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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2

13.67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점

13.67 - 6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100여페이지 정도 분량의 중단편 6편이 수록된 연작 중단편집. 제목의 13.67은 2013년에서 시작하여 1967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적 배경을 의미하고 있죠. 탐정역의 관전둬가 전편에 등장할 뿐더러, 뤄 샤오밍이나 탕 아저씨, 범죄자 스씨 형제 등 등장인물들이 여러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등 연작, 시리즈 느낌이 강합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중국 추리소설이라는 점인데, 단지 이색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중국 추리소설 수준도 정말 높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탐정역인 '천리안' 관전둬의 뛰어난 추리력과 사소해보이던 단서들의 조합으로 진상이 밝혀지는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성도 좋지만, 진상이 놀랍기 때문에 흡사 반전 스릴러를 읽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국 작가가 쓴 중국 추리소설이기에 선보이는 중국 - 홍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에요. 특이한 계급명과 CIB를 비롯한 중안조, 반흑조, 특별 직무대, 비호대와 같은 다양한 부서명에 1호 (경찰 최고위인 경무청장의 속칭), 장작 (제복 문양)같은 중국 - 홍콩 경찰 관련 용어 및 은어들, 탁가, 고혹자, 파파라치, 다취안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범죄자), 도사 (마약중독자), 일루일봉 (홍콩 특유의 매춘업소) 과 같은 범죄 관련 은어, 호루라기를 분다 (동원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한다)나 책에 들어간다 (감옥에 간다), 저수지를 경비한다 (한직으로 밀려난다)와 같은 홍콩 속어, 은어로 탄산수를 "네덜란드 음료수"라고 부른다거나 광둥어로 농땡이부리는 사람을 사왕이라고 한다는 등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실존하는 맥퍼슨 스타디움, 퀸 메리 병원, 프린스 에드워드 서로, 퉁초이가 (여인가) 등 몽콕의 거리, 그레이엄가 시장, 카오룽 거리와 같은 이국적 풍광 역시 가득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탐정인 관전둬의 캐릭터가 큰 매력이 없다는 점이 그러해요. "천리안" 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경찰로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이지만 사생활에서는 구두쇠 수준으로 알뜰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라는 식으로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한 묘사는 제법 되기는 하나 특별히 와 닿지도 않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또 몇몇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기도 합니다. "죄수의 도의" 편이 대표적이죠.

허나 단점은 사소할 뿐, 부담되는 분량임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자극도 많이 되었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새로운 추리 소설을 읽기 원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저와같이 80~90년대 홍콩영화 최 전성기 팬이시라면 더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책 소갯글을 보니 영화가 나온다고 하는데 꼭 보고 싶어집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흑과 백 사이의 진실"

펑하이 그룹의 총수 위안원빈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담당인 뤄 독찰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사부 관전뒤의 병실로 사건 관계자들을 소집하는 것. 이유는 관전둬가 사건해결 100%를 자랑하는 명탐정이지만 간암말기로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으로 병원에서 뇌파를 읽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하여 관계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듣고 그 자리에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관전둬의 추리를 통해 단순 강도사건인줄 알았던 사건이 위씨 가문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 - 테이프, 다이잉 메시지가 없는 이유, 흉기인 작살에 대한 이상한 사실 등 - 을 통해 아들 위용렌이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뤄 독찰은 위용렌 뒤에 고용인 탕 아저씨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한다. 탕은 경찰서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설임을 전제로 사건의 진짜 동기와 위용렌을 조종한 방법 등을 낱낱이 밝힌다. 그를 옭아맬 증거는 전혀 없는 상태. 그러나 뤄 독찰은 탕이 관전둬를 살해하는 현장을 촬영하여 그를 관전둬 살해범으로 체포하게 된다.

2013년을 무대로 한 첫 이야기. 그동안은 링컨 라임이 안락의자 탐정의 최고봉이라 생각했는데 그를 뛰어넘는 존재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탐정이거든요.

이런 설정은 좀 작위적이고 웃기지만 추리의 흐름은 괜찮습니다. 바닥이 어질러져있지만 침입한 흔적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초반부, 위씨 가문의 무남독녀 위첸러우에 관련된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는 중반부, 테이프와 작살총, 다이잉메시지가 없는 상황 등을 통해 범인을 확정하는 후반부까지 모두 합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이기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공정한 편이고요.

무엇보다도 탕 아저씨가 진정한 흑막이며 사건의 핵심 동기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어요. 위용롄의 설득력없는 동기에 비해, 설득력은 물론 드라마까지 갖춘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용롄을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아울러 뤄독찰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었다는 것도 앞서 말한 작위적인 설정을 잘 포장하고 있어서 꽤 괜찮았어요.

그러나 탕이 관전둬를 살해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이 영 별로네요. 그가 직접 나서서 관전둬를 살해할 이유가 없거든요. 본인 스스로 말했듯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뭐하러 추가 범행, 그것도 경찰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가며 뒷처리를 해야 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아도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고 그의 추리도 결국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가설이자 추론에 불과할텐데 말이죠.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 사족만 없었어도 별점 3점이상은 충분했을텐데 아쉽습니다.

"죄수의 도의"

잘 나가는 엔터회사 사장이지만 실상은 흑사회 보스인 줘한창을 검거하려는 뤄샤오밍은 실패만 거듭한다. 그러던 중 줘한창 회사에 소속된 신인가수 탕린이 괴한에게 습격당하고 살해당하는 동영상이 배포되는데....

줘한창을 잡아넣기 위해 암흑가 도의를 굳게 지키는 경쟁 조직 보스 런더러의 입을 열게 만든다는 작전이 그려지는 작품.

솔직히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특히 죄수의 딜레마가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영 모르겠어요. 죄수의 딜레마가 소용이 없는 암흑가 도의가 관련된 특수 상황에 대한 것은 알겠지만 런더러가 입을 여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또 탕린이 사실 줘한창에게 복수를 다짐한 전 정보원의 딸이라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과거 가쉽으로 접해보았던, 암흑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홍콩 연예계의 이면을 그린 점은 괜찮았지만 평작 이상의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장 긴 하루"

최고의 지능범인 스번톈의 탈옥 사건과 시장 대상의 무차별 산성액 투척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진 날, 모든 사건을 꿰뚫어 본 관전둬는 한번에 사건을 해결한다.

스번톈이 저우샹관과 바꿔치기 되어 있다는 진상도 기발하지만, 이를 밝혀내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스번톈 탈옥에 징교원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리는 쉽지만, 작중 등장하는 번호표가 뜯겨진 죄수복,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 산성액 투척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저우샹관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상황, 응급처치에 대한 증언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한 추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스번톈과 대면한 관전둬가 그를 옭아매는 장면도 아주 통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인구밀집형 도시가 무대인 탓에 설득력이 생기는' 작품의 대표적인 예라 더 주목할만 합니다. 탈옥 해 봤자 더 큰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누군가 죽었을 때 누구라도 조그만 의심을 품으면 법망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홍콩만의 상황을 기본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홍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홍콩 추리문학계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스케일이 큰 만큼 영화화에도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영화로도 보고 싶네요.

"테미스의 천칭"

흉악범 스씨 헝제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스번성이 머무는 은신처 주위에 잠복한다. 그러나 일당이 도주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잠복 중이던 TT가 이끄는 경찰들이 그들을 체포하려 나서고, 총격전 끝에 범인은 모두 사살하지만 인질이 된 시민이 모두 죽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후 경찰내 내통자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발견되고 사건을 지휘하던 가오랑산이 TT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홍콩 영화에서 봤던 악당과의 총격전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작품. 봉쇄된 주상복합(?) 건물에서의 활극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TT가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라는 진상도 놀랍지만 동기가 합리적으로 그것을 끌어내는 추론 역시 타당하거든요. 몇몇 사소해보이는 대사에서 단서를 끌어내는 관전둬의 활약이 빛을 발하거든요. 아울러 전작의 스번톈과 필적하는 강적 TT와의 두뇌 싸움도 돋보였습니다. 무선 발신 시간과 총격전 시간을 조종하는 트릭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명확합니다. 관전둬의 추리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때문에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벌이는 관전둬의 협박(?)이 그리 와닿지 않기도 합니다. TT가 총탄이 바꿔치기 당했다고 우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공간"

염정공서에 근무하는 영국인 그레이엄 아들 유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염정공서가 홍콩 경찰의 부정부패를 캐고 있었기에 경찰 조직과의 마찰이 있다는 당시 홍콩의 시대적 배경을 작품 전편에 깔고 있습니다.

유괴물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지금 보아도 흥미진진한 몸값 전달 방법이 그 백미입니다. 지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금괴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는 것, 혹시 모를 탐지기를 무효화하기 위해 수영장 잠수를 지시하는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시대에 적합했던 수사 현실을 반영한 완전 범죄 계획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범인이 몸값 회수에 실패하는 결정적 이유인 주머니의 지퍼 고장 역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고요. 홍콩에 실존하는 여러가지 공간을 활용하여 현장감이 높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아서, 관전둬가 사간의 진상을 깨우치는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될 뿐더러 반전도 괜찮습니다. 유괴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제로는 집 금고를 열고 서류를 훔쳐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린 좋은 동기였습니다.

허나 경찰이 연류되어 있었다면 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운과 우연에 많이 기댄 계획이니까요. 특히 리즈는 상근 유모이기에 열쇠를 복제할 기회는 찾다보면 분명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사건을 키운건 쉽사리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이국(異國) 독자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아울러 관전둬가 직접 서류를 훔쳐낸 뒤 벌이는 공작 역시도 이해는 잘 되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주모자를 체포해 나가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유괴 자체는 굉장히 잘 그린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시간"

1967년, 영국 정부와 홍콩인의 충돌 및 좌익 인사들의 테러 등이 벌어지던 시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사는 화자인 "나"는 "아칠"이라는 순경과 함께 좌익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한 모험에 뛰어드는데...

1편의 악당 탕 아저씨가 화자로, 관전둬가 아칠이라는 순경으로 등장하는 작품. 화자인 "나"의 추리력과 활약이 비상해서 이 친구가 관전둬인지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여튼, "1번"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여 '페리선에서 영국인이 타지 않았다'는 답변을 통해 1번 차만 페리로 옮기며 운전사는 중국인이었다는 상황 설정이 돋보입니다. 당시 홍콩 거리를 차와 오토바이를 활용하여 질주하는 묘사 등에서 스케일 큰 모험 활극 느낌이 들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크게 눈여겨 볼 부분이 없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딱히 감흥은 없었던 평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의 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10/12/27

Hansang의 2010 올해의 추리소설 Best 3

2010 올해의 추리소설 이벤트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팬덤의 하나인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입니다. 2009년 12월 ~ 2010년에 간행된 책들이 대상인데 확인해보니 이 중에서 읽은 책은 30여 권밖에 안되네요. 너무 적게 읽었나? 어쨌건 제 블로그 정리 차원에서라도 저도 한번 선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은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책을 더 읽기는 힘들 것 같거든요.

그럼 먼저 선정에 앞서 간단하게 2010년 추리소설계를 들여다 보도록 하죠.

2010년 국내 추리소설계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쏠림 현상이 심했고" "뜻깊은 발굴도 있었으며" "국산 추리소설이 모처럼 활기를 띤" 한 해였다고 말이죠.

"쏠림 현상"은 230여 권의 작품 중 100권 정도를 일본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일본 추리소설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 그리고 100권 정도의 일본 작품도 히가시노 게이고, 우타노 쇼고, 미야베 미유키 등 특정 유명 작가에게 많이 치우쳐져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일본 작품 이외의 작품 역시 기존 유명 작가의 시리즈 작품들과 국내에서 인기가 많은 팩션 장르물이 대부분이라는 것에 기인합니다. 출판사도 책이 팔려야 먹고 사는 경제조직이니 인기 작가 작품이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고 덕분에 출간된 반가운 작품들도 많았지만 일부 작가는 작품의 수준보다는 순전히 작가의 네임벨류로 선정되어 출간되는 것 같아 조금 아쉽더군요.

