 편한 글은 아니었어요. 한국 작가가 쓴 글인데도 불구하고 분석 대상이 영미 장르 문학이라는 것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그래도 범죄 소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8/08

빛의 현관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2.5점

빛의 현관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품이 꺼진 뒤 몰락해버린 건축업계에서 친구 오카지마의 도움으로 겨우 설계일을 이어나가던 아오세는, 의뢰인 요시노로부터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평생의 걸작인 Y주택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요시노 가족이 Y주택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아오세는 그들의 행적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옛 유명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존재가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는걸 알아채는데....

원제는 "노스라이트"로 2020년에 발표되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신작입니다. 2020년 당시, 온갖 순위를 휩쓴 작품이지요. '202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국내편 2위, '2020 주간문춘 베스트 미스터리' 1위, '202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2위 등을 차지했었습니다.

건축가가 주인공인 추리 소설은 보기 드뭅니다.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건물들이 사건의 무대가 되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건축가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는 없고, "낯선 승객"은 주인공 거이가 건축가지만 내용은 건축과는 무관했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아오세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인 Y주택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심혈을 기울인 Y주택에 의뢰인 가족이 이사오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하며 직접 찾아 나선 설정과 동기는 지극히 건축가스러우니까요.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외국인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설명들은 나중에 아오세가 건축가로 더욱 성장하여 미술관 공모전이라는 큰 도전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아오세의 가족 복원에도 도움을 주고요. 이 정도면 건축가가 주인공이며, 건축물이 주요 소재인 추리물이라고 하기 충분하겠죠.

물론 주인공 아오세가 평범한 건축가인 탓에 대단한 추리력이나 수사력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일반인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수사와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꽤 괜찮습니다. 요시노 가족을 찾을 때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 가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진품이 희귀한 덕분입니다. 그래서 요시노 도타라는 의뢰인의 뿌리를 알아내는 과정도 타당했고, 아오세가 브루노 타우트를 알아가는 과정은 독자도 함께하는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Y주택을 짓게 된 의뢰는 요시노 가족이 아니라, 이혼한 전처 유카리의 바램에서 비롯되었다는 진상을 알아내는데까지의 전개도 자연스럽습니다. 아오세와 유카리가 함께 살 때 이야기했던 내용을 복선처럼 앞에서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따뜻한 가족 관계의 복원을 암시하는 마무리는 완전 제 취향이었고요. 저는 해피 엔딩을 좋아하니까요.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재이며 가족 관계 복원의 핵심인, 이른바 '노스라이트'를 끌어들여 빛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는 Y주택에 대한 묘사도 엄청납니다.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어요. 드라마화 된 영상물에서의 모습은 생각보다 작고 볼품없는 모양새라 실망스러웠지만요.

2020년 발표작인데, 아오세와 주변 인물들이 버블로 몰락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특이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극초반을 무대로 하고 있는 탓으로, 이 시기가 무대인건 1930년대 일본에 잠깐 머물렀던 브루노 타우트와 등장인물들이 연결점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1930년대 당시 브루노 타우트를 어린 나이에 만난 뒤, 요시노 이사쿠는 타협없는 깐깐한 장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상황을 목격했던 90대의 야마시타 구사오가 살아서 아오세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시노 도타는 요시노 이사쿠의 손자라고 설정해도 되고, 야마시타 구사오의 증언도 일기나 편지 등의 형태로 남아있었어도 무리는 없었을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아오세가 버블 경제의 쓴 맛을 톡톡히 보았다는 설정을 위해 이 시기로 무대를 설정했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하여튼, 이렇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아주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광의의 미스터리'로 볼 수는 있지만, 정통 추리 소설은 아닌 탓이 가장 커요. 요시노 가족의 실종을 추적하는 과정만큼은 추리 소설인데, 진상이 드러나는건 뒤에 다시 설명드리겠지만 결국 주요 등장인물들의 증언이 전부니까요. 

요시노 가족의 실종이 아오세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요시노 도타의 아버지 이사쿠와 아오세의 아버지가 구관조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다가 아오세의 아버지가 절벽으로 추락사했던 과거의 속죄를 위해서라는 설정부터가 그닥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요시노가 아버지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3천만엔의 거금을 쓴다는건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딱히 대단한 애정을 품지 않았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살아 생전 듣지 않았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거금을 쓴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지요.

등장인물들이 서로 인연을 더듬게 되는 이유도 '아오세', '요시노'라는 성이 특이하다는 탓이 큰데,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오세라면 모를까 요시노가 그렇게 특이한 성은 아니지 않나요? 유명한 규동 체인점 이름도 '요시노야'인데....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온갖 순위를 휩쓸었는데에도 불구하고, '2020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걸로 짐작됩니다.

브루노 타우트 비중이 너무 크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작 중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 타우트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부분 등은 읽으면서도 한편으로 타우트의 작품을 계속 찾아보게 만들게끔 잘 쓰여져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타우트와 그의 작품들이 이야기에 꼭 필요했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요시노 이사쿠가 브루노 타우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장인이라는게 이 작품에서 유일했던 브루노 타우트의 존재 이유인데, 자존심으로 버티는 장인이 딱히 그런 공예가일 필요는 없잖아요? 이런 장인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가 Y주택에 남아 있던 덕분에 요시노 이사쿠의 과거가 일부 드러나게 되지만, 이 역시 사건을 밝히는데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쳐지나가는 오카지마의 말이 진상을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되지요. 탐정이 아오세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이었는데, 아오세는 이를 통해 탐정을 이용하던 요시노가 전처 유카리를 직접 만났다는걸 알아냅니다. 그리고 유카리가 직접 요시노의 의뢰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요. 그 뒤 목적이 아버지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였다는건 아오세가 요시노로부터 직접 듣게 됩니다. 

이렇게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증언으로 밝혀져서, 추리도 무의미할 뿐더러 브루노 타우트 엮일 이유는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브루노 타우트와 연인 에리카의 관계도 확대 해석한 느낌이고요. 이런 점을 보면, 작가가 큰 감동을 받은 브루노 타우트를 어떻게든 끌어들여 작품을 쓰려고 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네요.

아울러 전체 분량의 2/3가 지난 시점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이어지는, 아오세가 근무하는 오카지마 건축 설계 사무소 이야기는 앞서의 요시노 가족 실종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뿐더러, 너무 뻔했습니다. 대단치 않은 부정 - 택시비 대납 - 탓에 궁지에 몰린 오카지마가 사고로 죽은 뒤, 그가 남긴 설계안을 바탕으로 사무소 직원들 모두가 힘을 합쳐 공모안을 완성한다!는 내용은 철지난 열혈 청춘 드라마와 다를게 없으니까요.

게다가 아오세를 중심으로 한 직원들이 공모안을 완성시킨 뒤, 이를 공모전에 참여하는 대형 건축 사무소의 소장 노세에게 가져간다는 결말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설계안은 무상으로 넘기고, 이름 올려달라는 말도 안 할테니 나중에 오카지마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지은 건물이라고 말하게 해 달라? 대체 뭘 위한 노력이었을까요? 뻔한 열혈 청춘 드라마도 요새 이렇게 쓰면 욕을 먹을 겁니다. 이미 인생에서 쓴 맛을 여러번 겪었을 아오세가 한 말이라는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보다는 오카지마는 죽었지만 공모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남은 직원들이 힘을 합친 결과물이 선정된다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후지미야 하루코의 유족이 오카지마를 지지했다는 설정은 남아있는 만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오카지마의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었다던가, 마유미와 오카지마의 은밀한 관계 등은 구태여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가족간의 애정은 꼭 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조금 더 세련되게 풀어냈어야 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입부는 흥미로왔고, 건축 관련된 묘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족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가 만드는 메시지도 뭉클했고요. 그러나 브루노 타우트에 관련된 내용 비중이 지나치고, 클라이막스와 결말은 뻔하고 납득하기도 어려워 감점합니다.

2004/05/25

쿼런틴 - 그렉 이건 / 김상훈 : 별점 2점

쿼런틴 - 4점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2066년,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가 버블이라 불리우는 명왕성 궤도의 두배크기의 정체불명의 광대한 검은 구체로 둘러싸여 별들이 사라진 시대, 즉 태양계가 외계 종족의 과학기술 능력에 의해 격리(quarantine) 당한 시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립탐정 닉 스타브리아노스는 익명의 의뢰인으로부터 24시간동안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정신지체 여성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닉은 각종 공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노머신에 의한 여러가지 모드를 갖춘 전직 경찰출신으로 로라라는 실종된 여성을 찾는 동안 그 여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자역학에 의한 다양한 확률적 관측을 절대적인 경로로 스스로 축소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의 소유자로 그 능력의 모드화를 위해 “앙상블”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나, 그 자신도 앙상블을 위한 충성모드가 삽입되어 충실한 심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닉은 뤼 키우충이라는 충성모드를 자신만을 위해 개조한(?) 과학자에 의해 스스로 확산능력을 삽입하게 되고 신에 가까운 능력을 획득하면서 스스로 “앙상블”의 실체와 버블의 존재에 대한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간만에 읽어본 하드 SF. 여러가지 상을 많이 타기도 했고 걸작이라는 칭송 역시 높은 소설이라 취향은 아니지만 한번 도전해 보게 되었습니다.
일단 소설 전체에 깔려있는 나노머신등을 이용한 모드라던가 각종 장치들에 대한 디테일과 격변한 지구촌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멋지지만,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적인 설정과 전개는 아주 좋았어요. 덕분에 초반부의 흡입력은 정말이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중반 이후부터는 물리학에 바탕을 두고 그 중에서도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에 굉장히 깊게 파고들어 이른바 “평행우주”라는 세계관과 지구인의 잠재 능력에 의한 우주의 위기까지를 엄청난 스케일과 방대한 과학적 지식으로 펼쳐놓는데... 솔직히 이러한 이론들에 대해서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 머리에 쥐나는 줄 알았네요. 제가 이공계 출신이 아니라서 더 심하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어려움은 너무나도 딱딱한, 원서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재미없는 번역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좀더 읽기 쉽게 번역할 수도 있었을텐데 출판사측 배려가 아쉽네요. 행복한 책읽기 SF 총서 기획은 환영할만 하고, 선정된 작품 또한 이견을 표하기 힘들만큼 수준높고 좋은 작품들이지만 앞으로 번역에는 보다 신경을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명성 높은 걸작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이해도 못한 내용에 점수를 주는건 힘들잖아요. 물론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작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펼쳐놓는 재주는 정말로 놀랍기에 앞으로 보다 쉽고 간결한 문체로, 보다 하드보일드 느낌으로 번역되어 재출간된다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싶긴 해요. 그러나 현재 시점의 이 책은 저에게는 전혀! 가망이 없는, 그야말로 quarantine 대상일 뿐입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19/10/07

오래된 책들 (7) - 와타세 세이죠의 하트 칵테일!

