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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7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9. 역립(逆立)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카라쿠리의 과거 등은 제대로 번역하기 힘드네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9. 역립(逆立) 인형
카오리가 아틀리에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캔버스, 이젤은 한쪽으로 치워졌고, 책상은 수사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밝지만 장식이 적은 방이라 그림과 화구가 없으면 수사관들이 어슬렁거려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총소리를 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지?"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경찰관이다. 현경본부 수사 제1과의 노련한 호시자와 형사였다. 마이코가 아직 쇼조와 결혼하지 않았을 때 같은 서에서 근무했고, 마이코의 술친구였다. 너무 마음이 잘 맞은 탓에, 두 사람 모두 결혼 대상으로 서로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호시자와는 나라키 경감보다 한 살 위었다. 나라키 때문에 호시자와가 연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고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말했다.
"호시자와 군이 현경에 배치된 것은 분명 나라공 때문일 거야."
마이코는 아무래도 나라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라키의 얼굴도 보였다. 변함없이 눈썹 사이에 깊은 세로 주름을 짓고 있었다.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연이은 사고사. 거기에 더해 카오리의 기이한 죽음. 당연히 경찰은 흥분 상태였다. 소우지의 신고로 즉시 여러 대의 경찰차가 도착했다. 나사 저택에는 수많은 수사관들이 긴급 배치되었다.
"미로 속에 있었어요."
토시오는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자에서 쓰러졌을 때, 넘어지면서 뭔가에 부딪힌게 아닐까 생각했다.
"총소리는 어느 방향에서 났지?"
"모르겠습니다. 미로 속을 빙빙 돌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위치는 기억나지 않나요?"
"알 것 같아요. 저는 백묵으로 길을 표시하면서 가고 있었으니까요."
"그 위치에 서면 총소리가 들린 방향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실제로 미로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미로를 빠져나온 후에는?"
호시자와가 질문을 이어갔다.
"연못 주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니 화단으로 나왔습니다. 저택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무슨 일인지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연못 주변 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아무것도요.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후로?"
"우다이 씨를 만났습니다."
호시자와는 마와리 저택의 약도를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만났던 곳과 소우지가 서 있던 곳, 세 사람이 정자까지 달려온 경로를 표시했다. 그리고 카오리가 쓰러진 상태, 마사오가 서 있던 위치 등을 설명했다.
"당신은 카오리 씨가 쓰러진 정자에서 뭐든 떨어뜨린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 떨어뜨린 물건? 글쎄요........"
"시체를 본 게 처음인가요?"
호시자와의 말에는 가벼운 경멸이 섞여 있었다.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끔찍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토시오는 말을 멈췄다. 여성인 마이코도 마사오도 기절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미로에서 나와서 ...... 의식을 잃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 그림자라든가, 풀의 움직임이라든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라도 괜찮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나중에 미로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소우지의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소우지의 방을 두드리자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우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유리 선반이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선반은 수많은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장난감이 아닌 것 같았다.
수많은 인형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자 위에 앉아서 기타를 들고 있는 검은색 낡은 인형. 상자 아래에 나사가 보여서 전원을 켜면 바로 기타를 울릴 것 같았다. 아름답게 채색된 상자는 깜짝 상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다. 그 옆의 상자는 옛날 하코네 세공품일까? 회전목마에는 분명 오르골이 달려 있을 것이다. 시계를 내려놓은 인형이 그냥 그 자세를 계속하고 있을 리가 없다. 소우지의 손에 들어온 인형은 모두 생명을 얻어 보는 사람을 이차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그 외 분라쿠(文楽)의 목, 동물, 자동차, 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알 수 없는 톱니바퀴. 언젠가 마사오가 이야기했던 단쥬로의 숨은 병풍 ....... 새로운 것으로는 팬텀 램프, 밸런스 토이, 파이버 옵틱스 ....... 선반에서 넘쳐나는 장난감은 바닥과 책상 뿐 아니라 손 닿는 곳마다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장난감 상자를 뒤집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벽에도 여러가지 시계가 걸려 있는데, 모두 인형이나 오르골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 중 몇 개는 확실히 동작하는 물건이었다.
그 한가운데 소우지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역시 여동생의 죽음때문인지 평소의 가벼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이코는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이코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에 토시오는 살짝 놀랐다.
토시오의 뒤를 이어 수사관이 찾아와 소우지를 데리고 갔다.
"총에 대해 물어봤지?"
둘만 남았을 때 마이코가 물었다.
"총? 네, 정자에 뭐든 떨어뜨린 물건이 없었는지 물어보더군요."
"흉기를 찾지 못했어."
"흉기?"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이 방도 구석구석 다 뒤졌지. 그리고 소우지가 가지고 있던 사냥총이 압수당했어."
"소우지가, 설마?"
"수사관이 총구 냄새를 맡았지만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없는 것 같았어. 22구경 볼트액션으로 구 제국 육군이 사용하던 38식 보병총과 같은 형태야. 이 총은 원래부터 저택에 있었다고 하더군. 소우지가 손질해서 사용한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총으로 사냥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해.”
"그렇다면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총을 손에 발견했을 때 수사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어. 그리고 카오리의 방도 '당연히' 수색을 당했어."
"카오리 씨는 피해자잖아요"
"자살 가능성도 고려한 모양이야. 하지만 자신의 눈을 쏘는 자살자는 드물고, 현장에는 총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살인이지. 카오리 씨의 뇌에서 총알이 검출됐어."
"총알이요…."
"그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것 같아."
"우다이 씨도 총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어. 좀 더 빨리 저택에서 나왔더라면 범인을 보았을지도 몰랐는데."
"마사오 씨가 가장 빨리 현장에 도착한 것 같네요."
"그래. 하지만 마사오 역시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어."
"그녀는 어디 있었는데요?"
토시오는 카오리의 방 창문을 통해 미로 근처에 있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사오는 연못 근처를 걷고 있었다고 하더군."
창밖으로 연못이 보인다. 연못 주변에는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보였다.
"연못 속을 수색하는 걸테지."
"총을?"
"맞아. 경찰은 마와리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의 범행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듯 해."
".....설마......."
"이러면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죽음도 다시 한번 문제 삼을 것 같군"
"마와리 저택 안 사람이라고 해도 마사오 씨, 소우지와 테츠바. 그리고 가정부밖에 없잖아요?"
"우리도 포함이지. 물론 이 저택은 담이 무너진 곳도 있고, 정원 안쪽은 그대로 숲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범인이 외부에서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정자 주변에는 마사오와 소우지, 나와 너, 그리고 카오리, 이 다섯 명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그래. 정자 부근의 길이 부드러워졌지? 범인이 카오리에게 접근하면 당연히 발자국이 남았을 거야."
"데츠바는 우다이 씨와 함께 있었죠?"
"그랬지. 만약 카오리가 권총으로 살해당한게 맞다면, 테츠바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될거야."
"데츠바와의 대화는 잘 됐습니까?"
마이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데츠바는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어. 그리고 토모히로가 나에게 돈을 주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증언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 이런 상태니 나를 위한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증언해 주는 것이 좋지만,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토시오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카오리는 이기적이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얼굴에 범인은 무자비하게 총알을 쏜 것이다. 그것은 악마의 소행과 다름없었다.
"마와리 가문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것같군."
마이코는 천천히 방 안의 장난감들을 둘러보았다.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와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스케치북 사이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뭐야, 그게 뭐야?"
마이코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미로의 설계도입니다. 예전에 그렸던 게 생각나서요. 경찰이 이걸 원하더라고요."
누렇게 변색된 켄트지 위에 오각형 무늬가 보였다. 마이코는 눈을 반짝였다.
"소우지 씨, 저거 베껴도 될까요?"
"좋아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적 없으니까."
마이코는 종이를 받아 재빨리 미로 그림을 베꼈다.
"한번 해볼래?"
소우지가 나간 후 마이코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그림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너 군데, 손가락 끝이 막다른 골목에 빠졌지만, 그래도 중앙을 찾아갈 수 있었다.
".......52초"
마이코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손가락 끝이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본 느낌은 어땠어?"
"이 방법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골인 지점까지 도착하지 못했어요."
"그렇겠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이코는 서둘러 그림을 접었다.
경찰관이 얼굴을 내밀고 토시오를 향해 미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이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사하러 온 사람은 호시자와 형사와 젊은 수사관이었다.
토시오가 먼저 서고, 소우지, 두 명의 수사관, 마지막으로 마이코가 억지로 따라 왔다.
길에 새겨진 백묵의 흔적은 토시오가 직접 밟아서 사라질 뻔한 곳도 있었다. 그래도 표시를 따라가다 보니 토시오가 총소리를 들었던 곳에 도착했다. 선은 그 지점에서 끊어졌고, 떨어져 있던 백묵이 밟혀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이 밟은 것일까.
토시오는 일어서서 기억을 떠올렸다. 토시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호시자와는 그림과 나침반을 비교했다.
"틀림없는 것 같군. 정자의 방향과 일치한다."
그리고 소우지를 향해 말했다,
"미로의 중심부로 가고 싶은데, 안내해 주세요. 지도를 볼까요?"
소우지는 지도가 없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대신해 소우지가 먼저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미로는 여전히 깊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마지막 굽이굽이에서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보였을 때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대단한 미로네요."
호시자와는 돌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이 미로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입니까?"
"이 저택이 지어질 때 동시에 만들어졌어요. 다이쇼 초기에 호도라는 분이 설계했어요. 제 증조부이십니다."
"무엇을 위해 정원에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무엇을 위해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곤란하죠."
같은 질문은 많은 카라쿠리 제작자들도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인형을 움직이는 것에 몰두하느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토시오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을 앞에 두고 주변 울타리를 둘러보았다. 그래, 혼자 있고 싶을 때 이곳이 가장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일곱 겹 여덟 겹의 울타리 방벽은 한 겹의 철문보다 더 견고했을 것이다. 기행가 호도는 이 미로 속에서 무엇을 사색하고 있었을까?
호시자와는 불이 꺼진 성냥개비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저택 안에 우물은 없나요?"
호시자와는 소우지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물? ...... 조리실에 한 개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우물은 말랐나요?"
"글쎄요. 우물이 왜요?"
"사실 총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정자로 달려간 사람은 마사오 씨인데, 그때 카오리 씨는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죽지 않았다고?"
소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카오리의 최후를 떠올린 것일까.
"카오리 씨는 자꾸만 입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중 한 마디만 귀에 쏙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른 우물'이라는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미로를 빠져나오자 수사관 일행을 만났다.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마사오의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마사오는 짙은 감청색 정장을 입고 흰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색은 입지 않았지만 인상은 거의 상복에 가까웠다. 마사오는 토시오 일행을 발견하고는 바람에 날리듯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하네요."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내 방으로 오세요. 우다이 씨도 함께 있어요."
소우지가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봐요, 이렇게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카오리 씨의 방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건 무신경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우다이 씨."
마이코는 나라키 경감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경감님, 마사오 씨가 소우지 씨 방에서 쉬어도 되겠지요?"
나라키의 눈썹 사이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다만 소우지 씨는 남아서 우물 안내를 부탁합니다."
소우지는 작은 혀를 내밀며 껌을 입에 집어넣었다.
소우지의 방에 들어가자 마사오는 잠시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다.
"밝고,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마사오는 카오리를 회상했다.
"토모히로와 함께 신혼여행을 갔을 때가 기억나요. 숙소에 도착하니 방에 큰 꽃다발이 놓여 있었어요. 꽃다발 사이사이에 메시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카오리 씨로부터 온 것이었어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요.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창문을 크게 열어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어요. ......"
정말 카오리답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마이코는 가만히 마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오리 씨가 당신에게 이 저택에 살 것을 권유했다고 들었어요."
마사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카오리 씨의 배려에 감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카오리 씨는 저와 소우지와의 사이를 모르시거든요. 만약 이 저택에서 소우지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나를 농락할 거예요."
마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데츠바 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아까 만났을 때는 안색이 좋지 않으시던데요?"
"혈압이 조금 높은 것 같아요."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권유했어요. 하지만 진정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여전히 약을 복용하고 계십니까?"
"그것만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이런, 저들은 이 집을 유령의 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마른 우물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정자까지 이어져 있는것 같다고 하면서, 방금 젊은 녀석 한 명이 뛰어들었어요."
"그래서, 구멍은 찾았나요?"
"아니요, 바닥에는 물이 있고, 옆에 구멍은 없는 것 같았어요. 덕분에 한 명의 진흙 인형이 만들어졌지요."
마사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우지는 눈치를 보며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진흙 인형, 그것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인형이지요."
마사오는 소우지의 과장된 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나, 웃고 있었어."
"아니, 당신이 슬픈 표정을 짓게 해서는 안 돼죠. 카오리는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오늘 계획을 세웠으니까요. 마침 우다이 씨도 왔으니, 비스크 인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일어섰다. 발판에 올라가 유리 선반 안쪽에서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화려한 패션 인형이었다. 루이 왕조풍의 의상은 다소 색이 바랬지만, 손이 가득 찬 꽃 자수에서 당시의 사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인형의 특징은 도자기로 만든 머리였다. 피부는 지금 막 가마에서 꺼낸 것 같은 선명한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원형의 굵은 눈썹 아래에는 커다란 눈이 있었다. 푸른 홍채가 방사형으로 빛나서 쳐다보고 있노라면 섬뜩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풍만한 뺨과 작은 입매. 전체적인 얼굴형은 확실히 마이코를 닮은 것 같았다.
"에밀 주모우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요. 게다가 이 인형은 자동 인형 - '오토마티즈크' - 입니다."
인형은 왼손에 접시를 들고 오른손에는 작은 나팔 모양의 관을 들고 있었다. 소우지는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안에 있는 액체를 접시에 부었다.
소우지는 병을 치우고 인형의 등 뒤로 손을 뻗어 태엽을 감았다. '딱딱',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잘 보세요."
소우지는 인형에서 손을 뗐다.
작은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 왼손으로 들고 있는 접시 안에 관 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에 옮기더니 손아래에 있는 튜브를 입에 넣었다.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인형의 가슴이 크게 숨을 쉬자 튜브 끝에서 비눗방울이 튀어나온 것이다.
비눗방울은 관을 벗어나 일곱 빛깔로 빛나며 공중에 떠올랐다.
"가슴의 움직임을 보세요. 솜씨가 아주 섬세하죠?"
인형은 여러 개의 비눗방울을 뿜어냈다. 귀여운 어설픔에 약간의 섬뜩함까지 더해진 인형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소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기계를 멈춰 세웠다.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겠죠?"
마이코는 인형이 움직이지 않자 소우지에게 물었다.
"기원전 2천 년 전의 인형이 이집트에서 출토된 적이 있어요."
"기원전 2천 년 전이라니......."
"인간은 도구를 만들면서 동시에 인형도 만들기 시작했나 봐요. 게다가 자동 인형도요. 이집트 인형은 몸통과 팔다리를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한 것으로, 허리에 있는 끈을 당기면 손이 위아래로 움직여 빵을 반죽하는 동작을 하지요. 일본의 고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형이 출토되었어요."
"인간이 장난감에 쏟아 부은 에너지는 엄청났군요."
"쇼소인에 남아 있는 물건들도 투호, 탄환궁, 바둑, 스고쿠 등 사치와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놀이기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요. 그 중의 하나가 카라쿠리 바둑판입니다. 양쪽에 바둑돌을 넣는 서랍이 만들어져 있는데, 한쪽을 당기면 다른 쪽도 나오도록 되어 있지요. 엑스레이를 통해 내부의 장치가 알려졌는데, 매우 정교한 장치가 돋보입니다. 문헌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건 고사기 속 기록입니다. 고야쿠 친왕이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요."
언젠가부터 소우지의 표정에서 어둠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카라쿠리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았다.
"......카라쿠리가 성행한 것은 에도 시대였을 거에요. 그 당시에는 시계도 카라쿠리 중 하나였는데, 간분(寛文) 4년에 시조가와라(四条河原)에서 시계 놀이가 유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고 해요. 원래 시계와 카라쿠리의 관계는 깊습니다. 간분 2년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카라쿠리 연극의 기치를 올린 다케다 오오미는 원래 시계 장인이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에이세이 시계라는 백과사전만한 대형 시계를 나무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가에이(嘉永) 연간에 다나카 히사시게가 만년시계를 만들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건 알고 계신가요?"
"언젠가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카라쿠리 하면 히다다카야마(飛騨高山)의 카라쿠리 수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그렇네요. 아이치, 기후의 축제를 위해서 정교한 카라쿠리가 만들어졌죠. 바닷가에서는 가메자키의 조수제, 산에서는 다카야마의 산왕제.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布袋台)일 것입니다. 우다이 씨, 알고 계시나요?"
마이코도 소우지의 말에 이끌려 장난감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 생각나요. 본 기억이 있어요. 무대에 내밀어진 팔 위에서 천으로 된 칠복신이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리고 두 명의 가라코 (唐子 *중국풍의 옷을 입은 아이)가 여러 개의 가라코를 넘나들며 곡예를 했어요. 마지막에는 두 사람 모두 칠복신의 어깨와 팔에 올라타게 되고요. 칠복신이 손을 흔들면 긴 깃발이 흘러나왔습니다. …….인형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작들이었어요."
"가라코 인형은 그네를 타고 날아갈 수 있거든요. 이른바 자유분방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분세이 5년에 우에노산 아래, 화재 대피용 공터에서 행해진 축포세공 웃음 주머니는 더 대단합니다."
"웃음 주머니?"
"원래 제목은 '나니와가타하나노 스가타미(なにわがたはなのすがたみ)'. 오사카의 오오에 우베에(大江宇兵衛)라는 사람의 작품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카라쿠리는 눈알을 움직이면서 여유롭게 화살촉을 닦는 화살촉의 고로(矢の根の五郎), 옷깃에 꽂힌 바람개비에 손을 들며 기뻐하는 아이. 흙다리를 건너는 미인 등 십여 종이었습니다. 춤추는 모습과 말투, 문지기까지 모두 카라쿠리 인형이며, 마지막에 웃음 주머니를 팔았습니다. 칠복신과 가라코들의 놀이에서는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와의 연관성도 느낄 수 있지요. 마지막에 이 축포세공 칠복신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얼굴 표정이나 몸놀림은 말할 것도 없고 배꼽까지 흔들렸다고 하니, 에도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앞 다투어 산 아래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나라도 그렇겠네요."
마이코가 말했다. 마사오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소우지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덴포 4년, 에도 후카가와 하치만(深川八幡)에서 수호전이 상연되었습니다. 이는 하세가와 칸베에(長谷川勘兵衛)의 작품이며, 수호전의 호걸들이 대거 등장해서 활약하죠. 무대도 간도라케, 세리아케, 텐지라케 등이 많이 사용되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 외에도 오오후네 사계절의 순풍, 요코덴, 기야만선의 카라쿠리 등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케일이 컸던 것은 아사히나(朝日奈)의 대작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금화로도 남아있는데, 머리의 크기가 한 뼘이 넘고, 담뱃갑이 두 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인형도 움직였나요?"
마이코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마,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사히나가 들고 있는 연통 위에 인형의 다이묘 행렬이 지나가고, 케누키 위에서 처녀가 춤을 추고, 연통에 달린 네츠케에서 입이 나오는 등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개막 직전에 이 인형은 사사(寺社)봉행관으로부터 흥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너무 커서?"
"그래요. 당시에는 대형 인형극 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걸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금지령이 내려진 분세이, 덴포 시대에는 큰 구경거리가 즐비했다고 하네요."
"그런 장난의 유행은 계속 이어져 왔던 건가요?"
마이코가 물었다.
"아니, 카라쿠리라는 것은 공예의 천재가 나타나면 번성하다가, 그 천재가 없어지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아요. 독창적인 천재성과 정교한 기술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거죠. 따라서 평범한 인형사는 인형을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 어떻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제작의 노력을 쏟게됩니다. 그들은 인형의 표정에 움직임을 더하고, 자세에 쓸데없는 고심을 거듭하지만, 정작 인형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죠."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인형에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예술 아닐까요? 소우지 씨의 말을 들어보면 예술적 표현보다 기발한 장치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사람에게는 다양한 입장이 있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웃었다.
"예술가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들은 얼마나 엉성해 보일까요. 아무리 훌륭한 인형극이라도 그들은 절대 예술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반대로 과학자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 에디슨은 보캔슨에게 "어린아이 속임수 기계”라고 말했죠."
"카라쿠리 인형은 두 세계 모두에서 어린아이 장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군요"
"하지만 사기꾼의 눈에는 예술도 과학도 모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 아시겠나요?"
"주모우의 인형을 보니까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 하여튼, 이런 카라쿠리 인기도 초대가 죽은 후 기껏해야 3대 정도까지만 이어질 뿐이었지만, 후대의 연극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분라쿠의 '카시라(かしら)'가 그렇죠."
소우지는 일어서서 다른 선반에서 한 개의 인형 목을 꺼냈다.
인형은 둥근 상투머리로 묶여 있다. 부분적으로 칠이 벗겨졌지만, 고운 눈썹과 통통한 뺨에서 기품 있는 유부녀의 색기가 느껴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목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속임수가 숨겨져 있어요."
소우지는 목 아래쪽에서 튀어나온 나무 돌기를 눌렀다. '쿵'하고 많은 단단한 나무가 한꺼번에 결합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인형의 이마에서 커다란 뿔이 두 개가 튀어나왔다. 눈이 위로 치솟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평온한 유부녀가 순식간에 귀녀로 변해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귀신의 인상이 마사오의 가방 속에 있던 ‘마도죠’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코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귀신을 보면서,
"소우지 씨, 나에게 토모히로 씨가 마도죠라는 인형을 보여 준 적이 있어요. 그 인형은 이 목에서 힌트를 얻은 거였나요?"
"토모 씨가 마도죠를?"
소우지는 목을 다시 돌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네. 그 인형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 뭐, 이 목이 힌트가 되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 목은 인형의 한 표정이 그대로 바뀌는데, 마도죠는 한 목에 두 개의 얼굴이 있어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취향은 아니라서 나는 제작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뭐, 바보짓이였죠. 토모 씨도 시제품을 한두개 만들다가 결국 내 의견에 동의한 것 같습니다. 판매할 생각도 없던 것 같고요."
소우지의 말 속에는 토모히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마이코는 마사오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 분라쿠의 목도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장난이잖아요?"
"이런, 날카로운 질문이군요."
소우지는 다시 한 번 풍자극 세계의 얼굴이 되었다.
"이집트의 빵 반죽 인형은 당연히 손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우다이 씨가 본 다카야마의 호테이타이에서 무대에 튀어나온 팔은 '카라쿠리도이(からくりどい)'라고 합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줄은 여러 개의 기관통을 통해 줄잡이의 손에 전달되는데, 복잡한 줄타기를 하려면 40조에 가까운 줄을 8명의 줄꾼이 협력하여 조종해야 합니다. 당연히 줄을 다루는 장인의 명인에 가까운 기술이 필요한거라 완벽한 카라쿠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웃음 주머니도 마찬가지에요. 천가방 옆에 희미하게 어두워진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는 촛불이 놓여져 있어 살짝 비춰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거기에 장치가 있을 거라고 간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블랙매직과 같은 원리죠. 당시의 속임수는 모두 똑같았어요.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형을 조종했던 거죠. 즉, 멜첼의 자동 체스 기사와 같은 발상이었어요."
"즉, 속임수라고요?"
"네, 트릭입니다. 사람이 인형을 움직이는 거죠.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을 사용하는 방법. 천으로 된 자루대를 사용하는 방법.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이 사람이 인형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 웃음보처럼 교묘하게 조명의 공조로 인형을 움직이는 인간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법 ......"
"정말 많네요."
"이런 트릭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책이 쿄오호오(享保)년도에 출간되었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죠? '기공훈몽감초(機工訓蒙鑑草)'라는 책인데, 방금 이야기한 트릭이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동 체스 기사의 트릭의 원리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케다의 속임수인데, 인형극에서 배우까지도 5촌 상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죠. 사람이 5촌짜리 상자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속임수고요. 의상만 남기고 배우는 무대 위 구멍을 통해 바닥으로 도망쳐 버리는 거였죠."
"그럼 주모우처럼 완벽한 카라쿠리는 없었나요?"
"그게 바로 ......."
소우지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있어요. 많이 있어요. ‘기공훈몽감초’가 출간된 지 66년 후에 출간된 ‘기공도휘《카라쿠리즈이》’는 완전한 카라쿠리만을 모아놓은 해설서입니다. 실이나 현기증을 유발하는 트릭은 일절 없어요. 기본은 태엽 장치이기 때문에, 첫머리에 시계의 도해가 제대로 붙어 있고요. 각 인형에는 치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런 책이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소우지의 눈빛이 빛났다.
"가장 유명한 카라쿠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이에요. 주인이 인형의 양손에 들고 있는 쟁반 위에 찻잔을 올려놓으면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걸어갑니다. 손님이 찻잔을 가져가면 인형은 걸음을 멈추고요. 손님이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다시 놓으면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해 좌석을 돌아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하라 사이카쿠도 이 인형을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는 지금도 소중히 보존되어 있지요."
"그것도 고래의 수염으로 만든 태엽 장치를 사용한 것인가요?"
"초기 것은 그렇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금속제 기어와 태엽을 이용한 인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또 수은을 사용한 카라쿠리 인형도 만들어졌고요."
"수은이 인형에?"
"오단반지나 연리반지라는 인형에 수은으로 만든 카라쿠리 인형이 사용되었어요. 이 인형은 손에 들고 봐도 장치가 보이지 않아요. 인형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수은의 이동에 의한 것이지, 태엽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 인형을 맨 윗 단에 올려놓으면, 어느새 양손을 들어 올리고, 몸을 뒤틀고, 돌고 돌기를 반복하며 5단의 단을 이동해 나갑니다. 그 밖에도 잉어가 폭포를 타고 올라가 용으로 변하는 용문폭포, 아이가 북을 치면서 피리를 부는 고테키지도(鼓笛児童), 앞에 놓인 물건이 됫박을 내려놓을 때마다 네 가지로 변하는 물건 인형, 소년이 말의 목을 타고 노는 하루고마(春駒) 인형.... ..."
"정말 많네요."
에도 시대 중기에 이미 대규모 카라쿠리 연극이 상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토시오에게 있어서는 처음 알게 된 놀라움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완전 자동화된 여러 가지 카라쿠리를 듣고 있자니, 그 기술을 이용하여 소정에서 카오리를 쏘아 죽이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인형을 만드는건 아주 쉬운 공작처럼 느껴졌다.
"너무 수다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만 들어서는 재미없을 것 같네요. 이제부터 실물을 보여드릴까요?"
소우지는 마사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 씨, 역립(逆立)인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습니까?"
"역립 인형... 들어본 적 있어요."
마사오는 바로 대답했다.
"언젠가 토모히로가 흥분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소우지 씨가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창고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토모 씨와 둘이서 고쳐서 움직이게 만든 자동 인형이에요."
소우지는 일어서서 책상 위에서 네모난 포장지를 꺼내 세 사람 앞에 놓았다.
낡고 오래된 회색 면 봉투였다. 펼치자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오동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오동나무는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위에 '역립인형(逆立人形)'이라고 적힌 필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목화솜으로 감싼 물건이 들어 있었다.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에치고 사자 의상을 입은 어린아이 인형이었다. 인형은 사자 목을 달고 만자(万字)의 문양이 새겨진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소우지는 인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공도휘'의 목록에도 없는 희귀한 카라쿠리입니다. 태엽 장치에 수은까지 내장되어 있지요. 처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았어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까 수은이 증발해서 수은의 양이 줄어들었더라고요. 수은을 보충해 주었더니 신기하게도 작동이 되더라고요. 작가도 분명합니다. 오노 벤키치(大野弁吉), 가에이 2년의 작품입니다."
소지는 상자 뚜껑을 뒤집었다. 표지와 같은 필체로 '嘉永二年三月 大野弁吉 |拵 之《これをこしらう》'라고 적혀 있었다.
"오노 벤키치…… 사기꾼인가요?"
마이코가 흥미롭게 물었다.
“'사기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학문을 익힌 과학 기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카라쿠리 기에몬(からくり儀右衛門)의 다나카 히나시(田中久重) 등 카라쿠리를 만든 사람은 모두 걷는 사자를 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학식과 기예가 여러 방면에 이르렀습니다. 오노 벤키치는 가나자와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가나자와의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라고도 불리며, 시조류(四条流)의 그림과 조각을 잘했고, 목조각, 죽세공, 금세공, 도자기, 유리공예, 마키에(蒔絵) 등의 작품이 남아있지요. 학식은 의학, 이화학을 비롯해 약학, 천문학, 역학, 항해술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그의 천재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테이블을 옆에 두고 카펫 위에 공간을 만들어 인형을 꺼내 들었다.
"태엽을 감아볼래요?"
그 말에 마사오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태엽이 어디에 있죠?"
"허리 옆쪽. 하카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안 돼요. 떨어뜨리면 안 돼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감아 드릴게요."
소우지는 세 사람의 곁을 떠나 바닥에 앉았다.
"이 시대가 되면 태엽도, 기어도 모두 금속으로 만들게 되죠. 그래서 보존도 잘 되어 있습니다."
소우지는 즐거워하는 듯이 태엽을 감았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한 번 감았을 때였다.
"아, 아퍼!"
소우지는 갑자기 오른손을 인형에서 떼어냈다.
소우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손가락 밑부분에서 엷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엽이 끊어진건 아니야. 이상하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인형을 세 사람을 향해 세우게 했다.
인형은 가벼운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목에 달린 사자 관이 좌우로 흔들렸다. 양손이 움직여 허리춤에 달린 북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하는 북소리와 톱니바퀴 소리가 삐걱거리는 인공의 생명을 움직이고 있었다.
에치고 사자 소년은 세 사람 앞에 이르자 멈춰 서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잘 보세요 ......"
소우지의,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토시오는 그 목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인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형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뒤로 젖혀졌다. 두 발이 땅을 딛고 인형은 거꾸로 서게 되었다. 두 손 사이로 하얀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인형은 주인에게로 걸어갔다.
소우지 앞에서 인형은 멈춰 서서 천천히 두 발을 다시 땅으로 내려놓았다.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걸음걸이가 다소 어정쩡하게 소우지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멈추지 않아요 ...... 이상하네요 ......"
소우지가 신음하듯 말했다.
토시오는 처음으로 소우지의 얼굴을 보았다. 소우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소우지 씨!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가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소우지는 걸어가는 인형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순간 무게 중심이 무너지면서 소우지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괜찮아!"
마이코가 달려와 소우지를 일으켜 세웠다. 소우지는 열심히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 하지만, 훌륭하군, 그렇지......."
격렬한 고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소우지는 마이코를 튕겨내고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마사오가 무언가 외쳤다.
"의사를 불러!"
마이코가 소우지를 내려다보았다. 토시오도 일어섰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어 소리가 들렸다. 에치고 사자 인형이 구석에 쌓여 있는 장난감 상자에 부딪혀 옆으로 쓰러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토시오는 무의식적으로 인형에 손을 뻗으려 했다.
"만지지 마!"
매서운 마이코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자 수사관들이 달려왔다. 한 수사관은 소우지의 상태를 보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의사가 도착해 맥박을 쟀을 때, 소우지의 숨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방 전체가 기어 소리로 가득 찼다. 여러 개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르골이 울려 퍼지고, 시계 인형이 움직였다. 또 다른 시계의 창문이 열리고 기괴한 짐승이 얼굴을 내밀고 짖어댔다.