"뜻깊은 발굴"은 첫 번째 쏠림 현상의 와중에도 추리 애호가로서 기다려 왔던 반가운 작품들이 속속 번역된 한 해이기도 해서 꼽아보았습니다. 일본 추리소설 중에서는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라든가 "리라장 사건"이, 영-미권에서는 "7퍼센트 용액"과 "붉은 오른손",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과 딕슨 카의 고전들이 출간되었으니까요. 앞으로는 일본과 영-미권에 치우치지 않은, 예를 들면 중국이나 대만 등 제 3 세계권의 추리 소설도 발간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모르죠. "장미의 이름"처럼 대박이 날 수도 있잖아요?

"국산 추리소설의 활기"는 목록에서 보기 드문 한국 추리 소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인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어요. 장르도 훨씬 다양해져서 꾸준히 출간되어왔던 단편집뿐만 아니라 정통 장편 추리물에서부터 팩션, 하드보일드, 그리고 김내성의 과거 고전이 재발간되는 등 질과 양 모두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아주 기쁩니다. 한국 추리 소설도 더욱 성장한 한 해라 생각되며, 부끄럽게도 제대로 읽어본 작품이 아직 없는데 꼭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네요. 그나저나 여기 "경성탐정록" 2권이 포함되어 있었어야 하는데... 눈에서 땀이나네... ㅠ.ㅠ

그럼 간단한 분석을 마치고, 제 개인적인 "2010 올해의 추리 소설" 순위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둥~

Hansang의 2010 올해의 추리소설 Best 3

* 2009년 12월 ~ 2010년 출간된 추리소설만 해당됨

"7퍼센트 용액" - 니콜러스 메이어 : 별점 4점 - 셜록키언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작품. 일본 원판으로 구입은 해 놓았지만 10페이지 정도 읽고 손 놓고 있던 차에 국내에 출간되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작품도 역시나 만족스러웠고요.

"얼굴에 흩날리는 비" - 기리노 나쓰오 : 별점 4점 - 과거 구판본으로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정식 완역본으로 작품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제 생각에는 여성 작가의 하드보일드란 이런 것이다! 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작품 같아요. 첫 맛부터 진하고 독한 위스키라기보다는 부드럽지만 슬프면서도 날카롭고 쓴 뒷맛을 감추고 있는 사케 같은 작품이랄까요?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 별점 4점 - 고전 걸작. 더 말이 필요 없죠. 제가 읽은 딕슨 카 전 작품 중에서도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아차상>

"마크스의 산 1.2" - 다카무라 가오루 : 별점 4점 - 2010년 재판본이 아닌 예전 고려원 판본 별점입니다. 새 판본을 읽지 못했기에 선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작품이죠.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4점 - 별점 4점이기는 한데 개인적인 팬심이 포함되어 있어서 순위에서는 뺍니다.

이상으로 2010 올해의 추리소설 관련 글을 마치며, 내년에는 별점 5점짜리 작품을 선정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08/05/23

종소리를 삼킨 여자 - 로베르토 반 훌릭 / 이희재 : 별점 3점

쇠종 살인자 - 6점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황금가지

당나라 시절, 푸양의 새로운 판관으로 임명되어 부임된 디 공은 유능하고 성실한 수하 훙 수형리와 마 중, 차오 타이, 타오 간과 함께 고을의 여러가지 송사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사건은 푸주한 딸 순옥의 강간 치사 사건이 제일 먼저로, 순옥의 연인인 서생 왕이 이미 용의자로 수감된 상태였다. 그러나 디 공은 진범을 꿰뚫어 본 뒤 마 중에게 진범을 잡아올 것을 명했고, 곧이어 고을의 "아이를 점지해 주는 절"로 유명한 보자사의 실상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보다 가장 크고 위험한 사건은 광둥에서 옮겨온 대악당 린 판 사건이었다. 부유하고 세력도 강하여 한 집안을 멸문시킨 뒤에도 위세가 당당한 그를 잡아넣기 위해 디 공은 전력을 다하는데...

디 판관 시리즈로 저는 예전 디자인하우스 판본으로 시리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셜록홈즈 디 젠지에 추리소설"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옛 생각이 나서 들춰보았다가 끝까지 다시 읽어버렸네요. 치매가 오는건지 뇌에 기억이 전부 휘발되어 있어서 처음 읽는 책 같았습니다.

어쨌건 읽다보니 재미는 있지만 약간 부족한 부분도 눈에 띕니다. 일단 이야기는 아귀가 딱딱 들어맞고 고증도 정확해 보이지만, 고지식하게 고대 자료를 날 것 그대로 소설화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잔인한 형벌에 대한 묘사라던가,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 내용 전반에 걸쳐 주요 범죄 및 단서로 쓰인다는 점, 부패하고 무능한 말단 포교의 이야기 등이 특히 그러했어요. 

이야기도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건이 순차적으로 벌어지고 해결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여러 편의 단편으로 쪼개는 것이 더욱 나았을 겁니다. 세가지 이야기 중 하나인 보자사라는 절에서의 사기(?) 행각을 폭로하는 부분의 주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앞부분에 복선처럼 제시되는 등 장편으로 가져야할 장점을 살리는 부분은 있지만 내용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니까요.
(참고로 이 부분은 저자의 해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범죄 소설의 유형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해설을 읽으니 이해가 좀 되더군요)

그러나 중국 당나라의 명판관 이야기라는 설정이 주는 색다르고 이색적인 맛은 충분하고, 무엇보다도 "재미"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역사 추리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대단한 추리가 펼쳐지는건 아니지만 첫 번째 사건인 푸줏간 처녀 순옥의 강간 살해 사건의 경우, 범인을 밝혀내는 부분의 추리가 합리적이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악당 린 판 사건에는 다양한 추리와 사건 해결 방법이 등장해서 정통 추리물의 범주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요소가 돋보이고요. 특히 "돗자리 털기"라는 나름의 과학적 단서와 금합을 통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대 중국의 수사과정과 취조, 재판과정의 디테일한 묘사는 덤과도 같지만 나름의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벽안의 외국인이 동양의 신비와 기묘한 매력에 빠지지 않고 이만큼의 성과를 혼자 힘으로 이루어 내었다는 것은 높이 사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뒷 부분의 해설에 따르면 여러 고대 중국의 범죄 소설 등을 연구하여 인용한 뒤 실존인물 디 젠지에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로 꾸며낸 시리즈라고 하는데, 국내에 소개된 고대 중국 범죄 소설류야 "포청천" 정도 밖에 없는 만큼 자료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뒷부분 해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 소설의 형식을 여러모로 따라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옛스러움이 은근히 묻어나는 것도 매력적이었어요.저자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다음 작품으로 "쇠못 세개의 비밀"을 읽어봐야겠네요. 물론 디자인 하우스 판본입니다.

그나저나 요새 기억력 감퇴가 정말 심한 것 같아 걱정이네요. 뭐 새로 나온 책에 돈을 쓰지 않게 된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2022/04/01

사장을 죽이고 싶나 - 원샨 / 정세경 : 별점 2점

사장을 죽이고 싶나 - 4점
원샨 지음, 정세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 무명 연극 배우로 살아가던 위바이통에게 중국의 유명 금융 엘리트 투자자 양안옌이 찾아왔다. 그는 위바이통 부모에게 은혜를 입었다며 바이통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였다. 6개월 안에 금융 엘리트로 만들어주겠다는 장담과 함께였다. 위바이통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기심에 못 이겨 중국 강캉시로 향했다. 

강캉시에서 양안옌과 만나기로 한 곳은 그의 회사인 바나 금융 사무실이 있는 88층짜리 신축 바나 센터 건물로 개장하기 직전이었다. 악천후 탓에 꼭대기층 사무실에 조금 늦게 도착한 위바이통은 양안옌 사장이 여러 명의 사람들과 언쟁 끝에 격투를 벌이는 걸 목격했다. 바이통은 싸움을 말리려 했지만, 누군가 꺼낸 칼에 사장이 찔려 죽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현장에 있던 무리들은 사장이 강도 살해 당했다고 위장하려 했지만, 도망치려던 그들 앞에 류창융 등 금융계 거물 4명이 나타났다. 사장의 죽음을 숨기고 그들을 응대했지만, 곧이어 정전이 일어났고 비상 계단은 철문으로 잠겨있어서 일행은 88층 바나 은행 사무실 공간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숨겨놓았던 사장의 시체와 천뤄치가 깜쪽같이 사라진 다음날, 천뤄치, 리슈얼의 시체가 차례로 발견되는데...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집어 들게 된 중국 추리 소설로 급성장하는 중인 중국 금융업과 부동산업을 소재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88층 건물에 여러 명의 사람이 함께 갇힌 상황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밀실 추리물이라는 점은 독특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보기 드문 설정이었는데, 악천후로 인해 개장 직전 건물에 정전이 되었고 그 탓에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꽤 그럴듯하게 상황을 연출한게 괜찮아요. 초반에 위바이통이 처음에 양안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도 좋습니다. 위바이통의 출연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연극을 보러 왔었고, 또 다른 연극에서는 혼자 보기 적합하지 않고 오로지 위바이통을 찾기 쉬운 좌석을 골랐기 때문이었는데, 나름 추리력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생각되네요.

몇 가지 설정도 볼만합니다. 첫 번째는 양안옌이 연극 배우 위바이통을 스카웃하려던 까닭입니다. 처음에는 911 테러 때 양안옌이 위바이통의 친부모 대신 심부름을 한 덕분에 살아남아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위바이통이 중국 유학 시절 흠모했던 연극배우 리슈얼이 금융 엘리트 중 한 명이라는걸 알게 되고, 양안옌 살해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수상한 행동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집니다. 양안엔은 '연기력' 때문에 배우들을 고용해서 금융 엘리트인척 시켰던 겁니다. 배우들은 모두 회사 AI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적절한 연기로 고객과 소통했고요. AI가 금융 엘리트의 거의 모든 실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 상대의 커뮤니케이션은 필요하니 저렴하게 배우를 고용했다는 건데 꽤 그럴싸 한 설정입니다. 

두 번째는 양안옌이 입체 영상 기술과 놀이공원용 차량 기술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이게 류창융 회장의 주택 건물 개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로 정답은 좁고, 가사 도우미가 필요한 현재의 다세대 주택 환경 개선을 위해서입니다.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서 뿌리고, 엘리베이터는 놀이 공원용 차량 기술을 도입해 고층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주면, 주민들이 고층에서 넓고 쾌적하게 산다고 착각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비상 계단 벽에 숨겨진 문은 가사 도우미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 셈이었고요. 이 역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이런 설정을 풀어가면서 부동산에 목숨을 건 모습, AI 때문에 직업을 잃는 사람들 등 중국, 아니 우리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을 잘 그려낸 것도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이 사건과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추리 소설로는 아예 함량 미달이고요. 일단 사건의 범인 쩡자웨이가 양안옌 사장을 살해한 동기부터가 불분명합니다. 그냥 충동적인 범죄로 그려지거든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몰래 칼을 꺼내 찌르다니, 상황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천뤄치와 리슈얼 살해는 사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저지른 범행으로 이 역시 직접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양안옌 - 천뤄치 - 리슈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범행 순환 구조가 완성되기는 했지만, 이는 등장인물들 시점에나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독자들은 위바이통 시점의 묘사를 통해 리슈얼이 불쌍한 피해자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등장인물들 생각대로, 양안옌 사장이 죽지 않았고 천뤄치가 배신자였으며 리슈얼이 사장의 스파이였다면, 천뤄치를 죽이고 시체를 공개할 이유도 없어요. 중요한 투자처 손님들을 초대한 마당에 사건을 키울 필요가 있었을리 만무하니까요.