"하트 칵테일"은 아시는 분은 아마 아시겠지만, 80년대 일본 버블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모든게 번쩍번쩍하고 현란하며, 등장인물들은 다들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사랑 이야기만 하는 그런 세계관의 작품이지요. 미래와 꿈도 중요하지만 눈 앞의 사랑이 더 중요한, 다시는 올 수 없는 화려한 청춘 찬가랄까요? 이를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현란한 색채로 구현했으며 등장인물이 모두 성인이라는 점에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 동화같은 작품입니다.

발표 당시 일본에서는 높은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작가도 유명 일러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뮤직비디오 같은 애니메이션도 발표되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어요. City-pop과 일맥상통하기도 하고요.

다만 현지에서의 인기에 비하면 국내에서의 성과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아는 작품이지요. 그래도 세 권 분량으로 국내에 정식 소개된 적이 있다는게 고마울 뿐입니다. 이를 구입해서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는건 거의 제가 유일하지 않나 싶지만요.

그러나 출간 자체가 의의가 있었을 뿐 책의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하우 투 러브"라는 기묘한 제목 변경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와타세 세이죠의 색감을 살리지 못한 탓이 큽니다. 채도가 낮은 색감때문에 칙칙한 느낌이 강하거든요. 아마 국내 인쇄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거나, 제작비 문제가 컸었겠죠. 다시 나온다면 인쇄용 CMYK보다는 모니터의 RGB가 화려함을 살리기는 더욱 좋은 만큼 풀 컬러 e-book으로 나오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80년대를 회고하며 가끔 뒤적거리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화려함은 빛이 바랬지만 청춘과 사랑의 추억은 영원한 법이지요. 그런 점에서는 칙칙한 색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2015/12/20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수십 년 전, 80년대 초반 고민 상담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빈집이 된 지 오래인 나미야 잡화점에 3인조 빈집털이들이 숨어들었다. 그런데 잡화점에 고민 상담을 위한 편지가 들어왔다. 상담에 응하게 된 3인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재의 나미야 잡화점이 1980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일상계 판타지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5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로 알고 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 재미있더군요. 3인조 어설픈 빈집털이범들이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잡화점에서 고민 상담글을 받은 뒤, 그 공간이 30여 년 전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이야기부터 눈길을 사로잡아 마지막 이야기까지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읽어버렸습니다.

사실 특정 공간이 시공을 초월해 연결된다는 아이디어는 그동안 많이 있어 왔습니다. 편지만 시간을 넘어 전달된다는 설정도 영화 "시월애"와 똑같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5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이 거의 모두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 고민 상담과 아동 복지시설 "환광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독특한 구성으로 차별화됩니다.

상담이 중심인 작품답게 상담 과정의 디테일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특히 상담이 일종의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의뢰인이 상담 결과에 따르던, 따르지 않던 모두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는 점도 와 닿았습니다. 상담은 참고일 뿐, 답은 결국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아울러 80년대 배경의 이야기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음악 등 세부 묘사는 아련하면서도 추억을 불러일으켰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3인조 얼치기 범죄자들이 1장, 2장, 5장에 걸쳐 주요 상담자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얄팍한 상담글들이라 감동이나 깊이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상담이 성공하는 것도 애초에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능했을 뿐이고요 — 일본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다, 가쓰로는 사고로 죽지만 명곡을 남긴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80년대에 시작되어 90년대 초에 끝난다 등 —. 이래서야 제대로 된 상담이라고 보기 어렵지요.

이에 반해 4장에서의 나미야 할아버지의 직접 상담은 따뜻한 애정과 진지한 고민이 묻어나 확실히 비교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4장의 이야기만큼은 별점 5점을 줘도 될 만큼 마음에 들었어요. 상담에 따르지 않고 부모를 떠난 고스케가 나미야 잡화점 부활의 날에 동네를 방문한 뒤 우연히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 뒤 감사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비틀즈와 영화 "Let It Be"와 엮어 풀어내는 솜씨 또한 너무나 탁월했습니다. 70~80년대 감성에 더해진 감정을 건드리는 디테일한 묘사는 흡사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하더군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새롭지만은 않은 설정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변주하고 새롭게 풀어낸 솜씨는 탁월하며,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잘 팔리는 작품은 역시 이유가 있네요. 가슴 따뜻해질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이야기별 간략한 요약 및 연결고리는 아래에 설명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제1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얼치기 빈집털이 3인조는 잠시 숨어지내기 위해 찾아든 빈집 "나미야 잡화점"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달토끼"라는 닉네임의 의뢰인의 상담글을 받은 뒤, 나미야 잡화점이 뒤틀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에 응하게 됩니다.

의뢰인의 고민은 암에 걸린 연인을 간호할 것인가, 아니면 둘의 꿈이었던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노력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본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보이콧)을 알기에 연인 옆에 있기를 강조하는 3인조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의뢰인 달토끼는 꿈을 위해 노력하고 결과를 받아들인 뒤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결말 이어집니다. 

이야기의 시작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무엇보다 3인조의 답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결심을 굳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지만(올림픽 선수 선발 탈락과 연인의 죽음), 오히려 스스로 더욱 값진 것을 얻었기에 감사한다는 달토끼의 말이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3인조가 아닌 가수 지망생 가쓰로(생선 가게 예술가) 시점의 이야기. 그의 고민은 가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는 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명제에 어울리는 이야기랄까요. 뭔가 세상에 남겼다면 그 자체가 의미있는 삶이었다는, 약간은 고전적 사고방식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뭔가를 남긴다는 자각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더 클 것 같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긴 했습니다만, 뭐 이런 삶도 있는 것이겠죠.

참고로 작품 전체의 관계도로 보자면, 1장의 3인조가 환광원 출신인데 2장의 가쓰로가 작곡한 노래가 환광원 출신 유명 가수 세리가 부른 노래의 오리지널이고, 가쓰로는 환광원 화재 당시 숨을 거둡니다. 이러한 사실을 3인조는 환광원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기에 음악을 듣기 전에는 현실적이고 신랄하게 답변하지만(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듣고 난 후에는 전력으로 상담에 응하지요.

제3장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

나미야 할아버지와 아들 다카유키의 이야기로 나미야 할아버지는 자신이 상담한 미혼모의 사고사를 접하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 나미야 잡화점이 시공을 초월해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상담한 사람들에게 감사 편지를 받는데, 그 중 미혼모가 낳은 아이의 편지를 통해 안식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인격이 묻어나는 좋은 이야기. 잔잔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 중 가장 시공 이동을 잘 활용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 관계도로는 여기서 나미야 할아버지가 백지 편지에 대한 상담글을 쓰는데 이 백지 편지는 5장에서 3인조가 시험삼아 넣은 편지입니다. 미혼모가 낳은 아이는 환광원 출신으로 2장에 등장하는 유명가수 세리의 친구이자 현재는 그녀의 매니저고요.

제4장 묵도는 비틀스로

비틀즈 매니아 폴 레논 고스케가 야반도주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

앞서 말씀드렸듯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오사카 만박이 열리고 비틀즈가 해체한 1970년대를 무대로 하여 비틀즈 매니아인 주인공 고스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배경 묘사도 좋지만 고스케(폴 레논)의 고민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글이 정말로 심금을 울립니다. 저 역시 아이 하나를 키우는 가장이기에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멋진 날이 되리라.' 맞아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 가족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배에 타고 계속 항해해 나가야죠.

관계도로 보자면, 고스케가 위탁된 보육시설은 당연히 환광원이며, 환광원 화재 사건때 5장의 주인공 하루미를 만나게 됩니다.

제5장 하늘 위에서 기도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환광원 출신의 하루미가 성공하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3인조의 예언으로 큰 돈을 벌게 되지요.

그런데 3인조의 성장, 백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변 - 백지이기에 모든 것은 너 마음먹기에 달렸다 - 은 너무 뻔해서 좀 지루합니다.

그래도 하루미와 3인조가 결국 엮이고, 3인조가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대단원까지 깔끔하게 이어지는건 괜찮더군요.

관계도로는 하루미는 1장의 상담자 시즈코의 이웃사촌이자 3인조 강도행각의 피해자입니다. 또 환광원의 설립자와 나미야 할아버지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연결고리가 밝혀지며, 3장에서 쓴 나미야 할아버지의 백지 편지 답변을 3인조가 받게 됩니다.

2023/10/01

류 - 히가시야마 아키라 / 민경욱 : 별점 3점

류 - 6점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해피북스투유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와 의형제가 되었는지 묻자, 마 할아버지는 만두를 입에 넣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알았고, 뭐, 네 할아버지와 있으면 굶지는 않았으니까.”
리 할아버지와 구오 할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먹는 것과 목숨을 거는 일은 같은 거라는 사실을 이때 새삼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함께 먹는 것, 제대로 먹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었다.

예치우성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했다. 단순 강도 사건은 아니고 국공내전 때 많은 공산당원을 살해해서 원한을 샀기 때문으로 보였다. 예치우성은 대리 시험을 보다가 퇴학당해서 3류 고등학교로 전학가고, 거기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대학을 떨어지고, 소꼽친구인 두살 연상 마오마오와 사랑에 빠지지만 어릴 때 부터의 친구 사오잔과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군대에 갔다가 마오마오와 헤어지는 등 질풍노도와 같은 청춘을 보내며, 할아버지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버블 일본에 농산물 등을 수출하는 회사에 일하면서, 중국에 있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마 할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범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범인은 삼촌 위우원으로,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살해했던 왕커창 일가의 유일했던 생존자 아들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슈알후의 아들인 척 하여 할아버의 양자가 되었었다.....