2021/07/31

서점의 명탐정 - 니타도리 게이 / 이희정 : 별점 2점

서점의 명탐정 - 6점
니타도리 게이 지음, 이희정 옮김/㈜소미미디어

니시후나바시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화자인 고참 아르바이트생 아오이가 탐정역인 점장과 함께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제목과 표지만 보았을 때, 명탐정 홈즈걸 시리즈처럼 '서점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룰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생각대로였습니다. 심지어 책 뒤 소갯글을 보니, 명탐정 홈즈걸 시리즈의 저자 오사키 고즈에가 '서점'으로 테마를 정했던 앤솔러지에 기고했던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하네요. 최근 무거운 작품들만 읽어서 기분전환차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서점이 주요 무대이며 점장이 탐정이라는 점에서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물" 카테고리에 속합니다. 서점을 무대로 한 작품도 많지요. 그러나 이 작품만의 특징이 존재합니다. 바로 "책" 자체가 수수께끼가 되는 이야기는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의 경우는 책들이 중요 소재였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수록작 중 "모든 것은 에어컨을 위해"의 경우, 특정한 책의 도난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책인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에요. 훔쳐낸 방법이 핵심 내용이니까요. 이런 방향도 꽤 괜찮더군요. 서점이라는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내는데에는 아주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수록작 중에서 "일곱 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서점과 책의 특성을 잘 살린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서점이여 영원히"는 서점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고요. 그리고 손님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역할이 서점 직원의 중요 업무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이런 내용의 시리즈가 나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 먹었던 요리에 대한 기억만 듣고 추억속 요리를 재현해 주는 "추억을 파는 식당" 처럼 말이죠.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탓입니다. 특히 과장된 캐릭터들은 영 적응이 안되더군요. 점장부터가 그러합니다. ‘니시후나바시 POP 광고의 여왕’ 과 같은 별명, 바쁜 현장에서 빠져나와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 등 세세한 설정들은 만화 주인공같은 느낌만 전해 주거든요. 여기에 집사 역할을 수행하는 성실한 고참 아르바이트 아오이 설정은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미묘합니다. 등장하는 트릭들이 문제입니다. 대체로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오히려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고, 상황만으로 사건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곱 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가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요. "서점이여 영원히"도 점장의 어설픈 추리를 뺐더라면 훨씬 좋았을테고요.