밀실 트릭도 알고나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비밀 통로'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비상 계단 벽에 아래 층으로 가는 입구가 숨겨져 있었을 뿐이니까요. 때문에 '밀실이 등장하는 추리물'이지, '밀실 트릭'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차라리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뿌려서 88층으로 느끼게 했지만 사실은 3층이었다는 설정을 이용해서, 창문을 몰래 열고 지상으로 이동했다는 식으로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사실 트릭에 쓸 생각도 없었다면 구태여 필요했던 설정도 아니었어요. 물론 이 역시 정전 상태에서 창문으로 어떻게 88층 영상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겠지만요. 

아울러 양안옌 사장이 사실은 위바이통을 죽이려고 했다는 일종의 반전과 에필로그도 별로였어요. 위바이통이 911 테러 희생자의 자식으로 거짓 인터뷰를 한 것 정도로 그를 죽이려 했다?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위바이통이 양안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설령 살의를 품었다 한들, 구태여 중국까지 불러들여 자기 건물에서 죽인다는건 말도 안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금융 엘리트에 대한 설정은 기발했지만, 전체적으로 별로라 구태여 권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5/04/09

완전범죄 - 오구리 무시타로 / 신정원 : 별점 2점

1930년대, 중국 호남 팔선채에 영국식 저택 이인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옥스퍼드의 인류학자 휴 로렐 교수의 연구 설비였는데, 현재는 외동딸 로렐 부인이 거주 중이었다. 진격해 온 묘족 군대의 지휘관 자로프는 이곳을 사령부로 정하고 머물렀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던 집시 헤더가 완벽한 밀실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흑사관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오구리 무시타로의 중편입니다. 데뷔작이라고 하네요.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빌려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밀실물입니다. 핵심 사건과는 별개로 약간 독특한 암호 트릭도 등장하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전 정통 본격물인 셈이지요. 피해자 헤더가 미친 듯 웃던 와중에 남자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경비를 서던 정이 목격했던 파란 옷의 인물, 이상한 곳에 떨어진 비누거품, 방에서 풍기는 꽃향기, 헤더 몸에서 발견된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라는 몇 개의 단서만을 가지고 자로프의 추리가 연달아 펼쳐지며 마무리 추리쇼로 이어지는 전개를 보면 "흑사관 살인사건"의 원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단서와 상황을 잘 결합한 추리들도 꽤 볼 만했는데, 특히 "소리"를 통해 색깔을 착각한 것이라는 이론이 가장 기발했습니다. 정말 가능했을까 싶긴 했지만, 과학적 근거를 들어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가 눈이 인식하는 색깔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는건 확실한 것 같네요. 여하튼, 여러 아이디어를 연달아 쏟아내는 자로프의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나 트릭이 많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이 작품은 짤막함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흑사관 살인사건" 때도 그랬던 걸로 보면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황하고 드라마는 딱히 두드러지지 않으며, 읽는 사람 머리만 아프게 만드는건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큽니다. 사건의 동기가 너무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우생학 이론에 바탕을 둔 동기인데, 특정 성씨를 멸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성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죽일 수도 없을텐데 말이죠.
트릭도 장황한 설명에 비하면 진상은 너무 허술합니다. 일종의 장치 트릭으로, 부인이 치던 오르간 소리가 엉망이었다는 단서와 연결시킨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수준 이하였던 탓입니다. 오르간 특정 키와 헤더의 방이 연결되어 웃음 가스와 독가스를 내보냈다는 설정인데, 거창하고 복잡할 뿐더러 애초에 이렇게까지 기이하게 사건을 벌일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로프를 말로 꼬드겨 헤더를 죽이게 만드는 게 더 쉬웠을 것 같아요.
암호 트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한자를 사용한 트릭을 영국인이 만들 수 있었을까 같은 사소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굳이 암호로 만들 정도의 비밀은 아니었거든요. 흔히 보는 “사실 너의 어머니는...” 류의 내용인데, 어차피 본인은 죽을테니 그냥 말로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묘족 군대, 중국 호남 팔선채의 이인관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작품 속에 잘 녹아들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사건 당시 바로 옆방에 있었던 간부 4인방을 대상으로 추리쇼가 이어지는 것이 전부라서, 일본 어딘가의 독특한 건축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적인 배경이 묘사되는 여정 미스터리 스타일로 쓰여진 것도 아니고요. 왜 이렇게 설정을 잡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는 볼 만하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리 퀴즈의 해답을 이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독특하다는 점과 역사적인 가치를 빼고는 점수를 줄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가격과 분량은 매력적이므로,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덧 : 항상 알라딘을 이용하다가 이번에는 yes24 e-book으로 증정되는 이벤트라 별 수 없이 yes24 e-book으로 읽었는데, e-book 뷰어 자체는 너무 별로네요.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는 설정을 어디서 끄는지도 모르겠고, TTS로 읽어주는 기능도 없고요...

2023/10/01

류 - 히가시야마 아키라 / 민경욱 : 별점 3점

류 - 6점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해피북스투유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아버지와 의형제가 되었는지 묻자, 마 할아버지는 만두를 입에 넣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알았고, 뭐, 네 할아버지와 있으면 굶지는 않았으니까.”
리 할아버지와 구오 할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먹는 것과 목숨을 거는 일은 같은 거라는 사실을 이때 새삼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함께 먹는 것, 제대로 먹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었다.

예치우성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했다. 단순 강도 사건은 아니고 국공내전 때 많은 공산당원을 살해해서 원한을 샀기 때문으로 보였다. 예치우성은 대리 시험을 보다가 퇴학당해서 3류 고등학교로 전학가고, 거기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대학을 떨어지고, 소꼽친구인 두살 연상 마오마오와 사랑에 빠지지만 어릴 때 부터의 친구 사오잔과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군대에 갔다가 마오마오와 헤어지는 등 질풍노도와 같은 청춘을 보내며, 할아버지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버블 일본에 농산물 등을 수출하는 회사에 일하면서, 중국에 있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마 할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받고 범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범인은 삼촌 위우원으로,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살해했던 왕커창 일가의 유일했던 생존자 아들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의형제 슈알후의 아들인 척 하여 할아버의 양자가 되었었다.....


대만계 일본 작가의 작품.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집어들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인공 예치우성의 고등학교에서 군 생활까지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춘 소설이자 예치우성의 성장기더라고요.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답게, 묘사는 출중합니다. 70년대 대만을 이렇게까지 실감나게 그린 작품은 정말이지 처음 보네요. 숨막히는 더위로 대표되는 이국적인 풍광이 가득하지만 70~80년대를 거쳤던 한국인 독자에게 친숙한 광경들이 많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가학적이고 거친 학교 생활, 무식한 군대 생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레코드 가게에서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준다는 등 당시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많이 느껴진 덕분입니다. 특히 전쟁으로 본토에서 쫓겨난 외성인들과 본성인들의 갈등 상황은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요. 의형제, 의리를 강조하는건 확실히 중국스러웠습니다만.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모두 강렬하며, 이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치우성의 그야말로 폭풍같은 청춘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파괴적이기도 하면서,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온갖 상황이 펼쳐져서 눈을 떼기 힘들정도였어요. 살짝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치우성이 제대한 뒤인 80년대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세컨드 러브>> 등이 언급되는데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도 익히 잘 아는 시대니까요. 그런데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진 뒤 '두 번째 사랑'을 만났다는걸 의미하기 위해 이 곡을 일부러 등장시켰을텐데 이렇게 노골적인 제목보다는 은근하게 <<슬로 모션을 다시 한번>>처럼 접근하는게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추리 소설이라고 분류할 수도 없어요. 작품 내에서 할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이 중요하게 언급되며, 치우성도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노력을 펼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단서도 없고, 치우성의 수사도 근거없는 헛된 노력에 그칩니다. '분신사바'가 중요한 단서인 것처럼 등장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범인이 삼촌 위우원이었다는건 나름대로 반전이지만,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친구 마 할아버지가 보낸 사진으로 드러나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이전에 쌓아 올렸던 단서들, 예를 들어 위우원이 했던 거짓말 등이 있기는 하지만 피상적이며, 단서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건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추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위우원이 십 수년이 지난 뒤에야 예준린을 살해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예준린을 살해했을 때 치우성을 포함한 다른 예씨 일가를 모두 살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예준린이 위우원이 슈알후가 아니라 왕커창의 아들이라는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걸 위우원이 깨닫는건, 예준린을 살해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 동안 복수를 멈추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점들을 본다면 이 사건은 추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위우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아들처럼 대했다는 묘한 상황을 통해 중국과 대만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는 소재로 쓰였을 뿐입니다. 치우성의 질풍노도와 같은 정춘은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대만으로 향하는 성장통인 셈이고요.

후기를 보니 작가는 캐릭터가 마음대로 날뛰도록 작품을 쓴다던데, 그 말대로 전체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쓰지 않은 티도 물씬 납니다. 치우성이 어리석게 사오잔과 어울리며 비슷한 사고를 치고다니는 전개도 그렇지만, 치우성이 마오마오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둘이 이복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급작스러운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황당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더군요. 치우성이 중국으로 위우원 삼촌을 찾아가 담판을 짓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었고요. 사랑하는 연인도 새로 생기고, 안정된 직장도 있는데 지금와서 왜? 라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나라를 무대로 각색할 수 있어 보이네요. 한국 전쟁 때 북한의 부역자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던 가족의 생존자 아이가 흥남 철수 때 남한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학살을 주도했던 국군 집안에 어찌어찌 양자로 들어갔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양부와 기묘한 애정을 쌓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복수를 위해 양부를 살해하지만 양부가 자기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걸 깨닫고 허무함을 느낀다, 그리고 뿌리를 찾기 위해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향한다 정도로요. 
이렇게 정리하니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전쟁의 아픔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닌 탓이겠죠. <<최후의 증인>>이 전쟁으로 인한 양쪽 세력의 악행과 비극을 더 잘 그려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증인>>이나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6/02/20

2015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14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국내 최대의 추리문학 동호회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2015년도 출간된 추리소설에 대한 투표 이벤트 결과입니다. 매년 초의 연례 행사죠. 이번에는 모두 33분의 추리 애호가가 투표에 참여하셨네요. 1~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외 작품은 링크를 통해 확인하시길.

1위 : "13.67" 찬호께이

2위 : "미스터 메르세데스" 스티븐 킹

3위 : 미치오 슈스케 "랫맨"

후보작은 241권이나 되지만 1인당 3표씩 해도 100표가 안 되는 표의 절대 부족으로 많은 작품이 순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후보작 중 제가 읽은 작품은 극히 일부인 20권에 지나지 않는데도 7위까지의 순위권 작품은 총 10권 중 무려 6권이나 읽었더군요! 60%! 2표, 1표를 받은 작품 모두 포함하면 39권 중 13권을 읽었으니 1/3이나 되는 것이고요. 비슷한 경향의 투표 참여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과연 추리 애호가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제가 선정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기준은 제 블로그 리뷰 별점이며, 순서는 무순입니다.

"13.67" 찬호께이 :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추리문학의 저력을 알게 해 준 수작

"소름" 로스 맥도널드 : 구관이 명관. 하드보일드 3대장의 귀환!

"특별 요리" 스텐리 엘린 : 구관이 명관 (2). 이 바닥 최고의 유명 요리는 역시 아미르스탄 양 요리!

표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서

"두 사람의 거리 추정" 요네자와 호노부

2007/04/08

내가 추리잡지를 만든다면?