대만계 일본 작가의 작품.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집어들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인공 예치우성의 고등학교에서 군 생활까지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춘 소설이자 예치우성의 성장기더라고요.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답게, 묘사는 출중합니다. 70년대 대만을 이렇게까지 실감나게 그린 작품은 정말이지 처음 보네요. 숨막히는 더위로 대표되는 이국적인 풍광이 가득하지만 70~80년대를 거쳤던 한국인 독자에게 친숙한 광경들이 많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가학적이고 거친 학교 생활, 무식한 군대 생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레코드 가게에서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준다는 등 당시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많이 느껴진 덕분입니다. 특히 전쟁으로 본토에서 쫓겨난 외성인들과 본성인들의 갈등 상황은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요. 의형제, 의리를 강조하는건 확실히 중국스러웠습니다만.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모두 강렬하며, 이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치우성의 그야말로 폭풍같은 청춘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파괴적이기도 하면서,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황이 펼쳐져서 눈을 떼기 힘들정도였어요. 살짝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치우성이 제대한 뒤인 80년대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세컨드 러브>> 등이 언급되는데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도 익히 잘 아는 시대니까요. 그런데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진 뒤 '두 번째 사랑'을 만났다는걸 의미하기 위해 이 곡을 일부러 등장시켰을텐데 이렇게 노골적인 제목보다는 은근하게 <<슬로 모션을 다시 한번>>처럼 접근하는게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추리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도 없어요. 작품 내에서 할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이 중요하게 언급되며, 치우성도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펼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단서도 없고, 치우성의 수사도 근거없는 헛된 노력에 그칩니다. '분신사바'가 중요한 단서인 것처럼 등장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범인이 삼촌 위우원이었다는건 나름대로 반전이지만,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친구 마 할아버지가 보낸 사진으로 드러나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이전에 쌓아 올렸던 단서들, 예를 들어 위우원이 했던 거짓말 등이 있기는 하지만 피상적이며, 단서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추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위우원이 십 수년이 지난 뒤에야 예준린을 살해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예준린을 살해했을 때 치우성을 포함한 다른 예씨 일가를 모두 살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예준린이 위우원이 슈알후가 아니라 왕커창의 아들이라는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걸 위우원이 깨닫는건, 예준린을 살해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 동안 복수를 멈추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점들을 본다면 이 사건은 추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위우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아들처럼 대했다는 묘한 상황을 통해 중국과 대만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는 소재로 쓰였을 뿐입니다. 치우성의 질풍노도와 같은 정춘은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대만으로 향하는 성장통인 셈이고요.

후기를 보니 작가는 캐릭터가 마음대로 날뛰도록 작품을 쓴다던데, 그 말대로 전체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쓰지 않은 티도 물씬 납니다. 치우성이 어리석게 사오잔과 어울리며 비슷한 사고를 치고다니는 전개도 그렇지만,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둘이 이복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급작스러운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황당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더군요. 치우성이 중국으로 위우원 삼촌을 찾아가 담판을 짓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었고요. 사랑하는 연인도 새로 생기고, 안정된 직장도 있는데 지금와서 왜? 라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를 무대로 각색할 수 있어 보이네요. 한국 전쟁 때 북한의 부역자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던 가족의 생존자 아이가 흥남 철수 때 남한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학살을 주도했던 국군 집안에 어찌어찌 양자로 들어갔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양부와 기묘한 애정을 쌓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복수를 위해 양부를 살해하지만 양부가 자기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허무함을 느낀다, 그리고 뿌리를 찾기 위해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향한다 정도로요. 
이렇게 정리하니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전쟁의 아픔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닌 탓이겠죠. <<최후의 증인>>이 전쟁으로 인한 양쪽 세력의 악행과 비극을 더 잘 그려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증인>>이나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23/04/15

다 덤벼! 1~8 - 고바야시 마코토 : 별점 3점

[중고] 다 덤벼 8 - 6점
고바야시 마코토 지음/학산문화사(만화)

프로 레슬러 삼사랑 (산시로)은 미국 원정을 마치고 일본에 복귀한다. 그러나 몸담고 있던 단체가 망해버렸고, 동료들도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삼사랑은 패밀리 레스토랑 점장으로 일하며 생활에 안정을 찾지만, 어느날 과거 동료였던 오두가 찾아온다. 자신이 출범시키는 새로운 프로레슬링 단체 '드림팀'에 함께 참전하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오두의 처참한 패배 뒤 옛 동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삼사랑은 다시 프로 레슬링의 세계로 뛰어들고, 오두를 망가트리고 레슬링 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옛 후배이자 현재의 격투킹 적성과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진 만화가 고바야시 마코토의 작품. 이 작품이 처음 발간된 90년대 중, 후반에는 국내에서도 이런 저런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인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스타일과 디테일 모두를 갖춘 작화 실력과 조금은 어설프고 황당한 개그로 즐겁게 볼 수 있는 만화들이었죠. 그 중 최고 인기작은 고양이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그린 <<What's Michael>>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만화가 더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게 이 작품, <<다 덤벼!>>와 버블 경제 시절 긴자 호스테스의 일상과 사랑을 그렸던 - 심지어 순애물! - <<미스 헬로우>> 였어요. 

<<다 덤벼!>>는 일본에서는 꽤나 인기 있었다는 <<1,2,3 산시로>>의 후속작입니다. 연재 기간, 권수를 보면 <<1,2,3 산시로>>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았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고, 오히려 후속작인 이 작품과 <<격투 탐정단>>은 버젓이 소개된 상황이 조금은 웃깁니다. <<1,2,3 산시로>>가 80년대 초반 만화라 소개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많았던 탓이겠지요? 80년대를 풍미했던 다카하시 루미코의 대표작들 - <<시끌별 녀석들>> 등 - 이 국내에 정식 소개된 당시에 처참히 실패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나마 <<메종일각>>은 <<도레미 하우스>>라는 다소 괴이쩍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완전판으로 출간되었지만, 역시나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요. 시대가 너무 많이 흐른 탓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 보아도 꽤 재미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현재의 UFC 같은 이종 격투기를 전면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대체로 프로레슬링 경기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타격기, 관절기가 모두 실전처럼 사용되는 것으로 묘사되며, 적성과 대결하는 최종 클라이막스는 현재의 이종 격투기와 별로 다를게 없기 때문이에요. 레슬러들만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프로 유도'라는 단체의 리더 유정기와 적성의 대립도 치밀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리얼 이종 격투기라 할 수 있겠지요.
또 전개를 통해 ''프로 레슬링이야말로 최강의 격투기, 프로 레슬러 삼사랑은 지상 최강의 사나이"라는게 - 사실 여부를 떠나서 -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브록 레스너가 UFC에서 - 약물 여부를 떠나 - 유의미한 활약을 했던게 충분히 그랬음직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이를 뒷받침하는ㅡ 완숙의 경지에 달한 고바야시 마코토의 작화도 좋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들은 프로 레슬링 만화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고 수준을 다툴 만큼 멋져요. 


데스 매치, 시멘트(프로레슬링에서 승패가 정해진 연출된 시합이 아닌 실전 시합) 등의 전문 용어와 삼사랑의 피니쉬 '브레인 바스터 (위 이미지)' 등 - 일본식 표현이지만 - 관련 기술명도 비교적 (저먼 수플렉스를 더맨 수플렉스라고 표시하는 등 오류는 있습니다)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존 유명 프로 레슬러들의 카메오 등장이라던가 작가 특유의 썰렁한 개그들도 볼거리입니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주인공이 한단계, 한단계씩 위로 나아가며 적을 쓰러트리고 결국 최종보스까지 물리치는 전형적인 왕도식 전개도 확실한 재미 요소였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일본 이름의 한국식 독음을 비롯, 좌우반전 등의 문제가 있는 오래전 출간작이기는 하지만 프로레슬링 팬이라면 한 번 찾아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덧붙이자면, 알라딘 중고가가 마지막 권 (8권)은 무려 5만원이 넘는 가격에 등록된게 있는데 당연히 그 정도 가치가 있는건 아닙니다.....

2023/07/23

N - 미치오 슈스케 / 이규원 : 별점 2.5점 (2점에 가까운)

N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수록작들 대부분이 정통 추리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건이 많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등장한다 해도 전형적인 범죄물이나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탓입니다. 예를 들어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은 살인, 사체 은닉과 같은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범죄와는 별 관계없는 인간 드라마입니다. 살인범이 체포되지도 않고요.

그래도 드라마들은 괜찮은 편이고 재미도 있습니다. 인간 드라마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일상계 추리물 (이름 없는 독과 꽃), 성장기 + 청춘물 + 인간 드라마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가족 드라마 + 일상계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등 선보이는 장르의 폭도 넓습니다.
정통 추리물이 아닐 뿐, 추리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특히 <<이름 없는 독과 꽃>>은 작가 명성에 걸맞는, 괜찮은 일상계 추리물이에요. 학교 무대의 가벼운 일상계라는 점에서 요네자와 호노부 느낌이 살짝 들더군요. 결말은 전혀 달랐지만요.

그러나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는 과장 광고였습니다. 세계관과 무대, 등장 인물들이 겹치는 연작 단편 소설일 뿐이에요. 읽는 순서에 따라 대단히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작가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작품이 그걸 잘 반영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기는 힘드네요. 소설이라는 매체에 적합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읽은 순서대로에요.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고등학교 야구부원 신야는 보결이지만 매일 새벽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형 히데오는 고시엔 진출을 눈 앞에 둔 결승전 직전 무리한 포크볼 연습으로 팔꿈치를 다쳤고, 그 이후 자살했다. 신야는 형에게 악질 DM을 보낸 누군가가 보란듯 형처럼 자기를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죽어 버려"라고 말하는 회색 앵무 리쿠짱과 주인인 소녀 나가미 지나미를 알게되었다. 지나미가 죽고 싶어 한다는걸 눈치챈 신야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한 원양어선 선원 니시키모 씨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서 함께 빛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꽃을 보게 되었다.