한마디로, 전형적인 가벼운 양산형 전문가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가볍게 읽기는 수록작 네 편 중 수준 이하였던 두 편이 점수를 너무 깎아 먹어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쓱 한 번 읽기에는 적당했습니다. 일본의 서점 관련된 작품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네요.

덧붙여 실제 서점 근무 경험은 없다는 저자의 후기에는 조금 놀랐습니다. "서점 직원에게 책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 제목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던가, 서가로 문고본을 옮길 때 띠지는 손톱 밑으로 파고들어 다칠 수 있고, 찢어지기도 쉬워서 일부러 빼 놓는다는 등 디테일은 서점 근무 경험이 없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저자는 구제 반코"망나니 서점원 (暴れん坊本屋さん)"을 참고했다는데, 그 외에도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컨텐츠가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도 읽어 보았던 '해골 서점 직원 혼다씨' 처럼요. 이런 점은 조금 부럽네요. 하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모든걸 직접 경험할 필요야 없는게 맞기도 할 테고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곱 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서점 서가에 꽃혀있는 책을 습관적으로 정리하고 있던 손님은, 알고보니 다른 용무가 있었다. 그는 미국 유학으로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 연인으로부터 책들을 받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던 차에, 이 서점에서 주문을 받았다는걸 알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것이었다. 연인은 급작스러운 유학 이야기를 들은 뒤 연락 두절 상태였다. 일곱 권의 책은 그림책, 소설, 인문학, SF 등 장르가 다양했고 받았을 당시 제일 위에 "네가 없어도 괜찮아"가 놓여 있었다...

주요 등장인물들과 무대가 되는 서점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시작되는 첫 이야기로, 손님이 '정리꾼'이라는 설정을 활용해서 풀어내는 간단한 암호 트릭이 등장합니다. 책들은 크기별로 놓으면 "스카이프 가입해"라는 메시지가 표시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문고판이 나온 오래전 소설의 단행본을 구태여 주문하는 등의 단서도 등장하고요. 

책을 주문하고 배달된 날짜, "네가 없어도 괜찮아"가 상자 맨 위에 놓여 있었던 이유 등을 근거로 정리꾼의 애인은 서점 아르바이트생 히라노라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주문과 배달에 보통 1주일이 소요되는데, 몇 일 걸리지 않았던게 단서였습니다. 서점에 재고가 있다는걸 완벽하게 파악했어야 하는데, 이를 조사하기 위해 서가를 훝고 다니는 손님은 없었으니 그 연인이 서점 직원이라는건 꽤 그럴듯 했어요. 포장 역시 단서였습니다. 판형이 다른 특정 책이 맨 위에 올라가려면, 직원이 직접 포장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정리꾼이라는 손님이 책을 선물받고 정리도 하지 않은채 집에 두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책 제목 앞 글자만 따서 읽으면 되는 간단한 암호라서, 의지만 있었다면 책을 정리하지 않았어도 풀 수 있었을테고요. 경우의 수는 5천개 정도밖에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런걸 물어보려고 서점에 올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서점이라는 특성을 잘 살린 일상계 추리물로 기본은 해 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든 것은 에어컨을 위해" 

서점을 찾은 손님 시마지리는 아르바이트 생 이케베의 친구였다. 그는 서점 직원들에게 이케베가 자신의 소중한 책을 훔쳐간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이케베는 도저히 책을 가져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방법에 대해 서점 직원들이 모여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 놓기 시작하는데...

도난품은 유명 라이트노블 작가 하스미 쿄의 사인본으로 시마지리의 가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시마지리가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자리를 비운 사이, 방에 있었던 이케베가 훔쳐갔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케베의 몸 속 어디에도 책은 숨길 수 없었고, 그가 가져갔던 문고본이 가득했던 상자 안에는 책을 더 이상 넣을 방법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케베가 책을 어떻게 훔쳐내었는지?에 대해 서점 직원들이 각자 추리를 이야기하는, 일종의 추리 배틀이 핵심인데,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정말로 훔쳐낼 방법이 없었다는 상황을 알려주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결국 책이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문고본이 가득찼던 상자 안에 넣는 방법 밖에 없었다는게 증명되거든요. 상자안의 책들 커버를 벗겨서 책 한 권이 더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게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지식이 사용된 트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덧붙여, 시마지리가 방법을 알기 위해 서점에 찾아온 이유도, 보통 손님들은 서점 직원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곧잘 생각한다는 것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인데 꽤 그럴듯했어요. 이런저런 다른 서점 동료들 캐릭터들도 읽는 재미를 더하고요.

하지만 벗겨낸 책 커버의 처리 방법은 설득력이 떨어지더군요. 상자 골판지 앞, 뒤를 뜯어낸 사이에 집어넣었다는데, 시마지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50권이나 되는 책 커버를 완벽하게 안에 집어넣고 재포장하는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쓰레기 버리러 갔다 오는게 20분 이상 걸리지는 않았을테고, 설령 시간 내 집어 넣었더라도 티가 전혀 나지 않았을 것 같지도 않았고요. 이보다는 조금 더 큰 다른 상자를 미리 마련해서, 이미 포장해 두었던 박스와 책을 함께 넣었을 거라는 히라노의 추리가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시마지리가 상자를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럴리 없다고 했지만, 미묘한 크기 차이를 알아내는건 힘들지 않았을까요?

작가로 성공한 친구 싸인본을 질투심에 버렸지만, 그 작가 친구가 집에 자러올지도 몰라서 싸인본을 훔쳤다는 동기도 이상했어요. 진상을 알고 난 시마지리가 흔쾌히 용서하면서, "또 사서 사인 받으면 된다"고 말하는 장면과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마지리는 다시 싸인을 받아도 되고, 이케베는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또 이름 부분 필적이 다르면 눈치채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이렇게 흔쾌히 용서할거면 시마지리가 이런 소동아닌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애초에 책을 훔치는게 목적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훔칠리기 만무합니다. 어떤 트릭을 써도 용의자는 자기밖에 없으니까요. 시마지리 집에 놀러가서 몰래 가방에 넣고 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니, 상자 골판지를 뜯어내는 등의 불필요한 노력을 할 이유가 없어요. 문고본이 박스안에 정말로 "가득차 있었다"도 우연이었다고 생각되고요. 억지와 우연이 만들어낸 불가능 범죄인 셈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서점 업무에 대한 여러가지 디테일은 좋았지만 트릭, 동기, 상황 모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일상 업무 탐정단" 

하스미 쿄의 사인회가 있던 날 밤, 서점에 누군가가 침입하려 했었다. 다음날 출근 때, 정문 쪽에 테디베어가 목매달렸고, 가게 안 쪽에서 붙여놓은 하스미 쿄가 친필 사인한 포스터에는 핑크색 마커로 불경과 낙서가 가득 적혀져 있었다. CCTV 확인 결과 테디베어가 매달리던 새벽 3시 36분에는 포스터에는 낙서가 없었다. 이후 아침에 발견될 때 까지 모든 출입구는 잠겨 있었고, 뒷문 오토록도 열린 기록이 없었는데, 범인은 어디서 들어와 어디로 나갔을까? 

아오이, 히라미, 코미야마 모두 서점 일을 하며 트릭을 파헤치고 범인을 잡자는 결의를 다지던 와중에, 서점의 단골 손님 타와타가 밤 중에 하스미 쿄의 편집자가 도망가는걸 목격했다고 말하는데....

직전 이야기에서 인기 작가로 소개된 하스미 쿄가 주요 소재로 등장합니다. 스토커 타와타가 하스미 쿄의 지문을 노리고 그가 서명한 포스터를 얻기 위해 이런저런 범죄를 저지른다는 내용이지요.

핵심인 포스터 낙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핑크색을 띄게 만든 뒤 비치면 핑크색 낙서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트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테디베어를 매달던 시점 전에 낙서를 했던 것입니다. 초등학생 과학 실험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잘 되었을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작 중에서도 언급되듯, CCTV가 흑백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침 CCTV가 흑백이었던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이 트릭 보다는, 창 밖으로 멀쩡한 포스터를 붙여서 위장했다는 히라노의 아이디어가 더 괜찮았어요. 붙인 포스터를 뗀 건 CCTV에 찍히지 않아서 기각되긴 했지만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서 낙서를 언제 했는지를 모르게 만든 이유가 불명확하다는 점입니다. 범인 타와타는 밤중에 낙서를 하고 달아나다가 점장과 아오이에게 목격되었었죠. 이 때 타와타는 자기 정체가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낙서에 대한 혐의는 벗어나기 위해 이런 트릭을 사용했다고 설명됩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낙서를 했다고 의심받았을 거라면서요. 그런데 점장과 아오이가 달아난 사람이 타와타라는걸 알았다면, 이런 공작을 했든 안했든 그녀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게 뻔합니다. 현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점장이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타와타가 편집자 유루즈메가 도망치는걸 목격했다고 한 증언도 억지스러워요. 유루즈메가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어차피 자기가 범인으로 특정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 까닭도 없고요. 괜히 유루즈메가 수상하지 않다는걸 드러내는 빌미가 되었을 뿐입니다.

낙서로 포스터를 훼손한 동기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서점이 포스터를 버리면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였으며, 하스미 쿄가 사인할 때 손바닥을 찰싹 붙이는 버릇에서 착안하여, 코트지로 만들어진 포스터에서 잔류 지문을 회수하여 집에 몰래 침입할 의도였다는데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요? 또 이렇게 엄청난 공을 들여 포스터를 훔치느니, 사인할 때 버릇을 이용하여 직접 사인을 받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서점에 대한 디테일은 여전히 좋습니다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세금 관련되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 등장하는게 기억에 남을 뿐인 졸작이에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 "초세금 대책 살인 사건"은 추리 작가가 세금을 낼 수 없게 되자, 경비를 부풀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산 물건, 여행지 등을 억지로 원고에 등장시킨다는 내용이라는데 재미있을 것 같네요.

"서점이여 영원히"

아오이가 일하는 사사쿠라 서점은 경영이 악화되고 있었다. 어떻게든 서점을 살리려고 문예서 담당인 이치노세와 아오이는 힘을 합쳤지만, 점장의 얼굴을 보기도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 잡지에 "진열대에서 빼지 않으면 유해 서점으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장을 꽂아놓고 가는 사건이 일어났고. 거액의 사진집이 도난 당한 날에는 "유해 서점으로 지정되었다"며 밤 11시에 뒷문 앞으로 모이라는 협박장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누군가 서점에 불을 지르는데...

약간의 서술 트릭이 도입된 작품으로 점장 이치노세와 고참 아르바이트 아오이가 처음 만났던 '사사쿠라 서점'에서 일어났던 과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욕없고 자리를 자주 비우는 점장은 남자인 사사쿠라 점장인거지요. 이걸 마지막에 드러내고 있는건 꽤 그럴듯 했습니다.

실제 사건에 대한 추리 역시 괜찮은 편이에요. 서점 밖에서 서점 안 화재 경보기를 작동시킨 방법은 유치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합리적이면서, 서점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협박장인 빨간 괴문서는 언제나 반품 직전 잡지에서 나왔는데, 인기 잡지들이라 손님이 먼저 가져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해서, 협박장을 보낸건 서점 내부 사람이라는걸 밝혀내는 식입니다. 협박장을 꽂은 잡지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여기에 더해, 착화제가 남자 화장실에 버려졌다는걸 단서로 이치노세는 범인이 서점 내부의 남성이라고 확신합니다. 남자 화장실 휴지통에 착화제를 버리고 뚜껑을 닫은건 조작이 아니라 정말로 버린 것이며, 그렇다면 다른 성별로 위장할 필요가 없다는 추리였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하지만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은 사사쿠라 점장이 불을 지른 동기입니다. 점장은 목적은 보험금 때문이었다면서 서점은 이제 사라질 것이라면서, 아무도 책을 읽지 않게 됐다고 합니다. 책 말고도 오락거리가 넘쳐난다면서요. 문고본과 만화 매출은 늘어나지 않았냐는 이치노세의 반론에, "다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아니면 중고 서점에서 산다, 요즘은 잘 나가는 책만 들여놓는 편의점 수익이 훨씬 높다. 어차피 인터넷 서점에는 상대가 안된다"며 자신의 좌절감을 강하게 토로하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저 역시 도서관, 중고 서점을 애용하고, 인터넷 서점으로 책을 사니까요. 동네 서점이 사라지는데 일조하고 있나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요. 

하지만 "책과 서점은 다르다. 서점에서 보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것이다"는 이치노세의 말과 그 외에도 즐기는 공간으로 바뀌어서, 카리스마 직원의 힘을 빌려서, 전문성을 특화시켜서, 지역 밀착형 등으로 살아남고 명맥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아오이의 생각, 그리고 뒤이어 서점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섞인 기대와 함께 끝나는 결말 덕분에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암요, 책만 파는 공간은 비디오, DVD 대여점처럼 언젠가 없어질게 분명해요. 살아남으려면, 시대 흐름에 맞춰서 계속 변화해야지요. 어떻게 변화하는게 좋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작중 등장하는, 지금의 니시후나바시에 위치한 서점이 꽤 잘 되어가고 있는 것 처럼, 동네 서점들이 꾸준히 살아남아 주면 좋겠네요. 저도 동네에 이런 서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밖에도, 암에 걸릴 것 같던 만화책 절도 사건 등 여러가지 디테일도 좋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도나 조 나폴리가 썼다는 "도망친 숲의 마녀"라는 책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헨젤과 그레텔 마녀를 주인공을 했다는 소개가 꽤 재미있었거든요.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네요....