오늘 쟝르문학 잡지를 기획하시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추리 잡지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한 내용을 몇가지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국내 미출간 해외 추리 작품의 적극적 소개 :
제일 중요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아닌 고전 명작 중에서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요. 또 아무래도 잡지 특성 상 매월 한편이 완결되는 단편 위주의 선정이 좋겠죠.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외국 서적이 있는데 이 책을 번역하여 한편씩 실어줌으로써 과거 황금기의 명탐정을 새롭게 조명하는 자리가 되면 어떨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너무 작품들이 낡아 보일테니 EQMM등을 통한 최신 작품들과의 연계도 충실히 고려해야 겠지만요. 또 제가 좋아하는 일본 단편들은 물론 세계 각지의 작품들을 찾아서 조명하는 그런 자리가 되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추리문학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니까요.

2. 국내 출간 작품 중 절판된 작품의 소개 :
국내에도 출간되었는데 아쉽게 절판되고 사라져서 지금은 구하기 힘든 작품들이 많죠. 이러한 작품들을 다시 연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도끼" 라던가 벨린져의 "이와 손톱", 사노 요의 "완전범죄연구", 다카키 아키미쓰의 "파계재판" 등등 이겠죠.

3. 만화 :
만화는 국내 만화가중에 가장 독특한 센스와 쟝르물에 대한 애정을 가진 김진태씨가 꼭 연재해 주었으면 합니다. 원작이 있는 추리물도 좋고 오리지널 스토리도 좋으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주시길^^

4. 애호가 대담 및 간담회 / 설문 조사 :
파우스트 이번호에 실렸던 것 같은 추리 애호가들의 간담회나 대담같은 부분도 들어가면 좋겠더군요. 아울러 애호가들 대상으로 "꼭 번역되었으면 하는 작품" 설문 조사를 통해 새로운 작품을 조명해 보는 것도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5. 계절별 이슈 특집 :
월간지라면 발매되는 계절이나 달마다 뭔가 특별한 이슈가 있을 터인데, 그러한 이슈를 주제로 한 작품을 집중 선정하는 것도 재미난 기획이 되겠죠. 예를 들자면 이번주에 프로야구가 개막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토대로 "스트라이크 살인" 같은 작품을 조명한다던가 하는 식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6. 국내 작품의 발굴 :
만약 추리잡지가 창간된다면 척박한 국내 추리 문학계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국내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 나가야 함은 당연하겠죠. 시장의 확대와 컨텐츠 수급 측면에서라도 말이죠. 당장의 성과는 없더라도 긴 안목에서 수행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7. 추리 영화 및 게임 등 다른 컨텐츠의 발굴 및 소개 :
게임만 해도 제가 아주 재미있게 즐겼던 "역전재판"을 비롯해서 너무나도 많은 추리 게임이 있죠. 이러한 게임의 소개 등 다른 쟝르에서도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추리라는 컨텐츠를 소개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8. 인터뷰 :
추리 작가와의 대담 및 인터뷰도 빼놓을 수 없겠죠. 창작관이나 작품 세계에 대한 조명 등 여러가지 정보를 얻고 많이 배울 수 있는 유익한 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뭐 다른 다양한 아이디어도 많이 있겠지만 기본은 이 정도로 하고 세부 기획을 붙여나가는 식으로 하면 참 좋을 것 같네요. EQMM같은 유명 잡지를 참고하며 풍성하고 다양한 기획이 보강된다면 아주아주 멋진 잡지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누가 저에게 편집권을 주고 잡지 하나 맡겨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2020/12/12

탐정 혹은 살인자 - 지웨이란 / 김락준 : 별점 3점

탐정 혹은 살인자 - 6점
지웨이란 지음, 김락준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청은 한때 대만 연극계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지만 술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크게 상처 입혔던 사건을 계기로 교수직을 그만둔 뒤, 슬럼가같은 골목 워룽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첫 의뢰인 린부인의 의뢰는 갑자기 남편을 미워하게 된 딸아이 행동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미행과 탐문을 통해 린씨와 불륜 관계로 보였던 미스 추는 병원 대상으로 협박을 일삼던 범죄자였다는게 드러나고, 린부인은 이혼했다.

그 뒤 워룽제 주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우청은 체포되었다. CCTV로 피해자들과 근처에 있었다는게 드러났으며, 결정적으로 범인이 우청으로 변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번째 사건에서 범인 스스로 변장을 드러내 우청은 풀려난다. 경찰과 수사에 함께 참여한 우청은 범행 장소가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정확히 4방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 범인의 변장 기술은 전문가에게 배웠을 거라는 것 등 여러가지 추리를 선보이고, 결국 범인이 자신을 추종하던 극작가 쑤훙즈라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경찰은 꼭꼭 숨은 쑤훙즈를 체포하지 못하고, 결국 다섯번째 범행이 벌어지는데....

"내 심경이 어땠냐 하면 좆나 엿같았습니다!"

중국 추리 소설은 몇 편 읽어보았지만 대만 추리 소설은 처음 읽어 보네요. 그런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에는 주인공 우청의 지분이 상당합니다. 독특하면서도 생생한 매력을 그야말로 '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본인 실수로 스스로 루저의 길을 택했다는건 정신병을 앓는 탐정, 주정뱅이 탐정, 패배자 탐정 등 다른 루저 탐정들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살아있다!'는 걸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차이는 큽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는 다른 루저들과는 정 반대지요. 우청 역시 루저가 되는걸 선택한 뒤 워룽제 골방으로 숨어든건 혼자 우울하게, 어둡게 지내보겠다는 취지이기는 했습니다. 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경찰, 언론은 물론 범인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맞서 싸우면서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루저가 아니라 시민 영웅인 셈입니다.

또 우청은 사회에 대한 불만도 딱히 없고, 내면에 특별한 분노도 없습니다. 가족과도 그런대로 원만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루저의 길을 택한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서 현실감이 넘칩니다. 루저가 된 계기인 공황장애라는 병과 연극인들에게 상처를 준 '구이산다오' 사건 설명도 상세하고 현실적이고요. 어린 아이를 죽이거나, 믿었던 아내가 바람나서 도망갔다던가,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상황보다는 훨씬 와 닿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냥 루저는 아닙니다. 명확한 주관이 있으며 추리력도 갖춘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생각, 견해를 드러내는 언변과 재치도 대단하고요. 루저 탐정들이 보통 경찰 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먹고 살려고 탐정이 된 반면, 우청이 '사설 탐정'이 된건 지병 탓이라는 독특함도 눈에 뜨여요. 공황장애로 생긴 불면증으로 많은 책을 읽어서 사람 내면을 파악하는 기술을 습득했다는게 이유거든요. 스스로 추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추리 소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읽었고 타이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게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하지요. 한 마디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루저 탐정입니다. 이런 기묘한 캐릭터를 이렇게 잘 그려낸 작가에게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우청 탐정에 대한 여러가지 설정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린 부인, 천제루가 의뢰한 첫 번째 사건부터 흥미로운 부분이 있거든요. 미행과 탐문, 단도직입적 질문으로 답변을 끌어내어 해결되기 때문에 추리할 여지가 많지는 않지만, 린 선생이 받은 분재 동호회 회원 메일에 포함된 상품 번호가 날짜와 버스 번호, 내릴 정류장을 알리는 일종의 암호문이라는걸 찾아내는건 재미있었어요.

이어지는 본편 사건인 연쇄 살인 사건은 무려 다섯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라서 당연히 추리적으로 훨씬 풍성합니다. 우청이 체포되었을 때 당했던 부당한 처사를 이용하여 경찰 수사에 합류한다는 설정부터 괜찮습니다.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 연쇄 살인에 뛰어들어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찰과 협조해야 하니까요.
이후 수사 과정에서 우청이 단서를 하나씩 짚어내는 과정도 볼만해요. 우청이 7월 7일 타이베이에 없었다는걸 증명한 뒤, 7월 7일 CCTV를 뒤져 자신으로 변장한 범인 행적을 추적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범인이 변장의 달인이라는걸 알아낸 우청은 이 정도 변장은 어딘가에서 배웠을 것이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관련 세미나와 강의를 뒤져 수강생 명단에서 범인 쑤훙즈를 찾아내게 되지요.

불교의 사상, 이론과 상징을 연쇄 살인 사건에 녹여낸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기독교 상징에 따라 일어난 작품은 있었습니다. 묵시록 예언을 따르는 식으로요. 동요나 그림, 수학 법칙, 음악, 바둑, 체스, 심지어 추리 소설에 따라 일어났거나, 주요 소재가 된 작품도 읽어 보았었고요. 그런데 불교라니! 그동안 제가 읽어왔던 거의 1000편에 가까운 추리 소설 중 이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불교적인 상징이 사용된건 피해자들이 선택된 이유가 만(卍)자에 해당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초 피해자들은 우청을 중심으로 위도, 경도가 정확한 정4방향 꼭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해당 위치에서 무작위로 희생자를 선택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정사각형이 완성되었으니, 가운데 있는 우청만 남은 셈이지요.
그러나 5번째 사건이 일어난 위치를 확인하여 도형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불교의 만(卍)자를 그리고 있다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범인 쑤홍주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우청을 깨우치게 만드는 종교적 목적이었고요. 물론 이는 불교 사상은 아닙니다.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우리에게는 현생만 있는데 현생은 지옥이라는' 정신병자 쑤홍주 자신만의 주장이지요. 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불교 사상에 닿아 있으며, 여러가지 소재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핵심 키워드였던 금강경의 한 구절 -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으면 머물러 있는게 아니니라" - 해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기 위하면서 겉모습에 미혹된다는 거지요. 즉, 어떻게 사는게 편안한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일을 걱정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 거고요. 그래서 진짜 편안해지려면, 겉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불교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데, 모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곁가지로 진행되는 황색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사회 지도층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풍자하는 장면들도 재미납니다. 우청이 범인으로 몰렸던 상황에서 언론의 부정확한 추측 보도와 취재 경쟁이 블랙 코미디처럼 묘사되거든요. 우청의 보복 고소에 대한 묘사도 속 시원합니다. "언론 건드려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에 언론이 사람 잘못 건드린 줄 알라고 하세요. 나는 공익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난 그저 법원에서 언론에 한 방 먹이고 싶을 뿐입니다." 라고 일갈하는데, 멋지더라고요. 이런저런 결탁으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지만, 고소라도 한 게 어딥니까. 우리 나라도 이런 고소, 그리고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가 일상화, 법죄화되면 좋겠네요.

잘 모르는 대만의 복잡한 도시 묘사, 이런저런 문화와 풍습들 묘사도 새로움이 많았습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족발 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요. 서민적이고 사람사는 느낌 가득한 묘사도 정겨움을 더해 줍니다. 우청과 어머니의 관계는 물론, 우청과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 모두 서민적이고 정감가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거든요. 왁자지껄하면서 잔 정이 넘치는게 우리나라와도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수선스럽고 요란한 점은 옛날 보았던 홍콩 코미디 영화 정서와 비슷하다고 생각도 되네요.

그러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왜 쑤훙주가 우청을 함정에 빠트렸다가 바로 풀려날 수 있도록 범행을 저질렀는지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요. 우청을 고난에 빠트리려면 그를 살인범으로 모는게 당연했을텐데, 너무 쉽게 혐의를 벗겨주는 느낌이거든요. 우청도 이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등장하지 않고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추리도 기발함은 있지만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정교함을 느끼기 힘든건 마찬가지입니다. 범인 쑤훙주가 변장의 달인이라는게 전부니 어쩔 수 없지요.
경찰도 너무 하는게 없습니다. 우청과 동료들의 노력으로 범인이 쑤훙주라는게 드러난 이후에도 체포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무능해 보였고요. 쑤훙주의 집과 변장한 모습을 우청이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도 없어요. 대만의 치안이 심히 우려되더라고요.

마지막 결말은 지나치게 전형적입니다. 우청을 사로잡은 쑤훙주가 우청을 죽이기 전에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뒤, 때맞춰 나타난 경찰에게 사살당하는데 여러모로 너무 시시했어요.