학원물이자 성장기인 작품. 거대한 꽃을 보았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서로의 속 마음을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곤충 연구원인 나는 버블 붕괴로 전 재산을 잃은 연인 다사카에게 폭행을 당해왔다. 마침내 살해당하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니시키모라는 남자가 다사카를 막는 와중에 먼저 다사카를 죽이고 말았다. 니시키모는 원래 자신이 다사카를 죽이려 했다며, 사체 은닉을 도와준 뒤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경찰이 뒤를 쫓는 상황에서 다섯 줄기 박명광선이 만드는 거대한 꽃을 보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 뒤 나는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니시키모는 원래 빈집털이였으며, 다사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걸 알게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를 구해주었던 동네 소꼽친구였고, 주폭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떠올려 나를 구해주었던 것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에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원양어선 선원으로 나왔던 니시키모의 과거와 정체가 드러나는 작품. '나'와 니시키모의 오랜 인연이 함께 소개됩니다.
범죄물이기는 하지만, 주폭에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에 대한 슬픈 드라마라고 하는게 맞겠지요.
 
하지만 너무 생각대로 뻔하게 흘러간다는건 아쉽습니다. 자기를 한 번 도와준 정체모를 남자에게 푹 빠지고 마는 전문직 여성이라니, 너무너무 뻔하잖아요..... 조폭과 사랑에 빠지는 여의사가 나오는 20여년도 더 지난 신파 멜로물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일일 드라마도 이것보다는 의외성이 있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아일랜드에서 호스피스로 일하는 가즈마는 일러스트레이터 홀리의 터미널케어(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를 맡았다. 홀리의 착한 딸 올리아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기 위해 가즈마에게 시 글래스를 찾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올리아나와 홀리의 언니 스텔라 모두 시 글래스를 찾았다. 그러나 두 개의 시 글래스 중 한 개는 가즈마가 만들어서 놓아둔 것, 또 하나는 원래 스텔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시한부 인생, 소원을 비는 아이템 등은 <<마지막 잎새>>와 비슷합니다. 착하디 착한 사람들만 나온다는 것도요. 착하기 그지없는 올리아나에 대한 묘사가 특히 빼어났습니다.
지금 읽기는 다소 낡은 소재이지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런 서정적인 작품도 쓸 수 있는 작가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이름 없는 독과 꽃>>
중학교 교사 요시오카 리카는 펫 탐정일을 시작한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와 파트너 에조에 마사미와 함께 외딴 섬에 개를 찾으러 갔다가 3학년 학생 이이누마 가즈마를 발견했다. 가즈마는 섬을 찾은 이유는 독 미나리를 캐기 위해서였다. 리카는 가즈마가 어머니의 사고사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허튼 짓을 막기 위해 뒤를 쫓는다.

독미나리를 왜 캤는지?에 대해 조사해나가는 일상계 추리물. 추리 자체는 대단한게 없는데, 중학교 선생과 학생이 얽혔을만한 작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세이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너무 깹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급전개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아울러, 책 뒤 해설에서는 결말에서 사고사한건 펫 탐정들이 찾은 개로 착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됩니다. 개가 죽었다면 에조에가 리카에게 자책하며 꾸준히 돈을 보낼 이유가 없거든요. 더 결정적인 증거는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세이치의 부모도' 나를 벌하지 않았다는 묘사입니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저는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읽는 순서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전대미문의 체험판 소설이라고 광고하는건 무리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중학교 영어 교사를 하다가 은퇴한 '나'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어 회화 실력 부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잔돈을 구걸하는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빼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매개체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 어머니가 죽기 전 말했던 무언가에 대해 들었다.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소녀 몰래 상자를 열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귀국 후 조사하다가 알게된 건 소녀의 죽음이었다. 소녀는 상자 속에 무언가가 없어졌다며 패닉에 빠져 뛰쳐나갔다가 버스에 치였다고 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에서 착하디 착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소녀 올리아나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 이유도 "아이소어호리브르...."라고 말한걸 "I saw a horrible"이라고 이해했던 영어 교사 -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성실한 영어교사 니이마 선생 - 의 무식한 착각 탓이라니 더 입맛이 씁니다. 올리아나는 사실대로 "I saw a holy-blue" 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남의 소중한 상자를 몰래 열어본 행동은 용서가 안되고,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 그것도 영어 교사가 - '리' 발음과 '러' 발음을 헛갈린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자 안에 정말 나비가 들어있있는지, 니이마 선생은 보지 못했는데, 올리아나의 믿음에 의한 환각이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해서 답답했습니다.

본인이 만든 감동을 본인 스스로 무너트리는 이런 작품을 왜 썼는지도 모르겠고,. 이 작품만 읽으면 내용 이해가 힘들다는 점에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도시에서 50년 만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키 부부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사라진 개를 찾기 위해 여형사는 펫탐정 에조에를 고용했다. 꼬박 이틀에 걸친 수색 끝에 에조에는 사라진 개 부차티를 찾아냈다. 하지만 개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알고보니 살해범은 이웃집의 히키코모리 청년 게이스케가 수상하다고 했던 부부의 아들 다카야였다. 여형사는 게이스케의 어머니로 아들이 유죄라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개를 찾아 나섰었다....

<<이름 없는 독과 꽃>>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여형사가 아들을 의심한 나머지 증거를 인멸하려고 개를 찾아 나섰다는 동기가 밝혀지는 장면이 마음에 들었어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자책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런 부분에서 다 큰 어른이지만 의외로 성장기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게이스케와 다카야 증언과 상황이 뒤바뀌는 일종의 반전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헐겁습니다. 다카야가 했던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는걸 에조에가 초반에 눈치채지 못한 이유부터 석연치 않아요. 개와 함께 했던 유년 시절 경험으로 개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자인데다가, 펫 탐정일을 하면서 쌓아온 경력도 있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 거짓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반에 무의미하게 반대 방향을 돌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범인이건, 개를 없앤다고 증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닐겁니다. 범인이 체포된 이유도 개와는 무관했고요. 평범 이하의 범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수록작의 시간대별 순서는 아래와 같은데, 이대로 읽는게 가장 좋아보입니다.
  •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 <<이름 없는 독과 꽃>>
  •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제가 4를 가장 먼저 읽은 이유는, 에이스였던 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Touch>>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2023/06/18

패미컴 컴플리트 가이드 - 야마자키 이사오 / 문기업 : 별점 3점

패미컴 컴플리트 가이드 - 6점
야마자키 이사오 지음, 문기업 옮김/라의눈

제목 그대로, 80~90년대 패미컴 게임 전체 소개 및 관련 정보까지 망라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 저도 80년대 패미컴 유저라서 옛 추억 소환 차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초패미컴>>, <<초초패미컴>>과 비슷한 책인데, 가장 큰 차이점은 도판이 컬러라는 점입니다. 이 점 때문에라도 따로 구매할 가치가 있는 셈이지요.

담고 있는 정보가 많고 충실해서 패미컴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저같은 옛 유저라면 옛날 게임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것만 해도 시간이 금방 갈 정도입니다. 패미컴의 탄생, 패미컴의 변종들, 다카하시 명인, 패미컴을 다루는 TV 프로그램, 잡지, 광고 등 다양하게 수록되어 소개되는 각종 정보들도 굉장히 재미있었고요.

제가 재미있게 했던 게임을 하나 꼽자면, 역시나 <<사라만다>>. 작은 사진으로라도 다시 보니 반가왔습니다. 추억 돋네요.


그리고 책을 보다가 몇가지 새롭게 느낀게 있는데, 첫 번째는 미디어 믹스 게임이 많았다는 겁니다. 특히 인기 만화를 소재로 한 게임이 많더라고요. 쿠소게로 유명했던 <<터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바츠 & 테리>>와 같이 그렇게 대단한 히트를 치지 못했던 만화까지 게임화를 한 건 놀랐습니다. 심지어 게임 요소가 거의 없어 보이는 <<맛의 달인>>까지 게임화를 시도했던데 어떤 게임일지 궁금하네요. 유우코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사무와 한 판 승부를 벌이는 내용이었다면 꽤 흥미로왔을것 같습니다. (아래의 짤막한 소개만 보면, 또 출시일을 보면 그럴리는 없겠지만...)


두 번째는 인기 연예인들을 소재로 한 게임들도 제법 된다는 겁니다. 미디어믹스와 비슷하게, 유명세를 이용하여 팔아먹기 좋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주인공들은 당대 인기 아이돌들보다는, 예능인이나 다소 매니아 취향(?) 연예인이 많더군요. 인기 가수로는 아래와 같이 제가 좋아했던 TV Network 정도만 눈에 뜨일 뿐이었어요.

인기 연예인은 아니지만, 고르바초프가 주인공인 게임까지 있는데 히카루 겐지나 체커스와 같은 당대 아이돌 게임은 왜 없었던걸까요? 소속사에서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5,000엔에서 시작해서 거의 만엔 가까이 가는 게임들도 있는데, 굉장히 비싸다고 생각되었거든요. 그런데 조사해보니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일본은 버블 시기였기에 평균 급여가 425만엔으로 높았더군요. 월급으로 따지면 35만 5천엔이지요. 그렇다면 월급의 1.5%정도 되는 돈입니다. 월급이 300백만원이라고 치면, 게임 하나가 4만원 정도니 한달에 한, 두개는 살만했겠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싼 가격은 아니에요. 당연히 한 번 구입하면 마르고 닳도록 할 수 밖에 없었겠죠. 게임을 처음 고를 때에도 꽤 신중했을테고요. 무언가를 저렴하고 쉽게 소비하고, 싫증이 나면 곧바로 없앨 수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데, 오히려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깊이 고민해서 구입하는 방식이 개인의 취향이 생기는데에는 더 좋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추억을 되짚을 수 있었고, 볼거리도 많은 책이지만 수록 도판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문제는 큽니다. 육안으로는 상세 화면을 거의 확인할 수 없을 정도에요. 중반 이후부터는 스마트폰의 '확대경' 앱을 설치해서 읽었습니다.
<<초패미컴>> 등과 다르게 게임에 대해 명백한 사실, 좋은 의도만 전달하고 있는데, 해당 게임의 가치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상세하게 소개해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쿠소게, 망작으로 밝혀졌다면 명확하게 안내해 주는 식으로요. 