2016/05/20

책장의 정석 - 나루케 마코토 / 최미혜 : 별점 2.5점

책장의 정석 - 6점
나루케 마코토 지음, 최미혜 옮김/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일본 유명 독서가 나루케 마코토의 책장 관리법을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4개의 단락 - 책장에 대한 정의, 그리고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책장과 책 관리법, 저자가 생각하는 책 선택법과 독서법, 그리고 마지막 부록으로 웹에서 호평받는 서평 쓰는 법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 나루케 마코토는 저자는 1955년 생으로 1991년 일본 마이크로 소프트 법인 사장으로 취임하여 2000년까지 역임했으며, 이후 투자 컨설팅 회사를 설립한 비즈니스 맨입니다. "honz"라는 서평 사이트의 개설자로 마음에 드는 책을 무조건 사고, 1년에 200권도 넘는 책을 읽는다는 독서가이기도 하고요. '시마 사장'이 떠오르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독서가답게 글도 잘 쓰고 나름의 철학도 분명히 있는 사람이더군요.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독서관이 명확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런 저자의 책장 관리법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보기 편할 것', '20퍼센트의 여백이 있을 것'과 '승부수가 될 책만 둘 것', '다양성은 갖되 위화감을 없앨 것', '언제나 변화할 것' 입니다. 보기 편한 것과 여백은 그렇다 치고, 승부수가 될 책만 둔다는게 독특했습니다. 소설이나 만화는 일절 꽂지 않고 오로지 논픽션 중심으로만 책장을 관리한다는 의미로, 소설과 만화는 이미 완성되어 있어서 정보의 업데이트가 필요 없어서 책장에 계속 남아있게 되기 때문에 결국 공간을 차지하게 되어 나중에는 버리게 되는 탓이라고 합니다.
다양성은 테마를 정해 두는 것입니다. 저자의 테마는 '남들이 읽지 않는 재미있는 책' 이며, 테마는 약 5년 정도? 주기로 바꾸면 좋다는군요.
그리고 마지막 '언제나 변화하는 책장'이 바로 책장 관리의 핵심입니다. 우선 앞으로 읽을 책,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두는 공간인 "신선한 책장" (장소는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편안한 곳에, 책을 눕힌 채로 놓고 책등의 제목이 보이게 쌓는, 즉 서점의 '평대' 느낌)이 있습니다. "신선한 책장"에서 다 읽은 책은 "메인 책장"으로 옮깁니다. "메인 책장"에 넣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자의 기준은 '1. 재미있는가 2. 새로운가 3. 정보가 많은가'이고요. 그리고 앞서 말한 20퍼센트의 여백과 같은 공간 관리에 신경쓰며 주, 혹은 한 달에 한 번 "메인 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책장이 꽉 차면 결국 책을 처분해야 하지만 나름 선별한 것이라 버리기 어려우면, 시간을 두고 고민할 수 있게 따로 공간을 만들어 관리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관리하면 역사 관련 서적은 어떻게 하는지 좀 궁금해집니다. 역사는 정보가 새롭게 바뀔 여지가 아무래도 적잖아요? 이미 정해진 과학, 수학 쪽 논픽션도 마찬가지일테고요. 또 정말로 '소장하고' 싶은 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물어보고 싶네요. 1년에 1~2권만 건진다고 해도 수십년이면 엄청 많아질텐데 말이죠.

이러한 책장 관리법 외에 저자가 추천하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아 딱히 언급할 건 없습니다. 하지만 독서법에서 포스트 잇을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것은 괜찮더군요. 요건 바로 따라해봐야 겠어요.

마지막 서평 쓰는 법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은 책만 서평을 쓴다는 점에서 저와 차이는 있지만 같이 서평, 독서 감상문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참고될만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작법 측면에서 '1) 책 제목은 반드시 겹화살괄호로 쓸 것 2) 어미는 통일 할 것 3)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너무 떨어뜨리지 말 것 4)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데 2번과 4번은 저도 항상 쓰면서 고민하는 부분이라 확실히 이해가 되더군요. 참고로, 1번도 따라해보려고 했는데 html 태그 오류가 잦아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글의 구성에 대한 설명도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총괄 1,2 - 에피소드 1,2 - 감상 - 저자 - 일러스트나 장정 - 대상 독자 - 정리의 순으로 적는다'는게 핵심입니다.
우선 총괄 1에서 그 책이 어떤 식으로 재미있는지를 분명하게 소개하고(이것만 따로 잘라 내도 서평으로 구성될 수 있는 참신한 핵심 내용), 총괄 2는 총괄 1에서 다 말하지 못한 재미를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1이 '재미있다'라면 2는 '정말로 재미있다'라고 재 확인하는 것이지요. 에피소드 1에서는 재미를 구체적으로 쓰고, 2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쓰고요, 감상은 에피소드들이 어떻게 재미있었는지를, 다음은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소개하고 일러스트와 장정 등 글 이외의 요소 언급하며 예상되는 독자층에 대해 쓰고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정리와 총괄의 차이는 서평을 읽은 사람에게 책에 대해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인데 확실히 예비 독자들에게 꽤 유용하겠다 싶네요. 실제로 이렇게 쓴 서평 예문도 괜찮았으니까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서평도 이러한 이론에 기초해서 쓴 것인데, 앞으로도 많이 써먹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앞서 말씀드렸듯 책장 정리에 대한 욕심이 솟구치게 만드는 책입니다. 확실히 고수의 책장 관리와 독서법은 남다른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확실한 자신만의 철학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놀랍기도 했고요. 자신이 독서가라고 생각되신다면, 그리고 집에 쌓이는 책 정리에 고심하고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 역시 이사가게 되면 책장에 여유를 좀 두고 자주 정리해서 안 읽게 된 책은 정리해야 겠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저자가 추천하는 책 중 국내에 소개된 책들만 따로 모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2016.05 기준).

  • 만지트 쿠마르, 이덕환 "양자혁명 : 양자물리학 100년사" 까치 글방
  • 크리스틴 바넷, 이경아 "제이콥, 안녕? 자폐증 천재 아들의 꿈을 되찾아 준 엄마의 희망 수업" 알에이치코리아
  • 다니엘 T 맥스, 강병철 "살인단백질 이야기 : 식인풍습과 광우병,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저주받은 가족" 김영사
  • 오코우치 나오히코, 윤혜원 "얼음의 나이 : 자연의 온도계에서 찾아낸 기후 변화의 메커니즘" 계단
  • 구메 구니타케, 정애영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1~5" 소명출판
  • 궁리출판편집부 "세계만물 그림사전" 궁리
  • 마크 레빈슨, 김동미 "더 박스 :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 경제학" 21세기 북스
  • 빌 로스, 이지민 "철도, 역사를 바꾸다" 예경

2022/10/22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애덤 쿠하르스키 / 정훈직 : 별점 3.5점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8점 애덤 쿠하르스키 지음, 정훈직 옮김/북라이프

여러가지 도박에 대해 수학적으로 연구된, 여러가지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
리처드 파인만의 책 도입부 일화부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파인만은 도박은 잃을 수 밖에 없다는걸 계산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프로 갬블러를 만나고 혼란에 빠집니다. 수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 갬블러 닉은 파인만에게 “베팅 판에 돈을 거는 게 아니라, 베팅 판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돈을 거는 것." 이라는 비결을 말해 주었답니다. 암요, 호구는 타짜의 먹잇감에 불과하지요.

뒤이어 각종 도박 및 베팅에 대해 수학자들이 연구한 방대한 사례들이 소개되는데, 뭐 하나 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맨 먼저 소개되는 무작위여야 할 룰렛에서 거금을 땄던 일화부터 말이죠. 룰렛이 마모 등의 사소한 결함으로 특정 숫자가 다른 숫자들보다 자주 나온다면, 상황이 갬블러에게 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게 비결입니다. 하지만 바퀴가 문제가 있어도 어느 숫자에 돈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내는게 문제인데, 물리학에다가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최대 20% 정도의 적중률을 확보했던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임의의 배팅일 경우의 확률은 2% 미만이라니 그 차이가 실로 엄청나네요. 휴대폰 등을 이용해서 2004년에도 130만 파운드를 따 간 일당이 있었다고 하고요. 이런 계산을 할 수 있을 사람이라면 저 돈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튼 대단합니다.

운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복권에서도 수학자들의 성취는 눈부십니다. 제일 간단한건 로또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구입하는 비용이 상금보다 적을 경우 모든 숫자를 다 사버리는 '브룻 포스 공격'법입니다. 문제는 모든 조합을 구매하는 수고, 그리고 공동 당첨자가 있을 때 상금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는건 정말 큰일일거에요.
경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적인 예측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는 조직이 있으며, 그 적중률이 높다는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인트는 잘하는 말은 배당이 낮고 못하는 말은 배당이 높아서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이 못하는 말의 확률을 후하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말의 예상 성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고요.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고배당으로 한 방을 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잘하는 말에 돈을 거는 것 만으로 돈을 무조건 딸 수는 없겠죠. 수수료 문제도 있고요. (이 책에 의하면19%) 그래서 여러가지 수학 기법이 적용된 경마 우승 확률 분석 프로그램이 많이 나타났는데, 대체로 프로그램 결과와 현재의 배당률을 조합하여 베팅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축구 경기도 수학 기법이 도입되는건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에 몇몇 학자들은 축구 한 경기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예측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수학의 발달로 이런 제약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는데, 예를 들어 팀이 골을 넣는 실력, 골을 얼마나 못 막는지를 뽑으면 골을 넣을 확률을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군요.
홈팀의 공격 능력 × 원정팀의 수비 취약점 × 홈그라운드 이점
이를 기반으로 만든 모델을 통한 예측 결과가 베팅 업체 배당률보다 10퍼센트 이상 가능성이 높았다니 놀랍습니다.
이렇게 모든 스포츠 도박은 이제 과학적인 분석 대상이 되었기에, 심지어 투자 회사까지 생겨 투자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주식과 다를바 없다는건데, 이 정도로 고도화된 분석에 따른 결과라면 수긍할 만 합니다. 물론 저는 제 돈을 이런데 투자하지는 않겠지만요.

책은 이런 수학 이론들을 통해 인공 지능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포커에서 블러핑까지 구사한다는건 놀랍습니다. 이는 냉정한 논리에 따른, 최적의 포커 전략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나 룰렛에 돈을 거는 행동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포커 선수들은 베팅으로 게임의 결과를 바꿀 수 있어서 선수인 셈이니까요.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절대로 지지않는 포커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다고 하네요. 온라인으로 포커 게임을 하면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블랙잭과 카드 카운팅은 많은 책에서 소개되어서 새로운건 없었지만, 카지노가 유리한 이유는 기억에 남습니다. 참가자의 차례가 항상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참가자가 카드 한 장을 쓸데없이 더 요청했다가 목표치를 넘어가면, 딜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기니까요. 그래도 딜러의 카드 숫자가 작으면 딜러가 카드 몇 장을 더 뽑아야 할 가능성이 높아져서 합계가 21이 넘어갈 위험이 커진다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딜러의 카드가 6이면 딜러 쪽이 21을 넘어버릴 확률이 40퍼센트라는군요! 10의 경우에는 그 확률이 반으로 줄어들고요. 따라서 딜러가 6을 갖고 있으면 자신의 카드 합계가 작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결과가 좋을 수 있다는군요. 잘 기억해 두어야겠어요.

곁들여 소개되는 이런저런 정보들도 흥미롭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징크스’처럼요. 이 잡지의 표지에 나온 선수들은 종종 그 후 성적 하락을 겪게 된다는데, 통계학자들은 실제로는 징크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수들이 잡지 표지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그 선수들이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시즌을 보냈기 때문인데, 이는 진정한 실력보다 비정상적인 변동에 의한 것으로 이듬해 성적 하락은 단순히 원래 실력으로 돌아간 것 뿐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현곤 선수의 타격왕 획득같은 경우겠죠.
갬블, 베팅에 관련된 정보도 많습니다. 카지노와의 대결에서 정해진 액수만큼 더 벌 수 있다고 기대될 때 걸어야 할 최적의 액수는 얼마일까요? ‘켈리 기준’이라고 알려진 수학 공식을 따르면 됩니다. 기대 수익을 이기면 받게 될 액수로 나눠서 나온 비율을 전체 자금에도 적용해서 그만큼의 액수를 걸어야 한다는군요. 예를 들어 동전 던지기에서 뒷면이 나오면 2달러를 주는 내기가 있다고 한다면, 켈리 기준은 기대되는 당첨금 50센트를 이겼을 때의 액수인 2달러로 나눈 것이다. 계산 결과는 0. 25로, 이는 이용 가능한 자금의 4분의 1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론상으로는 이만큼을 걸면 적절한 수익이 보장되는 동시에 자금 손실의 위험성이 제한된다는 겁니다.

이런 류의 책답게 번역이 그렇게 좋지는 못하고, 아무래도 내용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도판은 아예 없다시피하고요.
그래도 재미와 정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도박을 좋아하고, 이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읽는다고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2015/05/20

멀리 돌아가는 히나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2.5점

멀리 돌아가는 히나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고전부 시리즈" 네번째.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단편집입니다. 가을, 겨울을 거쳐 봄방학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고 있죠.

각 이야기별 줄거리 및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은 간략하게"

가미야마 고등학교 7대 불가사의 중 첫 번째라는 "비밀클럽의 권유 메모"를 찾는 내용입니다. 소박한 학교 관련 일상계 소품으로 추리적으로도 별다른건 없습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터에"라는, 브라운 신부 단편 "브라운 신부의 옛날 이야기"에서도 인용되었던 격언이 핵심이지요.

그래도 이야기 서두에 등장하는 음악실 괴담에서부터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호타로의 행동이 잘 연결되는 결말 부분의 반전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상계도 이런 반전이 가능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에요. 사토시도 의외로 정곡을 찔러서 만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요. 여기에 음악실 괴담까지 해결해주기 때문에 여러모로 풍성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추리지만 이런 게 고등학교 무대에 적합한 트릭이겠죠. 여기가 뭐 부동고교도 아니니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일상계 왕도를 걷는 작품이에요. 시리즈 팬에게 여러 가지 재미를 선사해 주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대죄를 짓다"

수학선생님이 진도를 착각한 이유에 대한 아주 짤막한 이야기. 진상은 소문자 a와 d를 착각했다는 사소하고 별거 아닌 것입니다. 그냥 화를 낸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지탄다의 생각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그것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과연 화를 내는 것도 에너지 낭비인 건지 좀 궁금하네요. 별 내용이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정체 알고 보니"

고전부원들이 온천 여행을 떠나는데 숙소인 여관에서 지탄다와 마야카가 목매달아 죽은 시체의 유령을 본다는 이야기. "고전부" 시리즈 추리의 핵심, 즉 "신경쓰이는" 지탄다를 납득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게 잘 드러납니다. 진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추리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전달되는 단서들을 조합하여 나름의 합리적으로 설명해주기는 합니다. 유카타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뭐 그런 변수까지 다 등장시키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겠지요.

"고전부" 시리즈의 핵심을 꿴다는 측면에서 꼭 봐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기억이 있는 자는"

"10월 31일, 역 앞 고분도에서 물건을 산 기억이 있는 자는 지금 즉시 교무실 시바자키한테 와라." 라는 교내 방송에 대한 호타로의 추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누군가가 한 말을 추리해서 의외로 숨겨져 있는 범죄에 대한 진상을 파헤친다는 건 "9마일은 너무 멀다"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진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호타로가 지탄다를 납득시켜 승부에 이기기 위한, 순수한 추론일 뿐이거든요. 몇 가지 증거, 즉 방과 후에 호출 방송을 한 것, 학생지도부가 아니라 교감이 불렀다는 것, 10월 31일이라고 날짜를 지칭한 것, 방송을 두 번 반복하지 않은 것 등만 가지고 추론을 이끌어내는 호타로의 솜씨는 인상적이지만 진상이 위조지폐와 관련된 범죄라는 것은 비약이 너무 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새해 문 많이 열려라"

새해 참배에서 창고에 갇히게 된 호타로와 지탄다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 너무 추운 날에 남녀 단 둘이서 신사 창고에 갇힌다는 설정은 만화스럽습니다. 궁지에 몰리고 별다른 수단이 없는 둘이 가진 몇 가지의 소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펼쳐지는 과정은 일종의 모험담이라고 봐도 될 테고요. 이전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팥을 담은 주머니 양 끝을 묶어 전달했다"는 고사를 효과적으로 써먹는건 좋았습니다. Side라는 부제로 구분하여 이바라와 사토시 시점, 호타로와 지탄다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는 "이니시에이션 러브" 같은 전개도 독특했고요.