그래도 독특함, 신선함이 가득차 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우청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영상물에 어울릴 듯 싶은데, 영화가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20/12/18

빨간 리본 - 헨닝 망켈 / 홍재웅 : 별점 2점

빨간 리본 - 4점
헨닝 망켈 지음, 홍재웅 옮김/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헤세발렌에서 열 아홉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자들은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비르기타 로슬린 판사는 병가 중에 충동적으로 헤세발렌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록들을 통해 피해자 중에 어머니의 양부모가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르기타는 미국 네바다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고 이야기해 준 빨간 리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냈고 간단한 조사로 수상한 중국인 손님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정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르스 에리크 발프리드손이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던 탓이었다.
그 뒤 휴가를 얻어 친구 카린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던 비르기타는 수상한 중국인 손님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이다가 당한 강도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 실력자인 훙취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훙취는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동생 야뤼에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비르기타에게 전해지는데...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 (헤닝 만켈)이 쓴,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창조한 유명 탐정인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아닙니다. 비르기타 로슬린이라는 헬싱보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요.

2006년 1월, 한 마을에 사는 친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 아홉 명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왜 이런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비르기타 로슬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서류를 통해 피해자들이 '안드렌' 집안 사람들이라는게 이유일 거라고 추리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네바다의 안드렌 일가도 얼마 전 처참하게 살해된걸 알아내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뒤, 갑작스럽게 1863년의 중국인 '싼'이 겪는 역정이 그려지는데, 흥미롭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속아서 미국으로 끌려간 뒤, 네바다에서 철로를 놓는 노역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을 잃고, 중국으로 귀향한 뒤 선교사들 때문에 결혼할 여자와 뱃속 아이마저 잃어 복수귀가 된다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엄청난 내용이거든요. "황비홍" 1편에서 '금산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 뒤 노예로 팔아먹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빨간 리본의 출처, 에덴 호델 주인의 증언과 피해자 유품인 JA의 일기를 통해 사건 배후에 중국인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게 됩니다. 중국인 '싼'의 후예인 냉혈한 야뤼가 철천지 원수인 안드렌 가문에게 복수를 집행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합친건 아무리 무리수였습니다. 거의 150년 전, 증조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철로 노역 감독관 후손들을 죽인다는 동기부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싼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펼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거에요
 물론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 일가를 모두 몰살시키는건 억지입니다. 미국 노예의 4~5대 쯤 되는 후손이 복수를 위해 노예선 선장이었던 백인 후손들을 몰살시킨다면, 미국에는 남아날 사람이 별로 없을거잖아요? 

게다가 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야뤼가 등장한 뒤부터는 이야기는 아예 다른 길로 향합니다. 중국 특권층이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빈부격차로 분노한 농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농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탓입니다.
계획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마오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정책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설득력이 높거든요. 관련된 자료 조사가 철저했던 듯 싶네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함이 잘 살아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채 50Kg이나 되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아낙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아내의 황당무계한 권력욕으로 유명해진 무가베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설명되는 짐바브웨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습니다. 또 이 계획이 식민지 주의의 재현이라며 반대하는 훙취와 야뤼의 대결도 볼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본편 살인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다른 작품에서, 다른 주제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별 상관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1/3 분량을 할애한 뒤, 누나인 훙취까지 제거한 야뤼가 비르기타를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서고, 훙취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작 중에서 야뤼는 전용 비행기까지 있는 거부이자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발상부터가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없을 외국인 여판사를 중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직접 죽인다? 말이 될 리가 없지요.
몰래 커피에 유리 가루를 섞는다는 살해 방법도 불확실합니다. 많이 어설퍼 보였어요. 이보다는 초반부에 벌어진 헤셰발렌 사건을 직접 저질렀다는게 차라리 말이 될겁니다. 그 사건 피해자들은 납득은 잘 돼지는 않아도 가문의 원수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니까요. 

전개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에덴 호텔에서 리우신이 야뤼의 사무실 주소를 적은 팜플렛을 두고 간 것, 마침 중국 베이징 여행을 간 비르기타가 그 건물을 탐문하다가 강도를 당한 것, 그래서 훙취와 만나게 된 것 모두가 우연입니다. 비르기타가 중국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야뤼가 런던에 나타나 죽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덧붙여, 주인공인 비르기타 판사의 행동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녀는 지나치게 경찰을 불신합니다. 그녀가 중국인이 배후에 있음을 알렸음에도 경찰이 무시한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흉기까지 공개한 용의자가 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사건 담당 경찰 비바 순드베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중요 물건이었던 일기장을 훔친 그녀를 용서해주고 일기장을 빌려주는 등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비르기타는 경찰을 불신할까요? 판사가 경찰을 이렇게까지 불신해도 되는걸까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야뤼의 살의를 눈치채고 런던으로 도주하는 과정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 없는 중국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경찰이 움직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 호텔 주인 스튜레 헤르만손이 수상한 중국인 투숙 후 살해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텔 투숙객 장부가 없었졌고, CCTV라는 증거도 있고요. 스튜레 헤르만손이 전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다음 목표가 비르기타라는 것도 합리적인 추리일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왜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중국인 여자 말만 믿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 외에도, 비르기타가 소싯적 마오 사상에 경도된 극좌였다는 설정도 불필요했고 야뤼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면서 스튜레 헤르만손을 살해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빨간 리본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고요. 살해 현장에 리본을 남길 이유는 나오지 않거든요. 구태여 해석해 보자면, 서구권이 노략질하고 약탈했던 중국이 복수자로서 돌아왔다는 상징적 의미이겠지만, 추리물 기준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단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제법 빠른 시점에서 중국의 위협을 드러낸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된 드라마도 제법이었고요. 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디테일들 중에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이라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3/04/01

돌원숭이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1.5점

돌원숭이(THE STONE MONKEY)(개정합본판)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불법 밀항을 주선하는 스네이크헤드 중 고스트는 가장 악랄한 인물로 수많은 사건을 저질러 왔었다. 그를 잡기 위해 인터폴 적색 수배령이 내려졌고, 이민귀화국 INS와 연방 FBI, 뉴욕주 수사관 합동 작전이 시작되었다. 자문역으로 참여한 링컨 라임 덕분에 미국 해양 경비대는 밀항선을 발견했으나, 고스트는 배를 밀항선 승객, 선원들과 함께 폭파시키고 탈출했다. 
링컨은 자기가 배의 위치를 알아낸 탓에 승객과 선원들이 희생되었다고 자책하며 고스트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고스트는 운 좋게 탈출한 승객들까지 죽이려 암약했고, 그 와중에 링컨과 친구가 된 유능한 중국인 공안 경찰 소니 리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니는 죽기 직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링컨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남겼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 네번째 작품. 설정은 다른 시리즈들과 동일합니다. 악질이지만 유능한 범죄자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거든요. 이번에는 중국인 불법 밀항 브로커 고스트가 링컨 라임과 대결합니다. 제목의 '돌 원숭이' 부터가 손오공을 뜻할 정도로 중국 관련한 소재와 설정이 듬뿍 담겨있는게 특징이에요. 링컨 라임과 중국 공안 소니 리가 바이주를 마시며 바둑 대결을 벌이는 장면처럼요. 차이나타운에서의 중국인 범죄자 이야기의 클리셰들과는 다르게 중국 문화 혁명, 반체제 인사 등 사회적인 이야기가 가미되어 있는건 나름 진보한 측면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런 이국적인 설정 외에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전개가 굉장히 억지스러웠습니다. 불법 밀항 브로커 정도가 링컨 라임의 상대가 될 수 없기에, 무리하게 스케일을 키운 탓이지요. 예를들어 미국이 아무리 치안이 허술하다 하더라도, 대놓고 살인을 저지르고 - 푸저우통의 회장 지미 마 살해, 고스트를 배신하고 달아났던 제리 탕 살해, 백주대낮에 우씨 일가를 습격하려던 사건, 고스트의 거처였던 고급 아파트에서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 버젓이 도망갈 수 있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차이나타운 내에서야 그랬다쳐도, 백주대낮의 거리나 고급 아파트에서 손쉽게 탈출한다는건 말도 안돼죠. 
고스트의 정체가 존 성 박사였다는 반전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고스트는 처음에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성 박사를 살해한 뒤, 혼다 차를 훔쳐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차를 숨기고 난 다음, 의도적으로 죽을 뻔 한 척 하다가 경찰에게 구조된 후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말인데..... 고스트는 뉴욕 한복판에 은신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차로 숨어드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라고 수사팀도 이야기하고요. 몰래 뉴욕으로 숨어들어 은신처로 향하면 됐을걸 왜 경찰과 엮여서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죽을 뻔 하면서까지 말이지요. 망명이 허용될 정도로 유명한 반체제 인사였다면 누군가 알아채는건 시간 문제였을테고요. 경찰 보호를 받고 난 뒤로도 다른 밀항 승객들과 혹시라도 만나게 되었다면 바로 정체가 탄로났을겁니다. 
고스트가 마지막에 창씨 가족 거처로 향하는 색스와 동행하며 창씨 가족과 경찰을 죽이고 섹스를 납치할 계획을 짜는 것도 어이가 없었어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고스트가 가짜 존 성 박사였다는게 바로 드러났을테니까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체포 시 마지막 결말에서처럼 '콴시'에 따른 석방도 기대하기 어려웠을겁니다. 미국인 경찰을 죽인 외국인 범죄자를 풀어준다는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뜬금없었습니다. 고스트가 푸젠성 정치부와 결탁하여 반체제 인사를 밀항을 위장하여 살해해 왔다는 진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설득력도 있고요. 하지만 미국 해안까지는 온 다음에 살해해서 없애려고 했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어차피 죽일거였다면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어요. 식량과 연료를 소비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항구에서 승객들을 모두 살해하고 시체만 처리했다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드래곤 호'의 양심적인 선장과 승무원들을 속이려고? 미국 해안에서 죽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까요? 배를 폭발시킨 뒤, 곧바로 승객들을 죽이려 나선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혼자 탈출한 뒤, 조용히 죽이면 됐을텐데 미국 경찰이 쫙 깔린 해안가에서부터 총질을 한다는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죠. 실제로 제리 탕의 배신으로 위험에 처했었으니까요. 여러모로 무리수였습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아멜리아 색스의 조사에 따른 링컨 라임의 추리라는 기본 뼈대는 지키고 있기는 합니다. 몇 안되는 단서를 가지고 고스트의 위치를 좁혀나가기는건 볼만하고요. 그러나 결정적 상황은 모두 운과 우연에 의해 발생합니다. 링컨 라임이 활약한건 밀항선의 위치를 추리해 낸 것과, 우씨 일가 부인이 패혈증을 앓고 있을거라고 추리하고 그 행적을 밝혀낸 것 두 가지 정도 뿐입니다. 고스트의 은신처만 해도 어떤 아파트인지까지는 좁혔지만 결국 은신처가 드러난건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덕분이었죠. 고스트가 존 성 박사였다는걸 알게된 것도 소니 리가 죽어가면서 돌원숭이 목걸이 흔적을 부여잡았던 덕분이었고요. 소니 리가 이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면, 링컨 라임이 창씨 가족의 거처를 알아냈다 한들 아멜리아 색스의 납치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캐릭터들도 별로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별로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메인 빌런 고스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국인 캐릭터들 모두가 뻔하고 평면적이에요. 소니 리는 외국 독자가 보기에는 독특하다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전형적인 홍콩 영화 속 마초 형사를 따온 캐릭터로 느껴졌습니다. 이른바 '킬링 포인트'를 쌓아가며 죽음으로 이르는 전개도 뻔했고요. 거기에 더해 중국의 격언을 들먹이는 모습은 '찰리 챈'을 연상케 했습니다. 
나름 풍수에 주목하는 등의 활약은 있지만, 이 역시 억지로 끝나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풍수 전문가를 찾다가 고스트와 마주치는건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과했거든요. 애초에 이 시점에 고스트가 풍수 전문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문화 혁명에서부터 비롯된 고스트의 악행, 창씨 가족의 갈등이라던가, 우씨 일가의 이야기 등은 이야기 전개에도 불필요했을 뿐더러, 불법 이민과 가족에 대한 흔해빠진 담론을 반복할 뿐이라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뭔가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 같은데 작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헐리우드 양산형 범죄 스릴러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렇게 하면 깜짝 놀라겠지?" 라는 생각으로 의외의 범인을 드러내는데 촛점을 맞춘 나머지, 다른 부분의 설득력이 헐거워진게 아닌가 싶네요. 앞으로 이 시리즈도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23/02/18

책과 열쇠의 계절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책과 열쇠의 계절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요네자와 호노부의 청춘 학원 추리 단편집. '고전부'나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탐정의 역할입니다. 이 시리즈는 두 주인공인 호리카와와 마쓰쿠라가 각자 추리를 펼치며 서로를 보완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약간 버디물스러운 느낌도 들어요. 뛰어난 관찰력과 독특한 발상의 추리력을 갖춘 호리카와는 뻔한 고등학생 탐정 캐릭터인 반면, 모든걸 의심하면서 추리를 시작하는 마쓰쿠라의 독특함은 나쁘지 않았고요.