그래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버젼이 만들어진다면, 실제 게임 동작 화면과 사운드도 감상할 수 있는, 조금 더 나아가 실제 게임을 즐길 수도 있는 복합적인 컨텐츠로 제작되는게 훨씬 좋을 것 같네요. 판권이나 저작권 등 여러가지 이슈가 해결되어야 하겠지만요.

2007/04/01

두바이 - 무한 상상력과 창조적 리더쉽 - 서정민

두바이
서정민 지음/글로연

작년부터 화제가 된 두바이에 관한 서적중 한권입니다. 어쩌다보니 본의아니게 읽게 되었네요.
사실 국내에 출간된 대부분의 관련 서적이 두바이 관광 안내서 수준의 정보만 담고 있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이 책은 중동통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저자가 쓴 덕분인지 그래도 몇가지 괜찮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관광 안내서와 유사한 두바이의 여러 최신 건물들과 인공섬 등등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책들과 같지만 국왕 셰이크 무함마드의 리더쉽을 한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과 두바이의 화려한 발전 뒤에 숨겨진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또 이집트에 오래 근무해온 필자가 타 중동국가와 두바이를 실질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좋았고요.

솔직히 주변의 경쟁국들의 부상과 독재에 가까운 리더에 의한 발전이라는 점, 부동산 버블 등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 심화되는 빈부격차 등의 문제, 무엇보다도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이 계속되는 것과 테러 한번으로 단숨에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두바이의 발전이 앞으로 항구히 지속될 것이라고는 개인적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나름 현재까지의 초고속 발전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되기에 한번쯤 관심을 두고 읽어볼만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 뒤에 항상 "우리도 이렇게 하면 가능하다" 라는 글이 실리는 것은 좀 이해가 안되네요.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면서 그냥 따르고 본받자라는 알맹이없는 글은 종이 낭비일 뿐이었습니다...

2023/12/24

스콧 필그림 날아오르다! (Scott Pilgrim Takes Off) (2023) - 아벨 공고라 : 별점 2점

항상 꿈속에서 나오던 운명의 여자 라모나 플라워스를 만난 스콧 필그림. 하지만 라모나와 사귀려면 그녀의 사악한 예전 남자친구 7명 모임을 쓰러트려야 했고, 스콧은 첫 번째 남자친구 매튜 파텔에게 패배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스콧이 죽은게 아니라 사라졌다는걸 알아낸 라모나는 누가 스콧을 납치했는지 조사에 나섰다. 사악한 남자친구들 모두가 용의자였지만 그들이 아니라는게 밝혀지고, 스콧이 나타나 그를 납치했던건 미래의 스콧 필그림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라모나와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했기 때문에 둘이 이어지는걸 막기 위함이었다.
미래의 스콧 필그림의 의도와 다르게 둘의 사랑이 이어질 것 같자, 더 미래의 스콧 필그림이 그동한 수련해 왔던 막강한 무력으로 모두를 없애려 했지만, 미래의 라모나가 사랑이 계속됨을 이야기하며 모두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준다.


넷플릭스로 감상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작가의 작품은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로 접해보았을 뿐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어딘가의 추천으로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는 익숙한 설정이 많아서 별로 신선하지 않았었는데, 이 작품은 이상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세계관을 선보여서 새로운 느낌을 많이 전해줍니다. 예전 남자친구와 싸우다 죽었다는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비건은 포털을 쓸 수 있다던가 라모나의 가방은 뭐든지 담을 수 있는 등 온갖 기묘한 능력들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스콧 필그림 실종 사건의 진상조차도 '스콧은 '비건 포탈'보다 강력한 포털로 납치되었는데, 그런 아예 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로봇이 만든거다!'라는 황당한 추리가 펼쳐지는데, 이게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이지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과장된 작화와 액션, 신나는 음악과 함께 온갖 서브 컬쳐를 버무려서 짧은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어서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버블검 크라이시스 1편"의 주제가 '오늘 밤은 허리케인'이 연주될 정도니까요.


단순하면서도 미국과 일본 스타일을 절충한 (그야말로 화양절충) 작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좀 귀여운 라모나 플라워스 피규어가 나오면 하나 구입해 볼까봐요.

하지만 반대로 이런 황당함과 왁자지껄함, 서브 컬쳐를 즐기지 않거나 관련된 이해도가 떨어진다면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막나가는 이야기도  정리가 덜 된 느낌이라 좋게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캐릭터들 비중도 애매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원작은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원작과는 다른 what if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바꿔었는지 궁금증이 생겼거든요.

2015/02/25

먹는 존재 - 들개이빨 : 별점 2점

먹는 존재 1 - 4점
들개이빨 지음/애니북스

처음 시작은 전문가들이 등장하여 겨루는 배틀물의 하나로, 일종의 틈새시장이었던 요리 만화. 수십 년이 흐르는 사이 어느새 요리는 하나의 소재일 뿐, 요리를 즐기는 일상 속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형태로 변해갔죠. 그러면서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구루메 (미식가) 만화 버블 시대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만화 장르에서 일상툰이라는 형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라, 다양한 일상 속 요리만화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팬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던 "오무라이스 잼잼"을 비롯해 "코알랄라", "수상한 그녀의 밥상" 등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했죠. 이 작품도 그러한 흐름의 하나로, 요즘 시장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유료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유료 결제까지 하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평이 괜찮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설 연휴를 대비하기 위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위에서는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일상 속 이야기와 요리가 결합된 만화도 세 가지 분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상 속 드라마가 중심인 작품입니다. 요리는 그저 분위기 환기를 위한 도구일 뿐이며, 커피나 술, 책, 음악이어도 상관없을 작품들이죠. "심야식당"이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는 일상 속에서 맛보는 요리에 대한 소개가 중심인 작품. "고독한 미식가"가 그 예입니다.
세 번째는 음식에 대한 정보나 레시피를 알려주는 것이 핵심인 작품으로, "아빠는 요리사", "술 한잔 인생 한입" 같은 경우죠.
이 작품은 이 중에서 첫 번째 분류, 즉 일상 속 드라마에 해당합니다. 주인공 유양이 못된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뒤떨어진 기획을 하는 회사에서도 쫓겨난 뒤, 한 추남 박병을 만나 사귀게 되는 등 파란만장한 청춘의 기록에 이런저런 음식들이 소소하게 얽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위에 소개했던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즐겁고 행복한 일상 이야기인데 비해, 이 작품은 불편하고 찜찜합니다. 주인공 유양이 필요 이상으로 거친 성격의 사회부적응자인 탓이 큽니다. 작가가 실제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여기서 비롯되는 그녀의 돌출행동과 이를 야기하는 주변 인물들의 사고방식도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어린 시절 치기 정도로 볼 수 없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너무 가득하거든요. 직장생활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인물이 혼자 창작을 하겠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없고요. 작화 또한 인디만화 스타일의 연필 드로잉으로, 카이지를 연상케하는데 솔직히 불편함이 더 컸습니다.

물론 장점도 있습니다. 읽는 맛 자체는 괜찮습니다. 희극이나 비극이나 결국 방향은 하나라는 식으로, 애인도 생기고 절친도 생기고 원수와도 친구가 되는 등 유양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또한 요소요소에 신선한 발상이 돋보이는 장면도 많습니다. 메밀국수의 표현 장면이 대표적이죠. “배고픔이란 질 낮은 양아치다”, “발기부전 영감 같은 처량한 맛”, “빵집에서 비싼 빵을 사는 자신을 자책하며, 미녀에게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졸부 3세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식의 명대사도 인상 깊었습니다. 음식에 대한 묘사는 많지 않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친구가 "훠궈"로 하나가 된다는 등의 이야기는 좋았어요. “초코파이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기”라는 방식을 유행시킨 공로는 인정할 만하고요.

하지만 스토리 라인이 기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기대했던 “일상계 요리-음식 만화”와는 거리가 멀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단행본 가격도 비싸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확인해보니 레진코믹스에서도 연재분을 무료로 모두 감상할 수 있어, 굳이 이 책을 돈 주고 샀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완결편까지 모두 본 이상, 따로 책을 구입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17/10/06

하늘을 나는 말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3점

하늘을 나는 말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동서 미스터리 100"의 일본편 17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지요. 오래 전 부터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작품입니다.
사실 국내 소개가 이렇게나 늦어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에요. 앞서 말씀드린 "동서 미스터리 100"선 상위 20개 작품 중 국내 미출간 작품은 이 작품과 아유카와 데쓰야의 "검은 트렁크" 두 작품이 유이할 정도거든요. 이 중 "검은 트렁크"는 1950년대 출간된 묵직한 고전이지만, 이 작품은 80년대 발표된 나름 신세대 미스터리 작품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일상계 미스터리는 국내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이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등으로 제법 인기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고요. 온갖 수준 이하의 작품들까지 번역되는 일상계 추리물의 홍수 속에 이 유명 작품이 이제서야 소개된 것 자체가 미스터리같습니다.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는지 조금은 궁금하네요.

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는데 다행히 재미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하여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며, 추리적으로도 정통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덕분입니다. 기묘한 이야기가 선보이고, 그것을 엔시씨가 주어진 단서만으로 풀어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인데, 대체로 설득력있고 합리적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화자 "나"와 라쿠고가 탐정 엔시 씨 캐릭터도 좋아요.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물론, 주인공의 "국문학도" 로서의 전문가적인 지식과 엔시 씨의 "예인"으로서의 특수 능력 - 놀라운 기억력과 라쿠고 연기를 통해 단련한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 이 이야기와 잘 결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단점이라면 분량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이것은 엔시씨와 나, 그리고 그 외 등장 인물들과 본 편 추리와는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덕분에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다가오고, 전개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더해진다는 장점은 있습니다만, 추리 부분의 비중이 작아진건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국내 소개되었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 - "시미가의 붕괴" - 등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여유있고 풍요로왔던 시대에 어울리는 느긋한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숨 넘어갈 것 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쉬어갈 필요는 있는 법이지요. 단점은 사소할 뿐,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일상계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오리베의 망령" 

"나"는 우연히 대학교 은사 가모 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가 엔시씨 인터뷰에 동행했다. 인터뷰 후 회식 자리에서 가모 교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기묘한 꿈 이야기를 했는데, 엔시 씨는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증거 보완을 위해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하는데...