그러나 유실물이 무녀 아르바이트 중인 마야카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운에 의지한 작전이라는 것, 창고에 갇힌 시점에서 지탄다의 체면을 그렇게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 잘 납득이 안 된다는 것, 무엇보다도 "고전부" 시리즈의 핵심인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계로 보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제 초콜릿 사건"

이바라 마야카가 사토시에게 주려던 초콜릿이 고전부실에서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별 건 없지만 고등학생의 순진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 즉 집착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면 더 편한 마음으로 지내던 사토시가 마야카에게 집착해야 하는 딜레마를 다룬 이야기라 생각하고 보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별로라 잘 와닿지는 않더군요. 특이한 캐릭터를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지만, 이런 류의 평범한 일상계 사랑이야기에는 적합한 캐릭터들은 아닌 탓입니다. 일상계라면 보다 일상계다운 주인공이 나와 주는 것이 훨씬 좋았을 거예요. 또 에너지 절약 주의, 즉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는다는 호타로만큼이나 특이한 사상을 가진 사토시 같은 고등학생이 실존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기도 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

표제작. 제목 그대로 히나 축제에서 히나 인형(으로 분장한 지탄다)이 다리에 생긴 문제로 멀리 돌아가게 된 경위를 밝혀내는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

그러나 이 추리는 곁가지일 뿐이고 내용은 히나 인형 옆에서 우산을 받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호타로와,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지탄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 편의 사토시의 심리묘사보다는 호타로 묘사가 괜찮아서 그런대로 괜찮게 읽혔습니다. 사토시는 3인칭이고 호타로는 1인칭인 덕분입니다. 훨씬 말랑말랑하고 귀엽고, 여튼 좋았어요.

아울러 히나 인형이 돌아가게 된 계기 역시 일상계답게 괜찮았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럴듯했거든요. 공정한 정보 제공도 돋보였고 말이죠. 별점은 3점. 묘사, 전개, 추리적인 부분 모두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일상계 작품다운, 평범하게 재미있는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챙겨볼 만한 시리즈임에는 분명해요. 이 시리즈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호타로와 지탄다의 관계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너무너무 궁금해집니다. 후속권이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

2016/06/25

넨도nendo의 문제해결연구소 - 사토 오오키 / 정영희 : 별점 3점

넨도nendo의 문제해결연구소 - 6점
사토 오오키 지음, 정영희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현재 가장 각광받는 일본 디자인 회사 넨도의 오너 디자이너 사토 오오키의 잡재 연재글을 모아 놓은 에세이집입니다. 다양한 내용을 짧은 분량 안에 잘 담고 있으며, 전달하려는 주제가 명확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나 디자인 방법론에 대한 글들 - 어떻게 디자인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떻게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 하는지 등 - 은 사례 중심인데 새겨들을만한 내용이 많더군요. 잘 나가는 디자이너다운 생각들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새로운 콘셉트의 상품개발이라고 해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하겠다는 것은 위험하다.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할 이상적인 감각은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아직까지는 없었던 것'을 '보충한다'는 정도의 감각이다. 예를 들자면 시력 보호를 위한 '컴퓨터용 안경'이나 '지워지는 볼펜' 같은 것.
  2. 일단 해본다. 할 수 있을까, 없을까와는 별도로 반드시 그 안에 새로운 발견이 있다.
  3. 세계 일류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밀려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기 영역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영역을 사수하는 것이 일류의 필수 조건이다.
  4. 센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좋아하느냐의 여부이다. 투입한 시간의 양이 해결을 좌우한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연습을 하루 거르면 그것을 회복하는데 3일이나 걸린다고 하지 않은가.
  5. 기회란 기본적으로 여자와 같다. 한눈팔지 않고 하나의 일에 몰두해 있다 보면 질투심 많은 기회는 내가 있는 곳으로 기꺼이 찾아온다. 반대로 늘 기회만 엿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6. 디자이너에게는 독창성, 기발한 발상만큼 결단력이 중요하다. 결단의 요령은 '틀려도 괜찮으니 가능한 빠른 결단을 내리는 것.'
  7. 과제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눈 앞에 드러나는 문제보다 애초에 왜 그 문제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아보라.
  8. 디자이너는 누군가가 본 적 있는 것을 만드는 사람도,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드는 사람도 아닌, 누구나 본 적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다.

실제 사례로 수록된 디자인 작품들도 흥미롭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종이 블록'입니다. 잡지 부록으로 의뢰받았는데 조건이 까다롭더군요. "종이를 사용하여 입체로 조립할 수 있는데, 조립하기 쉽고 조립하기 전에도 지면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의뢰거든요. 결과물은 "평면이지만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종이 블록"입니다. 사진만 보아도 의뢰를 100% 충족시키는 그럴듯한 결과물이더군요! 그 외 코카 콜라 식기라던가 하나로 합쳐지는 젓가락 등도 인상적이었고요.

이러한 내용들을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게 써내려간 글 솜씨도 인상적입니다. 누군가에게 '한수 가르쳐 주겠다'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디자인의 기본 사상이 확실히 '배려'에 기초해 있구나 싶었어요.

책의 장정, 디자인도 저자와 주제에 걸맞게 괜찮은 편입니다. 사토 오오키와 넨도의 작품 도판이 부족한 것은 좀 아쉽지만요.

사토 오오키라는 디자이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런 글을 쓰고, 이렇게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라면 분명 좋은 디자이너일 것이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나이 탓인지 디자인 에세이에서는 최고봉인 하라 켄야 만큼의 깊이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이런 디자이너와 함께 일할 기회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무 전방위적으로 다작을 하는 것은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얻을게 많으니까요. 현업 디자이너이시라도 마찬가지고요. 저 개인적으로도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얻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이런 글, 읽는 독자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을 써 보고 싶네요.

2015/02/24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 로버트 템플 / 과학세대 : 별점 3점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 6점
로버트 템플 지음, 조지프 니덤 서문, 과학세대 옮김/까치글방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저본으로 하여, 중국이 3,000년 동안 세계 최초로 이룩한 발명과 발견을 200여 점의 도판과 함께 농업, 공학, 수학, 의학, 음악, 물리학, 수송, 전쟁기술 등 100가지 항목으로 편집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책 소개 인용)

중국 고대 발명품과 발견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 이런 류의 '읽을 수 있는 백과사전'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 책도 기본적인 재미는 물론 설득력을 높여주는 도판이 많이 실려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 항목도 100가지나 되어 내용도 풍부했고요.

내용이 많다 보니 요약은 어렵고, 인상 깊었던 것 몇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 복동식 피스톤 풀무 :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기계같은 느낌의 이름인데 피스톤을 밀고 당길때 모두 바람이 나오게 하는 것이 전부인 일종의 자동 밸브. 그러나 이 단순한 발명품이 기원전 4~5세기 (!)에 등장한 덕분에 중국의 모든 산업 (특히 제철과 같은 야금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니 허투루 볼건 아닙니다.
  • 크랭크 핸들 : 지금도 이런 저런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레바퀴 측면에 막대기를 끼워 손잡이로 삼아 돌리게 만든 발명품. 비슷한 것을 서양에서 생각해 내기까지는 무려 1,10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어떻게보면 참으로 단순한 것인데... 의외였어요.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것이었을까요?
  • 천연 가스 채굴 :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천연 가스를 채굴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순전히 인력으로 평균 900미터에 달하는 구멍을 팠다는 것 (주로 소금 채굴을 위해), 여기서 나오는 가스를 잘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고안 역시 대단했습니다. 잘만 활용했더라면 고대 중국을 무대로 한 스팀 펑크 스타일 SF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대나무에 저장한 천연가스를 활용한 동력원!
  • 칠 : 옻칠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소재인데 일종의 니스로 플라스틱과 같다고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태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특유의 보존력, 강도, 내구성을 볼 때 그렇구나 싶기도 했어요.
  • 성냥 : 여태 서양의 누군가 개발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최초는 북제 왕조의 여관들이 유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 성 호르몬 추출 : 소변에서 성 호르몬을 추출했다는 것이 기원전 125년전의 회남왕의 서적에 적혀있다고 합니다! 불을 이용한 승화, 강제 증발 이외에도 증류수를 넣은 뒤 태양열로 자연 증발시켜 얻었다고 하네요. 아울러 남녀 소변을 구별하여 제조하고 싶은 호르몬 종류에 따라 소변 혼합 비율을 바꾸었기 때문에 결과물인 "추석"은 어느 경우는 안드로겐 (남성 호르몬)이 많았고 어느 경우는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이 많았다고도 합니다.
  • 지리 식물학 : '특정 광물질이 많아 다른 식물들은 잘 자라지 못하는 토양에서도 번성하는 식물들을 가지고 탐광하는 것'으로 이런 학문이 있다는 것부터 처음 안 사실입니다. 고서 "산해경"에 "혜당은 금광 근처에서 자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근거이며, 이후 1421년의 "경신옥책"에서는 금은 순무에, 은은 수양버들에, 동은 인도산 괭이밥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한 학문으로 자리잡은 듯 합니다. 광물의 미량원소가 실제로 특정 식물에 존재하며 거기서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 참고로 예전에 전파과학사 문고 "과학사의 뒷얘기"에 실려있던, 토마스 챌러너 경이 요크셔에서 명반석 광상을 발견한 것이 유럽 최초의 지리식물학적 탐광 사례라고 합니다. 1600년 경의 일이죠.
  • 지진계 : "갤러리 페이크"에도 나왔던, 용 입의 구슬이 두꺼비로 떨어지는 기계로 도판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실려있습니다. 실제 어떻게 동작했는지까지 알려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지진"과 "단순 진동"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지진계 옆에서 아이가 뛰어놀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인쇄 : 중국에서 인쇄는 대단히 활발했다고 하는데 10세기 어느 불교도 문집은 지금도 40만부 이상이나 남아있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얼마나 찍었을지 상상도 안되네요. 40만부 이상 남아있는 것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골동품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도 궁금하고요. 인쇄에 관련된 상세한 설명 - 인쇄에는 유실수를 사용한다. 침엽수에 포함된 수지는 먹이 균일하게 칠해지는데 방해 작용을 하기 때문 등 - 도 볼거리였어요.

마지막으로 "대나무"가 서양에서는 나지 않아서 중국의 획기적인 신기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시각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만큼 튼튼하면서도 속이 비어있어서 가벼운 재료가 없었기 때문으로, 대표적인 예로는 선박의 "활대"를 들고 있는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도 있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은 재미없는 부분은 너무 재미없다는 것, 그리고 조지프 니덤의 원저를 베이스로 새롭게 추가하고 엮은 내용이라고 하는데 억측이 상당히 많아서 모든 것을 믿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해당 기술이나 발견의 시기를 단어나 문장 몇마디 가지고 굉장히 오래전 것으로 정의한다던가, 유럽에서의 발견도 중국인에게서 유래되었다고 추측하는 식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사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가 중국인이 먼저 개발했던 석궁을 보고 도시 방어용 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 중국에서 "대진"이라고 불리운 시리아와 교역을 하였다는 것을 증거로 대는 정도인데 이 정도는 증거도 뭐도 아니죠. 지리 식물학 이야기에서 고서 "산해경"에 "혜당은 금광 근처에서 자란다"라고 기록된게 근거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근거치고는 많이 약해요. 실제 혜당이 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말이죠. "문자"에 쓰여진, "옥이 묻힌 곳에는 나뭇가지가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글이 단순 지리 식물학이 아니라 식물의 생리적 상태까지 간파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고요. 이런 억측은 우리에게는 동북공정과 같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어서 더욱 신경이 쓰이네요. 이 책에 따르면 불국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중국에서는 자기들 유물이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아울러 내용에서 단순 년도만 표기하지 말고 해당 시기 중국의 왕조는 무엇이었을지 정도만이라도 함께 써주는 배려가 없는 것도 아쉬웠으며, 번역도 괜찮은 편이지만 장기 이야기에서 "포"를 "로켓 소년"이라고 번역한 것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한국어로 재 번역할 때 당연히 걸러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을까요? 중국 장기는 뭐가 조금 다른건지...

그래도 관련된 사료도 충실하고 도판도 만족스러운 수준일 뿐더러 첫 발견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은 수긍이 가기에 아주 폄하하기는 어렵군요.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 50% 할인 가격에 구입했기에 더 만족감도 크고요.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책보다는 영상 다큐멘터리로 보는게 더 낫지 싶긴 하네요.

2010/02/04

Flash는 어째서 미움받는가

 원문은 일본의 컬럼입니다. 형 블로그에 번역한 글이 있어 퍼옵니다. 원문은 여기서

<<Flash는 어째서 미움받는가?>> - 번역

엔드유저의 인터넷 접속환경이 고속화된 현재, 동영상이나 사운드 요소를 포함한 웹 콘텐츠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특히 플랫폼에 의존적이지 않으면서, 플레이어 보급율도 높은 Flash는 (웹 콘텐츠 열람을 위해) 스탠다드한 수단으로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어도비 사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에서의 Flash 플레이어 보급율은 99%가까이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Flash는 폭넓게,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되고 있지만, 사용성(Usability)란 관점에서 다시 보면 여러가지 문제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 앞서 먼저 “사용성(Usability)라는 건 뭐냐”는 것부터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용성]이란 단어의 의미를 “(대다수 사용자들이) 쓰기 쉬운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런데 사용성, 즉 usability란 단어는 Use + able(명사형) 으로 이뤄진 단어다. 즉 웹 사용성은, “접근하고자 하는 웹 사이트가 실제로 쓸만한 거냐?”라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ISO9241-11이란 국제규격에선 사용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Extent to which a product can be used by specified users to achieve specified goals with effectiveness, efficiency and satisfaction in a specified context of use(특정한 이용상황에서, 어떤 제품을 특정한 사용자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때, 유효성, 효율성, 만족도의 정도)라는 것이다.
즉, 사용성을 평가할 때에는 “특정”한 사용자, “특정”한 목표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다수 유저들이) 쓰기 쉬운 것”이 되도록 개선하면 OK – 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쓰기 쉬운 것(Easy to use)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용성이란 개념의 전부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용성의 향상이나 달성 정도에 관해서 논의할 때에는 “(그 웹사이트에서 타겟으로 하고 있는) 사용자가 문제 없이 사이트에 접근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사용자가 만족할 수 있는지”를 평가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

사용자가 웹사이트를 통해서 뭔가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웹 사이트 자체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을 또 한 번 강조해 두고 싶은 이유는, Flash 제작자들은 때때로 “멋지고 아름다운” Flash 어플리케이션을 “작품으로써” 만드는 일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용자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정보를 얻고, 서비스를 받고, 물건을 사는 등)을 부드럽게 달성하는 게 최우선사항이다. 유저 인터페이스는 Flash 어플리케이션이건 뭐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플래쉬 제작자들에겐 좀 충격적일지도 모를 사실인데 - 필자 자신이 여태까지 관련되어 왔던 수많은 사용성 개선 프로젝트 중에서 실시한 유저 테스트로 얻은 [사용자 행동 사례]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Flash “이기 때문에” 좋았다, 만족했다는 사용자는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물론 Flash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는 사용자 경험을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Flash를 썼다는 이유만으로는 사용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Flash “이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끼고, 곧 건너뛰기(Skip) 버튼을 누르는 유저는 뜻밖에도 매우 많았다. 건너뛰기를 위한 클릭 버튼이 보이지 않는 경우, 사용자들은 짜증을 냈다.
(보충설명을 해 두지만, 사용자 테스트는 사용성 평가 수법의 하나다. 사용자에게 평가 대상이 되는 웹사이트를 쓰게 하고, 그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사용자 경험은, 사용자가 웹사이트를 통해 얻은 체험이 유의미했는지(잘 됐다, 재미있었다, 열중했다 등등)을 평가하는 가치기준이다.)

상기와 같은 사용자 행동 사례가 있는 한편, 웹 사이트를 새로 만들 거나 리뉴얼할 때 웹사이트 운영자(클라이언트)가 웹에이전시로부터 샘플을 받을 때에는 Flash를 쓴 웹 디자인 쪽이 높은 평가를 받는 케이스가 자주 있다.
일을 의뢰하는 기업 입장에선 플래쉬를 쓴 웹사이트 쪽이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경영자들에게는 “웹사이트를 마케팅 툴로 보는 안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위에서 거론한 사용자 행동과의 갭이 크게 벌어지게 된다. 덕분에 큰 돈을 들여 Flash로 멋진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도 사용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는 케이스가 끊이질 않는다.
지금까진 이런 클라이언트 기업측의 “무지함”를 이용해서 일을 수주받아온 Flash 제작자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프로페셔널한 제작자들에게 “웹사이트란 것은 최종적으로 누굴 위한 것인가”라고 묻고 싶다. 웹사이트가 사용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란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히 유저(클라이언트 기업에게 있어선 손님)의 편의성을 제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빠르건 늦건 – 언젠가는 웹사이트의 비용대비 효과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클라이언트 기업측의 의식도 변하게 될 것이다. 여태껏 팔짱만 낀 채 클라이언트 기업의 “무지함”을 이용해 먹던 Flash 제작자들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실제 Flash가 유저에게 미움받는 사례를 5가지 소개한다. 이것들이 “미움받는 이유”는 전부 사용자 자신의 목적달성에 크건 적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즉, 사용성이 손상받기 때문이다.