또 두 주인공이 도서위원이라서 대부분의 이야기에 주제가 되는 책이 등장한다는 것도 차이점인데, 저 역시 독서 애호가(?)인지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상계로 한 획을 그은 작가답게 평범한 일상계로는 우수한 시리즈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913><913>>
도서위원 호리카와 지로와 마쓰쿠라 시몬은 선배 우라가미로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금고를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과거 둘이 에도가와 란포의 <<흑수조>> 속 암호를 풀었던 모습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일요일, 우라가미 선배 집에 방문한 둘은 할아버지 서재 방에 놓여져 있었던, 어울리지 않았던 책들이 단서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마쓰쿠라는 정보를 바로 공개하지 않고 따로 조사가 필요하다며 호리카와와 밖으로 나온 후, 그가 생각했던 의심을 털어놓는데...


등장하는 책은 많지만, 중요한건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가 되는 책들

마쓰쿠라의 의심은 우라가미 선배가 후배 둘에게 금고를 열어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무엇인지에서 시작됩니다. 가족이 정당한 유산 상속인이라면 금고를 여는 전문가를 부르면 됐으니까요. 그래서 마쓰쿠라는 우라가미 선배와 선배의 가족은 금고를 그렇게 쉽게 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추리합니다. 선배 집에서 대접받았던 차는 시판차와 똑같은 맛이었는데 그걸 끓여서 따로 찻주전자에 내 놓은 이유, 화장실을 간다고 했을 때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 이유 등 기묘했던 행동은 그 집이 선배 가족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찻잎이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살고 있는 척을 해야 해서 차를 끓여 내 놓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건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까봐 걱정했던 것이었지요.
할아버지의 단서는 이상한 책의 분류 번호에 대한 것으로, 그것을 통해 금고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를 이용하여 선배 가족의 정체를 밝히는 작전을 펼친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책 4권의 3자리 분류 번호를 50음도로 변환하면 모두 6자, "타스케테쿠레 (살려줘)"라는 말이 된다고 조작하는 방식으로요. 이 작전으로 선배와 선배 가족의 눈을 돌린 틈에, 마쓰쿠라가 집 안을 조사하여 노인을 발견하고 구해내게 됩니다.
금고 안 내용물은 할아버지 그림과 가족 앨범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건 서재방에 단서가 있고 그건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서재방의 책 중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책이 있다는건 어른이 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금고 번호가 도서 분류 기호라는건 어른이 된다고 알 수 있는건 아니고요. 즉 할아버지가 말했던 단서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선배 가족이 금고를 열기 위해 후배를 부른 것도 이상했어요. 저 같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정도로 끝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은 아쉬웠습니다.

<<록 온 로커>>
도서위원 컴비 둘은 함께 미용실을 찾았다. 함께 가야 40% 할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점장이 "귀중품은 '반드시' 지참하실 것"을 말했고, 이걸 이발 중 이야기하는걸 저지했다, 그리고 곧 종료 시간이라고 말하고 난 뒤 염색이 필요해 보이는 손님을 받았다는 등의 단서를 조합하여 마쓰쿠라는 미용실에 최근 도난 사건이 있었고, 범인을 잡기 위해 점장이 함정을 팠다는 추리를 펼칩니다. 호리카와는 마쓰쿠라의 도움으로 둘의 예약을 받았던 곤도가 범인이라는걸 알게 되고요. 이 작전을 모르는 사람을 점장이 의심하고 있으니, 그걸 모르고 예약을 받은 곤도가 범인이라는 추리로요. 이는 결국 사실로 밝혀집니다.
마쓰쿠라의 추리에 이어 호리카와의 추리가 이어지는 티키타카가 볼만했고, 마지막에 범인 곤도가 도주하는걸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던건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한 감성을 느끼게 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평범한 일상계로는 적절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일본의 미용실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는데 비해 남자 둘이 미용실을 가는게 굉장한 금기인 것처럼 묘사되는게 신기했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
기말고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후배 도서위원 우에다 노보루가 호리카와와 마쓰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주 금요일, 학교에 누군가 침입하여 교무실 앞 창문이 깨졌는데 그걸 보고 학생지도부 요코세 선생이 노보루의 형인 불량 학생 우에다 쇼가 시험 문제를 훔치려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요코세 선생은 이른바 '명탐정' 같은 사람으로, 무슨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학생 누군가를 아무런 근거없이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에다 쇼가 그 날, 밤 늦게 돌아왔는데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둘은 우에노 쇼가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형제가 같이 쓰는 방을 수색하는데...


등장하는 책은 <<파랑새>>. 유리창을 깬 원인이기도 한 새와 연결되는 장치. 헌책방에서 산 이름을 알 수 없는 애장판 만화도 중요한 단서 중 하나. 그 외에도 노보루가 관심있어하는 책으로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판타지 시리즈가 언급됨.

추리를 통해 밝혀낸 우에다 쇼의 알리바이는 가족과 별거 중인 아버지 병문안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있어서 그 사실을 숨겼던 것이지요.
우에다 쇼의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라이켄'이라는 라면집 쿠폰을 찾아낸 뒤, 이상할 정도로 좁았던 집 등의 단서를 통해 아버지가 별거 중이라는 노보루의 답변을 끌어내어 우에다 쇼의 그날 행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완벽한 일상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사건을 맡아서 끌어가는 과정과 결말이 다소 석연치 않습니다. 우에다 노보루의 부탁부터 억지스럽습니다. 왜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는지 모르겠어요. 작중에서도 우에다 혼자서는 도저히 알리바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호리카와에게 부탁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호리카와가 딱히 알리바이 찾기로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것도 아니니까요.
호리카와가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초에 우에다 쇼는 증거가 집에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설령 부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집을 뒤지느니 우에다 쇼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게 더 나은 해결책이었어요.

이에 대해 마쓰쿠라의 추리 - 우에다 노보루가 형의 퇴학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도 좁고 어차피 형은 아버지랑 살 터였기에. 그래서 알리바이 증거를 찾아내서 없애려고(형을 퇴학시키기 위해)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는 인간 관계가 깨져도 무방한 사람이었으니까 - 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형의 퇴학을 바란다면 알리바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이상적입니다. 구태여 알리바이를 찾아내고, 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늘린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애초에 학교에서 퇴학당할 정도의 위기에 처한다면, 증거 유무와 관견없이 병문안 당사자였던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테고요. 모든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마쓰카와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전에 보여줬던 추리력과 상반될 정도의 비합리적인 주장이라서 오히려 캐릭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리창을 깬건 마쓰카와였다는 결말도 별로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없는 책>>
3학년 선배 고다가 자살한 뒤, 자살한 선배의 친구 하세가와가 도서실에 나타났다. 그는 고다가 책 사이에 유서를 넣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며, 빌렸던 책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둘은 하세가와의 빌린 책에 대한 언급을 통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걸 알아채는데....


등장하는 책은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자살론>>.

극히 적은 정보만 가지고 원하는 책을 찾아준다는 이야기는 서점이나 도서관이 무대인 작품에서는 굉장히 많습니다. 아예 이런 내용이 핵심인 <<서점원 하야미>>라는 만화가 떠오르네요. 이번 이야기는 이런 류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반전과 함께 여운도 남기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세가와가 찾아달라고 하며 알려준 핵심 정보는 고다가 책을 읽다가 덮었는데 책 등이 보였고, 밑에 바코드 스티커가 있었다는 겁니다. 고다가 좋아했던건 소설책이고요. 그런데 현장 조사를 통해 하세가와는 고다의 오른쪽에 있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일본의 소설책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므로, 책을 읽다가 덮으면 하세가와의 위치에서 책 등과 스티커를 함께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즉, 하세가와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지요.
마쓰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를 날조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하세가와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호리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는 육필이라 위조할 수 없고, 오히려 유서를 받은 뒤 친구가 자살한 탓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은밀하게 유서를 드러내려고 했던 거라고 추리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묵직한 내용에 추리적으로도 좋았으며, 두 주인공의 차이를 강하게 드러내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고, 무조건 나쁜 의도일 것이라 짐작한 마쓰카와의 잘못과 이를 반박하는 호리카와의 말이 대미를 장식하거든요.
선배 교실에 가서 불필요한 연극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는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옛날 이야기를 해줘>>
마쓰카와는 호리카와에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숨겨두었던 현금을 함께 찾아보자고 부탁했다. 그간 호리카와의 추리력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내 놓았던 과거의 단서들를 함께 검토하다가 과거 마쓰카와 가족에게 차가 한 대 더 있었다는걸 추리해내었고, 둘은 결국 그 밴을 찾아내는데...