화자인 "나"와 탐정역인 라쿠고가 엔시씨가 등장하는 기념할만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섬세하면서도 느긋하고, 조금은 할머니 취향인 "나"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가 제대로 소개됩니다. 전통 일본적 소재인 라쿠고와 오리베 자기, 그리고 교수님 꿈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개도 괜찮고요.

추리적으로도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교수님 꿈의 이유가 된 숙부님이 평소 책을 함부로 대했다는게 핵심이거든요. 물론 교수님이 어렸을 때의 일본 사회 분위기, 당시 경매 제도 디테일 등은 국내 독자로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일본 한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시작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설탕 합전" 

"나"는 어느 날 엔시 씨를 우연히 만나 함께 홍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앞 테이블에 앉은 3인조의 기묘한 행동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사소한 것에서 진상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의 능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핵심 추리는 "왜 세 명의 마녀(?)가 설탕 합전을 벌이는가?" 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신경쓰는 사람들이 세 명의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라는걸 예언하는 등의 소소한 추리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설탕을 홍차에 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꺼내려는 목적이었다"에서 시작되는 핵심 추리의 흐름 및 진상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변장과 연기(?)로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엔시 씨의 활약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 무언가 이상한 것(소금)을 넣는 것을, 원래 퍼낸 설탕을 다시 넣는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용기에 담아온걸 넣었을 텐데, 이걸 착각한다는건 무리니까요. 앙심을 품은 알바생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게에 출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시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주 좋은 일상계 소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두 껍데기 안의 새" 

"나"는 친구 다카오카 쇼코와 함께 도호쿠 여행을 떠났다. 엔시 씨의 공연도 보고, 온갖 절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던 중, 현지에서 만난 친구 에미의 차 시트가 모두 벗겨진 채로 발견되는데...

분량은 약 90페이지에 가까운데, 80여 페이지에 걸쳐 도호쿠 여행담이 소개됩니다. 아무리 일상계 작품이라지만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아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나"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역시 지나치고요. 

작품 속 추리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동일 차종의 차 커버를 벗겨 위장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시트 커버만 벗긴다고 차가 비슷해질까요? 그 안의 모든 디테일, 소품이 다를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이렇게 위장하려고 했던 대상이 어린 여자아이라는걸 쉽게 떠올리는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물론 배경 묘사는 아주 근사합니다. 일본 인형 코케시의 고장이라고도 하는 "자오산"의 풍광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나"가 문학에 대해 정말 조예가 깊다는게 잘 드러나는 점도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에 감점합니다.

"빨간 모자"

"나"는 동네 치과에서 우연히 함께 대기실에 있던 "점 여사"로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알고 있는 점 여사의 동창 모리나가 유미코 씨의 집 앞에, 매주 일요일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전편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편의 결과(아이를 버린 어머니)를 궁금해 한 엔시 씨가 "나"를 공연에 초대한 후 이야기를 듣는다는 설정과 본편 이야기가 이혼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점에서요.

추리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는 사실 모리나가 유미코의 창작으로, 점 여사가 찾아온 날 화장실 옆에서 신발장을 정리한게 핵심 단서라는 것은 괜찮았어요. 충분히 일상계스러우면서도,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 셈이니까요. 그날 목격한 "빨간 모자"는 유미코의 딸일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점 여사의 남편과 모리나가 유미코가 불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 관계, 인간 심리를 그려낸 묘사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점 여사의 방자한 태도, 마지막에서 "나"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 등에 대한 묘사는 솔직히 불필요했고요. 본 편 추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는 모리나가 유미코의 "빨간 모자" 동화 묘사도 지나치게 깁니다. 이러한 점은 한 편당 8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냥저냥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

"나"는 집 근처 상점 "모퉁이 집"의 젊은 사장 구니오 씨가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후 "나"는 부탁을 받아 유치원 크리스마스 공연 비디오 촬영을 나섰는데, 그 곳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구니오 씨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유치원에 가게에 있던 목마를 선물로 기증했다. 그런데 이웃집 며느리로부터, 유치원 마당에 놓여져 있던 목마가 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표제작으로 일상계 단편집 마무리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추리적으로 수수께끼 자체는 평이하지만, 다무라씨(구니오씨의 연인)가 날짜를 착각했다는게 잘 설명되고 있는 만큼 즐길거리는 충분합니다. 일상계에 딱 어울리는 정도의 수수께끼였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읽었던 크리스마스용 소품들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고, 소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며, 이야기의 핵심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이만큼 좋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더해 별점은 3.5점입니다.

2024/03/30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밤비 뱅큇에서 컴패니언으로 일하는 교코의 친구 에리가 호텔에서 죽은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다. 에리가 죽은 호텔 방문에 도어 체인이 걸려있었고, 독약을 고향에서 챙겨 왔다는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밤비 뱅큇 사장 마루모토와 팀장 에자키 요코와의 삼각관계가 원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미심쩍은 이유로 형사 시바타는 자살설에 의문을 품었고, 마침 이웃이 된 교코와 함께 조사에 나섰다. 여기에 에리의 전 직장 동료 유카리도 합세했다. 그녀 역시 에리의 자살을 믿지 않았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에리는 전 애인 이세의 자살과 얽힌 사건 진상을 밝혀내려 노력해왔고, 그 목적으로 밤비 뱅큇으로 이적했다는걸 알아냈지만, 유카리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장편. 1992년 발표작입니다. 원제는 "ウインクで乾杯 (윙크와 건배)"입니다.
'복고풍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그대로인 작품이에요. 특히 부자와 결혼하는게 꿈이라는걸 서슴없이 밝히는 여주인공 교코, 그리고 '프린세스 프린세스'와 '티파니'를 즐겨들으며 교코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귀엽게 선보이는 형사 시바타는 80~90년대 유행했던 일본 트렌디 드라마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교코의 철없음과 연인 미만 우정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시바타의 모습은 "롱 바케이션"의 미나미와 세나와 아주 흡사해 보였거든요.
컴패니언이라는 직업과 화려한 보석상의 파티, 부동산 재벌과 함께 하는 데이트도 80~90년대 버블 경제의 편린을 느끼게 해 줍니다. 80~90년대를 떠오르게 만드는 장치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LP와 CD가 공존하던 시기, 테이프로 앨범을 녹음하고 워크맨으로 듣는 모습 등처럼요.
조금 찾아보니 오래전에 영상화(1988년, "화요 서스펜스 극장")가 되었던데, 아니나다를까 시바타 형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포스터만 붙여진 원룸에서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는 장면 등 화면이 완전 트렌디 드라마더군요.
 

'복고풍'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고전 본격물적인 성격도 일부지만 갖추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본격적인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에리 살해 사건은 여러가지 트릭과 상황이 잘 어우러져 추리 애호가들을 만족시킵니다. '방 문에 걸려 있던 체인'이라는 밀실 트릭을 비롯해서, 어떻게 에리가 독을 먹었는지, 마루모토가 어떻게 알리바이를 만들었는지 등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거든요. 체인은 걸려있던게 아니라 양면 테이프같은걸로 방 문에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는 간단한 트릭이지만, 범인 마루모토가 처음 방문을 확인했고 나중에 회수할 기회가 확실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 높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에리가 살해당한건 9시 30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서 마루모토의 알리바이가 성립했으며, 이는 연인 에자키가 공범으로 에리인 척 프런트에서 열쇠를 빌렸기에 가능했다는 추리도 그럴듯했고요. 이 추리가 에리가 마루모토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프런트에서 구태여 이름을 밝힐 이유가 없다는 착안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설득력 높은 이유였어요.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시바타가 여러가지를 생각한 뒤 직접 확인해보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체인을 끊고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범인이 욕실에 숨어 있다가 몰래 나가지 않았는지를 직접 실험해보는 장면처럼요. 이런 모습은 현실적이며 경찰이라는 직업 성격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체인 하나를 벌려 밖에서 이어 놓은 뒤, 그 체인을 펜치로 끊어 증거를 인멸한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체인에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실현은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추리가 계속 등장하는건 추리 애호가로서는 반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단서인 이세가 남긴 유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건 억지였습니다. 비틀즈를 녹음한 테이프 뒷 면에 진짜 유서를 적어 놓았다는건데, 이렇게 꼬아서 암호처럼 전달해야 했을 이유가 없었던 탓입니다. 이세가 자살한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유서는 경찰, 그리고 유족에게 전달될 터이니 테이프에 적어 두었던 글을 유서에 적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겁니다. 이세가 죽는 시점에 자기 유서를 겐조가 먼저 발견하리라는걸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말이 되려면 공범인 겐조 등이 이세가 자살하게끔 유서를 적고 목을 메는걸 협박으로 강요했어야 했습니다. '페이퍼백 라이터'라는 곡 명을 '페이버 백'이라고 표기해서 '종이 뒷면', 즉 녹음된 테이프 뒷 면을 보라고 했다는 것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전개도 초기작답게 어설픈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다카미에게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로 그를 수상쩍게 만드는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이 사람이 진범이다!'라는걸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 했어요. 에리가 겐조를 살해하려다가 잔을 바꿔치기한 겐조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진상도 마찬가지고요. 맥주야 안 마시면 그만인데 말이지요. 진범이 겐조라는 것도 급작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마루모토 선에서 끝내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저처럼 80~90년대 일본 트렌디 드라마에 향수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트렌디 드라마 풍의 '복고풍 미스터리'로 홍보하려면 원제를 살리는게 좋았을겁니다.

2021/10/28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계정민 : 별점 3점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6점
계정민 지음/소나무

19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중후반까지의 영국 사회의 문화와 패션 흐름, 특히 실버포크 문학과 댄디즘에 대해 고찰하는 인문학 서적이자 문학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중간 계급의 귀족 계급 따라하기와 이를 뒷받침해 주었던 실버포크 문학의 출현에서 시작하여, '댄디즘'이 일세를 풍미했지만 결국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귀족 계급과 실버포크 문학이 몰락하고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이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선물받아 읽었습니다. 