첫째는 “무의미한 스플래쉬 페이지”다. 예를 들어 언어 선택이나 제품 선택 등의 선택 페이지만 있으면 충분할 것을, 일부러 1페이지 독립된 스플래쉬 페이지를 만들어 넣는 것이다. 이것은 사용자에게 불필요한 스텝을 강요하게 될 뿐이다.
둘째는 “클릭 후 피드백에 쓸데없이 시간이 걸리는 것(Now Loading을 포함하여))이다”. 일부러 사용자를 안달나게 하려고 이런 효과를 연출하는 경우도 있는데, 웹사이트는 TV하곤 달라서 사용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사용자를 안달나게 하긴커녕 짜증만 나게 만든다.
셋째는 “텍스트가 TV 광고처럼 조금씩 나타나는 연출”이다. 웹사이트에서, 사용자는 텍스트를 빠르게 읽으며 자신이 찾는 “키워드”에 부합되는지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런 연출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그 텍스트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메시지일 경우, 기껏 기다리고 있던 사용자에게 최악의 인상을 심어줄 뿐이다.
네번째는 “마우스의 의도치않은 이동으로 어떤 장소에 우연히 마우스오버를 하면 사용자가 예기치못했던 행동을 일으켜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우스를 움직였더니 멋대로 메뉴가 열린다거나 해서, 사용자가 보려고 했던 부분을 감춰버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다섯번째는, “사용자의 관습을 무시한, 지나치게 참신한 유저 인터페이스”다. 예를 들어 클릭하지 않고 마우스오버를 하는 것만으로 콘텐츠 내용이 바뀐다거나, 또는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건 대부분 사용자들에게 있어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반응인 것이다. 따라서 깜짝 놀라는 동시에 상황파악을 할 때까지 잠시 동안 패닉 상태에 빠지곤 한다.

웹 사용성의 제 1인자, 야콥 닐센 씨는 2000년에 발표한 컬럼에서 “플래쉬는 99%유해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보면 99%는 역시 너무 지나친 숫자라고 생각되지만, 위에서 거론한 사용자에의 배려를 무시한 제작자(운영자)의 자기만족이 아직도 많은 Flash 어플리케이션에 존재하고 있다. 덕분에 이렇게 사용자와의 사이에 많은 갭이 생겨나고 말았다. Flash 제작자와 사이트는 운영자는 이러한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음 연재분 예고는 생략. 이후 연재분에선 이렇게저렇게 해서 플래쉬의 특성을 살리고 어찌저찌 해서 높은 사용성을 얻을 수 있다는 컬럼이 이어지지만, 거기까지 번역하진 않았다.)

과거 플래쉬를 주로 이용한 UI 시스템과 인터넷 페이지를 제작하던 에이전시 근무 경험을 토대로 상기 내용에 사견을 달자면, 100% 맞는 말입니다. 플래쉬는 인터랙티브한 효과 이외에는 사용자에게 주는 것이 하나도 없죠. 물론 영화 홈페이지와 같이 인터랙티브한 재미를 더욱 중시하는 사이트에서는 플래쉬가 분명 효과적인 Tool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CPU점유율을 높일 수 밖에 없는 현재의 플래쉬 특성 상 장기적으로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겠죠.

특히 GUI에 있어서는 OS에 특화된 임베디드 방식 최적화 솔루션이 칩셋이나 OS별로 제공되는 만큼, 플래쉬도 바짝 긴장하고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현재의 독점적인 구조를 가져가는 것은 점점 힘들어 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2021/11/19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효진 : 별점 1.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이소다 가즈이치 그림,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선정한 밀실 트릭 걸작 40편을 일러스트레이터 이소다 가즈이치의 그림과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몰랐던 작품에 대해 알게 된게 가장 큰 수확입니다. 어떤 트릭이 사용되었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글솜씨와 저는 별로였던 작품에 대해 호평하는 이유 등 아리스가와 아리스만의 시각도 볼 만 했고요. 저는 폄하했던 작품에 대해 높이 평가한 글들은 저 역시 리뷰어로서 많은 공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다른 점들은 거의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런 리뷰 모음인 줄은 몰랐던 탓입니다. 밀실 트릭에 대한 분류와 대표작 소개 등, 이론적으로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입했는데 예상과 너무 다르더군요. 

게다가 소개된 트릭의 비밀을 완벽하게 숨기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서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초대장' 임을 분명히 밝히며 앞으로 이 작품을 읽어보라는 취지의 리뷰이니 이렇게 쓴 건 당연합니다만... 절반에 가까운 작품이 국내 출간되지 않은게 문제지요. 국내에는 서양 미스터리 20선 중에서 11편 - 빅 보우 미스터리, 13호 독방의 문제, 노란 방의 비밀,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에 수록), 시계 종이 여덟 번 울릴 때, 개의 계시, 세 개의 관,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킹은 죽었다, 벌거벗은 태양, 투표 부스의 수수께끼 ("샘 호손 박사의 불가능 사건집" 수록) -, 일본 미스터리 20 + 1 중에서도 11편 - D 언덕의 살인사건, 거미, 완전 범죄, 등대귀, 혼진 살인 사건, 문신 살인 사건, 호로보의 신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에 수록), 천외소실 사건, 인형은 텐트에서 추리한다, 녹색 문은 위험, 모든 것이 F가 된다 - 이 출간되어 있습니다(2021년 11월 기준). 41편 중 무려 19편이 미출간된 상황이에요. 이래서야 거의 절반 가까이는 정답을 알래야 알 수 없는 퀴즈집을 읽은 셈이라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소개된 작품들이 선정된 이유도 여러가지를 대고 있지만, 결국 트릭만 멋지면 다른건 다 간과하는 듯한 리뷰도 불만스럽습니다. "녹색문은 위험" 같은 작품을 선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작품 속 트릭은 기발하기만 할 뿐 현실성은 전혀 없거든요. 하긴, 밀실 자체가 범인이 일부러 만들 이유가 없다는 점을 너무 대충 넘어가는 것 부터가 이상해요. 애초에 밀실 '살인'은 말이 안됩니다. 밀실에서 죽었다면 자살이어야죠.

수록 일러스트들도 실망스럽습니다. "거미" 속 거미 연구소처럼 몇몇 작품 속 건물에 대한 일러스트는 나름 반가왔지만 대체로 간단한 평면도와 밀실이 있는 건물의 간략한 스케치 수준에 불과해서, 예쁘기만할 뿐 가치는 없습니다. 책도 꼼꼼히 읽고, 관련 자료도 열심히 수집했다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설명이 무의미하게 여겨질 정도로요. 이왕 밀실 트릭 해설을 위한 그림을 싣는다면, 트릭을 설명하는 용도가 훨씬 좋았을거에요.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의 복잡한, 기차 내부 장치들을 활용하여 만든 장치 트릭을 그려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게 '밀실 대도감' 취지에도 더 잘 맞았을테고요. 이런 문제에 더해 3만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내용을 떠나 분량, 완성도 등 모든 면에서 이 가격을 받을 책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조금 조사해봤더니 저와 같은 이유 - 단순한 리뷰 모음, 트릭 설명 없음, 무의미한 그림들 - 로 이 책에 실망하신 분들이 많더군요. 저도 좀 조사해보고 구입할걸 그랬습니다.

마지막으로,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인터넷을 뒤져 알아낸,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작품들 트릭을 몇 개 찾아서 소개드립니다. 당연히 스포일러입니다. 혹시라도 국내 출간에 기대를 걸고 계시다면, 절대 읽지 마세요.

"밀실의 수행자" 비록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니지만 트릭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의 명탐정 50인"에 소개된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소년탐정 김전일"의 "이진관촌 살인사건"에서도 살짝 비틀어 사용되기도 했고요. 진상은 인도인 하인들이 위의 창을 통해 침대를 천장까지 끌어올렸던 겁니다. 백작은 고소공포증이 있던 탓에 침대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된 거지요.

"엔젤 가의 살인" 엘리베이터 천장 창문을 통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 칼이 떨어진다는 장치 트릭. 작품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칼을 3층 천정쪽에 묶은 끈으로 엘리베이터 천정에 매달아 놓으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끈이 끊어지고, 칼이 떨어져 아래 사람에게 꽂힌다는 걸까요?

"고블린 숲의 비밀" 뒷문 쪽에 있던 사촌이 잽싸게 집에 들어가 비키를 죽이고, 방수 시트 위에서 잽싸게 시체를 해체해서 짐 속에 나누어 넣었다. 그리고 뒤따라 온 사촌이 비키를 찾는 척 정문으로 들어간 뒤 뒷문을 잠근 것. 그리고 짐을 차에 싣고 돌아간게 진상이었다.

"지미니 크리켓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일즈가 범인이었다. 그는 경찰복을 입고 큰아버지를 살해한 후 방 안에 숨어있다가, 루퍼트가 들어온 뒤에 경찰들과 함께 들어온 것처럼 속였던 것. 납치했던 경찰관을 죽였던건 경찰복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루팡 3세 애니메이션에도 사용된 트릭이라지요. 조금 조사해보니, 자일즈와 노인의 관계에 대한 반전도 인상적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51번째 밀실" 범인이 지붕을 떼어내고 탈출하는 트릭.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네요. 범행을 저지른 동기 쪽이 더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종이 울렸다" 조각상 밑에 쐐기를 꽂아 놓아 쓰러지기 쉽게 해 놓은 뒤, 창 밖에서 푸코의 진자를 움직이면, 진자가 조각상에 맞아 쓰러지게 만든 것. 설명만 읽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트릭의 작동 원리를 그려 주었어야죠!

"보이지 않는 그린" 살해 장소인 화장실의 작은 환기구로 고무 보트를 들여놓은 뒤, 좁은 화장실 안에서 고무보트를 부풀려 심장 빌작을 일으킨 것.

"다카마가하라의 범죄" 현인신은 신이라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녀가 조서를 들고 2층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보초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 찾아본 결과로는 이러하던데, 이게 말이 되나요?

"구혼의 밀실" 어린 아이가 범인. 피해자와 범인이 협력하여, 피해자 어깨 위로 범인이 올라가서 3미터 이상 높이였던 천장 채광창으로 탈출한 것.

"로웰성의 밀실" 만화책 37페이지에 있던 엘로라를 맞은편 36페이지에 있던 홀리가 손을 뻗어 살해한 것. 3차원의 인물이 2차원에서 저지른 사건으로, 이소다 씨의 일러스트가 나름 힌트가 되기는 하네요. 이걸 트릭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대도감

2015/11/24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유키는 사고로 죽은 약혼녀 도모미의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녀 가족의 산장으로 향했다. 도모미의 부모, 오빠와 친지 등 모두 여덟 명이 산장에 모인 당일, 두 명의 은행 강도가 침입해서 그들 모두를 감금했다. 은행 강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중, 도모미의 사촌 동생 유키에가 칼에 찔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꽤 인기 있는 작품인데 읽는게 늦었네요. 부유한 가족, 그리고 그들과 엮인 인물들이 모인 폐쇄된 산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흥미진진한 본격 추리물입니다. 

두 개의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사건, 즉 도모미의 죽음은 마지막에서야 진상이 설명될 뿐더러 범인은 관계자 증언밖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지요. 허나 두 번째 사건인 유키에 살인 사건은 고전 본격물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기묘한 범죄, 용의자는 공간 내 모두라는 상황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유키에를 살해하는건 인질인 아쓰코 외의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상황, 즉 레이코가 몰래 적은 SOS를 지우고 타이머를 망가뜨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 뒤 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추리의 흐름이 설득력 높기 때문입니다. 타이머 관련 트릭 - 범인이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시간만 바꿔 놓은 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망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부순 것 - 도 간단하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탓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노부히코의 마지막 증언 - 레이코가 일기 페이지를 입에 넣었으며 그 페이지에 진상이 적혀 있을 것이다 - 부터가 그러합니다. 칼에 찔렸는데 죽어가면서도 일기장의 특정 페이지를 찢어서 입에 넣는다? 인간의 정신력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이건 무리지요. 그리고 일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필케이스 약통의 약이 정상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큰 증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부히코가 감금된 상태에서 유키에를 죽여야 하는 타당성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누군가를 살해한다? 탈출 후 유키에를 따로 손보는 게 상식적입니다. 최소한 풀려난 뒤 죽이고, 범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게 훨씬 나았겠지요. 진범을 밝히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후지의 협박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격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밝혀냈다고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노부히코가 자살한 시점에서는 협박할 건덕지가 사라져 버렸으니 다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하긴, 이 모든 게 거대한 연극이니 작위적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그보다는 다카유키를 옭아매기 위해 이런 추리쇼를 펼친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단지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도모미의 행동을 유키에가 보고 들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했을까요? 다른 추리 소설에서는 복수를 하고도 남을 증거인데 말이지요. 기껏 그걸 보강하려고 거대한 연극을 꾸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범행 증명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성공 가능성도 떨어지는 연극을 벌이는 것 보다는, 산장에서 다카유키를 제압하고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게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분 등 모든 측면에서 나았을 겁니다.
마지막에 노부히코를 다카유키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즉 연극이 실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카유키 역시 그 순간에 노부히코를 죽인다 해도 빠져나가는건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발악을 하는게 납득이 되지도 않았고요. 약혼녀를 죽일 때에도 남이 슬쩍 보고 다른 약임을 눈치챌 수 있는 약으로 바꿔칠 정도로 무신경한 놈이니 이런 대책 없는 행동도 당연하다고 본 걸까요?

아울러 상황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트린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일 뿐더러 설정이 완전 말도 안 됩니다. 은행 강도 같은 케케묵은 설정이 통할 리 없어요. 핸드폰 세대에게는 도저히 먹힐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읽으면서 후지가 죽은 줄 알았던 레이코고, 그녀가 사람들을 동원해 도모미 사건의 진범을 밝히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였다면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요.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화자라 할 수 있는 다카유키가 도모미 살해를 꾸몄다는 것 역시 반칙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과 스토리를 보면 영상물, 혹은 만화가 더 어울립니다. 유일한 가치라면 모든 잠재적 범죄자들은 최후의 그 순간, 즉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될 때까지는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며 헛짓거리하지 말고 버티라는 교훈 하나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준다는 것? 그 외의 무언가는 딱히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덧붙이자면, 범인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도주 중인 흉악범을 가장하고 범행을 저지른다는 유사 설정의 작품인 소년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 죽이겠다!("비련호 살인사건") 와 누군지는 알지만 확실치 않으니 확인해 보자!("가면산장 살인사건")의 차이인데 저는 "비련호 살인사건" 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그나저나,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리뷰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뷰는 별거 없지만 거의 2주에 걸쳐 썼습니다. 리뷰 완성도도 낮고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이게 한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020/05/01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구리하라 유이치로 / 문승준 : 별점 2.5점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6점
구리하라 유이치로 엮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제목 그대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런 저런 곡들에 대해 해설해 주는 책입니다.
몇 년 전 "애프터 다크"를 읽었을 때, 이런저런 곡들이 무척 많이 소개되어 리뷰에 따로 적어놓았던 적이 있는데, 이런 책이 나올 정도로 다른 작품 역시 많은 곡들이 쓰였네요. 하긴,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제목부터가 비틀즈의 곡 제목일 정도이니 당연하겠지요? 책은 1960년대적 가치관 소멸을 상징한다는 1980년대 이후의 음악들 (주로 팝), 록, , 클래식, 재즈의 5가지 장르로 하루키 작품 속 곡들을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렇게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곡 역시 그리 많지 않았고요. 하지만 짤막한 해설들이 꽤 재미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아는 작품, 아는 곡의 경우는 더욱 반갑더군요.