여러 책이 등장하지만 핵심은 아버지 밴 안에 있었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

보물찾기 이야기인데 마쓰카와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호리카와가 잡아낸 마쓰카와의 이야기 속 단서 - 동생이 멀미를 했다는 것 - 라는 착안점은 좋았습니다. 그때까지 마쓰카와는 당시 탔던 차가 렌트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의 멀미는 담배 냄새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담배 냄새가 나는 차를 렌트할리가 없었다는걸 깨닫게 되거든요. 결국 그 차는 빌린 차가 아닌 아버지 차였다는 추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이 추리는 자동차로 여행을 가다가 동생이 심하게 멀미를 했었다는 별게 아닌 추억담이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는 점과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잊고있던 기억을 떠오르게끔 도와주는 정도의 도움을 줄 뿐이라는 점에서 완벽한 일상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차를 찾아내는 과정, 그리고 차 속에서 발견한 열쇠의 '501호'가 어디인지를 추리하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이 중요 단서로 사용된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차 안에 굴러다니던 헌 책이 도서관 '제적본' 책이라는걸 알아낸 뒤, 도서관이 위치한 도시의 5층 건물을 검색한다는 것으로 도서위원인 아이들의 특기가 발휘된 것은 물론이고, 그 도시는 차로만 갈 수 있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져 있어서 여러모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일상계 보물 찾기로는 더할나위 없긴한데 딱 한가지 억지가 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라면 당연히 주차비를 냈을테니, 주차비를 내는 누군가는 차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누군가가 그렇게 했던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 그 누군가가 몇 년 동안 차를 뒤져 그 안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았을리도 없겠지요. 즉, 자동차가 주차장에 장기 주차되어 있었다는게 밝혀진 순간 보물찾기는 끝났어야 마땅합니다.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한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친구여, 알려 하지 마오>>
호리카와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돈을 도둑맞은 피해자가 아니라 돈을 훔쳤던 가해자였다는걸 알아낸다. 단서는 마쓰카와 시몬, 레이몬 형제 이름과 이에 대해서 마쓰카와가 '3/5이다'라고 했던 말이었다. 시와 예 (레이)는 중국 고전 5경에서 따왔으니 아버지 이름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리하여 아버지 이름을 검색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도 전편에서 독자가 가졌던 의문을 그대로 가지고, 자신의 추리 결과로 도서관에서 기사를 검색하게 됩니다. 자동차가 월 정액 주차장에 남겨져 있었던건 누군가 돈을 계속 냈다는 의미라는 추리는 저와 같은데요, 호리카와는 왜 돈을 계속 냈을까?에서 또 다른 추론을 얻어냅니다. 주차장에 놓여진 차를 처분할 수 없었던건 그 안의 열쇠 때문이었고, 열쇠를 지금 당장은 회수할 수 없었다는 처지였다고요.
그리고 줄거리 요약처럼 '오경'의 한자를 통해 마쓰카와 아버지 이름을 추측하여 검색한 결과,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절도범이었다는걸 알게됩니다. 즉, 마쓰카와의 아버지는 지금 구속 수감 중이라 열쇠를 회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까지의 추리는 기가 막힌데 그 뒤는 특별히 추리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뒷부분은 마쓰카와가 돈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해 반론하는 호리카와 사이의 자기 주장 대결이 대부분이에요.
마쓰카와가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평소에 돈을 아끼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이유 등 약간 사회파스러운 분위기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 약점이란 건 그런 거야. 약점 하나로 세상은 변해….. - 어차피 고등학교 2학년 생이 하는 이야기니 그렇게 깊이있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호리카와 역시 이상론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뿐이고요.
이야기는 마쓰카와가 그 돈을 찾으러 후미쿠라 정에 가서 건물들을 뒤졌는지, 그래서 돈을 찾았는지 밝혀지지 않고,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마쓰카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호리카와 시점에서 마무리됩니다. 아무래도 마쓰카와가 돈을 찾으면 더 이상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을텐데, 어떻게든 마쓰카와가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돌아와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추리도 괜찮았고,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기에는 나무랄데 없는 깔끔한 전개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8/15

역향유괴 - 원샨 / 정세경 : 별점 1.5점

역향유괴 - 4점
원샨 지음, 정세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부호의 후손 즈덩런은 투자 은행 A&B의 IT 부서근무 중에 퀸타스 투자 계획에 관련된 기밀 자료가 납치(?)된 사건에 말려들었다. 투자 계획 컨설팅 팀원 중 한 명인 샤오루가 즈덩런에게 자료가 사라진 사실을 처음 알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기를 꺼린 본부장 존은 팀원 모두와 즈덩런을 자료 몸값 지불일인 3일 뒤 까지 A&B 소유 아파트에 경찰과 함께 연금시켰다.
즈덩런은 사건에 샤오루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몇 가지 조사를 통해 이를 확신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적은 몸값에 주식 시장에서 한 몫 잡으려는 움직임도 없어서 범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지는데...

시마다 소지 상을 수상한 중국 추리 소설입니다. 찬호께이의 작품들로 중국 추리 소설에 대한 기대가 커진 탓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A&B를 협박한 '기밀 문서(재무 자료)' 납치 사건은 즈덩런을 3일 동안 일종의 연락 두절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는 진상, 반전은 좋습니다. 연락이 두절된 상태를 유괴된 걸로 위장하여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려는 계획이었지요. 즈덩런이 즈리 은행의 후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별 의미없어 보였던 도입부의 '술 먹기 게임'의 벌칙 - 즈덩런을 의자에 묶어 놓은 것 - 때 찌은 사진을 이용하고, 중간에 즈덩런의 자는 모습을 찍은 걸 살아있다는 증거로 활용한다는 식으로 단서와 복선을 배치한 솜씨도 제법입니다.

기밀 문서의 몸값, 그리고 최종적으로 즈덩런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과정도 꽤나 합리적입니다. 먼저 백 명의 협력자들에게 인터넷 옥션에 콘플레이크 박스를 고가로 출품하게 하고, A&B가 이를 낙찰받는 방식으로 10만 달러를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콘플레이크 박스를 경찰이 A&B로 가져오게 만듭니다. 사실 박스 중 하나에는 즈덩런의 몸값인 5백만달러에 상당하는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었거든요. 다이아몬드는 박스 속 알람 시계가 울리는 혼란 와중에 챙기고요. 박스를 범인이 의도한대로 쌓아놓게 만드는 디테일, 백명 단위가 필요했던 협력자들 모집을 일종의 폰지 사기 방식으로 끌어모으고 다이아몬드도 폰지 사기 형태로 벌어들인 현금에 대응하여 기존 투자자에게 돌려주어 증거를 인멸한다는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시각적인 볼거리가 연상되는 장면도 많아서 즐겁습니다. 콘플레이크 박스 회수 작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일종의 플래쉬 몹 처럼 회수자와 똑같은 복장을 차려 입는다는 묘사가 대표적이죠. 전개도 복잡하지 않고 깔끔한 편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도 큽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A&B가 투자 성공을 위해 사력을 타하는 퀸타스의 사업이 너무 유치해서 몰입하기 힘듭니다. 차후 그들이 주력으로 내세운건 흔하디 흔한 IoT 서비스일 뿐인 탓입니다. 이런 서비스는 이미 전세계 모든 제조사가 하고 있으니까요.
진짜 핵심이라는 '초크' 프로젝트의 K 포인트 역시 마찬가지에요. 가상 세계에서 얻은 포인트를 현실 세계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다는 개념부터가 별로 새롭지 않습니다. 가상 세계에서의 적극적인 행동 - 별점을 준다던가 - 에 따른 보상이라는 점을 차별화로 내세우지만 자동으로 쌓이는 카드, 통신사 서비스보다는 오히려 뒤떨어진 개념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서비스는 퀸타스와 같은 소프트웨어, 휴대폰 제조 업체가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상화폐를 만들었어요! 1K포인트는 1달러에요! 라고 이야기해봤자 쓸모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장에서 그걸 받아줘야 성립되는 사업 모델인데, 이런 신규 통화가 시장에 자리잡는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이런 이유로 퀸타스의 사업 문제가 금융 위기를 불러 올 수 있다는건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어설픕니다. A&B 사건을 맡은 T시의 탕푸 경감이 A시 경찰이 맡은 즈덩런 유괴 납치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유력 인사의 아들이 납치된 사건에서 그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 관련 정보가 알려지지 않는다? 각 도시별 관할이 다르다는 언급 정도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또 A시 경찰이 A&B 본사 건물을 감시할 때, 이들을 탕푸 경감이 체포했더라면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을거라는 문제도 있고요.

샤오루의 완벽해 보이는 범행 계획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합니다. A&B는 단돈 4만 8천 달러만 손해본 걸로 - 5만 2천 달러는 폰지 사기 형태로 이전 참여자로부터 선입금을 받은 덕분 - 사건에서 손을 뗍니다. 투자 계획과 신용의 문제라 이 정도 손해는 입다물겠다는 A&B의 입장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즈덩런 유괴 사기 사건은 상황이 달라요. 무려 5백만불을 손해 본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기대하는건 무리입니다.
진상이 드러나면 퀸타스 투자 위험성이 함께 밝혀지고, 연구 개발 증권의 흐름이 막혀 금융위기가 올 수 있기 때문에 함구한다는 설명도 말이 안됩니다. A시 경찰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샤오루의 일종의 폰지 사기 역시 협력자와 투자자가 많이 필요하다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연결고리가 많으면 많을 수록 한, 두 군데에서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건 백명 단위를 넘어가니까요. 단적인 예로 다이아몬드를 투자자들에게 전해주는 방법이 그러합니다. 직접 편지를 배달하던가, 최소한 누군가를 시켜야 하는데 백 명 이상에게 이런 짓을 하면 들키지 않는게 더 이상하지요. 사내 정보를 이용해 사기를 치려면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없이 차라리 퀸타스 문서를 인터넷에 뿌리고 주식으로 차익을 얻는게 더 손쉬웠을 겁니다.

깊이있는 캐릭터 형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심리 묘사도 얄팍한 캐릭터들 모두 전반적으로 수준 이하입니다. 대부호의 후손이자 컴퓨터 천재라는 즈덩런이 개중 최악입니다. 만화적인 설정부터 별로이며 무엇보다도 하는게 없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IT 관련된 지식 수준도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찬호께이의 "망내인" 속 아녜와 비교하면 초등학생 이하로 보일 정도에요. 다른 캐릭터들 모두 평면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하며, 천재 미형 악역인 샤오루 역시 뚜껑을 열고보면 사내 정보를 이용해 사기치는 사기꾼일 뿐입니다. 마지막에 'A&B'에서 더 배울게 없다'는 범인 샤오루의 뻔뻔함과 당당함에는 어이가 없어집니다. 모자라 보이는 개그 캐릭터 폴 형사는 대체 왜 나왔나 싶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고 핵심 아이디어는 반짝반짝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설정들 모두 설득력이 결여됐다는게 문제죠. 영화화되었다고 소개되는데, 나중에 한국에 소개된다면 영화로 보는게 훨씬 나은 선택일 듯 합니다.

2021/05/01

스텝 - 찬호께이, 미스터 펫 / 강초아 : 별점 2.5점

스텝 - 6점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알마

'사보타주'라고 불리우는, 범죄자 형량을 인공지능 분석을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을 주제로 한 4편의 중편이 모여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는 연작 소설집입니다. "13.76"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중국 추리작가 찬호께이가 타이완의 추리 작가인 미스터 펫과 함께 쓴 작품이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저' 방식은 아닙니다. 기둥 줄거리와 기본 설정은 함께 생각했을테지만, 미국을 무대로 한 첫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찬호께이가, 일본을 무대로 한 두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미스터 펫이 써서 합쳤거든요. 

그래서 각각의 이야기는 분위기와 전개가 사뭇 다른데, 찬호께이가 쓴 작품들은 정교한 구성, 반전 모두 어느 정도 기대에 값합니다. 하지만 미스터 펫의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왜 일본을 무대로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특히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그 수준이 가히 처참한 수준입니다. 미스터 펫이 맡았던 이야기들은 작 중에서 인공 지능의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라고 설명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처지는 완성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어요. 찬호께이가 맡았던 첫 번째 이야기 속 매슈 프레드 범죄극도 마찬가지로 시뮬레이션이지만 범죄물로는 차고 넘치는 좋은 작품이었으니까요. 추리물, 범죄물이 아닌 SF 측면으로도 사보타주 시스템 등 상세 설정도 찬호께이 이야기에서 더 잘 설명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찬호께이 부분은 별점 3.5점, 미스터펫 부분은 별점 1.5점인데 찬호께이가 이야기 전부를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P.1 SA.BO.TA.GE. /찬호께이 : 

미국을 무대로 매슈 프레드라는 범죄자가 저지르는 여러가지 범죄를 그려낸 작품. 이 중 마지막 범죄는 꽤 완성도가 높아요. 술집에서 만난 E와 의기투합해 그의 전처를 응징한다는건데, 아내나 불륜남이 아니라 E를 죽이고 아내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다는 반전이 괜찮았거든요. 매슈 프레드가 저지른 모든 범죄는 사보타주가 시뮬레이션한 내용이라는 큰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E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정비공에게 시세보다 훨씬 큰 돈을 주고 자동차 정비를 맡기는 등 약간의 헛점은 있지만, 이 모든게 시뮬레이션이라면 어느정도 납득할 만 합니다.

EP.2 T&E /미스터 펫 : 

탐정 메이구가 정부 의뢰로 사보타주 시스템을 일본에 이식한 '선인장' 시스템을 해킹한 범인을 찾아낸다는, 일본을 무대로 한 독특한 SF 추리물입니다. 