'패션' 보다는 '유행'에 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우선 현대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귀족 계급이 어떻게 사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흠모하고 따라하려는 중간계급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는 실버포크 문학은 현대로 따지면 유행을 선도하는 SNS 인플루언서나 유튜버들과 별로 다를게 없으니까요. 실버포크 문학의 대표 작가들 대부분도 귀족 계급으로, 자기들 이야기를 썼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킴 카사디안같은 경우겠지요. 당시 런던 유명 상점에 대한 정보가 가득해서 '런던 상점 안내도'이자 '광고판'으로도 불렸다는 고어의 "아내의 용돈" 설명은, 버블 전성기에 유행과 소비에 매몰되었던 일본의 사회 환경을 캐쥬얼하게 그려냈던 "어쩐지 크리스탈"이 떠올랐고요.

그런데 이런 실버포크 문학과는 반대로, 댄디와 댄디즘의 목적이 '유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도 새로왔어요. 귀족 계급이 프랑스어에도 능통하고, 유럽 대륙의 문화와 예술에 해박하며 그곳에서 유행하는 첨단의 패션을 소비하는 자신들과 비교하면, 중간 계급 남성은 귀족 남성의 삶을 서투르게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판단해서, 이러한 자기들의 문화 자본을 과시하는 스타일을 개발해 냈던 것으로, 이들이 바로 댄디 Dandy였고, 이들이 개발해냈던 스타일과 태도, 가치관이 댄디즘 Dandyism 이었습니다. 즉, 귀족 계급이 자기들 위치를 중간 계급이 따라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던거지요! 조선 후기, 중인 계층이 실학자들과 시서화를 통해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연상되네요.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 무리에 낄 수 있었다는건, 결국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가도 똑같은 법입니다. 

댄디즘이 단순히 패션에 국한된게 아니라, 일종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댄디들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중간 계급의 근면성, 실용성, 생산성과 같은 가치관을 거부하고 장식성, 무용성, 비생산성에 집중했다고 하거든요. '멋쟁이'가 아니라, 꾸미기에만 몰두하는 무위도식 한량이 '댄디'였던 거지요. 의미가 완전히 다른 셈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댄디즘의 종말도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결국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경제 공황, 세금 증가, 귀족계층을 위한 곡물법 제정에 따른 식료품 가격 상승 등으로 1840년대를 지나면서 귀족 계급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빈곤과 노동 문제가 겹친 탓에 댄디즘과 같은, 소비와 과시로 점철된 귀족 계급의 생활양식은 시대착오적인 악습으로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만 거지요. 그래서 댄디즘의 명줄은 다했고, 이후 도덕적이고, 근면 성실한 중간 계급 남성 이데올로기가 영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네요. 잠깐은 세상에 먹혔을지 몰라도, 이런 가치관이 오래 갈리 없으니 당연한 결말입니다.

이렇게 실버 포크 문학과 댄디즘의 종말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실들도 눈길을 끕니다. 중간 계급 독자의 증가로 문학의 주도권이 시에서 소설로 바뀌게 되었고, 문학은 이들 중간 계급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획에 의해 생산되고 마케팅에 의해 소비되는 문화상품으로 변해갔다는 것, 댄디가 외모로 구별짓기를 시도한건 당시가 시각적 상상력이 빠르고 전면적으로 부상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이론들이 그러합니다. 문학이 시에서 소설, 천재의 예술품에서 문화 상품으로 변했다는건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 그 중에서도 판타지나 로맨스가 유행하는 최근 트렌드와도 왠지 비슷한 느낌도 들더군요. 소비 주체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소비 행태가 모바일화되었다는 뜻이니까요.

각 단락마다 당대 유행했던 실버포크 문학 작품, 관련된 유명 인물을 함께 소개해주어서 이해를 쉽게 만들어주는 구성도 좋습니다. 문학 작품의 내용 소개만으로도 당시 분위기가 머리에 쏙쏙 들어올 뿐더러, 댄디의 상징이었다는 브러멜과 도르세이 백작에 대한 소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재미있었거든요. 브러멜은 완벽한 단순함으로 고도의 절제미를 선보였던 반면, 도르세이 백작은 유럽 출신으로 요란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탓에 그를 따라하던 중간 계급 청년들의 패션은 황당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는군요. 단순히 입는 옷, 장신구 등에만 신경쓸 뿐, 기본이 되는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지요. 

그런데 이런 과정을 겪고도 '댄디'가 '멋쟁이'라는 의미로 계속 사용된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저자도 댄디즘의 종말에 대해 설명하면서, 댄디를 흉내내는 중간 계급은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 캐릭터로 바뀌었다고 설명하는데 말이지요. 물론 댄디가 되고 싶어해서 그들을 추종하는 '속물'들 과 진짜 멋쟁이 '댄디'는 확실히 달랐겠지만, '댄디즘' 자체가 부정적 의미가 되었다면 '댄디'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로 힘을 잃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주제에 대한 설명은 재미있고 상세하나 아쉬웠던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실버 포크 문학'이 얼마나 중간 계급에게 잘 먹혔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이런 소설이 나와서 인기를 끌었다, 정도는 근거가 빈약해요. 특정 소설이 인기를 크게 끌었다고 한 들, 그게 사회 현상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힘들잖아요? 판매량같이 명확한 근거, 최소한 다른 문화, 사회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제대로 된, 정확한 역사서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입니다. 

도판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댄디들과 그들의 패션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도판이 필요했어요 글 역시 가독성 좋은,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고요.

덧붙이자면, 제목만 보고 기대했던 분들은 조금 실망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부제인 '패션의 권력학'은 잘못 붙여진 제목이거든요. 사실 패션에 국한된다면, 댄디들의 패션을 중간 계급이 따라하지 못했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패션은 물론, 먹고 자고 하는 모든걸 똑같이 따라하는건 돈만 있으면 어려울게 없으니까요. 그들이 따라할 수도 없었던건 패션과 같은 표면적인게 아니라 댄디즘이라고 불리우는 가치관같은, 귀족 계급만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도 문화 상품을 통해, 당대 계급간 갈등과 사고방식과 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해낸 내용만큼은 아주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과정에 대해 전반적으로 잘 알려주는 좋은 미시사, 문화사 서적이었습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17/03/01

학생가의 살인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학생가의 살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헤이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않은채 몰락해가는 학원가 카페 '푸른 나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 소모품은 되기 싫으며,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는 바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거리를 탈출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아르바이트 동료 마쓰키가 살해당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고헤이의 연인 히로미마저 피살되고 말았다. 고헤이는 히로미의 동생 에쓰코와 손잡고, 형사 고즈키와 경쟁하듯 사건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들을 비웃듯 학생가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에 시체가 매달렸다. 피해자는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 '수국학원'의 원장 호리에였다. 수국학원은 생전 히로미가 봉사활동을 하던 곳이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추리소설로 1988년 발표된 초기작입니다.

초기작임에도 흥행 작가의 역량은 충분히 보여줍니다. 방대한 분량임에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덕분입니다. 세세한 인물과 배경 설정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히 인공 지능 관련 신기술을 핵심 소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돋보입니다. 공대 출신이라는 배경을 잘 활용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알파고' 덕분에 화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는 소재인데, 무려 30년 전에 도입해서 이만큼 낡아보이지 않게 풀어낸 솜씨도 정말 대단하고요. 버블 시기,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상황도 아련하게 시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러한 시대와 겹쳐진 문란하면서도 대책없는 청춘들의 행동은 80년대 하루키스러웠고요.

추리적으로도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만큼은 괜찮습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며 이 단서들을 바탕으로 의외의 진상 - 모든 범행은 5년전 히로미가 피아노 콩쿨에서 연주를 하지 못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진상을 드러내는 점과 결말만큼은 유명 고전 본격물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각 사건 별로는 큰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건인 마쓰키 사건은 트릭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라 시시합니다. 사건 해결도 피해자가 4년 전 센트럴 전자 주식회사에 근무했던 당시 접촉했던 인물을 찾아낸 경찰의 활약 덕분이라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재미는 없습니다.

두 번째 히로미 사건은 밀실 트릭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지만 허술합니다. 죽은 히로미가 6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출발한 이후 3층에 잠깐 멈췄다가 6층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고, 계단으로는 고스케가 이동하고 있어서 범인이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상황입니다만... 여러모로 완벽한 밀실로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작중 에쓰코의 언급대로 3층, 또는 6층에 거주하는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고, 옥상으로 도망친 후 후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계단을 올라가면서 층별 복도를 과연 그렇게까지 유심히 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칼에 찔린 히로미가 엘리베이터로 도망쳐 6층을 누른 뒤 사망했다는 트릭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의 현장 검증으로 경찰이 범행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구태여 꽃다발을 끝까지 들고 있던 이유도 애매하거든요.

또 첫 번째 , 두 번째 사건을 연결하는 잡지인 "사이언스 논픽션"도 거슬립니다. 잡지 안에 각서가 들어있다는 것을 이하라가 알아챈 이유도 석연치 않고(죽기전에 마쓰키가 실토했을까요?), 각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하거든요. 우선 이하라가 히로미에게서 회수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지막에 고스케를 죽이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증거가 없어진 것이니까요. 반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면 잡지 속에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그것도 이상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사건이자 세 번째 사건인 호리에 원장 사건은 이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트릭없이 우연이 개입되어 미궁에 빠졌을 뿐인 탓입니다. 만약 서점 주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준코의 범행은 여기서 드러났을 거에요. 이 사건은 사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작위적인 전개도 도가 지나칩니다. 만약 이하라가 히로미를 살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로미 살해는 아무리 준코가 안배했다 하더라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이 겹쳐있습니다. 히로미가 도주에 성공했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준코는 대체 어쩔 셈이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흥행작가다운 면모는 충분히 과시하는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 권해드립니다.