특히 좋았던건, 곡이 특별한 '상징'이나 '메타포'로 사용된 경우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는 부분들이었습니다. 냇 킹 콜이 불렀다는 'South of border' 소개가 대표적입니다. 노래 속의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멕시코'가 실재하지 않듯이, 이 노래를 냇 킹 콜이 부른 버젼도 실재하지 않고, 그래서 이 곡이 등장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지만 이상하게 현실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판타지를 상징한다는데 이 정보를 알고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부분은 팝 보다는 클래식, 재즈 쪽 소개에 많은 편입니다. 클래식은 저자의 전공 분야인듯 싶고, 재즈는 하루키가 소싯적, 재즈 카페를 운영했을 정도의 재즈 매니아인 덕분이겠지요.

특히 클래식은 곡 마다의 소개도 다른 장르에 비하면 비교적 긴 편이며 내용도 굉장히 충실합니다. 일례로, "태엽갑는 새" 1부의 부제인 "도둑까치"를 통해, 까치의 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마지막에 행복한 결말을 맞는 오페라 "도둑까치"와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며, 각 부마다의 부제 모두 해당되는 오페라와 일맥상통한다는걸 알려주는 식입니다.
단지 곡 뿐만이 아니라, 누가 연주했는지에 따라 각 버젼별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를 드러낸다는 디테일도 아주 좋았습니다. "해변의 카프카" 속 호시노가 듣고 반한 "베토벤 피아노 3중주 제 7번 대공"은 야샤 하이페츠 등 '백만불 트리오' 세 명이 조화따위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연주하는 버젼인데, 오시마 씨가 좋아하는건 앙상블에 주축을 둔 수크 트리오의 잘 정돈된 연주라는게 대표적이지요. 정말 아는만큼 보이는 것 같네요.

재즈의 경우는 곡 자체보다는 그 곡의 발표된 배경이나 연주자의 특징 등 좀 더 깊고 디테일한 정보를 작품과 엮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깊이가 느껴집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A gal in calico'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명하지 않은 1950년대 (1955년) 앨범의 유명하지 않은 곡으로,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배경인 1970년대에서는 이미 잊혀진 앨범입니다. 때문에 이 앨범을 찾는 '나'의 모습은 '나'의 허영심과, 1970년대 은퇴 선언 후 칩거에 들어간 마일스 데이비스의 모습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작가의 의도인건지, 꿈보다 해몽이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은 참 좋네요. 저도 음식과 추리 소설에 대한 책을 썼는데, 이런 내용을 많이 담고 싶었습니다.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 외에도, 하루키 작품과는 무관하지만 이런저런 재미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하루키 작품에서 유독 많이 등장했다는 보비 다린이라는 가수는, 이 책에서 소개한 가정사가 아주 놀라왔어요. 키워준 어머니가 사실은 외할머니이고, 누나가 친어머니였다는데, 하드보일드 막장 드라마에서나 봄 직한 설정이지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등 그 자신의 인생도 파란만장해서, 이 책에서 소개된 대표곡 'Beyond the sea'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게 당연하다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듀란듀란과 보이 조지에 대한 신랄한 비평 - 특히 "댄스 댄스 댄스"에서 '끔찍하다'의 대명사처럼 인용되었다니 - 이 눈에 띄였습니다. 제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밴드이고, 특히 컬쳐 클럽의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는 많이 들었던 곡이었기 때문이거든요. 진짜 팝 애호가라면 좋아하기 힘든 곡일 수는 있지만, 이렇게까지 신랄한 평을 들어야 할 밴드는 아닐텐데, 조금 슬펐습니다.

아는 가수와 곡으로는 밥 딜런, 비치 보이스 소개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밥 딜런이야 시대의 총아였으니 그렇다 쳐도, 비치 보이스는 좀 의외죠? 비치 보이스의 최고 명반인 'Pet sounds'의 일본 소개 당시 야마시타 타츠로가 라이너 노트를 썼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정말 잘 어울린다 싶네요.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공통점이 느껴진다며 시작된 소개와 해설은 모두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비치 보이스의 음악은 죽음, 상실과 연관되는 내용이 많다는데, 이는 밴드의 운명과 브라이언 윌슨의 생애와는 별로 관계없는 작가의 기호일 뿐이라 생각되니까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비치 보이스의 곡에 관련된 작품으로는 도리 미키의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단편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비치 보이스의 불운한 싱글인 'Child of winter'를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비치 보이스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계기로 대학교 동창과 썸을 타는 관계가 되는데, 그녀는 다른 친구의 연인이 됩니다. 그 뒤 졸업을 앞 둔 겨울 방학의 어느날, 그녀가 자취방에 찾아오지만 나는 그녀를 내쫓습니다. 오해받기 싫다는 이유로요. 떠나면서 그녀는 "비치 보이스는 별로 좋아한게 아니었다..."는 말을 남기는, 83년도 단편입니다.

당연히 하루키 작품에 대한 소개, 평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이 멋지게 마무리된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는 사랑이 이루어졌는지, 아니 '나'의 미도리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를 애매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하루키 작품 속 이런저런 곡들을 100곡 채우겠다! 는 의도가 지나친 나머지 무리한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보비 비의 'Rubber ball'에 대한 설명은 지나쳤어요. "1973"에서 이 노래가 1960년을 상징하는 것 처럼 - 1960년, 보비 비가 'Rubber ball'을 부른 해다' - 언급되지만, 1960년 최대의 히트곡은 다른 곡이라고 알려주죠. 이로써 객관적인 의미의 히트곡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사적인 선곡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이는 독자가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곡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여 공감의 회로가 발생한다는데, 설명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을 뿐더러, 이렇게 오타쿠, 매니아만 알 수 있는 기호가 어떻게 공감을 일으킨다는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배경 음악에 지나지 않는 곡에 대한 침소봉대식 소개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곡들은 그냥 제목, 아티스트만 소개하고 작품 소개 및 기타 주변적인 요소에 집중하는데 책의 취지에는 벗어나는 듯 하여 여러모로 별로였습니다. "춤추는 난쟁이" 속 프랭크 시나트라의 "Night and day'가 대표적이죠. 곡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도 없이 4줄 정도의 소개로 그치고, 나머지는 전부 작품에 대한 줄거리와 인용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보 측면에서 나쁘지 않고,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설명도 적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절반 정도 됩니다. 설명도 곡의 장르에 따라 편차가 있는 편이고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셔야 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금 애매한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곡들이 궁금해서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곡들의 연주자, 발표 버젼이 일치하는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비슷은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링크는 여기 입니다.

2023/05/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2. 카라쿠리 미로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2. 카라쿠리 미로
다음 날, 토시오가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이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한 장의 종이를 놓고 몰두하고 있었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차나 마시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 테이블에 가져온 종이를 펼쳤는데, 그것은 소우지의 노트에서 복사한 미로의 개략도였다.
"카츠 군, 이 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이코는 미로가 그려진 그림을 토시오 앞에 내밀었다.
"커피, 커피로, 괜찮지?"
토시오는 우물쭈물 대답하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카츠 군은 카오리와 함께 미로에 들어갔지만, 미로의 중심부에는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형과 복연결형 두 종류가 있는데, 단연결형 미로에서는 한 손을 미로 벽에 대고 진행하면 돼. 손이 항상 벽에 닿아 있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맞지?"
"맞습니다."
"이 미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다지 어려운 미로는 아니야. 그게 문제였어.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미로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네가 시도한 방법으로 미로를 진행해보았어."
마이코는 성냥개비를 꺼내 토시오에게 건넸다.
"자, 이 그림으로 네가 실제로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미로를 통과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 끝을 미로의 왼쪽 벽에 대고 조용히 따라갔다. 성냥개비는 몇 개의 막다른 골목길을 돌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오각형의 중심에 도달했다.
"어때?"
마이코가 미로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도착했어요."
"반대편 벽으로도 시도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를 오른쪽 벽에 대었다. 결과는 같았다. 성냥개비는 똑같이 마지막에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카츠 군은 그때 벽에서 손을 뗀 적은 정말 없었어? 아니면 앞만 보고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걸 빼먹은건 아니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이 그림이 잘못 그려진건 아니야. 실제로 그날 소우지가 미로를 안내할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굽이굽이마다 구석구석 확인해 두었어. 이 미로는 단지 단연결된 미로에 불과해."
"그럼 저는 왜 미로 중심부로 골인하지 못했을까요?"
커피가 나왔다. 마이코는 설탕을 컵에 듬뿍 담아 제대로 섞지도 않고 마셨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꽤나 머리를 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미로로 보여. 하지만 실제로 미로에 서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골인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어.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의 세심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
"첫째, 이 모양에 주목해야 해. 오각형말이야. 이 모양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야."
"오각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요?"
"그래. 이상하게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형태는 삼각형도 아니고, 오각형도 아니야. 언제나 사각형이야. 네모난 집,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침대, 네모난 종이, 네모난 책 ...... 인간이 보통 접하는 대부분의 물건이 네모야. 잘 정비된 도시는 반드시 바둑판의 눈처럼 깔끔한 사각형으로 구분된 길이 붙어 있기도 하고. 길을 잃기 쉬운 길은 그것의 형태와 구분이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각형의 굴곡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사각형의 굴곡으로 인식될 것 같아."
"이 미로의 모든 면이 휘어져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것도 있지. 그리고 또 하나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의 시야를 없애는거야. 미로를 나아가다가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느낌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도록.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
"그랬어요.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햄튼 코트의 미로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일부에 이런 갈림길이 쓰여 있더라고. 하지만 부채꼴 모양으로 장식성은 있을지언정, 나사 저택의 미로처럼 현기증을 유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아. 나사 저택처럼 모든 길에 현기증이 나는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또 이 미로를 자세히 보면........"
마이코는 빨간 연필을 꺼내 미로의 바른 길을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바른 길 말이야. 미로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심부를 향하게 돼. 그래서 당연히 중심부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른 길은 미로의 중심을 등지고 돌아가야만 하는 갈림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 ……. 뭐, 이것은 미로의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건 이렇게 다양한 장치를 담은 미로가 결국 단연결 미로였다는 점이야."
"단연결 미로는 안 됩니까?"
"안 돼지. 카츠군이 시도한 방법, 즉 손을 벽에 대고 나아가는 방법은 미로를 소개하는 책에는 반드시 설명되어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풀 수 있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야. 오각형 등 여러가지 장치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말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저는 미로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죠......"
"그게 핵심이야. 이 미로를 굳이 단연결로 만든 것은, 때로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이 절대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해."
"절대로 골인할 수 없는 장치?"
토시오는 무심코 미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실제로 토요일에 카츠 군이 미로 중심부에 골인하는데 실패했잖아? 그거야말로 단연결 미로 해결 방식으로는 중심부로 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그런가요?"
"다시 한 번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이코는 비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코트를 에그의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나사 저택 안에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웠다.
마이코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라키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나라키 대신 호시자와가 저택에서 나왔다.
"당신이 오면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
호시자와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혼잡한 것 같네."
마이코는 늘어선 차를 보며 말했다.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이 모였어. 사장님을 중심으로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핵심 간부를 두 명이나 잃었으니, 회사로서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일 것이다.
"데츠바씨는 잘 지냈어?"
"건강해 보여. 강인하더군. 아들과 딸을 잃고도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약한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 대단한 분이야."
"마사오 씨를 만나고 싶은데..."
"안 돼."
"안 된다고? 설마, 용의자로 지목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안 돼. 바빠서 말이야."
"언제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용건인가?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나라 공이 그렇게 시켰겠지. 변함없이 융통성 없는 남자로군."
"우리가 알면 안돼는 용건인가?"
"뭐, 됐어. 그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닐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술에 취한것 같은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아.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나쁜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거야."
"경찰이 민간인의 협조를 거부하게 된 건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괜찮지 않아? 호위병이 있어도 상관없어."
호시자와는 마지못해 차를 통과시켰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쉬고 나면 바로 돌아가. 오늘은 마사오 씨와 만날 수 없어."
라며 말렸다.
마이코는 어슬렁어슬렁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호시자와는 한 순경을 붙잡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호위병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정자의 흙에는 아직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흙에 흡수되어 신경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마이코는 정자 앞의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미로 쪽으로 걸어갔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따라 천천히 미로를 돌았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마이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라고 말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토시오도 뒤따라 달렸다. 마이코는 그대로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이코는 미로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확하게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지도대로야."
마이코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카츠 군은 왜 그날 실패했던 걸까?"
마이코는 돌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뭔가 ......."
마이코는 돌로 된 테이블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탁자 밑으로 몸을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성냥개비의 타버린 조각이었다. 끝이 씹혀서 부서져 있었다. 마이코는 지겹다는 듯 성냥개비를 탁자 밑에 버렸다.
"미로 안에 돌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토시오는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 그림에도 제대로 적혀 있어요."
마이코는 그림의 ○표를 가리켰다.
"올바른 길은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도록 되어 있군요."
"맞아. 올바른 길로 지나가면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아. …….잠깐만. 의자 앞을 지나쳤다고?"
마이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날 의자 앞을 지나쳤어?"
"네."
마이코는 지도를 두드렸다.
"이 지도에서는 의자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표시되어 있어."
마이코는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중앙을 벗어나 미로를 거꾸로 따라간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쪽에 타원형의 돌이 보였다.
"의자는 이걸 말하는거지?"
"맞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나는데요."
마이코는 몸을 굽혀 타원형 의자를 면밀히 살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마이코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의 속임수를 알아챈 것 같아."
마이코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다시 미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심부 입구의 울타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울타리의 바로 뒷편에 돌 의자가 놓여 있어."
마이코는 계속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울타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버 같은 것이 나와 있어. 잡아당겨 보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마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울타리는 마치 문처럼 움직여 오각형의 중심부 광장을 꽉 막아 버렸다.
"즉, 의자 앞의 통로가 열려있으면 ……. 이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반대로 이 중심부는 닫힌 방으로 변해버리게 돼지. 여기가 닫히면 더 이상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이코는 다시 한 번 닫혀 방처럼 변해버린 미로의 중심부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기에는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이 장난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토시오는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땅속에서 물이라도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오각형 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에 있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탁자는 튕겨져 나오듯 일어섰고, 탁자 밑에 있던 오각형의 포석이 가라앉으면서 오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구멍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구멍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꽤 깊었고, 돌계단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희미하게 불어왔다.
"이게 뭐죠?"
토시오는 깜짝 놀라며 마이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이야."
마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조경은 인공적인 도원향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었어. 정원에는 이국적인 정자, 분수, 미로, 실물 크기의 자동 인형이 놓여 있고, 동굴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
"이 동굴은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상상으로는 반반인 것 같아. 오나와라는 땅에서는 고대인의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니, 고대인이 살던 동굴을 조금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오나와라는 지명은 다혈(多穴)이라는 뜻의 '오아나(おおあな)'가 사투리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이 큰 돌 탁자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력인가요?"
"전력 따위가 아니야. 수력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들리네요."
"이 동굴은 꽤 넓은 것 같아. 연못의 물이 흘러서 동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저 레버를 당기면 그 물이 한꺼번에 흘러서 그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동굴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나사 저택은 마와리 호도가 만들었지만, 이 동굴은 호도의 아버지인 사쿠조가 만든 것 같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사쿠조는 이상향으로 이 동굴을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닌것 같아. 이 미로부터가 매우 폐쇄적이니까. 단지 재미나 장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장난은 불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동굴이 열려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미로를 닫아놓는 거군요."
"내려가 보자."
마이코는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손전등과 양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다이 씨는 미로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토시오가 놀랐다.
"마와리 가문의 철야 때 만났던 스님이 미로를 만드는 동기도 다양하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어."
마이코는 직접 촛불을 들고 손전등 쪽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지금도 이 미로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군가가 이 미로를 손질한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양초가 필요해. 만약 양초의 불이 꺼지면 산소가 없다는 뜻이니까."
마이코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구멍 옆에 섰다. 동굴의 바람이 불어서 양초의 불이 꺼져버렸다. 마이코는 불을 다시 붙인 뒤 바람을 피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뒤따라가며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돌은 검고 축축하고 가팔랐다. 동굴 안은 따뜻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이코는 돌계단 중간에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의 성냥개비 조각이 떨어져있었다. 동굴의 문이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온걸로 보였다.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계단은 꽤 깊었다.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여섯 장 정도의 넓이의 돌방이 나왔다. 바닥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하얀 거미 같은 벌레들이 도망쳐 나갔다. 석실 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나란히 눈동자처럼 열려 있었다.
"보라고."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마이코는 방금 내려온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박쥐의 손아귀처럼 녹슨 쇠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로 미로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지."
마이코는 막대기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물러섰다,
"지금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지. 호위 아저씨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이코는 두 개의 동굴 안쪽에 촛불을 비췄다.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물론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카츠 군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마이코는 촛불의 반짝임 속에서 섬뜩하게 웃었다.
토시오는 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근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론적으로 풀려고 하네."
마이코는 토시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하지만 두 동굴 어느 쪽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또 한 쪽 손을 벽에 붙이고 가야할까? 이 구멍은 꽤 길 것 같은데?"
"그럼, 우다이 씨는 어느 길이 맞는지 알 수 있나요?"
불만을 품은 듯한 토시오의 목소리에 마이코는 다시 웃었다.
"물론, 왼쪽이야."
마이코는 망설임 없이 왼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꺾는 순서를 메모해 둘까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어."
"그럼 동굴의 길찾기 지도를 찾았나요?"
"그런 것,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천장이 낮아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걸어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이코가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바라보았다.
"왁스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 내 생각이 옳았던 것 같군."
그러다 길이 다소 넓어지고 평탄해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로 접어들었다.
"봐."
마이코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구멍은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를 거야. 한쪽은 벽을 깎은 흔적이 새롭지. 그러니까 이 두 구멍이 생긴,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새로운 구멍은 동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길을 선택하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새로운 구멍은 불완전했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길 순서는 새로운 구멍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요?"
"결국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이코는 얼른 오래된 쪽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의 폭이 넓어지고, 왼쪽에 좁은 도랑이 뚫려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이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상하네. ...... 누군가가 미로의 문을 닫은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걸음을 옮길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 폭포가 있어."
"폭포가? 동굴에?"
토시오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코는 촛불을 들었다. 그 빛 끝에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가느다란 폭포였다.
폭포가 있는 곳은 꽤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석실 양 옆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고, 두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듯한 바위가 있고, 물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표면은 물보라로 빛나고, 떨어지는 물은 도랑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폭포는 두 갈래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각각 뾰족한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접시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고인 물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폭포를 바라보던 마이코가 몸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동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요?"
토시오는 마이코가 선택한 동굴에 전등을 비췄다.
"아하, 동굴의 지도가 있었군요."
마이코가 돌아보았다.
"있었어. 엄청나게 큰 녀석이."
"어디에요?"
마이코는 천장을 가리켰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땅 위에 있었어."
토시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마이코는 양초를 토시오에게 건네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 나사 저택의 주인인 마와리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했다고 하지. 장난감의 창작보다는 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작은 회사였던 츠루슈도를 해바라기 공예라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장난감 나라에나 나올 법한 나사 저택 같은 집을 지었을까?"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요?"
"아니야. 호도는 장사도 잘한걸 보면 굉장히 계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일거야. 변덕스럽게 이런 이상한 건물을 만들지는 않았을테지."
"그럼 또 다른 동기가 있었나요?"
"그래. 나는 나사 저택 같은 기괴한 건물이라면, 정원에 이상한 미로가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있을 거라는게 이유라고 생각해. 만약 일반 가정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봐. 미로만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미로에 집중되었을거야."
"그럼 미로를 만들고 싶어서 호도는 나사 저택을 만든 건가요?"
마이코의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그 미로는 왜 만들었나요?"
토시오는 그때까지 미로를 만들어야만 했던 호도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왜 미로를 만들었을까?"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오각형의 미로 그림을 펼쳤다.
 