수사는 미행, 도청, 해킹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이구가 가진 특수 능력이 무엇인지가 수수께끼의 핵심입니다. 사건 수사를 여러가지로 시도하면서, 실패할 때 마다 사건을 의뢰받은 시점으로 기억과 함께 돌아오는 능력이지요. 실패하지 않아도, 5일이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요. 이 능력 덕분에 메이구는 의뢰받은 사건을 5일 안에 밝혀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야기는 중간에 의뢰인이 사망하는 등의 깜짝 전개를 거쳐, 특수 능력이 밝혀지고 범인이 타케우치라는게 드러나며 타케우치와 메이구의 격투로 끝맺습니다. 지금 전개되는 현실은 메이구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로, 이 가상 현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일종의 열린 결말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타임 리프물, 타임 슬립물과는 다른 설정에 더해, 메이구가 리셋할 때마다 료코의 1인칭, 3인칭으로 시점이 변하는 묘사도 독특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사뭇 달라서 신선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하려면 료코 뿐만이 아니라 메이구로의 시점 전환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료코만의 시점 변화는 진짜가 아닌 가상 현실이라는걸 보여주기위한 장치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거든요.

EP.3 E PLURIBUS UNUM /찬호께이 : 

석방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최악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본 법무부의 사보타주 시스템 총 책임자인 앤드루 키팅이 범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줄 알지만, 시스템 비밀을 밝히기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담당자의 고뇌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범죄 현장에서 마주치는 클라이막스 까지의 전개도 긴장감이 넘치고요, 마지막에 키팅이 읽은건 단순한 시뮬레이션 결과일 뿐, 실제 예측이 아니었다는 반전도 설득력있게 묘사됩니다. 

문제는 전개와 결과가 예상가능했고, 운과 우연에 지나치게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시뮬레이션과 비슷하게 애덤스가 현장에 나타나서 희생된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보타주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는데 너무 치중한 결과물이었어요. 키팅이 범인 애덤스를 죽이고 그냥 잡혀갈 생각을 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밝혀지는 두 번째 이야기 속 기묘한 설정만큼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키팅은 범죄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인공지능이 시뮬레이션 도중 일정 조건이 만족되면 자동으로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 변수를 변화시켜 시뮬레이션을 계속하는 '가젯'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점을 되돌리는 방식을 인공지능이 학습해 버려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가젯이 유출되어 해커가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지요. 이렇게 가상 세계 속에서 시간 회귀, 변수 수정, 데이터 기록의 능력을 갖게 되는 '머니퓰레이터' 를 잡기 위해 프로그래머 프랭크는 '에스코트'라는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에스코트는 머니퓰레이터를 확인하면, 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요. 즉, 두 번째 이야기에서 머니퓰레이터가 메이구, 에스코트는 다케우치였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다케우치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시스템만 놓고 보면 다케우치는 백혈구와 같은, 정의로운 존재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머니퓰레이터로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방법은 인공지능 딥 러닝 학습법의 하나인 GAN 모델이 연상되어 더욱 그럴듯하게 여겨졌습니다. GAN 모델은 학습이 필요한 인공 지능을 Discriminator라고 부르며, 여기에 가짜 데이터를 만드는 Generator가 생성한 결과물을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Generator의 위조가 정교해 질 수록, 이를 판별하는 Discriminator의 능력도 올라가는 방식이지요. 이 이야기로 따지면 메이구가 이런저런 가상 시나리오를 시도하는 Generator이고, 사보타주 시스템 속 인공 지능이 Discriminator인 셈입니다.

EP.4 PROCESS SYNCHRONIZATION /미스터 펫 : 

두 번째 이야기가 비롯된 원인인, 선인장 시스템에 침입하여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면서, 실제 현실의 메이구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완성도가 절망스러운 수준입니다. 완벽한 보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중앙 처리실에 두 시간 이상 머물려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 방법에 대한 트릭부터 억지입니다. 뭔가 엄청난 시스템인 것 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그냥 데이터 조작과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과거 일본에서 실행되었던, 기억을 조작하는 수술인 HIMIKO 프로젝트도 뜬금없었습니다. 수술을 받았던 메이구가 수술에 대한 비밀 서류를 손에 넣고, 관계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전개는 유치하고 작위적이고요. 아무리 이야기가 모두 시뮬레이션 결과에 불과했다고는 해도, 앞서의 다른 시뮬레이션들보다 현격히 낮은 완성도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필로그 : 

사보타주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인권을 무시하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형법 제도가 옛날 방식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인데 솔직히 사족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범죄자가 수형 시설에서 교정, 교화가 될 수 있다는걸 믿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는 정서가 깔린 사보타주 시스템의 형량 결정 시스템이 지금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됩니다.

2004/09/27

중국 오렌지의 비밀 - 엘러리 퀸 : 별점 2.5점

 
중국 오렌지의 비밀 - 6점 엘러리 퀸/시공사

뉴욕 챈슬러 호텔 22층에 있는 맨더린 출판사 사장 도널드 커크의 사무실에 찾아온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현장인 대기실의 모든 집기에서부터 피살자의 복장까지 거꾸로 뒤집혀 있는 괴상한 상황에 더해 밀실에 가까운 대기실의 존재 탓에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도널드 커크의 친구인 엘러리 퀸은 우연히 사건에 뛰어들게 되고, 피살자의 복장에서 단 하나 빠져있던 "넥타이"를 주목하며 특유의 추리력으로 결국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엘러리 퀸의 국명시리즈의 하나로 초기작이라 볼 수 있는 작품.
개인적으로 엘러리 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를 어려운 인용구를 남발하는 식의 잘난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죠. 그래서 우연찮게 구했던 몇몇 작품만 읽고 애써 구해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블로거 "옥수수밭"님의 도움으로 구해서 읽게된 이 작품은...! 엘러리 퀸의 잘난척과 인용구는 역시나 가득하지만 고전 추리로서의 미덕과 정통파로서의 품격과 내용을 모두 갖추고 있는 좋은 작품이더군요. 역시 선입견을 가지면 안되요... 반성, 반성합니다. 

여튼, 누가 뭐래도 정통파는 의외의 상황, 정교한 트릭, 의외의 범인 이 세가지가 잘 짜여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거의 밀실에 가까운" 방에서 모든것이 뒤집혀진채로 죽은 피해자 (입고있는 옷과 방의 모든 가구들, 심지어 그림까지!)라는 의외의 상황과 이 상황을 잘 이용한 트릭, 그리고 가장 범인 같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 까지 정통파의 플롯과 내용을 그대로, 하지만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라는 부분으로 독자에게 지적 게임을 유도한다던가 후반부의 엘러리가 관련자 전원을 모아놓고 추리쇼를 펼치는 부분은 김전일과 코난류의 일본 추리 만화의 마지막 장면과 무척이나 흡사하여 왠지 친근감마저 느껴졌고요. (특히나 김전일과 굉장히 비슷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범인이 갑자기 닥친 상황에서 급하게 짜낸 트릭으로 완벽한 알리바이를 구축할 수 있었다라는 부분의 설득력이 약한 것은 단점이긴 합니다. 이런 트릭으로 방을 밀실로 만들고 알리바이를 만드느니 시체를 잠깐 동안만 숨겨놓고 나중에 태워버린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처리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거기에 방을 밀실로 만드는 방법은 약간 억지스럽기도 합니다. 감히 잠깐 생각했던 트릭으로 엘러리 퀸에게 대결하다니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마음에 들은 부분이 많고 내용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국명 시리즈는 "이집트 십자가", "그리스관" 에 이어 이로써 세 작품 째인데 기회가 된다면 더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책을 주신 옥수수밭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PS : 그런데.. "중국 오렌지"라는 제목은 억지네요. 국명시리즈라는 타이틀에 엘러리가 너무 집착한 듯 싶어요^^

2008/05/24

쇠못 세개의 비밀 - 로베르트 반 훌릭 / 이희재 : 별점 4점

쇠못 살인자 - 8점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황금가지

디 판관은 새로운 부임지 북주에서 충실한 4명의 수하와 함께 새롭게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최초에 접수된 사건은 랴오 조합장의 딸 랴오 렌팡 처녀 실종 사건이었다. 사랑의 도피로 여겨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지물포를 하는 예씨 형제들의 여동생이 살해당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 목 없는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걸 계기로 다시 신중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북주의 유명한 권법가 란 사범이 독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결국 우여곡절끝에 각각의 사건의 용의자를 알아낸 디 판관은 용의자를 심문하나 결정적 증거는 잡지 못해 고민해 빠졌다. 결국 금기시 되어 있는 시체 발굴 부검을 자신의 직위와 목숨을 걸고 착수하는데...

어제 읽은 "종소리를 삼킨 여자" 에 필받아 연달아 읽어버린 디판관 시리즈 2번째 작품입니다. 재간되긴 했지만 저는 예전 디자인 하우스 판본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옛스러움과 이색적인 분위기는 전작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몇가지 세세한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요. 일단 가장 큰 차이점은 싯구와 더불어 전작의 무대인 푸양과는 다른 엄청나게 추운 북주의 겨울 풍광이 더해지며 섬세한 드라마가 더욱 강조되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호쾌한 맛은 부족하지만 감성적인 면에서 은근한 멋을 풍기네요.

여러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도 전작 그대로인데 랴오 처녀의 실종 사건과 머리없는 시신 사건, 권법가 란 사범의 독살 사건, 그리고 쇠못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중간에 사탕과자 상인의 에피소드와 같은 곁가지 추리담도 담겨 있긴 하지만 중심 내용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고요. 

또 이 네가지 사건이 두가지씩 -실종사건과 머리없는 시신 사건, 그리고 독살과 쇠못 살인 사건 - 조합되어 연관된어 진행된다는 점에서 전작보다 더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추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머리없는 시신 사건"은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처럼 시체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복선과 단서가 명쾌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독살 사건"은 고대 중국의 퍼즐 놀이라 할 수 있는 "칠반 (탱그램이라고도 하죠)"을 이용한 다이잉 메시지는 특이하지만 범인이 너무 초반에 드러난다는 점과 별다른 트릭은 없어서 약간 부족한 맛이 느껴졌는데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쇠못 살인 사건"의 고전적이고도 독특한 트릭이 부족한 점을 충분히 보충해 줍니다. 이 쇠못 살인 사건 트릭은 국내 추리 만화 "다모"에서도 접했었던 것이라 아주 새롭지는 않았지만요.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다모" 쪽이 더 정교한 느낌이라 생각됩니다. "흉기"의 은닉이 고려되었어야 할 거 같으니까요.

어쨌건 다시 읽어도 무척이나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전작에 비하면 사건이 보다 소박하고 드라마가 강조되었다는 점과 여성에 대한 가혹한 묘사나 잔인한 처형에 대한 묘사 등 껄끄러운 부분이 줄어들고 잔잔한 맛이 느껴진다는 점 때문에 전작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고요. 역시나 뒷부분 저자 해설에서 밝히듯 고대 중국의 실제 사례나 범죄 소설집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원전에 대한 설명도 충실해서 자료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충분히 다시 재간될 만한 재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보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디 판관 시리즈의 계속된 출간을 기원합니다~

그나저나.. 원제도 단지 "중국 쇠못 살인사건" 인데 왜 이 번역본은 "쇠못 세개의 비밀"로 제목이 붙은걸까요? "쇠못 두개의 비밀" 이었으면 이해가 되는데 당쵀 알 수가 없군요. 번역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 euphemia님의 비밀덧글을 보고 이유를 알았습니다. (다른 분들께 스포일러가 될까봐 비밀 덧글로 달아주셨는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쇠못은 세 개가 맞다고 합니다. 프롤로그 화자의 유령 이야기까지..... :]) 앞부분 프롤로그를 아무 생각없이 넘긴 제가 착각한 것이었네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