2020/10/02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신일본 항공 승무원인 하야세 에이코를 탐정으로 내세운 시리즈이지요. 에이코는 통칭 A코로 불리우는, 도쿄 대학을 중퇴하고 입사하여 훈련생 수석까지 차지한 재원으로, 마른 몸매의 고전적 외모의 미녀이기까지 하지요. 그녀가 겨우 합격하고 훈련생에서도 꼴찌인 동기 후지 마미코(통칭 B코)와 콤비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구태여 승무원이 주인공일 필요는 딱히 없어요. 승무원 설정을 살린 이야기가 한 편 정도? 때문에 버블 시대에 승무원 관련 컨텐츠 유행에 편승한 설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B코 역시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추리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민폐만 끼칠 뿐이니까요. 사실 등장할 때 마다 짜증만 날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이야기는 많이 없어요. 무리한 설정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K호텔 살인의 밤" 

가고시마로의 비행 후 언제나처럼 바 '와이키키'에 모여 한 잔 하던 승무원들 모임에 그날 승객이었던 혼마가 동석했는데, 마침 그 때 혼마 아내의 전화가 걸려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그녀의 호텔 방으로 샌드위치를 배달하는건 호텔에 있던 B코가 목격했다. 4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새벽 1시 경 호텔로 돌아간 그들은, 혼마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때 A코의 눈에 들어온건, 혼마 씨 부인 시체가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도가 구태여 트윈룸에 침입할리 없으며(두 명이 있을 수 있으니), 오토록으로 잠긴 문을 돌파할 방법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나 알리바이 공작임을 알아챌 수 있는 술자리 설정을 더하면 범인이 혼마 씨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이렇게 범인이 뻔하기에, 트릭이 중요합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트릭은 단순한 변장 트릭이라 시시합니다. 배달된 샌드위치를 받았던 건 변장한 조카였거든요. 둘은 자신들의 유산을 혼마 씨 부인이 멋대로 주식에 투자해서 큰 손해를 보자, 의기투합하여 살인을 공모했던 겁니다. 간단하고 현실적이기는 한데, 재미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나마 사체 부검 결과 위장 속에 있었던, 먹은지 30분 정도 지난 샌드위치는 배달 전에 따로 구입한걸 혼마 씨가 부인에게 먼저 먹였다는 조금 고심한 트릭이 곁들여져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새롭거나 기발한 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추리를 경찰이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카가 피해자로 변장했다는걸 밝혀내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혼마 씨가 따로 샌드위치를 샀다는걸 결정적 증거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이건 단순한 정황증거일 뿐입니다. 혼마 씨 조카의 지문이 피해자 방에서 나왔다면 모를까, 증거가 샌드위치가 전부라면 무죄 판결을 받는게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실물에 유의하세요" 

베이비 투어에 참가했던 25쌍의 가족이 탑승했던 비행이 끝난 뒤, B코는 실내를 정리하다가 남겨진 아기를 발견했다. 서둘러 베이비 투어 일행을 찾았지만 아이는 25명이 모두 있었다. 아이는 누구이며, 왜 혼자 남겨져 있었을까? 결국 사건은 방송을 타게 되는데, 다행히 교토에 사는 아기 엄마가 나타난다. 아기는 엄마와 함께 산책 중 실종되었었다...

A코는 베이비 투어 일행이 교토에서 그 공원에 들렸던 걸 알아낸 뒤, 참석했던 부부 중 누군가가 자기들 아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남의 아기를 착각해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에요.

그래도 비행기에서 내린 베이비 투어 참석자의 아기가 25명이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꽤 괜찮습니다. 남편이 먼저 자기 아기를 데리고 도쿄로 먼저 출발한 겁니다. 부인은 남의 아기를 데리고 원래의 투어용 비행기에 탑승했고요. 착륙 후 남의 아기는 자리에 남겨두고, 공기 인형 따위에 아이 옷을 입혀 위장한 뒤 비행기에서 내렸고, 곧바로 남편을 만나 자신들의 진짜 아기를 안고 있던 겁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실수로 데려온 남의 아이와 함께 비행기까지 탄 뒤 비행기에서 유기한다는건 너무 억지스럽지요. 투어였다면 가이드와 상의해서 처리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비행기에서 유기하는 순간 애가 울기라도 했으면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요. 마찬가지로 남의 아기를 태연히 버린 부모를 용서할 수 없던 A코와 B코가 그 부부의 아기를 인형과 바꿔치기 한 뒤 옥상에서 떨어트리는 쇼를 펼쳐 응징한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중범죄인 탓입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상황은 흥미롭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티가 너무 많이 났습니다.

"중매석의 신데렐라"

B코는 비행 중 친해진 나카야마라는 승객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운전사 딸린 벤츠로 B코를 에스코트한 뒤, B코에게 청혼했다. B코는 재산을 노리는 나카야마 친척들의 욕심을 좌절시켜야 한다며 A코에게 완벽한 신부 연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나카야마의 벤츠로 이동하던 A코는 운전사 다무라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느끼는데...

간단한 일상계 소품. 나카야마와 B코의 결혼은 나카야마의 부탁으로 진행했던 연극이었습니다. 나카야마가 진짜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연극을 꾸민거지요. 나카야마의 연인이 남자인 운전수 다무라였기에 친척들이 반대할게 뻔했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인데, 2020년 관점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특이한 설정이나 반전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무라를 성전환 시키겠다는 이야기는 이게 뭔가 싶더군요. 그럴거라면 성전환 후에 당당하게 결혼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억지 연극을 벌일 이유는 없죠.

전체적으로 억지스럽고 작위적일 뿐 아니라, 결말이 황당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나카야마가 연극 상대로 B코를 점찍은 이유가 다무라와 B코가 닮았다는 것 정도만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길동무 미스터리" 

후쿠오카 전통 과자 가게 도미야의 주인 도미타 게이조가 호리이 사키코라는 여성과 함께 도쿄의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자는 욕조에서 손을 그어 출혈사하였고, 여자는 칼에 가슴이 찔린 채였다. 처음에는 치정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그들이 마셨던 커피 잔 두 잔 중 한 잔은 지문이 지워져 있던 상태였고, A코와 B코를 통해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며 같은 호텔에 투숙한 것 역시 우연이라는게 드러났다.
도미야가 경영 위기였고, 도미타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아내의 범행도 의심했지만 알리바이는 철벽이었다. 또 자살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데 자살로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만들리도 없어서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는데...

진상은 도미타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자살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걸로 위장하려고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손을 그었지요. 그러나 투숙객 사키코가 열쇠를 주운 뒤, 친절하게도 방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도미타는 자살 시도가 밝혀지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죽이고 자살했고요. 찻잔을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열쇠를 다시 버리러 갈 여유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우연이 겹친 작위적인 사건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도미타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진상을 밝혀내는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인사건으로 처리될지는 확실치 않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문제고요. 자살로도 처리될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도미타의 아내가 진상을 알고 나서도 보험금을 꼭 받겠다고 단언하는 마무리는, 개죽음당한 사키코에 대한 배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주 중요한 분실물" 

A코는 비행 중 화장실 앞에서 유서를 주웠다. 27명의 승객 중 화장실을 간 승객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일흔살 쯤 되어 보이는 은발의 노부인, 여자 중학생, 머리가 벗어진 중년 남자, 인텔리 남자 회사원, 염치없는 중년 여성, 그 중 누구의 유서인가?

유서에 서명이 없는게 결정적 단서가 되는게 독특했던 작품. 소녀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바뀌게 되어서, 어떤 성을 써야 할 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허깨비 승객" 

신일본 항공 객실과 승무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A코에게 자신이 어제 신일본 항공 승객을 죽인 뒤 도쿄만에 유기했다고 털어놓으며, 돈을 내 놓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을 계속 죽일거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지만, 찾은 건 피가 묻은 핸드백 뿐으로 시체는 발견되지 았다. 핸드백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핸드백 속 탑승권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런 여자 승객은 없었다는게 드러나는데...

앞서 협박 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핸드백 주인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가 핵심 수수께끼인 일종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이 모든건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 나리타의 계획이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꾸민 범행이지요. 피 묻은 핸드백을 버려두고 협박 전화를 건 뒤, 핸드백 주인을 보았다고 하면 얼굴을 확인시키기 위해 다른 승객들을 만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이를 핸드백 속 립스틱으로 알아챈 A코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립스틱은 신상으로 출시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많이 닳아있던걸 보고 조작을 간파했던 것이지요. 일부러 쓰던 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니까요. 장난이 아니라 협박이 사실이라면,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나야 범인에게 유리한데 그렇지 않다는건 아주 공들인 장난일 거라는 추리 역시 합리적이고요.

무엇보다도 여성 승객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승무원 중 한명인 A코들의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그날따라 승객으로 탑승했던겁니다! 그녀가 핸드백 주인이 아니라는건 전 승무원들이 아는 만큼 수사 초기에 밝혀졌으니, 범인 나리타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선뜻 실행하기에는 너무 큰 범죄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장난이라도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아요. 또 B코가 번호를 잘못 눌러 발신번호 추적이 실패했다는 설정은 황당했습니다. 이건 경고 정도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한 실수잖아요?

그래도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예상치 못했던 동기가 잘 결합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누가 A코를 노리는가" 

결혼과 함께 승무원을 그만 둔 전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승객으로 탑승한 비행을 마친 A코는 가오리로부터 그녀 옆에 앉았던 이상한 승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휴일에 쇼핑을 나선 A코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깨닫고 불안해서 귀가하던 중, 차량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날, 출근한 A코에게 형사가 찾아왔다. 어떤 남자가 그녀가 기타지마 가오리와 함께 했던 비행편에 탑승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A코는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그가 대학 동창이자 전 연인 쓰카하라라는걸 알고 놀랐다. 그는 모리오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었다. A코는 쓰카하라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게 되는데...

진상은, 쓰카하라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장 동료 다구치가 범인이었지요. 다구치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비행기로 이동 중, 우연히 기타지마 가오리 옆 자리에 앉았던게 발단입니다. A코가 기타지마 가오리에게 "오랫만이에요"라며 아는 척 했는데, 승무원끼리는 개인적인 대화를 삼가하는 관습 때문에 대 놓고 아는척 하지 못한 기타지마 가오리가 눈인사만 전한게 화근이었어요. 다구치가 인사말을 자기에게 한 걸로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A코가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한게 자동차 습격 사건의 진상입니다. 3개월 전, A코의 옛 연인이기도 했던 쓰카하라가 A코와 우연히 재회했을 때, 다구치는 쓰카하라와 함께 있었던 탓도 큽니다. 그래서 더 쉽게 오해했던 것이지요.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승무원의 업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쓰여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2.5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