"이건 땅에 그린 동굴의 지도인 것 같아."
"지도? ...... 에서도 이 동굴은 오각형이 아니잖아요."
"지도라는건 실물과 똑같은 축척으로 그려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도쿄의 야마노테 선의 지도는 만두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잖아. 즉, 실제 길과 그림이 상대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림은 아무리 변형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나사 저택의 미로와 이 동굴의 길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지."
"위상적?"
"오각형 미로의 입구와 골목을 잇는 길에 밧줄 하나를 놓았다고 하자. 그 밧줄에 갈림길, 즉 막다른 길에도 밧줄을 뻗어 본길과 연결해 주는 거지. 미로 안의 모든 길에 밧줄이 깔렸을 때, 밧줄을 빼내어 양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라고."
"내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융통성 없는 남자네. 로프를 훨씬 더 짧게 만들어서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될 거야."
마이코는 미로 그림을 토시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는 그림의 모서리에 나뭇가지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미로나 동굴의 길을 생각할 때 길의 길고 짧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의 굴곡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길이 아무리 구불구불하고 각이 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다만 문제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지."
"오각형의 미로와 동굴의 길이 같다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갈림길에서는 미로와 같은 방식으로 꺾어 왔던 거군요."
"맞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것 같네."
"동굴의 지도를 그리는 데 왜 이런 엉뚱한 방법을 택한 거죠?"
"호도는 일반인에게 동굴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어. 그런데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놓을 경우,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저택 안에 동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문제가 많지. 그래서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미로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생각해냈던거야."
"미로 자체가 지도였던 거군요"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지상에 크게 그린 거지. 설마 이것이 동굴의 길을 표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숨기려고 한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궁에는 왕과 크로커다일이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호도는 그저 통로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나사 저택 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마이코는 다시 한 번 지도를 훑어본 후 촛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의 굴곡은 점점 심해져 불규칙한 계단과 언덕이 이어졌고, 땅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로 둘러싸인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길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듯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각형의 미로에 대응시키면 E의 지점에 해당되지."
마이코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로의 E 지점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이코는 주변의 바위를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동굴 안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고 해. 물론 다양한 장식도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는 벽면에 많은 불상 등이 새겨져 있었어.”
"이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나요?"
"없군. 보이지 않아. 그냥 맨땅과 흙이 있을 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용주의적인 냄새가 나네요."
마이코는 바위 틈새에 몸을 넣었다.
"오각형의 미로에는 본 길에 대해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 막 여섯 번째를 지나고 있는 중이야. 내 생각대로라면 드디어 출구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 출구에 도달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길은 쉴 새 없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좁은 곳은 몸을 옆으로 눕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처음에 돌계단을 내려왔던 곳과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넓이도 거의 비슷했고,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도 있었다. 토시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는 레버가 없어."
마이코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이코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마이코의 말대로 돌계단 옆에 있던 막대가 이 방에는 없었다. 막대기뿐 아니라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 보자"
마이코가 먼저 서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 중간쯤에 뾰족뾰족한 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두꺼운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녹슨 철제 틀이 끼워져 있고, 나무 껍질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름을 바른 흔적이 있네."
문의 경첩을 보고 있던 마이코가 말했다.
마이코는 문에 살며시 체중을 실었다. 문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마이코는 촛불을 껐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해."
마이코가 작게 말했다. 토시오는 시키는 대로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문 반대편 상황을 살폈다.
마이코는 몇 숨을 쉬고 나서 문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크게 움직였다. 문 반대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희미하고 먼지가 자욱한 방이었다. 사방이 거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빛은 천장 가까이 열린 작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토시오는 어렸을 때 친구 집에 있던 낡은 창고를 떠올렸다. 바로 그 창고 안과 똑같았다. 낡은 인형, 제등, 검은 상자 더미, 큰 화로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무심코 방금 들어온 문을 닫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문은 방에 면한 쪽이 사방의 벽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당황하여 문을 찾으려고 벽을 쓰다듬고 돌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문이 없어졌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말했다. 마이코는 벽의 위아래를 살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마이코는 문이 사라진 곳의 기둥을 세게 잡아당겼다. 기둥과 벽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뒤에 기둥과 벽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코는 문을 다시 닫으면서 오른쪽 벽에 주목했다. 이 벽이 미닫이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마이코가 벽에 손을 얹고 힘을 주자 벽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틈이 나타났다. 마이코는 틈새에 눈을 대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대로군. 데츠바의 방이야."
마이코는 벽을 크게 당겼다. 벽의 구멍 맞은편에 갈색 종이가 걸려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대담함에 놀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종이는 족자야. 이곳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이고. 이 족자는 산수화지. 그날 나는 이 방에서 산수화를 보며 데츠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
마이코는 족자를 치우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이코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
마이코는 신발을 걷어차고 구멍을 빠져나갔다. 토시오도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방.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상 위에 데츠바가 엎드려 있었다. 데츠바는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열린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듯 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10/11/29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 김선영 : 별점 3점

리라장 사건 - 6점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리라장이라 불리는 건물에 일곱 명의 학생이 피서차 방문했다. 서로 친구들이었지만 각자의 사연으로 갈등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대상으로 한 무서운 연쇄 살인극이 시작되는데...

아유카와 데쓰야의 1958년도 발표 작품입니다. "필독 본격 추리 30선"이나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 같은 리스트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전 본격물이지요. '판타스틱'에서 주최한 이벤트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에게 닥친 연쇄 살인이라는 기본 설정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전형적인 일본 고전 본격물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도 1958년이라는 발표 시기 때문에, 기존 고전 본격물과의 차이점도 몇 가지 눈에 띄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리라장'이라는 장소의 존재입니다. 보통 이런 유형의 연쇄 살인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클로즈드 서클'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경찰이 수시로 오갑니다. 심지어 경찰이 리라장에서 함께 거주하기까지 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선보입니다. 경찰의 수사 과정이 탐정보다 훨씬 비중이 높고, 반대로 탐정은 니조와 호시카게 류조의 두 명을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의 매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묘사도 특이했고요.

이런 점을 본다면 고전 본격물에서 트릭의 핵심만 남겨두고 작위성을 덜어낸, 고전 본격물에서 근대 사회파 추리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1950년대로 여전히 고전 본격물 쪽에 더 치우쳐져 있지만,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 다카기 아키미쓰의 "야망의 덫" 등 장르의 주류가 점차 사회파 미스터리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적인 모습에서 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우선, '리라장'이라는 장소와 스페이드 카드로 대표되는 작위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용의자가 축소되고 특정될 수밖에 없는 외딴 별장의 휴가 여행을 범행 무대로 삼기보다는, 도쿄에서 사고로 위장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인게 당연한데 말이지요. 탐정 캐릭터의 매력이 희박한 것도 고전 본격물에서 중요한 요소가 빠진 느낌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핵심인 알리바이 트릭은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편이지만, 살로메 - 유키타케 살인 사건 이후에는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 있지는 못합니다. 사건의 전개도 우연과 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요. 예를 들면, 알리바이부터가 경찰 수사의 부실함이 원인이었고, 하나 씨의 증언을 경찰들이 초반에 무시한 것, 하나 씨의 증언을 남편이 듣지 못한 것, 니조가 조사를 핑계로 입을 다물면서 사건이 이어지게 된 것 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상주하는 리라장에서 연쇄 살인이 계속 벌어진다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의 경우, 범인이 아비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애초에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경찰에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가능 범죄를 또 저지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기본이 되는 트릭 자체는 상당한 수준이며, 초반부 살로메-유키타케 사건까지는 몰입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가 너무 확장되면서 사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졌고, 무리한 전개가 많아진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런 점에서 명성과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 못했네요. 물론,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니조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마무리했더라면 더욱 괜찮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책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판형도 마음에 들고 표지 디자인도 세련되었으며,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 중간중간 포함된 약도, 뒷부분의 해설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옛날 추리 문고 스타일이 떠오르는데,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2017/07/07

그가 사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 류위즈.바이잉위 / 강은혜 : 별점 2.5점

그가 사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 6점
류위즈.바이잉위 지음, 강은혜 옮김/시그마북스

두 대만 의사의 의학 관련 컬럼 모음집입니다. 1, 2부로 구분되는데 1부 "죽음의 현장"은 역사 속 유명한 죽음에 대해 현대 의학 지식을 가지고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링컨, 가필드, 루즈벨트 등 미국 대통령들의 사인에 대해 분석하고, 이를 현대 의학으로는 어떻게 치료하였을지에 대해 설명하는 식으로요.
2부는 "죽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라는 주제로 역사 속 '과장(?)'이나 여러가지 상식에 대해서 현대 의학을 기반으로 설명합니다.

1부가 전체 분량의 2/3를 넘는 핵심 내용이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2부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1부는 해당 사건, 인물에 대해 깊이 알고 있지 않으면 큰 흥미를 느끼기 어려운 탓입니다. 죽음도 당연한 것이라 내용이 와 닿지도 않았고요. 예를 들어 조지 워싱턴의 병명은 급성 후두개염으로 사혈요법(피를 뽑는 것)으로 치료하려 해 죽었으며, 현대 의학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망한 당시 나이가 이미 60대 후반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평균 연령을 본다면 어차피 오래 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그를 살릴 수 있었다면, 다른 병들도 적절히 치료되어 평균 수명이 올라갔겠지요.
하지만 2부는 '잘린 머리가 말을 할 수 있나?'와 같은 주제를 의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어서 보다 흥미로왔어요.

물론 1부도 아주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의료사고라고 해도 무방할 마이클 잭슨 죽음의 진상, 아라비아 로렌스 사고 이야기 등은 재미있었어요. 저자들이 이런저런 컬럼을 많이 쓴 글쟁이(?)라 글도 쑥쑥 잘 읽히고요. 실제 역사 속 인물에 얽힌 이야기와 우리의 현실을 이어주면서 흥미를 잡아 끄는 솜씨가 특히 좋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로렌스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머리에 심각한 외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설명하면서, 영화에서 종종 사람의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행위라는 것을 짚어주거든요. 기절할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받으면 뇌내출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서 점점 악화될 것이고,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영화 "천장지구"에서도 유덕화의 사인은 칼에 찔린 것이지만, 머리를 심하게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여기에 로렌스를 치료하던 젊은 의사 휴 케언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오토바이 탑승자가 헬멧을 착용할 것을 제안했다는게 더해지는 구성입니다.
그나저나 헬멧이 로렌스와 관련이 있다니 의외네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그래도 더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짧아도 2부가 더 제 취향입니다. 잘린 머리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머리가 잘린 순간 몸이 벌떡 뛰어 오른다던가 죽어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남성은 사망 후에도 발기하고 사정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 불가능 하다는 것, 사후 경직이 지나면 경직이 풀리기에 강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등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훼손하는 것이 시신을 은폐하는 가장 하책이라고 지적하는 것도 색달랐어요. 분해 속도만 따지면 실외에 노출된 시신이 가장 빠르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숨기면 곤충 등의 접근이 막혀 분해 속도가 느려지니까요. 강에 버리면 떠오를 수 있고, 바닷물은 염분 때문에 분해는 더 느려지고요. 땅에 묻으면 분해 속도는 물 속에 던지는 것보다도 더 느려진다고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분량에 비하면 건질게 많다고 보기는 어렵고, 읽기 전 기대에 미치지도 못했지만 한번 쯤 읽을 만 합니다.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경직 시간은 이런저런 곳에 쓰임직하기에 몇 자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쥐를 이용하여 실험한 결과 섭씨 6도일 때 시체는 48~60 시간 후 비로서 완전히 딱딱해졌고 168시간 후 사후경직이 완전히 사라졌다. 섭씨 24도일 때 시체는 5시간 후 완전히 딱딱해졌고 16시간이 지나자 사후경직이 사라졌다. 섭씨 37도일 때는 3시간 후 완전히 딱딱해졌고 6시간이 지나자 사후경직이 사라졌다. 인체의 근육은 쥐보다 훨씬 많아서 사후경직이 지속되는 시간도 비교적 길다. 법의학자는 섭씨 5도에서 냉장한 시체 146구를 관찰하여 시체의 사후경직이 10일간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16일까지 지속되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는 사후경직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 28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중독으로 사망한 경우 사후경직 시간도 달라진다. 스트리키닌 중독일 경우 사후경직의 출현과 해제는 가속화되고, 일산화탄소 중독일 경우에는 사후경직이 풀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사후경직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운동이다. 사후경직은 근육세포의 다네소니 삼인산 함량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망하기 전 격렬한 운동 또는 반항이나 몸싸움을 한 경우 아데노신 삼인산이 모두 소모되어 사후경직이 비교적 빠르게 일어난다. (264~265p)